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5-09-08 18:09:52

반제 회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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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어: Wanseekonferenz
영어: Wannsee Conference
1. 개요2. 배경3. 참석자4. 회의 배경5. 회의 전개6. 여담7. 대중매체

1. 개요


반제 회의를 재현한 2022년 독일 영화 더 컨퍼런스[1]

반제 회의1942년 1월 20일 베를린 근교 반제의 별장에서 국가보안본부 본부장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 주재 하에 슈츠슈타펠 지휘관들과 각 행정부처의 수뇌부들이 모여 진행한 회의다. 이 회의를 통하여 유대인 문제에 대한 최종해결책(Endlösung der Judenfrage)의 방향이 절멸(Vernichtung)로 확정됐다. 사실 회의라고는 하지만 이미 절멸 노선은 힘러와 친위대에 의해 가닥이 잡혔었고, 이 결정과 실행안을 하이드리히가 각 부처에 일방적으로 통보한 것에 지나지 않아 발표회의 성격이 더 짙었다. 쉽게 말해 홀로코스트에 대해 나중에 딴소리하는 부처가 없도록 하는 것이 주된 목적이었다.

2. 배경

1933년 이후 나치 독일뉘른베르크 법과 같은 수단을 통해 지속적으로 유대인들에 대한 경제/사회적인 압력을 가했다. 이에 따라 1933년 당시의 통계에 따르면 약 40만명 가량이었던 독일 내 유대인들 가운데 절반 이상이었던 25만명이 나치 독일의 박해를 피해 타국으로 이주하면서 제2차 세계 대전 직전의 독일에서는 유대인의 흔적은 많이 옅어졌다. 가장 많이 망명을 떠난 곳은 미국이며 그 외에도 영국이나 프랑스, 심지어 팔레스타인으로 이주한 유대인들도 있다.

하지만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초반에 독일이 승승장구하면서 유럽 전역을 석권했고 이에 따라 독일이 지배하는 지역에 거주하는 유대인들의 수가 다시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으며 특히 1941년 6월에 바르바로사 작전을 개시하고 전선과 점령지가 크게 확대되면서 그 수가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서유럽에서는 18세기 후반의 프랑스 혁명을 거치면서 상당수의 유대인들이 기존 사회에 동화되었던 반면 동유럽에는 유대인의 정체성을 그대로 간직한 사람들이 많았다. 하이드리히는 소련에만 대략 500만명의 유대인이 거주하는 것으로 추산했다.

이에 1941년 7월 공군 제국원수이자 독일 제3제국의 2인자였던 헤르만 괴링은 유대인 문제에 대한 '최종해결책'을 강구할 것을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에게 지시했다.

3. 참석자

파일:반제 회의 참석자 명단 1.jpg 파일:반제 회의 참석자 명단 2.jpg
회의록 중 참석자 명단 부분.
  •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Reinhard Heydrich): 친위대 총수 하인리히 힘러를 대리함, 친위대 국가보안본부장 겸 보헤미아 모라비아 총독 대리이다. 1942년 5월 27일 그를 암살하려는 영국의 유인원 작전에 의해 부상을 입고 생존했으나 패혈증에 걸렸고 치료에 실패하여 1942년 6월 4일 사망했다. 최종계급 친위대 및 질서경찰 대장(Obergruppenführer(상급집단지도자)).
  • 하인리히 뮐러(Heinrich Müller): 게슈타포 소장 - 종전 후 잠적. 1945년 4월 29일 최종 목격. 최종계급 친위대 및 질서경찰 중장(Gruppenführer(집단지도자)).
  • 오토 아돌프 아이히만(Otto Adolf Eichmann): 게슈타포 중령(Obersturmbannführer(상급돌격대지도자)), 무장친위대 소위, 유대인 담당 - 1960년 이스라엘 모사드에 의해 체포, 1962년 5월 31일 반인륜범죄 교수형.
  • 오토 호프만(Otto Hofmann): SS 대장(Obergruppenführer(상급집단지도자)), 무장친위대 및 질서경찰 대장, 인종정주국 담당 - 1945년 체포, 25년형 선고, 6년 복역, 이후 직장생활, 1982년 사망
  • 카를 에버하르트 쇤가르트(Karl Eberhard Schöngart): SS 소장(Brigadeführer(여단지도자)), 질서경찰 소장, 무장친위대 중위, 폴란드 총독부 담당 - 영국 군사법정 '테러 프로그램' 혐의 유죄, 1946년 2월 처형
  • 루돌프 랑에(Rudolf Lange): SS 대령(Standartenführer(연대지도자)), 라트비아 특수임무대 부사령관 - 1945년 2월 폴란드에서 전사
  • 프리드리히 빌헬름 크리칭거(Dr. Friedrich Wilhelm Kritzinger): 총통비서실장 한스 라머스를 대리함, 총통 비서실 - 1945년 체포, 전범재판에서 나치의 행위를 반성, 석방 후 1947년 사망
  • 게르하르트 클로퍼 박사(Dr. Gerhard Klopfer): 나치당 당수부장 마르틴 보어만을 대리함, 나치당 비서실 - 1945년 체포, 증거부족 석방, 이후 세무사로 활동, 1987년 사망. 최종계급 친위대 중장(Gruppenführer(집단지도자))
  • 롤란트 프라이슬러 박사(Dr. Roland Freisler): 법무부 및 법무부 장관 프란츠 슐레겔을 대리함, 법무부 차관 - 1945년 2월 베를린 공습으로 사망. 최종계급 NSKK(국가사회주의 자동차 군단) 소장(Brigadeführer(여단지도자))
  • 게오르크 라이프브란트 박사(Dr. Georg Leibbrandt): 동유럽 점령지구 국장, 발틱 소련 정치국 담당 - 1945년 체포, 증거부족 석방, 이후 미국 문화원에서 활동, 1982년 사망
  • 알프레트 마이어 박사(Dr. Alfred Meyer): 동방영토부 장관 알프레트 로젠베르크를 대리함, 동방영토부 차관, 대관구 지휘자, 돌격대 상급집단지도자(Obergruppenführer) - 1945년 자살
  • 빌헬름 슈투카르트 박사(Dr. Wilhelm Stuckart): 내무부 장관 빌헬름 프리크를 대리함, 내무부 차관 - 1945년 체포, 1949년 석방, 1953년 암살로 추정되는 고의적인 교통사고로 사망. 최종계급 친위대 대장(Obergruppenführer(상급집단지도자))
  • 요제프 뷜러 (Dr. Josef Bühler): 폴란드 총독 한스 프랑크를 대리함, 폴란드 총독부 차관 - 1945년 체포, '폴란드에 대한 전쟁범죄' 유죄, 1948년 8월 처형. 최종계급 친위대 소장(Brigadeführer(여단지도자))
  • 에리히 노이만(Erich Neumann): 공군 총사령관 겸 4개년 계획부 장관 헤르만 괴링을 대리함, 4개년 경제계획부 차관 - 1945년 체포, 1948년 증거부족 석방, 1948년 사망 최종계급 친위대 상급대령(Oberführer(상급지도자))
  •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 외무성 차관 - 1944년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 가담 혐의로 체포, 1945년 심장마비로 사망[2], 최종계급 돌격대 여단지도자(Brigadeführer)

4. 회의 배경

1941년 가을 무렵만 하더라도 독소전쟁은 몇 달 안에 독일의 승리로 끝날 것으로 점쳐졌고 이에 따라 하이드리히는 유럽 대륙의 모든 유대인을 소련 변경 지역으로 추방해서 이들의 노동력을 이용하는 방안을 검토했다.[3] 본디 반제 회의는 1941년 연말에 열릴 계획이었으나 1941년 12월 7일 일본이 감행한 진주만 공습과 연이은 독일의 대미 선전포고 등이 겹치면서 하이드리히는 회의를 한 달 가량 연기했다. 게다가 같은 시기에 동부전선에서 일어난 모스크바 공방전 이후 독일의 전격적인 승리가 수포로 돌아가면서 하이드리히의 원 계획을 실행에 옮기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해졌고 여기에 아돌프 히틀러의 독촉까지 더해지면서 하이드리히는 유대인들을 집단 학살하기 위한 절멸 수용소를 폴란드에 건설하는 안에 착수했다.

회의가 시작하기 전 아돌프 아이히만은 유럽 각국에 거주중인 유대인 숫자를 정리했다. 이들은 A와 B그룹으로 분류되었다. A는 나치 독일의 직접 통제하에 있는 국가와 지역에 사는 유대인 그룹, B는 독일의 동맹국 또는 중립국 또는 적국에 살고 있는 유대인 그룹을 의미했다. 아이히만이 정리한 결과 A와 B그룹에 속해있는 유대인은 총 1,100만 명이었다. 이 것은 속칭 아이히만 리스트로 불리게 된다.

5. 회의 전개

회의가 시작되고, 하이드리히는 1,100만 명의 유대인 중 절반 이상이 독일로부터 통제받지 않는 지역에 거주중이라고 지적했다. 그래서 하이드리히는 유대인 문제 처리를 위해서 유대인들을 '동쪽'으로 '이주'시켜야 한다고 말했다. 하이드리히는 이 과정에서 다음과 같이 발언했다.
적절한 지도 하에 최종 해결책의 과정에서 유대인들은 동부에서 적절한 노동을 위해 배정될 것이다. 성별에 따라 구분된 건강한 유대인들은 도로 ​​작업을 위해 이 지역으로 대규모 작업 대열로 끌려갈 것이다. 이 과정에서 의심할 여지 없이 많은 유대인들이 자연적인 원인으로 제거될 것이다. 의심할 여지 없이 가장 저항적인 부분으로 구성될 최종 잔당은 그에 따라 처리되어야 한다.[4] 왜냐하면 그것은 자연 선택의 산물이며, 만약 풀려난다면 새로운 유대인 부흥의 씨앗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당시 연합군의 전략폭격으로 인해 집을 잃은 독일인들이 적지 않았고 이 문제에 대해 불만을 토로하는 지역 나치당 지도자[5]들이 적지 않았다. 하이드리히도 이 불만을 마냥 묵과할 수 없었고, 이에 대한 해결책으로 유대인들을 동쪽으로 '쫒아내는' 대신 그 자리에 집을 잃은 독일인들을 거주시키겠다는 전략이었다.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해서 독일을 위해 큰 공을 세운 유대인 참전자들은 살해 대상에 포함되지는 않았다. 예컨데 훈장을 수여받거나 부상을 입었던 이들이 여기에 포함되었고, 이들을 즉각 살해가 아니라 천천히 죽이려는 목적으로 테레지엔슈타트 강제 수용소로 보내기로 결정했다.[6]

큰 틀에서 유대인들에 대한 절멸계획이 수립된 가운데 프랑스 혁명 이후 유대인들이 이미 150년 가까이 유럽 사회에 상당 부분 동화됐다는 점이 문제로 부각되었다. 이에 대해 하이드리히는 나름대로 가이드라인을 제시했는데 유대인 혼혈의 경우 조부모를 기준으로 조부모 4명 가운데 둘 이상이 유대인이면 (뉘른베르크 인종법의 기준에 따르면 소위 1급 혼혈) 유대인으로 취급하며 그 이하면 (소위 2급 혼혈) 독일인으로 취급하는 방안이 제안되었고 덧붙여서 1급 혼혈일지라도 독일인과 결혼했고 아리안인다운 외모를 가졌다면 박해대상에서 제외할 것을 주장했다. 즉 혼혈이 이루어진 경우, 만약 자녀가 독일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지니고 자라났다면 유대인 배우자는 살해 대상에 포함되지 않았다. 반면 자녀가 유대인으로서 양육되었다면 유대인 배우자는 살해 대상에 포함되거나 강제수용소로 보내기로 결정했다.

이 방안에 대해서 반발한 사람이자 동시에 거의 유일하게 회의 전체에 있어서 반발을 낸 사람은 내무부 차관 빌헬름 슈투카르트였다. 외교부 차관 루터가 남긴 회의록에 의하면 슈투카르트는 하이드리히의 여러 가이드라인들이 너무 비현실적이고 행정적 절차를 복잡하게 만든다고 지적했다고 한다. 하이드리히의 방안에 의하면 여러 주관적인 관점에 따라 유대인 분류가 가능해지고 이들을 학살 대상으로써 수용소에 보내버릴 수 있었고, 특히 1급 혼혈은 얄짤없이 죽을 운명이었다. 슈투카르트는 대신 독일인과 결혼한 유대인들을 이혼시켜 혼혈을 방지하고 1급 혼혈들을 불임시킴으로써 모든 문제를 종결시킬 것을 주장했다. 내무부 소속답게 슈투카르트는 혼혈들이 지닌 독일 혈통과 그들의 독일인 친지들에 대해서 우려할 수밖에 없던 것이다. 제아무리 하이드리히가 입김이 센 권력자였다지만 슈투카르트는 나치 반유대 정책의 시초가 되는 뉘른베르크 인종법의 입안자 중 한명으로써의 명성과 권위가 있었기 때문에 일방적으로 무시할 수 없었다. 결국 혼혈 문제에 대해서는 결국 결론이 내려지지 않았고, 1개월 반 뒤의 후속 회의로 미루어졌으나 거기서 슈투카르트는 본인의 입장을 더 강화해서 불임 시술을 받은 1급 혼혈은 자연적으로 소멸되도록 기다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왜 슈투카르트가 이런 의견을 냈는지는 역사학자들마다 의견이 조금씩 다르다. 일단 종전 후 뉘른베르크 재판에서 슈투카르트는 자신이 이렇게 주장한 이유가 전시라는 특수성으로 인해 절차가 늘어질 것을 알고 시간을 벌어서 하이드리히의 학살 계획을 방해하려는 것이었다고 주장했다. 실제로 슈투카르트는 뉘른베르크 인종법에 관여한 법률가이자 유대인의 온건한 권리 박탈을 주장한 베른하르트 뢰제너와 입장을 같이했다. 슈투카르트 입장에서 법제적이고 순차적으로 유대인의 사회적 영향력을 제거하는 것과 그것을 무시하는 친위대식 초법적 행동은 상충될 수 밖에 없던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디터 레벤티쉬는 슈투카르트가 반유대주의자이만 시민적 용기를 지닌 복합적 인물이라고 평가했다. 하지만 한스-크리스티안 야쉬는 만약 슈투카르트의 주장대로 독일인과 결혼한 유대인이 이혼당한다면 그들이 그대로 학살에 노출되었을 것을 지적하며 슈투카르트가 단지 친위대와 다른 성격의 관료적 입장에 있는 유대인 학살의 책임자였다고 주장한다. 여하튼 결과적으로 하이드리히의 혼혈 제거 방침은 하이드리히가 회의 이후 4개월 뒤 프라하에서 체코슬로바키아 망명 정부와 영국 정보부의 합작으로 암살당하며 종말을 맞이한다. 이후에 유대 혼혈들은 여러 권리를 박탈당한 채 집에 박혀있거나 때때로 강제 노역에 동원되었으나 순혈 유대인처럼 대대적으로 학살당하진 않았고 대부분 종전 때까지 생존할 수 있었다. 물론 이는 독일 본토 내에서 순혈 독일인들과 어떻게든 연이 있던 혼혈들의 얘기로, 독일의 점령지, 특히 동유럽에서는 1/2 유대인이건 1/4 유대인이건 그냥 잡아다가 죽였다.

독일의 우방인 헝가리, 루마니아 등에 거주하는 유대인 문제에 대해서도 하이드리히는 '큰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지적하면서, 곧 문제를 해결할 것이라고 발언했다. 그의 전략대로 루마니아에선 지도자 이온 안토네스쿠가 유대인 학살에 동참했으며, 헝가리에선 호르티 미클로시가 축출되고 '회스 작전'을 통해 헝가리 내 수십만의 유대인들을 아우슈비츠 수용소로 보내 학살하게 되었다.[7]

회의장은 하이드리히의 사실상 독무대였고, 하이드리히는 장장 1시간 동안 혼자서 연설했다. 하이드리히는 매우 막강한 실권자였기 고유한 명성이 있던 슈투카르트 정도를 제외하면 직접 반발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반제 회의의 준비를 담당한 아돌프 아이히만이 전후 재판에서 증언한 바에 따르면 하이드리히의 연설이 끝나자 30분 동안 비공개 대화가 이어졌는데, 그 자리에서 참석자들은 '살해 방식', '학살', '절멸', '제거', '박멸' 과 같은 직접적인 단어를 많이 사용했다. 단지 회의 기록에선 행정적이고 은유적인 용어인 '최종 해결책'으로 포장했을 뿐이었다. 이는 자신들의 유대인 학살을 최대한 감추기 위한 나치 독일의 노력이었다.

회의가 끝나갈 무렵 회의 참석자들에겐 코냑이 제공되었고 그렇게 회의는 끝이 갔다. 결과적으로 모든 이들이 하이드리히가 제시한 유대인 절멸 계획을 인지하였고, 부처마다 조금씩 추가 의견을 낸다. 4개년 계획부 차관 에리히 노이만이 산업능력이 있는[8] 유대인도 제거당할 것을 우려하며 전쟁 수행에 필수적인 유대인 노동자들은 학살하지말 것을 요청하자 하이드리히는 전쟁 수행에 보탬이 되는 유대인들은 살려둘 것이라며 이를 받아들인다. 어쨌거나 인도적인 이유로 살려두는 것은 결코 아니었다. 폴란드 총독부 차관 요제프 뷜러는 현재 총독부가 추방된 유대인들로 꽉찬 것을 호소하며 하이드리히의 유대인 학살이 폴란드 총독부에서부터 시행되어야 함을 촉구했고 하이드리히는 이를 받아들였다.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의 구상에 반대하는 사람은 없었다. 오히려 하이드리히의 계획에 그 이상으로 적극 동조했다. 아이히만의 증언에 따르면 하이드리히는 내심 다른 참가자들이 절멸수용소와 같은 학살 프로그램에 거세게 반발하지 않을까 노심초사했는데 막상 아무도 반발하지 않자 기뻐했다고 한다.

6. 여담

  • 1947년 미군 조사단에 의해서 독일 외무부에서 발견된 마르틴 루터의 반제 회의록 사본이 현존하는 유일한 회의록이다.
  •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 절멸수용소트레블링카 절멸수용소와 같은 절멸수용소를 이용하는 것 외에 동유럽의 식량 보급을 끊어 버려 서서히 유대인과 슬라브족을 아사시키는 방법도 이용했다. 역사가들에 따르면 1941년부터 1944년까지 약 420만 명의 소련인들이 이로 인해 아사한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들 중 상당수는 전쟁 포로였다.
  • 반제 회의가 열렸던 별장은 나치 초기에 한 기업가에게 강제로 빼앗은 것이며 문제의 기업가는 제2차 세계 대전 동안 횡령 혐의로 감옥에 갇혀 있었다가 전쟁이 끝난 직후에 사망했다. 별장 건물 자체는 오늘날까지도 남아 있어서 반제 회의를 다루는 역사 전시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7. 대중매체



[1] 영어 자막이 있는데 자동 번역되어서 한글 자막으로도 볼 수 있다.[2] 종교개혁가 루터와 이름이 같은 동명이인.[3] 당시 동부점령지관리부(Reichsministerium für die besetzten Ostgebiete) 장관이었던 알프레트 로젠베르크에 의해 이른바 로젠베르크 계획으로 불리는 동부 점령지 관리안이 제안된 것도 바로 이 회의에서였다.[4] 즉, 강제노역과 혹독한 환경을 통해 건강하지 않은 유대인들을 살해하고, 끝까지 살아남은 건강한 유대인들은 가스실에 보내 살해하겠다는 소리이다.[5] 대관구 지도자, 즉 Gauleiters. 사실상 시장이나 주지사에 대응하는 인물들이었다.[6] 다만 후술했다시피 실제 현장에선 이들도 절멸수용소로 이송된 경우가 훨씬 많았다.[7] 당시 호르티 미클로시 섭정이 이끌던 헝가리는 독일의 반유대인 정책에 완강히 저항했고 아돌프 아이히만이 여기에 몹시 분개했다. 결국 호르티 미클로시가 실각한 1944년 여름에야 헝가리에서도 반제 회의에서 결정된 절멸정책이 실시되었다.[8] 숙련공, 기술자 같은 공장의 노동인력을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