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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드로 윌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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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년 미국 정부가 운영하는 국립 교육재단 스미소니언의 잡지, 스미소니언 매거진이 “미국사 가장 중요한 100인의 인물”을 선정했다. 미국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들을 뽑았기 때문에 미국인이 아닌 사람들도 많고 부정적인 인물들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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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제28대 대통령
이름<colcolor=#000000>Woodrow Wilson
우드로 윌슨
본명Thomas Woodrow Wilson
토마스 우드로 윌슨
출생1856년 12월 28일, 미국 버지니아 주 스턴톤
사망1924년 2월 3일, 미국 워싱턴 D.C.
국적미국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220px-US_flag_48_stars.svg.png
학력데이비슨 대학교 (중퇴) (1873-1874년)
프린스턴 대학교 (B.A.) (-1879년)[1]
버지니아 대학교 법학대학원 (중퇴) (1879년)
존스 홉킨스 대학교 정치학, 역사학 (Ph.D.) (1883-1886년)
정당[[민주당(미국)|
민주당
]]
직업정치인, 교수
임기1913년 3월 4일1921년 3월 4일
배우자엘렌 액슨 윌슨 (1885년 결혼, 1914년 사별)
이디스 볼링 윌슨 (1915년 결혼)
신체181cm
종교개신교(장로회)
서명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Woodrow_wilson_signature.png
파일:external/87ef33f0f20cb02177e13a1195a99d672402947569f3e4a99b21c578ddb2d8ff.jpg
공식 초상화

파일:external/www.old-picture.com/Woodrow-Wilson-008.jpg
1916년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개막전 시구. 뭔가 어설프다. 하딩 대통령은 더 어색하다.

1. 개요2. 활동
2.1. 정치학자, 대통령이 되다2.2. 대통령으로서2.3. 아내의 직무 대행과 사망
3. 평가4. 트리비아5. 어록

1. 개요

미국 제28대 대통령. 제1차 세계 대전을 치룬 시기의 대통령으로, 민족자결주의를 내세운 것으로도 나름 유명하다. 19세기 엽관제를 비판하며 나온 현대 미국 행정학의 창시자로도 평가받는다.

2. 활동

2.1. 정치학자, 대통령이 되다

버지니아 주 스탠튼에서 조지프 윌슨과 자넷 우드로 사이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조지프 윌슨은 스코틀랜드계 장로회 목사였다. 아버지는 그가 자신의 뒤를 이어 목사가 되기를 바랬으나[2] 윌슨은 영국 수상 글래드스턴에게서 정치를 배운 뒤 정치의 길을 가기로 결심했다. 지그문트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에 의하면 그는 스스로를 "신의 아들"신성모독류 甲이라고 여기고 있었다고 하며, 정치의 길로 가는 것을 자신에게 주어진 신의 명령으로 받아들였다고 한다.

데이비슨 대학에 입학했다가 1년 후 프린스턴 대학으로 재입학해서 1879년 졸업했다. 이후 버지니아 대학으로 가서 1년간 법학을 공부했다. 그리고 1886년에 존스 홉킨스 대학에서 정치학 연구로 정치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미국 역대 대통령 중 명예 박사학위가 아닌 자기가 공부해서 박사 학위를 딴 사람은 윌슨이 유일하다고 한다. 흠좀무

사실 이시기 윌슨은 앤드루 잭슨 이후 19세기 말까지 미국 정치와 관료 사회를 좌지우지하던 엽관주의의 폐해를 극복하기 위해, 행정을 정치 권력적 현상이 아닌 경영, 관리 기술로 보아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는 정치행정이원론을 주장했다. 그는 1887년 《행정의 연구》라는 저서를 통해 이러한 이론을 발표했는데, 이는 미국 내에서 행정학을 정치학으로부터 독립된 개념의 학문으로 본 사실상 최초의 이론이었기 때문에 우드로 윌슨은 지금도 미국 행정학의 아버지라고 불린다.

이후 정치학자의 길을 걸으면서 여러 대학에서 정치학 교수로 재직하다가 1902년 46세의 나이로 모교 프린스턴 대학의 총장으로 취임했다.[3] 그리고 1910년부터 1911년까지 미국 정치학회의 회장을 역임했다.

정치학자로서 정치 현안에 자주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던 윌슨을 미국 민주당이 영입해 1910년 뉴저지주지사로 지명받아 주지사로 재직했다. 윌슨의 정치적 입장은 대체로 진보적 자유주의의 성격을 띄고 있었다.

1912년 미국 대통령 선거가 다가오자 민주당은 윌슨을 대통령 후보로 선출하고 마셜을 부통령으로 지명했다. 그런데 민주당을 상대해야 할 공화당윌리엄 태프트시어도어 루스벨트[4]가 대립하는 바람에 적전 분열이 일어났고, 윌슨은 공화당의 분열을 틈타 득표율 41.8%, 선거인단 435표를 득표해 대통령에 당선된다. 참고로 윌리엄 하워드 태프트는 유타 주버몬트주에서만 이겨서 8표라는 결과를 얻었고, 시어도어 루스벨트는 88표를 득표했다.

2.2. 대통령으로서

대통령 취임 후, 윌슨은 국내에서는 진보적 자유주의 개혁을 추진했다. 1기 임기 동안 그는 끊임없이 하원의원을 개별적으로 접촉하여 자신의 정책을 지지해달라고 호소했다. 이런 노력이 효과를 봐서 네 개의 주요한 법안이 통과했다.

첫째는 "언더우드 관세법안 Underwood Tariff"으로, 보호무역 정책으로 높았던 미국의 관세를 낮추고 대신 수정 헌법 16조에 근거하여 연방소득세를 부과할 수 있도록 했다. 두번째 법안은 1913년 12월 23일에 서명된 "연방준비법 Federal Reserve Act"으로,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 Federal Reserve Board)의 기초가 되었다. 또한 1914년에는 연방무역위원회(Federal Trade Commission)가 창설되었다. 이 세 법은 모두 연방정부의 힘을 강화하는 바탕이 되었다.

또한 1914년에는 "클레이턴 독점금지법"이 통과되어 파업보이콧 행위를 합법화하고, 노사분규시 정부가 강제금지 명령을 내리지 못하게 하였다. 다만 복구불능의 파괴행위가 예견될 때는 금지명령을 내릴 수 있었다.

하지만 외교정책에 있어서는 이전 공화당 정부의 패권주의적 정책을 대체로 답습해 중남미 국가들에게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여 이들 지역의 반발을 불렀다. 특히 윌슨은 중남미를 통제하겠다는 생각을 버리지 않았고 멕시코 혁명이 일어나자 멕시코를 침공하여 베라크루즈를 무력 점령, 당시 멕시코의 우에르타 정권을 몰락시켜버렸고,[5] 히스파니올라 섬의 두 나라도 보호국화했다.

1916년에는 재선을 위해서 다시 한번 선거에 출마했다. 상대 후보인 찰스 에반스 휴스는 연방대법관을 재임하다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기 위해 사임하고 나온 후보였다. 이 선거에선 1:1 구도다 보니 49.2% : 46.1%로 제법 아슬아슬하게 이겼는데, 선거인단은 277:254였다.

1914년 제1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자 미국은 먼로 독트린의 전통에 입각해 될 수 있으면 유럽에 개입하지 않고 중립을 유지했다. 그러나 독일 제국의 무차별 상선 공격으로 루시타니아 호 침몰 사건이 발생해 미국내에 반독감정이 격화된 상태에서 결정타로 독일 제국이 멕시코에게 미국과의 전쟁을 일으킬 것을 제안한 치머만 전보가 폭로되자, 결국 윌슨은 1917년 4월 6일, 독일에 선전포고를 하고 전쟁에 참전하게 된다. 아이러니하게도 1916년 재선을 위한 유세에서는 전쟁불참을 내세워서 당선됐는데, 취임 1달 만에 모든게 뒤집힌 것이다.

다만 윌슨은 전쟁을 막기 위해 가능한 모든 일을 다하긴 했다. 그는 연합국과 독일을 중재하려 노력하며 평화협상을 여러번 제안했다. 그는 1917년 1월, 그 유명한 '승리없는 평화'를 연설하며 모든 인류가 평화를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견해를 밝혔다. 하지만 이미 전쟁 중인 유럽은 눈깔 뒤집힌지 오래였고, 멕시코에 대한 독일의 개입이 여러번 드러나면서 참전 여론이 강해지는 와중에도 윌슨은 카이저의 황화론 개드립까지 꺼내가며(...) 참전에 반대했다. 그러나 치머만 전보가 공개되자 그런 노력은 헛수고로 돌아갔고 미국도 전쟁에 참전하게 된다.

전시 와중엔, 진보적 성향의 윌슨이었지만 국가가 일치된 모습을 보여야 한다는 확신으로, 광신적 애국주의자들이 모인 극우 단체들을 이용해 반전운동가나 노동운동가들을 탄압하는 어두운 면을 보이기도 했다.

어쨌든 1918년 1차 세계 대전은 연합군의 승리로 끝난다. 그리고 윌슨은 독일에 대해 관대한 처벌을 주장했는데, 이유로 '독일의 경제 악화로 인한 사회혼란, 이로 인한 전쟁 재발 우려'를 들었다. 그는 경제적인 압박이 사회혼란과 전쟁 재개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을 정확히 예견한 것이다. 오늘날에는 이런 우드로 윌슨의 견해가 정치학자들에게 높이 평가받고 있지만, 안타깝게도 당대에는 과대망상 취급받으며 씹혔다. 다만 아무리 주변의 상황이 안좋았다지만 독일의 처벌을 줄이는 점에 대해 적극적으로 행동하지 못했고 결국 사태를 초래했다는 점에선 오십보백보란 의견도 있긴 하다. 우드로 월슨의 소극적인 태도하에서, 1차 대전의 주축이었던 영국과 프랑스에 의해 독일에 청구된 어마무시한 배상금은 결국 2차 대전의 빌미를 제공했다. 사실 영프 입장에선 전쟁 손실이 얼만데 뜯어먹고 싶기도 했을 것이다.

이는 당시 윌슨이 레임덕에 시달리고 있기도 해서 외교적 입지가 탄탄하지 못한 점도 있었다. 실제로 당시 우드로 윌슨은 자신의 바램이 담긴 베르사유 조약국제연맹 창설 딱 하나만 살릴 수 있었다. 한편, 합스부르크 가문이 통치하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카톨릭 독재'라 혐오하는 등 개인적인 카톨릭, 반오스트리아 감정 때문에 동맹국들과의 협상 조건으로 황제의 퇴위와 민주 정부 수립을 내걸었고, 결국 독일 제국과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의 군주정은 붕괴되는 결과를 야기했다. 이는 장기적으론 필요했을지 몰라도 단기적으론 혼란을 초래했고 그 결과가 발칸반도의 피바다와 나치의 집권이었던 것을 보면, 사회혼란과 전쟁 재발 방지를 근거로 관대한 처벌을 주장했던 그였기에 묘하긴 하다.

제1차 세계 대전이 끝난 후, 전후 처리를 위해 모인 1919년 6월의 파리 강화 회의에서 윌슨은 소위 "14개조 평화원칙"을 발표한다. 그중 "민족 자결의 원칙(혹은 민족자결주의)"은 당시 전세계 식민지 민중들에게 희망의 메시지처럼 들리기도 했다. 허나 그것은 패전한 동맹국 측 식민지에나 해당되는 이야기였고, 승전국인 연합국의 식민지들은 자신들의 알짜배기 식민지를 내놓을리가 없었으므로 또 전쟁해서 이기지 않는 이상 그 주인의 지배에서 대부분은 벗어나지 못했다. 연합군 측 식민지의 독립운동가들은 윌슨에게 거하게 낚인 셈.(...) 그리고 국제연합기구를 만들자는 주장에 의해 국제연맹이 창설되었지만, 정작 미국은 당시 고립주의를 고수한 야당 등 상당수 의원의 반대로 상원 2/3 찬성을 얻지 못해 국제연맹에 가입하지도 못하는 황당한 사태를 겪게 된다.

국제연맹 가입을 의회가 지지해주지 않자 윌슨은 여론의 지지를 호소하기 위해 대륙횡단열차를 타고 8천 마일에 달하는 거리를 누비며 수십회의 유세를 하는데, 충격적이게도 1919년 9월 25일 콜로라도 주 푸에블로에 방문하던 중 뇌경색을 일으켜 10월 3일 반신불수가 돼버리고 만다. 멀쩡하게 연설하다가 갑자기 말하는 것이 멈췄다고 하는데, 사실상 대중들 앞에서 연설하다 뇌경색이 일어난 수준일듯. 참고로 1919년 윌슨은 국제 연맹 창설과 유럽 평화에 기여한 공으로 노벨평화상을 수상한다.

2.3. 아내의 직무 대행과 사망

대통령이 반신불수가 되어 집무를 수행할 수 없게 된 상황에서, 상식적으로 생각한다면 부통령이 대통령직을 승계하는 것이 옳겠지만, 윌슨의 부인인 이디스 윌슨은 이를 숨기고 윌슨의 남은 임기 동안 국정을 자신이 처리했다.

사족으로 이디스 윌슨은 우드로 윌슨의 2번째 부인으로, 1번째 부인이 사망한 이후 우드로 윌슨이 임기 도중 청혼해 결혼에 성공한 케이스다. 이디스 윌슨도 이미 한번 결혼했으나 과부가 된 케이스로, 윌슨 대통령은 이디스를 만난 지 채 2달도 안되어 청혼을 했다고 한다. 그리고 윌슨의 청혼에 망설이던 이디스에게 윌슨은 각종 국정 사안들을 알려주며 기밀누설로 철컹철컹 정치에 관심없던 그녀를 자신의 정치적 동반자로 만들려 했다는데, 결국 둘은 만난 지 9개월 만인 1915년 12월 18일 조용히 결혼식을 올린다.

본론으로 돌아와서, 이렇게 평소에도 국정 사안을 논의하던 사이다보니 윌슨이 반신불수가 된 이후에도 이디스 자신이 국정에 참여해도 되겠다는 어찌보면 간 큰 계획을 실행한 것일지도 모른다. 윌슨의 행정부 2기 후반부, 윌슨의 소망은 반은 이루어지고 반은 이뤄지지 않았다. 1919년 금주법, 즉 '볼스테드 법(Volstead Act)'이 윌슨의 거부에도 불구하고 통과되었다. 1920년 8월에는 수정헌법 19조 통과로 일부 주에서나 시행하고 있던 여성의 투표권이 전국으로 확대되었다.[6]

윌슨은 반신불수가 되어서도 3년 넘게 살다가, 퇴임하고 머물던 워싱턴 D.C의 자택에서 1924년 2월 3일 수면 중 사망했다. 이디스의 국정 처리도 윌슨 사후에야 밝혀졌는데, 덕분에 그때까진 막연하게만 있던 대통령 유고시 대통령직 승계 원칙에 대한 규정을 확실하게 한 미국 수정헌법 제25조가 이후 만들어지는 계기도 된다.

3. 평가

우드로 윌슨은 19세기 후반~20세기 초 미국을 관통하던 혁신주의와 제국주의라는 큰 흐름 속에서 그의 행적을 평가할 수 있는 인물이다. 우선 그는 학자 시절 정치행정이원론을 주창하며 당시 횡행하던 엽관제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행정에 실적주의를 도입하여 현대 미국 행정학의 시초를 열었다고 평가받는다. 실제 행정학상 최초의 논문인 '행정의 연구(The Study of Administration, 1887)'를 발표하여 지금도 행정학 교과서 및 수험서에 이름을 올리고 있기도 하다. 또 진보적인 리버럴 성향을 띄고 있던 윌슨은 국내 정치에선 여러 진보적인 개혁들을 추진했고, 웬만하면 유럽에 직접 개입하지 않던 기존 미국의 입장을 선회해 1차 대전에 참전하여 파리 평화 회의에 참석한 것이나 노벨평화상을 수상하는 등 미국의 국제적 위상을 드높이는데도 기여했다.

한편, 윌슨은 국제 외교에서 '힘의 균형' 원리에 대립되는 '도덕주의'와 '이상주의'를 내세웠으며, 이런 이념을 바탕으로 독일에 대해 연합국의 도덕적 명분이상을 내세웠다. 하지만 그 역시 제국주의라는 당대의 트렌드 앞에서 말로만 이상을 떠들었지 현실은 시어도어 루스벨트 등 이전 공화당 정부때부터 이어져온 20세기 초 미국의 전형적인 외교정책이라 할 수 있는 군사력을 동원한 패권주의로 일관한 위선자였다는 주장도 있다. 사실 윌슨의 이런 이중적인 행보는 노동 문제에서도 나타났는데, 클레이턴 독점금지법을 통과시키며 파업보이콧 행위를 합법화시켜줬지만, 세계 대전 당시엔 또 노동운동을 탄압하기도 했다.

윌슨이 주장한 14개조 평화 원칙과 그에 포함된 민족자결주의 역시 어디까지나 1차세계대전 패전국 지배 아래에 놓인 폴란드, 알바니아, 세르비아 등 동유럽과 발칸반도에 있는 유럽 국가에 한해 적용되었지 1차세계대전 승전국인 미국, 영국, 프랑스, 일본 식민지는 알 바 아니었다. 다만 윌슨은 미국의 글래드스턴으로 불릴 정도로 전쟁에 꾸준히 반대한 것은 맞고그럼 시어도어 루스벨트는 미국의 디즈레일리?, 전후에도 자신의 입지랑 무관하게 이상주의자란 욕을 먹으면서도 14개조 평화 원칙과 국제연맹을 설립할 것을 주장하는 등 마냥 제국주의자로만 몰기엔 다른 모습을 제법 보인 것도 사실이다. 여러모로 다양한 면모를 보인 인물. 특히 그가 주창한 공개조약, 자유무역, 민주주의, 반내셔널리즘 같은 것은 당시 대중들에게 호응을 얻기도 했다.

실제 윌슨은 베르사유 조약 당시 회의장에서 패전국 관련해 가장 관대한 조건을 제시한 연합국 리더였다. 하지만 영국의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와 특히 '호랑이'라는 별명까지 생길 정도로 강경했던 프랑스의 조르주 클레망소[7] 관대한 조치에 격렬하게 반대했기 때문에[8] 조약은 윌슨의 의향과는 달리 가혹하게 변모했다. 하지만 이런 전후 사정을 잘 몰랐는지, 당시 영국 재무부 대표로 협상에 참여했던 경제학자 케인스는 윌슨을 "세계 최고의 협잡꾼"이라고 까기도 했다. 케인스는 독일에게 부과된 가혹한 배상금과 징벌이 또다른 비극과 전쟁을 불러 일으킬 것이라고 조약의 위험성을 윌슨에게 경고했다. 다만 상기했듯 케인스의 비판은 윌슨보다도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와 특히 조르주 클레망소에게 먼저 돌아가는 것이 옳다.

현실주의 국제정치학자들에게도 그렇게 좋은 평을 받지는 못한다.[9] 왜냐하면 기존의 유럽을 지배하던 세력균형이라는 국제질서를 무너뜨리고 국제연맹이란 집단안보체제를 만들었는데, 이게 도의적으로는 좋을지 모르지만 상당히 현실적인 제약점들[10]이 있었다는 것. 게다가 코미디는 자기가 제안해놓고 자국 의회 비준을 못 받아서 정작 본인 나라는 여기서 빠졌다는 것이다.(...) 물론 본인도 의회 욕하면서 열심히 여론 조성하려 뛰어다니긴 했다만 그 와중에 뇌경색이 와 리타이어하고 말았으니.. 하여튼 그 결과, 독일의 폭주를 방치하게 되는 결말을 낳았다고 평가한다. 한마디로 1차세계대전 이후 국제질서를 '허술하게 짰다'는 것. 다만, 그가 제시한 집단안보체제는 국제연맹은 실패했지만, 이후 FDR-트루먼 시대 들어 유엔 안보리와 유엔 군으로 어느정도 실현되긴 했다. 물론 여기도 집단안보체제의 취약성을 지니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긴 하지만(...), 그래도 냉전 등 위기 속에서도 세계대전급 대참사는 벌어지지 않게 통제하고 있으니 분명 평가할 점은 있다.

사족으로 일본 측에서 인종차별철폐 제안을 내놓자 윌슨은 반대하기도 했다며 그의 진보적 자유주의가 백인들만을 위한 것이 아니냐는 서술이 있었는데, 일본의 제안은 그보단 일본 국익을 대변한 의도가 강하므로 적절한 비판은 아니란 견해도 있다. 구체적으로 설명하면 일본은 국제연맹 규악을 결정하는 회의에서 '국제연맹에 참가하는 나라는 각국 내에 거주하는 외국인을 차별해서는 안 된다.'는 규정을 삽입하고자 했다. 그런데 당시 미국에선 본토로의 동양인 이민이 사회적 이슈로 떠올라 중국인과 함께 일본인은 이미 이민 제한을 받고 있었다. 캘리포니아주 같은 경우는 아예 일본인의 토지 소유와 임차를 금지할 지경이었다. 그래서 일본 외무성은 노골적인 이민차별철폐 규정을 내세우는 대신 반대하기 어려워 보이는 인종차별철폐를 국제연맹 조약 규문에 넣으려 한 것이다. 물론 의도를 간파한 규약 작성 위원회 의장 우드로 윌슨은 안건의 중요성을 이유로 다수결이 아닌 만장일치를 주장하였고, 그 결과 찬성 11, 반대 5로 이 제안은 부결되었다. 즉, 일본의 제안은 인종차별을 표면에 내세운 자국이익을 위한 주장이었으므로 이에 대한 반대 또한 백인만을 위한 진보적 자유주의라고 마냥 몰아붙일건 아니라는 주장. 국제연맹 가입을 위한 카드로 활용하려 했다는 의견이 있다는 서술도 마찬가지로 근거를 찾기 어렵다.

다만 우드로 윌슨이 인종차별주의자를 등에 업은 혁신가였던건 맞다. 진보주의와 행정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평가 이면에는 Ku Klux Klan(KKK)단을 이용해 상하원에 정치적 세력을 불린 배경이 있는데, 이는 어찌보면 당연한게 당시만 해도 민주당의 텃밭은 지금의 북부가 아닌 남부였다. 남북전쟁 당시 노예제를 옹호한 그 남부 지역 말이다. 덕분에 19세기만 해도 민주당은 지금의 리버럴함과는 상당히 결이 다른 보수적인 성향의 정당이었으나, 윌리엄 J. 브라이언 당수 체제 이후 20세기 들어 서서히 변화하기 시작해 FDR 시절 뉴딜, 1960년대 린든 존슨의 흑인민권운동 지지, 이 틈새를 노린 공화당의 남부 전략 등이 겹쳐져 지금의 텃밭, 성향 체인지 현상이 나타난 것이다.

하여튼 이러다보니 윌슨이 백인우월주의자였다는 의혹도 심심찮게 나오곤 있는데, KKK단을 미화한 영화 <국가의 탄생>을 보고 박수까진 아니고 칭찬을 했다고 한다. 미국 비영리 공영방송인 PBS의 홈페이지에 나와있는 내용.# 좀 더 자세하게 말하자면, 윌슨 대통령은 자신의 대학 클래스메이트가 쓴 소설을 원작으로 한 이 영화를 보고 난 후 "잘 만든 영화, 불행한 점은 이게 잔인하게도 사실이라는 거다(it is like writing history with lightning. And my only regret is that it is all so terribly true)."라는 말로 칭찬했는데, 이후 논란이 거세지자 은근슬쩍 말을 바꿨다고 한다.(...)

윌슨과 동시대를 산 '발명왕' 토머스 에디슨은 공화당을 지지하다 1916년 재선거 무렵에는 윌슨을 지지했는데 그를 이렇게 평가했다.
"사람들은 윌슨이 크게 헤맸다고 했습니다. 뭐, 제 생각도 그렇고요. 그렇지만 전 그가 헤매도 항상 앞으로 나아가면서 헤멘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4. 트리비아

윌슨이 주장한 민족자결주의 원칙에 영향을 받아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무단 통치에 반발한 3.1운동이 펼쳐지게 되고, 이 영향을 받아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된다. 하지만 당시 일본 제국은 1차세계대전의 승전국이었기 때문에 긁어부스럼 만들기도 뭐하고 해서 다른 식민제국인 열강들이 획득힌 식민지들처럼 합당하다고 간주되었다. 그리고 알다시피 이후 한반도에 대한 일본의 지배는 2차 세계대전 패전까지 계속되었다. 그런데 사실 한국에 영향을 미친 민족자결주의는 윌슨 뿐만 아니라 소련의 레닌이 주창한 것도 상당히 영향을 끼쳤다. 그러나 이 개념 자체가 "주의"와 같은 사상 체계는 아니기 때문에 레닌 역시 먼저 제창했다고 볼 순 없고, 이미 민족주의로서 오래전부터 존재했던 것이었다. 하지만 윌슨의 시대 때 떠돌던 민족자결주의의 근원은 당시 국제 공산주의 연합이었고, 윌슨은 프로파간다를 교묘히 잘 이용하여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다. 당시 여기에 영감을 받은 인물 중 한명은 호치민.[11][12]

여러 기록을 가진 대통령이기도 한데 사상 최초로 유럽을 방문한 미국 대통령이자, 앞에서 봤듯이 미국 역사상 전무후무한 부통령이 대통령직을 대행한 것이 아닌 부인이 대통령직을 대행한 역사를 가지고 있기도 하다. 동시에 의회에 보내는 첫번째 메시지를 직접 의회에 나가 읽음으로써 2대 대통령인 존 애덤스 이래 사라졌던 관습을 다시 부활시킨 인물이기도 했다. 소위 '연두교서'라 일컬어지는 행위로 현대 미국 정치에서도 대단히 중요하게 여겨진다.

훗날 한국에서 대통령을 지내는 이승만에게 한국인 최초의 미국 박사 학위를 준 사람 역시 당시 프린스턴 총장?학장이었던 윌슨이었다. 당시 윌슨은 이승만을 괜찮게 봤는지 가족 파티에도 초대하여 사람들에게 장차 한국을 이끌어나갈 청년이라고 소개하였다고 한다. 참고로 이승만의 졸업 당시 논문 제목은 "전시 중립론 - 미국의 영향을 받은 중립" 이었고, 이때 평점은 C+... 물론 늦은 나이에 영어 배우는 것도 힘들긴 했겠지만 가장 발목을 잡았던건 문돌이들의 최대 적 수학이었다고 한다. 수학은 당시 C 받으면 잘 받았던 거라나 어쨌다나... 실제로 당시 학점 자체가 짜긴 했다고 한다.

나름 유명한 러시모어 산 네 명의 대통령 얼굴에 들어갈 뻔 하기도 했다. 이걸 만들 당시 조지 워싱턴, 토머스 제퍼슨, 에이브러햄 링컨은 쉽게 결정되었고 실제로 처음엔 저 세 명의 얼굴만 새기려고 했지만 빈 바위가 남아 있어서 그 바위에 새겨질 주인공으로 시어도어 루스벨트와 윌슨이 경합을 벌였던 것. 그러나 루스벨트가 20세기 초 본격적으로 미국을 세계무대에 등장시킨 대통령으로 당시엔 좀 더 평가되는 바람에 루스벨트에게 밀렸다. 그래도 이후 미국 10만 달러 지폐 초상화 모델로 선정되긴 했다. 지금은 10만 달러 자체가 통용되지 않는게 함정이지만.

친구가 별로 없었다고 한다. 애초에 부인에게 대통령직 대행을 맡긴 이유도 부인만큼 가까운 사람이 없어서였다고... 주륵

프린스턴 대학 교수까지 지낸 엘리트 학자이고 외모로만 보면 상당히 냉철하고 쌀쌀맞은 인물로 보이지만 의외로 깨는 면이 많고 익살스러운 인물이었다. 가족들과 가장 즐겼던 놀이가 '셔레이드(Charade)'라고 해서 바디랭퀴즈 몸짓으로 단어를 알아맞추는 놀이였는데, 그는 가족들과 이 놀이를 할 때면 '도도한 귀족 미망인'이나 '외알 안경을 만지작거리는 영국인'을 너무 리얼하게 흉내내서 가족들을 경악시켰다고 한다. 가장 잘 흉내냈던 것이 술 취한 사람의 휘청거리는 모습[13]의 흉내를 잘 내서 지인들을 많이 웃겼다고. 근데 왜 친구가 없었을까... 걍 만들기 귀찮았나보지

노래나 춤에 대한 개인적 취향도 우울하거나 엄숙한 노래보다는 매우 경쾌하고 통통 튀는 종류의 밝은 음악을 선호했다고 한다. 비사교적인 성격이었다고는 하지만 아예 위트가 없는 사람은 아니었던 모양으로 사석에서 윌슨을 만나본 사람들은 생각보다 인간미가 있는 인물이라고 평가했다.

윌슨이 죽었을 때 당시 미국 국민들 사이에서 떠돌던 이야기가 하나 있다. 그가 죽어서 천국에 갔을 때 모세를 만났다. 모세가 윌슨을 보고 "자네가 바로 미국 대통령인 우드로 윌슨인가? 안됐구만. 자네가 제안한 14개조 평화원칙이 잘 지켜지지 않는다고 들었네."라고 말했는데 윌슨은 "뭐 그렇죠. 하지만 모세께서 직접 지상에 강림하셔서 "인간들이 십계명을 어떻게 지키고 있는지를 보시는 게 좋을 것 같군요."라고 받아쳤다고. 이 이야기는 당연히 떠돌던 이야기지만 인간들이 십계명의 정신을 훼손한 것을 보면 자신의 평화원칙에 대한 폄훼는 견딜만 한 것으로 여긴 윌슨의 면모를 잘 나타내는 이야기다. 실제로 윌슨은 자신의 평화원칙을 십계명에 견주기도 했다. 신성모독류 甲[14]

땅콩농장을 소유하고 있어서 윌슨이 대통령에 당선되자 당시 조선에서 그의 땅콩을 수입하기도 했다고 한다.[15] 근데 이때면 이미 한일병합..

심슨 가족바트 심슨이 자신의 담임선생님인 에드나를 골탕먹이기 위해서 우드로라는 가명으로 편지를 주고 받는 에피소드도 있는데 그 우드로라는 이름의 주인공이 바로 윌슨이다.

남부연합이 존속되는 대체역사물에선 거의 반드시 남부연합 대통령이 된다.(...) 해리 터틀도브의 타임라인-191 시리즈가 대표적이지만 시초는 아니고 따지고 들어가면 2차대전 전으로까지 거슬러올라가는 오랜 떡밥이다. 2차대전 전까지만 해도 이사람을 제외하곤 남부 출신의 대통령이 드물었기 때문. 사실 드문 수준을 넘어 남북전쟁 이후 링컨부터 트루먼까지의 대통령 중에선 남부 출신은 윌슨과 앤드류 존슨 딱 2명 뿐이다. 심지어 존슨은 남북전쟁 중에 링컨의 부통령으로 선임되었다 링컨 사후 이를 승계한 사람이니 1860~1950년 사이 선거로 뽑힌 남부 출신 대통령은 윌슨이 사실상 유일하다고 봐도 된다.

유로파 유니버셜리스 갤러리에선 미워하는 사람이다. 이 사람이 주장한 민족자결주의덕에 윾갤러들이 두 번째로 좋아하는[16] 빅토리아 시대의 유럽 판도가 붕괴되었기 때문이다.

5. 어록

"보수주의자는 그냥 앉아서 생각만 하는, 주로 앉아만 있는 사람을 뜻합니다. 그리고 보수주의란 아무것도 변화시키지 않고 의심이 나면 할머니와 상의하는 것입니다."[17]
"트러스트들이 돈만 있다면, 정부를 사려고 할 것이다."#
"곧 평화란 승리가 없는 평화가 아니면 안 된다. 승리란 패자에게 군림하는 강압적인 평화를 뜻한다. 그것은 수치를 당하고 희생을 감수하고서만 받아들여질 것이리라. 또한 후에 분노고통의 상념을 남기게 되리라. 그것은 영구한 것이 아니요, 모래밭에 놓여진 것에 불과하다. 평등한 자, 동지의 평화만이 오래 지속된다. 평화의 대원칙은 평등하며 공통적인 복지에 공동으로 참가하는 것이다."[18]
"평화를 사랑하는 이 위대한 국민을, 문명 자체의 운명이 걸려 있다고도 할 역사상 가장 참혹하고 파괴적인 전쟁으로 몰고 가기란 참으로 두려운 일입니다. 하지만 정의는 평화보다 값진 것이기에, 우리는 우리 마음 속 깊은 곳에 소중히 간직해온 것들을 위하여 싸우려고 합니다. 민주주의를 위해, 정부에 대한 발언권을 위해, 약소국들의 권리자유를 위해, 세계에 평화와 안전을 가져다주고 적어도 자유롭게는 해줄 그런 보편적인 권리를 위하여 싸울 것입니다. 우리는 아메리카를 태어나게 했고, 행복하게 했고, 그토록 찬미했던 평화를 가져다 주었던 원칙을 지키기 위해 피와 힘을 바치는 영광이 주어졌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모든 것을 바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도우시나니, 우리에게 다른 길은 없습니다."[19]

[1] 프린스턴 대학교는 편입을 허용하지 않기에 입학하여 1학년으로 들어갔다.[2] 여담으로 그의 아버지는 연설에 일가견이 있었는데, 덕분에 윌슨도 아버지의 영향으로 연설에 뛰어난 능력을 보였다. 그가 아버지에게 배운 연설의 비결은 내용보다는 사람에게 감동을 주는 화법 위주였다고 한다.[3] 당시 재학생이던 이승만에게 직접 박사 학위를 수여하기도 했다.[4] 당질인 프랭클린 D. 루스벨트는 우드로 윌슨을 지지했다.[5] 이때 미국의 강력함이 드러났는데 베라크루즈 전투와 멕시코 침공에서 멕시코는 총력전으로 저항하고 당시 중남미의 강국이었던 칠레, 아르헨티나, 브라질도 멕시코의 구원 요청에 지원군을 파견해 같이 맞섰지만 미국은 이를 모두 격파해버리며 멕시코의 저항을 무력화시켰다. 이 전투의 승리로 중남미 전체가 덤벼도 미국엔 이길 수 없음이 드러났고, 미국이 북미를 넘어 아메리카 전체의 맹주임을 보여주었다. 특히 외교에서도 멕시코가 불리했던 것이 멕시코는 유럽 국가들에게도 도움을 요청했지만 유럽은 미국과의 전쟁을 바라지 않아 거절했다. 이후 중남미의 모든 국가들이 미국에게 도전하지 않았다.[6] 참고로 미국의 참정권은 백인 남성 한정으론 1828년 재산에 상관없이 모든 주에서 보통선거가 확립되었고, 흑인 남성은 19세기 중후반 참정권이 부여되나 알게 모르게 현실적인 제약은 있었다. 근데 아이러니하게도 정작 이디스는 여성 참정권을 반대했다고.[7] 그는 독일을 무척 싫어해서, 유언"나의 시체를 독일을 향해 선 채로 매장하라"라고 했을 정도였다.[8] 클레망소는 윌슨을 보고 "당신은 강철 심장(heart of steel)을 가진 사람이오!"라고 비꼬았는데, 이는 프랑스가 독일에 대해 입은 피해가 막대한데 윌슨이 독일에 대한 관대한 처분을 주장하니까 반대로 '동맹국한테 너무 냉정한 것 아니냐'는 뜻으로 비꼰 것이었다. 다만 이에 윌슨은 "그래도 전 도둑놈 심보(heart of steal)는 없습니다"라고 받아쳤다고 한다. steel과 steal의 발음이 비슷한 것을 이용한 일종의 말장난. 이와중에도 유머는 잃지 않았다.[9] 에드워드 카도 '20년의 위기'에서 우드로 윌슨을 가루가 되도록 깠다.[10] 무엇을 안보로 위협하는 세력으로 볼 것인가? 그리고 그에 대한 어느 정도의 제재가 마땅한가? 집단안보를 지키기 위해 각국은 그렇게 희생할 각오가 되어 있는가? 사실, 이 모두가 합의되기 어려운 사안이다. 그나마 역사상 가장 성공적인 합의 중 하나라고 평가받는 한국전쟁 참전 역시 소련이 회의에 참석하지 않아 가능했다. 한마디로 비상사태 발생시 모두가 동의하는 대응책이 명확히 정해지지 않았다는 것.[11] 자세한 내용은 윌슨의 순간 (The Wilsonian Moment)-에레즈 마넬라 (Erez Manela), Oxford University Press 2009 1-2장 참고.[12] 물론 소련은 카라한 선언을 통해서 제정 러시아 시기에 청나라군벌들과 맺었던 불평등한 비밀협정을 완전히 무효화했고, 강제로 확보했던 영역도 무상반환했다. 이 때 러시아가 건설한 철도도 무상반환하기로 했는가에 대해서 논란이 발생하면서 중소분쟁의 원인이 되긴 하는데, 이 시기의 이런 선언은 그 자체만으로도 엄청난 반향을 일으킬 수 밖에 없었다. 단적으로 1차대전에 승전국으로 참가한 중국과 일본 가운데서 일본의 입장만 반영된 결론이 베르사유 조약에서 도출되면서 중국이 대대적으로 반발하고 있던 상황이었다. 결국 이런 소련의 지원은 중국 국민당중국 공산당에 모두 영향을 끼쳤다. 이 때의 대결구도는 공산주의 대 자본주의가 아니라 공산주의 대 제국주의 구도였기 때문이다. 독립된 나라 대부분은 소련에 편입되거나(소련 자체가 그 목적으로 세워진 연합국가이므로) 몽골과 같은 위성국이 되었다.[13] 영어로는 고무 다리(rubber-legged)라고 쓴다.[14] 프랑스 강경파 클레망소의 버전도 있다. "모세는 우리에게 십계명을 주었지만 우리는 그것을 어겼다. 이제 윌슨이 우리에게 14개조를 주지만 그것이 지켜질지는 두고봐야 할 것이다." 본문에도 나와있지만 1차 대전 중 독일에게 가장 혹독한 피해를 입은 프랑스를 대변하던 인물인 클레망소의 입에서 나올만한 말이다.[15] 사족으로 지미 카터 대통령도 땅콩농장 농장주였다.[16] 첫 번째는 로마 제국 트라야누스 황제 시기 판도[17] 1912년 대선 연설 중 공화당을 비꼬며 한 말. 다만 당시 공화당의 성향은 이때 민주당과 마찬가지로 좀 짬뽕이긴 했다. 현직이던 테프트가 공화당내 보수파였다면, 전임 시어도어는 혁신파였기에 둘이 갈라섰고 덕분에 윌슨은 어부지리를 취한다.[18] 1917년 1월 21일, 미국의 상원에서 한 '승리없는 평화' 연설 중 일부. 다만 그는 당시 유럽에 평화를 호소했지만, 이미 너무 많은 것을 쏟아부은 연합국과 독일은 싸우느라 바빴다. 그리고 무제한 잠수함 작전, 치머만 전보, 러시아 혁명 3단 어그로 콤보로 미국이 참전할 수 밖에 없는 분위기가 되자, 그는 3달 뒤 역시 명연설로 기억되는 후술된 제1차 세계 대전 참전 연설을 해야 했다.[19] 제1차 세계 대전 참전연설 중 일부. 여기서 윌슨은 미국을 여성으로 표현했다. 윌슨은 연설 이후 우레같은 갈채를 받았는데, 윌슨은 이에 대해 보좌관에게 이렇게 말했다. "오늘 내가 말한 것은 젊은이들에 대한 죽음의 메시지인데, 그걸 환호하다니 참으로 묘한 기분이 드는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