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18-09-25 10:22:29

노무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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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의 역임 직위
{{{#!folding [ 펼치기 · 접기 ] 파일:대한민국 정부기 (구).png 대한민국 해양수산부 장관
국민의 정부(1998 ~ 2003)
제5대
이항규
제6대
노무현
제7대
정우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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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대
박찬종 · 김정길
(중구·동구·영도구)
제13대
노무현
제14대
허삼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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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대
이명박
제15대[1]
노무현
제16대
정인봉
}}} ||
대한민국 제16대 대통령
노무현
盧武鉉 | Roh Moo-hyun
파일:대통령상.jpg
대통령 기록관 사진
파일:노무현대통령초상화.png
공식 초상화
이름 노무현 (盧武鉉, Roh Moo-hyun)
출생일 1946년 9월 1일
출생지 경상남도 김해군 진영읍 본산리 봉하마을[2]
거주지 서울특별시 종로구 명륜동[3]
경상남도 김해시 진영읍 본산리 봉하마을[4]
사망일 2009년 5월 23일 (향년 62세)[5]
사망지 경상남도 양산시 물금읍 양산부산대병원
묘소 경상남도 김해시 진영읍 본산리[6]
정당 통일민주당 (1988~1990)
민주당 (1990~1991)
민주당 (1991~1997)
새정치국민회의 (1997~2000)
새천년민주당 (2000~2003)
무소속 (2003~2004)
열린우리당 (2004~2007)
무소속 (2007~2008)
재임기간 2003년 2월 25일 ~ 2008년 2월 24일[7]
서명 파일:zPX2CKE.png
{{{#!folding [ 펼치기 · 접기 ] 성씨 광주 노씨 광주군파 31대손[8]
부모 아버지 노판석[9], 어머니 이순례[10]
형제자매 3남 2녀 중 막내[11]
배우자 권양숙
자녀 노건호, 노정연
최종 학력 부산상업고등학교 졸업
병역 육군 상병 만기 제대 (제12보병사단)
종교 무종교[12]
신체 168cm, 68kg, O형
약칭
}}}||

1. 개요2. 약력3. 일생4. 평가5. 묘소6. 이야깃거리
6.1. 팬클럽(노사모)이 생긴 최초의 정치인6.2. 정적이 많았던 대통령6.3. 비판적 국민과 국정원 여론 공작, 고인드립의 최대 피해자6.4. 죽음에 대한 의혹6.5. 노무현 대통령이 부른 노래6.6. 각종 타이틀
7. 다른 정치인과의 사이8. 어록9. 저서10. 가족 관계11. 선거 이력12. 대중 매체에서13. 관련 문서
13.1. 사건13.2. 발언13.3. 기타

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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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제16대 대통령

최초의 고졸 인권변호사부림사건 등의 변론을 맡으며 민주화운동에 참여한 경력이 있다. 1988년 김영삼의 제의로 정계에 입문하여, 5공 청문회 당시 노무현 명패사건 등으로 이른바 청문회 스타로 떠오르며 정치인으로서의 가치를 높였고, 이후 국민의 정부에서 해양수산부 장관을 거쳐 제16대 대통령 선거를 통해 대통령에 당선되어 제16대 대통령으로 취임하게 된다.

선거 관련 발언 논란으로 인해 재임 중 헌정 사상 첫 탄핵소추를 당하기도 했으나 헌법재판소에 의해 기각되어 직무에 복귀하였다. 퇴임한 뒤 역대 대통령들 중 처음으로 서울이 아닌 고향 봉하마을에 귀향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그러나 2008년에서 2009년까지 친형 노건평 등 친인척의 비리로 조사를 받다가 2009년 5월 23일, 봉하마을 사저 뒷산의 부엉이 바위에서 스스로 투신하였다. 병원으로 긴급 이송되었지만[13] 결국 62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그의 최측근들, 그의 핵심 이념들을 공감하는 정치인들로 대표되던 친노 세력은 노무현 대통령이 대선에 당선되기 전에 형성되어 개혁국민정당과 새천년민주당에 있다가, 참여정부 출범 뒤 열린우리당을 창당했다. 정권 2년차인 2004년에 있던 헌정 사상 최초의 대통령 탄핵소추 사건그에 따른 국민들의 심판으로 세력이 극대화되기도 했었다.

이후 노무현 대통령과 참여정부의 지지도가 정권 후기에 크게 떨어져 '폐족'이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었으나, 그의 죽음 이후로 추모 여론이 일어, 그의 사망 1주기와 선거 기간이 겹친 제5회 전국동시지방선거 등을 기점으로 위기에서 벗어나 빠르게 재결집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친구이자 대통령비서실장이었던 문재인을 필두로 한 친노 세력이 화려하게 부활하여, 2017년 더불어민주당 문재인 후보가 19대 대통령으로 당선이 되고, 제7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그가 바라던 지역주의 해소가 거의 이루어지는 등 노 전 대통령이 서거한 지 9년이 되는 현재까지도 대한민국 정치권에 적지 않은 영향력들을 끼치고 있다.

2. 약력

3. 일생

노무현/일생 문서 참고.

4. 평가

노무현/평가 참고.

5. 묘소

파일:external/www.knowhow.or.kr/600_1274438786-3-20100521195501.jpg
파일:external/pbs.twimg.com/CwulldQXcAAMUEX.jpg
파일:故노무현 대통령 묘역.jpg
고향인 경상남도 김해시 진영읍 본산리 봉하마을에 위치해있다. 장사 등에 관한 법률에 따라 2009년 8월 5일 보건복지부 국가보존묘지 심의위원회 심의를 거쳐 국가보존묘지 제1호로 지정되었다.

전직 대통령으로서 국립현충원에 안치되어야 한다는 의견도 있었으나, 본인이 남긴 유서엔 “작은 비석 하나만 남겨 달라”라는 부탁이 있었다. 유족들은 고민끝에 봉하마을 대통령 사저 뒷산에 묘역을 마련하기로 결정했다. 묘역 설계는 장례식 전날 모인 "작은 비석 위원회"의 일원인 승효상 이로재 대표가 맡았다. 이 묘지의 특성중 하나는 묘역 표면에 모인 1만 5000개의 박석에 적힌 글귀들인데, 국민모금으로 노 전 대통령에게 전할 어귀들이다.[23]

묘역은 봉하산에서 구해온 너럭바위 위에 지관스님이 쓴 '대통령 노무현' 6글자가 새겨져있고, 그 밑 묘판에는 신영복이 쓴(일명 신영복체) 노무현 전 대통령이 2007년 4월 포럼회에서 강연 중 말한 '민주주의 최후의 보루는 깨어있는 시민의 조직된 힘입니다' 가 적혀있다.

가끔씩 극우 사이트 회원으로 추정되는 사람들이 부엉이바위에 두부를 던지는 등 기행(奇行)를 하는 경우가 있다. 또, 노무현 대통령 묘소가 있는 곳에 배설물을 투척한 아주 경악할 만한 사건들이 종종 있었다. 일련의 사건들 때문에 2010년대 초까지는 묘소 바위 앞까지 갈 수 있었으나 한동안은 묘소 근처에 가는 건 불가능했으며, 좀 떨어진 곳까지만 접근 가능했다. 현재는 묘소 바위 옆에 순경이 배치되는 조건으로 다가갈 수 있다.

여담이지만 전직 대통령의 묘역 중 가장 큰 묘역(3206㎡)이다. 법적 묘지 면적의 약 100배가 좀 넘는다.

6. 이야깃거리

  • 파일:external/www.ikoreanspirit.com/38720_40707_1232.jpg
    파일:external/image3.inews24.com/116736_01.jpg
    휘호는 주로 한글로 많이 썼다.
  • 유년 시절 장래희망은 실업가, 판사였으며 그 중 판사는 비록 1년이란 짧은 시간이었지만 실제로 이루기도 했다.
  • 과거 박정희이렇게 평가한 적이 있다. 본인의 말로는 박정희의 리더쉽에 관한 것은 평가가 엇갈리기에, 딱 잘라 판단하기 어렵다고 한다.
  • 일각에서 노무현 대통령의 임기 중 지지율이 역대 대통령 중 최저인 5.7%를 기록한 적이 있다는 주장이 있다. 헤럴드경제가 실시한 여론조사가 그 근거인데, 하지만 이는 '보통'이라고 답한 응답까지 부정 평가로 둔갑시켜 왜곡했기 때문에 부적절한 주장이다.(#) 노무현 대통령은 모든 여론조사를 통틀어봐도 지지율 한 자릿 수를 기록한 적이 없다. 헤럴드경제 조사와 같은 시기에 이뤄진 리얼미터 여론조사에서 14.4%가 나왔었다. (#) 한국갤럽 여론조사에서 12%가 나온 적이 있었는데, 이 한국갤럽의 12%가 노무현 대통령 임기 중 가장 낮았던 지지율이다.(#) 디오피니언 등 마이너 조사 기관에선 이보다 낮은 10.2% 지지율을 보이기도 했다.(#) 오히려 이후 박근혜 대통령이 최순실 게이트로 인해 2016년 11월 초 역대 대통령 지지율 중 최저인 5%를 기록하면서 기존의 역대 최저 지지율이었던 김영삼 대통령의 6%을 경신했고(#) 11월 말에는 4%로 지지율이 또 하락하면서 역대 대통령 최저 지지율을 다시 한번 경신하게 된다.(#)
  • 중학교 2학년엔 3.15 부정선거를 앞두고 ‘우리 이승만 대통령’이라는 제목의 글쓰기 행사가 교내에 열렸는데, 당시 반장이었던 본인은 불법선거 운동이라며 ‘백지동맹’을 주도했다. 그는 이 일로 반성문을 강요받았지만, 이를 시인하지 않고 끝까지 버텼다고 한다.#
  • 여섯 살에 천자문을 독학해 동네 산골 마을에서 천재로 알려졌고, 대창초등학교와 진영중학교에서 항상 상위권을 유지했으나 부산상고 시절부터는 친구들과 수업을 빼먹고 술·담배 등을 접하며 엇나갔다고 한다. 이는 가난이라는 콤플렉스가 반항기의 주된 이유였는데, 그의 자서전 에세이 ‘여보, 나 좀 도와줘’[24]에서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어릴 때 나는 상당히 반항적이었고 한편으로는 열등감이 심했던 것 같다. 가슴에 한과 적개심을 감추고 있기도 했고, 쉽게 좌절하기도 했다.”라 쓰여있다. 원래 인문계 고등학교로 진학하려고 했으나 가세가 기울며 원하지 않는 상고로 진학하게 된 것이 이유로 추정된다. 당시에는 성적도 낮아지고 고교시절을 친구의 집에서 방황하며 지냈다고 전해진다.#
  • 노무현 대통령 장례식에 참석했던 그의 친구 중 한 명은 고등학교 때 을 하나 사서 노 전 대통령한테 나눠 먹자고 했는데 ''반씩 먹으면 둘 다 배고프니 네가 다 먹어라. 나는 배고픈 거 잘 참는다"라고 했던 기억을 떠올리며 눈물을 보였다.#
  • 극히 적은 인원을 선발하던 시절에 사법시험을 합격하여[25][26] 자신의 능력을 충분히 입증해보였음에도 불구하고, 단지 학력이 낮다는 이유만으로, 즉 고졸/상고 출신이라는 이유만으로 법조계 내에서 심한 무시, 멸시를 당했다고 전해진다.
  • 노안으로 이마에 난 유난히 큰 주름살 한 줄은 이미 30살 되기 전에 생긴 주름살이다.
  • 1993년 사법연수생 자치회에서 발행하는 '사법연수'지에서 예비법조인들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한 결과 ‘가장 존경하는 선배 법조인’으로 노무현 전 대통령이 뽑혔다고 한다.
  • 1997년 SBS 라디오 노무현 김자영[27]의 뉴스대행진의 진행자로 활동하기도 하였다.
  • 1997년 3월 서울 역삼동에서 당시 낙선한 국회의원 동료들과 같이 하로동선(夏爐冬扇)이란 고기집을 개업하였다. 김원기, 김원웅, 노무현, 박계동, 박석무, 원혜영, 유인태, 이철, 홍기훈 전 의원과 김홍신, 제정구 현직의원까지 돈을 보탰으며 2명씩 당번을 정해서 장사를 했다고 한다. 식당명을 직역하면 여름 난로 겨울 부채인데 당장은 쓸모없지만 때가 되면 요긴하게 쓰일 물건이란 의미가 담겨 있었다고 한다. 식당은 결국 1년을 못가서 문을 닫았지만 그 이름값을 제대로 했는지 다수가 국회의원으로 당당히 정치일선에 복귀했고 대통령과 정무수석, 국회의장을 배출하게 되었다.
  • 일본 방송에 출연한 적이 있는데, 당시 MC 비슷한 역할을 한 쿠사나기 츠요시"SMAP을 알고 계신가요?"라고 한 질문에 "그 애니메이션 말이죠?"[28](...)라고 대답한 적이 있다. 그럴 만한 게 SMAP의 일본식 발음은 스맙프(スマップ)여서 유사한 데다가 당시 쿠사나기의 발음이 스마프보다는 스머프에 가까웠다.
  • 회고록 및 봉하마을에서 행한 연설, 김경수 비서관의 인터뷰 등을 참조해보면 퇴임한 이후에도 자신을 잊지 않고 찾아주는 사람들 덕분에 행복했다고 한다. 김경수 비서관의 회고에 의하면 봉하마을의 방문객들과 인사하고 격의 없이 대화를 나누는 시간이 노무현 전 대통령이 가장 즐거웠던 시간이었다고 한다. 퇴임 대통령이 이렇게 인기가 있었던 것은 이례적인 경우라, 퇴임 이후의 대통령이 자주 산악용 오토바이를 타는 모습이나 밀짚모자를 쓰고 방문객과 막걸리를 마시는 모습 등이 노출되었고 KBS 다큐멘터리 3일의 소재로 방영되기도 했다. 퇴임 후 고향에서 환경운동을 하는 전직 대통령의 새로운 모델이 신선했던 측면도 크다. 실제로 이 시기에 20대가 선택한 대중문화 전반의 핫 아이콘을 선발해 상을 주는 '제2회 Mnet 20's 초이스 컴백스타 부문'에서 노 전 대통령은 1위를 차지하기도 하였다. 김국진·신애·박미선·박찬호 등 스타들을 누르고 1위에 오른 것이다.
  • 한겨레에서 진행한 퇴임 인터뷰에서 좋아하는 아이돌 스타로 원더걸스를 꼽았다.[29]
  • 리무진이 아닌 버스를 자주 애용한 최초의 대통령이기도 하다. 리무진을 타면 고립되어 있는 느낌이지만 버스를 타고 가면 비서나 기자들과 가는 시간 동안 의논이나 토론을 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 애연가이자 상당한 골초였다고 전해진다. 가난했던 고시생 시절에도 하루 두 갑씩 피웠을 정도였고 식후엔 꼭 2개피씩 피웠다고 한다. 혼자서 피우면 권양숙 여사가 잔소리를 하니까, 참모진이나 장관들이랑 자주 피웠다고 한다.[30]#
  • 연설에 능숙한 전문가이다. 이는 변호사라는 이력이 큰 영향이 미친 것으로 보인다. 연설문이 생기면 전날 밤까지 고심고심하며 수정을 거듭했다고 전해지며, 대통령 재임 시절에도 대국민 담화라도 해야할 일이 생기면 이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더불어 달변가로도 유명한데, 수십 명 되는 평검사들과의 토론에서도 굽히지 않고 토론을 이어나갈 정도로 막힘이 없다. 노무현 스스로도 대중 앞에서 말하기를 즐겼다. 귀향 후 봉하마을 방문객들 앞에서 시간가는 줄 모르고 떠들었을 정도니. 이 이야기가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이후 노무현 전 대통령의 연설문 작성 방식이 재조명받고 있으며, 김대중 전 대통령과 노무현 전 대통령의 연설비서관이었던 강원국 씨가 방송에 자주 노출되었다. 아울러 대통령의 글쓰기 책도 재조명받고 있다. 노 전 대통령은 상술했듯 본인이 직접 연설문을 쓴 경우도 꽤 되었으며, 전 공무원들을 대상으로 연설문 강의 지시를 내린 적도 있었다. 언론에 자주 노출된 강원국 씨의 사례를 보면 하나같이 나오는 말이 "자기 생각을 자신의 말로 제대로 전달하지 못하는 사람은 리더가 아니다"이다.

  • 1988년 7월 8일 국회 본회의장에서 한 말이 상당히 유명하다. 2009년 5월 23일 사망 이후 회자되었다.
    존경하는 의원 여러분! 그리고 국무위원 여러분!

    부산동구에서 처음으로 국회의원이 된 노무현입니다.

    국무위원 여러분, 저는 별로 성실한 답변을 요구 안 합니다. 성실한 답변을 요구해도 비슷하니까요.

    청년 학생들이 죽어가는 것은 감옥에 가서 참회해야 될 사람들이 권력을 잡고 온갖 도둑질을 다 해 먹으면서 바른 말 하는 사람 데려다가

    고문하고 죽이는 바람에 생긴 일이니까 그 사람들이 임명한 국무총리와 국무위원에게 무슨 대책이 있으리라고는 믿지 않습니다.


    물으면 제가 그르지요. 제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사회는 더불어 사는 사람 모두가 먹는 것. 입는 것. 이런 걱정 좀 안 하고 더럽고 아니꼬운 꼬라지 좀 안 보고 그래서 하루하루가 좀 신명나게 이어지는 그런 세상이라고 생각합니다. 만일 이런 세상이 좀 지나친 욕심이라면 적어도 살기가 힘이 들어서 아니면 분하고 서러워서 스스로 목숨을 끊는 그런 일은 좀 없는 세상. 이런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노동자와 농민이 다 함께 잘 살게 되고 임금의 격차가 줄어져서 굳이 일류대학을 나오지 않는다 할지라도 그리고 높은 자리에 안 올라가도 사람 대접 받을 수 있는 그런 세상이 되면...
  • 조지 워커 부시 미국 대통령으로부터 'Easy man'으로 불리는 수모를 겪었다. 당시 한미관계가 안 좋았기 때문이란 해석이 유력하다. 근데 이 양반 행보를 보면 진짜 몰라서 그런 거 같기도 하다. 김대중에게도 'This Man'이라고 부르는 결례를 저질렀던 사람이다.
  • 미국의 로버트 게이츠 전 국방장관은 노무현 사후 발간한 자신의 자서전 《DUTY》에서 노무현 대통령에 대해 "나는 그가 반미성향(anti-American)을 가진 사람이며 아마 미친(crazy) 것 같다고 결론내렸다."이라고 평가하여 논란이 생겼다.
  • 한 조사기관에서 연예인, 스포츠 스타, 정치인 등을 총망라하여 호감도 순위를 조사한 결과 노무현 전 대통령은 65.2%로 7위를 기록하여 역대 정치인들 중 유일하게 10위 안에 들었다. 이는 54.2%로 16위를 기록한 현직 대통령 문재인보다 높은 수치이다. 참고로 1위는 유재석(70.5%), 2위는 공유(68.2%), 3위는 김연아(68.0%) 순으로 나타났다.#
  • 백혈병으로 위독한 상태였던 한 학생이 퇴임한 노무현 전 대통령과 만나고 싶어했고, 담당교사가 사람사는 세상 홈페이지에 이런 사연을 올리면서 결국 만남이 이루어진 적이 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이 학생에게 '의지의 승리를 기원하며'라는 자필사인을 건네주며 쾌유를 기원해주었다. 그러나 학생은 악화된 병마를 이기지 못하여 2008년 10월 경 세상을 떠나고 노무현 전 대통령 역시 8개월 뒤 사망한다. 그리고, 죽은 학생의 담당 교사들이 노 전 대통령과 이 학생의 만남을 담은 앨범을 고인의 영전에 바치면서 이 이야기가 세상에 알려지게 된다.기사
  • 노 전 대통령이 국회의원 시절, 진주의 어느 길가에서 한 남성이 그를 알아보고 인사를 건넸고 함께 대화를 나눈 적이 있다. 그런데 이 남성은 삶이 너무 힘들어 죽으려 한다는 얘기를 꺼냈고, 깜짝 놀란 노무현은 '아이들을 생각해서라도 굳세게 살겠다고 나와 약속해달라'는 말과 함께 "약속은 생명이다. 욕심 부리지 마라"란 말이 쓰인 액자를 이 생전 처음 보는 남성에게 선물한다. 1년 뒤 이 남성은 김대중 대통령 선거유세 중이던 노무현과 재회하게 되고, 그때 격려가 큰 힘이 돼 주었다며 감사를 건냈고 노무현 역시 살아줘서 고맙다며 화답했다. 그리고 이 남성은 노무현 전 대통령이 사망한 후 분향소에 "자식들과 함께 약속을 끝까지 지켰다"며 영정 앞에 과거 노 전 대통령에게 선물받았던 액자를 바쳤다.(기사)
  • 조선일보를 배달하던 신문배달원들이 자신들의 권익을 지키고 열악한 근로조건을 개선하기 위해 도움을 건네줄 변호사들을 찾았지만, 서슬퍼런 조선일보의 기세에 눌려 아무도 나서서 이들을 도와주지 않았다. 이때 노무현이 발벗고 나서며 이들을 도와준다. 직접 나서서 신문사 지국을 상대로 소송을 거는 등, 3년간이나 이 일에 매달린 끝에 승소하여 그 결과 신문배달원들의 근로조건이 나아지게 됐다. 조선일보 기자가 노무현을 찾아와 이 일에서 손을 떼라고 협박을 했지만, 노무현은 기자면 기사나 잘 쓰라고 받아치면서, 이때부터 조선일보와 노무현의 악연이 시작되었다. '노무현, 마지막 인터뷰'라는 책에 나온 내용.
  • 노동운동가인 김진숙의 회고에 따르면 노무현 전 대통령은 인권변호사 시절 노동자들에게 법률지식을 가르치기 위한 소모임을 열거나, 노동조합원들이 여는 강연에 강사로 나서기도 하였다. 무료 법률상담소를 운영하며 형편이 어려운 자들을 위해 법률상담을 해주거나 무료로 소송을 대리하기도 하였다. 전태일의 기일에는 김진숙을 비롯한 몇몇 노동자들을 초청하여 변호사 사무실에 간단한 제사상을 마련하여 추모 의식을 치르곤 했다.
  • 노무현 전 대통령은 1980년대 안기부에 의해 문제 변호사 4인 중 1명으로 찍혀있던 상태였다. 이때 감시 역할을 맡은 안기부 직원 이화춘씨에게 노무현은 광주항쟁을 다룬 비디오나 기록집을 보여주고 노동·학생운동과 관련된 토론을 벌이기도 하였다. 이런 과정을 통해 이화춘 씨의 기관원 의식은 무뎌져갔고, 노무현 변호사와는 서로 애환을 챙기는 사이로까지 발전했다고 한다.[31] 훗날 이 사람은 노무현 대통령 후보의 경선, 대선 캠프에 정책특보로 합류한다.기사, 이 사건을 모티브로 한 만화
  • 청와대 전속 사진사로 일하며 노무현 대통령의 일거수일투족을 관찰한 장철영 사진사는 노무현 전 대통령이 한 인간으로서 완벽한 사람이었다고 평가하였다.#
  • 노무현 전 대통령의 변호사 시절 운전기사였던 노수현 씨의 회고에 의하면 노무현 변호사는 노수현 씨의 신혼여행 때 신혼부부를 태우고 웨딩카를 직접 신혼여행지인 경주까지 운전해주었고 호텔비용과 10만원의 금일봉까지 챙겨주었다고 한다.#
  • 노무현 전 대통령의 전속 이발사였던 정주영 씨는 노무현 전 대통령을 “소탈하고, 배려심 많은 따뜻한 분”으로 기억하고 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이발하는 동안에도 이발사가 긴장할까봐 먼저 농담을 건네고, 말도 항상 존대를 했다고 한다. 일주일에 한 번 청와대에 들어가는 이발사에게 ‘바쁜데 오라 가라 해서 미안하다’고 마음을 써주었고, 이런 대통령의 배려 덕에 정주영 씨는 일을 하면서 불편했던 적이 없었다고 한다. 평소 머리스타일은 이발사에게 일임하였지만, 딱 한 번 탄핵당했을 때 머리를 짧게 잘라달라고 주문한 적이 있다. 당시 노무현의 짧은 머리는 사람들 입길에 오르내렸고, 이발소의 단골손님들은 정 씨에게 핀잔을 주었다고 한다. 며칠 후 노무현은 이발을 하면서 정 씨에게 "제 머리 때문에 마음고생 많았죠"라고 말을 건네며 미안해했다고 한다.# 노무현 전 대통령을 만난 이후 정주영 씨는 영남 특유의 보수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다가 자신도 모르게 진보적 성향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 노무현 전 대통령의 두루마기 입은 초상화를 그린 김호석 화백은 노무현 전 대통령을 "대통령의 지위에 앉은 사람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화가를 편안하게 해주는 모델"이었다고 회상하였다. 노 전 대통령과 김호석 화백은 만나면 예술과 미학에 관한 담론을 주고 받았고, 노무현 전 대통령은 초상화 작업을 할 때도 화백의 까다로운 지시를 묵묵히 잘 이행해주는 사람이었다고 김호석 화백은 회고하였다.#
  • 노무현 전 대통령은 손녀가 태어난 날 병원을 방문하여 잠깐 손녀를 본 뒤 곧바로 자리를 떴다고 한다. 동행한 권양숙이 좀 더 있다가자고 말하자 노 전 대통령은 "일요일인데 경호원들이 집에서 못 쉬고 나와있지 않느냐? 우리가 빨리 가야 경호원들이 쉴 수 있다."라며 재촉하여 서둘러 자리를 떴다고 한다.#
  • 노무현 전 대통령이 판사로 재직하던 시절 법원 총무과에서 근무하던 공무원의 증언에 의하면 노무현은 예비군 훈련에 빠짐없이 참여하였을 뿐 아니라 훈련에도 적극적으로 임하는 유일한 판사였다고 한다.[32]
  • 노무현이 세무전문변호사로 활동하던 시절 부림사건에서 체포된 학생들 중 한 명을 면회하는 과정에서 고문의 흔적을 발견하고 그때부터 미친듯이 이 사건의 변호에 미친듯이 매달렸다고 한다.# 당시 노무현 변호사는 주 변호인단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부림사건의 피해자들의 증언에 의하면 노무현 변호사가 가장 열성적으로 변론했다고 증언하고 있으며 당시 판사였던 서석구 변호사도 본인의 블로그에 쓴 글에서 노무현 변호사가 재판 중 부림사건 피해자들에게 고문이 있었음을 폭로했다는 사실을 밝힌 바 있고, tv조선과의 인터뷰에서 노무현 변호사가 부림사건 당시 피해자들에게 고문이 있었음을 폭로하여 큰 화제가 되었다고 증언하였다.# 훗날 대법원은 부림사건의 수사과정에서 고문이 있었음을 인정하며 피해자들 전원에게 무죄로 최종판결을 내린다. 부림사건 피해자들은 훗날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노무현 전 대통령의 헌신적인 노력에 깊은 감사의 뜻을 밝혔다.# 고호석 씨는 노무현 변호사가 법정에서 격앙되어 판사와 싸울 정도로 열정적으로 변호했다고 증언하면서[33] 그의 당시 헌신적인 변호 덕분에 33년이 지나 무죄를 받을 수 있게 되었다고 말했다.#1, #2, #3 박욱영 씨는 노무현 변호사가 차분하고 논리적이면서도 때로는 거칠게 판검사들을 밀어 부쳤다고 증언하였으며, 최준영 씨는 노무현 변호사가 편한 길을 갈 수 있었음에도 부림사건 피해자들을 변론하느라 험난한 길을 걷게 되었다며 안타까움을 나타내었다. 윤연희 씨는 노무현 변호사가 자신들의 무료변론 요청에 흔쾌히 응해준 것에 감사해하며 재판에서 피해자들의 편에 서서 당당하게 변호해 주었다고 회고했다.
  • 훗날 부림사건의 피해자들은 노무현 전 대통령의 묘역을 참배하며 고마움을 전했고영상, 2014년 2월 13일 부림사건 피해자들에 대한 무죄선고가 나온 뒤 "무엇보다 오늘의 이 무죄 선고는 33년 전 저희를 위해 헌신적으로 변호했던 노무현 변호사님의 헌신적인 노력의 결과라고 생각한다"며 노무현 전 대통령에게 감사의 뜻을 표했다.기사
  • 노무현 전 대통령이 변호사 시절 대우조선 노동자 이석규씨의 장례식에 제 3자 개입 위반 혐의로 구속된 적이 있었다. 이 건과 관련한 구속 적부심에서 99명의 변호사가 무료변론을 자청하였고, 이들 대부분이 재판에 참석하여 화제가 된 적이 있다. 99명의 변호인단 중 대표변호사를 맡은 김광일 변호사가 판사에게 재판에 출석한 변호인단 모두를 일일이 호명해줄 것을 요청했고, 그에 따라 자리가 모자라 방청석에까지 앉아있던 수많은 변호사들이 판사의 호명에 따라 한 명 한 명 자리에서 일어나 응답하였다고 한다. 이 장면은 영화 변호인에서 그대로 묘사되었다. 여담으로, 노무현의 변호를 맡아 도와줬던 변호사들 중에서는 박원순서울특별시장도 있었다.# 김광일 변호사의 평전 '참 멋진 놈 하나 만났더라'에서 당시의 상황을 확인할 수 있다.
    그 순간 김 변호사가 변호인석에서 벌떡 일어나서 이렇게 요구했다.

    "출석한 변호인의 수가 많고 방청석에도 다수가 앉아 있어 변호인의 출석 여부를 확인하기 어려우니 재판장께서 직접 변호인을 호명하여 출석 여부를 확인하여 주십시오."

    결국 재판장은 장시간에 걸쳐 변호인을 일일이 호명하여 출석 여부를 확인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토록 많은 변호사가 선임되었을 뿐 아니라 직접 법정에 출석하여 노무현 변호사의 석방을 요구하고 있다는 사실을 재판부가 직접 확인하도록 함으로써 재판의 분위기를 유리하게 이끌고 재판부에도 압박을 가하는 일종의 시위 효과를 노린 것이었다.

    원로 변호사들까지 포함한 그 많은 변호사들이 방청석 여기저기에서 "나도 출석했소"하고 한 명 한 명 일어날 때의 감동과 그런 상황을 연출해낸 김 변호사의 순간적인 판단력은 그 후 오랫동안 변호사들 사이에서 회자되었다. - '참 멋진 놈 하나 만났디라' 143~144 페이지
  • 흥미로운 점이 있는데 이때 노무현을 구속했던 검사가 주선회노무현 탄핵 심판때 주심을 맡은 헌법재판관이다. 이때 주선회 재판관은 공식적으로 확인된 바는 없으나 탄핵 기각을 선고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 철도청 파업에 관련하여 해고된 공무원들을 철도 노조에게 "뒤통수 맞았다"라는 이유로 복직시키겠다는 데 반대했다.기사, 기사2
  • 노무현 전 대통령이 자이툰 파병부대를 방문하여 찍은 아래의 사진을 두고 지지자들과 반대자들 간에 논란이 있었던 적이 있다.
    파일:노무현자이툰.jpg
    논란인 즉, 사진에 나온 병사가 노무현 전 대통령에게 "아버지!"하면서 달려들어 안기자 노무현 전 대통령은 "그래, 아들아!"하면서 안아주었다는 설이 웹툰을 통해 확산되었는데, 노무현의 반대자들 중 일부는 이 사진이 연출된 것이라 주장하였다. 그러나, 다음 이종격투기 카페에서 사진에 등장한 병사가 직접 인증하여 당시 상황을 밝히면서 논란은 종식되었다. 결론적으로 이 사진은 연출된 것이 아니며, 웹툰에 나온 대로 상황이 벌어진 것도 아니다. 당사자가 밝힌 바에 의하면 대통령의 부대 방문으로 반가운 마음에 대통령을 향해 달려가자 주변의 경호원 2명이 제지를 하였는데, 노 대통령이 괜찮다면서 경호원을 물렸다고 한다. 그리고 이 병사는 노 대통령에게 걸어가서 "포옹 한 번 해주시면 가문의 영광으로 받겠습니다."하고 말하자, 노 대통령은 두 팔을 쫙 벌렸고 병사는 기쁜 마음에 노무현 전 대통령을 번쩍 안아올리면서 위와 같은 사진이 나왔다고 한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이 병사가 본인을 들어올리는 과정에서 혹시나 다칠까 걱정하며 "다칠라"는 말을 건넸고, 병사는 최선을 다해서 복무하겠다는 말로 화답하였다. 이종격투기 카페에선 이 병사의 인증글에 100여개에 달하는 댓글들이 달리며 화제가 되었고, 병사는 당시 노무현 전 대통령에게 편안하고 따뜻한 느낌이 들었다고 회고하였다.
  • 묘역 공사는 사망하고 나서 거의 딱 1년 후인 2010년 5월달에 마무리되었다.

  • 참모였던 안희정이 '담금질'이라는 책을 내며 출판기념회를 연다고 참석을 요청했으나 참석이 어려워지자 대신 축하영상을 찍었는데 촬영 도중 너무 고생시켜서 자신이 빚을 많이 졌다고 울었다.
  • 학생들의 생활 기록부와 교무학사/행정 업무를 온라인으로 처리할 수 있게 해주는 교육행정정보시스템을 최초로 도입하였다. 이 시스템은 추후 이명박 정권에서 '차세대나이스'라는 이름으로 개편되었다.
  • 국가 정보 기록물 시스템 이지원의 발명가 중 한명. 인문계의 성공 루트를 탄 인물이지만 대중들이 받아들이는 이미지와 달리 컴퓨터 관련 지식이 상당했고 활용 능력도 뛰어났다고한다. 대통령이 되기 전에는 정치계에서 인맥을 관리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스스로 개발하기도 했으며 자신의 유서조차도 보통 자살하는 이들이 주로 사용하는 수기 방식이 아닌 한글 문서 타이핑으로 남겼다. 게다가 사후의 논란으로 알려진 내용에 따르면 퇴임 후 이지원 시스템의 사본을 자신의 봉하마을 사저 네트워크에 NAS를 이용해 제작하여 통합시킬 정도의 능력자. 그리고 사법시험을 공부할 시절에 독서대를 개량하여 실용신안을 따낸 실력도 있다.
  • 일본 국민과의 대화 프로그램 중 일본 사회자가 계속 남성 방청객들에게만 질문 기회를 주자 "계속 남성 분들에게만 마이크가 가는 것 같네요, 여성 통역사를 통해서 들리기 때문에 결과적으로는 모든 질문이 여성의 질문으로 들리긴 합니다마는..."이라는 말을 할 정도로 성평등에 관심이 많았다고 전해진다.
  • 머리숱이 굉장히 많은 것으로도 유명했다. 말년에 할아버지가 된 후에도 노화로 인해 자연스럽게 진행되는 탈모의 흔적이 전혀 없었다. 탈모갤이나 대다모 등의 탈모 커뮤니티에서 국내에서 머리숱이 가장 많은 사람을 꼽으라면 항상 언급된다.
  • 근년 들어서 지지층들 사이에서는 사람 보는 눈이 뛰어났던 인물로 새삼 회자되고 있다. 문재인에게는 정치할 것은 강권한 반면, 유시민에게는 정치를 그만두고 작가가 될 것을, 안희정에게는 정치를 그만두고 농사나 짓는게 어떻냐는 식의 얘기를 거듭 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기 때문. 이 같은 발언들이 2017~18년 들어서 문재인이 제19대 대통령이 되고, 유시민이 작가 겸 방송인으로서 큰 유명세를 얻은 반면, 안희정 전 충남지사는 성폭행 파문을 일으키자, 노 전 대통령의 말을 따른 두 사람은 성공하고 따르지 않은 한 사람은 나락으로 떨어지면서 새삼 조명되고 있는 것이다. 사람에 대한 평가는 아니지만 한나라당(現자유한국당)이 집권하면 생기는일로 알려진 발언 역시 그의 혜안을 나타내는 단면이라고 볼 수 있을 듯.
  • 선관위 홈페이지에 등록된 부재자투표에서 모두 1위를 차지했다. 부재자투표는 군인의 비율이 가장 높다. 즉 군인의 지지를 많이 받았던 노무현 전 대통령이었다. 노무현 후보에게 절대적으로 불리하게 보였던 1992년 총선 부재자투표에서 대한민국 제5공화국의 출신이었던 허삼수를 눌렀다. 김대중 전 대통령의 간판인 민주당(1991년) 소속으로 출마했고 무엇보다 3당합당 이후의 선거였고 노무현은 3당 합당을 반대했기 때문이다. 허삼수는 이 당시 김영삼의 지원을 받았다. 부산 동구의 전체결과: 노무현 32.3% 허삼수 63.6%, 부산 동구의 부재자투표: 노무현 53.2%, 허삼수 43.9%
  • 여러 스포츠 분야에 관심이 많았다. 변호사로 활동하던 시절에는 요트를 취미로 하여 직접 2인승 요트를 제작하고 부산요트클럽 회장을 맡기도 했다.# 88년 서울 올림픽 출전을 목표로 일본의 요트 클럽에서 훈련을 받는 등 상당히 깊이 파고들었지만 민주화운동에 투신하면서 완전히 접었다. # 후에 주간조선이 이를 두고 호화 요트를 보유한 재산가로 왜곡 보도하여 민사 손해배상소송을 치르는 등 곤욕을 겪기도 했는데, 후에 자서전에서 인식에 비해 돈이 크게 드는 스포츠가 아니었다고 해명하기도 했다. 야구부로 유명한 부산상고 출신이어서인지 야구에도 애착을 보여 2003년 올스타전에서는 스트라이크존에 들어가는 시구를 하여 화제가 되었다.# 그 외에도 2000년 총선 낙선 이후 한국e스포츠협회 회장을 맡고자 했으며, 실제로 명예회장직을 맡고자 협회에 메일을 보내가도 하였다.#
  • 재임시절 중국의 북경대학에서 조선족에게 이중국적을 가질 수 있게 하자는 말을 했다가 곤욕을 치룬 적이 있다는 이야기가 있다.

6.1. 팬클럽(노사모)이 생긴 최초의 정치인

파일:external/blogimg.ohmynews.com/1357294488.jpg
노무현과 함께하는 노사모.
국내 정치인 중 최초로 (자발적으로 생성된) 팬클럽을 가진 것으로 유명하다. 노사모 문서를 참조.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한국 정치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현재는 구심점이 사라진 탓에 인원이 축소되어 명맥만 유지중이다.[35]

6.2. 정적이 많았던 대통령

대통령 노무현은 노사모 등 그를 열렬히 좋아하고 지지하는 아군 못지 않게 적(안티)도 많았다. 우선 정치 이념적으로 보수 성향의 사람들 및 정당(당시 한나라당)으로부터 늘 이념 공격을 받았다. 참여정부 기간 내내 보수 진영은 노무현을 향해 공산주의자 따위의 이념 딱지를 붙이며 색깔론 공격을 퍼부었던 것이다.[36] 그렇다고 노 대통령이 재임시절 진보 진영으로부터 절대적인 사랑을 받았던 것도 아니었다. 기본적으로 진보 진영의 입장에서는 노무현과 당시 여당인 열린우리당도 보수 정치인이자 보수 정당이었고, 특히 한미 FTA이라크 전쟁에 한국군 첫 파병 등의 문제에 있어서 참여정부의 결정은 진보 진영이 등을 돌리게 된 결정적 계기로 작용했다.

한편 대통령 노무현은 · 정치 이념과 상관없이, 소위 사회의 기득권 층으로부터도 환영받지 못하는 존재였는데, 이는 노무현이 가난한 시골 출신의 고졸, 그것도 상고 출신 대통령이라는 것이 주요한 이유였다. [37]

노무현은 김영삼에 의해 정치에 입문했고, 3당 야합 때 김영삼의 결정에 반대하며 갈라섰다. 김영삼도 이 사건 이후로 노무현과 사이가 극도로 멀어졌다. 군사정권은 말할 것도 없고 이승만은 대한독립촉성국민회 , 김대중은 호남충청연합(DJP연합), 김영삼은 3당합당으로 얻은 PK/TK/충청의 넓은 지역기반을 지지층 및 아군으로 두었고, 이명박은 YS에 의해 정계에 입문한 배경 덕에 당시 한나라당 內 상도동계 대부분은 물론, (이후 대부분이 친박계에 속하게 돼는) 민정공화계에서도 이명박 지지세가 상당히 나왔던 데다, 출신지 자체가 PK와 TK의 영향을 동시에 받는 경북 포항이기도 하고, 김영삼 문민정부 당시, 정치 1번지라고 불리우는 서울시 종로구에서 여당 국회의원을 역임한 후 서울특별시장 시절의 업적 및 화려한 커리어를 갖고 있어, PK-TK-수도권에서 광범위한 지지세력을 보유하고 있었으며, 호남을 제외한 전국에서 압도적인 세력을 아군으로 두었다. 그러나 그에 비하면 노무현은 완전 고립무원이었다.[38][39] 이는 노무현의 정치스타일의 문제도 컸다. 간단한 예로 대통령 된 후의 행적을 보자. 아군적군 없이 아무렇게나 대하면서 모조리 적으로 돌렸다.

DJ쪽 인사, 즉 동교동계에서도 노무현을 안좋게 보던 이들은 많았다. 참여정부가 출범하자마자 당시 한나라당조중동 등 보수 일간지의 공격이 시작되었고, 이들이 제일 먼저 문제 삼은 것이 김대중 정부의 대북송금이었는데, 당시 여소야대였던 정치 상황때문에 원활한 국정 운영을 위하여 노무현은 야당의 요구를 일언지하에 거부하기는 쉽지 않았다. 그리하여 결국 노무현은 당시 한나라당이 주도하여 발의하고, 국회를 통과한 대북송금특검법에 거부권을 행사하지 않았다. 오히려 대통령이 되자마자 제일 먼저 서명한 법안이 해당 법안이었다. 이에 대해 동교동계에서는 노무현에게 섭섭함 감정을 가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로써 여당이었던 민주당 내 일부 인사들과도 척을 지게 된다.[40]

또한 "전라도 정치인들과 정치 못 해먹겠다"(관련기사)는 발언이 논란이 될 만큼 호남인사들과 갈등이 존재했다. 이들은 새천년민주당에서 탈당하고 열린우리당으로 따라왔던 친노세력인데도 그랬다. 집권 초기 대북송금특검법 사태 등을 거치며 민주당 내에는 동교동계를 위시한 구주류와 신주류인 친노계가 마찰을 밎었고, 결국 민주당 내 소장파가 주축이었던 친노계는 민주당 내 쇄신을 요구하였다. 하지만 동교동계 2선퇴진 정도로는 만족하지 못하였고, 친노계는 열린우리당을 창당하면서 민주당 주류세력과 결별하게 된다. 이때 노무현도 민주당을 탈당하고 당적을 열린우리당[41]으로 옮겼다. 이후 민주당은 여당에서 일순간에 야당으로 전락하게 되었으며, 안 그래도 여소야대였던 국회 상황은 정부에 더 불리한 구도로 바뀌었다. 그리고 이러한 극도의 여소야대 정국 속에서 결국 2004년 탄핵사태를 맞이하게 된다.[42][43]

한편 한미 FTA이라크 전쟁 파병 등을 거치며 지지층 중 진보적 색채가 강한 사람들도 등을 돌리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해서, 즉 한미 FTA를 체결하고, 이라크 전쟁에 한국군을 파병했다고 해서 중도층이나 보수층이 새로운 지지층으로 편입된 것도 아니어서 지지율은 추락에 추락을 거듭했다. 이후노무현은 이러한 정국을 타개하기 위해 한나라당에 대연정을 제안하였으나[44], 오히려 여당인 열린우리당[45]과의 관계마저 악화되는 결과를 초래하였고, 노무현은 결국 여당 내에서의 탈당 요구를 받고서 결국 2007년 초에 열린우리당을 탈당하게 된다. 당시 여당 내에서 노무현에게 탈당 요구를 한 것은 2007년 말 대선을 앞둔 상황에서 지지율이 낮은 대통령이 여당의 대선 준비에 도움이 되기는커녕, 부담만 된다는 인식이 여당 내에 팽배해 있었기 때문이었다.

참여정부 말기에는 언론사들도 거의 대부분 노무현과 적대적 관계를 유지했는데, 2007년 1월 노무현이 "기자실에 죽치고 앉아서 기사나 담합한다"면서 당시 청와대 기자실통폐합안을 제출하여, 진보와 보수 매체 전체로부터 집중 비판을 당했다.(당시 진보 매체 프레시안 비판기사, 기사2), 공무원 기자접촉금지령을 내려서 취재를 원천봉쇄하려 하고, 공무원의 댓글을 독려했던 대통령의 언론관이 돋보이는 부분이다. 후임 대통령 이명박의 경우는 6.3 항쟁의 주역이면서 고려대학교를 졸업했고 그 이후, 현대건설 사장이었던 화려한 커리어로 인한 유권자들의 강력한 지지와, 김영삼에게 발탁된 것을 배경으로 한 상도동계 정치인 대부분의 지지, 연고지였던 수도권-PK-TK(PK와 TK의 접경지대였던 포항 출신인지라 양쪽에서의 지지를 모두 엄청나게 받을 수 있었다.)의 지지, 대부분이 친박계에 속했던 한나라당 內 민정공화계에서도 이명박 지지자들이 상당수 나와, 지지층이 엄청났던 것과는 대조적인 모습이다.[46]

제17대 대통령 선거 직전에는 여당 측[47] 대선 후보인 정동영마저도 의식적으로 거리감을 두었다.[48][49] 정동영은 여당의 대선후보이면서 당시 야당이던 한나라당에 편승해 노무현 대통령 심판론을 대통령 선거 의제로 설정하였다. 대선이 가까워지면서 민주당의 고질병인 이합집산이 시작되면서 민주당 의원들마저 노무현 대통령과 거리를 두기에 바빴다.

노무현 대통령은 언론의 자유 강화와 권위주의를 허무는 것을 시대정신으로 보았다. 그의 이러한 국정철학은 한국 정치 특유의 경직된 권위주의를 해소하려 했으나[50][51] 반대로 시종일관 강경 일변도의 대언론 정책을 폈고, 결국 언론도, 지지층도, 국민 누구도 만족시키지 못한 채 상당한 곤욕을 치렀다. 청와대 출입기자실을 폐지한 것은 그 예들 중 하나이다. "이게 다 노무현 때문이다."라는 말이 등장할 정도. 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통령에 대한 비난 수위에 대해 별다른 제지를 하지 않은 것은 특기할 만하다. 2003년 한나라당(당시 야당) 당직자 회의에서 홍보위원장 박주천은 노무현 대통령이 "생긴 게 개구리와 똑같다"라며 웃고 떠들었고, 한나라당 이상배 의원은 노무현 대통령이 일본을 방문하자 "등신 외교"라고 하였다. 이에 문제가 되자 한나라당 김덕룡 의원은 "등신이라는 말이 뭐가 나쁘냐"라고 할 정도. 심지어는 2004년 한나라당 국회의원 24명으로 구성된 극단 여의도는 노무현 대통령을 원색적으로 모욕하는 "환생경제"라는 연극을 공연했는데, 이 연극에서 국회의원들이 대통령을 "노가리"라고 대놓고 욕을 해도 아무 일 없었다. 보수일간지 등은 "천격"이란 표현을 비롯해 다양한 비하 소재를 만들어 내었다. 후에 이명박정권 때 쥐박이, 박근혜정권 때 귀태나 닭근혜로서 미러링하게 된다대통령 노무현은 "자신을 욕하여 국민들이 기분이 풀릴 수 있다면 얼마든지 욕을 하라"고 하였다.[52] 이명박 대통령 시절에는 인터넷에서 댓글 한번 작성한 것만으로 경찰조사를 받을 수 있는 법이 만들어진 것(#)과는 대조되는 모습이다.[53]

6.3. 비판적 국민과 국정원 여론 공작, 고인드립의 최대 피해자

이인규 전 중수부장은 2015년 2월, 국정원이 노무현 전 대통령의 포괄적 뇌물수수혐의에 대해 여론조작을 했다고 주장하였다. 노무현 대통령 일가가 피아제 시계를 논두렁에 버렸다는 등 허위 사실을 꾸며내어 언론에 흘린 주체가 검찰이 아니라 국정원이라 주장한 것. 결과적으로 노무현 대통령은 수사 도중 스스로 목숨을 끊기에 이르게 되었다. 당시 수사를 담당한 이인규 전 중수부장은 이 당시를 회고하면서 당시 국정원 행태는 공작 수준이었다고 말했다. 다만 구체적인 증거는 없는 상태에서 이인규 변호사의 일방적인 주장이었고,(노컷 뉴스: "이인규는 왜 지금에서야 국정원 탓으로 돌리나?") 이인규는 훗날 자신이 자서전 또는 회고록으로 모든 것을 공개할 것이라 밝혀 2탄을 예고하고 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사망한 직후, 국민장을 치루며 온 국민이 애도하는 가운데 국정원은 노무현 대통령을 비하하는 인터넷 게시물 수천 개를 유포시키며 추모 분위기를 방해했다.(뉴스)
하지만 그에 대한 반대와 비판여론은 국정원에 의해 수동적으로 행해진 것이 아니라, 경제성과와 정책 방향성에 따른 반감에 따른 영향이 매우 컸다고 볼 여지도 있다. 노무현에 대한 비난 분위기는 국정원이 어떻게 손을 써서 그렇다는 표현이 어려울 만큼 그의 임기 때부터 고질적었다고 보는 의견도 존재한다.

이후에도 대형 커뮤니티인 디시인사이드의 민간 유저들과 국정원은 여러 인터넷 사이트에 노무현 대통령을 모욕하는 게시물을 지속적으로 생산, 유포했다.(검찰의 국정원 댓글 여론조작 수사) 그러나 공무원과 국정원 단독의 여론의 조작능력과 스케일이 여론상의 비율에서 얼마나 되는지는 자세히 설명되지 못하고 있다. 다만, 규모에서 확대언급되는건 이들이 공직자였고, 그 공직자의 범주가 넓었다는 것이었다.

2013년 밝혀진 유명한 좌익효수 역시 노무현 전 대통령을 모욕하는 게시물을 지속적으로 올렸음이 확인되었다. 한편, 좌익효수의 재판결과, 모욕죄만 인정되었고 국정원법 위반은 무죄를 선고받았다. 이후 국정원에서 국정원의 신뢰와 기대를 훼손했다는 이유로 해임되었다.( "좌익효수 국정원 직원, 1심서 집행유예 선고...모욕죄 인정-국정원법 위반은 무죄") 이 판결은 여러 면에서 비난을 받았는데, 상당수 게시물은 증거부족으로 채택되지 않았다. 오직 10여 개의 게시물만 채택되었다. 좌익효수는 검찰에서도 죄질이 나쁘다고 말했지만, 국정원에 오래 근무했다. 국정원장은 대법원 판결이 난 다음에 처리하겠다고 말했다. 그런데, 2016년 4.13 총선이 끝나고 여소야대 국면이 이루어지자 국정원은 그를 해임시켰다. 2013년 사건이 밝혀지고 해임에 이르는데 무려 3년의 세월이 걸렸다.

디시인사이드와 일간베스트라는 대형커뮤니티를 사용하는 민간유저들의 반감정서는 타인을 통해 주도된것과는 다르지만.
이후 이명박 정부와 박근혜 정부 시기의 국정원이 저지른 범죄행각이 차례로 발굴되면서 국정원이 직접 주도하여 노무현 전 대통령을 공격하고 사후에도 짓밟기 위해 총공격을 가했다는 것이 여지없이 다 드러났다.
국정원이 노무현에 대한 반감여론을 '주도'했다는 것은 그냥 표현이 그런 게 아니라, 실제로 체계적으로 이를 시행하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대표적인 예로 이명박 정부는 대북공작금을 유용하여 소위 '연어 프로젝트'라는 이름으로 노무현의 음해 목적으로 사용하였다고 한다.

인터넷에서 쉽게 노 대통령을 모독하는 합성사진이나 영상을 찾을 수 있다. 일베저장소 등에서는 'MC무현'이라는 이름으로 오로지 노무현 대통령의 생전의 음성을 합성한다.[54]

JTBC에서는 노알라 합성사진이 심리학자들의 조언과 설계에 따라 국정원이 직접 만들어 고인 비하를 주도하였다고 의혹을 게시하였다. 중앙일보 기사 - "노무현 코알라 합성 사진, 심리학자 자문받아 국정원이 제작" 다만 이는 반론도 존재하는데, 노무현 전 대통령을 향한 많은 공작은 2009년 노 전 대통령의 사망시까지가 피크였어야 하나 노알라는 2013년에 뜬금없이 일베에서 여러 합성사진 중 하나가 히트한 것에 불과하다. 무엇보다 저 의혹제기의 출처도 한 사람의 증언에 불과하고 확실하게 확인된 것은 아니다.

6.4. 죽음에 대한 의혹

타살설을 정리한 문서

2009년 5월 23일 사망 이후 현재 공식 사인은 자살로 판정된 지는 벌써 몇 년이 지났지만, 수십 미터에서 투신했는데도 즉사하지 않았다는 점, 두개골이 파열되었음에도 목뼈는 부러지지 않았다는 점, 다른 신체부위의 타박상이 적고 출혈이 적었다는 점 등을 근거로 아직도 노무현 타살설이 주장되고 있다. 노무현 전 대통령 사망 이후 9년이 지난 2018년 현재도 가끔씩 노무현 타살설이 언급되고 있으며, 노무현 전 대통령의 사인(死因)에 대한 의심을 가지고 있던 지지자들이 노무현의 사인을 제대로 밝혀 내라고 요구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노무현 전 대통령의 시신은 부검도 없이 화장했기 때문에 정확히 자살인지 타살인지는 미스테리로 남게 되었다. 본래 자살 및 타살이라면 부검을 하는 것이 원칙이고, 사인을 알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기 때문에 부검을 실시하려 했으나, 유가족 측에서 고인의 유서에 쓰여 있는 '화장해라.'라는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의 유지를 지키기 위해서 화장하는 것으로 마무리지었기 때문이다. 만약 타살설이 확실할 경우 영구 미제 사건이 될 가능성이 높다.

노무현 타살설을 부정하는 이들은 당시 이명박 정부나 노무현의 정적들에게 노무현의 죽음으로 얻을 수 있는 이득이 없었기 때문에 노무현이 타살당했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주장한다. 또한, 노무현은 실족사한 것인데 외부에서 그의 죽음을 자살로 둔갑시켰다고 여기는 사람도 있다. 노무현이 딱히 자살할 이유도 없었고, 타살당할 만한 이유도 없다는 것이 이들의 주장이다.

위 타살근거 링크에 대해 몇가지 반박하자면,
1. 톨게이트 cctv를 동영상으로 보면 통과하는 순간 경광봉이 튀어나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1분부터 타살설에서는 이것이 피흘리는 손을 조작한 것이라 주장하지만, 화질이며 재생퀄리티를 봤을 때 조작된 것이라 보기 어렵다. 이는 타살설을 주장하는 측에서 저화질 캡처가 아닌 '원조' 동영상을 제시하지 못하는 한 근거라고 볼 수 없다. 경광봉은 화면에 매우 갑작스럽게 등장하는데, 만약 원본이 피흘리는 손이었고 그 부분을 경광봉으로 덮어씌운 거라면 손의 움직임과 같아야 할텐데, 죽어가는 사람이 저렇게 날렵하게 손을 내밀 수 없다. 또한 계속해서 손을 내밀고 있는 상태였다면 그 전까지 차체 밖으로 아무것도 나와있지 않은 것으로 조작을 해야 하는데 이건 더 어렵다.
결정적으로, 손이라고 주장하는 사진을 보면 차창 테두리에 기댄 게 아니라 들고 있는 것으로 명확히 확인이 되는데, 의식이 없는 사람에겐 불가능한 일이다. 또한 조금만 생각해보면 기절 혹은 사망한 사람의 팔이 저 각도로 튀어나오게 차 안에 눕히거나 앉히는 게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는 것을 알 수 있다.

2. 공사장의 바람구멍. 이 의혹은 사진각도에 문제가 있다. 사진3의 노란점선은 위 사진1,2의 시선을 표현하고자 한듯 하지만, 바람구멍이 있는 사진은 노란점선의 위치가 아니라 대로변에서 찍은 사진이다. 사진8을 보면 알 수 있듯 철재판넬이 같이 찍히기 위해서는 노란점선의 위치보다 상당히 내려와야 한다. 사진 1,2를 봐도 바람구멍이 모든 칸마다 뚫려있는 게 아니라는 걸 알 수 있고, 길목 막판에 해당하는 사진7에 나오는 구멍들이 사진1,2에 나오는 바람구멍일 가능성이 높다. 이런 기초적인 오류를 범하는 의혹에서, 몇월 몇일날 찍었다는 사진의 날짜가 확실한지도 의심스럽다.

3. 파일명을 가지고 악랄한 트집을 잡고 있다. 날짜를 착각했거나 전날 파일을 덮어서 계속 사용한 등의 일상적인 변수를 모두 제하더라도, 이 의혹은 '내일 노무현 암살'이라는 초S급 기밀이 일개 신문사 디자이너 귀에까지 들어갔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미 상식적으로 말이 안되지만, 하루 전날 로고를 미리 제작해둬야만 할 이유가 아예 없다.
또한 라디오 코리아는 미국에 거주하는 한인들을 위한 뉴스다. 시차발생은 너무도 당연한 것이다. 한국의 23일은 LA에서는 아직 22일인 것이다.설마 22일날 이미 기사로 예언했다고 말하고 싶은 건가 의혹제기자는 이러한 기초적인 사실관계조차 확인하지 않고, 군소언론의 특수성 혹은 실수를 마치 거대한 음모의 완벽한 증거인양 억지를 부리고 있다. 미국 한인언론이 이 경우에만 어떤 대단한 이유로 조선일보와 동급의 네트워크를 갖고 있었다고 말하고 싶은 걸까?

4. 병원 의혹에서 말하는 '1차진술'의 출처가 불분명하다. 5월 23일 당일 오전에 작성된 기사를 봐도 공식 브리핑에서 처음부터 의식불명이었다고 밝힌다. 기사 그리고 무엇보다, 이 의혹이 말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인가. 병원도 처음부터 다 짜고 죽어가는 사람 질긴 목숨을 끊으려 노력했다는 뜻일까? 신문사 디자이너에 이어 병원 간호사까지 공범이 확대되는 셈이다. 이정도 의혹은 그 어떤 것의 근거도 될 수 없다. 고작해야 '이상하다'고 갸우뚱거릴 수준인 것이다.

5. 각목의혹은....각목에 맞았을 때 생기는 상처라서가 아니라 각목에 맞아서 생긴 상처라고 믿고 싶다는 의도가 다분히 느껴진다. 이 세상 모든 11cm 상처는 각목에 의해서만 발생하는 걸까. 당시 의료진은 두개골 골절 등에 대해서도 분명히 언급하고 있다.기사 뒤통수, 이마, 옆머리도 아니고 정수리에 11cm상처를 내려면 각목을 쓰는 게 오히려 부자연스럽다. 한다면 돌로 찍는 게 훨씬 용이하고 나중 상황과 연계하여 조작하기도 쉽지 않았을까?

6. 최하단 경호원을 의심하는 장문은 너무나 주관적인 의도가 드러난 소설이라 반박할 가치는 없다. 하지만 경호원을 1명만 데리고 산에 오른 것은 노무현 본인이고, 그렇게 수상한 경호원 데리고 가면서 길에 난 풀까지 뽑는 여유를 부린다는 건 이해할 수 없다.
그외는 현재 확인하기 어렵거나 정말로 이상하긴 이상한 사안들이라 제외.

6.5. 노무현 대통령이 부른 노래

전 대통령들과 달리 노무현은 공식석상에서 노래를 부르는 모습을 자주 보여준 바 있다. 노래뿐만 아니라 기타를 직접 연주해보이기도 했다.

6.6. 각종 타이틀

  • 최초의 현역 일반병 출신 대통령[57]
  • 최초의 법조인 출신 대통령[58]
  • 최초로 광복 이후(미군정 시기)에 태어난 대통령
  • 최초로 여당을 옮긴 대통령[59]
  • 헌정상 최초로 국회에서 탄핵 소추된 대통령
  • 최초로 퇴임 후 고향으로 귀향한 대통령[60]
  • 최초로 대통령의 시신이 화장된 대통령[61][62]
  • 윤보선 이래로 두번째 처녀자리 대통령
  • 자연사하지 못한 두 명의 대통령 중 한 명[63]
    • 최초로 '전직 대통령'으로서 자연사가 아닌 대통령

7. 다른 정치인과의 사이

7.1. 친노

파일:/news/200909/10/yonhap/20090910171612395.jpg

노무현을 따르는 인사들의 계파를 일컫는 말. 한 때 폐족이라 자칭하며 몰락 위기에 놓이기도 했으나 노무현 사망 이후 세력이 확대되어 현재 한국 정치의 지형을 담당하고 있다. 주로 진보 내지는 개혁세력으로 평가되는 인사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반대파 세력들을 소위 '비노'라고 칭하기도 한다. 노무현 대통령 시절부터 보좌하던 인사들을 지칭하지만 범용적으로 그의 정치신념을 따르는 무리까지 포섭하기도 한다.[64] 일각에서는 이익집단의 성격을 띈 친박 내지는 친이와는 다르게 이념집단의 성격을 띄고 있어 더 오래 간다는 평가도 있다.

주요 인사로는 원조 친노인 문재인, 이광재, 안희정, 이호철, 천호선, 서갑원과 참여정부 시기의 문희상, 김근태, 김두관, 김진표, 유시민, 이해찬, 한명숙 등이 있다. 과거에는 친노였지만 현재는 아닌 인사로는 정동영, 김한길, 천정배 등을 꼽을 수 있다. 대체로 사람사는세상 노무현재단에 이사나 위원으로 자리잡고 있는 사람이 많다.

최근 들어서는 새로운 색채를 띈 문재인친문이나 안희정계 등으로 분화되면서 사용빈도가 줄어들고 있는 편이다. 자세한 내용은 친노 문서를 참고하면 된다.

7.2. 김영삼

https://goo.gl/images/sGUj3G

변호사인 그를 정치인으로 영입한 첫 정치적 스승
그러나 하나의 사건으로 영원한 원수가 되다

5공 시절 내내 인권변호사로써 명성을 얻어온 노무현을 알아본 김영삼은 그를 정치에 입문할 것을 제안했다.[65] 노무현은 김영삼의 제안을 받아들여 1988년 제13대 국회의원 선거 때 부산 동구에 통일민주당 소속으로 출마해 당선되었다.

그러나 1990년, 자신을 정치의 길로 인도했던 김영삼이 노태우 및 김종필과 3당 합당을 선언하자 노무현은 그의 행동을 야합으로 보고 김상현, 김광일, 장석화, 김정길과 함께 합당 발표 직후부터 격렬하게 반발하였고, 끝까지 소신을 지켰다. 또한 당시의 야당에서 김영삼, 김대중의 바로 다음 급이었던 이기택 부총재는 오랜시간 고민하다가 결국 합당 거부로 마음을 정하고 앞의 통일민주당 내의 합당 거부파 의원들과 당시 무소속이었던 이철, 박찬종과 민주당을 창당하였다. 당시 민주당은 소속 국회의원이 이기택, 김광일, 장석화, 노무현, 김정길, 이철, 박찬종, 허탁 딱 8명에 불과했기에 언론에선 속칭 꼬마민주당이라고 불렀다.

이에 대해 김영삼도 심기가 불편해졌는지, 훗날 노무현이 대통령 후보로 출마하자 불편한 속내를 내보이기도 했고, "노무현은 내가 픽업했죠. 의리가 없어요. 평가 가치 없습니다"와 같은 악평을 상당수 남기기도 했다. 노무현은 이를 맞받아쳐 김영삼에 대해서 "87년 때까지는 DJ와 함께 훌륭한 분이었으나 3당 합당 이후 (기존 기득권 세력의) 인의 장벽을 넘어서지 못했다"는 아쉬운 심정을 밝혔다.

이후 2000년대 들어 노무현이 민주당 대선 후보로 선출되면서 김영삼을 예방하고 서로 덕담을 나누는 등 사이가 다시 복원되는 듯했으나, 이때 예전에 김영삼으로부터 선물 받은 시계를 내보이며 '이 시계만 보면 지금도 총재님 생각이 난다'는 등 옛 정을 언급했다가 호남 지지층으로부터 역풍이 불고 지지율이 떨어지자, 김영삼 전 대통령을 예방한 것 때문에 지지율이 떨어진 것 같냐는 기자들의 질문에 그런 점도 있는 것 같다고 대답해 이를 듣고 화가 난 김영삼과 사이가 다시 틀어졌다고 한다. 이때는 예전에 3당 합당 건에 대해서도 서로의 갈등도 풀고,[66] 서로를 더 존중할 걸 그랬다라는 말까지 오고 갔었다. 김영삼과 노무현은 역대 대통령들 중에서 직설적인 화법으로 유명했지만 이것이 한동안 서로에게 철벽을 치게 만든 원인이 되었다.

그러다가 2009년에 노무현이 먼저 세상을 떠나자 김영삼은 아직 앙심이 남아 있었는지, "노무현의 장례식을 국민장으로 치른 것은 이명박이 실수한 것이었다. 가족장으로도 충분했다"고 말했다. 잡지에 따르면, 김영삼은 이어 "내가 발탁해서 국회의원이 되었으니 그는 내게 빚이 있는데, 이렇게 돼 버려서 조금 실망했다"며 "나도 전직 대통령으로서 장례식에 참석했지만, 헌화할 꽃만 그냥 던져버리고 왔다"고 한다. 이에 대해서 김영삼의 비서실장인 김기수는 김영삼의 '가족장' 발언에 대해 "한국과 일본 모두 자살률이 높다는 기사가 나온 시점에서 각하는 '국가 지도자가 자살하면 후세를 위한 교육에 안 좋다'는 취지의 얘기를 먼저 했는데, 문맥이 거두절미되고 엉뚱한 얘기가 기사로 나간 것 같다"고 전했다며 해명했다.

7.3. 김대중

http://archives.knowhow.or.kr/m/record/all/view/7139?page=45

민주당계 정당의 쌍벽 중 하나

DJ와 노무현의 만남은 YS가 노무현을 만났을 때 즈음이었는데, 5공 청문회에서의 강직하고 논리적으로 전두환과 재벌들에게 질문하는 것을 보고는 노무현을 우연히 국회 본청의 의원 식당에서 만난 DJ가 나에게 악수를 청하면서 건넨 말이 "잘했어요. 잘했어요."였다고 한다. 이때까지만 해도 김대중과 접점이 없던 노무현이 처음으로 대면했던 것이었다.

1990년에 일어난 3당 합당에 반대하여 민주당을 창당해 나왔던 노무현은 YS를 비판하며 뛰쳐나와 DJ 밑으로 후에 들어가긴 하나, 호남 기반의 세력들이 차지한 새천년민주당에서도 비주류였고, 정말로 김영삼이 하나회를 쫓아내고 전두환과 노태우를 구속시키면서 호랑이굴에서 호랑이를 잡겠다는 김영삼의 약속이 이루어지자, 당시에 YS를 비판했던 노무현은 입장이 난처해지며 YS와 DJ 세력 양쪽에서 배신자 소리를 들으며 찬밥 신세를 겪게된다. 노무현이 대선 후보로 떠오른 것도, 김대중 정권이 본인+ 세 아들들의 비리 및 국정원을 이용한 도청 등의 스캔들로 김대중 대통령의 지지율이 떨어지며, 동교동계가 호남을 제외하고 지지율을 잃을 때, 2002년 대선에서 민주당이 정권 유지를 할 수 있는 그나마 유일한 카드로 판별났었기 때문이었다. 경남 기반 YS 밑에 있었기에 호남 기반 DJ세력에게서 외면받으며 찬밥 자리였던 영남의 민주당 후보로 끊임없이 도전하다 바보 타이틀을 얻었던 것이 큰 이유였다.

2003년 노무현의 대통령 취임 이후 대북송금 사건이 터지자, 노무현은 한나라당의 특검 요구를 들어주게 되고 DJ는 병을 이유로 병원에 입원하는 것으로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으며, 측근들을 통해서 화병이 난 것이라는 이야기가 나올 정도로 양 측의 관계는 한순간에 냉랭해졌다. 노무현이 특검을 수용함으로써 친DJ세력, 즉 호남 세력과 친노 세력의 분열의 씨앗이 생겼고, 이것이 훗날 무소속이 된 천정배가 2015년 상반기 재보궐선거에서 국회의원에 당선된 뒤 호남형 신당을 창당하겠다고 선언한 뒤 호남인들이 "친노와 화합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하다"라고 주장하는 근거가 되었다. 이후 특검 연장을 거부하면서 둘 사이의 앙금은 일단락되었다.

2008년 노무현이 퇴임하고, 이듬해 과도한 검찰 수사로 인해 자살하자 김대중은 내 몸의 반이 무너진 것 같다.라며 안타까움을 드러냈다. 심지어 장례식 때 자신이 직접 쓴 추도사를 낭독하려 했다. 정치적으로는 가깝고도 먼 사이였지만, 사적으로 노무현을 얼마나 아꼈는지 알 수 있는 대목. 끝내 건강이 급격히 악화되어 3개월 뒤 사망하였다.

7.4. 이명박

https://goo.gl/images/xWoqKV


노무현과 이명박의 만남은 1996년 제15대 국회의원 선거 때 종로에서 맞붙은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이 선거에서 이명박이 간신히 이겼지만, 이후 선거법 위반으로 의원직을 상실해 실시된 재보궐선거에서 노무현이 당선된다. 그 후 노 전 대통령은 당시를 회상하며 내가 대통령이 되는 것도, 그가 그 다음 대통령이 되는 것도 당시에는 상상하지도 못했다.라고 말했다.

이명박의 기사회생은 국민의 정부에서 이뤄졌다. 김대중(DJ) 전 대통령이 2000년 8·15 광복절 대사면을 단행하면서 MB의 피선거권이 회복된 이후 2002년 제16대 대선 직전 치러진 제3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서울시장에 당선됐다. 청계천 복원사업과 버스노선 개편을 단행한 것도 이 재임 시기다. 같은 해 대선에서는 노란풍선 열풍을 일으킨 노 전 대통령이 민주 정부 2기 시대를 열었다. 종로에서 맞붙었던 경쟁자가 대통령과 서울시장으로 만난 셈이다. 이들은 이때부터 굵직굵직한 현안을 놓고 사사건건 부딪쳤다.

대표적인 게 행정수도 이전이다. 이는 노 전 대통령 핵심 공약이었다. 노 전 대통령 스스로 충청권으로의 수도 이전과 관련, “행정수도로 재미 좀 봤다”고 했다. MB는 행정수도 이전 반대 최전선에 섰다. MB는 당시 노무현 정부를 “잠시 왔다가는 5년 임기의 정권”이라고 폄훼한 뒤 “수도 이전 문제를 정치적으로 해결하려고 하는 것은 너무나 위험한 일”이라고 국민투표를 주장했다. 헌법재판소는 2004년 10월 ‘신행정 수도의 건설을 위한 특별 조치법’의 위헌확인 심판 소송에서 ‘관습 헌법’ 논리를 들면서 국민투표 없는 행정수도 이전은 위헌으로 판결했다. 

부동산 가격 폭등을 비롯해 경제 문제를 놓고도 대립했다. 참여정부 시절 ‘버블세븐’(서울 강남·서초·송파·목동, 경기 분당·용인·평촌)을 중심으로 집값이 폭등하자 MB는 참여정부 경제정책에 대해 “서민경제가 죽어가고 있다”고 강하게 비판하면서 강북 뉴타운을 내걸고 표심 잡기에 들어갔다. 김태년 더불어민주당 정책위의장이 최근 “노무현 정부의 부동산 정책 실패는 MB 때문”이라고 한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

보수진영의 ‘세금 폭탄론’에 휘청거린 노 전 대통령은 진보진영으로부터 부동산 원가공개 등의 요구를 받았지만 “권력은 시장으로 넘어갔다”고 일축, 양측으로부터 뭇매를 맞았다. 임기 막판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체결 논란까지 덮치면서 노 전 대통령은 민주진보 10년 권력을 MB에게 내줬다. MB는 2007년 대선에서 48.7%의 득표율을 기록, 26.1%에 그친 정동영 대통합민주신당 후보를 크게 앞섰다.

노 전 대통령과 MB의 관계가 앙숙관계로 치달은 것도 이때부터다. 2008년 퇴임 후 KTX를 타고 봉하마을로 내려간 노 전 대통령은 한때 친환경 벼농사 농법 전도사를 자처했지만, 2009년 박연차 게이트로 직격탄을 맞았다.

노 전 대통령은 자서전 <운명이다>에서 “그(MB)는 취임하자마자 임기가 남은 공공기관, 공기업 기관장들을 몰아냈다. 마침내 나를 겨냥한 공격을 시작했다”고 주장했다. 문 대통령도 자서전 <운명>에서 “정치보복의 시작은 참여정부 사람들에 대한 치졸한 뒷조사였다”며 “노 전 대통령은 나와 친분 있는 많이 기업이, 심지어 내가 자주 가던 식당도 세무조사를 당했다”고 말했다.

당시 정치권 안팎에선 MB가 노 전 대통령과 가까운 ‘우리들병원’, ‘토속촌’, ‘제피로스’ 등에 대해 전방위적인 세무조사를 벌였지만, 별다른 의혹이 나오지 않자 ‘태광실업’으로 방향을 틀었다는 말이 파다했다. 여권 내부에서 ‘박연차 게이트’를 놓고 표적 세무조사라는 비판이 나오는 이유다.

결국 노 전 대통령은 그러한 압박을 이기지 못하고 2009년 5월 23일 “너무 슬퍼하지 마라. 삶과 죽음이 모두 자연의 한 조각 아니겠는가. 미안해하지 마라. 누구도 원망하지 마라. 운명이다”라는 말을 남기고 사망했다. MB의 친노 궤멸은 노 전 대통령 서거 이후에도 계속됐다. 국가정보원의 ‘논두렁 시계’나 ‘문성근 합성사진’과 군 사이버사령부의 정치개입 등으로 친노에 타격을 가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후예이자 친구인 문재인이 제19대 대통령에당선되고 점점 자신의 입지가 위태로워지더니, 2018년 들어 검찰의 칼끝이 MB 턱 밑까지 왔으며, 3월 14일에 검찰 출석을 하고 급기야 23일에는 구속되었다. 9년만에 서로의 상황이 뒤바뀐 것.

7.5. 박근혜

참여정부 5년 내내 노무현을 괴롭힌 철천지원수 그 자체
그러나 10년 뒤, 서로의 입지가 완벽히 뒤집어졌다.

7.6. 문재인

노무현의 후계자이자 인생의 희로애락을 함께한 영원한 친구

7.7. 유시민

친노의 적통이자, 참여계의 수장

8. 어록

"민주주의 최후의 보루는 깨어 있는 시민의 조직된 힘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미래입니다."
ㅡ2007.6.16 노사모 총회 축하 메시지
"대통령을 욕하는 것은, 민주 사회에서 주권을 가진 시민의 당연한 권리입니다. 대통령을 욕함으로써 주권자가 스트레스를 해소할 수 있다면, 저는 기쁜 마음으로 들을 수 있습니다."
- 재임 중 자신에게 대한 악성 댓글에 대해 남긴 말(시사저널 링크)
"사람은 소통하며 살아야 한다. 지배하는 사람도 있고, 지배 받는 사람도 있는데, 내 희망은 이 차이가 작기 바란다. 지배하는 사람과 지배 받는 사람 사이에 가장 큰 단절은 소통이 안되는 것이다. 권력을 가진 자와 국민이 소통해야 한다."
ㅡ2006.8.28 경복궁 신무문 개방행사 中
국민 여러분! 독도는 우리 땅입니다. 그냥 우리 땅이 아니라 40년 통한의 역사가 뚜렷하게 새겨져 있는 역사의 땅 입니다. (중략) 독도를 분쟁 지역화하려는 일본의 의도를 우려하는 경해가 없지는 않으나,우리에게 독도는 단순히 조그만 섬에 대한 영유권의 문제가 아니라, 일본과의 관계에서 잘못 된 역사의 청산과 완전한 주권 확립을 상징하는 문제입니다. 공개적으로 당당하게 대처해 나가야 할 일입니다. 독도 문제를 일본의 역사 교과서 왜곡,야스쿠니신사 참배 문제와 더불어 한일 양국의 과거사 청산과 역사의식, 자주 독립의 역사와 주권 수호 차원에서 다루어야 합니다.
ㅡ2006.4.25 한일관계에 관한 특별담화문
자랑스러운 역사든 부끄러운 역사든, 역사는 있는 그대로 밝히고 정리해 나가야 합니다. 특히 국가권력에 의해 저질러진 잘못은 반드시 정리하고 넘어가야 합니다. 또한 용서와 화해를 말하기 전에 억울하게 고통 받은 분들의 상처를 치유하고 명예를 회복해 주어야 합니다. 이것은 국가가 해야 할 최소한의 도리이자 의무입니다.
ㅡ2006.4.3 제주 4.3사건 희생자 위령제 추도사
국민들과 눈높이를 맞추는 지도자가 되겠습니다. 경호원 한두 명과 남대문 시장에, 자갈치 시장에, 동성로에, 금남로에, 은행동 거리에 모습을 나타내는 대통령, 거기서 마주친 시민들과 소주 한 잔을 기울일 수 있는 대통령, 그런 친구 같은 대통령이 되겠습니다.
ㅡ2002.4.27 새천년민주당 대통령 후보 수락 연설문
“음모론, 색깔론 그리고 근거 없는 모략 이제 중단해 주십시오. 한나라당과 조선일보가 합창해서 입을 맞추어서 저를 헐뜯는 것을 방어하기도 참 힘이 듭니다. 제 장인은 좌익 활동을 하다 돌아가셨습니다. 그러나 해방되는 해에 실명을 하셔서 앞을 보지 못했기 때문에 무슨 일을 얼마나 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제가 결혼하기 훨씬 전에 돌아가셨는데, 저는 이 사실을 알고 아내와 결혼했습니다. 그리고 아이들 잘 키우고 지금까지 서로 사랑하면서 잘 살고 있습니다. 뭐가 잘못됐습니까? 이런 아내를 제가 버려야 합니까? 그렇게 하면 대통령 자격 있고, 이 아내를 그대로 사랑하면 대통령 자격이 없다는 것입니까? 여러분, 이 자리에서 여러분들께서 심판해주십시오. 여러분이 그런 아내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대통령 자격이 없다고 판단하신다면 저 대통령 후보 그만두겠습니다. 여러분이 하라고 하면 열심히 하겠습니다.” "언론 국유화, 과거에도 생각해본 일 없고, 앞으로도 그럴 생각 없습니다. 어느 언론사를 대통령이 폐간할 수 없습니다. 그런 생각 해본 일이 없습니다. 대통령이라도 할 수 있는 일이 있고, 할 수 없는 일이 있습니다. 국유화, 폐간, 어떤 대통령도 할 수 없는 일인데 감히 제가 어떻게 그런 말을 한다는 것입니까? 이치에 닿지 않는 말을 가지고 사람을 이렇게 모략해선 안됩니다. 조선일보와 동아일보가 제게 언론사 소유지분 제한의 견해를 포기하라고 압력을 가해왔지만, 저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굽히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모략을 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언론을 권력으로서 어떻게 흔들 생각도 없지만, 그러나, 언론에게 고개를 숙이고 비굴하게 굴복하는 정치인은 되지 않겠습니다. 끝까지 맞서 싸울 것입니다. 도와주십시오! 제게 힘을 주십시오! 동아일보와 조선일보는 민주당 경선에서 손을 떼십시오.[67]"
ㅡ2002.4.6 새천년민주당 인천지역 국민경선 연설문
조선 건국 이래로 600년 동안 우리는 권력에 맞서서 권력을 한 번도 바꾸어 보지 못했다. 비록 그것이 정의라 할지라도 비록 그것이 진리라 할지라도 권력이 싫어하는 말을 했던 사람은 또는 진리를 내세워서 권력에 저항했던 사람들은 전부 죽임을 당했다. 그 자손들까지 멸문지화를 당했다. 패가망신했다. 600년 동안 한국에서 부귀영화를 누리고자 하는 사람은 모두 권력에 줄을 서서 손바닥을 비비고 머리를 조아려야 했다. 그저 밥이나 먹고살고 싶으면 세상에서 어떤 부정이 저질러져도 어떤 불의가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어도 강자가 부당하게 약자를 짓밟고 있어도 모른 척하고 고개 숙이고 외면했어야 됐어요. 눈 감고 귀를 막고 비굴한 삶을 사는 사람만이 목숨을 부지하면서 밥이라도 먹고 살 수 있었던 우리 600년의 역사! 제 어머니가 제게 남겨 주었던 제 가훈은 "야 이 놈아. 모난 돌이 정 맞는다. 계란으로 바위치기다. 바람 부는 대로 물결치는 대로 눈치 보며 살아라." 80년대, 시위하다가 감옥 간 우리의... 정의롭고 혈기 넘치는 우리 젊은 아이들에게 그 어머니들이 간곡히 간곡히 타일렀던 그들의 가훈 역시 "야 이 놈아. 계란으로 바위치기다. 고만 둬라. 너는 뒤로 빠져라." 이 비겁한 교훈을 가르쳐야 했던 우리 600년의 역사, 이 역사를 청산해야 합니다. 권력에 맞서서 당당하게 권력을 한 번 쟁취하는 우리의 역사가 이루어져야만이 이제 비로소 우리의 젊은이들이 떳떳하게 정의를 얘기할 수 있고 떳떳하게 불의에 맞설 수 있는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 낼 수 있다!
ㅡ2001.12.10 제16대 대통령 민주당후보 국민경선 출마 연설문(#)
"광주에서 콩이면 부산에서도 콩이고, 대구에서도 콩인 옳고 그름을 중심으로 해서 인물과 정책을 중심으로 해서 그렇게 정치를 해나갈 수 있는, 그래서 국민들에게 봉사할 수 있는 새로운 정치를 열겠다."
ㅡ2000.4.1 16대 총선 거리유세 中
"결코 굽히지 않는, 결코 굴복하지 않는, 결코 타협하지 않는 살아있는 영혼이! 깨끗한 영혼을 가지고, 이 정치판에서 살아남는 증거를 여러분들에게 보여줌으로 해서, 우리 아이들에게 결코 불의와 타협하지 않아도 성공할 수 있다는 하나의 증거를 꼭 남기고 싶었습니다."
1995년 부산시장 선거 연설 中
제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사회는 더불어 사는 사람 모두가 먹는 것 입는 것 이런 걱정 좀 안하고 더럽고 아니꼬운 꼬라지 좀 안보고 그래서 하루하루가 좀 신명나게 이어지는 그런 세상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만일 이런 세상이 좀 지나친 욕심이라면 적어도 살기가 힘이 들어서 아니면 분하고 서러워서 스스로 목숨을 끊는 그런 일은 좀 없는 세상 이런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옛날에는 생활고로 일가족이 집단 자살하는 일이 많이 있었습니다. 지금은 그런 일은 거의 없는 것 같은데 그런데도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람은 늘어만 갑니다. (중략) 월남전 생각이 납니다. 월남전에 대해서 온 세계가 비난을 하고 있었을 때 정부는 슬그머니 여론을 이렇게 조성했습니다. 월남전에 참여해서 벌어온 돈으로 우리 경제가 발전되었노라고. 이렇게 사람을 속이려 했습니다. 이런 발상이야 말로 돈이면 무슨 짓이든 다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내 나라 백성 몇만 명 죽일 수 있다는 끔찍한 발상입니다. 저는 이렇게 묻겠습니다. 그런 발상을 가진 사람들에게 파이를 크게 해야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니네들 자식 데려다가 죽이란 말이야! 춥고 배고프고 힘없는 노동자들 말고, 바로 당신들 자식 데려다가 현장에서 죽이면서 이 나라 경제를 발전시킵시다!
ㅡ1988.7.8 제 142회 임시국회 첫 대정부질의 中
"대통령이 다 모든 것을 다 양보하고 할 수도 없고, 그래서 이렿게 하다가는 대통령직을 못해먹겠다는 생각이, 그 위기감이 생깁니다."
ㅡ 2003년 5월 21일 5.18 행사추진위 간부 접견 中 영상[68]

9. 저서

  • <노무현이 만난 링컨>, 학고재, 2001년 11월 30일 #
  • <노무현: 상식, 혹은 희망>, 행복한책읽기, 2002년 3월 5일, #
  • <여보, 나좀 도와줘>, 새터, 2002년 4월 17일 #, #개정판
  • <노무현의 리더십 이야기: 행정가와 CEO를 위한 리더십의 8가지 원리>, 행복한책읽기, 2002년 10월 15일 #, #개정판
  • 공저, <마음 먹었을 때 시작해라>, 고시계사, 2007년 6월 1일, #
  • <진보의 미래>, 동녘, 2009년 11월 27일 #, #개정판
  • <성공과 좌절: 노무현 대통령 못 다 쓴 회고록>, 학고재, 2009년 9월 22일 #
  • 노무현재단 엮음, 유시민 정리, <운명이다: 노무현 자서전>, 돌베개, 2010년 4월 26일 #
  • 공저, 김경수 엮음, <봉하일기: 그곳에 가면 노무현이 있다>, 부키, 2012년 1월 12일 #

10. 가족 관계

가계도
  • 아버지: 노판석 (1900년 ~ 1976년)
  • 어머니: 이순례 (1914년 ~ 1998년)
    • 누나: 노명자 (1928년 ~ 2013년)
    • 큰형: 노영현 (? ~ 1973년)[69][70]
    • 누나: 노영옥 (1938년 ~ )
    • 작은형: 노건평 (1942년 ~ )
  • 배우자: 권양숙 (1948년 ~ )
    • 아들: 노건호 (1973년 ~ )
    • 며느리: 배정민 (1976년 ~ )
    • 딸: 노정연 (1975년 ~ )
    • 사위: 곽상언 (1971년 ~ )

11. 선거 이력

연도 선거 종류 소속 정당 득표수 (득표율) 당선 여부 비고
1988 제13대 국회의원 선거 (부산 동) 통일민주당 53,075 (50.6%) 당선 (1위) 초선
1992 제14대 국회의원 선거 (부산 동) 민주당 30,397 (32.3%) 낙선 (2위)
1995 제1회 전국동시지방선거 (부산광역시장) 통합민주당 647,297 (37.6%) 낙선 (2위)
1996 제15대 국회의원 선거 (서울 종로) 통합민주당 17,330 (17.7%) 낙선 (3위)
1998 7월 재보궐선거 (서울 종로 국회의원) 새정치국민회의 26,251 (54.4%) 당선 (1위) 재선 [71]
2000 제16대 국회의원 선거 (부산 북·강서 을) 새천년민주당 27,136 (35.7%) 낙선 (2위)
2002 제16대 대통령 선거 새천년민주당 12,014,277 (48.9%) 당선 (1위)
파일:external/upload2.inven.co.kr/i14480414813.jpg 파일:external/upload2.inven.co.kr/i14415736454.jpg 파일:external/upload2.inven.co.kr/i14449839162.jpg
제13대 국회의원 선거 제14대 국회의원 선거 제1회 전국동시지방선거
파일:external/upload2.inven.co.kr/i14484896764.jpg 파일:external/upload2.inven.co.kr/i14418220471.jpg 파일:external/upload2.inven.co.kr/i14451290748.jpg[72]
제15대 국회의원 선거 1998년 7월 재보궐선거 제16대 국회의원 선거
파일:external/monthly.chosun.com/1604_098_7.jpg
제16대 대통령 선거

12. 대중 매체에서

파일:노무현변호인.jpg파일:노무현변호인2.jpg
송강호가 연기한 노무현 (영화 변호인)
2013년 그의 부림사건 시절 활약상을 모티브로 제작된 영화인 변호인이 개봉되었다. 송우석(노무현 모티브 캐릭터) 역할은 송강호가 연기했으며, 1000만 관객이라는 흥행을 모으기도 했다.[73] 임시완이 연기한 진우는 부림사건 당시 고문받은 피해자 고모씨와 송모씨의 일화를 합쳐서 만든 캐릭터라고 한다.

광해, 왕이 된 남자의 몇몇 장면은 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한 오마주라고 작가가 밝힌 바 있다.(참조)

이후 두 영화는 노무현을 연상케 한다는 공공연한 이유로 박근혜정부 하에서 여러 불이익(블랙리스트에 포함되어 상영관 축소)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자세한 내용은 각 영화 문서 내용을 참고할 것.

격동 50년에서는 최석필이상훈이 맡았다.[74]

2016년 무현, 두 도시 이야기의 주인공이 되었다.

2016년 더 킹에서 노무현 전 대통령의 당선과 죽음은 영화의 전환점으로 작용하였으며 감독은 이 영화를 "노무현 전 대통령에게 바치는 헌사"#라고 인터뷰에서 밝힌 바 있다.

2017년 노무현입니다의 주인공이 되었다.

2017년 오디오 드라마 그 사람 노무현에선 성우 홍진욱이 노무현 역을 맡아 연기하였다.

13. 관련 문서

'참여정부'가 아닌, '노무현' 개인과 관련된 문서만 추가할 것.

13.1. 사건

13.2. 발언

13.3. 기타


[1] 전임자 이명박 자진사퇴[2] 현 경상남도 김해시 진영읍 봉하로 129[3] 생전 거주지. 종로구 국회의원 출마를 위해 이사온 집이다. 1997년부터 취임 전까지 이곳에서 살았다. 당선 후 청와대로 가면서 "꼭 6년 전 이사와 15대 보선에서 국회의원에 당선되고 짧은 해양수산부 장관을 거쳐 마침내 대통령이 됐다"라며 소회를 밝혔다고. 정확한 주소는 서울특별시 종로구 혜화로9길 24 현대하이츠빌라 302호. 해당 집은 전직 중소기업인에게 팔렸다고 한다.[4] 생전 거주지. 퇴임 후 이곳에서 지냈다. 정확한 주소는 경상남도 김해시 진영읍 봉하로 135. 출생지 건너편이다.[5] 노무현 그가 살아온 모든 일생의 일수가 총 22911일.[77][6] 국가보존묘지 제1호로 지정되었다.[7] 2004헌나1에 의한 직무 정지 기간: 2004년 3월 12일 ~ 2004년 5월 14일[8] 본관의 현재 위치는 광주광역시 광산구.[9] 1900년생. 1976년 타계.[10] 1914년생. 1998년 타계. 아들이 정치인 되는 것은 보았지만, 대통령이 되는 것은 보지 못 하고 타계했다.[11] 노명자(이복누나), 김선밀(이부누나), 노영현, 노영옥, 노건평(친형제)[12] 공식적으로 무종교이나, 종교 이력이 다소 특이하다. 사시를 공부하던 시절에는 집 근처의 절에서 주로 공부했다고 전해지며, 불경도 틈틈이 외웠다고 한다. 이후 변호사 시절에 정신적 지주라고 불리는 송기인 신부와의 인연으로 당시 송기인 신부가 주임신부로 시무하였던 부산 당감성당에서 세례를 받았으며 '유스토'라는 세례명을 받았다고 한다. 그러나 일정 때문인지 신앙생활은커녕 성당에 몇 번 가지도 못했다고 전해진다. 이후 대통령 시절에는 종교적 정체성을 드러내지 않은 채 프로필에도 '무교'라 적혔지만, 불심이 깊은 영부인을 따라 해인사를 방문하는 등 불교적인 활동을 몇 번 한 적은 있었다. 참고로 사망하기 직전 근처에 있던 사시를 공부했던 사찰에서 위패에 예를 표하기도 했으며 장례식 때 해인사의 스님들이 조문을 오기도 했다.[13] 처음에는 인근 김해병원, 두 번째는 양산부산대학교병원으로[14] 학교에서 주선해준 회사로, 어망을 만드는 회사였다고 한다. 한달 반만에 퇴사한다. 이후 막노동을 하며 돈을 모아 고시공부를 시작한다.[15] 원래 1군사령부 부관부에서 행정병으로 복무하다가 전방 차출을 자원했다고 한다. 당시에는 파월장병들 위주로 진급시켜주는 바람에 상대적으로 한국에서 복무 중이던 장병들은 병장을 못 달고 제대한 경우가 많았다고.[16] 두 사람의 합동법률사무소 내에 무료로 상담해주는 노동법률상담소도 있었다. 결국, 이 법률사무소는 대통령을 2명이나 배출하게 되었다.[17] 이른바 5공 청문회 활동이다.[18] 안희정이 연구소의 사무국장을 맡았다.[19] 국회의원 임기 만료 후 할 일이 없자, 천정배에 의해 스카웃 된 것으로 보인다. 당시 같이 일한 사람이 천정배, 전해철, 임종인이었다. 1998년까지 근무.[20] 보궐선거로 당선되었다. 전임자는 바로 이명박(이명박은 자진사퇴)이다.[21] 과거 자신이 일하던 법률사무소로 복귀한 셈이다.[22] 퇴임 후 첫 직함으로, 낙동강 개선을 위한 지역 환경 단체의 고문직을 맡았다.[23] 글을 새기는 돌을 모집한다고 응모글을 올리자마자 마감될 만큼 반응은 폭발적이었다고 한다.(출처, 사진 블로그 출처)[24] 노무현 전 대통령이 결혼하고 나서 아내에게 가정폭력을 저질렀다는 내용도 있다. 그 외에도 길가던 아주머니들한테 음담패설을 하거나 노상방뇨를 했다는 등 문제가 많은 책이다. 물론 나중에는 반성한다는 내용도 있긴 하다.[25] 당시 사법시험 합격자 수는 60여명이었고, 심지어 노무현 전 대통령이 변호사로 개업했을 때 부산의 변호사 수가 3명에 불과했다. 독학으로 사법시험을 패스한 경우는 몇 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라고 한다.[26] 이후 사법시험 합격자가 300명, 700명, 그리고 1000명으로 늘어난 이후에도 고졸 출신 합격자가 나오는 일은 흔치 않았다는 점을 생각하면, 고작 60명을 선발하던 시절에 고졸/상고 출신이 합격했다는 것은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27] 김민석 전 국회의원의 전 부인[28] "스머프 무슨 그 만화, 애니메이션에 나오는 뭐..."[29] 2007년 제17대 대통령 선거이 이뤄졌을 당시의 발언이다. 워낙 당시에 원더걸스가 절대적인 존재였으므로 이명박, 정동영, 이회창 같은 다른 대선 후보들도 같은 대답으로 일관했다.(...)[30] 유시민:권 여사께서 담배 갖고 지청구를 많이 주셨다. 저녁에 우리가 관저에 들어 갈 때면 우리와 어울려서 담배를 피우곤 하셨다. 그러면 권 여사께서 말을 못하니까. 어느 한 날은 우리도 지청구를 들었다. 대통령이 담배를 많이 피우게 만든다고 말이다. 그러다가 권 여사가 나가시면 또 담배를 피우곤 했다.[31] 노무현입니다에 따르면 5.18 관련 기록집을 본 이후에 노무현의 감시역으로서의 임무에 회의를 느꼈고, 그걸 당시 변호사였던 노무현에게 털어놓자 감시자가 그래서야 일할 수 있겠느냐고 말해주었다고 한다. 사망하기 얼마 전에도 이화춘이는 요즘 왜 안 오나 하면서 찾기도 했다고.[32] 이는 부끄러운 줄 알아야지 연설문에서 군대 다녀온 뒤 예비군 훈련까지 다 받았다고 언급된다.[33] 거의 공범 수준으로 변호했으며 피해자 가족들이 변호사가 저렇게 싸우듯이 변호해도 되나하고 우려할 정도였다고 한다.[34] 물론 2009년의 김대중 역시 3개월 뒤의 노무현 다음으로 사망한 대통령이었다지만 부자연사가 아닌 노환으로 인하여 그 일생을 다하게 된다.[35] 반면 노사모에 비해 정치적 성격이 옅은 노무현 재단의 회원들이 증가하였다.[36] 심지어 대통령이 되기 전에는 같은 당 내에서도 색깔론 공격을 받았다. 즉 16대 대선 후보 선출을 위한 새천년민주당 경선에서 경쟁자 진영에서는 노무현 당시 후보의 장인의 이력을 들어 색깔론 공세를 펼치기도 했었다.[37] 가난한 고학생 출신이었던 이명박과 비교되는 이야기다. 그리고 한국의 정치인들이 싫어하는 사람은 그들의 이익에 해가 되는 사람이 대부분이다.[38] 영남은 당시 노무현 대통령의 터전이었던 부산에서조차 한나라당의 영향력이 막강했고, 호남도 전남권은 전부 동교동계의 세력 안으로 들어가, 열린우리당의 텃밭이라 불릴 지역은 전북밖에 없었기도 하다.[39] 특히 김영삼과 이명박의 경우 지지율이 호남을 제외한 전국에서 거의 압도적이다시피 했다.[40] 다른 얘기지만, 삼성공화국이라고까지 불렸던 참여정부 말기 삼성X파일 특검법에 대해서는 청와대에서 거부권을 행사하겠다고 했던 적이 있는데, 이것때문에 비판하는 사람들도 많다.[41] 열린우리당은 한나라당의 탈당파와 민주당 탈당파를 포함해 2003년 11월 11일 창당하였다. 열린우리당은 당대표나 당총재라는 이름 대신 의장이라는 명칭을 사용했는데, 열린우리당의 초대 의장은 정동영 의원이었으며, 김근태 의원이 원내대표를 맡았다.[42] 이 시기를 탄핵 정국이라고 하며, 여론은 기존 정당에 대한 비토로 들끓었으며 4월 총선에서 신규 정당인 열린우리당이 압승하는 결과를 불러왔다.(출처)[43] 실제로 동교동계에서는 현재도 노무현에게 전혀 우호적이지 않거나 적대적인 인물의 경우도 수가 상당하다. 그 결과, 보수정당-동교동계 비노가 연합해서 노무현 탄핵 소추를 가결시키는 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또한 그 구 동교동계 비노 성향의 인물들은 상당수가 더불어민주당이 아닌 국민의당으로 김한길, 안철수와 같이 당적을 옮겼다.[44] 당시 진보 언론지인 한겨레 21에서 사설로 노무현의 대연정론을 정면으로 비판했을 정도였다.[45] 당시 열린우리당은 한나라당 계열과 민주당 계열 간의 관계가 첨예하게 대립하고 정책 방향이 모호할 뿐더러 참여 정부의 거수기 역할만 했다는 평이 높았다. 출처[46] 실제로 이명박 대통령 취임 직후 실시된 제1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친박연대와 자유선진당을 제외한 한나라당은 150석을 가볍게 획득했으며, 그 당선자 중 친이계-범친이계 정치인만 무려 국회의원 전체 의석의 45%에 달할 정도로 당시 이명박 前 대통령의 지지율은 엄청났다.[47] 엄밀히 말하면 당시에는 여당이 없었다. 노무현이 열린우리당에서 탈퇴했기 때문이다.[48] 원래 여당 후보가 임기 말에 지지율이 지리멸렬해지는 현직 대통령과 거리를 두는 건 한국 정치의 전통이다.이건 어느 나라 정치나 마찬가지이다. 부시가 임기 말년에 공화당 대선 후보들로부터 받은 푸대접은 눈물이 날 정도이다. 오바마가 힐러리와 자주 같이 다니는 건 그의 인기가 높아서이지 미국 정치가 선진적이어서가 아니다.전두환은 노태우에게, 노태우는 김영삼에게 팽당했고, 김영삼과 김대중, 노무현은 임기 말에 스스로 만든 당에서 쫓겨났다. 민주화 이후 당적을 유지한 채 임기를 마친 최초 대통령이 후임인 이명박이다.[49] 사실 정동영도 노무현 정권의 일등 공신으로서 중반까지는 사이가 무척 가까웠고, 노무현은 정동영을 장관으로 임명시키며 대권 주자로 밀어주려는 움직임도 보였다. 하지만, 국정 운영 방침을 두고 둘 사이는 점점 멀어졌고, 정동영도 노무현과 선을 긋는 방식으로 조금이나마 지지를 얻게 될 정도였다. 현재도 친노가 아닌, 소위 비노로 분류되며 민주평화당 소속 국회의원이다.[50] 정권교체를 이룬 김대중 정부 당시까지만 하더라도 공공장소에서 말 한마디 잘못하면 큰 곤욕을 치루기 일쑤였다. 그 이전은 말할 것도 없다.[51] 국정원 독대를 받지 않았고, 검찰 권력을 휘두르려 하지 않았다.[52] 당시 노무현 대통령 공격에 앞장섰던 이상돈 교수는 저 정도면 잘못하면 사람이 죽고 임기를 마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훗날 회고하였다. 이후 이상돈 교수는 박근혜 대통령 후보 비대위로 활동하며 이명박 정부 심판을 말하였다.[53] 하지만 뉴스에서 언급되는 '사이버모욕죄'라는 것은 본래 '최진실법'이라는 이름으로 추진된 법으로 2008년, 즉 노무현 대통령의 임기가 끝난 후에 적용된 것으로 "단지 대통령을 욕했기에 체포되었다"며 편향적으로 바라보기는 힘들다. "대통령을 욕했다"는 것보다, "특정 인물을 모욕했다"는 이유로 경찰서에 소환된 셈이다.(참고1, 참고2)[54] 잘 알려진 대로 일베저장소가 주범이지만, 시작은 디시인사이드이다.[55] 노무현 대통령이 평소 가장 즐겨 부르던 노래, 사망 후에 노무현 추모곡으로 쓰이기도 했다.[56] 이전 문서엔 이 영상 속 노래의 제목을 아는 사람은 추가바람이라고 적혀 있었는데, 사실 똑같은 노래다... 카메라를 찍은 위치만 다를 뿐.[57] 다만 만기 제대임에도 병장이 아닌 상병으로 전역하였다. 이유는 당시엔 병장도 TO가 있었고 베트남 전쟁에 참전한 수많은 병사들이 병장을 달고 있었기 때문이다.[58] 법조인으로 대통령이 된 사람은 노무현이 유일했으나 그의 동지였던 문재인이 대통령에 취임하면서 그 기록은 깨지게 되었다.[59] 이승만의 자유당 창당은 그 이전에 여당이 없었던 상황이었고, 노태우의 민자당은 노태우의 소속정당인 3당합당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이에 비해 노무현의 열린우리당은 원래 여당이었던 새천년민주당과 한나라당에서 탈당한 개혁적 성향의 인사들이 만든 정당이다.[60] 이전 거의 모든 대통령들은 퇴임 후 낙향하지 않고 그대로 서울에 머물렀다.[61] 유지에 따른 것이라고 한다. 그 어떤 한국의 대통령도 시신이 화장된 전례가 없었기 때문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 시신은 수원 연화장 8번 화장로에서 화장되어 고향 봉하마을에 안장되었다. 역대 대통령 중에서 초대 대통령인 이승만, 박정희, 김대중, 가장 최근에 사망한 김영삼 전 대통령은 서울현충원에, 윤보선 전 대통령은 충남 아산의 선산에, 최규하 전 대통령은 대전현충원 국가원수 묘역에 안장되었고, 노무현 전 대통령만 역대 대통령 사상 최초로 유지에 따라서 수원 연화장 8번 화로에서 시신이 화장되었다.[62] 여담이지만 가장 넓은 묘지를 가진 대통령이기도 하다. 무려 3206제곱미터. 유서에는 작은 비석만 세워라 했지만, 지지자 등 타의에 의해 묘지 면적이 넓어지게 되었다.[63] 다른 한 사람은 박정희로, 박정희와 노무현 모두 70대에 들어서지 못하고 중장년 시기에 사망했다. 사망 당시 둘의 나이는 박정희(61세), 노무현(62세).[64] 친노이자 청와대 참모진을 거치고 더불어민주당의 전 당대표를 거쳐 현직 대통령이 된 문재인을 따르는 소위 '친문재인'까지 포섭하는 경향도 보인다.[65] 당시 문재인에게도 제안했지만, 문재인은 거절했다고 한다.[66] 김영삼이 진짜로 약속을 지켜 하나회를 숙청했기 때문이다.[67] 절묘하게도, 이 발언 직후에 연설 종료를 알리는 종소리가 울렸다.[68] 이게 그 유명한 "대통령 못해먹겠다"의 원본이다. 조중동에서 앞뒤 다 자르고 보도해서 논란이 된 적 있다.[69] 노무현 대통령의 큰형이며, 부산상고에 진학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법관의 길로 가게 도와줬다. 출생연도가 미상인데, 노무현 전 대통령의 형제자매들의 생년을 대충 끼워맞춰서 가정하면 1933년쯤으로 예상된다.[70] 노무현 전 대통령의 유소년기에 많은 도움을 준 적이 있어 만약 그가 현재도 살아있었다면, 노무현이 어려울 때 많은 격려를 해줬을 것이고 말년의 노 전 대통령이 극단적인 선택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71] 전임자 이명박1998년 의원직 사퇴로 보궐선거. 우리가 아는 그 이명박이 맞다.[72] 바로 앞의 선거 포스터에서 좌우만 바뀌었다.[73] 게다가, 송강호는 경남 김해 진영읍에서 1년간 산 적이 있었다. 진영읍은 다들 알다시피 노무현 대통령의 고향이다.[74] 최석필은 김종성이 해설할 때,이상훈은 원호섭이 해설을 맡은 뒤 연기했다.[75] 그냥 뜬금없이 '이기야!'라고 외친 건 아니고 국군을 비판하며 나온 발언이다. 사실, '이기야'가 아니라 입모양을 보면 '이기 짐(이게 지금)'이 유력하다.[76] 참고로 노무현 대통령의 작은형이다. 큰형 노영현은 1973년 교통사고로 작고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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