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000><colcolor=#fff> 대한민국의 민주운동가 문익환 文益煥 | Moon Ik-hwan | |
출생 | 1918년 6월 1일 |
중화민국 길림성 화룡현 명동촌 (現 중국 지린성 연변 조선족 자치주 용정시 지신진 명동촌)[1] | |
사망 | 1994년 1월 18일 (향년 75세) |
서울특별시 도봉구 쌍문동 한일병원 | |
묘소 | 경기도 남양주시 화도읍 모란공원 |
본관 | 남평 문씨 |
직업 | 목사, 교수, 성서학자, 사회운동가, 시인, 작사가 |
학력 | 한신대학교 (신학 / 학사) 프린스턴 신학교 (신학 / 석사) |
약력 | 한신대학교 신학과 교수 연세대학교 신과대학 교수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2] 의장 |
교단 | 개신교 (한국기독교장로회) |
가족 | 부친 문재린, 모친 김신묵 남동생 문동환, 남동생 문영환, 여동생 문은희 배우자 박용길 장남 문호근[3], 장녀 문영금, 차남 문의근, 삼남 문성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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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전태일 열사여![4] 김상진 열사여![5] 장준하 열사여![6] 김태훈 열사여![7] 황정하 열사여![8] 김의기 열사여![9] 김세진 열사여![10] 이재호 열사여![11] 이동수 열사여![12] 김경숙 열사여![13] 진성일 열사여![14] 강상철 열사여![15] 송광영 열사여![16] 박영진 열사여![17] 광주 2천여 영령이여! 박영두 열사여![18] 김종태 열사여![19] 박혜정 열사여![20] 표정두 열사여![21] 황보영국 열사여![22] 박종만 열사여![23] 홍기일 열사여![24] 박종철 열사여![25] 우종원 열사여![26] 김용권 열사여![27] 이한열 열사여![28]"
이한열의 추모식에서 한 연설.[29] 문 목사의 절절한 몸짓과 애절한 목소리가 영상으로 남아 있다. 이 영상은 영화 1987에 실리기도 했다.[30]
대한민국의 한국기독교장로회[31] 소속의 목사, 한신대학교 [32] 교수, 성서학자[33], 남북통일 운동가, 시인[34], 작사가[35]. 문재린 목사-김신묵 사모의 아들이며, 배우 출신 정치인 문성근의 아버지이다.
부인은 함께 민주화 운동에 헌신한 박용길 장로이며 남동생 문동환 목사도 같이 민주화 운동에 헌신하였다.[36] 본관은 남평(南平)이며, 늦은 나이에 운동권에 참여하면서 호를 '늦봄'이라고 지었다. 첫 사회 활동인 1976년 3.1 민주구국선언 사건 당시 이미 50대 후반이었다. 그 이전까지는 미국 유학을 거치고 한신대 신학교수로 재직하던 전형적인 개신교 목사였다. 현재 1994년 창립한 통일운동단체 '통일맞이-늦봄 문익환 목사 추모사업회'가 활동하고 있다.
2. 생애
2.1. 초반 생애
흔히 북간도로 표현되는 중화민국 길림성 화룡현 명동촌(明東村)[37]에서 1918년 아버지 문재린과 어머니 김신묵 사이에서 태어났다. 문익환 목사 집안은 1905년 을사늑약 이후 윤동주 시인 집안, 김약연 집안 등과 함께 5가문이 집단적으로 이주했다. 이들을 중심으로 용정에 독립운동을 지원하는 조선인 공동체가 생겨난다. 자립과 개척성향이 강했던 명동촌의 분위기와 항일 민족의식을 지녔던 가풍의 영향을 받으며 명동소학교, 은진중학교, 평양 숭실중학교, 용정광명학교를 거쳤다.[38] 학창시절 당시 저항시인 윤동주, 윤동주의 사촌형이자 독립운동가인 송몽규, 역시 독립운동가 겸 정치가 장준하, 정치인 정일권[39]과 절친한 지인이었다고 한다.[40] 아들인 문성근은 무릎팍도사에 출연하여 "아버지가 윤동주, 장준하에 대한 마음의 부채가 있었다"며 "윤동주 장준하가 세상을 떠났으니 이젠 내 차례다는 생각을 늘 가지고 있었던 듯하다"고 말했다.[41]젊은 나이에 생을 마감한 윤동주를 추모하며 헌정시 동주야를 쓰기도 했다.
동주야
너는 스물 아홉의 나이에 영원이 되고
나는 어느새 일흔 고개에 올라 섰구나
너의 영원한 젊음 앞에서
이렇게 구질구질 늙어가는게 억울하지 않느냐고
그냥 오기로 억울하긴 뭐가 억울해 할수야 있다만
네가 나와 같이 늙어가지 않는다는 게 여간만 다행이 아니구나
너마저 늙어간다면 이 땅의 꽃잎들 누굴 쳐다보며 젊음을 불사르겠니
너는 스물 아홉의 나이에 영원이 되고
나는 어느새 일흔 고개에 올라 섰구나
너의 영원한 젊음 앞에서
이렇게 구질구질 늙어가는게 억울하지 않느냐고
그냥 오기로 억울하긴 뭐가 억울해 할수야 있다만
네가 나와 같이 늙어가지 않는다는 게 여간만 다행이 아니구나
너마저 늙어간다면 이 땅의 꽃잎들 누굴 쳐다보며 젊음을 불사르겠니
이후 평양신학교[42]에 입학하려 했으나, 근본주의적인 학풍을 가진 평양신학교를 다니는 것보다는 일본 유학을 가는 것이 좋겠다는 부친 문재린(文在麟, 1896–1985)의 권유로 도쿄의 일본신학교에 입학한다. 여기서 성서비평학을 공부하게 되는데, 원래 축자영감설과 성서무오설을 중시하는 장로회 출신의 문익환은 성경의 문자적 해석에는 익숙하였으나 성경을 학문적으로 연구하고 비평하는 것에는 적응하기 힘들어했다고 한다. 하지만 당시 신학교수의 충고를 받고 학문적인 영역으로서 존중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후 만주국 봉천신학교를 졸업했으며, 아들 문성근에 따르면 태평양전쟁 말기 조선인들에 대한 징병령이 내려지게 되자 "나는 일본을 위해서 죽을 수 없다"며 직접 신학교 교장을 찾아가서 담판을 짓고 난 뒤에 만주로 돌아갔다고 하며, 교장이 신학자로서의 양심 때문이었는지는 몰라도 그를 신고하거나 하지는 않았다고 한다.[43] 1944년에 일본 유학 중에 만난 박용길과 결혼하여 3남 1녀를 낳았다. 1947년 한국신학대학교[44]를 졸업했다. 사실 문익환은 해방 이후 반공주의자였는데, 그 이유는 만주에서 살던 시절 중국 공산당의 탄압으로 인한 가족의 이주 그리고 해방 후 소련군에 의해 부친이 억울하게 목숨을 잃을 뻔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1949년에는 기독교반공청년단체에도 관여했을 정도. 물론 활발히 활동한건 아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고, 미국 유학시절 한국전쟁이 터졌다. 1950년 한국 전쟁이 터지자 자원입대, 미군통역장교로 활약하였다.[45] 이후 다시 미국 유학길에 올라 1954년에는 미국 프린스턴 신학교에서 신학 석사 학위를 받는다. 이후 귀국하여 연세대, 한신대 등에서 신학 강의를 하였다.
1970년대에는 공동번역성서 구약 번역에 참여했다.
2.2. 생애
좌측이 김일성.[46]
1970년대 중반까지는 주로 본연의 업무인 목사 겸 신학 교수로 활동했으나, 1976년 3.1 민주구국선언 사건으로 투옥된 이후 60대의 노구를 이끌고 민주화와 통일 운동의 길로 접어든다. 1976년 59세에 처음 구속된 이래 1994년 77세로 사망할 때까지 생애 마지막 17년 중에서 5년 반을 밖에 있었고 11년 반을 교도소에서 살았다. 함석헌, 장준하와 함께 진보주의의 개신교 대표로 활동하였으며, 같은 활동을 하던 가톨릭 대표인 서울대교구장 김수환 스테파노 추기경, 원주교구장 지학순 다니엘 주교, 서울대교구 함세웅 아우구스티노 신부, 전주교구 문규현 바오로 신부 등과 친하게 지냈다고 한다.
1980년대 내내 재야 운동권 세력의 상징이었으며, 1980년대 말 격렬하게 대립하던 학생운동권 그룹에서 모두 존경하는 거의 유일한 인물이었다. 특히 그 가운데 가장 임팩트가 강했던 사건은 위의 1989년 북한을 방문하여 김일성과 회담했던 사건.[47] 이 사건은 이어지는 전대협의 임수경 방북에 직접적인 계기가 되며 민간 차원의 통일운동의 불씨를 당긴 사건이다. 실제 당시 김일성과의 합의 내용은 이후 1991년 남북기본합의서와 2000년 남북공동선언에 거의 그대로 반복된다.#
그러나 그는 그가 활동한 단체 조국통일범민족연합에 대해 북한이 대남 공작용으로 이용한다는 의혹을 가지고 있었고, 이를 타파하고자 노력했다.[48] 말년에 일방적으로 북한에 끌려다닌다고 판단한 범민련을 해산시키고 새로운 통일운동 단체를 만들자고 제안했던 것도 이 노력의 일환이다. 그 외에도 민가협 양심수후원회의 초대 회장(1989~1991)과 지도위원(1991~1993)을 지냈다.
한편 신학자로서도 계속해서 활동을 이어 나갔는데, 1988년부터 89년 사이에 기독교 잡지 <생활성서>에 진보 신학적 관점에서 구약성서의 각 권을 갖다 해설한 글들을 당시의 시국과 연관지어 연재한 바 있으며, 이것을 1990년에 <히브리 민중사>라는 제목의 책으로 출간하였다.
1991년에 나온 민중가요+찬양 모음집인 <평화의 아침을 여는 이>에도 감수위원으로 참가하였다.
이렇듯 말년에는 특히 통일 문제에 주력하다 1994년 1월 18일에 집을 나서던 중 심장마비로 쓰러져 병원으로 옮겨졌지만 그날 오후 8시 20분에 향년 75세로 사망했다. 사인은 심장마비.
아버지 문재린 목사와 어머니 김신묵 여사는 함께 민주화 운동을 했고,# 남동생 문동환 목사도 한신대학교 교수로 재직하며 같이 민주화 운동을 하다가 훗날 김대중 대통령이 이끄는 평화민주당 부총재를 지내기도 하였다. 문익환 목사와 함께 민주화 운동에 헌신했던 부인 박용길 장로는 2011년 9월 25일에 사망했다.#
사후 30주기 특별전 강연(2024.5)에서, 문익환 목사 일생 관련 사진을 통한 생애 전반에 대한 깅연이 있었다. #
2.3. 방북
민주화를 가로막는 장벽, 그게 바로 분단이었습니다. 분단이 독재의 명분이 되어왔기 때문입니다. 민주화 운동과 통일운동이 하나의 운동일 수 밖에 없는 것은 이 때문입니다.
1989년 3월 27일 북한을 무단으로 방문하여 3월 29일에 김일성을 만났고 합의서까지 체결했다.
무단 방북 사건으로 수감되었을 당시에 쓴 편지들을 바탕으로 출간한 책에서, 문 목사는 북한 체제가 사회주의의 이상과 거리가 있으며 남한 체제처럼 문제가 있는 나라라는 입장을 밝히고 있다. 따라서 북한은 평등을 자유에 이르기까지 추구하고 남한은 자유를 평등에 이르기까지 추구함으로써 자유와 평등 모두가 온전히 실현된 진정한 민주주의를 실현하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 문 목사의 통일관이었다.[49]
그리고 문 목사는 김일성을 만나 이야기하면서도 '주체사상'에 대해 무조건 칭송하거나 옹호하는 것이 아니라 둘이서 말싸움 하는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토론을 벌였다. 그리고 김일성은 그걸 다 들어줬다.[50] 또 문익환 목사가 주체사상은 수령이 아닌 인민을 위한 주체사상이 되어야 한다고 말했을 때도 김일성은 그냥 넘어갔다.
문 목사가 김일성을 만나서 몇 가지에 '합의'한 것은 맞지만, 이 합의는 엄연히 1991년의 남북 기본 합의서와 2000년의 6.15 공동선언에도 포함되어 있는 내용으로서, 북한 주도의 적화통일을 추구하는 내용은 단 하나도 포함되어 있지 않다.
그런데 김정일은 본인의 미출판된 회고록에서 김일성과 문익환의 면담에 대해서도 기록했는데, 여기서는 마치 문익환이 북한 주도의 통일을 옹호하는 사람인 것처럼 서술해놓고 있다.[51]
정작 문 목사가 1993년 출소 이후 북한에 너무 의존하는 범민련을 해체하고 새로운 통일 운동 단체를 조직하려고 하자 북한은 그를 눈엣가시로 여겼다.[52]
3. 기타
- 이준익 감독의 영화 동주에 잠깐 등장한다.
- 아들인 배우 문성근이 문화방송 예능 프로그램 〈무릎팍도사〉에서 밝히기를, 성격이 시니컬한 면이 있어 한신대 신학생들 사이에서의 별명은 '문이꽝'[53]이었다고 한다. 성정이 드센 분이셨기에 아들에게도 냉정하게 대한 적이 더러 있었다고 한다. 한번은 노년에도 열성적으로 민주화 운동에 힘쓰는 부친이 걱정돼 첫 구속 이후 1976년 하룻날 외출하는 문 목사를 붙잡고 이제 고생 그만 하시고 회고록이라도 집필하시는 게 어떻냐고 말씀을 올렸다. 그러자 문 목사는 몹시 한심하다는 눈빛으로 아들을 보더니 대꾸도 없이 휙 나가버렸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문성근은 아버지를 소개할 때 아버지라고 하지 않고 문익환 목사님 또는 문 목사님 혹은 대명사로 문 목사라고 3인칭으로 부른다. 자신에게는 아버지이지만 세상에는 문 목사로 통칭되는 사람이니 이를 따르는 것이라고 밝혔다. 이는 장준하 선생의 아들 장호권 씨도 비슷한데 장호권 씨도 아버지를 지칭할 때 장 선생님이라고 부른다.
- 문성근이 나이 들어가면서 점점 문익환 목사와 닮은 외모가 되어가고 있다.
- 중국에서 목화씨를 들여온 문익점과 이름이 비슷해서 오해를 받기도 한다. 실제로 김흥국이 라디오 방송에서 이와 관련된 실수를 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문익환은 문익점의 26대손이다.
- 문익환 목사의 행보와 업적이 점점 잊히는 상황이라 진보 개신교는 답답함과 허탈감을 적잖이 느끼는 듯하다[54]
- 전라남도 강진군에 늦봄의 이름을 딴 늦봄문익환학교 가 2006년 개교하였다.
- 문익환 목사는 일흔이 넘은 나이에 장기간 수감되었는데, 그 시절 법무부장관이 김기춘이었다. 2016년 박근혜-최순실 게이트가 터지면서 대통령 비서실장을 지낸 김기춘이 구속을 앞두자, 아들 문성근은 트위터에 김기춘이 고령을 핑계로 구속을 면하려 하였을 것 같다면서 문 목사의 수감 이력과 함께 이 사실을 언급했다.
4. 관련 문서
[1] 북간도는 지리적으로 모호한 개념이다. 자세한 내용은 간도 문서 참고.[2] 약칭 민통련.[3] 1946~2001. 생전 오페라 연출가로 활동했으며, 2001년 5월 17일 향년 55세로 세상을 떠났다.[4] 노동자. 1970년 11월 13일 노동자 권리를 외치며 분신자살.[5] 서울대학교 농과대학 학생. 1975년 4월 11일 유신체제와 긴급조치에 항거하여 할복자살. 명동민주구국선언의 도화선이 되었다.[6] 일명 재야 대통령. 1975년 8월 17일 포천시 약사봉에서 의문사.[7] 서울대학교 사회과학대학 경제학과 4학년. 1981년 서울대생의 침묵시위에 경찰이 교내까지 진입해 진압하자 이에 항의하여 투신 자결했다.[8]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1983년 로널드 레이건 미국 대통령 방한에 맞추어 민주화 투쟁을 기획하던 중 사복경찰에 쫓겨 몸을 피하다가 추락사했다. 황옥의 친손자이기도 하다.[9] 서강대학교 무역학과 3학년. 1980년 5월 30일, 광주의 실상을 알리는 전단을 뿌린 후 투신자결했다.[10] 서울대학교 자연과학대학 학생회장. 1986년 전방 입소 반대투쟁 중 분신자결했다.[11] 서울대학교 사회과학대학 정치학과. 김세진 열사와 함께 전방 입소 반대투쟁을 했고 같이 분신자결했다.[12] 서울대학교 농과대학 원예학과. 1986년 5월 26일 오월제 행사 중 전두환 독재 타도를 외치며 투신 자결했다.[13] YH무역 여공 노조원. 1979년 8월 11일 경찰의 신민당사 강제진입 과정에서 사망했다.[14] 부산산업대학교(現 경성대학교) 행정학과에 재학중 10.28 건국대 항쟁이 전두환 정권의 폭력적 대응에 의해 진압되자 11월 5일 이에 항의하여 분투신한다.[15] 노동자, 1986년 노동탄압에 항거하여 목포역에서 분신자결했다.[16] 경원대학교 법학과. 1985년 9월 17일 전두환 독재에 항의하여 분신 자결했다.[17] 신흥정밀 노동자. 1986년 3월 17일 근로기준법 준수, 노동3권 보장을 요구하며 분신 자결했다. 그가 당시에 근무하던 곳이 바로 과거에 이름을 날렸던 필기구 회사 '마이크로'의 옛 이름이다.[18] 삼청교육대 소집 후 보호감호 처분으로 청송보호감호소 복역 중 재소자 처우개선을 요구하다 1984년 10월 14일 교도관들의 집단폭행으로 사망했다.[19] 노동자. 1980년 6월 9일, 노동권 보장 및 광주항쟁의 진실 규명을 요구하며 분신 자결했다.[20] 서울대학교 인문대학 국어국문학과. 1986년 5월 21일, 가두시위 중 연행되었다 풀려난 뒤 한강에 투신 자결했다.[21] 하남공단 신흥금속 근로자. 1983년 3월 6일, 광주학살에 대한 정부 및 미국의 책임을 규탄하고 내각제 반대를 외치며 미 대사관 앞에서 분신 자결했다.[22] 노동자. 1987년 5월 17일, 부산에서 광주항쟁의 전두환 책임을 물으며 분신자결했다.[23] 민경교통 노조 복지부장. 택시기사 처우 개선을 요구하다 1984년 11월 30일 분신 자결했다.[24] 노동자. 1985년 8월 15일, 전두환 독재에 항거하고 광주항쟁에 대한 책임을 물으며 분신 자결했다. 광주항쟁 당시 시민군이기도 하였다.[25] 서울대학교 인문대학 언어학과. 1987년 1월 14일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수사관들의 물고문으로 인해 사망. 정부는 탁 치니 억 하고 죽었다라고 사건을 은폐했으나 시민들이 진상규명을 요구하며 6월 민주항쟁이 시작되었다.[26] 서울대학교 사회과학대학 사회복지학과. 민추위 사건으로 수배중 1985년 10월 11일 시신으로 발견된다. 자살로 결론이 나왔으나, 의문사 의혹이 있다.[27] 서울대학교 경영대학. 카투사로 군 복무 중 1987년 2월 20일 내무반에서 목을 매달고 죽은 채 발견되었다.[28] 연세대학교 경영대학. 1987년 6월 9일 시위 도중 뒷머리에 최루탄을 맞고 7월 5일 사망했다.[29] 즉흥적으로 이루어진 연설이었다.[30] 아들 문성근이 이 영화에 출연했으며, 역할은 정 반대의 역할인 장세동 국가안전기획부장을 맡았다.[31] 한상렬 목사도 이 교단 소속이다.[32] 개신교의 보수성을 비판하던 한국신학대학교(조선신학교) 총장 김재준 목사가 박형룡을 중심으로 한 근본주의 목회자들에게 배척당해 예수교 장로회에서 제명된 후 한국기독교장로회 교단을 설립하였는데, 그 한국신학대학교의 후신이 한신대학교이다. 이런 탓인지 신학교임에도 성공회대학교와 함께 대단히 사회참여적, 진보적 성격을 가지고 있다. 특히 한신대학교 경제학과는 남한에서 유일하게 마르크스 경제학자들이 중심인 곳이다. 김수행, 정운영, 이해영 등 유럽유학파 출신 마르크스 경제학 전공자들이 모두 이곳 교수였다. 단 한신대학교가 교단 분리 당시 자유주의 신학이라고 비판받았던 것과 달리, 칼 바르트로부터 이어져 내려오는 신정통주의 신학을 추구하는 곳이다.[33] 1970년대 성서번역 공동위원회에 장로회 대표격으로 참여하였다.[34] 그는 잠꼬대 아닌 잠꼬대, 한뫼의 신화 등의 여러 시를 작시 한 시인이다. 그의 시를 모은 시집 또한 있다.[35] 그는 21세기 찬송가 582장 <어둔 밤 마음에 잠겨>의 김재준, 조원길과와 공동 작사가이다.[36] 형의 그늘에 많이 가려졌지만, 문동환 목사도 기독교교육학자로 한신대 교수를 지냈고 형보다 먼저 민주화 운동에 투신하였다. 이후 재야세력의 대표로 김대중 대통령이 이끌던 평화민주당 부총재를 지내기도 하였다. 말년에는 미국 뉴저지 주에서 주로 활동을 했으며, 2019년 3월 9일에 향년 97세로 사망했다.[37] 현재는 중화인민공화국 지린성 연변 조선족 자치주 용정시 지신진(智新鎭) 명동촌으로 남아 있다.[38]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39] 놀랍게도 절친 정일권이 사망한 다음날 문익환도 사망했다.[40] 시인이 되고 싶었던 문익환이 윤동주에게 자신이 고심해 적은 시를 보여주자 윤동주의 반응은 "이게 시냐?"라는 것이었다고(...). 이에 쇼크를 받은 문익환이 시인의 길을 포기했다는 일화가 있다.[41] 윤동주는 간도 명동소학교 동창이고, 장준하는 일본 도쿄의 일본신학교에서 문익환과 같이 수학하던 사이였다. 1976년 민주구국선언으로 민주화운동에 참여하게 된 계기도 1975년 장준하의 의문사에 충격을 받아서였다고 한다. 이들 3명과 반대의 길을 간 정일권까지 합치면 이래저래 한국 현대사에 대단한 영향을 끼친 4명의 동창생들이다.[42] 현 장로회신학대학교와 총신대학교의 전신[43] 이때 같은 학교를 다니던 윤동주와 장준하 역시 조선인들에게 떨어진 징병령에 대해 각자 저마다 다른 선택을 했고, 이때의 선택이 그들의 앞날을 결정짓게 된다고 문성근이 무릎팍도사에 나와서 언급했다.[44] 현 한신대학교. 중간에 교단분리되었을 때 잠시 조선신학교로 이름을 바꾼다.[45] 197~80년대 민주화운동의 버팀목이 되는 문익환, 리영희, 정경모도 모두 미군통역장교 출신이다.[46] 이 민간인 무단 방북 사건에 대해 여러 구설수가 나왔지만, 남북 간 언어 이질성이 점점 커지는 상황에서, 문 목사가 통일국어대사전 공동 편찬을 제안하고 김일성이 동의해 겨레말큰사전 편찬사업의 씨를 뿌리기도 하였다.[47] 민간인 신분으로 허가 없이 북한에 방문하는 것은 현재에도 위법 행위이며 당시에도 그러했다.[48] 그는 여기에서 남측본부결성준비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했다.[49] 이러한 이유에서 문 목사는 레흐 바웬사의 폴란드 민주화 운동을 지지했다. '평등을 자유에 이르기까지 추구한다'는 이유였다.[50] 사실 통일교 문선명을 만났을 때도 그랬던 것을 보면 김일성은 유달리 방북한 종교인사들에 대해서는 비교적 관대하게 대우해줬던 것으로 보인다.[51] 통일이 되면 남한의 중산층들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를 김일성에게 물었다고 써 있다. 다만, 북한이 발행한 회고록은 체제 선전용으로 정말 말도 안되는 허위사실을 갖다 붙인 것이 많기 때문에 진위여부 판단은 알아서 하자. 참고로 탈북자들이 한국사 공부하며 경악한 것 중 하나가 한글 창제자가 세종대왕이었다는 진실을 알고 난 이후라고 할 정도다.[52] 문 목사 사후에 적극적인 통일운동 단체로서 평화와 통일을 여는 사람들(평통사), 문 목사에 대한 추모와 기념 성격을 담은 단체로서 늦봄 통일맞이, 이렇게 두 개의 단체가 조직되었다.[53] 화가 나면 문을 꽝 닫는다고 해서 지었다고 한다.[54] 《한겨레》, 2021년 5월 27일, "과대표된 극우 개신교, 기득권 집착‥ 젊은이들 떠나게 만들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