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4-07 21:35:25

에드워드 버네이스

파일:LIFE_LOGO.png 선정 20세기 가장 영향력 있는 미국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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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0년 미국의 시사잡지인 라이프에서 20세기 가장 영향력 있는 미국인 100인을 선정했다. 순위는 없으며, 만장일치로 선정된 인물은 헨리 포드라이트 형제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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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개혁가>
무하마드 알리
<권투선수, 인권 운동가>
엘리자베스 아덴
<사업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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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 경영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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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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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리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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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보 책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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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곡가, 지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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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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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어컨 발명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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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해양생물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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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수, 배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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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IA 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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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리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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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브 루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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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업가, 정치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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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작가>
월터 윈첼
<신문기자>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
<건축가>
라이트 형제
<최초의 비행기 제작자>
말콤 엑스
<인권 운동가>
출처 }}}}}}}}}

<colbgcolor=#010101,#000><colcolor=#eee,#dddddd> Edward Louis Bernays
에드워드 루이스 버네이스
파일:에드워드버네이스.jpg
출생 1891년 11월 22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사망 1995년 3월 9일 (향년 103세)
미국 매사추세츠 케임브리지(Cambridge)
국적
[[미국|]][[틀:국기|]][[틀:국기|]]
가족 아버지 일라이 버네이스[1]
어머니 안나 프로이트[2]
부인 도리스 E. 플리쉬먼 (1891 ~ 1980) [3]
자녀 1남 1녀 (도리스 헬드, 안나 버네이스)
외삼촌 지그문트 프로이트
학력 코넬 대학교 농학과
서명
파일:Edward_L._Bernays_signature.png
1. 개요2. 생애3. 대표적 사례
3.1. 여성 머리망 판촉3.2. 아이보리 비누 판촉3.3. 아침 영양식으로 각인된 베이컨 판촉3.4. 여성 흡연 캠페인 (자유의 횃불)3.5. 과테말라 쿠데타
4. 여담
4.1. 프로파간다 (1928)4.2. 버네이스의 열렬한 팬, 괴벨스

[clearfix]

1. 개요

The father of public relations
홍보의 아버지

유대계 미국인 마케터. 홍보(PR, Public Relations) 및 선전(Propaganda) 분야의 선구자였다.[4] 버네이스는 라이프지에서 20세기 가장 영향력 있는 미국인 100명 중 한 명으로 선정되었다.[5]

선전이 잡부의 일로 취급되던 시대에 세계 최초의 PR 에이전시를 세운 사람이며 그를 열렬히 추종한 사람이 바로 나치의 괴벨스이다.유태인은 싫지만 유태인의 수법은 잘 배운다 그는 인간의 심리, 그 중에서도 집단 심리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연구하였는데, 이를 마케팅에 접목시킨 것이 바로 선전(Propaganda)과 이를 체계화한 PR(Public Relations)이었다. 또한 1923년 뉴욕대학교에서 최초로 '홍보' 교과 과정을 개설하여 PR을 과학이자 산업으로 정립하는 데 기여하였다. 쉽게 말해 우리는 여전히 버네이스가 만들어낸 시대에 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여기까지만 들으면 아주 훌륭한 사람처럼 보이는데, 한편으론 과테말라 민주 정부의 전복에도 큰 역할을 한 사람이다.

2. 생애

1891년 11월 22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수도 에서 곡물상으로 성공한 유대인 일라이 버네이스의 아들로 출생했으며, 심리학자 지그문트 프로이트의 조카(친조카이자 처조카)[6] 이다. 거기다 증조할아버지였던 이츠하크 버네이스는 함부르크의 최고 랍비였으며, 시인 하인리히 하이네와 친척이었다.

한 살 때 가족과 함께 미국 뉴욕으로 건너가 자랐다. 대학은 코넬 대학교에서 농학을 전공했다. 농학을 전공하게 된 동기는 곡물상인 아버지의 권유. 1912년 대학을 졸업하고 뉴욕시 상품거래소에서 전공을 살려 곡물 유통 업무를 하다가 그만두고 친구의 의학 잡지사에서 기자로 일하며 홍보(PR) 업무를 시작했는데, 언론 대행인으로서 여러 문화 행사를 성공리에 이끌었다. 이를 통하여 버네이스는 선전, 홍보 분야에 자신의 적성을 깨닫는다.

제1차 세계대전 때는 연방공보위원회(CPI)에 발탁되어 독일 등에 맞서 뛰어난 선전 전략을 펼쳤다.

전후 1919년에는 뉴욕에서 세계 최초로 'PR 고문'이라는 직함을 달고 PR 전문 사무실을 열었다. 대중심리학에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을 결합하여 최초로 선전과 홍보에 이용했고 홍보를 과학으로, 산업으로 정립했다.

1923년에는 뉴욕 대학교에서 최초로 '홍보'라는 교과과정을 가르쳤고 최초의 PR 전문서인 '여론 정제(Crystallizing Public Opinion)'도 출간했다.

그는 거의 반세기 동안 435명의 의뢰인에게 PR 자문을 했는데, 의뢰인 명단에는 대통령부터 노동조합에 이르기까지 미국 정계, 재계, 교육계, 언론계, 문화예술계 등을 대표하는 유명 인사와 기업, 기관과 단체가 망라됐다. 1995년 3월 9일 103세에 세상을 떠났으며, 수많은 언론과 지식인들이 그를 'PR의 아버지'로 기렸다. 저서로 '프로파간다(Propaganda)', '홍보(Public Relations)', '합의의 조작(The Engineering of Consent)' 등이 있다.

3. 대표적 사례

버네이스의 사례를 잘 검토해 보면 물건 자체를 홍보하기 보다는 물건이 저절로 판매되는 '환경 자체'를 만드는 것을 중요시 했고, 광고는 선전의 큰 체계속에서 직접 물건을 소개하는 하위 분야라고 생각했다. 즉, 사람들 마음 속에 '집단 습관(Group Custom)을 심으면 물건은 저절로 잘 팔릴 것이라 생각한 것이다. 아래의 예시와 함께 그의 저서 <프로파간다>에서는 여러가지 선전의 기술이 나오는데[7] 지금 보면 진부한 내용도 있지만 1928년에 발간되었다는 것을 감안하면 혁신적인 내용이다.

3.1. 여성 머리망 판촉

1920년대 머리카락, 특히 여성들의 머리카락을 감싸는 머리망을 만들던 '베니다 헤어넷 (Venida Hair Net)' 회사는 버네이스에게 머리망 판매 촉진에 대한 전략을 의뢰하였다. 보통의 경우라면, 머리망이 예쁘다든지 혹은 여배우를 써서 예쁜 모양의 광고를 찍었겠지만 베너이스는 접근부터 달랐다.

그가 주목한 것은 당시 최악의 화재사건이었던 뉴욕 트라이앵글 의류공장 화재사고였다. 9.11 테러전까지 미국에서 발생한 최악의 사건으로 손 꼽히는 이 참사로 단 15분만에 146명이 사망하였는데, 모두 여성이었다. 이 사고로 국가적인 조사위원회가 만들어져서 1915년부터 1920년까지 모두 64가지의 산업안전 관련법들이 새로 제정되었고, 미국 전체의 국가적 의제가 '안전'으로 모아지고 있었다.

버네이스는 이러한 국가적 분위기에 편승하여 풀어헤쳐진 머리카락이 여성 노동자들에게 매우 위험하다는 캠페인을 전개했다. 만약 여성의 긴 머리카락이 기계에 휘말려 들어가면 안전사고가 발생하는 것은 자명한 일이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공장에서 일하는 여성들은 자발적으로 베니다의 머리망을 구매하기 시작하였고, 곧 전체 여성들 사이에서 머리망이 유행이 되기 시작하였다. 정부에서도 이 머리망의 필요성과 중요성을 검토하였고, 마침내 여성근로자들은 공장에서 머리망을 착용해야 한다는 법이 통과되었다. 베니다의 머리망이 이제 법적 의무가 된 것이다. 물론 매출은 급격히 상승하였다.

3.2. 아이보리 비누 판촉

1897년에 P&G에서 출시한 아이보리 비누는 '물에 뜨는 비누'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지금도 판매되는 그 아이보리 비누 맞다. 무려 140년이 넘는 역사를 가진 비누다.) 당시 미국의 농가에서는 개울에서 빨래하고 몸도 씻는 경우가 많았는데, 물에 뜨는 비누는 분실 우려가 적고 개울에서 사용하기도 편리했다. 그러나 시장은 금세 포화상태에 다다랐다. 성장을 지속시키기 위해서는 뭔가 다른 행동을 취해야 했고, 1924년 P&G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버네이스를 찾는다.

버네이스는 누가 비누를 가장 싫어할지를 먼저 생각해보았다. 답은 아이들이었다. 아이들은 종일 밖에서 뒹굴다가 흙투성이가 되어 돌아온다. 가장 비누가 필요한 게 아이들이었지만 가장 씻기를 싫어하는 것도 아이들이었다. 버네이스는 아이들이 비누에 친숙해지면 씻는 횟수도 획기적으로 늘어날 것으로 판단했다. 그렇게만 된다면 비누의 시장규모는 지금보다 좀 더 확장될 수 있었다.

버네이스는 '비누 조각품 경연대회'를 열었다. 첫 번째 대회의 참가 자격은 예술가들에게 주어졌다. 수상작은 뉴욕을 비롯해 각지 박물관과 미술관에 순회 전시되었다. 이로써 비누 조각품은 사람들에게 예술 작품처럼 여겨지게 되었다.

두 번째 대회부터는 초등학생까지 참가자격을 넓혔다. 예술가들만 참여하는 대회에 아이들도 참가할 수 있게 되자 부모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자녀들을 참가시켰다. 아이들도 좋아했다. 비누는 아이가 자신의 상상력을 어려움 없이 조각해 뽐낼 수 있을 만큼 충분히 부드러웠다. 게다가 목욕하면서 가지고 놀 수도 있었다.

아이도 부모도 비누 조각에 열광했다. 대회는 매번 성공적으로 치러졌다. 대회에 사용된 비누는 전량 아이보리 비누였지만 대회 어디에도 상업적인 흔적은 없었다. 비누 조각품 경연대회는 미국 전역을 휩쓸며 전 세계로 퍼져나갔다. 버네이스는 이후 30여 년간 P&G의 PR을 전담하게 된다.

3.3. 아침 영양식으로 각인된 베이컨 판촉

1920년대 중반 미국 베이컨 제조회사인 비치너트 패킹(Beechnut Packing)으로부터 베이컨 판매량을 늘리기 위한 자문 요청을 받는다. 당시 미국에서는 베이컨을 판매하는 기업이 크게 4개 정도 있었는데 그 중 비치넛 패킹은 매출 하락으로 큰 위기에 처해 있었다. 비치넛 사장은 버네이스를 찾아가 업계 꼴찌인 자신의 회사를 살려달라고 부탁하였다.

물론 버네이스는 역시 다르게 생각하였다. 경쟁 회사를 제치고 업계 1위가 되는 것보다 새로운 수요를 창출하여 시장을 키우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 것이다. 당시 미국에서는 간단한 아침이 인기였고[8] 베이컨은 아침 식사로 인기 있는 메뉴가 아니었다.

이에 버네이스는 내과 의사들을 대상으로 행한 간단한 설문 조사를 통해, '내과 의사들은 든든한 아침 식사를 선호한다'는 뉴스 기사를 게재했다. 버네이스가 기획한 기사는 당시 전국지에 '4500명의 내과 의사들이 든든한 아침 식사를 권하다(4500 physicians urge bigger breakfast)'라는 제목의 기사로 실렸다. 그리고 동시에 다른 기사를 배치해 베이컨과 달걀이 중요한 아침 식사 메뉴 중 하나임을 부각시켰다. 그 결과, 미국에서 베이컨의 소비는 급증했고 당시 버네이스의 전략은 성공한 것으로 평가되었다.

사실, 여기에는 사람들로 하여금 귄위에 의지하게 하는 몇 가지 전략이 숨어 있다. 당시 설문 대상은 내과 의사였지만, 내과 의사들에게 베이컨을 아침 식사의 대용으로 선호하는지는 질문하지 않았다. 가벼운 아침 식사보다는 든든한 아침 식사가 밤사이 잃어버린 에너지를 보충하는 데 더 좋다는 답변만을 유도했을 뿐이다.

하지만 든든한 아침 식사가 좋다는 설문 결과가 뉴스로 기사화되고, 베이컨과 달걀이 아침 식사 대용으로 적합하다는 내용의 기사가 함께 실리게 된 것이다. 사람들은 기사 2개를 동시에 읽으면서 '든든한 아침식사=베이컨'이라는 식으로 기사를 이해하게 되었으며, 당시 막강한 언론이었던 신문의 힘으로 이에 대한 입소문이 널리 퍼진 것이다.

이러한 여론을 만들고 버네이스는 건강을 위해선 아침식사로 베이컨을 먹어야 한다는 내용의 '정성 어린 아침식사' 캠페인을 전개했고 이 캠페인은 미국 주부들에게 큰 반향을 일으켰다.

현재 이러한 홍보 방식은 다양하게 활용되고 있으며 특히 정치에서 많이 활용된다.

3.4. 여성 흡연 캠페인 (자유의 횃불)

1929년 미국의 담배 회사 아메리칸 토바코(American Tobacco)사(社)[9]는 당시 이미 마케팅 시장에서 유명해진 버네이스를 스카웃했다.

역시 버네이스는 다르게 접근했다. 담배를 직접 광고하기 보다는 담배를 피지 않는 사람들, 곧 당시의 여성들에게 주목했다. 20세기 초 흡연은 남자들의 전유물이었다. 남성은 길거리에서 공공연히 흡연을 하는 것이 문제삼지 않았지만, 여성이 길거리에서 흡연하는 것은 좋게 보지 않았다. 이것을 버네이스는 이용하여 여성 흡연 마케팅을 시작한 것이다. 즉, 여성에게 여성은 흡연에 있어 차별을 받고 있다고 주입시킨 것이다.

버네이스는 사교계에 입문한 젊은 여성들로 하여금 길거리에서 공공연히 흡연을 하며 행진을 하게 했고, 부활절 퍼레이드가 진행되는 동안 많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럭키 스트라이크 담배에 불을 붙이라고 설득하였으며, "여성들의 노상 흡연을 허락하라!"와 같은 슬로건을 제작했다. 버네이스는 한편으로 방송에 출연하여 "이들이 럭키 스트라이크 담배에 붙이는 불은 단순히 담뱃불이 아니라 여성들의 참정권과 같은 인권 운동에 있어 자유의 횃대에 불을 붙이는 횃불이다"와 같이 멋들어지게 포장해 주었다. 심지어 담뱃갑의 짙은 녹색 색깔에 여성들이 호감을 갖게 하기 위해 인위적으로 패션 업계까지 휘저어서 최신 패션 트렌드를 짙은 녹색 옷차림으로 바꿔 버렸다.

즉 버네이스가 만들어 낸 환상은 여성이 담배를 피움으로써 더 강해지고 독립적이 된다는 환상이었다. 물론 흡연이 실제로 여성을 더 자유롭게 만든다는 생각은 전혀 합리적이지 않지만, 여성들은 담배를 피움으로써 더 독립적인 기분을 맛보게 된 것이다. 마케팅은 대성공했고 담배 시장은 훨씬 커졌다.

자세한 사항은 "자유의 횃불" 참조

3.5. 과테말라 쿠데타

무슨 홍보 전문가가 과테말라 정부를 전복했을까 싶지만, 버네이스는 큰 역할을 했다.

라틴아메리카의 독재 정부와 결탁해 현지인들을 착취하는 것으로 유명한 미국의 과일회사인 유나이티드 프루트 컴퍼니[10]는 1950년 하코보 아르벤스 구스만(Jacobo Arbenz Guzman)이 과테말라 대통령으로 당선되며 유나이티드 프루트 컴퍼니가 경작하지도 않으면서 가지고 있던 땅 40만 에이커(서울시 면적의 약 2.7배)를 압수당하였다.[11][12]

이에 유나이티드 프루트 컴퍼니는 버네이스에게 의뢰를 하고 역시 버네이스는 언론을 이용하기 시작하였다. 그는 좌파 정권의 위험성만을 부각시켜 윤색한 보도자료를 미국 언론에 제공하고 주요 신문의 기자와 칼럼니스트를 모아 현지 취재 일정을 짜주고 여행을 금적으로 후원했다. 심지어 그는 '과테말라 정부 지도자들의 언어를 분석한 결과, 17,000개의 단어가 소련 선전 메시지와 비슷하더라'는 학자들의 조사 결과도 만들어냈다.

그 결과 미국 여론은 급격하게 과테말라 정권에 불리하게 돌아갔고 결국 1954년 6월 망명 인사인 카를로스 카스티요 아르마스(Carlos Castillo Armaz)가 미국 CIA가 훈련시킨 200명을 이끌고 온두라스 쪽에서 국경을 넘었다. 버네이스는 이들을 '자유의 군인'이라고 일컬었다. 이 침공으로 과테말라의 구스만 정권을 전복시키고 아르마스가 이끄는 친미정권이 들어섰다. 이는 모두 그가 홍보를 담당했던 유통 대기업의 이익을 위해 벌인 일이었기에 일각에서는 버네이스를 가리켜 선전과 홍보의 아버지가 아니라 '민주주의의 암살자'로 부르며 비판하기도 한다.[13]

그리고 얼마 안 있어 UFC는 웃기게도 반독점법에 걸려서 중남미의 철도망과 과테말라의 토지 일부를 뱉어내야만 했다.

4. 여담

4.1. 프로파간다 (1928)

버네이스는 자신의 저서 '프로파간다' (Propaganda, 1928)에서 기존의 보편적인 선전 방식을 옛 방식이라 말하며 자신을 '새로운 선전가'로 칭했다. '프로파간다'가 출간된 1928년을 기준으로 당시의 보편적인 선전은 오늘날의 보편적인 선전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피아노의 예를 들면 예전이나 지금이나 피아노의 음색, 아름다움, 차별성 등을 주로 선전하게 된다.
버네이스의 '프로파간다'에 따르면 구시대적 선전가는 피아노를 알리는 것에 주력한다. 반면 새로운 선전가는 '집단 습관'(Group Custom)을 이끌어내어 피아노가 팔리는 환경을 만드는 것에 주력한다. 집단 습관이라는 용어가 생소할 수 있지만, 사실 누구나 쉽게 경험하는 현상이다. 예를 들어 한국에서 대다수 아주머니들이 파마머리를 하는 것, 중년층이 등산복을 즐겨 입는 것 등이 모두 집단 습관에 해당된다.

버네이스는 피아노에 대한 집단 습관을 이끌어내기 위해 '가정 음악실'을 유행시키는 방법을 제안한다. 먼저 이름난 인테리어 디자이너와 협력하여 '뮤직 룸 페어' 행사를 개최하고 시대별 가정 음악실을 전시한다. 가정 음악실은 적절한 소품과 장식들로 고급스럽게 연출한다. 그다음 유명 음악가들을 섭외해 가정 음악실에서 연주회를 열고 영향력 있는 사람들을 대거 초청한다.

이것이 반복되다 보면 많은 사람의 머릿속에는 전에 없던 '가정 음악실'이라는 개념이 생겨난다. 최신 트렌드에 민감한 인테리어 디자이너들은 고객에게 가정 음악실을 제안하기 시작한다. 가정 음악실은 점차 집단 습관으로 자리 잡고 딱히 피아노를 선전할 필요가 없게 된다. 사람들이 가정 음악실에 놓을 피아노를 사기 위해 제 발로 찾아오기 때문이다. 이것이 버네이스가 프로파간다에서 주장하는 새로운 선전법이다.
대중의 관행과 의견을 의식과 지성을 발휘해 조작하는 것은 민주사회의 중요한 요소이다.
- 에드워드 버네이스

4.2. 버네이스의 열렬한 팬, 괴벨스

나치의 선전 장관 괴벨스는 버네이스의 열렬한 팬이었다. 버네이스가 쓴 책은 모두 괴벨스가 애독하는 교과서가 됐다. 1923년에 출간된 세계 최초의 PR 전문서 '여론 정제' (Crystallizing Public Opinion)는 괴벨스가 독일 내 반유대주의 여론을 끌어올리는 것에 이론적 바탕이 되었다. 유대계인 버네이스는 이런 사실에 충격받긴 했지만 자신의 영향력에 대한 증거로 삼았다 한다.#

버네이스의 대표작 '프로파간다' 역시 괴벨스에게 많은 영향을 미쳤다. 버네이스의 새로운 선전이 자발적으로 제품을 사는 환경을 만드는 것이었다면, 괴벨스의 새로운 선전은 독일인이 자발적으로 나치가 되는 환경을 만드는 것이었다.

결국 괴벨스의 선전은 전 세계를 충격에 빠뜨릴 정도로 영향력이 있었고 선전의 가치를 재고시켜 버네이스의 입지까지 넓혀주었다. 그러나 괴벨스가 한 짓이 너무나 사악한 것이었기 때문에 '선전(프로파간다)'이라는 용어 역시 사악한 것을 뜻하는 단어가 되고 말아서 '심리전'이라는 단어로 대체되기도 하였다. 사실 괴벨스가 버네이스의 열렬한 팬이라는 이유로 버네이스와 그의 프로파간다 기술에 대해 부정적 인식이 있지만[14] 버네이스 본인은 프로파간다는 사실에 기반하고 윤리적이어야한다고 그의 책에서 강조했었다. 물론 과테말라 정부 쿠데타는 문제였지만
그는 의뢰인과의 거래에서 솔직해야한다. 대중을 바보로 받들거나 속이는 일을 해서는 절대 안 된다. 만약 그런 평판을 얻게 되면 그의 직업 생명은 끝나고 만다. 선전 자료를 외부에 내보낼 때는 출처를 분명히 명시해야 한다. 언론사 편집자는 자료의 출처와 목적을 훤히 꿰고 있으면서 뉴스로서 가치가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자료를 받아들이거나 거절한다.


[1] 곡물상으로 성공한 미국의 유대인이며 심리학자 지그문트 프로이트의 아내인 마사 버네이스의 오빠이다. 참고로 일라이 버네이스와 지그문트 프로이트는 서로의 여동생과 결혼한 겹사돈이다.[2] 결혼 전 이름이며 결혼 후에는 안나 버네이스. 이름에서 보듯이 심리학자 지그문트 프로이트의 여동생이다.[3] 미국의 작가, 홍보담당, 페미니스트 운동가이며 남편 성을 따르지 않고 결혼 전 성을 유지하는 Lucy Stone League의 멤버로 결혼 후에도 Fleischmen 성을 유지했다.[4] Edward Bernays, 'Father of Public Relations' And Leader in Opinion Making, Dies at 103". 뉴욕타임즈. 1995-3-10.[5] Ewen, Stuart (1996). "Visiting Edward Bernays". PR! A Social History Of Spin. Basic Books. Archived from the original on September 5, 2008.[6] 그의 어머니는 프로이트의 여동생이고 아버지의 여동생(고모)은 프로이트와 결혼했다. 즉 지그문트 프로이트는 그의 외삼촌이자 고모부이다.[7] 예를 들자면 난방기구 판매회사의 경쟁자는 동료 난방기구 판매사가 아니라 실내복 판매사라는 것이다. 실내 온도가 높으면 실내복을 얇게 입어도 되기 때문에 둘은 일종의 대체재 성격을 띈다.[8] 지금도 이런 전통은 그대로라서, 우유+시리얼+과일주스 만으로 아침을 먹는 미국인들이 많다. 빵에 베이컨, 달걀, 과일, 커피 정도면 중산층 미국인 기준으론 제법 잘 차린 아침상이다.[9] 현재는 BAT(British American Tobacco)로 통합됨[10] 하와이를 집어먹은 Dole, 필리핀을 불구로 만든 델몬트와 더불어 플랜테이션과 정경유착으로 악명높은 기업으로 현재는 치키타로 개명하였다.[11] 처음에는 과테말라 정부에서도 정당한 값을 지불할 의향을 있었으나, 당연히 이권을 내놓기 싫었던 회사 측에서 터무니없이 높은 값을 불렀다. 물론, 무상몰수는 아니고, 회사가 탈세를 위해 후려친 값으로 유상몰수한 것이다.[12] 땅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경작하지 않은 이유는 따로 있었는데, 파나마병이 창궐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를 대비하느라 땅을 휴경지로 놀려두어야 했기 때문이다.[13] 이 나라의 쿠데타 실상을 보고 체 게바라는 미국에 대해 본격적인 환멸감을 키웠다고 한다.[14] 무협지로 이야기하자면 흑마술 혹은 마교 같은 이미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