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19-06-28 20:12:43

니콜라이 부하린

니콜라이 부하린
Никола́й Буха́рин
파일:external/www.runivers.ru/Bukharin.jpg
이름 니콜라이 이바노비치 부하린
(러시아어: Никола́й Ива́нович Буха́рин)
생몰년도 1888년 10월 9일 ~ 1938년 3월 15일
출생지 러시아 제국 모스크바
(現 러시아 모스크바)
사망지 소련 모스크바 주 레닌스키군
매장지 모스콥스카야 사격장
국적 러시아 제국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518px-Flag_of_Russian_Empire_for_private_use_%281914%E2%80%931917%29_3.svg.png소련파일:소련 국기.png
학력 모스크바 국립대학교
직업 혁명가, 정치가
정당 소련 공산당
종교 없음(무신론)
가족 이반 가브릴로비치 부하린(부)
류보비 이바노브나 이즈마일로바(모)
안나 미하일로브나 라리나(부인)
{{{#!folding [ 소련 공산당 정치국 ]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326px-%D0%9A%D0%9F%D0%A1%D0%A1.svg.png 소련 공산당 정치국 후보국원
선출일자 1919년 3월 25일
선출일자 1920년 4월 5일
선출일자 1921년 3월 16일
선출일자 1922년 4월 3일
선출일자 1923년 4월 26일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326px-%D0%9A%D0%9F%D0%A1%D0%A1.svg.png 소련 공산당 정치국 중앙총회 정치국원
선출일자 1924년 6월 2일
선출일자 1926년 1월 1일
선출일자 1927년 12월 19일
해임일자 1929년 11월 17일
}}} ||

1. 개요2. 생애
2.1. 혁명 이전2.2. 혁명 이후
3. 죽음4. 기타

언어별 명칭
한국어 니콜라이 이바노비치 부하린
일본어 ニコライ・イヴァノヴィチ・ブハーリン
중국어 尼古拉·伊万诺维奇·布哈林
러시아어 Никола́й Ива́нович Буха́рин
영어 Nikolai Ivanovich Bukharin
히브리어 ניקולאי איוונוביץ בוכארין
아랍어 نيكولاي بوخارين
그리스어 Νικολάι Μπουχάριν

1. 개요

소련마르크스주의 혁명가, 정치인, 경제학자. 볼셰비키의 일원으로 레닌과 함께 러시아 혁명을 이끌었으나, 스탈린 집권 이후 대숙청에 걸려서 처형당했다.

2. 생애

(추가예정)
초등학교 교사였던 부모 아래 출생했고 러시아 최고의 대학이었던 모스크바 대학에 진학하였다.

스탈린의 "마르크스주의와 민족문제"의 저술을 돕기도 하였다.

2.1. 혁명 이전

(추가예정)

2.2. 혁명 이후

2.2.1. 신경제정책

농민 여러분, 부자되시오!
부하린은 일국사회주의를 주장[1]했고, 이는 후에 스탈린이 취하는 포지션이 된다. 트로츠키의 영구혁명론과 대립했다. 부하린은 스탈린을 비판하면서 급격한 농업집단화와 중화학공업화보다는 점진적으로 추진할 것을 당내에서 이를 강하게 주장했다. 허나 당에선 부하린의 주장은 비주류에 불과했고 결국 당내에서 권력을 빼앗기고 자아비판을 하게 된다.

3. 죽음

1937년 1월에 국가전복혐의로 체포되었다. 이후 우익행위 및 트로츠키주의자로 사형판결이 내려진다. 혐의는 "레닌과 스탈린을 암살하려했고, 막심 고리키를 독살했으며, 소련의 영토를 제국주의 국가에게 할양하려 하였다"는 누명이었다.

몰로토프 소련 외무장관은 "부하린은 고문당한 적이 없고 스스로 모든 죄목을 자백했다"고 말했으나 후에 밝혀진 내용으로는 부인과 아들에 대한 위협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허위사실이 적시된 진술서에 서명을 했다고 한다[2]. 부하린의 죄목과 재판에 대한 신빙성으로 인해 해외의 공산주의자들이 재심을 요청했으나 스탈린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결국 1938년 3월 15일 부하린은 처형되었다.

아들과 아내에 대하여 처벌하지 않겠다는 약속과 달리 아들과 아내는 수용소로 보내진다. 부하린의 아내는 당시에는 문서로 남길 수 없어서 암기한 부하린의 유언을 이후 흐루쇼프가 집권하다 공개하기도 했고, 부하린은 1988년 복권되었다.

부하린이 혁명동지이자 친우였던 스탈린에게 마지막으로 남긴 말은 "코바, 왜 나의 죽음을 필요로 하지?"(Коба, зачем тебе нужна моя смерть?)[출처] 였다. 코바는 스탈린의 애칭 중 하나이다. 스탈린이 죽고서 그의 집무실에서 발견된 편지 중에 하나라고 한다. 이에 대해 스탈린이 부하린에 대한 어떤 감정이 남았다, 혹은 '삐뚤어진 애정'이 있어 남겨두었다는 평가도 있으나 로버트 서비스는 그 편지를 다시 읽으며 떨리는 만족을 얻으려 한 것이 아니냐는 싸늘한 추측을 남겼다.

다만, 스탈린과 부하린은 개인적으로 아주 친한 친구 사이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고, 부하린의 편지 내용 역시 "내 인생의 가장 큰 실수는 트로츠키와 손을 잡지 않은 것"이라는 지노비예프의 유언이나 "날조하는 스탈린 학파" 등의 저서에서 스탈린을 매독환자, 강도 등으로 묘사하며 조롱한 트로츠키와는 달리 자신을 왜 숙청하려 하는지 당혹스러워하는 반응에 가깝다는 점, 스탈린이 저 유언장과 별개로 부하린이 옥중에서 집필한 회고록 "늙은 볼셰비키의 편지"의 원고 또한 잘 보관해놓고 있었다는 점 등을 근거로, 스탈린에게 부하린에 대한 어떤 감정이 남았기에 이 편지를 간직했을 것이라는 추측이 더 다수이기는 하다. 무엇보다 자신의 승리에 대한 떨리는 감동을 얻고 싶었다면 그 대상은 부하린보다는 트로츠키가 훨씬 적당했을 것이다.

4. 기타

  • 소련 내 일반인들에게는 가장 인기가 많은 사람이었다. 레닌이 그에게 너무 자만하지 말라고 지적을 할 정도. 해외에서도 매우 명망이 높아서 대숙청 당시 사형 선고를 받자 많은 해외 지식인들이 "부하린을 사면해달라." 하고 스탈린에게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 말빨과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이해도가 매우 좋아 레닌과 논쟁을 벌이기도 했다. 하지만 부하린의 출중한 지식에도 불구하고 항상 레닌에게 깨졌다. 이와 같은 레닌과의 논쟁은 이후 숙청의 빌미가 되었다.
  • 레닌은 부하린의 식견을 상당히 높게 평가했으며, 유서에서 차기 지도자 후보 5명 중에 하나로 언급하기도 했다. [4] 하지만 부하린은 기계론적 마르크스주의자였고 레닌은 이에 대해 "당내 최고의 이론가이지만 변증법 이해가 부족하다."라고 비판했다(...). 실제로도 유물론자라기보단 기계론자였다.
  • 부하린은 마르크스 레닌주의에 대한 많은 기여가 있었을 뿐만 아니라 식물학에도 조예가 깊어서 소련 학술원의 창립 회원이기도 하였다.
  • 소련에서 최고의 경제학자였는데, "제국주의와 세계경제"라는 저술을 남겼다.[5] 이후 신경제정책(NEP)의 최고 이론가였다. 허나 스탈린과 중화학 공업에 대한 이견을 보였고 결국 부하린이 자아비판하면서 물러났다. 이와 같은 논쟁은 이후 부하린을 숙청하는 빌미 중 하나로 쓰였다.
  • 만화에도 소질이 있어서 혁명 동지들의 캐리커처를 그리기도 했다.
  • 부하린은 총 3번 결혼했는데 첫 번째는 사촌 여동생과, 두 번째는 동료 혁명가와 결혼했으나 이혼했다. 세 번째 결혼은 45살에 했는데 19살 여인과 결혼했다. 심지어 먼저 대시한 쪽은 부하린이 아니라 아내였던 안나 쪽이었다! 먼저 러브레터를 건냈다고(...). 스탈린도 재혼 경력이 있었지만 어린 신부와 결혼하는 부하린에게 핀잔을 하기도 했다. 여자관계만큼은 위너
  • 부하린의 아내가 기억했던 부하린이 남긴 유언 중 하나는 "동지여 명심하라. 혁명 성공의 그날 동지들이 치켜들 깃발 위엔 나의 피 한 방울도 묻어 있을 것이다."

[1] 알려진 것과 달리 스탈린이 먼저 주장해서 트로츠키와 대립한게 아니다. 일국사회주의는 부하린이 먼저 주장했다.[2] 사실 후술할 스탈린에게 보낸 마지막 편지라든가, 이 때 수감된 상태에서도 회고록 "늙은 볼셰비키의 편지"를 집필할 수 있었다는 사실을 생각했을때 정말로 고문 당한 적 없다 해도 이상하진 않다.[출처] :Медве́дев Алекса́ндрович(메드베데프 알랙산드로비치). Unknown Stalin)[4] 나머지 4명은 트로츠키, 스탈린, 지노비예프, 카메네프. 하지만 이 유서의 내용을 정밀하게 분석해보면 스탈린에 대해선 잔인하다고 비판하면서 서기장에서 해임할 것을 요구했으며, 반면에 트로츠키를 굉장히 추켜세우면서 단지 몇몇 부족한 면이 있으니 주변에서 도와줘야 한다고 적시하고 있다. 지노비예프, 카메네프, 부하린은 각자 장점을 적시하면서도 최고 지도자로선 치명적인 단점들도 함께 언급하고 있다. 아마 레닌은 스탈린을 한직으로 좌천시키고 트로츠키가 지노비예프, 카메네프, 부하린의 보좌를 받아서 국가를 이끄는 집단 지도 체제를 원했던 거 같다.[5] 레닌은 서문을 써줬다.http://babodool.tistory.com/263[6] 이 회고록은 부하린이 실각 이후 감옥에서 작성한 문서이고 부하린이 죽자 스탈린이 보관하고 있던 것을 스탈린 사후 비공개로 보관하다가 1988년 복권이 되고 나서야 출간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