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2-09-26 14:04:44

창씨개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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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배경3. 진행
3.1. 거부자에 대한 불이익3.2. 일본의 패망 이후
4. 목적
4.1. 대내외에 밝힌 목적4.2. 실제 목적
5. 조선인들이 보인 반응6. 사례
6.1. 창씨개명의 예외6.2. 성씨별 창씨개명 상황6.3. 저항 사례
7. 유명 인물의 창씨개명 목록8. 유사 사례
8.1. 강요 차원8.2. 자발적인 개명 차원8.3. 번역 차원
9. 한국10. 번역상의 표기11. 참고 문헌

1. 개요

창씨개명([ruby(創,ruby=そう)][ruby(氏,ruby=し)][ruby(改,ruby=かい)][ruby(名,ruby=めい)], 소시카이메이)은 조선총독부에서 조선인들의 성과 이름을 강제로 일본식으로 바꾸게 하던 일을 말한다. 교과서에서는 이해가 쉽도록 '일본식 성명강요'(日本式 姓名强要)라고도 하나, 역사학계에서는 창씨개명이라 부르며 이것이 정책의 본질을 더욱 잘 나타내는 명칭이다.

한국의 성명(名)을 일본식 씨명(名)로 바꾼 것이므로 창씨(創氏), 즉 '씨'를 창제하는 일이 된다. 물론 개명(改名)이란 말에서 보듯, 이름(名) 역시 함께 개조했다. 다만, 창씨만 의무였고 개명은 자유였다. 실제로 창씨만 하고 개명은 안한 사람들도 많았다.

상당수의 현대 한국인중국인은 이해하지 못하지만, 원래 성(姓)과 씨(氏)는 다른 개념이다. 춘추좌전에 "천자제후를 봉할 때 그 조상의 근원을 보고 성으로 삼고 그 봉토를 보고 씨로 삼는다." 하는 내용이 있다. 즉 성이란 출신 종족명이고 씨란 그 사람 혹은 그 사람의 조상이 영유했던 분봉지를 의미한다. 예컨대 중국 제나라의 시조인 강태공 여상은 성과 씨가 다른데, 성은 강이요 씨는 여이다. 고대 한국에서도 연개소문(이리카수미)와 겉보기에는 전혀 성명에 겹치는 글자가 없는 도수류금류가 연개소문과 '같은 성(同姓)'이라는 기록이 일본서기에 나온다. 그 후 한국과 중국에서는 사실상 성씨 개념이 통합되고 한국에서는 조상의 근원을 나타내는 부분이 본관으로 별도로 분화하였으나,[1] 일본의 경우 은 오로지 덴노가 하사하는 것이다. 대부분 일본인은 성이 없이 오로지 씨만 있다. 일본에 존재하는 대표적인 성은 후지와라, 다이라, 미나모토, 다치바나 등으로 대부분 고대 일본의 귀족에서 파생됐다. 물론 성과 씨가 같을 수 있으나 일본에서도 고대 중국에서처럼 성과 씨가 다른 경우가 있었다. 예컨대 우리에게 유명한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경우 은 미나모토(후에 하사받음)이며 씨는 도쿠가와(미나모토노 도쿠가와 아손 이에야스)이다.[2]

이처럼 일본의 귀족 및 무사계급은 원래 앞에서 언급한 4대 성씨인 후지와라나 미나모토 등 성을 가진 일족의 후손들이 각자가 소유한 장원이나 저택의 지명을 따서 각각 씨명을 정하는 식으로 성과 씨를 구분해 사용했다. 예를 들어 센코쿠시대의 유명한 무가 다케다 가문은 가문의 시조가 소유한 장원이 위치한 곳이 히타치노쿠니에 위치했던 다케다 장(竹田莊)이었기 때문에 스스로 다케다 씨를 자처했다. 성과 씨의 차이 때문에 일본인은 예컨대 처가의 가업을 잇기 위해 사위가 씨를 바꾼다든지 하는 문제에 대해 한국보다 훨씬 덜 민감하다. 한국과 달리 씨를 바꾼다는 것에 조상을 부정한다는 의미가 훨씬 적기 때문이다.[3]

그 후 메이지 시대에 와서 신분제 폐지 등 개혁의 일환으로 성 제도는 폐지되고, 씨만을 사용하게 되면서 이전에는 성과 씨를 쓸 수 없던 평민들에게도 씨가 부여되었다. 이때 씨의 개념을 조상의 근원을 나타내는 이름이 아니라 '한 가정(戶)의 구성원을 나타내는 이름'이라는 개념으로 보면서 한 가정의 구성원은 모두 씨를 통일시켰고, 그래서 시집온 부인은 중국이나 한국처럼 본래 성씨를 쓰지 못하고 서양처럼 남편의 씨를 따른다든지, 반대로 데릴사위로 들어간 신랑은 처가의 씨로 개성한다든지 하는 일본 특유의 씨 제도가 확고해졌다.

2. 배경

그 기원은 1890년대 일본에서 메이지민법(明治民法)의 제정을 통해 폐성창씨(廢姓創氏)를 이뤄낸 이토 히로부미와 우메 겐지로(梅 謙次郎) 교수가 새로운 식민지가 될 조선의 새로운 민법을 구상하던 시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둘은 조선의 서구 문명화를 구실로 조선의 성 제도를 폐지하고 일본처럼 씨 제도로 바꿀 계획을 구상했는데, 이토가 안중근 의사에게 저격당하고 우메 교수도 급사하면서 이 계획은 흐지부지해졌다.

일제가 조선을 병탄한 후 조선총독부는 '조선의 정서 상, 일본식 성명을 강제하면 매우 위험하다'고 여겨 이를 시행하지 않았다. 물론 이 계획을 아주 포기하진 않아서 1919년에 창씨정책 시안을 수립했지만, 얼마 후 3.1 운동(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나 이 계획은 유보되었다. 이후 일본은 1923년 조선민사령을 통해 조선의 호적을 일본식 이에(家)를 중심으로 하는 일본식 호적제도로 개편했고, 1929년에 다시 2안을 수립하는 등 재차 창씨개명을 시도했지만 본국의 만류로 그만두었다.

그러나 일본 입장에서도 조선인에게 일본식 이름을 부여하는 것에 대해서는 논쟁이 매우 많았다. 물론 도덕적, 인도적인 관점에서 반발한 것은 절대 아니고, 조선인이 일본식 성씨를 쓰고 일본에 동화되는 것, 즉 조선인이 일본인과 동등한 지위, 동등한 시민권을 가질 수 있다는 데에 거부감을 표시한 것이다.# 무엇보다 조선인과 일본인은 같은 동아시아인이라 외형만으로 구분하기 어려워, 조선인과 일본인이 섞여 순수 일본인이 사라질 것이라는 공포감이 있었다.[4] 실제로 1923년 관동대지진 당시에는 "15원 50전(じゅうごえん ごじっせん)"과 같은 구절을 말하도록 시켜서 어두에서 탁음 발음 가능 여부를 악용조선인을 구별하여 학살했다.[5] 이렇게 문화적 차이를 이용하지 않으면 조선인과 일본인을 구분하기 어려웠다는 뜻이기도 하다. 성명까지 일본식으로 바꾸고 호적을 교체한다면 더욱 조선인과 일본인을 분간하기 어려워진다.

이 때문에 데라우치 마사타케 총독은 구분을 위해 조선인이 일본식 성명을 쓰는 것을 엄격히 금지하기도 하였다. 초대 1910년대에도 몇몇 친일파들이 일본에 충성한답시고 일본식으로 개명 신청을 하고, 일부는 자식이 태어나자 일본식 이름을 지어 호적에 올리려 하기도 했지만, 당연히 이 자들조차도 예외없이 퇴짜를 맞았다. 이는 식민통치 당시 일본인이 1등 신민으로서 조선인보다 우월한 지위를 차지해야만 했고, 그런 만큼 적용되는 법률이나 형벌 등도 차별화되었기 때문이다. 일본 내에서 그런 입장의 반발이 점차 사라지고 일제 정책이 조선인의 일본인과의 확실한 동화, 즉 내선일체 정책으로 굳어진 것은 최소한 1930년대 이후의 일인데, 이때조차도 보수적인 일본인들은 내선일체 정책에 반감을 가진 경우가 적지 않았다.

한편으로는 그렇게 일본 내부에서의 내선일체 정책의 반발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니토베 이나조 도쿄제국대학 교수를 필두로 조선의 점진적 동화를 주창하는 입장 또한 지속되어 왔다. 이들은 기존 무단통치의 가혹함이 오히려 조선 지배에 악영향이 됨을 지적하고, 조선에 유화적인 통치를 펼쳐 조선인들이 자발적으로 일본을 우러러보게 한 다음 아예 일본인의 일부로 동화시켜 조선을 내지화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주장을 2대 정무총감 미즈노 렌타로(水野 錬太郎) 등이 실정적으로 채택했으니, 이것이 바로 문화통치이다.

하지만 동시에 일본 내에서는 '식민지에도 자치권을 부여해야 한다'는 분화운동 역시 격렬히 제기되었고, 이에 따라 동화와 자치를 동시에 추진하는 '자주협동정책'을 펼쳤다. 이는 과거 프랑스의 식민지배 방식인 연합주의를 일본 나름대로 벤치마킹한 것이었다. 프랑스도 열강 진입 초기에는 식민지에 강제적인 프랑스 동화를 강요했으나 격렬한 반발로 통치가 더 어려워지자, 나중에는 동화와 거리를 두는 영국식 통치와 기존의 방식을 절충, 즉 자치와 동화의 병행 정책으로 노선을 틀었기 때문이다.

1930년대에 이르러서는 이런 점진적 동화 정책이 사그라들고 본격적으로 일본이 야욕을 드러냄과 동시에 급진적 동화 정책으로 선회되는데, 1935년 일본의 국정교과서들은 조선인과 대만인을 일본인이라고 표기하는 등 이전보다 더욱 노골적으로 동화의 의지를 표명했다. 물론 말만 그랬고 조선인이나 대만인을 본토 일본인과 동일하게 취급해 주려는 노력도, 생각도 없었고 단지 식민 통치의 정당성과 명분을 확보하기 위한 위선에 불과했다.

가령 관동군이 세운 괴뢰국인 만주국의 사관학교였던 만주국육군군관학교에서는, 당대 만주국에 국적법이 없음에도 일본인은 일계(日系), 조선·중국·대만인은 만계(滿系)로 구분하여 차별했다. 창씨개명과 다른 문제이긴 하지만, 첨언하자면 물론 만주국육군군관학교에서 일본인과 다른 민족을 아예 별도로 구분해서, 식사시간에조차 서로 마주칠 일이 없을 만치 분리교육을 했다. 이후 조선인 학생들이 항의하여, 조선인을 중국인과 분리하여 일본인과 함께 일본인으로서 교육받도록 하였다.

3. 진행

1936년 8월 전 육군대신이자 관동군사령관인 미나미 지로가 7대 조선총독으로 부임했다. 그는 천황이 조선에 방문해도 좋을 정도로 조선의 치안을 안정시키며 조선인들에게 천황 숭배 사상을 가지도록 정신을 개조하여 '충량한 황국신민'으로 만드는 것과, 조선에 징병제를 실시하고 조선 청년들에게 일본의 국방의 의무를 다하도록 교육의 확보를 목표로 삼았다. 그는 부임 직후 일본어의 생활화와 천황 숭배(궁성요배)를 방해하는 다른 종교들을 탄압했으며,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보다 강경책을 펼쳐 조선 내부의 독립운동 세력을 완전 독립과 자치, 좌와 우를 가리지 않고 때려잡아 조선의 표면적인 안정화를 가져왔다. 미나미 지로는 황민화와 징병을 기반으로 한 동화정책을 펼치기 시작했다.

1937년 10월 황국신민서사가 발표되었고 조선인들에게 신사참배를 의무화시켰다. 1938년 2월에 지원병제를, 4월에 조선어의 상용 및 교육 금지 정책과 더불어 일본어 보급 정책을 폈다. 5월에는 일본의 국가 총동원령을 조선에까지 확대했다. 그리고 조선인의 천황에 대한 충성심 고취와 완전한 일본화를 통한 사법 행정의 일원화와 징병 및 국가 자원의 동원을 완성하기 위해 조선과 대만에 조선, 중국식 성씨를 폐지하고 일본식 성씨를 새로 만드는 폐성창씨(廢姓創氏)를 강요했다. 총독부는 이 정책이 조선인과 대만인의 차별을 완전히 철폐하고 그 증거로 그들에게 일본식 이름을 부여하는 것이라고 대대적으로 홍보했지만, 극도의 반발로 '폐성창씨'의 대체어로 '개성명(改性名)'이란 용어를 대신 사용할 수 밖에 없었다.

목표 달성을 위해 일본은 먼저 조선의 지식인층을 겨냥, 수양동우회 사건흥업구락부 사건을 일으켜 좌우익을 망라한 조선의 수많은 지식인을 체포해, 고문을 거듭하며 천황과 국가에 충성하는 황국신민이 되겠다는 전향서를 쓸 것을 강요했다. 매 앞에 장사 없다고, 이광수를 비롯한 수백 명의 지식인이 사상 전향서를 쓰고 나서 겨우 풀려났다. 하지만 고문에도 불구하고 전향을 거부하고 구속된 조선 지식인들은 "조상을 욕되게 하는 폐성창씨를 강할 바에 차라리 우리들을 죽이라"고 미친 듯이 반발했다. 이들 대다수가 자존심이 강한 지식인들이었으니, 일본식 성명의 강요가 더욱 치욕이었을 것이다. 이들의 반발에 놀란 조선총독부 경무국[6]미나미 지로에게 "일본식 성명을 강요하면 대규모 폭동(大規模な暴動)이 일어날 것이니, 일본식 성명을 강요하는 것을 불가능하다"는 보고서를 올렸다.

끝내 일본은 조선식 성을 완전히 없애는 것이 아니라 일본식의 새로운 성씨를 부여하는 것에 그치는 창씨개명으로 후퇴하는 수밖에 없었다.[7] 그렇게 1939년 11월 10일 제령 19호와 20호를 통해 창씨개명의 방침을 발표했으며 이는 1940년 2월 11일 기하여 효력을 발휘했다. 조선총독부는 기존의 '관습적 성명'과 더불어 일본식 씨명을 등재하고 일상생활에서 씨명을 쓸 것을 명령했다. 이렇게 호주의 아내와 어머니에게 집안의 성과 다른 성이 허용된 것과 달리, 여자들에게도 같은 씨가 강요되었다.

조선총독부는 "6개월 안에 호주(戶主)가 의무적으로 창씨를 해야 한다"고 압력을 넣었다. 만약 호주가 응하지 않아도 직권창씨라 하여 이름을 강제로 바꿀 계획이었다고 한다. 모든 조선인들은 제령 19호에 따른 법정창씨에 해당됐다.

총독부에서는 미나미 지로 총독의 부임 이래로 오랫동안 창씨개명을 준비해서 건국기원절[8]인 1940년 2월 11일에 맞춰서 대만과 동시에 6개월 시한을 주고 각자 스스로 창씨하라고 집중 광고를 때렸다. 총독부는 창씨개명 절차를 매우 편리하게 해 주었고, 비용도 깎아 주었다.

총독부는 매우 느긋한 태도로, 조선인들이 열화와 같이 호응하며 엄청나게 신청하리라 예상하고 현장 격려 공문까지 발송했다. 하지만 2월 11일 하루 경성부에서 창씨개명한 사람은 고작 48명이었고 12일에도 겨우 43명에 불과했다. 12일 창씨 신고를 한 주요 인물로는 이광수, 이승우, 이원보, 조병상, 윤갑병, 최지환 등이 있었다. 예상보다 훨씬 적은 수치에 총독부는 발칵 뒤집혔고, 기존의 느긋한 태도를 버리고 전국의 유지, 지식인들에게 "모범을 보이라"고 갈구면서 창씨를 유도했지만, 2월 말까지 창씨 비율은 겨우 0.26%였고 2달이 지나도 1.07%에 그쳤다.

전국의 유림문중의 강력한 반발로 접수율은 터무니없이 낮았고[9], 시한의 절반이 지난 5월 20일까지 창씨개명을 한 가구 수는 조선 전체 428만 2754가구 중 고작 32만 6105호(7.6%)에 불과했다. 당시 별 창씨개명 비율은 경상북도[10] 22.8%, 충청북도[11] 12%, 충청남도[12] 9.6%, 평안북도 7.7%, 경기도[13] 7.1%, 평안남도 6.7%, 황해도[14] 6.1%, 강원도[15] 5.5%, 경상남도[16] 4.8%, 전라남도[17] 4.6%, 함경북도 3.7%, 함경남도 3.6%, 전라북도[18] 1.8% 순이었다.

이런 엄청난 무반응에 열이 뻗친 총독부는 강제로 창씨개명을 밀어붙여서 나머지 3개월 동안 300만 가구를 창씨개명시켰다. 당시에는 이장이 사람들을 불러서 이름을 부르면 서류에 적는 식으로 이루어졌다고 한다. 이에 따라 창씨개명 업무가 종료된 1940년 8월 10일에 집계된 통계로는 전체의 80.3%인 320만 116가구가 창씨개명이 완료되었다고 한다. 1940년 12월 법무국 조사과에 따르면 도별 창씨 호적수의 비율은 평안북도 87.3%, 강원도 85.0%, 충청남도 84.4%, 경상남도 84.3%, 경상북도 83.8%, 함경남도 83.5%, 전라남도 80.8%, 경기도 79.0%, 황해도 77.9%, 평안남도 77.3%, 전라북도 76.5%, 충청북도 70.5%, 함경북도 64.6% 이었고 전체 400만 8925가구[19] 중 80.5%인 322만 8931가구가 창씨를 완료했다. 그 이후로도 창씨개명 신청을 받아 1941년 81.5%로 늘어났다. 당시 신문들은 "xx군 oo% 달성!" 식으로 창씨개명을 독려하는 내용을 연일 선전하는 등, 총독부의 강제력을 매우 절실히 입증했다.

3.1. 거부자에 대한 불이익

또한 조선총독부에서는 창씨개명 거부자에게 불이익 조치를 내렸는데, 저 아래의 것들을 전부 이겨낼 수 있는 사람은 법도 없고 직장도 없어도 살 수 있거나 불굴의 의지를 지녔을 가능성이 높다. 당장 창씨개명을 안 하면 월급을 주지 말든지 깎아버리든지 하는 것이 회사 단위의 의무였을 정도니 자발적이였다는 주장은 걸러듣는 것이 좋다. 위인전에 나오는 사람들을 비롯해 끝까지 창씨개명을 거부한 경우도 있지만 대개 한국에서 명망이 높고 인맥을 통해 생활에 충분한 지원을 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 직장/노무
    • 조선인 중 창씨개명을 거부할 경우 해당자를 이유불문하고 즉시 해고한다. 다만 창씨개명에 참여하면 복직을 할 수 있다.
    • 각 직장 및 노무사(社)들은 창씨개명을 거부한 조선인의 고용 및 입사 등을 절대 금하며, 이를 어길 경우 총독부령에 따라 엄벌에 처한다.
    • 창씨개명 거부자 또는 창씨개명을 하지 않은 자에게는 봉급 급여를 불허하거나 삭감해야 하며, 이를 어길 경우 총독부령에 따라 엄벌에 처함과 동시에 해당 직장을 강제 폐쇄 조치한다.
  • 학교/교육
    • 조선인 학생 중 창씨개명을 거부한 학생의 경우, 해당 학교 교장 및 교사는 해당 학생들에게 창씨개명을 할 것을 권고강요 협박해야 하며, 마찬가지로 교직원들도 창씨개명을 의무적으로 해야 한다. 이를 어긴 교장 및 교직원은 즉시 학교에서 제명 및 해고 처리를 당하며, 학생의 경우 즉시 정학 및 제적 또는 퇴학 조치를 한다. 학교 집단에서 거부할 경우 해당 학교를 폐교 조치한다.
    • 창씨개명 거부자는 입학을 불허하며 교육 대상에서도 전면 제외한다. 학교 중 조선 성명을 쓰는 학생의 입학을 무단으로 허가했을 경우 해당자는 엄벌에 처하며, 해당 학교도 폐교 조치한다.
    • 학생들은 물론 해당 학생들의 부모나 직계 가족 등도 모두 창씨개명을 해야 하며, 이를 어기거나 따르지 않을 경우 가족 전원을 처벌 대상으로 올린다.
  • 교통/수송
    • 창씨개명을 거부한 조선인 승객은 모든 교통편 이용을 불허한다. 또한 1등석 등 객차 이용도 절대 불허한다.
    • 철도 수송화물에 조선인 성명이 표기된 화물 역시 수송 이용을 불허하며 해당 화물은 즉시 반송 처리한다.
  • 기타
    • 창씨개명을 거부한 조선인은 총독부에서 지원하는 물자 및 배급대상에서 제외한다.
    • 조선인 성명을 사용하는 자는 행정기관 민원 사무에서도 불허 대상이며, 민원상담의 일체를 금한다.
    • 창씨개명을 거부하거나 일본식 성명으로 개명하지 않은 조선인은 불령선인, 비국민 및 무국적자로 처리, 간주하며 군헌병과 경찰 등을 통해서 요주의 사찰(감시) 대상으로 선행한다.
    • 창씨개명 제정 이후 출생한 조선인 신생아는 무조건 일본 성명으로 먼저 짓거나 단독으로 지어야 하며, 조선 성명 단독으로 짓거나 일본 성명과 병행해서 짓게 될 경우 비국민 및 무국적자로 처리하고, 해당 부모는 엄벌에 처한다.
    • 창씨개명을 하지 않은 사람은 내지로 도항할 수 없다.
빠스껫 볼에서는 스포츠 구단은 유니폼에 창씨개명한 이름만을 적을 수 있고 창씨개명을 하지 않은 선수를 구단에서 제명할 수 있다는 내용도 나왔다. 이 때문에 빠스껫 볼에서 민치호가 아사노 지코(淺野時子)라는 창씨명이 적힌 유니폼을 받은 것으로 설정된 것이다. 이외에 빠스껫 볼에서 몇몇 한국인 선수가 다나카 준페이, 요시다 다케시, 하세 료 등으로 창씨를 하기는 했다.

3.2. 일본의 패망 이후

1946년 10월 조선성명복구령(朝鮮姓名復舊令)을 제정해 원래 이름을 되찾을 수 있었으며, 일부 제적등본(구 호적등본)에서도 해당 법령의 제정에 의거해서 수정한 흔적[20]을 찾아볼 수도 있다.[21]

한 때 한국 국적이나 조선적을 가진 재일동포나, 중화인민공화국 또는 중화민국 국적을 가지고 있는 재일 화교들은 일본 국적으로 귀화를 신청할 때 "당신과 같은 성씨는 일본에 없다"는 이유로 여전히 일본식의 창씨개명을 강요받았다. 그래서 성을 갈기 싫은 사람들은 가네다(金田), 아키야마(秋山)등 자신의 성과 같은 한자가 들어간 성을 썼다. 내국인이 아니어서 생기는 불이익이 많으니 귀화를 결심하는 것이다. 특히 조선적을 가진 사람의 경우는 조선적 문서 참고. 다만 손정의의 경우에는 일본 국적으로 귀화하면서 같은 이유로 거부 당하자 '역창씨개명'을 시도했는데, 일본에선 결혼하게 되면 보통 아내가 남편의 (데릴사위로 들어가면 그 반대) 성씨로 바뀌는 것에 착안해 일본인인 자기 아내를 손씨로 바꾸어서 일본인 중에 손씨가 있음을 증명하여, 성명 한자를 그대로 두되 이름의 독음만 훈독으로 읽어서 '손 마사요시'가 되었다. 역관광 이건 순환논법 아닌가 현재는 강희자전에 등록된 한자 + 인명용 한자 + 상용 한자 + 가타카나 + 히라가나라면 얼마든지 마음대로 창씨개명할 수 있다. 단, 이름은 상용 한자 + 인명용 한자 + 가타카나 + 히라가나만 쓸 수 있다. (읽기는 마음대로 신청할 수 있다.)

4. 목적

4.1. 대내외에 밝힌 목적

미나미 지로는 창씨개명을 선포하면서 '조선은 이제 식민지가 아니라 내지다!' 라고 호기롭게 선언하면서, 창씨개명을 실시하는 사유를 다음과 같이 밝혔다.
  • 중국의 영향에서 완전히 벗어나고 조선 고유의 문화를 확립하기 위해서.
  • 조선인들이 원해서.
  • 조선의 성씨는 250여 종밖에 안 되는데 이는 10만여 종에 이르는 성씨를 가진 일본과 대조된다. 일본처럼 성씨가 다양해지면 선진화와 문명화를 이룩할 수 있다.
그리고 기존의 성이 없어지는 게 아니라, 기존의 성은 그대로 남고 새로운 씨를 부여할 뿐이니 오해하지 말라는 설명서까지 전국에 배포했다.[22] 그리고 이광수를 비롯한 지식인들을 대거 내세워서 창씨개명을 홍보했다.

4.2. 실제 목적

한반도를 "외지가 아닌 일본의 일부로 완전히 합병하기 위한 계획의 일환"이었다. 그래야 장기적으로 조선의 인력과 자원을 전쟁 등에 본격적으로 투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중일전쟁으로 한창 군사력이 필요하던 시절에도 일제는 조선인을 믿지 못해 군인으로 써먹는다는 선택지를 피하려고 했고, 징병 대신 특별지원병제도라 하여 철저히 검증된 조선인들만 전장에 투입했다. 조선인들을 대규모로 군대에 보내서 병사로 삼았다가는 혹시 조선인들이 반란을 일으킬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이었다.[23] 조선인 징병과 징용을 하자 일부 친일파들이 '드디어 우리도 황국신민으로서 맡은 바 의무를 다할 수 있게 됐다.'고 한 데는 이런 배경도 있었다. 그러다가 사정이 급하니까 '이제 차별하지 않는다.'는 떡밥을 교묘하게 끼워서 조선인을 전쟁에 동원하고자 한 것이다.

또한 조선인이라는 정체성을 희석시켜 독립의지를 꺾기 위한 계획이었다. 표면상으로는 '일본식으로 개명한 조선인이 일본인과 동등한 대우를 받는다'고 하였지만, 일본은 끝끝내 '조선 거주 조선인과 일본인은 병역을 지지 않는다'며 본국 거주 주민과 동등하게 취급하지 않았다. 해방 직전인 1945년에야 겨우 조선에 거주하는 일본인에게만 제국의회 투표권이 주어졌다.

창씨개명은 조선식 이름을 아예 없애는 것이 아니라 단지 일본식 이름을 새로 만드는 것이었다. 창씨개명을 해도 원래 이름과 창씨개명한 이름이 나란히 호적에 오른다. 게다가 성씨를 만들 때도 고대 일본 귀족 성씨인 원([ruby(源,ruby=みなもと)])·평([ruby(平,ruby=たいら)])·등([ruby(藤,ruby=ふじわら)])·귤([ruby(橘,ruby=たちばな)])은 쓰지 못하게 했다. 일본 무사계급의 유명한 성씨들(도쿠가와 등)로 창씨개명하는 것도 불가했고, 조선인들은 조선인임을 알 수 있는 성씨로 창씨개명을 하게 시켰다. 또 현재 일본에서 재일교포들이 신상을 숨기고 활동하는 것이나, 부락지명총람사건을 통해 부라쿠민의 출신지를 죽어라 캐내는 현대 넷우익들의 모습이나, 류큐인이나 아이누 같이 일본의 정복전쟁을 통해 일본화된 지역의 토착민족이 야마토 민족계 이주민들과 갈등하거나, 생물학적으로는 아이누의 후예이지만 이미 문화적으로 야마토 민족에 동화될 대로 동화된 도호쿠인들이 일본 극우세력에게 에미시 취급을 당하는 모습을 보면, 실제로 창씨개명을 전면적으로 했어도 조선인 차별이 없어졌을 가능성은 희박하다. 예를 들어, 평생을 일본에서 살고 한국어조차 할 수 없는 아라이 히로후미는 성범죄를 저지르자마자 곧바로 본명인 박경배로 환원되어 버렸다.

가끔 일본 극우들이 '창씨개명은 조선인을 위한 정책'이라거나 '조선인에게 일본인과 같은 권리를 주기 위한 관대한 조치'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같은 권리를 부여한다는 발상은 실은 같은 동원의 의무를 짊어지게 만들기 위해서 가져다붙인 것이다. 그리고 당시 조선인들 중 진성 친일파들을 제외한 대다수의 조선인들은 자신이 일본인이 된다는 걸 싫어하는 걸 넘어 혐오했다. 당시 조선인들 사이에서는 일본인이라는 말보다 비하단어인 왜놈들이란 말이 더 통용될 정도였고 친일파들마저도 일부는 정작 자신이 일본인이 되는 것도 싫어했다.[24]

5. 조선인들이 보인 반응

명목상으로는 어디까지나 '자발적으로' 행해진 것이었기 때문에, 유명 인사 혹은 아이러니하게도 친일반민족행위자 등 '유·무형의 압박과 강요를 이겨낼 수 있었던 사람들'은 창씨개명을 거부할 수 있었다. 해방 직후 어느 친일파는 창씨개명이 극히 자발적으로 이뤄지는 행위였지만 자신은 개명하지 않았으니 친일파가 아니라고 우기다가 반민특위의 반박을 받고 데꿀멍하기도 했다. 또 홍사익처럼 일본군 장성이 되어서도 창씨개명을 하지 않은 인물 역시 있다.

어느 친일파는 거액을 총독부에 헌납하고 악랄하게 사업을 하여 악명이 높았는데 정작 "창씨개명을 하느니 그냥 죽겠다"고 악을 써서 창씨개명을 관리하는 일본 관리들이 그를 달랬지만 그는 성과 이름만큼은 절대로 버릴 수 없다며 스스로 목을 매어 죽었다. 유학의 영향이 아직 강하게 남아서 조상과 가문이 절대적이었던 시절이고, 창씨개명은 '민족의 정체성'에 앞서 '가문의 정체성'과도 직결되는 문제다. 냉정히 말하면 나라는 몰라도 가문은 소중했다는 것. 족보와 가문에 대한 집착 및 자부심이 굉장한 시대였다. 이러한 당시의 모습은 일본의 소설가 카지야마 토시유키가 쓴 이조잔영(李朝殘影)과 이를 가지고 만든 임권택 감독의 영화 족보에 잘 반영되었다. 카지야마는 실제로 식민지 조선의 경성 출신이었다.

그러나 창씨개명에 극렬하게 반대하던 당시의 기성세대와 달리, 조선의 정체성이 희미해진 1930년대 이후 출생자들은 이미 창씨개명에 익숙하여 오히려 조선 이름보다 일본 이름을 더 세련되게 느끼기도 했다. 박완서의 자전소설인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에 의하면, 자신의 창씨개명하지 않은 보쿠엔쇼라는 이름을 부끄러워하며, 하나코·하루에 같은 일본 이름이 듣기 좋아 부럽다는 내용이 나온다. 실제로 이 세대는 1945년 해방이 되어서도 우리 일본이 패망하였는데 왜 기뻐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던 세대임을 생각해보면, 일제강점기가 조금만 더 길었어도 창씨개명은 이전 세대에 비해 거부감 없이 널리 퍼졌을 것이라 추측할 수 있다. 아메리카 원주민필리핀의 사례가 해당 대체역사에 가까운 대표적인 사례인데, 앵글로아메리카 원주민들이 영미권 성명을 쓰고 라틴아메리카 원주민들이나 필리핀인들이 스페인어권 성명을 쓰는 게 그 예다.[25]

창씨개명의 피해자들[26] 중에는 직업 특성상 개명된 이름을 불러야 하는 경우도 있었는데, 이들은 80세가 다 되거나 심하면 팔순이 지나서도 서로를 창씨개명한 이름으로 부르는 경우도 있었다. 또한 이렇게 창씨개명을 하고 제2차 세계 대전에 징집, 징용, 정신대 등으로 끌려간 많은 이들이 서류상으로 조선 말 이름이 아닌 창씨개명한 이름으로 등록되어 21세기에 이르기까지 피해자들의 신원 파악부터 적잖은 어려움을 겪고 있다.

6. 사례

어쩔 수 없이 창씨개명을 할 경우 대체로 그 집안의 문중이 모두 모여서 회의로 정했는데, 마침(?) 씨(氏)의 유래 가운데 하나가 제후의 봉토를 의미하고 이게 본관하고 의미가 비슷하므로, 조금이라도 고전을 읽어본 문중 일원들은 고전에 맞추려고 본관과 비슷하게 창씨를 했다. 안동 권씨(安東權氏)[27]라서 안도(安東), (盧)씨의 시조가 용강군(龍郡) 출신이라 오카무라(村), 하동(河東)정(鄭)씨라서 가와히가시(河東), 혹은 가와토(河東) 등으로 창씨개명한 경우가 많다. 본관을 그대로 사용한 창씨개명이 가장 흔한 편으로, 지명이니까 일본어로 읽었을 때도 그다지 위화감이 느껴지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안도, 오카무라, 가와히가시·가와토는 일본에도 있는 성씨이므로 위화감이 없었다. 만약 본관을 일본식 한자음으로 읽어 다소 위화감이 있다면 본관과 본래 성을 합친 이름으로 개명하기도 했다.[28] 박정희고령 박씨다카기(高木)는 박(朴)의 목()자와 고령 박씨의 고()자를 따서 만든 것이다. 심영[29] 등의 청송 심씨는 본관인 청송(靑松)에서 글자를 따 와 아오키(青木)로 창씨개명하였다.

이는 한국인과 일본인이 가지는 성씨에 대한 인식을 극명하게 보여준다고 할 수도 있다. 메이지 유신 때 평민들에게 일괄적으로 성씨를 부여한 일본에서는 성이 같은 것은 그저 '우연'이지만, 한국은 성씨에 대한 관념 자체가 일본과 달랐기 때문에 그 심리적 반감이 만만치 않았다. 조선 후기에 우후죽순으로 생긴 성씨의 경우, 어떤 형태로든 자신의 연고와 밀접한 관계인 것이 많았다.

본래의 한국식 성씨의 본관 + 성씨와 본관을 붙여 일본식 성씨로 바꾼 것 말고도, 원래 한국식 성의 글자를 파자한 사례도 있다. 예를 들어 장(張)씨는 유미나가(弓長)로 창씨개명했는데, 파자한 유미나가의 한자를 합하면 弓 + 長으로 張이 된다. (朴)씨의 경우, 마찬가지로 朴을 파자해 기노시타(木下)로 바꾸기도 했다.[30] 일부 최(崔)씨의 경우는 한자의 산 산(山)과 새 추(隹)를 분리하여 가야마(佳山)로 창씨하고, 일부 정(鄭)씨도 한자를 분리하여(鄭 = 奠+邑) 덴오(奠邑) 등으로 창씨하였던 사례가 있다.

혹은 성씨별 시조 설화에서 의미를 따 온 경우도 있었다. 박씨의 경우 위처럼 파자한 사례도 있지만 대체로 신라 박혁거세 신화에서 따와 '신라의 우물'(나정 참고)이라는 의미를 담아 아라이(新井)이나 마쓰이(松井)도 많이 썼다. 대표적인 인물이 재일동포 출신 중의원 의원인 아라이 쇼케이(박경재)였다. 경주 이씨는 시조 이알평이 시조설화에서 표암봉 바위에 내려온 것에서 따 와 이와모토(岩本)로 정하는 것을 고려했다고 한다.

전주 이씨의 경우 대체로 아사모토(朝本), 미야모토(宮本), 구니모토(國本)[31]로 바꾸었는데, 이유는 조선왕실. 종근당을 세운 이종근이 처음 만들었던 약방 이름은 '궁본(宮本) 약방'이었다.[32]

이밖에도 본래의 성씨나 본관에, 일본 성씨에 굉장히 자주 들어가는 한자인 (다), (야마), (하라), (가와), (무라), (모토) 등을 합성한 예는 일제강점기 당시 흔히 쓰인 창씨법이다. 후술될 유명인의 창씨명에서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여자들의 경우 창씨개명을 할 때 이름 뒷부분에 (코, )자를 붙여서 했다고 한다.[33] 남자는 원래 이름 그대로 바꾸거나 원래 이름의 한 글자에 (오), (로), (야) 등을 붙여서 하는 경우가 많았다.

6.1. 창씨개명의 예외

하지만 몇몇 성씨는 창씨개명의 예외로서 인정됐다.[34]

예외대상인 성씨는 (南)씨, (柳)씨, (林)씨, (桂)씨, (吳)씨인데, 일본에도 한자가 같고 발음만 다른 미나미(南), 야나기(柳), 하야시(林), 카츠라(桂), 쿠레(吳)씨가 있고, 희귀성씨도 아니었기 때문에 창씨개명이 큰 의미가 없었다. 실제로 총독부 역시 해당 성씨는 별도의 창씨개명을 하지 않아도 넘어가는 태도를 보였다.#
또한 (安)씨도 일본에 야스(安)라는 성씨가 있으므로, 위의 성씨와 같은 대우를 받았을 가능성이 크다.

다만 국민총력부락연맹의 이사장이었던 유대흥(柳大興)이라는 사람은 창씨개명을 안 해도 되지만[35] 사람들에게 강제하는 입장이라 어쩔 수 없이 야나모토(柳本)로 창씨했는데, '나는 어쩔 수 없이 창씨개명한 것이다. 나도 창씨개명에 반대한다'라는 발언을 하였다가 경찰에게 적발되어 잡혀가기도 했다.[36] 가짜동족어?
오히려 이 때문에 애먼 일본인이 조선인으로 오해받기도 하였는데, 대표적으로 당시에 조선과 조선인을 옹호하는 글을 많이 썼던[37] 미술학자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悅)는 그 이름을 한국식으로 음독하면 류종열이고 위화감 따위는 전혀 찾아볼 수가 없으니 조선인으로 인신공격 당한 일도 있었다.

다른 의미로 웃기는 사례로, 7대 총독 미나미 지로(南次郎, 남차랑)가 부임하자 종씨가 보위에 오르셨다면서 인사를 드려야 한다고 남원에서 일가족을 이끌고 상경한 어떤 남씨가 있었다고 한다.[38] 다른 케이스로 김(金)씨는 순수 일본인 성씨인 콘(金)씨가 있음에도 불구하고[39] 카네다(金田) 등 다른 성으로 창씨개명을 했다. 아마 콘씨가 희귀성이라 그랬을지도.

남궁(南宮)씨도 성이 2글자이고 일본식으로 읽으면 음독으로는 '난구'[40]가 되고 훈독으로는 '미나미야'[41] 정도가 되어 그럭저럭 일본 성씨하고 비슷하게 보여서 그대로 놔뒀는데도 이미 창씨개명을 한 줄 알고 아무 불이익도 받지 않고 그냥 넘어가기도 했다. 실제로 일본에도 이와테현에서 유래된 南宮씨가 있었으므로, 이름만 그럴싸하면 창씨는 물론이고 개명도 하지 않아도 됐었다.

다만 다른 2글자 성은 일본어로 읽었을 때 다소 위화감이 있다고 생각한 경우 본관 등을 따서 창씨개명을 하기도 했다.

6.2. 성씨별 창씨개명 상황

성씨 순위 100위 이상만 기재되었다.
1 (金) 가네우미(金海、かねうみ), 가네오카(金岡、かねおか), 가네다(金田、かねだ), 가네모토(金本、かねもと), 가네시로(金城、かねしろ),
요시카네(慶金、よしかね), 가네야마(金山、かねやま), 가나에(金江、かなえ), 가네야(金谷、かねや), 가네자와(金澤、かねざわ),
가네가와(金川、かねがわ), 가네우라(金浦、かねうら), 가네하라(金原、かねはら), 가네무라(金村、かねむら), 가네이(金井、かねい),
가네키요(金淸、かねきよ), 가네모토(金源、かねもと), 가네코(金子、かねこ), 가나시마(金島、かなしま), 가네마쓰(金松、かねまつ),
가네바야시(金林、かねばやし), 가네미쓰(金光、かねみつ), 미쓰야마(光山、みつやま), 오카다(岡田、おかだ), 미쓰모토(光本、みつもと)
2 (李) 미야모토(宮本、みやもと), 구니모토(國本、くにもと), 아사모토(朝本、あさもと), 마쓰야마(松山、まつやま), 이와무라(岩村、いわむら), 이와모토(岩本、いわもと)
마키야마(牧山、まきやま), 우시미네(牛峰、うしみね), 마시로(眞城、ましろ), 히라카와(平川、ひらかわ), 아오키(靑木、あおき),
니야마(丹山、にやま), 야마모토(山本、やまもと), 리무라(李村, りむら), 리노이에(李家, りのいえ), 나가카와(永川、ながかわ), 기고(木子、きご)
3 (朴) 아라이(新井、あらい), 아마모토(天本、あまもと), 무라이(村井、むらい), 보쿠하라(朴原、ぼくはら), 보쿠다(朴田、ぼくだ),
보쿠자와(朴澤、ぼくざわ), 보쿠야마(朴山、ぼくやま), 보쿠무라(朴村、ぼくむら), 마쓰가와(松川、まつがわ), 다케야마(竹山、たけやま), 기노시타(木下、きのした), 기모토(木本、きもと),
기야마(木山、きやま), 기무라(木村、きむら), 다카기(高木、たかぎ), 게린(鷄林、けいりん), 미쓰야마(密山、みつやま)
4 (崔) 다카야마(高山、たかやま), 야마카(山佳、やまか), 가야마(佳山、かやま), 야마모토(山本、やまもと), 야마에(山江、やまえ),
오야마(大山、おおやま), 도야마(東山、とうやま), 와야마(和山、わやま), 즈이시로(随城、ずいしろ), 사이(佐井、さい), 사이모토(崔本、さいもと), 야마우치(山内、やまうち),
5 (鄭) 지야마(智山、ちやま), 다메카와(爲川、ためかわ), 무카에다(迎田、むかえだ), 오카와(大川、おおかわ), 가와히가시(河東、かわひがし),
미쓰시로(三城、みつしろ), 미쓰야마(三山、みつやま), 덴오(奠邑、てんおう), 데이야(鄭家、でいや), 다케하시(竹橋、たけはし)
6 (姜) 시나노(神濃、しなの), 가미모토(神本、かみもと), 가미구모(神雲、かみぐも), 신야마(晉山、しんやま), 오카(岡、おか), 가미야마(神山、かみやま), 간다(神田、かんだ)
7 (趙) 도요타(豊田、とよた), 시라카와(白川、しらかわ), 초케(趙家、ちょうけ), 다카모토(高本、たかもと), 도요하라(豊原、とよはら), 나카야마(中山、なかやま), 야마모토(山本、やまもと)
8 (尹) 히라누마(平沼、ひらぬま), 이토(伊東、いとう), 이하라(伊原、いはら), 시게마쓰(茂松、しげまつ), 마쓰모토(松本、まつもと)
9 (張) 하리모토(張本、はりもと), 유미나가(弓長、ゆみなが), 나가타니(長谷、ながたに), 다마야마(玉山、たまやま), 나가야마(長山、ながやま), 하세가와(長谷川、はせがわ), 하리마(張間、はりま), 하리노(張野、はりの)
10 (林) 하야시(林、はやし)[비개명]
11 (韓) 기요하라(淸原、きよはら), 니시하라(西原、にしはら), 미모토(箕本、みもと), 아사카와(朝川、あさかわ), 오하라(大原、おおはら), 미노하라(箕原、みのはら), 기요모토(淸本、きよもと), 기요야마(淸山、きよやま), 마쓰하라(松原、まつはら), 이노우에(井上、いのうえ)
12 (吳) 구레(吳、くれ)[비개명], 구레야마(吳山、くれやま), 구레무라(吳村、くれむら), 도쿠야마(德山、とくやま), 미쓰이(三井、みつい)
13 (徐) 다쓰시로(達城、たつしろ), 오시로(大城、おおしろ), 오카와(大川、おおかわ), 오야마(大山、おおやま), 오하라(大原、おおはら), 조카와(徐川、じょかわ), 다쓰카와(達川、たつかわ)
14 (申) 히라야마(平山、ひらやま), 히라타(平田、ひらた), 히라무라(平村、ひらむら), 사루모토(申本、さるもと)
15 (權) 안도(安東、あんどう), 겐토(權東、けんとう), 곤도(權藤、ごんどう), 곤야마(權山、ごんやま), 곤모토(權本、ごんもと), 요시모토(吉本、よしもと)
16 (黃) 기하라(黃原、きはら), 요시무라(芳村、よしむら), 히야마(檜山、ひやま), 기타(黃田、きた), 기모토(黃本、きもと), 히로타(廣田、ひろた)
17 (安) 야스다(安田、やすだ), 야스모토(安本、やすもと), 안도(安藤、あんどう), 다케야스(竹安、たけやす), 야스야마(安山、やすやま), 야스키(安木、やすき), 야스쿠니(安邦、やすくに)
18 (宋) 노야마(野山、のやま), 무카야마(迎山、むかやま), 쓰보야마(壺山、つぼやま), 마쓰야마(松山、まつやま), 마쓰하라(松原、まつはら), 노다(野田、のだ), 오하라(大原、おおはら), 무네모토(宗本、むねもと), 소무라(宋村、そうむら)
19 (全) 에하라(江原、えはら), 마쓰야마(松山、まつやま), 마쓰바라(松原、まつばら), 마쓰다(松田、まつだ), 기쿠하라(菊原、きくはら), 젠케(全家、ぜんけ), 야마다(山田、やまだ)
20 (洪) 난요(南陽、なんよう), 도요야마(豊山、とよやま), 도쿠야마(德山、とくやま), 히로카와(洪川、ひろかわ), 히로하라(洪原、ひろはら), 도코(唐洪、とうこう), 나가야마(永山、ながやま)
21 (柳) 야나기(柳、やなぎ)[비개명], 야나기사와(柳澤、やなぎさわ), 야나기가와(柳川、やなぎがわ), 야나기와라(柳原、やなぎわら)
22 (高) 다카야마(高山、たかやま), 다카시(高志、たかし), 다카시마(高島、たかしま), 다카키(高木、たかき), 다카코(高子、たかこ), 다카다(高田、たかだ)
23 (文) 후미이와(文岩、ふみいわ), 후미히라(文平、ふみひら), 후미하라(文原、ふみはら), 후미아키(文明、ふみあき), 후미카와(文川、ふみかわ), 에시로(江城、えしろ), 난페이(南平、なんペい), 후미모토(文本、ふみもと), 후미야마(文山、ふみやま), 후미무라(文村、ふみむら)
24 (梁) 야나가와(梁川、やながわ), 요시하라(良原、よしはら), 난바라(南原、なんばら), 야나하라(梁原、やなはら)
25 (孫) 오무라(大村、おおむら), 마쓰야마(松山、まつやま), 덴니치(天日、てんにち), 마고다(孫田、まごた), 시게야마(茂山、しげやま)
26 (裵) 다케모토(武本、たけもと)
27 (曺) 마사야마(昌山、まさやま), 나쓰야마(夏山、なつやま), 다치야마(立山、たちやま)
28 (白) 시라카와(白川、しらかわ), 시로하라(白原、しろはら)
29 (劉) 다마가와(玉川、たまがわ), 가와니시(河西、かわにし)
30 (許) 모토시마(許島、もとしま), 모토무라(許村、もとむら), 이시와타(石渡、いしわた), 이와무라(岩村、いわむら), 이와다(岩田、いわた), 마쓰야마(松山、まつやま)
31 (南) 미나미(南、みなみ)[비개명]
32 (沈) 아오마쓰(靑松、あおまつ), 마쓰모토(松本、まつもと), 아오키(靑木、あおき)
33 (盧) 오카무라(岡村、おかむら), 도요카와(豊川、とよかわ), 가미모토(神本、かみもと), 가와하라(河原、かわはら), 미즈하라(瑞原、みずはら), 우에다(上田、うえだ)
34 (丁) 자야마(茶山、ちゃやま), 조토(丁藤、ちょうとう), 마치다(町田、まちだ), 다케시마(武島、たけしま)
35 (河) 가와모토(河本、かわもと), 가와하라(河原、かわはら)
36 (郭) 쓰토야마(苞山、つとやま), 니시우라(西浦、にしうら), 마키노(牧野、まきの), 이와타니(岩谷、いわたに), 니시하라(西原、にしはら)
37 (成) 나리모토(成本、なりもと), 나리타(成田、なりた), 나리야마(成山、なりやま)
38 (車) 구루마다(車田、くるまだ), 나가타(永田、ながた), 다카타(高田、たかた), 도도로키(轟、とどろき)
39 (朱) 아케모토(朱本、あけもと), 모토시로(本城、もとしろ), 네이노(寧野、ねいの)
40 (禹) 니야마(丹山、にやま), 우모리(宇森、うもり)
41 (具) 아야시로(綾城、あやしろ), 아야하라(綾原、あやはら), 아야베(綾部、あやべ), 아야모토(綾本、あやもと)
42 (辛) 가라시마(辛島、からしま), 시게미쓰(重光、しげみつ), 미카와(三川、みかわ)
43 (任) 도요카와(豊川、とよかわ)
44 (田) 다무라(田村、たむら), 사와다(澤田、さわだ), 다나카(田中、たなか)
45 (閔) 빈하라(閔原、びんはら), 모토시로(本城、もとしろ), 이와무라(岩村、いわむら), 이와모토(岩本、いわもと), 가도후미(門文、かどふみ)
46 (兪) 유하라(兪原、ゆはら), 마쓰하라(松原、まつはら), 기젠(杞前、きぜん), 유무라(兪村、ゆむら)
47 (柳) 야나기(柳、やなぎ)[비개명], 야나기사와(柳澤、やなぎさわ), 야나기가와(柳川、やなぎがわ), 야나기와라(柳原、やなぎわら)
48 (羅) 도미타(富田、とみた), 우에무라(上村、うえむら), 마쓰시마(松島、まつしま)
49 (陳) 진나이(陳內、じんない), 진카와(陳川、ちんかわ), 진다(陳田、ちんだ), 미쓰야마(三山、みつやま), 오하라(大原、おおはら)
50 (池) 이케다(池田、いけだ)
51 (嚴) 이와모토(岩本、いわもと), 나시로(奈城、なしろ)
52 (蔡) 사이하라(蔡原、さいはら), 사이카와(蔡川、さいかわ), 히라오카(平岡、ひらおか), 히라마쓰(平松、ひらまつ), 히라모토(平本、ひらもと), 사카와(佐川、さかわ)
53 (元) 모토무라(元村、もとむら), 하라모토(原元、はらもと), 하라무라(原村、はらむら), 하라야마(原山、はらやま)
54 (千) 지하라(千原、ちはら), 지다(千田、ちだ)
55 (方) 가타야마(方山、かたやま)
56 (孔) 교쿠하라(曲原、きょくはら), 고무라(孔村、こうむら), 히하라(檜原、ひはら), 마사하라(昌原、まさはら), 고베(孔部、こうべ)
57 (康) 야스하라(康原、やすはら), 야스히로(康宏、やすひろ), 야스다(康田、やすだ), 야스나리(康成、やすなり)
58 (玄) 겐부(玄武、げんぶ), 노베야마(延山、のべやま)
59 (咸) 나리모토(成本、なりもと), 간네(咸根、かんね), 간하라(咸原、かんはら), 에하라(江原、えはら), 가와모토(河本、かわもと), 마쓰바라(松原、まつばら)
60 (卞) 벤다(卞田、べんだ), 구사타니(草溪、くさたに), 도쿠하라(德原、とくはら)
61 (廉) 미즈하라(瑞原、みずはら), 우메하라(梅原、うまはら), 다치하라(立原、たちはら), 이시카와(石川、いしかわ)
62 (楊) 야나기(楊、やなぎ)[비개명], 기요미즈(淸水、きよみず), 기요하라(淸原、きよはら), 와다(和田、わだ), 야나기하라(楊原、やなぎはら)
63 (邊) 하라베(原邊、はらべ), 하라카와(原川、はらかわ)
64 (呂) 미야하라(宮原、みやはら), 미야모토(宮本、みやもと), 로이(呂井、ろい)
65 (秋) 아키야마(秋山、あきやま), 아키타(秋田、あきた), 아키히타(秋常、あきひた)
66 (魯) 에무라(江村、えむら), 에모토(江本、えもと), 하나무라(華村、はなむら)
67 (都) 미야코(都、みやこ)[비개명], 미야코다(都田、みやこだ), 쓰모토(都本、つもと), 미야코가와(都川、みやこがわ)
68 (蘇) 구사카(草禾、くさか), 이소(伊蘇、いそ), 와다(和田、わだ), 아키타(秋田、あきた)
69 (愼) 마야마(眞山、まやま), 마하라(眞原、まはら)
70 (石) 이시하라(石原、いしはら), 이시카와(石川、いしかわ), 이시무라(石村、いしむら)
71 (宣) 요시카와(宣川、よしかわ), 나카하라(中原、なかはら)
72 (薛) 다마가와(玉川、たまがわ), 마쓰야마(松山、まつやま), 히로모토(弘本、ひろもと), 오야마(大山、おおやま)
73 (馬) 기가와(木川、きがわ), 아리마(有馬、ありま), 우마노(馬野、うまの), 바바(馬場、ばば)
74 (吉) 요시모토(吉本、よしもと), 요시다(吉田,よしだ), 데라사이(寺再、てらさい), 엔요(延陽、えんよう)
75 (周) 슈모토(周本、しゅうもと), 도쿠하라(德原、とくはら)
76 (延) 노부하라(延原、のぶはら), 나카야마(中山、なかやま), 나카모토(中本、なかもと),
77 (房) 후사하라(房原、ふさはら)
78 (魏) 나가모토(長本、ながもと)
79 (表) 오모다(表田、おもだ), 야마자키(山崎、やまざき), 신카와(新川、しんかわ)
80 (明) 아카시(明石、あかし), 아케가와(明川、あけがわ), 아카치(明地、あかち), 다치모리(日月、たちもり)
81 (奇) 이와사키(岩崎、いわさき)
82 (潘) 요네다(米田、よねだ), 가와무라(河村、かわむら)
83 (羅) 도미타(富田、とみた), 우에무라(上村、うえむら), 마쓰시마(松島、まつしま)
84 (王) 오모토(王本、おうもと), 오지마(王島、おうじま), 마쓰다(松田、まつだ), 마쓰시로(松城、まつしろ), 오야마(王山、おうやま), 오하라(大原、おおはら)
85 (琴) 고토가와(琴川、ことがわ), 가네다(金田、かねだ), 이마다(今田、いまだ)
86 (玉) 오하라(大原、おおはら)
87 (陸) 구다시로(管城、くだしろ),구가미(陸海、くがみ)
88 (印) 시루시마(印島、しるしま), 다카키(高木、たかき), 다카무라(高村、たかむら)
89 (孟) 니하라(新原、にいはら), 마쓰오카(松岡、まつおか), 마쓰바라(松原、まつばら)
90 (諸) 에가와(穎川、えがわ)
91 (牟) 무타(牟田、むた), 다니모토(谷本、たにもと)
92 (蔣) 기바야마(牙山、きばやま), 마쓰야마(松山、まつやま), 구니모토(国元、くにもと)
93 남궁(南宮) 난구(南宮、なんぐう)[비개명]
94 (卓) 다카야마(卓山、たかやま), 미쓰야마(光山、みつやま)
95 (鞠) 아오야마(靑山、あおやま), 아오타(靑田、あおた)
96 (余) 요시카와(宜川、よしかわ), 도미모토(富本、とみもと)
97 (秦) 하타(秦)[비개명], 난바라(南原、なんばら), 마쓰바라(松原、まつばら), 오쿠라(大倉、おおくら), 도요타(豊田、とよた)
98 (魚) 우오카와(魚川、うおかわ), 우오니시(魚西、うおにし), 니시카와(西川、にしかわ), 우오누마(魚沼、うおぬま)
99 (殷) 고슈(幸州、こうしゅう), 마쓰에(松江、まつえ), 에모토(江本、えもと)
100 (片) 가타야마(片山、かたやま), 가타모토(片本、かたもと)

6.3. 저항 사례

한편 일부 조선인들은 창씨개명에 아주 심한 반감을 느껴서, 얌전히 창씨개명을 당하는 대신 DQN 네임 저리가라 할 정도로 온갖 개드립, 비웃음, 풍자가 섞인 개명을 하면서 언어유희역관광을 꾀했다.
  • '이누쿠소 구라에(犬糞倉衛, 견분창위)', 개똥이나 처먹어라라는 뜻이다.[51] 물론 당연히 퇴짜를 맞았다.
  • '이누코 구마소(犬子熊孫, 견자웅손)', 단군의 자손이 개자식이 되었다는 뜻. 역시 퇴짜를 맞았다. 다만 일본에도 비슷한 뜻인 이누카이(犬養) 씨는 있다.
  • 이름이 '전병하(田炳夏)'인 한 농부는 자신의 성에 농(農)을 붙여 '전농병하(田農炳夏)'라고 신고했다가 경찰서로 끌려갔다. 평범해 보이지만 이 이름을 일본식으로 읽으면 덴노 헤이카. 즉, 한자는 다르지만 발음이 천황 폐하와 비슷하게 되는 것이다. 정확하게는 天皇陛下는 てんのうへいか(텐노 헤이카)이고 田農炳夏는 でんのうへいか(덴노 헤이카)로 청음과 탁음의 차이가 있지만 일본식 말장난인 고로아와세에서는 청탁음이 무시된다.
  • 어떤 고등학생은 창씨개명 강요에 반항하는 뜻에서 쇼와 덴노의 황태자 책봉 이전 칭호와 이름을 합친 '미치노미야 히로히토'(迪宮裕仁)라고 개명을 하려 했다가 역시 경찰서에 끌려갔다. 우연치 않게도 쇼와 덴노가 황태자 책봉 전에 쓴 어칭호 미치노미야가 조선어로 미친놈이야와 비슷하여 미친놈이야 히로히토라 하여 히로히토 천황을 비아냥거리는 뜻도 가질 수 있다.
  • 조선총독부로 '덴노조쿠 미나고로시로(天皇族 皆殺郞, 천황족개살랑)', '쇼와 보타로(昭和 亡太郞, 소화망태랑)'라는 이름으로 개명해도 좋냐는 엽서가 날아온 적도 있다고 한다. 전자는 천황 집안 다 죽인다는 뜻의 天皇族 皆殺에 인명에 쓰이는 (로)를 붙인 것이고, 후자는 쇼와 망해라라는 뜻인 昭和亡에다가 장남의 이름에 쓰이는 太郞(타로)를 붙인 것이다.
  • 비슷한 경우로, 어떤 사람들은 창씨개명을 실시한 총독의 이름이 '미나미 지로(南次郎)'인 것을 보고, '내가 총독보다 형님이구만'이라는 뜻으로 '미나미 다로'(南太郞)로 창씨개명했다. 물론 처음엔 넘겼다가 뒤늦게 알아차린 총독부는 퇴짜를 놓는다. 일본에서 太郞(타로)와 次郞(지로)는 각각 장남과 차남에게 붙이는 이름이다.
  • 당시 유명한 만담가인 신불출은 '구로다 규이치(玄田牛一)'라고 지었는데, 이는 畜生파자한 것으로 세로로 써서 읽으면축생이다. 한국어에서는 그냥 짐승이라는 뜻이지만, 일본어에서는 "개자식, 개 같다" 등의 욕으로 사용한다. 당시에는 세로쓰기가 더 흔했으므로 이에 맞춘 고품격 개드립이었고 이를 늦게 알아차린 총독부에선 역시 퇴짜를 놓았다. 드라마 《야인시대》에서도 신불출이 개그 소재로 창씨개명을 구로다 규이치(玄田牛一)로 이름을 정한 일화를 보여주기도 했다. (34초부터) 공연 후 빡쳐서 찾아온 미와 경부는 덤.
  • 역시 신불출의 이야기. 첫 번째 개명인 구로다 규이치가 퇴짜 맞은 후에 2번째로 이름을 江原野原(강원야원)이라고 지었는데, 이를 일본식으로 읽으면 에하라 노하라. 즉 추임새인 '에헤라 놓아라'와 발음이 비슷하게 만든 것이며 이 역시 일본을 디스하는 의미이다.
  • 시인 이영철은 창씨개명의 성을 가나다(加那多)로 지었다. 일부러 한국어의 가나다 어순을 내포하여 지은 것으로 보인다. 이름은 라마인가
  • 한술 더 떠서 한 마을 전체가 짜고 마을 사람 전원이 같은 성과 같은 이름으로 통일해 버리는 사례도 있었다고 한다. 성과 이름을 통일시켜버리면 조선총독부 입장에서는 조세 징수나 행정 절차상 귀찮은 일이 많아지므로 일부러 의도했다고도 볼 수 있다.
  • 네이버웹툰 조선왕조실톡 312화에서도 이렇게 창씨개명을 강요당한 조선인들의 재치담긴 이름을 소개했다.
  • 전술한 항일 또는 풍자의 목적으로 지은 창씨개명들 외에도, 일부러 성의없이 대충 지을 의도로 청산백수(靑山白水, 아오야마 시라미즈) 내지는 산천초목(山川草木, 야마카와 구사키)이라고 지은 사례도 있었다. 이 경우는 일단 별 문제는 없는(?)아무렴 뭐 덴노 헤이카보다는 문제 없지 개명이라 퇴짜 맞았다는 기록은 찾을 수 없다. 이는 한국어 위키백과사례에서도 볼 수 있다.
  • 경상남도 양산군의 금융조합 직원 엄이섭(嚴珥燮)은 자신의 엄이섭(嚴珥燮)이란 이름 끝에 야(也)자만 붙여서 "엄이섭야"(嚴珥燮也)라는 이름으로 개명신고를 하여 모든 가족의 성 2글자가 "엄이"(嚴珥)[52]로 변하게 되었는데 이것을 통해 창씨개명을 풍자·조롱하였다.

7. 유명 인물의 창씨개명 목록

창씨개명을 한 사람들은 반드시 모두 친일파인 것은 아니다. 1941년 기준, 조선인의 81.5%가 창씨개명을 했는데 그렇다면 절대 다수의 조선인이 친일파란 뜻이 된다. 당시 거부자에 대한 불이익 때문에 학교 진학 및 취직 등 현실상 어쩔 수 없이 했던 사람이 대다수이며, 이 당시 미성년자라 사실상 저항할 수 없었던 입장의 사람[53]도 상당수이다. 항일 독립운동가 중에도 창씨명을 가진 사람은 많다. 대개가 일본인이나 친일파로 위장하기 위해 창씨개명한 경우이며, 위에서 보듯이 창씨개명을 지시한 조선총독부일본 정부를 조롱하기 위해 일부러 욕설로 창씨명을 만들기도 했다.

반대로 창씨개명의 자발성을 홍보하기 위해 친일반민족행위자들 중에서도 창씨개명을 하지 않은 경우 역시 종종 있다. 대표적으로 조선인으로서는 유일하게 제2차 세계 대전의 전범으로 기소되어 처형된 홍사익이나, 일본 중의원 정치인과 정치깡패로 활동했던 박춘금 등이 있다.

인물 성씨 기준으로 가나다순 정렬. 창씨개명 원리는 옆에 쌍점(:)을 붙이고 적으며, 그밖의 부연 설명은 창씨개명 원리 설명 뒤에 추가하기 바람.

이름 표기 시 표준 외래어 표기법을 준수하여 표기하며, 일제강점기 이후 출생한 현대 인물들은 이곳에 작성하지 말 것.

개명된 이름은 모두 리다이렉트 처리 바람.

===# ㄱ #===
  • 갈홍기 - 아마즈시로 히로키(葛城弘基): 갈/홍기로 분리하여 성씨에 城을 넣어 창씨하였다
  • 강대련 - 이하라 가오리(渭原馨)
  • 강동진 - 오야마 도친(大山東鎭): '동진'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강덕상 - 시나노 사토루(信濃智)
  • 강두안 - 가미노 도시오(神農敏男)
  • 강만길 - 교다 만키치(姜田萬吉): 강/만길로 분리한 다음 성씨에 田을 넣어 창씨하였다.
  • 강면욱 - 니노 다케시로(新農武四郎)
  • 강번 - 도요다 한(豊田藩): '번'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강보형 - 도리야마 가오루(鳥山馨)
  • 강성인 - 하나다 요시기치(花田芳吉)
  • 강영철[54] - 오바타 미노루(小畑實)
  • 강용옥 - 나가시마 노조미(永島望)
  • 강이황 - 오카토시 아키라(岡利晃)
  • 강재호 - 혼고 기미야스(本鄕公康)
  • 강중인 - 도쿠다 주진(徳田仲仁): ‘중인’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강철모 - 오야마 데쓰보(大山哲模): '철모'를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강태하 - 노다 다이카(農田太河): ‘태하’를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강홍식 - 이시이 데루오(石井輝男)
  • 고광만 - 다카미네 게이미쓰(高峰啓光)
  • 고병간 - 다카헤이 간코(高平幹康): ‘간’(幹)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고원훈 - 다카모토 군(高元勳): 이름을 그대로 일본식으로 읽어서 창씨개명하였다.
  • 고은 - 다카바야시 도라스케(高林虎助): 성씨인 고(高)에 림(林)을 붙여 창씨.
  • 고종익 - 다카시마 무네마스(高島宗益), 다카야마 무네마스(高山宗益): ‘종익’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구동욱 - 아야스 히데노부(綾洲秀信)
  • 구마적 - 다카야마 이사오(高山勳)
  • 구연직 - 구미치 노부오(具道信夫)
  • 구용서 - 구하라 이치로(具原一郞): 구에 原을 붙여 창씨했다.
  • 계경찬 - 게탄 게이산(桂丹景燦): 성씨에 丹을 넣어 창씨하고, ‘경찬’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계정식 - 가쓰라 사다타네(桂貞植; 이름 부분을 훈독), 가쓰라 데쇼쿠(桂貞植; 이름 부분을 음독): '정식'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계창업 - 가쓰라 쇼교(桂昌嶪)
  • 계철순 - 가쓰라 데쓰오(桂哲雄): '철'(哲)을 이름 부분에 사용하였다.
  • 구자경[55] - 다케야마 기요시(竹山清)
  • 구자옥 - 구쓰이에 지다마(具家滋玉): 성씨 뒤에 '家'를 붙여 창씨하고, '자옥'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글자 그대로 구씨 집안의 자옥이라는 의미.
  • 고긍명 - 다카 와타아키(高亘明; 이름 부분을 훈독) / 다카 고메이(高亘明; 이름 부분을 음독)
  • 고담룡 - 다카다 유세이(高田湧清)
  • 고웅주 - 다카가키 유츄(高垣雄柱): '웅주'를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고일청 - 다카미네 이치키요(高峰一清): 고/일청으로 나눈 뒤 성씨에 峰를 붙여 창씨하였다, 이름은 '일청'을 그대로 사용.
  • 고재호 - 나가사와 아리타카(長澤在鎬): ‘재호’를 그대로 이름으로 사용하였다.
  • 고홍석 - 다카야마 고샤쿠(高山洪錫): 성씨에 山을 넣어 창씨하고, ‘홍석’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고희준 - 다카시마 모토(高島基)
  • 곽기종 - 니시하라 유이치(西原祐一)
  • 곽인호 - 호모토 린코(保元麟浩): ‘인호’를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곽종원 - 이와타니 가네모토(岩谷鐘元; 이름 부분을 훈독), 이와타니 쇼겐(岩谷鐘元; 이름 부분을 음독): ‘종원’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곽진근 - 마키노 미치오(牧野道雄)
  • 곽태진 - 쓰토야마 다이친(苞山泰珍): 본관인 현풍(玄風)의 옛 지명인 포산(苞山)으로 창씨하고, '태진'을 그대로 이름으로 사용하였다.
  • 권목용 - 곤도 보쿠류(權藤穆龍): 성씨에 藤을 넣어 창씨하고, ‘목용’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권상로 - 안도 쇼로(安東相老): 본관인 '안동'을 따서 창씨했다. 이름 부분은 '상로'를 그대로 사용.
  • 권상학 - 야스나가 소쓰루(安永相鶴), 안쓰이 소쓰루(安水相鶴): ‘상학’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권영세 - 야스하라 세이테이(安原清禎)
  • 권오직 - 마쓰나가 고쇼쿠(松永五稷): ‘오직’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권이원 - 나가노 니겐(永野二元): ‘이원’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권일 - 곤도 요시로(權藤嘉郎)
  • 권중석 - 이시카와 주샤쿠(石川重錫): ‘중석’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권중수 - 다이야스 시게미쓰(太安重光): ‘중’(重)을 이름 부분에 사용하였다.
  • 권중식 - 야마모토 시게오(山本重夫), 야마모토 쇼스케(山本昇佑): 중(重)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권중환 - 겐토 히로시(權堂弘): 성씨 앞에 '堂'을 넣어 창씨하였다.
  • 권쾌복 - 요시다 가이후쿠(吉田快福): ‘쾌복’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권태술 - 야스히가시 마사스케(安東正祐; 성씨 부분을 훈독), 안도 마사스케(安東正祐)
  • 권혁수 - 곤야마 가쿠쥬(權山赫壽): 권/혁수로 분리한 뒤 성씨에 山을 넣어 창씨하였다.
  • 권혁조 - 곤도 데쓰로(權藤哲郎)
  • 길창덕 - 요시모토 마사아키(吉本昌悳; 이름 부분을 훈독) , 요시모토 쇼토쿠(吉本昌悳; 이름 부분을 음독): 성씨에 本을 넣어 창씨하고, 이름 부분은 '창덕'을 그대로 사용하였다.
  • 김갑수 - 가네미야 마코토(金宮允)
  • 김갑순 - 가네이 고준(金井甲淳): 성씨에 ‘井’을 넣어 창씨하고, 이름 부분은 '갑순'을 그대로 사용하였다.
  • 김관 - 가나자와 다케이치로(金澤竹一郎)
  • 김관수 - 기시모토 간(岸本寛): 관(寛)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김관식 - 가네모토 간쇼쿠(金本觀植): ‘관식’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김관현 - 가네미쓰 후쿠오미(金光副臣)
  • 김경림 - 요시하라 도시요시(吉原敏吉; 이름 부분을 훈독), 요시하라 빈키치(吉原敏吉; 이름 부분을 음독)
  • 김경수 - 가네오카 도미모토(金岡富源; 이름 부분을 훈독), 가네오카 후겐(金岡富源; 이름 부분을 음독)
  • 김경승 - 가네시로 게이쇼(金城景承): 김/경승으로 분리하여 성씨에 城을 넣어 창씨하였다.
  • 김경주 - 가네야마 게이주(金山敬注): 김/경주로 분리하여 성씨에 山을 넣어 창씨하였다.
  • 김경재[56] - 가네자와 히데오(金澤秀雄)
  • 김경진 - 가네코 노리미키(金子典幹), 가네코 게친(金子慶鎭): 김/경진으로 분리한 뒤 성씨에 子를 넣어 창씨하였다.
  • 김규년 - 가와모토 구니모토(川本國元; 이름 부분을 훈독), 가와모토 고쿠겐(川本國元; 이름 부분을 음독)
  • 김근배 - 가네우미 곤바이(金海根培): ‘근배’를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김기수 - 가네다 모토히데(金田基秀; 이름 부분을 훈독), 가네다 기슈(金田基秀; 이름 부분을 음독): 김/기수로 분리한 뒤 성씨에 田을 넣어 창씨하였다.
  • 김기진 - 가네무라 야미네(金村八峯): 성씨에 村을 넣어 창씨하고, '팔봉'을 이름으로 사용. 호, 필명을 반영한 것으로 추정된다.
  • 김기태 - 가네자와 데루마사(金澤輝昌)
  • 김기홍 - 가나가와 기코(金川基鴻): 김/기홍으로 분리한 뒤 성씨에 川을 넣어 창씨하였다.
  • 김낙순 - 가네다 라쿠준(金田洛淳): 김/낙순으로 분리한 뒤 성씨에 田을 넣어 창씨하였다.
  • 김낙헌 - 가네도쿠 에이켄(金徳榮憲)
  • 김달호 - 가네바시 다케시(金橋健)
  • 김대중 - 도요다 다이쥬(豊田大中): 김해 김씨인 데다 흔한 김씨들의 창씨 이름과는 다른 '도요타'를 사용한 것이 다소 특이하다. 곡창지대인 전라도의 특성을 따서 창씨했다는 얘기가 퍼져있었으나, 사실과 다르다. 도요타로 창씨한 정확한 이유는 불명이다.
  • 김돈희 - 가네에다 도오루(金枝亨)
  • 김동선 - 마쓰오카 요시아키(松岡義明)
  • 김동인 - 곤도 후미히토(金東文仁): 김동/인으로 분리하여 '김동'으로 창씨한 다음, '인' 앞에는 문학을 뜻하는 文을 넣었다. 다만, 이에 대해서는 한자는 같지만 金이 빠진 東文仁이라는 기록도 발견되기 때문에 곤도가 아니라 히가시(東), 혹은 가네히가시(金東)라고 읽어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 김동원 - 가네오카 히가시모토(金岡東元; 이름 부분을 훈독), 가네오카 도겐(金岡東元; 이름 부분을 음독): 김/동원으로 분리한 뒤 성씨에 岡을 넣어 창씨하였다.
  • 김동진 - 가네모토 도신(金本東進): 김/동진으로 분리하고, 성씨에 本을 넣어 창씨하였다.
  • 김동하 - 가네모리 다케오(金森武雄): 성씨는 金 뒤에 森을 넣어서 창씨했다.
  • 김동화 - 가네가와 도카(金河東華): 김/동화로 나눈 뒤 성씨에 河을 넣어 창씨하였다.
  • 김동환 - 시로야마 아오키(白山靑樹; 이름 부분을 훈독) / 시로야마 세이주(白山靑樹; 이름 부분을 음독)
  • 김동현 - 가네야 도겐(金谷東炫): ‘동현’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김동훈 - 가네하라 구니미쓰(金原邦光)
  • 김두일 - 히라카와 도이치(平川斗一): '두일'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김두정 - 가네코 도사다(金子斗禎): 성씨에 子을 넣어 창씨하고, '두정'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김두찬 - 가메오카 도산(龜岡斗贊): '두찬'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김두하 - 가네야마 도미카와(金山富河; 이름 부분을 훈독) / 가네야마 후카(金山富河; 이름 부분을 음독): '하'(河)를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김두희 - 가네다마 요시오(金玉吉男)
  • 김명연[57] - 가네하라 아키후치(金原明淵; 이름 부분을 훈독), 가네하라 메이엔(金原明淵; 이름 부분을 음독): 김/명연으로 분리하여 성씨에 原을 넣어 창씨하였다.
  • 김명준 - 가네다 아키라(金田明): ‘명’(明)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김문집 - 오에 류노스케(大江龍之助): 대구에서 나서 일본 에도에서 공부하고 서울 용산구에 살았다는 뜻을 담아 창씨했다.[58]
  • 김백일 - 가네자와 도시미나미(金澤俊南; 이름 부분을 훈독) / 가네자와 슌난(金澤俊南; 이름 부분을 음독)
  • 김법룡 - 가가와 도카(香川東華), 가네이 호류(金井法龍): ‘법룡’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김병욱 - 나가타 다네히데(永田種秀)
  • 김병제 - 가네오카 헤이사이(金岡秉濟): ‘병제’를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김병태 - 가네무라 야스오(金村泰男): ‘태’(泰)를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김사연 - 가네 시엔(金思演)
  • 김상윤 - 에하라 쇼준(江原尙潤): ‘상윤’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김상형 - 가네코 소쿄(金子相亨): 김/상형으로 분리하여 성씨에 子을 넣어 창씨하였다.
  • 김상회 - 도요하라 이나오(豊原以尚): '상'(尚)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김생려 - 가네야마 세레이(金山生麗): 김/생려로 분리하여 성씨에 山을 넣어 창씨하였다.
  • 김석범 - 가네야마 요테쓰(金山照): 金에 山을 넣어 가네야마(金山)로 창씨하였다.
  • 김석원 - 가네야마 샤쿠겐(金山錫源): 김/석원으로 분리하고 성씨에 山을 넣어 창씨하였다.
  • 김석태 - 가미바야시 마코토(神林誠)
  • 김선태 - 가네자와 젠타이(金澤善太): 김/선태로 분리하여 성씨에 澤을 넣어 창씨하였다.
  • 김성근 - 가네바야시 세이콘(金林星根): 성씨인 '金'에 '林'자를 넣어 창씨했다. 재일교포 출신. 선수들을 혹사시키는 잘못된 훈련법 때문에 비난이 쏟아지자, 그의 창씨개명한 이름이 사실상 그에 대한 멸칭으로 쓰이고 있다. 세이콘 드립 문서 참조.
  • 김성률 - 가네코 요시오미(金子義臣)
  • 김성민 - 미야하라 소이치(宮原惣一)
  • 김성태 - 가네시로 세타이(金城聖泰): 김/성태로 분리하여 성씨에 城을 넣어 창씨하였다.
  • 김성환 - 가네히라 세이칸(金平聖煥): 김/성환으로 분리하여 성씨에 平을 넣어 창씨하였다.
  • 김세완 - 가나가와 엔(金川遠): 성씨에 '川'을 넣어 창씨하였다.
  • 김소영 - 가네 게토쿠(金惠得): 본명인 ‘혜득’을 그대로 사용하였다.
  • 김수백 - 가네야마 스이후쿠(金山水福):‘수백’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김순흥 - 가네모토 준쿄(金本淳興): 김/순흥으로 분리하여 성씨에 本을 넣어 창씨하였다.
  • 김시권 - 기쿠야마 지켄(菊山時權): '시권'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김시명 - 가네코 도키아키(金子時明; 이름 부분을 훈독) / 가네코 지메이(金子時明; 이름 부분을 음독): 성씨에 子을 넣어 창씨하고, '시명'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김시욱 - 야스야마 지오쿠(安山時昱): '시욱'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김신재 - (星信載)
  • 김억 - 기시 세이오(岸曙生): 자신의 호인 안서(岸曙)[59]를 창씨명에 반영한 것으로 추정된다.
  • 김오섭 - 가네모토 고로(金本五郎): ‘오’(五)를 이름 부분에 사용하였다.
  • 김영기 - (金川益大), (金川寧起)
  • 김영덕 - 가네히코 나가노리(金彦永徳): 성씨인 金에 본관인 언양의 彦을 넣어 창씨했다. 재일교포 출신. 이름 부분은 '영덕'을 그대로 사용.
  • 김영두 - 미쓰야마 에이토(光山永斗)
  • 김영무 - 가네다 히데다케(金田英武; 이름 부분을 훈독), 가네다 에이부(金田英武; 이름 부분을 음독): 김/영무로 분리하고 성씨에 田을 넣어 창씨하였다.
  • 김영배 - 후루미 아키라(古海洸)
  • 김영삼 - 가네무라 고스케(金村康右): 성씨인 金에, 흔한 일본식 성씨의 접미사인 村을 합성한 창씨. 가네다, 가네야마 등과 함께 김씨들이 흔히 사용한 창씨다.
  • 김영상 - 가네미쓰 히로스케(金光浩助)
  • 김영선 - 가네야마 나가요시(金山永善; 이름 부분을 훈독), 가네야마 에이젠(金山永善): 김/영선으로 분리하여 성씨에 山을 넣어 창씨하였다.
  • 김영섭 - 가네미쓰 에이쇼(金光永燮): 김/영섭으로 분리하여 성씨에 光을 넣어 창씨하였다.
  • 김영수 - 미쓰야마 도겐(光山東源)
  • 김영수 - 요무라 쓰쓰미쓰(陽村包光), 요무라 에스이(陽村映遂): 자신의 법명인 포광(包光)과 ‘영수’(映遂)를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김영수 - 마쓰야마 히로노리(松山博則)
  • 김영호 - 가네야마 하라미치(金山原道; 이름 부분을 훈독), 가네야마 겐도(金山原道; 이름 부분을 음독)
  • 김용식 - 가네모토 요쇼쿠(金本溶植): 성씨에 本을 넣어 창씨하고, '용식'을 그대로 이름으로 썼다.
  • 김용제 - 가네무라 류사이(金村龍濟): '용제'를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김용주 - 가네다 류슈(金田龍周): ‘용주’를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김윤복 - 마쓰모토 기요시(松本清)
  • 김윤정 - 세이도 긴지로 (淸道金次郞): 성씨는 본관인 청도 김씨에서 따왔으며, 이름인 긴지로는 본래 성씨인 김씨에서 따와 지은 것으로 추측된다.
  • 김영준 - (金谷英俊)
  • 김영진 - 가네코 에이진(金子英鎭): 김/영진으로 분리하여 성씨에 子을 넣어 창씨하였다.
  • 김영호 - 가네야마 하라미치(金山原道)
  • 김영희 - 가네야마 에이키(金山泳喜): 김/영희로 분리하여 성씨에 山을 넣어 창씨하였다.
  • 김옥균 - 이와타 슈사쿠(岩田秋作), 이와타 산와(岩田三和)[60]
  • 김용국 - 미쓰야마 우겐(光山宇顯): 광산 김씨의 본관을 가져와 창씨하고 이명인 '우현'을 이름으로 사용하였다.
  • 김우영 - 가네 아메히데(金雨英; 이름 부분을 훈독) / 가네 우에이(金雨英; 이름 부분을 음독)
  • 김우현 - 가네미쓰 우겐(金光禹鉉): 성씨에 光을 넣어 창씨하고, '우현'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김원근 - 가네우미 모토네(金海元根; 이름 부분을 훈독), 가네우미 겐콘(金海元根; 이름 부분을 음독): 김/원근으로 분리하여 성씨에 海을 넣어 창씨하였다.
  • 김원태 - 가카와 모토야스(賀川元泰; 이름 부분을 훈독), 가카와 겐타이(賀川元泰; 이름 부분을 음독): ‘원태’를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김은호 - 쓰루야마 마사타카(鶴山殷鎬): '은호'를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김응빈 - 가네자와 오힌(金澤應彬): ‘응빈’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김응순 - 아라모리 이치오(新森一雄)
  • 김인승 - 가네시로 진쇼(金城仁承): '인승'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김인엽 - 긴노 진이치로(金納仁一郎), 긴노 히토(金納仁)
  • 김인영 - 가네무라 진에이(金村仁泳): 김/인영으로 분리하여 성씨에 村을 넣어 창씨하였다.
  • 김인오 - 가네야 진고(金谷仁梧): 김/인오로 분리하여 성씨에 谷을 넣어 창씨하였다.
  • 김재규 - 가네모토 겐이치(金本元一): 가네모토(金本) 역시 당시 김씨들의 흔한 창씨명이다.
  • 김재열 - 가네호시 무네아키(金星宗明)
  • 김재홍 - 가네미쓰 지카이(金光智海)
  • 김정렬 - 가가와 사다오(香川貞雄): 이름인 사다오는 원래 이름자인 정렬에서 따 온 듯.
  • 김장섭 - 가네야마 조쇼(金山長渉), 가네야마 히로노부(金山博信): 김/장섭으로 분리하여 성씨에 山을 넣어 창씨하였다.
  • 김장현 - 가네모리 소히로(金森荘浩): ‘장’(荘)을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김정렴 - 다마이 마사토(玉井正人)
  • 김정석 - 가네야마 쓰구노리(金山韶能; 이름 부분을 훈독) / 가네야마 쇼노(金山韶能; 이름 부분을 음독)
  • 김종구 - 가나가와 하루노리(金川治徳)
  • 김종대 - 가네코 쇼다이(金子鐘大): 김/종대로 분리하여 성씨에 子을 넣어 창씨하였다.
  • 김종석 - 가네이 가네히사(金井鐘久; 이름 부분을 훈독), 가네이 쇼쿠(金井鐘久; 이름 부분을 음독): 종(鐘)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김종순 - 가네하라 쇼준(金原鍾淳): 김/종순으로 분리하여 성씨에 原을 넣어 창씨하였다.
  • 김종원 - 가네야마 무네모토(金山宗元; 이름 부분을 훈독) / 가네야마 슈겐(金山宗元; 이름 부분을 음독): 김/종원으로 분리하여 성씨에 山을 넣어 창씨하였다.
  • 김종필 - 가네무라 슌에이(金村俊英): 김영삼과 마찬가지로 김씨들의 흔한 창씨명. 그의 공주고등보통학교 시절 학적부에는 1940년 4월 18일이라는 창씨개명 날짜까지 정확하게 남아있다. 1997년 대선 당시 기사
  • 김종한 - 쓰키다 시게루(月田茂)
  • 김종흡 - 가네모토 쇼큐(金本鍾翕): 김/종흡으로 분리하여 성씨에 本을 넣어 창씨하였다.
  • 김정섭 - 가네시로 마사사와(金城昌澤)
  • 김정혁 - 나쓰메 다다시(夏目正)
  • 김정희 - 가네이 기이치(金井喜一)
  • 김주혁 - 가네무라 슈호(金村周邦): ‘주’(周)를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김준보 - 고이즈미 도시스케(小泉俊輔; 이름 부분을 훈독), 고이즈미 슌호(小泉俊輔; 이름 부분을 음독): ‘준보’를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김준엽 - 구니하라 쓰네히로(國原常廣) : 장준하와 함께 학병으로 징집되어 중국 전선으로 끌려갔다가 충칭으로 탈출한 그 사람 맞다. 학병으로 징집될 당시 일본 당국에 의해 작성된 육군전시명부에 國原常廣라고 씨명이 적혀져 있다. 하지만 학창시절 재학했던 1942년에 작성된 일본 게이오기주쿠대학 재학생 명단에는 동명의 학생 이름이 존재하지 않아 학창시절에는 다른 이름으로 창씨개명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 김준영 - 아사히나 노보루(朝比奈昇)
  • 김준평 - 가네미쓰 슌헤이(金光凖枰): 김/준평으로 분리하여 성씨에 光을 넣어 창씨하였다.
  • 김진민 - 가나에 신빈(金江振玟): 김/진민으로 분리하여 성씨에 江을 넣어 창씨하였다.
  • 김진수 - 가네마쓰 신슈(金松晉洙), 마쓰미야 신슈(松宮晉洙): '진수'를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김진수 - 가네시로 진슈(金城珍洙): 김/진수로 분리하여 성씨에 城을 넣어 창씨하였다.
  • 김진탁 - 하치다 신(八田晉): '진'(晉)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김찬욱 - 시미즈 겐(清水源)
  • 김창두 - 가네야 쇼토(金谷昌斗), 가네야 야스히라(金谷康平): 김/창두로 분리하여 성씨에 谷을 넣어 창씨하였다.
  • 김창수[61] - 가네야마 교(金山敬)
  • 김창영 - 가네미쓰 마사나가(金光昌永; 이름 부분을 훈독), 가네미쓰 쇼에이(金光昌永; 이름 부분을 음독): 김/창영으로 분리하여 성씨에 光을 넣어 창씨하였다.
  • 김창한 - 가네야마 마사이치(金山昌市): 창(昌)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김천애 - 류미야 덴아이(龍宮天愛): ‘천애’를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김청암 - 가네가와 세이안(金川青庵): 김/청암으로 분리하여 성씨에 川을 넣어 창씨하였다.
  • 김태동 - 가네코 다이도(金子泰東): 김/태동으로 분리하여 성씨에 子을 넣어 창씨하였다.
  • 김태석 - 가네무라 다이시(金村泰錫): 김/태석으로 분리하여 성씨에 村을 넣어 창씨하였다.
  • 김태진 - 시마 간(志摩貫)
  • 김태집 - 가네이 다이슈(金井泰潗): 김/태집으로 분리하고 성씨에 井을 넣어 창씨하였다.
  • 김태호 - 가네야스 다이코(金安泰昊): 김/태호로 분리하여 성씨에 安을 넣어 창씨하였다.
  • 김태흡 - 가네야마 다이코(金山泰洽): 김/태흡으로 나눈 뒤 성씨에 山을 넣어 창씨하였다.
  • 김택림 - 가네미쓰 히로시(金光博)
  • 김하섭 - 가네모토 가쇼(金本夏渉) / 가네모토 야스타미(金本安民): 김/하섭으로 분리한 뒤, 성씨에 '本'를 넣어 창씨하였다.
  • 김학성 - 가네자와 가쿠세이(金澤學成), 가네자와 도시미쓰(金澤俊光): '학성'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김학응 - 가네코 가오루(金子薫; 이름 부분을 훈독), 가네코 군(金子薫; 이름 부분을 음독)
  • 김한규[62] - 가네코 간케이(金子漢奎): 김/한규로 분리하고 성씨에 '子'를 넣어 창씨하였다.
  • 김한경 - 가네모토 노리하루(金本憲治)
  • 김한목 - 히라노 간보쿠(平野漢睦): '한목'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김한송 - 가네야마 간쇼(金山漢松): 김/한송으로 나눈 뒤 성씨에 山을 넣어 창씨하였다.
  • 김한승[63] - 가네코 간케이(金子漢奎): ‘한’(漢)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김해송 - 가네야마 마쓰오(金山松夫): ‘송’(松)을 이름 부분에 사용하였다.
  • 김해룡 - 가나에 다쓰오(金江龍雄): 룡(龍)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김행도 - 가네다 고도(金田幸道), 가네다 다쓰도(金田逹道): 김/행도로 분리하여 성씨에 田을 넣어 창씨하였다.
  • 김형근 - 가네하라 교콘(金原亨根): 김/형근으로 분리하여 성씨에 原를 넣어 창씨하였다.
  • 김홍걸 - 도요카와 히로시(豊川弘): '홍'(弘)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김홍식 - 오카다 히로마사(岡田弘政): 홍(弘)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김홍준 - 가네자와 고이치(金澤洪一): ‘홍’(洪)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김화준 - 가네우미 가슌(金海化俊): 김/하준으로 분리하여 성씨에 海을 넣어 창씨하였다.
  • 김형숙 - 가네미야 에이슈쿠(金宮瀅淑): 김/형숙으로 분리하여 성씨에 宮을 넣어 창씨하였다.
  • 김활란 - 아마기 가쓰란(天城活蘭): '활란'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김희덕 - 가네오카 기도쿠(金岡熙徳): 김/희덕으로 분리하여 성씨에 岡을 넣어 창씨하였다.
  • 김희영 - 가네코 마사오(金子政雄)

===# ㄴ #===
  • 나정윤 - 마쓰시마 마사노리(松島正綸): ‘정윤’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나지강 - 와지마 히데쓰나(和島秀綱): ‘강’(綱)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나항윤 - 도미타 쓰네미쓰(富田恒滿): ‘항’(恒)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노기주 - 에모토 마사아키(江本正明)
  • 노덕술 - 마쓰우라 히로(松浦鴻): 한자 鴻에는 기러기라는 뜻도 있지만 넓다는 뜻도 있어서 히로라고 읽은 것이다.
  • 노병한 - 오카무라 헤이칸(岡村秉漢): 성씨는 노씨의 시조가 평안남도 용강군 출신이어서 오카무라로 지은 것이며, '병한'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노봉익 - 다마우라 요시아키(玉浦義明)
  • 노상구 - 에모토 요시오(江本吉男)
  • 노성석 - 미즈하라 히지리(瑞原聖): '성'(聖)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노영빈 - 도요카와 나가타케(豊川永斌; 이름 부분을 훈독), 도요카와 에이힌(豊川永斌; 이름 부분을 음독): ‘영빈’을 그대로 이름으로 사용하였다.
  • 노영한 - 오하라 지로(大原次郎)
  • 노용호[64] - 오카무라 류코(岡村龍鎬): 성씨는 노씨의 시조가 용강군 출신이어서 오카무라로 지은 것이며, '용호'를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노익형 - 미즈하라 마스쿄(瑞原益亨): ‘익형’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노주봉 - 도요카와 모리히로(豊川守弘)
  • 노준영 - 도요카와 이치키요(豊川一清)
  • 노창성 - 야하타 마사나리(八幡昌成): '창성'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노창안 - 도미야마 소간(富山蒼顔): '창안'을 그대로 이름으로 사용하였다.
  • 노태식 - 도요카와 다이쇼쿠(豊川台植), 도요카와 도요키치(豊川豊吉): ‘태식’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남계룡 - 미나미 도모오(南智夫)
  • 남백우 - 미나미 햐쿠유(南百祐)
  • 남학봉 - 미나미 가쓰마사(南勝允), 미나미 가쓰히로(南勝博)
  • 남흥우 - 미나미 이(南煒)
===# ㄷ #===
===# ㄹ #===
  • 리덩친(이등흠) - 이와사토 다케노리(岩里武則)
  • 리덩후이(이등휘) - 이와사토 마사오(岩里政男)

===# ㅁ #===
  • 맹건호 - 다케우치 다케조(武内建三)
  • 맹영옥 - 마쓰바라 가즈모리(松原一盛)
  • 마성만 - 하세가와 다카야스(長谷川高保)
  • 명인화 - 아카시 린카(明石麟華): ‘인화’를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문동호 - 후미모토 도코(文元東鎬), 후미모토 요시무네(文元義宗): 문/동호로 분리한 뒤 성씨에 元을 넣어 창씨하였다.
  • 문명기 - 후미아키 기이치로(文明琦一朗): 문명/기로 분리한 뒤, 琦에 일본식 이름인 一朗를 붙여 창씨했다.
  • 문명호 - 후미하라 다케시(文原武)
  • 문선명 - 에모토 류메이(江本龍明): 이름은 개명 전 이름인 용명(龍明)을 그대로 사용.
  • 문승모 - 후미나가 쇼보(文永昇謨): 문/승모로 분리하여 성씨 앞에 '永'를 넣어 창씨하였다.
  • 문원태 - 히라후미 다다오(平文忠勇)
  • 문예봉 - 하야시 데이겐(林丁元): 본명인 '정원'을 그대로 이름으로 사용하였다.
  • 문용채 - 스구다 고이치(直田剛一)
  • 문이정 - 기타하라 후미타카(北原文剛): 이름 부분에 자신의 성씨인 文을 넣어 개명한 것으로 추측된다.
  • 문종구 - 히라후미 쇼키(平文鍾龜): 문/종구로 분리하여 성씨 앞에 平을 넣어 창씨하였다.
  • 문학명 - 히라이와 가쿠메이(平岩學明): ‘학명’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민건식 - 빈하라 겐쇼쿠(閔原健植): 민/건식으로 분리하여 성씨에 '原'을 넣어 창씨하였다.
  • 민재기 - 시바야마 기(芝山祺): '기'(祺)를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민병덕 - 하치야마 헤이도쿠(鉢山丙徳): '병덕'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민병삼 - 이와무라 도쿠타로(岩村徳太郎)
  • 민영학 - 오카다 에이가쿠(岡田泳學): "영학"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ㅂ #===
  • 박관수 - 고토카와 간(琴川寛): '관'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박경석 - 야마모토 게이샤쿠(山本經錫): '경석'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박경호 - 가무라 미노루(香村實)
  • 박기효 - 미쓰이 모토요시(三井基義)
  • 박기환 - 마쓰시타 잇세이(松下一晟)
  • 박남규[65] - 오토모 사네오미(大朝實臣): 창씨명인 ‘大朝’는 창씨개명 정책이 시행된 1940년의 새해를 의미하고, 이름 부분의 ‘實臣’은 천황 앞에 진실된 신민으로 살겠다는 각오를 담았다.
  • 박대륜 - 샤쿠무네 오와(釋宗大輪; 이름 부분을 훈독) / 샤쿠무네 다이린(釋宗大輪; 이름 부분을 음독): 석가모니를 따른다는 의미를 담아 창씨했다. 이름 부분은 대륜을 그대로 사용하였다.
  • 박도수 - 요시다 게이타쿠(吉田景宅)
  • 박도순 - 아라이 도준(新井道淳): ‘도순’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박동익 - 보쿠하라 도요쿠(朴原東翼): 성씨에 原을 넣어 창씨하고, ‘동익’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박두영 - 야마시타 도에이(山下斗榮): '두영'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박명석 - 도리바야시 메세키(鳥林命石) / 도리바야시 겐유(鳥林健勇): '명석'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박범집 - 히가시바야시 마스노리(東林益範): ‘범’(範)을 이름 부분에 사용하였다.
  • 박병운 - 다카기 하루미쓰(高木春光; 이름 부분을 훈독), 다카기 슌코(高木春光; 이름 부분을 음독)
  • 박보양 - 에하라 모토요(江原基陽): ‘양’(陽)을 이름 부분에 사용하였다.
  • 박봉진 - 기야마 호친(木山鳳鎭): '봉진'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박상준 - 호자와 쇼준(朴澤相駿): 박/상준으로 분리한 다음 성씨에 澤을 넣어 창씨하였다. 이름은 그대로 '상준'을 썼다.
  • 박승직 - 미키 쇼쇼쿠(三木承稷): 성씨 박(朴)에서 木을 가져와 창씨, 이름 부분은 "승직"을 그대로 사용하였다.
  • 박승하 - 오하라 미쓰미네(大原光峰)
  • 박승하 - 히로키 준사이(廣城純才)
  • 박연서 - 보쿠모토 후치미즈(朴本淵瑞; 이름 부분을 훈독) / 보쿠모토 엔즈이(朴本淵瑞; 이름 부분을 음독): 박/연서로 분리하여 성씨에 本을 넣어 창씨하였다.
  • 박영빈 - 기야마 나가타케(木山永斌; 이름 부분을 훈독), 기야마 에이힌(木山永斌; 이름 부분을 음독)/기야마 나가이치로(木山永一郎; 이름 부분을 훈독), 기야마 에이이치로(木山永一郎; 이름 부분을 음독): ‘영빈’을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박영준 - 마쓰모토 노리타케(松本憲武)
  • 박영효 - 야마자키 에이하루(山崎永春)[66]
  • 박용섭 - 기야마 가쓰오(木山勝雄)
  • 박용익 - 미무라 후미오(美村文雄)
  • 박용현 - 아라이 류겐(新井龍鉉): 창씨는 박씨의 시조 설화의 내용을 취하여 '신라의 우물'이라는 의미의 아라이(新井)로 창씨한 것. '용현'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박윤진 - 후쿠다 인신(福田允進): '윤진'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박영희 - 요시무라 고도(芳村香道)
  • 박영희 - (赫田元雄)
  • 박완 - 쓰루카와 간(鶴川浣): '완'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박원석 - 도쿠다 모토쿄(徳田元教): '원'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박원찬 - 아라이 엔산(新井圓讃)
  • 박을수 - 마쓰이 미치오(松井三千雄)
  • 박이순 - 오하라 가즈오(大原一夫)
  • 박이순 - 아라이 이준(新井彜淳), 신쿄 히로시(新居廣): ‘이순’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박인덕 - 나가카와 진도쿠(永河仁徳): '인덕'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박임항 - 쓰루야마 하야시쓰네(鶴山林恒; 이름 부분을 훈독) / 쓰루야마 린고(鶴山林恒; 이름 부분을 음독): '임항'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박일석 - 아라이 닛세키(新井日碩): '일석'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박정서 - 아라이 고쿠쇼(新井圀緖): '서'(緖)를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박정욱 - 아오키 쇼이쿠(青木晶昱): ‘정욱’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박정희 - 다카기 마사오(高木正雄): 본관인 고령(高靈)에서 高를 따고, 朴에서 木을 따 창씨하였다. 고령 박씨들의 흔한 창씨법. 이름 부분의 마사오(正雄)는 본명에서 正 을 가져오고, 일본식 남성 이름인 雄 자를 붙여서 창씨.[67]
  • 박종렬 - 요시이 무네타케(吉井宗烈)
  • 박중양 - 호추 시게요(朴忠重陽), 야마모토 신(山本信): 박(朴)에 忠을 넣어 창씨하고, '중양'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박재홍 - 마스나가 히로시(増永弘): '홍'을 이름으로 사용하였다.
  • 박정수 - 오야마 사다모리(大山定守): '정수'를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박제륜 - 나카하라 마사미치(中原正道)
  • 박제선 - 요시무라 사이센(芳村齊璿): '제선'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박제승 - 마쓰야마 사이쇼(松山齋昇): '제승'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박지근 - 마쓰야마 기요시(松山清)
  • 박찬범 - 시카노 가이덴(鹿野階傳)
  • 박찬웅 - 미야모토 산유(宮本贊雄): ‘찬웅’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박춘식 - 우미노 하루키(海野春樹): 이름 부분의 春은 본인 이름에서 따온 것으로 추측된다.
  • 박창화 - 오바라 마사카즈(小原昌和): '창화'를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박철[68] - 무라이 데쓰(村井澈): '철'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박철희 - 다케야마 뎃키(竹山喆熙): '철희'를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박필병 - 마쓰이 히쓰헤이(松井弼秉): '필병'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박현명 - 아라이 겐메이(新井炫明): '현명'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박형균 - 마쓰가와 에킨(松川瀅均), 마쓰가와 교가이(松川匡開): ‘형균’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박형동 - 마쓰이 교도(松井亨東): ‘형동’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박호근 - 나가이 다카하루(永井孝治)
  • 박희열 - 마쓰바라 도시기미(松原俊卿)
  • 방규환 - 도야마 기요시(頭山清)
  • 방순원 - 가타야마 준겐(方山順元): ‘순원’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방중원 - 야마카와 주엔(山川重遠): ‘중원’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방준경 - 야스다 유키테루(安田行輝)
  • 방진태 - 후사무라 케노스케(房村敬之助)
  • 배상명 - 가마타 사치아키(蒲田祥明) / 요시무라 사치아키(芳村祥明): '상명'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배상하 - 호시노 소카(星野相河): '상하'를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배영춘 - 다케모토 에이이치(武本榮一): 영(榮)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배정자 - 다야마 사다코(田山貞子): '정자'를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배학보 - 호시야마 쓰루호(星山鶴甫): ‘학보’를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백낙승 - 시라카와 라쿠쇼(白川樂承): 백/낙승으로 분리한 후 성씨에 '川'을 붙여 창씨하고, '낙승'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백낙주 - 마쓰바라 운키(松原雲起)
  • 백낙준 - 시라하라 라쿠준(白原樂濬): 백/낙준으로 분리하여 성씨 뒤에 '原'을 넣어 창씨하였다.
  • 백두진 - 시라카와 미노루(白川實): 원래의 성씨에 川을 넣어 창씨했다.
  • 백석 - 시라무라 기코(白村夔行): 이름 '기코'는 백석 시인의 본명 '기행'을 그대로 썼다. 시라무라는 본래의 성씨인 白에, 일본식 성씨인 村을 합성한 흔한 창씨법. 만주국 국무원 경제부에서 외국어 번역 촉탁으로 근무하던 중 일제가 창씨개명을 강요하자 사직한 이력이 있었다. 그러나 언제 끝날지 모르는 일제통치의 현실 앞에 어쩔 수 없는 선택을 한 것으로 보인다.
  • 백선엽 - 시라카와 요시노리(白川義則): 시라카와는 앞서 백석 시인처럼, 본래의 성씨에 일본식 성씨인 川을 합성한 흔한 창씨법이다. 윤봉길 의사가 상하이 홍커우공원에서 폭사시킨 일본 육군대장 이름과 같다. 우연의 일치일 수도 있지만, 요시노리가 당대의 유명인사였다는 점과 창씨개명 시점 등으로 미루어 볼 때 그의 이름을 따서 지은 것일 수도 있다. 백선엽의 창씨명은 본인이 거론하거나, 거론된 적 없었다. 해방 이후 조선 이름으로 복구시키는 법령까지 나온 마당에, 치욕스러운 창씨명을 본인도 굳이 이야기할 필요를 못느꼈을 것이다. 그러다 '간도특설대'의 저자 김효순이 그의 직속상관이었던 만주군 옌지헌병분단장 소네하라 미노루의 회고록에서 발견하여 알려졌다.
  • 백윤화[69] - 시라카와 인와(白川允和): 백/윤화로 나눈 뒤, 성씨에 川을 넣어서 창씨하였다.
  • 백중빈 - 시라카와 도요쓰쿠(白川豊造; 이름 부분을 훈독) / 시라카와 호조(白川豊造; 이름 부분을 음독): 성씨 뒤에 '川'를 넣어 창씨하였다.
  • 백철 - 시라야 요테쓰(白矢世哲): 본명인 '백세철'을 이용해 '백/세철'로 분리하고 성씨 뒤에 '矢'를 넣어 창씨하였다.
  • 백한성 - 미즈하라 쓰루히토(水原鶴人)
  • 백홍석 - 도쿠가와 에이이치(徳川榮一)
  • 변기엽 - 하라베 기요(原邊基燁): 변/기엽으로 분리하여 이름 앞에 原을 넣어 창씨하였다.
  • 변설호 - 호시시타 에이지(星下榮次)
  • 변옥주 - 다나카 마모루(田中護)
  • 변홍규 - 벤다 고케이(卞田鴻圭): 변/홍규로 분리하여 성씨에 田을 넣어 창씨하였다.
  • 부승림 - 도미나가 구니마사(富永國正)
  • 부완혁 - 오야마 죠부(大山丈夫): 일본어로 '괜찮다'라는 뜻의 다이죠부(大丈夫) 중간에 산 산(山)자를 넣어 창씨개명한 것으로 보인다.

===# ㅅ #===
  • 사경욱 - 시무라 게이쿠(史村敬郁): 사/경욱으로 분리하여 성씨에 村을 넣어 창씨하였다.
  • 사광욱 - 시무라 미쓰후미(史村光郁): 사/광욱으로 분리하여 성씨에 村을 넣어 창씨하였다.
  • 상호 - 나오카와 고요시(尚川灝吉)[70]: 尚에 川을, 灝에 吉을 붙여서 창씨.
  • 서극형 - 하라다 가나리(原田桂成)
  • 서기영 - 오시로 에이지(大城榮二)
  • 서기홍 - 오오카 모토히로(大岡基弘; 이름 부분을 훈독), 오오카 기코(大岡基弘; 이름 부분을 음독): ‘기홍’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서병조 - 오미네 헤이초(大峯丙朝): '병조'를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서상훈 - 조카와 소쿤(徐川相勛): '상훈'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서성극 - 리카와 쓰네오(利川恒雄)
  • 서은숙[71] - 조시로 온슈쿠(徐城恩淑): 서/은숙으로 분리하여 성씨에 城을 붙여 창씨하고, '은숙'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서정국 - 요시나가 다마스케(吉永圭佑)
  • 서정인 - 오우라 마사토라(大浦正寅): ‘정인’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서정주 - 다쓰시로 시즈오(達城靜雄): 본관인 '달성'으로 창씨했다. '달성'을 일본어식으로 읽어도 위화감이 없으므로, 본관이 그대로 창씨로 사용되었다.
  • 서정철 - 오시로 데이테쓰(大城廷哲): ‘정철’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서춘 - 오카와 지타네(大川慈種) / 오카와 도요쓰구(大川豊注)
  • 서항석 - 마쓰오카 쓰네스즈(松岡恒錫): '항석'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석명선 - 이시카와 메이센(石川明瑄): 성씨에 川을 붙여서 창씨하고, '명선'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선우렴 - 오하라 렌조(大原廉三): ‘렴’(濂)에서 한자를 따 와 이름 부분에 사용하였다.
  • 성일영 - 나리타 이치에이(成田一永): 성씨에 田를 넣어 창씨하고, 일영을 이름으로 사용하였다.
  • 성정수 - 나리타 데이슈(成田禎洙): 성씨에 田을 넣어 창씨하고, '정수'를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소완규 - 고바야시 에이시(小林英司)
  • 소진문 - 아리소 진분(有蘇鎭文): 성씨에 有를 넣어 창씨하고, '진문'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소진섭 - 소가 진쇼(蘇我鎭燮), 도쿠히라 진쇼(徳平鎭燮), 도쿠히라 마사히코(徳平雅彦): 소/진섭으로 분리하여 성씨에 我를 넣어 창씨하였다.
  • 소진우 - 이소 미쓰미네(伊蘇三峰)
  • 소진은 - 이소 마사미네(伊蘇正峰)
  • 손계조 - 마쓰다 게이조(松田啓照): ‘계조’를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손기욱 - 마쓰히라 기이쿠(松平基郁): ‘기욱’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손동욱 - 나가우라 도교쿠(永浦東頊): ‘동욱’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손석도 - 마고다 무네아키(孫田宗明): 성씨에 田을 넣어 창씨하였다.
  • 손양섭 - 나가마쓰 료쇼(永松亮燮): "양섭"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손영목 - 마고나가 야스시(孫永穆)
  • 손응린 - 마고다 오린(孫田應麟): 손/응린으로 분리하여 성씨에 田을 넣어 창씨하였다.
  • 손정규 - 이바라 다마(伊原圭) / 이바라 사다다마(伊原貞圭): '정규'를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손정룡 - 히라카와 류지로(平川龍次郎): '룡'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손조봉 - 고야마 소호(湖山祚鳳): '조봉'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손종권 - 마쓰다 유키마사(松田行正)
  • 손재박 - 요시모토 히로시(吉本博)
  • 손재하 - 히로카와 헤이나리(廣川平成) / 히로하라 헤이나리(廣原平成)
  • 손지현 - 마고나가 히가시(孫永東)
  • 손창식 - 마고다 마사다네(孫田昌植): '창식'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손창윤 - 도쿠토미 준요(徳富潤世): ‘윤’(潤)을 그대로 이름 부분에 사용하였다.
  • 손홍원 - 노무라 고엔(野村弘遠): '홍원'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손홍준 - 마고조노 레이코(孫園禮光): 성씨에 園을 넣어 창씨하였다.
  • 손홍팔 - 나가우라 고하치(永浦洪八): ‘홍팔’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송금선 - 후쿠자와 레이코(福澤玲子)
  • 송남헌 - 마쓰바라 쇼이쓰(松原秀逸)
  • 송문헌 - 야마기 후미노리(山木文憲; 이름 부분을 훈독), 야마기 분켄(山木文憲; 이름 부분을 음독): '문헌'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송문화 - 야마모토 분카(山本文華): '문화'를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송병주[72] - 온즈 아키모리(恩津明森)
  • 송병준 - 노다 헤이지로(野田平治郞): 조선인 최초로 창씨개명을 하게 된 인물이라고 알려졌으나 이동인이 훨씬 빠르다. 다만 이 이름을 경술국치 이전부터 이미 사용한 것은 사실. 그러면서 조선 이름이 촌티가 난다고 변명을 늘어뜨린다(…) 어쨌든 이 때문에 일각에서는 그를 '노다(野田) 영감', '야전(野田) 대감'이라고도 부르기도 했다.
  • 송몽규 - 소무라 무케이(宋村夢奎): 성씨인 宋에 村을 넣어 창씨하고, "몽규"를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송석하 - 다케하라 히로요시(武原弘慶)
  • 송양호 - 도미야마 요코(富山良浩): ‘양호’를 이름으로 사용하였다.
  • 송영 - 야마카와 미노루(山川實)
  • 송원홍 - 마쓰바라 마사아키(松原正明)
  • 송인태 - 오하라 도라히코(大原寅彦): ‘인’(寅)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송주순 - 미쓰이 지사부로(三井柱三郎): ‘주’(柱)를 이름 부분에 사용하였다.
  • 송종헌 - 노다 소노리(野田鍾憲): '종헌'을 그대로 이름으로 사용하였다.
  • 송찬도 - 나카하라 산도(中原燦道) / 나카하라 요시히로(中原祥愽): '찬도'를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송창근 - 온치 쓰부라(恩地圓)
  • 송해 - 기무라 후키(木村福): 나무 목(木)은 (宋)씨에서 따와 村을 붙여 일본의 흔한 성씨인 기무라로 만들고, 복(福)은 본명인 '복희(福熙)'에서 따 왔다.
  • 송화식 - 오하라 가쇼쿠(大原和植): '화식'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신격호 - 시게미쓰 다케오(重光武雄): 신 씨들은 본관이나 성씨의 합성명이 흔한 것과 달리, 주역의 간지를 따라 창씨한 예가 많다. 그에 따르면 신(辛)은 중광이 되는데, 중광을 일본어로 읽으면 일본에서 흔한 성씨인 시게미쓰가 되므로. [73]
  • 신계선 - 신모토 게이젠(眞本啓善): 성씨에 本을 넣어 창씨하고, ‘계선’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신동하 - 시게미쓰 도카(重光東夏): 주역의 간지를 취해 시게미쓰로 창씨하고, '동하'를 이름으로 썼다.
  • 신병현 - 히라야마 에이지로(平山榮次郞): 본관인 '평산'을 따서 창씨했다.
  • 신불출 - 구로다 규이치(玄田牛一), 에하라 노하라(江原野原): 특이하게도 두 번이나 창씨개명한 경우. 처음에는 일본어 욕인 칙쇼(畜生)를 파자해서 창씨개명하고 신고했으나 당연히 퇴짜를 맞았고, 그 다음에 '될 대로 되라'는 식의 추임새인 '에헤라 노아라'를 일본어로 음차해서 재차 창씨개명했다. 당연히 트롤링목적이었다.#
  • 신봉조 - 가라시마 준(辛島純): 성씨 뒤에 '島'를 붙여 창씨하였다.
  • 신상묵 - 시게미쓰 구니오(重光國雄): 신(辛)씨들은 주역의 간지인 중광(重光)을 그대로 사용하였다.
  • 신상초 - 히라야마 마사오(平山正生): 성씨는 본관에서 따와 창씨한 것으로 보인다.
  • 신석린 - 히라바야시 린시로(平林麟四朗): ‘린’(麟)을 이름 부분에 사용하였다.
  • 신석호 - 데라타니 슈조(寺谷修三)
  • 신숙범 - 나오야마 슈쿠한(直山淑範), 도쿠야마 슈쿠한(悳山淑範): ‘숙범’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신양재 - 마야마 히로유키(眞山博行): 성씨에 '山'을 붙여서 창씨하였다.
  • 신영화 - 히라야마 에이와(平山永和): 평산 신씨의 본관을 창씨명으로 사용하고, ‘영화’를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신용균 - 히라야마 요킨(平山鎔均): 평산 신씨의 본관을 가져오고, '용균'을 그대로 사용하였다.
  • 신용욱 - 신바라 가쓰헤이(眞原勝平): 성씨 '신'(愼)의 심방변을 없애고 '原'을 붙여 창씨하였다.
  • 신윤영 - 히라노 모토다(平野源田)
  • 신우선 - 오타니 유젠(大谷佑善): '우선'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신원배 - 유키하라 겐바이(幸原元培): ‘원배’를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신응균 - 히라야마 가쓰토시(平山勝敏)
  • 신익균 - 히라야마 요쿠긴(平山益均): ‘익균’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신재모 - 구니모토 사이보(國本宰模): ‘재모’를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신태악 - 미카와 다이가쿠(三川泰嶽) / 미카와 기요시(三川清): '태악'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창씨는 본래 성씨인 신(辛)을 파자한 것으로 추정.
  • 신태영 - 히라야마 스케히데(平山輔英; 이름 부분을 훈독) / 히라야마 호에이(平山輔英; 이름 부분을 음독): ‘영’(英)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신태진 - 히라야마 다이진(平山泰鎭): ‘태진’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신태호 - 시게미쓰 쓰네마루(重光常圓), 시게미쓰 다이코(重光太浩): 신(辛)씨들의 창씨명인 시게미쓰(重光)로 창씨하고, ‘태호’를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신후식 - 히가시하라 고쇼쿠(東原厚植): ‘후식’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신현구 - 신 교쿠(申鈺)
  • 신현규 - 히라야마 히사오(平山久雄)
  • 신현준 - 우다가와 요시히토(宇田川義人)
  • 신현확 - 히라바야시 유쿠니(平林佑國)
  • 신희련 - 히라야마 기수(平山熙崇): 희(熙)를 이름에 사용하였다.
  • 신흥우 - 다카타마 교우(高靈興雨): 창씨는 본관인 고령을 가져와 사용하였다.
  • 심동구 - 아오키 도큐(青木同求): ‘동구’를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심선택 - 아오마쓰 센타쿠(青松璿澤): '선택'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심영 - 아오키 진에이(青木沈影): 예명인 '심영'을 이름 부분에 사용하였다. 창씨만 하고, '심영'은 그대로 이름으로 사용하였다. 아오키(青木)라는 창씨는 본관인 청송(靑松)을 변형한 것. 실제로 다른 심씨들은 본관 그대로를 따와 아오마쓰라고 지은 사례도 있다.
  • 심재인 - 아오마쓰 다다마사(青松忠正)
  • 심종석 - 아오키 미치아키(青木道明)
  • 쑨원(손문) - 나카야마 쇼(中山樵): 쑨원이 일본에 망명해 있을 때 도쿄의 히비야 공원 근처에 살았는데, 그 근처에 나카야마(中山)라는 저택이 있었고 이 글자를 마음에 들어하여 자신의 호와 창씨명으로 썼다. 에서는 쑨원이란 본명보다는 창씨에서 유래한 호를 붙인 '쑨중산 선생'으로 더 많이 부른다.

===# ㅇ #===
  • 안광수 - 가메무라 마사노리(亀村正經)
  • 안병범 - 가메무라 사다노부(亀村貞信)
  • 안배항 - 노부야스 나가테루(信安永照)
  • 안상덕 - 야스쿠니 쇼토쿠(安國商悳): 안/상덕으로 분리하여 성씨에 國을 넣어 창씨하였다.
  • 안석주 - 야스다 사카에(安田榮): 성씨 뒤에 '田'을 넣어 창씨하였다.
  • 안성 - 야스다 사카에(安田盛): 성씨에 田를 넣어 창씨하고, ‘성’(盛)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안용대 - 야스다 류다이(安田龍大): 성씨에 田을 넣어 창씨하고, '용대'를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안용백 - 다케야마 류하쿠(竹山龍伯): '용백'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안영일 - 아베 히데키(安部英樹): '영'(英)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안종철 - 히로야스 쇼테쓰(廣安鍾哲): 성씨에 廣을 넣어 창씨하고, 이름은 '종철'을 그대로 사용하였다.
  • 안종화 - 야스다 다쓰오(安田辰雄)
  • 안창환 - 야스카와 쇼칸(安川昌煥): 안/창환으로 분리하여 성씨에 川을 넣어 창씨하였다.
  • 안형식 - 야스나카 에이쇼쿠(安中瀅植): 성씨에 中을 넣어 창씨하고, '형식'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양국진 - 나카하라 고쿠진(中原國鎭): '국진'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양원석 - 야나가와 지로(柳川次郎)
  • 양익현 - 야나가와 마스사카(梁川益賢): 성씨 뒤에 '川'을 붙여 창씨하고, '익현'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양재창 - 야나가와 아리노부(梁川在昶; 이름 부분을 훈독) / 야나가와 사이쵸(梁川在昶; 이름 부분을 음독): 성씨 뒤에 '川'을 넣어 창씨하고, '재창'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양재하 - 아오키 자이카(青木在河): '재하'를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양주삼 - 야나하라 지산(梁原柱三): 양/주삼으로 분리하여 '原'을 넣어 창씨하였다.
  • 어담 - 니시카와 단이치(西川潭一), 니시카와 류단(西川龍潭): 담(潭)을 이름 부분에 사용하였다.
  • 엄민영 - 기지야마 도시오(雉山敏夫): ‘민’(敏)을 이름 부분에 사용하였다.
  • 엄주완 - 미쓰하라 히로가쓰(光原裕勝)
  • 엄창섭 - 다케나가 가즈키(武永憲樹)[74]
  • 여경엽 - 도미모토 기요마사(富本清正)
  • 여구현 - 우메다 규겐(梅田求鉉) / 우메다 히데요시(梅田秀吉): 전자의 경우는 본래 이름인 '구현'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예종석[75] - 구사우치 무네스즈(草内宗錫; 이름 부분을 훈독) / 구사우치 소샤쿠(草内宗錫; 이름 부분을 음독): 성씨는 한자를 파자하여 창씨했으며, 이름은 원래 이름인 '종석'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오국영 - 오하라 고쿠에이(大原國泳): ‘국영’을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오긍선 - 구레 교젠(呉兢善): 성씨를 일본식으로 읽고, '긍선'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오남학 - 구레야마 모코(呉山猛浩), 모세이 난쓰루(猛清南鶴): 성씨에 山을 넣어 창씨하고, ‘남학’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오세흥 - 다카야마 나가히사(高山長久; 이름 부분을 훈독), 다카야마 초큐(高山長久; 이름 부분을 음독)
  • 오석주 - 구레야마 샤쿠주(呉山錫柱): 성씨에 山를 넣어 창씨하고, ‘석주’를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오문강 - 기타하라 분고(北原文剛): '문강'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오병문 - 기요무라 헤이분(清村炳文): ‘병문’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오병욱 - 이와시로 헤이쿄쿠(岩城炳旭): '병욱'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오성덕 - 히라가 유사쿠(平賀右作)
  • 오세윤 - 구레하라 모토히로(呉原基弘): 성씨 뒤에 '原'을 붙여서 창씨하였다.
  • 오세호 - 마쓰카와 마사토쿠(松川正徳)
  • 오세흥 - 다카야마 나가히사(高山長久; 이름 부분을 훈독), 다카야마 초큐(高山長久; 이름 부분을 음독)
  • 오연길 - 구레모토 엔키치(呉本淵吉): 성씨에 本을 넣어 창씨하고, ‘연길’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오영세 - 야마모토 네이요(山本檸世): '영세'를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오용수 - 미야카와 류슈(宮川龍洙): ‘용수’를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오완수 - 구레 간이치(呉完一): 성씨를 그대로 일본식 발음으로 읽고, '완'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오치한 - 구레다케 가가히코(呉竹輝彦): 성씨에 竹을 넣어 창씨하였다.
  • 오태여 - 구레시로 다이요(呉城泰艅): 성씨에 城을 넣어 창씨하고, '태여'를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오해건 - 구레 마사오(呉正夫): 성씨를 그대로 일본식 발음으로 읽었다.
  • 우기돈 - 단요 모토이치로(丹陽基一郎): 본관인 단양(丹陽)으로 창씨하고, 기(基)를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우병기 - 도쿠야마 헤이키(徳山丙基): ‘병기’를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우장춘 - 스나가 나가하루(須永長春): 나가하루는 장춘(長春)의 일본식 독음이고, 스나가란 성은 그가 망명 조선인을 지원하는 일본인의 명목상 데릴사위로 들어가면서 얻게 된 성씨이다. 아내 와타나베 코하루가 친정의 반대를 무릅쓰고 조선인과 결혼하면서 의절하여 이 일본인의 명목상 양녀가 되어 우장춘도 아내의 성을 따른 것이다. 다만 해외 논문 등을 발표할 때에는 '나가하루 우'(Nagaharu U)로 쓰는 등 우씨 성을 고집했다고 한다.
  • 원덕상 - 모토무라 죠(元村肇)
  • 원병희 - 모토무라 헤이키(元村炳喜): 원/병희로 분리하고 성씨에 村을 넣어 창씨하였다.
  • 원의상 - 모토무라 주칸(元村壽完)
  • 원종억 - 모토하라 쇼오쿠(元原鍾億): '종억'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원진희 - 모토무라 신키(元村晋喜):'진희'를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원훈상 - 모토무라 시게모리(元村重盛)
  • 위기철[76] - 시라이시 기테쓰(白石基喆): '기철'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위정학 - 미야마 쓰루이치(三山鶴市; 이름 부분을 훈독) / 미야마 가쿠시(三山鶴市; 이름 부분을 음독): 학(鶴)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양봉화 - 야나가와 호카(梁川鳳華): ‘봉화’를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양원용 - 야나하라 류(梁原龍)
  • 양정수 - 야나가와 마사히데(梁川正秀; 이름 부분을 훈독), 야나가와 세이슈(梁川正秀; 이름 부분을 음독): 양/정수로 분리하여 성씨에 川을 넣어 창씨하였다.
  • 유명한 - 야나기하라 히로시(柳原博)
  • 유시환 - 야나기 도키아키(柳時煥; 이름 부분을 훈독) / 야나기 지칸(柳時煥; 이름 부분을 음독)
  • 유영 - 히라야마 에이(平山瑛): '영'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유인수 - 에무라 히사오(江村久雄)
  • 유재기 - 아마기 교신(天城虚心)
  • 유재환 - 야나기다 도요이치(柳田豊一)
  • 유진순 - 다마가와 진준(玉川鎭淳): '진순'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유진영 - 유무라 진다마(兪村鎭靈): 성씨에 村을 붙이고 '진영'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유진후 - 기모토 하루모리(杞元春盛)
  • 유태설 - 구니모토 다이세쓰(邦本泰卨): '태설'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유태훈 - 니레 야스아키(楡泰明): ‘태’(泰)를 이름 부분에 사용하였다.
  • 유홍순 - 나카하라 고준(中原鴻洵): '홍순'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유헌열 - 야나기자와 겐레쓰(柳澤憲烈), 야나기자와 노리하루(柳澤憲治): ‘헌열’과 ‘헌’(憲)을 이름 부분에 사용하였다.
  • 유혁로 - 야마다 유이치 (山田唯一)
  • 유형기 - 야나가와 에이키(柳川瀅基): ‘형기’를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육영수 - 구가미 에이슈(陸海英修; 성씨 부분을 훈독), 리쿠카이 에이슈(陸海英修; 성씨 부분을 음독) [77]: 성씨에 해(海)를 넣어 창씨하고, ‘영수’를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윤갑병 - 히라누마 히데오(平沼秀雄)
  • 윤관[78] - 히라누마 간지(平沼灌次): 창씨는 본관에서 가져오고, '관'을 그대로 이름 부분에 사용하였다.
  • 윤길중 - 히라누마 요시시게(平沼吉重; 이름 부분을 훈독), 히라누마 기치주(平沼吉重; 이름 부분을 음독): ‘길중’을 그대로 이름으로 사용하였다.
  • 윤동주 - 히라누마 도주(平沼東柱): 성만 일본식으로 바꾸고, '동주'는 그대로 이름으로 사용하였다. 본관 파평 윤씨에서 평(平)을 따왔고, 파평 윤씨의 시조 윤신달이 연못에 떠 있던 옥함 속 아이였다는 설화에서 소(沼 : 연못)를 따온 것이다. 당시 일본 유학에 필요한 도항증명서 발급 탓에, 창씨명을 만들었다. 자세한 사항은 윤동주 문서 각주 참고.
  • 윤두헌 - 히라누마 분포(平沼文甫): 상술된 윤동주 시인의 사례와 동일한 창씨 방법이다.
  • 윤범행 - 이토 노리유키(伊東範行; 이름 부분을 훈독), 이토 한코(伊東範行; 이름 부분을 음독): ‘범행’을 이름으로 사용하였다.
  • 윤병희 - 마쓰다 헤이키(松田秉禧): '병희'를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윤사혁 - 히라카와 히로도시(平川博敏)
  • 윤상구 - 이토 소큐(伊東相求): ‘상구’를 이름으로 사용하였다.
  • 윤상필 - 이하라 아이스케(伊原相弼; 이름 부분을 훈독) / 이하라 소히쓰(伊原相弼; 이름 부분을 음독): '상필'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윤상희 - 히라이 소키(平井相曦): '상희'를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윤석중 - 히라오카 나가이에(平岡永宇; 이름 부분을 훈독), 히라오카 에이우(平岡永宇; 이름 부분을 음독)
  • 윤익선 - 히라누마 에이이치(平沼榮一)
  • 윤종화 - 이자카 가즈오(伊坂和夫)
  • 윤치오 - 이토 지고(伊東致旿): 尹에 人변을 붙이고 뒤에 東을 붙여 창씨하였다. 이름 부분은 '치오'를 그대로 사용하였다.
  • 윤치왕 - 이토 지오(伊東致旺): 尹에 人변을 붙이고 뒤에 東을 붙여 창씨하였다. 이름 부분은 '치왕'을 그대로 사용하였다.
  • 윤치호 - 이토 치코(伊東致昊): 尹에 人변을 붙이고 뒤에 東을 붙여 창씨하였다. 이름 부분은 '치호'를 그대로 사용하였다. 윤치호의 경우 신문 광고를 빌려 창씨개명을 적극 추천하기도 했다. 지코가 아니다!! 물론 지코의 발음도 치코지만. 역시 기회주의적인 부역자 이를 두고 한국어로 발음이 비슷한 '이 똥 치워'라고 윤치호를 욕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 윤태림 - 이토 다이린(伊藤泰林): ‘태림’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윤태빈 - 이토 야스아키(伊藤泰彬): '태빈'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윤형남 - 히라노 교난(平野亨南): 이름 부분으로 형남을 그대로 썼다.
  • 윤효중 - 이토 다카시게(伊東孝重; 이름 부분을 훈독), 이토 고주(伊東孝重; 이름 부분을 음독): ‘효중’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이갑성 - 이와모토 마사이치(岩本正一)
  • 이강원 - 히가시조노 야스모토(東園康元; 이름 부분을 훈독) / 히가시조노 고겐(東園康元; 이름 부분을 음독): '강원'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이강혁 - 리하라 고카쿠(李原康爀): 이/강혁으로 분리하여 성씨에 '原'을 넣어 창씨하고, '강혁'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이경식 - 리 게쇼쿠(李敬植)
  • 이경우 - 오모리 기미히로(大森卿弘): '경'(卿)을 그대로 이름 부분에 사용하였다.
  • 이겸제 - 후쿠다 겐지(福田謙治): ‘겸’(謙)을 그대로 이름 부분에 사용하였다.
  • 이각종 - 아오야마 가쿠쇼(青山覺鐘): '각종'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이갑녕 - 야스하라 고네이(靖原甲寧): '갑녕'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이갑용 - 오타 가즈오(大田一夫) / 나가카와 고요(永川甲用): '갑용'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이계한 - 마쓰모토 게이산(松本啓三): '계'를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이공후 - 단야마 기미아쓰(丹山公厚; 이름 부분을 훈독), 단야마 고코(丹山公厚; 이름 부분을 음독): ‘공후’를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이광수 - 가야마 미쓰로(香山光郞): 香山는 일본의 초대 덴노진무 덴노가 도읍으로 정한 나라현 가시하라(橿原) 시에 있는 가구산(香久山)[79][80]에서 가져왔으며, 광수(光洙)의 光과 일본식 郞을 합쳐 이름으로 삼은 것.
  • 이교식 - 미나미다 교쇼쿠(南田教植): '교식'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이규남 - 미나미 구니오(南邦男)
  • 이규완 - 아사다 료(浅田良)
  • 이근상 - 오야마 세이고(大山清吾)
  • 이근석 - 아오키 모토미쓰(青木根皙): '근석'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이근수 - 가미야 긴슈(桂宮瑾洙): '근수'를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이근창 - 단야마 네마사(丹山根昌) / 단야마 곤쇼(丹山根昌): '근창'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이금룡 - 가야마 나가하루(香山長春)
  • 이긍종 - 미야무라 가오루(宮村薫)
  • 이기동[81] - 나카무라 기도(中村起東): '기동'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이기명 - 리노이에 기메이(李家起明)
  • 이기방 - 마쓰무라 모토히로(松村基弘): '기'를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이기세 - 다카야마 모토요(高山基世): '기세'를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이기승 - 야마무라 기쇼(山村基升): '기승'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이기을 - 아오미 기오쓰(靑海氣乙): 성씨는 본관에서, 이름은 그대로 따와 사용하였다.
  • 이기찬 - 야스시로 모토(安城基)
  • 이난영 - 오카 란코(岡蘭子): ‘난’(蘭)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이능섭 - 도엔지 노쇼(東園寺能燮) / 도엔지 노쇼(東園寺能昭): '능섭'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이대영 - 우미히가시 다카토모(海東孝朋; 성씨 부분을 훈독) / 가이토 다카토모(海東孝朋; 성씨 부분을 음독)
  • 이대영 - 고마시로 다이에이(駒城大榮): '대영'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이단 - 마쓰모토 아마오(松本天雄) / 마쓰모토 아키사이(松本明宰) / 마쓰모토 도모사이(松本朋宰)
  • 이덕진 - 오야마 요시미치(大山善道)
  • 이두연[82] - 마쓰타니 도엔(松谷斗淵): ‘두연’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이돈화 - 시로야마 이치구마(白山一熊)
  • 이동욱[83] - 리카와 도교쿠(李河東旭): 이/동욱으로 분리하여 성씨에 '河'를 붙여 창씨하고, '동욱'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이동인 - 아사노 도진(朝野東仁) / 아사노 도진(淺野東仁): '동인'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朝野라는 창씨명은 '전주 이씨 → 조선'에서 온 듯. 개화승으로 유명한 그 이동인이다. 임종국의 연구에 의하면 창씨개명 1호. 승려라는 것도 일본식 불교인 진종대곡파(眞宗大谷派)의 본찰인 히가시혼간지에서 법계를 받았다. 이전에 범어사통도사에서 정식승적에 올랐는지는 이론이 있으나, 본격적인 활동시기에 일본에서 법계를 받은 것은 논란의 여지가 없다. 개화승 부분도 논란이 있어서, 임종국은 이동인을 이중스파이로 지목했다.
  • 이동화 - 리노이에 마코토(李家實)
  • 이동혁 - 모리야마 하쓰미(森山肇三; 이름 부분을 훈독) / 모리야마 죠산(森山肇三; 이름 부분을 음독)
  • 이만수 - 오히라 반슈(大平晩秀): 이름으로 만수를 사용하였다.
  • 이만식 - 가와하라 히라사다(河原平定)
  • 이만준 - 마키야마 반슌(牧山萬濬): ‘만준’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이묘묵 - 리노미야 우다마(李宮卯默; 이름 부분을 훈독) / 리노미야 보모쿠(李宮卯默; 이름 부분을 음독): '묘묵'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이면상 - 마치무라 벤소(街村冕相): ‘면상’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이명교 - 아키야마 히데미네(秋山秀峰)
  • 이명구 - 마키하라 히로사다(牧原廣定)
  • 이명박 - 쓰키야마 아키히로(月山明博): 그의 본관인 경주시의 옛 이름 월성(月城)에서 따와 月山이라 창씨하였다. 일본 오사카 출생으로 유년기를 일본에서 보냈다. 따라서 통명이었던 아키히로가 주가 되어, 그것을 그냥 한국이름 '명박'으로 쓴 것으로 보인다. 참고로 이명박 형제는 상자 돌림을 쓰고 있고(이상득-이상은), 이명박 역시 족보에는 돌림자가 사용된 '이상정(李相定)'으로 기재되어 있다. 호적상 성명과 족보상 성명이 다른 경우는 주변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실제 사례로는 조국[84], 김대건 신부[85], 이만희[86], 한동숙[87], 심대평[88], 정형돈[89] 등이 있다.
  • 이명섭 - 리미야 메이쇼(李宮明燮): ‘명섭’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이명세 - 하루야마 아키요(春山明世): '명세'를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이명우 - 세토 아키라(瀬戸明): ‘명’(明)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이명직 - 마키노 메이쇼쿠(牧野明植): ‘명직’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이명흠 - 고토야마 이즈미(琴山泉)
  • 이무영 - 나가이카 야스오(永佳泰雄)
  • 이민호 - 요시우미 도시히로(芳湖敏浩): '민호'를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이범관 - 기요하라 한칸(清原範觀): '범관'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이범익 - 기요하라 노리마스(清原範益): '범익'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이병렬 - 기요하라 헤이레쓰(清原炳烈): '병렬'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이병숙 - 기야마 도이치(木山登一)
  • 이병식 - 히로바야시 유사쿠(廣林雄策)
  • 이병용 - 오와다 헤이요(大和田炳瑢), 오와다 모토이치(大和田元一): ‘병용’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이병재 - (平川炳㦳)
  • 이병학 - 아오키 헤이가쿠(青木柄學): '병학'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이보담 - 기무라 호탄(木村寶潭): ‘보담’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이봉창 - 기노시타 쇼조(木下昌藏), 아사야마 쇼이치(朝山昌一): 아래 이완용처럼 일제가 창씨개명을 강요하지 않았던 시절에 알아서 일본식 이름을 붙인 것이다. 이는 이봉창이 일본을 좋아하여 뼛속까지 일본인이 되고자 노력했기 때문. 그는 일본어도 아주 잘 했다. 하지만 결국 그는 일제강점기의 조선인으로서 차별을 벗어날 수 없었고, 이것이 그가 독립운동에 뛰어든 계기가 된다. 독립운동에 뛰어들고자 임시정부를 찾아갔을 땐 유창한 일본어 실력과 일본식 이름으로 인해 친일파 밀정으로 오해당한 바 있다. 다행히 김구가 이 때 이봉창이 내뱉은 말 "당신들 너무 한심한 거 아니오? 나 같았으면 그 때(덴노의 행차) 수류탄만 있었으면 콱"을 듣고 일단은 받아줬지만, 감시를 붙이는 등 한동안 안 믿었다고 한다.
  • 이상기 - 사카와 아이모토(佐川相基; 이름 부분을 훈독), 사카와 소키(佐川相基): ‘상기’를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이서향 - 기모토 고레유키(木元是之)
  • 이석규 - 오히가시 구니오(大東國男; 성씨 부분을 훈독) / 다이토 구니오(大東國男; 성씨 부분을 음독): 상술된 박남규의 사례와 비슷하게 자신이 지지하던 일본 제국대동아 공영권을 이름에 담아 대동국의(大東國)남아(男)라고 작명하였다.[90]
  • 이석규 - 리야마 세키큐(李山奭求), 리야마 세키(李山奭): 이/석규로 분리한 뒤 성씨에 山을 넣어 창씨하였다.
  • 이석두 - 이와모토 분진(岩本文璡), 이와모토 우히로(岩本宇弘)
  • 이석훈 - 마키 히로시(牧洋)
  • 이선홍 - 다케다 젠코(武田善洪), 다케다 히데오(武田英雄): '선홍'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이성근 - 가나가와 히지리(金川聖): '성'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이성범 - 도요무라 세이한(豊村聖範): ‘성범’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이성재 - 오모토 마사로(大本正郎)
  • 이성환 - 야스오키 세이칸(安興晟煥; 성씨 부분을 훈독) / 안코 세이칸(安興晟煥; 성씨 부분을 음독): '성환'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이수현 - 도쿠하라 모리쓰루(徳原守鉉): '수현'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이숙종 - 미야무라 주쿠쇼(宮村淑鍾): '숙종'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이순재 - 히로키 준사이(廣城順載): 본관이 광주인지라 여기서 廣자를 따오신 듯. 이름 부분은 "순재"를 그대로 사용.
  • 이승구 - 미시마 쇼이치(三島承一): '승'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이승우 - 고무라 쇼우(梧村升雨): '승우'를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이심훈 - 미야무라 에이오(宮村榮夫)
  • 이영근 - 가와모토 류오(河本龍雄) / 우에다 류오(上田龍雄)
  • 이영택 - 마쓰모토 나카시(松本仲司)
  • 이영환 - 아사노 에이칸(朝野榮還): ‘영환’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이완용 - 리노이에 간요(李家完用): 글자 그대로 이씨 집안의 완용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의외로 생전에 일본어는 거의 못했다고 한다. 대신 영어는 매우 잘했다고 한다.
  • 이완종 - 미야무라 간이치(宮村完一): '완'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이용 - 오하시 슈류(大橋集龍): 개명 전 이름인 '집룡'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이용설 - 미야모토 요세쓰(宮本容卨): ‘용설’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이용수 - 간무네 구니타다(桓宗邦忠)
  • 이용휘 - 요시카와 히로마사(義川浩正)
  • 이운붕 - 도요나가 호우(豊永鵬宇): '붕'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이원규 - 모리 겐타이(茂李源泰) / 모리 하라미(毛利原三): '원'(源)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이원우 - 나카하라 하쓰오(中原初夫)
  • 이윤종 - 미야무라 인쇼(宮村允鍾): '윤종'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이응준 - 가야마 다케토시(香山武俊): '준'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이영찬 - 야스카와 에이산(安川永贊): '영찬'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이윤세 - 리노이에 인세(李家允世): 성씨에 家를 붙여서 창씨. 의미는 글자 그대로 '이씨 집안의 윤세'
  • 이윤영 - 쓰키시로 에이이치(月城榮一)
  • 이원보 - 리노이에 겐포(李家源甫): 성씨에 家를 붙여서 창씨. 의미는 글자 그대로 '이씨 집안의 원보'
  • 이원찬[91] - 하타니 마쓰토요(羽溪松豊; 이름 부분을 훈독) / 하타니 쇼호(羽溪松豊; 이름 부분을 음독): 본관인 우계를 가져와서 창씨하였다.
  • 이원창[92] - 고마키 히데야스(駒城秀康)
  • 이익화 - 니시하라 요쿠가(西原翊華): '익화'를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이익흥 - 오야마 마스쿄(大山益興): '익흥'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이인범 - 요시모토 히토마사(義本仁範; 이름 부분을 훈독), 요시모토 진한(義本仁範; 이름 부분을 음독): ‘인범’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이인숙 - 나카야마 이에하쿠(中山家伯)
  • 이장우 - 이와무라 쇼우(岩村章雨): '장우'를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이재기 - 미야모토 데이린(宮本廷麟): 이름은 개명 이전의 본명인 '정린'을 그대로 이름으로 사용하였다.
  • 이재학 - 오하라 이쿠오(大原郁生)
  • 이정섭 - 미야모토 아키쇼(宮本晶燮): '정섭'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이종덕 - 에모토 쇼도쿠(江本鍾悳): '종덕'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이종린 - 미즈하라 쇼린(瑞原鍾麟): '종린'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이종만 - 쓰키시로 쇼마(月城鍾萬): '종만'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이종섭 - 마쓰타니 헤이오(松谷平雄)
  • 이종실 - 야스무라 쇼지쓰(安村鐘實): ‘종실’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이종욱 - 히로타 쇼이쿠(廣田鐘郁): '종욱'을 그대로 이름으로 사용했다.
  • 이종은 - 시바무라 쇼인(芝村鍾殷): '종은'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이종준 - 이와무라 쇼준(岩村鐘駿): ‘종준’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이종태 - 이와모토 쇼타이(岩本鐘泰): ‘종태’를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이종태 - 스즈키 기이치로(鈴木貴一郎)
  • 이준식 - 가와하라 구니노리(河原邦典)
  • 이중수 - 마시로 나카히데(眞城仲秀): '중수'를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이진호 - 리노이에 신코 (李家軫鎬): 글자 그대로 이씨 집안의 진호라는 뜻이다. 이완용과 동일한 창씨 방법이다.
  • 이찬 - 아오바 가오루(青葉薫)
  • 이찬용 - 마쓰카와 아키요시(松川明義) / 마쓰카와 산요(松川燦容): '찬용'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이창근 - 히라마쓰 쇼콘(平松昌根): '창근'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이창수 - 마쓰모토 아키라(松本彰)
  • 이창수 - 구니모토 쇼주(國本昌洙): '창수'를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이창용 - 히로카와 소요(廣川創用): '창용'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이철 - 아오야마 히카리(青山哲): '철'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이태길 - 도쿠가와 다이키치(徳川泰吉): ‘태길’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이태순 - 야마키 다이준(山木泰淳): '태순'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이태용 - 마쓰자와 다이요(松澤泰鎔), 마쓰자와 나리요시(松澤成宣): ‘태용’을 그대로 이름으로 사용하였다.
  • 이태준 - 아오모토 모토히로(青本基弘)
  • 이태희 - 미에 다이키(三江太熙) / 미에 다쓰오(三江達夫): '태희'를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이택규 - 마키야마 다쿠케이(牧山宅珪): '택규'를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이판오 - 리시로 가하쿠(李城化白)
  • 이한창 - 히라카와 신지(平川眞次)
  • 이항녕 - 노베야마 미쓰타로(延山光太郎)
  • 이해용 - 산슈 가이요(三州海用): '해용'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이해익 - 와나가 히로미쓰(和永博光)
  • 이형근 - 마쓰야마 다케오(松山武雄)
  • 이호 - 리노이에 히로시(李家澔): '호'를 그대로 이름으로 썼다.
  • 이홍묵 - 다케다 미쓰모리(武田光盛)
  • 이홍빈 - 니가와 고힌(仁川洪彬): ‘홍빈’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이흥렬 - 나오키 쿄네쓰(直木興烈) : '흥렬'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이흥재 - 히로카와 마사우미(廣川正海)
  • 이희간 - 우메다 지로(梅田二郎)
  • 이희순 - 시바야마 기준(芝山熙淳): '희순'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이희적 - 히라이 기테키(平居熙迪): '희적'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인정식 - 기류 이치오(桐生一雄)
  • 인창환 - 다카기 쇼칸(高木昌桓): '창환'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인태식 - 다카기 야스하루(高木泰治; 이름 부분을 훈독), 다카기 다이지(高木泰治; 이름 부분을 음독): ‘태’(泰)를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임동혁 - 도요하라 도가쿠(豊原東爀): '동혁'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임문환 - 도요카와 후미오(豊川文夫): 본관인 풍천을 가져와 창씨하고, 문(文)을 이름 부분에 사용하였다.
  • 임병식 - 하야시 쓰네오(林常雄): 성씨는 일본에도 있는 하야시(林)로 창씨.
  • 임석진 - 하야시바라 요시(林原吉; 이름 부분을 훈독) / 하야시바라 키치(林原吉; 이름 부분을 음독): 성씨 뒤에 原을 붙여 창씨하였다.
  • 임선규 - 하야시 나카로(林中郎): 성씨는 일본에도 있는 하야시(林)로 창씨하였다.
  • 임숙재 - 도요카와 주쿠사이(豊川淑宰): 본관인 풍천(豊川)을 가져와 창씨하고, '숙재'를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임용길 - 도요카와 류키치(豊川龍吉): 본관인 풍천을 가져와 사용하고, 이름 부분은 '용길'을 그대로 사용하였다.
  • 임창하 - 하야시 가오루(林薫): 성씨를 한자 그대로 일본식으로 읽었다.
  • 임헌평 - 하야시 노리히라(林憲平): 성씨는 일본에도 있는 하야시(林)로 유지하고, '헌평'을 그대로 이름으로 사용하였다.

===# ㅈ #===
  • 장규원 - 다카야마 기겐(高山逵源): '규원'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장경근 - 나가야마 게이네(長山暻根): '경근'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장기상 - 하리모토 기소(張元基相): 성씨에 元을 넣어 창씨하고 기상을 그대로 이름으로 사용하였다.
  • 장기창 - 나가타 모토마사(長田基昌): '기창'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장대익 - 하리무라 다이요쿠(張村大翼): 장/대익으로 분리한 뒤 성씨에 '村'를 붙여 창씨하였다.
  • 장덕조 - 마고나가 히가시(孫長 東)
  • 장도영 - 나가하라 미치히데(長原道英): '도영'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장도환 - 나가모토 도칸(長本道煥): ‘도환’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장두현 - 마쓰나가 도켄(松永斗鉉): 이름은 원래 이름인 두현을 그대로 따왔다.
  • 장면 - 다마오카 쓰토무(玉岡勉): '면'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그의 본관 옥산(玉山)에서 따와 옥강(玉岡)이라 창씨하였다.
  • 장석상 - 우에오 샤쿠소(上生石霜): ‘석상’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장병옥 - 도모노키 헤이교쿠(友軒炳玉): ‘병옥’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장석원 - 오이케 류조(大池龍藏)
  • 장석주 - 다카타니 요시(高谷義; 이름 부분을 훈독 1) / 다카야 요시(高谷義; 이름 부분을 훈독 2)
  • 장세정 - 하리다 요사다(張田世貞; 이름 부분을 훈독), 하리다 세테이(張田世貞): 장/세정으로 분리한 뒤 성씨에 田을 넣어 창씨하였다.
  • 장우식 - 다마야마 도모히코(玉山友彦)
  • 장윤식 - 오사 준지(長潤二) / 오사 세이지(長清二): 潤을 그대로 이름 부분에 사용하였다.
  • 장연송 - 하리야마 렌쇼(張山連松): 성씨에 山을 넣어 창씨하고, ‘연송’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장용관 - 야스모토 류칸(安本龍官): '용관'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장응상 - 도쿠야마 다카아쓰(徳山喬厚)
  • 장응진 - 하리마 오신(張間應震): 성씨에 '間'를 붙여 창씨하고, '응진'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장인근 - 시마다 하리이치(島田張一)
  • 장준식 - 하세가와 슌쇼쿠(長谷川俊植): ‘준식’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장준영 - 하리에이 도시히데(張營俊英) / 하리나가 도시히데(張永俊英) : '준영'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장준하 - 하리야스[93] 슌가(張安俊河): 장/준하로 분리한 다음 성씨에 安을 넣어 창씨하였다. 역시 당시에 흔한 창씨법이다.
  • 장직상 - 하리모토 지키쇼(張元稷相): '장'씨 뒤에 元을 넣어서 창씨했다. 이름은 그대로 가져옴.
  • 장창국 - 마쓰모토 도시하루(松本敏治)
  • 장홍식 - 하리마 고쇼쿠(張間弘植): 장/홍식으로 분리하여 성씨에 間를 넣어 창씨하였다.
  • 장훈 - 하리모토 이사오(張本勳): '장'에다 本을 넣어 창씨했다. 이름 부분은 "훈"을 그대로 사용.
  • 장헌근 - 하리마 노리시로(張間憲四郎): 성씨 뒤에 '間'을 붙여 창씨하고, 이름 부분에 '헌'을 사용하였다.
  • 장헌식 - 하리마 겐쇼쿠(張間憲植): '헌식'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장혁주 - 노구치 미노루(野口稔) / 노구치 가쿠추(野口赫宙): '혁주'를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장현식 - 마쓰야마 다케오(松山武雄)
  • 전덕룡 - 다하라 도쿠류(田原徳龍): 성씨에 '原'자를 붙여 창씨하고, '덕룡'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전석영 - 마쓰다 다마오(松田圭生)
  • 전성욱 - 에하라 세이교쿠(江原聖旭): '성욱'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전승수 - 미야케 가쓰히데(三宅勝秀): '승수'를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전예용 - 에하라 레조(江原禮三): '예'를 이름 부분에 사용하였다.
  • 전봉덕 - 다나카 호토쿠(田中鳳徳): 이름 부분으로 봉덕을 그대로 썼다.
  • 오리 전택부 - 젠케 다쿠후(全家澤鳧): 창씨개명 당시에 전씨 집안이라는 것을 유지하기 위해 성을 '전가(全家)'로 했다고 생존 당시 KBS 프로그램인 《사랑방중계》에서 밝힌 바 있다. 이름 부분은 '택부'를 그대로 사용. 덤으로 호인 '오리'는 이름자에 있는 鳧(물오리 부)에서 따온 듯.
  • 전병하 - 젠모토 요시스케(全本吉助)
  • 전필순 - 히라야스 요네즈(平康米洲)
  • 정광조 - 가와우에 히로토모(川上廣朝): '광조'를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정건영 - 마치이 히사유키(町井久之)
  • 정건유 - 가네우라 다케히로(金浦健裕): '건유'를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정교원 - 도리카와 교겐(鳥川僑源): '교원'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정규섭 - 우미모토 게이쇼(海本奎燮): ‘규섭’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정규식 - 우카와 게이쇼쿠(烏川圭植): ‘규식’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정규환 - 라이야마 게이칸(莱山圭煥): '규환'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정기창 - 니데하라 모토마사(日出原基昌): '기창'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94]
  • 정난교 - 나카하라 유조(中原雄三) / 나카하라 헤이키치(中原平吉) / 우미히라 란쿄(海平蘭敎): 창씨개명한 이름이 이례적으로 3개나 있는 인물이다. 첫번째 이름은 갑신정변 실패 이후 망명길에 지토세마루 선원 쓰지 도쥬로(辻藤三郞)[95]가 직접 지어준 이름이고 세번째 이름은 1940년에 창씨 개명령이 떨어졌을 때 개명했던 이름이다.
  • 정민조 - 마쓰나가 미쓰히로(松永光弘)
  • 정석모 - 모미지가와 세키보(楓川碩謨): '석모'를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정석용 - 마쓰카와 샤쿠요(松川錫溶): '석용'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정연기 - 구사모토 젠키(草本然基): '연기'를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정용신 - 아오야마 신스케(青山信介): '신'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정운성 - 고마쓰 운세이(小松雲成): '운성'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정인과 - 도쿠가와 진카(徳川仁果) / 도쿠가와 진카(悳川仁果): '인과'를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정일권 - 나카지마 잇켄(中島一權): '일권'을 그대로 이름으로 사용했다.
  • 정인섭 - 히가시하라 인쇼(東原寅燮): '인섭'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정인택 - 고마쓰 미키(小松幹)
  • 정재춘 - 히가시무라 슈이치(東村秀一)
  • 정지용 - 오유미 오사무(大弓修): 동이족을 나타내는 한자 夷를 파자하여 大弓으로 창씨하고, 활 쏘는 자세를 뜻하는 修를 이름으로 삼았다.
  • 정진호 - 히가시모토 신코(東本鎭浩): ‘진호’를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정태균 - 기리모토 다이킨(桐本泰均): '태균'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정창윤 - 오야마 쇼인(大山昌允): ‘창윤’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정천모 - 히가시카와 텐보(東川天謨): '천모'를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정철수 - 우카와 데쓰슈(烏川哲洙): '철수'를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정춘수 - 가타니 슌주(禾谷春洙): '춘수'를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정충원 - 우카와 주겐(鳥川忠源): '충원'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정치화 - 다이손 지카(乃尊致化): 본래 성씨인 鄭을 파자하여 창씨하고, ‘치화’를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정칠성 - 오하라 에이이치(大原榮一)
  • 정해봉 - 니테이 가이호(日鄭海鵬): 성씨 앞에 '日'자를 붙여 창씨하고, '해봉'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정훈 - 가마 이사오(蒲勳): '훈'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조강제 - 도모에야마 고보(巴山高芳)
  • 조경하 - 아오바시 교카(青橋鏡夏): '경하'를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조경호 - 마사마쓰 교코(昌松京鎬): '경호'를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조기간 - 아마야 다다시(天谷正)
  • 조동민 - 미나야스 도빈(咸安東敏): '동민'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조동식 - 하야시카와 도쇼쿠(林川東植): '동식'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조명하 - 아케가와 도미오(明河豊雄): 이름인 명하(明河)를 성씨로 사용하였다. 참고로 이 이름은 독립운동에 뛰어들고자 일부러 창씨개명한 이름이라고 한다.
  • 조병교 - 후쿠카와 나가이치(福川永一)
  • 조병렬 - 가가와 히사시(嘉川久士)
  • 조병상 - 가야마 시게루(夏山茂)
  • 조병학 - 나쓰야마 헤이가쿠(夏山秉學): '병학'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조상만 - 이와모토 나오미쓰(岩本尚満): '상만'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조상옥 - 후루야마 쇼교쿠(古山尚鈺): '상옥'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조소영 - 시라카와 고키치(白川亨吉): 이명인 ‘형길’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조승제 - 초무라 쇼사이(趙村昇濟): 성씨에 村을 넣어 창씨하고, ‘승제’를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조용순 - 하야시카와 준이치(林川淳一)
  • 조우식 - 시라카와 에이지(白川榮二)
  • 조연현 - 도쿠다 엔켄(徳田演鉉): ‘연현’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조원환 - 야마모토 겐칸(山本元煥): '원환'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조종춘 - 시라카와 모토쿠라(白川元藏)
  • 조중구 - 다케무라 고이치로(竹村呉一郎)
  • 조진만 - 초케 미치오(趙家庸夫): 조씨 집안인 사실을 유지하기 위해 趙家로 창씨한 것으로 추정된다.
  • 조택원 - 후쿠카와 겐 (福川元): '원'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조춘원 - 시바야마 하루모토(芝山春元): '춘원'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조희문 - 마쓰하라 기분(松原羲聞): '희문'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조희연 - 오무라 지사부로 (大村智三郞)
  • 주영석 - 오하라 에이샤쿠(大原永錫): ‘영석’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주영섭 - 마쓰무라 에이쇼(松村永渉): '영섭'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주영환 - 모토시로 히데미치(本城秀通)
  • 주요한 - 마쓰무라 고이치(松村紘一): 이름 '고이치(紘一, 굉일)'는 일제의 황도정신이자 일본 제국주의 핵심사상인 팔굉일우(八紘一宇)에서 따온 것이다.
  • 주재년 - 신시로 자이넨(新城在年): ‘재년’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주진욱 - 마쓰야마 도라오(松山虎雄)
  • 지희열 - 나카하라 다케시(中原健)
  • 진양근 - 마쓰모토 히로네(松本洋根): '양근'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진의종 - 오하라 도시유키(大原敏亨; 이름 부분을 훈독), 오하라 빈쿄(大原敏亨; 이름 부분을 음독)
  • 진학문 - 하타 마나부(秦學): 성씨를 그대로 일본식으로 읽고, '학'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ㅊ #===
  • 차남진 - 도쿠야마 난진(徳山南鎭): '남진'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차준담 - 구루마다 슌단(車田濬潭): 성씨에 田을 붙여 창씨하고, '준담'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천장욱 - 오야마 다테마사(大山健正) / 오야마 다테타다(大山健忠)
  • 천병규 - 치다 게이이치(千田圭一): '병규'에서 圭를 따온 것으로 보인다.
  • 채병덕 - 오시마 헤이토쿠(大島秉德): 이름은 병덕을 그대로 썼고 성은 새로 만든 것으로 보인다.
  • 채필근 - 사가와 히쓰긴(佐川弼近): '필근'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최경만 - 쓰루하라 다케오(鶴原武雄)
  • 최경진 - 에도 게이신(江東慶進): '경진'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최규하 - 우메하라 게이이치(梅原圭一): 출신지역인 강원도가 바다와 가까운 점을 통해 우메하라(梅原)으로 창씨하였다. 이름 부분은 '규하'에서 圭를 따온 것으로 보인다. 이름을 그대로 사용한 '게이나쓰(圭夏)'였다는 얘기도 있다.
  • 최낙철 - 가야마 라쿠데쓰(佳山洛哲): 성씨를 파자하여 가야마(佳山)로 창씨하고 낙철을 그대로 이름으로 사용하였다.
  • 최남근 - 마쓰야마 다다요시(松山忠義)
  • 최대교 - 에모토 다이쿄(江本大教): '대교'를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최동 - 야마카 도(山佳棟): 성씨를 파자하여 창씨하고, '동'(棟)을 이름으로 사용하였다.
  • 최만달 - 야마에 다쓰오(山江達雄): '달'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최명하 - 다케야마 다카시(武山隆)
  • 최병협 - 니오카 한조(新岡繁蔵)
  • 최린 - 가야마 린(佳山麟): 崔를 파자하여 佳山으로 창씨하고, '린'을 그대로 이름으로 썼다.
  • 최수부 - 다카야마 히데오(高山秀夫). 일본 후쿠오카 출생으로 일본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창씨는 성인 崔를 의역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름 부분은 "수부"를 그대로 사용.
  • 최상문 - 마루야마 쇼분(丸山翔文): ‘상문’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최석현 - 야마모토 쇼스케(山本祥資)
  • 최승렬 - 도쿠야마 쇼레쓰(徳山昇烈): '승렬'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최양호 - 다케야마 요코(武山養浩): '양호'를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최안국 - 와다 긴고(和田欽五)
  • 최연 - 다카야마 기요타다(高山清只)
  • 최연국 - 아사히 노보루(朝日昇)
  • 최영의 - 오야마 마스타쓰(大山倍達): 崔에서 山을 따고 앞에 大를 붙여 창씨하였으며, 한민족을 뜻하는 배달을 이름으로 썼다. 그래서 그의 이명이 '최배달'인 것.
  • 최윤 - 야마카 준(山佳潤): 성씨를 파자하여 창씨하고, '윤'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최윤주 - 미야타케 겐포(宮竹謙輔)
  • 최익하 - 와야마 마스나쓰(和山益夏): '익하'를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최인규 - 호시 인케이(星寅奎): '인규'를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최인범 - 쓰바라 히토노리(津原仁範): '인범'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최재엽 - 다카야마 자이요(高山在燁): '재엽'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최정규 - 야마모토 마사오(山本正夫)
  • 최정묵 - 오야마 아키라(大山晃)
  • 최주성 - 오야마 히로마사(大山博正)
  • 최준집 - 마루야마 류준(丸山隆準)
  • 최지화 - 데쓰하라 지카(鐵原志化): ‘지화’를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최지환 - 후지야마 다카모리(富士山隆盛)
  • 최창조 - 기요카와 마사토모(清川昌朝): '창조'를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최창학 - 마쓰야마 마사가쿠(松山昌學): '창학'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최창호 - 야마모토 쇼코(山本昌鎬): '창호'를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최창홍 - 히로타 마사히로(廣田昌弘): '창홍'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최창현 - 마키야마 마사쓰루(牧山昌鉉): '창현'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최탁 - 미카즈 다쿠(三和卓): '탁'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최태봉 - 다카야마 다이호(高山泰鳳): '태봉'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최하영 - 가야마 가에이(香山夏永): '하영'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최항묵 - 오야마 니치고(大山日剛) / 오야마 다케시(大山剛)
  • 최형직[96] - 가야마 사다요시(佳山定義): 성씨를 파자하여 창씨하였다.
  • 최형직[97] - 다카야마 게이쇼쿠(高山炯稷) / 다카야마 후미이치(高山文一): "형직"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최효대 - 다케야마 고다이(武山孝大): ‘효대’를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최희남 - 미야모토 요시오(宮本吉雄)

===# ㅌ #===
  • 탁경현 - 미쓰야마 후미히로(光山文博)
  • 탁춘봉 - 야마모토 하루미네(山本春峰): '춘봉'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ㅍ #===
===# ㅎ #===
  • 하준석 - 가와모토 도시스즈(河本駿錫; 이름 부분을 훈독) / 가와모토 슌샤쿠(河本駿錫; 이름 부분을 음독): '준석'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하판락 - 가와모토 한라쿠(河本判洛) / 가와모토 마사오(河本正夫): 하/판락으로 분리한 다음 성씨에 本을 넣어 창씨했다. 이름은 '판락'을 그대로 사용.
  • 한규복 - 이가키 게후쿠(井垣圭復): '규복'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한기방[98] - 고이에 모토쿠니(子家基邦): '기방'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한동석 - 아사카와 도샤쿠(朝川東錫): '동석'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한은진 - 기요야마 긴진(清山銀珍): ‘은진’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한정석 - 오하라 사다스즈(大原定錫; 이름 부분을 훈독) / 오하라 데샤쿠(大原定錫; 이름 부분을 음독): '정석'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한종건 - 니시하라 쇼겐(西原鐘建): '종건'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한창우 - 간 쇼우(韓昌祐)
  • 한흥 - 닛센 슌케이(日仙俊炯): 족보명인 '준형'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한희석 - 이가키 기샤쿠(井垣煕錫): '희석'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함성욱 - 에하라 세이쿠(江原誠郁)
  • 허기락 - 이와무라 기라쿠(岩村基洛): '기락'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허영호 - 도쿠미쓰 인(徳光允) / 도쿠미쓰 쓰바사(徳光翼)
  • 허하백 - 가네무라 가와노리(金村河伯; 이름 부분을 훈독) / 가네무라 가하쿠(金村河伯; 이름 부분을 음독): '하백'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허섭[99] - 아사히카와 쇼(旭川燮) / 아사히카와 가즈이치(旭川和一): '섭'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허영 - 히나쓰 에이타로(日夏英太郎)
  • 현사선 - 구로야마 기젠(玄山己善)
  • 현영만 - 마쓰모토 고헤이(松本亘平)
  • 현영섭 - 아마노 미치오(天野道夫)
  • 현인 - 고토 진(後藤仁): "인"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현제명 - 구로야마 스미아키(玄山濟明; 이름 부분을 훈독) / 구로야마 사이메이(玄山濟明; 이름 부분을 음독): 성씨에 山을 넣어 창씨하고 '제명'을 그대로 이름으로 썼다. 역시 흔한 창씨법.
  • 현영조 - 노베야마 에이소(延山永祚): ‘영조’를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현용주 - 노베야마 다쓰슈(延山龍珠): ‘용주’를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현준혁 - 다이호 오세이(大砲黄成)
  • 홍난파 - 모리카와 준(森川潤)
  • 홍목 - 오야마 아쓰시(大山穆), 오야마 유키노부(大山幸伸): 목(穆)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홍순봉 - 오무라 히로조(大村裕造)
  • 홍이두 - 미쓰이 리토(三井利斗): ‘이두’를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홍승호 - 기요카와 미키오(清川幹夫)
  • 홍양명 - 시라카와 요시노리(白川義則)
  • 홍영선 - 오야마 가즈쿠니(大山和邦)
  • 홍인석 - 가가와 진샤쿠(香川仁錫): ‘인석’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홍종국 - 도쿠야마 요시히코(徳山善彦)
  • 홍종철 - 고카이 쇼테쓰(洪海鍾轍): 홍/종철로 분리한 다음 성씨에 海를 넣어 창씨했다. 이름은 '종철'을 그대로 사용.
  • 홍종현 - 미쓰이 쇼켄(三井鐘顯): ‘종현’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홍진기 - 도쿠야마 신이치(徳山進一)
  • 홍청파 - 고누마 기요모토(洪沼淸源): 성씨 뒤에 沼를 넣어 창씨하였다.
  • 홍치업 - 난요 지교(南陽致業): 본관인 '남양'으로 창씨하고, '치업'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홍태욱 - 도쿠야마 미치히라(徳山道平)
  • 홍헌표 - 도쿠야마 가이치(徳山嘉一)
  • 황벽응 - 아리다 헤키오(有田碧應), 아리다 슌다쿠(有田賰澤): ‘벽응’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황의명 - 마쓰다 요시아키(松田義明) / 보무라 요시아키(尨村義明): '의명'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황의영 - 나가미즈 기에이(長水義瑛): ‘의영’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황종국 - 나카야마 도미오(中山富雄)
  • 황종률 - 마쓰하라 마사요시(松原正義) / 히야마 마사요시(檜山正義)
  • 황창섭 - (平本昌燮)

8. 유사 사례

8.1. 강요 차원

  • 류큐 왕국은 1522년에 아마미 군도를 병합한 후 아마미 군도의 야마토 민족계 토착민들을 류큐인에 동화시키기 위해 그들에게 야마토식 이름을 버리고 류큐식 이름을 쓰도록 강요하였다. 이러한 역사 때문에, 오늘날 아마미 군도 주민들은 정체성은 야마토 민족이지만 언어, 문화적으로는 류큐 왕국의 지배에 따른 흔적이 적지 않게 남아있는 복잡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 임진왜란 직후에 명나라의 장군인 모문룡조선을 상대로 해적질을 일삼아서, 이것이 외교 문제로 비화되기도 했다. 결국 이에 대해 조선이 명나라 측에 항의하는 지경에 이른 바람에, 같은 명나라 장군인 원숭환이 그를 체포해서 처형해버리고, 뒤이어 조선군이 모문룡의 본거지인 평안북도 철산군 가도를 점령하자, 조선 조정에서 가도의 주민들과 그의 부하들을 포함해서 거기에 남아있던 한족들에게 몽땅 조선식 의복상투를 강요하고, 중국식 성명을 전부 조선식으로 고쳐버렸다.
  • 바빌로니아에 끌려간 남유다 왕국의 유민들도 창씨개명을 당한 것으로 보인다. 구약성경 다니엘서의 주역 다니엘과 그 친구들은 바빌론식 이름을 갖고 있었다. 에스델서의 에스델모르드개 역시 히브리식 이름은 아니며, 각각 이슈타르마르두크에서 따 왔다는 설이 유력하다.
  • 베트남참파캄보디아를 정복했을 때 두 민족에게 베트남식 성씨와 이름(한자) 사용을 강요할뿐 아니라 다른 동화 정책과 문화 말살 정책도 펼쳤는데 참파의 경우 이슬람힌두교를 믿던 참족에게 종교별로 돼지고기쇠고기를 강요했고 힌두, 이슬람 사원을 허물고 그 자리에 베트남인들이 믿는 대승 불교 사찰을 지었다. 캄보디아를 잠깐 합병했을 때에는 합병 1년 만에 창씨개명, 풍습개조, 지명개명, 직할화, 캄보디아 왕족과 관리들에게 베트남식 단령 착용 강요 등을 시행하는 동시에 남부 베트남의 크메르족 마을의 경우 베트남인 촌락으로 크메르족 촌락을 포위하고 강제 통혼 혼혈을 시켜가면서까지 동화시키려고 하였다. 오늘날 베트남 남부지역 주민들은 베트남화된 참족과 크메르족의 후손이라서 그런지 베트남 북부지역 주민들과 달리 전형적인 동남아시아인의 스테레오타입(황인과 네그리토혼혈)이 드러나는 편이다.
  • 프랑스는 19세기에 알제리에 프랑스식 이름을 강요한 적이 있었다. 프랑스식 적극적 동화정책의 일환이었는데 반발이 너무 심해서 손해가 크자 1900년대부터 방침을 바꿔 연합주의로 전환했다.
  • 위에도 적혀 있지만 대만이 일본 식민지였을 때 비슷하게 폐성창씨가 이뤄졌다. 예를 들면 위의 창씨개명한 사람 목록에 나와 있듯이 리덩후이(李登輝)는 일제강점기에 이와사토 마사오(岩里政男)라는 성명을 썼었다. 한국 성씨를 남긴 조선과는 대조적으로 대만은 호적에서 중국 성씨를 아주 없앴다. 하지만 애초에 대만에선 그다지 열심히 개성명을 강요하지 않고 오히려 허가제를 두어 일본 이름으로 바꾸는 것을 엄격히 했다. 허가 기준은 일본어에 능통하고 천황을 제대로 모셨는지(…)였다고 한다. 결과적으로 1944년까지도 대만의 폐성창씨 비율은 전 대만인의 2%에 해당하는 7만 명에 지나지 않았다.
  • 2차 세계대전 중에 나치 독일룩셈부르크 대공국을 점령하고 아예 독일의 일부로 합병했을 뿐더러 룩셈부르크의 프랑스어 사용을 전면 금지했으며 프랑스식 이름을 가진 사람들에게 모두 독일식 이름으로 이름을 고칠 것을 강요했다. 현대 룩셈부르크인들 중에서도 룩셈부르크 북부 지역 사람들은 독일어가 모어이고 독일식 이름을 쓰는 경우가 많다.
  • 이탈리아 파시스트당 역시 트리에스테 지역을 차지하면서 그 지역에 살던 슬로베니아인들에게 이탈리아식 이름으로 개명할 것을 강요했다. 그리고 그 중 가장 대표적인 성씨가 바로 AC 밀란에서 2대 째 전설을 이어오고 있는 말디니 가문(체사레 말디니 - 파올로 말디니)이다. 본래는 성이 믈라디치(Mladic)였다고 한다.
  • 인도네시아수하르토 집권 후 신질서(Orde Baru)시기에 화교들에게 중국식 성씨를 강제로 고쳐서 인도네시아식으로 만들 것을 강요하는 법령을 발표도 했다. 이 때문에 현재 인니의 중국계 대다수는 성씨가 다음절이다.
  • 1980년대 불가리아 인민 공화국에서는 '재생과정(Възродителен процес)'이라는 정책으로 튀르키예계 주민들의 튀르키예풍 성씨를 슬라브식 성씨로 고치게 했다.[100] 이에 대한 반발로 1989년 국경이 개방되자 30만 가량의 튀르키예계 불가리아인이 튀르키예로 이주하였다.[101] 다만 그대로 불가리아에 남은 튀르키예계 불가리아인 또한 적지 않으며, 특히 아랫동네인 그리스의 경우처럼 터키어를 쓰고 튀르키예계 정체성을 가졌으면서도 종교는 정교회인 이들이나 아예 무신론자라서 불가리아 공산당의 비위에 거슬리지 않았던 이들은 이슬람교를 믿는 튀르키예계 불가리아인들에 비해 차별을 덜 받았기 때문에 튀르키예로 이주하지 않고 그대로 불가리아에 남는 경향이 더더욱 강했다. 튀르키예로 이주한 튀르키예계 불가리아인의 후손들이 튀르키예식 성씨를 쓰는 것과 달리, 불가리아에 그대로 남은 튀르키예계 불가리아인의 후손들은 여전히 슬라브식 성씨를 쓰고 있다.[102] 사실 이러한 일은 튀르키예계 불가리아인만 겪은 게 아닌데, 포마크인·알바니아계 불가리아인·그리스계 무슬림·보슈냐크인·쿠르드족 같은 불가리아의 다른 무슬림 민족들도 불가리아 인민 공화국의 강요에 의해 이슬람식 성씨를 슬라브식으로 변형시킨 경우가 많았다.
  • 위의 불가리아와 비슷한 사례인데, 러시아 제국소련의 지배를 받았던 무슬림 민족들은 현재까지도 국적이 러시아인지 아닌지를 막론하고 이슬람식 이름을 슬라브식으로 변형시켜 만든 성씨를 쓰고 있다. 누르술탄 나자르바예프, 이슬람 카리모프, 라흐몬 나비예프 등이 대표적이다.
  • 보슈냐크인, 튀르키예인, 알바니아인, 쿠르드족 등 구 유고슬라비아의 무슬림 민족들 또한 유고슬라비아의 지배에 따른 영향으로 이슬람식 성씨를 슬라브식, 정확히는 세르보크로아트어권식으로 -비치 돌림 성씨로 바꾸는 경우가 많았다.
  • 중화인민공화국소수민족여권을 발급받을 때 일종의 창씨개명을 당한다. 중화인민공화국 정부가 소수민족의 이름을 여권에 적을 때는 원음이 아니라 그 이름의 표준중국어 음차를 기준으로 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원음이 Rehimjan인 이름은 赖希木江을 거쳐 Laiximujiang으로 변하고, 여권에는 REHIMJAN이 아니라 LAIXIMUJIANG이 적힌다. 중국/민족 문서의 여권 발행 시 이름 표기 섹션 참고. 그리고 '김하일'을 '진허이'로 불러야 한다는 등의 의견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 중국공산당위구르족들에게 중국식 성씨와 중국 풍습, 돼지고기 섭취 및 이슬람교 포기 등을 강제수용소나 가정 등에서 강제하고 있다.

8.2. 자발적인 개명 차원

  • 태국화교들은 태국식 성명을 따로 쓰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전직 총리인 탁신 친나왓잉락 친나왓객가족 출신의 화교인데, 두 이름은 태국식으로 고친 성명이며 각각 丘達新(관화 : 추다신, 한국 한자음 : 구달신)과 丘英樂(관화 : 추잉러, 한국 한자음 : 구영락)이라는 중국 이름이 있다.
  • 과거 캐나다에선 과거 퀘벡 출신 사람들에게 프랑스식 이름을 버리고 영국식 이름을 쓸 것을 우회적으로 요구한 바가 있다. 프랑스식 이름을 쓰면 취직에 차별을 한다거나 등등. 퀘벡 출신 만화가 기 들릴의 회고에 따르면, 그의 아버지인 프랑수아 들릴이 프랑수아 들릴이란 이름으로 직업을 구하러 가면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았으나 프랭크 들릴로 이름을 바꾸자 그제야 직업을 얻었다고 한다.
  • 핀란드러시아 제국핀란드 대공국이 되기 전까지 700년 가까이 스웨덴의 지배를 받았고[103] 많은 핀란드인들이 스웨덴 문화에 동화되어 자연스럽게 스웨덴식 성명을 사용하고 스웨덴어를 구사했다. 그런데 스웨덴에게서 핀란드를 빼앗은 러시아는 초반에는 핀란드인들의 전통을 존중하는 듯 하다가 차츰 핀란드에 러시아 문화를 강요하자 핀란드에서는 핀란드 고유의 전통과 문화를 지키자는 페노마니아 운동이 분다. 페노마니아인들은 핀란드 고유의 문화의 중추로 핀란드어에 주목해 기존에 구사하던 스웨덴어 대신 핀란드어 사용을 장려했고 스웨덴식 성명 역시 핀란드식으로 고쳤다. 특이한 점이라면 스웨덴계로 동화된 핀란드계가 아닌 스웨덴에서 이주해와 핀란드에 정착한 순수 스웨덴계 역시 페노마니아 운동에 경도되어 성명을 핀란드식으로 고친 경우도 많았다는 것이었다.
  • 중동유럽에 거주하던 유대인 분파인 아슈케나지의 경우 아슈케나지 문화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독일어의 영향을 받아 독일식 성명이나 아니면 당시 유럽에서 유대인이 가장 많이 거주하던 폴란드-리투아니아의 영향을 받아 슬라브식 성명을 사용했다.[104] 그런데 19세기 말 시오니즘이 대두되면서 시오니즘에 경도된 아슈케나지 유대인은 '옛 조상들이 쓰던 이름으로 돌아가자'는 의도에서 기존에 쓰던 게르만/슬라브식 성명을 버리고 이를 히브리식으로 창씨개명을 했다. 예를 들어 다비트 그륀은 다비드 벤구리온, 골다 마보비치는 골다 메이어로 이름을 바꾼다던가. 물론 모든 시오니스트들이 히브리식으로 창씨개명을 했다는 건 아니고 하임 바이츠만처럼 조상 대대로 물려받은 성명을 버릴 수는 없다고 그대로 유지한 유대인도 있었다.
  • 벨기에는 과거에 프랑스계 주민들이 우대를 받고 네덜란드계 주민들이 천대를 받는 경향이 강했으며, 당시에는 공용어도 프랑스어 하나 뿐이었다. 그러다 보니 네덜란드계 주민들 중에서 출세를 위해 성만 그대로 네덜란드식인 채 프랑스식 이름을 쓰고 더 나아가 언어, 문화적으로 프랑스화되는 이들이 속출하기도 했다. 그 후손들로는 지정환 신부와 장 클로드 반담이 대표적인데, 이들은 네덜란드계 벨기에인임에도 불구하고 프랑스어가 모어였다.
  • 제1차 세계대전영국에서 반독일 정서가 퍼지자 왕족들이 독일계 성씨인 색스-코버그-고사(Saxe-Coburg-Gotha, 독일어로 적을 때는 Saxe-Coburg und Gotha(작센-코부르크-고타))를 버리고 왕실이 보유한 성(castle)의 이름을 따서 윈저(Windsor)로 바꿔야 했다. 그리고 역시 독일계 귀족인 배튼버그(Battenberg, 독일식으로는 바텐베르크) 가문이 성씨를 마운트배튼(Mountbatten)으로 고쳤다. 이 둘은 현 엘리자베스 2세 여왕과 부군인 에든버러 공작 필립의 성씨이기도 하다. 미국에서도 발음은 똑같지만 성의 독일식 철자를 영어식 철자로 바꾸는 일이 흔했다고 한다. 대표적인 예가 34대 미국 대통령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Eisenhauer였던 성씨를 Eisenhower로 바꾸었다. 31대 미국 대통령 허버트 후버도 Huver에서 Hoover로 고쳤다. 45대 미국 대통령 도널드 트럼프도 조부 대에서 Drumpf를 Trump로 고쳤다. 그리고 독일령이나 오스트리아령이던 슬라브 문화권의 독일계 주민들은 해당 사건을 계기로 자신의 독일식 성씨를 -스키 돌림의 슬라브풍 성씨로 바꾸는 경우가 많았으며, 독일식 성씨를 고수하던 이들은 자발적으로 떠나거나 강제로 추방당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 서양에서 다른 국가로 이민하는 사람이 본래 자신의 성과 이름을 해당국 언어에서 대응되는 이름으로 변경하는 경우가 가끔 있다. 예를 들어 만약 'Friedrich Johansen'(프리드리히 요한젠)이라는 이름을 가진 독일인이 있는데, 이 사람이 미국 시민권을 취득하면서 'Frederick Johnson'(프레더릭 존슨)이라고 개명하는 식. 대개는 본래 가지고 있던 철자를 유지하지만 종종 이런 식으로 바꾸는 경우도 있다. 사실 이는 나라마다 발음이 좀 다를 뿐이라고 생각하거나, 같은 유래의 유사한 이름으로 번역하는 것에 가깝다. 그리고 미 대륙 초창기에 이주한 러시아 등 동구권 국가 사람들도 차별을 우려하여 나타샤는 나디아로, 토마시 같은 폴란드식 이름은 톰(토머스)으로 개명했으며 아예 앤더슨 같은 영어권 성으로 개명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 사실 동양에서도 한자 성명을 쓰는 사람들은 한중일간 이민시에 한자의 자형을 고치거나 독음을 고치기도 한다. 어쩔 수 없는 게, 중국 행정시스템에는 정체자 입력이 안 되고, 일본은 구자체 사용이 가능하긴 하나 현지인이 알아보기 어려운 등 제약이 많다. 반대로 중국이나 일본에서 한국으로 건너오는 경우에는 정체자로 바꾸던가, 아예 한자표기 자체를 포기하고 서양인들처럼 로마자 표기만 해야 하고. 또한 독음의 경우에도 지들 편한 대로 읽어버리다 보니 매번 후리가나한어병음을 붙여야 되는데, 상당히 귀찮은 일인데다 수기입력이 아닌 경우 불가능하다. 반대로 한국의 경우에는 한글전용이 된 지 오래라서, 한자표기를 쓸 일이 없기에 현지식 독음을 한글이나 로마자로 표기할 경우 문제는 없지만. 다만 대한민국 귀화나 외국인등록시에 로마자표기가 아닌 한자표기를 선택하면, 알아서 한국식 독음으로 바꿔버린다.[예를들어]
  • 앙겔라 메르켈독일 총리의 할아버지는 폴란드인으로 독립운동에도 가담했던 루드비크 마리안 카지미에르차크(Ludwik Marian Kaźmierczak, 1896~1959)인데, 원래 비엘코폴스키에포즈난(Poznan - 1차 대전 전까지는 독일 제국포젠)에서 살았지만 이후 독일 베를린으로 이주하여 경찰로 살았으며, 1930년 이름을 독일식인 루트비히 카스너(Ludwig Kasner)로 고쳤다.
  • 화가 프리다 칼로의 아버지는 빌헬름이라는 이름을 가진 독일인이었지만, 멕시코에 이주하면서 빌헬름의 스페인식 이름인 '기예르모'로 이름을 고쳤다.
  • 지휘자 카를로스 클라이버도 아버지가 독일인이지만 아르헨티나로 이민을 갔기 때문에 칼 → 카를로스가 되었다.
  • 프랑스 시인 기욤 아폴리네르는 빌헬름 아폴리나리스 데 코스트로비스키 (Wilhelm Apollinaris de Kostrowitzki)라는 폴란드식 이름이 본명이었는데, 가족이 프랑스로 이주하면서 이름을 프랑스식으로 고쳤다.
  • 출생 당시 프랑스령 지역에서 태어난 이탈리아 작곡가 주세페 포르티누노 프란체스코 베르디의 출생 증명서는 '조셉 포르튀냉 프랑수아 베르디'라는 프랑스식 인명으로 기록되어 있다.
  • 작곡가 게오르크 프리드리히 헨델은 영국에 귀화하면서 이름을 영국식인 조지 프레드릭 헨델로 고쳤다.
  • 신해혁명으로 청나라가 무너진 후 혁명군의 만주족 학살을 피해 겨우 살아남은, 만주족은 대부분 한족식으로 성씨를 바꿨다. 주로 본래의 만주족식 성씨에서 뜻이나 발음을 따와서 중국식 성씨를 짓는 경우가 많았고, 일부는 만주족이 중원 입관 이후 자신의 이름 첫글자를 한족식 성씨처럼 쓰던 풍습인 수명성(隨名姓)에서 따와 중국식 성씨를 짓기도 했다. 조상이 만주족으로 귀화한 한족인 경우 조상의 한족식 성씨를 썼으며, 조상이 정묘호란이나 병자호란청나라로 끌려가 만주족에 동화된 조선인 포로였던 경우에는 조상의 조선식 성씨를 썼다. 아버지가 만주족이고 어머니가 한족 출신 인 경우에는, 아버지의 만주족식 성씨에서 뜻이나 발음을 따온 한족식 성씨를 쓰는 경우와 어머니의 한족식 성씨를 쓰는 경우가 공존했다.
  • 나폴레옹 시기 프랑스 장군인 장 바티스트 베르나도트스웨덴의 왕위 계승자가 되면서 이름을 칼 요한 밥티스트 율리우스로 개명하고 나중에 칼 14세 요한으로 즉위했다.

8.3. 번역 차원

9. 한국

한국에서도 귀화인들에게 한국식 이름을 만들도록 시키긴 한다. 한국 민법에서는 1993년 이후 호적에서의 성명 글자를 성을 제외하고 5글자로 제한시켰기 때문이다. 다만 1990년대 초까지만 해도 한국으로 귀화하러 오는 외국인의 수가 적었기 때문에, 특별히 귀화인을 겨냥했다기보다는 이름이 긴 사람이 속속 생겨나자(예를 들면 박초롱초롱빛나리) 업무를 처리하기 난감해진다는 이유 때문에 행정편의주의적인 관점에서 이름의 글자수를 제한시키기는 한다. 한자, 한글 불문.[108] 없는 성을 만들어도 된다는 게 다르고 그렇기 때문에 일본인이 귀화할 경우 일본인으로써의 성씨를 그대로 써도 되기는 하다. 대신 한자를 한국 한자음이 아닌 방식으로 읽는 것은 엄격하게 금지된다.[109]

예를 들어 사토 마사요시()라는 일본인이 한국으로 귀화를 할 경우, 원칙적으로는 성명을 한글 '사토마사요시'라고 써야 하며,[110] 마치 인명용 한자 이외의 한자를 이름에 썼을 때처럼 한글로만 이름을 표기해야 한다. 佐藤을 성으로, 正義를 이름으로 등록시켜 사용할 수 있지만 이 경우에는 성명을 한국 한자음대로 무조건 '좌등정의'로 읽어야 한다. 이런 식으로 일본 성씨를 한국식으로 쓰는 예가 양산시에 거주하던 망절씨.[111] 호사카 유지도 귀화하면서 자신의 이름을 발음 그대로 쓰고 있는데, 공문서에는 순한글 성씨 및 이름으로 등록되어 있다.

네이버 지식iN에 '창씨~'등으로 검색하면 '제 이름은 ○○○인데, 제 창씨명이 궁금해요'라는 질문이 다수 나온다. '창씨'라는 것은 (성)씨를 '만든다란' 뜻이기에 창씨명이 '일본식 이름'이란 뜻이 아니라는 것을 차치하고서라도, 애초에 이름이란 고유명사이니 이름이 홍길동이면 일본에서도 홍길동(에 가까운 발음)이라서 굳이 일본식으로 음독/훈독할 필요는 그닥 없다. 현재는 洪吉童(ホン·ギルドン) 또는 シム·チョン(沈淸)처럼 쓰는 게 보통. 일본에 완전히 정착해서 자식 낳고 산다면 몰라도.[112] 사실 굳이 바꾸는 경우는 개인 취향 문제이거나 현지에서 상용하지 않는 한자이거나 해서 발음을 곤란해 한다거나 아니면 공식 성명은 아니지만 현지인과 친근하게 교류하기 위해 별칭으로써 재미삼아 만들어 붙이는 경우이다. 또는 드물지만 업무상/학술적인 이유로 불가피하게 재특회가 활개치는 지역에서 체류해야 하는 경우에도 (일본인으로 위장하기 위해)하는 경우도 있다 한다. 사실 그런 극단적인 경우는 아니더라도, 외지인 티가 나면 이지메하거나 배척하여 끼워주지 않으려고 하는 경우도 있다 한다. 물론 일본의 조직에 끼어들 일이 없는 단기체류자는 해당사항이 없겠지만.

이는 미국 등 서양권 국가로 유학/이민/귀화한 사람들 중에서도[113], 가끔 로마자로 한국이름을 표기할 수 있음에도 "제임스 리" 라던지 "데이비드 킴" 같이 현지식 이름을 지어다 붙이는 경우[114]가 있는 것과 같다. 마찬가지로 한자를 파자해서 일본식/중국식 성명표기를 하고 싶으면 하면 되고, 하기 싫으면 안하면 된다. 온전히 상황과 주변 환경, 대인관계에 따른 개인의 선택일 뿐이다.

이름을 바꾸는 것은 아니지만 한자문화권 사람이 자신의 이름을 소개할 때 일본식 한자음을 빌어서 하는 경우는 많다. 예를 들어 이름이 성준이라면 '세이타의 成에 슌스케의 俊입니다.' 하는 식으로. 이건 단순히 표기법이나 뜻을 이해시키기 위한 차원을 넘어서 각종 지원서 등의 공문서에서는 비록 발음은 한국식, 중국식으로 후리가나를 달더라도 한자식 이름을 쓰는 외국인이라면 이름을 한자로 써야 하기 때문이다. 이는 일본 내에서 한자와 독음이 잘 매치가 안 되는 성명을 가진 사람의 겅우에도 똑같이 한다. 단 이 경우는 다른 사람의 이름보다는 대중적으로 쓰이는 훈독음을 알려준다.

사실 저런 한국식 한자성명의 일본식/중국식 독음에 대한 문의가 넘치는 이유는, 해당국에서는 한자성명 사용자는 타국인이라 할지어도 한자 표기를 강요하며, 그렇게 표기된 한자를 현지인들은 자기들 멋대로 읽기 때문이다. 한국에서는 중국, 일본국적/출신 체류자의 성명이 한국식 한자음으로 읽히는 것을 원치 않는다면 한자 표기를 아예 지우고 로마자 표기나 순한글 표기가 가능한데, 무슨 이유에서인지 중국과 일본은 허락하지 않는다. 기본적으로는 영어 표기가 우선이지만, 한자를 쓰는 경우가 이렇다는 것. 그나마 일본은 재류신고 등 공문서를 제외하면 한국식 독음대로 가타카나 단독 표기를 하는 것은 가능하나, 한어병음 단독 표기를 절대 불허하는 중국답이 없다.

10. 번역상의 표기

참고로 서양의 인물은 언어마다 이름을 다르게 표기하는 경우가 많고[115] 지금도 교황이나 왕족의 이름을 적을 때는, 요한 바오로 2세영어로 쓸 땐 John Paul II, 이탈리아어로 쓸 땐 Giovanni Paolo II, 우크라이나어로는 Іван Павло II라고 쓰는 것과 같이 언어마다 다르게 표기하는데 이 경우는 창씨개명처럼 취급하기 곤란할 듯하다. 호적상의 사람 이름을 고치는 게 아니라 그냥 과거 유럽의 관례를 따라 이름을 해당국 국어로 '번역'한 것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마리 앙투아네트는 원래 마리아 안토니아였다. 그냥 마리아가 프랑스에서는 마리, 영국에서는 메리라고 자동으로 불리게 되었던 것. 같은 원리로 그리스 로마 신화의 신/인물 이름들은 유럽권에서는 자국의 언어(표기 방식)로 '번역'된다.

따라서 만약 민족국가 형성 전, 여러 국가의 역사에 영향을 미친 인물의 이름이라면 차라리 당대의 공용어 격인 라틴어(또는 그리스어)로 표기하는게 중립적이라고 볼 수 있다. 그 대표가 카롤루스 대제. 좀 경우는 다르지만 크리스토퍼 콜럼버스도 유사한 사례이다.

한편 이런 '번역식' 인명표기는 한자문화권에서도 똑같다. 현대에는 원어를 존중하여 표기하는 경우가 많지만[116], 근대 이전 인명/지명은 그런 것 없이 자국의 방식대로 읽고 쓰는 게 보통이다. 현대 한국어에서 일본어 한자 읽기가 예외적이라고 할 수 있지만, 이건 역사적인 이유가 겹치면서 생긴 특수한 예이고, 한국도 근대 이전에는 일본의 인명/지명도 예외없이 한국식으로 읽었다. 근대 이전은 풍신수길, 근대 이후는 이등박문을 생각하면 된다. 중국의 경우도 19세기 말~20세기 초 인물들은 한국식 독음과 중국식 독음 모두 통용된다. 표기법상으로야 신해혁명 이후 인물은 중국식 독음 표기가 원칙이지만. 대략 이홍장원세개, 양계초 이후 인물들이 여기 해당한다. 손문, 장개석, 모택동이 대표적이고, 이들보다 후대 인물로 20세기 후반~21세기 초엽까지 활동한 등소평, 조자양, 강택민도 한국식 독음으로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최근 한국에서는 호금도, 습근평중국인들의 이름이 거의 한국식 독음으로 불리지 않는다. 단, 조선족들이나 북한에서는 여전히 한국식 독음으로 부르고 있다. 또 영화배우의 경우도 한국식 독음이 널리 퍼져 있다.

11. 참고 문헌

  • 창씨개명정책과 조선인의 대응(구광모, 중앙대학교) - 배경, 전개, 목적 부분.
  • 동화정책 사례연구 -창씨개명을 중심으로- (구광모, 중앙대학교) - 배경 부분.
  • '족보'와 '창씨개명' -김달수의 <族譜>와 가지야마 도시유키의 <族譜>를 중심으로.(박제홍, 김순전, 전남대학교)
  • 창씨개명-일본의 조선지배와 이름의 정치학(미즈노 나오키, 정선태 역, 산처럼 2008)
  • 식민지 조선과 대만의 창씨개명, 개성명 비교 연구.(이승일, 한국외국어대학교)
  • 굿모닝 예루살렘(기 들릴) - 퀘벡 사례 관련.


[1] 허나 결국 본관도 성과 세트메뉴가 되었다. 그러니까 안동 김씨 김XX가 출세하여 서울에 상경하여 대대로 자리를 잡아도 특별한 일이 벌어지지 않는다면 천년만년 안동 김씨이지 서울 김씨가 된다든가 하는게 아니라는 것. 물론 후삼국 시대 같은 혼란기에는 얘기가 좀 다르긴 했다.[2] 참고로 풀네임은 "도쿠가와 지로사부로 미나모토노 아손 이에야스(徳川次郎三郎源朝臣家康)"[3] 당장에 3대 천하인들도 보면 씨를 바꾼 경우가 많았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바꾸기 직전의 씨는 하사바였고 또 그 이전에는 기노시타였다. 그밖에도 후지와라, 헤이지 등을 쓰기도 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도 어릴 적에는 마츠다이라 이에야스였다.[4] 일본은 2021년 현재까지도 정치적 목표가 엘리트주의, 민족주의, 보수주의이며 외국인의 시민권 획득에 큰 제한을 두고있다.[5] 조선인 뿐 아니라 중국인, 오키나와인, 심지어 관서 출신 일본인과 청각장애인들도 상당수 살해당했는데, 이들 역시도 어차피 외형적 차이는 크지 않았고 저 발음들은 못 했기 때문이다. 저런 극단적인 민족주의의 관점에서도 자기들 나름대로의 선의의 피해자가 생긴 셈이니 말 다 했다.[6] 치안을 담당하는 곳[7] 대조적으로 대만에선 기존의 폐성창씨를 그대로 추진했는데, 대신 강제가 아니었다.[8] 초대 덴노인 진무 덴노가 일본을 건국한 것을 기념하는 날. 한국의 개천절 같은 기념일이다.[9] 다만 황도유림(천황과 일본제국을 위해 헌신하라는 유학을 따르는 유림들)의 세력이 컸던 경상북도에서는 유림들의 참여율이 초기, 후기 가릴 것 없이 높게 나타난다. 2월에만 전체의 50%가 넘는 창씨개명이 경상북도에서 접수되었다. 초기 경상북도의 유달리 창씨개명 참여율이 높음도 이 때문인 듯. 창씨개명이 완료될 때까지 전체 경북 유림 2만 6842명 중 2만 6670명이 창씨에 참여하였다.[10] 지금의 대구광역시, 강원도 영월군 상동읍 덕구리 및 천평리, 충청북도 괴산군 청천면 삼송리 포함, 울진군 전역 및 영양군 수비면 본신리 제외[11] 지금의 세종특별자치시 부강면 포함, 괴산군 청천면 삼송리 제외[12] 지금의 대전광역시, 세종특별자치시(부강면 제외) 포함, 논산시 연무읍 고내리, 황화정리, 마전리, 봉동리, 안심리, 신화리 제외[13] 지금의 서울특별시, 인천광역시(옹진군 백령면, 대청면, 연평면 (서해5도) 제외) 포함, 연천군 신서면 제외[14] 현재의 인천광역시 옹진군 백령면, 대청면, 연평면 (서해5도)을 포함[15] 경기도 연천군 신서면, 경상북도 울진군영양군 수비면 본신리 포함, 영월군 상동읍 덕구리 및 천평리는 제외[16] 지금의 부산광역시, 울산광역시 포함[17] 지금의 광주광역시, 제주특별자치도 및 전라북도 부안군 위도면 포함[18] 지금의 충청남도 금산군 전역과 충청남도 논산시 연무읍 고내리, 황화정리, 마전리, 봉동리, 안심리, 신화리 포함, 부안군 위도면은 제외[19] 호주의 소재불명 등 창씨를 할 수 없는 호적 제외[20] 朝鮮姓名復舊令에依하야名復舊 檀紀四貳七九年拾貳月貳拾四日改訂함(조선성명복구령에 의하여 이름을 복구함. 단기 4279년 12월 24일 개정함.)[21] "한국식 이름을 가졌던 사람이 일제강점기 창씨개명으로 일본식 이름을 가지게 된 경우라면 성명복구령에 의하여 당연히 종전의 한국식 이름으로 복구되었어야 하는데 아직까지도 창씨개명된 일본식 이름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면, 그 창씨명은 이미 무효로 된 이름이므로 개명의 절차에 따라 개명할 사항이 아니고 호적정정의 대상으로서 호적공무원이 직권정정절차에 따라 정정하여야 할 사항이고, 다만 그러한 창씨개명의 사실이 호적(제적)상에 명백히 나타나 있지 아니한 때에는 사건본인은 그러한 사실을 증명하는 서면을 첨부하여 직권정정을 촉구하는 의미의 호적정정신청을 본적지 시(구)·읍·면의 장에게 제출할 수 있을 것이다."(구 호적선례 2-339).[22] 그러나 이는 사실 기만에 가깝다. 이미 일본에서도 성씨는 거의 합쳐져 있었기에 실질적으로 씨고 성이고 다 갈아지는 것이나 다름없다.[23] 사실 이 우려가 기우는 아니였던것이 조선인 징병이 시행된 이후 징병된 조선인들이 일본군에서 배운 기술이나 무기등을 가지고 탈출해 독립군측에 도움을 준 경우도 많았고(당장 지청천 등이 해당 케이스다.) 쁘락치가 되는 경우도 많았다.[24] 이상하지만은 아닌 게 친일파들 중에선 진짜 일본이 좋거나 동경해서가 아닌 일본이 대세이기에 일본의 편을 선 기회주의자들도 굉장히 많았다. 또한 그런 사람들 중 많은 사람들도 일반 조선인들처럼 일본인 자체를 마치 일본인들이 조선인 보듯이 보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데 그렇게 바라본 일본인이 자신이 되라니, 일부 기회주의적 친일파들에게도 창씨개명을 통해 일본인이 되라는 말이 그리 달갑진 않았다.[25] 무려 300년 이상을 지배받았으니 어쩔 수 없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들 모두 스페인어를 아직도 쓰고 이름도 스페인 이름이거늘, 전쟁까지 벌이며 독립했다. 스페인이 벌이던 차별에는 이들도 반발했고 시몬 볼리바르 같은 남미 독립 영웅도 심지어 스페인 계 핏줄이 흐르는 혼혈귀족임에도 스페인과 남미는 다른 나라라고 주장해 독립전쟁을 이끌었다. 필리핀 독립을 이끌던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수백여 년 지나도 일본에 대하여 일본어나 이름은 낯설지 않아도 차별이 이어질 테고 결국 이렇게 될 가능성이 높다.[26] 현재 이들은 고인이거나, 살아 있더라도 최소 70대 후반의 할아버지, 할머니들이다. 1990년대까지만 해도 창씨개명 피해자들 중 중년층도 제법 되는 편이었으나, 이들이 65세를 넘는 2000년대 후반을 기점으로 창씨개명의 피해자들은 전원 노인이 되었으며, 왠지 남자들이 많아 보이는 것은 당시 취학률은 남자 쪽이 여자보다 더 높았기 때문이었다.[27] 조선시대 당시 대표적인 명문가 중 하나로 유명인물로는 권근·권람·권율 등이 있다.[28] 이를테면 안동의 안(安)과 권(權)을 따서 안켄(安權)이라 한다거나.[29] 본명 심재설. 야인시대의 등장인물로도 나왔던 친일반민족행위자로서 심영이라는 예명으로 알려져 있다.[30] 소설 비명을 찾아서의 주인공 기노시타 히데요(木下英世 목하영세)도 조선식 성은 박씨다.[31] 현대 일본에서는 國 대신 国을 쓰지만 당시에는 國이 표준이었다. 그리고 지금도 일본에서 인명에서는 国을 안 쓰고 國을 쓰는 경우가 있다.[32] 그러나 전주 이씨를 제외한 다른 본관의 이씨 집안들은 창씨개명할 당시에 자나 자 등을 일본식 이름 작명에 사용하지 않았다는 의견도 있다.[33] 1930~40년대에 태어난 할머니 이름이 춘자(春子), 방자(方子)와 같은 이름이 많은 것도 그 이유이다. 한국인이 듣기엔 촌스런 옛날 이름 이지만 일본어로 바꾸면 하루코, 마사코 등 지극히 평범한 여자아이 이름이 되기 때문.[34] 발음만 일본식으로 바꾸면 성씨를 바꾸지 않아도 됨.[35] 성과 이름을 일본식으로 읽으면 야나기 다이코인데 일본 현지에서도 통할 정도.[36] 다만 이 사람은 친일 경력 덕에 검찰에서 기소유예 처분을 받았다.[37] 일본인임에도 불구하고 1984년에 대한민국문화훈장을 추서했을 정도.[38] 물론 정황상 정말 같은 종가로 오인한 것이 아니라, 모르는 척 하면서 비꼬려고 한 행동일 가능성이 다분하다. 상식적으로 종가인지 아닌지 족보를 다 따져 볼 텐데, 몰랐을 리가.[39] 재일교포와 상관없는 토호쿠 지방에서 종종 보이는 성씨. 실존인물로는 전 야구선수 콘 히로아키 등이 있다.[40] 음독 그대로. 세키가하라 전투 때에 근처에 난구산(남궁산,南宮山) 이 있어서 일본인들은 한두 번 정도는 들어 본 지명이다.[41] 훈독(미나(미)+미야)[비개명] [비개명] [비개명] [비개명] [비개명] [비개명] [비개명] [비개명] [비개명] [51] 倉衛는 의미상으로는 관계 없는 한자이지만, '먹어라'라는 뜻인 喰らえ와 독음이 같다.[52] 여담으로 해당 성씨의 발음은 이와지(いわじ) 내지는 이와니(いわに)로 읽히게 된다.[53] 지금의 70대 후반~80대 초반. 대표적으로 쓰키야마 아키히로(月山明博)라는 이름으로 유명한 17대 대통령 이명박이 이 케이스이다. 단, 이명박은 오사카 태생의 재일 한국인이었다.[54] 링크된 인물과는 동명이인으로, 일제강점기 당시 음악인으로 활동한 인물이다.[55] 링크된 인물과는 동명이인인 1888년생 인물로, 일제강점기 당시 경찰로 활동하였다.[56] 링크된 인물과는 동명이인인 1899년생의 인물로, 일제강점기 당시 사회주의 계파 사회운동가 겸 언론인으로 활동했다.[57] 링크된 인물과는 동명이인인 1893년생의 인물로, 일제강점기 당시 관료로 활동하였다.[58] 또는 당시 서울 용산역(山驛)에서 "전투에서 전사하여 기차에 실려 돌아오는 황군 장병의 시신에서 깊은 감명을 받아 슬퍼했다"는 경험을 토대로 용산역(山驛)을 이름에 반영했다는 의견도 있다.[59] 김억 시인은 김소월 시인의 스승이었다. 김소월의 유명한 시 '삼수갑산 - 차안서선생삼수갑산운'의 '안서선생'이 스승 김억을 일컫는다. 번역하면 '안서선생께 보내는 삼수갑산 운(답시)'로, 김억의 시 삼수갑산에 대한 답시임을 나타낸다.[60] 전자는 일본에서 일본인으로 위장해 생활할 당시에 사용하던 이름으로, 후자는 갑신정변 실패 이후 위험에 처하자 갑신정변을 주도한 개화파 세력들과 함께 떠난 일본행 망명길에서 승선한 지토세마루(千歳丸)호가 일본에 도착한 이후헤어졌던 선원 쓰지 도쥬로(辻藤十郎)가 지어준 이름으로 알려져 있다.[61] 링크된 인물들과는 동명이인1873년생 인물로, 일제강점기 당시 관료로 활동하였다.[62] 1877년생의 인물로, 일제강점기 당시 관료로 활동했다.[63] 1869년생의 인물로, 일제강점기 당시 관료로 활동했다.[64] 1904년생 인물로, 일제강점기 당시 법조인으로 활동했다.[65] 1905년생 인물로, 일제강점기 당시 언론인으로 활동하였다.[66] 김옥균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갑신정변이 실패한 이후 떠난 일본행 망명길에서 지토세마루(千歳丸)호의 선원 쓰지 도쥬로(辻藤十郎)가 지어준 이름으로 알려져 있다.[67] 박정희의 창씨개명이 오카모토 미노루(岡本 実)나 마쓰모토(松本)라고 알고 있는 사람들도 있는데, 이 창씨명들은 북한이 그의 친일행적을 비판하려는 목적으로 퍼뜨렸다는 주장부터, 일부 전문가들도 "그가 자신의 본관인 고령(高霊)과, 본명인 정희(正熙)의 "正"등을 가져와 본관과 본명을 일부 유지하여 "高木正雄"라고 창씨개명을 한 마당에, 굳이 오카모토 미노루와 마쓰모토 등으로 2차 개명을 할 이유가 없다"는 것과 이러한 2차 개명을 했다는 것을 입증할 확실한 증거가 없다는 점을 들어 이는 낭설에 불과하다는 주장도 있기 때문에, 따라서 그가 실제로 창씨개명 시기에 정식으로 작명한 일본식 이름은 "高木正雄" 하나뿐인 것으로 추측된다.2012년 신문기사[68] 링크된 인물과는 동명이인1883년생 인물로, 일제강점기 당시 관료로 활동하였다.[69] 1893년생. 일제강점기대한민국의 법조인으로 활동한 인물로, 1919년 사이토 마코토 총독을 암살할 목적으로 자신의 집에 찾아와 자금을 요구하던 의열단윤병구, 유석현, 김지섭 등의 독립운동가들을 일본 경찰에 밀고하여 체포하도록 하였으며, 1927년에는 일본인 교장을 배척하는 운동을 벌였던 박종운, 박일봉 등 주도 학생들의 재판에 판사로 참여, 같은 달 비밀결사 단원 김응선 등을 비롯한 독립운동가들이 체포되어 열린 재판에서 판사로 참여, 1931년에 일어난 광주학생운동을 계획하고 전개한 임종만, 고인환 등의 학생들의 검사 측의 항고로 열린 항소재판과 이들에 대한 면소결정을 파기하여 본래 법원으로 돌려보냈고, 1932년에는 무장 독립운동 단체인 국민부, 군사부의 김형건, 박차석 등의 독립운동가들이 체포되어 열린 재판에 참여하는 등 여러 친일 행적을 보인 인물로, 이러한 경력으로 1934년에 일본 정부로부터 훈 5등 서보장을 수여받는 등 일본 정부로부터 여러 차례 훈장을 받은 인물이다.[70] 1879년생의 인물로, 일제강점기 당시 관료로서 활동했다.[71] 링크된 인물과는 동명이인1900년생 인물로, 일제강점기 당시 교육인으로 활동하던 인물이다. 여담으로, 친일파 김활란과는 학교 선후배 관계이다.[72] 링크된 인물과는 동명이인1890년생 인물로, 일제강점기 당시 경찰로 활동했던 인물이다.[73] 1942년 일본으로 밀항하여 해방 이후에도 이 이름을 통명으로 삼았고, 일본에서 사업을 하는 동안 사실상의 본명으로 사용했으며, 현재도 일본에서는 이 이름을 쓴다. 그의 아들들 역시 일본 통명이 있다.[74] 링크된 인물과는 동명이인1890년생 인물로, 일제강점기 당시 관료로 활동한 인물이다.[75] 링크된 인물과는 동명이인으로, 일제강점기 당시 기업인으로 활동한 인물이다.[76] 링크된 인물과는 동명이인1889년생의 인물로, 일제강점기 당시 관료로 활동했다.[77] 중앙일보 연재 청와대비서실[78] 링크된 인물과는 동명이인1897년생의 인물로, 일제강점기 당시 관료로 활동하였다.[79] 해발 152 m짜리 야트막한 산이지만, 헤이조쿄를 둘러싼 야마토 3산 중 가장 신성시되었다. 만요슈에서도 가구산을 자주 언급하며, 오늘날 일본도 중요성을 인정하여 역사적풍토특별보존지구로 지정하여 보존한다. 지금도 종교인들이 종교적 목적으로 가구산에 오르곤 한다. 진무 덴노가 도읍했다는 우네비산도 아니고 하필 가구산에서 이광수가 성을 따왔음은 가구산이 야마토 3산 중 가장 특별한 곳임을 알았다는 증거이다.[80] 그러나 이 설을 반박하는 의견 중 하나로, 당시 이광수가 자신이 살던 이북 지역의 묘향산(妙香山)의 지명을 가져와 가야마(香山)로 창씨하였다고 주장하는 의견도 있다.[81] 일제강점기 당시 박춘금과 함께 친일성향 정치인과 친일 극우 정치깡패로 활동했던 사람이다.[82] 1번 항목의 인물.[83] 링크된 인물과는 동명이인1897년생 인물로, 일제강점기 당시 목회자로 활동하였다.[84] 족보이름은 조국현이다.[85] 족보이름은 김지식이다.[86] 족보이름은 이희재이고 실제로 형제들은 모두 '만'자 돌림을 쓰고 있다.[87] 본명은 한성욱이고 족보이름은 동숙이다.[88] 족보이름은 심용석이다.[89] 족보이름은 정현수이다.[90] 이 사람의 아들.[91] 링크된 인물과는 동명이인1893년생의 인물로, 일제강점기 당시 은행원으로 활동하였다.[92] 링크된 인물과는 동명이인1886년생의 인물로, 일제강점기 당시 관료로 활동했다.[93] 학병으로 징집되었을 당시 일본 당국에 의해 작성된 육군전시명부에 창씨개명한 성 張安 옆에 가타카나로 하리야스(ハリヤス)라는 독음이 적혀져있다.[94] 링크된 인물과는 동명이인인 1889년생의 인물로, 일제강점기 당시 경찰관료로서 활동한 인물이다.[95] 지토세마루 선장 쓰지 가쓰자부로(辻勝十郞)의 아들로, 김옥균과 유혁로에게도 일본식 이름을 직접 지어줬다.[96] 1892년생.[97] 1895년생.[98] 일제강점기에 활동하였던 기업인이다.[99] 1885년생의 인물로, 일제강점기 당시 관료로 활동했다.[100] 가령 유명한 역도 선수 나임 술레이마노프(Наим Сюлейманов)는 나움 샬라마노프(Наум Шаламанов)로 변경되었다. 튀르키예로 탈출하고 나서 이름을 나임 쉴레이마놀루(Naim Süleymanoğlu)로 바꿨다. 해당 인물은 2017년 11월 사망.[101] 혈통상 불가리아계였지만 조상이 오스만 제국 시절 이슬람교로 개종하여 대대로 무슬림으로 살아가게 된 포마크인 또한 독립국가 불가리아의 무슬림 탄압을 피해 튀르키예계와 함께 지금의 튀르키예 땅으로 이주하는 경우가 많았다.[102] 공교롭게도 튀르키예인의 가까운 친척뻘 민족인 아제르바이잔인들 또한 독립국가 아제르바이잔에 사는 이들은 자신들을 지배했던 러시아 제국소련의 영향을 받아 튀르키예식(아제르바이잔식) 이름과 슬라브식 성씨를 쓴다.[103] 단순히 스웨덴의 지배를 받은게 아니라 스웨덴 입장에서는 건국 초부터 원주민인 핀인들을 정복하면서 편입된 그냥 '본토의 일부'였다.[104] 고대 유대인 사회에서는 성씨라는 개념이 없었는데 디아스포라 이후 유럽에 정착하면서 성씨 개념을 받아들이고 아무래도 현지에서 가장 익숙한 게르만/슬라브식 성씨를 만든 것이다.[예를들어] 마오쩌둥이란 성명을 가진 중국인이 대한민국 외국인등록증에 "모택동(毛澤東)"이라 표기되는 게 싫다면 "毛澤東"으로 신고하면 안 되고 "Mao Zedong" 이라고 신고해야 된다. 후자로 신고할 경우 한국 체류 서양인들처럼 한글/한자 표기는 되지 않고 로마자만 남는다.[106] 이탈리아어 위키백과나 프랑스어 위키백과에서도 후안 카를로스 1세의 항목명은 Juan Carlos이다. 번역명을 썼다면 Giovanni Carlo나 Jean Charles로 기재되었을 것이다. 단, 폴란드어 위키백과에서는 Jan Karol이라는 번역명으로 기재되었다.[107] 영어권에서 에스파냐 국왕의 이름을 지칭할 때는 이사벨 2세까지는 번역명을 사용하고, 후안 카를로스 1세부터는 원어 그대로 표기한다. 그 사이에 재위한 알폰소 12세알폰소 13세도 원어 그대로 부르기는 하지만, 이 경우는 알폰소에 대응하는 영어 이름이 원래부터 존재하지 않아 번역명을 사용할 수 없었다.[108] 예외 규정이 둘 있는데, 1993년 이전 호적에 등록한 자, 그리고 한국 국적자와 외국 국적자의 혼인으로 출생한 자의 경우 외국 국적자 측의 성을 따르기로 결정하여 외국식 이름으로 한국 호적에 등록시킬 때는 5글자 초과가 가능하다.[109] 대한민국에서는 법률로 인명용 한자를 지정하는데, 인명용 한자의 음까지 같이 규정한다.[110] 귀화하는 외국인의 경우 순한글 성씨도 가능하다.[111] 아미키리 이치로(網切一郞) 씨가 한국으로 귀화하면서 이름의 한자 표기를 그대로 유지하고, 한국식으로 읽은 '망절일랑'을 이름으로 사용한 케이스이다.[112] 그 경우도 귀화하지 않으면 한국 이름 그대로 쓰는 사람도 많다. 특히 성인이 돼서 넘어간 케이스. 당장에 김무영 같이 일본에 완전히 정착했는데도 한국 이름을 꿋꿋이 유지하는 사례도 있다.(이 사람은 부인이 일본인인데다가 미필이라 한국에 돌아오면 군대에 가야하기 때문에 그걸 회피하기 위해서 일본에 정착했을 수도 있다.)[113] 혹은 장기체류 하지 않더라도 그냥 재미삼아서[114] 물론 이런 경우는 사실 발음 문제가 크다. 구미권에서는 ㅓ나 ㅡ같은 모음의 발음을 어려워하기도 하고(우리에게 친숙한 언어 대부분은 ㅡ발음이 없음), 한국 이름 중 현지어로 이상하게 들리는 글자가 있는 경우(석-suck, 범-bum, 일-ill 등) 등이 있다.[115] 예를 들어 프랑스잔 다르크(Jeanne d'Arc)는 영어로 Joan of Arc로 적는 경우가 많다. 잔 다르크가 현대인이었으면 프랑스어 표기 그대로 적었을 텐데 옛날 사람이거나 현대의 인물이라도 왕족일 경우에는 전통적인 방법대로 이름을 '번역'한다(…).[116] 물론 쿨하게 씹고 전통적인 방식대로 '번역'하는 경우도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