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19-10-08 23:59:55

최규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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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제10대 대통령
최규하
崔圭夏 | Choi Kyu-hah
파일:최규하 공식사진.jpg
대통령 재임 중 사진
파일:최규하 기록관 사진.jpg
대통령 기록관 사진
파일:최규하대통령초상화.png
공식 초상화
출생 1919년 7월 16일
강원도 원주군 원주면 봉산리[1]
사망 2006년 10월 22일 (향년 87세)
서울특별시 종로구 연건동 서울대학교병원
묘소 국립대전현충원 국가원수 묘역
재임 1979년 12월 6일[2] ~ 1980년 8월 16일
서명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200px-Choi_Kyu-Hah_signature_%28Sugyeol%29.svg.png
{{{#!folding [ 펼치기 · 접기 ] 본관 강릉 최씨 매창공파 33세손[3]
부모 아버지 최양오, 어머니 이응선
형제자매 8남매 중 장남[4]
배우자 홍기
자녀 최윤홍, 최종석, 최종혜
학력 도쿄고등사범학교 영어영문학 학사
종교 유교 (성리학)
신체 182cm, A형
약칭
서옥 (瑞玉)
현석 (玄石) }}}

1. 개요2. 생애
2.1. 10.26 사건 이전2.2. 10.26 사건 이후2.3. 사임 이후
3. 묘소4. 선거 이력5. 각종 타이틀6. 여담7. 매체에서


1. 개요

대한민국의 정치인, 대한민국의 제10대 대통령.

박정희 정부 당시 제12대 국무총리였으나 10.26 사건으로 박정희가 시해되어 대통령직이 궐위되자 그 직을 이어받게 되었다.[5] 그러나 곧 신군부일으킨 반란으로 말미암아 재임 8개월 만에 사실상 축출되었으며, 대한민국 역사에서 가장 짧은 임기를 지낸 대통령이 되었다.

1919년 강원도 원주에서 출생하여 호는 현석(玄石), 자는 서옥(瑞玉)이다. 일제강점기 당시 창씨개명을 한 명칭은 우메하라 게이이치(梅原圭一). 2006년 10월 자택에서 노환으로 사망하였다.

2. 생애

2.1. 10.26 사건 이전

가문에서 한학(漢學)을 수학했으며,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와 일본 도쿄고등사범학교 영문과, 만주국 대동학원 정치행정반을 졸업(1부 15기)하였다. 졸업 후 길림성 통양현에서 행정과장으로 근무했다. 그 때문에 친일의혹이 있었지만, 별다른 친일 행적은 드러난 것이 없어 결국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에는 등재되지 않았다.

최규하의 친일 논란에 대해 [펼쳐 보기 ㆍ 접기]

최규하가 사망했을 때 방학진 민족문제연구소 사무국장이 쓴 평, 최규하, 일제 관료에서 대한민국 대통령이 되다가 최규하에 대한 민족문제연구소의 시각을 대변하는데... 여기서도 대동학원 출신이라는 점 외에는 사실 자세한 내용이 아무것도 없고 완전히 엉뚱한 '나쁜 놈들은 일제 관료출신들의 후예다'라는 괴상한 결론을 낸다.

추가로 생각해봐야 할 것은 만주대동학원이 건설되는 30년대 중반이면 조선 땅에 일본인들이 들어오기 시작한 지 한 세대가 되는 시점이고, 강제지배에 들어간 지도 20년이 넘은 시점이라 이미 당시 성장하여 사회에 진출하던 청년계층 중 '조선'이나 '대한제국'에서 태어난 사람들이 드물었다. 태어나서 자라난 환경이 동네에 일본인 학교 있고, 일본말을 조선말과 같이 배우고, 일본 사람들과 교류하던 식이라...

이 문제는 비교적 최근에 들어와 해당 분야 연구에서 더 이상 단순한 '친일'만으로는 규정하기 힘들고, 점차 '부일'이나 '협일'등, 차이점이 존재하는 개념들이 등장하여 세분화 되는 것을 통해 조명되는 경향이 있다. 오늘날 사람들은 30년대에 들어와서 '조선반도' 모든 조선인들이 강경한 독립정신을 갖고 있었다고 생각하고 싶겠지만, 나름대로 시대적 상황에 모순과 울분을 느끼면서도 누구나 다 독립운동을 한 것은 아니었고, 그냥 평범하게 순응하여 살아갈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 평범한 대중은 언제나 절대 다수라...

그런 젊은이들의 경우 조선땅 안에서 총독부에 근무하거나 순사노릇 하거나 하는 고약한 짓은 하지 않더라도 일제가 제공하는 고등교육 받아 공부 열심히 하고 적당히 출세하여 관료봉급 받으며 차별도 좀 덜 당하고 살 수 있는 방법이 순순히 창씨개명하고 조선 밖 만주국 같은 곳에서 중하급 행정관료, 사무직 일 하는 것이었다.

그런 측면을 감안한다면, 최규하는 적극적인 친일파도 아니었으나, 적극적으로 독립을 꿈꾸던 것도 아니었고, 당시 평균적인 수준에서 일제가 만든 세상에 그냥 적응하여 당시 조선출신들이 막노동 외에 할 수 있었던 일로 고등교육 받고 얌전히 관료일 하는 정도 부일파가 아닐까 하는 추측이 꽤 있다. 물론, 민족문제연구소 등 강경한 민족주의 계통 연구단체에서는 친일파가 확실하다고 못박고 있긴 한데 증거는커녕 뭔 중대한 의혹이나 악평조차 나오는 게 없어서... 조선출신으로서 적극적으로 친일을 하는, 고등교육을 받은 고급 인재들은 일제에 이용가치가 높기 때문에 거의 반드시 뭔가 문헌기록, 사진, 영상, 어록 등 형태로 친일을 입증하는 사료가 남아있기에 그런 사료 파내서 친일파 아닌 척 숨기려는 사람들 잡아내는데 귀신들인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여전히 아무 것도 찾은 게 없다.[6]

정치사에서는 별 족적을 남기지 못했으나, 최규하나 그와 비슷한 행적을 보인 당시 인사들의 친일, 혹은 부일 문제는 해방 전 일제말기 시대상을 연구하는데 있어서 시사하는 점이 꽤 많기 때문에 관심있는 사람들은 해방전, 일제말기 시대연구의 최근 동향을 꼭 참고해보도록 하자.

광복 이후에는 경성사범대학[7] 영문과 조교수로 영어를 가르치던 중 1946년 4월 미군정 중앙식량행정처의 기획과장으로 발탁되었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인 1949년 싱가포르에서 열린 유엔식량농업기구(Food and Agriculture Organization/FAO) 국제회의에서 유창한 영어 실력과 국제적 활동력을 인정받아 외교관의 길을 걷게 되어, 1951년 외무부 통상국장이 되고 1959년에는 마흔을 갓 넘긴 나이에 외무부 차관이 되었다.

박정희는 최규하가 이승만 정권 시절의 외무차관이란 이유로 싫어했으나 외무장관 이동원의 강력한 추천으로 1964년 주 말레이시아 대사로 기용하였다가, 그 후 1967년 외무부 장관, 1971년에는 대통령 외교담당 특별보좌관, 1975년 국무총리로 중용하였다. 전임자인 김종필이 건강상의 이유로 사의를 표하자[8] 박정희가 정치적 야심이 전혀 없는 관료출신 최규하를 후임자로 선택한 것이다. 그렇게 몇년간 국무총리로 재임하다 공직생활을 마감할 운명이었는데...

2.2. 10.26 사건 이후

파일:최규하 취임식 사진.png


대한뉴스의 1979년 12월 6일 <제10대 대통령> 보도.[9]


대한뉴스의 1979년 12월 21일 <제10대 최규하 대통령 취임식> 보도.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가 사망함으로써 대통령 권한대행이 되고, 같은 해 12월 6일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정식 대통령으로 선출된다.[10] 다만 최규하가 6년의 임기를 다 채울 것이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않았다. 실제로 최규하 대통령은 권한대행 시절이던 1979년 11월10일 특별담화를 통해 제4공화국 헌법에 따라 대통령을 우선 선출하되,[11] 새 대통령은 가능한 한 빠른 기간 안에 민주헌법으로 개정한 후 이에 따라 다시 선거를 실시하여야 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 담화문은 야당 정치인을 포함해 모든 국민의 환영을 받았으며, 이 선언으로 인해 최규하 권한대행이 제10대 대통령으로 선출되는데 대내외적으로 별다른 이견이 없었다. 실제 새로운 민주적 헌법을 마련하고 그에 따른 선거를 치러 다음 정부에 무사히 정권을 넘겨주는 것이 그에게 주어진 역할.

그러나 그 직후 신군부 세력12.12 군사반란을 일으키고 1980년 5.17 내란으로 권력을 모두 장악한 후 5.18 민주화운동을 잔인하게 무력 진압하기까지 하는데, 이 과정에서 대통령으로서의 권한을 전혀 행사하지 못하였다.[12] 말 그대로 허수아비였던 것이었다.



결국 1980년 8월 16일 사임함으로써 역대 최단기 대통령이 되었다.[13] 그 직후 전두환이 통일주체국민회의를 한 번 더 열어 대통령에 취임한 뒤 바로 헌법을 바꿔서 제5공화국 유일무이의 대통령이 되었다.

2.3. 사임 이후

사임 후 1981년 4월부터 1988년까지 국정자문회의 의장을 지낸 후 1991년부터 민족사바로찾기국민회의 2대 의장을 지내다가 1993년부터 윤택중 전 문교부장관에게 의장직을 물려주고 명예의장으로 추대되었다.

김영삼 대통령의 문민정부 시절, 신군부 일당이 내란죄로 재판을 받게 되자 법원에서 수차례 증언 요청을 받지만, 법정 증언을 끝까지 거부하였다. 이 때문에 당시 풍자의 대상이 되거나 신문만평에서는 입에 자물쇠가 채워졌다거나, 김영삼이 최규하 대포를 쏘려는데 총포구가 꼬여서 발사가 안 되는 것처럼 최규하의 침묵을 표현한 만평들이 돌아다니기도 했다.

이후 상당한 생활고에 시달리다 2006년 10월 22일 오전 6시께 서울 마포구 서교동 자택에서 의식을 잃은 상태로 발견돼 서울대학교병원으로 옮겨졌으나 오전 7시 37분에 사망했다. 향년 88세.

많은 사람들이 재임 당시 신군부에 관련된 일을 기록으로라도 남겨놓지 않았을까 기대했지만 끝내 무덤까지 비밀을 가져갔다... 비망록을 남겨 놓을 테니 참고하면 될 것이라고 했던 걸 보면 기록이 일기로 있긴 있던 모양이지만 끝내 공개되지는 않았다.[14]

3. 묘소

파일:external/pbs.twimg.com/CbgyinfVAAA55xS.jpg 파일:external/pbs.twimg.com/CbgykH7UAAAOJ3r.jpg
현석(玄石)[15] 최규하 전 대통령과 전 영부인 홍기 여사의[16] 묘소. 대전시 유성구 갑동 국립대전현충원 내 국가원수 묘역.[17]
사후 국립대전현충원 국가원수 묘역에 안장되었다. 국립대전현충원에 대통령이 안장된 경우는 1985년 설립 이래 최초이다. 앞으로도 꽤 오랜 시간동안은 홀로[18] 묘역을 지킬듯 하다.[19]

4. 선거 이력

연도 선거 종류 소속 정당 득표수 (득표율) 당선 여부 비고
1979 제10대 대통령 선거 무소속 2,456 (99.9%) 당선 [20]

5. 각종 타이틀

  • 최초이자 유일하게 전임자의 사망으로 인해 대통령직을 승계한 대통령
  • 역대 최단기 재임 대통령
  • 2018년 기준 역대 최장신(182cm) 대통령
  • 역대 대통령 중 유일하게 재임기간 중 무소속이었던 대통령
  • 유일한 관료(외교관) 출신 대통령
  • 최초의 국무위원 출신 대통령
  • 최초이자 유일한 국무총리 출신 대통령. 이회창, 김종필 등 유력한 대선 후보까지 나갔던 적은 있어도 실제로 된 것은 최규하가 유일하다.
  • 최초이자 유일한 강원도 출신 대통령
  • 최초이자 유일하게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된 대통령
  • 최초이자 유일한 최씨 대통령
  • 역대 대통령 중 유일하게 종교가 유교인 대통령

6. 여담

  • 할아버지 최재민이 조선 말기에 성균관 박사를 지낸 이름 높은 한학자였기에 3살 때부터 할아버지에게서 선비로서의 훈도와 한학, 예절을 배웠으며, 특히 한자뿐만 아니라 다른 학문과 고문학에도 실력이 뛰어났다. 원주보통학교(지금의 원주초등학교) 출신이어서 이 학교에 몇 점의 휘호와 자필 서신을 남겼으며 전통적인 한문 필체로 평가받는다.
    파일:external/www.artday.co.kr/W5666kor1371436401.jpg
  • 윤보선과 함께 존재감 없는 대통령으로 꼽힌다. 하지만 윤보선은 의원내각제 대통령으로서 명목상의 국가원수일 뿐이었고, 퇴임 후에도 박정희와 선거에서 두 번이나 맞짱을 뜨는 등 정치 활동을 계속하였지만, 최규하는 막강한 유신헌법 하의 대통령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실권이 신군부에게 있었고, 퇴임 후에도 조용히 살다 죽었기 때문에, 존재감이 가장 작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윤보선은 의원 내각제 하의 대통령이긴 하지만, 장면이 도피하여 대통령이 5.16 군사반란을 진압해야 할 의무가 있음에도 우유부단하게 행동했기에 신군부에 의해 이미 취임 때부터 권력을 행사할 수 없었던 최규하보다 더 무능하다는 평가가 있다. 게다가 윤보선은 이후 신군부가 들어서고 난 후에는 전두환과 친하게 지내고 1987년 대선 때는 노태우 지지선언까지 하면서 최규하에 비해 존재감과는 별도로 평가가 좋지 않다.
  • 대통령 중에 가장 처음으로 생전에 살던 가옥이 문화재[21]로 지정되었다. 개방 시설이므로 자유롭게 관람할 수 있다. 위치는 망원역합정역의 딱 중간이며 주소는 "서울특별시 마포구 동교로15길 10"이다.
  • 광부들의 노고를 잊지 않겠다고 맹세하며 평생 연탄을 때겠다고 약속했고, 실제로도 노년까지 직접 연탄을 집게로 날라 때운 연탄 보일러로 방을 덥혔다. 냉방 기계인 선풍기 또한 딸이 태어날 때 사들인 옛날 물건이었고, 에어컨 역시 장남이 미국서 사용하던 것 그대로 들여온 것이었다. 메모지도 달력을 잘라 제작했으며 그 달력에 빽빽히 매일매일의 일정을 기입했다. 볼펜 또한 1968년 푸에블로호 피랍사건 당시 한미회담에서 썼던 볼펜을 쓰고 있었다. 심지어 맷돌과 돌절구도 썼다고 하니 그가 얼마나 검소한 삶을 추구했는지 알 수 있는 부분이다. 어느 하루는 꽃동네의 신부가 우연히 산삼을 얻어 최규하에게 선물했는데, 그 산삼을 돌려보내며 다른 불우한 이들을 위해 써 달라고 했던 적도 있었다. 때문에 최규하를 비웃는 사람들은 있을지언정 그의 개인적인 면모는 존경하는 경우가 많다.
  • 식단도 역대대통령중 굉장히 검소하기로 유명했어서, 재직시절 즐기던 음식도 국수, 콩자반, 냉면, 나물등이었으며, 술도 즐기지않았다. 그나마 술을 마실때에는 과일주와 나물에, 생선구이나 전골등을 즐겼다고한다.
  • 협박에 의해 긴급조치를 묵인한 것 외에는 특별히 악한 행동을 하지 않았고 전직 대통령 예우 차원에서 국민장을 치렀지만, 정작 대부분의 국민들은 국민장을 치렀는지 안 치렀는지도 모른다. 게다가 최규하가 아직도 살아 있었다니? 같은 반응도 나왔다. 국민장 당일에는 2,000여 명만 참여했다.[24]
  • 대통령에 취임해서 뭔가 좀 해보려고 하는데 뭘 시작도 하기 전에 쫓겨난 탓에 역사적 평가에서 동정을 많이 받는다. 삼국지로 따지면 헌제와 비교가 된다.
  • 182cm의 장신[25]이고 역대 대통령 중에서 김영삼과 같이 세 번째로 장수했다. 첫 번째는 윤보선, 두 번째는 이승만.
  • 긍정적 수식어로 많이 붙는 표현이 '선비'. 언론에서나 다른 정치인들이 최규하를 수식하는 단어로 '선비 대통령', '선비 정신을 갖춘 대통령' 이런 식으로 간간히 쓰였고, 장례 때도 한명숙 전 총리의 조사에서 "선비의 표상"라는 표현이 쓰이기도 했었다. 이는 사실 그가 한학을 배우기도 했었고, 절제와 검소한 삶을 살았던 걸 가리키는 수식어로 많이 쓰였지만, 정작 현대 한국에서는 '선비'에 대해 부정적인 인식이 더 강한 경향이 있고, 검소함이나 절제와 함께 진정한 선비의 표상이라고 할 부분인 '절개'나 '기개'라는 부분에서 그리 좋은 모습을 보여주지는 못했던 행적을 생각하면 묘한 느낌이 드는 표현이다.
  • 최규하 전 대통령의 비서관을 지낸 권영민 전 독일대사의 회고에 따르면 당시 최규하의 우유부단함이나 신중함을 비꼬는 의미로 국민들이 "최 주사"라고 부르기도 했었다고 한다. 최 전 대통령 본인은 당연히 매우 불쾌해 했는데, 권 전 대사는 평소에 온화하던 최 전 대통령이 그 말을 듣고는 그렇게 불같이 화를 냈었다고 회고했다.[26] 사실 '주사'라는 표현의 경우 원칙적으로는 6급 공무원을 지칭하는 직급명이긴 하나, 지방직 공무원들의 경우 공무원끼리 서로, 또 민원인들이 공무원을 부를 때 적당히 사용할 만한 경칭으로 'OOO주사(님)을 사용하는 것에서 알 수 있듯 서민들이 일상적으로 만나는 소시민적 공무원을 지칭하는 표현으로 널리 쓰인다. 특히 9급으로 공무원 경력을 시작할 경우, 승진 시험 없이 경력 차면 연공만으로 승진 가능한 직급이 대개 6급 주사까지인 점을 감안하면, 동사무소나 면사무소 등에서 특별한 권한이나 재량 없이 지시와 규정대로 정해진 일이나 하다가, 화난 민원인이라도 찾아오면 일을 시끄럽게 만들지 않으려고 적당히 굽신거리는 중년, 또는 초로의 아저씨... 정도가 흔히 생각하는 '주사'의 이미지인 것. 말하자면 공무원의 초라하고 무기력한(더 나아가 무능한) 측면에서 부정적인 이미지가 함축된 표현이다[27].(5급 사무관과는 한 급 차이일 뿐이지만 호칭에서 느껴지는 이미지의 차이는 상당하다. 최 사무관이라고 불렀으면 화를 덜 냈을지도 모른다.) 이런 이미지를 생각하면 최규하를 지칭하던 '최 주사' 라는 표현은 단순히 우유부단함과 신중함만을 비꼰 것이 아니라 대통령씩이나 하면서 하는 일은 말단 공무원같다, 즉 자기 권한과 재량으로 스스로 문제를 해결해 나가지는 못하고 그저 위에서 시키는대로 하고 서식 맞춰 서류나 써낸다는 식으로 무기력하고 무능력하고 자리나 차지하고 앉아있을 뿐 딱히 하는 일도 없다는 굉장히 심한 조롱이다. 그의 장점으로 꼽히는 검소함이나 자기절제 역시 이런 부정적인 평가와 얽혀서 '좀스럽고 째째하다'는 나쁜 의미로 해석된 부분이 있을 것이다. 물론 이런 평가를 받은 것은 최규하 자신의 책임이고, 이런 평가가 억울하다고만 하기는 어려운 것이 그의 행적이긴 하지만 불같이 화내는 것이 이상하지 않은 모욕적인 표현임은 분명한 것.
  • 말년에 현대 뉴 그랜저를 소유하고 있었다. 얽힌 이야기는 현대 그랜저를 참고.

7. 매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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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현 강원도 원주시 봉산로 134[2] 보궐선거로 선출되었기 때문에 당선 확정과 동시에 임기 시작.[3] # 참고.[4] 남동생으로 최명하, 최중하가 있다.[5] 대통령 선거인 통일주체 국민회의의 표결을 거쳐 '당선'되긴 했다.[6] 브루스 커밍스에 따르면, 최규하의 전적에 대해서 일본식 교육을 완벽하게 받은 사람이었지만 인터뷰 내내 일본의 통치에 대해서 혐오감을 감추지 않았다고 한다.[7] 해방 후 경성사범학교에서 승격되었으며 서울대학교 사범대학의 전신이다. 1946년 8월에 경성여자사범과 통합하여 서울대학교 사범대학이 되었다. 흔히 서울대 사범대 교수로 알려져 있는데, 서울대 출범 전에 미군정청으로 옮겼다.[8] 이미 4년 넘게 국무총리에 재임하고 있었다. 그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생각해보면 지칠 만도 하다.[9] 6일 후 12.12 쿠데타 발생[10] 이때 민주공화당에서는 김종필의 대통령 출마를 준비했으나, 김종필 본인이 유신헌법에 의한 대통령이 되고 싶지 않다는 이유로 거부한다. 그 뒤에 어떤 일이 일어나는 줄 알았다면 어땠을까?[11] 제4공화국 헌법에는 대통령 궐위 시 3개월 이내 후임자를 선출하게 되어 있다.[12] 광주 민주화 운동 당시 중동에 순방을 나갔던 최규하는 소식을 듣고 급히 귀국했고, 귀국 후에 신군부로부터 상황을 보고받고 "무기를 버리고 해산하세요. 그렇지 않으면 강경 진압으로 갈 수밖에 없습니다."라는 담화를 발표했다고 한다.[13] 대한민국 공군 참모총장을 지낸 김정렬 장군이 오랜 친구로서 설득했다고 한다. 훗날 김정렬은 대한민국 제5공화국 전두환 정부의 마지막 국무총리로 발탁된다.[14] 정확히는 비망록이라고 이름지어진 문건은 없었지만 여러가지 메모들이 잔뜩 있었고 정리되지 않은 채 지하실에 보관되어 있었다고 하는데, 1984년 폭우로 지하실에 물이 들이치면서 젖어버리는 바람에 쓸모없게 되었다고 한다.[15] 하늘 아래 겸손하고 신중한 사람이란 의미이다.[16] 2004년 영면하여 선영에 묻혀있다 남편이 세상을 떠난 후 합장했다.[17] 사진 블로그 발췌[18] 무덤이 1기이긴 하지만 영부인 홍기 여사와 함께 합장되었으니 엄밀히 말하면 홀로는 아니긴 하다.[19] 김대중 전 대통령의 경우 최규하보다 나중에 사망했음에도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되었으며 김영삼 전 대통령 또한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되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고향인 봉하마을에 안장되어있다. 전두환, 노태우, 박근혜는 전직 대통령에 대한 예우가 박탈되어 국립묘지에 들어가는 것 자체가 거의 불가능하다.[20] 간접선거, 1980.8.16 대통령 사임.[21] 서울시 등록문화재 제413호[22] 어느 정도냐면 홍기 여사가 와병하던 안방에 온도계를 달고 매일마다 실내 온도를 체크했으며, 화장실 출입이 어려울 것을 염려해 안방과 통하는 곳을 화장실로 개조하기까지 했다.[23] 미국에서는 반대로 전직 대통령이었던 로널드 레이건이 알츠하이머를 앓았고, 영부인인 낸시 레이건 여사가 그를 돌봤다.[24] 그래도 전직 대통령의 장례에 걸맞게 KBS, MBC, SBS, YTN등 주요 언론사들에서 주요 뉴스로 보도했고, 정계에서는 노무현 대통령 내외분과 한명숙 국무총리, 김대중, 김영삼, 전두환 전 대통령이 참석했다.[25] 2018년 시점에서도 182cm면 굉장한 수준이며, 저때는 독보적인 장신이었다. 오늘날 192cm 정도 되는 키다.[26] 권영민, <자네 출세했네>에서.[27] 게다가 직급상으로도 주사 위에 사무관, 서기관, 부이사관, 이사관, 관리관, 차관, 장관, 부총리, 국무총리, 국가원수 총 11직급차이난다(...)[28] 하지만 박정희에게 수시로 까이는 경우가 많아서 의도하지 않은 코믹함을 자아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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