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6-30 13:28:09

카를로스 안드레스 페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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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네수엘라 볼리바르 공화국 대통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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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9C802><colcolor=#000> 베네수엘라 공화국 제57·60대 대통령
카를로스 안드레스 페레스
Carlos Andrés Pérez | CAP
파일:Carlos_Andrés_Pérez_-_World_Economic_Forum_Annual_Meeting_1989.jpg
본명 카를로스 안드레스 페레스 로드리게스
Carlos Andrés Pérez Rodríguez
출생 1922년 10월 27일
베네수엘라 합중국 타치라 루비오
사망 2010년 12월 25일 (향년 88세)
미국 플로리다 마이애미
국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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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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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체 NNNcm, NNkg, 혈액형
가족 이름 (관계)
학력 학교명 학부명 (학과명1 · 학과명2 / 재학 여부)
종교 종교
직업 정치인
소속 민주행동당
서명
파일:카를로스 안드레스 페레스 서명.svg
1. 개요2. 생애3.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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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베네수엘라의 제57·60대 대통령이자 부정부패[1]로 악명높은 인물. 사실 2기 집권기 이전인 1980년대까지는 민주투사 출신으로 베네수엘라의 황금기를 이끈 성공한 전직 대통령으로 대접을 받았고 그 명성으로 사회주의 인터내셔널 부의장직을 맡았기까지한 입지전적인 인물이다.[2] 그래도 인생여정 자체는 꽤 파란만장하며 드라마틱하기는 하다. 드라마로 제작해놓으면 흥행이 될듯

2. 생애

1922년에 루비오주에서 평범한 커피농의 아들로 출생하였지만 사춘기 시절에 당시 독재자인 후안 비센테 고메스의 정책과 당시 커피가격의 폭락으로 가정형편이 어려워졌고 1936년에 아버지가 사망하는 일이 벌어졌으며 이후로는 이를 계기로 정치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1941년에 민주행동당에 입당하였고, 거기서 두각을 나타냈으며 이후로 베네수엘라 중앙대학을 졸업했다. 졸업 이후로는 베네수엘라에 민주정부가 들어서며 비서직을 지내지만 1948년 베네수엘라의 민주정부가 군부에 의해 강제로 뒤엎어지자 카를로스 안드레스 페레스도 같이 쫓겨났고 페레스는 해외에서 망명생활을 하면서 베네수엘라 독재정권에 대해 대항하는 행보를 펼쳤다. 1958년 혁명으로 푼토피호 체제가 들어서자 인생길이 확 펴지기 시작하여 1959년부터 64년까지 상원의원을 지냈고 1962년부터 1963년까지 내무부 장관을 지내기에 이르렀고 이때 공산게릴라를 효과적으로 진압하는데 상당한 공을 세웠다.

그리고 1969년부터 1974년까지 민주행동당 소속으로 사무총장직을 지내면서 총-대선 참패로 위기에 빠진 민주행동당의 입지를 회복시키는 데 주력하였고, 1973년 대선에서 미국 선거운동 전문가들을 대거 영입하여 성공적인 선거캠페인으로 예상을 뒤엎고[3] 여당인 기독사회당 후보를 제법 큰 차이로 제치고 48.7%의 득표율로 당선되었으며 때 마침 운 좋게 불어닥친 오일쇼크로 베네수엘라는 황금기를 맞게 되며 이를 기회 삼아 베네수엘라의 인프라를 대대적으로 정비하는 한편, 당시까지만 하더라도 외국기업들의 주도하고 있었던 석유산업의 국유화를 단행하여 세수를 대대적으로 확충하면서 대규모의 석유기금을 조성하였다.

페레스는 친환경적인 환경정책을 추진하였고, 실제로도 법안을 제정하는것으로 이어지면서 1975년에 지구환경상을 수상하게 되었다.[4] 또한 당시 미국의 패권주의적인 남미정책에 대해서도[5]크게 비판했고 특히 소모사피노체트에 대해 혹독한 비판을 가하기도 했다. 그렇다고 해도 후에 플로리다에서 말년을 보냈으므로 미국과 완전히 적대했다고 보긴 힘들고 미국 입장에서도 그런대로 잘 굴러갔던 베네수엘라 정권을 뒤엎을 명분같은 건 있을 리가 없고 미국에 인맥이 있었기 때문에 쿠데타를 뒤에서 사주하진 않았다.

물론 이 시기에 베네수엘라가 그 만큼 잘나갔던 건 사실이지만 부패도 심했고 석유 수입으로 조성한 석유기금의 상당부분이 불분명하게 쓰였으며 특히 냉동선 구입으로 탄핵 위기에 처할 뻔 했기도 했다. 또한 페레스는 컬러 텔레비전이 석유붐을 타고 급속히 늘어나자 컬러 텔레비전의 보급으로 인해 사치품의 수입이 늘어나고 베네수엘라가 소비자향적인 사회가 된다면서 이미 1968년에 시작되었던 컬러 텔레비전의 송출을 일시적으로 종료하는 조치를 취하기도 했다.[6]

그러나 이런 조치에도 석유수입으로 들어온 달러가 그다지 체계적이지 않은 외화관리로 인해 다시 빠져나가고 사우디아라비아를 언급하면서 시행한 인프라 건설사업과 중공업 진흥정책의 영향으로 국가채무는 늘어났으며 1인당 GDP는 급속히 늘어나서 남유럽과 비슷한 수준이 되었고[7] 그마저도 높은 출산율 덕택에 저평가 받은 수준으로 실질 소득은 그보다도 더 높았기는 했지만 대도시 지역과 농촌지역간의 격차는 커졌고 인프라 정비사업을 시행했음에도 석유산업 이외의 산업은 제대로 커지지 않아 여전히 석유에 재정의 다수를 의존하는 매우 기형적인 산업구조를 유지하게 되었다는 모순적인 결과를 낳았다.[8]그렇지만 그래도 완전고용을 실현한데다가 빈부격차는 심하기는 했어도 복지혜택은 나름대로 괜찮았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빈민층의 불만은 그리 크지않아서 정치혼란과 독재정치로 악명높았던 다른 남미국가들과 다른 모습을 보여줬으며[9] 당시 베네수엘라의 중산층들은 플로리다 등 미국 남부지역으로 가서 휴양을 보내기도 했다라는 일화도 전해져내려온다. 그래서 베네데모크리시아나 사우디 베네수엘라라는 용어도 나오게 되었고 당시 베네수엘라는 주변국들에게 부러뭄을 사게 되었다.

그렇지만 임기 최후반기에는 저조한 경제성장으로[10] 말기의 지지율이 그리 좋게 나오지는 않았고 1978년에 기독사회당에게 3%차의 정권을 내주며 그런대로 다사다난하게 임기를 마쳤다. 그 이후로는 상원의원을 재직했으며 1988년 대통령 선거에서 불리한 위치에 처했음에도[11] 뛰어난 선거운동과 건설적인 경제정책을 내세웠고 베네수엘라 유권자들의 향수를 자극하면서 과반을 넘는 득표율로 당선되었다. 그리고 베네수엘라는 멸망했다 하지만 이건 훼이크였고...



페레스는 대통령에 당선된 이후로는 자신이 내세웠던 공약과 다르게 세수부족으로 사업을 실행할수 없게 되면서 결국에는 IMF에 굴복하여 대대적인 긴축정책을 펴기로 했고 그로 인해서 버스비와 휘발유값 등 주요 공공물가가 폭등하는 사태가 벌어지자 그 동안의 유가하락에 크게 피해를 본 빈민층들이 배신감에 대거 분노하며 폭동을 일으켰고 카라카스와 주요 대도시들의 주요 쇼핑물과 상점들의 물품과 경찰서등이 대대적으로 털려버리는 사태가 벌어졌다, (일명 카라카소(caracazo)라고 불린다.[12])그리고 페레스는 군대와 경찰을 동원해 강경하게 진압하고 나서야 소요사태는 끝났고 이 과정에서 빈민층에 대한 광범위한 인권침해가 벌어졌던것으로 파악된다. 이 과정에서 공식집계로는 300명, 비공식집계로 1900명에서 3000여명 가량이 사망한것으로 추산뇐다. 이 사건으로 페레스는 초창부터 정통성에 타격을 입었다. 그래도 결과적으로 채무의 상당수를 탕감받기는 했고 주지사 직선제가 도입되어 지방자치제도의 범위가 확대되는 성과가 있기는 했다. 이 지방선거에서 이 선거에서 민주행동당은 주지사 과반을 점유하기는 하며 타격을 일정부분 수습할수있었지만 득표율은 52%에서 39%로 떨어지며 지지세가 약화된것을 동시에 확인했다.[13]

그 이후로도 상황은 크게 변하지 않아서 경제개혁을 진행하면서 식품에 붙는 보조금이 삭감하고 통화팽창으로 물가상승은 여젼했으며 특히 식품가격이 급속히 올라서 국민들의 다수는 하루에 두끼조차 못먹을 지경이 되었다. 그로 인해 시위는 빈번하게 벌어졌으며 1991년 걸프전으로 석유값이 급등하여 일단 재정상태는 안정을 유지하게 되었지만 민영화로 일단 재정상황이 개선되어도 서민들의 생활수준도 1980년대보다도 하락하여 1992년에 국민의 과반수가 하루에 한끼 정도나 간신히 때울 지경이라는 비참한 보고서가 나올지경이었고 이런판이니 교육수준도 하락하여 1990년대 들면서 중등교육을 받지 못하는 학생들의 수도 급속히 늘었고 교사들의 봉급도 올라가지 않아 베네수엘라의 교육수준은 말 그대로 개판이 되었으며 1990년대의 초중반의 베네수엘라의 1인당 GDP는 1980년대 초반의 절반에도 못미칠 지경이었다. 더군다나 페레스는 그 상황에서도 정신을 못차리고 불륜을 저질러서 여론은 급속히 악화되었다. 결국 1992년 상반기 들어서 빈민층과 야권에 의해 주기적으로 호루라기 시위가 벌어지는데다가 두 차례의 쿠데타 미수사건이 벌어졌다.[14] 쿠데타 자체는 미수에 그쳤지만 당시 페레스가 부정부패와 극심한 빈부격차를 불러온 정책으로 위낙에 악명이 높았기 때문에 쿠데타를 굳이 규탄까지 하지 않은 여론이 대세였으며, 결국 민주행동당에서도 페레스를 버릴 지경이 되었고 1992년 말에 치러진 지방선거에서 민주행동당은 다시 참패를 거두었다.

1993년 5월에 대법원의 의해 부패혐의로 기소되며 탄핵되었고 1994년 청문회에서 천만달러의 공금을 횡령한것으로 드러나서 당직이 박탈되었고 1996년 대법원에서 2년 4개월간의 가택연금 형에 처해졌다. 1998년에 가택연금에서 풀려난 이후로는 상원의원을 지냈지만 개헌으로 2000년에 임기를 마치고나서 도미니카 공화국에서 생활을 하였으며 2003년에 미국 마이애미로 거쳐를 옮겨서 말년을 보내다가 2010년에 사망하였다. 여담이지만 대규모 시위로 점철되는 베네수엘라의 풍경은 사실상 페레스 2기 집권기때부터 시작되었다고 봐도 무방하다. 그만큼 베네수엘라의 사회 갈등의 골이 깊다는 뜻이기도 하지만 말이다.

3. 여담

니콜라스 마두로와도 비교되기도 한다. 페레스와 마두로가 경제난, 보조금 삭감, 고물가등의 영향으로 둘 다 지지율이 최악인 상황에 직면해 있다는 것이 같지만 페레스가 끝내 버티지 못하고 탄핵된 데 반해 마두로는 무리수를 써서라도 어떻게든 버티고 있다는 것이 다르기 때문이다.[15] 물론 페레스가 군인들을 푸대접해서 군인들도 저임금 등의 고통을 왕창 받은 데 반해, 마두로가 군대를 나름대로 우대하고 있고 연줄도 얽혀 있는 것도 있는 터라 경제난에도 군인들이 해 처먹을 수 있는 것이 많아서[16] 군부에서 경제난에도 마두로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지 않은 것도 있기는 하다. 또한 페레스는 마두로와 달리 비현실적인 극좌파적 인물이 아니었기 때문에 현 베네수엘라 수준으로 폭망한 시절까진 아니었다.

[1] 1기 집권기 때에 냉동기 구입으로 탄핵 위기에 처할 뻔했으며 2기 집권기 때는 내핍정책으로 1인당 GDP가 줄어드는 와중에 거액을 횡령했다.[2] 사실 1988년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지만 않았으면 어느정도 존경받는 대통령 혹은 부패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나름대로 본받을만한 대통령이라는 평을 들을수 있었을 것이다. 사실 이런 점은 전임이자 후임인 라파엘 칼데라도 마찬가지이기는 하다.[3] 1기 집권기 때의 라파엘 칼데라가 그런대로 임기를 잘 수행했기 때문이었다.[4] 그렇지만 당시까지도 인구밀도가 지극히 낮아서 미개발지가 많았던(베네수엘라의 인구가 1000만대였던 시절이었다.) 남부지역에 인프라 구축산업을 펴는 과정에서 원주민들의 반발을 대대적으로 사기도 했다. 환경정책을 추진하면서도 환경에 위험이 될만한 정책을 동시에 편점을 보면 이것도 상당히 모순적이다.[5] 당시 미국에서 남미 국가에 민주주의로 나설경우에 미국에 적대적이고 미국 기업의 자산을 몰수하는 좌파정권이 들어설것을 우려하여 우파 독재정권에 대해 대대적인 지원에 나섰으며 우파 독재정권이 민주화 인사를 잡아다 처형시키거나 시민들을 탄압시키는 등 억압적인 정책을 펴고 미국기업들이 이 기회를 틈타서 착취를 하는것에 대해서도 묵인하였다. 1970년대 후반에 카터 행정부에서 정책을 전환하기는 했지만 1980년대 레이건 행정부 시절에 70년대 초반의 정책을 일부 계승하여 니카라과와 엘살바도르에서 비슷한 일을 저질렀으며 이 시기에 아르헨티나브라질 등 대다수 남미 국가들이 민주화되기는 했지만 정작 민주화 된 남미 국가들에 대해서는 마셀플랜식의 정책지원을 안해줘서(사실 이때 미국이 쌍둥이 적자에 한창 시달렸던때라는걸 감안해야하지만) 많은 남미 국가들이 90년대에 와서도 다소 나아졌기는 했지만 여전히 지속적인 경제위기에 시달리고 비슷한 정책을 취하기는 마찬지였고, 1998년 외환위기에도 적절히 대처하지 않은 통에 남미 국가에서 미국에 대한 반감이 극심해졌고 결과적으로 1998년 차베스 당선으로 시작되어서 2015년 원자재값의 하락 이전까지의 남미 좌파열풍을 불어일으킨 원인으로 평가된다.[6] 오일쇼크로 인한 경기호황으로 인해서 소비자들이 컬러 텔레비전을 대대적으로 구입하게 되면서, 흑백 텔레비전의 재고가 남아돌게 되자 흑백 텔레비전 가전상들이 남아있는 재고를 소진하기 위해 페레스에게 로비를 했고 페레스도 이를 받아들였다는 후일담이 있다.[7] 다만 환율체계가 4개로 나누면서 운영되었기 때문에 이 당시의 베네수엘라의 1인당 GDP 수준이 중진국에서 선진국 수준에 이르기까지 널을 뛰는 편이다.[8] 이는 우고 차베스가 받는 평가와 일맥상통한다.[9] 지금으로 친다면 칠레우루과이급의 포지션이라고 보면 된다.[10] 이후로 1979년부터 1981년까지 다시 고성장을 이어가게 되었지만 1981년 하반기부터 석유값이 더 오르지 않으면서 점차 불안해지더니 1981년부터 1982년까지 베네수엘라에 투자했던 외국자본들이 베네수엘라 금융시장으로부터 이탈하게 되었고 그로 인해 외환보유고가 줄어들게 되면서 외채를 감당하기 힘들어지자(당시에는 이자율이 10%를 훌쩍 넘었던 시절이었다.) 더 이상 버티지 못한 베네수엘라 정부에서 이자에 대해 모라토리엄 선언을 하면서 이후로부터 베네수엘라는 내리막길을 걸었다. 통계를 보면 베네수엘라 경제의 혼란상이 2003년 상반기를 기점으로 막을 내리고 이후로 반등하였지만 니콜라스 마두로 2년차인 2014년부터 유가폭락으로 다시 내리막길을 걷는 중이다.[11] 1983년 대선에서 민주행동당이 다시 집권하기는 했지만 유가하락으로 변변치 못한 경제성과를 낸것이 원인이었다.[12] 이 사건이 피델 카스트로가 페레스 대통령 취임차 베네수엘라로 다녀온 뒤에 벌어졌다는 점때문에 베네수엘라 야권 지지자들 사이에서 쿠바가 개입해서 벌어진것이라는 음모론을 제기하기도 하지만 이 당시의 정치와 외교상황을 전혀 감안안한 엉뚱한 소리이다. 이 당시의 쿠바는 중남미 민주화를 기회삼아 중남미 각 국가들과 수교 및 관계개선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던 시절이었고, 또한 쿠바가 외채탕감을 강력히 주장했기 때문에 외채로 고심하던 베네수엘라 당국과 죽이 맞았으면 맞았지 척을 질 이유가 없었다. 무엇보다도 이 당시에는 민주행동당을 대체할 다른 좌파정당들이 수권능력을 갖추지 못한 시절인지라 페레스의 지지율이 떨어진다한들 우익정당 사회기독당이 이득을 볼게 뻔한 상황이었고, 실제로 페레스가 위기에 몰렸을때 치러진 1992년 지방선거에서 사회기독당이 승리했다. 정작 당내분으로 인해서 대통령직을 내는데 실패했지만.[13] 다만 사회기독당도 큰 이득을 본것은 아니었고, 사회주의를 위한 운동이 약진한다.[14] 쿠데타의 근본원인은 군인들에 대한 실질적인 봉급삭감으로 인해서 군인들도 벌어먹고 살기힘들어졌기 때문이었는데 1980년대 초에 비해서 실질봉급이 1/7 수준으로 떨어진 수준이었고, 그 덕택에 군인들도 등을 들리면서 상당수가 쿠데타에 동참했다. 물론 쿠데타 시도는 진압당하기는 했지만, 페레스에 대한 지지율이 10%에도 못미쳤던 상황이었기 때문에 당시 베네수엘라 민중들의 반응은 쿠데타를 굳이 옹호하지는 않겠지만 군인들의 처지가 이해가 가기는 간다 정도였다.[15] 사실 마두로가 탄핵되지 않은 주 원동력은 총선에서 여소야대가 된 직후에 대법원장을 새로 임명해서 여소야대가 된 의회를 견제하려고 말뚝을 박은 영향으로, 그 덕택에 상대적으로 오래버티고 있는 것이다.[16] 예를 들면 값싼 생필품을 이윤을 붙이고 몇백 배 이상의 바가지를 씌워서 팔 수 있도록 해도 대충 봐 준다거나 하는 일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