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盧周鳳1901년 - 1945년 10월 15일(음력 9월 10일)(향년 45세)
일제강점기, 미군정 초에 활동한 경찰공무원. 친일반민족행위자로 악명높은 고문 경찰이었다.
2. 생애
1901년 대한제국 전라남도 나주시에서 노재승(盧在昇)의 3남으로 태어났다. 광주농업고등학교를 졸업한 노주봉은 1920년대 중반 전후로 경찰시험에 합격해 경찰이 되었다.[* 조선총독부가 발간한 총독부 직원록에 의하면 1927년 노재승이 전라남도경찰부 보안과 순사부장으로 승진한 기록이 남아있다.노주봉은 1929년 광주학생항일운동, 1932년 전남노농협의회 사건, 1942년 무등회 사건 및 제2차 광주학생항일운동에서 관련자들을 수사, 고문한 것으로 악명이 높았다.[1] 1945년 일본 제국이 패망할 때 경시까지 승진했다.
1945년 8월 15일 광복 이후 미군이 38선 이남으로 진주하면서 군정청 경찰위원 김의택(金義澤), 김정택(金正澤), 홍용구(洪鎔球), 조희인(曺熙仁) 등과 함께 경찰위원으로 임명되었다.
1945년 10월 15일, 노주봉은 해방 직후 광주시(현 광주광역시)에서 활동하고 있던 광주청년단의 행동대원 김영일(金永一), 김이현(金利鉉)과 화랑단 정판국(鄭判國)에게 권총으로 이마와 복부를 맞아 사망했다.
3. 기타
2004년 발표된 대한민국 정부 발표 친일반민족행위자 명단과 2009년 민족문제연구소에서 발간한 친일인명사전에 노주봉의 이름이 올라와 있다.[1] 1942년 제2차광주학생항일운동에 참여한 기한도, 윤봉현, 강한수을 고문해 석방 3일만에 사망하게 만들었고, 노주봉의 밑에서 학생들을 고문한 친일경찰 강홍섭이 해방 직후 암살될 정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