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정 20세기 가장 영향력 있는 미국인 | |||||
{{{#!wiki style="margin:0 -10px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6px -1px -11px" | ※ 1990년 미국의 시사잡지인 라이프에서 20세기 가장 영향력 있는 미국인 100인을 선정했다. 순위는 없으며, 만장일치로 선정된 인물은 헨리 포드와 라이트 형제뿐이다. | ||||
제인 애덤스 <사회 개혁가> | 무하마드 알리 <권투선수, 인권 운동가> | 엘리자베스 아덴 <사업가> | 룬 알레지 <방송 경영자> | ||
루이 암스트롱 <재즈 뮤지션> | 조지 발란신 <안무가> | 존 바딘 <물리학자> | 어빙 벌린 <작곡가> | ||
에드워드 버네이스 <홍보 책임자> | 레너드 번스타인 <작곡가, 지휘자> | 말론 브란도 <배우> | 베르너 폰 브라운 <로켓 공학자> | ||
데일 카네기 <작가> | 월리스 캐러더스 <발명가, 화학자> | 윌리스 하빌랜드 캐리어 <에어컨 발명가> | 레이첼 카슨 <작가, 해양생물학자> | ||
빙 크로스비 <가수, 배우> | 클래런스 대로 <변호사> | 유진 데브스 <노동운동가, 사회주의자> | 로버트 더그래프 <포켓북 창업자> | ||
존 듀이 <철학자> | 월트 디즈니 <기업가, 애니메이션 제작자> | W. E. B. 듀보이스 <NAACP 설립자> | 앨런 덜레스 <CIA 국장> | ||
밥 딜런 <포크 뮤지션> |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물리학자> | 토머스 스턴스 엘리엇 <시인> | 윌리엄 포크너 <소설가> | ||
에이브러햄 플렉스너 <교육자> | 헨리 포드 <기업가> | 존 포드 <영화감독> | 베티 프리댄 <페미니스트 여성 작가> | ||
밀턴 프리드먼 <경제학자> | 조지 갤럽 <여론 분석가> | 아마데오 지아니니 <은행가> | 빌리 그레이엄 <목사> | ||
마사 그레이엄 <댄서, 안무가> | 데이비드 와크 그리피스 <영화감독> | 조이스 홀 <사업가> | 어니스트 헤밍웨이 <소설가> | ||
올리버 홈스 주니어 <법학자> | 존 에드거 후버 <FBI 초대 국장> | 로버트 허친스 <교육자> | 헬렌 켈러 <인권 운동가> | ||
잭 케루악 <시인, 작가> | 빌리 진 킹 <인권 운동가, 테니스 선수> | 마틴 루터 킹 <목사, 인권 운동가> | 알프레드 킨제이 <성과학자, 생물학자> | ||
빌렘 콜프 <생명과학자> | 레이 크록 <맥도날드 창업자> | 에드윈 랜드 <과학자, 발명가> | 윌리엄 레빗 <부동산 개발업자> | ||
존 L. 루이스 <노동당 지도자> | 찰스 린드버그 <비행기 조종사> | 레이먼드 로이 <산업 디자이너> | 헨리 루스 <편집자> | ||
더글러스 맥아더 <군인, 정치인> | 조지 C. 마셜 <군인, 정치인> | 루이스 B. 메이어 <영화 제작자> | 클레어 매카델 <패션 디자이너> | ||
조지프 매카시 <변호사, 정치인> | 프랭크 맥너마라 <신용카드 발명가> | 마거릿 미드 <인류학자> | 칼 메닝거 <정신과 의사> | ||
찰스 E. 메릴 <주식 중개인> | 미스 반 데어 로에 <건축가> | 로버트 모세 <공무원> | 윌리엄 멀홀랜드 <토목 기사> | ||
에드워드 R. 머로 <종군기자> | 랠프 네이더 <소비자 보호가, 환경보호가> | 라인홀드 니부어 <윤리학자> | 존 폰 노이만 <물리학자, 수학자> | ||
유진 오닐 <극작가, 작가> | 줄리어스 로버트 오펜하이머 <물리학자> | 윌리엄 S. 페일리 <방송 경영자> | 잭슨 폴록 <화가> | ||
에밀리 포스트 <소설가, 작가> | 엘비스 프레슬리 <가수> | 재키 로빈슨 <야구선수> | 존 데이비슨 록펠러 주니어 <기업가> | ||
리처드 로저스 (로저스 앤 해머스타인) <뮤지컬 작곡가, 작사가> | 윌 로저스 <배우, 작가> | 엘리너 루스벨트 <FDR의 아내, 사회운동가> | 베이브 루스 <야구선수> | ||
조너스 소크 <소아마비 백신 개발자> | 마거릿 생어 <사회운동가> | 앨프리드 P. 슬론 <사업가, 산업가> | 벤자민 스팍 <소아과 의사> | ||
앨프리드 스티글리츠 <사진작가> | 로이 스트라이커 <공무원, 사진작가> | 빌 윌슨 <AA 창립자> | 앤디 워홀 <화가> | ||
얼 워런 <대법원장> | 제임스 듀이 왓슨 <생물학자, 유전학자> | 토머스 왓슨 주니어 <사업가, 정치인> | 테네시 윌리엄스 <극작가> | ||
월터 윈첼 <신문기자> |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 <건축가> | 라이트 형제 <최초의 비행기 제작자> | 말콤 엑스 <인권 운동가> | ||
출처 | }}}}}}}}} |
스미스소니언 선정 미국 역사상 가장 중요한 인물들 | ||
{{{#!wiki style="word-break: keep-all; margin: 0 -10px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 2014년 미국 정부가 운영하는 국립 교육 재단 스미스소니언 재단의 잡지, 스미스소니언 매거진이 “미국사 가장 중요한 100인의 인물”을 선정했다. 미국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들을 뽑았기 때문에 미국인이 아닌 사람들도 많고 부정적인 인물들도 있다. | |
<colbgcolor=#000047><colcolor=#ffc224> 개척자들 | 크리스토퍼 콜럼버스 · 헨리 허드슨 · 아메리고 베스푸치 · 존 스미스 · 조반니 다 베라차노 · 존 뮤어 · 메리웨더 루이스 · 사카자위아 · 키트 카슨 · 존 웨슬리 파월 · 닐 암스트롱 | |
혁명가 & 저항가들 | 마틴 루터 킹 · 로버트 E. 리 · 토머스 페인 · 존 브라운 · 프레드릭 더글러스 · 수전 B. 앤서니 · W. E. B. 듀보이스 · 테쿰세 · 타탕카 이요탕카 · 엘리자베스 케이디 스탠턴 · 말콤 엑스 | |
대통령들 | 조지 워싱턴 · 토머스 제퍼슨 · 율리시스 S. 그랜트 · 우드로 윌슨 · 에이브러햄 링컨 · 제임스 매디슨 · 앤드루 잭슨 · 시어도어 루스벨트 · 프랭클린 D. 루스벨트 · 로널드 레이건 · 조지 W. 부시 | |
첫 여성들 | 포카혼타스 · 엘리너 루스벨트 · 힐러리 클린턴 · 마사 워싱턴 · 오프라 윈프리 · 헬렌 켈러 · 소저너 트루스 · 제인 애덤스 · 이디스 워튼 · 베티 데이비스 · 세라 페일린 | |
범법자들 | 베네딕트 아놀드 · 제시 제임스 · 존 윌크스 부스 · 알 카포네 · 빌리 더 키드 · 윌리엄 M. 트위드 · 찰스 맨슨 · 와일드 빌 히콕 · 리 하비 오즈월드 · 러키 루치아노 · 존 딜린저 | |
예술가들 |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 · 앤디 워홀 · 프레더릭 로 옴스테드 · 제임스 애벗 맥닐 휘슬러 · 잭슨 폴록 · 존 제임스 오듀본 · 조지아 오키프 · 토머스 에이킨스 · 토머스 내스트 · 앨프리드 스티글리츠 · 앤설 애덤스 | |
종교인들 | 조셉 스미스 · 윌리엄 펜 · 브리검 영 · 로저 윌리엄스 · 앤 허치슨 · 조너선 에드워즈 · 라파예트 로널드 허버드 · 엘런 화이트 · 코튼 매더 · 매리 베이커 에디 · 빌리 그레이엄 | |
팝 아이콘들 | 마크 트웨인 · 엘비스 프레슬리 · 마돈나 · 밥 딜런 · 마이클 잭슨 · 찰리 채플린 · 지미 헨드릭스 · 마릴린 먼로 · 프랭크 시나트라 · 루이 암스트롱 · 메리 픽포드 | |
제국 건설자들 | 앤드루 카네기 · 헨리 포드 · 존 D. 록펠러 · J. P. 모건 · 월트 디즈니 · 토머스 에디슨 · 윌리엄 랜돌프 허스트 · 하워드 휴즈 · 빌 게이츠 · 코닐리어스 밴더빌트 · 스티브 잡스 | |
운동선수들 | 베이브 루스 · 무하마드 알리 · 재키 로빈슨 · 제임스 네이스미스 · 아놀드 슈워제네거 · 타이 콥 · 마이클 조던 · 헐크 호건 · 짐 도프 · 세크리테리엇 · 빌리 진 킹 | |
출처 | }}}}}}}}} |
<colbgcolor=#000><colcolor=#fff>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 Frank Lloyd Wright | |
출생 | 1867년 6월 8일 |
미국 위스콘신 주 리치랜드 센터 | |
사망 | 1959년 4월 9일 (향년 91세) |
미국 애리조나 주 피닉스 | |
국적 | [[미국| ]][[틀:국기| ]][[틀:국기| ]] |
직업 | 건축가 |
부모 | 아버지 윌리엄 라이트 어머니 안나 로이드 존스 |
배우자 | 캐서린 라이트 (1889년 ~ 1922년, 이혼) 마우드 미리암 라이트 (1923년 ~ 1927년, 이혼) 올기반나 로이드 라이트 (1928년 결혼) |
자녀 | 2남 2녀 및 4명 |
종교 | 유니테리언 혹은 범신론 |
서명 |
[clearfix]
1. 개요
미국의 건축가. 일반인들에게는 낙수장과 솔로몬 R. 구겐하임 미술관의 설계자로 잘 알려져 있다. 근대 건축으로 시작했으나 생의 마지막에는 현대 건축으로 나아간 인물이다. 동양과 서양의 건축을 융합시켰을 뿐만 아니라,[1] 당시까지만 해도 유럽의 카피에 불과했던 미국의 건축이 독자적인 양식을 갖추고 이후 현대 건축으로 나아가는 길을 보여준 사람이기도 하다. 르 코르뷔지에의 대립쌍으로 둘을 엮어 20세기 현대 건축의 양대 산맥으로 부르기도 한다. 그리고 개인사적으로는 꽤나 극적인 삶을 살았던 사람.2. 생애
2.1. 대초원 양식을 완성하기까지의 인생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의 건축은 크게 세가지 단계로 나눌 수 있다. 첫째는 유럽의 주택 양식에서 벗어나 독특한 미국만의 주택양식인 "대초원 양식(prairie style)"을 완성하는 시기다.2.1.1. 탄생과 성장
1867년에 미국 위스콘신주에서 태어났고, 16세 때 위스콘신 대학교를 들어갔다. 학업에 매우 뛰어나서 16세에 대학에 입학한 것은 아니라 당시 시대가 그랬다. 그러나 집안이 가난해서 대학교의 학비는 상당한 부담이 되었고, 이로 인한 불화로 아버지는 집을 나가 행방불명이 되었으며 라이트는 고학으로 졸업하였다.1887년 근대건축의 선구자 루이스 설리번의 설계사무소에서 일을 배웠다. 루이스 설리번은 현대 디자인에서 명언으로 평가받는 "형태는 기능을 따른다(form follows function)"을 남긴 사람이다. 주로 시카고 등지에서 활동하며 초기 마천루 건축에 지대한 영향을 남겼다. 하지만 사실 형태는 기능을 따른다는 말을 장식적이었던 그의 작품에 적용해보면 큰 차이가 있다. 시기가 시기였던 만큼 라이트의 시대는 현대건축이란 것이 막 태동했을 무렵이기에 라이트는 고전적인 근대 건축에만 매달렸다. 설리번 아래에서 그의 장기였던 장식들은 라이트 건축의 전반기에서 아주 중요한 요소가 된다.
라이트는 1889년에 시카고 근교의 오크파크에 자신의 집을 지었고, 1893년에는 그 주변의 주택을 중심으로 자신의 설계 활동을 시작하게 된다. 같은 연도에 라이트는 시카고에서 열린 콜롬비아 세계 전람회에 출품된 일본 전시관에서 호오덴 사원의 복원 등 일본 전통 건축을 접하게 되고, 일본 건축과 예술품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게 된다. 건축가 중에서도 알아주는
이후 많은 주택이 오크파크 주변에 지어지는데, 라이트의 건축이 어떻게 발전하는지를 한 눈에 볼 수 있을 정도다. 이 기간 동안 라이트는 일본의 주택과 유럽의 주택을 섞어서 점차 자신만의 양식을 개발하게 된다. 같은 시기에 라이트는 자신의 집에 스튜디오 등을 증축하며 발전시켰는데, 여기서 얻어진 많은 실험적 경험들은 훗날 대초원 양식을 발전시키는 것에 도움이 되었다.
2.1.2. 대초원 양식을 만들다
위스콘신주 근교의 할아버지의 농장에서 일을 하기도 하며 대도시보다 교외지역을 선호했던 그는 당시의 주류 건축인 보자르 스타일(고전적인 구성방식을 중심으로 한 양식, 흔히 떠올리는 유럽 건물 스타일)을 받아들이지 않고 반 고전적, 반 유럽적인 자세를 취했다. 이는 미국의 문화적 독립성을 추구한 것이다. 당시까지만 해도 미국이란 나라의 문화는 유럽의 카피에 불과한 2류였다.건축 철학에서 그가 따른 것은 '유기적' 관념인데, 그는 건축이란 자연을 지배하는 것보다는 자연스럽게 주변에 녹아 공간을 디자인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자연을 중요시한 이러한 자세는 미국 특유의 광대한 초원이라는 자연환경과 어우러지며 '대초원 주택 양식'을 만들어낸다. 라이트의 집이 있었던 오크파크는 당시에는 그저 초원이었다. 지금은 한적하기는 해도 주택이 꽉 들어찬 주택가다.
- 수평성이 강하다. 이는 미국 평원의 끝없는 지평선과 어울린다.
- 공간 구성은 중앙의 굴뚝을 중심으로 십자형태이며, 벽들이 완벽하게 막혀 있지 않아 방들이 흐르듯 연결되어 유기적인 공간을 만든다.
- 내부공간과 외부공간의 축선을 일치시키는 등 자연과 주택을 개념적으로 일체화시킨다.
- 형태적 특성으로는 길게 뻗은 지붕과 끈처럼 이어지는 수평적인 창 배열이 있다.
이 독특하면서 아름다운 집은, 미국만의 독특한 자연환경을 바탕으로 한 미국만의 독자적인 양식이라는 것에 큰 의의가 있다. 그러나 기본적으로는 세련된 창틀의 무늬 등 장식 요소에 많이 의존하는 근대적인 주택에 머물렀다.
2.2. 유기적 건축으로..
라킨 빌딩(라킨사옥)[2]
이렇게 자연과 건축이 만나는 것을 연구하던 그는 도시 속에서도 이러한 만남을 시도한다. 1904년 뉴욕주 버팔로 시에 지은 라킨 빌딩에서, 사무소 건물은 외부를 향해 열리지 않고 내부를 향해 열리며 천장에 창을 내었기 때문에 외부공기와 자연광을 접촉할 수 있다. 이 건물은 환경 조절 장치를 갖춘 최초의 오피스 건물 중 하나이다.
1910년 그의 작품집이 베를린에서 출판되었고 유럽의 주류 건축계에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2.2.1. 논란의 개인사
이 시기 그는 거만하고 과시하기 좋아하는 기혼 여성과 오픈카를 타며 어울리며 비싼 옷과 풍성한 넥타이로 자신을 포장하더니, 결국 여섯 명의 아이들과 조강지처를 버리고 다른 여자와 유럽으로 도피하는 바람둥이 행각을 벌인다. 이 때 그의 말을 들어 보자."결혼은 인간의 굴레가 아니다. 사람이 개인적 자유와 결혼 생활의 노예 중 어느 하나를 선택해야 할 경우 전자를 선택해야 한다. 간통은 세상과 맞서는 진실이다."
그런데...
1914년, 그의 주택 겸 작업실 탈리에신에서 내연녀 Cheney 부인과 아이들이 도끼로 살해되는 것도 모자라 범인이 급기야 방화까지 일으키는 사건이 발생해 큰 충격을 받았지만 정신줄을 잡고 집을 복구한다. 이 때 복구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맡은 일이 도쿄의 제국호텔.
이 건물은 지진 방지를 위해 당시의 최신 기술을 동원하여 고심해서 설계되었지만 한편으로는 돈과 시간을 너무 과다하게 쓴다는 비판도 있었다. 이 건물은 1922년 완공되었고, 다음해 도쿄에서 관동대지진이 터졌다. 500만의 인구 중 10만여 명이 사망했고 도시의 절반이 폐허가 되었으나 제국호텔만큼은 멀쩡했다. 이로 라이트의 명성은 또 높아졌으며, 1970년대 도시화로 새 건물을 지어야 할 때가 오자, 제국호텔을 기념하기 위해 해체하여 나고야의 메이지 시대 민속촌에 로비 건물동을 조립해서 보존하고 있다.
그리고 제국호텔이 지어진 해 두 번째 아내(Cheney 부인과는 내연녀 사이)도 얻고 다시 재기하려던 찰나 믿기지 않는 일이 또 일어난다. 1925년 기껏 복구한 탈리에신 주택이 다시 불타 사라진다. 화재 당시 주변 주민들은 화재진압을 돕기는 커녕 라이트가 수집했던 동양의 예술품들을 훔쳐 갔다고 한다. 그리고 두 번째 아내와도 이혼하게 된다.
그러나 동유럽의 귀족이었던 여인을 세 번째 부인으로 맞고는 삶의 안정을 되찾게 된다. 이후 라이트는 근대건축의 역사를 쓰는 데 합류하게 된다.
2.3. 20세기 유기적 건축의 완성
2.3.1. 낙수장
1939년에 라이트는 그의 후원자였던 에드거 카프만을 위해 착공한 여름 별장인 낙수장(Fallingwater)를 완공한다. 이 저택은 흐르는 폭포 위에 지어졌다.
자연과 그대로 융합한 이 저택은 21세기가 된 지금도 전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주택이다. 라이트의 자연주의적인 신념을 가장 잘 표현하였으며, 인문학적인 면에서 시적인 표현을 이룩한 건축으로 높게 평가받고 있다. 또한 캔틸레버(cantilever) 공법을 사용하여 공학적인 혁신을 이룬 건물이기도 하다. 캔틸레버는 한쪽 끝만 받치고 길게 뻗은 바닥을 말한다. 이건 안정되게 짓기 힘들다. 신입생 환영회 같은 행사에서 쓰는 깃발의 끝 부분만을 잡고 수평으로 들어 보자. 손이 부들부들 떨린다(...)
라이트는 주택에 대한 확고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주택에 있어서만큼은 특정한 스타일을 내세우는 것을 꺼렸는데, 그 안에 사는 사람이 다 다르기 때문에 각각에 맞는 스타일이 따로 존재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또한 그는 주택의 본질적인 면, 즉 온화함과 보호 등의 개념을 중시하여 천장을 낮게 한다거나 코너를 활용하는 등의 디자인을 했다. 특히 벽난로(hearth)를 따뜻한 가정의 중심이라 생각하여 이를 부각시킨 주택 설계를 많이 하였는데, 낙수장에서는 집의 가장 중앙에 벽난로와 그 굴뚝을 두고 여기서부터 각 공간이 뻗어나가는 듯한 형태로 표현해냈다.
이 집이 자연과 동화된 유기적 건축인 이유는 단순히 폭포 위에 세웠다는 사실 하나로 끝나지 않는다. 우선 콘크리트를 제외한 대부분의 재료를 해당 지역에서 가져다 썼으며 이는 수직적으로 부각되는 석재 매스를 통해 충분히 알 수 있다. 또 위에서 언급된 1층의 벽난로나 메이드룸에선 원래 그 자리에 위치해 있던 가공되지 않은 자연석을 그대로 집의 일부로 만들어 쓴 것이 돋보인다. 거실로 들어서면 강으로 곧장 내려갈 수 있는 계단이 있어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집 안에서 다이빙을 시도할 수 있다! 낙수장의 특이한 점으로는 모든 방에 커다란 테라스가 하나씩 딸려 있다는 점인데 이 또한 사적인 공간을 자연을 향해 열어두어 자연과 주택을 연결시키려 한 시도다. 심지어 진입로 부분에서 원래 있던 나무를 자르지 않은 채 그 주변을 돌아 건축물이 지어진 것을 보면 라이트가 자연과의 동화에 얼마나 심혈을 기울였는 지 느껴진다. 이 건물은 서구 건축사에서 자연과 대립하지 않는 건축을 완성했다는 점에서 큰 의의가 있다.
낙수장은 그 과감한 선택을 통해 엄청난 반향을 일으켰지만, 그에 따른 논란 역시 불러 일으켰다. 우선 건축주인 카프만부터 아우성이었다. 폭포의 따가운 물소리 때문에 시끄러워서 살 수가 없다는 것.(...) 실제 당시 고령의 노인이었던 에드거 카프만 시니어는 이 집에서 며칠을 머무르다 폭포 소리가 너무 커 잠을 못 자겠다고 불평하며 원래 살던 집으로 돌아갔고, 그 이후 이 건축물은 오래 머물지 않는 주말 별장 정도로 쓰였다는 말이 있다.[3] 그리고 공학적으로 보면 20세기 초의 기술로 만들어졌던 탓에 캔틸레버는 노후화되어 휘고 있다. 지금은 켄틸레버 곳곳에 금이 가있다고도 한다.
이 집은 애초에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가 젊은 에드거 카프만 주니어[4]에게 당시에 그의 아버지인 에드거 카프만 시니어가 살던 집이 그 집안의 위세에 알맞지 않는다는 등의 말로 도발을 해서 의뢰받은 작품이다. 결국 에드거 카프만 주니어는 이 집이 거주용보다는 예술작품이라 판단하여 국가에 기증해버렸다. 이 집은 수년간 국유 건물로 관리되다 1964년 민간에 개방하여 관람용으로 이용된다.
관광하러 가기는 다소 까다로운 편이다. 여러 방문객 후기에 따르면 피츠버그 기점 차로 2시간 거리 깊은 산속에 있다. 월~일 10시에서 4시 개장이다. 내부 촬영은 금지되어 있지만 건축학과 프로그램으로 참여하는 것이라면 찍을 수 있다.
그가 설계한 건축물 중 워낙 유명하다보니 사람들이 3D로 재현하기도 한다. 심즈 4 등으로 재현한 팬아트 건축도 있다.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의 다른 작품들처럼 레고 아키텍처 시리즈로도 나와 있는데 재현도가 높은 편. 이후 품절되어 프리미엄이 붙었다. 4~50만원 선.
2.3.2. 솔로몬 R. 구겐하임 미술관
라이트의 최후의 작품인 뉴욕의 솔로몬 R. 구겐하임 미술관. 건축주인 솔로몬 R. 구겐하임이 여지껏 한 번도 보지 못한 미술관을 만들어 달라고 말했고, 라이트는 그 요구에 정확히 부합하는 건물을 만들어냈다.[5] 구겐하임 미술관의 설계는 1943년에 끝났지만 전쟁으로 인해 시공이 늦춰져 결국 라이트 사후 반년 뒤에 완공된다. 맨 인 블랙에서 윌 스미스가 신나게 뛰어다녔던 이 건물은 미술관 건축의 새로운 방법을 제시했을 뿐만 아니라 건축에서 오랫동안 변하지 않았던 '평평한 바닥'의 패러다임을 바꿔놨다! 건물 전체가 경사면을 이용해 계단 없이 이어진다! 바닥과 벽, 천장이 함께 흘러가는 모양을 통해 공간과 구조의 유기적인 흐름을 추구한 것이다.
국제주의 양식(International Style)에 가까운 라이트의 기존 건축과는 달리 이 건물은 후기 표현주의 건축의 상징으로 여겨질 만큼 특징적인 외관이 돋보인다. 때문에 처음 지어졌을 땐 커다란 세탁기 같다고 비난받았지만, 사실 고대 지구라트 신전의 모양에서 착안한 형태를 그대로 뒤집은 것이 디자인의 모티프였다. 그 외에 "벽이 저렇게 휘어 있어서 그림이나 걸겠냐" 같은 비판이 있었는데, 완전히 틀린 이야기는 아니라고 한다. 여기에 걸릴 전시물들을 만들어내는 작가들의 비판은 더욱 거셌다. 미술관의 경사진 바닥으로 인해 작품에 대한 심도있는 감상이 없이 흘끔 보고 지나가게 되므로 건축물 자체가 아티스트에 대한 모독이나 다름없다는 것이었다. 때문에 일부 작가들은 자신의 작품을 라이트의 미술관에 걸지 못하게 하는 경우까지 있었다. 이러한 비판들을 차치하고서라도 솔로몬 R. 구겐하임 미술관에는 큰 문제가 있었는데 바로 공간 부족이었다.[6][7] 직원들의 업무공간은 물론 작품을 보관하는 수장고 공간마저 그 수요를 충족시키기엔 역부족이었다. 때문에 미술관 완공 후 그 뒤편에 업무공간 및 수장고 공간을 위한 건물을 새로 지었고 원래 업무공간, 수장고로 계획되었던 부분은 특별 전시를 하는 등의 용도로 사용하여, 현재는 라이트의 건물 전체가 다 전시공간으로 쓰이고 있다.
구겐하임 미술관의 완공 6개월 전 평생을 논란 속에서 산 풍운아는 91세의 나이로 사망한다.
3.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미국의 세계유산 | ||||
{{{#!wiki style="margin:0 -10px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6px -1px -11px" | <colbgcolor=#002664> 문화유산 | 1978년 메사 버드 국립공원 Mesa Verde National Park | 1979년 독립기념관 Independence Hall | 1982년 카호키아 마운드 역사 유적 Cahokia Mounds State Historic Site |
1983년 푸에르토리코의 라 포탈레사와 산후안 국립 역사 지구 La Fortaleza and San Juan National Historic Site in Puerto Rico | 1984년 자유의 여신상 Statue of Liberty | 1987년 차코 문화 국립 역사 공원 Chaco Culture | ||
1987년 몬티셀로와 버지니아 대학교 Monticello and the University of Virginia in Charlottesville | 1992년 푸에블로 타오스 Taos Pueblo | 2014년 파버티 포인트의 기념비적 토공사 Monumental Earthworks of Poverty Point | ||
2015년 샌안토니오의 전교회 San Antonio Missions | 2015년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의 20세기 건축물 The 20th-Century Architecture of Frank Lloyd Wright | 2023년 호프웰 의례용 토공사 Hopewell Ceremonial Earthworks | ||
2024년 베들레헴의 모라비아 교회 정착촌 Papahānaumokuākea | ||||
자연유산 | 1978년 옐로스톤 국립공원 Yellowstone National Park | 1979년 알래스카·캐나다 국경의 산악 공원군 Kluane / Wrangell-St. Elias / Glacier Bay / Tatshenshini-Alsek | 1979년 그랜드 캐니언 국립공원 Grand Canyon National Park | |
1979년 에버글레이즈 국립공원 Everglades National Park | 1980년 레드우드 국립공원 Redwood National and State Parks | 1981년 매머드 동굴 국립공원 Mammoth Cave National Park | ||
1981년 올림픽 국립공원 Olympic National Park | 1983년 그레이트스모키 산맥 국립공원 Great Smoky Mountains National Park | 1984년 요세미티 국립공원 Yosemite National Park | ||
1987년 하와이 화산 국립공원 Hawaii Volcanoes National Park | 1995년 칼즈배드 동굴 국립공원 Carlsbad Caverns National Park | 1995년 워터턴 글레이셔 국제 평화 공원 Waterton Glacier International Peace Park | ||
복합유산 | 2010년 파파하노모쿠아키아 Papahānaumokuākea |
유네스코 세계유산 | |||
이름 | 한국어 | [8] | |
영어 | [9] | ||
프랑스어 | [10] | ||
등재유형 | 문화유산 | ||
등재연도 | 2019년 | ||
등재기준 | (ii)[11] | ||
지정번호 | 1496 |
[clearfix]
4. 영향과 평가
여러 면에서 르 코르뷔지에와 비교된다. 도시와 기계를 찬양하며 대량생산에 의한 효율을 주장했던 코르뷔지에와 달리 라이트는 자연을 열렬히 찬양했다. 단순히 도시를 좋아하지 않은 수준이 아니라 아주 싫어했다. 라이트는 더욱 장인적이고 맞춤형 생산에 의한 다양성을 주장했다.따라서 코르뷔지에가 이후 모더니즘에 지대한 영향을 준 것처럼 라이트는 자연적인 건축, 환경적인 건축에 큰 영향을 준다. 그리고 동양의 건축기술과 양식을 서구에 알린 공도 있는데, 한국과 일본 건축의 영향도 많이 받았으며 특히, 온돌 난방을 경험하고 서구식 보일러와 접목시킨다. 1916년 일본 제국호텔의 설계를 맡아 일본을 방문했다가 일본 귀족의 조선관에서 온돌을 체험한 뒤 Herbert Jacobs house를 1937년 만든다. 이 조선관은 원래 경복궁 자선당 건물이었다. 일제강점기에 당시의 일본 귀족 부호였던 오쿠라 키하치로가 뜯어가(...) 자기 집에 세웠던 것. 이후 자선당은 관동대지진으로 소실된 뒤 1996년에야 주춧돌이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12] 원래 자리에 복원된다. 기사
또 유럽식 보일러를 이용한 온수 복사난방과 한국의 온돌 기술을 접목시켜서, 유럽의 난방 역사에도 큰 족적을 남겼다. 결국 유럽 최초의 바닥난방 시공표준안이 1980년 개발된다. 바닥난방 문서 참고.
주거계획의 측면에서도 아파트를 선호했던 코르뷔지에와 달리 라이트는 단독주택에 살면서 자동차, 비행기를 1~2대씩 소유하고 넓게 퍼져 사는 삶을 이상적인 도시 생활로 생각했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이 총집합된 그의 구상안(Broadacre City)은 당대 빠르고 효율적인 주거단지의 보급에 알맞는 근린주구(C.A.Perry)에 밀려 실현되지 못했으며, 이후에도 제인 제이콥스를 비롯한 도시 이론가들에게 교통체계에 대한 미고려, 비현실성 등으로 비판을 받기도 했다.
라이트의 업적이 부풀려졌다는 의견도 있는데, 유럽의 건축 역사에 비해 내세울 게 적던 당시 미국이 자국 건축가인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를 대대적으로 선전해 그가 고평가되었다는 주장이다. 다만 고평가 되었을지언정 그의 업적이 없는 것도 아니기에, 20세기를 대표하는 건축가 중 한명으로 불릴만하다.
5. 어록
"자연을 관찰하라. 자연을 사랑하라. 자연과 가까이하라. 자연은 절대로 배신하지 않을 것이다."
"위대한 건축은 인간이 위대하다는 가장 위대한 증거이다."
"내 건물에 물이 새서 책상 위로 떨어진다고? 그렇다면 책상을 옮기시오."
6. 매체
- 스파이 패밀리: 엔딩곡에서 그의 가구인 FRANK LLOYD WLIGHT TALIESIN 2가 잠깐 스쳐 지나간다.
- So Long, Frank Lloyd Wright: 유명 남성 듀오인 사이먼 앤 가펑클의 마지막 스튜디오 정규앨범인 Bridge Over Troubled Water에 수록된 곡인데 이 사람에 대한 노래이다. 아트 가펑클이 폴 사이먼에게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에 대한 곡을 지어달라고 요청했고(컬럼비아 대학교에서 건축학을 전공했던 아트 가펑클이 좋아하던 건축가였다고 한다.) 폴 사이먼은 이 요청을 듣고 그가 누구인지도 몰랐지만 곡을 작곡했다고 한다.
7. 여담
1950년 이브의 모든 것, 1956년 십계에 출연한 여배우 앤 백스터의 외할아버지이다. 상술한 조강지처가 낳은 자식 중 하나가 앤 백스터의 어머니.아인 랜드의 소설 파운틴헤드의 주인공 하워드 로크의 모델 중 하나이다. 천재적이지만 독선적이고 고집적인 성격이 닮았다.
'레고 아키텍처 시리즈'의 라인업 중에는 그의 건축물을 재현한 제품이 많다.
히가시노 게이고의 소설인 라플라스의 마녀에서 아오에 슈스케와 기리미야 레이가 한 쇼핑센터 안의 모형 전문점 안에서 그가 제작한 데이코쿠 호텔에 대하여 이야기를 나눈다.
[1] 후술되어있듯 온돌 방식도 본인의 건축에 접목시킨다.[2] 해당 건물은 1950년 철거되었다.[3] 다만 그게 루머라는 말이 있다.[4] 라이트 밑에서 건축을 배웠다고 한다.[5] 이 때문인지 라이트는 평소에 미술관 프로젝트를 꺼렸지만 이 프로젝트에는 굉장한 애착을 갖고 있었다고 한다.[6] 사실 표현주의 건축물에는 기능적인 문제가 고질적으로 따라다닌다.[7] 참고로 이 형식을 취하고 있는 지금의 백화점, 미술관 등은 저 빈 공간에 거대한 장식물을 설치해 시선을 집중시킨다. 설치미술 전시에만큼은 제격인 셈이다.[8]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의 20세기 건축물[9] The 20th-Century Architecture of Frank Lloyd Wright[10] Les œuvres architecturales du XXe siècle de Frank Lloyd Wright[11] 오랜 세월에 걸쳐 또는 세계의 일정 문화권 내에서 건축이나 기술 발전, 기념물 제작, 도시 계획이나 조경 디자인에 있어 인간 가치의 중요한 교환을 반영할 것[12] 다만 주춧돌 자체는 자선당 복원 때 활용하려 했지만 손상이 너무 심해 경복궁 건청궁과 녹산 사이에 놓아 보존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