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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966년 8월 29일 |
전라남도 화순군 능주면 남정리 | |
사망 | 1987년 7월 5일 (향년 20세) |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신촌동 세브란스병원 | |
사인 | 6월 항쟁 중 후두부 최루탄 피격과 두개강 내 이물질 함유에 의한 사망 |
본관 | 전주 이씨[1] |
학력 | 광주동산국민학교[2] (졸업) 광주동성중학교 (졸업) 광주진흥고등학교 (11회 / 졸업[3]) 연세대학교 상경대학[4] (경영학 86 / 명예학사) |
부모 | 아버지 이병섭[5], 어머니 배은심[6] |
형제 | 누나 3명, 남동생 이훈열[7] |
서명 | |
종교 | 개신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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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 많은 청년들이 니 가슴에 있는 원한을 풀어주길, 안 되면 엄마가 갚을란다. 안 되면 엄마가 갚아."
이한열 열사 장례식 당시 배은심 여사의 조사
전라남도 화순군[8] 출생 학생운동가이며 1980년대 대한민국 민주화 운동을 상징하는 인물. 1987년 6월 9일 최루탄에 피격당하고 동년 7월 5일 후유증으로 사망하여 6월 항쟁의 도화선이 되었다. 이한열 열사 장례식 당시 배은심 여사의 조사
2. 생애
1966년 8월 29일 전라남도 화순군 능주면 남정리에서 아버지 이병섭과 어머니 배은심의 5남매 중 넷째로 태어났다. 누나 3명이 태어난 다음 태어난 장남이라서 누구보다 가족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랐다. 광주동산국민학교(現 광주동산초등학교), 광주동성중학교, 광주진흥고등학교(11회)를 졸업했다.[9]광주에서 학창 시절을 보냈기 때문에 5.18 민주화운동 당시 광주에 있었는데 모범생이었던 이한열은 부모님의 말씀대로[10] 집에 가만히 있었다고 한다. 이한열은 나중에야 진상을 알게 된 후 충격을 받고 민주화 운동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11]
1986년 재수로 연세대학교 경영학과에 입학했다. 이한열은 경영학과 C반 소속으로 최루탄 피격 당시 입고 있었던 티셔츠도 C반 반티였고 본인도 상당히 마음에 들어 자주 입고 다녔다고 한다.
연세대학교 재학 당시[12]. |
재학 중 중앙 동아리인 '만화사랑' 창립 멤버로 참여했다. 이 동아리는 당시 운동권이 대중과 멀어지자 대학생들을 운동권으로 쉽게 포섭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물론 대놓고 학생운동 서클을 만들 수는 없었으므로 만화나 음악 등등의 명목을 붙여 동아리를 만들고 활동 구심점으로 삼았다. 이한열은 "비록 명목상일지라도 '만화 동아리'를 표방하고 있으므로 만화를 열심히 배워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실제로 부원 중에서 만화를 가장 열심히 배웠다고 한다. 이런 제안에 힘입어 민중 화가를 불러 그림을 배우기도 했다고 한다.
마르크스-레닌주의 서적 목록 정리 |
이한열은 운동권 학생들과 진짜 만화가 좋아서 들어온 학생들 간의 가교 같은 존재였으며 누구보다 자기 자신에게 성실했던 인물이었다. 동기들은 "집회 후 항상 학생회관 휴게실에 앉아 그림을 그리거나 시위를 기록하는 모습이 기억에 남는다"고 한다. 그는 학생운동과 공부 양쪽에서 성실했고 마르크스-레닌주의 서적만큼이나 영어 공부에도 열중했다. 하지만 해당 동아리는 1989년 설인종 고문치사 사건 이후 운동권과 전혀 무관한 동아리가 되었으며 이한열 열사 관련 행사 역시 학생회 주도로 이뤄지고 있다. 동아리에서 보관하던 사료들은 전부 이한열 기념 사업회에 기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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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위 당일 피격당하기 전 이한열 열사. |
최루탄에 피격당한 후 이종창에게 부축받는 모습.[13] | 민중미술가 최병수의 걸개그림.[14] |
1987년 6월 9일 이한열은 '6·10 대회 출정을 위한 범연세인 총궐기 대회'에서 시위대의 일원으로 참여했다.[15] 그날 오후 4시 40분경 학과는 달랐지만 마찬가지로 '소크'였던 도서관학과 2학년생 이종창[16]은 최루탄을 공격적으로 쏴대는 경찰들을 피해 교문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같은 시각 이종창처럼 쫓기고 있었던 이한열 역시 교문 안으로 뛰어 들어가다가 수평으로 직사된 최루탄에 후두부를 피격당했다.[17][18]
최루탄을 맞은 이한열을 발견한 이종창은 이한열을 끌어안고 학교로 들어갔다. 참고로 이종창은 이한열과는 일면식도 없는 사이였으며[19] 시위 현장에서 이한열을 부축하게 된 것은 우연이었다. 이한열은 계속해서 "뒤통수가 아파. 나 괜찮아?"라고 중얼거렸고 뛰어온 학생들이 그를 급히 세브란스병원으로 옮겼으나[20] 그날 오후 5시 30분 이한열은 "내일 시청에 나가야 하는데…"라는 마지막 말을 남기고 혼수 상태에 빠졌다. 이때 이한열의 왼쪽 뇌 전체에 피멍이 들어 있었다고 한다.
피격 직후 병원으로 옮겨져 치료를 받는 이한열 열사. |
6월 항쟁이 끝나고 6.29 선언이 이루어짐으로써 그의 바람이었던 민주화는 이루어졌으나 안타깝게도 이한열 본인은 이를 자신의 눈으로 보지도 못한 채 결국 25일 만인 1987년 7월 5일 오전 2시 5분에 20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22] 1987년에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과 학생이 정부의 폭력 진압으로 희생되는 이 사건이 발생하자 제5공화국에 대한 국민들의 반감은 가중되었고 이는 6월 항쟁으로 이어졌으며 6.29 선언 직후 노태우가 병문안을 온 적도 있었다.
영정을 들고 있는 우상호 당시 총학생회장과 태극기를 들고 있는 우현 당시 총학생회 사회부장.[23] |
장례식은 1987년 7월 9일에 '민주국민장'으로 거행되었다. 훗날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가 되는 우상호 총학생회장이 민주국민장 집행위원장을 지냈으며 위 사진에서 보이듯 시위 현장에서 이한열의 영정 사진을 들고 선봉에 서기도 했다. 우현 총학생회 사회부장은 장례식장에서 태극기를 들고 있었다. 연세대학교 본관 → 신촌로터리 → 서울시청 앞 → 광주직할시 5.18묘역의 순으로 이동되며 진행되었는데 당시 추모 인파는 서울 100만 명, 광주 50만 명 등 전국적으로 총 160만 명이었다고 한다. 이때 문성근의 아버지인 문익환 목사는 아직도 대한민국 현대사의 명연설 중 하나로 꼽히는 연설을 했는데 민주화를 위해 목숨을 바친 '광주 2천여 영령' + 25명의 열사들의 이름을 부르짖는 것이었다. 이때의 인연으로 이한열의 어머니인 배은심은 우상호를 친아들처럼 여겨 왔다고 한다.
"전태일 열사여![24] 김상진 열사여![25] 장준하 열사여![26] 김태훈 열사여![27] 황정하 열사여![28] 김의기 열사여![29] 김세진 열사여![30] 이재호 열사여![31] 이동수 열사여![32] 김경숙 열사여![33] 진성일 열사여![34] 강상철 열사여![35] 송광영 열사여![36] 박영진 열사여![37] 광주 2천여 영령이여! 박영두 열사여![38] 김종태 열사여![39] 박혜정 열사여![40] 표정두 열사여![41] 황보영국 열사여![42] 박종만 열사여![43] 홍기일 열사여![44] 박종철 열사여![45] 우종원 열사여![46] 김용권 열사여![47] 이한열 열사여![48]"
이한열의 추모식에서 한 명연설.[49] 문익환 목사의 절절한 몸짓과 애절한 목소리가 영상으로 남아 있는데 영화 1987에 실리기도 했다.[50]
거의 즉흥적으로 이루어진 연설[51]이었으나 효과는 엄청났고 소름이 끼친다는 평이 자자한 명연설이다. 유튜브[52]
이한열이 최루탄을 맞고 쓰러진 연세대학교 정문 앞에서 한풀이춤을 추던 서울대학교 이애주 교수(1947~2021) 역시 깊은 인상을 주었다. 그러나 이것으로 끝나지 않았는데 운구 행렬 후 서울시청 광장에 남은 100만여 명은 연좌 집회를 열었고, '전두환 퇴진', '청와대 진격'을 외치며 6.29 선언에 주저앉지 말고 전두환 퇴진을 위해 항쟁을 계속하자고 했다. 군중들은 일제히 서울시청에 "조기"를 외치며 조기를 달 것을 요구해 이는 곧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장례위원회, 국민운동본부 지도부, 서울지역대학생대표자협의회(서대협) 등도 100만 인파가 모인 것을 예측하지 못한 까닭에 군중들은 광화문4가 쪽으로 방향을 틀었으나 광화문4가 쪽을 방어하던 경찰 병력이 다연발 최루탄을 발사하자 결국 군중들은 흩어지고 말았으며 6.10 민주 항쟁은 그것으로 막을 내렸다.
이한열 열사 사후 33년인 2020년에 이한열 열사의 유고 시집 《한열: 그대 고운 이름이여》가 발간되었다. '이한열기념사업회'와 '연세대이한열학생위원회'(열의걸음)가 주축이 되어 발간 작업을 수행하였고 초판 500쇄가 발행되었다.
3. 대중매체에서
- 2017년 개봉한 영화 <1987>에서는 배우 강동원이 연기했다. 영화 내내 그저 잘생긴 운동권 대학생 정도로만 묘사되다 영화 막바지에 가서야 이한열 열사였음이 밝혀지기 때문에 나름 반전 요소가 되었다.[53][54] 특히 영화 막바지에 연세대 정문에서 뒤통수에 최루탄을 맞고 쓰러지는 장면은 피가 흐르는 모습까지 당시 상황과 일치할 정도로 똑같이 재현하여 관객들을 놀라게 했다.[55][56] 여기서의 이한열은 단순히 교과서에 실린 열사로서의 모습이 아니라 누군가의 풋풋한 첫사랑, 누군가의 소중한 친구, 의를 행하는 의인으로 묘사되어 인간적인 이한열의 모습을 담아내었다. 여기서 궁금한 이야기 Y의 주장을 반영했는지, 영화에서는 전경이 의도적으로 최루탄 발사각을 낮추는 모습이 나온다. 몇몇 전경은 처음부터 직사로 조준하고 있고 곡사로 조준하고 있던 전경들도 지휘관이 헬멧을 툭툭 치며 지나가자 이내 직사로 조준한다. 이때 경찰에 사용하던 발사기는 SY-44라고 불리는 펌프액션 12게이지 산탄총[57] 앞부분에 장착해 총류탄처럼 사용하는 물건이었는데, 탄두의 질량이 질량이다 보니[58] 직사로 사격할 시 인명피해가 날 것을 우려해[59] 경찰에서도 나름 자체적인 안전장치[60]를 달아 놨다. 하지만 당시 일선 전의경 출신들의 증언에 의하면 온갖 편법을 사용하면 직사로 사격할 수 있었다고 한다.[61] 물론 맞으면 당연히 사람이 다쳤지만, 전의경들 입장에선 시위대가 순식간에 와해되었기 때문에 이만큼 좋은 게 없었다고 한다. 이후 이한열의 사망으로 인해 이 문제가 이슈가 되자 훨씬 작은 중량의 탄두를 발사하는 4연발 신형 발사기를 도입했다.###[62] 다만 이후에도 SY-44가 쓰였다는 전경들의 후일담이나 사진 등을 보면 교체는 지지부진했던 듯하다.
4. 연세대학교 관련
연세대학교에는 이한열 동산과 기념비가 있다. 신촌에 민주화운동가로서는 유일하게 어머니 배은심이 국가에서 받은 보상금을 사용해 '기념관'이 설립되어 있다. 또 연세대학교에서는 매년 학생회의 주도로 6월에 중앙도서관 앞에서 이한열 열사 추모제가 열린다. 특히 2008년 촛불시위 열기가 한창일 때에는 6월 10일 세종로에 수십만 명이 운집한 가운데 노제가 열리기도 하였다. 국제캠퍼스가 생긴 후에는 국제캠퍼스에서도 이한열 열사를 기리는 현수막이 걸리고 위의 최병수의 걸개그림이 국제캠퍼스 종합관 벽에 걸렸으며 생협 앞에 이한열 열사의 영정과 향이 놓이는 등 뜨거운 추모가 이루어지고 있다.
△국제캠퍼스에 걸린 이한열 열사 추모 현수막
△국제캠퍼스 1기숙사 생활협동조합 앞에 놓인 이한열 열사의 영정
팟캐스트 방송 그것은 알기 싫다에서는, 출연자 물뚝심송이 연세대 학생이었을 때 이 현장 근처에 있었다고 이야기했다. 딴지라디오 시절 61화 '역사=나' 편에서 나온다. 누군가가 최루탄에 맞아서 쓰러졌다는 소식을 들었다고 하는데 당시에는 그 피해자가 이한열이었는지도, 최루탄을 직사로 맞아서 쓰러졌다는 내용도 몰랐다고 한다. 이후 연세대 학생들이 경찰의 시신 탈취
2015년 여름, 연세대학교 공과대학 제1공학관 리모델링을 위해 짐을 들어내다 학생회 창고에서 피 묻은 연세대 화학공학과 과기가 발견되었다.[63] 이한열 열사가 최루탄에 머리를 맞고 피 흘리며 쓰러질 때의 피가 묻은 학생회기였다.[64]# 해당 기는 이한열기념사업회에 기증되었으며 기념 사업회는 보존 처리 후 이한열 기념관에 전시할 계획이라고 한다.
이한열 열사의 모교인 연세대학교 근처 서울특별시 마포구 신촌로12나길 26에는 이한열 기념관이 있는데 열사의 생전 유품 등이 전시되어 있다. 개장 시간은 평일 오전 10시부터 오후 5시까지다.
장례 행렬 때 사용되었던 이한열 열사 초상화도 이한열 기념관에 있으며 6월 10일을 전후로 연세대학교에 전시된다. 단 지금의 영정 사진은 1987년 당시의 것이 아니고 2007년에 새로 제작된 것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지금의 초상화는 3번째로 다시 만든 것이다. 1987년 당시 초상화는 그 이듬해인 1988년 9월에 누군가에 의해 뿌려진 검은 락카 스프레이로 인해 훼손되었고 이로 인해 다시 그려진 초상화도 2004년 6월에 누군가에 의해 칼로 찢겨져서 새로 만든 것이라고 한다.[65] # # 참고로 이 초상화도 걸개그림과 마찬가지로 최병수가 그렸다.
2016년 이한열 열사 추모식 때 연세대학교 정문 앞 이한열 열사가 최루탄을 맞았던 위치에 동판을 설치하여 이곳에서 6월 항쟁이 시작되었음을 알렸다. #
5. 여담
- 이한열 열사의 묘는 광주광역시의 망월동 옛 5.18 묘역에 있다.
- 노래를 찾는 사람들의 마른 잎 다시 살아나 라는 곡은 이한열 열사의 추모곡이다.
- 세브란스병원 이송 후 이한열 열사는 좌측 후두부 두개골 골절, 골절 부위 뇌타박상, 뇌출혈 판정을 받았다.
- 이한열 열사의 어머니 배은심 여사는 아들이 사망하고 35년 후 본인이 사망할 때까지 아들과 함께 살던 집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열사의 형제들이 좋은 집으로 모시고 가려고 했지만 사양하였다. 그 이유는 "아들과 함께 살던 집을 떠난다면 아들의 넋이 집을 찾지 못하고 헤멜 것 같아서"라고.
- 김숨 작가의 장편소설 "L의 운동화"는 이한열 열사의 운동화가 복원되는 과정에 대한 이야기다.
- 배우 신현준이 "대학 신입생 시절 당시, 이한열 열사가 사망할 때까지 옆에서 지켜봤다"고 월간 말 1996년 4월호에서 인터뷰했다.[67] 당시 5공정권 심판 등 정치권에 큰 불신을 가지던 시기라 이 사건을 옆에서 지켜보면서 '부끄럽다'고 말하기도.
- 배우 박철민이 그의 중학교 동창이다. 박철민의 기억에 따르면 중학교 친구 이한열은 학교에 흔히 있는 착한 모범생 친구였던 듯하다. "똑똑하고 착하고 성실한 데다,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일에는 고집을 절대 꺾지 않는 학생"이라 증언하고 있다.
- 2017년 5월 이한열 열사의 피격 전후 사진이 최초 공개되었다. 참고
- 최루탄을 맞은 지 정확히 30년이 되었던 2017년 6월 9일 밤 SBS 궁금한 이야기 Y에서 이한열이 최루탄을 맞아 쓰러졌던 당일 찼던 전자 손목시계[68]를 찾고자 하는 내용이 전파를 탔다. 1988년 당시 수배 학생이 이한열의 사촌형에게 "이한열의 시계를 가지고 있으니 나중에 다시 찾아주겠다"는 말을 전하였으나 그 학생은 이후 행방이 묘연해졌고 현재도 그의 전자 손목시계는 찾지 못하고 있다. 관련 링크[69] 여담으로 해당 손목시계는 피격 사진을 눈여겨본 자들이 거의 없었는지 걸개그림에서도 빠져 있었다.
6. 관련 문서
[1] 묘비에 "聖徒 烈士全州李韓烈之墓(성도 열사전주이한열지묘)"라고 써져 있다.[2] 現 광주동산초등학교[3] 해태 타이거즈의 투수 송유석, KBO 심판 나광남, 진흥고 감독 김인호가 고교 동기다.[4] 경영학과가 연세대학교 경영대학으로 분리된 건 2000년대 초반이고 이한열 재학 당시에는 상경대학 산하였다.[5] 1932 ~ 1995. 10. 20. 향년 63세.[6] 1940. 1. 17. ~ 2022. 1. 9. 향년 81세.[7] 강원대학교 자연과학대학 지질·지구물리학부 지구물리학전공 교수[8] 모교인 광주진흥고등학교에 세워진 추모비에 적힌 약력에 따르면 전라남도 곡성군 출생이다.# 한편 이한열 기념관에 전시된 학생증에는 본적이 화순군으로 되어 있다.[9] 당시 전남에서는 공부 좀 잘한다 하면 광주로 보내는 게 보통이었다.[10] 이한열의 어머니가 시내의 참상을 목격한 후 이한열을 보호해야겠다는 생각에 집에 있도록 당부한 것이다.[11] 이 내용은 NHK에서 방송된 다큐멘터리에서 이한열 어머니의 증언과 함께 방영되었다.[12] 1986년[13] 이 사진은 로이터 통신의 정태원 사진 기자가 촬영하였고 중앙일보와 뉴욕 타임스 1면 머릿기사에 실렸다. AP통신이 선정한 20세기 100대 보도 사진에 선정되어 6월 항쟁 항목에 있는 "아! 나의 조국" 사진과 함께 선정되었다.[14] 매년 이한열 열사 추모 기간에 연세대학교 중앙도서관이나 학생회관 건물에 걸리는데 그림의 세로 방향 크기는 건물 3층 정도로 크다. 현재 연세대학교에 보관 중이며 6월 9일 무렵 연세대학교 중앙도서관에 걸어놓고 추모 행사를 진행했으나 연세대학교 중앙도서관 리모델링 이후로 중앙도서관 옥상에 올라가기 어려워진 관계로 2014년부터는 학생회관에 걸고 있다. 송도국제도시에 개교한 1학년 및 몇몇 학과의 이원화 캠퍼스인 국제캠퍼스에도 동일한 그림을 제작하여 같은 시기에 걸고 있다. 처음에는 전단 크기로 찍어낸 작은 판화였으나 걸개그림을 만들어보자는 제안에 판화를 크게 확대해 천에 스케치하고 먹줄을 튀겨 선을 잡은 그림이다. 학생회관 2층에 펼쳐 놓고 작업했으며 학생 수십 명이 달려붙어 대략 하루만에 완성했는데 인근 봉제 공장 공단에 가서 걸개그림을 매달기 위해 재봉해 왔다고 한다. 2019년 6월에도 걸렸으며 2020년에는 이한열 열사 추모사업회에서 새로운 걸개그림을 인쇄하여 걸게 되었다.[15] 정확하게는 당시 학생 운동 용어로 '소크(soc)'라고 부르는 전위대 역할이었는데 학생과 전투경찰 사이에서 대치하면서 학우들을 보호하고 시간을 버는 훗날 사수대 등으로 불리는 조직.[16] 이후 그는 연세대학교 교직원으로 근무하다가 2011년 연세대학교 노조 위원장으로 선출되었고 2017년에는 경기도 파주시 가람도서관 관장으로 재직하는 게 확인되었다. 2017년 현충일에는 6월 항쟁 30주년을 맞아 인터뷰를 하였다. 영화 1987에서는 강정우가 그를 연기하였다.[17] 이 최루탄은 수류탄처럼 던지는 형태가 아니라 척탄통과 비슷한 발사형이다. 원래 30도 이상 위로 들어서 발사하는 것이 원칙이었고 안전 장치가 있어 그러지 않으면 발사를 하지 못하는데 특정 목표물을 명중시키기 위한 것이 아니다.[18] 궁금한 이야기 Y 2017년 6월 9일 방송분에서는 당시 경찰이 일부러 노리고 쏘았을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저 안전 장치라는 것도 이쑤시개 같은 걸 쑤셔넣거나 총기 자체를 가로로 눕혀 발사할 경우 무력화할 수 있었다고 한다.[19] 따라서 1987에서 이종창이 "한열아!!한열아!!!"라고 외치면서 뛰어간 건 영화적 연출이다.[20] 의식이 있을 때는 자신를 들어 옮기는 학생들에게 "쉬었다 가자."라고 하는 등 본인이 가장 고통에 괴로워할 상황에서도 배려심 있는 모습을 보였다.[21] 한겨례 ‘이한열 사망진단서엔 ‘외인사’로 적혀 있다’ 기사 참고.[22] 이 사건으로부터 27년 전에 일어난 4.19 혁명의 발화선이 되었던 김주열 열사 사망사건도 고성능 최루탄을 직사한 것 때문이었다. 김주열 열사는 알루미늄제 최루탄이 눈에 직격으로 박힌 끔찍한 모습이었기 때문에 당시 찍힌 사진들 중에는 얼굴을 가린 경우가 종종 있는데 이한열 열사는 뒤통수를 맞았다. 김주열 열사와 착각해서 이한열 열사도 최루탄을 맞고 바로 죽은 것으로 아는 사람이 많은데 사망한 채로 발견되었고 상태를 보면 즉사한 것으로 추정되는 김주열 열사와 달리 이한열 열사는 현장에서 사망하지 않았고 병원에 옮겨져 약 1개월 동안 생존해있다가 숨졌다. 즉사했든 아니었든 이한열 열사가 정말 고통스럽게 죽은 것은 변함없으니 크게 유의미한 설명일지는 의문이다.[23] 고개를 숙이고 있는 왼쪽 인물은 교육과학대학 학생회장이자 체육교육과 학생이라고 한다. 체육교육과 소속으로 신촌세브란스병원을 지키던 인원 중 87학번 배우 신현준도 있었다.같은 날 찍은 다른 사진, 경향신문 기사[24] 1970년 11월 13일 노동자 권리를 외치며 분신 자살.[25] 서울대학교 농과생. 1975년 4월 11일 유신 체제와 긴급 조치에 항거하여 할복 자살. 이 사건으로 한심석 당시 서울대학교 총장이 사임했으며 명동 민주구국선언의 도화선이 되었다.[26] 일명 재야 대통령. 1975년 8월 17일 포천시 약사봉에서 의문사.[27] 서울대학교 경제학과 4학년. 1981년 서울대생의 침묵 시위에 경찰이 교내까지 진입해 진압하자 이에 항의하여 투신 자결.[28] 서울대학교 공대. 1983년 레이건 방한에 맞추어 민주화 투쟁을 기획하던 중 사복 경찰에 쫓겨 몸을 피하다가 추락사.[29] 서강대학교 무역학과 3학년. 1980년 5월 30일 광주의 실상을 알리는 전단을 뿌린 후 투신 자결.[30] 서울대학교 자연대학 학생회장. 1986년 전방 입소 반대 투쟁 중 분신 자결.[31] 서울대학교 정치학과. 김세진 열사와 함께 전방 입소 반대 투쟁을 했고 같이 분신 자결.[32] 서울대학교 원예학과. 1986년 5월 26일 오월제 행사 중 전두환 독재 타도를 외치며 투신 자결.[33] YH무역 여공 노조원. 1979년 8월 11일 경찰의 신민당사 강제 진입 과정에서 사망.[34] 부산산업대학교(現 경성대학교) 행정학과에 재학 중 10.28 건국대 항쟁이 전두환 정권의 폭력적 대응에 의해 진압되자 11월 5일 이에 항의하여 투신.[35] 노동자. 1986년 노동 탄압에 항거하여 목포역에서 분신 자결.[36] 경원대학교 법학과. 1985년 9월 17일 전두환 독재에 항의하여 분신 자결.[37] 신흥정밀 노동자. 1986년 3월 17일 근로기준법 준수와 노동 3권 보장을 요구하며 분신 자결. 그가 당시에 근무하던 곳이 필기구 회사 '마이크로'의 옛 이름이다.[38] 삼청교육대 소집 후 보호감호 처분으로 청송보호감호소 복역 중 재소자 처우 개선을 요구하다 1984년 10월 14일 교도관들의 집단 폭행으로 사망.[39] 노동자. 1980년 6월 9일 노동권 보장 및 광주 항쟁의 진실 규명을 요구하며 분신 자결.[40] 서울대학교 국어국문학과. 1986년 5월 21일 가두 시위 중 연행되었다 풀려난 뒤 한강에 투신 자결.[41] 하남공단 신흥금속 근로자. 1983년 3월 6일 광주 학살에 대한 정부 및 미국의 책임을 규탄하고 내각제 반대를 외치며 미국 대사관 앞에서 분신 자결.[42] 노동자. 1987년 5월 17일 부산에서 광주 항쟁의 전두환 책임을 물으며 분신 자결.[43] 민경교통 노조 복지부장. 택시기사 처우 개선을 요구하다 1984년 11월 30일 분신 자결.[44] 노동자. 1985년 8월 15일 전두환 독재에 항거하고 광주 항쟁에 대한 책임을 물으며 분신 자결. 광주 항쟁 당시 시민군이기도 하였다.[45] 서울대학교 언어학과. 1987년 1월 14일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수사관들의 물고문으로 인해 사망. 정부는 탁 치니 억 하고 죽었다라고 사건을 은폐했으나 시민들이 진상 규명을 요구하며 6월 항쟁이 시작되었다.[46] 서울대학교 사회복지학과. 민추위 사건으로 수배 중 1985년 10월 11일 시신으로 발견되었고 자살로 결론이 나왔으나 의문사 의혹이 있다.[47] 서울대학교 경영학과. 카투사로 군 복무 중 1987년 2월 20일 내무반에서 목을 매달고 죽은 채 발견.[48] 연세대학교 경영학과. 1987년 6월 9일 시위 도중 뒷머리에 최루탄을 맞고 7월 5일 사망.[49] 즉흥적으로 이루어진 연설이었다.[50] 아들 문성근이 영화에 출연했는데 이 영화에서는 정반대의 역할인 장세동 국가안전기획부장 역을 맡았다.[51] 열사들의 명단도 미리 준비된 것이 아니라 연설 직전에 문익환 목사에게 열사들의 명단이 필요하다고 요청받아서 기억나는 대로 쓰고 넘겨준 것이라고 한다.[52] '지금 이 순간의 역사'의 저자 한홍구는 친구들과 함께 민주 인사들의 연설을 듣고 있는데 당시 김영삼이나 김대중 같은 유명 인사들이 연설했다고 한다. 연설이 지루했지만 문익환 목사의 연설을 듣자 졸던 학생들마저 모두 일어나 뜨거운 반응을 보냈다고 한다.[53] 실제로 각종 포털의 영화 소개 페이지 등에선 단순히 특별출연이라고만 언급되었고 배역이 적혀 있지 않았으며 실제 배역명도 '이한열'이 아닌 '잘생긴 남학생'이었다.[54] 그가 이한열이라는 떡밥은 꾸준히 뿌렸는데 대표적으로 신발. 극중에서 열사가 등장할 때마다 신발을 계속 보여주고 신발이 유달리 부각되는데 실제로 열사가 신고 다니던 신발과 똑같은 신발이다. 6월 민주 항쟁에 관심이 있던 사람이라면 신발이 처음 등장할 때 "어어?" 했을 것이고 만화사랑 동아리 옷을 입고 활동하는 장면이 나올 때 무릎을 탁 쳤을 것이다.[55] 차이점이 아주 없지는 않은데 실제로는 쓰러진 이한열 열사를 부축했던 이종창이 이한열과 모르는 사이였지만 영화에서는 쓰러진 이한열을 보고는 "한열아! 한열아!"라고 부르며 그를 부축하러 달려간다. 영화에서는 오른쪽 신발이 벗겨졌지만 실제 사진에서는 양발 다 신발을 신고 있다. 시위 종료 집회에 총학생회장 우상호가 신발 주인을 찾았으나 현장에서 못 찾아 신발 한 쪽만 신고 집에 잘 가라고 했는데 그것이 이한열의 신발이었다.[56] 실제 사진은 영화가 끝난 뒤 엔딩 스크롤에서 나온다.[57] 사진으로 확인할 수 있는 종류는 윈체스터사의 모델 1200과 S&W사의 모델 916 등이 있으며, 레밍턴이나 이사카, 베넬리 등 회사의 물건을 사용했다는 증언도 존재한다.[58] 무게가 거의 500g이고 크기는 벽돌만하다.[59] 이는 시민들을 보호하기 위함이 아니라, 최루탄을 직사로 쐈다가 사람이 맞아 인명피해가 발생하면 어떤 일이 발생할 것인가를 신군부 측에서도 아주 잘 알고 있었을 것이기 때문일 것이다.[60] 총구를 45도 각도 이상으로 들어올리지 않으면 방아쇠가 격발되지 않도록 해놨다.[61] 총을 순간적으로 앞으로 밀면서 사격하거나, 옆으로 눕혀서 쏘거나, 아예 안전장치가 작동 안 되게 이쑤시개를 끼워 놓는 등.[62] 사진의 산탄총은 이탈리아 파브암(FABARM)사의 SDASS 초기형.[63] 2001년에 표구를 떠서 보관했지만, 어느 순간 실전되다 다시 찾은 것이다.[64] 일설에 따르면 이 기로 이한열 열사를 지혈했다고도 한다.[65] 참고로 칼로 찢겨진 해당 초상화는 수선 작업을 거친 후 광주비엔날레에서 전시된 적이 있다. #[66] 사망 20주기였던 2007년에야 생겼다. 참고로 광주진흥고는 2004년에 북구 운암동에서 현재의 위치인 광산구 신창동으로 이전했다.[67] 아래 서술한 그것은 알기 싫다 속 이야기를 보면 도움이 될 것이다. 그도 당시 병실 주변을 지키던 이들에 속해 있었던 듯하다.[68] 지금도 나오는 카시오사의 카시오트론-쿼츠 타입 전자시계다. 현재 판매되고 있는 신형 모델인 A159의 이전 모델이니 DB-310 혹은 380 모델로 추정된다. 다만 사진을 자세히 살펴 보면 프레임이 이전의 두 모델과 살짝 달라, 29CS-11B-2 기종일 가능성도 있다.[69] 다음 스토리펀딩 자료다. 서비스 종료로 인해 아카이브 링크를 올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