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18 13:10:36

모부투 세세 세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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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칭 모부투라고 불리는 2022년에 출시된 콜 오브 듀티 시리즈 게임에 대한 내용은 콜 오브 듀티: 모던 워페어 II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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콩고민주공화국 대통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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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훈 연도 결정일 수여일 이름 직책 국적 비고
1949년 8월 15일 이승만 대통령 대한민국
1960년 8월 13일 윤보선 대통령 대한민국
1963년 12월 5일 12월 17일 박정희 대통령 대한민국
1967년 6월 23일 육영수 영부인 대한민국
1979년 12월 7일 최규하 대통령 대한민국 12.12 군사반란으로 하야
1979년 12월 7일 홍기 영부인 대한민국
1980년 8월 29일 8월 29일 전두환 대통령 대한민국 무궁화대훈장 이외의 모든 훈장 취소
1980년 8월 29일 8월 29일 이순자 영부인 대한민국
1988년 2월 24일 2월 25일 노태우 대통령 대한민국 무궁화대훈장 이외의 모든 훈장 취소
1988년 2월 24일 2월 25일 김옥숙 영부인 대한민국
1993년 2월 11일 2월 23일 김영삼 대통령 대한민국
1993년 2월 11일 2월 23일 손명순 영부인 대한민국
1998년 2월 17일 2월 25일 김대중 대통령 대한민국
1998년 2월 17일 2월 25일 이희호 영부인 대한민국
2008년 1월 28일 노무현 대통령 대한민국
2008년 1월 28일 권양숙 영부인 대한민국
2013년 2월 12일 이명박 대통령 대한민국
2013년 2월 12일 김윤옥 영부인 대한민국
2013년 2월 19일 박근혜 대통령 대한민국
2022년 5월 3일 문재인 대통령 대한민국
2022년 5월 3일 김정숙 영부인 대한민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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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훈 연도 결정일 수여일 이름 직책 국적 비고
1964년 12월 3일 12월 8일 하인리히 뤼프케 대통령 서독 외국인 최초 상훈자
1964년 12월 3일 12월 8일 빌헬미네 뤼브케 영부인 서독 외국인 최초 상훈자
1966년 2월 1일 2월 7일 이스마일 나시루딘 국왕 말레이시아
1966년 2월 1일 2월 7일 틍쿠 인탄 자하라 왕비 말레이시아
1966년 2월 1일 2월 10일 푸미폰 아둔야뎃 국왕 태국
1966년 2월 1일 2월 10일 시리낏 끼띠야콘 왕비 태국
1966년 2월 1일 2월 15일 장제스 총통 중화민국
1968년 5월 10일 5월 18일 하일레 셀라시에 황제 에티오피아
1969년 5월 23일 5월 27일 응우옌반티에우 총통 남베트남
1969년 5월 23일 5월 27일 응우옌티마이아인 제1부인 남베트남
1969년 10월 28일 10월 28일 하마니 디오리 대통령 니제르
1969년 10월 28일 10월 28일 아이샤 디오리 영부인 니제르
1970년 9월 25일 9월 28일 피델 산체스 에르난데스 대통령 엘살바도르
1970년 9월 25일 9월 28일 마리나데 산체스 에르난데스 영부인 엘살바도르
1975년 6월 27일 7월 5일 오마르 봉고 대통령 가봉
1975년 6월 27일 7월 5일 조세핀 봉고 영부인 가봉
1979년 4월 17일 4월 23일 레오폴 세다르 상고르 대통령 세네갈
1979년 4월 17일 4월 23일 콜레테 위베르트 상고르 영부인 세네갈
1980년 5월 11일 할리드 빈 압둘아지즈 알사드 국왕 사우디아라비아
1980년 5월 14일 자베르 알아흐마드 알자베르 알사바 국왕 쿠웨이트
1981년 6월 25일 수하르토 대통령 인도네시아
1981년 6월 25일 시티 하티나 영부인 인도네시아
1981년 6월 29일 아마드 샤 이브니 아부 바카르 국왕 말레이시아
1981년 6월 29일 틍쿠 아프잔 왕비 말레이시아
1981년 7월 6일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대통령 필리핀
1981년 7월 6일 이멜다 마르코스 영부인 필리핀
1981년 10월 13일 로드리고 카라소 대통령 코스타리카
1981년 10월 13일 에스트레야 셀레돈 리사노 영부인 코스타리카
1982년 5월 10일 사무엘 도 대통령 라이베리아
1982년 6월 7일 모부투 세세 세코 대통령 자이르
1982년 6월 7일 보비 라다와 영부인 자이르
1982년 8월 25일 압두 디우프 대통령 세네갈
1982년 12월 21일 케난 에브렌 대통령 튀르키예
1983년 3월 10일 3월 15일 자파르 모하메드 니메이리 대통령 수단
1983년 3월 10일 3월 15일 부띠나 칼릴 압불핫산 영부인 수단
1983년 9월 10일 후세인 1세 국왕 요르단
1983년 9월 10일 누르 왕비 요르단
1984년 4월 9일 하사날 볼키아 국왕 브루나이
1984년 4월 21일 할리파 빈 하마드 알타니 국왕 카타르
1984년 8월 30일 9월 13일 다우다 자와라 대통령 감비아
1984년 8월 30일 9월 13일 치렐 자와라 영부인 감비아
1985년 5월 17일 무함마드 지아울하크 대통령 파키스탄
1985년 5월 20일 루이스 알베르토 몽헤 대통령 코스타리카
1986년 9월 4일 4월 10일 엘리자베스 2세 국왕 영국
1986년 9월 4일 4월 16일 보두앵 국왕 벨기에
1987년 4월 7일 아메드 압달라 대통령 코모로
1988년 11월 3일 이스칸다르 국왕 말레이시아
1988년 11월 3일 자나리아 왕비 말레이시아
1989년 11월 3일 11월 20일 리하르트 폰 바이츠제커 대통령 서독
1989년 11월 3일 11월 30일 프랑수아 미테랑 대통령 프랑스
1989년 11월 3일 11월 30일 다니엘 미테랑 영부인 프랑스
1990년 6월 21일 안드레스 로드리게스 대통령 파라과이
1990년 11월 5일 괸츠 아르파드 대통령 헝가리
1991년 9월 13일 아즐란 샤 국왕 말레이시아
1991년 9월 13일 투안쿠 바이눈 왕비 말레이시아
1991년 9월 25일 카를로스 살리나스 데 고르타리 대통령 멕시코
1992년 8월 13일 호르헤 안토니오 세라노 엘리아스 대통령 과테말라
1993년 5월 20일 5월 25일 피델 라모스 대통령 필리핀
1993년 5월 20일 5월 25일 이멜리타 마르티네스 라모스 영부인 필리핀
1994년 11월 7일 11월 21일 에두아르도 프레이 루이스 타글레 대통령 칠레
1994년 12월 5일 12월 9일 레흐 바웬사 대통령 폴란드
1995년 2월 7일 2월 16일 이슬람 카리모프 대통령 우즈베키스탄
1995년 2월 21일 3월 6일 로만 헤어초크 대통령 독일
1995년 3월 28일 4월 3일 젤류 젤레프 대통령 불가리아
1995년 6월 26일 7월 7일 넬슨 만델라 대통령 남아프리카 공화국
1995년 9월 26일 9월 29일 카를로스 메넴 대통령 아르헨티나
1996년 7월 23일 9월 4일 알바로 아르수 대통령 과테말라
1996년 7월 23일 페르난두 카르도주 대통령 브라질
1996년 10월 8일 10월 20일 후안 카를로스 1세 국왕 스페인
1996년 10월 8일 10월 20일 소피아 마르가리타 빅토리아 프리데리키 왕비 스페인
1996년 11월 26일 자파 이브니 압둘 라만 국왕 말레이시아
1996년 12월 10일 12월 15일 레오니드 쿠치마 대통령 우크라이나
2000년 2월 22일 3월 3일 카를로 아첼리오 참피 대통령 이탈리아
2000년 2월 22일 3월 6일 자크 시라크 대통령 프랑스
2006년 3월 12일 압델아지즈 부테플리카 대통령 알제리
2007년 3월 26일 사마 알아마드 알자베르 알사바 국왕 쿠웨이트
2007년 3월 28일 하마드 빈 할리파 알사니 국왕 카타르
2009년 5월 13일 누르술탄 나자르바예프 대통령 카자흐스탄
2009년 11월 12일 알란 가르시아 대통령 페루
2012년 5월 30일 칼 16세 구스타프 국왕 스웨덴
2012년 11월 21일 할리파 빈 자이드 나하얀 대통령 아랍에미리트
2018년 10월 8일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 프랑스
2019년 하랄 5세 국왕 노르웨이
2021년 6월 14일 알렉산더 판데어벨렌 대통령 오스트리아
2021년 6월 16일 펠리페 6세 국왕 스페인
2021년 6월 16일 레티시아 오르티스 로카솔라노 왕비 스페인
2021년 8월 25일 이반 두케 대통령 콜롬비아
2021년 9월 21일 보루트 파호르 대통령 슬로베니아
2023년 7월 13일 안제이 두다 대통령 폴란드
2023년 11월 21일 찰스 3세 국왕 영국
2024년 11월 16일 디나 볼루아르테 대통령 페루 }}}}}}}}}

콩고민주공화국 제2대 대통령
자이르 공화국 초대 대통령
모부투 세세 세코
Mobutu Sese Seko
파일:mobutu.webp
<colbgcolor=#6abd51><colcolor=#fcdd09> 출생 1930년 10월 14일
파일:콩고 독립국 국기.svg 벨기에령 콩고 리살라
사망 1997년 9월 7일 (향년 66세)
파일:모로코 국기.svg 모로코 라바트살레케니트라 라바트
국적 파일:벨기에 국기.svg 벨기에(파일:콩고 독립국 국기.svg 벨기에령 콩고)1930~1960
파일:콩고민주공화국 국기(1966-1971).svg 레오폴드빌 콩고1960~1971
파일:자이르 국기.svg 자이르1971~1997
파일:콩고민주공화국 국기(1997-2003).svg 콩고민주공화국1997
재임기간 제2대 콩고민주공화국 대통령
1965년 11월 24일 ~ 1971년 10월 27일
초대 자이르 공화국 대통령
1971년 10월 27일 ~ 1997년 5월 16일

1. 개요2. 생애
2.1. 초기 생애2.2. 두 차례의 쿠데타2.3. 독재2.4. 부정부패와 경제 파탄
2.4.1. 파멸적인 결과
2.5. 사치 행각
2.5.1. 고향 그바돌리테의 별장
2.6. 몰락
3. 부인4. 기타5. 참고자료

[clearfix]

1. 개요

파일:mobutu1983usa.jpg
1983년 캐스퍼 와인버거 미국 국방부장관을 만났을 때의 모습.
하루아침에 부자가 되기 위해 너무 많이 훔치면 잡힐 것입니다.
1976년 5월 20일에 킨샤사의 축구 경기장에서 한 연설 중

콩고민주공화국독재자.

반대파 세력에 대한 탄압과 우상화, 특히 상상 이상이었던 부정부패와 경제 파탄으로 장 베델 보카사, 시아드 바레, 이디 아민, 멩기스투 하일레 마리암 등과 함께 아프리카 역사상 최악의 독재자 중 한 명으로 평가받는다. 실제로 타임지는 모부투를 '전형적인 아프리카 독재자'라고 평가했으며, 모부투의 국가 권력을 이용한 국민침탈 행위는 아예 도둑정치(kleptocracy)라는 신조어가 생길 정도였다.

2. 생애

2.1. 초기 생애

모부투 세세 세코는 1930년 10월 14일 벨기에의 식민지였던 콩고의 리살라에서 식민지 행정관의 요리사의 아들이자 응반디(Ngbandi)족 혈통으로 태어났는데, 태어날 당시의 이름은 조제프데지레 모부투(Joseph-Désiré Mobutu)이다. 아버지는 모부투가 겨우 8살이었을 적에 죽었기 때문에 어린 모부투는 할아버지와 삼촌 곁에서 자라야 했다.

이후 모부투는 가톨릭 선교 기숙 학교에서 벨기에식 교육을 받아 프랑스어에 능통해졌는데, 학창 시절의 모부투는 공부와 운동을 모두 잘하면서도 장난을 잘 쳤던 학생이었으며, 학급 신문을 운영하기도 했다고 한다. 그러나 학교를 몰래 빠져나와 한 여자를 만난 일이 발각되어 1949년에 퇴학당한 후 1950년부터 '형벌'로서 식민지 군에서 복무하게 되었는데, 당시 모부투는 벨기에 장교로부터 유럽 신문과 책들을 찾을 수 있는 것들이라면 뭐든지 빌려 읽을 정도로 지적인 열망이 남치던 군인이었다고 한다. 이후 모부투는 출세가도를 달리며 1956년에는 벨기에군에서 콩고인이 오를 수 있는 최고의 자리인 소령에 올랐다.

여기까지만 보면 모부투는 벨기에 식민당국에 부역하던 사람이긴 하다. 그러나 1958년에 벨기에에 엑스포를 취재할 목적으로 간 모부투는 군을 일시적으로 그만두고 기자 생활을 하다가 콩고 독립운동을 하던 파트리스 루뭄바와 친해저 그의 보좌관이 되었다.[1]

2.2. 두 차례의 쿠데타

1960년 6월 30일에 콩고가 벨기에에서 독립한 뒤 모부투는 국무장관 겸 콩고민주공화국군 참모총장이 되었다. 콩고 독립의 3인방인 조제프 카사부부는 대통령이 되고 파트리스 루뭄바는 총리가 됐으며 모이스 촘베는 카탕가주 주지사가 된다. 허나 이 세명의 갈등과 외세의 개입으로 인한 극심한 정치적 혼란으로 콩고 내전이 발발하자 군부를 장악하고 있던 모부투 세세 세코는 정치적 야심을 갖기 시작했고, 1960년 9월 14일에 무혈 군사 쿠데타를 일으켜 은인이자 친구였던 파트리스 루뭄바를 체포해 촘베에게 보내 루뭄바가 처형되게 만든다.

이후 카사부부와 촘베와의 전쟁이 계속되자 모부투는 유엔 평화유지군과 함께 1963년 촘베를 제압한다. 그러나 동년에 루뭄바의 측근이었던 피에르 물렐레가 서남부에서 크윌루 반란을 일으켜 그 반란이 동부의 심바 반란으로 확대되어, 내전이 지속됐다. 1964년 연립정권이 극심한 혼란 속에 빠지자 망명했던 촘베가 다시 돌아와 총리가 되었는데, 촘베와 카사부부는 서로 정치투쟁에 빠저 콩고는 혼란이 계속됐다.

결국 모부투는 서방의 지원을 업고 1965년 11월 24일에 또다시 무혈 쿠데타를 일으켜 헌법을 정지시킨 뒤, 의회와 당시까지 존재했던 야당 50여 개를 해산해 조제프 카사부부 대통령과 촘베를 모두 축출하고 스스로 대통령으로 등극해 혁명인민운동(Mouvement Populaire de la Révolution, MPR)만의 일당 독재 체제를 확립시켰다. 이로써 모부투는 동년에 심바 반란을 제압하여 체 게바라가 참전했던 것으로 유명한 내전의 최종 승리자가 되었다.

2.3. 독재

권력을 완전히 장악한 모부투는 자신의 정권안정을 위해 무소불위의 독재권력을 휘둘렀는데, 1966년 5월 30일에는 쿠데타 공모 혐의로 전직 장관 3명과 전직 총리 1명을 군사 재판에 넘긴 후 공공장소에서 5만 명이 지켜보는 가운데 교수형시킨 것은 물론이고, 1969년에 학생들의 반정부 시위를 발포로 진압한 후에는 1년 동안 모든 대학을 폐쇄했으며, 노동조합은 1990년 4월까지 어용 국영 노동조합인 자이르 전국 노동자 연합(UNTZA) 하나만 허용되었다고 한다.

모부투는 촘베를 지지하던 1967년 카탕가 반군과 콩고군에 편입된 백인용병의 반란으로 한때 어려움을 겪기도 했지만 그해 카탕가 주의 반란은 완전히 진압되었고, 반군 지도자들은 앙골라로 망명했다. 촘베는 망명지인 스페인에서 프랑스 정보기관에 납치되어 알제리에 감금되었다가 사망했고 피에르 물렐레도 사면을 약속해서 유인한 뒤 붙잡아 처형해버렸다.

1967년 모부투는 총리직을 폐지하고 다당제 역시 금지하여 1당 1인 독재 권력을 완성했다. 이 무렵부터 파트리스 루뭄바와 피에르 물렐레를 따르던 로랑 데지레 카빌라는 동부 산악지대 키부에 마르크스주의 정당인 인민혁명당(People's Revolutionary Party, PRP)을 창당하고 구 심바 반군을 흡수하여 세력을 키우고 금광채굴과 상아무역으로 자금을 충당했다. 한편, 모부투는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기 위해 카탕가의 구리광산 등 기업과 산업을 국유화하고, MPR을 제외한 모든 정당을 완전히 불법화했다.

이렇게 권력을 완전히 장악한 모부투는 반체제 세력과 반군들의 끊임없는 위협에도 불구하고 1970년 10~11월경에 있던 대선에 단독후보로 출마해서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이 당시 콩고민주공화국의 헌법은 두 정당의 존재를 허용했지만, 대통령 후보 지명은 여당만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공개 투표로 치러진 이 선거는 '모부투를 지지하면 녹색 종이를, 모부투를 반대하면 빨간 종이를 선택'하는 방식으로 치러졌는데, 이때 초록 종이는 '희망', 빨간 종이는 '혼란'을 택한 걸로 간주되었다. 이 선거 결과 공식 통계에 따르면 10,131,669표가 모부투에게 찬성을 표했고, 겨우 157표만이 모부투에게 반대를 표하며 모부투는 프랑수아 뒤발리에마냥 99.9985%라는 압도적인 득표율로 대통령이 되었다. 당연히 이 선거는 명백한 부정선거였는데, 실제로 이 선거에서는 투표 수가 실제 유권자 수보다 3만 표 이상으로 많았다고 한다. 그리고 1970년 11월 14~15일에 치러진 국회의원 선거도 MPR 소속 후보들 명단만 제공되어 겨우(?) 99.26%[2]의 찬성율로 당선되었다.

1971년 10월 27일에 모부투는 콩고민주공화국이라는 국명을 자이르(Zaire)로 변경하고, 수도 등 각 나라의 지명과 도시명들도 아프리카식 이름으로 바꾸었다. 이전까지는 레오폴드빌이었던 수도 이름을 킨샤사로 바꿨다. 1972년 1월에는 자신의 이름도 조제프데지레 모부투에서 모부투 세세 세코 쿠쿠 응벤두 와 자 방가(Mobutu Sese Seko Kuku Ngbendu wa za Banga')로 개명했는데 이 뜻은 "초인적 인내와 불굴의 의지로 지나가는 발자취마다 불을 남기며 정복에 정복을 거듭하여 전진하는 전능한 전사"라는 의미라고 한다.

한편 이 무렵 카탕가 주도 샤바 주로 이름이 바뀌었고, 자이르의 모든 국민들은 아프리카식 이름으로 개명해야만 했으며, 자이르의 신생아들에게 유럽식 이름으로 세례를 주다 적발된 사제들은 5년 징역형에 처해져야 했다. 그리고 서양식 복장도 식민지 시절의 상징이라고 판단되어 금지되었고, 자이르의 국민들은 모부투가 좋아하던 나라인 중화인민공화국 스타일에 모부투가 손수 디자인한 인민복 비스무리한 복장만 입어야 했다. 크리스마스도 '진정한' 날짜라며 12월에서 6월로 옮겨지고 음식, 의복, 춤 같은 문화들도 아프리카 전통으로 의무적으로 재현해야 했다. 모부투는 이 '진정성 캠페인'이 식민과 부족으로 분열된 국가를 통합할 것이라고 굳게 믿었다고 한다.

1974년에는 MPR이 명실상부한 유일한 합법 정당이 되며 자이르는 일당제 국가가 되었고, 모든 자이르의 국민들은 태어날 때부터 자동으로 MPR의 당원이 돼야만 했으며, MPR 총재는 자동으로 7년 임기의 대통령 후보, 즉 모부투로 임명되었고, 모든 통치권은 모부투에게 집중되게 되었다. 이후 모부투는 1977년과 1984년에도 대통령 선거에 단독 후보로 출마했는데, 이전보다는 명백히 낮은(?) 98.2%/99.16%로 당선되었다.

이렇게 사실상의 '종신 대통령'이나 다를 바 없게 된 모부투에게 반대하는 사람들은 아무런 혐의도 적용되지 않았는데도 영장 없이 체포되어 재판 없이 220여개나 되던 수용소에 구금된 후 고문을 당하거나 갑자기 실종되기도 했다. 게다가 수감자들이 수용된 수용소도 100명 이상이 1개의 화장실을 써야 할 정도로[3] 위생도 열악했고, 음식과 물도 주지 않아 굶어 죽는 수감자들도 흔할 정도였다. 게다가 수감된 여성들은 교도관들에게 강간당했고, 심지어는 5살도 안 된 아이들까지 수용소에 구금되었다는 사례도 보고되었다. 심지어 모부투는 남미의 극우 군사정권마냥 정적들을 재판도 거치지 않은 채 헬리콥터에 태운 후 산 채로 콩고 강과 호수에 떨어뜨려 죽이기까지 했다고 한다.

1978년 2월 3일 모부투는 자신에 대한 '음모'를 '발견'했다며 64명의 장교와 24명의 민간인을 체포한 후 2월 5일~3월 16일까지 열린 재판에서 피고인 18명[4]에게 사형이 선고되었고, 이들 중 13명(군인 8명, 민간인 5명)은 사형 선고 당일에 총살형에 처해졌다. 이를 넘어 모부투는 자이르군을 동원해 자이르에 창궐한 반군에 대한 보복 차원으로서 도합 천 단위로 민간인들을 학살하기도 했다. #

언론 탄압도 강도 높게 자행되어 언론인과 편집자를 넘어 신문을 판매하는 사람까지 군에 의해 구금되는 일이 흔했고, 심지어 1990년 9월에는 친 야당 신문 팔마레스(Le Palmares)의 편집장이었던 라디 루야(Ladi Luya)가 겨우 대통령의 건강 상태에 대해 추측하는 기사를 개재했다는 이유만으로 체포되어 11일간 구금되는 일도 있었던 판이었으니, 모부투에 대한 비판을 쓴다는 것이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는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이런 폭정 때문에 국민들은 두려움에 떤 나머지 모부투의 본명도 부르지도 못 하고 '모 아저씨'라고 불렀다고 하며, 심지어는 비록 정적들의 인육을 먹었다는 루머는 돌지 않았어도 '모부투가 사람의 를 마신다'는 소문도 돌았다.

1976년 3월에 모부투는 가족을 스위스로 데려갔을 때 국가의 경제적, 정치적 위기에서 벗어날 방법을 찾지 못하고 잠시 권력 포기를 고려하기도 했고, 1977년에 모부투는 앙골라의 지원을 받은 카탕가 반군이 샤바 주를 공격해오자 프랑스에 군사지원을 요청한 후 정부군의 반격으로 이 반군들을 격퇴했고, 1979년에는 중앙아프리카 제국의 (참칭) 황제였던 보카사 1세[5]의 요구로 중앙아프리카 제국 내에 있던 2차례의 반제정 시위를 진압할 목적으로 외국에 자이르군을 투입했는데, 그들은 보카사의 근위병들과 함께 시위대에게 무자비한 진입을 가하여 두 시위 합쳐서 500여명을 사망케 하는 엄청난 인명피해를 만들어냈다. 그 외에도 모부투는 9개국과 국경을 맞댄 자이르의 지정학적 환경을 이용해 차드, 콩고 공화국, 우간다, 수단 등 아프리카 각지의 분쟁에 개입했고, 모부투는 자이르를 프랑스와 미국이 중앙아프리카와 남부아프리카 전역에의 개입과 비밀작전을 위한 플랫폼으로 쓸 수 있도록 하며 프랑스와 미국으로부터 경제적 원조와 정치적 지원을 얻었다.

모부투는 또 자신에게 위협이 되는 사람들을 없애기 위해 장관의 능력은 전혀 신경쓰지 않은 상태로 내각을 지속적으로 개편했는데, 1965년 11월부터 1997년 4월까지 32년도 안 되는 기간 동안 무려 60회의 개각을 감행했다고 한다.

2.3.1. 우상화

1974년 12월에 북한을 방문한 모부투는 김일성을 두 차례나 만나며 큰 감명을 받아 주체사상을 모방한 '모부투주의'를 국가의 공식 이념으로 내세우고, 우스꽝스럽기 그지없는 우상화 정책을 실시했다. 어느 정도였냐면, 모부투의 초상화가 모든 화폐의 앞면과 모든 공공장소, 정부 관리들의 옷깃 핀에서 볼 수 있을 지경이었다.

실제로 당시 자이르의 모든 출판물의 첫 페이지에는 모부투의 초상화가 인쇄되었고, 많은 집에도 모부투의 초상화가 걸렸으며, 많은 국민들은 모부투의 모습이 그려진 옷을 입었고, "조국의 아버지", "메시아", "혁명의 인도자", "조타수", "창시자", "인민의 구세주", "최고의 전투원"과 같은 다양한 칭호가 오직 모부투 세세 세코 1인만을 위해 존재했으며, 심지어는 법률까지 통과시켜서 자이르의 TV의 저녁 뉴스를 말 그대로 구름 뒤에서부터 태양처럼 떠오르거나 하늘에서 구름 사이로 내려오는 모부투의 모습으로 시작하게 했다. 당시 자이르 TV 저녁 뉴스의 도입부 이를 본 당시 자이르의 어린이들은 모부투를 신처럼 여겼다고 한다. 당시 방송인의 증언 물론 원래 호텔 청소부였던 모부투의 어머니는 성모 마리아에 비유되었다.

게다가 1975년부터 자이르의 언론은 모부투가 아닌 다른 사람을 언급하는 게 금지되었고, 다른 사람들은 그들이 맡은 직책 정도만 언급할 수 있었다고 한다. 쉽게 말하자면, 당시 자이르 언론은 '조국의 아버지이신 모부투 세세 세코 각하께서 재무부 장관에게 이러이러한 지시를 내렸고 이를 내무부 장관도 들었다' 식의 기사만 쓸 수 있었단 거다.

그리고 학교에서도 모부투에 대한 우상화가 이루어져 초등학생들은 아침에 등교할때마다 모부투의 이름을 외치며 춤을 춰야 했으며, 자이르의 학생들은 '하나의 당, 하나의 나라, 하나의 아버지, 모부투, 모부투'라는 말을 암송해야 했다. 게다가 모든 대통령 보도 자료에서 모부투의 이름은 대문자로 표기되었으며, 심지어는 모부투가 일곱 살 때 맨손으로 사자를 죽였다거나 '자이르의 적들'과 싸울 때 가슴에 총알과 창이 튕겨져 나왔다거나 그가 공식석상에 들고 다니는 흑단 지팡이가 마법의 힘이 깃들어 있고 너무 무거워서 일반적인 사람이 들 수 없고 8명이 함께 들어야만 겨우 들 수 있다는 등 그의 '초자연적 재주'에 대한 공식적인 소문도 유포되었다.[6] 이쯤이면 지도자 우상화 수준이 거의 북한과 다를 바가 없다.[7]

2.4. 부정부패와 경제 파탄

모부투가 우리 중 한 명에게 은행에 가서 100만 달러를 찾아오라고 명령합니다. 그 다음에 우리는 중개인에게 가서 500만 달러를 찾아오라고 하죠. 그러면 중개인은 모부투의 권한으로 1,000만 달러를 인출합니다. 모부투가 100만 달러를 가져가고 우리가 나머지를 갖는 거죠.
당시 관계자의 증언

모부투의 가장 유명한 악행으로 모부투는 인류 역사상 부패한 독재자를 꼽을 때 김씨 3대, 수하르토,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등과 함께 반드시 꼽힌다. 어느 정도였냐면 그의 부패를 표현하기 위해 상술한 것처럼 아예 '도둑정치'라는 개별 용어가 만들어졌을 정도였다. 실제로 모부투는 해외로부터 받은 원조들은 물론이고, 국고와 나라에 매장된 넘쳐나는 천연자원[8]을 착복해서 수십억 달러를 축재하면서 국가의 경제를 파탄냈다. 특히나 모부투의 경우 전쟁이나 내전 없이 부정부패으로 나라를 파탄냈다는 점, 그리고 정적들에게 모부투보다 잔인한 모습을 보여준 독재자들은 아주 흔했지만[9] 모부투만큼 나라를 확실하게 말아먹은 독재자는 거의 없다는 점에서 그의 부정부패가 얼마나 대단한 지 설명이 된다.

급전을 구하는 방식도 다른 부정부패와는 급이 다른 수준이었는데 비밀리에 일어나는 일반적인 부패와 다르게 모부투는 그냥 자이르 중앙은행에 전화로 돈이 필요하니 내놓으라고 당당하게 국고를 횡령해가는 것이었다. 즉 비밀리에 뇌물을 주고받는 수준도 아니고, 공식적으로 국고는 모부투의 사적 금고와 다를 바가 하등 없었다.[10] 한 달에 한 번씩 군용 트럭 몇 대가 자이르 중앙은행에서 150만 달러에서 1000만 달러에 이르는 지폐를 싣고 모부투에게 갔는데, 이 돈들은 공식적으로는 '대통령 보조금'이라고 포장되었다. 실제로 1993년 2월 22일자 타임지는 자이르 중앙은행에 대해 '모부투가 과거에 개인 돼지 저금통으로 취급했던 자이르의 중앙 통화 당국은 사실상 파산했습니다.'라고 재치있게 묘사했다.

이미 1970년부터 그 해의 국가 예산의 60%를 횡령했다고 전해지며 이렇게 긁어모은 재산을 스위스와 벨기에에 은닉해 모부투는 1993년에 추산된 모부투의 해외 자산은 자이르 외채의 70%에 달하는 약 70억 달러였고 그가 죽을 때 개인적으로 남긴 재산은 50~60억 달러였다고 한다.

1997년 당시 콩고민주공화국의 공공 부채는 125~145억 달러에 달했다는데, 모부투의 개인 재산이 국가 부채의 절반에 필적하는 거액이었기 때문에 '모부투의 개인 자산은 자이르 공화국의 대외 채무와 같다'는 말까지 나올 정도였다. 참고로 모부투 치하에 가장 GDP가 높았던 1978년 기준으로 자이르의 GDP는 153.7억 달러 정도였고[11], 모부투가 사망한 1997년 기준으로 자이르의 GDP는 60.9억 달러에 불과했다. 이렇게 모부투는 자기가 지배하던 나라의 GDP와 맞먹는 수준의 돈을 횡령하는 전대미문의 부패 기록을 선보였으니, 신조어가 생기지 않는 것이 더 이상한 판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상술한 것처럼 내각 임기가 굉장히 짧았기 때문에 각료들은 짧은 임기 동안 최대한 많은 것을 챙기려고 했으며, 이렇게 국가에 부패는 만연해져 갔다. 그리고 모부투는 "친구는 가까이 두고 적은 더 가까이 두십시오"라는 말을 남기며 정적들에게 뇌물을 주면서 정적들을 자기의 지지자들로 만들었으며, 정부의 반체제 인사를 구속하고 고문한 후 그들을 용서하고 보상을 주는 식으로 지지자들을 만들어나가는 식으로 부패를 조장했다. 실제로 당시 자이르의 고위층들이 횡령한 금액은 300억 달러 가량 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73년부터 모부투는 갑자기 '자이르화' 정책을 실시해 모든 기업을 국유화했는데, 이 프로그램은 식민지 시대 이후로 남아 있던 벨기에인 소유의 기업으로부터 식민지 시절부터 이 나라의 소규모 상거래 대부분을 지배했던 그리스, 유대인, 파키스탄 상인에 이르기까지 외국인 소유의 농장, 공장 및 사업체를 몰수하는 프로그램이었다. 1973년 11월 30일에 연설에서 모부투는 이 정책을 "우리 역사의 결정적인 전환점"이라고 설명하고 "자이르는 지금까지 세계에서 가장 심하게 착취당했습니다."라며 이 정책의 필요성을 강조했고, 이 정책은 처음에는 국민들의 환호를 받았다. 모부투는 이렇게 몰수한 이 기업들을 친척들과 지지자들에게 넘긴 후[12] 국영 기업을 개인 재산처럼 여기며 연간 3억 3,100만 달러에 달하던 해외 원조의 일부를 횡령하기까지 했다. 게다가 자이르인들은 '자이르화' 정책으로 물려받은 사업에 대한 사전 경험이 거의 없었기에 경영난을 해소하고자 재빨리 외국인들을 다시 유인하여 그들의 자리에서 운영하도록 했고, 결국 자이르화 정책은 대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이후 고질적인 부정부패와 정치적 무능력, 행정의 실패가 이어졌고, 국가의 기간산업이나 농업, 교통 체계 등 국가 전체의 기반 시설이 무너졌음에도 모부투는 서방 강대국들의 지원으로 쿠데타 기도나 외부의 침입과 같은 자신의 정권에 대한 도전을 물리칠 수 있었다.

모부투는 아프리카의 대표적 친미 반공 지도자라는 점을 이용해 자이르를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 국가 중 가장 많은 미국의 원조를 받는 국가로 만들었는데 서방은 냉전 기간에 모부투를 아프리카에서 공산주의로부터 방어하는 보루로 생각하고 지원을 아끼지 않았으며, 이 덕분에 지미 카터 시기에는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 국가들이 받던 총 원조액의 절반 가량을 자이르 혼자서 받을 정도였다고 한다.[13] 더욱이 서구권은 자이르에 지원하는 막대한 지원금이 어떻게 되었는지를 인지하고 있었음에도 모부투를 '소련의 아프리카에 대한 영향력 확장에 저항하는 데 있어 너무나 중요한 전사'라고만 여겨 모부투의 부정부패를 알고 있으면서도 묵인하고 지원했다. 로널드 레이건 시기 미국의 국무장관 알렉산더 헤이그(Alexander Meigs Haig, Jr., 1924~2010)는 사적인 대화에서 수사적으로 "모부투가 아니라면 누가?"라고 물었을 정도로 모부투를 신임했으며, 앙골라의 공산주의 게릴라에 대한 비밀 작전과 반공주의 게릴라에 대한 무기 공급은 킨샤사에 있는 기지에서 집결되었다. 1982년에 IMF 고위 직원 중 한 명이 자이르 정부 고위층의 엄청난 규모의 부패와 횡령에 대한 보고서를 준비했지만 상관에 의해 보고서가 보류되기도 했다.

그나마 임기 초반에는 어느 정도 경제가 성장할 때도 있었지만[14], 이건 단기적인 수준에 머물렀고, 구리값이 하락하고 물가상승률과 국가부채가 상승한 데다가 막대한 통화 평가절하까지 일어나며 콩고민주공화국의 경제는 침체일로에 달렸다. 일례로 1975년 기준으로 자이르의 국가부채는 8억 8700만 달러에 육박했고 1977년에는 재정 적자가 국가 예산의 32%에 육박했다고 한다. 그리고 1983년 기준으로 자이르의 국가부채는 1975년의 6배 가량인 50억 달러였고, 그 부채의 80%는 세계은행IMF 등의 서방에 빚진 거였다고 한다.

여기에 자이르는 상술한 것처럼 세계 여러 나라들과 IMF로부터 지속적인 풍부한 지원을 받았음에도 경제성장률은 인구증가율을 밑돌았고, 자이르의 기반 시설은 사실상 붕괴되었으며[15], 실업률은 80%, 영유아 사망률은 50%를 기록했고, 임금은 독립 이전의 1/10 수준으로 떨어졌으며, 1995년 기준으로도 TV 보급률은 세계 최저 수준인 1000명당 0.5대였다. 당시 자이르의 출산율이 (지금과 거의 다를 바가 없는) 6.7명이었단 것과 아프리카 대다수 지역이 대가족을 선호한다는 것을 감안해도 1990년대에 가구대비 TV 보급률이 10%를 밑돌았다는 뜻이다! [16]

그리고 많은 공공 서비스 근로자들의 월급은 몇 개월 동안 체불된 상태였고, 정기적으로 적절한 급여를 받는 집단은 모부투의 경호를 맡은 군인들밖에 없었다. '공무원은 일한 척, 국가는 급여를 주는 척'이라는 말이 유행할 정도로 공무원들의 사기도 저하된 것은 물론이고 군인들은 고국의 민간인들을 가난한 지역까지도 '잔혹한 점령군처럼' 약탈할 정도로 생활난에 시달렸던 데다가[17] 하도 여성들을 강간해댄 나머지 수도에서도 여성들이 밤에 집을 떠나지 않을 정도가 되었다. 이러한 자이르의 무질서는 '제2의 보스니아, 또 다른 소말리아'라는 비유까지 들을 정도로 심각했다. 모부투의 부패가 얼마나 심했는지 임기 막판에는 모부투의 지지 기반이었던 군인들에게 봉급조차 줄 수 없게 됐다. 그리고 이는 군인들이 모부투를 배신하는 중요한 원인으로 작용했다. 더구나 1990년대 초에 냉전이 종결되면서 모부투를 옹호할 이유도 없어지게 되자 세계은행과 IMF는 자이르에 대한 지원을 급격히 줄이고는 완전히 끊게 되었다.

거기다가 집권 말기인 1980년대 후반에는 물가가 상승하자 물가 통제 정책을 실시하며 어떻게든 이를 막으려고 했으나 정책이 실패로 돌아가면서 초인플레이션까지 일어났다. 1달러당 환율을 살펴보자면 1985년 50자이르[18]였던 것이 1986년 60자이르로 오른 것을 시작으로 불과 5년 뒤인 1990년에는 719자이르로 뛰어올랐고, 이것이 1991년에는 15,300자이르, 1992년 초에는 114,291 자이르로 뛰어올랐다. 그리고 이것이 1년도 안 된 1992년 12월에는 1,990,000 자이르로 뛰어올랐으며, 이로 인해 1993년 1월에는 임금 체불에 불만을 품은 군인들을 달래기 위해[19] 500만 자이르 지폐까지 발행되었으나[20] 정작 이것을 지급받은 군인들은 분노하고는 수도를 약탈했는데, 이 과정에서 최소 1,300명의 외국인이 대피하고 2천여명이 혼란 속에서 사망했다[21]. 결국 자이르 정부는 '3백만 자이르=1 누보자이르' 환율로 1993년 10월 1일에 화폐 개혁을 실시했으나, 그럼에도 1달러당 환율이 계속 떨어지면서 급기야 최종적으로 100만 누보자이르 지폐까지 나오게 되었다.[22][23] 1993년 환율을 따져보면 3월에는 1달러당 252.9만 자이르, 10월에는 1달러당 8백만 자이르, 12월에는 무려 1달러당 1억 1천만 자이르가 되었다.

연도별 콩고민주공화국의 물가상승률 보이다시피 자이르를 건국한 후인 1972년 이후 2003년까지 콩고민주공화국의 물가상승률은 항상 두 자릿수를 넘겼는데,[24] 1979년/1989년 일시적으로 101%/104%를 찍은 바가 있으며, 1991년 2154.4%, 1992년 4129.2%, 1993년 1986.9%, 1994년 23773.1%를 기록했고, 1995년부터 2001년까지 자이르 멸망 직후인 1998년을 제외하면 항상 세 자릿수의 물가상승률을 기록했다.

그리고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도 맑다라는 속담처럼 상류층의 부패가 워낙 극심했기에 자이르의 민간인들도 부정부패에 물들었는데, 어느 정도였냐면 자이르의 경찰까지도 길마다 상주하며 다른 지역으로 가려고 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총구를 겨눈 뒤 뇌물을 강요했고, 그 사람들이 뇌물을 줘야만 다른 지역으로 이동하는 것을 허용하며 이동의 자유를 침해할 정도였으며[25], 심지어는 도시 외곽에 갔다가 돌어온 여성들과 어린아이들까지 몸값을 받기 위한 인질로 붙잡히는 일까지 있었다고 한다. # 그리고 1997년 기준으로는 방 3개의 좁은 집에서 하루 한 끼 죽밖에 먹지 못하는 것도 수도에서는 잘 살고 있는 수준이 되었다고 하는데, 수도마저 이렇게 경제가 파탄났으니 지방의 경제 파탄은 상상이 불가능한 수준이었을 것만큼은 확실하다. #

2.4.1. 파멸적인 결과

나는 아프리카 지도자들이 국가 발전에 무책임하고, 가용 자본을 낭비하고, 외국 은행 계좌에 돈을 보관하고 있다는 의견에 동의하지 않는다.
모부투 세세 세코, 1988년 9월 중순에 미셸 캉드쉬(Michel Camdessus, 1933~) IMF 사무총장이 '제3세계 부채 문제의 대부분이 부패 때문'이라고 선언하자 이에 반발하며. 모부투는 여기서 자신의 부패를 '추문'으로만 간주했다.[26]

이런 모부투의 실정으로 인해 콩고민주공화국의 전체 GDP는 모부투가 집권한 1965년 시점으로는 (이하 세계은행 통계 기준) 40.44억 달러였지만, 모부투가 물러난 1997년에는 60.9억 달러로, 32년간 약 1.5배 성장했다. 언뜻 보면 당시 자이르 경제는 별다른 추락은 안 한 것처럼 보이지만, 이는 다시 말해 당대 아프리카 국가들 중 최상급의 원조를 받아온 나라가 32년 동안의 평균 경제성장률이 겨우 1.4% 미만을 기록했다는 말이다. 그리고 그가 집권할 32년 동안 자이르는 마이너스 성장을 14번이나 기록했고, 특히 -3% 미만의 성장률은 무려 9번이나 기록했다. 즉 모부투 치하에서는 경제성장률이 3% 이상이었던 적보다 -3% 미만이었던 적이 더 많았다는 이야기다!

그리고 동시기에 자이르의 1인당 GDP는 232달러(1965)에서 136달러(1997)로, 이전의 58.6% 정도로 떨어졌는데, 그나마 집권 초반에는 1967년, 1970년, 1976년을 제외하면 항상 플러스 성장을 기록해 1978년에는 614.53달러[27][28]로 최고점을 찍었으나, 이후에는 단 6년[29]을 제외하면 항상 역성장을 기록했다. 특히 1982년(483.77달러)부터 1984년(262.98달러)까지의 급락과 1993년(270.49달러)부터 1994년(140.21달러)까지의 급락은 특히나 치명적이었다.

환율 변동까지 고려하면 모부투의 경제 성적표는 더욱 처참한데, 32년간 자이르의 전체 GDP는 이전의 29.4% 수준으로 추락했고[30], 1인당 GDP는 이전의 11.4% 수준으로 떨어진 셈이다.[31] 심지어 모부투가 몰락한 1997년 기준 자이르의 1인당 GDP의 현재 가치는 6.25 전쟁 직후 대한민국의 1인당 GDP의 현재 가치보다도(!) 낮은 수치인데, 실제로 1954년 기준 대한민국의 1인당 GDP는 당시 실질 환율로 계산하면 약 45.4달러였으며, 이는 2024년 환율로 환산해도 527달러밖에 되지 않는다.

심지어 자이르의 1인당 GDP가 최저점을 찍은 1995년 기준으로 자이르의 1인당 GDP는 고작 130.38달러로, 2023년 환율로 환산해도 261.02달러 남짓이다. 1978년에 찍은 최고점과 비교하면 17년 만에 21.2%, 환율변동까지 감안하면 9.1% 수준으로 떨어진 셈.

참고로 당시 고도성장을 이룬 여러 나라 중 하나인 대한민국의 경제성장과 비교해보면 모부투가 얼마나 무능하고 부패한 통치자였는지를 더욱 쉽게 짐작할 수 있는데, 동시기 한국의 1인당 GDP는 109달러(1965)에서 12,398달러(1997)로 이전의 114배 정도로 성장했고, 총 GDP도 31.2억 달러(1965)에서 5,700억 달러(1997)로 약 182.7배나 성장했으며, 이 기간 동안 평균 경제성장률은 약 17.7%를 기록했다. 참고로 당시 한국의 GDP 지표들을 전부 2023년 환율로 환산한 후 한국의 경제성장을 계산하면 전체 GDP는 이전의 35.9배, 1인당 GDP는 이전의 22.3배나 성장한 셈이다.

다만 후대에 로버트 무가베 집권기의 짐바브웨는 2001년부터 2008년까지 단 7년만에 1인당 GDP가 63% 수준으로 급락하기는 했으나, 당시 짐바브웨의 경제난은 2002년부터 이어진 서방의 경제제재의 영향도 있었다는 것을 감안하면, 신이 준 수준의 풍부한 자원들과 당대 아프리카 국가들 중 최상이라 할 정도로 엄청난 원조를 받았음에도 위와 같은 기록을 보여준 모부투의 능력(?)은 경이롭다 못해 초능력의 경지에 다다른 수준이라고밖에 표현할 수 없다.[32]

다만 모부투 시기 자이르의 경제 폭락 기록은 급격한 환율 변동의 영향도 매우 크다. 1971년부터 1976년까지 자이르의 환율은 '1달러=2자이르'라는 고정환율이었고, 1976년부터 1978년 10월 31일까지 1자이르는 1특별인출권(SDR)과 동등한 수준이었으나,[33] 1978년 11월 27일까지 단 1달도 안 되어 '1자이르 = 0.7614 SDR'로 평가절하되었으며, 1979년 1월 1일 1자이르는(이하 1자이르 생략) 0.5 SDR, 동년 8월 24일에는 0.375 SDR로 평가절하된 데다가 1980년 2월 22일에는 0.2625 SDR, 1981년 6월 19일에는 0.1575 SDR로 단 3년도 안 되어 환율이 1/6 수준으로 떨어졌고, 1983년 9월 9일에는 무려 1자이르 = 0.035425 SDR를 기록하며 환율이 기존의 4% 미만으로 완전히 폭락했다. 그리고 상술한 것처럼 80년대 말~90년대에는 가히 짐바브웨에 준하는 단기간의 어마어마한 초인플레이션의 영향이 있었기에 1994년의 폭락도 1993년 초인플레이션의 여파라고 봐도 무방하다.[34]

참고로 2004년자 글로벌 부패 보고서에 따르면 모부투 세세 세코는 2004년 기준으로 50억 달러를 착복한 것으로 조사되어 '세계에서 3번째로 부패한 지도자'라는 타이틀을 얻었다.[35]

2.5. 사치 행각

이렇게 나라를 거덜낸 모부투는 개인 금광을 비롯하여 자이르에만 11개나 되는 궁전과 호화 요트, 별장들 사이의 이동만을 위한 벤츠 차량들을 보유한 것은 물론이고, 스위스, 프랑스, 벨기에, 이탈리아, 스페인, 포르투갈, 모로코, 세네갈, 브라질 등지에 별장을 구입하는 등[36] 많은 재산을 축재했으며, 1997년 5월 26일자 워싱턴 포스트 지의 기사에 따르면 모부투가 보유한 외국의 부동산의 총 가치는 4천만~6천만 달러에 달했다고 한다. #

특히 그의 가장 유명한 구매 중에는 프랑스의 유명 휴양지 코트다쥐르에 있는, 미화 520만 달러 가격에 분홍색과 흰색 대리석 기등, 실내와 실외에 각각 하나씩 있는 수영장, 금도금 욕조가 있는 도금된 욕실, 헬기 착륙장을 갖춘 25에이커(약 0.1제곱킬로미터) 규모의 빌라인 빌라 델 마레(Villa del Mare)가 있었는데, 이 별장은 모부투가 1986년에 사우디아라비아로부터 구입한 것이었으며, 원래에는 전 피아트 회장 잔니 아넬리(Giovanni "Gianni" Agnelli, 1921~2003)의 소유였고, 한때 이 별장 별장 근처에는 벨기에 국왕 보두앵의 여름 별장이 있었다.

그리고 프랑스 리비에라(Riviera) 해안의 520만 달러짜리 빌라를 구입했을 때 모부투는 계약 후 대금을 달러로 지불할지 아니면 벨기에 프랑으로 지불할 지를 물었다고 하는데, 이는 39배 정도로 차액의 차이가 엄청난 거였지만 모부투는 전혀 신경쓰지 않았다. 또한 그는 1970년대 스위스 레만호 부근에 8백만 스위스 프랑(SFr)의 별장을 구입했고 정기적으로 스위스를 드나들었으며 스위스에서 전립선암 수술을 받은 뒤에는 프랑스에 머무르기도 했다. 거기에 1980년대 말에 모부투가 구입한 '카마뇰라(Kamanyola)'라는 호화 요트는 100여명의 손님을 수용할 수 있는 연회장과 60개의 객실, 2개의 VIP실, 심지어 미용실까지 갖춰졌다고 한다. 카마뇰라의 실제 모습

모부투의 식생활 역시 굉장히 호화로웠다고 한다.[37] 1985년에 고향 그바톨리테(Gbadolite)의 별장에서 55세 생일을 맞이했을 때 모부투는 세계 최고의 파티시에로 꼽히던 프랑스인 가스통 르노트르[38]에게 '하얀 크림을 얹은 커다란 데코레이션 케이크'를 만들게 하고는 이를 콩코드에 실어 나르게 했으며, 1979년에는 특별한 행사를 위해 폴 보퀴즈, 가스통 르노트르를 포함한 프랑스 최고의 요리사 4명을 초대해 자신의 요트에서 파티를 즐기기도 했고, 1988년에 이 곳을 방문한 뉴욕 타임즈 기자에 따르면 '제복을 입은 웨이터는 리모주 도자기에 메추라기 구이를 서빙하고 적도의 열기에 적절히 식힌 루아르 밸리 와인을 따랐다'고 한다. #

모부투는 영양, 생선 및 장어와 같은 전통적인 지역 음식을 좋아했으며, 금박을 입힌 도자기 접시에 음식을 담아 먹었고, 핑크색 로랑 페리에 샴페인을 하루에 아침부터 여러 병 마시면서 별장에 15,000개의 와인이 보관된 세계 최고의 와인 저장고 중 하나를 가지고 있었을 정도로 와인도 좋아했고, 프랑스 포도원의 포도로 만든 최고 빈티지 와인을 자이르로 직수입하며 마셨으며, 개인 정원에서 재배한 과일로 직접 브랜디를 만들어 마셨다고 한다. 게다가 그바돌리테 인근에는 모부투 일가가 보유하던, 고기와 우유를 얻기 위한 용도로 스위스 소, 베네수엘라 양[39], 아르헨티나 염소를 기르는 목장과 기름야자, 오렌지나 자몽, 파인애플과 같은 과일, 농작물을 기르는 농장이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모부투는 절대 혼자서 식사하지 않았고, 항상 최소 100명, 때로는 최대 1,000명과 함께 식사를 했다고 한다.

그리고 모부투는 1인당 GDP가 215달러(2023년 환율로 약 461달러)도 되지 않았던 데다가 상술한 것처럼 초인플레이션이 자이르를 강타한 1992년 7월 4일에 딸 야크프와(Yakpwa, 별명인 '야키(Yaki)'로도 불렸다)와 벨기에인 사업가 피에르 얀센(Pierre Janssen)의 결혼을 위해 2,500명이 넘는 하객들을 초청하고는[40] 그들에게 바닷가재와 캐비어, 1천 병 이상의 고급 와인, 핑크 샴페인을 제공한 후 오케스트라 3개, 75,000달러를 들여 부른 프랑스의 특별 전세기, 이 전세기로 배송된 13피트(약 4m) 높이의 75,000달러짜리 웨딩 케이크, 딸만을 위한 7만 달러의 웨딩 드레스와 300만 달러의 보석[41], 거대한 불꽃놀이가 포함된 초호화 결혼식을 치르고도 결혼식 선물 비용을 전혀 걱정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이런 초호화 결혼식에도 불구하고 야크프와와 얀센은 후에 이혼했다고 한다.

2.5.1. 고향 그바돌리테의 별장

모부투는 집권 초기인 1967년부터 '모부투의 뜻으로 탄생한 도시'라며 기득권층들에게 헌금을 지시하며 수도, 전기, 도로, 학교도 없이 진흙벽돌 오두막에 1,700명 남짓의 사람들이 살던, 지도에 표시조차 되지 않은 외딴 마을이었던 고향 그바돌리테를 개발하면서 주택, 학교[42], 대학, 병원, 시립 건물, 교회, 슈퍼마켓, 쇼핑몰, 5성급 호텔, 현대적 상하수도 시스템, 댐과 수력 발전소, 코카콜라 공장[43], 핵 벙커[44], 국제공항[45]을 설치해 인구 37,000명의 도시로 만들었다.

모부투는 그바톨리테에서 업무를 보는 일이 많아 측근들도 수도 킨샤사에서 북쪽으로 1,000km 이상 떨어진 그바톨리테에 저택을 세웠을 정도인데, 모부투는 언젠가는 수도를 그바돌리테로 천도하고 싶었다고 하고, 말년의 모부투는 수도에서 권위가 흔들릴 때마다 그바돌리테로 피신해 자신의 혜택으로 자신을 지지하는 주민들과 함께 하는 것으로 위안을 얻고 싶었기에 거의 모든 시간을 그바돌리테와 콩고 강을 떠다니는 카마뇰라 요트에서 보내게 된다.

모부투는 그바돌리테에 의례적이거나 공식적인 용도(외국 인사 접대)로 쓰기 위해 튀니지 출신 프랑스 건축가인 올리비에 클레망 카쿠브(Olivier Clement Cacoub, 1920~2008)의 설계로 15,000m²대지에 1억~4억 달러를 들여 '대나무 궁전'을 지었다. 여러 건물들로 구성된 이 저택은 '정글의 베르사유'라는 말까지 있을 정도로 호화로웠다. 집권 당시 모습 현재 모습 7미터 높이의 문과 홀이 있는 이 건물은 피에르 얀센의 증언에 따르면 '한 쪽 벽에 서 있으면 반대편 벽에 있는 사람의 얼굴을 볼 수 없었다'고 한다. 이 건물에는 요한 바오로 2세 교황, 발레리 지스카르데스탱 프랑스 대통령, 부트로스 부트로스 갈리 UN 사무총장, 록펠러 가문의 당주 데이비드 록펠러(David Rockefeller, 1915~2017), 재클린 케네디와 동거하기도 했던 벨기에 출신 유대인 보석상 모리스 템펠스만(Maurice Tempelsman, 1929~), 윌리엄 J. 케이시(William J. Casey, 1913~1987) CIA 국장 등 초특급 명사들이 방문했다.

그리고 모부투의 고향인 그바돌리테에서 7마일 떨어진 카웰레(Kawele)에 '대나무 궁전'보다는 작은 2개의 대저택을 지었는데, 이 저택들 역시 '대나무 궁전'과 마찬가지로 호화로웠다고 하며, 하나는 탑, 분수, 수련 정원으로 구성된 자금성을 모방한 중국식 건축물이었고[46] #1 #2 다른 하나는 모부투와 그의 손님의 주된 거주지로 쓰인 현대식 주택이었는데, '정글의 베르사유'에 버금가는 규모였다고 한다. # #2

그바돌리테의 '정글의 베르사유'에는 도금된 문과 창문, 입구의 분홍색 대리석 기둥과 함께 클로드 모네피에르오귀스트 르누아르의 그림, 조각품, 고블랭 태피스트리, 스테인드글라스, 루이 16세 시대 풍의 금으로 도금된 목재 가구, 이탈리아 카라라의 대리석, 스페인산 바닥 타일, 미국식 에어컨, 그가 좋아하던 음악들인 그레고리오 성가나 클래식 음악을 연주하는 확성기로 둘러싸인 올림픽 경기장 규모의 두 개의 수영장, 6개의 자쿠지, 화려한 욕실[47], 최고의 빈티지 샴페인, 고급 와인 및 증류주를 갖춘 바가 있는 호화로운 붉은 벽으로 둘러싸인 나이트클럽[48]이 있었으며, 거의 모든 방에는 '터무니없이 비싼' 무라노 샹들리에가 걸려 있었으며, 악어떼가 우글거리는 해자로 둘러싸여 있었고, 궁전 주변의 경기장 크기의 광활한 정원에는 백조가 있는 인공 호수, 컴퓨터로 작동되는 분수, 수백 종의 나비와 수백만 송이의 꽃이 있는 정원과 함께 사자코끼리들을 사육하는 동물원이 있었다. 그리고 이 별장에는 모부투의 어머니와 첫째 아내, 세 명의 요절한 자식들을 포함하여 이미 사망한 모부투 일가의 인물들이 방부 처리되고 보존되어 있는 영묘도 있었다.

그리고 모부투는 가난한 국민들이 하루 한 끼밖에 먹지 못할 때에도 빠짐없이 이 궁전에서 밤마다 조명이 켜진 분수 앞 대리석 타일이 깔린 테라스에 있는 연회 테이블에서 유럽인 셰프 위주의 요리사들이 컨베이어 벨트에서 제공하는 떼땅져 샴페인, 연어, 바닷가재, 두툼한 스테이크, 소시지 및 기타 음식과 함께 수많은 연회를 주최했다고 하는데, 이 때문에 모부투를 방문한 사람들은 '배고프거나 목마른 것이 가증스럽다'고까지 말했을 정도였으며, 모부투는 파티를 하도 열고도 이에 만족하지 못해 자신과 아내의 생일에는 때때로 정부 전체를 그바톨리테로 날아오게 하고는 다시 킨샤사로 돌아오게 했다. 거기에 할머니가 모부투의 어머니[49]를 가르쳤던 프랑수아 코지아 응가마(Francois Kosia Ngama, 1975?~)의 증언에 따르면 전성기에 그바톨리테 궁전에는 운전사, 요리사, 하인[50] 및 기타 직원들을 합해 총 700~800명의 직원들과 300명 이상의 군인이 함께 살고 있었다고 하며, 내부는 천국과도 같았다고 한다.

다만 인터넷에서 찾을 수 있는 그바돌리테 궁전 내부 사진은 거의 모두가 모부투의 퇴임 직후 후술한 약탈 때문에 황폐해진 모습들밖에 없어서 그바돌리테 궁전의 화려함은 벽수산장[51]과 마찬가지로 글로만 접할 수 있게 되었다. 그나마 궁전 내 나이트클럽이 훼손이 덜하긴 하다.

여담으로 그바돌리테는 정확히는 양아버지인 삼촌과 어머니의 출생지인데, 전통 관습에 따라 양아버지의 출생지였기에 모부투의 고향으로 간주되었다.

2.6. 몰락

냉전이 끝나자 서방 강대국들은 모부투에게 다당제와 권력배분 등을 요구하며 압력을 행사했다. 그러나 모부투는 1980년대에 "내 두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까지 야당은 안 된다"라고 말하며 그의 1당 독재를 공공연히 주장 했던지라 계속해서 다당제 도입을 미루고 있었다. 자료

그러나 궁지에 몰린 모부투는 1990년 4월 24일에 공개 연설을 통해 다당제를 허용하게 되었고 결국 다음 해에 다당제 하의 선거를 허용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이르렀다. 이때 모부투는 다당제를 허용해야 하는 현실이 원통했는지 눈물까지 흘렸다고 한다. #

이 무렵부터 반정부 시위에 나선 루붐바시 국립대학교의 대학생들은 5월 11일 밤부터 바로 다음날인 5월 12일 새벽까지 마체테총검으로 무장한 모부투의 경호 부대[52]에 의해 유혈 진압의 피해자가 되었다. 증언에 따르면 모부투의 경호 부대는 학생들을 매우 잔혹하게 진압했는데, 대학생들을 무자비하게 구타한 것은 기본에 칼로 찌르거나 구덩이에 던져넣거나 위층 창문에서 내던진 것을 넘어 강제로 목을 조르거나 불에 태워 죽이기도 했으며, 심지어 배를 갈라 내장을 꺼내는 만행까지 저질렀다고 한다.

모부투 정권은 이 진압의 사망자가 단 1명밖에 없다고 거짓말을 치고는 현지에서의 언론 보도와 조사[53], 사법적 처리, 독립적 조사를 전격적으로 막으려고 했으나, 한 생존자는 사망자가 100명이 넘는다고 증언했고, 국제앰네스티는 이 사건의 사망자 수가 50~150명일 것이라고 추정했고, 1992년 5월에에 자이르 군사정보부는 내부 보고에서 52명의 사망자와 7명의 중상자가 발생했음을 확인했다고 보고했지만, 학생들의 시신 대부분이 '알려지지 않은 장소로' 옮겨졌기에 이 학살의 정확한 사망자는 현재까지도 미상으로 남아 있다. 결국 이 학살로 인해 서방 국가들은 모부투 정권에 대한 지원을 인도주의적 지원 외에는 완전히 끊게 된다. 참고로 전술한 것처럼 이 진압에 참여한 부대가 대통령 경호 부대였던 것과 대통령 집무실을 포함한 자이르 중앙 당국이 이 학살의 계획과 수립에 '모호하지 않게' 연루되었다는 것으로 보아 정황상 모부투가 진압 계획 과정에 참여하거나 아예 이 진압을 직접 명령했을 가능성이 높다.

1991년 2월에 모부투는 반대세력이 날로 확대되는 가운데 다당제하의 선거를 실시하고 1992년 8월 15일 에티엔 치세케디(Étienne Tshisekedi, 1932~2017)[54]를 총리로 하는 과도내각 주권국가회의(CNS)을 구성했으나,[55] 그럼에도 모부투는 1993년에 "내 백성이 나를 필요로 한다면 앞으로 5년, 10년 또는 심지어 20년 동안 집권할 수 있습니다."라며 권력을 내려놓을 생각이 전혀 없음을 밝혔다. 그러나 르완다의 종족분쟁으로 150만 명에 달하는 수많은 난민들이 자이르로 유입되면서 그의 권력은 더욱 약화되었다. 모부투 정권은 1994년 르완다 내전에서 패배하고 자이르로 도주하던 50만 명의 후투족을 학살하면서 동부의 긴장이 고조되었다.

냉전 종식과 함께 서방 세계는 그에게 등을 돌렸고 모부투는 몰락의 길을 걷게 됐다. 설상가상으로 전립선암까지 얻은 그는 괜히 르완다 내전에 개입했다가 투치와 후투족의 종족 분쟁 와중에서 정권 타도를 부르짖으며 봉기한 폴 카가메와 함께 손 잡은 반군 지도자 로랑 데지레 카빌라에게 패해 병든 몸으로 망명길에 올랐다. 정확히는 1996년 모부투가 스위스에서 암 치료를 받으려고 콩고에 없던 사이에 로랑 데지레 카빌라가 이끄는 반군에게 콩고민주공화국의 대부분을 점령당했고, 1997년 5월 17일에 결국 반군의 정권 장악으로 32년간의 집권을 끝마치고 축출당한 후 그바돌리테에서 비행기를 타고 해외로 도피했다. 참고로 모부투의 축출 직전인 1997년 5월 초에 자이르에서 모부투를 만난 유엔 주재 미국 대표이자 미국 하원의원, 빌 클린턴 대통령의 특사였던 빌 리처드슨(Bill Richardson, 1947~)[56]은 모부투의 사임을 공론화하고는 "나는 당신이 처한 혼란이 우리의 혼란이 아니라고 말했습니다. 당신은 당신의 나라를 통치하지 않았습니다."라는 사실에 기반한 독설을 남겼다.

모부투의 축출 직후 자이르의 국민들은 나라를 도탄에 빠트린 독재자의 몰락을 진심으로 기뻐했는데, 자이르의 국민들은 노래를 부르면서 거리를 행진하고 모부투의 초상화를 낙서하고 짓밟으며 반군들을 보면서 환호했다고 한다.[57] 영상의 1:36~2:29 부분 심지어 그가 축출될 시점의 장관들 중 일부도 민중들에게 보복을 당했다고 하며, 심지어 모부투의 경호원들이 모부투가 타던 전용기에 총기를 난사했다고 한다.[58] 모부투의 경호원들은 일국의 대통령을 보호하는 임무를 수행하던 사람들이자 모부투 시절에 정기적이고 충분한 금액의 임금이 지급된 유일한 조직이기도 했는데, 그렇게 모부투의 신임을 받던 사람들마저 모부투에게 이런 반응을 보일 정도였으면 일반적인 자이르의 국민들이 모부투에 품었던 증오는 문자 그대로 일반인들이 상상할 수 있는 범주를 능가하는 수준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쯤이면 농담이 아니라 만약 모부투가 자이르에 남았다간 그야말로 새뮤얼 케니언 도와 같은 운명을 맞이했을 가능성이 높은 상황이었다.

그는 그바톨리테에서 비행기를 타고 도피한 후 토고를 거쳐 동년 5월 23일부터 모로코에 머물면서 프랑스 등지로의 망명을 모색했으나 거부당했고, 결국 모부투 세세 세코는 1997년 9월 7일에 향년 66세로 모로코의 군병원에서 전립선암으로 사망하여 모로코 내 기독교 묘지의 지상 영묘에 안장되었다. 죽을 무렵 키가 187cm[59]나 되던 모부투의 체중은 겨우 40kg도 되지 않았으며, 고통을 견디기 어려워 하루 빨리 죽기를 간절히 원했다고 한다. 말기암 대부분이 고통스럽지만, 전립선암은 그중에서도 끔찍할 정도로 고통스럽다.[60]

참고로 모부투는 죽기 전에는 수도승처럼 검소하게 음식을 먹다가 죽었는데, 이는 모부투가 가난해져서가 아니라, 그의 가족들에게 버림받은 고독과 곧 임박한 죽음에 직면하고는 뒤늦게 참회하며 젊은 시절의 기독교인으로서의 본능을 발견했고, 자신이 그동안 누려왔던 모든 것이 결국 허영에 불과하단 것을 깨닫게 되었기 때문이다.[61] 죽기 전날, 핑크색 샴페인을 즐겨마시던 모부투는 소스와 곁들임 음식도 없는 카사바 후후[62] 요리를 마지막 식사로 대접할 것을 요구했다. #

그바톨리테에 입성한 카빌라의 반군들은 '정글의 베르사유'를 위시한 모부투의 별장들을 보자마자 그 즉시 들어가고는 별장 안의 가구들을 부수고 비단 벽지를 찢고는 '마지막으로 남은 가장 값싼 물건까지' 하나도 남기지 않고 모든 것을 약탈해갔고,[63] 현재 모부투의 궁전은 군인들과 그 가족의 거주지로 전락하고 지붕이 뜯겨나가 붉은 뼈대가 고스란히 드러난 데다가 덤불, 잡초, 나무가 잔해를 뒤덮고, 내부에는 쥐와 열대에 서식하는 곤충, 파충류가 살고 벽은 낙서로 가득차는 등 화무십일홍이 무엇인지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상황이다. 그리고 한때 콩코드 여객기가 다녔던 그바톨리테 국제공항은 이제 일주일에 2~3대의 작은 항공기만 운항하는 초라한(?) 공항으로 바뀌었으며, 2015년 기준으로 그바톨리테 현지인들은 방문객에게 전직 대통령의 사유지에 접근하는 데 20달러를 청구한다고 한다.

어쨌든 엽기적인 수준의 부정부패와 사치로 나라를 희대의 최빈국으로 만든 모부투의 독재가 끝나고도 그 후유증은 도저히 잦아들 기미가 보이지 않으며, 더구나 모부투의 축출 후에도 콩고민주공화국은 '아프리카의 세계 대전'이라고까지 불리던 콩고 전쟁의 후유증까지 겹치며 상황이 크게 악화되었다. 모부투 때에 비하면 경제 성장은 어느 정도 이루어지기는 했으나 그 과실은 수도 킨샤사와 서부에 집중되고 동부는 아직도 반군이 설칠 정도로 난장판이다. 2023년 IMF 통계 기준으로 1인당 GDP195개국 중 182위인 695$로 집계되어 여전히 세계 최악의 최빈국 중 하나로 남아 있다. 아시아의 최빈국들과 비교하자면 북한, 예멘, 아프가니스탄보다는 높긴 하지만 타지키스탄, 미얀마는 물론이고 시리아보다도 낮은 수치다.

3. 부인

  • 마리 앙투와네트(Marie-Antoinette Mobutu, 1941~1977) : 본명은 마리 앙투아네트 그비아티브와 고브 예테네(Marie-Antoinette Gbiatibwa Gobbe Yetene)이다. 1941년 에카퇴르 지방의 반지빌(현 모바이-음봉고)에서 태어나 1955년 14세의 나이로 부사관이었던 모부투와 결혼했다. 9명의 자녀를 두었지만 1977년에 스위스에서 심부전으로 사망했다. 시신은 그바돌리테(Gbadolite)에 매장되었는데 모부투 실각 이후 예배당이 파괴되어 모로코의 라바트에 재매장되었다.
  • 보비 라다와(Bobi Ladawa Mobutu, 1945~) : 서부 에카튀르 지방의 둘라에서 태어나 수도 킨샤사에 있는 로마 가톨릭 수녀원 학교에 다녔으며 교사로 재직하다 1977년 모부투와 결혼해 4명의 자녀를 출산했다. 그녀도 남편 못지않게 부패한 인물로, 1996년에 내각 개편으로 자신이 해임당할 것이 두려웠던 장관이 그녀에게 줄 100만 달러 현금이 든 가방을 들고 그바돌리테로 날아왔더니 개각 후에 해임될 뻔한 그 장관이 부총리가 되었다는 일화가 전해질 정도다. 모부투 정권 몰락 이후 횡령한 수십억 달러를 가지고 모로코로 도피했으며 쌍둥이 자매 코지아(Kosia Ladawa, 1945~)와 함께 유럽에서 망명 생활을 하고 있다고 전해진다. 여담으로 모부투는 코지아와 관계를 맺어 가진 아이도 3명이나 있었다.

4. 기타

  • 벨기에의 작가 다비드 반 레이브룩(David Van Reybrouck, 1971~)은 2010년에 출판한 '콩고: 민족의 서사시(Congo: The Epic History of a People)[64]'라는 제목의, 선사시대 이래의 콩고민주공화국의 역사를 다룬 논픽션 책에서 모부투가 전국을 순방하면서 '전통'인 초야권을 이용해 지역 추장들이 처녀들을 모부투에게 바치게 했고[65], 각료의 아내들을 모욕하고 각료들의 비밀을 확인하기 위해 각료의 아내와 동침했다는 의혹도 제기했는데,[66] 이는 전술한 타임지 기사에서 인터뷰에 응한 자이르의 전직 장관은 "대통령은 거의 봉건적 영주권을 누리고 있습니다. 그는 주변의 남자들을 지배하기 위한 도구로 섹스를 사용합니다. 당신은 돈이나 메르세데스-벤츠를 받고, 그는 당신의 아내를 데려가고 당신은 그를 위해 일합니다."라고 설명한 것으로 교차검증된다.
  • 표범 가죽 모자를 즐겨 썼으며 이로 인해 표범 가죽은 그의 트레이드 마크가 되었다. 그래서 그의 별명은 그의 부정부패 행각까지 담은 '표범가죽 모자를 쓴 걸어다니는 은행'이었다. 또한 1972년에서 1990년까지 정장과 넥타이마저 식민지 시절의 상징이라는 어이없는 이유로 금지하는 "정장 내려놓기(à bas le costume)" 정책으로 모부투가 (독재 종식 이후 권좌에서 내려온 뒤에도) 늘 입고 다녔으며, 자기만이 아니라 콩고 국민들에게도 입기를 강요하고 다녔던, 안에 정장 셔츠도 입지 않고 넥타이도 착용하지 않은 채 그대로 입는 깃 없는 외투인 아바코스트(Abacost) 역시 그의 트레이드 마크 중 하나로 자리잡았다.
  • 모부투와 그의 측근들이 입은 옷은 벨기에의 아틀리에에서 특별 제작한 것이었다고 하며 표범 모피 모자도 파리에서 맞춤 제작된 것이었다고 한다.[67]
  • 1994년에 비행기 격추로 사망한 쥐베날 하뱌리마나 르완다 대통령의 시신을 그의 사망이 알려진 직후부터 그바톨리테에 보관하고 있었으나, 1997년에 카빌라의 반군이 그바톨리테로 접근한다는 것을 인지하고는 시신 처리 방법을 의논하기 위해 하뱌리마나의 유족들과도 상의한 끝에 결국 축출되기 정확히 하루 전이자 반군이 킨샤사를 장악한 1997년 5월 16일에 하뱌리마나의 시신은 모부투의 요청으로 화장되었다.
  • 월드컵 참가금을 먹튀하기도 했다. 1974년 서독 월드컵 때 자이르는 아프리카 대표로 출전했고, 유고슬라비아 출신의 명장 비디니치가 팀을 맡았는데, 스코틀랜드, 유고, 브라질 등과 한 조에 속했다. 자이르가 첫 경기에서 스코틀랜드에 0대2로 패하고 유고와의 두 번째 경기를 앞뒀을 때 참가금은 국가가 가져간다고 체육부 장관을 통해 통보했다. 당연히 선수들은 기권패까지 고려할 정도로 사기가 떨어졌고 자이르는 유고에 '0:9'라는 희대의 스코어로 참패했고 그 후 브라질전도 0:3으로 패배하고 무득점 전패로 대회를 끝내야 했다. 국내에서는 유고슬라비아인 비디니치 감독이 유고슬라비아에게 져줄지도 모른다는 이유로(...) 감독을 경질하고 현지에 있던 체육부 장관을 감독 대행으로 앉혀 이 사단이 났다는 루머가 있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며 모든 경기를 비디니치 감독이 지휘했다.#
  • 어릴 적에 도둑질을 한 적이 있다고 한다. 당시 주변 사람들은 전혀 상상하지 못했겠지만 모부투는 바늘 도둑이 소 도둑이 되는 것을 넘어 나라를 완전히 거덜낸 '나라 도둑'이 되었다.
  • 모부투는 다른 쪽에서는 매우 뛰어난 역량을 발휘했는데, 실제로 모부투가 집권할 동안 부족이 450개 이상이던 자이르는 아프리카의 어느 곳보다 강력한 민족 의식이 구축되었다고 한다. 모부투는 집권할 동안 주요 부족 언어인 링갈라어, 스와힐리어, 루바-룰루아어의 사용을 성공적으로 촉진하여 국민들을 일체화시켰으며, 아프리카 전통을 강조하던 모부투의 노력으로 모부투 치하의 자이르인들은 노래, 의복, 예술에서 놀라운 문화적 창의성의 시기를 경험했는데, 이는 모부투에 대해 가장 가혹한 비평가들 대다수마저 '민족적 적대감으로 갈라지고 인위적으로 그려진 국가들의 모음인 아프리카에서 주요한 업적'이라고 평가할 정도였다. 르완다 내전을 제외해도 아프리카에서 종족간의 분쟁이 자주 발생한다는 것을 생각하면 적어도 모부투의 이러한 공적만큼은 호평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부패하지만 않았으면 오히려 티토마냥 민족 분역을 막아낸 탁월한 능력의 지도자로 호평받을 수 있었을 텐데 부패로 자신이 좋은 평가를 누릴 기회를 모조리 날려버린 셈. #
  • 장남인 장파울 니니와(Jean-Paul Nyiwa Mobutu, 1955~1994)에게 권력을 세습하려고 했지만, 니니와가 1994년 9월 17일에 파리의 병원에서 에이즈로 사망했다고 한다. 참고로 니니와는 순회 대사, 국가 원수에 대한 개인 및 외교 고문, 국제협력담당관, 외무부 장관 등을 역임한 적이 있었으며, 니니와의 사후 후임 '국가 원수에 대한 개인 및 외교 고문'에는 니니와의 여동생이던 은가왈리(Ngawali)가 임명되었다.
  • 그가 첫째 부인과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 콩굴루(Kongulu Mobutu, 1970?~1998)는 DSP의 대위로서 모부투의 말년에 정권의 실세로 일하며 아버지의 정적들을 감시하고 잔인한 대우를 가한 것으로 악명이 높았고, 돈세탁 문제로 아버지와 다투고는 리비아중동으로 도피하자 아버지가 아들을 구하기 위해 군인들을 보내는 사고도 쳤으며,[68] 자신의 실명으로 밀수를 주관하며 레바논의 밀수업자들에게 뇌물을 수수받거나 자국의 금을 몰래 감비아로 수출하기도 했다. 1997년 4월에 로랑 데지레 카빌라의 반군이 킨샤사로 진군하자 곧 암살할 아버지의 정적 500명의 명단을 작성하며 동년 5월 17일에 아버지가 축출될 때에도 '계획'을 '달성'하기 위해 킨샤사에 남아 있었으나, 그로부터 하루 뒤에 자이르의 고위층 중 가장 마지막으로 탈출하고는 콩고를 거쳐 모나코로 도피했으나 아버지의 사망 1년 후인 1998년 9월 24일에 에이즈로 향년 28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다만 콩굴루는 1991년 2월에 킨샤사 인근에서 술에 취한 미군 해병대가 자이르인들을 학대하고 인질로 잡았다는 소식을 듣고는 분개하여 부하들과 함께 이들을 포위한 후 협상을 이끌어내며 인질들을 구해냈고[69], 1993년에 있던 킨샤사의 약탈 이후 킨샤사에서 브라자빌로 벨기에와 유럽 국민을 대피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등 의외의 노블레스 오블리주적인 면모도 보였다.
  • 미국의 극우 성향 침례회 목사인 팻 로버트슨과 절친했다고 한다. 로버트슨은 모부투의 생전에 아프리카 지도자에 대한 국무부의 금지령을 풀겠다고 말한 적도 있으며, 그바돌리테의 별장을 방문하기도 했다.
  • 아이러니한 현실이지만, 모부투가 물러난 뒤 그가 통치하던 시절과 비교를 불허하는 생지옥이 무려 3년 간이나 펼쳐지고 지금도 혼란 상황이 지속되고 있으며, 새 통치자로서 18년을 통치한 조제프 카빌라무능한 독재자여서 콩고 국민들은 그나마 가난하기만 하던 모부투 집권기를 그리워하는 것이다. 심지어 모부투의 오랜 정적들조차 '모부투 시절에는 국가가 있었지만 지금은 국가가 아닌 정글만 있다'[70]고 말하는 등 차라리 모부투가 카빌라보다 낫다고 생각한다고 한다. 물론 이후에도 내전은 계속됐지만 동부 지역에서의 공방으로 국한되었다는 점은 다르다. 사실 이런 현상은 콩고민주공화국뿐만 아니라 아프리카에서 내전에 시달리는 몇몇 나라들에서 자주 벌어지는 현상이다. 실제로 내전에 시달리고 있는 중앙아프리카 공화국에서 장 베델 보카사를 '중앙아프리카공화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지도자'로 여기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이 그 단적인 예시다.
그러나 이러한 사회적 기조는 현직 지도자에 대한 비판 현상에 가까우며, 모부투에 대한 긍정 평가와는 거리가 멀어 콩고에서도 이런 감정에 대하여 비웃는 시각도 많다. 내셔널 지오그래픽 2015년 11월호 콩고강 관련 기사에서도 나오는데 이런 이야기를 하는 콩고 사람들에서도 어느 콩고 사람이 반론하듯 비웃으며 그 때나 지금이나 차이가 없는 지옥이거늘, 그저 예전이 기억이 희미하니까 그때가 더 낫다고 하는 것 뿐이다.라는 말에 모부투가 낫다는 다른 콩고 사람들도 적극적으로 반론하지 못했다.
  • 오늘날에도 모부투주의 정당이 의석을 차지하고 존재한다.#
  • 모부투가 명명한 아프리카식 명칭 중 자이르의 국명은 다시 원래 이름인 콩고민주공화국이 되었던 것과는 달리, 킨샤사는 레오폴드빌이라는 이름으로 되돌아가지 않았다. 원래 명칭의 유래였던 레오폴드 2세가 극악무도한 학살자였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 모부투는 도둑정치라는 말의 유례로 유명하나, 과거 콩고민주공화국을 식민지배한 벨기에레오폴드 2세가 어떻게 보면 모부투 뺨치는 도둑정치를 일삼았다. 과장 안 보태고 콩고 자유국을 온전히 자신의 재산을 불리기 위한 사유지로써 착취한 것이니까. 물론 모부투도 재산 축적을 위한 학살만 안 했을 뿐이지 콩고를 자신의 재산을 불리기 위한 사유지 취급한 것은 레오폴드와 판박이다.

5. 참고자료



[1] 모부투가 벨기에군 소령까지 역임한 식민부역자였다는 것을 감안하면 참으로 아이러니하다.[2] 정확히는 9,763,510개의 투표지 중 겨우 72,378표 만이 반대표를 던졌다고 한다.[3] 심지어 그것마저 자이르의 교도소 중에서는 시설이 가장 잘 갖춰진 것이었다고 한다.[4] 이 재판에서 3명은 궐석재판 상태였다.[5] 사족으로 보카사는 후술할 그바돌리테의 별장을 방문한 적이 있었다고 한다.[6] 후술하듯 국가를 파탄내는 것에 한해서는 '초자연적 재주'를 확실히 가지고 있긴 했다.[7] 실제로 김일성은 자신을 필사적으로 배우고자(?) 하는 모부투를 좋은 후배처럼 여겨 군대 훈련, 경제 협력 등 여러 면에서 모부투를 지원했다고 한다.[8] 자세한 것은 콩고민주공화국 항목 참조. 실제로 모부투는 자이르 동북부 지역에 있는, 1841제곱킬로미터 넓이에 금 매장량이 1백여t이나 되는 킬로 모토 금광을 개인적으로 보유하기도 했다.[9] 대표적으로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의 경우 공포정치의 대명사로, 국회에서 의원을 즉결처분하는 등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여 국가를 철권통치했으며 그의 아들인 우사이는 아예 후폐제만큼이나 난폭하고 잔혹했었다. 모부투가 좋아한 북한 역시 콩고민주공화국을 능가할 정도로 극악한 인권 침해가 계속 이루어졌다. 아이티프랑수아 뒤발리에 역시 의사 시절 위인으로 평가받았으나, 집권 이후 극단적으로 흑화하여 정적을 손수 고문하고 아이티판 SS 통통 마쿠트를 만들어 국민을 학살한 독재자였다. 이들 말고도 모부투보다 악랄하게 국민을 학대한 사람은 매우 많은데, 문제는 모부투는 독재와 인권 탄압, 불법 처형을 하기는 했으나 저 정도로 극심하게 국민을 학대하지는 않은 반면 부정부패가 인류 역사에 남을 정도로 극심하고 그 폐해도 극단적으로 커서 저들과 함께 최악의 독재자로 현재까지 회자되는 것이다. 비슷하게 니콜라에 차우셰스쿠 역시 잔혹성보다 마치 북한을 연상시킬 정도로 헛웃음이 나오는 우상화와 루마니아의 경찰국가 상태 유지, 출산 강제 정책으로 대표되는 멍청한 정책들로 악명이 더 높다.[10] 이런 건 전근대 국가의 탐관오리에게서나 볼 수 있는 일이다.[11] 당시 1인당 GDP 한국과 유사[12] 1978년 자이르 은행의 기록에 따르면 50개의 자이르 기업이 불법적으로 약 3억 달러를 해외로 유출했다고 하며, 이 회사 중 가장 큰 회사 중 8개는 모부투와 그의 직계 가족이 소유했다고 한다.[13] 참고로 냉전 시기 미국의 공적개발원조(ODA) 지원 수준(2010년 가치로 환산)으로 보면 자이르는 탄자니아, 에티오피아에 뒤이은 3위이며, 저 세 국가간 지원금 차이도 거의 없다. 물론 객관적으로 보면 자이르가 받은 ODA는 2010년 가치로 500억 달러에 달하는 매우 큰 지원금이며, 전체 지원금 순위 12위다. #[14] 1969년에는 9.3%, 1973년에는 8.1%의 상당히 높은 경제성장률을 기록하긴 했으나, 그가 집권하는 동안 3% 이상의 경제성장률을 기록한 해는 그 외에도 1966년(6.8%), 1968년(4.3%), 1974년(3.1%), 1984년(5.5%), 1986년(4.7%), 이렇게 총합 7년밖에 없었다.[15] 실제로 독립 당시에 31,000마일의 도로를 보유하던 자이르에서 1980년까지 사용할 수 있는 도로는 3,700마일 미만으로 추락했고, 그가 축출될 무렵에는 기존의 도로망의 85% 이상이 수풀로 바뀌며 콩고 강이 유일하게 남아있는 동서 고속도로라고 부를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고 하며, 그 콩고 강을 드나드는 배도 거의 없었다고 한다. 그리고 전기와 수도를 넘어 전화 시스템도 망가졌는데, 전화 시스템이 망가진 이유는 어처구니없게도 모부투가 그의 정적이 외부 세계와 연락해 '음모'를 꾸미는 것을 막기 위해 전화 시스템 개선을 전혀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정작 모부투는 자신의 별장에 이스라엘의 최첨단 통신 시스템을 장착했다.[16] 컬러TV 방송을 한국과 같은 해에 시작했음에도 이렇다. 당시 한국의 TV 보급률은 1000명당 233대였고, 북한도 85대였으며, 일본은 769대, 미국은 833대였다. #[17] 1991년 9월 24일에 자이르군이 전국의 주요 도시를 약탈하는 과정에서 사망한 사람만 200명이 넘었을 정도였다.[18] 여기서 '자이르'는 1967년부터 콩고민주공화국에서 사용되던 통화 단위로, 당시 교환 비율은 '1자이르 = 1천 콩고민주공화국 프랑'이었다.[19] 모부투는 군인들에게 "무기가 있는데 왜 돈을 받아야 하냐"고 물은 적도 있었다고 한다.[20] 참고로 인플레이션이 가속화되며 1989년에 1만 자이르가 나왔고, 1991년에는 2만, 5만 자이르도 나왔으며, 1992년 한 해에는 10만, 20만, 50만, 100만 자이르도 나왔다.[21] 참고로 사망자 중에는 자이르 주재 프랑스 대사 필리프 베르나르(Philippe Bernard, 1931~1993)도 있었다.[22] 이후 1997년에 모부투가 축출되고 이듬해에 누보자이르는 '1 콩고민주공화국 프랑=10만 누보자이르'라는 교환 비율로 콩고민주공화국 프랑으로 대체되었다. 참고로 구 프랑과 신 프랑의 교환 비율은 '1 신 프랑 = 300조 구 프랑'이다.[23] 다만 이 초인플레이션은 경제학 석사 출신이던 로버트 무가베 치하 짐바브웨의 압도적인 초인플레이션 때문에 많이 가려졌다.[24] 2004년 겨우 4% 미만을 기록한 후에도 2008년까지 콩고민주공화국의 물가상승률은 항상 두 자릿수를 넘겼다.[25] 다만 적도 기니에서처럼 아프리카에서 부패한 경찰들이 검문소에서 내지인은 물론 외지인에까지 돈을 뜯어가는 일은 그리 드문 편이 아니다. 사실 테오도로 오비앙이 모부투보다는 아주 약간 낫긴 해도 적도 기니를 자원의 저주 끝판왕으로 만든 극도로 부패한 독재자인지라...[26] 참고로 이후에도 모부투는 '기독교인이자 추장으로서의 명예'를 걸고 자신의 가용 자금이 "1000만 달러를 넘지 않는다"고 주장했으나, 본인도 이 수치가 자신이 보유하고 있는 해외 부동산과 유동적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기타 자산은 포함되지 않는다는 것만큼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27] 2023년 환율로는 무려 2,873.27달러다. 게다가 이후 자이르의 1인당 GDP가 가장 높게 잡힌 해가 581.73달러를 기록한 1979년과 575.88달러를 기록한 2019년, 577.21달러를 기록한 2021년인데, 즉, 현 콩고민주공화국 사람들은 화폐 가치 변동을 감안하지 않아도 40년 전의 자신들보다도 가난한 셈이다.[28] 여담으로 자이르의 1인당 GDP가 400달러대/300달러대를 기록한 1981~1982/1983년 이후로 다시 이들 달러대에 들어간 해가 30여년이나 지난 2012/2008년이다.[29] 1982년, 1986년, 1990년, 1993년, 1996년, 1997년[30] 2023년 환율로 386.2억 달러(1965) -> 113.9억 달러(1997)[31] 2023년 환율로 2,216달러(1965) -> 254.3달러(1997). 이를 2022년 IMF의 국가별 1인당 GDP 추산에 대입하면 32년 만에 케냐(2,269달러, 195개국 중 150위) 수준에서 현 시점 세계 최악의 최빈국인 부룬디(249달러, 194개국 중 194위)와 같은 수준으로 떨어진 셈이다.[32] 하다못해 석유 매장량 1위인 베네수엘라조차 전성기에는 무려 이탈리아보다도 1인당 GDP가 높았을 정도로 잘 나갔던 데다가 우고 차베스 시기 국민들은 (뒷일은 꿈에도 모른 채) 석유의 혜택을 제대로 볼 수 있었다.[33] 다만 당시에도 '1달러=2자이르'를 암묵적으로 유지해왔다.[34] 비슷하게 짐바브웨의 초인플레이션도 2008년 정점을 찍은 것과 달리 로버트 무가베 짐바브웨 대통령의 세계 최악의 독재자 1위 달성, 취약국가지수 2위 모두 그 다음 해인 2009년 통계에 기록되었다.[35] 참고로 이 조사에서 2위는 50억~100억 달러를 착복한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필리핀 대통령, 1위는 150억~350억 달러를 착복한 수하르토 인도네시아 대통령이었다. 다만 사치 수준이 그 모부투도 능가할 정도였던 마르코스와는 달리 수하르토는 막내아들 토미 수하르토가 사치로 물의를 빚었지 본인은 어떠한 사치 행각을 보인 적이 없었다. 마르코스 또한 서민적인 입맛의 음식을 즐겼기에 식생활로 물의를 빚은 적은 전무하다.[36] 실제로 2016년에 모부투가 보유했던 스위스의 별장이 경매에서 550만 유로(약 77.5억 원)에 매입되기도 했는데, 그 별장은 내부 면적만 700m²에 정원이 6ha에 달한다고 한다. # 그리고 후술할 모부투의 벨기에인 사위의 증언에 따르면 모부투는 벨기에 한 나라에서만 브뤼셀 남쪽에 있는 6ha의 정원과 40개의 침실이 딸린, 800~900만 달러 가치의 호화 별장 샤토 퐁드로이(Château Fond'Roy)[71] 외에도 총 6채의 부동산과 8채의 아파트를 보유하고 있었는데, 이들의 총 가치는 2,500만 달러에 달했다고 한다. #[37] 이는 부패 독재자 2위를 차지한 마르코스와 니콜라에 차우셰스쿠, 로버트 무가베, 프란시스코 마시아스 응게마가 별장과 명품에는 돈을 아끼지 않았으면서도 식사는 전반적으로 채식 위주로 검소하게 한 것과 부패 독재자 1위를 차지한 수하르토가 아예 컵라면을 즐겨먹었을 정도로 식생활이 소탈했던 것과는 너무나 대조적이다. 사실 특출나지 않은 집안에서 태어난 독재자들이 소박한 식생활을 하는 것은 흔한 일이다. 오히려 김일성과 모부투가 특이 케이스일 정도.(김정일, 김정은은 어릴 때부터 지도자의 자식이었으니 논외) 참고로 김일성도 모부투처럼 호화음식과 전통음식을 같이 먹는 절충형이었다.[38] Gaston Lenôtre, 1920~2009. 아버지가 호텔 주방장에 어머니는 명문 은행가 집안의 개인 요리사였던 요리사 집안 출신이었으며, 1960년에 파티용 빵과 케이크를 배달해 주는 '파티 출장업'이란 새로운 업종을 창안하며 세계 12개국에 케이터링 지점망을 구축하고 특별한 이벤트와 국가 행사 등의 케이터링을 맡았고, 1971년에는 '에콜 르노트르'란 프랑스 최초의 요리학교를 개설했다. 그의 제자 중 한 명이 바로 현존하는 세계 최고의 셰프 중 한 명으로 알려진 알랭 뒤카스(Alain Ducasse, 1956~)다.[39] 모부투는 정부 소유의 DC-8 여객기를 베네수엘라에 1년 동안 32번이나 보내 털이 많은 양을 5천 마리나 가져오기도 했다.[40] 모부투는 호텔에 도착한 하객들에게 정확히 10억 자이르가 든 상자를 제공했는데, 이 시점이면 10억 자이르는 말보로 담배 1갑 가격에 불과했다고 한다.[41] 아이티의 독재자 장클로드 뒤발리에가 1980년 결혼식에 들인 전체 금액이 200~300만 달러였고, 이 때문에 뒤발리에의 결혼식은 '최고 호화 결혼식'으로 기네스북에 등재되었을 정도였는데 모부투는 결혼식에 쓸 전체 금액도 아닌 보석값에만 300만 달러를 쓰며 뒤발리에의 기록을 거뜬히 뛰어넘었다. 더구나 1980년 기준 아이티의 1인당 GDP는 약 245달러(2023년 환율로 약 894달러)로, 환율 변동을 고려하지 않아도 1인당 GDP가 1992년 기준 자이르보다 높았다는 것을 감안하면 모부투가 얼마나 생각이 없는 독재자였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42] 그중 모부투에게 학교를 인수받은 예수회 신부가 운영하던 학교 College Presidentiel는 화학실, 물리실, 컴퓨터실, 올림픽 게임 시설, 모든 종류의 밴드 악기가 있었다고 한다.[43] 한 번도 가동되지 않았다고 한다.[44] 500명 이상을 수용할 수 있는 아프리카에서 가장 큰 핵 벙커였으며, 건설 당시에는 중앙 아프리카에서 유일한 핵 벙커였다고 한다.[45] 그바돌리테 국제공항은 정확히는 그바톨리테에서 남서쪽으로 6km 떨어진 모안다(Moanda) 마을에 위치해 있었고, 초음속 여객기인 콩코드 여객기와 초대형 여객기인 보잉 747의 이착륙도 가능할 정도로 긴(3.2km) 활주로를 가지고 있었으며, 모부투는 해외로 순방과 쇼핑을 갈 때면 에어 프랑스의 콩코드를 전세내서 탔다고 한다. 참고로 활주로 왼쪽에는 그의 첫 아내의 동상이 세워져 있었으며, 매일 그바돌리테-킨샤사를 연결하는 보잉 737 항공편이 있었다.[46] 건설에 참여한 노동자들도 중국에서 직접 온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47] 금색 비품과 유럽 골동품들, 금도금 욕조, 크리스탈로 채워진 것은 물론 벽에는 금박이 칠해졌다고 한다.[48] 2017년에 촬영된 사진[49] 1971년에 사망했다.[50] 수백 명의 르완다 난민들을 납치해 노예처럼 부려먹었다고 한다.[51] 이쪽도 남아 있는 내부 사진이 내부 화재로 전소된 모습밖에 없다.[52] 이 학살에 참여한 부대가 밤에만 활동한다고 해서 '올빼미(Les Hiboux)'라는 이름이 붙은 특수부대로 알려졌으나, 실제로 이 부대는 학살 후인 1991년 8월에야 창설되었고, 이 학살에 참여한 실제 부대는 모부투가 창설하고 모부투의 사촌 은짐비 응발레(Nzimbi Ngbale, 1944~2005)가 지휘하던 '특별 대통령 부서(DSP)'라는 대통령 경호 부대였다. 참고로 DSP는 응반디족 인원들만 대원으로 받아줬고, 이스라엘인 지도교관의 훈련을 받았으며, 당시 자이르에서 정기적이고 충분한 금액의 임금이 지급된 유일한 조직이었다. 물론 이 조직은 모부투가 축출된 1997년에 해체되었다.[53] 실제로 당시 샤바(루붐바시가 속했던 지역이자 오늘날의 카탕가 주) 지역의 지검장이던 은테사 네 음페모지키(Ntesa Ne Mpemoziki)는 이 학살을 조사하려다가 상급자에 의해 조사가 강제로 중지되고는 곧 킨샤사로 소환된 후 그해 9월에 키상가니로 좌천되었고, 다음 해까지도 샤바 지역의 지검장은 선출되지 않았다고 한다. #[54] 1965년 쿠데타에 가담한 후 모부투 정권 초기에는 1967년 개헌, 공금 횡령, 반대파 탄압에 가담한 모부투의 측근이었으나, 1980년경에 모부투를 떠나 민주사회진보연합(UDPS)이라는 '불법' 야당을 차리며 민주화 운동을 벌이다 여러 번 투옥된 특이한 이력의 보유자다. 아들이 2019년부터 현직 콩고민주공화국 대통령을 역임하고 있는 펠릭스 치세케디다.[55] 오랜 독재에 억눌려왔던 탓인지 단기간에 무려 400개에 가까운 야당이 등록되었다고 하며, 공식적으로는 66개의 야당이 인정되었다.[56] 2003년부터 2011년까지 뉴멕시코 주 주지사를 역임했다.[57] 여담으로 이와 비슷하게 장 베델 보카사이디 아민이 축출되자 중앙아프리카공화국우간다의 국민들도 모부투가 축출된 후의 자이르 국민들과 비슷한 반응을 보이며 환호했다.[58] 이는 우간다이디 아민도 국민들의 증오 속에 탄자니아군에게 축출되고는 헬리콥터를 타며 도주하긴 했으나, 그럼에도 리무진 5대의 호위를 받으며 우간다를 안전하게 빠져나왔다는 것과는 대조된다.[59] 이것도 노화로 인해 줄어든 것으로 학창 시절에는 키가 191cm나 됐다고 한다.[60] 사실 말기 암이 무서운 건 가망이 없어서가 아니다. 치료 가망이 없는 병은 넘쳐난다. 그보다는 죽기 직전의 삶이 너무나 비참하기 때문이다.[61] 이와 비슷하게 중앙아프리카공화국장 베델 보카사도 축출 후 사형 선고까지 받았다가 사면된 후에는 기독교에 귀의하여 적은 연금만으로 조용히 생활하고 집권할 동안 그렇게 즐기던 술과 여자도 끊으며 살다가 죽었다.[62] fufu, 서아프리카, 중앙아프리카 지역에서 먹는 전통 요리. 카사바 등을 익히고는 절구에 찧어 반죽 같은 질감의 덩어리로 만든다.[63] 당시 자이르인들이 모부투에게 품은 '지독한' 증오심은 물론이고 헐벗고 굶주리는 국민들을 뒤로 한 채 본인은 국민들에게 자신을 신으로 추앙할 것을 강요하며 뒤에서는 추잡하게 저딴 '궁궐'에서 신처럼 생활하고 있었다는 걸 직접 두 눈 뜨고 지켜보게 된 마당이니 반군들이 저 집을 평지로 만들지 않은 것만으로도 용한 수준이다.[64] 2012년 말까지 네덜란드어로 30만 부가 팔렸으며, 2014년에는 영어로도 번역 출판되었다.[65] 레이브룩에 따르면 그 처녀들의 가족들은 모부투에게 처녀들을 바치는 것을 영광으로 여겼다고 한다.[66] 참고로 반 레이브룩은 이 책을 쓰기 위해 6년 동안 콩고민주공화국을 10번이나 방문하고 500회가 넘는 인터뷰를 한 데다가 심지어 광저우의 콩고민주공화국 이주민들의 커뮤니티까지 방문했을 정도로 정성을 가했기에 모부투의 여성 편력과 관한 주장들이 가십에 불과했다면 책에다 적지는 않았을 것이다.[67] 김정일이 즐겨 입던 인민복이 실제로는 서양제 고급 원단을 공수해오고 북한의 장인이 수제작으로 만들었다는 것과 유사한 모습인 셈이다.[68] 그 군인들은 성공적으로 자이르로 돌아오지 못했다고 한다.[69] '사담 후세인'이라는 별명도 콩굴루의 악행 때문에 붙은 것이 아니라, 자이르인들이 콩굴루의 이런 모습을 보고 '미국에 맞서고 있던 위대한 이라크 지도자'와 같다며 칭찬의 의미로 붙인 표현이었으니, 적어도 니콜라에 차우셰스쿠의 환갑을 축하하기 위해 루마니아의 지식인들이 차우셰스쿠를 뜬금없이 공산권 지도자도 아닌 이디 아민과 동렬에 세운 것과 비교하면 그나마 이해가 가긴 하다. #[70] 참고로 이 말을 한 사람은 모부투 시기에 45번 체포되었을 정도로 강경한 모부투 반대파였던 조셉 올렌간코이(Joseph Olenghankoy)였다. 참고로 올렌간코이는 2003~2004년에 콩고민주공화국 교통통신부 장관을 역임했고, 2016년 12월 31일에 2016년의 정치적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세인트 실베스터 협정 과정을 모니터링하기 위한 국가위원회 의장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