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18 15:09:10

모사드

<colbgcolor=#fff,#1c1d1f><colcolor=#0038B8,#2c69f5> 정보특수작전국
המוסד למודיעין ולתפקידים מיוחדים
המוסד | the “Mossad”
<nopad> 파일:모사드 깃발.svg 파일:모사드 로고.svg
<rowcolor=#0038B8,#2c69f5> 깃발 엠블럼
창설일 1949년 12월 13일 ([dday(1949-12-13)]일, [age(1949-12-13)]주년)
국가
[[이스라엘|]][[틀:국기|]][[틀:국기|]]
소속 이스라엘 내각부
직원 수 약 7,000명
원훈 בְּאֵין תַּחְבֻּלוֹת, יִפָּל-עָם; וּתְשׁוּעָה, בְּרֹב יוֹעֵץ.
지휘자 없는 군대는 패하고 좋은 참모가 많으면 승리한다.[1]
국장 데이빗 바네아
위치 이스라엘 텔아비브
링크 파일:홈페이지 아이콘.svg

1. 개요2. 직제3. 역사4. 알려진 주요 행적
4.1. 암살
4.1.1. 2010년 암살
4.2. 납치4.3. 첩보 수집 및 분석
5. 조직 문화6. 중국과의 관계7. 대한민국과의 관계8. 대중매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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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모사드(Mossad)란 이스라엘의 대외 정보기관을 가리킨다. 이스라엘 정부의 적대 세력을 감시하고 파괴 및 암살 등 필요한 공작을 수행하는 것을 목표로 하며 모사드에 대응하는 이스라엘의 내무정보기관으로는 신 베트가 있다.

'모사드'는 히브리어로 '기관', '국(局)', '청(廳)'이라는 뜻의 일반명사이며, 영어의 'institute', 'agency'에 대응된다. 이스라엘 국내에서 모사드를 지칭할 때는 정관사를 사용하여 '하모사드(המוסד)'라고 읽는데, 이는 '그 기관(the Institute)'이라는 암시적 의미로, 정식 명칭인 '정보특수작전국(Institute for Intelligence and Special Operations, המוסד למודיעין ולתפקידים מיוחדים; 하모사드 레모디인 우레타프키딤 메유하딤)'의 이름조차 직접 드러내지 않던 관행에 따라 '거기', '그 쪽' 하고 부르던 것이 통칭으로 정착한 것이다.[2] 한국어 번역명으로는 '정보특수공작국', '정보 및 특수 작전국', '정보특수공작기관' 등이 쓰인다.

모사드의 대표적인 표적으로는 팔레스타인 자치정부하마스, 팔레스타인 해방인민전선, 팔레스타인 이슬람 투쟁 운동, 레바논헤즈볼라, 이란 정부 관계자, 구 바트주의 이라크, 구 시리아의 핵 개발 관계자 등 중동 아랍 세력들이 있으며 이들과 군사적 교류가 잦은 북한에 대해서도 독자적인 공작을 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3]나치 전범에 대한 추적 및 보복도 모사드의 지속적인 목표 중 하나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결과지상주의적 일처리와 불도저식 공작 능력, 놀라운 정보수집 능력으로 유명하다.

2. 직제

모사드의 직제 현황은 기밀로, 민간에 공개되어 있지 않다. 가장 최근 알려진 것은 CIA가 1977년에 작성한 이스라엘 정보기관에 대한 보고서에 수록된 것으로, 1979년 이란 혁명으로 테헤란 주재 미 대사관이 점거되었을 때 외부로 유출되어 알려졌다. 이 자료에 의하면 모사드는 8개 부서로 나뉘어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공작과, 대외연락과, 기술과, 훈련과 등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현장투입 및 암살팀인 '키돈'과 통신감청 전문기술팀 '야호로민', 해당 공작 지역에서 모사드를 도와주는 유대인들인 '캇차'와 '사얀/사야님', 그리고 도처에서 운용하고 있는 각국 국적의 모사드 정보원 등을 갖고 있다.

모사드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거대한 규모인데 메이르 아미트(3대 국장, 1963~1968 재직) 시절에는 1,200명 정도의 조직원을 가지고 있었다.[4] 예산도 많이 들어갔을 것이 분명하다. 전직 안기부 제2차장에 따르면 2010년 즈음에는 1,500명 정도의 조직이었다고 한다.
  • 첩보수집과: 해외 공작을 책임지며 모사드 내에서 가장 큰 규모다. 모사드 요원들은 해외 공관의 외교관 신분과 신분 위장을 통해서 해외에서 활동한다.
    • 암살-납치 부서 '키돈'(Kidon): 언제 생겼는지는 아무도 모르지만 60~80년대가 아닐까 추측만 하고 있다. 키돈 여성요원의 존재는 2004년에야 세상에 드러났다. 키돈의 훈련 과정은 2년인데 각종 무기, 폭발물, 미행 기법, 호텔 객실 침입 방법, 속옷 안에 권총을 은폐하는 방법, 위장 방법, 미인계 등 다양한 교육이 이루어진다. 규모는 50~70명 정도로 추측되고 있다.
  • 정치 활동 및 연락과: 세계 각국 정보기관과의 연락.
    • 지역과: 정치활동연락과와 첩보수집과는 공동으로 8개의 지역과를 운영했고 이스라엘 대사관의 모사드 요원들은 이 2개 부서에서 파견나온 요원들로 구성된다. (북미, 중미, 남미 등)
  • 기술과: 첨단 장비 제공
  • 기술공작과
    • LAP과: Lohamah Psichologit Department의 약어로, 심리전과 정치 선전, 그리고 기만 작전을 담당한다.
  • 분석과
  • 훈련과
  • 작전기획조정과
  • 인력 재정 병참 보안과

3. 역사

제2차 세계 대전나치의 집단학살에서 살아남은 유대인을 팔레스타인에 이주시키기 위해서 다비드 벤구리온 총리의 제안으로 설립되었다. 1948년 6월 초대 국장을 레우벤 실로아흐(ראובן שילוח)로 하여 외무부 산하 정치국으로 출범하고 1949년 12월 13일에 정치국을 확대개편하여 정보조정연구소(the Institute for Coordination)로 재출범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1951년에는 총리 직속기구로 재편되었다. 그래서 현재의 모사드의 창설연도를 1951년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1953년에 취임한 2대 의장 이세르 하렐(Isser Harel)은 모사드를 전문가 조직으로 발전시켰으며 외국에서의 첩보활동·정보수집·비밀정치공작 등의 업무를 담당한다. 중동전쟁에서 큰 공을 쌓은 이스라엘 스파이 엘리 코헨의 형 모리스 코헨도 모사드 요원이었지만 아우가 시리아에서 교수형당하는 걸 그저 TV화면으로 바라봐야 했다.

모사드는 1979년 이전까지는 베일에 싸여 있던 기관이었으며 일반인들은 모사드가 존재하는지 조차도 알지 못했지만 정체가 1979년에 드러나게 되는데 그 과정이 좀 골때린다. 1979년 주 이란 미국 대사관 인질 사건 당시 대사관 직원들은 인질로 잡히기 전 기밀 문서를 파쇄기에 넣고 모두 파기했지만, 대사관 내의 사람들을 인질로 잡은 뒤에 할 일이 없던 인질범들이 파쇄기에 갈아댄 문서들을 하나하나 맞추어 복원한 과정에서 모사드의 존재가 밝혀졌다.

1980년대 말~1990년대 중반은 모사드에게 암울한 기간이었는데 벌여 놓은 각종 작전이 실패해 언론에 알려져 망신을 당해 국장이 여러차례 교체되기도 했다. 수뇌부들이 개인적인 욕심으로 정보기관을 휘두르면 망한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좋은 예다.

그러다가 2002년 메이어 다간이 국장으로 취임하면서 화려하게 부활했는데 취임사는 '적의 뇌를 삼켜라'다.
나는 레바논에 참전했을 때 가문끼리의 싸움이 초래한 비참한 결과를 본 적이 있다.
한 족장의 머리가 깨져서 뇌가 거리에 흩어져 있었다.
주변에는 족장의 부인과 어린아이들의 시체가 있었다.
이때 살아남은 한 아이가 족장의 뇌수를 한 움큼 쥐더니 집어삼켰다.
이것이 레바논 사람들이 가문끼리의 싸움에서 하는 행동이다.
뇌를 먹어 삼켜라.
그렇게 힘의 근원을 취하라. 나는 여러분의 뇌가 다른 자들에게 먹히기를 절대 바라지 않는다.
뇌를 먹는 사람은 여러분이어야 한다.
모사드 10대 국장 메이어 다간의 취임사

모사드는 해외에서 주로 활동하다 보니 국제적으로 이름이 알려졌지만 이스라엘 내 첩보를 주로 맡는 신 베트(Shin bet)는 미국에서 이스라엘에 대하여 자세히 아는 사람들도 잘 모르는 첩보기관이다. 어느 나라든 그렇지만 모사드와 신 베트는 은근히 사이가 나쁘다고 한다. 그렇긴 해도 같은 이스라엘 첩보기관으로 서로 정보를 주고받을 땐 돕긴 하지만. 2012년에 만들어진 이스라엘 다큐멘터리 영화 게이트키퍼즈에 나온 전직 신 베트 국장들의 증언을 봐도 모사드가 마치 자신들이 우위인 양 설쳐댄다고 마구 화를 내며 털어놓는 게 나와서 이를 본 모사드 출신 국장들도 불쾌하게 반론하던 적이 있다. 이 외에도 이스라엘에는 정보기관이 꽤 많은 편이다.

모사드와 협력적인 국가/적대적인 국가에 대해서는 이스라엘/외교 문서 참조 바람.

4. 알려진 주요 행적

주요 공작으로는 다음이 알려져 있다.

4.1. 암살

모사드는 암살에 대해 가능한 한 긍정도 하지 않고 부정도 하지 않는다. 모사드 창설 후 정적들을 납치 혹은 총격으로 주로 암살했지만 21세기 들어 정적들의 철저한 경호를 갖춘 이후로 총격보단 공습 혹은 원격으로 암살을 주로 하는 편이다.
  • 나치 전범을 추적해 암살한 것으로 추정된다.
    • 알렉산데르 라크(Aleksander Laak): 에스토니아 출신 나치 부역자로 나치 수용소 중 하나인 예갈라 강제 수용소(Jägala concentration camp)의 책임자였다. 최소 10,000여명을 수용소에서 죽인 것으로 알려져 있었으며 전후 캐나다로 도피했다가 1960년 위니펙의 자택 차고에서 목을 매단 채 발견되었다. 그는 안 그래도 평소에 자신과 같은 에스토니아인 부역자들이 전후에 족족 체포되어 처벌받는 것을 보고 심적으로 불안해했다고 한다. 이스라엘 저널리스트 마이클 엘킨스(Michael Elkins)에 따르면 사망하기 전날 아내가 영화를 보러 나간 사이 집에 모사드 요원들이 침입해 그에게 자살을 강요했다고 한다. 안 그래도 심적으로 몰려있었던 라크는 살해당하는 것보다는 자살하는 것을 택하고 스스로 목을 매달았다는 것이다.
    • 구스타프 바그너(Gustav Wagner): 소비보르 절멸수용소 소장으로 브라질에 숨어 살다가 1978년 시몬 비젠탈 센터에 발각되어 한 번 체포되었는데 당대 브라질 군사정권이스라엘, 폴란드 인민공화국, 오스트리아의 인도를 모두 거절함으로써 잔류할 수 있었지만 몇 년 지나지 않아 1980년 자택에서 가슴에 칼이 꽂힌 채 발견되었다. 가슴에 칼을 꽂아 죽이는 것이 당시 유대인들의 나치 전범 및 부역자들에 대한 주된 복수 방법이라는 것인지라 모사드의 소행이라는 주장이 있다.
    • 헤르베르츠 추쿠르스: 일명 '리가의 교수인(Hangman of Riga)' 혹은 '리가의 도살자'로 불리던 라트비아 부역자로 악명 높은 아라이스 의용대(Arajs Kommando) 소속이었다. 본래 라트비아의 비행사로 리가에서 도쿄감비아까지 비행 기록을 세우는 등 가히 라트비아의 찰스 린드버그라고 할 수 있는 라트비아의 국민 영웅이었으며 직접 국산 급강하폭격기추쿠르스 C.6bis를 맡아 설계할 만큼 라트비아의 항공계에 적지 않은 영향력을 발휘한 인물이었다. 그러나 빅토르스 베른하르트 아라이스를 만나고 아라이스 의용대에 가입한 후 급격하게 흑화하여 온갖 범죄 행위에 가담하게 된다. 그는 아라이스와 독일군의 수족 노릇을 자처하여 리가의 유대인들을 무자비하게 학살하였는데 룸불라 학살리가 시나고그 방화에 참여하였고 결과적으로 그의 의용대는 라트비아 거주 유대인의 절반을 죽였다. 전후에는 독일군 무리에 섞여 브라질도주했다. 그 곳에서도 사업체를 만들고 직접 비행기를 몰며 비행사 노릇을 했는데 여기서 정체를 숨기지 않고 활동하는 큰 실수를 범한다. 1965년 의도적으로 접근해온 모사드 위장 요원에게 우루과이에서 사업을 시작해 보라는 제안을 듣고 몬테비데오로 향했고 그 곳에서 그대로 모사드에 납치당해 근교로 끌려가 참혹하게 살해당한다.[5]
  • 주변 국가의 핵무기 개발에 관여된 사람들을 암살했다.
    • 야히야 엘 메스하드(Yahya El Meshad) 암살(1980): 이집트 출신 핵물리학자. 이집트의 핵 개발 프로그램이 동결된 후 바트주의 이라크로 옮겨 프랑스의 도움을 받은 이라크의 핵 개발 프로그램을 이끌다가 프랑스 파리의 한 호텔방에서 살해되었다.
    • 제럴드 불(1990.3.22): 캐나다인 대포 개발자로 사담 후세인바트주의 이라크에 협력하다가 총격으로 암살당했다. 암살 전부터 누군가 미행하는 것 같다든지, 집에 돌아와보면 가구 배치가 바뀌어 있다든지 등의 반응으로 박사는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였는데 이것을 모사드의 경고로 해석하기도 한다. 문서 참조.
    • 무하마드 슐레이만 암살(2008.8.1): 시리아군 준장. 시리아 바샤르 알아사드 정권에서 대통령 군사보좌관, 북한과의 핵 프로그램 협력 연락 담당자, 핵시설 보안 책임자로 있었다. 시리아 연안 도시의 휴양지에서 삼엄한 경호 속에 저녁 파티를 즐기던 중 별장 앞바다에 잠수해 대기하던 암살자가 발사한 총탄에 맞아 즉사했다. 경호원들은 아무도 총성을 듣지 못했다. 모사드와 이스라엘 해군 특수부대 '제13전단'의 공동작전으로 추정된다.
    • 2012년 이란의 핵개발 관련 과학자 4명이 연속으로 암살당했다. 참고 반이란 단체 및 망명 단체들이 모사드에 협조하는 경우도 많다고 한다. 팔레비 왕조 시절 비밀경찰 샤바크가 모사드와 동맹으로 서로 정보를 주고받았는데 호메이니 정부에게 샤바크는 철저하게 숙청당했고 일부 샤바크 관계자는 해외로 이민가서 지금까지도 반이란 활동에 나서고 있기 때문에 이들이 모사드와 은밀히 협력했다는 주장도 많다.
    • 모센 파크리자데(2020): 이란의 핵 과학자이자 아마드 프로젝트의 총책임자 모센 파크리자데를 암살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특히 원격조종기관총이 테러에 동원되었고 테러 직후 이 원격조종기관총 탑재 차량이 곧바로 자폭 처리되었다던가 테러 직전 외부 통신선 까지 차단한 사례들이 모사드로 확실시되는 분위기다. #
    • 하산 사이야드 호다에이(2022): 이슬람 혁명 수비대 쿠드스군 소속 대령으로 테헤란에서 운전 중 괴한에 의해 총에 맞아 사망했다.
  • 와엘 즈와이테르, 마흐무드 함샤리, 후세인 알 바시르 등 후술하는 뮌헨 올림픽 참사(1972)에 대한 보복 암살 작전을 벌였다. 검은 9월단에 의한 뮌헨 올림픽 테러가 발생하자 모사드는 검은 9월단 일원 13명을 9년 동안 추적하여 암살하였다. 영화 '뮌헨' 이 '신의 분노 작전'을 배경으로 만들어졌다.
    • 와엘 즈와이테르(Wael Zwaiter) 암살(1972.10.16): 이탈리아 로마에 살던 팔레스타인인으로, 야세르 아라파트의 조카이기도 하다. 직업은 번역가이고 저녁 먹고 집으로 돌아오다가 모사드 요원들에게 총격을 당해 사망했다. 즈와이테르의 지지자는 '검은 9월단과 관계없는 죄없는 지식인을 암살'했다고 비난하지만 이스라엘은 그가 검은 9월단의 사령관이라고 주장한다.
    • 마흐무드 함샤리 암살(1972.12): PLO프랑스 대표. 파리의 아파트에 살고 있었다. 모사드 요원이 이탈리아 언론인으로 위장해 아파트에 폭파팀이 잠입할 수 있게 함샤리를 속였다. 전화기가 있는 책상 밑에 폭탄을 설치한 후 함샤리에게 전화를 걸어 함샤리가 전화를 받는 걸 확인하자마자 부비트랩 폭탄을 터뜨렸다. 함샤리는 치명상을 입은 뒤 프랑스 경찰에게 사건의 전모에 대해 진술했고 몇 주 후 사망했다. 이스라엘은 그가 검은 9월단의 프랑스 총책이라고 주장한다.
    • 후세인 알 바시르 암살(1973.1.24): 요르단인. 키프로스파타당 대표. 호텔 방에 들어와서 불을 끄자 원격 폭탄이 폭발해서 폭사했다. 이스라엘은 그가 검은 9월단의 키프로스 총책이라고 주장한다.
    • 바시르 알 쿠바이시 암살(1973.4.6): 베이루트 아메리칸 대학교의 법학 교수. 파리에서 저녁 먹고 집에 가던 중 2명의 모사드 요원에게 12발의 총격을 맞고 사망했다. 이스라엘은 그가 검은 9월단의 무기를 운송했다고 주장한다.
    • 모하메드 유스프 알 나자르, 카말 아드완, 카말 나세르 암살(1973.4.9): 모하메드 유스프 알 나자르는 검은 9월단의 작전대장, 카말 아드완은 PLO의 작전대장, 카말 나세르는 PLO 최고위원회 위원이자 대변인. 레바논 베이루트에서 엄중한 경호를 받으며 살고 있었기 때문에 이들은 쉽사리 암살할 수 없었다. 'Spring of Youth' 작전을 통해 특공대를 보내 대규모 습격을 벌여 살해했다. 특공대는 민간인 복장을 하고 이스라엘 해군의 미사일 고속정에서 내린 조디악 모터보트를 통해 레바논 해안에 상륙했다. 모사드 요원들이 차를 렌트해서 특공대를 운송했다. 나자르의 부인, 이탈리아 민간인, 레바논 경찰 2명이 습격에 휘말려 함께 사망했다.
    • 자이아드 무차시 암살(1973.4.11): 키프로스에서 후세인 알 바시르의 후임자. 호텔 방에서 침대 밑의 폭탄으로 인해 폭사했다.
    • 아브델 하미드 시비, 아브델 하디 나카 암살(1973): 로마에서 차량 폭탄으로 인해 치명상을 입었다.
    • 모하메드 부디아 암살(1973.6.28): 알제리 출신. 프랑스의 검은 9월단 작전대장. 변장과 여장에 능했다. 카시트 밑에 너트와 볼트를 이용한 압력식 폭탄에 의해 사망했다.
    • 알리 하산 살라메 암살(1979): 검은 9월단의 지도자 중 1명인 알리 하산 살라메는 1973년 7월에 모사드의 암살을 간신히 피했다. 이후 CIA의 보호를 받아 모사드의 손에서 어느 정도 벗어났다. 1973년 11월 3일 CIA 부국장 '버넌 월터스'는 수단 주재 미국대사 암살 이후 야세르 아라파트를 만나 'PLO가 미국인에 대해 테러를 하지 않는다'라는 비밀 약속을 했다. PLO는 중동 지역 테러 정보를 CIA에 제공해서 미국인들이 좀 더 안전하게 중동에서 활동할 수 있게 되었다. 아라파트는 CIA와의 연락책으로 알리 하산 살라메를 지명했고 그는 미국 CIA 본부 건물에 초청받아 드나들었다. 모사드는 CIA에게 알리 하산 살라메와의 연락을 끊으라고 요구했으나 CIA는 정보적 가치가 높다는 이유로 거부했다. 알리 하산 살라메는 결국 1979년 베이루트에서 폭탄으로 모사드에게 암살당했다. 당시 모사드의 책임자는 '라피 에이탄'으로, 전설적인 공작 책임자였다고 한다. 레바논 민간인 8명이 주변에서 함께 사망했다. 모사드와 CIA의 관계는 급속히 냉각되었다.
  • 이런저런 팔레스타인 무장단체들의 지도자 암살 사건에 관여한 것으로 추정된다.
  • 암살에 실패한 적도 있다.
    • 알리 하산 살라메 암살 실패 (1973.7): 모사드는 노르웨이릴레함메르[7]에서 모로코인 웨이터 '아흐메드 부치키'를 검은 9월단의 지도자 중 하나인 알리 하산 살라메로 착각해서 살해했다. 알리 하산 살라메는 그 도시에서 식당 종업원으로 숨어 지내고 있었다가 모사드의 암살 시도를 간신히 모면했다. 모사드 요원들은 아흐메드 부치키를 임신한 노르웨이인 아내가 보는 앞에서 총으로 쏘아 죽였다. 살해한 요원 중 6명(남성 4명, 여성 2명)이 작전에 사용했던 자동차를 버리지 않고 그 차로 공항으로 가다가 노르웨이 당국에 살인죄로 체포당했다. 이 사건에서 체포당한 요원들이 활동 내용을 자백하는 바람에 모사드의 유럽 내 활동에 큰 타격을 입었다. 모사드가 힘을 써서 2년만에 전부 풀려날 수 있었지만 그 대가로 유럽 내 안전가옥을 비롯한 비밀공작 인프라를 거의 상실했고 유럽 내 활동은 이후 몇 년간 완전히 중단되었다. 여성 요원 중 '실비아 라파엘'은 자신을 담당하던 현지 변호사와 사랑에 빠져 출옥 후 결혼했고 1992년 남편의 출생지인 남아공으로 이주해 버렸다. 이 사건은 이라크로부터 당시 최신형 소련제 미그기를 탈취하는 작전 이래 그간 비교적 승승장구하며 꽤 주목할 만한 첩보계의 플레이어로 주목받던 모사드에 타격을 준 이른바 릴레함메르의 실패라는 사건으로 기록되었다. 작전목표 달성 실패는 물론 이 때문에 유럽 내 공작망이 붕괴되어 재구축할 때까지 많은 시간이 걸렸다고 한다. 이 사건은 이후 모사드의 요원 훈련 교범 및 코스에서 주 교훈으로 삼는 실패 사례가 되었다고 한다. 1996년 이스라엘 정부는 사죄하며 유족에게 배상금을 지불했다. 비록 공식적으로 이 사건을 인정하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알리 하산 살라메는 결국 이 사건으로부터 6년 후인 1979년에 폭탄으로 암살당했다.
    • 알로이스 브루너: 수많은 유대인들을 수용소로 보내며 홀로코스트에 관여한 친위대 출신 나치 전범으로 시리아 정부의 국빈으로 보호받으며 첩보 교육을 했다. 모사드에서 1961년, 1980년 두 번 우편폭탄을 보냈지만 목숨에 지장이 없었고 한 눈과 손가락 1개를 잃는 데 그쳤다. 2010년 시리아에서 98세로 천수를 누리고 사망했다.
    • 칼레드 마샬 암살 실패(1997.9.25.): 하마스의 간부. 베냐민 네타냐후 총리가 지시하여 캐나다 여권을 소지하고 요르단으로 여러 명의 요원이 입국해 칼레드 마샬의 귀에 독극물을 주입했는데 경호원이 암살단 중 2명을 현장에서 붙잡았다. 요르단 국왕 후세인 1세가 격분해 '이스라엘이 해독제를 넘겨주고 요르단과 3년간의 평화협정을 맺어야 요원들을 풀어주겠다'라고 조건을 제시했다. 캐나다여권을 도용당해 항의했고 미국의 빌 클린턴 대통령이 당시 중동 평화 협상을 이끌던 중이라 모사드에 불만을 표했기 때문에 모사드는 해독제를 보내 주었으며 투옥 중이었던 하마스 지도자 셰이크 아흐메드 야신을 포함해 하마스 조직원 22명을 석방했다. 칼레드 마샬은 이 사건을 계기로 하마스 최고지도자가 되었다. 요르단도 모사드 요원 2명을 풀어주었다. 당시 모사드의 최고책임자였던 다니 야톰 국장[8]은 욕을 엄청나게 먹어야 했다. 다만 이 때 풀려난 셰이크 아흐메드 야신은 2004년 공습으로 암살당했다.
    • 아부 다우드 암살 시도(1981.8.1): 검은 9월단의 수장이며 PLO의 유력한 지도자. 바르샤바에서 5발을 저격당했지만 생존했다. 당시에는 모사드의 관여 만 나돌았지만 결국 모사드가 고용한 PLO 이중간첩의 소행으로 밝혀졌다.[9]
    • 아리베르트 하임: 마우트하우젠 수용소의 의사였던 그는 전후 외국으로 도망쳤다는 사실만 알려졌을 뿐 워낙 자신의 신상 노출에 민감했던 탓에 모사드조차도 장장 2009년까지 행방을 쫓았지만 이미 1992년카이로에서 죽어 있었다. 프랑스, 스페인, 모로코를 거쳐 이집트에서 관심이 사라질 때까지 대기한 후 최종적으로는 남미로 가려고 했지만 예상 외로 빨리 잊혀지자 카이로에 정착하여 이름도 아랍식으로 바꾸고 이슬람으로 개종까지 한 후 카이로의 한 호텔에서 정체도 과거도 숨긴 채 외부 연락도 전부 끊고 사진조차 찍지 않아 모두의 추적을 피할 수 있었다. 하임 본인도 이집트이스라엘과 화평하여 자신이 이스라엘로 압송당할 것을 평생 두려워하며 살았다고 한다.
  • 2023년 이스라엘-하마스 전쟁 관련자를 추적/암살한 것으로 추정된다.[10]
    • 야히야 신와르: 이스라엘로썬 반드시 무조건 제거해야할 순위. 신와르는 수감중에 히브리어를 터득했고 유대 역사까지 배웠으며 인질 협상과정중 신와르가 석방되면서 하마스의 지도자가 되었다.[11] 김일성마냥 이스라엘에게 화전양면전술을 썼으며 이스라엘이 서안 지구로 집중 투입되면서[12] 신와르는 기회를 노리고 10월 7일 기습을 감행했다. 이스라엘은 크게 분노했고 보복 명분하에 가자지구를 침공하고[13] 특수부대며 공병들을 대거 투입하면서 신와르를 추적중에 있었다. 결국 신와르는 2024년 10월 16일 가자 지구 남부를 순찰하던 이스라엘군에게 정말 우연히 걸려서 허무하게 사살당했다.
    • 이스마일 하니예(2024.7.31.): 하마스 정치국장, 2024년 7월 31일 이란 혁명 수비대가 "하니예가 이란 테헤란이란 대통령 취임식에 참석하던 중 살해됐다."고 밝혔다.# 하마스도 하니예의 사망을 공식적으로 발표했으며, 암살의 배후로는 이스라엘을 지목했다. # 피살장소가 이스라엘 영토도 아닌 이란의, 심지어 수도에서 암살된만큼 하마스의 지도층 제거뿐만 아니라 이란에 대한 도발을 노린게 아니냐는 의견도 있다. 2024년 이스라엘 이란 공습 등 이란에 대한 가시적인 적대행위가 증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만 새로 취임한 마수드 페제시키안 대통령이 온건 개혁파인데 수도에서 이런 테러행위가 벌어져 상당히 곤란한 처지에 처했음은 분명하다. 그러나 하니예는 온건파였고 살해되고나서 강경파인 신와르가 기회삼아 지도부에 선출되고 그동안 중단되었던 자살테러가 재개하는 후폭풍이 오게 되었다.
    • 모하메드 데이프: 사진에 찍힌 것도 20년 전이었으며[14] 공습 9번에 직접 타격에도 살아남아서 '사기를 올리기 위한 가상인물 혹은 죽을 위기를 매번 넘기는 전설적 인물'로 평가할 정도였다. 데이프의 아버지와 그의 형제들은 공습에 몰살되었지만 아들인 데이프는 그 자리에 없었다. 2024년 7월 중순에 사망한 걸로 확인되었고 데이프 일가는 완전히 사라지게 된 셈이다.
    • 하산 나스랄라(2024.9.27.): 레바논의 시아파 정당이자 반이스라엘의 무장단체인 헤즈볼라의 대표를 32년 동안 역임한 인물로 2006년 헤즈볼라와의 전쟁 중 그의 집을 미리 알아내 급습했지만 나스랄라가 이미 눈치채고 도망가서 암살에 실패하였다. 18년 후인 2024년 헤즈볼라 지휘부 공습에서 이스라엘은 2006년의 실패를 거울삼아 철저하게 준비하였고 헤즈볼라 수뇌부가 회의 중인 지하 벙커에 벙커 버스터인 BLU-109 탄두를 탑재한 JDAM 100발을 때려박아 끝내 제거하였다. 이 때 같이 있던 이슬람 혁명 수비대 파견 인원들도 즉사하였다.

4.1.1. 2010년 암살

2010년 1월 20일에 두바이에서 일어난 하마스의 지도자 '마무드 마부'(50) 암살 사건의 배후로 추궁당하고 있다. 자세한 사항을 알고 싶다면 본 기사기사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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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번, 8번,10번 아담 마커스 ,15번 게일 폴리어드[A], 16번[A] 21번[A] 위 22명 외에도 바니 가브리엘라[A], 니콜 산드라 등 4명의 범인이 더 있었다. 이 암살팀 중의 1명이 아래에 나오는 호주 이중간첩 '죄수 X'였다.

26명의 범인이 5개 국적의 위조여권을 이용해 4곳의 공항에서 입국해서 19시간만에 암살을 저지른 뒤 7곳의 공항으로 탈출했다. 서로간의 연계점이 없게 보이기 위해 택시도 모두 따로 타고 호텔도 각각 다른 곳에 투숙했으며 신분 추적이 안 되게 하려고 위조여권, 선불제 휴대폰 7개, 다른 사람의 명의로 발급받은 신용카드 17개를 사용했다. 암살 용의자 중 8명은 1년 전부터 4차례 이상 두바이를 들락거렸다.

공항 대기조, 호텔 정찰조 여러 팀, 암살 실행조 등 여러 팀으로 나누어 임무를 수행했다. 테니스복 차림에 테니스 라켓을 든 남성 2명이 알 마부를 미행해 객실 번호를 알아냈다. 이후 남녀 2인(아래의 '게일 폴리어드' 포함)이 객실 내에 실제로 그가 있는지 알아냈다. 이후 게일 폴리어드와 함께 건장한 체구의 남성 4명이 방으로 들어가 20분만에 알 마부를 암살하였다.[19] 방법은 전기쇼크로 일단 기절시킨 뒤 썩시닐콜린[20]를 투여해 깨어나도 저항하지 못하게 조치한 다음 베개로 질식시킨 것이다. 현장 요원들이 몇몇 멍청한 짓을 저지르지 않았다면 감전에 의한 쇼크사로 오인될 뻔 했다.

호텔 CCTV에 수차례 인물들이 드나드는 장면이 포착되었는데 CCTV에 사진이 찍힐 때마다 용모와 복장을 지속적으로 바꾸었기 때문에 전혀 수상해 보이지 않았다. 밝은 미소를 띄면서 사회성 좋게 호텔 직원들과 이야기했던지라 전혀 음침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암살단은 범행이 이뤄진 호텔 외에 알마브후흐가 두바이에서 머물 때 자주 이용했던 호텔에도 여러 명의 요원을 배치한 것으로 드러났는데 상황에 따라 제2, 제3의 작전 시나리오까지 준비했음을 추정할 수 있는 대목이다. 마부 역시 암살에 대비해 이런저런 조치를 취했는데 독극물을 두려워해 확실한 음식 외에는 절대 음식을 먹지 않았고 자신이 어느 나라에 가는지 최대한 알리지 않으려고 노력했지만 모사드의 행동은 그의 대비보다 훨씬 치밀했다.

여권위조를 비롯한 여러 국제법 위반이 줄줄이 비엔나처럼 묶인 사건이라서 이러한 이스라엘의 '초법적 처형'이 많은 국제사회의 비난을 불러일으켰다.

영국 중대조직범죄청(SOCA)이 이스라엘에 수사관을 보내 위조 여권 사용경위를 조사하여 밝혀진 위조 수법은 이스라엘에 영국인들이 입국할 때 이스라엘 공항 직원들이 영국인의 여권을 체크한다면서 가져갔다가 복사하여 개인정보를 빼낸 뒤 20분 후 돌려주는 방식이었다. 2010년 3월 영국이 국내 주재 중이던 모사드 관련 이스라엘 외교관을 추방하였는데 영국에 입국할 때 모사드 암살요원들이 소지한 영국 위조여권이 모사드와 관련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게일 폴리어드(가명)는 이 암살의 주요 실행범 중 하나다. 게일은 복도에서 휴대폰을 들고 누군가와 통화하는 척하면서 목표물이 방에 들어가는지, 다른 투숙객이 지나가지는 않는지 감시했으며 호텔 직원을 가장해 목표물이 거부감 없이 방문을 열도록 유도했다. 살해 후에는 빠져나가면서 방문에 '방해하지 말아 주십시오'라는 표식을 걸어놓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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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 외국인 관광객을 방불케 하는 평범한 옷차림.

마부가 암살당한 이유는 다음과 같다. 2008-2009년 가자 전쟁에서 하마스는 이란제 다연장로켓을 사용했는데 이스라엘 군부는 이걸 알고 충격을 받았다. 이란에서 무기를 반입한 인물이 누구인지를 추적한 결과 알 마부인 것으로 추측되었다. 하마스 지도부 중에서도 극소수만이 그의 활동을 알고 있었다. 2010년 초 알 마부는 가자 지구에 있는 친척에게 휴대폰으로[21] '두바이에 간다'고 무심결에 얘기했으며 인터넷으로 자신이 숙박할 호텔을 예약하기도 했다. 모사드는 사실 확인을 위해 팔레스타인에서 하마스의 앙숙인 파타의 협력자들로부터 추가정보까지 입수했다.

이만큼 자세하게 사건의 경위가 알려지고 현장에 전혀 출입하지 않은 요원들의 위조여권까지 발각된 것은 암살임이 발각되었기 때문이다. 게일 폴리어드(가명)가 CCTV를 보고 윙크를 했고 암살 직후 요원들이 우르르 몰려서 호텔을 빠져나가는 모습이 CCTV에 포착되었다. 그러자 두바이 경찰이 엄청난 양의 CCTV 데이터를 분석해서 모든 상황을 추적하였다.

4.2. 납치

나치 잔당을 색출해 납치하여 자국에서 재판했으며 이미 사망했을 경우 사망 사실이라도 확인하기 위해 노력했다. 나치 독일SS 중령이었던 오토 스코르체니를 포섭하여 나치 잔당 사냥을 함께 하기도 했다.[22]
  • 아돌프 아이히만: 유대인 강제수용소 설치와 학살을 지휘했던 주역이다. 15년 동안 추적해 1960년 아르헨티나에서 잠복해 있었음을 알아냈고 국제법을 무시하고 납치해서 국내법을 고쳐 가면서 사형을 시켰다. 이스라엘로 압송한 뒤 재판 자체는 정상적으로 하긴 했지만 납치 자체가 문제다. 이것은 명백한 국제법 위반임에도 불구하고[23] 당시 세계 언론들은 "아이히만이 나쁘다"는 보도만 줄기차게 해댔다고 한다. 그만큼 당시 세계가 나치를 어떤 이미지로 생각했는지 알 수 있는 부분이다. 다만 공소시효가 없는 반인륜 범죄자였고 어차피 연합국에 잡혔어도 사형 아니면 최소 무기징역이라 살아서 감옥을 나갈 가능성은 없었다.
  • 요제프 멩겔레: 생체 실험의 주역이었다. 시체가 확인될 때까지 40여 년을 쫓아다녔는데 결국 잡지는 못했지만 죽을 때까지 악몽에 시달리게 했다고 한다. 멩겔레는 생전에 아이히만과 만난 적이 있고[24] 아이히만이 교수형되는 것이 생중계되는 그 순간까지 살아 있었기 때문에 자신이 붙잡혀서 아돌프 아이히만처럼 교수형에 처해질 것을 굉장히 무서워해서 집 주변에서 조금이라도 소리가 나면 깜짝 놀라 밖을 내다보았으며 불면증에 시달리거나 여러 가지 정신병적인 행태를 보였다고 한다. 80년대에 뒤늦게 이스라엘과 서방의 추적이 시작되었지만 1979년에 수영을 하다가 심장마비로 익사하는 바람에 미수로 처리되었다.
  • 모르데카이 바누누: 내부고발자. 이스라엘인이지만 자국의 핵무기 보유 여부를 폭로했으며 팔레스타인도 독립할 자격이 있다고 하여 이스라엘 정부를 빡치게 만들었다. 이 때문에 직장에서도 해고당해 영국으로 망명했는데 1986년 9월 모사드 공작원의 미인계에 유혹당해 이탈리아에서 납치된 뒤[25] 온갖 가혹행위를 당하며 심문을 받았고[26] 결국 간첩죄[27]로 그냥 징역도 아닌 무기징역이 선고됐다. 내부고발자에게 내린 형벌이니까 소위 양심선언하면 이렇게 된다고 그야말로 시범케이스로 당한 셈이다. 다만 당시 이스라엘 법제상 가석방 없는 무기징역이 불가능했기 때문에 무기형으로 복역했는데 시범케이스 아니랄까봐 18년간 2004년에 출소할 때까지 법적으로 가능한 처우를 최대한 가혹하게 했다.[28] 18년이라는 복역기간 중 무려 12년간 독방에 감금됐고[29] 창문 없는 좁은 방에서 24시간 전등이 켜진 채로 지내다가 2년 반이 지나서야 교도소 측이 밤에는 전등을 꺼 줘서 낮과 밤을 구별할 수 있었다. 다른 수감자에게는 허용되는 신문, 라디오, TV도 상당히 오랜 기간 위험인물이라는 이유로 금지됐으며 면회도 기밀 유출 가능성을 핑계로 직계가족과 변호사에게만 허용됐다.[30] 이스라엘 보수파들과 하레디들은 반역자이니 이렇게 당해도 싸다고 주장한다. 그나마 인권단체의 정부 비난 등에 힘입어 형기를 다 채우지는 않고 가석방되긴 했지만 출소 후에도 해외로의 이민이 금지당하며 가택 연금되어 있고 전화와 인터넷은 이스라엘 정부에서 감시받고 있으며 외국인과의 접촉도 금지하고 있다. 이렇게 접촉을 차단해도 어떻게든 계속 양심선언을 하면서 버티고 있고 이스라엘 정부도 세계에 이름이 워낙 퍼진 유명한 내부고발자라 팔레스타인 간부들처럼 대놓고 자살로 위장된 타살로 죽일 수도 없기 때문에 통제하는 것도 지쳤는지 노르웨이 이민을 허용하는 것을 검토 중이라고 한다. 거꾸로 대놓고 납치할 지도 모른다.

4.3. 첩보 수집 및 분석

  • 성공한 사례
    • 이집트계 유대인인 정보원 엘리 코헨이 감쪽같이 신분을 속여 시리아 내부로 은밀히 침투했고 시리아 국방차관까지 올라 시리아 내부의 주요 알짜 정보들을 전부 본국으로 전송해 3차 중동전에서의 승리에 크게 기여했는데 특히 그동안 베일에 휩싸였던 골란 고원의 시리아군 주요 요새와 진지들을 전부 파악했고 시리아 병사들을 위한 그늘을 제공한다는 명목으로 나무들을 설치해 이스라엘군은 시리아군의 주요 벙커 위치를 단번에 파악할 수 있었다. 시리아에서도 어찌나 충격이 컸는지 나중에 발각되자 그를 교수형에 처한 후 한동안 시신을 그대로 걸어 두었을 정도였다.
    • 1967년 제3차 중동전쟁 당시 모사드는 이집트군의 레이더 기지 근무자들의 신상정보와 교대시간, 심지어 식사시간까지 입수하여 이들이 교대시간에 레이더 화면을 잘 안 본다는 사실을 이용해 프로펠러 폭격기에 연료를 최대한 싣고 각 레이더 기지의 교대 시간을 틈타 저공으로 침투하는 식으로 후방에 있는 이집트군 공군기지 기습을 성공시켰다.
    • 1981년 6월 이스라엘 공군이 이라크의 오시라크 원자로를 폭격하였다. 모사드에 의한 상세한 사전조사가 바탕이 되었다고 한다.
    • 1981년 요한 바오로 2세 암살 미수 사건 진상 파악에 관여했다. CIA는 배후를 KGB로 추측하였으나 모사드는 친이란계 테러조직에 의한 사건임을 밝혀내고 교황청에 은밀하게 보고했다. 이를 계기로 이스라엘의 반기독교적 행동으로 냉각되었던 이스라엘에 대한 교황의 태도는 현격히 순화됐고 이스라엘과 바티칸의 수교를 허용했다. 신문기사
    • 조너선 폴라드: 1985년까지 미 해군 정보 분석관으로 일하면서 이스라엘 대사관 공군 무관과 협조하며 1년 반 동안 특급 기밀을 누출시켰다.
    • 2004년 룡천역 열차 폭발사고의 사망자 명단에 이란의 핵개발에 참여했던 12명의 시리아 국적 핵물리학자들이 있음을 확인한 모사드는 즉시 북한과의 핵개발 커넥션 조사에 착수했고 그 결과 2007년 9월 5일 이스라엘은 시리아가 북한의 도움을 받아 비밀리에 건설 중이던 핵시설을 폭격, 파괴했다. 이 작전의 결정적인 단서는 런던의 한 호텔에 투숙 중이던 시리아 고위 관료의 방에 몰래 침투해 그의 노트북에 해킹 장치를 설치해 확보했다. 기사
    • 2018년 1월 적국 이란의 수도인 테헤란의 슈러버드 지역의 비밀창고를 2년간 감시하다가 한번에 급습하여 CD 183장과 문서 5만 5000여 쪽을 슬쩍했다. 유튜브 이 자료들은 4월 30일 베냐민 네타냐후 총리가 직접 TV 연설에서 이란의 비밀 핵무기 개발 계획이라며 방송했고 북미정상회담을 앞두고 있던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한테도 전달되었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란은 핵협정 지키기 않을 거라는 내 말이 맞다고 말했다고 한다.[31]
    • 2020년 1월 이슬람 혁명 수비대 쿠드스군 사령관 가셈 솔레이마니가 이라크 친이란 민병대 카타이브 헤즈볼라 부사령관 알무한디스와 함께 미군의 드론 공격에 폭살당했는데 그 과정에서 모사드가 솔레이마니의 행보에 관한 많은 정보를 제공해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 2024년 레바논 및 시리아 무선호출기 폭발의 배후로 추정되고 있다.
  • 실패한 사례도 있다.
    • IAI 크피르 개발을 위해 스위스에서 면허생산 기술자를 포섭하여 미라주 III의 도면을 빼돌릴 때도 도면 20여만장이 담긴 가방 5개 중 마지막 1개가 이웃 주민의 신고로 걸려 관련자들이 산업 스파이 혐의로 감옥에 갔다. 그럼에도 나머지 4개 가방의 도면을 이용하여 스네크마 아타 9C 엔진의 재현에 성공했다.
    • 1964년 모로코 출생 이스라엘 이중간첩 'Josef Dahan'이 붙잡혀 이집트로 압송되던 중 로마 세관에 의해 구출된 적이 있다. 로마에 있는 이집트 대사관 명의로 외교행낭 상자에 넣어서 이집트로 우편 배송하려고 시도했다. 외교행낭은 국제법적으로 개봉이 엄금되어 있으나 세관원들이 사람의 신음소리를 듣고 강제로 개봉해서 구출했다. 그는 마취당한 채 묶여서 발견되었다.
    • 1973년 제4차 중동전쟁의 발발 예측에 실패한 것은 모사드의 큰 잘못이었는데 이는 첩보 부족 탓이 아니라 첩보 해석을 둘러싸고 군사정보기관 '아만'과 총리 직속기구인 '모사드' 사이에서 의견이 대립하다가 정부가 아무 조처를 취하지 못한 문제였다.
    • 1998년 1월 19일 스위스 베른에서 전화도청 장비를 설치하다가 옆집 아줌마의 신고로 경찰에 1명이 체포당했으며 도청 장비도 압수당했다.
    • 2005년 3월에 뉴질랜드에서 모사드 요원들로 추정되는 2명의 인물들이 체포되어 6개월형과 미국 달러로 32,500달러의 벌금을 뇌성마비 환자들을 위한 기부금으로 내라는 판결을 받았다.BBC 영어기사 이스라엘 출신인 Uriel Zosha Kelman와 Eli Cara는 모사드와 관계가 없다고 주장했으나 결국 유죄 판결을 받았다. 내무부에서 이 둘의 입국심사 과정에서 이상한 점을 알아낸 후 전화를 도청하는 등의 감시를 한 후에 체포하였다. 이 둘은 위조여권을 통해 입국한 뒤 범죄조직들과 일한 적이 있음이 밝혀졌다. 각각 2개월, 3개월 뒤에 이스라엘로 추방됐다고 한다. 당시 헬렌 클락 정부는 이스라엘 대사의 입국을 취소시켰고 사과를 요구해 정식으로 이스라엘 정부의 사과를 받아냈다.
    • 2010년에 일어난 크라이스트처치 대지진 때 타고 있던 승합차가 돌에 깔려 사망한 이스라엘 여행객에게서 5개의 위조여권이 발견되었고 혼잡한 틈에 12시간도 안 되어 이스라엘 대사와 몇몇 이스라엘 여행객들의 행방이 묘연해졌다. 복구작업을 위해 투입된 뉴질랜드 SAS가 이들의 흔적을 조사했다고 한다.[32] Stuff 뉴질랜드 (영어)
    • 모사드의 내부 배신자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그 중 하나로 2013년 초에 2010년 이스라엘의 비밀 감옥에 수감 중 사망한 '죄수 X'라는 죄수가 호주 출신의 모사드 요원이었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언론 보도에 따르면 이 요원이 2010년 2월의 하마스 지도자 '마무드 마부' 암살 작전에 참가했는데 민감한 정보를 출신국인 호주 정보부에 넘기는 등 이중간첩 행위를 하다가 발각되어 체포당하고 감옥에서 의문의 죽음을 당했다고 한다. 한편으로는 모사드조차 이런 일을 겪을 정도로 이중간첩이 무서운 존재라는 것이 드러난 셈이기도 하다.
    • 2015년 12월에는 독일에 주문한 돌핀급 잠수함(209급 잠수함의 파생형)을 독일 영내에서 호위하는 임무를 맡았으나 작전에 사용한 승용차가 독일 북부의 킬 운하 근처 습지에 빠져 버렸다. 이웃 주민의 신고로 지역 소방서에서 출동했으나 소방차마저 갇혀 버렸고 결국 다른 주민이 트랙터를 끌고 와서 차를 빼내는 데 성공했다. 이 지역 당국에서는 소방대 출동 비용을 주 독일 이스라엘 대사관에 청구했다. Times of Israel (영어)
    • 2021년 10월 22일에는 튀르키예 정보당국(MIT)에 의해서 15명의 모사드 요원들이 적발되기도 하였다. Time of Israel 기사
    • 2022년 10월 17일에는 말레이시아에서 모사드와 연계된 현지 요원이 하마스와 관련된 팔레스타인인을 납치하려다가 실패했고 결국 경찰에 의해서 체포되었다.기사
    • 2023년 이스라엘-하마스 전쟁 발발 당시 이스라엘 측에서 하마스의 대규모 공습을 전혀 예상하지 못한 모습을 보이면서 이스라엘 내에서 민간인만 1300명 이상의 사망자가 나오는 대참사를 야기하고 말았는데 이는 모사드 역사상 가장 큰 실패이다. 어찌나 피해가 컸는지 베냐민 네타냐후 정부가 일부러 알고 있었음에도 방기한 것이 아니냐는 주장이 나돌 정도이다. 온건파인 이스마일 하니예가 암살당하고 강경파인 야히야 신와르가 지도부에 선출되자 하마스가 20년만에 자살테러 재개하면서 과격적인 근본주의로 보이게 되었다.[33]
  • 주변 중동 국가에 대한 군사작전에 대한 정보를 수집했다.
    • 이라크의 MiG-21 파일럿 귀순: 제3차 중동전쟁 직전에 미인계이라크 파일럿을 유혹해 MiG-21과 함께 귀순하도록 만들기도 했다. 해당 파일럿은 이라크의 소수 민족 아시리아인으로 아시리아인들은 3세기부터 기독교도였기 때문에 19세기에는 심한 핍박을 받았으나 1960년대에는 사담 후세인바트당 치하에서 비교적 우대를 받았는데 이는 바트당의 사상적 기반 구축에 아랍 민족주의자들과 더불어 바로 아시리아 기독교도들이 초기 정당 구성원 및 지도자의 상당수를 차지했기 때문이다.[34] 아시리아인들은 후세인 정권이 무너지자마자 곧바로 핍박받기 시작한다. 유명하지는 않지만 이 사건을 배경으로 만들어진 영화도 있는데 망명을 선택하기 까지의 이라크 파일럿의 심정변화 등을 잘 그린 편이다.
  • 미국 FBI 요원에 따르면 냉전 시절 모사드의 미국 내 활동은 소련 다음으로 활발했다고 하는데 이를 뒷받침할 만한 근거로 FBI의 대이스라엘 첩보 부서의 규모가 소련 데스크 다음으로 컸다는 점을 들 수 있다.
    • 위험에 처한 유대인 및 자국민 구출
  •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 사태에서 모사드가 이런저런 루트로 검진키트 10만개를 가져왔는데 정작 제일 중요한 시약을 안 가져와서 아무짝에도 쓸모없어지는 실수를 저질렀다. 해당 진단키트는 한국산으로, 대한민국 정부가 이 사실을 알고 있었는지는 불명확하다.

5. 조직 문화

모사드는 다른 나라의 해외 정보기관과 마찬가지로 매우 위험한 일들을 많이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어려운 임무를 성공시키기 때문에 굉장히 주목받고 있다.

다음을 성공 요인으로 생각해 볼 수 있다.
  • 방첩기관(신 베트), 해외정보기관(모사드), 군사정보기관(아만)의 분리가 확실히 이루어져 있다.
  • 전 세계에 유대인 협조자가 있다. 2000년대에는 약 35,000명 정도로 추측되었다. 아래의 타국 주권 무시와 함께 작전 성공률이 높은 이유를 차지한다. 다만 이 사실이 알려지고 나서 유대인들에 대한 시선이 나빠지자 최근에는 해외의 유대인들이 이스라엘에 등을 돌리는 사례가 늘어나면서 모사드의 영향력이 눈에 띄게 약해지는 추세다.
  • 대놓고 타국의 주권을 신경쓰지 않는 국제적인 암살 행위를 하는 것을 국가 차원에서 공인하고 있다. 다른 선진국들은 막나가던 냉전 시절의 미국조차도 같은 서방 진영에서는 타국의 주권 침해를 하지 않거나 드러내지 않았는데 이스라엘은 대놓고 이민국에서 위조 여권으로 쓸 외국인의 신분증을 복사해서 공급해 준다. 암살을 위한 각종 독극물과 장비의 개발 및 공급도 모사드가 대놓고 공식적으로 요인 암살을 업무로 내세우는 만큼 충분한 국가예산으로 이루어진다. 그래서 살인, 납치, 여권 위조, 절도 등을 하지만 총리가 외교부를 통해 다 막아 주기 때문에 현장 공작 요원들은 외교적 문제 같은 것을 신경쓰지 않고 국가에 가장 이익이 되는 형태로만 행동하면 된다.[35] CIA의 비호를 받고 있던 알리 하산 살라메도 암살당했으며 이로 인해 CIA와 모사드의 관계도 냉각되었지만 이런 외교적 페널티조차 꺼리지 않는다. 알리 하산 살라메 암살 실패 당시에는 노르웨이와 단교 직전까지 갔고 캐나다 여권을 도용하다 캐나다와도 단교 직전까지 갔던 적이 있다. 폭탄을 사용할 경우 무고한 민간인이 함께 죽기도 하지만 반드시 보상을 해 주는 것은 아니다.
  • 테러리스트가 아닌 경우 암살하지 않고도 다른 방법으로 보복을 가하기도 하는데 대표적인 사례가 오토 웜비어다. 유대인인 오토 웜비어가 고문으로 인해 사망하자 부자인 부모는 모든 연줄을 동원해 보복에 나섰는데 모사드도 도와주었다고 한다.
  • 작전에 있어 이득이 된다면 상대가 누구든 가리지 않고 손을 잡는다. 설령 그 대상이 나치 독일 출신이라고 하더라도 유대인 학살에 관여한 이력만 없다면 영입할 정도다. 일례로 과거 나치 친위대의 특수작전 전문가이자 중령이었던 오토 스코르체니를 요원으로 고용한 전력이 있다.
  • 국장의 임기가 5년 가량으로, 여타 첩보기관에 비하면 매우 긴 편이다. 총리의 위상을 돋보이기 위해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서 충분히 소신대로 움직일 시간적인 여유가 있다.[36]
  • 암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아 항상 변화무쌍해서 적들이 대응하기 어렵다. 베개로 눌러 질식사시키기도 하고 이동전화나 책상 아래, 카시트 등에 부비트랩을 설치하기도 하며 총으로 쏘아 죽이기도 하고 귀에 독극물을 부어 죽이기도 한다. 차량이 도착할 만한 장소에 폭발물을 설치해 놓기도 하며 달리는 차량에 오토바이를 탄 사람들이 접근해 자석으로 폭탄을 붙이기도 한다. 거기다 절도, 미인계, 협박 등 별의별 테크닉이 이용된다. 굉장히 창의적인 수단이 많이 동원되는 것을 보아 첩보기관치고는 혁신적인 내부 조직문화가 뒷받침되는 것으로 추측된다. 적들이 대응했다 싶으면 유령회사를 차려서 무선호출기를 민간인에게는 그대로 팔지만 테러리스트다 싶으면 폭탄을 넣고 팔아버린다.[37]

6. 중국과의 관계

모사드는 중국 국가안전부 MSS와 매우 독특한 관계를 지니고 있었다. 지난 50년 동안 모사드는 MSS와 함께 공작활동을 벌여왔는데 사실 이스라엘은 처음부터 중국과 함께 공작활동을 벌인 것이 아니었다. 1964년 MSS가 아프리카로 요원들을 보내 아랍 테러리스트를 지원하며 이스라엘을 공격하라고 부추겨 시비를 걸었는데 빡친 모사드는 케냐, 가나, 콩고, 잠비아 등 곳곳에서 차량 폭파, 총기 암살, 약물주사 후 사자와 악어 먹이로 던지는 식으로 MSS 요원들을 마구잡이로 암살했다. 당시 MSS는 수십 만 명의 인력과 소련의 KGB에 맞먹는 예산을 갖고 있었지만 악명 높기로 유명한 모사드에게 승리는 거두지 못하였다. 심지어 아프리카로 갔던 MSS 요원들이 속속 죽어나갔으며 시신도 못 찾을 정도였다. 물론 피해는 모사드 측도 만만찮게 심했다.

물론 이스라엘중국과 전쟁할 생각이 없어서 대놓고 적대하지 않았으며 중국도 빡쳐도 이스라엘의 태도를 알기 때문에 모사드한테 엿먹을 때마다 간접적인 보복만 했지 전쟁은 생각하지 않았다. 모사드는 그렇게 MSS와 치고박고 하다가 KGB가 멀티를 시도하자 모부투 자이르 대통령을 앞세워 휴전을 제의하고 함께 KGB를 막자는 제안을 했다.[38] 이후 중국이스라엘과 급속히 친해졌고 나중에는 서로 함께 미국의 주요 연구소를 털기도 했다. 2005년 5월 5일 중국 MSS, 인민해방군 정보국과 함께 미국의 핵무기 연구소인 로스 앨러모스에서 가짜 화재를 일으킨 뒤 중요한 핵무기 정보가 든 하드 드라이브를 해킹했다. 당시 미국 정부는 로스 앨러모스의 이 하드 드라이브를 분실한 것으로 생각했는데 한 달 뒤 구석에 숨겨져 있던 하드 드라이브를 발견하여 난리가 났다.[39]

7. 대한민국과의 관계

중동에 수출된 북한 무기는 모사드가 직접 한국으로 보내 주기도 했으며 굳이 북한제가 아니더라도 중동 전쟁 동안에 T-72 등 소련제 전차들을 입수한 이스라엘은 이걸 군용기에 실어서 한국에 보내주기까지 했는데 이를 이용한 시험 데이터는 북한군의 전차 성능 연구와 차세대 한국산 전차 개발에 중요한 영향을 끼치기도 했다.

2014년 1월에는 선진 정보기관에 대해 배우기 위해 7명의 한국 국회의원이 모사드를 방문했다. 다만 이 때 해당 국회의원들이 한국 언론에 방문 일정을 예고하는 바람에 모사드로부터 항의를 받기도 했다.

대한민국에도 해외 요원이 돌아다니고 있을 수 있다. 국정감사에 따르면 2003년부터 2013년까지 북한 이외의 국가에 현지 협력자로 활동하던 한국인 30여명이 처벌받았다고 하는대 이 중엔 우방국 정보기관의 비밀공작도 포함되어 있었다.

2020년 초 전세계적인 판데믹을 불러온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 관련해서도 모사드의 개입이 있었다. 예루살렘포스트의 보도에 의하면 3월 19일 코로나 진단키트 10만개를 모사드를 통해 이스라엘로 공수했는데# 보도 당시에는 진단키트의 출처를 밝히지 않았지만 이후 문재인 대통령의 진단키트 제조기업 씨젠 방문 영상에서 씨젠 대표의 발언을 통해 이스라엘이 사용한 진단키트가 한국산임이 밝혀졌다.

2020년 3월 26일 이스라엘 신문 The Times of Israel 에서 모사드가 비밀리에 40만 개의 키트를 공개되지 않는 외국에서 추가로 가져왔다고 말하였다. # 역시 한국산 키트로 추정된다.[40]

2020년 4월 24일 코로나 사태로 고립된 이스라엘 거주 한국인 55명과 외국인 15명 등 총 70명을 태운 대한항공 임시운항 특별기가 인천국제공항에 도착했는데 돌아가는 비행기에 한국산 키트를 대량으로 수송한 것이 알려졌다. 이 키트 수송은 모사드와 국정원이 협력해서 이뤄진 것으로 발표됐다.#

국정원은 모사드처럼 암살 등의 불법적인 행위들을 자유롭게 할 수 있도록 묵인받지도 못하고 있고[41] 모사드보다 지원받는 예산도 더 적다. 이는 대국민 탄압에 동원되었던 과거 행적 때문도 있지만 모사드가 타국과 비교해도 이스라엘과 미국의 묵인 아래 이례적으로 막나가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미 중앙정보국(CIA)은 모사드에 대해 요원이 약 7,000명, 연간 예산이 27억 3,000만 달러(약 3조 원)에 달하는 것으로 추정한다.# 참고로 국정원은 인원 약 6000여명에 대략 1조원 정도의 예산을 쓰는 것으로 추정된다.#[42]

8. 대중매체


[1] 구약 성서 잠언 11장 14절의 일부다. 과거 원훈은 "작전이 서야 싸울 수 있고, 좋은 참모가 많아야 이길 수 있다."였는데 마찬가지로 잠언 24장 6절의 일부다. #[2] 비슷한 사례로, 한국에서도 국가안전기획부 시절 '남산' 혹은 '회사'로 소속을 에둘러 표현하던 관행이 있다.[3] 북한에게 있어 중동은 최대의 무기 수출시장으로 핵과 미사일 개발 기술도 공유한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4] 1968년 이스라엘 인구가 280만명이었던 점을 생각해 보면 매우 인원이 많았음을 알 수 있다.[5] 머리에 총상을 두 번이나 입고도 살아 있었으며 끝까지 몸부림치다가 더 끔찍하게 살해당했다. 23일경에 살해되어 시체는 3월 6일에 트렁크에서 발견되었는데 총상이 온 몸에 산재했고 두개골이 박살나 있었다고 한다.[6] 잠깐 풀려나 있을 때인 2001년경 KBS단독 인터뷰를 하기도 했다.[7] 인구 27,000여명의 소도시. 1994년 동계올림픽의 개최지이기도 했다. 이 사건이 일어나기 전까지 36년간 살인 사건이 일어나지 않았다고 한다.[8] 이 양반은 베냐민 네타냐후 총리에게 직접 뽑혀서 국장으로 취임했는데 이때의 작전 실패로 베냐민 네타냐후 총리뿐만 아니라 모든 언론의 비난 대상이 되어야만 했는데 네타냐후 총리는 나몰라라 했다. 결국 다니 야톰 국장은 얼마 안 돼서 스위스에서의 공작 활동 실패로 인해 자신이 책임을 떠맡고 사퇴했다.[9] 당시 공산 독재국가 폴란드 인민공화국에 총기를 밀반입해서 암살을 시도한 것이니 평범한 암살보다 훨씬 어려운 일이다.[10] 하마스가 협상 준비할 때 이스라엘이 빈 틈을 노린 셈이다.[11] 지도자는 되었지만 강경파 신와르를 반대하는 정치국장 하니예 포함 하마스 대원들에게 견제를 받아야만 했다.[12] 네타냐후 타도보단 가자 지구 국경지대 공백이 컸다.[13] 이스라엘이 UN기구에 무자비하게 폭격한 것도 하마스가 UN을 이용해 먹었기 때문이다.[14] 다에시 포함 다른 무장단체들은 사진을 대놓고 찍히거나 예방 접종을 받은 반면 데이프는 그 이상으로 치밀한 편이다.[A] 사진 삭제됨[A] 사진 삭제됨[A] 사진 삭제됨[A] 사진 삭제됨[19] 사실 여성 1명만으로도 가능하지만 완벽하게 제압해서 완벽하게 성공시키기 위해서인 듯 하다.[20] 근육마비제. 시간이 지나면 인체에서 자연 분해되어 증거가 남지 않는다.[21] 무아마르 카다피가 왜 제거되었는지 봐야 한다. 위성전화로 연락했다가 표적이 돼서 무인기에 처참하게 비극을 맞이했다. 이런 이유로 이라크 레반트 이슬람 국가는 선전과 같은 특수한 경우가 아닌 이상 스마트폰을 절대 쓰지 않으며 요원을 모집할 때 스마트폰을 무조건 압수했고 선전에서도 무조건 트위터와 같이 익명성이 보장되는 가계정을 사용했다. 그럼에도 끝까지 추적당해 궤멸당했다.[22] 스코르체니는 SS답지 않게 나치의 전쟁범죄에 일절 관여하지 않는 모습을 보였으며 오히려 포로나 민간인에게 따뜻하게 대해 준 전적이 있다. 전후 재판에서도 당당하게 무죄를 받아냈기에 정상을 참작해 처벌 대신 모사드의 정보원으로 썼을 것으로 보인다. 여담으로 포섭 당시 스코르체니는 자신에게 다가오는 모사드 요원을 알아채고 권총으로 겨누는 등 꽤나 날카로운 눈썰미와 깡을 보여주었다.[23] 아이히만의 납치가 공개된 후 즉시 아르헨티나는 아이히만의 송환을 요구했으며 UN 안전보장이사회도 이스라엘의 아르헨티나 주권 침해를 인정하였다. 결국 이스라엘은 아르헨티나에게 사과, 배상함으로써 아이히만을 돌려보내지 않고 사태를 마무리할 수 있었다.[24] 그러나 아이히만은 멋대로 하는 성격이라 서먹서먹한 사이였다고 한다.[25] 납치 과정에 대해서는 미인계 문서의 모사드 문단 참조.[26] 같은 유대인이라서 팔레스타인인들에 비하면 약하게 해 준 거다.[27] 기밀 유출에 대가를 받지 않았고 유출된 기밀이 인류 공공의 이익과 관련된 핵 개발 등이었기 때문에 정확히는 간첩은 아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정부도 대놓고 죽이지 못하고 굳이 납치하는 수고를 벌였다.[28] 한국으로 치면 무기형을 선고한 다음 경북북부제2교도소 독방에서 10여년 동안 감금했다고 보면 된다. 냉전 시기에 대놓고 간첩질을 크게 하거나 대남 테러를 실행하다가 걸려 사형당하지 않고 남파간첩 혹은 간첩 협조 혐의로 무기징역을 선고받은 비전향 장기수들에게 이런 처우가 행해졌다고 한다.[29] 이는 서방세계에서의 가장 긴 독방 수감기간으로 기네스북에 기록됐다고 한다.[30] 부모와는 기독교로 개종한 일로 관계가 나빴던 데다 이 사건으로 의절한 상태여서 직계가족이 형 메이르 바누누와 아내와 자식들뿐이었다.[31] 즉, 북한도 미군이 직접 들어가서 상당한 기간동안 주둔하며 북한 전역을 샅샅이 헤집고 핵무기를 다 찾아서 미국으로 가져가서 폐기하는 리비아식 비핵화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어떤 협정도 해 줄 수 없다는 의미라는 설에 힘이 실리고 있다.[32] 공식발표에 따르면 이들의 뛰어난 구급조치와 인명구조능력 때문에 생존자 구출을 위해 투입되었다고 한다.[33] 이팔전쟁 이전에 하마스 내부에서는 야히야를 좋게 보이지 않았었다. 따라서 신와르는 하니예와 갈등을 겪었는데 하니예가 암살당하자 신와르는 기회삼아 지도부로 선출된 것이다.[34] 대표적인 인물이 타리크 아지즈다.[35] 대개의 선진국 정보기관은 강대국에서 불법적인 정보활동을 하는 것을 꺼리는데 들통날 경우 외교적으로 불이익이 너무 크기 때문이다.[36] 한국의 국정원장은 임기가 평균 1년 정도이고 대통령이 자신의 뜻에 맞는 고위 인사를 지정하며, 그 고위 인사는 군인, 행정공무원, 검사, 인권변호사 등 다양한 커리어패스를 거친 사람이 뽑힌다.[37] 하산 나스랄라가 스마트폰을 절대 안쓴다고 공언하자마자 대원들은 무선호출기로 바꿨으나.. 모사드가 2022년도에 미리 적국으로 위장한 유령회사 차리고 무선호출기에 폭탄을 설치하고 판매했던 것이다. 사이트는 닫아버린덤.[38] 모사드와 MSS가 치고받고 하는 동안 KGB가 은근슬쩍 엉덩이를 들이밀며 아프리카를 요리하려고 했다고 한다. 중국-소련 국경분쟁 이후 소련과 갈라진 중국으로써는 또다른 적이 출현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고 그것은 이스라엘도 마찬가지였던 터라 여기서 이해관계가 일치한 양국은 결국 휴전에 동의했다.[39] 특히 FBI는 배신감에 치를 떨었다고 한다. 미국-이스라엘 관계를 생각해 본다면 잘 알 수 있을 것이다. 결국 나중에 이스라엘의 사죄로 어느 정도 마무리되었다.[40] 다만 나중에 와서 볼 때 이렇게 노력해서 확진자가 하루에 몇 명씩 나오는 수준으로 줄면서 봉쇄를 해체했는데 이후 하루 확진자가 폭증하는 바람에 그 노력을 무위로 되돌리고 말았다. 그나마 사망률이 낮은 것이 불행 중 다행이다.[41] 아돌프 아이히만이 대표적이다. 이스라엘은 모사드의 불법 행위를 허락하고 아르헨티나의 주권을 침해해 가면서 아돌프 아이히만을 불법으로 납치했고 재판을 통해 처형해 버리고 아르헨티나와의 갈등을 감내하는 걸 택했다.[42] GDP대비 예산규모로 보면 차이가 명확하다. 2021년 기준 한국의 GDP는 1806 B$(세계 10위)이고 이스라엘의 GDP는 446 B$(세계 29위)로 한국이 4배 이상 많다. GDP대비 예산을 보면 모사드가 12배정도 많다.[43] 이 드라마의 방영이 시작된 시점인 2013년에 장관 후보자의 국적과 외국 정보기관 관련 이력이 문제가 되었고 100% 이 문제 때문만은 아니지만 결국 낙마한 사례를 생각하면 더 미묘하다. 뉴스 링크의 인물은 김종훈미래창조과학부 후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