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19-06-14 01:07:27

블라디미르 레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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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me 100: The Most Important People of the Century
지도자 부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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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어도어 루스벨트 블라디미르 레닌 마거릿 생어 프랭클린 D. 루스벨트 안나 엘리너 루스벨트
아돌프 히틀러 윈스턴 처칠 모한다스 카람찬드 간디 다비드 벤구리온 마오쩌둥
마틴 루터 킹 아야톨라 루홀라 호메이니 마가렛 대처 로널드 레이건 미하일 고르바초프
레흐 바웬사 넬슨 만델라 요한 바오로 2세 호찌민 탱크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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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위2위3위4위
알렉산드르 넵스키 표트르 스톨리핀 이오시프 스탈린 알렉산드르 푸시킨
5위6위7위8위
표트르 대제 블라디미르 레닌 표도르 도스토옙스키 알렉산드르 수보로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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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레닌.jpg
이름Влади́мир Ильи́ч Ле́нин
블라디미르 일리치 레닌
본명Влади́мир Ильи́ч Улья́нов
블라디미르 일리치 울리야노프[1]
국적러시아 제국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518px-Flag_of_Russian_Empire_for_private_use_%281914%E2%80%931917%29_3.svg.png러시아 공화국 파일:러시아 국기.png소련 파일:소련 국기.png
출생1870년 4월 22일, 러시아 제국 심비르스크
사망1924년 1월 21일 (53년 274일), 소련 러시아 SFSR 모스크바 주 레닌스키 구 고르키
학력카잔 황립대학교 중퇴
상트페테르부르크 황립대학교 법학 학사
직업정치인, 정치경제학자, 정치철학자, 노동운동가, 혁명가, 작가, 변호사
정당노동계급해방투쟁동맹 (1895년–1898년)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 (1898년–1912년)
소련 공산당 (1912년–1924년)
종교무신론
신체165cm
배우자나제즈다 크룹스카야
자녀없음
서명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Lenin_-_signature.png

1. 개요2. 생애
2.1. 어린 시절2.2. 젊은 혁명가2.3. 1905년 혁명과 2월 혁명에서의 역할2.4. 10월 혁명소련의 건설2.5. 신경제정책과 최후
3. 레닌에 대한 평가
3.1. 옹호3.2. 비판
4. 뒷 이야기
4.1. 민족자결주의와 아시아 독립운동 영향4.2. 그 외 일화와 성격들
5. 어록6. 저서7. 레닌의 이름을 딴 지명, 사물
7.1. 지명7.2. 사물
8. 매체
8.1. 역사서
9. 관련 노래 가사


1. 개요

"만약 사회주의가, 모든 사람의 지적 수준이 그것을 용인할 정도로 발전한 후에야 해결될 수 있다면, 우리는 최소한 5백 년 동안은 사회주의를 보지 못할 것입니다."
1917년 11월 14일 레닌의 연설[2]

제정 러시아사회주의 혁명가이자, 소련의 정치인이며 국부. 본명은 '블라디미르 일리치 울리야노프(Влади́мир Ильи́ч Улья́нов)'이며 흔히 알려진 '레닌(Ленин)'은 1902년 경부터 사용한 필명 겸 가명이다.[3][4]

러시아 제국의 혁명조직인 볼셰비키의 지도자였으며, 소련 인민위원회 초대 위원장 겸 소련 공산당의 창립자였다.[5] 공산주의자들에게는 마르크스주의·공산주의 이론을 발전시킨 레닌주의의 창시자이자 칼 마르크스 이후 가장 위대한 사상가인 동시에 뛰어난 혁명 지도자로 추앙받는다. 반공주의자들에게는 전세계를 적화시킬 뻔 한 위험 인물. 같은 좌파 중에서도 무장 봉기나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반대한 멘셰비키, 즉 사민주의자아나키스트들에게는 평이 갈린다.

2. 생애

2.1. 어린 시절

1870년 볼가 강변 심비르스크의 장학사 일리야 니콜라예비치 울리야노프의 차남으로 태어난다. 레닌의 아버지는 볼가강 서안에 거주하던 튀르크계 추바시 인이었고, 할머니는 칼미크 인이였다. 이때문에 레닌의 외모는 백인보다 황인에 더 가까웠다. 심지어 어머니 알렉산드라는 기독교로 개종한 아슈케나짐으로 가계의 1/4은 돌궐족, 또 1/4은 몽골족, 1/2는 유대인으로 레닌은 주류 슬라브계와는 완전히 무관한 배경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레닌은 반유대 정서가 심한 동유럽에서도 유달리 심해 유대인 집단 학살인 포그롬이 발생할 정도로 극단적이였던 러시아 제국에서 태어나 가족사를 숨기려고 애썼다.

어머니 알렉산드라는 언어에 재능이 있어 4개의 국어를 구사했고, 직업은 교사였다. 아버지 일리야는 농노 출신이었지만 고급 교육을 받을 수 있었고, 이후 교육 공무원으로써 공적을 인정받아 하급 귀족의 칭호를 받을 정도로 유능했다. 일반 농민이나 노동자와는 괴리된 중산층 계급 출신인 레닌은 이러한 뒷배경을 딱히 숨기거나 부끄러워 하지는 않았고, 종종 사적인 경험과 연관지어 쁘띠부르주아적 정서에 대한 이해심을 보였다.[6]

레닌과 형제자매들은 당시 기준으로 매우 높은 수준의 교육을 받았다. 부모 둘 다 교육에 종사했고, 재산도 어느 정도 있었으니 당연한 선택이였다. 그리고 차르 충성 교육또한 하였는데, 이는 당시 기준으로는 매우 당연한 일이였다. 그래서 레닌과 형제 자매들은 어학·역사·문학·음악 등 다양한 방면으로 교육을 받게 되는데 이 학습 효과는 반대로 나타나게 된다. 레닌의 아버지가 죽고, 레닌의 형인 알렉산드르가 차르 알렉산드르 3세 암살 음모에 가담했다가 처형당하자 레닌과 그 형제들은 모두 혁명에 가담한다. 이후 레닌의 어머니도 혁명에 투신한 자식들을 돌봐주게 된다.

레닌은 이런 유복한 환경에서 좋은 교육을 받았으며, 특히 어머니로부터 유창한 프랑스어를 배웠다. 러시아 귀족들이 프랑스어를 거의 모국어처럼 쓴 것은 레프 톨스토이의 소설 《전쟁과 평화》를 보면 잘 나온다. 물론 아니꼽다고 까는 차원에서 작품에 언급된 것이지만. 각설하고, 레닌과 같은 공산주의 혁명가가 정작 부르주아 출신에 가깝다는 것에 아이러니를 느낄 수도 있는데, 사실 19~20세기 좌파 운동가들 중엔 프롤레타리아 계층보다 오히려 부르주아 지식인 계층 출신이 많았다. 고등 교육을 통해 좌파 사상을 습득할 가능성이 높으므로 이 점을 감안하면 이상한 것은 아니다.

레닌이 17살이 되던 해, 혁명 운동에 투신하고 있던 형 알렉산드르 울리야노프가 차르 암살에 가담하여 체포된 후 사형을 당한 사건이 계기가 되어 그는 러시아 사회의 모순을 본격적으로 의식하기 시작한다. 1887년 카잔 대학에 입학했으나 학생 운동으로 퇴학당하고,[7] 이후 러시아 마르크스주의의 효시인 게오르기 플레하노프가 번역한 서적들을 탐독하며 마르크스주의자가 되었다. 1893년에는 마르크스주의 조직인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에 가입했고, 그 해 말 수도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옮겨가 본격적으로 혁명 운동에 뛰어들었다.

2.2. 젊은 혁명가

레닌은 1895년 4월부터 9월 사이에 다른 마르크스주의자들과 접촉하려고 프랑스·독일·스위스를 여행했다. 그러나 그 해 12월에 《노동자의 대의》라는 신문을 준비하는 도중에 비밀경찰에 체포되어 1897년에 시베리아로 유배되었다. 1898년에는 시베리아에서 함께 유배된 나데즈다 크룹스카야와 결혼했으며, 1899년에는 그의 주요 저서인 《러시아 자본주의의 발달》을 집필했다.

~유배~에서 풀려난 레닌은 1900년 독일로 망명, 이 와중에 국가 고등고시에 수석으로 합격해 변호사 사무실에 취직하기도 했다.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의 기관지인 《이스크라(불꽃)》를 같은 해 12월 말 창간하여 편집자로 활동한다. 마르크스주의 최초의 정치 신문인 《이스크라》는 러시아 지식인을 혁명 운동으로 포섭하고 마르크스주의자들을 규합해 사회민주노동당을 만드는 데 목적이 있었다. 또한 이스크라 편집진과 함게 마르크스 이론을 다루는 신문 《자랴(여명)》를 발간했다. 1902년에는 당 조직에 대한 자신의 사상을 정리해 《무엇을 할 것인가》를 집필했다.

한편 1903년에 열린 제2차 당대회에서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은 당원 자격을 둘러싸고 레닌이 주도하는 파와 율리우스 마르토프가 주도하는 파로 분열되었다.

최초의 분열은 앞에서 말한 기관지 《이스크라》의 편집진을 구성하는 과정에서 발생했다. 이후의 볼셰비키멘셰비키의 전략적 대립과는 전혀 다른 양상으로, 그저 편집진의 구성에 있어서 이견이 있는 정도였고 볼셰비키와 멘셰비키의 구분 또한 명확하지 않았다. 이 과정에서 레닌의 편집진 구성을 지지하는 사람이 약간 더 많아서 레닌 파가 다수파라는 의미의 볼셰비키(большеви́к), 마르토프 파는 소수파라는 의미의 멘셰비키(меньшевики)로 규정되었다. 그리고 이것이 오늘날까지 공식 용어로 굳어져버렸다.

구체적인 사회주의 건설 전략에서 견해 차이가 생기면서 레닌과 마르토프의 대립은 격화되었는데, 마르토프는 카를 카우츠키가 집대성한 정통 마르크스주의에 따라 부르주아 혁명으로 봉건제가 타도된 이후 정치권력과 경제적 주도권을 부르주아에게 이양하여 자본주의가 충분히 성숙한 후에 사회주의 혁명을 일으켜야 한다고 보았다. 반면, 레닌은 봉건제를 타도하고 자본주의 사회로 이행하는 것이 선결조건임에는 동의하나 정치권력과 경제적 주도권을 모두 부르주아에게 맡겨두면 노동자 계급에 대한 탄압이 격화되고 혁명의 원동력 자체가 소멸될 수도 있다고 보고 경제적 주도권은 부르주아에게 넘기되, 정치권력은 프롤레타리아 당이 갖고 있어야 한다고 보았다.

이렇듯 전략적 견해의 차이가 있다 보니 당연히 레닌 파는 당원 자격을 소수의 직업 혁명가로 제한하길 원했지만, 마르토프 파는 입당 자격 제한을 낮추는 등 대중 정당을 추구했다. 볼셰비키와 멘셰비키의 분열은 처음에는 전혀 심각한 대립이 아니었으나 이후의 논쟁을 거치면서 당내 파벌 수준을 넘어 실질적으로 다른 당이라고 할 만큼 갈라서게 되었다.

뒤에 보겠지만 레닌의 파는 같은 당의 분파인 멘셰비키는 물론, 농민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는 인민주의 정당 사회혁명당에 비해서도 세력이 약했다.[8]

원칙적인 부분에서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이 대중적인 정치 정당이 되어야 한다는 데는 볼셰비키들도 동의했다. 허나 왜곡된 러시아의 현실에서 이미 민중이 혁명으로 달음박질하고 있는데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이 언제까지고 대의제적·의회적 정당 타령이나 하고 앉을 수는 없으니, 하루 빨리 민중의 움직임에 동조할 수 있는 혁명의 선봉으로써 훈련된 혁명가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혁명 조직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 레닌을 필두로 하는 볼셰비키들의 생각이었다. 이른바 '혁명 전위당' 이론이다. 그런데 이게 멘셰비키/볼셰비키의 입장 차이 전부는 아니고... 볼셰비키가 대중 정당이 아닌 전문적 혁명가 중심 정당을 요구한 이유 중에는 당시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이 탄압의 대상인 불법 정당이었다는 점도 있었다. 언제 당원들이 체포당할지 모르는 상태에서 규모가 큰 대중 정당을 만들면 유사시 당 간부들이 몸을 숨기는 것도 불가능하고, 당내의 비밀 유지도 힘들며, 가족과 생활이 있는 대중 당원들로서는 탄압에 저항하기도 힘든 것이 현실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결국 볼셰비키멘셰비키의 이러한 입장의 차이는 1917년, 최후의 순간까지 좁혀지지 않았다.

2.3. 1905년 혁명과 2월 혁명에서의 역할

1905년피의 일요일 사건이 터지고 가을에 시작된 파업이 전국으로 퍼지자, 차르 니콜라이 2세는 시민에게 의회(두마)를 허용하고 표현의 자유와 투표권을 부여했다. 레닌은 11월에 러시아로 돌아와 총파업을 주장했다. 그러나 파업은 12월 말에 진압되었고 레닌은 탄압을 피해 다시 스위스로 망명했다. 그는 저술 활동에 힘쓰며 조금씩 동료들을 포섭한다.

제1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고 적국인 러시아 제국의 세력을 약화시키기 위해 독일 정부는 비밀리에 레닌과 교섭해 1917년 3월 혁명(구력 2월) 직후 독일이 제공한 봉인 열차로 귀국하였다. 그리고 니콜라이 2세를 폐위시킨 뒤 세워진 리보프의 임시정부를 무너트려야 한다고 주장하며 <4월 테제>를 발표했다. 볼셰비키는 4월 테제에서 '농민에게 토지를',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 '즉각적인 전쟁 종결'을 구호로 외치며 대중을 선동했다. 하지만 볼셰비키는 7월에 봉기를 일으켰으나 실패하고 말았다. 임시정부는 멘셰비키 우파(사회혁명당)였던 알렉산드르 케렌스키총리로 내각을 다시 짜고 레닌을 체포하라고 명령했다. 이에 레닌은 노동자로 위장한 뒤 핀란드로 망명했고 망명 기간 중 <국가와 혁명>을 저술했다.

2.4. 10월 혁명소련의 건설

파일:external/gatsbysmonologue.files.wordpress.com/lenin1.jpg
'''Ленин - жил,
레닌은 살았으며,
Ленин - жив,
레닌은 살아있으며,
Ленин - будет жить!
레닌은 살아있으리라!'''

레닌이 핀란드에서 망명을 하는 동안 러시아 제국은 이른바 '이중권력체제'라고 부르는 모순 상태에 빠져들었다고 해석된다. 차르를 중심으로 하는 구체제가 모든 힘을 상실했고, 나라를 좌지우지할 수 있는 거대한 힘이 이미 대중들에게 넘어가 있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대중 스스로는 자신들이 쥐고 있는 힘의 크기를 자각하지 못하고 있었던 반면, 케렌스키를 중심으로 한 정부는 권력을 가질 준비가 되어있지 않은 상황에서 주전론만을 되풀이하고 있었던 것이다.

즉, 러시아 혁명주의의 최일선에 있었던 인민주의 사회혁명당도, 서구적이고 점진적인 개혁을 주장하던 '부르주아 정당' 입헌민주당(카데츠)도, 사회주의/사민주의를 표방하던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도 모두 멍때리고 있던 사이에 대중은 자발적으로, 그리고 폭발적으로 행동을 개시하며 순식간에 2월 혁명을 통해 러시아 구체제를 개박살 내고 황제를 폐위시키기에 이르렀다. 임시정부와 각 정치 세력은 자신들의 주도로 이루어지지 않은 황제 폐위 및 2월 혁명의 결과에 당황한 나머지 서로 눈치를 보며 주도적인 활동을 벌이지 않고 있었다. 실제로 임시정부의 힘은 거의 수도 페트로그라드 주변 일부 밖에 미치지 않았다.

8월, 주도적인 권력의 공백 상황을 이용하여 라브르 코르닐로프 장군이 케렌스키의 명령을 사칭하며 쿠데타를 시도하면서 상황은 급반전하게 된다. 이를 저지할 군사력을 모으던 케렌스키 정권은 페트로그라드 전역을 장악하고 있던 민중들의 자치적 평의회 - 즉, '소비에트' - 와 제휴하고 무기를 지원한다. 각 소비에트의 노동자들은 코르닐로프 휘하의 병력을 소멸[9]시키는데 도와주지만, 반란이 진압된 후 무기를 반납하라는 요청은 거부한다.

1917년 10월, 이러한 와중에 레닌은 마침내 케렌스키 정부가 모든 힘을 상실했음을 느끼고, 페트로그라드로 돌아와 당 중앙위원회에 즉각적인 혁명의 개시를 촉구했다. 11월 7일(러시아 구력 10월 25일), 노동자 대중을 동원하기가 가장 유리했던 볼셰비키는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의 지도자 레프 트로츠키의 주도로 거의 무혈로 페트로그라드를 장악하고 케렌스키의 임시 정부를 전복시키는데 성공했다. 볼셰비키는 '빵, 평화, 토지'라는 간결한 표어를 내걸고 모든 권력을 장악하는데 성공한다. 이것이 바로 10월 혁명이다.

1917년 11월 8일에 제2차 전 러시아소비에트대회가 열리고 레닌은 즉시 자신을 지원해준 독일과 강화 회담을 시작했고, 1918년에 치욕적인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을 맺고 그 대가로 핀란드, 러시아령 폴란드, 베사라비아(몰도바), 우크라이나와 발트 삼국을 포기했다.

한편으로 볼셰비키는 예고한 대로 1917년 11월 제헌의회 선거를 실시했으나, 볼셰비키에 대한 노동자와 군대의 지지에도 불구하고 농민들의 압도적인 지지를 받는 사회혁명당이 과반을 차지하자[10] 1918년 한차례의 회의만에 제헌의회를 폐지해 버리고(...)[11]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을 러시아 공산당으로 이름을 바꾸는 한편, KGB의 전신이 되는 체카를 설치하여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기반을 놓게 된다.[12]

비록 혁명은 성공했지만 단순히 페트로그라드와 대도시 중심의 쿠데타에 불과했고, 러시아 전역에는 아직도 반(反)볼셰비키 세력들이 다수 포진해 있는데다가 레닌이 독일과의 불평등 휴전 조약을 맺자 볼셰비키의 적군과 반 볼셰비키의 백군이 서로 싸우는 러시아 내전이 터진다. 미국, 영국, 프랑스, 일본 등 당대 모든 주요 열강 세력과 독일, 체코슬로바키아 등 군사 강국들이 직접 원정군을 파견한 것은 물론, 각지에서 백군 세력이 봉기[13]하여 신생 소련은 말 그대로 사면초가 상태였다. 하지만 1919년부터 적군의 반격이 시작되었다. 사실 가장 큰 위협은 농민층의 반발이었는데, 백군이 토지 소유권을 원상회복시키려고 하면서 농민층의 지지를 잃어 내전은 적군의 승리로 끝난다.

이를 계기로 트로츠키가 수장이 된 소련의 붉은 군대(赤軍. Красная Армия. Red Army)이 최초로 결성되었고, 수도가 모스크바로 옮겨졌다.

1921년 내전은 종료되었다. 이 내전은 소련의 승리로 끝났고 볼셰비키의 권력은 확고부동하게 되었으나, 그 대신 전 국토가 잿더미가 되는 피해를 입었으며 무엇보다도 러시아 혁명을 이끌었던 수많은 풀뿌리 혁명가들과 운동가들을 잃게 되는 뼈아픈 타격을 입게 된다. 결국, 이들의 빈 자리를 채운 것은 급속히 성장하고 있었던 젊은 엘리트 관료계층이었으며, 이들을 자신의 권력의 기반으로 받아들인 것이 바로 스탈린이었으니...

2.5. 신경제정책과 최후

신생 소련은 내전에서 승리했으나 경제가 심하게 침체된 상황이었다. 러시아 내전 직후 소련의 경제 상황은 '침체'라는 말로는 다 표현하기 힘들 만큼 심각했다. 가장 대표적인 예로, 중공업의 꽃이자 중공업 발달 수준의 척도인 철강 생산량이 내전 이전에 비해 1/5이하로 격감했을 정도. 레닌은 경제를 복구하려고 1921년에 신경제정책(NEP)를 도입했다. 레닌에 의하면 NEP는 혁명 성공의 최초기단계가 지나면 실행되기로 원래부터 계획이 된 정책이었다. 레닌 스스로부터가 당시 단계에서 소련은 성공적인 사회주의의 구축을 위한 자본주의적 물적 토대가 부족하다는 것을 냉철히 인식하고 있었다. 실제로 사회주의로 넘어가기 위한 전 단계로써 과도기적인 형태로 도입된 자본주의적 체제에 대해 레닌은 '국가 독점 자본주의'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그래서 소규모 사업 및 자유 소매업을 허가하는 것을 시작으로, 외국과의 관계를 개선하고 선진 기업들을 초청하며 자본의 투자를 장려하고자 했다. 즉, 이후 냉전의 형태로 소련과 같은 공산주의 국가들이 자본주의 국가들과 완전한 적대 관계에 놓이게 되면서 고립되어 버리는 상황은 처음부터 소련이 의도한 바는 아니었던 것. 이러한 상황이 굳어진 건 스탈린 무렵부터다.

다만, 레닌이 공산주의 국가의 고립을 바란게 아니었다는 주장에는 반론도 있으니 참고할 필요가 있다. 공산주의 국가와 자본주의 국가는 서로를 인정하고 공존할 수 없고, 상대를 완전히 극복하기 위해 갈등할 수 밖에 없다는 입장은 마르크스가 제기하여 레닌주의의 공식 입장이 된 것에 가깝다. 레닌 이후 트로츠키와 스탈린이 벌인 권력투쟁의 이론적 기반이었던 일국사회주의론 VS 연속혁명론의 논쟁에서도 양측 모두 자본주의 국가와 공산주의 국가의 공존 가능성에 회의적이었다. 자세한 내용은 레프 트로츠키 문서를 참고할 것. 이 면에서 보면 레닌의 신경제정책은 자본주의 국가와의 공존 자체를 목적으로 한 것이 아니라, 공산주의 사회를 건설하기에는 터무니없이 부족한 물적 기반을 마련하기 위한 과도적 정책으로서 시행된 것에 가깝다. 또한, 레닌 시대의 소련이 스탈린 시대보다 훨씬 더 심각한 외교적 고립 상태였다는 점 역시 참고할 필요가 있다. 냉전 이후 시기에 자본주의 진영과의 대립이 극단으로 치닫기는 했지만, 상당한 수의 우방국, 또는 위성국가군을 거느리고 있던 데 비해 레닌 시대의 소련은 위성국인 몽골 이외에는 거의 교류상대가 없었다.

그러던 1918년, 볼셰비키에 대항하여 독자적인 좌익 혁명을 추구하려고 하던 좌파 SR[14] 당원이 레닌을 암살하려 하였다가 미수로 끝났다. 하지만 중상을 입은 레닌은 총상의 후유증과 그 동안 누적된 과로 때문에 정상적인 활동을 할 수 없게 되었고, 1922년 독일 의료진을 불러 총알 제거 수술을 받았지만 그 직후 뇌일혈을 일으켜 건강이 급속도로 악화되자 점점 권력의 자리에서 밀려나기 시작한다. 결국 마지막 1년은 실어증까지 겪으면서 병상에서 지내다가 1924년 1월 21일 사망하였다.

레닌은 필요할 때는 주저없이 독단적이고 과감하게 폭력을 휘둘렀지만, 일단 상황이 안정되었을 때는 이념이 다르더라도 상대방을 끌어 안을 줄 알아 적지 않은 수의 멘셰비키[15], 사회혁명당원, 아나키스트 등의 볼셰비키와 대립했던 좌익들은 이 내전 중에 그를 적대했더라도 용서받고 새로운 소련 체제에 정착할 수 있었다. 마르토프, 사회혁명당 당수 빅토프 체르노프, 우크라이나 흑군의 지도자 마흐노 같은 지도부들도 레닌 시절에는 직접 죽이기 보단 망명이 더 일반적인 경우였고, 그 아래 평당원, 조직원들의 경우 이때 옛 멘셰비키와 사회혁명당원, 아나키스트였던 사람들이 대거 공산당에 입당했다. 레닌이 이전에 정치적으로 대립하던 시절도 혁명의 완성을 위한 견해 차이라고 생각했고, 혁명이 이루어지고 혁명역량이 싸그리 날아가는 최악의 상황에 봉착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 여러 수단을 썼던 것 뿐이었다. 혁명 이후 안정화 시기에 여러 계파를 받아주고 다양한 견해를 수용해주었다. 그러나 레닌이 죽자, 레닌이 인식한 자유에 대한 의식과 거리가 있었던 스탈린이 집권하고 대숙청 때에는 스탈린계파를 제외하고 전직 비 볼셰비키를 포함한 계파들이 스탈린에게 전부 숙청당했다. 대숙청의 피해자 숫자로 제시 되는 수십만 단위의 처형인들 중 지노비예프, 카메네프, 부하린 같은 유명한 볼셰비키 원로가 아닌 다수는 이렇게 레닌 시절 포용 되었다가 스탈린 시절 마치 현대 민주 국가의 법적 논리의 면전에 노리고 빠큐를 날리는 듯이 소급입법 된 판결에 따라 형장의 이슬이 되었다.

죽기 직전까지도 레닌은 소련의 상황에 대한 냉정한 시각을 잃지 않았으며, 공산당 중앙위원회에서 이오시프 스탈린의 세력이 비정상적으로 강해지는 것을 경계하고 있었다. 결국 스탈린의 지나치게 흉포한 성격을 경계해야 하며, 당 중앙 위원회에서 스탈린을 제명시켜야 한다는 유명(遺命)을 남겼으나 세상에 공개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스탈린 뿐만 아니라 다른 모든 최고위원들을 다 까는 바람에(...) 인기가 떨어질 것을 걱정한 최고위원들이 알아서 쉬쉬하며 묻었기 때문.[16] 덕분에 스탈린은 위기에서 벗어났고 손쉽게 권력을 잡을 수 있었다.

말년에 스탈린을 경계하라는 유언장을 남기고, 보안을 염려하여 5중의 자물쇠가 달린 금고에 보관하는 치밀함까지 유지했을 정도. 하지만 말년에 말도 제대로 할 수 없는데가 손짓으로 겨우 대화하던 중환자로, 때문에 자신의 모든 서류작업은 대필할 사람이 필요했는데 그 일을 한 비서[17]의 밀고로 이내 스탈린이 알아챌 수 있었다. 안습.

마침내 권력을 잡은 스탈린은 레닌의 유언을 숨기고 서기장이 되어 정적인 트로츠키를 숙청한다. 그리고 레닌을 신격화해서 그 후계자인 자신의 권력을 확고히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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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닌의 시체는 보존처리[18]가 되어 현재까지도 붉은 광장에 있는 레닌 영묘에 전시되어 있다.[19] 원래 레닌 본인은 자신이 죽으면 레닌그라드에 묻힌 자신의 어머니 곁에 묻히길 원했다. 크룹스카야도 영묘 전시에 반대했으나, 스탈린 앞에서는 그런 거 없었다. 레닌이 죽자 시체를 영구보존하는 방법을 연구하라고 과학자들을 닦달했다고 한다. 이후 그의 유언에 따라 어머니 곁으로 보내주자는 의견도 많이 나왔다. 말년에 편안하게 잠도 못자는 레닌 또한 그의뇌는 분해되어 연구소로 보내졌다.

레닌의 시신은 스탈린 격하 이후에도 여전히 붉은 광장에 전시되어 있다가, 소련 붕괴이후에 체제선전용으로 쓸모가 없어진(...) 레닌의 시신을 이장할것이라는 계획이 세워져서 실제로 이장될 것이라는 소문이 무성하였고, 당초에 레닌 시신 이장에 대해서 여론의 반응은 찬성 쪽에 가까웠지만, 경제난으로 지지율이 떨어진 옐친 대통령이 자신이 불리할 때마다 정국 전환용으로 레닌 시신 이장 얘기를 꺼낸 데다가 이미 레닌의 무덤이 관광명소가 된지 오랜 세월이 흘렀기에 그냥 이장시키기엔 좀 아깝기도 하고(...) 러시아 공산당에서도 강하게 반대한 데다가 더군다나 당시 경제난이 위낙 심한 터라서 사람들이 레닌 시신 이장에 대해 별로 관심이 없어지면서 결국 실제 이장은 되지 않았다. 어차피 소련 붕괴 이후 국가지원이 끊어지고 시신 보존 문의자들의 돈[20]으로 보존하게 되면서 예산 절감을 목적으로 레닌의 시신을 매장하자는 주장이 의의를 잃어서 그렇기도 하다.

그래도 심심하면 레닌 시신 화장 및 이장 얘기가 나오곤 하는데 러시아의 여당인 통합 러시아당의 일부 의원들은 영구보존 중인 레닌을 매장하자고 주장하고 있으나, 제 1 야당이자 소련 공산당의 후신인 러시아 연방 공산당 측에서는 통합 러시아당 측 주장에 강력하게 반대하고 있다. 뭐, 그래도 관광명소로 이미 자리잡은 지도 오래고 소련 시절의 향수가 위낙에 강한 터라 그냥 이장시켜 버리기엔 아깝다고 판단되고 있는지 그냥 말만 나오고 있다.
참조.

2017년 통합 러시아당러시아 자유민주당 의원들의 레닌 매장 법안이 또 발의됐다. 2016년 여론 조사에서 러시아 국민의 60% 이상이 레닌 매장에 찬성한다는 결과가 나왔고 레닌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블라디미르 푸틴의 입장에서는 레닌 매장을 통해 블라디미르 푸틴 및 통합 러시아당과 대립하는 러시아 연방 공산당구시대적 집단으로 몰아 붙이는 효과를 기대할 수 있지만 소련에 대한 향수를 잘못 건드려 니콜라이 2세 일가가 순교자로 추대된 것과 비슷한 효과가 날 까봐 주저하는 중.

3. 레닌에 대한 평가


TED에서 제작한 역사 vs 레닌.

3.1. 옹호

"나는 레닌을 사회 정의의 실현을 위해 자기 자신을 희생하고 모든 것을 바친 사람으로 존경한다. 난 그의 방식이 실용적이라고 생각하진 않지만, 한가지는 확신한다. 레닌과 같은 사람들은 인간성의 수호자이자 복원자이다."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의 평가.[21]

니키타 흐루쇼프에 의해 스탈린은 격하운동이 벌어졌으나, 반대로 레닌에 대해서는 우상화가 유지됐다. 레닌에 대해 흠이 될만한 과오는 모두 숨겨졌으며, 이러한 숭상은 페레스트로이카 이전까지 유지되었다. 그로 인해 우상숭배가 끝난 오늘날까지도 붉은 광장의 레닌 묘역에는 많은 참배객이 모여들며, 레닌은 '문제가 없지는 않지만 대체로 훌륭했던 위인'으로 평해진다.

러시아뿐 아니라 다른 공산권 몇몇 국가들, 특히 구 소련 공화국(우즈베키스탄, 타지키스탄, 투르크메니스탄, 카자흐스탄, 키르기스스탄)이나 몽골[22]에서는 영웅을 도와 악인을 무찌르는 산신령 같은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 주로 공민전쟁 시기 백군 압제자에 대항하여 맞서던 각국의 민족 영웅들이 고생하다 모스크바로 가서 레닌을 만나 공산주의 교육을 받고, 적군과 함께 돌아와 압제자를 몰아내 사회주의 공화국을 설립한거나 혹은 그냥 레닌이 와서 압제자를 몰아내고 고통받던 인민들을 해방시켜준다는 내용.

종종 러시아 바깥의 반러주의자 중에서도 레닌에는 우호적인 사람도 있다. 특히 스탈린 이전 초창기 레닌시대의 소련은 러시아 민족국가를 초월해 세계 혁명의 전진기지이자 전세계 혁명가의 공통 조국의 성격이 있었고, 알려진 레닌 개인의 성향도 '러시아 민족'에 국한된 것과는 한참 거리가 있었다.

실제 레닌의 경우 중앙아시아 등지의 유색인종에 대한 차별을 폐지했고, 소련은 러시아계만을 위한 국가가 아니라며 러시아어를 법적 공용어로 지정하는데 반대했다. 그 외에도 실질적 측면에서 인종 차별과 평등 문제에 대해 많은 관심을 보였고, 정책적 성과 역시 상당했다. 이는 실제 레닌 집권 시기 소련을 방문했던 미국의 흑인 시인 랭스턴 휴즈가 직접 목격하고, 인증한 것이다. 그래서 반스탈린, 반러적이면서도 레닌은 괜찮게 평가하는 사람들은 훗날의 '러시아 중심적인 경직되고 폐쇄적인 소련'은 전부 스탈린 때문이라고 깐다.

반면 서방 세계에서 레닌은 원조 빨갱이, 빨갱이 교주로 불리며 악명을 떨쳤다. 아무래도 소련의 수립에 가장 커다란 역할을 했던 사람인 만큼 냉전기 프로파간다로 가루가 되게 까이는 사람이다. 그 혁명이라는 것을 이룩하기 위해 니콜라이 2세 황제 일가의 몰살 및 체카의 수립, 반대파 숙청과 숱한 인민재판 등 도덕적인 면에 있어 끔찍한 패악이 벌어지곤 했으나, 공산정권을 수립하고 볼셰비키가 살아남기 위해 필수적으로 벌인 악행이었다는 점에서 이를 이해해 볼 필요가 있다.

예컨대, 이전 왕조가 근절되는 것은 전근대 왕조 교체에서는 자주 나타났던 현상으로, 이전 왕조의 구성원은 항상 반혁명 세력의 구심점 및 명분으로써 작용할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또 러시아는 제정시대로부터 내려오는 유구한 비밀경찰(오흐라나)의 전통이 있었으며, 레닌은 내전기 및 그 이후 시기에 벌어진 수많은 '반혁명 세력'과의 싸움에서 이러한 정보전 및 비밀경찰을 제대로 활용했다. 도덕적인 관점에서는 용서할 수는 없는 행위이나, 적어도 '혁명의 수립 및 그 수호'를 목적으로 움직이는 혁명가로서 황족의 영향력을 근절시키거나 비밀경찰을 활용하는 등의 행위는 현실과의 타협의 결과라고 할 수도 있는 것. 한편 레닌은 이러한 억압 도구를 새롭게 수립된 노동자 권력을 안정궤도에 올려놓기 위한 한시적 필요에 의한 조치로 생각했고 권위주의적 통치기구의 활용 역시 극도로 유의하여 활용해야 한다고 여긴 반면, 스탈린의 경우는 그러한 통치기구를 오남용하여 통제와 폭력 자체가 일상화되고, 평범한 노동인민들까지도 감시하고 통제하는 체제로 만들어 버린 것이 주요한 차이점이라는 주장도 있다.

실제로 레닌의 언행이나 정책의 측면에서, 자신에 내세웠던 사회주의적, 그리고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의 이상을 공공연히 배신한 혐의는 보이지 않는다.[23] 내전이 발생하기 전까지 볼셰비키의 사회정책은 노동자-농민의 권익의 향상 및 일반적인 복지, 여성의 권리보장, 사회의 신분적/계급적 관계의 철폐 등등 여러 면에서 긍정적인 평가를 받을만한 것들이 많이 있다. 물론 어디까지나 20세기 초의 열악한 세계환경 기준이지만. 예컨대 선거권이라든가.

문제는 1918년 내전과 함께 '전시공산주의'라는 비상상황이 벌어지면서 그 모든 것이 틀어져버린 것 - 이를 계기로 정부와 농민의 관계는 극한으로 꼬이기 시작했으며, 입안된 수많은 정책들은 비상사태의 선포와 함께 한순간에 물거품으로 날아간다. 그리고 내전이 종식된 상황에서 혁명은 고립되어 레닌이 죽고 트로츠키는 쫓겨나는 상황에서 권위주의적 통치기구가 스탈린 관료집단의 수중에 넘어간 결과 스탈린주의가 등장하게 되었다.

혁명 이후의 정치적 행적에 대해서는 엇갈린 평가가 있을지언정, 혁명활동 자체에 능력에 대해서는 자타공인 본좌. 대중의 혁명적 열기를 감지해내고, 현재 상황에 대한 냉정한 평가를 기반으로 대중과 동조하여 그들의 힘을 통해 일련의 목적을 수행해가는 면모는 가히 천재적이라는 평. 공산주의에서 마르크스가 혁명의 당위성을 이론적으로 세웠다면, 레닌은 그 혁명을 어떻게 잘 해낼 것인가 - 마르크스의 저작에서는 거의 빠져있던 부분 - 을 스스로 만들어 채워넣은 존재다. 공산주의가 괜히 교조를 기려 마르크스-레닌주의라는 말을 쓰는 것이 아니다. 애초에 10월 혁명 직전에 볼셰비키 내부에서도 "야 이거 했다가 우리 다 죽는 거 아니야?" 하고 벌벌 떠는 사람이 대부분이었고, 멘셰비키나 사회혁명당, 입헌민주당은 여전히 제1차 세계 대전에서의 승전과 같은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주장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레닌은 민중들이 원하는 것은 평화라는 것을 잘 캐치하고 있었고 이를 바탕으로 혁명에서의 지지를 확보한 것. 주변인들은 죄다 우려한 그 10월 혁명도 결국 성공시키는 위엄을 보여준다. 전형적인 난세의 간웅이며, 한 나라의 건국자 자리를 꿰어차기에 손색이 없다는 의미다.

한 마디로 말해서 레닌 집권기의 권위주의적 통치는 러시아판 적폐청산의 과정이었으며, 비록 외형적이고 방법론적인 유사성은 있을지언정 (그 자체가 또 하나의 적폐가 되어 버린) 스탈린 집권기의 전체주의적 관료 독재와는 그 주체나 목적 면에서 본질이 다르다는 것이 반스탈린계 레닌주의자들이 내세우는 레닌에 대한 옹호론의 핵심이다. 따라서 권위주의적 통치 자체를 반대하는 입장에서라면 그것조차도 용납할 수 없는 것이고, 권위주의적 통치 자체는 필요하지만 본래의 목적에 어긋나면 안 된다고 여기는 입장에서라면 그것은 인정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긍정하게 되는 것이다. '권위주의적 통치는 절대악인가?'에 대한 가치판단은 각자 알아서 할 문제이다. 비판론은 '그렇다. 절대악이다'라는 관점을 전제한 것이다.

3.2. 비판

소비에트의 광기 어린 실험은 1917년 레닌에 의해 시작됐다. 플라톤의 '국가'에나 등장할 법한 공상사회를 만들려 한 그 실험실에선 혹시 자신에게 닥칠지 모르는 모멸감에 침묵하는 방관자와 "나 말고 저 사람을 데려가세요." 라고 절규하고픈 공포심에 사로잡힌 협력자가 만들어졌다. 그들의 방관과 조력의 속삭임 속에서 스탈린이라는 괴물의 탄생은 우연이 아니라 필연이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출처[24]
레닌의 생부는 그의 아들이 장차 경멸하게 될 전형적인 자유주의 신사였다. 레닌의 귀족적인 출생 배경은 레닌의 소련 전기 작가에게는 곤란한 요소였다. 그러나 그것은 그의 군림하려드는 성격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힌트를 준다. 그것은 하급자로부터의 비판을 참지 못하는 성격이나, 대중을 그저 그의 혁명적 계획을 위해 필요한 인간 재료로 보는 그의 성향에서도 엿보인다(기근 시기에 그는 혁명의 발발 가능성을 높여주기 때문에 농민들에게 원조를 중단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1917년 막심 고리키가 썼듯이, “레닌은 ‘지도자’인 동시에 러시아 귀족이었다. 그에게는 이 멸종된 계급의 어떤 심리적 특성이 남아 있었다. 따라서 그는 러시아 국민에게 이미 실패할 운명이 예정되어 있는 하나의 잔인한 실험을 실행하는 것에 대해 스스로를 정당하다고 생각했다”.
- "혁명의 러시아 1891~1991", 올랜도 파이지스

그러나 실상 1917년 12월 체카의 창설 이래로 비밀경찰의 탄압 수위는 날이 갈수록 더해가고 해산 일정 같은 건 전혀 잡혀 있지 않았다. 레닌이 이를 필요악이라고 생각했을지 안 했을지는...또한 소련은 분명 여성과 소수민족 등이 투표권을 획득한 최초의 국가 가운데 하나지만, 자유선거가 보장되지 않는 한 얼마 못 가 별 의미 없는 것으로 전락했다. 다른 여러 권익도 마찬가지다. 소련 건국 직후에는 그런 권익은 분명히 높은 평가를 받을만한 것이었고, 파시즘의 시대를 지나면서 대부분의 유럽국가들 역시 별반 다를 바 없을 정도로 열악했으나[25], 스탈린의 대숙청 시대를 거치고 1980년대까지 소련과 다른 나라의 자유, 권리 수준 차이가 점점 커졌던 것이다.

내전 이전에도 볼셰비키는 자신들이 겨우 전체 득표의 24%를 얻은 입헌 의회를 곧장 해산시키고 공산주의를 따르지 않은 조직들을 정치적으로 탄압했다.[26] 애초에 의회 민주주의를 부르주아지의 권력 수단으로서 타도 대상으로 보고, 프롤레타리아 계급 독재를 주장하는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의회와 반대파를 곱게 놔둔다는 것이 오히려 자기모순인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사상적으로도 비판을 받는 경우가 많은데 되려 마르크스 계열 사회주의자들 사이에서 레닌을 비판하는 경우가 꽤 있다. 맑시즘을 마르크스-레닌주의로 명명하는 통념과는 상반되는데, 이런 경우는 대부분 칼 마르크스 본인의 주된 목적이 "인간 소외 현상"을 비판하는 것에 있었다고 보는 사람들이다. 이들에 따르면 레닌이 맑시즘을 소수의 직업적인 혁명가들을 기반으로 하는 사상으로 탈바꿈시키고 대중주의를 배제하면서부터 치명적인 왜곡이 시작됐다고 보는데 이러한 전문화와 대중주의의 배제로 인해 종래에는 "인간 소외"에 대한 담론이 더 이상 중요하게 다루어질 수 없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비판적 시각에선 맑시즘이 갈수록 온건 개혁 성향의 서구 사상가들에게서 매력을 잃어가던 것과 20세기 자유 진영에서 "공산주의의 반댓말은 민주주의"라는 왜곡된 사고가 형성된 것 모두 그 원흉은 레닌에 있다고 본다.

사실 레닌주의는 그 주의가 태동하면서부터 많은 비판을 받아왔다. 사민주의자들은 레닌주의를 국가를 절대화시킨 권위주의적 공산주의라고 비판하였다. 당장 사민주의자들은 생산수단의 자유와 억압당하지 않을 자유를 주장했으나 레닌주의에선 경제적 평등을 기초로 정치, 사회, 문화적인 면에서 모든 평등을 실현하는 과정에서 전 국민적으로 자유가 침해되며, 사상의 차이를 인정하지 않게 되었기 때문, 한 마디로 레닌주의는 기존 마르크스주의가 국가를 억압의 대상으로 본 것과 달리 국가라는 체제를 절대화했다라는 것.[반론]

레닌주의와 후에 악명을 떨치게 되는 스탈린주의의 연계성에 대해서 레닌주의자들은 '스탈린 체제 후 스탈린주의가 레닌주의식 민주주의를 많이 후퇴시켰고, 스탈린은 항상 자신의 비민주적인 사상을 레닌주의와 동일시하려고 했기 때문에 레닌주의는 현재 스탈린주의와 동일시되어 왜곡된다.'라고 주장하였다. 대표적으로 슬라보예 지젝 같은 사람은 '레닌의 시대에 일어났던 공공연한 폭력과 스탈린 시대에 벌어졌던 은폐된 폭력을 구별하고, 스탈린 시대에 자행된 폭력이 가진 은폐되고 비밀스러운 속성 때문에 밀고자와 방관자, 비겁한 수동적 협력자들이 사회의 주류를 차지하게 되었다'고 분석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다른 사회주의 진영인 사민주의자 쪽이나 무정부주의 진영에선 레닌주의는 큰 비판을 받았으며 근본적으로 스탈린주의는 레닌주의의 토대에 의해 진행되었다고 주장하였다. 레닌주의는 중앙의 의견이 우선시되고 소수의 의견이 무시되거나 억압되고 있으며 구조적으로 비민주적이고 전례에 없던 권위주의를 새로 만들어낸 사상이라는 것이었다. 이런 무비판적이며 권위주의를 앞세운 덕에 중앙에 뜻에 맞지 않은 자들은 무자비하게 숙청될 수 밖에 없는 체제였고 스탈린뿐만 아니라 레닌 역시도 그 비판을 피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즉, 스탈린은 의외로 레닌의 가장 충실한 계승자였을 수 있다.

실제로 체카는 반혁명세력의 축출이라는 명목으로 수만명을 고문하거나 처형했고 레닌은 체카의 처형방식을 정당하다고 인식했다. 그는 1920년 1월 12일의 연설에서 "우리는 머뭇거리지 않고 수천명을 쏘았다. 우리는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래야만 우리가 이 나라를 구할 수 있다." 라고 말하며 체카의 숙청을 옹호했다. 또한 1921년 5월 14일 레닌이 의장을 맡고 있던 당 정치국은 체카의 즉결처분권을 확대하는 조치를 통과시켰다. 레닌주의자들은 당대 러시아의 혼란상을 지적하며 혁명을 실행하기 위해선 어쩔수 없는 조치라고 주장하였으나 그 반대진영에선 레닌의 시기에 무정부주의자나 사회혁명당 등 레닌과 레닌의 세력을 반대하는 사람들에 대한 무자비한 탄압이 이루어졌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으며 이후 소비에트 지도자들이 펼칠 공포정치의 토대를 구축했다는 평가가 대세를 이룬다.

광산업자, 교사, 성직자, 사업가 등등 많은 직업을 가진 이들이 공산주의 혁명을 위협한다는 이유로 처형당했다. 스탈린만큼은 아니었지만 극단주의로 치닫기 전인 1920년까지 이미 5만 명이 '공식 집계로' 사형당했다. 그렇기에 공산주의라는 사상을 믿는 이들이 아닌 그냥 절대다수의 대중, 일반인, 농부들에게 위대한 정치가였는지는 의문이다.

적백내전으로 인한 소련의 경제 사정이 더욱 악화되자 1921년 크론슈타트에 있던 수병들이 반란을 일으켰는데 레닌과 볼셰비키들은 시민군을 무자비하게 진압했다. 그러나 레닌과 볼셰비키들이 무자비하게 진압했던 크론슈타트의 병사들은 1917년 레닌과 볼셰비키와 함께 러시아 혁명을 주도했던 혁명동지들이었다.[28] 즉 레닌과 볼셰비키들의 과오다.


촘스키의 레닌주의 비판, 답변은 2분 14초 부터.

4. 뒷 이야기

레닌이 죽은 이후로 레닌의 동상은 소련 곳곳에 세워졌고, 구 동구권 국가에서도 레닌 동상이 잇따라 세워졌다. 그러나 공산주의 몰락과 함께 동유럽 공산주의 국가에 있던 그의 동상은 대부분 철거크리를 맞게 되나, 일부 국가나 지역에 따라서는 남아 있는 경우도 있다. 러시아에서는 소련이 붕괴되기 직전에 레닌 동상 중 상당수가 철거되었고, 폴란드헝가리 등 반러감정이 강한 국가들처럼 레닌 동상이 완전히 혹은 거의 대부분 철거된 국가들도 있지만 위낙 많이 만들어진 탓에[29] 러시아에서는 여전히 레닌 동상이 5300여개가 넘게 남아 있다고 한다. 그래서 현재도 러시아 주요 거리나 광장에서 레닌 동상을 쉽게 볼 수 있는 편이다. 특히 시베리아나 극동과 같은 오지에서 많이 보이는 편. 노보시비르스크의 오페라극장 광장에도 큰 동상이 있다.

스위스의 사진가인 닐스 아커만이 철거당한 레닌 조각상들의 현재 모습을 추적한 사진집 「Lost in Decommunization」을 발간해 현재의 동상들의 모습들을 담기도 했는데, 허리 윗부분만 싹둑 잘려나가 방치되거나 지하실에 곰팡이 낀 채로 처박히거나 완전히 산산조각 박살나서 코만 한조각 발견되거나 공장 구석에 방치되거나 철조망에 걸려 있거나 하는 취급을 당하고 있다. 개중에는 아주 희한한 최후를 맞이한 케이스도 있는데, 오데사에 있는 조각상은 알렉산드르 밀로프라는 조각가가 다스 베이더로 깎아버렸다. -훌륭한 재활용 사례
https://www.nack.ch/lost-in-decommunisation-lenin-ukra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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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 특이한 사례로,워싱턴 소비에트, 시애틀에서는 그의 동상을 매입해서 매년 크리스마스하누카, 성 패트릭의 날 같은 때마다 트리 겸 장식물로 활용하고 있다. 능욕

기네스북에도 오른 바 있는데, 바이칼 호수 근방의 울란우데라는 도시에 세워진 레닌 두상이 세계에서 가장 큰 레닌 머리(두상)이라는 이름으로 1991년 등재된 것, 폭 4m 이상에 무게는 42톤짜리로 레닌 탄생 100주년을 기념해서 기존의 레닌 상 셋을 대신해 세운 거라고 하는데, 소련 붕괴 후 이걸 철거하자니 철거 비용이 너무 나와서 그냥 방치해 놓은 것이 기네스북에 올라가면서 애물단지였던 상이 본의 아니게 관광상품이 되었다고 한다.

러시아의 문호인 레프 톨스토이의 애호가로, "톨스토이 이전에는 진정한 농민의 모습이란 없었다"고 극찬할 만큼 높이 평가했으며 이 때문에 공산 혁명 이후 과거 러시아 제국의 유산이 비판을 받는 과정에서도 오히려 톨스토이와 그의 작품은 갈수록 높은 평가를 받는 현상이 나타나기도 했다.

첼리스트 그레고르 피아티고르스키(1903~1976)가 15살 나이에 현악 4중주단을 만들었는데 베토벤 4중주단이라는 이름을 지어 베토벤에 대한 존경을 내비쳤다. 그런데 당에서 이 이름을 레닌으로 바꾸라고 명령했고, 피아티고르스키는 "레닌은 혁명가이지 음악가가 아니다! 죽어도 못 바꾼다!" 며 당에 대들었다. 이 이야기를 들은 레닌이 직접 그를 만났고, 피아티고르스키는 죽음을 각오했는데 레닌은 껄껄 웃으면서
"자네 말이 맞아. 난 음악에 대하여 도통 아는 게 없는데 내 이름을 악단으로 짓는다는 건 말도 안 되지. 예술가로서 그 용기 정말 멋졌네. 아, 이름이야 자네 마음껏 짓게나."

하며 되려 그를 격려했다. 하지만 레닌의 격려와 달리 주변에선 아무래도 레닌 4중주단으로 바꾸는 게 좋겠다고 하여 결국은 이 이름으로 바꿔 활동해야 했다. 그래서 지금 분위기로선 자유로운 음악을 연주하기 어렵다고 느낀 피아티고르스키는 18살 나이로 식구 및 음악 동료들과 같이 해외로 망명해 버렸다. 국경을 넘을 때 수비병들에게 걸렸지만 무사히 망명에 성공했다. 다만 그가 아끼던 첼로가 이 과정에서 부서졌을 뿐. 나중에 이 소식을 들은 레닌은 "나는 음악가 하나에게도 인정받지 못하는 건가." 라면서 한숨을 쉬었다고 한다.

2017년에 에콰도르에서 레닌 모레노라는 인물이 에콰도르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그래서 러시아 SNS상에서 러시아 혁명 100주년을 맞아 레닌이 돌아왔다는 식의 드립이 성행하고 있는 중(...) 물론 이름만 레닌이고 실제 성향은 꽤 다른 편이다.

4.1. 민족자결주의와 아시아 독립운동 영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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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닌과 한국인 독립운동가 박진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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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 페트로그라드 대중집회에서 연설중인 레닌, 집회속에 펄럭이는 태극기.

우드로 윌슨보다 앞서 민족자결주의를 주장하여 세계에 큰 파급력을 미친 사람이다. 단, 민족자결주의가 레닌에 의해 만들어진 것은 아니다.[30] 제1차 세계 대전 시기 러시아와 오스트리아-헝가리 등의 적대국에서는 타국의 분열을 유도하기 위해 '민족의 자결'을 본격적으로 구호로 이용하기 시작했는데, 내전 시작 시기에 봉기했던 구 러시아 제국 산하 체코 군단도 이러한 목적으로 차르 정부에서 육성한 것이었다. 즉, 민족 자결론을 자국의 이익을 위해 끌어들였던 것이다.

레닌의 민족 자결론은 이를 자타를 가리지 않고 적용하면서 러시아 제국의 해체 및 식민지로부터의 우호 획득에 이용하고자 한 것이었고, 그 결과 식민지 상태에서 독립을 꾀하던 국외의 여러 지역에서 크게 성공을 거두었다. 대표적인 경우가 중국 국민당중국 공산당이다.[31] 다만 러시아 제국의 해체 이후 내전기에 캅카스, 폴란드, 우크라이나, 발트3국, 부하라, 히바 등이 우수수 떨어져 나가면서는 당시 민족문제인민위원이었던 스탈린의 의견을 받아들여 적어도 러시아 제국의 권역 내에서는 '부르주아 민족주의는 거부하되 프롤레타리아 민족주의는 받아들인다'는 식의 논리로 선회하기도 했다. 다른 식민지들은 민족자결해야 하지만 너희는 소련으로 들어와야 합니다

한편 미국 정부가 대한민국의 임시정부의 승인요구를 철저히 묵살[32]한 반면, 소련은 아시아 식민지 문제에 상당한 관심을 가졌고, 실제로 지원도 했었다.[33] 이러한 일환 중 하나로 임시정부의 공산주의자, 사회주의자들은 물론이고 독립운동가들은 레닌을 여러차례 만나고 조언을 구하는가 하면 공작금을 원조받기도 했었다. 하지만, 독립운동가들 사이에서 이 자금의 행방을 둘러싸고 임시정부가 더 분열되었고[34], 이 돈을 임시정부에 내놓지 않은 김립김구에게 사살되었다. 김구가 백범일지에 "김립이 죽을 만해서 죽였다"고 써 놓아서 다들 그런가 보다(...) 생각하고 있었는데, 최근에 와서야 밝혀진 것이다. 자세한 내용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참조. 자유시 참변 역시 조선의 독립을 지원한다는 명목에 부응해 연해주로 간 독립군이 친소세력과 주도권을 다투다가 소련군이 무장해제를 주장하며 학살한 것이다.(일본군에게 밀려 올라갔다가 당시 러시아 내전 중에 있던 러시아에서 무장해제를 거부해 학살당한 거다.)

4.2. 그 외 일화와 성격들

이 이야기들은 '로버트 서비스(Robert Service)'가 쓴 전기 레닌(원제 'Lenin: A Biography')에 나오는 내용이거나 기타 카더라, 일화들을 모은 것이다.

20대일 때 벌써 머리가 빠지기 시작한 데다[35], 삭아 보였다. 더군다나 수염도 잘 자르지 않고 늘 지저분한 상태였는데다, 걸걸한 목소리 때문에 그를 처음 본 사람들은 왠지 무서워했다. 이 덕에 소비에트 정권이 생긴 이후에 국가원수의 사진을 대중에게 공개해야 하는 입장이 되었을 때조차 꼴이 말이 아니라서, 지도자의 공식 사진은 1918년에 가서야 최초로 언론에 공개된다. 덕분에 망명할 때 변장이라고 하면 깔끔하게 하고 가발만 쓰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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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이 1917년 핀란드 망명 시절 레닌의 변장 모습. 정말로 변장한 거라곤 면도하고 가발을 쓴 것 밖에 없다. 이때 레닌의 수염을 면도해준 사람은 바로 스탈린으로 레닌은 자신의 모습을 거울로 보고 "누가 봐도 핀란드 농부로군. 이러면 잡힐 일이 없겠어!" 라고 크게 흡족해했다고 한다.

모계 혈통이 유대인이다. 그러나 레닌은 다른 이들에게 자신이 유대인이라는 사실을 숨기지 않았고 어머니인 알렉산드라도 레닌에게 유대인식이 아닌 독일식 가정교육을 했으므로 레닌도 자신이 유대인이라는 자각은 사실상 없었다. 당연하게도 그는 자신을 러시아인이라고 생각했다.

레닌은 학창 시절에 최우수 학생이었으므로 동생들의 공부를 도와주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데 교육 방식은 미칠듯한 암기와 물어봐서 답을 못대면 패는 방식이었다. 그래서 레닌의 집에는 밤이면 밤마다 울음소리가 그치지 않았고 심지어는 상급자에 대한 절대복종을 강요하여 "울어라." 라고 명령한 다음 반응이 없으면 패서 울게 만든 다음 "너는 네 명령에 복종했다." 라고 선언하기도 했다. 나중에는 어머니마저 동생들을 그만 좀 때리라고 말렸을 정도.

당시 러시아 제국의 대학교에서 각광받던 학과는 과학, 기술 혹은 의학과였다. 실제로도 누나와 형 모두 그렇게 진학했고 마찬가지 성적이 뛰어났던 레닌도 그럴 것이라고 보였지만, 레닌은 뜬금없이 당시 비인기 학문인 법학을 선택한다. 이는 레닌의 형제나 어머니도 말렸었지만, 그의 고집을 누가 꺾겠는가? 결국 레닌은 법대에 진학했다.

동상이나 초상화 등에서 코트 등의 옷깃을 한 손으로 붙잡고 있는 모습으로 나타내는 경우가 많은데, 사실 이는 간지 때문이 아니라 본래 겁을 먹었거나 긴장했을 때 하던 버릇이다. 이 덕에 옷깃이 너덜너덜해져 있는 경우가 많았다. 특히 옷을 한번 사면 낡아 빠질 때까지 입었기 때문에 더 이런 현상이 두드러졌다.[36]

위와 마찬가지 맥락으로, 레닌의 사진을 보면 양복이나 코트를 거의 풀어 헤치고 있는데, 기본적인 이유는 더워서다. 몸에 열이 많고, 활동량이 많은 사람이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원래 체질인 듯 하다. 밖이 아무리 추워도 집안의 온도를 섭씨 16도 이상 올리지 못하게 했으므로 아내 크룹스카야는 집안에서도 옷을 껴 입고 있는 경우가 많았다. 이것 때문에 나중에는 주치의들의 항의 덕분에 몸을 따뜻하게 해야 한다는 의견을 받아들여 온도를 조금 더 올리긴 하지만 그 때는 이미...

외국어 고수. 학창 시절부터 언어 과목, 특히 라틴어그리스어는항상 최상위 성적이었고 나중에 망명할 때 다른 국가의 혁명가들과 토론하기 위해서 자발적으로 독일어, 영어, 프랑스어를 숙달하였다. 폴란드어도 조금 할 줄 알았다.[37]

레닌은 프롤레타리아 혁명계 본좌이지만 사실 그 자신은 아버지가 심비르스크 시 총 장학관인 쁘띠 부르주아 러시아에서는 부르주아가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합니다! 로 아버지가 사망하기 전까지는 부유하게 살았으며, 이 때 뿐만이 아니라 그는 평생 육체노동을 단 한번도 해 본 적이 없다. 특히나 노동자와 자신을 분명히 다른 계층으로 보고 있었으며 집안일을 전혀 못 해서 집에도 하녀를 두고 있었다. 본래 공산주의의 시조인 칼 마르크스와 프리드리히 엥겔스도 노동자와 거리가 먼 삶을 살았고, 그 외에도 유명한 사회주의 운동가 중에는 오히려 출신 신분 자체가 프롤레타리아 계층과 거리가 있는 경우가 있었다. 이러한 출신 성분의 차이라는 아이러니함은 사회주의 혁명에 대한 연구에서 한 부분을 차지한다.[38]

소련 시절에 나온 레닌에 관련된 책을 보면, 아버지의 사망 이후 그가 기지를 발휘해 가족들을 부양했다고 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건 사실이 아니다. 레닌은 그 후에도 어머니 밑에서 값비싼 여러가지 부대비용을 요구하는 벅찬 존재였다. 위에서도 썼지만 그는 육체노동을 해 본 적이 없다. 단지 방에 틀어박혀 책만 읽거나 도서관에서 아예 안 오거나 했을 뿐이다. 이 덕에 어머니 알렉산드라는 영지를 팔기도 하고, 레닌의 요구에 따라 이사를 다녔으며, 집에 세를 내거나 하는 등 각종 수단을 동원하여 어떻게든 돈을 마련해 주었다. 레닌의 어머니는 러시아 제국의 국채를 소유하고 있었는데 이 국채에서 나오는 이자가 레닌의 망명비용으로 들어가기도 했다고 한다. 역시 어머니는 위대하다.[39] 근데 아쉽게도 레닌이 권좌에 앉기 몇 달 전 사망했다. 조금만 더 살았다면 아들이 최고 지도자가 되는 것을 볼 수 있었을 텐데... 다만 레닌이 혁명 활동의 비용을 어머니로부터만 충당한 것은 아니다. 상당 부분에서 볼셰비키 당원들과 체제 변혁을 바라는 부르주아지들[40] 의 후원이 있었고 열성당원 중에선 부르주아들의 은행을 노획하여 얻은 전리금을 레닌에게 송금하기도 하였다. 그 중 한 사람이 다름아닌 스탈린이었다. 후술할 막심 고리키와 알렉산드르 보그다노프 역시 레닌의 후원자였다.

학창 시절에 담배를 하도 많이 피워서 어머니로부터 '담배는 건강에 해롭다.'라고 충고를 들었을 때는 상큼하게 씹었다. 그러나 나중에 어머니가 다른 방법으로 '너에게는 네 담뱃값으로 가족의 재산을 소모할 권리가 없다.'라고 하자 그 즉시 금연했다.[41]

형 알렉산드르가 알렉산드르 3세 암살미수 사건으로 사형을 선고받자, 레닌의 담임 교사는 아직 어린 레닌에게 이것을 도대체 어떻게 말해야 할까 걱정하다가 조심스럽게 말했는데, 그는 "형 자신이 옳은 일을 하였다고 생각하고 결과가 그렇게 되었다면, 후회하지 않을 것이지요." 라고 대답하며 동요하지 않았다. 그러나 형의 국가반역 행위 덕에 레닌은 대학교에서 뭔 사건만 터지면 주동자로 몰려서 불이익을 받았다. 그러다가 청강생으로 법학 공부를 겨우겨우 하고 졸업시험을 볼 수 있게 되었는데, 수석이었다. 변호사 면허도 최우수 성적으로 받고 사무실에 취직한다. 그러나 이 당시 레닌은 변호사 일을 할 때 사소한 소송에서도 매번 패소했는데, 한달에 대략 6번 정도 의뢰받았을 정도로 원래 이 일에 관심이 없었다. 즉 그저 생계를 위해 했던 것. 그러나 이 때 농민의 억울함과 사회현실의 부조화 등을 체험하는 계기가 되었다는 설도 있다.[42]

레닌은 을 사는데는 돈을 아끼지 않았기 때문에, 돈이 쪼들리면 주변 사람들에게 독촉해서라도 돈을 구해 책을 샀을 정도로 책벌레다. 책의 요약 및 정리하는 능력이 일반인과는 넘사벽 수준이었고, 칸트나 헤겔, 마르크스의 저서를 읽고 비판과 개인적인 주석까지 달 정도의 수준이었다. 토론에 들어가면 논쟁에서 유리하기 위해 관련 서적을 많게는 4백 권씩 읽었다. 또한 5천 단어로 된 문서 하나 쓰는 데는 4시간이면 충분했으므로, 레닌이 러시아 역사상 최고의 연설가이자 세계구논객이었다는 것은 더 이상 설명이 필요한가?[43]

아이러니하게도, 공화혁명의 시발점이자 공산주의의 발상지를 싫어하고 자본주의의 상징국이자 세계 최대의 제국을 좋아했다. 레닌은 프랑스 망명시기 더럽고 규칙이 없는데다 제일 추악한 곳이라며 욕을 퍼부었을 정도. 당시 그가 살았던 아파트의 맞은 편에 살던 푸주간 주인이 매일같이 소세지를 만들어대는 통에 풍기는 돼지 창자의 고약한 냄새 때문에 레닌은 아무리 더워도 창문을 열 수 조차 없을 지경이었다. 그런데 사실 그 앞집 사람은 독일계였다.

레닌은 만성적인 위장 질환을 앓았다. 광천수를 마시도록 처방하고 각종 검사를 해봐도 명확한 원인을 찾지 못했는데, 결국 원인은 체스였다. 레닌은 체스를 매우 즐기는 편이었다. 그런데 레닌은 체스 도중 좋은 수가 떠오르면 숙이고 있던 상체를 갑자기 일으키며 힘을 주는 버릇이 위장에 무리를 준다는 것을 밝힌 것. 위까지 아프게 하는 신들린 체스. 실제로 체스를 끊자 고통이 많이 사그라졌다. 러시아인들이 체스를 좀 좋아하긴 하지. 그래서 평균수명이 아직도 60세 사실 알고 보면 종합병원 수준인데, 특히 신경쇠약은 항상 달고 다녔으며 불면증으로 고생하여 심하면 며칠이나 잠을 못 자기도 했다. 그의 말년 뇌출혈이나 기타 사소한 질병들은 그의 아버지 쪽 가족력에서 기인한다고 볼 수 있다.

레닌의 모습을 기록한 사진 중에는 그가 동지들과 함께 체스를 두는 장면도 적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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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악!! 당했다!

위 사진은 1908년 망명 생활 중인 레닌이 알렉산드르 보그다노프와 함께 체스를 두는 모습이다. 오른쪽에 승기를 제대로 잡았는지 입을 벌리며 크게 기뻐하는 사람이 레닌이다. 왼쪽은 보그다노프, 중앙에서 체스를 구경하는 사람은 사회주의 리얼리즘 분야의 문호인 막심 고리키이다.

원래 힘이 장사였다. 학창시절에는 실제로 성적도 최상위권이었고 공부만 하는 스타일이긴 했지만, 만약에 자신이 책을 읽을 때 시비를 거는 학생이 있으면 당연히 폭력을 시전. 덕분에 레닌이 일단 교실에서 책을 꺼내면 모두가 무조건 조용히 있어야 했다. 성인이 된 후에도 평범한 강도는 그냥 제압해 때려 눕힐 수 있을 정도였고, 토론 자리에서 언성이 높아질 때 자기 측의 인원 중 하나가 폭력을 쓰려고 하자 그의 멱살을 한 손으로 잡아 회의장 밖으로 끌고 나와서는 "논쟁의 자리에서 폭력을 쓰는 자만큼 어리석은 사람은 없다."라는 명언을 남겼다.ㄷㄷ

또한 운동을 좋아하여 볼가 강을 따라 카누 타는 것는 것을 어려서부터 즐겼을 뿐 아니라 스키등산도 좋아하여 알프스를 등반하는 것도 즐겼다. 여기서 따라 온 일행들이 퍼지면 "벌써 퍼지는 건가?" 라고 핀잔을 준 뒤 그래도 못 따라오면 버리고 갔다. 국가원수가 된 이후에도 차를 타기보단 크레믈린 주위를 자주 걸어다녔으므로 강도를 만났던 적도 있고 저격 미수사건도 이 도중 일어났다. 또 2월 혁명 이후 독일에서 러시아로 향할 때 기차 안에서 수상해 보이는 인물을 발견하자, 다짜고짜 그 사람을 기차의 플랫폼으로 던져버렸다.

사진에서 레닌은 늘 양복을 입은 말쑥한 차림이지만 사실 옷이 그것 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레닌은 패션이라는 것에 대해서 완전히 무지하였으며 요리나 청소, 집안 인테리어 등의 것들조차 하나도 몰랐다. 옷도 누가 사주지 않으면 입던 것만 계속 입고 집에서도 누가 요리를 안 해주면 그냥 굶었다. 실제로 일만 하는 혁명 로봇 수준. 레닌의 초상화에서 그가 입은 셔츠가 다운버튼 스타일이라 오버 테크놀로지패션 리더가 아니냐고 하는 경우도 있는데, 그것은 다운버튼이 아니고 넥타이가 풀어지지 않게 하는 목적으로 카라를 조이는 링크버튼을 끼운 것으로 당시에는 꽤 많이 사용되었다. 지금도 '탭(Tab) 카라'라는 이름으로 쓰이며 당연히 버튼다운보단 훨씬 고전적인 아이템으로 꼽힌다.

다혈질에 자타공인 아가리 파이터로 유명하다. 기차를 타고 여행할 때, 역에서 실제 객차의 자리수보다 표를 많이 발권하는 오류로 승객들과 승무원 사이에 실랑이가 벌어졌을 때, 레닌은 분명히 올바른 좌석 표를 소지하고 있었음에도 열차가 지연되기 시작하자 승강장으로 박차고 나가 승무원을 붙잡고 입배틀을 시전, 결국 모두 타고 갈 수 있게 한 경우가 있다. 설전이 붙으면 상대가 패배를 인정할 때까지 논쟁했으며 이 시간이 몇 시간씩 가는 경우도 있었다.아 그래 그래 니가 이겼다고 치자... 이겼다! 특히 스탈린은 말년에 뇌일혈로 투병 중이라 말도 잘 못하는 레닌을 상대로 논쟁했을 때도 백이면 백 발렸다. 심지어 볼셰비키 최강의 이론가이자 꿀리지 않는 아가리 파이터인 니콜라이 부하린도 망명 시절에 몇번을 발라먹었다. 다만 트로츠키와 논쟁할 때 한번 말빨로 밀려서 당황한 적은 있었다.

소비에트의 국가원수가 된 이후, 관용차로 당원들이 롤스로이스를 선물하였다. 그러나 이런 것에 관심없던 레닌은 차가운 반응이었고, 한번 타 보았을 때 눈보라에 바퀴가 박혀 버려 운전기사와 함께 차를 끌어내야 하는 상황이 생기자 돌아와서 "이딴 사치품은 갖다 버려라!" 라고 일갈했다. 당시 롤스로이스 뿐 아니라 자동차 자체가 귀한 사치품이었다. 1920년대 시점에서는 미국 등 일부국가에서나 자동차가 보급된 수준이었고[44], 대부분의 국가들과 식민지에서는 자동차라는것은 말 그대로 고위급이나 일부 부유층이나 타고 다닐수 있던 수준이었고, 훨씬 이후에도 사치품이었다. 당장 소련만 해도 자가용의 대중화는 늦게 이루워져서 자동차가 일반 서민들에게까지 보급되기 시작한것은 1971년 라다 공장이 완공되고 나서부터의 일이었으며, 한국은 1980년대 중반 이후에나 이루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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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료들은 당황하여...이렇게 무한궤도와 썰매를 달아줬는데, 이렇게 개조된 이후에 타 보곤 그제서야 제 기능을 한다며 마지못해 이용했다. 그리고 이 국가원수용 스노모빌롤스로이스는 모스크바 외곽에 있는 '레닌의 별장'전시되어 있다.[45] 실제로 레닌은 이렇게 누군가가 자신에게 선물을 주는 것을 그다지 좋아했던 편이 아니다. 후에 뇌출혈로 불구자가 되었을 때, 영국공산주의자들이 전동휠체어를 선물했을 때도 참전 군인들에게 주라고 거부했었다.

깔끔하고 정돈된 상황을 좋아했고 주변인에게 그렇게 요구했다. 특히 다른 곳은 어질러지든 더럽든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았지만 자신의 집무실에서만큼은 업무를 볼 때 연필을 반드시 뾰족하게 깎아서 길이를 맞추어 일렬로 배치해야 했고, 자리에 앉을 때 책상을 반드시 걸레로 닦은 뒤에야 업무를 보았다. 뇌출혈로 정권에서 밀려난 이후에도, 크레믈린에 있는 자신의 집무실 물건을 누가 건드리지는 않았는지 점검하러 올 정도. 이는 소음에 관련한 문제에서 더욱 두드러지는데, 조금이라도 흐트러지거나 소리를 내면 불같이 화를 내는 바람에, 레닌의 아내인 크룹스카야는 그가 서재에 들어가면 발꿈치를 들고 살금살금 걸어야만 했을 정도이다. 그리고 집무실에서 담배 피우는 것을 극도로 싫어하여 누가 담배를 피우면 밖의 날씨가 어떻든 간에 무조건 창문을 열어 버렸다. 특히 스탈린이 자신의 집무실에서 파이프 담배를 피우자, "이 아시아놈 같이 생긴 작자를 보게! 할 줄 아는 건 저렇게 앉아서 담배 빠는 것 밖에 없잖아!" 라고 소리쳤다. 그리고 그루지야인인지라 아시아인이라는 말에 컴플렉스가 있던 스탈린은 쳐서 파이프를 던졌다는 후문이 있다. 본인도 황인 핏줄이면서..

특히 아이들을 좋아했다. 집에 아이들이라도 놀러오면 근엄한 모습을 내버리고 아이들처럼 시끄럽게 떠들고 방 안을 뛰어다니는 등 정신이 없었다. 이를 본 볼셰비키 당료들이 오히려 당황해 했을 정도이다. 특히 레닌은 늘 손주나 다른 아이들을 키우고 싶어했다. 다만 레닌의 아내인 크룹스카야는 병을 앓았기 때문에 아이를 가질 수 없는 상황이었다는 것이 정설이고 따라서 레닌의 직계 자손은 없다.

러시아 역사상 최고의 논객답게 연설과 토론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했다. 말년에 체력적으로 매우 무리가 따르는 상황에서도, 측근들의 만류를 뿌리치고 연설을 감행하기도 했다가, 연설 직후 기절한 적도 있다. 그러나 비생산적인 논쟁이나 논쟁을 위한 논쟁은 매우 싫어했으며, 논쟁이 무익하다고 판단할 때는 그냥 상대를 하지 않았다.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의 노선차를 둘러싼 논쟁이 도저히 해결이 안 되자 깔끔히 볼셰비키멘셰비키로 분당된 것은 레닌의 이런 면도 크게 작용했다.

러시아 혁명이 완수되고 크레믈린이 집무실이 되었을 때, 레닌은 거대한 크레믈린 궁전의 딱 세 방만을 사용했는데 침실, 집무실, 서재이다. 이 방들을 지금도 보존되어 있으나, 일반인이 출입할 수 없는 구역에 있다. 이후 대부분의 소련 서기장들은 이러한 레닌의 검소함을 계승한다는 명목으로, 대부분 비슷한 방식의 구역을 사용했다.

호신용으로 리볼버 권총을 항상 소지하고 있었다. 이 덕분에 경찰에게 붙들려 고난을 치렀던 적도 있다.

레닌이 사망한 이후, 이오시프 스탈린'레닌 동지가 도대체 어떻게 그러한 천재적인 혁명적 위업을 수행할 수 있었는가?' 라는 주제로 그의 를 절단해 세계 각지에 보내 공밀레를 시전했다. 당연히 답이 없다. 그러나 독일의 한 과학진이 레닌의 뉴런 집합체가 일반인보다 크다는 연구결과를 발표하기도 했다. 과연 독일답다. 사실 성장환경을 보면 어느 정도 답이 나온다.

사후 그를 기리기 위하여 소련 최고 등급의 국민훈장인 레닌훈장이 1930년이 제정되었다.

혁명에 대한 열정은 그 누구보다도 강해서 반대파조차 인정할 정도였다. 당시에는 갈라졌지만 한때 친구이자 혁명동지였던 마르토프는 10월 혁명 후 레닌이 어떻게 정권을 잡을 수 있었냐는 질문에 "온종일 혁명만 생각하고, 혁명에 대한 글만 쓰고, 혁명에 관한 글만 읽는 사람이 어찌 집권할 수 없었겠소." 라고 되물었다. 레닌은 한때 혁명 동지였으나 노선 차이로 갈라진 멘셰비키 인사들에 대해 매우 관대했으며, 옛동지 마르토프도 해외 망명을 허가해줬다.

아름다운 프랑스 여자 혁명가 이네사 아르망(Inessa Armand)과 내연의 관계라는 소문이 있었다. 2004년 EBS에서 방영한 레닌의 전기영화 '레닌의 혁명으로 가는 열차'(Lenin:the Train, 1988)는 이 소문이 사실이라는 전제하에 만들어진 것이다. 이 영화는 레닌을 비롯한 러시아 혁명가들이 봉인열차를 타고 스위스를 떠나 독일을 횡단하면서 러시아로 갈 때 벌어진 일화를 다루고 있다. 이네사 아르망은 레닌에게 크룹스카야와 이혼하고 자기와 결혼하자고 재촉하지만 영화에서 레닌은 단호히 이렇게 말한다. "혁명가가 조강지처를 버린다면 도대체 누가 그 혁명을 지지하겠소."[46]
이네사 아르망은 레닌을 따라 러시아에 왔고 그가 집권하는 것을 봤으나, 혁명 이후 창궐했던 티푸스에 걸려 사망한다.[47] 이네사와 레닌이 서로 사랑하는 관계라는 소문이 퍼진 이후에도, 뜻밖에도 레닌의 아내인 크룹스카야와 이네사는 매우 사이가 좋았다. 서로를 혁명 동지로서 존중하고 아껴준 흔적이 편지나 주위 사람들의 증언을 통해 남아 있다. 이네사가 사망한 이후 크룹스카야는 진심으로 슬퍼하며 그녀를 위한 추도사를 작성해 주었으며, 이네사가 전남편 사이에서 낳은 아들인 앙드레를 후견인으로서 보살펴 주었다. 그러나 레닌이 바람피웠다는 증거는 없고, 아르망과의 관계는 그냥 소문이다.

레닌의 사망 원인이 매독 때문이라는 설이 그럴듯하게 돌았다. 레닌이 건장했으며, 비교적 젊은 나이(54세)에 사망한 것이 이 설의 배경이 되었다. 당시 항생제가 나오기 전이라서 매독은 불치병이었으며, 현재의 에이즈와 비슷한 (사실 전염성을 보면 에이즈보다 더 무서웠다.) 공포였다. 이 설은 그를 디스하는 측에서 상당히 널리 퍼진 설이다. 유력 정치인이 에이즈로 사망했다고 해보자. 그 정치인이 어떻게 보여질까? 그것과 비슷한 효과이다. 한국의 모 교회 목사도 좌파를 디스하며 이런 말을 하기도 했다. 제 들보는 보지 못하면서. 소련측의 부인에도 불구하고 이 설은 서방에서는 반공적인 분위기에서 유력한 설로 인정되었으며 한때 영문 위키에까지 그럴듯하게 서술되었다 (현재는 삭제됨). 그러나 2012년 6월 중립적이라고 할 수 있는 미국 메릴랜드 의대의 연구진은 레닌의 부검소견서를 연구한 결과, 스트레스로 인한 뇌졸중이 사망 원인이라고 발표했다. # 레닌의 아버지도 이 병으로 사망했으므로 가족력이 있었는데 여기에 더해 스트레스와 과도한 흡연으로 그도 같은 질환으로 최후를 맞았다. 어쨌든 레닌의 사생활은 담백했다는데에 대부분의 전기 작가들의 견해는 일치한다. 여자보다는 혁명이나 철학적 논쟁에 더 흥미가 있었던 듯하다. 사실 레닌 말고도 많은 정치가들이 사망했을때마다 매독으로 죽었다는건 전형적인 비하용 레파토리이다. 레닌이 매독으로 죽은 것이 아니라는게 확실한 과학적 검증을 통해 밝혀졌다. 애초에 시신이 그대로 앰버밍 되어 있기에 검증도 언제든지 가능하기 때문이다.

5. 어록

소비에트 권력이란 무엇인가? 국민 대다수가 이해하지 못하거나 이해할 수 없는 이 새로운 권력의 본질은 무엇인가? 점점 노동자들의 관심을 끌고 있는 이 권력의 본질은 부자들과 자본가들이 독점하던 국가 경영이 이제는 처음으로 억압받고 박해당하던 계급에 의해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소비에트 권력'에 대한 레닌의 정의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유는 언제나 고대 그리스 공화국들에 있었던 자유, 즉 노예 소유자들을 위한 자유와 거의 같은 것이다. 현대의 임금노예들은 자본주의적 착취와 조건으로 인해 궁핍과 빈곤에 몹시 짓눌려 있기 때문에 민주주의에 신경 쓸 여지도 없고 정치에 신경 쓸 여지도 없으며 따라서 모든 일이 통상적으로 평화롭게 진행될 떄에는 주민의 다수가 공적 생활과 정치 생활에서 배제되어 있다.
저서 '국가와 혁명(1917)' 중
국가가 있는 한 자유란 있을 수 없으며, 자유가 있는 한 국가는 있을 수 없다.
저서 '국가와 혁명(1917)' 중
어려움이 실행 불가능은 아니다. 올바른 길을 선택했다는 확신이 중요한 것이니, 이 확신은 기적을 이룰 수 있는 혁명적 정력과 혁명적 열정을 백 배 강화해 준다
저서 '민주주의 혁명에서의 사회민주주의의 두 가지 전술' 중
"블라디미르 일리치가 빠르게 연단에 올라 '동지들이여'라고 목을 굴리며 명확히 말하였다. 그는 말을 잘 못하는 것 같아 보였으나 잠시 후 나는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그의 말에 빨려들어갔다. 매우 복잡한 정치문제들을 그토록 단순하게 말하는 것을 들어본 적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그는 문장을 아름답게 말하려 하지 않았으며, 단어 하나하나를 놀랍도록 손쉽게, 그리고 단어의 의미를 손바닥 위에 올려놓듯 정확하게 표현하였다. 가볍게 위로 올려져 앞으로 내민 그의 팔과, 말을 담고 있는 듯한 그의 손은 적의 주장들을 축출하면서 노동자 계급이 자유주의 부르주아지의 뒤나 옆을 걷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길을 가고 있다는 증거들을 내세웠다. (...) 이 모든것은 탁월하였다. 레닌은 자신의 이름으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의 이름으로 말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내 뒤에서 누군가가 '말을 간결하게 하는군' 이라고 소곤거렸다. 그것은 사실이었다."
막심 고리키가 묘사한 레닌의 연설

6. 저서

레닌은 총 120권의 책을 저술했다. 국내에서는 민주화 이후 가장 유명한 저작 일부 만이 번역되어 출판되어왔으나, 최근 한 출판사에서 전집 출간을 시도하고 있다.#
  • Our Immediate Task, 1899년
  • 러시아에 있어서 자본주의의 발전 (The Development of Capitalism in Russia), 1899년
  • 무엇을 할것인가 (What Is to Be Done?), 1902년
  • 국가와 혁명
  • 제국주의, 자본주의의 최고 단계
  • 이른바 시장문제에 관하여
  • 인민의 벗들은 누구이며 그들은 사회민주주의자들과 어떻게 싸우는가

7. 레닌의 이름을 딴 지명, 사물

지금도 러시아에는 그의 이름을 딴 울리야놉스크(Ульяновск)라는 도시[48]가 있으며, 소련 지도자들의 이름을 딴 지명은 대체로 소비에트 연방 붕괴 후에 대부분 이전 명칭으로 돌아가는 수모를 당했으나[49] 울리야놉스크는 소련식 이름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50] 그리고 과거 레닌그라드라고 불리던 소련 제 2의 도시 상트페테르부르크는 옛 이름으로 돌아갔지만, 상트페테르부르크를 둘러싼 레닌그라드 주는 옛 이름으로 남아있고 도시는 아니지만 키르기스스탄레닌 봉 같은 사례도 있다.

7.1. 지명

많다. 더 보고 싶으면 여기를 참고하라.
굵은 글씨는 현역 지명이다.

7.2. 사물

8. 매체

심슨 가족에서 잠깐 등장. 호머가 해군에 입대해 핵잠함을 강탈하는 에피소드에서 러시아가 소비에트 연합으로 돌아가자[55] 퍼레이드 중인 러시아 국기가 소비에트 연합 국기로 덮어지고 퍼레이드 구조물에서 탱크가 나오며 병사들이 절도있게 움직이고 베를린 장벽이 다시 쳐지며 보존처리된 레닌이 유리관을 깨고 부활하더니 "자본주의를, 쳐부수자!" 라고 외친다.

8.1. 역사서

  • 영국의 사회주의자 토니 클리프가 저술한 레닌 평전 4부작이 국내에 들어와 있다. 다만 클리프주의의 관점이 뚜렷하게 드러나, 이른바 속류 민주주의[56]의 관점에서 레닌의 활동과 사상을 다소간 곡해하고 있으므로 읽을 때 이 점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참고로 클리프주의 경향에서는 이 책을 거의 종교경전으로 취급하고 있다. 사실상 레닌을 자기네들 입장에 맞게 끼워 맞춰서, 서구식 부르주아 민주주의에 익숙한 대중들에게 '레닌은 독재자가 아니다'[57] 라고 호소하기 위한 목적으로 집필한 책인 셈인데, 막말로 스탈린이 레닌을 왜곡한 것과는 정반대 방향으로 레닌을 왜곡하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그렇기 때문에 이 책을 읽을 때는 각별한 주의가 필요하다.
  • 2001년 삼인출판사에서 영국의 역사학자 로버트 서비스가 저술한 레닌 평전이 정발됐었지만 현재는 절판되고, 2017년 러시아 혁명 100주년을 맞아 출판사 교양인에서 문제적 인간 시리즈 최신간으로 재출간하였다. 다만 이 책은 10월 혁명 이전까지의 레닌의 생애를 잘 조명했다는 점이 있지만, 그 이후 레닌과 볼셰비키에 대해선 매우 부정적으로 다루는 관점을 떠나서 볼셰비키의 반대세력이었던 백군의 잔인함과 만행은 일언반구조차 없다는 크나큰 우파적 한계가 있다.
  • 레닌의 아내 크룹스카야가 쓴 '레닌을 회상하며'라는 책이 있다. 박종철 출판사에서 출판했다.

9. 관련 노래 가사

Ветви оделись листвою весенней,
И птицы запели, и травы взошли...
Весною весь мир отмечает рожденье
Великого сына великой земли.
나뭇가지들이 봄의 잎사귀로 덮혔고,
새들은 노래했고 풀들은 돋아났다.
봄에는 전세계가 위대한 대지에서 난
위대한 아들의 탄생을 기념한다.

Судьбы народов, мечты поколений
Провидел он взором орлиным своим.
Бессмертный, как жизнь, вечно жить будет Ленин
В делах мудрой Партии, созданной им.
제민족의 숙명과 세대의 꿈을
자신의 가진 매의 눈으로 그는 예견했었다.
그가 창건한 지혜로운 당의 업적 안에서
생명처럼 불멸한 레닌은 언제까지나 살아있으리라.

К дружбе и миру народы звал Ленин.
Мы ленинским светлым заветам верны.
И нас вдохновляет в победном движенье
Могучая Партия нашей страны.
화합과 평화를 향하여 레닌은 제민족을 불렀다.
우리는 레닌의 찬란한 유훈에 충성한다.
그리고 우리나라의 강대한 당이
승리의 활동 속에서 우리에게 힘을 준다.

Ленин - это весны цветенье.
Ленин - это победы клич,
Славься в веках, Ленин,
Наш дорогой Ильич!
레닌, 그것은 봄의 개화이다.
레닌, 그것은 승리의 함성이다.
만대에 떨치라, 레닌,
경애하는 우리 일리치!
알렉산드르 홀미노프(Александр Холминов) 작곡,
유리 카메네츠키(Юрий Каменецкий) 작사
레닌송가(Песня о Ленине).
2절
Сквозь грозы сияло нам солнце свободы,
И Ленин великий нам путь озарил:
На правое дело он поднял народы,
На труд и на подвиги нас вдохновил!

폭풍우 속에서도 자유의 태양은 우리를 비추고
위대한 레닌은 우리에게 길을 밝혀주네
정의로 그는 인민을 인도하고
노동과 위업으로 우리를 이끄네!
후렴구
(생략)
Партия Ленина — сила народная
Нас к торжеству коммунизма ведёт

인민의 힘인 레닌의 당이여[58]
공산주의의 승리로 우리를 인도하리라!
세르게이 미할코프[작사1]
가브리옐 옐레기스탄[작사2]
알렉산드르 알렉산드로프[작곡]
소비에트 연방 찬가, 1977


[1] 가끔 남한 운동권에서 풀네임을 '블라디미르 일리치 울리야노프 레닌'이라고 쓰는 경우가 있는데(예를 들어 아고라 출판사에서 나온 <국가와 혁명>의 페이지에 풀네임을 이렇게 적어 놓았음), 풀네임을 쓰려면 '블라디미르 일리치 레닌'까지만 써야 한다.[2] <세계를 뒤흔든 열흘>, 존 리드, 책갈피, 2005, 337쪽[3] '레닌'이라는 이름은 레나 강(Лена) 유역에서 온 남자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최한우, 『중앙아시아 연구』 하권, 펴내기, 2004, p.334.[4] 제정 러시아 말기 공산주의 혁명가치고 필명이나 가명을 안 쓴 사람이 없고, 대부분 본명보다 가명이 더 유명해진 탓에 이후에도 가명으로 활동한 경우가 더 많다.[5] 소련의 초대 서기장은 레닌이 아니라 스탈린이다.[6] 이는 레닌 사후 우상화 작업을 하던 스탈린에의해 의도적으로 묻혔다.[7] 때문에 카잔에는 청년 시절 레닌의 모습을 딴 동상이 있다.[8] 이 당시에는 트로츠키도 멘셰비키에 있어 레닌의 각종 논리를 공격하고 있었다.[9] 전신철도 체계를 장악하고 있던 노동자들은 거짓된 통신을 보내어 병력을 분산시킨다던가, 병사들이 타고 있던 열차의 운행을 고의로 멈추거나 전혀 엉뚱한 지역으로 열차를 보내버림으로써 말 그대로 병력의 응집 자체를 '소멸'시켜버린 것![10] 당시 러시아 인구의 80%는 농민이었다. 볼셰비키는 대도시의 노동자, 전선의 군대에서 과반 이상의 지지를 받았으나 농민의 압도적인 지지를 받는 사회혁명당을 숫적으로 이길 수 없었다. 결국 볼셰비키는 사회혁명당 좌파와 연대하여, 사회혁명당의 토지 개혁 프로그램을 받아들일 수 밖에 없었다. 원래 볼셰비키의 계획은 집단농장화.[11] 이때의 논리가 '선거 결과가 소비에트를 통해 나타난 민중의 실제 의사와 일치하지 않는다'라는 것이었다. 소비에트는 사업장별로 대표자를 뽑는데, 여기에서는 볼셰비키당이 압도적인 지지를 얻었다. 그러나 제헌의회는 행정구역에 따라 편성한 지역구별로 대표자를 뽑는데, 이 지역구는 인구비례가 반영되지 않았고 사회당 표가 많이 나오는 농촌 선거구가 볼셰비키당 표가 많이 나오는 도시 선거구에 비해 압도적으로 많다 보니 실제 대중의 정당별 지지율을 반영하지 못하여 사회혁명당이 더 많은 의석을 가져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쉽게 말해서 인구 100만인 수원시, 용인시와 인구 2만도 안 되는 영양군, 울릉군에서 똑같이 1명씩의 국회의원을 선출한다고 생각해 보면 이해가 빠를 것이다. 볼셰비키당이 제헌의회를 해산시켜 버린 것이 아주 근거가 없는 독단적 결정은 아니었던 셈이다. 볼셰비키당은 소비에트가 부르주아 의회에 비해 인민의 의사를 보다 정확히, 직접적으로 반영하는 통로라 여겼기에 제헌의회를 해산한 것인데, 당시에는 소비에트 전국회의 대의원 역시 자유선거로 뽑았기에 큰 문제는 없었다. 문제는 그 이후에...[12] 공산당으로 이름을 바꾼 것과 일당독재 사이에는 상관관계가 없다. 일당제는 적백내전 때 등장했는데 적백내전이 종식되고 정국이 안정되면 다시 프롤레타리아 계급독재의 범위 내에서 제한적 다당제를 인정하려는 것이 원래 레닌과 트로츠키의 의도였으나, 레닌 사후에 트로츠키가 쫓겨나고 스탈린이 정권을 잡으면서 이러한 일당체제는 더욱 숨 막히는 일당독재로 흑화하게 된다.[13] 그러나 이들은 사분오열되어 있어서 그 자체로 큰 위협이 되었다고는 보기 힘들다.[14] 10월 혁명 이후 볼셰비키를 지지할 것이냐 말 것이냐의 문제로 분열한 사회혁명당원 중 볼셰비키와 행보를 같이 하기로 한 계파를 의미한다. 그러나 이들 또한 러시아 내전 중 볼셰비키의 독단적이고 폭압적인 행동에 반발하여 결국 볼셰비키를 적대하였다. 직접적인 계기는 브레스트 리토프스크 조약으로, 독일에 대한 혁명전쟁을 주장하던 이들은 강화를 볼셰비키의 반역으로 규정, 2차 혁명을 일으킬 것을 선동한다. 그러나 이들의 어설픈 쿠데타는 하루만에 진압...[15] 멘셰비키의 수장 율리 마르토프 또한 독일에서 망명 생활을 했는데, 그를 쫓아낸 레닌의 지원을 받아가며 영위하였다. 어찌됐건 레닌과 마르토프는 오랜 옛 친구...[16] 트로츠키는 '지나치게 자신감을 지녔다고 깠으며, 심지어 레닌이 가장 신뢰했던 위원인 부하린마저 '마르크스주의자라기엔 상당히 현학적인 자'라며 깠다. 물론 스탈린을 성실하지만 위험하다며 승계자가 무능해도 상관 없으니 갈아치울 수 있는 한 갈아치우라고 깐 건 당연하다.(...) 이 유언들은 모두 니키타 흐루쇼프 때 공개되었다.[17] 이 부분에 있어서는 레닌의 정치적 감각...이 아니라 최소한의 상식에도 의문을 품을 수밖에 없는 것이, 그 비서가 누구냐면 바로 스탈린의 두번째 아내 나댜 알릴루예바였다![18] 레닌이 죽자 많은 참배객 인파를 본 스탈린은 그를 기리자는 의미에서 이것을 제안하였다.[19] 제2차 세계 대전 당시에 나치 독일총통 아돌프 히틀러독소전쟁을 일으켜 독일 국방군모스크바로 진격하자 임시로 레닌의 시체를 일시적으로 소련 동방 지역인 튜멘에 위치한 국립과학연구소로 보낸 적이 있다.[20] 주로 자신의 시신을 보존하려고 하는 졸부(...)들이 많이 문의한다고. 아무래도 레닌도 그렇고 스탈린도 한동안 시신이 보존되어 있었으니 죽어서도 시신이 보존되는 권력자로써의 기분을 느낄 수 있어서 그렇다나. 과거 90년대 러시아의 경제난이 심각했을 때 한창 세를 떨쳤던 마피아 두목들도 시신 보존 문의를 많이 했다고.[21] Feuer, Lewis S. (1989). Einstein and the Generations of Science. Routledge. p. 25.[22] 할머니가 몽골계 혈통인 레닌에게 동족의 감정을 느끼는 사람도 있다고 한다.[23] 다만 전시공산주의가 끝나고 경제성장의 필요성이 대두되자 NEP(신경제정책)이라는 자본주의화 정책을 밀어붙이면서, 이에 반대하는 이상주의적 공산주의자들을 '좌익소아병'이라고 까고(당연히) 탄압한 적은 있다. 물론 NEP는 원래부터 현실적 필요에 의한 한시적 정책으로 추진된 것이니......[24] 서평이다. 이 서평은 레닌주의와 스탈린주의, 주체사상을 구별하지 않고 있어서 무의미하다는 의견도 있으나 스탈린 정권 당시 악명을 떨친 KGB의 전신인 체카가 레닌의 집권기에 이미 탄생하였고, 레닌 역시 이후의 소련을 뒤덮은 잔인한 폭력에 대한 책임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25] 물론 영국, 프랑스과는 비교 불가능하지만 이탈리아, 스페인 등 대부분의 다른 국가는 파시스트 독재를 시행했다.[26] 물론 소수파들이 망명 간 다음에는 다시는 돌아오지 말라고 자금을 대주기도 했다.[반론] 여기에 대해서는 레닌 자신보다는 레닌의 후계자들의 책임이 크다는 견해가 마르크스주의자들 사이에서 제기된 바 있다. 레닌의 신경제정책 즉 NEP는 자본의 사회화의 과정으로서 자본의 국유화를 추진했는데, 레닌의 후계자들은 자본의 사회화=자본의 국유화로 생각했고 이 때문에 국가를 절대화시켰다는 것이다. 이러한 오류는 스탈린, 트로츠키, 부하린 등 여러 후계자들에게서 공통적으로 발견된다.[28] 근데 크론슈타트 진압 당시 진압당하는 쪽 보다 진압하는 쪽이 훨씬 더 많은 사상자가 나왔다.[29] 물론 이건 단순히 많이 만들어져서라기보다는 1990년대 러시아 경제사정이 안 좋아져서 철거를 미처 못했고, 옐친 시절 실정에 대한 반동으로 소련에 대한 향수도 강해지다 보니 '레닌 동상을 굳이 철거할 필요가 있나?' 라는 식으로 여론이 반전되다 보니 철거 논의가 힘을 잃은 것에 가깝다. 현재도 통합 러시아당 등에 의해 철거 논의가 간간히 벌어지기는 하지만 반응은 미미한 편. 아니 그 위대한 차르께서 계신 곳인데 반응이 미미하다고? 심장박동이 미미한게 아니고? 당수가 이사람이여서 그렇다[30] 애초에 '민족의 자결'은 민족주의의 기본적인 속성이다.[31] 그런데도 중국은 티베트나 위구르 등은 독립해선 안 된다는 이중잣대를 내밀었으며, 지금도 마찬가지고, 심지어 『중국의 붉은 별』을 보면 마오쩌둥은 조선마저도 중화연방의 일원이라는 식으로 말해서 인터뷰한 작가(에드가 스노우)가 따로 지적하는 주석을 달기도 했다.[32] 당시 미국, 영국, 프랑스 등 서구열강들은 아시아 식민지 문제에 대단히 소극적이었던 자세로 일관했었고, 일본 제국을 지지하는 분위기였다.[33] 실제로 아시아 여러 지역(특히 중국, 한국, 베트남 등)의 여러 지도자급 인물들이 여기에 깊은 영향을 받았다. 심지어 쑨원도 이러한 전략적 필요성에 공감해 소련과 손잡았다. 독립군 무장이 보통 모신나강이나 PPSH-41같은 소련제 무기인 것으로 보아 무기도 지원해 준것으로 보인다[34] 이는 독립운동가들 사이 내부 계파가 생각이상으로 분열이 심각했기 때문이다.[35] 25세가 되던 1895년에 찍은 머그샷을보면 이미 탈모가 상당히 진행된 것을 볼 수 있다.[36] 파리 망명 당시 발에 안 맞아서 못 신는 구두를 버리지 않고 트로츠키에게 줬다는 이야기가 있는 걸로 봐서, 의외로 구두쇠였는지도 모른다.[37] 그러나 러시아를 나오기 전까지는 유창했던 언어는 프랑스어 정도고, 나머지 두 언어는 글로만 읽을 수 있었다고 한다. 이후에는 스위스(독일어를 씀)와 영국에 살기도 했으므로 유창해졌을 듯.[38] 의외로 공산주의 초기 지도자 중 부유한 출신들이 상당히 많다. 우선 레닌을 시작으로 중국마오쩌둥도 젊은 나이에 학교를 설립할 정도로 부자였고, 쿠바카스트로 형제도 아버지가 농장 소유주였고 체 게바라도 아버지가 귀족 출신에 병원 원장이었다. 트로츠키는 8살 때 당시 우크라이나에선 구경조차 하기 힘들었던열대 관엽식물이 잔뜩 놓인 사진관에서 입학 기념 사진을 찍을 만큼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폴 포트는 왕의 외척가문 출신으로 젊은시절에는 왕족들과 교류했다 반대로 가난한 집안 출신들로는 스탈린, 저우언라이, 티토, 차우셰스쿠, 호치민을 들 수 있다. 문제는 마르크스주의를 이해할려면 고대 철학에서부터 헤겔을 비롯한 고등교육을 받아야만 이해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작금의 시대에 비추어보면 강남 좌파와 비슷한 케이스랄까.[39] 로버트 서비스의 책을 읽어보면 레닌의 어머니 알렉산드라가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 알 수 있다.[40] 본인이 부르주아지라도 저번 달엔 매출이 대박 났다가 이번 달엔 깡통 차는 롤코가 반복되는 경우라면, 차라리 체제 변혁을 통해 국영기업 사장 자리 차지하고 앉아서 국가로부터 안정적인 수입을 받기를 원한것일수도 있고 개인적으로 정치성향이 진보쪽일 경우에도 체제변혁을 원할수 있다. 부르주아지라고 하여 모두 체제 변혁을 반대하는 것은 아니다.[41] 반대로 스탈린은 담배를 신나게 피웠고, 집무실에서 담배 냄새가 나는 걸 극혐하던 레닌에게 까이기도 했었다.[42] 레닌 에센스 중 하나인 무엇을 할 것인가?에서 간접적으로 나타난다.[43] 모스크바 대학을 나오고 당내 최고 이론가인 니콜라이 부하린도 레닌에게 논쟁으로 이긴 적이 없다![44] 이것도 포드 사가 자동차를 대량생산하는 시스템을 개발, 자동차를 염가에 팔아먹을수있게 만들어서 그렇지 그게 아니었으면 자동차의 대중화는 훨씬 늦었을것이다.[45] 위 기록사진보다 완성도(...)가 좋은 걸 보면 일단 급한 대로 기능부터 추가하고 나중에 외관도 다듬은 듯.[46] 이에 반해 트로츠키는 조강지처를 버리고 젊은 여자와 딴살림을 차렸다. 대체적으로 혁명가들은 보수적 성향과 거리가 있다보니 연애 문제에 대해서도 개인의 의지가 중요하다면서 관대한 사람이 많았다. 유명한 여성 볼셰비키였던 알렉산드라 콜론타이는 프리섹스를 주장했다. 다만 '섹스는 물과 같다'고 주장한 콜론타이의 주장은 볼셰비키 당 내에서 별로 평판이 좋지 않았고, 상당한 비판까지 받았다는 점에서 연애 문제에 대한 혁명가들의 한계, 또는 남녀차별성을 엿볼 수 있는 것도 사실이다. 이 점에서 콜론타이의 직책이 주로 공사, 대사 등 외교관이었던 것 역시 대단히 명예롭고 대외적으로 소련의 남녀평등을 과시할 수도 있지만, 실권은 별로 없는 자리에 박아넣은 것이라고 보는 관점도 있다.[47] 당시 유행했던 티푸스로 많은 사람이 사망했는데, "세계를 뒤흔든 10일"을 쓴 존 리드도 그때 사망한다.[48] 이전까지는 심비르스크(Симбирск)라 불리던 곳으로, 레닌의 고향이다. 소련 시절에는 레닌 관광(생가나 기타 등등)으로 돈 좀 만졌다는데 러시아로 바뀐 이후 관광객이 줄어 울상인 듯. 알렉산드르 푸시킨의 《대위의 딸》 주인공인 표트르 그리뇨프가 여기 출신이다.[49] 레닌그라드상트페테르부르크, 레닌스크→바이코누르, 스탈린그라드볼고그라드, 브레즈네프나베레즈니예첼니, 안드로포프→리빈스크 등.[50] 물론 이 도시 말고도 안 바뀐 도시들은 꽤 있다. 특히 옛날에는 러시아 땅이 아니었다던가 혹은 그냥 황무지에 불과한 곳이었다던가 하는 곳들. 칼리닌그라드(구 독일령)가 대표적인 예시다.[51] 원래 도시의 이름은 심비르스크(Симбирск).[52] 이 지역의 영유권을 주장하는 조지아에서는 아할고리(ახალგორი)라고 한다.[53] 타지키스탄에서는 2006년 이븐 시나 봉(Қуллаи Ибни Сино)으로 개칭했다. 다만 키르기스어 이름은 아직도 레닌 봉(Ленин чокусу).[54] 이 배 자체도 1974년 레닌훈장을 받았다.[55] 이 때 Prince Igor: Boyar's Chorus가 흘러나온다.[56] 국가자본주의론 및 좌익 공산주의. 참고로 이런 경향은 레닌 본인이 강하게 비판한 바 있는 노선이다. 레닌의 저작 <공산주의에서의 좌익 소아병>이 아예 대놓고 독일의 좌익 공산주의를 대차게 까는 내용이다.[57] 레닌, 그리고 레닌 시기에 2인자였던 트로츠키가, 계급 중립적 입장에서 볼 때 독재자가 아닌 것은 아니다. 분명 볼셰비키당은 프롤레타리아 계급 독재를 추구하였고,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독재를 전제로 하여 그 체제 안에서 제한적으로 프롤레타리아 계급 내의 정치적 다양성을 보장하고자 하였다. 그마저도 송두리째 부정하고 짓밟아 버린 게 스탈린인데, 레닌이나 트로츠키가 그런 스탈린과 같은 유형의 독재를 추구한 것은 분명히 아니다. 그렇지만 속류 민주주의자들이 마치 스탈린이 처음 발명한 것인 것처럼 왜곡하는 KGB나 굴라크는 이미 레닌 시절에 트로츠키가 만든 것이고, 스탈린은 그걸 오남용하여 문제를 일으킨 것일 뿐, 정통 트로츠키주의 쪽에서도 그런 권위주의적 통치 기구의 필요성 자체는 인정한다. 반면 클리프주의자들은 아예 어떤 유형의 독재도 절대악이라 규정하기에 레닌의 활동과 사상에서 그런 부분을 받아들일 수가 없는 것이고, 그렇기에 자기네들 마음에 드는 레닌을 만들고자 온갖 무리수를 두고 있는데 그 시도의 결정체가 바로 레닌 평전이다.[58] 러시아어에선 영어의 be동사에 해당하는 것들을 생략해 버리기 때문에 러시아어에서 be동사를 굳이 표현하고 싶다면 슬래시(—)로 표현한다. 따라서 정석대로 해석한다면 "레닌의 당은 인민의 힘이다."겠으나 노래의 곡조를 생각하여 저렇게 표현했다.[작사1] Сергей Михалков, 1913-2009 (+러시아 찬가의 작사가이기도 하다)[작사2] Габриэль Эль-Регистан, 1899-1945[작곡] Александр Александров, 1883-194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