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베네수엘라 볼리바르 공화국 대통령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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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olbgcolor=#ddd,#000><colcolor=#000,#ddd> 시프리아노 카스트로 Cipriano Castro | |
| | |
| 출생 | 1858년 10월 12일 베네수엘라 타치라 |
| 사망 | 1924년 12월 4일 푸에르토리코 산후안 |
| 국적 | |
| 대통령 임기기간 | 1899년 10월 23일 - 1908년 12월 19일 |
1. 개요
베네수엘라 20대 대통령이자 독재자.2. 일생
1858년 10월 12일 베네수엘라의 카파초 비에호 근처에서 태어난 시프리아노 카스트로는 중산층 농부 가정에서 자라나 산크리스토발과 콜롬비아 팜플로나신학교에서 교육을 받았다. 1876년 타치라 주의 정치에 참여하며 반정부 활동을 시작했고, 1878년 신문 ‘엘 알붐’을 운영하면서 주 정부에 반대해 산크리스토발 점령에 가담했다. 1884년 한 신부와의 갈등으로 투옥되었으나 탈출 후 콜롬비아 쿠쿠타로 도피해 여관을 운영하며 아내 도냐 소일라를 만났다. 1886년 다시 타치라로 돌아와 반정부 무장투쟁에 참여해 여러 전투에서 승리하고 장군으로 승진했으며, 이 과정에서 후일 권력 동반자가 되는 후안 비센테 고메스를 만났다. 이후 타치라 주의 정치 지도자로 부상하여 혁명세력과 함께 안두에사 팔라시오스 정부를 지지했으나, 1892년 호아킨 크레스포의 혁명으로 정권이 무너지자 콜롬비아로 망명했다. 그는 쿠쿠타 근처에서 밀무역으로 재산을 모으고 사병을 양성했다. 1899년 안드라데 정부의 불안정이 심화되자 고메스 등과 함께 쿠쿠타에서 ‘자유당 복고 혁명’을 일으켜 베네수엘라를 침입했고, 정부의 약세로 인해 빠르게 승리하여 정권을 잡게 되었다.1899년 시프리아노 카스트로는 안데스 군의 진격으로 대통령 이그나시오 안드라데가 나라를 떠난 후 10월 22일 카라카스에 입성해 1908년 12월까지 베네수엘라 대통령으로 재임했다. 그는 중앙집권적 체제 구축, 군대의 프로이센식 개혁, 커피 중심 경제 강화, 외채 상환, 그리고 지방 군벌 통제 정책을 추진했다. 그러나 이에 불만을 품은 군벌들과 은행가 마누엘 안토니오 마토스가 주도한 ‘자유혁명(1901~1903)’이 일어나며 내전이 발생했다. 카스트로는 직접 전투에 참여해 1902년 라 비토리아 전투에서 수적으로 불리한 상황을 극복하고 반란군을 격파했다. 이후 반란군은 분열했고, 정부군이 차례로 진압하여 1903년 7월 시우다드 볼리바르 전투에서 반란군 지휘관 니콜라스 롤란도가 항복하면서 내전이 종식되었다. 전쟁으로 인한 외채 지불 중단과 외국인 피해 보상 문제로 1902년 12월 독일·영국·이탈리아 등이 해안 봉쇄를 단행했고, 미국의 중재로 1903년 워싱턴 의정서가 체결되어 봉쇄가 해제되고 부채가 감축되었다. 이후 카스트로는 1904년 민법과 광업법을 개정해 정부가 광산과 석유 관련 대규모 토지 양도권을 직접 부여할 수 있도록 했으며, 1904년에는 교회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이혼 제도를 도입했다. 외교적으로는 1901년 콜롬비아와의 단교를 시작으로 미국, 프랑스, 네덜란드 등과 잇따라 충돌했다. 내전 당시 반란 세력을 지원한 외국 기업 뉴욕 앤 버뮤다 컴퍼니와 오리노코 스팀십 회사를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과 몰수 조치를 단행했고, 프랑스 해저케이블 회사와의 계약을 파기해 외교 관계가 단절되었다. 또한 네덜란드 선박의 강제 징발로 인해 양국 관계가 단절되고 해상 봉쇄까지 이어지는 등 그의 통치는 내외적으로 갈등과 고립 속에 이어졌다.
시프리아노 카스트로는 1894년부터 방광과 장이 연결되는 희귀 질환(방광결장루)을 앓았고, 수술 도중 심정지가 일어나 실패했다. 이후 건강이 악화되었지만 1906년 일시적으로 사임했다가 복귀했고, 1907년 반군 지도자 안토니오 파레데스를 처형했다. 매독으로 병세가 심해지자 1908년 11월 23일 부통령 후안 비센테 고메스에게 권한을 위임하고 치료를 위해 유럽으로 떠났는데, 그가 부재 중이던 12월 19일 고메스가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장악했다. 카스트로는 베를린에서 신장 제거 수술을 받고 회복했으나 귀국이 좌절되었다. 이후 프랑스·스페인령 카나리아 제도 등지에서 망명 생활을 이어갔다. 1912년 미국 입국을 시도했으나 엘리스섬에서 구금·추방당했고, 이후 쿠바, 미국, 트리니다드 등지를 전전하며 정권 복귀를 꾀했으나 실패했다. 1918년 푸에르토리코에 정착하며 여생을 보냈고, 1924년 12월 4일 그곳에서 사망했다.
3. 여담
- 그의 유해는 1975년 고향으로 이장되었으며, 2003년 우고 차베스 대통령의 명령으로 베네수엘라 국립묘지로 옮겨졌다.
- 2023년에는 니콜라스 마두로 정부가 그의 이름을 따서 산안토니오 델 타치라 공항을 ‘시프리아노 카스트로 공항’으로 개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