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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돌프 히틀러 | 파울 요제프 괴벨스 | 루츠 그라프 슈베린 폰 크로지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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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d00,#d00><colcolor=#fff> 나치 독일 초대 국민계몽선전장관 | ||||
나치 독일 제2대 총리 파울 요제프 괴벨스 Paul Joseph Goebbels | ||||
| ||||
출생 | 1897년 10월 29일 | |||
독일 제국 라인란트 묀헨글라트바흐 라이트[1] | ||||
사망 | 1945년 5월 1일 (향년 47세) | |||
나치 독일 베를린 퓌러붕커 (現 독일 베를린 미테구 브란덴부르크문 요양원 앞마당) | ||||
묘소 | 없음[2] | |||
재임기간 | 초대 국민계몽선전장관 | |||
1933년 3월 14일 ~ 1945년 5월 1일 | ||||
제25대 국가수상 | ||||
1945년 4월 30일 ~ 5월 1일 | ||||
서명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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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 | 가톨릭 → 무종교 | |||
정당 | ||||
학력 | 본 대학교 (문학 / 중퇴) 뷔르츠부르크 대학교 (문학 / 중퇴) 프라이부르크 대학교 (문학 / 중퇴) 뮌헨 대학교 (문학 / 학사) 하이델베르크 대학교 대학원 (문학 / 박사[3]) | |||
부모 | 아버지 프리츠 괴벨스 어머니 카타리나 마리아 괴벨스 | |||
배우자 | 마그다 괴벨스(1901년 ~ 1945년, 1931년 결혼) | |||
자녀 | 딸 헬가 주자네 괴벨스 (1932년 ~ 1945년, 향년 13세) | |||
딸 힐데가르트 트라우델 "힐데" 괴벨스 (1934년 ~ 1945년, 향년 11세) | ||||
아들 헬무트 크리스티안 괴벨스 (1935년 ~ 1945년, 향년 10세) | ||||
딸 홀디네 카트린 "홀데" 괴벨스 (1937년 ~ 1945년, 향년 8세) | ||||
딸 헤트비히 요한나 "헤다" 괴벨스 (1938년 ~ 1945년, 향년 7세) | ||||
딸 하이드룬 엘리자베트 "하이데" 괴벨스 (1940년 ~ 1945년, 향년 5세) | ||||
의붓아들 하랄트 크반트[4] (1921년 ~ 1967년) |
|
파울 요제프 괴벨스의 타임지 표지 |
1. 개요
제2차 세계 대전 중 파울 요제프 괴벨스의 총력전 연설[5] |
Ich frage euch: Wollt ihr den totalen Krieg? 파울 요제프 괴벨스 |
나치 독일의 정치인으로, 베를린 관구장 및 중앙선전국장과 국회의원, 국민계몽선전부 장관을 역임하였다. 아돌프 히틀러의 가장 가까운 심복 중 한 명으로, 인문학 엘리트로서의 장점을 살려 주도면밀한 대중연설 능력을 통해 독일 국민들에게 극단적인 반유대주의를 설파하며 홀로코스트 등 나치의 여러 악행에 앞장선 인물이다. 그의 행적에 대한 평가와는 별개로, 그가 사용한 선전 · 선동 방식은 전후 세계의 정치와 언론에 큰 영향을 주었기에 프로파간다의 제왕으로 칭해지기도 한다.
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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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하십시오.3. 개인적인 특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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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관이 되고 나서는 다른 나치당 간부들만큼 흥청망청은 아니어도 꽤나 해먹었다. 우선 유대인 부호를 협박해서 땅을 헐값에 가로채고 괴링의 양해를 받아 산림 구역에서 법을 어기고 주건물 방 개수만 21개, 욕실만 5개짜리 별도의 영화관과 연회홀이 딸린 저택을 300만 라이히스마르크를 들여서 만들었다. 내부 장식도 가구나 식기는 물론이고 하나에 3만 마르크나 하는 루이 16세풍 양탄자를 까는 등 실내 장식에도 펑펑 써댔다. 물론 여기엔 재벌 출신인 마그다의 취향도 한 몫 했다. 이 대부분의 돈은 당연히 영화계의 뇌물이나 선전부 예산을 삥땅쳐서 빼돌렸다. 나치당 베를린 관구장 시절에도 상당수의 베를린 관구 당예산을 빼돌려서 소송비용이나 여자들을 만나고 다니는 데 썼다. 한가지 재밌는 여담으로 300만 마르크를 들인 이 저택에 아돌프 히틀러를 초대했는데 히틀러는 현관 앞에서 얼굴을 찌푸리며 총통 관저로 돌아가 버렸다. 그 이유는 괴벨스가 300만 마르크로 사치해서가 아니라 저택 현관에 걸린 그림이 히틀러의 기준으로 천박해서였다.[7]
독재정권의 관료답게(?) 자신의 권력을 이용한 행패도 마음껏 부렸는데, 그의 생애를 다룬 다큐멘터리에서는 '괴벨스는 캐스팅의 대가였다. 그가 섭외하지 못할 배우는 없었고, 그의 의사에 반하는 배우는 그 누구도 캐스팅될 수 없었다'라는 표현까지 나왔다. 여배우 아넬리스 어리그는 어느날 저녁 괴벨스의 제안으로 드라이브를 하게 됐는데, 괴벨스는 그녀를 근교의 한 방갈로로 데려갔고 그곳에서 '우리 관계를 좀더 진전시켜보자'고 제안했다. 벽난로가 불타는 방갈로에서 스타로 대성하게 해주겠다는 제안을 크게 화를 내면서 거절하는 아넬리스에게, 괴벨스는 "이 별장에 올 생각은 다시는 하지마라"고 외쳤고, 그 다음날 영화 촬영을 위해 스튜디오로 나온 아넬리스는 자신이 출연하는 영화의 제작이 갑자기 취소됐다는 통보를 받았다고 한다.
3.1. 이성 관계
주변에 여자들이 많았다. 이는 그가 피아노를 잘 다루었고, 화술과 매너가 좋았기 때문이다. 고등학생 시절에도 시골 여인 하나를 꼬셔서 사귄 적이 있다. 얀카 슈탈헤름이라는 부자집 따님과는 신분 차이로 헤어지지만 오랫동안 진지하게 사귀는 사이였고 엘제 얀케라는 유대인 초등학교 교사와도 나치당에 들어가고 베를린 관구장으로 가기 전까지도 헤어지지 않았다. 한때 나치당에 있음에도 결혼을 심각하게 고려했고 베를린 관구장으로 부임하고 피눈물을 흘리며 헤어질 정도. 베를린에 가서도 여자들이 끊이지 않았고 자주 바뀌었으며 아내 마그다와 결혼하던 시절에도 전 여자친구인 슈탈헤름과 양다리를 걸쳤으며 바쁜 와중에도 다른 여자들도 만났다. 권력을 잡은 뒤 선전장관이라는 직책상 배우들의 출세에 대해 최종권한을 쥐고 있었기 때문에 여배우들과 염문이 많았으며 그 문제가 불거져 정적이던 힘러는 "우리는 여직원을 농락하는 유대인 사장에 대해 비난해왔는데[8], 이제는 괴벨스 장관이 그 비난을 듣고 있다."는 말까지 했다. |
리다 바로바(Lida Baarova)(1914년 ~ 2000년) |
3.2. 마그다 괴벨스와 아이들
|
마그다 괴벨스 |
아무튼 젊은 나이에 이혼을 하고 하루하루를 무료하게 보내던 마그다는 심심풀이로 베를린 스포츠궁에서 열린 나치당 집회에 놀러갔다가 깊은 감명을 받고 그날 즉시 나치당에 입당한다. 재벌집 마나님 출신이면서도 매우 열렬한 당원으로 활동했으며 무급으로 베를린 나치당 사무실에서 자원봉사에 나섰고 이때 괴벨스를 만났다. 이미 이 시절엔 괴벨스는 국회의원도 되고 나치당 베를린 대관구장이 되어 있었지만, 출신 배경 차이란 게 있었기 때문에 괴벨스가 약간 꿇리는 감도 없지 않았다. 생부와 모친과 옛 시가인 크반트 가문까지 모두 결혼에 반대했지만 첫 아이를 밴 상태에서 조용하게 결혼했다. 이후 인맥과 영향력으로 괴벨스가 출세하는 데 큰 영향을 끼쳤다. 남편보다 더 열렬한 총통 추종자에다 히틀러도 마그다를 좋아했기 때문에 독신인 히틀러를 돕는 제3제국 퍼스트 레이디로 불릴 정도였다.
그녀는 영어, 프랑스어, 이탈리아어에 능통해서 외국어에 약한 괴벨스나 히틀러를 대신해서 외국 손님들을 접대하고 다리를 놓는 데도 안성맞춤이었다. 괴벨스가 한때 히틀러의 신임만 있을 뿐 권력층에 밀려나 찬밥이 되었을 때도 마그다에 대한 히틀러의 신임은 탄탄했다. 괴벨스가 리다 바로바와 바람이 났을 때는 괴벨스의 오른팔 선전부 차관이며 연하인 카를 항케와 맞바람을 피우며 이혼도 불사했으며 괴벨스는 괴벨스대로 아이들을 뺏겠다며 으름장을 부린다. 그러나 히틀러가 마그다를 달래며 "리다 바로바는 추방하고 마그다의 허락 없이는 괴벨스가 아이를 만날 수 없다. 1년만 그렇게 살아보고 정 안되겠으면 그때 이혼해라."는 조건을 내걸어 결국 남편과 재결합한다.
제3제국의 다산 정책을 몸소 실천해서 전 남편에게서 1남인 하랄트를, 괴벨스 사이에서 1남 5녀을 낳아 총 2남 5녀를 낳았다.
사진의 맨 오른쪽 공군 상사 비행복[12]을 입은 이는 아내 마그다가 전 남편과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 하랄트 크반트[13]로, 괴벨스는 그도 데려와서 의붓아들로 함께 키웠다.
태어난 순서는 헬가 (1932년 9월 1일), 힐데 (1934년 4월 13일), 헬무트 (1935년 10월 2일), 홀데 (1937년 2월 19일), 헤다 (1938년 5월 5일), 하이데 (1940년 10월 29일).
맏딸 헬가는 무척 영리하여 일찍부터 히틀러의 귀여움을 받았다. 참고로 전부 H로 시작하는 이름인데 일부 역사학자들은 아이들의 이름이 모두 아돌프 히틀러에 대한 헌사로 H로 시작한다고 주장하지만, 이를 뒷받침할 증거는 없다.[14] 헬가는 똑똑해서 괴벨스가 기대하며 아낀 반면 외아들 헬무트는 자주 공상에 빠져서 "남자애 혼자 여자 형제들 사이에 키워서 저러나?" 하고 괴벨스가 많이 걱정했다고 한다.
그리고 나치 독일의 패망 직전 총통벙커에서 그 아이들을 모조리 살해 후 자살한 사실이 유명하다. 아이들의 시신(그냥 잠자는 듯한 모습이지만 시신이다보니 거부감이 느껴질 수 있으니 클릭시 주의 요망) 괴벨스 가족의 시신은 소련군이 입수했는데 맏딸 헬가는 얼굴에 저항 흔적이 있었다고 한다. 영화 다운폴과 유사하게 예방 주사 놓는다고 SS 군의관을 시켜 모르핀을 투여하고, 자고 있을 때 부부가 직접 청산가리를 먹였다고 한다. 괴벨스는 아이들을 해치기 전에 망설였지만 마그다가 적극적으로 나섰는데, 그 이유가 총통 각하가 없는 세상은 살아갈 가치가 없다였다.[15] 마그다와 친한 알베르트 슈페어가 남긴 회고록을 제외하고는 마그다가 나서서 죽였다는 증언이 일치한다. 슈페어 회고록에선 총통 벙커에서 마지막으로 마그다와 인사할 때 괴벨스가 질투해서 둘만의 이야기 시간을 주지 않았다고 원망도 한다.
의붓아들인 하랄트 크반트는 전쟁 전 공군에 사병으로 입대, 부사관 시절 장교후보생을 지원해 공수부대 장교로 복무했다. 1941년 크레타 전투 때 부상당하기도 했고, 1944년에 이탈리아 전선에서 영국 육군의 포로가 되었기에 살아남았다. 최종 계급은 공군 중위였다. 마그다가 죽기 전 총통벙커에서 보낸 편지는 기적적으로 하랄트에게 전해졌다는 일화가 있다. 전후에는 크반트 가문으로 돌아가 사업가로 활동하다 1967년 비행기 사고로 사망한다. 친부자 관계는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얼굴이 은근히 괴벨스와 닮은게 특징. 의붓아버지와의 관계는 비교적 양호했던 것 같다. 여담으로 2014년 10월, 하랄트의 친족이자 BMW의 대주주인 요한나 크반트[16]가 독일 최고 부호 반열에 올랐다고 영국 일간지 타임스가 보도했다. 요한나 크반트와 그녀의 두 아들딸의 BMW 지분을 합하면 46.7%에 달하는데, 이에 따르면 크반트 일가의 재산은 245억 파운드(약 42조 2983억 원)에 달한다. #
4. 선거 이력
연도 | 선거 종류 | 선거구 | 소속 정당 | 득표수 (득표율) | 당선 여부 | 비고 |
1928 | 바이마르 공화국 총선 | 비례대표 (베를린 비례선거구)[17] | | 810,127 (2.6%) | 당선 (9위) | 초선 |
1930 | 바이마르 공화국 총선 | 6,379,672 (18.25%) | 당선 (2위) | 재선 | ||
1932.7 | 바이마르 공화국 총선 | 13,745,680 (37.27%) | 3선 | |||
1932.11 | 바이마르 공화국 총선 | 11,737,395 (33.09%) | 당선 (1위) | 4선 | ||
1933.3 | 바이마르 공화국 총선 | 17,277,180 (43.91%) | 5선 | |||
1933.11 | 나치 독일 총선 | 39,655,244 (92.11%) | 6선 | |||
1936 | 44,462,458 (98.8%) | 7선 | ||||
1938 | 48,751,587 (98.93%) | 8선[총리] |
5. 저작
괴벨스의 저작으로 가장 방대한 자료는 《괴벨스의 일기》다. 20대 중반(1923년)부터 거의 매일 꼼꼼하게 쓴 일기는 바이마르 공화국 시대와 나치 시대, 괴벨스와 히틀러 등 기타 나치 인사들을 연구하는데 결정적으로 중요한 1차 자료다. 일기 중에서도 사생활이나 시덥잖은 감상이나 적거나 몇달에 한번 대충 적으면서 사료로의 가치가 없는 일기도 많은데, 괴벨스 일기는 거의 매일 있었던 국사에 관한 중요 내용들을 빠지지 않고 모두 적어 사료서의 가치가 대단히 높다. 괴벨스의 인물평이나 당시 시대 여론이나 루머들이 솔직하게 적혀있다. 그렇지만 일기라고 해서 완전히 자신만의 생각을 쓴 것만은 아닌 게 나치 집권 후 출판사로부터 자신의 사후 20년 출판을 조건으로 막대한 선인세를 받고 팔았기에 히틀러나 나치 정권에 대해선 완전히 자기검열 없이 쓴 것이라곤 볼 수 없다. 어쨌거나 대전 종전 직후에 영어판이 발간될 정도로 관심이 높았으나, 문제는 2만 페이지가 넘는 엄청나게 방대한 양이었기 때문에 한권에 담는 것은 불가능했고 그리고 서방에 남아있는 괴벨스 일기는 불완전한 버전이라서 중요한 내용이 많이 빠져 있는데, 서방본 괴벨스 일기는 1939년 시점에서 독소 불가침 조약 체결과 2차 대전 개전을 비롯한 핵심적인 순간이 모조리 빠져 있다. 이후 1970년대에 영역본으로 1939-1941년본, 1942-1943년 본, 1945년본 총 3권이 출간되었으나 1939년 이전은 출간도 안했고, 빈장이 많아서 한계가 있다. 이후 독일이 통일되고 나서야 동독에 보관되어 있던 완전한 일기가 입수되어 90년대부터 독일에서 완전판이 출간되었는데, 그 방대한 양 때문에 1 ~ 2년 또는 2 ~ 3년 정도의 양으로 나눠서 출판했다.[19]저작으론 몇 차례의 개작을 거친 반(半) 자전적 소설 《미하엘》이 있다. 자전적 소설이 아닌 반 자전적 소설인 것은 자신의 절친한 친구였던 리하르트 플리스게스(Richard Flisges)가 노동자로 일하다 광산에서 사고사하자 그를 기리기 위해 집필했기 때문이다. 주인공 미하엘 포어만(Michael Vormann)은 현실의 친구 플리스게스와 파울 요제프 괴벨스 자신을 투영하여 암울한 환경에서 새로운 시대를 갈망하는 내용이다. 저자 본인부터가 그다지 좋은 작품은 아니었던 것으로 평했지만, 히틀러의 《나의 투쟁》처럼 집권 후 불티나게 팔려서 10쇄를 넘게 찍어냈다. 대한민국에도 2017년 4월에 번역, 출간 되었다.
그 밖에 베를린 관구장 시절 공산당이 집회 때, 연극을 이용하는 걸 따라한답시고 정치적인 희곡을 몇 편 썼지만 역시 평은 좋지 않다. 나치당 입당 하기 전 실업자일 때, 언론사에 발표한 논문이 6편 정도가 남아있다고 한다.
사람들이 가장 궁금해 하는 나치당 시절 정치적으로 쓴 글 모음. (영문판) 1920년대 ~ 1933년, 1933년~1945년.
6. 어록
|
당원들에게 연설하는 파울 요제프 괴벨스 장관[20] |
본문 항목에 소개되지 않은 단편적인 문구와 어록, 연설문. ※주의: 이 어록들 중에는 실제로 괴벨스가 하지 않았음에도 유명한 어록들도 많다. (출처 필수) |
"내가 이렇게 과장된 반유대주의를 싫어한다는 것을 너도 알 거야.(...) 유대인이 내게 절친한 친구라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욕설이나 편 가르기, 아니면 심지어 박해를 해서 그들을 없앨 수는 없다는 말이야. 만일 이런 식으로 그들을 없앨 수 있다고 해도 그것은 아주 천박하고 비인간적인 일이야."
1919년 2월 17일 연인 안카 슈탈헤름에게 한 의미심장한 말[출처]
1919년 2월 17일 연인 안카 슈탈헤름에게 한 의미심장한 말[출처]
Wenn unsere Gegner sagen: Ja, wir haben Euch doch früher die Freiheit der Meinung zugebilligt, ja, Ihr uns, das ist doch kein Beweis, daß wir das Euch auch tuen sollen! Daß Ihr das uns gegeben habt, das ist ja ein Beweis dafür, wie dumm Ihr seid!"
우리의 상대가 "그래, 전에 우리는 당신에게 표현의 자유를 보장해주었잖아"라고 한다면 이렇게 말할 것이다. "그래, 당신들이 우리에게 그렇게 했지! 하지만 그건 우리가 당신들에게도 그렇게 해야한다는 증거가 아냐! 당신들이 멍청하다는 증거일 뿐!"
1935년 12월 4일 연설.
우리의 상대가 "그래, 전에 우리는 당신에게 표현의 자유를 보장해주었잖아"라고 한다면 이렇게 말할 것이다. "그래, 당신들이 우리에게 그렇게 했지! 하지만 그건 우리가 당신들에게도 그렇게 해야한다는 증거가 아냐! 당신들이 멍청하다는 증거일 뿐!"
1935년 12월 4일 연설.
선전은 본질상 일종의 예술이다. 그리고 선전원은 엄밀한 단어상 의미에 있어 민중 심리 예술가라고 볼 수 있다. 선전원의 가장 중요한 임무는 매일 매 시간 민중의 맥박 소리에 귀 기울이고 어떻게 맥박이 뛰는지 듣는 것이다. 그리고 그 맥박의 박자에 맞추어 조치를 취하는 것이다.
1935년
1935년
이 얼마나 이상한 민족입니까! 다른 민족이라면 저항하기 위해 대중들이 봉기했을 겁니다. 가련한 독일! 상놈의 나라! 불량한 나라! 유대인들이 누구보다도 정확하게 우리를 평가했습니다!
1928년, 베를린 거리 연설.
1928년, 베를린 거리 연설.
Im Uebrigen muss man feststellen, dass was diese Herren auf propagandistisch-politischem Gebiet in den vergangenen 14 Jahren geleistet haben, dass ist eine wahre Stuemperarbeit gewesen.
바이마르 공화국 신사분들의 지난 14년간 프로파간다 정치부문에서의 성과는 참으로 서툴렀습니다.
Wenn obschon sie alle oeffentlichen Mittel fuer sich in Anspruch nahmen, haben sie nichts anderes zuwege gebracht, als dass sie jetzt ueber politische Machtwirkung ueberhaupt nicht mehr in Frage kommen. Die nationalsozialistische Bewegung wird ihnen nun zeigen, wie sie es eigentlich haetten machen sollen.
언론에 대한 통제 권한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고작 한 것은 새로운 정치기반을 다지는데 아무쓸모없는 정치 스캔들을 감추는 것이었으니 말입니다. 이제 국가사회주의 운동이 이들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 제대로 보여줄 것입니다.
Man muss naemlich gut regieren, und mit einer guten Regierung auch eine gute Propaganda betreiben. Das eine gehoert zum anderen. Eine gute Regierung ohne Propaganda kann ebensowenig bestehen wie eine gute Propaganda ohne eine gute Regierung. Beide muessen sich einander ergaenzen.
좋은 통치가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좋은 프로파간다 정책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이 둘은 서로 때어놓을 수 없습니다. 좋은 프로파간다 정책이 없는 좋은 정부는 좋은 프로파간다 정책을 펼치는 좋지 못한 정부보다 오래 버틸 수 없습니다.
Und wenn die jüdischen Zeitungen heute noch glauben, durch versteckte Drohungen die nationalsozialiste Bewegung einschüchtern zu können, wenn sie heute glauben, unsere Notverordnungen umgehen zu dürfen, sie sollen sich hüten! Einmal wird unsere Geduld zu Ende sein, und dann wird den Juden das freche Lügenmaul gestopft werden.
그리고 아직도 유대 언론들이 국가사회주의 운동을 위협할 수 있고 우리의 방어 조치를 회피할 수 있을것이라고 생각한다면, 그들은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언젠가 우리의 인내심도 바닥날 것이고, 유대인들의 거짓되고 건방진 주둥이를 닥치게 할 것입니다!
(중략)
Im Uebrigen koennen unsere SA Maenner und Parteigenossen auch darueber beruhigt sein, dass eher als wir alle denken die Stunde des Endes des Roten Terrors gekommen sein wird.
SA와 당원동지 여러분! 빨갱이들에 대해 더 이상 걱정하지 마십시오! 적색 테러단의 끝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Es wird auch der sozialistischen Presse nicht gelingen die Dinge ins Gegenteil umzuluegen, Wenn die Rote Fahne, in tuepischer Juedischen Frechheit wagt zu behaupten, dass unser Kamerad Maikowski und der Polizeiwachtmeister Zauritz von unseren eigenen Kameraden erschossen worden ist.
그 누가 볼셰비키 언론들이 유대인의 오만한 기사단인 적색 전선이 우리의 동지인 마이코프스키와 경찰관 자우리츠를 쏘아죽였을때 감히 우리 손으로 죽였다고 거짓말을 떠들어댄 것을 부정하겠습니까? [22]
so muss ich sagen, diese Juedische Frechheit hat laenger gelebt als sie in Zukunft noch leben wird. Und wir werden den Herren vom Karl-Liebknecht-Haus bald Töne beibringen, die sie noch niemals vernommen haben.
이 오만불손한 유대인 놈들의 지금까지 산 날이 앞으로 살 날보다 많을 것이며 그리고 곧 카를 리프크네히트의 당원 놈들을 평생 잊지 못할 만큼 두들겨 패 줄 것입니다!
1933년 2월 10일 나치당 집회 개최사[23]
바이마르 공화국 신사분들의 지난 14년간 프로파간다 정치부문에서의 성과는 참으로 서툴렀습니다.
Wenn obschon sie alle oeffentlichen Mittel fuer sich in Anspruch nahmen, haben sie nichts anderes zuwege gebracht, als dass sie jetzt ueber politische Machtwirkung ueberhaupt nicht mehr in Frage kommen. Die nationalsozialistische Bewegung wird ihnen nun zeigen, wie sie es eigentlich haetten machen sollen.
언론에 대한 통제 권한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고작 한 것은 새로운 정치기반을 다지는데 아무쓸모없는 정치 스캔들을 감추는 것이었으니 말입니다. 이제 국가사회주의 운동이 이들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 제대로 보여줄 것입니다.
Man muss naemlich gut regieren, und mit einer guten Regierung auch eine gute Propaganda betreiben. Das eine gehoert zum anderen. Eine gute Regierung ohne Propaganda kann ebensowenig bestehen wie eine gute Propaganda ohne eine gute Regierung. Beide muessen sich einander ergaenzen.
좋은 통치가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좋은 프로파간다 정책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이 둘은 서로 때어놓을 수 없습니다. 좋은 프로파간다 정책이 없는 좋은 정부는 좋은 프로파간다 정책을 펼치는 좋지 못한 정부보다 오래 버틸 수 없습니다.
Und wenn die jüdischen Zeitungen heute noch glauben, durch versteckte Drohungen die nationalsozialiste Bewegung einschüchtern zu können, wenn sie heute glauben, unsere Notverordnungen umgehen zu dürfen, sie sollen sich hüten! Einmal wird unsere Geduld zu Ende sein, und dann wird den Juden das freche Lügenmaul gestopft werden.
그리고 아직도 유대 언론들이 국가사회주의 운동을 위협할 수 있고 우리의 방어 조치를 회피할 수 있을것이라고 생각한다면, 그들은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언젠가 우리의 인내심도 바닥날 것이고, 유대인들의 거짓되고 건방진 주둥이를 닥치게 할 것입니다!
(중략)
Im Uebrigen koennen unsere SA Maenner und Parteigenossen auch darueber beruhigt sein, dass eher als wir alle denken die Stunde des Endes des Roten Terrors gekommen sein wird.
SA와 당원동지 여러분! 빨갱이들에 대해 더 이상 걱정하지 마십시오! 적색 테러단의 끝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Es wird auch der sozialistischen Presse nicht gelingen die Dinge ins Gegenteil umzuluegen, Wenn die Rote Fahne, in tuepischer Juedischen Frechheit wagt zu behaupten, dass unser Kamerad Maikowski und der Polizeiwachtmeister Zauritz von unseren eigenen Kameraden erschossen worden ist.
그 누가 볼셰비키 언론들이 유대인의 오만한 기사단인 적색 전선이 우리의 동지인 마이코프스키와 경찰관 자우리츠를 쏘아죽였을때 감히 우리 손으로 죽였다고 거짓말을 떠들어댄 것을 부정하겠습니까? [22]
so muss ich sagen, diese Juedische Frechheit hat laenger gelebt als sie in Zukunft noch leben wird. Und wir werden den Herren vom Karl-Liebknecht-Haus bald Töne beibringen, die sie noch niemals vernommen haben.
이 오만불손한 유대인 놈들의 지금까지 산 날이 앞으로 살 날보다 많을 것이며 그리고 곧 카를 리프크네히트의 당원 놈들을 평생 잊지 못할 만큼 두들겨 패 줄 것입니다!
1933년 2월 10일 나치당 집회 개최사[23]
Wir werden als die größten Staatsmänner aller Zeiten in die Geschichte eingehen oder als ihre größten Verbrecher
우리는 역대 가장 위대한 정치인으로 역사에 남을 것이다. 아니면 역사상 가장 악랄한 범죄자로.
1944년 초 총통 본부로 향하는 기차에서 만난 루돌프 딜스에게[25] 흔히 괴벨스가 2차대전이 일어난 날 일기장에 적었다고 잘못 알려져있다.#
우리는 역대 가장 위대한 정치인으로 역사에 남을 것이다. 아니면 역사상 가장 악랄한 범죄자로.
1944년 초 총통 본부로 향하는 기차에서 만난 루돌프 딜스에게[25] 흔히 괴벨스가 2차대전이 일어난 날 일기장에 적었다고 잘못 알려져있다.#
Fahrt durch das Ghetto. Wir steigen aus und besichtigen alles eingehend. Es ist unbeschreiblich. Das sind keine Menschen mehr, das sind Tiere. Das ist deshalb auch keine humanitäre, sondern eine chirurgische Aufgabe. Man muß hier Schnitte tuen, und zwar ganz radikale. Sonst geht Europa einmal an der jüdischen Krankheit zugrunde. Fahrt über polnische Straßen. Das ist schon Asien. Wir werden viel zu tuen haben, um dieses Gebiet zu germanisieren.
게토를 가로질러 차를 몰았다. 우리는 차에서 내려 모든 것을 상세하게 둘러보았다. 무엇이라 형용할 수가 없다. 인간은 하나도 없으며 짐승들 뿐이다. 때문에 이것은 인도적인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단지 외과적인 차원의 문제이다. 칼로 절단을 하되 아주 사정 없이 잘라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유럽은 결국 유대인 질병 때문에 멸망할 것이다. 폴란드의 도로를 달렸다. 이미 여기는 아시아다. 우리는 이 지역을 게르만화하기 위해 많은 일을 해야 한다.
1939년 11월 2일 폴란드 로츠에 대한 시찰을 다녀온 이후 작성한 자신의 일기 중[26]#
게토를 가로질러 차를 몰았다. 우리는 차에서 내려 모든 것을 상세하게 둘러보았다. 무엇이라 형용할 수가 없다. 인간은 하나도 없으며 짐승들 뿐이다. 때문에 이것은 인도적인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단지 외과적인 차원의 문제이다. 칼로 절단을 하되 아주 사정 없이 잘라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유럽은 결국 유대인 질병 때문에 멸망할 것이다. 폴란드의 도로를 달렸다. 이미 여기는 아시아다. 우리는 이 지역을 게르만화하기 위해 많은 일을 해야 한다.
1939년 11월 2일 폴란드 로츠에 대한 시찰을 다녀온 이후 작성한 자신의 일기 중[26]#
Aus dem Generalgouvernement werden jetzt, bei Lublin beginnend, die Juden nach dem Osten abgeschoben. Es wird hier ein ziemlich barbarisches und nicht näher zu beschreibendes Verfahren angewandt, und von den Juden selbst bleibt nicht mehr viel übrig. […] An den Juden wird ein Strafgericht vollzogen, das zwar barbarisch ist, das sie aber vollauf verdient haben. Die Prophezeiung, die der Führer ihnen für die Herbeiführung eines neuen Weltkrieges mit auf den Weg gegeben hat, beginnt sich in der furchtbarsten Weise zu verwirklichen.
유대인들은 이제 총독부에서 루블린을 시작으로 동부로 추방되고 있다. 여기에는 더 자세히 설명할 수 없는 상당히 야만적인 과정이 사용되고 있으며, 유대인들 자신의 모습은 별로 남지 않았다. [...] 유대인들에 대한 형사 판결이 내려지고 있는데, 이는 야만적이지만 그들에게는 마땅한 일이다. 새로운 세계대전을 일으키겠다는 퓌러의 예언이 가장 끔찍한 방식으로 실현되기 시작했다.
1942년 3월 27일 개인 일기
유대인들은 이제 총독부에서 루블린을 시작으로 동부로 추방되고 있다. 여기에는 더 자세히 설명할 수 없는 상당히 야만적인 과정이 사용되고 있으며, 유대인들 자신의 모습은 별로 남지 않았다. [...] 유대인들에 대한 형사 판결이 내려지고 있는데, 이는 야만적이지만 그들에게는 마땅한 일이다. 새로운 세계대전을 일으키겠다는 퓌러의 예언이 가장 끔찍한 방식으로 실현되기 시작했다.
1942년 3월 27일 개인 일기
Wir dürfen uns die Propaganda im Kriege nicht zu einfach vorstellen. Es ist nicht damit getan, daß man nur große Siege an das Volk weitergibt; man muß auch zu gewissen Zeiten versuchen, aus kleinen Einzelsteinchen ein großes und imponierendes Mosaikbild zusammenzustellen. Das erste ist zwar leicht und einfach, das zweite aber zeugt von der Güte und von der Höhe einer überlegen geführten Propaganda.
전시 선전을 너무 단순하게 생각해서는 안 된다. 위대한 승리를 국민에게 전달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어떤 시점에는 작은 조각들을 모아 크고 인상적인 모자이크 그림을 만들어내려고 노력해야 한다. 전자는 쉽고 간단하지만, 후자는 우수한 선전이 얼마나 수준 높은지를 보여준다.
Genauso, wie es für einen Staatsanwalt einfacher ist, wenn der Angeklagte gleich ein Geständnis ablegt, als gegen ihn den Indizienbeweis zu führen, genauso ist es für einen Propagandafachmann einfacher, mit einem Schlage niederschmetternde Tatsachen zu übermitteln, als durch eine Unsumme von kleinen Einzelzügen ein Gesamtbild zu entwerfen
마치 검사가 피고인이 즉시 자백하는 것이 더 쉽다고 느끼는 것처럼, 간접 증거를 통해 유죄를 입증하는 것보다 훨씬 간단하다. 마찬가지로, 선전 전문가는 단번에 충격적인 사실을 전달하는 것이 수많은 작은 개별적인 특징들을 통해 전체적인 그림을 그리는 것보다 훨씬 쉽다
1941년 7월 24일 개인 일기장에 전시 선전 기술에 대해 논하며#
전시 선전을 너무 단순하게 생각해서는 안 된다. 위대한 승리를 국민에게 전달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어떤 시점에는 작은 조각들을 모아 크고 인상적인 모자이크 그림을 만들어내려고 노력해야 한다. 전자는 쉽고 간단하지만, 후자는 우수한 선전이 얼마나 수준 높은지를 보여준다.
Genauso, wie es für einen Staatsanwalt einfacher ist, wenn der Angeklagte gleich ein Geständnis ablegt, als gegen ihn den Indizienbeweis zu führen, genauso ist es für einen Propagandafachmann einfacher, mit einem Schlage niederschmetternde Tatsachen zu übermitteln, als durch eine Unsumme von kleinen Einzelzügen ein Gesamtbild zu entwerfen
마치 검사가 피고인이 즉시 자백하는 것이 더 쉽다고 느끼는 것처럼, 간접 증거를 통해 유죄를 입증하는 것보다 훨씬 간단하다. 마찬가지로, 선전 전문가는 단번에 충격적인 사실을 전달하는 것이 수많은 작은 개별적인 특징들을 통해 전체적인 그림을 그리는 것보다 훨씬 쉽다
1941년 7월 24일 개인 일기장에 전시 선전 기술에 대해 논하며#
Gegen die ständigen Sorgen ist die Arbeit das beste Heilmittel. Ich beginne deshalb am späten Nachmittag meine Rede für den Sportpalast zu diktieren, die ich bis in den späten Abend hinein korrigiert vorliegen habe. Ich glaube, daß sie sehr gut gelungen ist.
끊임없는 걱정에 맞서는 가장 좋은 약은 바로 일이다. 그래서 나는 늦은 오후에 스포츠팔라스트 연설을 받아 적기 시작했고, 늦은 저녁까지 교정을 마쳤다. 나는 이 연설이 매우 잘 완성되었다고 생각한다.
Vielleicht wird sie sogar eine Meisterleistung meiner bisherigen Redetätigkeit überhaupt sein. Wir können eine solche Rede auch für die öffentliche Stimmung sehr gut gebrauchen. Es ist wiederum notwendig geworden, dem deutschen Volke eine Aufmunterung zu geben.
아마도 이 연설은 지금까지 내가 한 연설 중 최고의 걸작이 될지도 모른다. 우리는 이러한 연설을 대중의 분위기를 위해서도 매우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다. 다시금 독일 국민에게 격려를 주는 일이 필요하게 되었다.
1943년 2월 15일 일기 중 #
끊임없는 걱정에 맞서는 가장 좋은 약은 바로 일이다. 그래서 나는 늦은 오후에 스포츠팔라스트 연설을 받아 적기 시작했고, 늦은 저녁까지 교정을 마쳤다. 나는 이 연설이 매우 잘 완성되었다고 생각한다.
Vielleicht wird sie sogar eine Meisterleistung meiner bisherigen Redetätigkeit überhaupt sein. Wir können eine solche Rede auch für die öffentliche Stimmung sehr gut gebrauchen. Es ist wiederum notwendig geworden, dem deutschen Volke eine Aufmunterung zu geben.
아마도 이 연설은 지금까지 내가 한 연설 중 최고의 걸작이 될지도 모른다. 우리는 이러한 연설을 대중의 분위기를 위해서도 매우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다. 다시금 독일 국민에게 격려를 주는 일이 필요하게 되었다.
1943년 2월 15일 일기 중 #
독일 선전방송 Die Deutsche Wochenschau의 1943년 2월 25일 651호 방영 일부 번역본[27] |
Ich frage euch: Wollt ihr den totalen Krieg? Wollt ihr ihn, wenn nötig, totaler und radikaler, als wir ihn uns heute überhaupt noch vorstellen können?
묻겠다, 제군은 총력전을 원하는가? 만약 필요하다면, 상상할 수 있는 것 이상의 완전하고 전면적인 전쟁을 원하는가?
Ich frage euch: Seid ihr bereit, mit dem Führer als Phalanx der Heimat hinter der kämpfenden Wehrmacht stehend diesen Kampf mit wilder Entschlossenheit und unbeirrt durch alle Schicksalsfügungen fortzusetzen, bis der Sieg in unseren Händen ist?
묻겠다. 제군은 이 땅(조국)의 군단으로써, 투쟁의 국방군을 총통과 함께 뒷받침하며, 어떠한 운명의 결과에도 굴하지 않고 결연한 의지로 우리가 승리를 거머쥘 때까지, 이 투쟁을 해나갈 준비가 되었는가?
Nun, Volk, steh auf, und Sturm, brich los!
지금이야말로, 국민들이여, 일어나라! 폭풍이여, 떨쳐 나가라!
1943년 2월 18일 총력전 연설.
묻겠다, 제군은 총력전을 원하는가? 만약 필요하다면, 상상할 수 있는 것 이상의 완전하고 전면적인 전쟁을 원하는가?
Ich frage euch: Seid ihr bereit, mit dem Führer als Phalanx der Heimat hinter der kämpfenden Wehrmacht stehend diesen Kampf mit wilder Entschlossenheit und unbeirrt durch alle Schicksalsfügungen fortzusetzen, bis der Sieg in unseren Händen ist?
묻겠다. 제군은 이 땅(조국)의 군단으로써, 투쟁의 국방군을 총통과 함께 뒷받침하며, 어떠한 운명의 결과에도 굴하지 않고 결연한 의지로 우리가 승리를 거머쥘 때까지, 이 투쟁을 해나갈 준비가 되었는가?
Nun, Volk, steh auf, und Sturm, brich los!
지금이야말로, 국민들이여, 일어나라! 폭풍이여, 떨쳐 나가라!
1943년 2월 18일 총력전 연설.
Wohl kaum ist während des ganzen Krieges in Deutschland eine Rede gehalten worden, die so lebhaft über den ganzen Erdball zitiert und kommentiert wird wie diese Sportpalastrede vom 18. Februar. Sie beherrscht immer noch die Schlagzeilen der großen Blätter in allen Ländern der Erde. [. . .]
전쟁 기간 통틀어 2월 18일 스포츠팔라스트에서 열린 연설만큼 세계에서 가장 많이 인용되고 있는 연설은 없을 것이다. 아직도 연설이 전 세계 신문 1면을 장식하고 있다.
Die Wirkung im Inland ist enorm. Ich entnehme das einem zusammenfassenden Bericht der Reichspropagandaämter, der außerordentlich positiv ist. Die deutsche Presse hat die Rede großartig aufgemacht und dazu sehr wirksame Kommentare geschrieben.
국내에서의 효과는 엄청나다. 선전부(Reichspropagandaämter)의 종합 보고서에서 확인했는데, 그 내용은 매우 긍정적이다. 독일 언론은 연설을 대대적으로 보도했고, 이에 대한 매우 효과적인 논평도 덧붙였다.[...]
Alles in allem genommen, kann man feststellen, daß die Rede hundertprozentig ihren Zweck erreicht hat. Ich kann Uber diesen propagandistischen Erfolg außerordentlich glücklich sein. Wenn der Kampf gegen den Bolschewismus einen geistigen Boden haben mußte, so hat er ihn hier bekommen.
종합적으로 보면, 이 연설은 100% 그 목적을 달성했다고 말할 수 있다. 나는 이 선전적 성공에 대해 매우 기쁘게 생각한다. 만약 볼셰비즘과의 투쟁이 정신적 기반을 필요로 했다면, 이번 연설이 그 기반을 마련해주었다.
1943년 2월 21일자 자신의 일기에 적은 총력전 연설에 대한 평가#
전쟁 기간 통틀어 2월 18일 스포츠팔라스트에서 열린 연설만큼 세계에서 가장 많이 인용되고 있는 연설은 없을 것이다. 아직도 연설이 전 세계 신문 1면을 장식하고 있다.
Die Wirkung im Inland ist enorm. Ich entnehme das einem zusammenfassenden Bericht der Reichspropagandaämter, der außerordentlich positiv ist. Die deutsche Presse hat die Rede großartig aufgemacht und dazu sehr wirksame Kommentare geschrieben.
국내에서의 효과는 엄청나다. 선전부(Reichspropagandaämter)의 종합 보고서에서 확인했는데, 그 내용은 매우 긍정적이다. 독일 언론은 연설을 대대적으로 보도했고, 이에 대한 매우 효과적인 논평도 덧붙였다.[...]
Alles in allem genommen, kann man feststellen, daß die Rede hundertprozentig ihren Zweck erreicht hat. Ich kann Uber diesen propagandistischen Erfolg außerordentlich glücklich sein. Wenn der Kampf gegen den Bolschewismus einen geistigen Boden haben mußte, so hat er ihn hier bekommen.
종합적으로 보면, 이 연설은 100% 그 목적을 달성했다고 말할 수 있다. 나는 이 선전적 성공에 대해 매우 기쁘게 생각한다. 만약 볼셰비즘과의 투쟁이 정신적 기반을 필요로 했다면, 이번 연설이 그 기반을 마련해주었다.
1943년 2월 21일자 자신의 일기에 적은 총력전 연설에 대한 평가#
빌헬름 2세는 패배한 체제의 상징적 인물이다. 그가 최선을 다했던 것은 인정하지만, 이 세계에서 중요한 것은 의도가 아니라 성공적인 결과다.
빌헬름 2세의 사망 이후 독일 언론에 내린 보도지침.
빌헬름 2세의 사망 이후 독일 언론에 내린 보도지침.
괴벨스 최후의 연설 |
베를린 수비대여! 제군의 아내, 어머니 그리고 아이들이 제군을 지켜보고 있다. 제군에게 그들의 인생, 운, 신변 그리고 미래가 달려있다. 제군이 제군의 임무를 잘 알고 있기에 나는 제군이 그 임무를 매우 훌륭히 수행할 것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진실의 시간이 마침내 도래했다. (중략)
나는 내 선전부 직원들과 베를린에 남을 것을 확언한다. 나의 아내와 아이들도 베를린에 있고 그들은 베를린에 남을 것이다. 나는 제국 수도에 대한 필요한 모든 조치를 실시할 것이다. 나의 행동과 생각은 전적으로 국민들의 삶과 우리의 공통 적에 대한 방어를 위한 것이다. 우리 수도의 방어벽에 몽골의 폭풍은 반드시 부서질 것이다. 수도에서의 우리의 싸움은 국가의 향방을 결정짓는 결정적 전투가 될 것이다. 열성적인 수비대는 볼셰비키 놈들의 손에 제국의 수도가 함락되지 않게 해줄 것이다. 우리는 전투와 과업 앞에 굳건히 서있다. 우리의 목표는 국민의 자유와 다가오는 행복한 미래를 위한 제국의 사회 정의를 세우는 것이다.
1945년 4월 21일 괴벨스 최후의 대국민 연설. 라디오 연설 중간 중간에 간간히 포성을 들을 수 있다.
나는 내 선전부 직원들과 베를린에 남을 것을 확언한다. 나의 아내와 아이들도 베를린에 있고 그들은 베를린에 남을 것이다. 나는 제국 수도에 대한 필요한 모든 조치를 실시할 것이다. 나의 행동과 생각은 전적으로 국민들의 삶과 우리의 공통 적에 대한 방어를 위한 것이다. 우리 수도의 방어벽에 몽골의 폭풍은 반드시 부서질 것이다. 수도에서의 우리의 싸움은 국가의 향방을 결정짓는 결정적 전투가 될 것이다. 열성적인 수비대는 볼셰비키 놈들의 손에 제국의 수도가 함락되지 않게 해줄 것이다. 우리는 전투와 과업 앞에 굳건히 서있다. 우리의 목표는 국민의 자유와 다가오는 행복한 미래를 위한 제국의 사회 정의를 세우는 것이다.
1945년 4월 21일 괴벨스 최후의 대국민 연설. 라디오 연설 중간 중간에 간간히 포성을 들을 수 있다.
6.1. 그의 말로 잘못 알려진 것들
선동은 문장 한 줄로도 가능하지만 그것을 반박하려면 수십 장의 문서와 증거가 필요하다. 그리고 그것을 반박하려고 할 때면 사람들은 이미 선동당해 있다.
실제로 괴벨스가 이런 말을 했다는 증거는 찾을 수 없으나 그의 대표적인 어록으로 유명하다.[28] 괴벨스는 영국인들이 그런 뻔뻔한 거짓말의 문화를 가지고 있다면서 비판하는 글을 썼는데 그 글이 영문으로 인용되면서 괴벨스의 생각인 것처럼 알려졌다. [29] 내용상 비슷한 말로는 이탈리아의 프로그래머 알베르토 브란돌리니가 2013년에 공표한 '개소리 비대칭성 원리(Bullshit asymmetry principle)'가 있다. #
실제로 괴벨스가 이런 말을 했다는 증거는 찾을 수 없으나 그의 대표적인 어록으로 유명하다.[28] 괴벨스는 영국인들이 그런 뻔뻔한 거짓말의 문화를 가지고 있다면서 비판하는 글을 썼는데 그 글이 영문으로 인용되면서 괴벨스의 생각인 것처럼 알려졌다. [29] 내용상 비슷한 말로는 이탈리아의 프로그래머 알베르토 브란돌리니가 2013년에 공표한 '개소리 비대칭성 원리(Bullshit asymmetry principle)'가 있다. #
나에게 한 문장만 달라. 그러면 누구든지 범죄자로 만들 수 있다.
출처 불명의 가짜 어록이나, 괴벨스의 어록으로 자주 인용된다.
출처 불명의 가짜 어록이나, 괴벨스의 어록으로 자주 인용된다.
100%의 거짓말보다는 99%의 거짓말과 1%의 진실의 배합이 더 나은 효과를 보여준다.
괴벨스의 어록이라 하여 국내 언론에서 무수히 많이 등장하지만 출처는 없고, 외국에서는 이 말 자체가 사용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국내의 누군가가 괴벨스의 명의를 도용한 것으로 보인다. 출판사가 마케팅 문구로 사용했을 가능성이 크다. 앞에서도 강조되었지만 괴벨스는 선전을 진실과 진리를 다루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괴벨스의 어록이라 하여 국내 언론에서 무수히 많이 등장하지만 출처는 없고, 외국에서는 이 말 자체가 사용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국내의 누군가가 괴벨스의 명의를 도용한 것으로 보인다. 출판사가 마케팅 문구로 사용했을 가능성이 크다. 앞에서도 강조되었지만 괴벨스는 선전을 진실과 진리를 다루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Das wird immer einer der besten Witze der Demokratie bleiben, daß sie ihren Todfeinden die Mittel selber stellte, durch die sie vernichtet wurde.
민주주의가 철천지 원수에게 자신을 파멸시킬 방법을 손수 알려주었다는 이야기는 아마도 민주주의를 비꼬는 풍자 중 가장 뛰어난 것이 될 것이다.[30]
괴벨스가 발간한 나치당 관보인 'Der Angriff'에 실린 탓에 괴벨스의 것이라고 흔히 착각되지만 1935년 당시 편집장이었던 한스 슈바르츠 반 베르크(Hans Schwarz van Berk)가 1927년부터 1930년까지의 괴벨스 기고글을 모은 '공격: 투쟁기의 논문들' 2장 서문에 적어둔 글이다.#
민주주의가 철천지 원수에게 자신을 파멸시킬 방법을 손수 알려주었다는 이야기는 아마도 민주주의를 비꼬는 풍자 중 가장 뛰어난 것이 될 것이다.[30]
괴벨스가 발간한 나치당 관보인 'Der Angriff'에 실린 탓에 괴벨스의 것이라고 흔히 착각되지만 1935년 당시 편집장이었던 한스 슈바르츠 반 베르크(Hans Schwarz van Berk)가 1927년부터 1930년까지의 괴벨스 기고글을 모은 '공격: 투쟁기의 논문들' 2장 서문에 적어둔 글이다.#
당신이 거짓말을 자주 하면 할수록 대중들은 그것을 믿게 되며 마침내 자기 자신도 믿게 된다.
거짓말은 처음에는 부정되고 그 다음에는 의심받지만 되풀이하면 결국 모든 사람이 믿게 된다.
이외에도 다양한 버전이 등장하지만 괴벨스가 실제로 하지 않은 말이다. 미국 의회에서 발행한 서적 중 1958년 발행된 부분에서 처음 나온 말이며, 이것은 수십만 페이지의 웹사이트에 출처 없이 유포되고 있는 그에 대한 가장 큰 거짓말이다.
괴벨스는 언제나 선전이 진실되어야 한다고 주장했고[31] 그의 연설과 작문, 개인적 일기 어느 곳에서도 위와 같은 발언을 찾을 수 없다. 아무런 근거가 없는 거짓말임에도, 이것은 대중들에게 끊임없이 반복되어 선전되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것을 믿게 되었다. 즉, 괴벨스의 가짜 어록을 퍼뜨린 사람은 다소 기괴한 방식으로 자기 주장이 옳음을 증명한 것이다.
거짓말은 처음에는 부정되고 그 다음에는 의심받지만 되풀이하면 결국 모든 사람이 믿게 된다.
이외에도 다양한 버전이 등장하지만 괴벨스가 실제로 하지 않은 말이다. 미국 의회에서 발행한 서적 중 1958년 발행된 부분에서 처음 나온 말이며, 이것은 수십만 페이지의 웹사이트에 출처 없이 유포되고 있는 그에 대한 가장 큰 거짓말이다.
괴벨스는 언제나 선전이 진실되어야 한다고 주장했고[31] 그의 연설과 작문, 개인적 일기 어느 곳에서도 위와 같은 발언을 찾을 수 없다. 아무런 근거가 없는 거짓말임에도, 이것은 대중들에게 끊임없이 반복되어 선전되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것을 믿게 되었다. 즉, 괴벨스의 가짜 어록을 퍼뜨린 사람은 다소 기괴한 방식으로 자기 주장이 옳음을 증명한 것이다.
문화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나는 권총을 꺼내 든다.
괴벨스가 실제로 하지 않은 말이다. 이 또한 어디에서도 증거조차 발견된 기록이 없고, 근거 또한 있다고 보기 어렵다. 괴링이 한 말이라고 알려진 경우도 있으나, 사실은 한스 요스트라는 시인이 쓴 희곡에서 나온 대사다.
허나 나치 사상을 반영한 희곡이기도 하고 한스 요스트 본인도 그 알프레드 로젠베르크한테 문학상까지 받았을 정도로 열렬한 나치 지지자였던지라, 나치즘을 연구할 때 자주 활용되는 인용구이기도 하다.
괴벨스가 실제로 하지 않은 말이다. 이 또한 어디에서도 증거조차 발견된 기록이 없고, 근거 또한 있다고 보기 어렵다. 괴링이 한 말이라고 알려진 경우도 있으나, 사실은 한스 요스트라는 시인이 쓴 희곡에서 나온 대사다.
허나 나치 사상을 반영한 희곡이기도 하고 한스 요스트 본인도 그 알프레드 로젠베르크한테 문학상까지 받았을 정도로 열렬한 나치 지지자였던지라, 나치즘을 연구할 때 자주 활용되는 인용구이기도 하다.
분노와 증오는 대중을 열광시키는 가장 강력한 힘이다. 선전의 가장 큰 적은 '지식인주의'이다.
흔히 괴벨스가 했다고 알려져 있지만 원문 근거는 존재하지 않는다.
흔히 괴벨스가 했다고 알려져 있지만 원문 근거는 존재하지 않는다.
민중은 그저 빵 한 조각과 왜곡된 자극적인 정보만 주면 충성스러운 사람으로 만들수 있다.
원문 출처가 확인되지 않은 어록이다. 비슷한 맥락으로 히틀러가 말했다는 어록 역시 전해지지만 이 역시 그 근거가 확인되지 않은 어록이다.
원문 출처가 확인되지 않은 어록이다. 비슷한 맥락으로 히틀러가 말했다는 어록 역시 전해지지만 이 역시 그 근거가 확인되지 않은 어록이다.
7. 관련 서적
랄프 게오르크 로이트(Ralf Georg Reuth)가 쓴 《괴벨스》[33]가 《괴벨스, 대중선동의 심리학》[34]으로 국내 발간되어 있다.원서 제목은 그냥 《괴벨스》인데, 국내판에서 괴벨스 뒤에 대중선동의 심리학이라 제목을 붙여서 제3제국의 선동 정책을 다룬 책인지, 심리학을 다룬 책인지 헷갈리게 만들어 놨다. 내용은 그냥 괴벨스의 전기다. 사실 교양인의 문제적 인간 시리즈 특징이 이건데, 비슷한 시기에 나왔던 스탈린 전기도 '권력의 심리학, 공포의 정치학'으로 발간되었다. 파울 요제프 괴벨스를 깊게 다룬 책 중에 거의 유일하게 국내에서 구할 수 있는 책이다. 파울 요제프 괴벨스의 선동 내용 중에 "예나에 이은 라이프치히를 공간적으로 가깝다" 식으로 번역한 사소한 오역[35]이 있지만 읽어볼 가치가 있다. 현재 나무위키 파울 요제프 괴벨스 문서의 상당 부분이 이 책이 출처다.
괴벨스의 선동 관련 내용은 《괴벨스 프로파간다》[36] 책을 참고해도 된다.
파울 요제프 괴벨스가 쓴 반(半) 자전적 소설 《미하엘》[37] 역시 국내 발간되어 있다.
8. 평가
그는 결코 성급하지 않았다. 주도면밀하고 냉철했다. 얼음처럼 차가웠고 악마적이었다.
오토 야콥스, 속기사
지금까지도 나치당 내에서 악명이 높은 사람들은 당연히 아돌프 히틀러, 헤르만 괴링, 하인리히 힘러, 괴벨스 정도인데[38], 여기서도 괴벨스는 유별나며 심지어 히틀러에게도 밀리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 중에서 괴링은 우스꽝스러운 나치즘의 돼지 이미지가 강하고, 힘러의 악명은 학살을 저지른 것인데 그런 상황을 설계한 것이 괴벨스이기 때문이다.오토 야콥스, 속기사
이게 얼마나 대단한 건지는 다음과 같은 이유로 설명할 수 있다. 보통 한 나라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은 국가원수, 정부수반이 있고 그 다음으로 중요한 건 적어도 행정부만 따지면 외무부[39], 내무부[40], 재무경제관계(예산편성, 산업정책 등 나라마다 권한이 상이하다) 장관이라고 볼 수 있고 전시 상황을 감안하면 국방부의 장관도 들 수 있다. 그런데 어지간한 전 세계의 밀덕들은 제2차 세계 대전의 주요국들[41]에서 저 3개국 장관을 다 아는 경우는 소수지만, 일반적인 경우 저것보다는 덜 중요할 선전부의 민간인 장관 괴벨스만은 제2차 세계 대전의 초보 수준의 밀덕이라도 다 알고 있을 정도로 인지도 면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애당초 히틀러는 우두머리이기 때문에 악명이 높은 게 당연하지만 괴벨스는 나치당 내에서도 손꼽히는 악마였다.
사실 괴벨스는 나치당 내 여러 유형 중에서도 워낙 특별한 유형이었으니 어떻게 보면 당연한 것일지도 모른다.[42] 괴링은 흔해빠진 부패한 유형이고, 힘러같이 광신적 충성심과 사명감에 불타 돌쇠처럼 기계적으로 나치당에 충성한 인물은 한둘이 아니었다. 반면 괴벨스는 북독일 라인란트 출신 노동자 계층 출신이라는 점에서 프티부르주아 출신 고등학교 중퇴자 히틀러와 통하는 면이 있었으며, 둘 다 반자본주의적이고 반권위적이며 현란한 선동가이자 연설가였다. 또한 괴벨스는 금발이고 키가 크며 건장한 모습이 대부분인 아리안족과는 달리 흑발에 키가 작고 발을 저는 연약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특유의 뛰어난 말솜씨와 교활함으로 자신의 장애를 극복했으며 자신의 출신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오히려 자랑으로 생각했다. 그것이 그의 인기 비결이기도 했다. 괴벨스는 권위를 혐오했지만 추구했고, 지성인 출신이지만 연설은 지성적인 언어를 쓰지 않았다.
괴벨스에 대한 책을 썼던 롤프 호흐후트는 스스로 열광했기에 타인을 열광시켰던 신도라고 했던 반면, 요아힘 페스트는 최후까지 마키아벨리스트였던 자라고 했다. 괴벨스를 다룬 다른 작가들은 합리적인 선동가라든가 "장애에 대한 보상을 총통 신앙과 세계관으로 대리 충족했다."는 다양한 평가가 있다.
종합적으로 보면 괴벨스가 가진 그만의 능력을 절대로 무시할 순 없다. 남들과는 다른 장애를 갖고 시작했음에도 불구하고 남들과는 다른, 아니 오히려 뛰어나다고 할 수 있는 그만의 언변 능력으로 독일 국민들을 사로잡고 하나로 뭉쳤다. 이렇게만 보면 장애를 극복한 뛰어난 연설가로 평가받아야겠지만 문제는 그 뛰어난 능력을 나치즘과 히틀러를 위해 써먹었다는 점이다. 재능만큼은 천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만, 그 천재성을 악하고 교활한 자가 갖게 되었을 때 어느 정도까지의 영향력을 보여줄 수 있는지 잘 보여준 인물이라 할 수 있다.
9. 여담
- 윈스턴 처칠이 군 부대를 시찰하면서 톰슨 기관단총을 직접 시연해 보는 사진을 이용해서 "저런 갱단 두목 같은 전쟁광이 여러분을 죽음으로 내몰려고 합니다. 처칠을 쫓아내고 우리 제3제국과 사이좋게 지내지 않겠습니까!"라는 선전 문구를 영국에 뿌렸는데, 정작 영국 사람들에게 대혹평만 받았다. 결국 이 건은 괴벨스의 선전, 선동에서 몇 안 되는 실패한 사례로 끝맺었다.
오히려 영국 사람들의 "역시 우리 총리님이 화끈하시네!" 처럼 긍정적으로 반응했고역시 원조 깡패국가아예 "독일군을 싹쓸어버릴 저격수" 같은 문구까지 붙여서 찬양하는 같은 반응으로 전의만 왕성하게 만들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 선전은 오히려 "괴벨스가 영국을 자만하고 방심하게 만들어서 국가 방어에 집중하지 못 하도록 몰아간 언플이었다."는 평도 있는데, 만약 이게 사실이라면 비열하긴 하지만 영국의 애국심을 역이용해 허를 찌르려 한 작전인 셈이다.
- 덧붙여 처칠 본인도 톰슨 기관단총을 들고 있는 사진을 매우 싫어했다고 한다. 특히 처칠은 "손에 술이나 총을 든 모습을 찍히지 않도록 주의하게나. 난 술은 피했는데 그 몹쓸 사진, 손에 기관단총을 들고 있는 모습이 찍힌 사진 때문에 여태까지 곤욕을 치르고 있지. 다른 것도 있지만 그 사진이 나한테 입힌 손해가 커."라는 말을 남겼을 정도였다고 알려져 있다. 영국 내 처칠의 다른 정적들도 문제의 사진을 이용해서 괴벨스가 했던 것과 비슷한 정치적 공격을 많이 했던 모양이다.
- 알베르트 슈페어는 히틀러의 연설이 위압감으로 사람들을 흡입시킨 것과는 다르게 괴벨스는 온화한 인상을 주었다고 한다. 괴벨스의 연설 스타일이 과격한 언어를 사용한 것임을 생각하면 흥미로운 부분. 덧붙여서 알베르트 슈페어는 괴벨스와 상당히 친했으며, 괴벨스의 아내 마그다와도 친한 몇 안되는 인물이었다.
- 독일이 제2차 세계 대전에서 패한 후, 그의 시골 별장은 소련 공군 사령관인 알렉산드르 골로바노프 중장 (1904년 ~ 1975년)이 통째로 뜯어가서 러시아로 가져가서 자기 집으로 삼았다.
- 대한민국 정치계에선 상대 정치인이 대중 호소 스타일이라면, 으레 '괴벨스와 다를 바 없다'는 비판을 가하곤 한다. 때문에 정치 관련 뉴스에서 종종 언급되는지라, 자세히는 몰라도 '괴벨스' 이름 석자는 알고 있는 한국인이 많다.
- 텔레비전와 라디오를 정치 선전에 활용한 선구자이며 정치쇼의 원조, 공약보다는 감성에 호소하는 선거 전략의 선구자이다. 또한 전통시장 같은 장소에서 후보자가 유권자들과 어울리는 모습을 사진으로 찍어서 선전하는 행위의 창시자이다. 그 덕분에 독일은 프랑스와 함께 세계 최초로 정기적으로 TV 방송을 보낸 국가가 되었다.
- 현재 뉴스 프로그램에서 이용되고 있는 "뚜... 뚜... 뚜.... 삐이~" 소리를 낸 뒤 본격적으로 방송이 나가는 방식은, 괴벨스가 사람들을 방송에 집중하게 만들어 홍보 효과를 높이기 위해 창안한 거란 얘기가 종종 나온다. 이는 사실과 다르며, 그 이전부터 도입되어 쓰인 기법이다. 다만 괴벨스가 이를 적극 활용하여 라디오 선전을 행한 것은 사실이 맞다. 마찬가지로 광고 기법 중 하나인 티저를 가장 잘 활용한 사람이기도 하다.
- 베를린 올림픽에서 현재 올림픽 전통으로 자리잡은 성화봉송은 물론 올림픽 중계에 사용되는 슬로우 모션, 수중 촬영 등 다양한 촬영 기법, 스포츠 중계를 도입한 것도 괴벨스 였다. 또한 히틀러와 함께 패션국을 개설해 나치 군복 디자인을 제작하여 군입대를 높이기도 했다고 한다.
- 스탈린그라드 전투가 끝난 직후 1943년 2월 18일 베를린 스포츠 궁전(Berlin Sportpalast)에서 독일과 소련을 상대로 총력전을 하자는 연설이 유명하다. #, 내셔널 지오그래픽의 요약분석
- 역덕후들 사이에서는 "만약 괴벨스가 자살하지 않고 체포되어 전범재판에 회부되었으면 어떻게 되었을까?"라는 가정이 나름대로 흥한 떡밥이기도하다. 특유의 말빨로 연합국 검사 측을 압도할 것이라는 의견도 있지만.... 다른 건 다 제쳐두더라도 그의 입지가 일개 관료가 아닌 나치 최고위층인지라 강렬한 인상은 남길수는 있어도 극형을 피하긴 불가능했을 것이다. 괴벨스 본인은 아니지만 괴링이 실제로 재판에서 괴벨스 못지 않게 자기 변호를 잘 했으나, 죄가 너무 크다는 이유로 사형 판결을 받았다. 아무리 잘한다 한들 "나치하면 전부 갈아마시겠다."고 날뛰던 소련의 분노 앞에서 결코 살아남지 못 했을 것이다.
- 괴벨스가 한 말이 아님에도 괴소문에 의해 괴벨스가 한 말처럼 알려져버린 문장이 무려 2015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 9월 모의평가 사회문화 문제로 등장했는데, 얼마나 한국에 괴벨스의 가짜 어록이 퍼져있는지 체감할 수 있는 부분이다.
그 해 EBS 수능완성 연계 지문이기도 했다.
- 장 르누아르의 반전(反戰) 영화 《위대한 환상》을 매우 싫어했다. 이 영화는 개봉 당시 베니스 영화제에서 수상했는데, 이때 괴벨스가 봤는지 영화판 공공의 적 제 1위(Cinematic Public Enemy No. 1)라고 대놓고 발언했다. 그리고 나치 치하 프랑스에서는 당연히 금지되었고 연합군 공습 도중 필름 현상소에 보관되어 있던 네거티브 프린트가 파괴된 것으로 알려졌으나 사실은 뮌헨에 있는 제3제국 영화자료실에 보관되어 있었다.[44] 다만 상영용 프린트는 어떻게 찾았는지 전후 다시 상영되기 시작했다. 네거티브 프린트는 소련에 갔다가 1960년 프랑스로 다시 돌아왔으나, 전달 과정에서 착오가 생겼던지 툴루즈 시네마테크 창고에 잠들어 아무도 찾지 못했다. 그러다가 1990년대 초반 다시 발굴되었으며 상태가 매우 좋았다고 한다. 현재 상영되고 있는 위대한 환상 복원판은 이 네거티브 필름을 기초로 한다. 이 위대한 환상이 르누아르 커리어에서 손 꼽히는 걸작이기도 해서 이 일화는 영화 역사에서 자주 언급되는 사건으로 꼽힌다. 출처
- 유대인 출신의 사진가 알프레드 에이젠슈타트(Alfed Eisenstaedt)[45]가 찍은 사진이 유명하다.
단, 이것이 에이젠슈타트가 유대인인지를 알기 전과 후의 사진이라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출처
- 라디오 방송용으로 써먹기 위해서 성우를 한 명 고용했는데, 그가 한스 프리체이다. 한스 프리체는 괴벨스와 목소리가 똑같았고 그 때문에 괴벨스에게 발탁되었다. 괴벨스가 연설 대본을 써서 한스 프리체에게 주면 한스 프리체는 이를 라디오 방송을 통해 읽는 역할을 했다. 종전 후 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에 이미 죽은 괴벨스 대신 한스 프리체가 회부되었으나 써 있는 글을 읽었을 뿐인 죄로, 뉘른베르크 전범 재판에 회부된 자들로서는 이례적으로 훈방되었다.[46]
- 이름의 현 한글 표기는 괴벨스가 표준이지만, 이전에는 '게베스'나 '겟벨스' 등으로 표기하기도 했다.[47] 심지어 "궤벨스"로 잘못 쓰는 경우도 은근히 많다. 성 자체가 왠지 궤변을 연상시켜서인 듯.
10. 대중매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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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하십시오.나치당의 선전, 선동을 담당하는 핵심인물이자 브레인이다 보니 출연이 잦은데, 괴벨스 본인말고, 괴벨스 특유의 선전, 선동 능력을 모티브로한 캐릭터들도 상당히 많다.
11. 참고 자료
- 《괴벨스, 대중선동의 심리학》 랄프 게오르크 로이트 저, 김태희 번역, 출판사 교양인
12. 관련 문서
- 천주교
- 반신론
- 아돌프 히틀러
- 나치당
- 호르스트 베셀의 노래
- 귀스타브 르 봉
- 군중심리
-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
- 몰락
- 언론플레이
- 여론조작
- 흑색선전
- 프로파간다
- 선동
- 중2병 데이즈 괴벨스 찬양 사건
- 총력전 연설
- 한스 란다
13.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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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외부 링크
- 독일어
[1] 現 독일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주 뒤셀도르프현 묀헨글라트바흐[2] 1970년 국가보안위원회 의장 유리 안드로포프는 유해 파괴 작전을 승인했다. 4월 4일 마그데부르크에서 유해가 담긴 나무 상자 5개가 발견됐는데, 전량 소각 후 비데리츠강에 뿌려졌다.[3] 박사 학위 논문: Wilhelm v. Schütz als Dramatiker: ein Beitrag zur Geschichte des Dramas der Romantischen Schule = 빌헬름 폰 슈츠의 독일 낭만극 역사에 대한 기여 (1922)[4] 마그다 괴벨스가 전 남편 사이에서 낳은 아들로 괴벨스의 집에서 같이 살며 친아들 대접을 받았다.[5] 1분 27초 쯤엔 연설에 참석한 알베르트 슈페어도 보인다.[6] 당시 유럽에는 유대인 마을이었던 게토 안에 유대인 전용시설이 갖추어져 있었는데 초등학교 역시 그 전용시설 중 하나였다.[7] 히틀러의 미술 취향이 건물이나 풍경 등을 있는 그대로 그려내는 것이었음을 고려할 때 현대미술 비슷한 느낌이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8] 당시 나치가 유대인을 비하할 때 써먹던 레퍼토리 중 하나가 금발벽안의 게르만 여자를 사들이는 / 착취하는 음흉한 뚱뚱보 유대인 사장이었다.[9] 메트로폴리스에서 프레더를 연기했던 구스타프 프뢸리히(Gustav Fröhlich).[10] 상류사회 출신으로 친정과 전 남편 집안 양쪽을 통해 독일 상류사회에 대단한 영향력을 갖고 있었다. 히틀러가 독신이었으므로 괴링의 아내 에미 존네만과 함께 실질적인 퍼스트 레이디 역할을 수행했다. 국민적으로도 알려져서 나치에서 이상적인 이미지로 독일 어머니나 주부를 대표해서 방송 연설을 하기도 했다.[11] 바이에른 지방에 기반을 둔 부호 가문이다.[12] 당시 독일 공군은 항공기 승무원용으로 위 같은 밑단이 짧고 주머니 등 돌출부를 최소화한 비행복을 만들었다가, 이를 공군 전체의 전투복으로 확대 지급했다.[13] BMW의 최대주주였던 헤르베르트 크반트가 바로 하랄트의 이복형이다.[14] 마그다의 어머니 아우구스테 베흐렌트(Auguste Behrend)는 이 가족이 각각의 연속적인 아이들에 대해 H로 시작하는 새로운 아기 이름을 찾는 순수한 취미를 만들었다고 진술했다.[15] 영화 다운폴에서 마그다 역을 맡은 배우 코리나 하르포히는 이 장면을 찍은 뒤 큰 충격을 받아서 한동안 제대로 움직일 수 없었다고 한다.[16] 1926. 6. 21.~2015. 8. 3. 하랄트의 이복형인 헤르베르트의 세번째 부인이다. 즉 형수-도련님 관계.[17] 제2선거구[총리] 괴벨스 내각 출범. 1945.05.01 사망으로 궐위[19] 시대순은 아니다.[20] 1934년 8월 베를린 루스트 가르텐 공원에서 열린 집회에서 연설하는 괴벨스. 그의 사진 중 가장 잘 알려진 사진 중 하나이다.[출처] 1차 출처 : Joseph Goebbels an Anka Stalherm am 17. 2. 1919, BA Koblenz, NL118/126 / 2차 출처 : 괴벨스 대중 선동의 심리학, 117 ~ 118p[22] 1933년 1월 30일 히틀러 내각 창설 직후 독일 공산당 지지세력 근거지에서 SA가 도발성 행진을 벌였는데 이때 누군가 총격을 가해 SA대원 마이코프스키와 현장 통제 경찰관이었던 자우리츠가 죽었다. 괴벨스는 이들을 공산당에 암살당한 투사라며 이들의 이름을 붙인 거리를 만들었다. 당연히 전후 마이코프스키 거리는 개명되었지만 자우리츠는 나치당원도 아니었고 문자 그대로 현장통제 갔다가 죽었기 때문에 남아있다. 현재 자우리츠 거리(Zauritzweg)는 베를린 샤를로텐부르크-빌머스도르프구에 위치해있다.[23] 이 연설이 있고 난지 정확히 한달도 안된 2월 27일 독일 국회의사당 방화 사건이 터졌다. 방화범이 공산주의자라는 점을 빌미삼아 나치당은 독일 공산당 당원들을 마구잡이로 폭행, 체포하였다. 이후 치루어진 선거에서 나치당과 국가인민당이 과반 324석을 훌쩍 넘기는 340석을 얻었다. 이 기세를 몰아 히틀러는 수권법을 통과시켰고 7월 14일 정당신설금지법을 통과시켜 일당독재 체제를 완성했다. 워낙 절묘한 타이밍에 터진 사건이었기 때문에 나치 방화설도 있었지만 이를 입증할 증거가 부족하여 논쟁 중인 사안이다.[24] 원래 출전은 19세기 민족시인 테오도르 쾨르너이다. 괴벨스는 문학으로 박사학위를 딴 사람이다.[25] Lucifer ante portas: 최초의 게슈타포 수장이 말한다』, 슈투트가르트: 도이체 페어락스 안슈탈트(Deutsche Verlags-Anstalt), 1950, p. 118.[26] 이후 1940년 2월 루츠엔 바르샤바 다음으로 제일 큰 규모의 유대인 게토가 생겼고 나치 독일은 20만명의 유대인들을 이곳에 강제 수용했다. 7만명이 넘는 이곳 유대인이 헤움노 절멸수용소에서 살해당했고 나머지는 아우슈비츠 절멸수용소로 보내져 살해당했다. 1945년 1월 소련군에 의해 해방될 때 생존한 루츠 게토의 유대인은 1000명이 채 안되었다.#[27] 본래 괴벨스의 총력전 연설은 2시간에 달하는 장문의 연설이었지만 선전의 목적상 독일 주간뉴스 651호에선 5분 남짓으로 편집해 내보냈다. 그렇기 때문에 영상 속 괴벨스의 말 순서와 실제 연설 순서와 맞지 않는 부분이 존재한다. 해당 유튜버의 경우 괴벨스의 연설 앞부분을 요약해 설명하는 아나운서 대사를 편집하고 괴벨스의 말을 방영한 부분만 올렸다.[28] 아이러니하게도 이 말이 "괴벨스의 어록"이라는 거짓 선동 또한 문장 단 한 줄로 해내졌으며, 이를 반박하기 위해서 많은 증거를 가져와야 했다. 그리고 그럼에도 괴벨스가 실제로 저런 말을 했다고 잘못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29] "영국인은 '거짓말을 한다면 철저히 거짓말을 하고, 무엇보다도 그 거짓말을 계속 고수하라'는 원칙을 따른다. 그래서 그들은 우스꽝스럽게 보일 위험이 있더라도 거짓말을 고수한다."-1941년 1월 12일, 전례 없는 시대(Die Zeit ohne Beispiel), 364~369페이지-[30] 앞선 항목에 '무임 승차자', '면책 특권자'와 연계되는 문구로, 보장한 자유에 무임승차해서 체제를 조롱하고 뒤엎는 데도 민주적 방식으로 뽑힌 면책특권(국회의원)을 가지고 이용하고 있다는 뜻.[31] "우리의 투쟁과 선전은 하나의 최고의 원칙을 가지고 있습니다. 선전의 기초로서 진실과 진리만을 취하는 것입니다." - 괴벨스[32] 그의 어록 중에서 현대에도 쓰이는 말들 중 하나. 여론 조작을 간단히 설명한 예라 볼 수 있다.[33] 아마존닷컴[34] 네이버 도서[35] "1807년 예나 전투에서 패하고 독일이 나폴레옹 치하로 들어갔다가 1813년 해방 전쟁에서 라이프치히 전투에서 승리로 독일이 나폴레옹 치하에서 독립한다. 상반된 사건의 시간적 연속성을 비슷한 사건의 공간적 연속성"이라 잘못 써놨다. 초판인쇄 후 2012년에 나온 쇄까지도 아직 수정이 안 되어있다.[36] 네이버 도서[37] 네이버 도서[38] 나치 독일의 실질적인 2인자라고 볼 수 있는 마르틴 보어만은 인지도가 매우 낮다.[39] 특별한 사정이 없으면 국가원수, 정부수반 빼고 유일하게 그 국가의 의사를 대표할 수 있다.[40] 경찰조직, 잘만 하면 정보기관의 통제권을 쥐고 있다.[41] 미국, 영국, 독일, 소련, 일본, 중국, 이탈리아, 프랑스 8개국, 좁게 보면 미국부터 일본까지 5개국만 따져도[42] 다만 일반적으로 알려진 바와 달리 괴벨스의 특별함은 고학력이 아니었다. 나치당 내 초기 멤버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베를린 훔볼트 대학 법학 박사 빌헬름 프리크, 뮌헨 공과대학 공학박사 프리츠 토트, 엔지니어 출신 고트프리트 페더, 변호사 한스 프랑크, 약사 출신 그레고어 슈트라서, 하버드 출신 한프슈탱글, 건축가 로젠베르크와 알베르트 슈페어, 농학 석사 출신 힘러와 발터 다레, 언론인 발터 풍크, 폰 쉬라흐, 루돌프 헤스 등 의외로 대부분이 번듯한 집안 출신에 대학 이상의 고등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었다.[43] 전통적으로 서양에서는 악마는 한 쪽 다리가 인간의 다리와 발이 아닌 염소의 다리와 발굽으로 되어 있어 절뚝거리며 걷는다고 믿었다. 절름발이가 범인이라는 그 유명한 반전도 사실은 여기서 기인한 것.[44] 프랑크 헨젤이라는 사람이 옮겨놓았다는 설이 유력하다.[45] 2차 세계대전 종전을 상징하는 V-J Day in Times Square를 찍은 사진사다.[46] 좀 더 정확히 설명하면 프리체는 나치당 법률 연구회에 가입하는 등 나치즘을 열렬히 지지했던 것은 맞지만 나치당을 지지했을 뿐 전범행위에 대해선 가담한 바가 없었기 때문이다.[47] '겟벨스'는 괴벨스의 일본어 표기인 'ゲッベルス'에서 유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