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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병하

전라남도경찰국장
안병하
安炳夏 | Ahn Byeong Ha
파일:/image/001/2005/08/23/kp1_2050823l0846.jpg
이름 안병하(安炳夏)
본관 순흥 안씨[1]
출생 1928년 7월 23일
강원도 양양군 양양면 남문리[2]
사망 1988년 10월 10일 (향년 60세)
서울특별시
학력 양양공립보통학교[3] (졸업)
시라오카 제국중학교 (졸업)
광신상업고등학교[4] (졸업)
육군사관학교 (8기 / 졸업)
임관 1949년 ~ 1962년[5]
최종 계급 중령(군인)
경무관(경찰관, 생전 최종)
치안감(사후 추서)
주요 경력 육군 제6보병사단 포병관측장교
부산시 중부경찰서장
치안국 작전계장
치안국 소방과장
치안국 방위과장
강원도 경찰국장
경기도 경찰국장
전라남도 경찰국장
묘소 국립서울현충원 9묘역-4판-22호
상훈 화랑무공훈장

1. 개요2. 초기 생애3. 군인 시절4. 경찰 시절5. 5.18 광주항쟁 당시의 행적6. 사망 및 명예회복7. 참고/관련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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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경찰공무원. 최종 계급은 경무관, 추서 계급은 치안감. 한국판 쉬친셴이다.

2. 초기 생애

일제강점기였던 1928년 7월 23일에 강원도 양양군에서 3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양양공립보통학교(현 양양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 진학을 포기한 채 홀연히 일본행을 결심한다. 일본으로 건너간 그는 도쿄 외곽의 시라오카(白岡)의 제국중학교에 입학해 일본 생활을 시작했다. 당시 풍족한 형편이 아니었던 그는 학비와 생활비를 벌기 위해 신문배달, 구두닦이 등 갖은 일을 했으며, 중학교 졸업 이후 귀국, 서울특별시 동대문구 회기동에 있던 광신상업고등학교(현 광신방송예술고등학교)에 들어가 학업을 마쳤다.

3. 군인 시절

고등학교 졸업 이후 육군사관학교 8기로 입학했고[6], 육사 졸업 후 첫 부임지는 육군 제6보병사단(청성부대)였다. 당시 포병관측장교였던 그는 1950년 6.25 전쟁 초기의 대표적 방어전인 춘천-홍천 전투에서 참전했고,[7] 이 공로로 화랑무공훈장을 받게 된다.

한편 그는 전쟁 중에 아내인 전임순 여사와 속초시의 한 중학교에서 결혼식을 올렸는데, 전쟁 중이었기 때문에 결혼식에는 일가친척도 없이 근처 동네 사람들과 동료 군인들이 참석한 자리에서 조촐하게 치렀다고 한다. 그는 신혼여행은 커녕 결혼식 다음날부터 또 다시 전장에 나가야만 했다.

전쟁 이후 대대장까지 재직하고 중령으로 제대했다.

4. 경찰 시절

1962년 11월 3일, 정부는 군대 간부 23명을 총경으로 특채했는데, 당시 중령이었던 그 역시 전역할때 특채되어 경찰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첫 부임인 부산 중부경찰서장 시절에는 부패한 경찰관들의 비리 장부를 발견하고 그것들을 한데 모아 모두 불에 태워버리며 당장의 처벌보다는 과거의 잘못을 용서하는 통합의 리더십을 보여줬다.[8]

치안국 작전계장 시절인 1968년 '서귀포 간첩선 침투 사건'이 발생하자 직접 육상작전을 지휘하여 북한군 12명 사살, 2명 생포, 간첩선 나포라는 전과를 올려, 당시 중앙정보부로부터 표창장을 받았다.

1971년, 43세의 나이로 경무관으로 승진했고, 그 뒤 치안국 소방과장, 방위과장, 강원도 경찰국장, 경기도 경찰국장을 거쳐 1979년 2월 20일, 운명의 전라남도 경찰국장으로 발령받았다.[9] 그가 전라남도 경찰국장으로 발령받은 지 8개월 뒤, 박정희 대통령김재규에게 피살되는 10.26 사건이 발생했다. 그리고 전두환노태우를 중심으로 한 사조직인 하나회12.12 군사반란을 일으켜 군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5. 5.18 광주항쟁 당시의 행적

5.18 민주화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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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에 들어서자 전국적으로 신군부에 반대하는 시위가 자주 일어났으며, 그가 부임하던 광주·전남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학생 시위를 막는 전투경찰 기동대에게 “공격 진압보다 방어진압을 우선하라”, “시위진압 시 안전수칙을 잘 지켜라”, “시위학생들에게 돌멩이를 던지지 말고 도망가는 학생들을 뒤쫓지 말라”, "학교 안으로는 진입하지 말라.", “죄 없는 시민들이 다치지 않도록 각별히 유의하라”, "잡혀온 시민들에게도 식사를 정상적으로 지급하고 가혹행위하지 마라."라고 특별지시를 내리는 등, 시민들의 안전을 최우선에 두었다.[10]

한편 12.12 군사반란으로 정권 찬탈의 의도를 노골적으로 드러낸 신군부는 5월 17일 밤, 비상계엄의 확대를 통해 대학 휴교, 국회 해산, 재야인사 체포 등을 강행하는 사실상의 쿠데타를 일으켰다. 광주에서도 전남대학교에 공수부대가 주둔하게 되었다.

이후 5.18 민주화운동이 발생하자, 신군부의 강경 진압 명령을 거부하고 학생 및 시민들의 시위에 온건하게 대처할 것을 일선 경찰들에게 명령하였다. 특히 발포 명령을 거부하고 오히려 일선 경찰들로부터 총기를 회수할 것을 명령해 1960년 4.19 혁명 때처럼 경찰에 의한 사상자가 발생하는 것을 막았다. 이로 인해 민주화운동 기간 내내 전남 및 광주 지역의 경찰들은 시민들과 큰 충돌 없이 대처할 수 있었다. 당시 경찰과 시위대는 서로 고생한다고 웃으며 인사를 하는 등 우호적인 분위기를 이어갔다. 오히려 5월 20일 당시 광주 금남로 1가에서 공수부대가 경찰 간부를 폭행하는 사건이 발생했고, 시위대에 적극 대처하지 않는다며 나주경찰서장을 질질 끌고 가기도 했다. 한 전남도경찰 과장은 공수부대의 과격한 시위 진압에 용기내어 항의하다가 병사들에게 구타를 당해 머리가 터지는 일도 있었다.[11] 계엄군이 광주에서 일시 철수하고 전남도청에 광주 시민군이 진입할 때, 계엄군이 미처 통보하지 않고 자기들만 빠져 나와서 도청에 남아 있던 직원들 및 경찰들이 시민들에게 포위된 적도 있었지만, 이 때도 안병하가 곧바로 철수하라고 명령하였고 시민군도 경찰들에겐 적대감이 없어서 큰 충돌 없이 무사히 빠져나올 수 있었다.[12]

5월 25일, 전투교육사령부에 최규하 당시 대통령이 방문했고, 이희성 계엄사령관, 김종환 내무부 장관, 소준열 전투교육사령관, 안병하 국장 등이 함께 했다. 이 자리에서 이희성 계엄사령관은 최 대통령이 보는 앞에서 안 국장에게 "경찰이 무장하고 도청을 접수하라"고 윽박질렀다. 하지만 안 국장은 “경찰은 시민군에 형제, 가족도 있을 테고 이웃도 있는데 경찰이 무기를 사용하면서까지 할 수 없다”고 말하며 끝까지 이를 거절했다. 그러자 이희성은 화를 내며 “저런 사람이 전남 치안을 맡고 있는 경찰인가?” 라며 면박을 줬다고 한다.동기끼리 너무하네 그는 이렇게 대통령 앞에서까지 경찰의 무기 사용을 극구 반대하며 시민의 안전을 최우선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5.18 민주화운동이 계엄군에 의해 진압된 이후 그가 머물고 있던 경찰항공대 임시 막사에 보안사 요원들이 찾아와 다짜고짜 그를 붙잡아 계엄사령부가 있는 서울 동빙고동 보안사령부로 연행했다. 그와 동시에 전라남도 경찰국장이라는 직위 역시 해제되었다.[13] 계엄사에 체포당한 그는 8일 동안 혹독한 고문을 받았으며 그의 육체와 정신을 끔찍하게 짓밟혀 나갔다. 결국 강압에 의해 사표를 제출하고 풀려나게 되었다. 당시 그는 혹독한 고문을 받으면서도 5.18 민주화운동을 함께 겪은 경찰 부하들을 보호했고, 셋째 아들인 안호재 씨에 따르면 “아버님은 혹독한 고문을 받으면서도 ‘부하들에게 책임을 묻지 않겠다’는 조건으로 사표를 제출했다”고 한다.

계엄사에서 풀려난 뒤로도 바로 집에 돌아가지는 못하고 치안본부에서 대기해야만 했다. 신군부의 눈치만 살피던 당시 경찰 수뇌부는 누구도 그의 편을 들어주지 않았고, 오히려 신군부의 눈 밖에 나지않기 위해 그를 비판하고 무능한 경찰로 낙인찍기만 했다.

6. 사망 및 명예회복

이후 집에 돌아온 그는[14] 예전의 모습은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만신창이 상태였다. 특히 고문으로 인한 정신적인 충격 때문인지 말문도 닫아버렸고, 단지 “죽고 싶다”는 말만 되풀이 할 뿐이었다고 한다. 정신적 충격과 고문 후유증으로 고혈압과 당뇨, 담낭염, 신부전증까지 앓던 그는 결국 8년 간의 투병 생활에 들어갔고, 1988년 7월 25일 민주정의당 측의 증인 신청명단에 오른 후 29일자 <한겨레신문> 인터뷰 기사를 통해 그의 근황이 전해졌지만 결국 증인으로 나서기 전인 10월 10일 서울특별시의 한 내과의원에서 혈액 투석을 받던 중 숨을 거두고 말았다. 이때 그의 나이 60세였다. 그의 시신은 현충원에 안장되지 못하고 충청북도 충주시의 한 공원묘지에 안장되었다. 유족으로는 아내 전임순 여사와 3남(장남 안영재, 차남 안춘재, 막내 안호재)이 있다.

그의 강제 해직 이후 가족들마저 극심한 생활고에 시달려야 했다. 당시 경찰 고위간부 정도면 얼마든지 치부가 가능했지만 그는 철저하게 청렴을 지켰으며 국가에서 월급 받는 것을 자랑으로 생각하고 더 이상의 욕심도 내지 않았다. 살고 있던 집이 유일한 재산목록 1호였다. 그가 사망한 뒤로 유족들은 8년간 투병에 썼던 병원비로 인해 막대한 빚더미에 앉게 되었고 그가 생전에 살던 집까지 팔아야 하는 상황이 되었지만, 어느 누구도 도움의 손길을 주지 않았다. 유족들이 그의 명예회복을 위해 여기저기 찾아다닐 때, 치안본부를 포함한 여러 기관들 중 단 한 군데도 관심을 가져주지 않았다.

문민정부 출범 후인 1993년 7월 아내 전임순 측이 광주직할시에 5.18 관련 보상을 신청했다가 초반에는 받아들여지지 않았으나, 재심 신청 후 12월 '5.18 관련자'로 인정받았다. 1994년 2월 '광주민주화운동 상이자 등급 판정 등 심의위원회' 측은 안병하의 죽음이 고문으로 인한 것임을 인정하여 '간접사인'을 인정받았고 5월 2일 합수부 구금일수 8일로 인한 32만원 + 생활지원금 및 위로금 800만원을 합해 보상금 832만원을 수령받았다. 이마저도 안병하가 고문에서 사망에 이르는 8년 간의 기간이 반영되지 않자 유족 측은 행정심판까지 걸어 1997년 대법원에서 유족 측의 의견을 받아들였다.#

2003년에는 국가보훈처로부터 5.18 민주화유공자로 인정받았으며 2005년 11월 24일에는 국립서울현충원 9묘역에 이장되었다.

2015년 8월의 이달의 호국인물로 선정되었다.

2017년 1월 22일 방송된 신비한 TV 서프라이즈 749회에서 안병하 경무관의 이야기가 방송되었다. 마침 같은날 전남지방경찰청에서 흉상 제막식이 열렸다. 전남지방경찰청 청사 1층 로비에 전시하기로 했다.

충남 아산시에 있는 경찰 교육시설인 경찰인재개발원에는 이름을 딴 안병하홀이라는 건물이 있다.

2017년 11월 27일 경무관에서 치안감으로 1계급 특별승진 추서를 받았으며 2018년 3월 10일, 국립서울현충원에서 추서식이 거행되었다.#

2018년 5.18 38주기를 앞두고 유족들이 보관해 온 안병하의 비망록이 공개되었다. 비망록에서 안병하는 자신이 지켜본 5.18 항쟁은 계엄군의 과격 진압이 원인이었다고 적었다. 비망록 원본은 유족들이 5.18 기록관에 기증하였다.

2020년 5월 17일 안병하 치안감과 함께 신군부에 맞서 시민을 보호했던 경찰관 21명에 대한 부당한 징계가 취소 되면서 40년만에 명예가 회복되었다. 5·18 민주화운동 시민 보호했던 경찰관 21명..40년 만에 '명예회복'

2022년 3월 24일에는 1980. 6. 2.자 의원면직을 취소하고, 1981. 6. 29.자로 치안감에 추서한다는 내용의 대통령 임명장이 발급되었다. 또한, 밀린 급여도 정산해서 지급하였다.

2022년 10월 10일에는 5·18 당시 신군부의 강경 진압지시를 거부한 고 안병하 치안감을 추모하는 행사가 열린 자리에서 안병하 기념사업회가 광주 5·18 민주광장에서 추모식을 열고 "안병하 치안감의 명예회복을 위해 노력한 모든 분께 감사드린다"고 추모사를 전했다.#

7. 참고/관련 자료

  • 안병하 평전 - 이재의 저. 정한책방. 2020.


[1] #[2] #[3] 현 양양초등학교[4] 대동상업고등학교졸업했다는 설도 있다.[5] 군번 14562[6] 당시 육사 8기 동기들 중 주요 인물: 김종필국무총리, 김형욱 전 중앙정보부장, 윤필용 전 수경사령관, 강창성 전 보안사령관, 이희성육군참모총장 등, 이런 이유로 5.16 쿠데타 당시 안병하에게도 국가재건최고회의 참여 제안이 있었으나 안병하는 이를 거절했다고 한다.[7] 당시 북한군의 주력부대가 춘천으로 몰려오자 지도와 나침판을 소지한 채 무전병을 이끌고 적의 포화 속으로 뛰어들어 빗발치는 총탄을 뚫고 적의 정확한 위치를 포대에 무전으로 알렸다고 한다.[8] 현대의 관점에서는 전형적인 제식구 감싸기로 비판을 받을 위법한 행위지만 60년대라는 사실을 고려하여야 한다. 그 당시의 분위기는 공무원의 비위가 심각한 수준이 아니면 관행으로 넘기던 시절이었으며 더욱이 법보다는 정이 우선이던 사회였다.[9] 안응모 전 내무부장관의 회고록에 의하면 원래 전남 경찰국장으로 지명된 이는 안응모였다고 한다. 그러나 하도 외부에서 인사를 놓고 갖은 청탁과 외압이 계속되자 당시 내무부장관이던 구자춘이 내정자들을 뒤섞어버렸고 그때문에 안병하가 전남 경찰국장으로 가게되었다고 한다. 여담이지만 안응모는 충남 경찰국장으로 가게된후 제5공화국 당시 경찰내에서 승승장구하여 노태우정부에서는 내무부장관으로까지 승진하게 되었다.[10] 20년 전 4.19 혁명에서 경찰이 시위대에게 총을 쏘아서 강경진압하고 반대로 군이 온건하게 진압한 것과는 천지차이였다.[11] 이는 진압측인 경찰 쪽에서도 도를 넘었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 예로 계엄군이 무자비하게 시위대를 구타할 때 경찰들도 그 모습을 보고 경악할 정도였으니 말 다한 셈이다. 그들의 입장은 "아니.. 시위대를 체포했으면 그냥 연행해서 조사하면 될 일이지 저렇게까지 반 죽음을 만들어야 하는가?" 라는 회의감이 생겼던 것이다.[12] 오히려 경찰들을 동정하고 딱하게 여겨서 그들이 시민들의 옷을 달라고 사정했을 때에 군말없이 자신들의 옷을 거리낌없이 내 주어서 그들을 안전하게 탈출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13] 당시 그는 52세로, 치안감 승진 대상 1순위였다고 한다. 심지어 육사동기였던 김종필 前 국무총리도 끌려와 있었다.[14] 당시 대학생이던 아들의 증언에 따르면 처음 귀가할 때는 당당한 모습으로 걸어들어왔다고 한다. 하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