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24 18:32:45

5.18 사적지 목록


5.18 민주화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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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목록
2.1. 1호 - 전남대학교 정문2.2. 2호 - 광주역 광장2.3. 3호 - 구.시외버스 터미널 ▶ 현 광주은행 본사2.4. 4호 - 금남로2.5. 5호 - 구.전라남도청 일대
2.5.1. 5-1호 - 구.전남도청 ▶ 현 국립아시아문화전당 건립지2.5.2. 5-2호 - 5.18 민주광장2.5.3. 5-3호 - 상무관2.5.4. 5-4호 - 광주 YMCA 앞
2.6. 6호 - 구.광주 YWCA 앞2.7. 7호 - 구.광주문화방송 건물 ▶ 전남여고 건너편2.8. 8호 - 녹두서점 옛터 ▶ 장동로터리 부근2.9. 9호 - 전남대학교병원2.10. 10호 - 광주기독병원2.11. 11호 - 구.적십자병원 ▶ 前 서남대학교병원2.12. 12호 - 조선대학교2.13. 13호 - 홍림교2.14. 14호 - 주남마을 입구2.15. 15호 - 간 민간인 학살지 ▶ 효덕지하차도 위2.16. 16호 - 농성광장 격전지 ▶ 농성역 1번출구2.17. 17호 - 상무대 옛터 ▶ 5.18 자유공원2.18. 18호 - 무등경기장 정문 ▶ 광주-KIA 챔피언스 필드2.19. 19호 - 양동시장2.20. 20호 - 광주공원2.21. 21호 - 광주고등학교 정문 인근(첫 발포지)2.22. 22호 - 옛 광주교도소2.23. 23호 - 구.국군광주병원2.24. 24호 - 망월동 5.18 묘역2.25. 25호 - 남동성당2.26. 26호 - 505보안부대 터 ▶ 5·18 역사공원2.27. 27호 - 들불야학 옛터2.28. 28호 - 전일빌딩2.29. 29호 - 홍남순 변호사 가옥
3. 관리 실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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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5.18 민주화운동과 관련된 역사 현장 중에서 광주광역시에서 지정한 사적지를 모아둔 목록이다. 해당 링크에 자세한 설명이 되어있고, 5.18기념재단에서 일명 '오월길'이라는 탐방로를 안내해주고 있다. 사적지 앞에는 대부분 횃불 모양을 상징하는 표지석이 있기 때문에[1] 사적지를 찾기 쉬운 편이다. 해당 표지석에는 사적지에 대한 설명이 한글과 영어로 서술되어 있다.

다만 5.18 사적지로 지정한 곳이 광주의 급속한 성장으로 인해 일부 기관 이전 등으로 많이 변한 곳도 있고, 도시개발로 인해 없어지거나 훼손된 곳들이 많으면서 사적지 관리의 문제점이 성토되고 있다. 특히 대체로 나중에 지정된 505보안부대 터나 구 국군병원 자리는 제대로 관리가 이뤄지지 않아 우범지역화 되고 있다는 지적도 있다.

이 문서에서는 사적지 목록에 대한 간단한 설명 및 찾아가는 방법을 서술한다.

2. 목록

5.18 사적지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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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호전남대학교 정문6호구)광주 YWCA14호주남마을 입구22호옛 광주교도소
2호광주역 광장7호구)광주문화방송15호광목간 민간인 학살지23호구)국군광주병원
3호구)시외버스 터미널8호녹두서점 옛터16호농성광장 격전지24호망월동 5.18묘역
4호금남로9호전남대병원17호상무대 옛터25호남동성당
5-1호구)전남도청10호광주기독병원18호무등경기장 정문26호505보안부대 터
5-2호5.18 민주광장11호구)적십자병원19호양동시장27호들불야학 옛터
5-3호상무관12호조선대학교20호광주공원28호전일빌딩245
5-4호광주 YMCA13호홍림교21호광주고등학교 정문29호홍남순 변호사 가옥}}}}}}}}}

2.1. 1호 - 전남대학교 정문

거리뷰
이곳은 한국 민주주의 역사에 찬연히 빛나는 5·18광주민주화운동이 시작된 곳이다. 1980년 5월 17일 자정 불법적인 비상계엄 전국 확대에 따라 전남대에 진주한 계엄군은 도서관 등에서 밤을 새워 학문에 몰두하고 있던 학생들을 무조건 구타하고 불법 구금하면서 항쟁의 불씨는 뿌려졌다. 이어 18일 오전 10시경, 교문 앞에 모여든 학생들이 학교 출입을 막는 계엄군에게 항의하면서 최초의 충돌이 있었으며, 학생들은 광주역과 금남로로 진출해 항의 시위를 벌렸다. 계엄군은 항쟁기간 중 시내에서 끌고 온 시민들을 여기 종합운동장과 이학부 건물에 수용, 집단 구타하는 과정에서 사망자가 발생하였고 주검은 학교 안에 매장되었다가 그 후 발굴되었다. 당시 정문 앞에는 서방천이 흐르고 그 위에 다리가 놓여 있었으나 지금은 복개되었다. 학생과 시민들을 불법 감금했던 이학부 건물도 철거되었으며 교문도 모양이 바뀌었다.

광주광역시 북구 용봉로 77 (용봉동) 소재.

5.18의 상징적인 장소로는 주로 옛 전남도청 앞 광장을 떠올리지만, 사적지 1호는 5.18 민주화운동의 발상지라고 할 수 있는 전남대학교이다. 시국 상황에서 교수 및 학생들의 성토가 많이 있었던 곳이었고 그로 인해 교수들과 학생들이 거리로 나서게 된 것. 사적지 1호라는 특성 덕분에 사적지 표지석 사이즈도 매우 크다. 문제는 지금의 정문은 5.18 당시의 그 정문이 아니라는 것. 5.18 당시의 정문이 낡고 협소하다고 헐어버리고 새로 지은 것이다.

전남대 정문으로 가는 버스들이 몇몇 있기 때문에 찾아가는 방법은 어렵지 않은 편. 다만 정문은 후문에 비해서 교통량이 적다. 참고로 전남대학교의 캠퍼스 크기는 국내 대학 중에서 손가락에 꼽는 광대한 캠퍼스 규모를 자랑하기 때문에 후문에서 내려서 정문으로 갈 생각을 하지 말고, 그냥 정문으로 바로 가는 것을 추천한다.

2.2. 2호 - 광주역 광장

거리뷰
이곳은 5·18광주민주화운동 당시 광주시민과 계엄군 사이에 치열한 공방전이 벌어졌던 곳이다. 시위가 더욱 가열된 5월 20일 밤 광주역에 주둔해 있던 계엄군은 무자비한 유혈 진압에 항의하며 나아가는 비무장 시민들을 향해 발포, 다수의 사상자를 내었으며, 21일 아침 이곳에서 주검 2구가 발견되었다. 이들 주검이 전남도청 앞 광장으로 옮겨오자 이 소식을 들은 시민 수십만명이 민주화운동에 적극 동참함으로써 항쟁은 절정으로 치달았다.

광주광역시 북구 무등로 235 (중흥동) 소재.

광주 시내 철도 교통의 요충지이자 광주역 앞 광장이 사람들이 많이 모일 수 있었던 곳이었으므로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던 곳이기도 하다. 광주에서 외부로 나갈 수 있는 길목 중 한 곳이었기 때문에 계엄군 입장에서는 광주 시민들의 진입을 막아야 했던 곳이기도 하다.

현재는 광주의 교통 분담이 철도에서 고속버스로 많이 넘어가버린 상황이기 때문에 예전에 비해서 광주역 상권이 많이 초라해진 상태이다. 여기에 KTX 출발지 지위도 광주송정역으로 넘어가면서 광주역 시/종착 열차 횟수도 많이 줄어서 썰렁한 상태. 그래도 광주역에서 출발하는 농어촌버스(광신고속 160번, 담양운수 노선 등)들이 아직 상당수 남아있기도 하다. 역 바로 앞에 표지석이 있으므로 찾기는 쉬운 편. 역이라서 철도로 접근하는 것이 가장 쉽다. 광주송정역에서 광주역으로 가는 통근열차가 1일 28회 운행한다. 시내버스도 이 역을 거쳐가는 것이 많다.(이 통근 열차도 지난 2024년 3월경 적자를 이유로 운행을 중단했다.)

2.3. 3호 - 구.시외버스 터미널 ▶ 현 광주은행 본사

거리뷰
여기는 5·18광주민주화운동 당시 시외버스공용터미널이 있던 곳으로, 전남 일원을 잇는 교통 중심지였다. 5월 19일 오후 이곳에서 계엄군의 과잉진압을 규탄하는 대규모 시위가 있었다. 계엄군은 대합실과 지하도에까지 난입, 총검을 휘둘러 이곳은 일시에 피비린내 나는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이 소식은 시외버스를 통해 시외로 나간 사람들에 의해 곳곳으로 전파돼 항쟁이 전남 전역으로 확산되는 계기가 되었다. 이곳은 한때 공수부대 숙영지로 사용되기도 했다.

광주광역시 동구 제봉로 225 (대인동) 소재.

현재는 시외버스터미널의 유스퀘어 이전으로 해당 부지에 광주은행 본사와 롯데백화점 광주점이 들어서 있다. 롯데백화점 건너편에 있는 천주교 북동성당[2]도 사적지로는 지정이 되어있지 않지만, 당시 5.18의 치열한 흔적을 보여주는 총탄 자국이 건물 외부에 남아있다. 한때 이 곳이 광주의 교통중심지였던 흔적으로 홍등가가 상당수 이 곳에 있었으나 2015년 가을 광주시 일제 단속으로 대부분 문을 닫았다.[3] 하지만 5.18 당시 홍등가에서 일했던 사람들도 한 사람의 시민을 살리기 위해 병원등지에서 헌혈을 하는 등 그들도 치열한 역사 현장 속에서 한 사람의 시민을 더 살리기 위해 노력하였다.

표지석은 광주은행과 백화점 사이에 있는 흰색 건물 지하보도 입구에 있다.

2.4. 4호 - 금남로

거리뷰
이곳 금남로는 광주시민들이 계엄군에 맞서 5·18광주항쟁 기간 중 연일 격렬하게 저항했던 항쟁의 거리다. 5월 18일 가톨릭센타 앞에서 최초의 학생 연좌시위가 있었으며 5월 19일부터 수많은 시민들이 끊임없이 모여들어 투쟁 의지를 불태웠다. 5월 20일 저녁에는 택시를 중심으로 100대 이상의 각종 차량이 참가한 대규모 시위가 이 거리를 누볐다. 21일 계엄군의 집단 발포 전까지 30여만 광주시민이 매일 운집, 군사독재 저지와 민주화를 촉구했던 금남로는 5·18광주민주화운동을 상징하는 거리다. 5·18광주민주화운동 이후에도 항쟁의 진실을 밝히려는 투쟁이 이 거리를 중심으로 전개되었고, 가톨릭센타에서는 민주화를 위한 시민 집회가 계속 열렸다. 항쟁 당시 가톨릭센타에는 천주교광주대교구청과 CBS광주방송국이 들어서 있었다. 천주교광주대교구청에서는 시내 곳곳에서 벌어지는 계엄군의 잔혹한 살상행위와 이에 저항하는 시민들의 피어린 투쟁을 전국의 교회기관에 알려 광주의 진실을 전국과 세계에 전파시켰으며 항쟁 이후에도 계속 '5월광주'를 불밝혀 왔다.

광주광역시 동구 금남로 일대 (금남로1·2·3·4가)

4호 사적지 표지석은 옛 가톨릭센터 앞에 있다. 이 곳에 이유는 사적지 해설판에 적여있듯이 5.18 당시 중요한 역할을 했던 곳이었기 때문. 5.18이 종료된 이후 광주의 천주교 사제를 포함한 각계 인사들이 이 곳에서 5.18의 역사자료를 모아 외부에 알리기 위한 운동을 꾸준히 해왔으며, 이후 이것이 5.18 관련 자료가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됨으로써 그 결실을 맺었다.

금남로 가톨릭센터 건물은 2012년까지 광주평화방송을 포함, 가톨릭센터가 입주해 있었다가 이후에 상무지구로 이전하면서 주인이 없는 상태. 다만 노후화된 건물이라 안전등급이 낮게 나온 문제로 해당 건물에 대한 보전 문제를 놓고 고민을 하였으나 그 상징성을 고려하여 철거하지 않고 리모델링 후 '5.18 아카이브 센터'로 사용하기로 2013년 결정이 났으며 2015년 현재 "광주광역시 5.18민주화운동기록관'으로 개관하여 운영 중이다.

2.5. 5호 - 구.전라남도청 일대

5.18 민주화운동 역사의 가장 중심이 되었던 곳이다. 본래 도청앞 일대를 포함한 금남로, 충장로는 과거 교통 및 업무, 금융, 행정, 상업의 중심지였던 만큼 가장 많은 사람들이 모일 수 있었던 상징적인 장소였다. 훗날 구.전남도청 앞 분수대 광장은 5.18 민주광장이라는 이명이 붙었다. 다만 전남도청의 무안 이전 및 상무신도심의 개발로 인해 현재는 예전의 활기를 찾지 못하는 상태.

전남도청 자리는 2015년까지 국립아시아문화전당 부지에 편입되면서 공사에 들어가 있어 도로 구조가 많이 바뀌는 등 복잡한 상태였다가 2014년 말을 기준으로 민주광장 부지가 개방되었다. 2015년 11월 국립아시아문화전당이 개관하면서, 5.18 당시 이곳에 서있다가 농성광장으로 이전했던 시계탑이 다시 돌아와 분수대 앞 원래 자리에 복원되었다. 그리고 문재인 정부 출범 후 국립아시아문화전당 건물군을 다시 대폭 개조하여 구 전남도청 건물을 5.18 당시의 모습으로 다시 복원하기로 결정되었다.

2.5.1. 5-1호 - 구.전남도청 ▶ 현 국립아시아문화전당 건립지

이곳 전남도청은 5·18광주민주화운동 본부가 있던 곳이며, 최후의 항전을 벌이다 수많은 시민군이 이곳에서 산화했다. 항쟁 초기 이곳 도청은 군부독재에 대한 시민들의 항의와 분노를 표출하는 표적이었다. 그것은 "가자, 도청으로!"라는 짧은 구호 속에 잘 응축되어 있다. 계엄이 불법 확대되면서 이곳에 주둔하고 있던 계엄군은 집단 발포로 엄청난 희생을 치른 광주시민들의 결사항전에 쫓겨 5월 21일 오후 광주시 외곽으로 철수하였다. 이후 이곳에서는 항쟁지도부가 활동하였고, 시민수습대책위원회가 수습책을 논의하는 등 시민 공동체의 중심이었다. 이곳은 또 5월 27일 새벽 계엄군의 무력 진압에 맞서 싸운 시민군의 최후 결사항전지로, 마지막 항전에서 수많은 시민군들이 산화하였다.

광주광역시 동구 문화전당로 38 (광산동) 소재.

참고로 전남도청의 5.18 사적지 표지석은 다른 표지석과는 다르게 별도의 조각으로 제작되어 있다.#

2.5.2. 5-2호 - 5.18 민주광장

거리뷰
이곳 5·18민주광장은 한국 민주주의의 상징적 장소다. 5·18광주민주화운동 당시 광주시민들이 여기 분수대를 연단으로 하여 각종 집회를 열어 항쟁 의지를 불태웠다. 5월 18일 이전 3일 동안 학생과 시민들은 이곳에 모여 대규모 '민족·민주화대성회'를 열고 시국선언문을 발표해 군사통치 종식과 민주화를 촉구하였다. 이 집회에는 광주시내 고등학생들도 대거 참여하였다. 5월 21일 계엄군 철수 이후 끊임없이 민주화 투쟁 결의를 다지는 각종 궐기대회가 열렸던 이곳은 바로 5·18 광주민주화운동 정신을 낳은 산실이다. 항쟁 후에도 전국에서 벌어진 민주화 투쟁 과정에서 산화한 민주 열사들의 영혼이 이곳에 들러 시민들의 분향을 받으며 전국민의 투쟁 의지를 일깨웠다.

광주광역시 동구 문화전당로 38 (금남로1가) 소재.

표지석은 롯데리아 옆의 주차장 건물. 지금은 주차장으로 쓰이고 있지만 5.18 당시에는 수협 광주전남본부가 있었던 곳이다. 상무지구로 이전을 하면서 건물이 헐리고 주차장으로 사용되고 있는 중. 위에 언급된 5-1호 사적지 표지석이 공사현장에 편입된 관계로 5-1호 안내문과 합쳐져서 재정비되었다.

2.5.3. 5-3호 - 상무관

이곳 상무관은 5·18광주민주화운동 당시 희생자들의 주검을 임시 안치했던 곳이다. 집단 발포와 무자비한 진압에 희생된 주검이 이곳에 안치되자 시민들은 다시 한번 계엄군의 행위에 분노의 눈물을 삼켰다. 5·18광주민주화운동 기간동안 광주시민들은 줄지어 분향하며 희생자들의 넋을 위로하면서 민주화 의지를 더욱 불태웠다.

광주광역시 동구 문화전당로 38 (금남로1가) 소재.

본래 상무관은 광주청년단의 사무실이 있었던 곳이었고, 문화전당 공사 이전까지는 전남경찰청 소속 경찰들과 전남유도회의 체육관으로 사용되었다. 5.18 당시에는 수습된 시신들 및 실종자 명단이 그 옆의 남도예술회관과 함께 걸려져 있었던 곳이기도 하다.

표지석은 광장 내 구 도청 건너편 상무관 앞에 설치되어 있다. 한강 작가의 소설 소년이 온다에 등장하였다.

2.5.4. 5-4호 - 광주 YMCA 앞

거리뷰
이곳은 5·18광주민주화운동 당시 항쟁지도부가 자주 옥내집회를 열었던 곳이다. 5월 26일에는 계엄군의 무력진압을 막기 위해 자위적 수단으로 시민군에게 총기훈련을 실시했으며, 항쟁 이후에도 광주항쟁정신을 계승하기 위한 수많은 집회가 이곳에서 열렸다. 이곳은 60년대 이후 군사정권에 저항하는 반독재·반유신운동의 거점이었다.

광주광역시 동구 금남로 264(금남로1가) 소재.

5-1, 5-2호 통합 표지석과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다. 이곳은 따로 표지석이 있지 않고 YMCA 건물을 리모델링하는 과정에서 사적지 내용을 별도의 동판에 새겨 입구 쪽의 기둥에 박아두었다.

국립아시아문화전당(전남대병원 방향) 정류장 바로 앞에 있으므로 찾기는 어렵지 않다.

2.6. 6호 - 구.광주 YWCA 앞

거리뷰
이곳은 5·18광주민주화운동 당시 광주YWCA 건물이 있던 자리다. 항쟁기간인 5월 24일부터 그 건물 안에 있던 신용협동조합 관계자들과 들불야학 청년들은 '민주시민회보'를 제작, 광주항쟁 소식을 전국에 전했으며, 민주인사들은 이곳에서 시민의 희생을 막고 사태를 수습하기 위한 대책회의를 수시로 가졌다. 이곳은 5월 27일 새벽 전남도청을 공략하던 계엄군의 주요 공격목표가 되었고 최후의 항전에서도 많은 시민군이 희생되었다.

광주광역시 동구 중앙로196번길 31-6 (대의동) 소재.

YWCA가 북구 중흥동으로 이전한 뒤 삼성생명 광주지사가 자리를 잡고 있었다가, 현재는 '골든 래비츠&갤러리 D'라는 커피숍이 들어와 있다. 5호 사적지와는 멀지 않은 곳에 있다.

2.7. 7호 - 구.광주문화방송 건물 ▶ 전남여고 건너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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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는 5·18광주민주화운동 당시 광주문화방송(광주MBC)이 있었다. 계엄하에서 군부의 검열을 받던 언론은 항쟁 열기는 물론 계엄군의 과잉진압 행위마저 제대로 보도하지 않아 시민들의 빗발치는 항의를 받았다. 시민들이 진상을 사실대로 보도하라고 거세게 항의하는 과정에서 5월 20일 밤 광주문화방송, 다음날 새벽 KBS 광주방송국 건물이 불탔으며 광주세무서 건물에도 불길이 올랐다. 국민의 세금으로 유지되는 계엄군에 대한 항의요, 응징의 표현이었다.

광주광역시 동구 제봉로 145 (궁동) 소재.

이곳은 옛 광주문화방송 사옥이기도 하면서 조선 시대에 축조되었다 대한제국 말기에 철거된 광주읍성의 동문(서원문)이 있었던 터이기도 하다. 현재는 해당 자리에 경찰 공무원 입시학원이 들어서 있다. 학원 이름이 적절하게도 김재규경찰학원이다

2.8. 8호 - 녹두서점 옛터 ▶ 장동로터리 부근

거리뷰
이곳은 5·18광주민주화운동 산실 가운데 한곳인 녹두서점이 있던 자리다. 유신체제 말기 암울한 시대에 민주 청년 학생들이 모여 열띤 시국 토론을 벌이던 사랑방이었던 이곳은, 5월17일 밤 전국에서 많은 민주인사들이 예비검속 되자 청년 학생들이 이곳에 모여 격문과 현수막을 제작하는 등 민주화를 촉구하는 궐기대회를 준비하고 대책을 논의한 항쟁의 산실이다. 항쟁기간 중 광천동 '들불야학'에서 활동하던 강학들과 노동자들도 이곳을 중심으로 정보를 수집하고 서로 연락을 취하면서 그들이 발행하던 '투사회보'를 제작해 광주시내에 살포, 광주민주화운동 소식을 시시각각 시민들에게 알렸다.

광주광역시 동구 제봉로 134 (장동) 소재.

7호 사적지 길 맞은편 장동로터리 쪽으로 올라오다 보면 만날 수 있다. 현재는 일반적인 상가가 들어서 있으며 국립아시아문화전당의 최북단과 마주하고 있다.

현재는 불교봉사단체인 '자비신행회'가 들어서있다.

2.9. 9호 - 전남대학교병원

거리뷰
이 병원은 5·18광주민주화운동 당시 부상당한 시민과 시민군을 헌신적으로 치료하여 의료인의 참모습을 보인, 광주항쟁의 야전병원이었다. 복도에까지 밀려든 부상자, 치명상을 입고 신음하는 중환자들 속에서 의사와 간호사들은 부상자들을 한 사람이라도 더 살려내려고 밤낮을 잊고 혼신의 노력을 다했고, 자발적인 시민 헌혈 행렬은 광장에 까지 이어졌다. 시민군은 이 병원 옥상에 무기를 갖추고 계엄군과 치열한 저항전을 펴기도 했던 곳이다.

광주광역시 동구 제봉로 42 (학동) 소재.

9호부터 11호까지는 5.18 부상자가 발생하였을 때 부상자들을 치료했던 병원들이다. 특히 대학병원이었던 전남대병원의 경우에는 넘쳐나는 부상자들을 치료하기 위해 전남대 의대생들까지 치료에 동원되기까지 했다. 9호 사적지 표지석은 전남대병원 장례식장 앞에 있다.

2017년에는 5.18 당시 전남대학교병원에서 부상자를 치료했던 당시 의료진들의 기억을 채록한 ‘5.18 10일간의 야전병원’ 책자가 출간되었으며 2017년 5.18 언론상을 수상하였다.#

2.10. 10호 - 광주기독병원

거리뷰
이 병원은 5·18광주민주화운동 당시 부상당한 시민들을 헌신적으로 치료한 민주 의료현장이다. 병원에 있던 의료진은 일시에 밀려든 부상자를 치료하기 위해 침식을 잊었으며 수혈할 피가 부족하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수많은 시민들, 어린 초등학생들까지 자발적으로 헌혈에 동참해 민주시민의 뜨거운 열정을 보였다. 당시 긴박한 상황에서 광주시민은 남녀노소 구분없이 한 덩어리가 되어 서로 돕고 위로하였다. 이 병원은 항쟁 뒤에도 항쟁 부상자들을 가족처럼 치료하고 돌봄으로써 기독교 정신을 빛냈다.

광주광역시 남구 양림로 37 (양림동) 소재.

현재 이 곳을 지나가는 버스는 금남55번 뿐이라 비교적 외진 데에 위치해있다. 표지석은 기독병원 본관 앞으로 올라가는 경사로 입구에 위치.

2.11. 11호 - 구.적십자병원 ▶ 前 서남대학교병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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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병원은 5·18광주민주화운동 당시에는 '광주적십자병원'으로, 부상당한 시민과 시민군을 헌신적으로 치료하고 돌본 곳이다. 당시 긴박했던 상황에서도 의료진은 부상자들의 생명을 돌보고 살리기 위해 헌신적이고 희생적인 활동을 폈다. 피가 부족하다는 것이 알려지자 시민뿐 만 아니라 인근 유흥업소 종업원들까지 헌혈에 참여, 뜨거운 시민정신을 발휘했다. 항쟁 후에도 계속 부상자들을 따뜻하게 치료해주는 등 적십자 정신을 빛낸 곳이다.

광주광역시 동구 천변우로 415 (불로동) 소재.

적십자병원은 후에 녹십자병원으로 이름을 바꾸었고, 다시 서남대학교 재단이 사들여 서남대병원이 되었다. 그러나 현재 서남대병원은 운영이 중단되었으며, 서남대 의과대학은 파행을 겪고 있다. 서남대학교는 그야말로 비리사학의 진수를 보여주는 최악의 대학이지만, 이 건물 자체는 중요한 역사의 현장인 만큼 반드시 보존되어야 한다.

이 건물은 지금도 흑칠판을 사용하는 등,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묻어나 있다(…). 이곳도 대중교통으로 접근하기 어려운 곳에 있다. 2015년 5월 현재 이곳을 지나는 시내버스는 금남55번 단 하나뿐이다. 아쉬운 대로 문화전당역에서 서석교 방향으로 광주천변까지 걸어가는 방법도 있다.

광주광역시는 청산인과의 협상 끝에 2020년 6월 구 적십자병원 건물 및 부지를 매입하는 계약을 체결했다. 광주광역시는 이 곳을 역사문화교육공간으로 활용한다는 계획이다.#

그러나 2024년까지 아무런 조치가 취해지지 않은 채 흉물처럼 방치되고 있으며 활용방안조차 제대로 확립되지 않은 상황이다. 5.18단체와의 갈등 및 예산확보 부족 등의 이유로 준공이 기약없이 미뤄지는 가운데, 바로 뒤에 있는 정율성 생가는 벌써 새단장을 마친 모습은 대조적이다.

2.12. 12호 - 조선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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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대학교 학생들은 전남대학교 학생들과 함께 5·18광주민주화운동 이전부터 이 지역 민주화운동에 앞장섰으며, 항쟁기간에는 시민군 지도부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5월 17일 자정 불법적인 비상계엄 확대조치에 따라서 이 대학에도 계엄군이 즉시 진주했으며, 5월 18일부터 21일까지 시내 곳곳에서 연행되어 온 수많은 시민과 학생들이 체육관, 야전막사 등에 수용되어 계엄군으로부터 잔혹한 폭행을 당한 현장이기도 하다.

광주광역시 동구 필문대로 309 (서석동) 소재.

사적지 표지석은 학교 밖에서 정문을 바라보는 방향으로 조형물 바로 오른편 아래에 있다.

2.13. 13호 - 홍림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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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있던 배고픈다리(현 홍림교) 일대는 5·18광주민주화운동이 치열하던 5월 21일, 시민군이 시내 중심가에서 계엄군을 물리친 후 모범적으로 지역방위를 했던 곳이다. 조선대학교 뒷산으로 퇴각한 계엄군이 다시 시내로 진출할 것에 대비, 그날 해질 무렵부터 이 지역 예비군 등 젊은이들이 주축이 되어 시민군을 편성하고, 이 다리를 중심으로 방어망을 구축하여 물샐틈없는 경계를폈다. 22일 자정 무렵에는 인근 숙실마을에서 내려오던 계엄군과 30여분간 총격전을 벌려 그들을 물리치기도 했다. 주민들은 밥을 지어 오고 담배와 음료수를 가져다주는 등 시민군과 한 덩어리가 되어 이곳을 지켰다.

광주광역시 동구 의재로 77 앞 일대 (학동·운림동) 소재.

무등산국립공원 증심사지구로 올라가는 길목에 위치해 있다. 배고픈다리라는 이름 유래도 재미있는 편인데 산기슭에 있었던만큼 치열한 전투가 펼쳐졌던 곳. 주변보다 낮은 다리라 그 형상이 사람이 배고픈 모습처럼 보인다는 설과 한 나그네가 과거를 응시하러 가다 봇짐을 잃어버려 그 봇짐 안에 있던 일백 다섯 푼을 찾지 못해 동네를 돌아다니다 '내 백오푼'을 외치고 그 다리 위에서 죽었다는 설에서 백오푼→배고픈으로 지어졌다는 설이 있다. 현재는 홍림교라고 부르고 있다.

2.14. 14호 - 주남마을 입구

거리뷰(전 위치)
거리뷰(현 위치)
이곳은 5·18광주민주화운동 당시인 5월 21일 광주 시내에서 조선대학교 뒷산을 넘어 퇴각하여 인근 주남마을에 주둔하던 계엄군들이 광주―화순간 도로통행을 통제하였다. 5월 23일 오전 버스가 광주천 부근 지원동을 지나 주남마을 입구에 들어설 즈음 도로변에서 군인 한 명이 정지신호를 보냈다. 버스 운전사 김윤수씨는 멈추지 않았다. 주남마을을 지키던 11공수여단 62대대 4지역대 병사들이 도시 외곽으로 나가던 시민군 버스에 발포를 한 다음 강가에 빠트려 버스에 타고 있던 시민군 15명이 사망하고 3명이 부상당하였다. 이때 계엄군은 부상을 당한 2명을 주남마을 뒷산으로 끌고가 살해하였으며, 단 1명만이 살아 남았다. 그후 이곳에 묻혀있던 시신은 5·18직후 주민의 신고로 발굴되었다

광주광역시 동구 주남길 10 앞 일대 (월남동) 소재.

이 곳은 광주와 외지를 잇는 주요 통로 중 하나였던 너릿재터널로 가는 길목이었기 때문에 광주로 들어오려거나 나가려는 사람들을 사살한 자리였다. 당시 계엄군이 주남마을 인근에 주둔해있었고 집단사격은 해당 현재의 지원IC 인근에서 행해졌다. 주남마을 인근에 계엄군이 시신을 매장했던 곳에는 위령비가 세워져 있는데 많이 멀지는 않고 갈림길마다 안내판이 있어 찾아가기는 어렵지 않다.

사적지 표지석은 예전에 2순환로 지원IC 입구 부근에 있어 도보로 접근하기 매우 어려운 위치에 있었지만, 광주-화순 간 도로 확장공사를 진행하면서 현재의 위치인 주남마을 입구 앞으로 옮겼다. 또한 인근에 있는 버스정류장인 주남(녹동, 소태역 방향) 정류장은 2014년에 이를 기념하는 새로운 디자인의 버스정류장을 준공했다.관련기사

2.15. 15호 - 간 민간인 학살지 ▶ 효덕지하차도 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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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은 5·18광주민주화운동 당시인 1980년 5월 24일, 계엄군간의 오인사격으로 무고한 양민이 무참히 희생당한곳이다. 5월 24일 오후 1시경 광주시내에서 조선대학교 뒷산을 넘어 퇴각한 계엄군과, 이곳에 잠복해 있던 다른 계엄군 사이에 오인 사격전이 벌어져 계엄군 다수가 죽거나 부상당했다. 이때 계엄군은 총소리에 놀라 몸을 피하던 이웃 원제, 진월부락 주민들과 심지어는 저수지에서 목욕하던 어린이들에게까지 무차별 총격을 가해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 또한 계엄군은 오인사격 화풀이로 광목간 도로변 주택을 수색하여 무고한 주민들을 살상하였으며, 항쟁기간 중 이곳을 지나던 민간차량들에게 무차별 사격을 가해 이곳에서도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

현재 광주광역시 남구 진월동, 송하동 지역. 주남마을 입구와 마찬가지로 나주, 목포 등지로 나갈 수 있는 길목에 있었기 때문에[4] 이 곳 역시 학살과 격전이 일어났던 곳이다. 사적지 표지석은 송하삼익아파트(송암공단, 나주 방면) 버스정류장 앞에 있다.

2.16. 16호 - 농성광장 격전지 ▶ 농성역 1번출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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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은 5·18광주민주화운동 당시, 5월 22일 광주시내에서 쫓겨온 계엄군이 통제선을 설치하고 농성광장의 시민군 방어선과 대치하면서 인근 주택가에 무차별 총격을 가해 무고한 시민이 희생당한 곳이다. 시민군과 계엄군이 이곳에서 대치하고 있을 때 시민수습대책위원들이 이곳 사선을 넘나들며 상무대에 있던 계엄사를 방문해 중재와 협상을 시도했고, 5월 26일 아침에는 계엄군이 시내로 다시 진입하려 하자 시민수습위원들이 이곳 농성광장에 맨몸으로 누워 저항하는 '죽음의 행진'을 했던 현장이다.

광송가도(현 상무대로)[5]에서 광주시내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지나가야 했던 곳이었기 때문에 마찬가지로 격전지가 일어났던 곳. 지금도 마찬가지이지만 광주 시내 교통의 집결지 중 하나였던 곳이었기 때문에 이 곳의 중요성이 매우 컸다.

5.18이 끝난 이후에 또 다른 의미가 있었는데, 바로 국립아시아문화전당이 지어지면서 본래 자리로 돌아간 '분수대 앞 시계탑'이 강제로 옮겨진 자리였다는 것이다.

사적지 표지석은 농성역 1번출구 앞에 바로 보인다. 비교적 쉽게 찾을 수 있는 곳 중 하나.

2.17. 17호 - 상무대 옛터 ▶ 5.18 자유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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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은 상무대(육군전투병과교육사령부)가 있었던 자리로 5·18광주민주화운동 당시 여기에 계엄사령부 전남북계엄분소가 설치되어 있었다. 계엄군 주요 지휘관회의가 이곳에서 자주 열렸고, 시민수습위원들이 몇 차례 드나들며 군 수뇌부와 협상을 벌이기도 했다. 항쟁 뒤에는 시민 3천여명이 붙잡혀와 이곳 헌병대 영창에서 상상을 뛰어 넘는 무자비한 고문과 구타를 당했으며, 이곳 군사법정에서는 시민들에게 내란죄를 씌워 사형과 무기 등 중형을 선고했다. 그때의 영창과 군사법정 건물은 상무대지구 택지개발에 따라 인근에 옮겨져 복원되어 있다.

표지석 위치가 몇 차례 바뀌었다. 본래 상무대 정문이 있었던 곳이었던 시청로의 초입부분에 있었으며, 시청로를 따라 쭉 광주광역시청 방면으로 올라가다 보면 상무대 시절 쓰였던 상무대 비석과 함께 사적지 표지석과 같이 있었다. 중앙분리대 상에 존재하기 때문에 도보로 접근이 어려웠으며 2016년에 근처 주상복합 때문에 그 일대 도로를 확장하면서 시청 앞으로 옮겨지게 됐다.

현재는 김대중컨벤션센터 북쪽에 있는 5.18 자유공원에 표지석과 오월길 조형물, 상무대 비석과 함께 옮겨졌다. 이곳은 상무지구 개발로 인해 본래 있었던 영창 건물 및 재판소로 쓰였던 강당 건물을 해당 자리로 옮겨서 역사교육현장으로 만들어 조성한 곳이다. 상무대 옛터를 보러 왔다면 필히 방문해야 하는 곳.

2.18. 18호 - 무등경기장 정문 ▶ 광주-KIA 챔피언스 필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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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은 5·18광주민주화운동 당시인 5월 20일, 계엄군의 과잉진압에 격분한 운전기사들이 모여 항쟁 참가를 선언하고 차량시위를 시작한 곳이다. 운전기사들은 대형버스를 앞세워 경적을 울리고 전조등을 비추며 금남로로 향하였다. 시내버스와 택시 등 100대 이상의 차량이 참가한 이 시위는 실로 장엄한 드라마였으며, 시민들에게 강한 연대의식과 항쟁에 대한 자신감을 불어넣었다. 이 차량시위 정신을 기리기 위해 5월 20일을 '민주기사의 날'로 정하여 기념하고 있다

무등경기장은 2011년을 끝으로 철거되어 챔피언스 필드로 재건축되었지만 정문 자체는 현판 등을 다시 손보고 조성되었다. 야구장 기준으로 1루 측 외야에 있다. 사적비는 무등야구장 건너 119안전센터 옆에 있는 소공원에 있다. 새 야구장 공사를 할 때 정문을 보존했던 이유가 바로 사적지로 지정되었기 때문.

2.19. 19호 - 양동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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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 양동시장은 대인시장 상인들과 마찬가지로 함께 5·18광주민주화운동 당시 시민군들에게 주먹밥과 생필품을 제공하는 등, 모든 시민이 하나가 되는 대동정신을 앞장서 발휘했던 곳이다. 상인들 모두가 털고 일어나 김밥과 떡, 음료수, 약품 등을 모아 시민군을 지원하고 뜨겁게 격려했던 모습은 지금도 시민들 가슴을 훈훈하게 하고 있다.

양동시장역 1번 출구로 나와 길 건너편 정육점 앞에 표지석이 위치하여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광주 양동시장은 광주시에서 가장 큰 상설 전통시장으로 유명한 곳이고 양동통닭으로 전국에서 유명하며 광주 농어촌지역을 오가는 많은 시내버스의 허브이기도 하다.

2.20. 20호 - 광주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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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은 5·18광주민주화운동이 치열하던 5월 21일 전남도청 앞에서 자행된 계엄군의 집단 발포로 많은 사상자가 나자, 자위수단으로 인근 시군지역에서 총과 탄약을 가져와 시민군을 편성하고 사격술 훈련을 실시했던 곳이다. 처음부터 시민군은 일정한 지휘체계에 따라 움직였던 것은 아니었지만 이곳에서는 자연스레 지도부가 결성되어 24일 도청으로 통합될 때까지 광주시내 순찰과 차량 등록 등 일시적이나마 치안 관련 업무를 보았다. 5월 27일 계엄군이 진압해 올 때 이곳에서도 시민군과 치열한 접전이 있었다.

과거 구동체육관이 있었고 서오층석탑이 있는 광주공원의 입구 계단에 표지석이 있다. 광주공원 앞의 일부 가게를 철거하고 구동체육관 자리에 빛고을시민문화관이 조성되면서 광주공원 앞이 녹지화되었다. 녹지화 이전에는 어르신들이 모이는 장소였고 심야에는 포장마차 밀집지역으로 술한잔을 기울이던 곳이기도 하다. 광주천 공원화와 함께 광주공원-광주교와 더불어 잘 조성이 되었기 때문에 휴식공간으로 알맞은 곳이기도 하다.

2.21. 21호 - 광주고등학교 정문 인근(첫 발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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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은 5·18광주민주화운동 때 계엄군이 비무장 시민을 향해 최초로 발포를 했던 곳이다. 5월 19일 계엄군 장갑차가 시위 군중에게 포위되자 시민을 향해 발포, 당시 조대부고에 다니던 학생이 총상을 입었다. 이 발포 사실이 알려지자 시민들은 계엄군의 과잉진압에 극도로 격분하게 되었고, 투쟁이 한층 더거세지는 계기가 되었다.

표지석은 광주고등학교 정문과 계림오거리의 사이에 있다. 북구 두암, 문화동 일대에서 시내로 진입하는 중앙로 상에 있었던 곳이다.

2.22. 22호 - 옛 광주교도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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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은 5·18광주민주화운동 당시 계엄군이 주둔해 있으면서 담양, 순천방면으로 이동하던 차량과 시민들에게 총격을 가해 많은 양민이 희생당한 곳이다. 계엄군의 이런 행위를 항의하기 위해 달려간 시민에게도 중화기로 무차별 사격을 가함으로써 많은 시민이 목숨을 잃었다. 또한 항쟁기간 중 무고한 시민들이 계엄군에 의해 이 곳 광주교도소로 끌려와 무자비한 고문을 받았고, 그 과정에서 사망한 희생자 시신은 인근 야산에 매장되었다가 5·18직후 발굴되었다.

주남마을 입구, 광송간 학살지와 마찬가지로 시외(주로 담양 일대)로 나가는 길목에 위치해 있었기 때문에 계엄군이 주둔하면서 왕래하는 시민들에게 총구를 겨눴던 곳이다. 그런데 인근에 위치한 광주교도소 때문에 5.18 광주폭동설을 주장하는 몇몇 사람들의 타겟이 되어 광주교도소 습격 조작 사건을 주장하는 근거가 되었다. 다만 앞서 서술했듯이 광주교도소 인근에 순천, 여수, 장성 등지로 나가는 호남고속도로가 있었고 교도소 주변이 개발되기 전까지는 담양으로 나가는 국도가 좁게 나 있었기 때문에 교전이 발발했던 것이다. 자세한 내용은 항목 참조. 그리고 전남대 총학생회장이던 박관현 열사가 단식투쟁 끝에 1982년에 숨진 곳이기도 하다.

한편 문흥동에 위치했던 광주교도소는 2015년 10월 삼각동으로 이전했다. 그래서 광주교도소 자리 활용을 놓고 시민들의 논의가 오가고 있다. 2017년 11월 6일부터 유해 발굴을 위해 발굴 조사를 재개했다. 2019년 12월에 40여구가 발굴되었다.

표지석은 농산물공판장 정류장(동광주진입로 방면)에서 북쪽으로 조금 걸어가면 찾을 수 있다.

2.23. 23호 - 구.국군광주병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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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은 5·18광주민주화운동 당시 계엄사에 연행돼 심문하는 과정에서 고문과 폭행으로 부상을 당한 시민들이 끌려와 강제 치료를 받았던 곳이다. 광주시내 곳곳에서 계엄군에 체포되었던 시민들은 상무대에 설치 되었던 계엄사령부로 끌려가 갖은 고문과 구타를 당하면서 심문을 당했다. 그 과정에서 부상당한 시민들은 이곳 국군광주병원으로 실려와 엄중한 감시 아래 치료를 받았다. 이곳에까지 계엄사 수사관들이 파견되어 시민들을 취조하여 치료 과정에서도 고초를 겪어야 했다.

표지석은 쌍촌역 1번출구에서 도보 5분거리 상에 위치해 있다. 기존에 있었던 국군광주병원은 2007년 함평군으로 이전하여 국군함평병원이 되었다. 기존 국군광주병원 부지 중 일부는 서구 지역의 여자고등학교 확충 필요성에 의해 동구 장동에 있었던 광주여자고등학교의 이전 부지로 활용되었다.[6]

국군병원의 함평 이전 후 부지와 병원시설들은 줄곧 폐건물 상태로 방치중이었으나, 2017년 6월에 공원으로 조성되어 개방되었다.

2.24. 24호 - 망월동 5.18 묘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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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은 5·18광주민주화운동 당시 산화한 영령들이 묻혔던 곳으로 '망월동 묘지'라 불려왔다. 당시 가족과 친지들은 항쟁 와중에서 공포와 분노에 떨며 처참하게 훼손된 주검을 손수레에 싣고 와 이곳에 묻었고, 연고자가 나타나지 않거나 5월 27일 도청 함락 때 희생된 주검은 청소차에 실려와 묻혔다. 그 뒤 이곳이 '민주성지'로 세계적으로 각광을 받게 되자 군사반란집단은 묘를 파내게 하는 등 묘지 자체를 없애려 획책하기도 했다. 1994년부터 묘지성역화 사업을 추진하여 1997년 새로운 5·18묘지가 완성되자 이곳에 묻혔다. 여기 구 묘역의 영령들은 치욕의 17년을 뒤로 하고 새 묘역으로 이장되어 비로소 편안히 눈을 감게 되었다. 여기 구 묘역은 당시의 참상을 처절하게 안고 있는 곳인 데다 그 동안 수많은 국내외 참배객들이 수 없이 다녀간 곳이므로 그대로 보존하고 있다.

운정동 5.18 국립묘역이 생기기 전까지 5.18 희생자들의 유해가 묻혀졌던 곳이다. 본래 망월동에 광주 시립묘역이 있었기 때문에 넘쳐나던 유해를 안장하기 위해 임시로 안장해야 될 곳이 필요했고, 그리하여 망월동의 광주시립묘지 3구역에 안장해야 했다. 이후 1997년 국립묘역이 조성되어 유해들이 이곳에 모셔져 안장되었지만 여전히 상징성이 남아있는 곳이다.

5.18 당시 희생자 중 대부분은 신 묘역으로 이장되었고, 신묘역의 조성 이후엔 6.10 민주항쟁 당시 사망한 이한열 열사를 포함한 민주열사들이 이 곳에 묻혀 있다.

이곳에 가면 아스팔트 길바닥에 깨진 채로 박혀있는 전두환 대통령 기념비가 있다. 1982년 3월 담양군 고서면 성월리 성산마을에 방문하여 민박 기념비[7]를 세운 것을 민주화 이후인 1989년 1월에 피해자 유족들이 찾아내어 이곳에 옮겨 부수어 묻었던, 피해자 유가족 및 광주시민 입장에서는 굴욕과 억울함을 이겨내지 못했던 역사가 있다. 안내문에도 직접 "5월 영령의 원혼을 달래는 마음으로 비석을 짓밟고 가달라"라고 적혀 있으며, 사람들의 발길에 풍화되어 이제 비석의 글자는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상당히 희미해진 상태다. 제3묘역은 지금도 상징성으로 인해 많은 운동단체들의 5.18 추모지로써 사용되고 있고, 특히 정부에서 국가기념식으로 주도하는 5.18 추모식 때에는 정부의 정책이나 5.18 추모식에 불거진 논란 등 정부에 반대하는 이유로 망월동 구묘역에서 별도로 추도식을 가지기도 했다.

북구 운정동에 조성된 국립묘역과는 육교로 연결되어 있다.

2.25. 25호 - 남동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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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은 1980년 5월 22일 당시의 주임신부를 비롯하여 광주의 유력한 민주인사 12명이 모여 시민들의 희생을 막기 위한 수습대책을 논의한 장소이다. 또한 1980년 당시 전남대학교 총학생회장으로 민주화운동을 이끌었던 박관현이 1982년 교도소에서 단식농성을 하다가 숨을 거두었을 때 그의 빈소가 차려지기도 했다.

천주교 광주대교구 산하의 성당. 5.18을 널리 알리는 데 있어 당시 광주대교구의 역할이 매우 컸다. 참고로 남동성당 뿐만 아니라 구.터미널 앞의 북동성당에도 건물에 총탄 자국이 남아있는 등 당시의 치열했던 역사 현장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구.도청 일대와 전남대학교병원 사이에 있기 때문에 표지석을 찾기에는 어렵지 않은 편. 전남대병원오거리 정류장(문화전당역 방면)에서 횡단보도를 건너면 쉽게 찾을 수 있다.

2.26. 26호 - 505보안부대 터 ▶ 5·18 역사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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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은 전남지역 군 정보기관이었던 505보안부대가 자리잡고 있었던 곳이다. 5·18 당시 505보안부대는 이 지역 민주인사와 학생운동 지도부 및 시민군 등을 체포해 지하에 감금하고 고문수사를 자행하였다. 또한 이곳은 5·18 민주화 운동 진압과 그 진실을 은폐·조작했던 실질적 지휘본부였다.

2007년에 추가된 사적지이다. 과거 기무사 예하부대였던 만큼 상당히 외진 곳에 위치해 있다. 23호 사적지에서 좀 더 운천역 방향으로 떨어진 곳에 있다. 부대가 이전을 하고 해당 지역이 시민들에게 개방된 이후에 관리 소홀로 문제가 되어 뉴스에도 지적된 곳이기도 하다. 실제로 사적지를 방문하면 을씨년스러움이 묻어날 정도.

이후 광주시는 국방부와 논의를 거쳐 해당 부지를 공원으로 조성할 계획을 세웠고, 2021년 5월 20일 '5·18 역사공원'으로 일부 새로 단장해 선보였다.


여담으로 여기서 일제 군부대 땅굴도 발견했다.

2.27. 27호 - 들불야학 옛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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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은 ‘광천동성당’의 교리실이었으며, 1978년 들불야학이 설립되어 학교에 가지 못한 노동자들이 저녁에 공부하였던 곳이다.
들불야학은 1978년 7월 23일, 노동자의 의식화와 조직화를 목적으로 만든 노동야학으로 5·18민주화운동 당시 들불야학 교사와 학생들은 조직적으로 항쟁에 참여했다. 이들은 항쟁지도부와 시민군으로 활동했으며 왜곡된 언론을 대신해 '투사회보'를 비롯한 각종 유인물을 제작했다. 5·18민주화운동 당시 윤상원, 박용준 두 교사가 희생되었으며 이후 들불야학 구성원들은 많은 고초를 겪었다.

호남 지역 최초의 민중사학이자 5.18의 주축 세력이 된 들불야학이 시작된 곳. 본래 천주교 광천동 성당의 교리교실에서 시작되었던 곳이었기 때문에 광천동 성당 내에 들불야학의 자리가 있었다. 그러나 건물이 노후되어 안전문제가 거론되었고 소방도로를 내는 과정에서 부지 일부가 도로에 편입되어 당시 교리실의 입구만 남기고 철거된 상태. 광천동성당 옆에 있는 광천시민아파트 역시 들불야학과 관련된 장소. 2013년 10월 15일 27호로 지정되었다.

2.28. 28호 - 전일빌딩

거리뷰
5․18당시 계엄군의 헬기발포 총탄흔적 발견 등의 역사적인 장소이다. 금남로 1가 1번지에 위치한 건물로 당시 도청 일대에서 가장 큰 높은 건물이라는 점과 더불어 전남일보와 전일방송이 입주해있어 전략적으로 요충지였다. 계엄군이 퇴각한 이후에도 전일빌딩 옥상에는 시민군이 배치되어 계엄군의 재진입 시 공격 목표가 되었고 그로인해 5월 27일 새벽 공중사격을 당했다. 전일빌딩의 외곽과 내부에 있는 탄흔들은 당시 헬기사격이 있었음을 증명해주고 있다.

금남로 시작부이자 민주의 종각 건너편에 있는 전일빌딩[9]은 처음에는 5.18 사적으로 지정되지는 않았었지만 1965년 건립되어 50여년 가까이 금남로를 지키고 있는 터줏대감과 같은 건물이다. 광주시에서는 이 건물이 워낙 노후화되어 안전상으로도 문제가 있었기 때문에 철거를 하고 공원 주차장으로 만들 것을 검토하였으나 5.18 당시 증거자 역할을 했던 상징성이 있는 건물이기 때문에 리모델링으로 가닥을 잡았다.#

이후 리모델링 이전 안전점검 및 현장 검증 차 국립과학수사연구소에 감식을 의뢰한 결과 목격자의 증언에도 불구하고 군 당국에서는 부인하던 헬기 사격설을 증명하는 총탄자국이 발견되었다. 당시 금남로에 전일빌딩을 제외하면 높은 건물이 없었던 것을 생각했을 때 헬기를 타고 사격하지 않고서는 높은 건물에 총알이 박힐 가능성은 드물었기 때문.

또, 직선거리로 300여m 지점에 광주은행 옛 본점 사옥 유리창에 남겨진 탄흔에 대해 "구경 5.56㎜의 소총탄에 의한 탄흔으로 추정된다"고 밝히기도 했다.#

이러한 점으로 인해 2017년 8월 15일 28호로 지정되었다. 탄흔이 있는 건물 10층과 외벽은 원형대로 보존할 방침이다.

2020년 5월 11일, 5.18 기념 문화공간인 전일빌딩245로 재개관하였다. 5-4호 표지석과 마찬가지로 건물 리모델링 과정에서 사적지 내용을 별도의 동판에 새겨 입구 쪽의 기둥에 박아두었다.

2.29. 29호 - 홍남순 변호사 가옥

거리뷰
5․18당시 민주주의를 쟁취하기 위해 토론과 회의를 진행했던 장소이며 구속자 석방 논의, 관련문건 작성 등을 했던 역사적인 공간이다.
홍남순은 꼿꼿한 리더십을 지닌 광주의 대표적 인권 변호사이다. 그의 집은 60년대 이후부터 민주인사들의 방문이 끊이지 않는 '재야사랑방' 이었다. 5·18민주화운동 당시 홍남순 변호사는 남동성당 수습모임과 5월 26일 '죽음의 행진'에 참여하였으며, 이로 인해 재야수괴로 몰려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석방 된 이후에도 5·18민주화운동의 진상규명을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이다가 2006년 뇌출혈로 사망했다. 이 집은 많은 사람들의 기억에 남아있는 '장소성'을 갖는 곳 이다.

광주 동구 제봉로에 있는 이 가옥은 5·18 당시 재야 민주인사들이 민주주의를 쟁취하기 위해 토론과 회의를 한 사랑방 역할 뿐만 아니라 구속자 석방 논의, 관련 문건 작성 등을 한 곳이다. 또한 홍남순 변호사는 당시 5·18수습위원들과 벌인 '죽음의 행진'을 비롯한 일련의 수습위 활동으로 시민과 학생 희생을 최소화하기 위해 노력했다. 이후 광주구속자협회장, 5·18광주민중혁명기념사업 및 위령탑 건립추진위원장 등을 맡아 '끝나지 않은 5·18 진상규명과 시민 명예회복' 활동에 주력했다.

광주광역시는 2017년 9월 10일 이 가옥을 사적지 제 29호로 지정하며 5·18사적지 지정 기준인 '시민 다수의 집합적 행동이 이뤄진 곳, 장소성을 갖는 사람들이 다수이며 이를 기억하고 기념하기 위한 집단적 노력이 전개된 곳'에 부합한다고 설명했다.

2024년 안에 10억의 예산을 들여 전시관으로 개장한다는 청사진은 있지만 10월이 다 되도록 아직 시작조차 하지 않은 상황이다.

3. 관리 실태

대한민국 현대사에서 큰 비중을 차지했던 5.18 민주화운동에서 의미가 있는 사적지임에도 불구하고 사적지 관리가 제대로 되지 않는다는 지적이 있다. 30여년이 지나면서 광주는 광주시→광주직할시→광주광역시로 승격이 되었고, 호남 지역의 중심도시로 급성장하면서 해당 사적지가 개발 과정에서 없어지거나 훼손되는 등 당시의 흔적을 찾기 어려울 정도가 되었다. 단순히 사적지 표지석으로써 당시에 어떤 곳이었음을 알려줄 뿐이다. 그 외에도 505보안부대 터나 구 국군광주병원 터 등은 이전 이후 제대로 관리가 되지 않아 우범지역이 될 가능성이 높아졌음에도 큰 개선을 보이지 않고 있는 등 역사적으로 보존할 가치가 있는 사적지 관리가 제대로 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현재 광주시와 5.18기념재단 등에서 5.18 사적지를 묶어서 오월길을 안내하는 등 역사교육자료로 활용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고 최근 불거진 5.18 관련 오해나 논란 등에서도 적극적인 해명을 하는 등 5.18 교육의 필요성 부각시키는 가운데 시설 이전 후 방치되다시피 한 사적지 보수의 중요성이 시급하다고 볼 수 있다.
[1] 물론 횃불 모양 표지석이 아닌 경우도 있다.[2] 한 때 광주·전남지역 가톨릭의 본산이었던 곳. 현재도 임동성당과 함께 천주교 광주대교구의 주교좌성당 역할을 하고 있다.[3] 롯데백화점 롯데시네마에서 심야영화를 보고 나오는 남자들은 ''들의 부름으로부터 도망칠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어야 했었던 시절이 있었다.[4] 당연한 말이지만, 당시에는 화순으로 나갈 수 있는 칠구재터널은 뚫리지도 않았다. 칠구재터널이 뚫린건 1999년에 와서야 이루어졌다.[5] 광주시내와 구 송정읍(현 광산구 일대) 지역을 연결한다고 해서 붙은 이름. 하남대로무진대로가 만들어지기 전에는 나주시, 목포시, 영광군에서 광주로 오는 관문 역할을 했던 도로다.[6] 2010년에 현 위치로 이전했으며, 장동에 있던 옛 교사는 현재 문화전당 주차장으로 활용중.[7] 원문은 '전두환 각하 내외분 민박 마을 - 고서면 성산마을'이라고 적혔다. 참조[8] 표지석은 광천동 성당 내부에 있다.[9] 정식 명칭은 전일회관(全日會館)이다. 건물의 이름이 왜 '전일(全日)'인고 하니, 과거 이 곳이 전남일보(現 광주일보)의 사옥이었기 때문에 전일이라는 이름이 붙어졌다. 이 건물에는 전남일보가 운영했던 지방 방송국인 전일방송도 있었다. 5.18 당시 자료사진과 자료화면에 등장하는 안테나는 전일방송의 것이었고 전일방송이 1980년 언론통폐합으로 사라진 뒤 안테나도 없어졌다. 이 건물의 주인이던 전남일보도 언론통폐합 당시 전남매일과 통폐합되어 광주일보로 바뀌어 2004년까지 사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