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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남북열차 시험운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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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철도연결구간 열차시험운행[1][clearfix]2007.0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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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남철도련결구간 렬차시험운행[2][3][clearfix]2007.05.17
1. 개요2. 역사
2.1. 남북철도 연결 전 남북 각 측 상황2.2. 남북철도연결 합의 및 단절구간 복구
2.2.1. 경의선 철도연결2.2.2. 동해선 철도연결
2.3. 열차시험운행까지 우여곡절
2.3.1. 원래 계획2.3.2. 재운행을 위한 노력
2.4. 우여곡절 끝에 성사된 열차 시험 운행
2.4.1. 시험운행을 위한 준비
2.5. 시험운행 당일
2.5.1. 양측에서 사용한 열차
2.5.1.1. 대한민국2.5.1.2. 북한
3. 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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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그때 그 뉴스] 분단 반세기 만에 ‘철마’ 다시 달렸다

2007년 5월 17일 대한민국 정부와 북한 정부의 합의하에 경의선동해북부선 각각 두 노선이 군사분계선을 넘어 열차를 직결 운행한 사건.[4]

2. 역사

2.1. 남북철도 연결 전 남북 각 측 상황

대한민국과 북한 사이의 철도는 남북분단 이후 단절되면서 한때 대륙철도의 한 축이었던 대한민국의 경의선, 경원선은 수도권 외곽지역의 미미한 여객수요를 처리하는 지선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북한의 상황도 크게 다르지 않아 경원선 구간중 안변-군사분계선 구간이 강원선으로 분리되었으며 경의선은 평양역을 기준으로 평양~신의주 구간을 평의선, 평양-부산(실질적으로는 개성) 구간을 평부선으로 분리하면서 남북분단 이후 종종 있었던 남북한 대화 및 교류 당시 철도는 당연히 선로가 안 이어졌기 때문에 이용하지 않았다.

2.2. 남북철도연결 합의 및 단절구간 복구

그런데 김대중 대통령의 국민의 정부 시절에 김 대통령이 당시에 직접 평양을 방문하여 남북정상회담을 열어 6.15 남북공동선언을 하는 데 이르렀고 이후에 우선 경의선 복원이 합의되었으며 예정보다 이르게 동해선도 복원되었지만 실질적인 열차 운행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금강산 관광에 육로를 이용하는 등 도로 교통은 합의가 있었지만 철도는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2.2.1. 경의선 철도연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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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의선 및 동해선 철도, 도로 연결 착공식[clearfix]2002.09.18
경의선국민의 정부 시절에 착공하였고 완전 연결은 참여정부 시절에 완료되었다.

경의선 철도연결 구간은 북한 개성역에서 남한 도라산역까지였으며 참고로 이 구간은 애당초 남쪽까지 선로가 모두 정상적으로 있었기 때문에 남측방향 선로가 존재한다.
  • 2000년 7월 31일: 남북은 장관급회담에서 먼저 경의선 철도 연결에 합의하였다.
  • 2000년 9월 18일: 경의선 철도 연결 기공식이 있었다.
  • 2001년 12월 31일: 비무장지대 이남 남측구간이 완공되었다.
  • 2002년 9월 18일: 남북철도연결구간 착공식을 진행하였다.#
  • 2002년 12월 31일: 도라산역 인근 남측구간이 모두 복원되었다.
  • 2003년 6월 14일: 완전히 연결되어 연결행사를 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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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2. 동해선 철도연결

동해선참여정부 시절에 복구되었다.

구간은 북한 금강산청년역에서 남한 제진역까지의 구간이다. 이 구간은 북측으로는 선로가 나 있는데 남측으로는 선로가 끊어져 있다. 이는 일제강점기에 일제가 동해선을 건설하던 중에 완공하기도 전에 해방이 되면서 공사가 중단되면서 동해북부선 양양~강릉 구간이 단절되었기 때문이기도 하고 6.25 전쟁 때 양양~제진 구간이 파괴된 후 양양~제진 구간을 복구하지 않고 그냥 내버려 두었기 때문이다.

다만, 박근혜 정부 들어서 제진~강릉 연결을 추진했다.
  • 원래 동해북부선 철도복원은 2019년에 연결하기로 하였다. 그런데 협의에 의해 예상 일정보다 상당히 빨리 착공되었다.
  • 2004년 4월 17일 군사분계선을 건너는 선로가 복원되었다.
  • 2005년 12월 남북출입사무소인 제진역까지 선로를 복원하였다.

이에 따라 실질적인 열차운행만을 남겨두게 되었다. 비무장 지대를 넘는 도로 교통은 남북한 정부 사이의 임시적 합의를 통해 이루어질 수 있었지만 철도교통은 합의가 없었던 상태였다.

2.3. 열차시험운행까지 우여곡절

2.3.1. 원래 계획

원래 남북철도 연결구간 열차시험운행은 2006년에 할 예정이었는데 후술하는 이유들로 인해 2006년에 열리지 못하였다.
  • 2006년 4월 21일과 23일사이에 남북은 제18차 장관급회담을 열어 열차시험운행 및 도로, 철도 개통문제에 대해 제12차 경추위를 5월에 개최하여 협의하기로 하고 5월 11일~12일 경의선 및 동해선 동시 열차시험운행 실시하기로 실무접촉을 하였다.
  • 하지만 북한에서 예정 시험운행 전날 실무접촉 북측단장 (박정성) 명의로 취소통보를 하는 바람에 열차 시험운행은 성사되지 못했다. 예정 전날 북측은 전화를 통해 취소 사유를 군사 보장 미이행과 불안한 남측 정세라고 하였으며 군부의 반발이 주원인으로 지목되었다. 군부가 협상에서 더 많은 것을 얻기위한 것이라는 추측등이 있지만, 정확한 원인은 밝혀지지 않았다.
  • 개성역 정비작업과 북측구간 철도 점검을 위해 열차가 왕복하는 모습, 그리고 북측 당국자들의 언행을 보아 시험운행 중단 통보가 온 5월 23일전에는 운행이 무산될 수도 있다는 징후가 나타나지 않았다.

2.3.2. 재운행을 위한 노력

남북철도는 연결했지만 열차를 운행하지 못해 물거품이 되던 때 대한민국 정부는 포기하지 않고 재운행을 위한 협의에 들어갔다.
  • 2007년 4월 22일 오전 고려호텔에서 제13차 남북경제협력추진위원회(경협위) 종결회의를 열고 이 같은 내용을 골자로 하는 10개항의 합의문을 채택했는데 이 합의문에는 1년전에 취소되었던 열차 시험운행을 재추진 한다는 내용이 들어 있었으며 북한의 자원 개발권을 전제로 남한이 당시 8000달러 가량의 경공업 원자제를 제공하기로 하였다. 쌀 40만톤도 5월 말에 지원하기로 남측은 약속했는데 북측이 2·13 합의 이행에 나서지 않으면 쌀 지원이 어렵다는 조건을 걸어 핵사태와 종속시켰다.
  • 2007년 5월 8일에서 5월 11일에 판문점 북측지역 통일각에서 이루어진 제5차 남북장성급군사회담에서 남북열차시험운행의 군사보장합의서를 타결및 발효시키고, 5개항의 공동보도문을 합의하였다. 또한 도로, 철도 통행의 군사보장합의서 체결문제를 협의함에 따라 상시 운행도 보장할 수 있게 되었다.

2.4. 우여곡절 끝에 성사된 열차 시험 운행

2.4.1. 시험운행을 위한 준비

정상운행을 위해 궤도 검측차에 의한 선로 검측을 실시하고 기관차 운행시험에 이르기까지 열차운행 전반에 걸쳐 실시하였는데 이는 남북 공동으로 진행되었으며 분계역인 도라산역~판문역 구간과 감호역~제진역 구간 사이의 송수신 시험도 완료되었다.

문산역~개성역 구간은 26.8km였으며, 금강산청년역~제진역 구간은 비슷한 25.5km였다.

탑승인원은 남북측 고위급 인사와 일반 초청객을 합해 총 300명이었으며 남측 200명과 북측 100명이었다.

유명 탑승객중에는 리영희, 시인 고은, 문익환의 부인 박용길, 탤런트 고은아 등이 있었다.

남측 승객은 버스를 이용해 금강산청년역으로 이송되었으며 인근 학교의 학생들이 출발 전 남측 대표단을 맞았다.

2.5. 시험운행 당일

시험 운행은 2구간에서 동시에 이루어졌다. 철도 신호는 연동폐색식을 사용하였다.

열차는 당일 오전 11시 30분에 각각 문산역과 금강산역을 떠나 목적지로 향했으며 군사분계선도 모두 비슷한 시간인 12시 15분 경에 통과하였다. 북측구간에서는 영 좋지 못한 선로 사정 때문에 시속 40km 이하의 속력을 낼 수밖에 없었다.

한편 이날 오전에는 납북자 단체 회원 5명이 시험운행 취소를 요구해 코란도 자동차로 경의선 철도 기념식장을 점거하려고 하였으나 경찰의 진압으로 인근 지구대로 이송된 바가 있다. 단체는 납북자 문제 해결 촉구를 위해 기습시위를 준비했었다.

2.5.1. 양측에서 사용한 열차

2.5.1.1. 대한민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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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라산역을 출발하여 DMZ로 진입하는 남측 열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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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험운행을 마친 뒤 다시 도라산역으로 돌아오는 남측 열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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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방한계선을 넘는 열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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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측에서 동해선 제진역에 세워둔 새마을호 열차

대한민국 한국철도공사에서는 새마을호 열차를 사용했다.

남한측 열차가 북한으로 넘어가는 시험운행은 경의선에서 이루어졌으며 동해선에서는 북한 열차가 남한으로 넘어오는 시험운행으로 진행됐다.

당시 7435호 디젤전기기관차 1량, 새마을호 객차 4량, 발전차 1량 등 모두 6량 1편성을 운행하였다.

탑승객은 초청객 150명(남측 100명, 북측 50명)이었으며 열차는 문산역을 출발해 도라산역을 거쳐 휴전선을 넘고 판문역, 손하역을 지나 개성역에 도달하였다.
2.5.1.2. 북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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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산청년역을 출발한 북한 측 열차가 동해선 제진역으로 진입중인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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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5] 철도성 소속 기관사가 대한민국 한국철도공사 소속 기관사와 악수하는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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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한국철도공사 승무원과 북한[6] 철도성 승무원이 악수하는 모습

북한 철도성에서는 소련제 M62 디젤 기관차[7]를 이용해 금강산역에서 미리 대기하고 있던 남측 및 북측 승객을 태우고 휴전선을 건너 제진역에 도착했다.

3. 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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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남북 열차 시험운행 이후 1회성 행사에 지나지 않고 남북관계 및 교류를 활성화하는 데 이용해야 한다는 의견이 있었다. 시험운행 이후 서울-평양 정기열차, 시베리아 횡단철도와 연결, 금강산 관광에 철도를 이용하는 것 등이 거론되었지만 북한의 영 좋지 못한 선로 상태와 여러 난제로 실행되지는 못했다.

그렇지만 어느 정도 시험운행 이후 위 사진처럼 문산-개성공단간 화물열차가 2008년 11월 남북관계 경색 이전까지 운행되었다.

그러다가 박근혜 정부에서 유라시아 이니셔티브 사업의 일환으로 아직 복구되지 않은 경원선의 선로복원이 추진되면서 월정리~백마고지 복원이 확정되어 2015년 8월 5일 기공식을 열고 착공에 들어갔다.

그러나 북한이 경의선 및 동해선을 폭파하면서 운행을 못하게 되었다.
[1] 사진 속 열차는 경의선 도라산역을 출발한 후 남방한계선을 넘고 평부선 판문역으로 향하는 모습이다.[2] 사진 속 열차는 북방한계선을 넘고 동해북부선 감호역을 출발한 후 제진역에 도착한 모습이다.[3] 해석하자면 북남철도연결구간 열차시험운행[4] 북한 측에서는 북남 렬차 시험운행이라는 팻말을 달았다.[5]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6]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7] 우크라이나 루한스크 공작창에서 제조된 기관차로, 표준궤 방계형 중 하나인 Deutsche Reichsbahn V200 모델로 동독에서 사용되던 사양이었으나 독일 재통일 이후 퇴역하여 북한으로 수출된 기관차다. 북한 내부에선 "내연 기관차"라고 부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