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5-10-17 22:29:35

우고 차베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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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네수엘라 볼리바르 공화국 대통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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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9C802><colcolor=#000> 베네수엘라 볼리바르 공화국 제64대 대통령
우고 차베스
Hugo Chávez
파일:Hugo_Rafael_Chávez_Frías.jpg
본명 우고 라파엘 차베스 프리아스
Hugo Rafael Chávez Frías
출생 1954년 7월 28일
베네수엘라 바리나스 주 사바네타
사망 2013년 3월 5일 (향년 58세)
베네수엘라 카라카스
묘소 카라카스 군사 박물관
재임기간 제64대 대통령
1999년 2월 2일 ~ 2013년 3월 5일[1]
학력 카라카스 군사학교 (졸업)
병역 베네수엘라 육군 공수부대 대령 전역
사상 차베스주의, 21세기 사회주의
최종 당적
종교가톨릭
신체173cm, 86kg
배우자난시 콜메나베스
마리사벨 로드리게스
서명
파일:우고 차베스 서명.svg

1. 개요2. 일생
2.1. 대통령 이전2.2. 대통령 임기2.3. 암 투병2.4. 취임식 논란2.5. 사망
3. 거침없는 반미 외교
3.1. 카다피, 김정일 옹호 및 추모
4. 평가와 정책5. 일화
5.1. '입 닥쳐' 사건
6. 관련 서적

1. 개요

베네수엘라의 제64대 대통령.

베네수엘라를 정치적으로 반미 국가로 만든 장본인이다.

2. 일생

2.1. 대통령 이전

바리나스 주 사바네타에서 태어났다. 학창시절에는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선수를 꿈꾸던 야빠소년이였으나 마침 육군에 야구선수 양성 프로그램이 있다는 소리를 듣고 야구선수가 되려고 육군사관학교에 진학했는데 거기서 진로를 바꿔 직업군인이 되었다. 결과적으로 야구선수가 되는 데 실패했지만 야빠인 건 틀림없어서 육군 장교로 재직하고 있을 때 아마추어 야구대회에 참여했고, 대통령 재임시에 야구 대표팀에 대대적인 지원을 보냈다.[2] 2005년 월드시리즈에서도 시카고 화이트 삭스(당시 화이트 삭스 감독이 베네수엘라 출신의 아지 기옌)가 우승에 성공하자 엄청 좋아하기도 했다.

육군 장교가 된 이후에 시몬 볼리바르에 매력을 느껴 볼리바르 대학 정치학과에 재직하기도 했으며, 때마침 형인 아단 차베스가 좌파 성향이었다는 점도 한 몫하여 이 때부터 좌파사상에 호기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그 이후에 베네수엘라의 빈부격차와 군 내부의 부패 문제를 보고 여러 좌파 지식인과의 만나면서 "볼리바르-200"이라는 정치군인 단체를 만들고 '볼리바르 사상'을 정립했다. 그 후의 차베스는 군사학교에서 강사로 재직하면서 당시 정부에 대한 비판[3]과 정열적인 강의법으로 이름을 날리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콜롬비아 국경지대로 전출되면서 민군협력증진 프로그램에 참여했고, 1988년에 승진하여 대통령궁에서 국가안전보장회의의 보좌관으로 근무하게 되었다.

사실 이때까지만 해도 빨간물(?)이 좀 들긴 했어도 딱히 쿠데타를 일으키려 한다거나하는 조짐은 없었다. 한편 이 시기에 페레스 前 대통령이 경제가 계속 하향세를 타서 여당인 민주행동당이 불리했던 상황에도 그 전에 대통령에 재직했던 경험(1974~1979년)과 뛰어난 선거전략,[4] 상대야당인 기독사회당의 자중지란까지 겹치며 과반 득표로 재선에 성공했다. 하지만 그는 경제를 살린다는 명분하에 IMF의 구제금융을 받아들였고 이 구제금융 조건으로 교통비와 석유값을 보조하는 정책이 전면적으로 중단되어 순식간에 물가가 2배가 오르자 물가폭등에 항의하는 빈민층들이 대대적으로 들고 일어나 이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최소 수백명이 사망하는 참사가 벌어졌다(일명 카라카소[5]).

그 이후에도 실정이 이어지면서 차베스는 페레스 정권을 뒤엎을 결심을 하게 되고 3년 뒤인 1992년 페레스 정권[6]의 지지가 크게 떨어지는 상황에서 페레스 대통령과 그 측근들의 부패혐의를 내세워 현역 중령으로 10% 정도의 군 병력을 장악해 쿠데타를 시도했으나 페레스 충성파 군인들에 의해 진압되어 실패했다. 하지만 쿠데타가 진압되어 투항하는 조건으로 방송연설을 할 기회를 얻어 자신의 동료들을 처벌하지 말라며 “지금은 목표를 이루지 못했지만 언젠가는 이룰 것이다. 모든 책임은 내가 지겠다"라는 내용의 연설을 해 베네수엘라 국민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고 이후에 2년간 감옥에서 복역하다가 라파엘 칼데라 정권 때 들어서 사면되었다. 라파엘 칼데라는 출신성분(?)이 보수파이긴 했어도 재선 당시에는 일부 좌파 정파의 지지를 받던 상태였기에 사면이 가능했다. 더군다나 라파엘 칼데라 입장에선 페레스 前 대통령의 부패혐의도 입증되긴 했으니 굳이 차베스를 감옥에 더 가둬놓을 이유가 없다.

차베스의 쿠데타는 베네수엘라 정치 체제를 뒤흔들어놓았다. 베네수엘라는 사실 오랜 정치 안정을 누리고 있었다. 빈발하던 쿠데타와 정치적 불안으로 인해 체결된 "푼토 피호 협정" 이후 1958년부터 양당체제 하의 정권교대가 계속되던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차베스의 쿠데타 기도 당시 푼토 피호 협정은 34년째 되는 해였다.

2.2. 대통령 임기

여하튼 간에 방송 연설로 유명인이 된 차베스는 옥중에서도 1993년 대통령 선거에서 기권운동을 주장하여 라파엘 칼데라의 득표율보다 높은 기권율 40%를 기록하는데 공헌했고, 1994년 라파엘 칼데라의 사면으로 출소한 후 본격적으로 정치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그는 정치권에 투신한 뒤에도 한동안 선거에 회의적인 입장이었으나 1997년 들어 생각이 바뀌어 적극적으로 선거에 참여하는 방향으로 틀고 군소정치조직에 불과했던 "볼리바르 혁명 200"을 확대재편하여[7] "제5공화국 운동"이라는 정당을 창당했고 사회주의 운동당, 애국당 등과 좌파연합(애국전선)을 결성, "제3의 길"을 정책노선으로 내걸고[8] 모라토리엄 선언과 사회주의적 정책을 공약으로 내세웠다. 이때 뚜렷한 비전과 투박하면서도 열정적인 연설 등으로 탄탄하게 지지기반을 다져나가며 지지율을 끌어올렸다.

1998년 지방선거에서 자신의 아버지[9]를 바리나스 주지사로 당선시켰고 그 이후에 치러진 총선에서 약진했으며(의회 다수는 차지하지는 못했다.)[10] 이어서 치러진 1998년 대통령 선거에서 드디어 56.2%의 득표율로 베네수엘라 대통령에 당선되었다.[11] 대통령 당선 직후에 미국이 급진적인 공약과 과격한 발언을 이유로 경고성 축하 서한을 보내면서 미국과의 관계는 급속히 삐그덕거리기 시작했다.[12] 차베스는 1999년 2월 2일 베네수엘라 대통령에 취임했다.
개표 완료 후 차베스 소개영상(베네비시온)

대통령이 된 차베스는 정부의 주요 요직에 곧바로 자신의 지지자들과 좌익 연립정당의 인사들을 앉혔다. 볼리바르 혁명 200의 창당인 헤수스 우르다네타는 국가정보국장(DISIP)에, 쿠데타 동료 에르난 그루베르 오드레만은 카라카스 주지사에 임명했다. 이른바 볼리부르게시아(볼리바르+부르주아지)가 정권의 핵심으로 올라섰다.

차베스는 대통령 당선 이전에 치러진 국회의원 선거 결과 여소야대에 놓이게 되었다. 원래 베네수엘라에선 대통령 선거와 국회의원 선거를 같은 날에 치르는게 관례였으나 차베스의 약진에 위기를 느낀 의회가 국회의원 선거가 대통령 선거보다 한 달 일찍 치르도록 변경했고 그 결과 베네수엘라 의회는 야당이 다수가 되어 여소야대가 된 것이다. 차베스는 이미 선거운동 시절부터 기존 의회를 해산하고 새 의회를 구성하겠다는 공약을 내놓았으며[13] 제헌의회 전술을 이용해 개헌을 시도했다. 구체적으로는 양원제로 구성되어있던 베네수엘라 의회를 단원제로 개편하고, 직접민주주의적 요소를 강화시키고, 대통령의 임기를 5년에서 6년으로 연장하고 대통령의 권한을 강화하면서[14] 연임을 허용[15]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야권이 장악하고 있던 기존 의회를 대체한 새 제헌의회 선거에서 여당연정이 압승을 거두었고 개헌에 성공한 뒤 기존 의회를 사실상 무력화한 뒤에 치러진 2000년 대선에서 59.8%라는 득표율로 역시 압도적인 득표율로 재선[16](5공화국 헌법상 1선)에 성공했고 동시에 치러진 총선과 지방선거에서도 과반확보에 성공했다. 이미지와는 다르게 1선에서의 지지기반은 빈민이 아니라 중산층이었다.[17]

그러나 차베스는 너무 성급하게 개혁을 시도하려다가 이미 의회에서 여당연정이 과반을 확보하고 있었는데도 공론과정을 생략하는 바람에(특히 49개의 개혁법안을 의회의 동의없이 통과시킨게 결정적인 발단이 되었다.) 연정 내부에서도 이탈자가 속출했고 결국엔 이들 이탈자를 맞아들인 차베스 반대파가 세를 불리게 되면서 연립여당까지 합해 100석을 넘던 여당은 80석대 중반으로 주저앉고 야당진영은 70석대 후반까지 불어났다. 결국 이 시기부터 세가 불어난 반대파의 저항이 거세지기 시작했다. 결국 2001년 하반기부터 반대파의 조직적인 저항이 시작되었고 특히 2002년 우파 정치군인들의 쿠데타 시도로 위기를 맞게 된다.

이 쿠데타는 대다수의 언론과 대기업의 지지를 등에 업었기 때문에 여론지형상에서 반 차베스파가 차베스에게 우위를 보일 것으로 예측되었다. 그러나 쿠데타의 주도세력이 극우세력이라 차베스 반대파 내부의 중도파와 좌파가 배제되었다. 특히 차베스가 내건 49개의 개혁법을 모두 무효화하는건 물론[18] 무엇보다도 의회를 해산하겠다고 밝히면서 주요 야당들의 지지를 얻지 못하게 되었다. 야권에서도 쿠데타 지지여부를 두고 갑론을박이 벌어져 시간을 보내기만 했다. 더군다나 차베스가 대통령 사퇴서를 냈다는 보도가 나왔지만 차베스 딸의 통화내용을 통해 사실이 아님이 드러나면서[19] 차베스파 정치군인들이 반발하고 빈민 30만명이 차베스를 적극 지지하면서 쿠데타 규탄 시위를 벌였다. 물론 처음에 시위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수십명의 사상자가 났지만 결국 진압에 실패하고 또한 장기간의 내전을 우려한 쿠데타 주도세력이 항복하여 결국 쿠데타는 사흘만에 실패로 돌아갔고 차베스는 국정에 복귀했다.

언론에서는 RCTV가 가장 강렬하게 차베스를 반대했다. RCTV는 쿠데타를 적극 옹호했던 방송국이었는데 쿠데타가 일어났을 때엔 일방적으로 편파보도를 일삼다가 쿠데타를 진압한 차베스가 복귀하자 그 날 하루동안 뉴스 프로그램을 안보내고 오락프로그램으로 채웠다. 그 이후에 2004년 국민투표까지 차베스의 승리로 마무리 지어지면서 결국 2007년 재허가 심사에서 떨어졌고 현재는 일개 케이블 TV 방송국으로 전락했다. 물론 지상파 방송권 박탈에 대한 반발이 없던건 아니었지만 야당이 2005년 총선을 보이콧한지라 당연히 반대 목소리가 힘을 얻을 수 없었다. 이 시기에 연이어 쓴 맛을 본 야권에선 2010년 총선에 적극 참여해서 개헌저지선을 확보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이 때 언론에게 당했던 경험 때문인지 차베스는 쿠데타 진압 이후에 자기편의 목소리를 내어줄 공동체 방송국들을 적극적으로 지원했다.

하지만 여전히 반대파의 저항은 거셌고 특히 차베스가 급진적인 정책을 펼칠까 우려한[20] 중산층들도 반 차베스파 대열에 적극적으로 가세하기 시작했다. 이 때 벌어진게 2002년2003년 상반기에 걸쳐서 벌어진 자본 파업과 연이어서 벌어진 석유 파업으로 대기업과 노조(특히 석유노조)를 중심으로 대대적인 총파업을 벌였던 것이다. 그로 인해 주요 공장들과 쇼핑물, 주요 상점들이 대거 문을 닫고 자본이 대거 유출되어 경제성장률 역시 마이너스 7-8%대(2002-2003년)를 찍는 등 경제상황은 막장에 이르게 되었으나 차베스는 이를 오히려 기회를 삼아 군대를 동원하면서까지 지지기반인 빈민층들에게 주요 생필품을 보급해주고 카라카스 한복판에 민중시장을 개설하며 위기를 탈출하기 위해 애를 썼다. 결국 장기간 총파업은 기세가 시들해지며 실패로 끝나갔다. 이 석유파업은 "일반적인 노동자가 아니라 그 동안 기득권을 노렸던 석유관련업 종사자, 간부들의 파업"이라고 평가절하되고는 하지만 만, 이 파업으로 인해 차베스에게 해고된 국영 석유기업 PDVSA 임직원의 수는 18,000명으로 회사 총직원수의 40%에 달했으며 특히 연구개발부서인 Intevep의 인력은 80%가 해고됐는데, 차베스는 이에 더해 이들을 베네수엘라의 석유 관련 업종에 다시는 취업하지 못하도록 보복했고 해고당한 숙련노동자들과 연구개발자들이 먹고 살 길을 찾아 죄다 해외로 빠져나갔다. 그 결과 베네수엘라의 석유 생산량은 2000년대의 석유 호황기에 증가는커녕 정체 내지 후퇴했다. 이웃 국가 콜롬비아가 석유생산량을 두 배 가까이 늘릴 때 핵심 중의 핵심 국가산업인 석유산업의 생산성에 대해 이런 자해행위를 거리낌 없이 행한 덕분에 베네수엘라는 유가가 폭락한 2010년대 경제파탄을 겪게 된다.

총파업이 실패로 끝나가기 직전에 야권은 소환투표안을 대안으로 제시하면서 총 유권자 가운데 20%의 서명(254만명)을 얻어 차베스 소환투표를 청구하였고 진통 끝에 1년 뒤인 2004년 8월에 소환투표가 실시되었으나 때마침 베네수엘라가 호황을 누리기 시작했고 결국 선거결과는 2000년 대선에서 나타난 6:4 구도 그대로 나타나면서 결국 야권은 차베스 정권을 뒤엎는데 실패했다. 이 선거에서 반 차베스 표는 2000년 대선 때에 비하면 훨씬 많았지만(252만표-> 357만표). 이게 투표율 상승효과(2000년 대선 56%-> 2004년 국민투표 70%)에 힘입은거라 친 차베스파도 투표율 상승의 효과를 누려서 (357만표->499만표) 2000년 대선 때에 비해 훨씬 많은 표를 얻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뒤를 이은 지방선거에서도 여당 연정은 대승을 거두었다. 결국 연이은 패배에 힘을 잃은 야권은 2005년 총선을 보이콧했고 결과적으로 의회를 여당이 독차지하게 되면서[21] 차베스가 독주하는데 공헌(?)을 하게 되었다. 이후 야권은 자신들의 실책을 인정하고 뼈저리게 반성하게 된다. 반면, 차베스는 덕분에 '민주적으로' 권력을 독점적으로 행사할 좋은 기회를 얻게 된다. 차베스의 21세기 사회주의 정책의 대부분은 이 2005년 총선 다음부터 실행이 된다.

2006년에 여당 연정을 통일사회당이라는 하나의 정당으로 통합시키는데 성공한 뒤에 대선에서도 오일쇼크 시기 이후 최대의 경제호황에 힘입어 74.6%라는 높은 투표율을 기록하고[22] 62.9%라는 득표율(1947년 첫 직선제 대선 이후 최다 득표율)로 3선(5공화국 헌법상 재선)에 성공했다. 이후엔 야당이 2005년 총선을 일방적으로 보이콧해 여당이 의회를 거의 독차지하던 상황이었던 것도 있고, 압도적인 지지율에 자신감을 얻은 차베스는 헌법을 개정해서 연임 제한 규정을 철폐하려 했다. 차베스가 제시한 개헌안에는 선거참여가능 연령 18세에서 16세로 인하, 성차별 철폐와 인종차별 철폐 규정, 근로시간 단축(주당 44시간에서 36시간으로 단축), 여성선출직 확대, 사회보장제도 확충 등을 패키지로 담고 있기 때문에 긍정적으로 평가되었으나 행정부 권한 강화나 대통령 권한 강화 등의 법안이 들어가있어 부결되었다. 그 외에도 개헌안에 쓸데없이 너무 많은 조항을 담았고(그것도 A안과 B안으로 나누어서!) 개헌 국민투표 과정이 여당에 의해 속도전으로 진행되다보니 도저히 일반인들이 개헌안의 내용을 이해하기 힘들었다는 점도 한 몫했고, 낮은 투표율에 1%의 차이로 실패했기 때문에, 차베스 지지자 측에서 너무 안일하게 대처하여 패배했다는 분석도 있다. 그러나 2008년 지방선거 압승과 함께 자신감을 얻은 차베스는 다시 교묘하게 개헌안을 비틀었는데, 드디어 2009년 2월 모든 선출직 공무원의 연임제한 규정 폐지안이 상정되어 국민투표를 통해 연임제한이 철폐되었다.

하지만 그 이후에 유가하락의 여파로 경기침체가 시작되면서 2010년 총선에서 의회 개헌선 확보에 실패하고 통일사회당의 득표율은 야당연합보다 1%의 득표를 더 얻는데 그쳤으며 공동여당인 베네수엘라 공산당과 합쳐도 득표율 50% 초반 수준으로 부진을 거두었다.

2.3. 암 투병

이렇게 장기집권의 토대를 마련했음에도 불구하고 골반 (골육종)에 걸려서 그게 다 허사가 되었다.[23] 2011년 6월 중남미에서 비교적 발달된 의술을 가진 쿠바에서 수술을 받기도 했으나 최대 2년의 시한부라는 보도도 나왔다. 수술 이후 다소 건강이 호전되었으나 2012년 2월 같은 부위에 암이 재발하여 또다시 암 수술을 받는다고 한다. 정확한 병세는 알려지지 않고 있으나 4월 5일 부활절 미사에서 "그리스도여, 당신의 가시 면류관을 저에게 주시면 제가 피를 흘리겠나이다, 당신이 십자가를 주시면 당신을 위해 십자가를 지겠나이다, 그러나 아직 나라를 위해 제가 할 일이 있사오니 저에게 생명을 주소서"라는 기도를 한 게 알려지면서 상당히 심각한 거 아니냐는 분석이 많다.

그러나 본인이 암의 완치를 선언하고 다시금 대권 도전을 선언, 2012년 10월 7일에 치러진 대통령 선거에서 야권 단일후보를 접전 끝에 꺾고 4선 연임에 성공했다. 생각보다 격차는 많이 났지만 그래도 야권이 44%의 득표를 얻었기 때문에 그 전의 세차례의 대선 때에 비하면 선전했다는 평이며, 선거의 여파로 그 동안 막말도 많이 하던 차베스가 슬슬 좀 유연한 방향으로 국정전환한다는 얘기도 나왔고 아무튼 2019년까지 20년 동안 장기집권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했다.

그렇지만 암이 재발해 12월 11일 쿠바에서 수술을 받고 회복을 기다렸다. 쿠바로 가기 전 니콜라스 마두로를 부통령으로 임명하고 그를 후계자로 지명하긴 했지만 당장 2013년 1월 10일로 예정된 대통령 취임식에 참석할 수 있는지 불투명한 상황이었다. 심지어 의식불명 상태라서 생명유지장치로 연명하고 있다는 주장까지 제기되었다. 병에서 제대로 회복되지 않은 상태에서 선거운동을 강행했으니 몸에 무리가 가는게 당연하다.

2.4. 취임식 논란

2013년 1월 6일에 나온 소식들에 의하면 니콜라스 마두로 부통령이 1월 10일 국회에서 취임선서를 못할 경우에는 대법원에서 대법관들 앞에서 할 수 있다는 예외조항을 강조했다고 한다. 사실상 차베스가 1월 10일에 취임식을 하기는 어렵다는 것을 인정한 셈이라 논란이 커질 것으로 보인다. 베네수엘라 헌법에는 국회에서 취임선서를 못할 경우 30일 이내에 재선거를 실시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어 야당에서는 국회의장을 대통령 권한대행으로 삼고 재선거를 실시해야 한다고 맞서고 있다. 차베스의 반대파들은 대법관들이 쿠바로 가서 병상에서 차베스가 취임선서를 해 대통령직을 유지하려고 한다는 주장을 펼치고 있다.

결국 1월 8일 베네수엘라 정부는 차베스의 4기 대통령 취임식을 연기한다고 공식 발표했으며, 1월 9일 베네수엘라 대법원도 취임식 연기가 합헌이라고 판결했다. 사실상 차베스가 회생해서 국정에 임하는 건 어려워졌다는 게 대체적인 분석. 일단 무기한 취임식 연기로 권력 이양이나 차베스의 회생에 필요한 시간을 벌기는 했다는 분석이지만 야당이 가만 있을지는 의문. 게다가 차베스가 만약 죽기라도 할 경우 정권의 2, 3인자들인 마두로 부통령과 카베요 국회의장이 권력다툼을 벌일 가능성이 있다는 분석이 제기되어 베네수엘라의 정국은 더욱 혼미할 것으로 보인다. 게다가 중남미의 좌파정권들을 주도하는 차베스였던지라 베네수엘라의 좌파정권이 무너질 경우에는 다른 중남미 국가들에도 파급효과가 클 것이라는 관측이 많다.

일단 국정은 마두로 부통령이 대행하는 것으로 보인다. 마두로 부통령이 중남미 국제기구 회의에 참석해서 차베스의 서한을 대독한 점으로 미루어 마두로 부통령으로의 정권 이양이 진행중인 것이 아니냐는 관측도 있다. 일각에서는 마두로 부통령이 미국에 밀사를 보내서 관계 개선을 모색했다는 주장도 제기되었다. 마두로 부통령이 보낸 특사가 미 백악관 국가안전보장회의의 중남미 책임자를 만나서 2005년에 추방당한 미국 마약단속국 요원을 복귀시키는 문제를 협의했다고. 이는 디오스다도 카베요 국회의장을 견제하기 위한 방책이라고 알려졌는데 미국 마약단속국의 블랙리스트에 카베요 국회의장이 올라 있어서 이런 방책을 취했다는 뜻이다. 그러나 마두로 부통령은 차베스의 상태가 급 호전중이라면서 이런 모든 의혹을 부인했다.

2월 18일, 차베스는 쿠바에서 베네수엘라로 귀국했다. 그러나 귀국하자마자 카라카스의 군 병원에 입원해 그의 상태에 추측이 나돌던 상황. 결국 2월 21일 에르네스토 비예가스 통신정보 장관이 라디오에서 발표한 성명문에서 차베스가 호흡기 계통에 문제가 있으며 건강 추세가 호의적이지 않다고 밝혀 건강이 아직 완전히 회복되지 않았음을 인정했다. 이를 밝힌데 대해서는 차베스의 건강이 좋지 않기는 하지만 죽기 일보직전이라는 추측을 차단하기 위한 조처로 풀이된다.

2월 27일, 미주기구 주재 전 파나마 대사 기예르모 코체스가 차베스의 임종이 멀지 않았거나 이미 사망했다는 주장을 제기했다. 이에 대해 베네수엘라 정부는 사실무근이라고 부인하며 진화에 나섰지만...

2.5. 사망

3월 6일 사망속보가 보도되었다. 현지 시간으로 3월 5일[24] 오후 4시 25분에 수도 카라카스의 군 병원에서 현지 나이로 58세를 일기로 사망했으며,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 상황에서 입술을 움직여 남긴 유언은 "죽고 싶지 않다. 제발 날 죽게 내버려두지 말아다오"였다고, 하지만 이게 진짜 유언이었는지는 논란이 많다.[25]

장례식은 3월 8일 국장으로 엄수되며 유해는 방부처리되어 수도에 있는 혁명박물관(구 군사박물관)에 영구 전시될 예정이었다. 기사 그러나 정작 차베스는 생전에 유해의 영구 보존을 반대한 것으로 알려져 집권 세력이 정권 유지를 위해 고인의 뜻을 무시했다는 비판이 제기되었다. 그러나 엠버밍 시기를 놓치는 바람에 유해를 영구 보존하는 방안은 그냥 배제되었다.

장례식에는 라울 카스트로, 다니엘 오르테가, 에보 모랄레스, 크리스티나 페르난데스, 루이스 이나시우 룰라 다 시우바, 지우마 호세프 등 중남미 지도자들이 대거 참석했으며 차베스와 친했던 마무드 아마디네자드 당시 이란 대통령, 알렉산드르 루카셴코 벨라루스 대통령도 참석했다.

베네수엘라 정부는 대통령 사망일로부터 30일 안에 다시 선거를 치를 예정이다. 차기 대통령으로는 니콜라스 마두로 부통령과 야권 실세인 엔리케 카프릴레스가 물망에 올랐는데, 4월 14일에 치러진 대선에서 마두로 부통령이 근소한 차이로 승리했다. 하지만 마두로는 차베스 사망이라는 최고의 호재를 가지고도 야권후보와 고작 1.6%포인트의 득표율 격차를 기록하는데 그쳐 사실상 패배나 다름없는 승리를 거두었다는 평가다. 이는 즉, 나중에 현 집권당이 선거에서 야권에게 밀릴 가능성이 높아졌다는 얘기나 다름없다는 얘기이기 때문에 마두로 입장에서 차베스 정책 상당부분 재검토를 해야 하는 상황에 처해있다. 이후에 급속한 물가상승과 저조한 경제성장률, 저가 생필품들의 부족문제와 이로 인한 암시장의 활성화로 경제상황에 어려움이 가중되는 상황이었지만 2013년 지방선거를 앞두고 강제세일 조치를 취해 지방선거에서 승리를 하면서 입지를 탄탄하게 다져놓을 걸로 보였다. 하지만 야권의 시위로 다시 지지율이 하락하고 있었고 시위가 수습된 뒤에 경제통제완화조치를 취했는데 이번에는 생필품의 외부밀수로 인한 소비재 부족 문제 때문에 다시금 골머리를 앓고 있는 중.

정작 본인의 이른 죽음으로 모든 조치가 허사가 된 것을 보면 참으로 인생무상. 이른 죽음으로 인해 자신이 한 짓의 결과가 어떻게 났는지를 보지 않고 저세상으로 도망간 상황이 되어버렸다.

3. 거침없는 반미 외교

나는 매일 더욱 확신하게 되며 내 마음 속에는 한 점의 의심도 없습니다. 이전부터 수많은 지식인들이 말해왔듯이, 우리는 자본주의를 넘어서야 합니다. 하지만 자본주의 안에서 자본주의를 넘어설 수는 없습니다. 사회주의를 통해서만이 자본주의를 넘어설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일은 민주주의를 통해서 가능합니다. 하지만 미국이 강요하는 방식의 민주주의는 아닙니다.

특유의 거침없는 말투와 내뱉기를 좋아하는 성격. 특히 공적으로나 사적으로나 미국과 쌓인 감정이 많기 때문에[26] 미국을 도발하는 것을 자주 볼 수 있다.[27]

미국 남부가 허리케인 카트리나로 막대한 피해를 입자 "불쌍한 미국을 위해 우리가 지원금 좀 보내줄까?"라며 약올리기도 했고 실제로 지원금을 보냈다. 또한 후에 CITGO를 통해 미국 북부 저소득층 가정에 난방용 석유를 지원하기도 했다.

유엔 연설문에서 전 미국 대통령 조지 W. 부시"악마"라고 비난하였으며 그 전날 부시가 연설했다는 점을 이용하여 유황 냄새가 가시지 않았다라며 조롱하기도 했다.[28] 반면 버락 오바마악마가 아니라고 하였다(자신과 방향이 맞지 않으면 언제든지 악마라고 할 준비는 되어있는 듯). 이때 책을 주며 우호감을 표시하긴 했으나 나중에 다시 오바마에게 실망하였다고 발언했다.

외교적인 면에서는 이웃 국가 콜롬비아를 자국의 이념 성향에 맞추지 않는다는 이유로 강하게 비난했다(콜롬비아는 대표적 남미의 친미성향국가이다.). 그는 콜롬비아의 대통령[29]을 "미제의 꼭두각시"라고 멸칭하는 등 수많은 언행을 남겼다. 그러다가 2010년 8월에 산토스 대통령이 취임하면서 화해했다. 천안함이 북한의 공격으로 침몰하자 전 세계가 북한을 규탄하는 가운데 혼자서 미국의 소행이라고 미국을 비난하는 기행을 벌이기도 했다.

또 자신의 우상이나 다름없는 쿠바의 카스트로는 말할 것도 없고 이란마무드 아마디네자드알리 하메네이, 시리아바샤르 알아사드, 짐바브웨로버트 무가베, 벨라루스알렉산드르 루카셴코, 리비아무아마르 카다피, 심지어는 당시 국제적으로 고립된 상태였던 이라크사담 후세인까지 그야말로 북한을 제외한 전세계 반미 지도자란 지도자는 다 만나고 다니면서 친분을 과시했다.

다만, 차베스의 반미외교는 진정성 없는 그저 레토릭이라는 의견도 있다. 차베스 집권기간중 대미 무역량은 줄어들지 않았고 오히려 늘어나는 모습까지 보였기 때문. 달리 말하자면 베네수엘라 경제의 대미 의존도는 개선되지 않았고 오히려 심화되었다. 실제로 차베스 이후로도 맥도날드나 코카콜라 같은 미국 기업이 철수하지 않고 멀쩡히 영업하기도 했다.[30]

한편으로는 반미외교를 펼치면서도 중남미 각국에 석유를 지원하며 영향력을 강화하고[31] 특히 볼리비아의 에보 모랄레스와 에콰도르의 라파엘 코레아가 당선되는데 도움을 주기도 했다.

그가 죽고나서 "콜롬비아 마르크스주의 게릴라 세력과 협력해 미국 사회에 코카인을 범람시켜라”라고 지시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3.1. 카다피, 김정일 옹호 및 추모

2011년 리비아 민주화 운동카다피를 지지하기도 했다.

2011년 10월 20일 카다피가 죽자 이를 슬퍼하며 "카다피는 전 생애 동안 혁명가·순교자·전사로 기억될 것"이라고 말했다.#

북한과도 우호적인 관계를 맺으려고 했다. 김정일 생전에 북한을 방문하려고는 했으나, 일정이 맞지 않아 그만둔 바 있으나, 여러 차례 김정일에 대해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2011년 12월 김정일이 죽자 "김정일 동지의 사망에 진심어린 애도를 표시한다”며 “북한 인민이 미래를 번영과 평화로 이끌어갈 능력이 있음을 확신한다"고 했다.# 2006년에 방북하려다가 핵실험 때문에 취소하기도 했다.

에보 모랄레스 볼리비아 대통령도 2014년 3선에 압도적으로 성공했지만 카다피에 대하여 민중 학살이라는 문제가 있다고 까기도 하고 북한과는 외교관계를 맺지 않는 등 독재자를 견제하며 국제 여론도 신경썼다. 브라질의 룰라 대통령도 북한과 수교는 했지만[32] 대놓고 북한하고 거리를 두는 모습을 보이거나 차베스나 에보 모랄레스보단 좌파 및 반서방 성향을 적게 보였으며 자신의 정치 노선에서 어느 정도의 선을 지키는 성향이 있었다. 이는 당시의 에콰도르나 우루과이, 아르헨티나 같은 남미의 좌파정권들도 마찬가지였다.

4. 평가와 정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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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일화

미국 등 서방 국가들 사이에서 허구한 날 최악의 독재자로 까이긴 해도 그는 분명히 민중 대다수 지지로 합법적인 권력에 오른 인물이다.[33] 베네수엘라에서 그를 욕하는 사람(주로 중산층, 부유층)도 많지만 지지자가 다수였다. 그가 얼마나 지지를 받고 있는지를 알 수 있는 일화가 있다. 중남미 대다수 나라들이 그렇듯 베네수엘라도 가톨릭이 대다수인 나라이다. 그래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죽고 '새 교황에 누가 어울릴까?' 하는 조사를 한 적이 있었단다. 그런데 압도적으로 1위에 오른 게 바로 이 차베스였다. 차베스가 자길 교황 후보로 올린 것도 아니고 조사한 곳도 넣지도 않았음에도 사람들이 듣도 보도 못하고 우리나라에 영향도 못 주는 이들보단 차라리 차베스 대통령이 낫다고 알아서들 투표했던 것이다.

또한 골프에 대하여 "골프부르주아 스포츠"라고 발언하였다. 실제로 골프에 반감을 가졌는지는 몰라도 주택용지로 사용될 땅이 골프장으로 낭비된다고 골프장을 대거 압류한 사건이 있었다. 다만 의외로 골프대회 우승자에 대해 코멘트한 일도 있는 걸 보면 골프에 대해 무조건적인 반감까지는 가지지 않은 듯 하며 한편으로는 '모든 스포츠를 존중한다'고 말하였다.

2010년 초 베네수엘라 국영석유회사 단체협약 임금협상 타결 행사장에서 "볼리바르 혁명정부가 3485년까지 베네수엘라를 통치할 필요가 있다"고 발언한 바 있다. 하필 3485년을 언급한 이유는 밝혀지지 않았다. 이에 대해 중남미 언론에서는 "당대의 독재자였던 독일의 히틀러도 천년제국 꿈밖에는 꾸지 못했는데 황당하긴 하지만 꿈과 야망에선 차베스 대통령이 한 수 위인 것 같다"고 비꼬았다.

한편 심각한 에너지난으로 물이 매우 부족해지자[34] '공산주의 방식으로 3분 만에 샤워를 하라'[35]고 한 바 있으며 소니의 플레이스테이션을 비난하면서 "자본주의가 만들어낸 게임기로 어린이들에게 폭력성을 키운다. 이는 폭력적인 인간을 만들어내 나중에 무기를 팔아먹기 위한 전략"이라며 무지한 발언을 하기도 했다.

차베스의 괴짜 발언의 대부분은 차베스 자신이 진행하는 "안녕 대통령"이라는 국정홍보 프로그램에서 나왔다.# 사실 이 프로그램이 국정홍보 프로그램치고는 심하게 깨는 게 차베스 자신이 내키는 대로 프로그램의 내용이나 형식이 수시로 변경된다. 물론 유명인을 초청한다거나 일반인들과 얘기를 나누면서 민원해결 및 정책발표도 하지만 문제의 괴짜발언이나 쌩쑈(?), 자신의 가정사나 개인사항, 남미역사 해설같은 것도 간간히 나오기 때문에 차라리 쇼 프로그램에 가까운 면이 강하다. 어쨌든 차베스는 이 프로그램을 통해서 카리스마가 넘치고(부정적으로 본다면 성격이 괄괄하고 독선적인) 유머러스한(역시 부정적으로 본다면 막말과 저질발언이나 해대는) 친근한 서민 대통령이라는 이미지를 굳히는데 성공했다. 물론 그에 대한 반작용으로 차베스를 까대는 레퍼토리가 대거 양산되기도 했다. 한편, 볼리비아나 에콰도르 같은 데에서도 이 프로그램의 영향을 받아서 유사 프로그램이 방영되고 있다. 참고로 2012년 들어 차베스가 암으로 투병하기 시작하면서 종영.

평소 손수 운전하기를 즐겼는데 어느날 차를 몰고 서행하던 중 자신을 못 알아본 트럭 운전자가 뒤에서 경적을 울리고 갓길로 추월하자 쫓아가 세운 다음 훈계한 적도 있다. 이후 도로에서 벌어지는 과속운전행태를 두고 '도로에서 미친 짓들이 벌어진다'고 개탄했다(#).

두 번에 걸쳐 결혼했는데 둘 다 이혼으로 결혼생활을 끝맺었다. 그래서 50대가 되어서부터는 쭈욱 독신이었다. 그 중 언론인 출신의 두번째 부인은 2002년 성격 차이로 이혼한 후에 재혼을 하면서 조용히 자녀를 키우다가 2007년 국민투표에서 대통령 임기를 6년에서 4년으로 축소해야한다는 발언을 시작으로 차베스와 본격적으로 각을 세우기 시작했고 2008년 지방선거때 야당소속으로 바르퀴시메토 시장에 출마하기도 했으며 딸 양육권을 가지고 다툴 정도로 앙숙이다. 그리고 한때 야구선수를 꿈꿨던 만큼 열정적인 야구팬으로 유명하며[36] 축구계의 전설인 디에고 마라도나와도 절친이다.

여담으로 리그베다 위키 시절에는 차베스가 독재자라고 등재되는 것이 반달로 간주되던 흑역사가 있다. 이글루스 등지에서 리그베다를 깔 때 주요 레퍼토리로 썼던 사건. 나무위키도 차기 대통령인 마두로와 달리, 차베스를 독재자라고 규정하는 것은 과하다는 평가에 따라 서술되고 있다.

차베스는 공식 석상에서 베네수엘라의 전차 부대 군가 한 곡을 불렀는데, 이 곡은 차베스를 상징하는 정치적인 곡으로 변질됐다. 훗날 이 곡은 그의 장례식에서도 연주됐다. 에먼 군가 한 곡이 차베스를 상징하는 곡으로 변질된 것.

차베스를 지지하는 사람들을 차베스타라고 하며, 차베스 사후 차베스를 기리는 상품들이 차비스타들 사이에서 유통된적도 있다.

1999년에 바르가스의 비극 당시 자신의 정치 성향 때문에 미국의 인도적 지원을 거절했으며 이로 인해 훗날 나비효과로 한 16세 소년을 반(反)차베스로 돌아서게 할 뿐만 아니라 국가가 경제위기와 독재 때문에 붕괴되어가는 정치 위기가 닥치자 야권을 통일시키고 더 나아가 베네수엘라 임시 대통령까지 되게 만든다.#

심령주의에 심취해서 증조할아버지의 영혼과 대화하곤 했다고 전한다.#

텔레그램 커스텀 스티커로 존재한다.#

민주노동당 계열 지식인들은 비슷한 시기에 집권한 노무현 전 대통령을 차베스와 비교하여 비판했다. 정의당의 싱크탱크 격인 정의정책연구소 김병권 소장은 2006년 말 노무현 전 대통령과 차베스를 비교하면서 "차베스는 매번 국민을 신뢰했고 국민에게서 힘을 구했다."면서 "노무현 정권이 국민이 내민 손을 외면했다. 경제는 관료조직과 글로벌화한 재벌기업들에 의존했다"고 평가한 바 있다.#

포스탈 3에서 뜬금없이 최종 보스로 납신다. 그런데 게임 자체가 시리즈에서는 워낙 쓰레기라서 포스탈 시리즈에 우고 차베스가 등장했는지도 모르는 사람이 좀 있다. 포스탈 3만은 러시아 회사에서 외주를 받아 제작했는데 베네수엘라와 러시아가 우호적인 관계임에도 왜 차베스를 까는지는 묻지말자.

5.1. '입 닥쳐' 사건

2007년 스페인 및 중남미 등 라틴계 국가들이 모이는 정기 외교 회담인 이베로 아메리카 정상회의(스페인어: Cumbres Iberoamericanas de Jefes de Estado y de Gobierno)에서 벌어진 일. 우고 차베스는 이라크 전쟁을 지지했던 호세 마리아 아스나르 스페인 전 총리가 2002년 베네수엘라 쿠데타 시도에 참여했다고 주장하며 히틀러, 파시스트이자 인간 이하의 존재라고 부르는 등 평소와 다름없이 거침없는 언행(+욕)으로 주목을 받을 뻔했다. 그러나 당시 스페인 총리인 호세 루이스 사파테로가 "저는 그의 정책에 반대하지만[37] 국민이 뽑은 총리이기 때문에 그를 존중합니다"라고 답변했다. 차베스는 이에 불복하여 발언권을 박탈당해 마이크가 꺼져있음에도 계속 회담을 방해하였다. 아스나르는 사파테로의 전임 총리로 정당도 정치 성향도 서로 다른 인사이다. 그러나 사파테로조차 아스나르를 옹호해야 할 정도로 차베스의 발언은 무례했다.

그러자 바로 전부터 주의를 계속 주다가 화가 난 스페인 국왕 후안 카를로스 1세"¿Por qué no te callas?"("입 닥치지 못해?")란 말을 하자 꿀먹은 벙어리 신세가 되었다.(베네수엘라도 스페인어권 국가다.) 뒤늦게 차베스 대통령은 강하게 항의하고 후안 카를로스 국왕은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없다고 맹비난하며 스페인 정부에 사과를 요구하긴 했지만...

아래 영상에서 직접 보도록 하자. (17초 부터)

우고 차베스 : #!%# !#$$%#@$@!$*&!@#$ *!@$
호세 루이스 사파테로 : exijo. exijo
후안 카를로스 1세 : 너! (¡tú!)[38]
우고 차베스 : (어쩌고 저쩌고)
호세 루이스 사파테로 : exijo. exijo. ese respeco por una razón además.
호세 루이스 사파테로 : 물론이죠. 물론이죠, (por supuesto. por supuesto.)
우고 차베스 : (어쩌고 저쩌고)
후안 카를로스 1세 : 닥치지 못할까? (¿Por que no te callas?)

점잖은 국왕이 왕실에서 쓰는 경어가 아닌 말로 시원하게 "닥쳐"라고 한 말이 어찌나 인기가 있었는지 아스나르 스페인 총리가 돌아오자 이 인사말로 사용했고 당일에 바로 축구 중계에서 사용되질 않나, 스페인 내에서 "닥쳐" 벨소리가 50만 다운로드를 돌파하고 스페인어권 전국적으로 이 말이 적힌 티셔츠가 유행하게 되었다(결국 차베스를 반대하는 시위대의 구호가 되었다.). 그리고 노래도 있다.

스페인이 2010 남아공 월드컵에서 주로 중남미에 있는 팀들(온두라스, 칠레, 파라과이)과 경기를 많이 가졌는데 이때 스페인 팬 중에는 국왕이 차베스에게 한 말을 담은 팻말을 들고 응원하는 사람도 있었다. 베네수엘라인들도 경기를 보러 와서 미묘하게 되었다.

6. 관련 서적

  • 차베스 미국과 맞짱 뜨다 - <원숭이도 이해하는 자본론>의 저자 임승수의 저서.[39] '사회주의'보다는 '반미'에 초점을 맞춘 감이 없지 않다. 사실 많은 진보 계열 사람들이 차베스에 열광하는 것은 21세기 사회주의보다는 반미 때문이기도 하고. 다만 진보 계열이라고 해서 전부 차베스를 긍정적으로 보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오마이뉴스에 게재된 어느 기사는 차베스의 정치를 공화국 붕괴정치로 보며 이를 박정희식 참주정과 비교하며 비판하고 있다. 저자는 민주노동당에서 의정정책실장을 역임한 사람.[40] 그 외에 레디앙에서도 차베스와 박정희의 유사성에 집중하며 차베스를 비판한 바 있다.[41] 사실 베네수엘라 야권 연합내에서도 상당수의 좌파 정파가 소속되어 있기도 하다. 물론 이전 집권당에 소속된 인원이 다수를 차지하긴 하지만 차베스 정권에 참여했다가 2000년대 초반의 49개 개혁법안 강행처리와 2000년대 중반의 여당 대통합 움직임에 반발해 야당에 합류한 인원도 있다. 진보진영에서는 차베스를 우파로 보는 사람들도 있다.[42]

[1] 대통령 재임 중 사망.[2] 다만 2009년 WBC를 제외하면 생각보다 성적은 그리 신통치 못했다. 그리고 그 WBC도 준결승에서 당시의 김인식호에게 깔끔하게 개박살나고 미국과 함께 공동 3위에 그쳤다.[3] 이 시기엔 석유값 하락과 외채위기와 함께 베네수엘라의 경제가 크게 후퇴했는데, 당시 베네수엘라 정부는 변변한 대책을 내세우지 못했다.[4] https://www.youtube.com/watch?v=LJYfKxnRDAI 당시 민주행동당 후보와 기독사회당 후보의 선거광고를 비교해보면 딱 봐도 민주행동당 페레스 후보의 광고가 훨씬 더 낫단 걸 알 수 있다.[5] 카라카스의 참사. 마라카나수미네이라수와 조어 원리가 통한다.[6] 1차 오일쇼크에 편승하여 베네수엘라 경제가 크게 성장시키는 성과를 냈고, 1988년 대통령 선거에서 경제위기 상황속에서 재선에 성공했으나 재선 직후 신자유주의 정책을 널리 수용하면서 카라카스 봉기가 일어나고 그 이후에도 빈곤율이 높아지는 상황에서 국민들의 불만이 높아지는 상황에서 집권 1기 때의 명성을 전부 까먹고 결국에 부패혐의로 법원에 의해 탄핵되는 수모를 당했다. 1999년에 베네수엘라를 떠났으며 2010년 미국에서 사망.[7] 원래는 이 이름 그대로 정당을 창당하려고 했지만 1997년 5월 베네수엘라 법원에선 볼리바르를 당명으로 사용할수 없게 하도록 판결을 내려 당명으로 쓸 수 없게 했다.[8] 당시 영국 노동당이 정책노선으로 내건 "제3의 길"과는 다르다. 공산주의자본주의 사이의 중도를 추구한다는 뜻에서 제3의 길이라고 이름 붙인 것. 명칭만 차용하였다.[9] 참고로 차베스의 아버지인 우고 데 로스 레예스 차베스는 교사출신으로 기성정당에 가입하기도 했는데 1970년대에 당시엔 민주행동당 당원이었고 이후 1978년부터 1990년대까지는 사회기독당 당원으로 가입할 정도로 의외로 정치성향이 보수적(?)이긴 했지만 아들이 본격적으로 정치활동을 시작하면서 아들의 정당인 제5공화국 운동에 참여했고 1998년 지방선거에서 바리나스 주지사 선거에 당선되었다. 참고로 2008년에 주지사 직에서 은퇴했고 그 자리를 우고 차베스의 형인 아단 차베스가 이어서 2016년까지 재임했다.[10] 당시 총선에서 원내 1당은 민주행동당이 차지했고(상원 19석, 하원 62석) 제5공화국 운동은 상원 12석, 하원 46석으로 2당이었다. 연합정당인 사회주의를 위한 운동(2001년에 연정에서 이탈)이나, LCR(2000년 대선에서 야당후보를 지원하면서 연정에서 이탈), 모두를 위한 조국을 합해도 절반을 넘기지 못한다(하원 76/207, 상원 19/54).[11] 1998년 상반기만 해도 차베스가 주요대선 주자로 언급되기는 했으나 유력 대권주자급은 아니었고 오히려 1981년 미스 유니버스 우승자이자 카라카스 산하 차카오 시장(한국으로 치면 구청장) 이레네 사에스(당시 사회기독당 소속)가 차카오 시장 재직당시의 범죄율 하락같은 성과를 내세워 지지율 1위 자리를 차지했지만 정작 사회기독당 소속 대선후보로 지명된 이후에 외교정책이나 경제정책에 대한 대안부재에 대한 우려감으로 지지율이 떨어져 차베스가 "21세기 사회주의" 같은 뚜렷한 비전을 내세우고 살라스 호메르(원래 사회기독당 소속이었으나 탈당 뒤에 베네수엘라 프로젝트라는 가설정당을 창당하고 대선에 출마)도 경제학자 출신인 점을 내세워 지지율이 급속히 올라가면서 순위에서 밀리자 결국 선거를 며칠 앞두고 출마를 포기했다. 다만 이미 투표용지에 이레네 시에즈의 이름이 적혀있는 채로 인쇄되었기 때문에 일단 선거에 참여한걸로 되어있다. 참고로 최종득표율은 2.8%. 이때 사회기독당과 민주행동당은 차베스의 당선을 막기 위해 각자 출마를 포기하고 경제학자 출신인 엔리케 살라스 로메르(무소속) 후보로 단일화했지만 결국 기존 우파-중도파정당연합(엔리케 살라스 로메르) 소속 후보는 40%의 득표율로 대참패. 이후 이레네 사에스는 1999년 누에바에스파르타 주 보궐선거에 출마해 당선되었으나 2000년 대선-총선-지선 동시선거에 출마하지 않으면서 정계에서 떠났다.[12] 참고로 차베스는 1996년에 미국에 입국하려고 비자발급을 신청했지만 1992년 쿠데타 시도를 이유로 미국 방문 비자 발급이 거절되었다. 정책 노선 외의 이유로도 미국과 사이가 나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13] 제5공화국 정당이라는 운동은 이를 가리킨다.[14] 이 부분은 프랑스 제5공화국 헌법의 영향을 부분적으로 받았다. 2007년에 국민투표가 시행되었던 문제의 개헌안도 프랑스 헌법의 영향을 받았다.[15] 그 이전 4공화국 시절에도 대통령의 재선은 허용되어 있었지만 연임은 불가능했다.[16] 아이러니하게도 이때 차베스에 맞선 사람이 1992년 쿠데타 미수사건의 동기인 프란치스코 아리아스였다. 쿠데타에 실패한 뒤 차베스와 같이 깜방에 갇히기도 했지만 출소후에 주지사 선거에 출마하면서 선거에 회의적이었던 차베스랑 다른 길을 걸어 야당 대선후보가 되었던 것이다. 나중에 차베스와 화해해서 베네수엘라 통합사회당에 입당했다.[17] 그 이후에 여러 가지 사건들이 겹쳐 중산층들은 그에게서 등을 돌리게 되는데, 특히 차베스가 원유가격의 상승을 위해 여러 반미 지도자들과 회동을 가지기도 했고, 차베스가 여러모로 급진적인 정책을 펼칠까 불안감을 느껴 반 차베스파에게 적극적인 지지를 보내게 된다.[18] 연정을 이탈했던 좌파/중도좌파 정당들도 이 개혁법은 지지하고 있었다.[19] 이때 차베스는 결사항전을 하려다가 쿠데타군이 수도를 장악했다고 판단하여 조건부 사임을 내걸고 협상을 시도했는데 쿠데타군이 무조건 사임을 요구하면서 협상이 결렬되었고 결국 차베스는 사임 의사를 철회했다. 그런데 베네수엘라 언론사에서 이런걸 전부 쌩깐채 쿠데타군의 의견를 받아적다보니 이런 오보가 나왔던 것이다. 이때 카스트로의 역할이 중요했는데 차베스의 딸이 피델 카스트로에게 전화를 걸어 차베스가 사임 의사가 없음을 밝혔고 카스트로는 외신 기자를 불러서 차베스가 사임 의사가 없음을 밝히면서 상황이 반전되었다.[20] 1999년 대통령 취임사에서 시장의 보이지 않는 손과 국가의 보이는 손이 서로 맞잡는 중간지대를 경제정책의 목표로 제시했고 그에 따라 거시경제정책면에서 이전 정부의 장관을 유임했을 정도로 경제정책면에서 그리 급진적이지는 않았다.[21] 야권이 보이콧하면서 보나마나한 선거가 되는 바람에 투표율은 25%대에 그쳤다. 참고로 2010년 총선 투표율은 66.4%.[22] 1988년 대선 이후 최다 투표율.[23] 사족이라면 사족이겠지만 차베스의 아버지는 2024년 91세를 일기로 사망했고 어머니는 아직도 살아계신다.[24] 스탈린과 같은 날에 사망했다.[25] 아무래도 지도자의 최후 치고는 너무 치졸하고 찌질해보여서가 아닌가 싶다.[26] 중남미 국가들이 미국계 자본에 휘둘려 경제가 파탄에 이른 경우도 많고 쿠바 등이 러시아의 영향권으로 빠지는 것을 염려해 미국 정부가 국가 전복을 뒤에서 도왔던 역사도 있던지라...특히 2002년 있었던 쿠데타 시도가 미국의 음모라고 여기고(쿠데타 몇 일전부터 야권 인사들, 장성들과 미국 대사관 및 CIA로 추정되는 인물들이 회합을 가졌었다.) 대놓고 악감정을 내비쳤다. 결국 2000년대에 대부분의 남미국가들에서 친미가 아닌 좌파정권이 집권하였다. 자세한 건 반미 항목의 2, 3번 항목 참조.[27] 조지 W. 부시베네수엘라를 찾아오면 어떻게 할거냐는 질문에 손을 내저으며 '우!'라고 한 다음에 '고!'라고 말할 것이라 대답했다. 본인의 이름을 십분 살린 대답.[28] 광범위한 미국의 대외 간섭에 대한 반감이 상당할 때였어서 당시 영상을 보면 박수갈채가 엄청났다.[29] 우리베. 열렬한 신자유주의 신봉자에다가 남미내 온건성향인 좌파정권들을 대놓고 욕하지는 못했지만 은근히 고깝게 보기도 했고, 3선 개헌을 시도했으며 후임 산토스 대통령이 온건정책을 펼치고 반군과 협상에 나서자 산토스 대통령을 열심히 비방하면서 타 후보를 지원했다. 물론 산토스 대통령이 재선하긴 했지만 총선에서 상당한 세를 과시하는데 성공했다. 물론 차베스가 복지정책과 석유값 상승으로 인한 호황으로 지지율이 높였듯 우리베도 원자재값 상승으로 상당한 호황을 누렸고, 마약재배하는 반군세력을 상대로 대대적으로 소탕작전을 벌이면서 완전하진 못해도 콜롬비아를 어느 정도 안정화하여 지지율은 높았다.[30] 사실 차베스 정권 초기의 경제정책에서도 이러한 점을 찾아볼 수 있는데 취임사에선 시장의 보이지 않는 손과 국가의 보이는 손이 서로 맞잡는 중간지대를 경제정책의 목표로 제시했고 이전 정부 시기의 재무장관을 유임할 정도로 거시경제운용에서 이전 정부 시기의 정책을 거의 그대로 계승하였다. 물론 석유를 국유화하려 하긴 했으나 이것도 냉정히 보면 그냥 90년대 이전 상태로 되돌려놓는거나 마찬가지. 급진적인 정책을 펼치기 시작한건 집권 2기 들어 자본 파업으로 자본이 대거 유출되고 이를 고유가로 메꾸면서부터이다.[31] 이 때문에 같이 남미 지역에서 외교적인 주도권을 쥐려고 노력한 브라질의 룰라 대통령과 대립관계라는 말이 서구언론으로부터 나오기도 했지만 룰라가 차베스의 선거운동을 지원하기도 했고 남미공동시장에 베네수엘라가 가입하는 것에 대해 브라질 국회의 반대에도 지지했으며 차베스도 룰라의 선거운동을 지원하는 등 실제 사이는 상당히 좋았다.[32] 브라질과 북한은 2001년에 수교를 했다.[33] 1998년 대선에서 56.2%, 2000년 대선에서 59.8% 2006년 대선에서 62.8% 2012년 대선에서 54.5%. 독재는 견제없는 권력을 말하는 것이지, 국민들의 지지와는 상관이 없다. 그래서 민주주의 국가를 표방하는 나라에서 독재라는건 사실 국민들이 만드는 것이라는 말이 나오는 것이다. 집권 초기의 아돌프 히틀러박정희도 절차적인 정당성은 충분했다.[34] 석유가 넘쳐나는 나라에서 웬 물 부족이냐 싶지만, 차베스가 원체 강경한 발언을 많이 쏟아내다보니까 투자가 많이 부족하고, 수도시설 역시 확충되고 있다고는 해도 그 속도가 더딘데다 빈곤율의 급격한 감소로 물 수요량이 그야말로 폭증하면서 결국엔 물이 부족해지게 된 것. 그리고 베네수엘라가 이 시기에 극심한 가뭄에 시달렸다는 것이다. 덕분에 베네수엘라 전력의 상당부분을 책임지는 구리발전소(수력)가 한 때 전력생산을 제대로 못하면서 단전사태도 일어났다.[35] 차베스는 공산주의자가 아니지만 공산주의에 우호적이고 베네수엘라 공산당과도 가깝게 지낸다.[36] 쿠바, 도미니카, 베네수엘라 등의 일부 국가들은 인기가 많아서 이런 나라에서는 독재자들이라 해도 반미, 친미 상관없이 전부 야구광이다.[37] 아스나르 총리는 중도우파 인민당 출신이지만 사파테로는 중도좌파 성향인 사회주의노동자당 출신이었다.[38] 스페인어에서 ¡TÚ!는 '너'를 뜻하는 대명사로 평어체에 가깝다. 즉 이미 후안 카를로스 1세는 점잖게 주의를 줄 생각이 아니라 '야 너 임마!'라는 식으로 강하게 지적하였던 것.[39] 매우 NL적인 시각에서 써있지만 정작 본인은 NL도 PD도 아니며 애초에 학생운동가 출신이 아니라고 한다. 통합진보당으로 민주노동당이 합당될 때 탈당한 인물이기도 하다. 인터뷰[40] 그러나 어디까지나 20여년 전 과거형으로 이후 채진원은 공화주의 간판 내걸고 진보=포퓰리즘이라는 등식으로 매도하는 흔한 신흥 우파가 되어버린지 오래. 어쩌면 저 때부터 싹수가 보였을 수도 있다. 민주노동당 출신 경력 내걸고 전향 테크 밟은 유형이 그렇듯.[41] 레디앙은 의외로 반미 성향이 약하다. 심지어 2020년대 들어서는 '규칙(진보 진영의 해석으로 보면 제국주의적 패권 질서)에 기반한 국제 질서가 규칙을 파괴하려는 행위(중국, 러시아 등 반미 진영)'보다 낫다고 '단언'하는, 민주당계보다도 더 막나간 연재를 게재하여 진보 진영을 경악시켰다.[42] 주로 진보 진영 내 '좌파'에서 그의 비사회주의, 비공산주의적 성향을 지적하며 좌파가 아니므로 우파라는 것이 주요 논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