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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민주당 수석총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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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정치인 장덕수 張德秀 | Jang Deok-su | |
<colbgcolor=#008000><colcolor=#fff> 출생 | 1894년 (고종 31) 12월 10일 |
황해도 재령군 남율면 | |
사망 | 1947년 12월 2일 (향년 52세) |
서울특별시 제기동 자택 | |
총기에 의한 과다출혈으로 인한 사망 | |
본관 | 결성 (結城) |
아호 | 설산 (雪山) |
직업 | 정치가, 언론인, 교수 |
학력 | 와세다대학 정치경제학과 오리건 주립대학교 언론학과 런던 대학교 대학원 사회과학 석사 오리건 주립대학교 대학원 언론학 석사 컬럼비아 대학교 대학원 경제학 석사 컬럼비아 대학교 대학원 정치학 박사 |
종교 | 개신교 |
정당 | [[한국민주당| 한국민주당 ]] |
주요 경력 | 보성전문학교 교수 동아일보 부사장 한국민주당 외무부장 한국민주당 정치부장 |
비고 | 친일파 708인 명단 등재 친일반민족행위자 명단 등재 친일인명사전 등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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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일제강점기부터 미군정 시기까지 활동한 교육자, 언론인, 정치인.황해도 재령군 출생으로 호는 설산(雪山). 본관은 결성(結城)이다.#
독립운동을 하다가 1938년 흥업구락부 사건으로 체포되어 고문 당하고 풀려난 후 변절한 친일반민족행위자로 분류되나, 후술하듯이 논란은 존재한다.
광복 후 한국민주당의 발기인으로 정치 활동을 하다가 1947년 김구가 이끄는 한국독립당 소속 배희범, 박광옥의 암살 테러에 희생되었다.
2. 생애
1894년 황해도 재령군 남율면 강교리 나무리벌의 빈농가에서 장붕도(張鵬道)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둘째 형인 장덕준(張德俊) 역시 동아일보 창간에 참여했으며 훈춘 사건을 취재하다 일본군에게 살해당한다.[1] 동생 장덕진(張德震)도 독립운동에 가담하여 상해 임시 정부 행동대원으로 상하이에서 독립 운동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중국 상하이 카지노를 털다 순사하였다.서당을 다니다 1901년 연의 학교에 입학하며 신학문을 접했다. 1907년 14살에 아버지를 여의면서 가세가 더욱 기울었다. 생계를 위해 몇 년간 일본 영사관 역할을 하던 진남포이사청에서 급사로 일했다. 1911년 판임관 시험[2]에 합격했으나, 임용을 포기하고 일본 와세다대학 정치 경제학부에 입학한다. 이 때 송진우, 김성수를 만났다고 한다.
학교 졸업 후 상하이로 건너가 여운형, 김규식과 신한 청년당을 결성하고, 일본에 가서 2.8 독립 선언에 관여하여 3.1 운동이 일어나는 데에 기여했다. 이 때문에 일경에 체포되어 전라남도 하의도에 유배되기도 했으나 여운형이 일본 당국의 도쿄행 요구에 수락하는 조건으로 장덕수를 통역으로 데리고 가겠다 하여 감금에서 해제, 일본을 다녀가기도 했다. 전일본 대학생 웅변 대회에서 우승할 만큼 장덕수의 일본어가 뛰어났기 때문이다. 이런 일련의 사건과 여운형이 "설산 형"에게 보낸 편지들을 읽어 보면 알 수 있듯이 한때 장덕수와 여운형은 가깝게 지냈다.
1923년 모습 |
미국에 체류하는 동안 허정 등과 함께 삼일신보사 발기인으로 그 설립에 참여하고 주필로 활동했다. 1934년 4월부터 9월까지 대한민국 임시정부 재무부 주미 제5행서(뉴욕) 재무 위원을 잠깐 맡아 활동하기도 했다. 1936년 귀국하여 동아일보 부사장으로 복귀하였으나, 귀국하자마자 8월 25일 터진 일장기 말소사건의 여파로 부사장직을 사임하게 된다. 같은 해 12월 보성전문학교 교수가 되어 강단에 서기도 했다. 1938년 동아일보 취체역(대표 자리)으로 다시 복귀했으나, 그 해 9월 장덕수가 한때 활동했던 '동지회' 활동으로 '흥업 구락부 사건'[3]에 연루돼 체포되었으나 전향서를 쓰고 기소유예로 풀려났다. 이와 동시에 "조선 민족 혁명을 목적으로 한 동지회에 가입해 활동한 것이 교육자로서 무지했으므로 이에 대해 책임지고 사직한다."는 내용의 사직서를 보성 전문 학교에 제출하고 사직하였으나, 1940년 다시 교수로 복귀하였다.
중일전쟁 이전까지만 해도 장덕수는 '합법적인 공간'에서 나름대로 활발한 독립운동과 사회활동을 했지만, 흥업 구락부 사건 이후 사상 보국 연맹, 국민 총력 조선 연맹, 대화숙(야마토주쿠) 등 어용 단체에 참여해 그 단체에서 주관하는 시국 강연에 적극 나서는가 하면 내선일체를 찬양하는 글을 기고하거나 발표하는 등 적극적인 친일활동에 나섰다. 이러한 흑역사로 인해 뒷날 1980년대 친일파 연구가 임종국이 쓴 한국의 친일파 99인에 수록되었고, 민족문제연구소 발간 친일인명사전에도 수록되었다.
다만, 1940년 총독부로부터 창씨개명 권고를 받고도 끝내 거부한 점, 1941년 오사카에서 조선독립청년단이라는 비밀 조직을 결성하려다가 체포된 사실이 있는 점, 그의 형 장덕진·동생 장덕준이 독립운동을 하다가 희생되었고 일제가 패망할 때까지 장덕수를 요시찰 명단에 두고 있었던 점 등에 비추어 논란이 있고, 1943년 총독부 학무국에서 보성전문학교 전임교수 전원을 초청하여 학병 모집을 독려하는 만찬회가 있었는데 이 자리에서 장덕수가 분개하여 “그렇게 충성스러우면 왜 학생들보다 먼저 지원하지 않느냐”며 친일 교수들을 꾸짖고 일본인인 학무국장 오노와 경무국장 단게까지 질타했다는 증언도 있다. 한편, 친일파 연구에 가장 중요한 자료인 한국독립당 김승학의 보고서에 따르면[4] “원래 미국·영국에 호의를 가졌으나 일제에는 호감을 가지지 아니하였고, 친미·배일(排日)사상의 소지자였으나 위협을 느끼고 직업을 유지하기 위해 친일적 태도를 가지고 협력한 자”로 분류되어 있다.
진보 성향의 역사학자 한홍구도 "장덕수의 친일 문제도 다시 볼 필요가 있다"면서 "장덕수는 보성전문 학생들에게 학도병 나가라는 연설을 했다. 내가 "장덕수가 학도병 연설을 하고 젊은이를 군대로 내보내지 않았느냐"라고 하니까 아버지께서 "야 이놈아, 내가 그 연설을 들었다"고 하시더라. 그러면서 장덕수가 그 연설을 울면서 했고, 아버지와 학생들도 울면서 들었다는 거다. "장덕수가 진짜로 친일파여서 그런 연설을 했으면, 이철승 같은 깡패가 돌아와서 장덕수를 때려죽였지 가만뒀겠느냐"며, 학도병으로 갔던 학생들이 살아 돌아와 장덕수를 부둥켜안고 울었다고 하시더라. 학도병 연설을 잘했다고 할 수는 없지만, 당시 학도병들은 장덕수를 아무도 친일파라고 보지 않았다는 거다."라고 평가했다. #
광복 이후 1945년 9월에 한국민주당 발기인으로 참여, 결성하는데 커다란 활동을 했다. 1945년 9월부터 1947년 12월 사망할 때까지 한국민주당 외무 부장과 정치 부장을 지냈고, 1945년 11월에는 미군정청 조선 교육 심사 위원회 사범 교육 분과 위원에 선임되었다. 같은 해 12월 동아일보가 복간되면서 취체역(이사)을 맡았다.
3. 암살
경향신문 (1947년 12월 4일) |
12월 2일 장덕수가 한민당 간부들과 제헌 국회 공천 문제를 의논하고 있을 때 각각 경찰 제복과 검정 외투를 입은 두 청년이 찾아온다. 동대문 경찰서에서 왔다며 의심을 무마한 이들은 M1 카빈으로 장덕수를 두 차례 저격한다. 장덕수는 백병원으로 가는 택시 안에서 절명한다. 향년 53세.
박광옥, 배희범 등 범인과 그 일당이 이틀 만에 체포됐다. 이들은 속한 대한 학생 총연맹은 김구가 총재로 있는 단체였다. 이로 인해 김구, 조소앙, 엄항섭 등 한국독립당 세력이 장덕수 암살의 배후로 지목됐고, 그 중 일제강점기 때부터 김구의 측근으로 맹활약한 김석황은 체포됐다. 이전부터 합당 무산, 친일 문제, 미소 공동 위원회 참여 문제를 두고 한민당과 한독당은 갈등 관계에 있었기 때문에 의심은 짙어졌다. 특히 한민당-한독당 합당 반대파 중 최고 거물이었던 장덕수와 합당을 밀어붙이던 김구의 갈등은 잘 알려져 있었다. 결국 김구 역시 재판에 소환되는 등, 장덕수 암살 사건으로 한국 독립당은 큰 타격을 입었다. 당시 김구는 공판에서 김석황이 "김구의 지시로 살해했다"고 증언하고 손정수, 조상항, 신일준의 증언도 일치하는 바람에 법적 위기에 놓였지만, 이들 증언을 완강하게 부인하면서 빠져나갔다. 그러나 당시 3월 16일자 <경향신문>에 실린 관련 기사를 보면, 정작 피고인들은 공판에서 김구의 지시라는 것은 "완전한 모략"이라고 기존 증언을 번복하면서 "죄 없는 사람을 왜 그러는가"라고 항의하는 모습을 보였다. 당시 경찰의 수사가 혹독한 고문을 통해서 이뤄졌다는 점도 고려해야 할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김구가 장덕수 암살의 배후라고 단정 지을 수는 없다.
1948년 박광옥과 배희범에게는 사형이 선고됐고, 김석황 등 한국독립당 간부에게는 종신형이 선고된다. 박광옥과 배희범의 사형은 1950년 6.25 전쟁 발발 직후 집행된다. 이 때 김석황 역시 함께 사형되어 일각에서는 이승만이 장덕수 암살의 배후가 아니냐는 시각도 있다. 미소공위 참여를 통해 미국에 적극적으로 협조했던 장덕수와 달리 이승만은 미소 공위 없이 조기 선거를 통해 자신이 집권하는 것을 원했기 때문에 장덕수가 암살된 시점에서 두 사람 역시나 긴장 관계에 있었다. 그러나 이승만 역시나 어디까지나 의심과 가능성의 영역인 것이지, 장덕수 암살의 배후라고 단정 지을 수는 없다.
다른 후보로는 조소앙이 있는데 허정의 회고록에서 당시 허정은 장덕수가 암살 당한 날, 조소앙을 찾아가 "왜 설산을 죽였오"라고 물었더니 너털 웃음만 터뜨리며 말을 피했다고 한다.
본래 호형호제할 정도로 친했던 이승만과 김구[6]는 이 사건을 기점으로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너게 된다. 1947년 한때 김구가 이승만 등과 함께 남한 단독정부 수립에 찬동했다가 다시 완강한 단독정부 반대론으로 돌아서고, 방북하여 김일성과의 회담에 나섰던 것도 장덕수 피살을 계기로 이승만과 결별한 일이 결정적이었다.
4. 기타
- 1920년대 ~ 1930년대 미국 유학 시절에 김활란한테 청혼했다가 차였다고 한다(...).
그리고 둘 다 친일반민족행위자로 전락했다.박은혜를 장덕수에게 소개해 준 사람도 김활란이다.
- 미군정이 수사하여 밝힌 사실에 의하면 암살 명단에는 고하 송진우를 비롯하여 장덕수는 물론 낭산 김준연(金俊淵), 윤치영 등 포함하여 27명이 있었다고 하였다. 이들은 대부분 한국민주당이거나 그와 관련이 깊은 인사들이었으며 이 소식을 들은 이승만은 그럼에도 만약 김구를 체포한다면 거족적으로 군정에 대항하겠다고 하지에게 선언했다. 이 일로 한민당은 김구를 두둔하는 이승만에게도 석연찮은 눈으로 보게되었다.[7]
- 장덕수를 습격한 박광옥은 인촌의 집에서 일한 가사 도우미의 아들이었다. 김성수가 조병옥에게 추천해 경찰에 임용됐다. 1948년 3월 15일, 오전에 열린 장덕수 피살 사건 공판에서 김구의 증인 신문 때에 법무장교와 김구 사이에 격렬한 논쟁이 벌어지자, 암살범인 박광옥은 피고석에서 김구 선생을 모욕한다고 고함을 지르며 혁대를 풀어들고 횡포를 벌여 미군 헌병의 제지를 받기도 했다.[8]
- 장지는 망우리공원묘지에 있다. 부인 박은혜와 합장하였다. 묘지의 연보비에는 동아일보 창간 당시 직접 쓴 사시(社是)가 적혀 있다. 내용은 '조선 민중의 표현기관으로 자부하노라. 민주주의를 지지하노라. 문화주의를 제창하노라'.
5. 대중매체에서
- 1973년작 영화 <광복 20년과 백범 김구>에선 배우 방수일이 연기했다.
- 1981년 MBC 드라마 <제1공화국>에서는 배우 한인수가 연기했다.
- 1985년작 KBS1 대하드라마 <새벽>에선 배우 김성원이 연기했으며, 1990년작 <여명의 그날>과 1994년 2월 20일자 <다큐멘터리 극장>에서도 같은 배역을 맡았다.
[1] 한국 최초의 순직 언론인이다.[2] 지금의 7급 공무원, 9급 공무원에 해당하는 하급 관료를 뽑는 시험이었다.[3] 수양 동우회 사건과 거의 같은 사건이다.[4] 김승학은 임시정부 및 광복군에서 활약하다가 광복 후 한국독립당에서 활동하고 건국유공자 심사를 맡았던 인물로, 친일파 명단을 직접 작성하고 자세한 기록을 남겨 그의 보고서는 친일파 연구에 있어 '당대'의 자료로서 중요한 가치를 가진다.[5] 미군정 사령관 존 리드 하지는 이승만을 정계에서 제거하려 했을 정도였고 이에 격분한 이승만도 존 하지에 공공연히 반대하였다.[6] 이승만이 임시정부에서 여러 혐의나 정치적 문제로 위기에 처할때마다 이승만을 보호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고, 사실상 한몸이었기에 안창호, 노백린 같은 독립운동가들을 김구와 이승만이 배척하는데 큰 힘을 쓸 수 있었다.[7] “反共 · 建國 에 寧日없던 나날 , 李承晩 , 光復主役 들의 8·15前後<特輯>”, 《新東亞》, (東亞日報社) , 1977년 8월, p. 108-114[8] 許政, 《내일을 위한 證言 : 許政回顧錄》, 1979, 샘터사, p. 14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