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3-11-18 23:44:39

이순금


<colbgcolor=#955251><colcolor=#fff> 이순금
李順今
파일:이순금서대문형무소.jpg
1936년 6월30일 서대문형무소에서 촬영된 사진.
입은 옷은 일제강점기의 죄수복이다.
출생 1912년 6월 3일
경상남도 울산군 범서면 평천동
(현 울산광역시 울주군 범서읍 입암리)
사망 몰년 미상
북한
본관 학성 이씨
신체 154cm
가족 오빠 이관술
학력 언양공립보통학교 (졸업)
서울 실천여학교 (전학)
동덕여자고등보통학교(현 동덕여자고등학교) (졸업)
직업 독립운동가, 노동운동가, 정치인
경력 경성RS협의회
조선반제동맹 경성지방준비위원회
경성트로이카
경성고무공장 노동조합
경성콤그룹
조선인민공화국 중앙인민위원
조선공산당 중앙위원회 서기국원
민주주의민족전선 중앙위원
조선부녀자총동맹 조직부
남조선로동당 중앙위원
남조선민주여성동맹 조직부원[1]

1. 개요2. 생애
2.1. 출생과 성장2.2. RS 협의회 활동2.3. 조선반제동맹 활동2.4. 경성트로이카 활동2.5. 경성콤그룹 활동2.6. 광복 후 정치인으로서의 활동2.7. 오빠 상실2.8. 북한에서의 사라짐, 동명이인

[clearfix]

1. 개요

한국독립운동가, 노동운동가, 여성운동가, 정치인. 이관술의 동생이자 제자. 여성 독립운동가 중 박진홍과 함께 일제감시대상인물카드가 가장 많이 만들어진 인물이다. 여성 독립운동가 중 가장 많이 검거되고 고문 피해도 많이 봤고 일제가 위험시했다는 의미. 그녀가 광복 후 맡은 조선인민공화국 중앙인민위원이나 조선공산당 중앙위원회 서기국원 등의 직책은 여성 공산주의자 중 최고위직이다.

그녀에 대한 자료로는 김경일, 신영숙, 정현주, 이상경, 김성은의 《한국 근대 여성 63인의 초상》, 안재성의 《잃어버린 한국 현대사》 속 약전, 이임하의《조선의 페미니스트 - 식민지 일상에 맞선 여성들의 이야기》 속 약전이 있다. 그리고 이순금, 이효정, 손응교가 주인공인《울산여성의 독립운동》이란 책이 있는데 네이버 등으로 '울산여성의 독립운동'을 검색하면 나오고 무료로 다운받을 수 있다. 기사로는 배문석의 여성독립운동가 중 일제 감시카드가 가장 많은 이순금, 정계향 교수와 고은정 기자의 울산의 여성독립운동가, 고은정 기자의 울산여성독립운동 그 길에 다시 서다‘대한독립’ 불굴의 의지·애환 오롯이…역사 이해 큰 도움, 배성인 교수의 조선의 로자 룩셈부르크 이순금 등이 있다. <임경석의 역사극장>의 2023년 5월 10일자 주인공이 되었다. 20대에 옥살이 4번한 신여성…일제에 저항한 이순금

이런 기사를 보게 되다니, 울산사람 아무도 모르는 울사[2]사람의 얘기를 실어줘서 한없이 고맙다. 한없이 순수했고 조국에 대한 사랑으로 한평생 자신은 돌보지않고 살았던 이관술.이순금 남매의 삶에 모든 이가 고개숙이는 날이 오기를, 아파트건설로 이순금이 살았던 입암마을이 곧 없어진다. 울산인으로 그저 안타깝다. 울산북구에 순금산이 있는데 혹시 이순금의 이름에서 비롯됐는지 항상 궁금하다.
이순금 기사(임경석의 역사극장)를 반가워하는 댓글. 누군가는 이순금을 계속 기억해주고 사랑해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독립운동가 작가 '동닙'이 2023년 5월 22일 이순금 작품을 올렸다.작품 보기

2. 생애

2.1. 출생과 성장

아버지 이종락은 울주군 범서면 입암리의 유서 깊은 양반 가문의 장자였다. 이관술과 이순금은 어머니가 달랐다. 이순금의 어머니는 주막집 주모로 이름은 김남이였다. 이종락을 만나기 전에 이미 딸 하나를 가진 과부였다.

이순금은 부모가 끔찍이 아끼는 딸이었다. 이순금 부모는 딸에게 신식 교육을 열심히 시켰다. 언양에서 보통학교를 졸업한 뒤 1928년 서울에 있는 실천여학교에 보낸다. 어머니 김남이는 딸을 혼자 보내지 못해 종로구 익선동에 집을 장만한 뒤 아예 함께 살았다. 그리고 도쿄고등사범학교를 졸업한 이관술이 1929년에 귀국해 동덕여자고등보통학교에 교사로 부임하자 그 학교로 전학까지 시켰다.출처
파일:1932졸업앨범동덕여고.jpg
동덕여자고등보통학교 1932년 졸업앨범 속 동덕여고 전경
파일:이관술동덕여고.jpg
동덕여자고등보통학교 1932년 졸업앨범. 왼쪽부터 이관술, 이순금, 이종희, 이효정이다.

동덕여고보에서 평생의 친구이자 독립운동 동지가 되는 박진홍, 이효정, 이종희 등과 만난다. 이순금의 성격은 활달하고 인심을 잘 써서 누구하고나 쉽게 친해졌으며 눈물이 많았다.[3]

어느 날은 순금이가 손뼉을 치며 교실에 뛰어 들어와 호들갑스럽게 떠드는 거예요. 학교의 처녀 선생님과 총각 선생님이 연애를 한다는 거예요. 무슨 말인가 했더니 두 분이 한 책상에서 도시락을 먹고 있다는 거예요. 글쎄 그걸 연애라고....
이효정

파일:익선동이순금집.jpg
이관술과 이순금의 익선동 집. 이효정은 동덕여고보 재학 시절 단짝 박진홍과 함께 매일 이관술과 이순금의 집으로 놀러 갔다.

2.2. RS 협의회 활동

이순금과 친구들은 1930년 11월 광주학생독립운동 1주년을 맞아 백지동맹을 주도한다. 이순금과 친구들이 이제 몇 달 뒤면 졸업반이 되는 때였다. 1929년 11월 광주학생운동 소식이 경성까지 닿은 뒤 대부분 학교에서 만세운동에 나설 조짐을 느끼자 일본 당국은 강제로 휴업이나 방학에 들어갔다. 두 달 뒤 근우회와 연결된 여학교들을 중심으로 만세시위가 일어났다. 백지동맹은 그 연장선이었다. 백지동맹의 목적은 첫째로는 일제 당국에 대한 항의, 두 번째로는 일제에 굴복한 학교당국에 경종을 울리는 것이었다.출처

그리고 이 투쟁에 참가하면서 이효정·박진홍 등 동기들과 함께 경성RS독서회에 참가했다. 사회과학도서를 읽는 사상연구회였다. 동덕·휘문·중앙·제2공립·법정학교 등 7개 학교 학생들이 참가했다.출처

그러던 중 1931년 6월 초 또 한 번의 동맹휴업이 경성지역 10여개 학교에서 벌어진다. 일본인 교육과의 차별을 시정하라고 요구했다. 동덕여고보 학생들도 재단과 교장을 향해 학교운영 개선 등을 요구했다. 참가 학생들이 모두 징계를 받자 끝내 재단 이사장의 집 앞 단식농성까지 한 달 동안 지속됐다.
파일:이관술교사사직선언.jpg
1931년 6월, 동덕 동맹휴업 동조 교사들 총사직 선언(왼쪽)과 학생 단식농성(오른쪽)

동맹휴업이 끝난 즈음 이순금의 어머니 김남이가 서울 종로구 익선동 집에서 운명했다. 딸을 지극한 정성으로 아꼈던 어머니의 죽음은 무척 큰 충격이었을 것이다.출처

어느 날 수업 중인데 순금이 엄마가 죽었다는 연락이 오니까 순금이가 목놓아 우는 거예요. 엄마, 엄마 하고 어찌나 크게 소리쳐 우는지 선생님들도 말리지 못하고 모두들 입을 다물고 안타까워했지요.
이효정


김남이는 죽기 전에 이순금의 결혼지참금으로 2000원을 남겨주었다. 돈은 아버지 이종락이 보관하고 있었던 듯하다. 이후 박진홍을 비롯한 이순금의 친구들은 이 돈을 타내어 운동 자금으로 쓰기로 마음먹는다. 유인물도 만들고 지하운동가들의 생활비도 지원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몇 사람을 소개해도 성사되지 않은 채 이순금이 감옥에 들어가서 실패한다.

일제 당국은 잇단 학생동맹휴업의 배후를 찾겠다고 혈안이 됐다. 그 결과가 바로 경성RS독서회에 대한 수사와 대규모 체포였다. 이순금과 동기들 모두 이때 경찰에 끌려가 조사를 받고 고초를 겪어야 했다.출처

1931년 12월 졸업을 3개월 앞둔 시점 ‘RS협의회’가 발각되고 말았다. RS란 ‘Reading Society’의 약어로 독서회를 뜻했다. 서울 시내 각 고등보통학교와 전문학교 10개교 안에 학생들로 이뤄진 비밀 독서회가 연계망을 구축했는데 그것이 드러났다. 종로경찰서를 주무 기관으로 하는 일본 경찰은 학생들을 마구 잡아들였다. 이순금도 그 속에 포함됐다. 동덕여고보 학생으로는 박진홍, 이종희, 이효정 등이 함께 연루됐다.출처: 임경석

수사는 혹독했다. 취조 중에 사망자가 나올 정도였다. 이 사건의 혐의자 가운데 중앙고보 4학년생 박풍직(21)이 옥사하고 말았다. 사망 원인은 ‘각기증’ 탓이라고 보도됐다. 각기증은 비타민 B1의 결핍으로 생기는 영양실조 질환으로서 다리가 붓고 마비되며 맥박이 빨라지는 증세를 보인다. 하지만 그것이 돌연사를 가져오는 원인이라고 보기 어렵다. 구타와 고문이 얼마나 가혹했는지를 보여주는 사건이었다.출처: 임경석

이순금은 이듬해 2월15일 불기소 처분을 받았다. RS협의회 사건으로 검찰에 넘겨진 형사범은 19명이었고, 이순금을 포함한 다른 19명은 불기소 혹은 기소중지 처분을 받았다. 이순금은 3개월 가까운 경찰서 유치장 신세를 벗어나 겨우 풀려날 수 있었다. 덕분에 동덕여고보 졸업식에도 참석할 수 있었다.출처: 임경석

2.3. 조선반제동맹 활동

이순금은 오빠 이관술이 주도한 조선반제동맹 경성조직준비위원회 반제동맹에 참여한다. 이들은 서울 시내 각급 학교 속에 비밀 독서회 13개를 뿌리내리는 성과를 올렸다. 이 때도 이순금은 학생운동 방면을 맡았다. 비밀 독서회를 조직하고 사회주의 사상을 유포했으며, 학생 대중이 시위운동과 거리 진출을 꾀하도록 이끌었다.출처: 임경석

그리고 1933년 2월 경성반제국주의동맹 사건으로 체포됐다. 이관술이 주모자로 송국될 때 이순금은 한 달 만에 기소유예로 풀려났다.

2.4. 경성트로이카 활동

이재유를 만나 경성트로이카에 참여해 경성고무공장 여공들과 적색노조 파업을 했다. 1933년 4월부터 별표고무를 시작으로 6월1일 편장제사를 거쳐 8월부터 중앙상공회사(별표고무 8월17일), 소화제사(8월22일), 고려고무(8월 하순), 조선견직(9월7일), 서울고무(9월19일), 용산공작소 영등포공장(9월21일)으로 연쇄파업이 이어졌다. 이순금은 동덕여고보 동창 이종희·이효정과 함께 경성트로이카의 파업위원회 ‘레포’(연결책)로 활약했다.

다음 경성트로이카 파업 내용을 보면 이순금은 분명 가장 활약한 성원 중 하나다.
<rowcolor=#fff> 경성트로이카가 주도한 파업
<rowcolor=#fff,#1f2023> 공장 일시 참여자 배후 활동가 결과
편창제사 1933.6.1 364명의 여공 이재유, 김형선 운동선의 양하석 패배
중앙상공회사(일명 별표고무) 1933.8.17 150명의 여공, 유종희, 권오상 이순금, 이현상, 이재유 승리(청부제도 부활)
소화제사 1933.8.22 249명의 여공, 유순희 이순금, 변홍대, 안병춘, 이현상, 이재유 일부 승리(교부장 퇴직/이재유 그룹 소속이었던 유해길 해고)
고려고무 및 동명고무회사 1933.8. 40명의 여공, 변홍대 안병춘, 이현상, 이재유 승리(임금인하 취소)
조선견직주식회사 1933.9.7 20명의 여공, 김복금, 이정숙, 이순금 이현상, 변홍대, 이재유 승리(불명)
서울고무회사 1933.9.19 120명의 여공, 허마리아, 지순이, 맹계임, 유순희, 이종희, 권오상 이순금, 변홍대, 이현상, 이재유 패배(연속적 파업으로 감시가 강화된 탓에 수모자 허마리아, 지순이, 맹계임 등 6명과 권오상 검거)
종연방적회사 경성제사공장 1933.9.21 500명의 여공, 이병희, 이효정, 이순금, 이종희 이현상, 변홍대, 남만희, 안승락(기금 모집) 패배(이종희, 이병희, 이효정, 변홍대, 허마리아, 권오상 등이 검거되어 이재유는 빈민촌 아지트에서 탈출해야 했으며 이듬해 1934.1 이재유가 검거되는 계기가 됨.)
용상공작소 영등포 공장 1933.9.21 100명의 직공, 안병춘, 안삼원, 이순복 변홍대, 이현상, 이재유 전 직공을 망라하는 대회를 개최하는 이례적인 성과가 있었다.(보통은 주모자가 검거되면 불가능.) 안병춘, 안심원 검거되어 영등포 운동 불가능해짐.
<rowcolor=#fff,#1f2023> 평가 1933년 부산의 고무 제네스트 등 수개월에 걸쳐 전국에서 연속적 파업이 일어났는데, 서로에게 영향받은 파업들이었다. 식민지 시기 전체를 통틀어서 대표적인 투쟁 사례.

1934년 1월 20일 체포돼 7월17일 예심 재판을 받았다.출처
파일:이순금여직공.jpg
1935년 8월 24일 <조선일보> ‘동덕여교 졸업 후 여직공으로 잠신’

한편 이순금은 이재유의 아지트키퍼가 되기도 한다. 1930년대 경성의 인구는 30만이 채 되지 않았다. 일제는 골목마다 책임자를 두어 젊은 남자가 혼자 살거나 여럿이 모이면 바로 밀고하게 했다. 수배망을 벗어나기 위해 위장 부부로 동거하는 일이 있었다. 이 때 남성을 지켜주는 여성을 하우스키퍼라고 불렀다. 엄혹한 시대 운동가에게는 생명이 걸린 문제였다. 이재유는 수배되자 하우스키퍼를 구하는데 첫 상대가 이순금이었다. 그러나 이순금이 3주만에 체포되자 이재유는 박진홍을 다시 하우스키퍼로 얻는다. 이재유와 박진홍은 5개월 동거하다 아기까지 생겼다. 이순금은 이재유를 좋아했기 때문에 박진홍이 임신해 감옥에 들어오자 질투로 간수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며칠이나 말싸움을 해 당대 신문에 실린다. 그러나 두 사람은 곧 화해하여 죽을 때까지 우정을 유지한다.[4]

전술했듯 이순금이 체포된 뒤, 이재유도 체포되었다가 탈출한다. 이순금은 9월 잠시 석방되기도 했지만 탈출하거나 하지는 못하고 후술하듯 1935년 12월 징역형을 받는다. 그런데 9월 석방되었을 때 이순금과 박진홍은 잠시 경찰의 수사망을 벗어나 이재유와 이관술의 만남을 주선하는 사회주의 독립운동사에서 의미있는 역할을 수행한다.

1934년 1월 일본 경찰에 검거된 사건의 결과 1935년 12월 경성지법에서 징역 2년을 선고받았다. 이순금이 석방된 것은 1937년 7월 15일. 박진홍이 제일 먼저 석방된 이순금을 찾아 왔다. 박진홍은 이관술과 함께 활동하고 있었다. 이재유가 체포된 후 이관술이 혼자 전국을 누비며 공산당 재건을 도모하고 있을 때였다. 이순금은 박진홍이 말해준대로 7월 17일 오빠를 만나러 여의도로 들어간다. 몇 해 만의 만남에 초조해하던 이순금은 처음에는 농부로 변장한 오빠를 알아보지 못한다. 이관술은 교사 시절에는 언제나 양복 차림 등 도시인 복장으로 활동했기 때문이다. 바로 앞에 와서야 오빠임을 알아채고 이순금은 눈물을 쏟았지만 이관술은 안부 말 한마디만 하고는 조직 재건에 대한 논의를 시작한다. 해방 후 이순금은 그런 오빠의 모습에서 위대한 혁명가의 면모를 느끼고 이런 혁명가를 오빠로 가졌다는 데 감격했다고 술회한다.[5]

그러나 7월 18일 이순금은 잡히게 된다. 당시 상황은 임경석 교수가 임경석의 역사극장 이관술 편에 잘 묘사해놓았으니 참고. 임경석의 역사극장: 15년간 일본 수배망 뚫은 ‘신출귀몰’ 혁명가 이관술
파일:이순금체포.jpg
1937.7.28. <조선일보> 이순금 4년 만에 출옥하자마자 체포

이순금은 출옥 나흘 만에 또다시 옥중에 갇히게 됐다. 이렇다 할 ‘범죄행위’가 없었지만 일종의 괘씸죄였던 것으로 보인다. 일본 경찰이 사활을 걸고 수년째 추적하는 비밀운동의 지도자 이관술을 눈앞에서 놓친 데 대한 보복이었다. 이순금은 장장 9개월간이나 수감됐다.출처: 임경석

이순금과 박진홍은 석방되었다 또다시 나란히 검거되어 장기간 옥살이에 들어간다. 감옥을 제 집처럼 드나든 것이다.

2.5. 경성콤그룹 활동

박진홍은 아직 감옥에 있고 이순금이 먼저 석방되자 이관술은 다시 이순금을 찾아 온다. 1939년 1월 겨울, 두 사람은 김삼룡을 찾아간다. 김삼룡은 새 항일 비밀결사를 만들자는 이관술 오누이의 제안을 수락하는데, 경성콤그룹의 태동이었다.[6] 경성콤그룹 활동을 할 때는 체포되지 않고 성공적인 지하활동을 한다.

이후 박헌영이 경성콤그룹에 들어와서 이순금은 박헌영의 하우스키퍼가 되고 육아노동도 도와주는데 이순금 인생 최대의 실수이다. 사회주의 독립운동가는 박헌영과 엮이기만 하면 부속품 취급받는 뚜렷한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이순금은 박헌영을 만나기 전 이미 10년의 투쟁경력을 가진 당대 가장 유명한 혁명가였다. 그리고 이순금이 박헌영을 좋아했다는 사료는 전혀 없다. 그냥 아지트키퍼 관습을 오해한 것. 참고로 이순금이 김삼룡 부인 이옥숙과 동일인이라는 것도 틀린 정보로 무려 이순금 오빠 이관술 수기에서 이미 이를 부정하는 서술이 나온다. 이순금 오빠 이관술보다 이 문제에 대해 더 잘 아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또한 각종 회의에 이순금과 이옥숙이 동시에 참석한 기록이 있다.

1938년 가을에 순금이 출옥했다는 소식을 듣고 수원 화홍문 앞에서 순금을 만난 다음 재회를 약속하고 다시 대구로 갔다가 39년 정월에 충북 충주로 가서 김삼룡 동무와 처음 만나 경성서 만나기로 상약(相約)을 하고 그길로 상경하였다. 상경 후에는 지금 삼룡 동무의 부인인 옥숙 동무를 통하여 이문정(里文町) 대창직물공장에 ‘콩그룹’을 만들기에 성공하여 5-6개의 공장세포 근 10개의 가두세포를 형성해가던 중(후략)
이관술, 조국엔 언제나 감옥이 있었다, 1946

2.6. 광복 후 정치인으로서의 활동

광복 후 이순금은 조선공산당 서열 12위로 이주하와 나란히 서기국원을 맡는 한편 조선인민공화국 중앙위원이었다. 여성 공산주의자 중 단연 최고위직이었다.[7]
<colbgcolor=#955251><colcolor=#fff> 조선인민공화국 중앙인민위원회
중앙인민위원 이승만, 여운형, 허헌, 김규식, 이관술, 김구, 김성수, 김원봉, 이용설, 홍남표, 김병로, 신익희, 안재홍, 이주상, 조만식, 김기갑, 최용달, 리강국, 김용암, 강진, 이주하, 하필원, 김계림, 박낙종, 김태준, 이만규, 이여성, 김일성, 정백, 김형선, 이정윤, 김점권, 한명찬, 유축운, 리승엽, 강기덕, 조두원, 리기석, 김철수, 김상혁, 정태식, 정종근, 조동우, 서중석, 박문규, 박광희, 김세용, 강병도, 이순근, 김무정, 장기욱, 정진태, 이순금, 이상훈
후보위원 최창익, 황태성, 홍덕유, 이청원, 최근우, 김준연, 한빈, 양명, 최원택, 안기성, 정재달, 김오성, 권오직, 김두수, 장순명, 이광, 최성환, 이림수, 현준혁, 김덕영
고문 오세창, 권동진, 김창숙, 정운영, 이시영, 홍명희, 김상은, 장도빈, 김용기, 김관식, 리영출처

9월 11일 서울에서 발표된 중앙위원회 명단은 다음과 같다. 앞에 있는 숫자가 서열이다.
조선공산당 중앙위원회
중앙위원
1.박헌영, 2.김일성, 3.이주하, 4.박창빈, 5.리승엽, 6.강진, 7.최용건, 8.홍남표, 9.김삼룡, 10.이현상, 11.이주상, 12.이순금, 13.무정, 14.서중석, 15.이인동, 16.조복례, 17.권오직, 18.박광희, 19.김점권, 20.허성택, 21.김용범, 22.홍덕유, 23.주자복, 24.문갑송, 25.강문석, 26.최창익, 27.김근, 28.오기섭
중앙검열위원
1.이관술, 2.서완석, 3.김형선, 4.최원택

이관술 등 중앙검열위원을 중앙위원과 서열을 비교하면 어떨지 궁금한데 아래를 보면 적어도 중앙검열위원 서열 1위는 중앙위원 서열 2위에 밀리지 않았던 것 같다.

조공 중앙위의 구성은 시기별로 일부 차이를 보이고 있지만 김일성은 박헌영, 이관술에 이어 서열 3위로 올랐다.
기광서, 해방 후 김일성의 정치적 부상과 집권과정, 역사와 현실 48호, 253쪽


1945년 12월에는 풍문여고에서 열린 전국부녀총동맹 회의에 열렬한 환영을 받고 등장해 조선공산당 간부 자격으로 정치 정세를 보고했다. 대회에 앞서 주최측은 '조선의 해방을 위해 모든 정력을 다 바치고 일본의 탄압에도 굴하지 않고 국내에서 용감히 싸운 이순금, 허정숙 등 동지에게 대회 이름으로 환영과 감사의 박수를 보내자'는 결의문을 채택한다.[8]

2.7. 오빠 상실

1946년 이관술이 정판사 사건으로 누명을 쓰고 검거되자 오빠의 투쟁사를 알리는 애절한 글을 현대일보에 쓴다.

나는 이 검거의 소식을 듣고 의아심을 가지지 않을 수 없으며 아무리 생각하여도 참말로 들을 수 없다. 해방조선에서 오빠와 같은 애국자를 다시 그 자유를 뺏는다 함은 아무리 하여도 정말 같지 아니하다. 이것은 남매간이라는 사정(私情)에서가 아니요, 조선의 자주독립을 위하여 전 민족 해방운동을 위하여 특히 근로인민의 이익과 생활향상을 위하여 잔인무도한 일제폭압 밑에서 20년간 개인의 생명과 권위와 가정을 희생하고 지하에서 토막 속에서 감옥 속에서 혈전고투해온 진정한 애국주의자임을 구체적 투쟁 속에서 가장 잘 알며 확실히 인정하기 때문이다.

오빠 이관술 동지는 1930년대부터 조선민족해방투쟁에 그 몸을 바쳤으니 일제 경찰놈들의 혹독한 총칼이 그의 전신에 집중하였으나 사회에서나 감옥에서나 놈들 앞에서나 민중 속에서나 장소를 불문하고 낮이나 밤이나 일심전력 전민중의 이익을 위하여 행동하여 투쟁하였었다. 그러므로 그의 생활은 반생을 통하여 혁명적이었으며 과감하고 용감하였으며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나는 진실한 이 애국자의 뒤치다꺼리를 할 때 그 치다꺼리가 확실히 우리민족 해방운동의 한 사업인 것을 매우 만족히 생각하고 항상 기쁨으로 처리하였었다. 이러한 애국자를 민중으로부터 빼앗아감은 무슨 이유인가? 더욱이 추악한 죄명까지 씌워 잡아간다 함이야 꿈엔들 상상할 일인가!

이순금, 오빠 이관술 동지 검거의 소식을 들고서


이관술이 투옥되자 이순금은 월북한다. 이관술은 전쟁이 발발하자 대전형무소 학살 사건으로 학살당해서 오빠와 다시는 못 만나게 된다. 전쟁 중 오빠가 죽은 것을 알고 통곡을 했다고 한다. 많이 여러 번 울었을 것이다.

2.8. 북한에서의 사라짐, 동명이인

그 후 박헌영 재판 증인 목록에 이순금이 들어있다. 어떤 증언을 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런데 박헌영 재판에서 증언을 한 남로당원 출신은 권오직, 이주상, 이인동, 조일명, 정태식 등 많은데 이순금이 여자라 튀어서 그런지 대한민국의 박헌영 팬들이 이순금만 집어서 욕한다.

예를 들면 박병엽 회고 <김일성과 박헌영 그리고 여운형>에 따르면 김형선(김명시의 오빠)은 박헌영에 대해 다음과 같은 말을 한 적 있다.

김형선: 박헌영이 6년 만기 출옥했다고 하는데 1927년에 보석된 것을 고려한다면 6년은 말도 안 되는 형량이다. 오히려 거짓말했기 때문에 더 중형을 때렸을 텐데 만약 진짜로 6년형을 내렸다면 그 형 자체에도 의문이 있다. 같은 사건으로 체포된 사람 중 최고간부가 다른 사람보다 형을 낮게 받은 것은 상식적으로 이해가 안 된다. 박헌영은 일제의 임무를 받고 공정위원장 간판을 가지고 콤그룹에 끼어들었다.


또한 권오직, 이주상, 이인동은 경성콤그룹 사건 때 박헌영만이 체포되지 않은 것이 이상하다고 문제삼았다.

권오직: 내가 체포될 때 일제 경찰이 조직의 명단을 다 입수하고 거처를 다 알고 급습했다. 이 명단이 어디에서 나왔겠는가. 내가 이현상보다 늦게 체포되었지만 김삼룡이나 이현상을 의심하지는 않았다. 8.15 이후 김삼룡은 제주도 출신으로 붙들렸다 도중에 나간 강문석을 의심했다. 어찌되었든 누군가에 의해 조직명단이 넘겨진 것은 사실이다.


이주상: 박헌영이 명단을 넘겨주었다.


이인동: 박헌영이 다 밀고했다. 벽돌공장에 숨어버려 일본경찰이 못 찾았다는 것은 당시 일본경찰의 조직력을 무시한 눈 가리고 아웅하는 소리다.


조일명은 1946년 초부터 박헌영이 미국 간첩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고 말했다. 그는 박헌영의 지시로 출판물에 박헌영을 조선 인민의 지도자인 것 같이 선전하였다고 증언했다.

그리고 원경스님의 친척인 정태식은 광복 직후 나붙은 '박헌영은 우리의 부름에 답하라'는 벽보 등 선전물이 사실은 박헌영이 붙이라고 시켜서 붙인 것이라고 말했다.

그런데 대한민국의 박헌영 팬들은 김형선, 권오직, 이주상, 이인동, 조일명, 정태식을 욕한 적은 없고 이순금만을 집어서 욕하는데 이 현상은 솔직히 이순금이 여자라 제일 만만해서라는 이유 외에는 설명할 수 없다. 이외에 이 현상을 설명할 수 있는 다른 이유가 있는가? 귀한 딸이자 당대 최고 혁명가 중 한 사람인 이순금이 박헌영 아들 돌보는 육아노동에 종사하고 하우스키퍼도 해서 지켜줬던 은혜가 있으면 고마워서 이순금을 빼고 욕해도 모자랄 판인데, 더 잘해준 사람만을 굳이 집어서 욕하는 건 모든 사회주의 독립운동가는 박헌영을 위해 일하는 게 당연하다는 '호의가 계속되면 권리인 줄 안다'는 경우에 들어맞는 사례이다. 이순금 외 다른 증인 욕하는 것도 이상하다. 박헌영 팬이 박헌영 숙청에 대해 욕하려면 김일성 방학세 등을 욕하는 게 정상이다. 그런데 사회주의사 관련 대중서와 인터넷 글을 보다 보면 많은 박헌영 팬은 숙청을 말할 때 굳이 이순금만을 향해 욕 한 마디씩 던진다. 이순금의 사례에서 알 수 있듯 이렇게 사회주의 독립운동가는 박헌영과 엮이기만 하면 박헌영에게 충성을 바치는 것이 당연한 부속품 취급받으니 박헌영과 엮이지 않은 사람은 행운이다. 그리고 이순금 오빠 이관술은 무고한 상태로 김일성과 박헌영이 일으킨 전쟁의 학살 피해자가 되었는데 전쟁범죄 가해자 팬이 전쟁범죄 피해자의 동생을 집어서 욕한다니 얼마나 부조리한 일인가? 그리고 면면을 보면 박헌영 비판에 가담한 권오직, 이순금, 정태식, 이주상, 이인동 등은 일제 말기 끝까지 변절하지 않은 투사들인데 이들이 진짜 자기가 살려는 목적으로 불의에 가담한 것일까? 그런 사람들이었으면 독립운동을 진작 포기했을 것이다. 당대 공산주의자들 얘기를 들어 보면 남로당계 빨치산까지도 박헌영이 간첩이라고 믿었다. 이들은 살려고 그런 것이 아니라 진짜 박헌영이 간첩이라고 생각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아니면 고문버티기를 못 했든지이다. 어떻게 이걸 욕할 수가 있나? 이순금을 욕하는 박헌영 팬들은 일관성을 유지하기 위해 고문을 끝까지 못 버틴 고문 피해자들을 볼 때마다 욕해야 할 것이다.

그 뒤 리순금이라는 이름의 사람이 최고인민위원으로 1989년에 예멘 대사를 영접했다는 자료가 있어 이순금 관련 글 쓰는 몇 안 되는 사람들은 다들 이순금이 이때까지 살아서 고위직을 하고 있었다고 추정하는데, 동명이인이다. 우선, 이관술의 딸이 이산가족 상봉 신청을 했으나 응답이 없었다.[9] 또한, 이순금이 계속 활동했다면 쭉 고위직 명단에 이름을 올리고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명단에도 꾸준히 올랐을텐데, 현실은 리순금 이름이 1980년대 즈음 갑자기 나타난다.

다음은 북한이 만든 조선향토대백과 사전 리순금 문서이다.

[경력]
최고인민회의 제8기 대의원(1986.11)
최고인민회의 제10기 대의원(1998.7, 제400호 선거구)
천삼협동농장 관리위원장

[주요활동]
김정일 농장 현지지도 동행(1999.6)
공동사설 관철을 위한 천삼협동농장 궐기모임 참석(2000.1)
북한의 조선향토대백과 사전 리순금 문서


1986년 갑자기 8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으로 튀어나와서 1998년 10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을 하고 2000년에도 활동. 딱보면 동명이인이지 어딜 봐서 저 리순금이 독립운동가 이순금인가? 90세 가까운 할머니가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을 하며 김정일 농장 현지지도를 동행할까? 그런 90세 할머니가 있었다면 한국에서도 유명해지지 않았을까? 이순금 관련 글 쓰는 몇 안되는 사람들이 이순금이 북한에서 숙청을 피하고 고위직을 했다고 너무 심하게 확신해서 의심없이 받아들일 수 있는데 막상 찾아보면 1980년대의 동명이인이 등장하기 전까지는 고위직 명단에서 찾을 수가 없다.

만약 이순금도 숙청되었다면 오빠 누명쓰는 걸 보고 올라간 북한에서 여동생까지 몰락한 남북 모두에게 버림받은 비극이다. 북한은 숙청된 사람들의 명예를 종파분자 운운하며 훼손한다. 게다가 대한민국에서도 박헌영 팬들이 이순금 혼자 살아남았다고 이순금만 집어 욕하는데 사실은 숙청당한 거라면 그동안 비난받은 게 얼마나 불쌍한가? 이관술 이순금 남매는 누구보다 희생적으로 독립운동했는데 다른 몰락한 국내파 사회주의자와 비교해도 누구보다 억울한 이상한 이유로 비난받는다.
[1] 그 외 북한에서 이순금이 맡았다고 알려진 관직은 동명이인일 가능성이 높음.[2] 울산. 댓글 오타[3] 출처 : 안재성, 잃어버린 한국 현대사[4] 출처 : 안재성, 잃어버린 한국 현대사[5] 출처 : 안재성, 잃어버린 한국 현대사[6] 출처 : 안재성, 잃어버린 한국 현대사[7] 출처 : 안재성, 잃어버린 한국 현대사[8] 출처 : 안재성, 잃어버린 한국 현대사[9] 출처 : 안재성, 잃어버린 한국 현대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