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19-05-26 17:17:34

미군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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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조선 미국 육군사령부 군정청
(在朝鮮美國陸軍司令部軍政廳)
약칭 미군정청 (美軍政廳)

USAMGIK
(United States Army Military Government in Korea)
파일:1900px-Flag_of_the_United_States_(1912-1959).svg.png 파일:Seal_of_the_United_States_Army_Military_Government_in_Korea.svg.png
국기 문장
미군정(美軍政)
1945년 9월 8일 ~ 1948년 8월 15일
성립 이전 해산 이후
일본령 조선 대한민국 제1공화국
위치 한반도 38도선 이남과 부속 도서
정치 체제 군정체제
사령관 존 리드 하지 (1945년 9월 8일 ~ 1947년 2월 5일)
민정장관 안재홍 (1947년 2월 5일 - 1948년 9월 15일)
군정장관 아치볼드 빈센트 아널드(1945년 9월 11일 ~ 1945년 12월 17일)
아서 러치(1945년 12월 18일 ~ 1947년 9월 11일)
윌리엄 프리시 딘(1947년 10월 30일 ~ 1948년 8월 15일)
찰스 헬믹(1948년 8월 15일 ~ 1949년 1월 11일)
주요사건 1946년 10월 1일 대구 10.1 사건
1948년 4월 3일 제주 4.3 사건
1948년 5월 10일 제헌 국회의원 선거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
현재 국가 대한민국,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1]
1. 개요2. 군정 이전(~ 1945. 9. 8)3. 군정 초기(1945. 9. 9 ~ 1947. 2)
3.1. 여론 관련 자료
4. 군정 후기(1947. 3 ~ 1948. 8. 14)5. 역대 지도자6. 같이 보기7. 관련 인물8. 관련 문서

1. 개요

(중략) 북쪽이 소련군의 진주와 함께 친위공산세력을 기초로 하는 정부조직을 만들고 있을 때, 남쪽은 미국이라는 강력한 또 하나의 세력이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다. 미국은 승전국으로서 건국준비위원회를 비롯한 모든 정부를 불인정하고, 새 정부 건설은 자신들이 적극 주도하겠다는 노골적인 의사를 표현했던 것이다. 그러나 조선의 정객들은 정파와 이념에 따라 서로 갈등하고 분열되고 있었다. 공산주의민족주의, 즉 역사에 큰 상처로 기록되는 분단의 시작이 여기서부터 비롯되고 있었던 것이다.
나레이션 - 야인시대 51화에서.

1945년 8월 광복 이후, 미 육군 제24군단이 진주하여 1945년 9월 9일부터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까지, 조선총독부에게서 한반도의 행정권, 치안권 등을 이어받아 38도선 이하 한반도(및 그 부속 도서)를 통치했던 기구, 혹은 그 시기(한편 38선 이북에서는 소련 육군이 진주하여 통치하였다).

군정 사령관총독은 24군단장 육군중장 존 하지였고 소장급 육군 장성이 군정장관을 맡았다. 하지 장군은 미 육군원수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의 예하 지휘관 가운데 한 명이였으며 미군정도 맥아더가 주재하던 연합군 최고사령부의 지시를 받았다. 그러나 맥아더는 일본의 통치에 집중하고 있어 한국의 미군정에 대해서는 간섭 자체를 거의 하지 않았고, 사실상 미군정은 미국 본토의 지시를 받았다.

2. 군정 이전(~ 1945. 9. 8)

제2차 세계 대전 막바지에 들어가던 시기, 추축국 패배가 서서히 다가오자 연합국 측은 1943년 11월 카이로 회담(미국, 영국, 중화민국 참여)에서 일본 제국을 해체하고 '적절한 시기에(in due course)' 한국을 독립시키기로 결정했으며, 1945년 7월 포츠담 회담(미국, 영국, 소련 참여)에서 이를 재확인하였다. 이에 앞서 1945년 2월에는 얄타 회담(미국, 영국, 소련 참여)이 이루어져 독일 항복 이후 2 ~ 3달 안에 소련이 일본 전선에 개입할 것을 약조하였다.

한편 중국 충칭에서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세력이 독립운동을 지속하고 있었고, 1941년에는 대한민국 건국강령을 발표하였다. 이보다 북쪽인 연안에서는 1942년 경부터 조선 독립 동맹이 마오쩌둥 등의 공산 정부와 합작하여 활동하고 있었다. 국내에서는 일제의 극심한 감시로 독립운동 세력이 크게 위축되었으나, 여운형 주도로 1944년 조선 건국동맹이라는 비밀 결사가 세워져 있었다.[2]

1945년 8월에 들어가면서 일제는 말 그대로 파국으로 치닫고 있었다. 태평양 전쟁을 사실상 정리한 미국은 일본 본토 폭격에 들어갔고 종전을 앞당기기 위해 8월 6일과 9일 히로시마나가사키원자폭탄을 투하하였다. 한편 미국과 영국의 대일본전 참전 요구에도 불구하고 관망하고 있던 소련은 히로시마 원폭이 이루어진 직후에야 대일본 선전포고를 하고 파죽지세로 만주를 장악하고 한반도 북부까지 진입했다.(원래부터 소련군 무장해제 지역에 두만강 하류의 함북지역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 서술은 마치 소련의 대일전 참전이 기회주의적으로 이루어진 것처럼 말하는데, 실제로는 독일을 상대로 항복을 받고 3개월 가량의 시간을 달라고 했고 (부대 재편성 등의 시간도 필요했다.) 약속을 지켜서 공격했다.

이에 조선총독부 측에서는 엔도 류사쿠 정무총감을 대표로 여운형과 교섭을 시도했으며, 여운형은 일본인의 무사 귀환을 보장하는 대신 5개조 요구를 들어 행정권, 치안권의 이양 등을 약속받았다. 여기에 송진우 선 교섭설이 존재하나, 신빙성을 놓고 말이 많다. '한국현대사 박사 1호' 연구자인 서중석은 '총독부의 송진우 접촉까지는 사실이나, 이는 명백히 여운형의 경우와는 다른 하급 수준의 것이었으며, 송진우가 총독부의 정권담당의뢰 또는 치안담당의뢰를 거절했다는 설은 한민당 측에서 자신들의 일제시기 행위를 은폐하고 건준과 여운형을 공격하기 위한 수단으로 집요하게 주장했다'고 규정지었다.

조선총독부는 성급하다고 볼 수 있을 정도로 여운형의 요구를 사실상 전부 수락했다. 일례로 정치범 석방의 경우 엔도 정무총감은 최소한 연합군이 행정권을 이양한 뒤에 이행할 것을 요구했지만 거절당했고[3] 결국 여운형의 안대로 즉시 석방을 받아들일 수 밖에 없었다. 이렇게 된 근본적인 이유는 포츠담 선언 수락에 관하여 조선총독부에는 어떠한 훈령도 내려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조선총독부는 당연히 이미 조선주차군과 전투를 벌이고 있던 소련군이 한반도 전체를 접수할 줄 알고 급하게 신변이나마 보장받고자 했던 것. 물론 조선총독부가 자기 발등을 찍었다는 사실을 안 것은 일본이 항복하고 난 뒤였다.

한편 전쟁 말에 일본군의 반자이 돌격에 맞아 처절한 혈투를 벌이며 겨우 오키나와 진입에 성공하여 주둔하고 있던 미국은 소련이 일본에 선전포고를 한 지 사흘도 채 되지 않아 만주국을 함락시키고 한반도 북부로 진입하는 것을 보면서 불안감을 느꼈다.(미국의 생각에서도 일본과의 전쟁을 조기에 끝내면서 미군의 피해를 경감시키는 효과를 누리고자 소련의 참전을 요구하였다. 그런데 현실은 관동군은 이미 종이호랑이였다는 것이며, 이 덕분에 만주의 많은 물자들은 소련의 전리품으로 주게되었다. 여기에 소련군이 정해진 곳에서 멈추지 않고, 청진과 함흥을 지나 평양에까지 계속해서 내려오게 되면서 모든 것이 복잡해졌다.) 죽쒀서 개주게 된 처지에 몰린 미국은 1945년 8월 11일경 혹시나 하는 심정으로 38선 한반도 분할론을 소련 측에게 제시하였다. 미국은 한반도를 분할하더라도 반드시 수도인 서울은 포함해야 한다는 방침을 세우고 마침 서울 북쪽을 지나고 있던 38선을 그 기준으로 삼았다. 미국의 이런 제안에 대해 소련은 생각 외로 이를 흔쾌히 수락하였다. 이에 대해서는 소련이 동유럽에 치중할 계획이었으므로 동북아시아에 개입할 여력이 별로 없었고, 따라서 이러한 합의가 쉽게 이루어졌다는 설이 있다. 참고로 이 제안을 소련에서 불복할 시에는 37도선까지[4]로 합의를 보려고 했다는 기밀 문서의 내용도 존재한다.[5]

그리고 1945년 8월 15일, 일본은 항복하고 한반도는 광복을 맞았다. 여운형 등은 건국동맹을 조선건국준비위원회로 확대 개편하였으며, 8월 말까지 건국준비위원회는 지방 세력의 호응을 받으며 전국에 145개 지부를 두게 되었다. 그러나 조선총독부는 행정권 등을 제대로 이양하지 않아 마찰이 벌어졌는데, 이는 일본 본국에서 행정권을 미국에게 이양하라는 지시가 떨어졌기 때문으로 알려져 있다. 한편 국내에서도 김성수, 송진우 등은 '임시정부 봉대'를 주장하며 건국준비위원회에 협조하지 않았다.

이러던 중 9월 초에 미군이 진주한다는 소식이 들려오자 건국준비위원회 측은 마음이 급해졌다. 때문에 9월 3일 내각 개편이 이루어지고 9월 6일 조선인민공화국이 선포되었으나, 이 과정에서 비중이 좌익측으로 기울자 안재홍 등 중도 우파 세력이 건국준비위원회 / 조선인민공화국에서 탈퇴하였다. 그러나 9월 7일 인천항에 진주한 미군은 포고령을 통해 조선인민공화국, 대한민국 임시정부 등을 부정하였으며 이에 얼마 가지 않아 조선인민공화국은 와해됐다. 미군정은 9월 9일 서울로 진주하였으며, 조선총독부로부터 행정권을 이양받았다.

3. 군정 초기(1945. 9. 9 ~ 1947. 2)


1945년 9월 9일 미 육군에 항복하는 마지막 조선총독 일본 육군대장 아베 노부유키 장군.

파일:external/ifeeltong.org/45980291fd1088145229b868604911a0_ANFu1pCpTANDK16CPZwxs4l2kbOzq.jpg
그날 조선총독부의 일장기가 내려가고 성조기가 올라갔다.[6] 그리고 미군정이 선포됐다.
이 시기에 심영고자가 되었다.[7]

미군정 진주 이후에는 조선인민공화국에 참여했던 인사들이 당 형태로 정치 세력을 전환하고 조선인민공화국에 참여하지 않았던 인물들 또한 당을 조직하였다. 이 시기 난립한 당파는 수백 개를 상회하므로 일일이 열거하기 어려우나, 주요 정당들을 대략적으로 열거하자면 다음과 같다.

이 중 한국민주당은 미군정에 협조적인 모습을 보였으므로 미군정 측에서도 이들에 호의적이었으나 대중적 지지율은 낮은 편이었다. 이에 미군정은 이승만과 한민당이 연대하도록 주선하였다. 미군정은 김구와도 접촉하였으나 시간이 지날수록 완고한 임시정부 정통론을 주장하였던 김구와 거리가 멀어졌다.

이 시기에는 정치 세력 대부분이 한반도의 통일 국가가 생길 것을 의심하지 않았고, 또 대부분이 서로 그리고 미군정과 교섭할 가능성이 있다고 여겼으므로 정치 대립이 그 이후만큼 격하지는 않았다. 이건 남한 지역뿐만 아니라 남북 관계에도 마찬가지여서, 38선도 원래는 소상인들이 물건 팔러 넘나들 수 있을 정도로 경비가 느슨했다고.

다만 정치 부분을 벗어나면 일제강점 아래에서 눌렸던 각종 불만들이 민주주의 이식을 표방하던 미군정하에서 폭발하였으므로 이로 인한 혼란은 있었는데, 대표적인 것이 해외 동포의 다수 귀국과 공출 - 배급제 해지에 따른 쌀값 폭등이었다. 이에 1946년 1월 미곡수집령이 발표됐으나 운영 미숙으로 다시 한번 혼란을 가져왔다. 이외에 소작제, 토지 분배 등을 놓고 쟁의가 계속되었다. 미군정 측은 소작료를 수확량의 1 / 3로 제한하고 일제 아래 지주의 토지를 매각하는 등의 노력을 하긴 했으나 이는 농민의 불만을 수렴하지 못했으며 사회주의적 개혁이 이루어진 북한과 대비되면서 불만은 더욱 커졌다. 이후 미국 국방성과 국무부의 한국문제특별위원회에서는 3년간 5억4천만 달러를 한국에 뿌리려 했으나 계획단계에서 그쳤다.

하여튼 다시 정치로 돌아와서, 임시정부 수립과 이를 위한 신탁통치안이 포함된 모스크바 3상회의의 결정안이 전달되면서 남한 지역의 정치판은 완전히 뒤바뀌게 된다. 타국에게 정치를 맡긴다는 신탁통치안은 이성적으로 생각했을 때는 견딜 만한 것이었을지 모르나 감정적으로는 35년의 식민 통치를 겨우 벗어난 한국 시민들에게 악몽의 재림처럼 다가왔던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여기서 끝이 아니었으니, 이러한 전달이 미국과 소련 측 입장이 뒤바뀌어 전달된 것이다(신탁통치 오보사건).

이후 우익 측(이승만, 김구, 한민당 등)은 반탁 운동에 나서면서 나섰고, 좌익 측(박헌영 등)은 본래 대개 반탁 혹은 중립적 행보를 보였으나 박헌영 등이 소련에 갔다온 이후에는 찬탁으로 선회하였다.[11] 반면 중도 세력 측은 신탁통치안을 보류 혹은 수용하려는 반응을 보이되 한반도 안의 임시정부 수립안에 주목하였다. 그러나 시민의 지지는 우익 측으로 향했으며 좌익 측의 세력은 급격히 축소되었다. 한편 좌우파 대립이 격해지면서 중도파(여운형, 김규식, 안재홍 등)의 세력 또한 위축됐으며, 우익의 대표 인사였던 송진우마저도 신탁통치에 대해 (다른 우익층에 비해 비교적)호의적인 발언을 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암살당했다.

파일:FB_IMG_1474740940271.jpg
1946년, 제1차 미소공위에 참여한 이승만, 김구, 스티코프, 안재홍 (순서대로)
이후 1946년 3월 미소공동위원회가 개최되었다. 위원회는 초기에는 그럭저럭 잘 진행되는 듯 보였으나, 참여할 정치 세력을 놓고 미소 양측이 대립하면서 결국 결렬되었다. 소련 측은 3상 회의안에 반대하는 반탁 세력은 배제해야 한다고 주장한 반면, 미국 측은 3상 회의 안에서 한반도 세력이 직접 참여하지 못했으므로 이를 들어 한반도 안 정치 세력을 배제할 것을 논하는 것은 옳지 못하고 모든 정치 세력을 포괄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5월에 회의가 결렬되자, 이승만은 1946년 6월 3일 정읍에서 한 연설에서 남한 지역만이라도 독자적인 정치 세력을 구축할 것을 주장하였는데(정읍발언), 이는 사실상의 단독 정부 수립안이었다. 한편 격화된 좌우 대립과 단독 정부 수립안에 위기감을 느낀 중도 세력은 좌우합작운동을 시작하였으며, 1946년 10월에는 좌우합작 7원칙을 내놓았다. 이 당시 좌우합작 7원칙에 대한 여론의 지지는 대단했었으나, 정치적으로는 극좌와 극우 모두에게서 배척받는 중도의 한계점을 보였다. 가령 '무상 / 유상 / 유조건 몰수 → 무상 분배' 안의 경우 우익 측에서는 무상 분배를, 좌익 측에서는 유상 / 유조건 몰수를 반대하였다. 그리고 양측 모두 '돈 주고 사서 돈 없이 배분하면 재정이 파탄난다'는 반대 의견을 냈으며 이 또한 설득력이 있는 주장이다. 판단은 알아서 해야겠지만, 어쨌거나 좌우익 모두를 수렴하려는 노력이 결국 좌우익 모두의 반발을 받을 수밖에 없었음을 잘 보여주는 사례다. 이러는 동안 미군정 측은 중도 세력과 교섭하여 1946년 남조선 과도 입법의원과 남조선 과도 정부를 세웠으나, 여운형 세력 등은 남조선 과도 정부 수립 단계에서 탈퇴하였다.

한편 미군정은 1946년 초부터 국방경비대, 경찰 등을 창설하거나 강화하였는데 이는 좌익 측에 대한 압력으로 이어졌다.[12] 이에 대한 반발로 조선공산당(후에 남조선노동당)은 쟁의 활동에 본격적으로 나서기 시작했는데, 대표적인 것이 1946년 9월 30일, 부산에서 철도기관사들이 일으킨 파업부터 시작해 총파업이 일어났고, 여기서 경찰의 민간인 발포로 우발적으로 터진 대구 10.1 사건이었다. 그러나 쟁의가 격해지면 격해질수록 탄압 또한 격화됐으며, '정책의 역전' 이후 좌익 측은 지하로 들어가거나 월북하게 되었다.

또한 1946년 초부터 이어진 북한의 개혁으로 인해 많은 월남민들이 발생하였으며, 이들은 대개 공산주의에 대한 반발 심리를 가지고 있었으며 때문에 서북청년단 등의 정치 세력 등으로 연결되기도 하였다.

1946년 8월에는 민선의원과 관선의원 45명씩으로 구성된 남조선과도입법의원이 설치되었는데 이는 일종의 과도기적 국회의 역할을 하였다. 다음 해인 1947년 2월에는 명칭을 남조선과도정부로 바꾸고 한국인 안재홍을 민정장관에 임명하였다.[13]

경제에 있어서는 일본인 자본 및 기술자의 철수, 만주 및 일본과 교역 단절 등으로 혼란이 심했는데 여기에 미군정이 정부 운영에 필요한 비용을 지폐 발행으로 조달하는 바람에 인플레이션이 극심해졌다. 여기에 서울 등 도시에 필요한 쌀을 농촌에서 강제로 수매한 것 때문에 여론도 나빠졌다.

미군정이 이렇게 한반도 현실에 맞지 않는 정책을 실행하는 병크를 일으킨 것은 한반도에 대한 정보 부족이었다. 미군정이 한반도에서 얻은 정보들은 구 조선총독부가 넘겨준 정보가 전부였고 그나마 이것도 왜곡됐거나 근거가 부족한 정보였다. 실제로 미국은 한반도 정보에 무지했다. 이승만 대통령이 태평양 전쟁 중 미국에서 일본의 가혹한 식민통치를 기자회견을 통해 알리자 그 어떤 미국인들도 믿지 않았고 오히려 일본 식민지가 된 한반도가 근대화되지 않았냐는 식의 질문을 해 이승만이 울화통이 터질 정도였다. 이는 광복 뒤에도 마찬가지로 이승만이 미군정 정책의 문제점을 지적해도 듣지 않고 그대로 시행하였다가 낭패를 보았다. 심지어 한국전쟁 와중에는 구 일본군을 투입시켜 병력열세를 만회하자는 주장을 했다. 일본군이 한반도를 지배한 만큼 한반도 지리를 잘 알고 일본군이 한반도에 오랫동안 주둔한 만큼 일본군에 대한 한국인들의 친근감도 있어 빠르게 적응할 것이라는 황당한 판단이었다. 당연히 이승만 대통령은 "한국군과 일본군이 전쟁하는 것 보고 싶으면 해봐라"식으로 비판하였고 미국은 이 계획을 철회하였다.

3.1. 여론 관련 자료

광복 직후 1945년 10월, 중도우파 성향의 잡지사 '선구'에서 서울 시민 2000명에게 여론조사한 자료는 다음과 같다.

파일:external/mlbpark.donga.com/1291658313.jpg

이 자료를 통해 여운형의 지지율이 매우 높았다고 단편적으로 해석하기 쉬우나 실제로는 조금 복잡하게 해석할 필요가 있다. 일단 표본은 잡지사의 여론조사에 응할 수 있는 지식인층이었으므로, 일반 시민의 여론을 그대로 반영했다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이 여론조사는 '선구회' 잡지사에서 창간하자마자 기념으로 여론조사를 한 것이고, '그나마' 광복 직후 당시 정치색에 얽매이지 않았기 때문에 기존 학계에서는 이 여론조사를 자주 인용한다.

또 한편으로 여운형, 박헌영은 국내에서 계속적으로 활동을 한(그래서 활동 등에 대한 인지도가 높은) 상태였던 반면 김구는 10월, 이승만은 11월에 귀국했음을 생각하면 단순한 수치보다 해외파의 세력 또한 만만치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이승만에 대한 지지율에는 또한 미군정과 교섭할 때 수월할 수 있으리라는 신뢰[14]가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일단 좌익 측조차도 광복 직후 이승만을 미군정과 교섭할 인물로 삼으려 했다는 것은 9월 초 우익 측이 탈퇴하면서 좌경화되었다는 비판을 받는 조선인민공화국의 내각안에서 당시 국내에 있지도 않던 이승만을 주석으로 세운 점, 그리고 조선공산당이 독립촉성위원회에 합류한 점(금방 탈퇴했지만) 등으로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다. 한편 이승만은 이러한 제안들을 거부했다. 지금은 믿을 수 없겠지만, 이 시기까지만해도 이승만은 좌우익을 망라해 인지도가 높았던 지도자 가운데 한 명이었다.

이외에 1946년 7월, '조선여론협회'가 서울에서 "누가 초대 대통령이 될 것인가?"라는 조사를 한 결과는 이승만(29.2%), 김구(10.5%), 김규식과 여운형이 각 10.3%였다. 1948년 6월23일, 조선여론협회가 5개의 거리 행인에게 "누가 초대대통이 되기를 바랍니까?"라는 조사를 한 결과는 이승만(1,024), 김구(568), 서재필(118) 순이었다. 신탁통치 오보사건정판사 위조지폐 사건 등으로 인한 좌익 측의 위축이 눈에 띈다. 그러나 설문에 응답한 이들 가운데 '모르겠다'고 응답한 사람들이 전체에 30%가량이나 될 만큼 많았고 미군정에서 여론조작 공세에 적극적으로 개입했다는 설까지 있어 신뢰성이 떨어져 학계에서는 이 자료를 그다지 많이 인용하지 않는다.

이 두 여론조사에서 유추해보면 한 가지 주목할 만한 사실이 한민당 세력 인사들은 단 한 명도 뽑히지도 거론되지도 않았다. 이는 당시 민심이 한민당을 얼마나 극렬 혐오했는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광복 이후 당시 민심은 사회주의 성향이 다분히 강했다. 1946년 8월 13일자 동아일보(한민당의 기관지)의 기사에 따르면, 미군정 당국에서 여론조사를 한 적이 있는데, 당시 시민들은 사회주의 체제를 지지한다는 여론이 70%나 되었다. 반면, 자본주의, 공산주의를 지지한다고 응답한 이들은 각 14%, 7%정도였다. 1946년 8월 13일자 동아일보 3면 참조. 다만 1945년 당시 한국의 문맹률이 77%에 달했다는 점을 생각해볼 때, 과연 정치 사상에 대해서 일반 시민이 얼마나 깊은 이해도를 갖고 있었을지는 조심스럽게 접근해야 할 것이다. 소작 등 부조리한 수취 구조에 대해 '부의 재분배'를 원하는 시민이 몹시 많았다는 정도로 이해할 수 있을 듯하다. 다만 사회주의를 주장했다해도 어디까지나 사민주의를 원하는 의견이 강했다는 점을 생각해야지 공산주의를 찬성한다는 응답이 매우 낮은것은 주목해야할 사실이다. 해당 조사에서 제일 지지받는 정당은 한독당과 인민당이었지만 제일 지지받지 못하는 정당은 다름 아닌 공산당이었다.

4. 군정 후기(1947. 3 ~ 1948. 8. 14)

1947년 3월 트루먼 독트린이 발표되면서 동북아에 대한 미국의 정책 또한 뒤바뀌게 되었다(정책의 역전, Reverse Course). 이 트루먼 독트린을 바탕으로 미국에서는 매카시즘 열풍이 불게 된다.[15] 이전까지의 정책이 좌익 측에 대해 비우호적일지언정 '민주주의'라는 명분을 지키려 했다면, 이 이후의 정책은 아예 반공 정권을 세우려는 성향이 강해져 좌익 측의 활동은 아예 불법화되었다. 이에 맞춰 좌우합작운동 등에 대한 지원 또한 약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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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7년, 제2차 미소공위 당시 사진, 오른쪽부터 여운형, 김규식, 이묘목(영어통역관), 말리크, 티렌티 스티코프, 허헌

1947년 5월 제 2차 미소공동위원회가 개최되었다. 제2차 미소공위는 초기 순조롭게 진행되었으나, 참가단체 선정문제를 놓고 제1차 미소공위 때와 같은 문제를 넘지 못하고 끝내 1947년 10월에 결렬되었다. 이 과정에서 1947년 7월에는 여운형이 암살되어 좌우합작운동이 사실상 와해됐으며[16], 단독 정부 수립파의 목소리가 더욱 커졌다. 1947년 9월에는 미국 측이 제시한 한반도 내 선거를 통한 정부 수립안이 UN 총회에서 가결되었으나, 소련 측은 북한 지역에 UN 한국 임시 위원단이 들어오는 것을 거부하였다(인구 수에 따른 의원 수가 적었다는 것이 그 이유로 꼽힌다). 이에 1948년 2월 UN 소총회에서 남한 지역만의 단독 선거 수립안이 결정되었다.

김구와 김규식 등은 이에 반발하고 1948년 4월경 남북 회담을 열었으나 이미 북한 단독 정부 수립안을 차근차근 진행해 나가던 김일성 등에게 형식상의 합의를 얻었을 뿐이었으며, 이는 이후 북한의 선전에 이용되는 불행만을 낳았다. 한편 무장 좌익 세력에 의해 제주도에서 4.3 사건이 일어나 총선거를 방해하였고 미군정은 이를 진압했으나, 이에 대한 토벌 작전이 벌어지면서 무고한 민간인이 다수 학살당했다(한편 여순사건이 4.3 사건에 연동하여 벌어지면서 군내 좌익 숙청 작업이 벌어졌다).

이후 선거가 연기된 제주도를 제외한 남한 지역에서 진행된 5.10 총선거로 제 1대 국회가 성립되었는데, 여기에는 김구 세력이나 중도 세력 등이 대거 불참하였다(이는 당대에는 신념에 따른 일종의 보이콧이었을지 모르겠으나 제 1대 국회가 이승만과 한민당 세력 위주로 편중되는 결과를 낳았다). 이 선거에서는 100석을 공석으로 남겨두었는데, 이는 북한 지역 또한 대한민국의 관할에 있다는 상징성을 위해 남겨둔 것이다. 7월 12일 대통령으로 이승만, 부통령으로 이시영, 그리고 본래 이승만이 맡았던 국회의장 직에 신익희가 당선되었으며, 7월 17일 대한민국 헌법이 세워졌다(제헌절의 기원).

1948년 8월 15일 중앙청성조기가 내려지고 태극기가 걸리면서 대한민국 정부 수립으로 미군정은 끝났다. 미군정이 대행하던 각종 권한들이 대한민국 정부로 이관되었으며, 남아있던 미군정 관리하의 토지와 공장 등 적산 또한 대한민국 정부 소유로 전환되었다.

그러나 군정장관인 찰스 핼믹은 1949년 1월 11일까지 군정장관으로 재임했고, 6월까지 정치, 군사고문을 맡았다.

5. 역대 지도자

한국 군정기 지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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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소련 국기.png 소련군정
이반 치스차코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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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500px-US_flag_48_stars.svg.png 미군정
존 리드 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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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틀:역대 한국통감부 통감|{{{#FFD700 한국 통감}}}]] · [[틀:역대 조선 총독|{{{#FFD700 조선 총독}}}]] }}}}}}

6. 같이 보기

7. 관련 인물

8. 관련 문서



[1] 경기도(개성시, 개풍군, 장단군) 및 황해도(옹진군, 연백군) 일부. 그 전에 북한대한민국과 똑같이 한반도 전체를 자기 영토라 주장한다.[2] 충칭에 있었던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연합국의 일원으로 포함만 되었다면 한반도 분단과 같은 비극적인 현실은 없었을 것이였다.(비슷한 예로 프랑스는 2차세계대전 초기 나치스에게 항복하였으나, 드골을 중심으로하는 임시정부가 계속해서 유지되어 이후 해방의 기쁨을 누릴 수 있었다. 물론 폴란드의 경우에는 영프의 헛소리와 같은 약속에 나치스에게 망하였고, 전쟁기간 동안 런던에서 계속해서 투쟁하였으나, 전후에는 소련군이 들어오면서 토사구팽 당하기는 하였다.)[3] 같은 시기 일본은 10월 GHQ의 인권 지령에 의거하여 치안유지법이 철폐될 때까지 정치범과 사상범이 그대로 수감되어 있었다.[4] 북위 37도선은 아산만부터 울진 앞바다까지를 가른다. 즉, 서울특별시를 포함한 경기도강원도 전 지역이 소련 치하에 들어가는 것이다.이 얼마나 끔찍하고 무시무시한 생각인가[5] 사실 미국 입장에서는 소련이 "우리가 먼저들어와서 다 먹었으니 이거 다 내꺼야" 라고 할 줄 알았지만, 반대로 소련 입장에서는 미국이 "우리는 태평양에서부터 일본 아작냈고 니네는 숟가락만 얹었으니 이거 다 내꺼야" 라고 할 줄 알았던 것이다. 따라서 서로의 예상보다 훨씬 양보된 입장을 표명하니 양쪽 모두 놀란 것이다.[6] 사진을 보면 깨알같이 미군들이 성조기가 게양되는 순간 성조기에 경례를 하는 것을 볼 수 있다.[7] 사실 실제 역사에서는 하복부에 총상을 맞은 것으로 그쳤다.[8] 김구 등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자격으로 귀환하기를 원했으나 이를 거부한 미국 측과 한동안 마찰을 겪었으며, 결국 한국독립당이라는 당의 형태로 전환하였다.[9] 송진우가 암살된 이후에는 극우 성향을 띄게 된다.[10] 이후 '인민공화당'으로 개칭된다.[11] 여기에 존스턴의 왜곡보도도 커다란 한몫을 했다.#[12] 다만, 국립 경찰을 강화하는 부분은 좌익 측뿐만 아니라 민심에도 상당히 부정적인 여론을 초래시켰다.(당시 국립 경찰에는 일제시대 때 일했던 친일 경찰들이 상당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들은 시민들을 가혹하게 다뤘다.)[13] 하지만 실질적으로는 미국인 군정장관이 우위에 있었다.[14] 여기에 다른 의견도 있는데, 미군정의 선전활동도 커다란 한몫을 했었다는 점이다.[15] 이는 한반도뿐만이 아닌 일본 GHQ에서도 상당히 영향을 미쳤다. 일본GHQ의 '레드퍼지'(역코스 정책) 이전까지가 일본의 사회주의자들의 활동이 왕성했던 시기였다.[16] 이때 민정관 E. A. J. 존슨에 따르면 당일 미국은 여운형에게 민정장관직을 타진하려고 했고, 여운형 역시 당일 북한과의 관계를 해명하는 문서를 지참했다고 한다.[17] 사건 자체는 일제강점기 때 일어났으며, 조선어학회 학자들이 광복 후 《조선말 큰사전》을 출판한 것은 미군정 시기인 1947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