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19-07-20 15:18:50

요시프 브로즈 티토

유고슬라비아 대통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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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임 초대 2대
이반 리바르 요시프 브로즈 티토 라자르 콜리셰프스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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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고슬라비아의 초대 대통령
본명요시프 브로즈 티토
(Josip Broz Tito/Јосип Броз Тито)
출생1892년 5월 7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크로아티아-슬라보니아 왕국[1] 쿰로베츠(Kumrovec)[2]
사망1980년 5월 4일 (87세),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공화국 슬로베니아 사회주의 공화국 류블랴나
국적슬로베니아 사회주의 공화국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800px-Flag_of_SR_Slovenia.svg.png
직업정치가, 군인, 독립운동가, 노동운동가, 파르티잔 지휘관
최종계급대원수
종교가톨릭(세례명:요셉) → 무종교(무신론)
정당소련 공산당
유고슬라비아 공산주의자 동맹
배우자펠라게야 벨로우소바
(Пелагея Белоусова, 1919-1939)
헤르타 하스
(Herta Haas, 1940-1943)
요반카 부디사블레비치
(Јованка Будисављевић, 1952-1980)
신체170cm[3]
서명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800px-Tito_signature.svg.png

1. 개요2. 생애
2.1. 초기와 공산당 입문2.2. 반나치 지도자2.3.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공화국 건국2.4. 말년
3. 사후의 평가
3.1. 두샨 바타코비치의 비판
3.1.1. 반론
4. 이것저것
4.1. 티토주의4.2. 매체에서

1. 개요

요시프 브로즈 티토는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공화국의 전 대통령이다. 본명은 '요시프 브로즈'이며, '티토'는 그가 노동운동에 가담하던 시기에 사용했던 가명으로 크로아티아어로 "네(Ti)가 이것(To)을 해라"라는 농담구 어조에서 따온 이름이다.

북한에서는 러시아어식 표기로 이오씨프 브로즈 찌또로 표기하고 부르지만 엄밀히 말하면 틀린 표기이다. 세르보크로아트어는 러시아어와 달리 구개음화가 일어나지 않기 때문에 굳이 따지자면 띠또라고 적어야 하는데 북한에서는 이를 잘 모르고 러시아어 키릴문자 표기를 그대로 쓴 모양.[4]

2. 생애

2.1. 초기와 공산당 입문

크로아티아 지방에서 가난한 크로아티아인 농부 프라뇨 브로즈(Franjo Broz)와 슬로베니아인 어머니인 마리야 야베르셰크(Marija Javeršek) 부부의 아들로 태어나 초등학교 졸업 학력으로 기술공으로 발칸 반도를 떠돌았다. 그러던 중 제1차 세계 대전오스트리아 육군에 강제 징집되었고, 러시아군에 생포된다. 포로수용소에서 러시아 혁명을 목격하고, 이때부터 공산주의의 이념에 동조하게 된다.

2.2. 반나치 지도자

귀국 후 유고슬라비아 사회당에 입당해 티토라는 가명으로 활동했고, 각 공장의 파업을 주도하다가 유고슬라비아의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체포되어 5년 간 복역한다.

이 후 스페인 내전에 참가[5]하는 등 해외를 배회하다가 2차 세계대전 때 나치 군대가 이탈리아, 헝가리와 함께 유고슬라비아를 침공하자 귀국해 빨치산 부대를 이끌며 게릴라전으로 나치 군대와 맞서 싸운다.

당시 유고슬라비아 왕실이 나치군에게 그리스로 가는 도로를 내주고 세르비아민병대체트니크가 나치와 협력해 빨치산 토벌에 치중하는 등 병크를 범한지라 유고 국민들의 민심은 급속도로 티토로 쏠렸다고 한다. 물론, 1930년대 독일은 세르비아인의 용맹함을 높이 평가한 히틀러 때문에 유고슬라비아에 대해서 지나칠 정도로 많은 경제적 편익을 제공했던 터라 섭정인 파블레 대공[6]으로서는 독일의 요청을 대놓고 거절하기도 쉽지 않았다. 이때쯤에는 이탈리아가 배후지원하는 크로아티아의 독립운동이 거셌고 헝가리도 슬슬 1차대전 시기 뺏긴 땅을 되찾으려는 움직임이 강했기 때문에 무솔리니호르티를 제압할 수 있는 히틀러의 도움이 유고슬라비아의 통일유지에 필수적이기도 했다. 하지만 꽤 고집을 피워서 추축국에 가입하는 대신 그리스로 향하는 군대의 유고 통과를 막는 등, 나름대로 전쟁에 끼어들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그래도 어떤 이유를 들어도 유고슬라비아 왕실이 독일에 협력한 사실은 지울 수 없는 것인지라 실제로 개전 며칠 전에 쿠데타가 발생하여 정권이 뒤바뀌고, 독일이 유고슬라비아를 침공하는 등의 대소동이 있었다.

티토가 지휘하는 유고슬라비아 파르티잔은 매우 효율적인 유격전을 벌였으며, 이탈리아와 헝가리, 크로아티아는 자기네 구역만 지키고 있었으므로 다른 전선에도 병력이 부족했던 나치는 이미 점령했다고 생각한 유고에 30만의 병력을 박아놔야 했다.[7][8] 하지만 어쩼든 간에 유고슬라비아라는 땅이 가진 실제 가치에 비해서 엄청난 양의 독일군 병력이 이곳에 주둔해야 했고, 전쟁후반에 독일군의 극심한 인력부족에도 이곳에서 병력을 빼낼수가 없었다.[9] 오죽 히틀러가 열받았으면 티토를 붙잡기 위해 오토 슈코르체니가 지휘한 특공대가 투입되어 티토의 본거지를 급습하기까지 했고, 실제로 거의 붙잡힐 뻔 했으나 티토는 여기서도 간신히 살아남았다. 이후 잠시 아드리아 해의 휴양지 비스 섬에서 기거하면서 윈스턴 처칠 등 연합군 최고위층 인사들을 만나 파르티잔 임시정부의 지위를 놓고 회담을 하는 등, 거의 동맹국 수장에 준하는 대우를 받았다고 한다. 전쟁 전에는 무명인사에 불과했던 티토의 명성은 점점 빠른 속도로 높아졌고, 나치 고관인 하인리히 힘러 조차 "독일에 티토같은 지휘관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라고 할 정도였다. 하지만 수뇌부가 당신들이잖아? 어차피 안돼... 만슈타인 구데리안 어리둥절행

추축군 한복판에서 빈약한 장비를 가지고 프랑스의 레지스탕스 이상의 전과를 올린 한편, 비록 공산주의자였지만 서방측의 지원을 적지않이 받은데다가, 소련과의 관계도 좋지만은 않았던 관계로 양측의 사이에서 정치적 협상도 적지 않이 벌여내었다. 이후에도 티토는 동유럽권에서 냉전내내 서방측과 나쁘지 않은 관계를 유지해낼수 있었을 정도.
(이때문에 마피아들의 밀무역 루트로 애용되었다...200척의 밀수선을 잡는 이탈리아 해경선은 1척이라는 말까지 나왔다.)

소련군이 유고슬라비아 영토 내로 진입하여 독일군을 몰아낼 때, 수도인 베오그라드 탈환을 소련군과 함께 함으로서 파르티잔의 손실을 줄임과 동시에 독일군을 유고슬라비아에서 퇴치하는데 성공한다. 한편, 소련이 파르티잔 투쟁 기간중 제대로 된 도움을 하나도 주지 않았다는 것과, 티토 자신의 명성이 서방세계에서도 높다는 점을 바탕으로 해서 심지어 소련군이 오래 주둔하면 소련군과도 싸울 생각이 있다(!)는 의지를 보여주어 소련은 유고슬라비아에 상징적인 병력만 남기고 철수하기까지 했다. 이 때문에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다음 다른 공산국가처럼 소련의 위성국이 되지 않을 수 있었다.

2.3.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공화국 건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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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옥 조병옥
살인을 부르는 미소 저 미소에 얼마나 많은 추축군들이 피를 보았을까
해방 이후 티토는 연합군 측의 암묵적인 지지를 받아 유고 과도정부의 수상이 되었고, 체트니크 계열과 나치에 부역한 왕족들을 숙청한 뒤 1948년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공화국을 건국한다.

이 과정에서 앞서의 약속에도 불구하고 유고슬라비아에 군사적 영향을 행하려는 소련스탈린과 갈등을 빚어 같은 해에 코민포름에서 영구제명되고, 매카시즘으로 인해 미국과의 사이가 멀어지는 등 시련을 겪기도 했지만 그는 비동맹주의 외교라는 신념을 버리지 않았고, 냉전시대 제3세계, 자유진영, 공산진영을 넘나드며 어느 국가와도 극단적으로 척을 지지 않는 실용주의 외교로 고립된 유고슬라비아의 위기를 반전시켰다. 그 일례로 1950년 한국전쟁이 터지자 서방진영의 장 폴 사르트르까지도 남한이 북침했다는 소련과 북한의 발표를 지지했는데도 유고 혼자서 남침설을 고수했고(6.25 전쟁/전쟁 발발 문서 3. 용어 문단 하단 참고.) 1950년대에는 주력 전투기로 미국제 F-86을 도입했을 정도.

또한 과거의 역사 내내 민족, 종교, 언어의 갈등때문에 툭하면 내부에서 서로 싸우던 유고슬라비아의 사정을 감안해서 형제애와 일치 정책(brotherhood and unity)을 펼쳐서 세르비아 민족주의, 크로아티아 민족주의 등의 유고 내부의 민족주의적 사상을 제거하였으며, 각 구성 공화국내의 거주민들이 타 구성 공화국 내에도 거주해서 살아가도록 혜택을 충분히 제공하여 성과를 이룩하였고, 이렇게 민족이 혼합된 상태를 가칭 유고슬라비아 민족이라고 설정하여 해당 상태가 지속되면 언젠가 유고슬라비아가 여러 민족이 혼합되어 새로운 민족을 탄생시킴으로서 단일 국가로서의 정체를 확립함으로서 더 이상의 내전을 막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사실 위의 구상이 일부분 현실화되었기 때문에 성과도 있었으며, 티토 사후 지속적으로 각국의 이해를 조율할 정치가가 있었다면 진짜로 그런 가능성으로 나갈 수도 있었다는 점에서 상당한 아쉬움이 드는 대목이기도 하다. 내전이 터진 다음에 여러 나라 사람들은 티토 시절이 좋았지 하고 한숨을 푹푹 쉬었다. 실제로 티토 시절엔 여러 민족들이 제법 화합을 이루며 잘 살았다는 증언이 많다.

한편으로 스탈린주의와 소련과의 차별화를 위해 탈권위주위적인 개혁 정책을 펼쳤다. 1952년, 공산당의 관료화와 기득권화를 방지하기 위해 집권정당인 유고슬라비아 공산당을 정치조직인 유고슬라비아 공산주의자 동맹으로 재편했다. 아울러 공장, 공기업의 경영권을 공산당에서 노동자 자치위원회로 넘기는 "노동자 자주관리" 체제를 도입, 실시해, 사적 소유의 철폐와 낮은 생산력 사이의 모순에서 나타나는 비효율과 국가의 과도한 권위를 극복하려고 노력했다[10][11]. 또한 자신에게 비판적인 세르비아계를 견제하고 낙후된 보스니아 지역 발전을 위해 사라예보 천도를 계획했다, 그리고 민족갈등을 해소하기 위해 코소보에 대한 자치를 허용했다.

이런 행보를 보면 정적에 대한 탄압만 빼면, 그 당시로서는 베트남이나 중국의 개방정책을 이미 실현하고 있었다는 점을 알 수 있다.[12] 게다가 미국을 중심으로한 서방과 소련을 중심으로한 동구권 대신 제3세계를 중점으로 비핵화와 후진국의 산업화를 추진하며 자본주의와 공산주의의 문제점을 고쳐나가는 첫 모델을 티토가 제시했다고 볼 수 있다. 덤으로, 티토는 유럽의 68혁명 당시 기존 정치체제의 입장에서는 지나치게 과격한 것으로 보이는 학생운동에 대해 공개적으로 지지한 유일한 국가 지도자이기도 했다.[13] 이 면에서는 급진적인 개혁 요구에 매우 개방적인 인물이었던 것으로 볼 여지도 있다. 단, 한 가지 주의해야 할 것은, 소련의 간섭에 위기를 느끼던 티토의 입장에서 소련군의 프라하 진주에 격렬히 반대하던 68년의 학생운동에 대한 지지가 정치적 고려에 의한 것일수도 있다는 점[14].

비록 티토가 장기집권을 하기는 했지만, 김일성이나 스탈린, 마오쩌둥, 엔베르 호자, 차우셰스쿠 같은 다른 공산권 국가들의 종신 독재자들과는 달리 정적에 대해서도 매우 신사적인 대접을 했다. 1950년대 이래, 당내에서 티토의 반대파들이 추방되기는 했지만, 이들은 처형이나 투옥이 아니라 그저 고액의 연금을 수령하는 야인이 되었을 뿐이다. 다만 티토의 과거 부하이자 최대의 정적인 밀로반 질라스는 "티토가 나치독일과 뒷거래를 했다"는 유언비어를 터트려[15] 파르티잔 투쟁을 정통성으로 삼는 티토의 심기를 건드렸기 때문에 허위사실 유포혐의로 여러차례 투옥되었다.[16] 다만 민족주의자나 민주화 인사, 친소파에 대한 탄압은 존재하여 골리 오토크 교도소에서 이들을 분리 수감한 바는 있다.

2.4. 말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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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2년, 티토 사망 2주기를 맞아 소련 체신청에서 발매한 우표.[17]

1974년 헌법 개정으로 종신 대통령이 되었고, 1980년 다리의 혈행장애로 입원해 오른발 절단수술을 받았지만 회복되지 못하고 그해 5월 4일에 세상을 떠났다. 안타깝게도 88세 생일이 겨우 3일 앞이었다. 제3세계를 대표하던 지도자라는 생전의 명성답게 그의 장례식에는 4명의 국왕과 22명의 총리, 31명의 대통령, 47명의 외무장관이 참석하여 당시 기준으로 가장 많은 나라의 국가지도자들이 참석한 장례식이라는 타이틀을 달았다.

티토의 묘지는 현 세르비아의 수도 베오그라드에 있는 티토 기념관 내에 있다.

3. 사후의 평가

일단 그의 강력한 지도력 덕분에 수많은 민족이 얽히고 설켜 있던 다민족 국가였던 유고슬라비아가 큰 문제 없이 유지될 수 있었다는 점은 이견의 여지가 없다. 다만 다음과 같은 면에서는 비판도 많이 받는다.

우파로부터는 과도정부 수상 당시 유고 내 대표적 우익인 드라자 미하일로비치를 처형한 점이 비판받는다. 유고슬라비아의 독수리라고 불렸던 이 장군은 체트니크라고 불리는 세르비아 민족주의 레지스탕스 조직을 이끌고 반나치활동도 했으나, 20만 가량의 크로아티아인과 무슬림도 학살했다. 전쟁 이후 그는 신생 유고연방에게 체포된 후 전쟁범죄와 반역죄로 사형을 선고받고 총살되었다.[18] 자신의 독재노선을 비판한 밀로반 질라스[19] 등에게 콩밥을 먹인 것 등으로 인해 미국의 유고슬라비아 이민자 사회에서도 욕을 많이 얻어먹기도 했다.

공산주의 진영에서도 소련을 배신하고 서방 자본주의 국가들에게 부역했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일례로 코민포름 제명 이후 영국 정보국에 소련의 군사관련 정보를 제공하는 등 뒤끝있는 모습을 보인 바 있다. 그래도 흐루쇼프 집권기 이후부터는 소련과의 사이는 우방국이라고 할 정도는 아니어도 호전되어서 원만해지기는 했다.

그를 높이 평가하는 사람들도 많다. 독자 노선을 택해 다른 사회주의 국가처럼 소련의 위성국이 되는 것을 피했을 뿐 아니라, 제3세계를 주장하며 그 지도국격의 위치를 누렸다. 등거리 외교정책으로 서방국가와 많은 교류를 하였으며, 유고 인민의 생활수준도 높았다. 그러나 1980년대 중반 이후 경기침체로 지역별 불균형 발전이 쟁점화되었다. 그 영향으로 민족주의가 고조되면서 민족주의 노선의 지도자들이 속속 등장했는데, 이들은 티토를 격하하는 운동을 벌였다. 그 영향으로 티토의 동상이 속속 철거되고, 티토도 과거의 유물로서 한동안 잊혀졌었다. 심지어 티토 시절의 유고슬라비아를 그리워하는 사람들을 매국노로 내모는 경우도 많았다.

그러나 그 지도자들로 인해 전쟁이 일어나고 학살극이 펼쳐졌었다. 그러한 전쟁의 결과물로 유고슬라비아가 7개의 소국으로 찢어졌으며, 새로 독립한 7개 국가들은 과거의 유고연방 시기보다 훨씬 못한 경쟁력을 지니게 되었다. 이의 반작용으로 대대적인 티토 재평가가 일어났다. 특히 구 유고슬라비아 남부지역에 위치한 국가일수록, 티토 시절에 대한 향수도 강한 편이다.

슬로베니아와 크로아티아는 잘살기 때문에 그래도 좀 덜한 편이지만 그래도 제3세계를 대표했던 지도자라는 점이나 비교적 풍족하게 이루워졌던 사회복지정책 때문에 티토 시절을 좋게 생각하거나 티토를 위대한 지도자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으며, 세르비아와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마케도니아 등지에서 티토에 대한 향수가 더욱 강해져서 이들 지역에서는 티토를 신급으로 추앙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티토의 유고슬라비아 시절엔 꽤나 풍족하게 살았으나, 막상 독립한 이후에는 내전과 경제난에 시달렸기 때문으로 현재도 청년실업률이 높고 상대적으로 1인당 GDP가 낮은 등 경제적으로 사정이 영 좋지 않다. 만약 유고슬라비아가 분열되지 않은 채로 현재까지 존속되었다면 유고슬라비아의 국제적인 위상에 힘입어 세르비아인이나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인, 마케도니아인들도 솅겐조약, EU가입의 혜택을 두둑히 누렸을 공상이 크다.

아울러 진보 진영에서는 그의 강한 민족주의 성향, 소련의 압력에도 굴하지 않는 배짱있는 외교정책, 공산주의와 자본주의의 단점을 지양하려고 노력했던 경제정책, 복지정책 등에 대해 조명하고 있다.

여하튼 구 유고권 국가들에서는 티토에 대한 이미지가 매우 긍정적이다보니 주요 기업들과 소규모 레스토랑에 이르기까지 티토의 이미지를 많이 차용해서 광고나 홍보를 하기도 하며, TV프로그램에서도 티토에 대해 긍정적으로 언급되는 경우가 많기도 하다. 그러다보니 2000년대와 2010년대에 들어서면서 크로아티아, 슬로베니아, 세르비아,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북마케도니아 등 구 유고권 국가들의 갈등이나 적대감이 조금씩 나아지고, 민족주의적 성향이 그나마 덜 해진 것도 티토 덕택이라는 말도 나오고 있다.

조국인 크로아티아에서는 위대한 크로아티아인 1~2위로 손꼽히는 설문조사나 여론조사가 나올정도의 호평을 받기는 하지만, 동시에 비판도 많이 듣는다. 그 중 하나가 항구도시 네움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에게 넘겨준 것. 내륙국이던 보스니아에게 행정개편 당시 선심쓰듯 작은 항구인 네움을 넘겨주면서 크로아티아 영토가 동강나버렸기 때문이다. 이 문제는 위에서 설명된 민족통합을 위해 거주자를 섞어놓은 것과 비슷한 맥락의 문제이다. 정말 계획대로 통합이 이루어졌다면 아무 문제 없었겠지만, 통합이 완성되지 않은 상태에서 재분할되어 버리자 영토나 거주자를 재조직한 부분에서 분쟁이 발생한 것. 유고연방이 붕괴하면서 내전 당시 인종청소가 빠르게 행해진 것도 이런 이유였다. 그러나 사실 저 항구 문제는 오스만 제국시절부터 내려온 행정적 이유로 딱히 티토의 책임은 아니다. 사실 저 항구를 기준으로 기독교왕국들로 나뉘였었던 것이 그저 지금도 내려온 것이다.

3.1. 두샨 바타코비치의 비판[20]

두샨 바타코비치의 평을 근거로 하면, 위의 평가는 미화된 부분이 상당히 많다. 그의 말에 따르면 티토는 대세르비아주의를 억제하겠다는 명목으로 세르비아인들을 지나치게 억압하는 등 티토 사후 유고슬라비아에 내전을 자초한 인물이었다. 또 그가 보기에 티토의 정책들은 다른 사회주의 국가의 지도자들과 다를 바가 없었다는 것이다.

* 우스타샤(Ustaša)와 우스타샤에 저항하기 위해 결성된 부대 체트니크(Четници)가 서로 협력했다는 문서들을 위조했다. 체트니크들이 우스타샤를 방어하기 위한 목적으로 결성되었다. 우스타샤와 서로 협력을 한 증거는 없다. 이 체트니크의 지도자인 드라자 미하일로비치에게는 나치협력자라는 누명을 씌워서 총살시키고, 시체를 묘비도 없는 무덤에 매장해버렸다. 드라자 미하일로비치는 통칭 유고슬라비아의 독수리라고 불린 대표적인 레지스탕스였다. 심지어 히틀러가 무솔리니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는 가장 두려운 적이라고 언급한 바 있었다. 2015년, 세르비아 법원은 그에게 가해진 전범재판을 무효화하고 명예회복을 공식적으로 선언했다. 링크(영어)
* 우스타샤에 학살당한 희생자들의 묘비에 새겨진 '우스타샤의 손에 세르비아인들이 희생당했다'라는 문구를 '여기서 파시스트들이 애국자들과 반파시스트주의자들을 살해했다,'라는 문장으로 바꿨다. 우스타샤 사건의 원인이 크로아티아인과 세르비아인 사이의 민족갈등이라는 것을 은폐한 것이다.공인해서 내전 일으킬 일 있나
* 우스타샤에 있었던 장교와 관료들의 직책은 박탈되지 않았고, 오히려 승진한 사람도 있었다.
* 대세르비아주의를 약화시키고 소수 민족의 권리를 보장하겠다고 세르비아인 다수 지역이지만 헝가리계가 많았던 보이보디나[21]와 알바니아계가 다수였던 코소보를 자치주로 만들었다. 이거 좋은 거 아니냐고 생각하기 쉽겠지만 세르비아에게만 이것을 엄격하게 적용해서 문제다. 실제로 마케도니아의 알바니아인들과 크로아티아의 달마티아[22]는 자치를 별로 부여받지 못했고, 크로아티아 서북부의 이스트라 반도에 살던 이탈리아인들은 자치권을 받기는 커녕 이탈리아로 추방당했다. 유고슬라비아가 동서방 진영에 대해 중립적인 태도를 유지하긴 했어도 엄연히 공산주의 국가였기 때문에 이탈리아보다는 우방국인 알바니아나 헝가리와의 관계가 중요했기 때문이다.
* 마케도니아와 코소보에서 거주하다가 전쟁 때문에 다른 지역으로 피난가있던 세르비아인들을 돌아오지 못하게 하려고 귀환금지령을 내렸다.
* 공산화 이후에 공무원, 변호사, 상인, 지주, 중소상공인, 성직자들을 점령자들에게 협력했다는 죄목으로 총살시켰다.
* 마케도니아[23]를 세르비아에서 마케도니아 사회주의 공화국으로 분리시키는 것도 모자라, 그곳에 살던 세르비아인들에게 강제동화정책을 실시하여 (-ић로 끝나는) 세르비아식 성씨를 사용하지 못하게 하는 정책을 취했다.

3.1.1. 반론

하지만 그가 펼친 정책들이 다른 사회주의 국가의 지도자들과 다를 바가 없었다는 건 과장이다. 유고슬라비아는 사회주의 정책을 펼쳤지만 당시 다른 공산국가들에게 수정주의, 반동이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중립국적인 자세를 취했다.

또 드라자 미하일로비치와 그가 이끈 체트니크는 20만 가량의 크로아티아인과 무슬림을 학살하는 등 명백히 전쟁범죄를 저질렀으며 그가 나치부역자가 아닌 반나치 애국자라고 해서 이 사실을 덮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체트니크의 적은 유고슬라비아를 침략한 세력뿐 아니라 세르비아인과 대립관계에 있었던 비세르비아계 민족들까지였다. 물론 크로아티아인과 일부 무슬림들이 우스타샤에 협력해서 세르비아인 학살에 참여한 것은 맞지만, 그렇다고 해서 체트니크들도 똑같이 보복성 학살을 해도 된다는 것은 아니다. 다만 미하일로비치가 학살을 주도한것인지, 부하들의 폭주를 제어할 능력이 부족했던것인지는 학문적으로 논란이 있다.

우스타샤에 있었던 장교와 관료들의 직책은 박탈되지 않았고, 오히려 승진한 사람이 있으니 민족감정 폭발의 여지를 일부분 제공했다는 지적도 위험한 면이 있다. 전반적으로 바타코비치의 비판은 어디까지나 세르비아 민족주의자의 입장에서 보편적, 좌파적 범유고 통합 민족주의를 주장했던 티토이즘에 대한 사상적 저격에 가깝다. 티토 시절 세르비아가 속했던 유고 연방의 국력에 대한 향수와는 별개로 세르비아 민족주의자들 입장에서 티토 정권이 왜 불만스러웠나 보여줄 순 있어도 전적으로 객관성이 보장되는 주장도 아니고, 애초에 바타코비치 같은 세르비아 민족주의자들 입맛에만 맞는 정책을 폈으면 유고 연방 자체가 티토 사후에도 10년 가까이 존속했을리가 없다.

4. 이것저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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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7년 호찌민 전 베트남 주석과 정상회담을 하는 티토.
  • 아버지는 크로아티아계, 어머니는 슬로베니아계였으며 두 나라 모두 독실한 가톨릭 신자가 많은 지역이다. 이와 관련해 티토의 어린 시절에 얽힌 일화로 티토 본인이 회고한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다.
    한 번은 미사가 끝난 후 뚱뚱하고 큰 몸집을 가진 신부의 제의를 빨리 벗기지 못했지. 그랬더니 신부가 화를 내면서 나의 뺨을 갈기더군. 그 뒤로는 성당에 두 번 다시 가지 않았다네.

    - 블라디미르 데디예르와의 회고에서[24]

    다른 버전으로는 이러한 이야기도 있다. 어느 작은 시골 마을에 위치한 성당에서 미사를 드릴 때 어린 티토가 복사로 사제를 돕고 있었다. 그런데 어린 티토가 그만 실수로 주수병을 떨어뜨려 포도주를 흘리자 신부가 몹시 화가 나서 티토의 뺨을 후려치며 "당장 나가! 다시는 성당에 나타나지 마라!"라고 말했고, 그 후 티토는 더 이상 성당을 찾는 일이 없었다. 그리고 예화에서는 '말에 관련된 교훈'을 주기 위해서 미국의 폴튼 쉰 대주교[25]의 이야기를 넣으며 상황은 똑같은데, 신부가 그 어린 아이를 잘 타일러서 나중에 훌륭한 사람이 되었다는 이야기가 같이 실리곤 한다.
  • 앞서 말한 종교에서의 트라우마 때문인지 종교에 회의적이었기도 했으며 사회주의자이기도 했는지라, 종교인들을 탄압한 행적들이 여럿 있다. 이런 종교탄압 행적 때문에 탈권위주의적이거나 개혁적인 행보에도 불구하고 자잘하게 비판받기도 한다. 1945년 티토하의 공산주의자들이 국가를 장악한 후, 곧 종교 박해 운동이 시작돼 가톨릭, 정교회, 이슬람교 지도자들이 투옥됐다. 개중에는 가톨릭의 알로이스 스테피나츠 대주교도 끼어있었다. 그는 1946년 9월 체포됐으며 반역죄로 판정받아 16년간의 강제 노동형에 처해졌다. 나중에 그의 재판을 지켜봤던 몇몇 증인들은 그들이 고문을 당했으며 그들 가족들은 위협을 당했다고 말했다. 가톨릭 유아 세례를 받았던 티토는 1951년 12월 스테피나츠 대주교를 차막 사형시키진 않았고, 조건부로 석방했으나 그 대신 그의 고향인 크라식에 억류(가택연금)시켰으며 대주교는 끝내 완전한 자유를 다시 얻지 못한 채 1960년 사망하고 말았다.[26]
  • 실제로 티토는 특히 가톨릭을 반동주의자들의 집합처로 간주하고 탄압했는데, 가톨릭은 유고슬라비아 22개교구 중 14개 교구가 교구장 주교를 잃었다. 약350명의 신부들이 살해됐으며 다른 2백 명은 투옥됐다. 약300개의 수도원 및 교회 기관들과 함께 18개의 신학교 중 3분의 2가 폐쇄됐다. 모든 교회 재산은 몰수당했으며 그리고 전쟁구호기관(현 가톨릭구제회) 종사자들은 모두 추방됐다. 또한 유고슬라비아는 교황청이 내정을 간섭했다고 비난하면서 바티칸과의 외교관계를 일방적으로 단절해 버렸다.
  • 정교회 탄압도 심해서 전쟁으로 성당이 파괴된 자리에 파르티잔들을 기념하는 건물들을 세웠으며, 정교회가 소유한 토지와 건물 대부분을 압수했다. 정교회의 명망 있는 신부들은 수도원에 강제로 억류되거나 포로수용소로 이송되었다. 전쟁 후인 1950년에도 크게 다르지 않아서 특히 반공주의자이며 민중들에게 인기가 높았던 스코페의 요시프(Josip) 신부가 세르비아 총대주교로 선출되는 것을 막기 위해 그를 반국가행위 죄목으로 체포했다.
  • 서방과 친했기 때문에 할리우드 영화 합작도 많이 진행했었다. 할리우드 영화 철십자 훈장은 당시 현역이었던 유고연방군의 T-34가 소련군으로 대거 출연한다. 파르티잔 투쟁을 다룬 영화 네레트바 전투도 할리우드 배우들을 출연시킬 정도였다.[27] 율 브리너도 나온다. 리처드 버튼이 티토 역할을 수행한 영화도 만들어졌다. 이 작품은 여러 번 공중파를 탔는데 화염병으로 탱크를 불태우는 장면은 80년대에는 삭제 방영되었다. 한국에서 탱크 하면 떠오르는 누구 정권 시절이었던 것과 관계있을지도 심지어 조지 오웰1984, 동물농장이 유고슬라비아에서 세르보크로아트어, 마케도니아어, 슬로베니아어로 번역되어 나왔을 정도로 서방과도 적절하게 지냈다.
  • 비단 할리우드 영화 뿐만 아니라 본인의 성향 자체가 전쟁 중 추축국의 끊임없는 추격을 받으면서도 항상 깔끔하게 손질한 정복과 반짝이는 구두, 깨끗하게 면도한 얼굴에 위의 사진과 같은 활짝 웃는 살인 미소로 사람을 대하며 좋은 와인과 파이프 담배를 즐기는, 공산주의 혁명가 이전 영화 배우 같은 미중년의 모습으로 대중에게 자신을 거리낌 없이 드러내는 호남아 기질이 다분했다. 이념적으로 대치하면서도 티토의 깔끔하고 호방하면서도 세련 된 자기 이미지 관리에 매료된 영국 측의 시선에서는 티토의 라이벌인 체트니크의 지도자 드라자 미하일로비치전형적인 발칸 깡촌 도적(...)으로 밖에 안 보였고 실제로고 도적떼나 다름없던 짓을 하던 것도 티토를 지원한다는 결정을 내린 요소 중 하나였다. 지금도 구글 등에서 티토의 사진을 검색해 보면 항상 말쑥한 제복이나 정장에 얼짱 각도로, 흔한 공산국가 서기장의 이미지보다는 영화배우에 더 가까운 이미지를 볼 수 있다. 사진작가 유서프 카쉬가 찍은 티토의 사진들.
  • 그리고 이탈리아와 합작하여 찍은 영화 슬픔은 어느 별 아래(Andremo in Citta)에서는 찰리 채플린의 딸 제랄딘 채플린이 주연으로 등장한다.
  • 전쟁 때 동지이자 이념으로는 사실상 적이었던 영국 수상 처칠을 보기 위해 영국에도 자주 방문을 했을 정도로 호감을 느꼈다. 반면 루마니아니콜라에 차우셰스쿠의 경우는 사석에서 비겁한 짓을 하는 것을 티토가 목격하고 같은 공산권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혐오했다.
  • 소련에 반대하는 노선 때문에 195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레프 트로츠키와 더불어 공산권에서는 공공의 적으로 불리운 적이 있었다. 소련의 노선에 삐딱선을 타는 정치인을 티토주의자로 매도한 것이 대표적이다. 한국전쟁 이후 빨치산 수감자들 사이에서도 수감자들의 정치활동에 냉소적인 사람은 동료죄수들이 티토주의자라고 집단 괴롭힘을 했는 이야기도 있다.
  • 한편 티토가 이오시프 스탈린에게 보낸 편지 한장이 훗날 꽤나 주목을 모았다. 이 편지를 보내기 전에 스탈린이 티토를 암살하려고 자객들을 파견했는데 티토가 그들을 일망타진한 사건이 있었다. 편지 내용은 다음과 같다.
    Стаљину, прекини са слањем људи да ме убију. Ухватили смо их већ пет, једног од њих са бомбом, другог са пушком... ако не престанеш слати убице, ја ћу послати једног у Москву и нећу морати да шаљем другог.

    스탈린에게, 이제 날 죽이려고 사람을 보내지 마십시오. 우리가 벌써 다섯 명을 체포했는데, 하나는 폭탄을 가지고 있었고 하나는 소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만일 또 다시 살인자를 보내면, 그때는 내가 모스크바로 하나 보낼 것입니다. 나는 두 번째는 보낼 필요가 없을 겁니다.[28]

    해당 편지는 스탈린의 블라즈냐야 별장 서랍에서 발견된 세 편지 중 하나로 그 서슬퍼런 강철의 대원수에게 대놓고 항의하는 편지를 부칠 수 있었던 티토의 배짱과 깡다구를 매우 적나라하게 보여주는데, 이를 두고 서비스는 깡패가 또 다른 깡패에게 편지를 보내 대들었다고 평가했다. 그리고 그 깡패가 스탈린에게 대들 수 있던 유일한 인물이었다고도 평가했다.
    위 편지는 티토의 무지막지한 깡다구를 보여주는 일화로도 유명하지만 스탈린에게 어찌저찌 남아있던 인간성을 보여주는 에피소드로도 유명하다. 스탈린 사망 후 소련인들이 스탈린의 집무실 서랍에 고이 짱박혀있던 편지 세 통을 발견했는데 한 통은 자기 아내에게 난폭하고 무례한 짓을 한 스탈린에게 격노해서 사과를 요구한 레닌의 편지, 또 한 통은 평생의 친구이자 동지였으나 자신의 손으로 숙청했던 니콜라이 부하린이 형 집행 직전에 보낸 편지[29], 그리고 마지막이 티토의 편지였다. 다시 말해서, 티토의 편지는 평생 지도자로 섬기고 따랐던 레닌의 편지, 평생의 친구였지만 자신이 배신한 부하린의 편지만큼 스탈린에게 충격을 안겨 준 편지였다는 것.
  • 코키(Koki)라는 유황앵무를 기른 바 있다. 정확히는 손녀 선물로 사준 앵무였다. 티토 사후에도 그의 이름을 불러서 주변을 안타깝게 했다. 그러나 이내 곧 차기 대통령의 이름을 부르며 갈아타기를 했다고(...). 현재는 크로아티아의 브리유니 국립 공원에서 관리하고 있다.# 브리유니 국립 공원의 명물이며 현재까지도 건강한 모습을 유지하고 있는 중. #1[30] #2 티토가 이 앵무를 손녀에게 사준 시기는 1977년으로 브리유니 국립 공원측에 의하면 현재 50세를 넘긴 상황이라고 한다. 참고로 유황앵무는 최대 100년까지 장수한다.
  • 티토에 대해 알기위해 읽어볼만한 책은 영국의 작가 재스퍼 리들리가 저술한 평전 '티토: 위대한 지도자의 초상'이 있다. 2004년에 을유문화사에서 출간했으며, 현재는 절판되어 인터넷 중고서점 등을 통해 구할 수 있다.
  • 시메 브르살코의 증조부가 티토 정권에게 찍혀 처형당했다. 참고로 이 사람과 그의 아들(축구선수 시메 브르살코에겐 할아버지)도 이름이 시메 브르살코.

4.1. 티토주의

과거 사회주의 국가들이 시퍼렇게 살아있을 당시에는 티토의 노선은 티토주의라는 이름으로 분류가 되었다. 워낙에 사회주의 국가들 사이에서도 독특하고 독자적인 노선으로 유명했기 때문이다. 특징은 노동자 자주관리, 비동맹노선, 중공업 편향적 산업화 지양, 탈권위주의 등.

다만 실리주의적인 비동맹 외교같은 경우는 티토의 독특한 정치외교 노선이라고는 할 수 있지만 사상이라고 불릴만한 이론적 체계를 갖춘 것은 아니었다. 티토 노선의 성과가 제법 훌륭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단순히 그것만으로 독립된 정치 사상으로서 '주의'라고 부르기는 좀 힘들다. 인간의 얼굴을 한 사회주의라는 표현도 폭압적인 스탈린과 소련의 내정간섭에 질린 동유럽의 공산주의자들이 탈스탈린주의, 탈소련화라는 기치를 내걸때 광범위하게 사용한 표현이고 사실 "인간의 얼굴을 한 사회주의"는 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을 이끌던 알렉산데르 둡체크의 슬로건으로 훨씬 유명하다...

인상주의처럼 티토주의라는 표현 자체가 티토의 노선을 높이 평가하는 의도보다는 멸칭으로 시작된 것이기도 하다. 당시 집권 공산당 보기에 꼴보기 싫은 놈인데 차마 트로츠키주의자라고까지는 부르기 뭐한 반대파를 티토주의자라고 부른 격. 이말의 원조는 이웃나라의 독재자이자 한때 티토와 함께 파시스트와 싸웠던 알바니아엔베르 호자였다. 엔베르 호자는 티토가 자기나라를 유고 연방에 강제합병시키려는 속셈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해서 열심히 국가와 당선전기관을 이용해 티토를 비난했다(....)

4.2. 매체에서

  • 굽시니스트본격 제2차 세계대전 만화에서는 존 티토로 패러디되었다. 그의 비범하고도 개념찬 행각들은 다 미래를 예지한 덕분이라고. 역시 갓티토
  • 세계정복자 4라는 2차 세계대전 배경 전략게임에서는 누군가가 장군 추천을 요청할때 티토를 추천하는 밈이 있다.
  • Hearts of Iron IV에서 유고슬라비아를 플레이할 때 티토의 공산정권 트리가 가장 강력하다. 또 유고가 연합국이나 추축국에 가입하면 반란이 일어나는데 공산주의일 때는 안일어난다. 하지만 이탈리아의 침공[31]으로 추축국의 공격이 시작되는데 지정학적으로 포위된 상태라 매우 불리하다.


[1] 오스트리아-헝가리 이중제국 내에서 헝가리 부분에 속해 있었다.[2] 크로아티아 영내에 있지만 슬로베니아 국경과 매우 가까웠다.[3] 장신이 많은 발칸반도 출신치고는 키가 꽤 작았다. 다만 그리스와 알바니아는 발칸반도 국가이긴 해도 평균 신장이 작은 편.[4] 미국식 영어 표기가 대세인 한국도 이런 점에서 자유롭지 않다. 가령 에이레를 아일랜드라고 한다던지, 에스파냐를 스페인으로, 폴스카를 폴란드로...다만 대체로 철자가 쉬운 것을 주로 언어로 쓰는 것도 있다는 점도 감안할 필요가 있다. 오스트레일리아를 호주로 줄여부르는 것과 비슷한 셈.[5] 이에 대해서는 최근까지도 논란이 많았다. 무엇보다도 유고슬라비아 공산당이 티토의 내전참가를 부인하였으니. 현재 가장 유력한 주장은 실제로 스페인에서 싸운건 아니고, 국제 여단지원자들을 파리에서 모아서 스페인으로 보내는 코민테른의 행정 업무를 담당하면서 관리 차 스페인에 여러번 갔다 왔다는 주장도 있다.[6] 당시 왕이였던 페타르 2세의 5촌 당숙이였다. 페타르 2세의 큰아버지인 조르제 왕자가 있었으나 이쪽은 원래 왕세자였는데 정신병으로 사람을 죽여서 동생에게 왕위를 넘긴 상태라서 섭정을 할 수 없었다.[7] 출처: 위키페디아[8] 하지만 스타브카는 30만이 아니라 7만이라 판단했고, 이쪽이 진실에 가까운 것으로 평가된다.[9] 사실 유고슬라비아를 잃으면(또는 이곳에 연합국이 들어온다면), 독일의 유일한 유전이었던 루마니아가 위험해지고, 우크라이나까지의 보급로도 위험해진다. 그 자체는 별로 가치가 없지만, 석유나 보급로 확보를 위해 반드시 점유해야 했다.[10] 다만 그 덕분에 물품이 풍족하게 생산되었기는 했으나 동시기 타 공산국가와는 다르게 임금 상승으로 인한 물가상승률이 상당해서 이 문제로 골치좀 썩혔다고 한다. 노동자 자주관리의 비판으로 흔히 드는 사례이다. 한편 90년대 초반 여러 공산국가들도 체제전환을 하게되면서 이와 비슷한 부작용을 겪게 되었는데, 이경우 당관료들이 국영 기업을 불하받으면서 독과점이 일어나 발생한 것으로 유고슬라비아와는 원인이 다르다.[11] 유고슬라비아를 방문한 체 게바라는 유고슬라비아의 자주관리기업으로부터 영감을 받아 쿠바의 산업정책에 적용을 시도하기도 했다.[12] 실제 중국이 개혁개방 정책을 펼쳤을때 적극적으로 참고했던 나라가 헝가리유고슬라비아였다.[13] 칠레의 살바도르 아옌데도 지지의사를 표명하기는 했지만, 공식적인 지지 표명은 아니었다.[14] 특히 68운동 내에서 기존의 공산당 및 소련에 대한 혐오가 강하게 드러난다는 점을 생각해야 한다.[15] 위에서 언급한대로 나치는 오만방법으로 티토를 죽이려고 애썼다. 또한 만약 나치와 야합했으면 종전후 티토를 싫어한 스탈린이 당연히 이를 들어 티토를 공격하지 않을 리가 없다.[16] 그래도 처형은 당하지 않았다. 질라스는 티토 사후였던 90년대 초까지 살아있었다가 1995년에 사망했다.[17] 사실 스탈린 시절에 앙숙이었다고 해도 1955년에 흐루쇼프와 만나면서 화해했으니 기념우표를 발매해도 이상할 것은 없다.[18] 체트니크는 티토의 빨치산과 항쟁과정에서 독일, 이탈리아군과 동맹을 맺고 함께 빨치산 토벌에 나서기도 했다. 이로 인해 체트니크를 지지하던 연합국은 체트니크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고 빨치산을 지원했다.[19] 티토와 같이 게릴라 운동을 같이 한 동지에 초기 권력 2인자였으나 티토의 독재정치를 비판하면서 반체제 인사로 돌아선 사람이다. 심지어 질라스는 공산당 비판 작품들을 저술하여 투옥, 가택연금 상황 속에서도 정치 민주화를 주장하는 등 티토와 대립하였고 1980년 티토가 죽자 죽어야 할 독재자가 죽었을 뿐이라는 반응을 보였다. 그러나 유고 내전 당시 연방의 분열을 막으려다 1995년 의문사했다. 정작 질라스 자신은 평생동안 국제공산주의자로서의 신념을 유지했다고.[20] 이 문단은 두샨 바타코비치外 저, 정근재 역 『세르비아 역사』를 참고하였다. 두샨 바타코비치는 구유고 정권에 대해 비판적인 인물이었고, 세르비아 민족주의 성향이 있기 때문에 이를 감안하여 볼 필요가 있다.[21] 그것도 모자라서 아예 보이보디나의 일부였던 바라냐(Baranja) 지방을 크로아티아에 떼어주었다.[22] 달마티아는 19세기에 크로아티아-슬라보니아 왕국과는 분리된 행정구역이었다.[23] 마케도니아는 발칸 전쟁 이래로 쭉 세르비아 영토였다.[24] 출처: 티토: 위대한 지도자의 초상(2003), 제스퍼 리들러, 을유문화사. 54페이지[25] '그리스도라면 어떻게 하실까?'라는 책의 저자다.[26] 그러나 저 스테피나츠라는 사람은 다른 곳도 아니고 우스타샤에 협력한 전과가 있는 인물로 직접 학살에 관여했다는 의혹이 제기될 만큼 굉장히 논란이 많은 사람이다. 스테피나츠 외에도 이반 사릭을 비롯한 유고 내의 많은 가톨릭 신부들이 우스타샤에 협력해 세르비아인 학살에 관여한 것은 엄연한 역사적 사실이다. 단순히 공산당에 반대했다는 이유만으로 체포된 것은 아닌 셈이다.[27] 한국에서는 1989년 주말의 명화에서 방영해준바 있다.[28] 출처: 역사학자 로버트 서비스(Robert Service)의 저서 『스탈린 전기(Stalin: A Biography)』. 하버드 출판부, 2005년.[29] 내용은 딱 한 줄이다. '코바, 당신에게 왜 내 죽음이 필요하지?' 그러니까 스탈린에게 숙청당해 곧 죽을 상황에서조차 스탈린을 애칭으로 부르면서, 원망하기보다는 왜 굳이 자신을 죽여야 하는지 오히려 의아해 할 정도로 절친한 사이였던 것. 다만 스탈린의 그의 죽음을 고소해하며 다시 편지를 보며 기쁨을 얻기 위해서라는 시각도 있다.[30] 2분 11초에 티토라고 말한다![31] 이탈리아가 친선하는 선택지도 있지만 거의 반드시 침공한다고 보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