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4-22 03:16:39

히틀러가 되었다

히틀러가 되었다
파일:히틀러가 되었다.jpg
장르 대체역사, 전쟁
작가 종이호랑이
출판사 영상출판미디어
연재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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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기간 2022. 12. 30. ~ 2024. 04. 15.

1. 개요2. 줄거리3. 연재 현황4. 등장인물
4.1. 독일
4.1.1. 나치당4.1.2. 군부4.1.3. 민간인
4.2. 영국4.3. 프랑스4.4. 이탈리아4.5. 덴마크4.6. 노르웨이4.7. 유고슬라비아 → 세르비아4.8. 스페인4.9. 포르투갈4.10. 터키4.11. 소련4.12. 자유 러시아4.13. 미국4.14. 중국4.15. 일본4.16. 한국4.17. 베트남4.18. 인도네시아4.19. 인도4.20. 에티오피아4.21. 아르헨티나4.22. 쿠바
5. 개변된 역사
5.1. 독일5.2. 영국5.3. 프랑스5.4. 이탈리아5.5. 북유럽5.6. 남유럽5.7. 동유럽5.8. 소련5.9. 자유 러시아5.10. 미국5.11. 중국5.12. 일본5.13. 한국5.14. 동남아시아5.15. 인도5.16. 에티오피아5.17. 아르헨티나5.18. 쿠바
6. 평가7.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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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국의 대체역사 웹소설. 작가는 종이호랑이.

히틀러에 빙의한 현대인을 소재로 삼은 판타지 소설이다. 약칭은 히틀러됨 혹은 히틀됨.

2. 줄거리

하루아침에 히틀러가 되었다. 그저 게임을 하고 싶었을 뿐인데.

본래 세계로 돌아가려면 전쟁에서 승리해야 한다.

.....가능할까?
폰게임이 취미인 백수 한국인 주인공이 강철의 심장이란 폰게임[1]을 발견하고 아돌프 히틀러로 플레이하는 순간, 진짜 히틀러에 빙의했다는 설정에서 시작한다. 처음에는 역사를 긍정적으로 바꾸기 위해 군대에 말뚝을 박지만 그 결과 독일에서 공산당이 폭동을 일으켜 내전이 터지고 폴란드군이 쳐들어와 싸우다가 사망, 오스트리아로 돌아갔더니 또 공산당 때문에 내전이 터지고 이탈리아의 침공을 받아 사망, 스위스로 이민을 갔더니 트럭에 치여 사망, 간신히 트럭을 피했더니 강도에게 칼을 맞아 사망하는 등 온갖 고생을 하다가 게임 시작 시에 봤던 미션 문구를 떠올리고 회귀에서 탈출하기 위해선 독일 총통이 되어 전쟁을 승리로 이끌어야 된다고 판단, 히틀러의 길을 그대로 따라가 독일의 고토를 대부분 되찾고 평화롭게 지내려 했으나 갑자기 융커들이 왕정복고 쿠데타를 일으켜 감금당하고, 내전이 터지자 주변국들이 끼어들면서 결국 소련군이 베를린에 입성하기 직전 지하실에서 끌려나와 총살당했다.

결국 다섯 번째 회귀에선 히틀러처럼 총통이 되긴 하되 자기가 가지고 있는 미래지식을 이용해 원 역사의 나치 독일이 저지른 실수를 답습하지 않고 독일을 개혁해나가며 승리로 이끌기로 결심한다.

3. 연재 현황

문피아 연재 이전 대체역사 마이너 갤러리에서 연재되었다.

이후 문피아에서 2022년 12월 30일부터 연재를 시작하였다.

2023년 2월 24일 유료화되었다.

2024년 4월 15일에 총 366화로 완결되었다.

4. 등장인물

이 문서에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 문서가 설명하는 작품이나 인물 등에 대한 줄거리, 결말, 반전 요소 등을 직·간접적으로 포함하고 있습니다.


4.1. 독일

4.1.1. 나치당

  • 아돌프 히틀러
    주인공. 원래는 폰게임이 취미인 백수 한국인 이규태[2]였으나 '강철의 심장'이라는 게임을 플레이하려다 히틀러에 빙의하고 만다. 기왕 빙의한 거 원래의 히틀러와 다른 건실한 삶을 살려고 했으나 네 번이나 급작스러운 죽음과 회귀를 반복하게 되자[3] 자신이 총통이 되어 독일을 강대국으로 만드는 미션을 수행해야만 한다는 것을 깨닫고 총통으로 집권한 뒤 독일 제국의 고토를 대부분 되찾았다. 하지만 융커들이 왕정복고 쿠데타를 일으켜 감금당하고, 내전이 터지자 독일이 약해진 틈을 타 주변국들이 침공해오고 주인공은 패망 전 융커들에 의해 살해당하게 된다. 결국 복수를 다짐한 채 상병 시절의 히틀러로 다시 회귀하게 된다.

    원 역사의 히틀러와 비슷한 길을 걸어가며, 연설 능력도 뛰어나지만[4] 성격은 훨씬 차분하고 측근들을 찍어누르는 대신 최대한 설득을 하려고 하며 유용하다 생각되는 의견을 받아들이는 데 거리낌이 없다. 또한 홀로코스트 같은 악행은 시도하지도 않으며, 오히려 맥주홀 연설에서와 같이 인종주의에 반하는 발언과 행동을 당당히 한다. 이런 행보에 최측근들도 일부 감화되어 인종 문제에 대해 원 역사에 비해서는 누그러진 태도를 가지게 된다. 또한 6번이나 히틀러로서의 삶을 살고는 있지만 정신적으로는 현대 한국인에 가깝다. 때문에 자신이 미션을 수행하고 나면 개변된 역사 속 한국에서 눈을 뜨게 될 것을 걱정해 대비하고자 하며,[5] 원 역사 히틀러와는 달리 채식주의자가 아니며 꽤나 미식가이며 현대 한국인 시절의 기억을 살려 한식을 찾거나 현대적인 요리를 개발하기도 한다.[6] 그나마 원래 히틀러와 비슷한 점은 지독한 금연주의자인 것이다.[7] 대체역사물을 많이 봤었는지 검은머리 미군 대원수유진 킴이나 당신들의 조국을 언급하기도 하고, 내 독일에 나치는 필요없다에 나오는 3명이 쏘는 판저파우스트를 언급하기도 했다.

    1918년 1차대전에서는 혼자서 람보 수준의 무쌍난무를 펼쳐 탕크게베어 M1918과 수류탄으로 MK 전차 두 대를 격파하고 참호로 돌격해 오는 영국군을 사살하고 노획한 리-엔필드MP18로 60여 명의 적들을 사살하여 참호를 지켜낸 공로로 파울 폰 힌덴부르크로부터 1급 철십자 훈장을 수훈받았고 상병에서 하사로 2계급 진급을 했으며, 이 훈장 덕분에 종전 후 대대적인 군축에서도 하사 자리를 유지할 수 있었다.

    전간기에는 맥주홀 폭동을 일으킨 건 똑같으나 원 역사와 달리 나의 투쟁을 비교적 차분한 어조와 시각으로 서술하고 미래에 대한 예측을 넣어 큰 명성을 얻었다.[8] 그리고 집권 후 반유대주의를 독일을 분열시키려는 공산당의 음모로 몰아 반유대주의를 공식적으로 배격하는 연설을 하고[9] 1936 베를린 올림픽에서 메달을 딴 손기정남승룡, 그리고 제시 오언스를 환대하는 등 인종주의에 반대하는 행보를 보였다. 그리고 지난 회귀에서 중용하였음에도 자신을 배신한 검은 오케스트라 일원들을 미리 반역죄로 체포한 뒤 고통스럽게 사형시켜 복수를 하였다.

    2차대전 전까지는 원 역사와 같은 길(라인란트 재무장, 안슐루스, 뮌헨 협정, 체코 합병)을 걸어갔지만 본인이 가진 미래의 지식을 이용해 나치 독일을 개혁함과 동시에 실제 역사보다 이른 시기에 전쟁 중~후반에서야 나온 무기들을 개발, 배치함으로서 독일군의 전투력을 상승시켜 2차대전이 발발하자 훨씬 적은 피해로 폴란드와 베네룩스, 프랑스, 이탈리아를 정복한다. 파리 방문 당시 미리 엘리베이터를 지키도록 지시해서 원 역사와 달리 에펠 탑 꼭대기까지 올라갔으며, 앵발리드 참배 후에는 르 트랑 블루에서 여유롭게 식사까지 하고 떠난 것은 덤이다. 그렇게 1년도 채 되지 않는 기간에 영국을 제외한 서유럽을 평정함으로써 2차대전 유럽 전선을 조기에 종결시키고 내치에 집중하지만, 독일의 급격한 팽창은 역으로 소련을 자극하게 되고, 2차대전 발발 전까지 보여준 행동들은 처칠, 루스벨트 등 적수들이 히틀러의 말을 도통 믿어주지 않는 원인이 된다.[10]

    소련과의 전쟁 위기가 코앞으로 다가오자 선제공격을 주장하는 장군들을 어르고 달래는 한편, 소련의 공격에 대비함과 동시에 소련과의 협상을 이어가지만 결국 스탈린의 선제공격 지시로 독소전쟁이 약 1년 늦게 터지고 만다. 하지만 소련군을 성공적으로 막아내고 그동안 모은 동맹국, 괴뢰국들과 함께 소련을 향해 역공세를 취하였다. 그리고 원 역사의 나치가 저지른 실수를 담습하지 않기 위해 레벤스라움 계획은 폐기하고, 친독 괴뢰국들을 동유럽에 세우기로 방침을 잡는다.[11] 마침내 소련을 상대로 승리한 후엔 영국을 처리하기 위해 바다사자 작전을 시행하고, 미국이 선전포고하자 터스키기 매독 생체실험 사건과 루스벨트가 자신의 진주만 공습 경고를 묵살했다는 사실을 폭로하며 내부 분열을 유도한다. 이후 영국을 상대로도 승리하고 미국과 평화협정을 맺는다.

    이걸로 전쟁을 끝내려고 했으나 소련에서 내전이 일어나자 생각을 바꿔 2차 독소전쟁을 일으키고, 마침내 우란프로옉트에 성공해 소련에 핵무기를 투하하며 항복을 받아낸다. 그 뒤 미국으로부터 대일전 참전 요청을 받자 이를 승낙, 일본에 선전포고하고 극동에 병력을 파병한다. 그리고 마침내 일본마저 항복하며 제2차 세계 대전에서 승전하고, 모스크바에서 전범재판을 열어 처칠, 스탈린 등 핵심 전범들을 사형에 처한다.

    이 시점에서 나폴레옹비스마르크도 해내지 못한 유럽 전체를 손에 넣었다는 전무후무한 업적을 세워 독일에서는 그야말로 신세계의 신으로 추앙받게 되었지만, 정작 본인은 전쟁이 끝나는 대로 은퇴할 생각이었으나 측근들의 결사반대로 은퇴가 미뤄진다.

    냉전에 접어든 후 인도의 독립을 지원하고 미래를 대비해 수도를 재개발하는 한편 미국 대통령으로 취임한 듀이와 정상회담을 가져 전 세계를 독일과 미국의 영역으로 양분하고 소아마비 백신을 공동 연구하기로 했다. 그 뒤 마침내 독립한 한국을 직접 보고 올 생각으로 아시아 순방을 떠나고, 중앙아시아, 인도, 티베트, 중국, 그리고 한국을 방문하여 협력 관계를 맺었으며, 경제를 안정화시켜 원래 히틀러가 약속했던 폭스바겐 비틀 배급을 실제로 이뤄낸다.

    한편 독일에게 패배한 이탈리아와 그리스의 정국이 불안해지자 예의주시하다 내전이 터지자 그리스 정부의 요청으로 먼저 그리스 내전에 개입한다. 그 와중에 아르헨티나에서 포클랜드 제도의 영유권을 주장하며 독일에 도움을 요청하지만, 거절 의사를 밝힌다. 그 뒤 이탈리아 정부의 요청으로 이탈리아 내전에도 개입하여 두 내전을 빠르게 끝낸다.

    이후 스위스까지 중립을 포기하고 추축국에 가입하며 바티칸을 제외한 유럽 전체가 추축국에 가입하자 유럽연합을 창설한다. 그리고 원자폭탄을 넘어서 수소폭탄 개발을 위한 니체 프로옉트와 인공위성 발사를 위한 바그너 프로옉트를 진행한다. 이때 미국에게 미독 공동 우주 탐사와 핵무기 감축을 제안했지만 맥아더가 사실상 무시하자 단독으로 우주 탐사를 진행하고, 미국도 이를 따라잡기 위해 노력하면서 본격적으로 우주 경쟁을 시작한다.

    그리고 미국과 서로간에 정찰기를 보내고 있던 중 유럽 상공에서 U-2를 격추하고 조종사 게리 파워즈를 생포했는데, 이를 계기로 미국에게 정상회담을 제안하였다. 그리고 닷새 간의 회담을 통해 서로 정찰기를 보내는 것을 그만두고, 게리 파워즈를 미국으로 송환하고, 제3차 세계 대전을 막기 위해 미독간 핫라인을 설치하고 군비 제한을 논의하였다.

    이후 미국과 두 차례 더 회담을 가져 전략무기제한협정과 미독 우주 개발 상호협력을 결정한다. 그리고 라이히스부르거를 통해 벌어들인 돈과 미국이 지원해준 돈으로 원자력 발전소 건설과 우주 개발에 투자한다. 그리고 달 착륙이 성공하는 걸 보고 난 후, 총통이 된지 32년 만에 괴링에게 자리를 물려주고 은퇴를 선언한다.[12] 은퇴하면서 괴링에게 독일에게 역사와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도록 당부하는 메모 한 장을 남기며 이를 후임 총통들에게 대대로 물려주되 세상에 알리지 말라고 당부한다.

    은퇴 후 여유로운 삶을 지내며 여행도, 주변인들의 장례식도 자주 다니면서, 우주 탐사, 노트북과 스마트폰 같은 가정용 컴퓨터, 인터넷, 드론 같은 전자기기의 발달과 실용화를 담은 나의 투쟁에 이은 두 번째 자서전 우리의 투쟁을 출간하고 그 수익금은 모두 국고로 보낸다. 그 뒤로도 미국, 아프리카 등 세계 방방곡곡을 돌아다니며 은퇴를 즐기다가 1972년 4월 30일, 83세의 나이로 눈을 감는다. 유언으로 자신이 죽으면 베를린의 전사자 묘지에 묻어달라고 했지만 괴링에 의해 총통기념관이 건설되어 거기 매장되었다.

    사망 후 마침내 회귀에서 탈출해 자신이 바꾼 역사 속의 본래의 몸으로 돌아왔다. 가족이나 집까지 바뀌진 않았지만, 백수였던 과거와 달리 번듯한 직장인이자 단기사병으로 2년간 복무한 군필자가 되었다. 이후 독일 여행을 떠나 자신이 바꾼 역사를 살펴보다 마지막으로 자신의 무덤을 보며 미소를 짓는 것으로 끝난다.
  • 헤르만 괴링
    원 역사와 달리 맥주홀 폭동에서 고환에 총을 맞지 않게끔 히틀러가 일부러 대열의 후방에 배치, 결과적으로 괴링이 마약에 중독되는 것을 막아 훨씬 뛰어난 판단력을 보이고 있다. 또한 원 역사와 달리 해군과도 제대로 된 협조를 하기도 한다. 실제 역사와 마찬가지로 나치 독일의 2인자 역할을 맡고 있다. 마약 부작용으로 뚱뚱해진 실제 역사와 달리 작중의 괴링은 군살 하나 없는 미중년으로 시간이 날 때마다 공군 기지를 방문해 현역 시절처럼 전투기를 몬다고 한다. 덕분에 히틀러가 차기 총통으로 점찍어놓고 있다.

    히틀러와 듀이의 독미 정상회담 직후 히틀러의 은퇴 의사를 듣고 나서 같이 들은 헤스와 함께 돌바닥에 머리를 찧어가며 결사반대하여 은퇴를 보류하게 만든다. 이때 자기는 준비가 덜 됐으니 최소 20년은 더 있어야 한다고 했는데 정말로 20년이 넘어서야 히틀러가 은퇴하면서 2대 총통이 된다. 총통이 된 뒤에도 히틀러에 대한 충성심은 여전한 모습을 보이며, 히틀러가 사망한 후 히틀러를 베를린의 전사자 묘지에 묻으면 다른 추모객들이 추모하기 힘들다며 총통기념관을 따로 건설해 매장했고, 히틀러가 말년을 보낸 집과 생가를 기념관으로 지정했으며, 베를린 템펠호프 공항을 아돌프 히틀러 국제공항으로 개명했다.

    1974년 슈페어에게 총통직을 넘기고 은퇴하였으며, 3년 뒤 1977년 사망했다.
  • 파울 요제프 괴벨스
    원 역사처럼 연설기계로 활약하고 있으며 히틀러의 의중에 따라 평화를 주장하는 연설을 하기도 하였다. 독소전쟁이 결국 터지자 심혈을 기울인 총력전 연설로 전 독일을 뒤흔든다. 실제 역사에서처럼 여자를 밝혀서 히틀러가 자주 뒷목을 잡는 모양. 히틀러가 은퇴하자 같이 은퇴하였고, 늘그막에 여자를 밝히는 버릇을 고쳤는지 가족과 단란한 노년을 보내다 1984년 아내 마그다가 사망한 다음날 사망했다.
  • 하인리히 힘러
    오컬트에 심취한 것과 무능한 면모는 원 역사와 똑같아서 매번 히틀러에게 뻘소리를 늘어놓아 골치아프게 만들지만, 히틀러에게 충성하는 건 확실하고 굳이 내칠 이유도 없어 히틀러도 내버려두고 있다. 그래도 히틀러의 영향을 받아 폴란드 내 유대인으로 구성된 특수부대 '존더코만도'를 만들어 파르티잔을 소탕할 방안을 구상하는 등 원 역사에 비하면 좀 더 실리적인 행동을 하기도 한다. 또한 티베트를 아리아인의 기원으로 확신하고 원 역사처럼 조사단을 파견하는 것은 물론, 전후 2차 조사단을 보내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아예 티베트를 정식 국가로 인정하는 것을 지지하고 티베트군의 현대화를 돕는 등, 티베트와의 친선에도 기여한다. 그 대신 연구라는 핑계로 마음껏 오컬트 덕질을 하고 있지만 히틀러도 어차피 전쟁도 끝났고 뻘짓도 안 했으니 내버려두고 있는 중. 이후 헤스와 함께 히틀러의 아시아 순방에도 동행해 티베트에 직접 방문까지 하는 등 여러모로 성공한 덕후가 되었다. 히틀러가 은퇴하자 같이 은퇴하였고, 죽기 전까지 예수의 마지막 성배를 찾아다니다가 1978년 사망했는데, 사망 직전까지도 그걸 찾지 못해서 아쉬워했다고 한다.
  • 루돌프 헤스
    오컬트에 심취한 건 힘러와 똑같지만 힘러의 레벤스보른 계획을 정상적으로 다듬어서 독일 전체의 출산율을 끌어올리려는 정책을 제안하는 등 실리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또한 소련에서의 회담에서 도청당할 것을 우려하는 히틀러에게 역으로 역정보를 흘리는 제안을 하였고 이것이 실행된 결과 소련의 유능한 인재들이 대거 숙청되면서 엄청난 공을 세웠다. 이 공로로 금강석백엽검 기사철십자 훈장을 히틀러에게 수여받는다. 괴링과 함께 히틀러의 은퇴를 결사반대한다. 이후 힘러와 함께 히틀러의 아시아 순방에도 동행해 티베트에 직접 방문까지 하는 등 여러모로 성공한 덕후가 되었다. 히틀러가 은퇴하자 같이 은퇴하였고, 힘러를 따라 세계를 돌아다니다가 말년에는 농장에서 원예 일을 하며 시간을 보내다 1995년 무려 101세의 나이로 사망한다.
  • 안톤 드렉슬러
    나치당의 초대 당수이지만 실권에선 배제된 채 당수직만 맡고 있는 처지였으나 원 역사와 달리 히틀러가 당을 장악한 후에도 계속 당수로서 예우해주었기에 히틀러와도 그럭저럭 괜찮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폴란드 침공 후 히틀러에 의해 폴란드 총독으로 임명된다. 실권은 프리치가 쥐고 있어 사실상 명예직이었지만 본인은 만족한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 후 건강이 안 좋아져 히틀러와 만나 마지막 이야기를 나눈 후 뮌헨의 자물쇠 수리공에서 폴란드의 총독까지 된 자신의 삶에 만족하며 눈을 감는다.
  •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
    히틀러의 명령에 따라 검은 오케스트라 일원들을 감시하다 그들이 반역을 꾸미는 증거를 찾아 그들을 체포하였다. 그리고 아프베어SD에 합병되며 독일 첩보망의 총책임자가 되었다. 특유의 꼼꼼한 성격과 미래를 아는 히틀러의 지식이 더해져 그가 이끄는 SD는 실제 역사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뛰어난 공적을 세우고 있지만 정작 하이드리히 본인은 자기도 몰랐던 고급 정보를 히틀러가 알고 있자 의문을 가지고 히틀러 주변인들을 조사한다. 이외에도 역사에서처럼 힘러를 내심 경멸하며 언젠가 그를 제거하고 자신이 슈츠슈타펠의 수장이 될 계획을 가지고 있다가 실행에 옮겼으나, 히틀러가 관련 보고를 듣고 제거를 결심하여 원래 힘러에게 갈 폭탄을 하이드리히의 비서를 통해 그의 집으로 보내 가족째로 날려버리며 사망한다.
  • 얄마르 샤흐트
    나치 독일의 경제장관. 군비 지출로 독일 경제가 한계에 봉착하자 전쟁을 포기하고 군비 지출을 줄일 것을 청하나 거부당하자 사임 의사를 표하지만 히틀러의 설득으로 자리를 지키게 되었다. 이후 경제 관련 문제에서 다방면에서 활약한다. 또한 독일군 미니어처 세트에 희귀 미니어처들과 히틀러의 친필 사인을 무작위로 집어넣어서 홍보하는, 그러니까 가챠 시스템을 탄생시켰다.
  • 요아힘 폰 리벤트로프
    나치 독일의 외무장관. 히틀러의 명으로 에티오피아로 가 비밀리에 군사동맹을 체결하고, 현실 역사와 동일하게 소련과 불가침조약을 맺는다. 그러나 그의 소망과 달리 소련은 독일을 공격했고, 소련의 대독 선전포고를 전하는 주독 소련대사 데카노조프에게 분노를 드러낸다. 히틀러가 은퇴하자 같이 은퇴하였고, 말년에 와인 산업에 뛰어들어 상당한 성과를 내고 1986년 사망했다. 사망한 뒤에도 그가 설립한 와인 브랜드 '리벤트로프'는 지금까지 인기를 끌고 있다고.
  • 에밀 마우리스
    히틀러의 보디가드 겸 운전수였던 인물. 원 역사에서는 겔리 라우발에게 관심을 보이다가 히틀러의 불쾌감을 사서 좌천되었지만, 여기서는 겔리 라우발과 결혼하여 가정을 이루고 자식을 3명이나 둔 채 잘 살고 있다. 무려 SS 제국지도자까지 진급했지만 실질적인 권한은 없는 명예직으로 뮌헨에서 소일거리나 하고 있는 것으로 나온다. 전후 보헤미아-모라바 보호령의 2대 총독으로 임명된다.
  • 베르너 폰 브라운
    히틀러 밑에서 로켓 연구를 한다. 이후 인공위성 발사를 위한 바그너 프로옉트를 진행해 성공시킨다.
  • 알베르트 슈페어
    괴링의 뒤를 이어 3대 총통으로 취임한다. 재임 중 1981년 심장마비를 일으켰고, 목숨은 건졌지만 더 이상 총통직을 유지하는 건 무리라고 판단해 파이퍼에게 총통직을 넘기고 은퇴하였다. 그 뒤 1983년 심장마비로 사망한다.
  • 쿠르트 발트하임
    파이퍼의 뒤를 이어 5대 총통으로 취임한다. 레마르크의 금서 조치를 해제하는 등 어느 정도 부분적 개혁을 하였다.
  • 헬무트 콜
    발트하임의 뒤를 이어 6대 총통으로 취임한다.
  • 올라프 숄츠
    콜의 뒤를 이어 7대 총통으로 취임했으며, 현대 시점에 총통으로 재임 중이다.

4.1.2. 군부

  • 파울 폰 힌덴부르크
    1차대전 때 전장에서 활약하고 입원한 히틀러에게 직접 훈장을 수여하였다. 원 역사에서는 히틀러의 고향을 착각해 보헤미아 상병이라는 별명을 붙인 장본인이었으나 여기서는 처음 만난 자리에서 오해를 정정받았다. 이때 히틀러에게 아부를 듣고 그를 호의적인 시선으로 바라보게 되었다. 이 덕분에 대통령이 된 이후 파펜슐라이허를 건너뛰고 히틀러를 총리로 임명하였다.[13] 이후 원 역사와 같은 날에 사망하였다. 유언은 "나의 황제 폐하, 나의 독일". 유서에는 빌헬름 2세를 복귀시켜달라고 했으나 주인공은 융커들 때문에 죽었던 회차도 있던데다가 카이저가 한 일이라고는 나라를 파탄내고 중립국으로 도망간 것밖에 없으면서 자신이 이 자리에 오는 데 무슨 도움을 줬냐며 독일에 필요한 건 자신이라며 냉소적으로 여겼다.[14]
  • 베르너 폰 블롬베르크
    히틀러에 광적인 충성심을 보이는 것은 역사와 동일하나 블롬베르크-프리치 사건으로 퇴역 처분되었던 실제 역사와 다르게 그를 신뢰한 히틀러에 의해 자리를 지키나 정작 본인이 음주운전(...)을 하는 바람에 한동안 병원 신세를 지게 된다. 퇴원한 뒤 프랑스 주둔 독일군 총사령관이라는 사실상의 프랑스 총독으로 임명된다. 1953년 은퇴한다.
  • 베르너 폰 프리치
    게이라는 누명을 쓰고 쫓겨났다가 폴란드 침공 중에 전사하는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 원 역사와 달리 히틀러의 신임으로 본래 자리를 보전 중이었으나 블롬베르크와 음주운전 사고에 휩쓸려 병원 신세를 진다. 블롬베르크보다 먼저 퇴원한 뒤 히틀러의 명령으로 폴란드 주둔 독일군 총사령관, 실질적인 폴란드 총독에 임명된다. 실제 역사와 정반대로 운수대통한 상태. 드렉슬러가 사망한 후에는 2대 총독에 임명되었다.
  • 루트비히 베크
    히틀러를 못마땅하게 생각하며 거듭 이어진 성공에도 히틀러를 불신하고 제거하려 하나 선수를 친 히틀러에게 2차 장검의 밤 숙청 대상이 되어 반역죄로 체포당하고 군적박탈 후 교수형으로 고통스럽게 처형되었다.
  • 빌헬름 카이텔
    원 역사와 다르게 국방군최고사령부가 생기지 않고 국방부가 그대로 유지되어 국방장관의 직위에 올랐다. 계급은 역사와 동일하게 원수. 작중 소련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자 히틀러에게 동원령 선포를 요청한다. 1953년 은퇴하였고 1970년대에 사망한다.
  • 알렉산더 폰 팔켄하우젠
    주중 독일 군사고문단장. 히틀러의 지시로 원 역사와 달리 팔켄하우젠 본인이 명목상 건강 악화로 중국에 더 머무르는 형식으로 군사고문 역할을 지속하게 된다. 제2차 세계 대전이 종전된 뒤에도 장제스의 요청으로 중국에 남는다. 방중한 히틀러에게 자신은 장제스의 몽골 정복 계획에 우려를 표했지만 장제스는 듣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별 수 없이 중국군을 이끌고 몽골을 침공하지만 우려한 대로 소련군을 당하지 못하고 철군한다. 1970년대에 사망한다.
  • 에리히 레더
    크릭스마리네 최고사령관. 현실적인 문제로 Z 계획을 축소하려는 히틀러에게 다소 떨떠름한 반응을 보이지만 서부전선에서 승전하고 프랑스, 이탈리아 해군으로부터 뜯어낸 각종 함선들을 크릭스마리네에 편입시켜 Z 계획의 목표치에 사실상 근접하는 업적을 세우자 감격한다. 본인 스스로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다고 말할 정도. 전후 예산 문제로 해군 축소를 주장하는 샤흐트와 충돌한다. 대양함대를 지향하는 레더는 해군 전함들의 해체에 반대하는 입장이었지만 경제 활성화를 위해선 해군의 축소가 불가피했고, 결국 최소한의 전함 전력만 겨우 보존하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1948년까지 일하다가 되니츠에게 자리를 넘겨주고 은퇴하였고 1970년대에 사망한다.
  • 에리히 폰 만슈타인
    그의 능력을 알고 있는 히틀러에게 일찌감치 기용되어 원 역사처럼 낫질 작전을 구상해 프랑스 침공을 성공시켜 승승장구하게 된다. 그리고 소련과의 긴장이 고조되자 히틀러에 의해 자기보다 연공서열이 높은 선배들을 제치고 동부전선 총사령관으로 파격적인 승진을 하게 되고, 두 번에 걸친 독소전쟁에서도 활약하며 독일에게 승리를 가져다준다. 1953년 국방장관이 된다.
  • 하인츠 구데리안
    기갑총감으로써 히틀러와 협력하며 뛰어난 성과를 올리게 된다. 원 역사와 달리 원수까지 진급했으며, 히틀러가 효율에만 집중하며 생산 라인을 최대한 단순화시키려 하고 반대로 구데리안이 어느 정도의 다각화를 주장하며 입장이 뒤바뀌게 된다. 그리고 70톤에 육박하는 중량 탓에 신뢰성이 문제가 됐던 티거 2를 50톤대의 크기와 판터급의 기동력을 갖춘 MBT로 만드는 업적을 세웠다. 1953년 은퇴하였고 1970년대에 식도정맥류 파열로 입원해 히틀러가 병문안을 온 다음날 사망한다.
  • 발터 베버
    실제 역사에선 1936년 비행기 추락 사고로 사망했지만 여기서는 사고 자체가 일어나지 않아 중장에서 그쳤던 역사에 다르게 원수까지 진급했다. 숙원이었던 전략폭격기 개발의 총책임자로 임명되어 전략폭격기를 개발한다. 1970년대에 사망한다.
  • 볼프람 폰 리히트호펜
    붉은 남작의 사촌동생이자 루프트바페의 장군. 도시가 불타는 모습을 좋아해 파리를 폭격해 불태워 진정한 빛의 도시로 만들고자 했으나 프랑스가 일찍 항복하는 바람에 실패하자 뭇내 아쉬워했으며, 대신 로마를 폭격해 불태우고 '로마는 불타고 있다.'는 짤막한 보고를 올린다. 전후 원 역사보다 4년을 더 살았지만 점차 건강이 안 좋아지다 결국에는 뇌졸중으로 병사하며 31년 전 서부전선 상공에서 전사한 사촌형의 옆자리에 안장된다.
  • 미하엘 비트만
    폴란드 침공 파트에서 등장. Sd.Kfz. 231을 타고 다녔던 실제 역사와 반대로 38(t)를 타고 등장한다. 프랑스 침공에서는 SS 소위로 진급하여 헤처로 프랑스군 전차들을 격파하고 다닌다. 독소전쟁이 발발하자 6호 전차 티거의 전차장으로 소련군의 진격을 저지한다. 그의 포수는 실제 역사에서도 비트만의 포수로 이름을 날린 발타자르 볼.
  • 클라우스 폰 슈타우펜베르크
    2차 장검의 밤 사건에서 음모자들과 매우 가까운 사이였고 체포된 동료들을 옹호하여 조사를 받았으나, 히틀러가 단순히 불안하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죽일 수 없어 살려줬다. 그러나 빌헬름 2세의 경호원으로 임명된 후 왕정복고를 시도하려 들자 더 이상 봐줄 수 없다고 판단한 히틀러에 의해 암살당한다.
  • 오토 카리우스
    원 역사처럼 보병으로 배속되었으나 히틀러가 부대 시찰 중 그를 만나 직접 기갑병과를 추천하여 기갑병이 되었고, 이후 독소전쟁이 벌어지자 참전하여 격파된 4호 전차의 포탑을 수동으로 움직여서 적 전차 중대를 잡아버리는 판타지에나 나올 법한 활약을 찍으며 살아있는 전설이 되었고, 이후 원 역사에서처럼 티거 1의 전차장이 된다.
  • 헤르베르트 브루네거
    4년 간의 의무복무를 마치고 고향에서 친구들과 맥주를 마시며 회포를 푼다. 민간인이 되었으니 무슨 일을 하며 살지 고민하다가 친구의 권유로 고급 호텔 종업원으로 일하게 되지만, 전쟁이 코앞으로 다가오자 히틀러가 내린 예비군 소집령으로 재입대하게 되어 절망한다... 전쟁 중 SS 중사까지 진급하고 원 역사에서는 받지 못한 1급 철십자 훈장까지 받았지만 종전 후 전역해 호텔에 복직한 후 객실부 지배인으로 진급한다.
  • 발터 모델
    히틀러에 의해 고속승진하여 독소전쟁 시점엔 상급대장으로 진급하여 제9군 사령관이 되었다. 특유의 기동방어로 소련군을 학살하며, 소련군의 지휘관들을 12살짜리 애나 다름없다고 평하고 나였으면 저런 돌대가리 밑에서 굴려지느니 자살한다는 농담을 하였다.[15] 1953년 육군총사령관이 된다.
  • 게르트 폰 룬트슈테트
    서부전선 총사령관으로 임명되어 북프랑스 해안가에 방어선을 구축한다. 이때 기갑부대를 해안에서 떨어진 곳에 배치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히틀러가 롬멜의 손을 들어주자 히틀러의 결정에 실망해서 폭음을 했지만, 결과적으로 해안 가까이 배치된 기갑부대가 적의 상륙을 성공적으로 막아내자 롬멜의 말이 옳았다는 것을 인정한다. 1953년 은퇴하였고 1970년대에 사망한다.
  • 에르빈 롬멜
    프랑스 침공과 이탈리아 침공에서 활약한 후 원 역사와 달리 서부전선 부사령관으로 임명되어 북아프리카가 아닌 북프랑스에 배속, 해안가에 방어선을 구축한다. 이때 룬트슈테트와 달리 기갑부대를 해안 가까이 배치해야 한다고 주장하였고 히틀러가 롬멜의 손을 들어준 덕에 디에프 상륙작전을 성공적으로 막아낸다. 그러나 영국 본토 침공 중 피난민으로 위장한 영국군에게 총을 맞는 바람에 후송된다. 회복된 후 자청해서 극동 파병군 총사령관으로 임명되어 일본군과 싸운다. 1953년 육군참모총장이 된다.
  • 오토 스코르체니
    프리덴탈 특수임무대를 이끌면서 원 역사와 달리 기사의 도약 작전에서 요시프 브로즈 티토를 생포하는데 성공한다. 이후 대영전에 투입되어 윈스턴 처칠을 생포해 독일로 압송한다. 이탈리아 내전이 터진 후 히틀러의 명령으로 무솔리니를 구출해 독일로 데려가는데 이때는 영관급이 아닌 장성이 된지라 이전과 달리 일선에서 교전을 벌이진 않았다.
  • 카를 되니츠
    유보트 함대 사령관으로서 미국이 영국에 물자를 지원하고, 영국 함대가 미국 선박으로 위장해 드나드는 꼴을 보다못해 빡쳐서 미국에 선전포고할 것을 주장하나 히틀러에 의해 거부당한다. 전후 레더의 뒤를 이어 크릭스마리네 최고사령관이 된다.
  • 하인리히 하러
    원 역사에서 히말라야 탐사 중 영국군의 포로가 되었다가 티베트로 탈출해 7년간 머무른 경험을 《티베트에서의 7년》이라는 책으로 낸 인물. 여기서는 히틀러가 위험하다고 말린 덕에 탐사를 나가지 않아 포로로 잡히지 않았고, 종전 후 티베트를 방문한 히틀러의 안내역을 맡았다.
  • 에두아르트 디틀
    산악 사단을 지휘하며 알프스 산맥에서 이탈리아군과 싸우고, 바다사자 작전에서 영국군과 싸우고, 캅카스 산맥으로 숨어든 소련군 잔당을 소탕하는 공을 세운다. 이후 그리스 내전에 원정군 총사령관으로 파병된다.
  • 발터 도른베르거
    히틀러 밑에서 로켓 연구를 한다. 이후 인공위성 발사를 위한 바그너 프로옉트를 진행해 성공시킨다.
  • 베른하르트 크라머
    독일 공군 조종사. 인류 최초의 우주 비행사가 되어 체펠린 1호를 타고 우주로 나가 '지구는 푸르다'는 말을 남겼다.
  • 에두아르트 샬모저
    독일 공군 조종사. 원 역사에서는 공중충돌만으로 3기를 격추시키고 자기 집 뒷마당에 불시착한 희대의 괴짜. 1966년 7월 21일, 인류 최초로 달에 발을 디딘다.
  • 지그문트 얀
    독일의 우주 비행사. 1982년, 인류 최초로 화성에 발을 디딘다.

4.1.3. 민간인

  • 빌헬름 2세
    초반에 패색이 짙어지자 원 역사대로 네덜란드로 망명한다. 이후 왕정복고를 원하면서도 히틀러와 독일인들이 자신을 달가워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한탄하다, 슈타우펜베르크의 설득을 듣고 고민하지만 슈타우펜베르크가 암살당하고 경호원들이 모두 무장친위대로 교체되면서 사실상 감금 상태에 놓여 왕정복고는 꿈도 꿀 수 없다는 사실만 자각하게 된다. 이후 원 역사대로 1941년에 사망하였다고 언급된다.
  •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히틀러가 반유대주의에 반대하는 행보를 보이자 원 역사와 달리 독일에 머무른다. 그리고 우란프로옉트에 참가하여 핵무기 연구를 한다. 마침내 핵무기 개발에 성공하지만 핵무기가 가져올 결과에 겁을 먹고 히틀러에게 핵무기를 사용하지 말아달라고 간청하지만 거절당한다.[16] 이후 죄책감에 훈장 수여식에 참석하지 않고, 수소폭탄 개발을 위한 니체 프로옉트에 참가를 거부한다.
  • 욘 라베
    난징 대학살을 목도하고 귀국해서 히틀러에게 이를 폭로할 것을 청하였다. 히틀러는 아직 일본과의 관계를 유지해야 한다고 판단해 이는 거절하였으나 라베 본인이 중립국에 가서 폭로하는 것은 상관하지 않겠다는 허락을 받고 스위스에서 난징의 참상을 폭로하였다. 이후 히틀러의 방중 때 동행하여 난징에 돌아와 격한 환영을 받는다.
  • 겔리 라우발
    히틀러의 조카이자 원 역사에서 히틀러가 연인으로 생각하고 집착했던 여인. 하지만 빙의자 히틀러는 근친을 혐오했기에 그녀에게 관심을 두지 않았고 덕분에 에밀 마우리스와 결혼하여 가정을 이루고 자식을 3명이나 둔 채 잘 살고 있다.
  • 에리히 마리아 레마르크
    서부 전선 이상 없다를 집필한 것으로 유명한 소설가. 실제 역사와 같이 1차 대전 서부전선에서 부상을 입고 야전 병원에 수용되었는데, 그곳에서 히틀러를 만났다. 히틀러에게 자신의 소시지를 양보한 이후 함께 이야기를 하다가 소설가가 되겠다는 꿈을 밝혔다. 그 뒤 원 역사에서 스위스로 망명한 것과 달리 계속 독일에 머무르며 서부 전선 이상 없다를 출간하는 등 소설가로 유명세를 얻었지만, 폴란드 침공 직전 반나치 발언을 하다가 게슈타포에게 체포된다. 직후 독재자가 된 히틀러와 21년 만에 다시 한 번 만나게 되는데, 히틀러는 자신이 독재자임을 인정하며 레마르크에게 호의적인 태도를 보이며 그를 바로 석방시킨다. 그 역시 반전주의적 태도를 버리진 못하나 히틀러와의 옛 전우로서의 추억과 히틀러의 태도를 보고 현실 역사와는 다르게 그에게 행운을 빌며 얌전히 물러난다. 하지만 2차 독소전쟁이 발생하자 반전, 반나치 선전물을 뿌리다 분노한 시민들에게 얻어맞고 또다시 게슈타포에게 체포당하고[17], 또다시 히틀러와 독대하여 이야기를 나눈 후 고민하며 물러난다. 이후 미국으로 건너가 반나치 활동을 계속했고 이로 인해 독일에서 매국노로 낙인찍혔으며 그의 저작들은 금서로 지정되었다. 이후 원 역사보다 5년 정도 더 살다가 1975년 6월 22일 사망했으며, 훗날 금서 조치는 해제되었지만 여전히 그의 저작들은 독일인에게 기피되고 있다고 한다.
  • 콘라트 아데나워
    독일 중앙당 소속으로, 원 역사에서는 나치에게 탄압당했지만 본작에서는 히틀러가 그의 능력을 높게 샀기에 포젠 시장 자리를 제안하였고 이를 수락하여 포젠을 재건시켰다.[18] 중앙당이 사실상 구색정당이 되었음에도 간간이 나치에게 반대하는 모습을 보였지만 히틀러의 신임 덕분에 자리를 지켰고, 이후 히틀러의 수도 재개발 계획에 참가한다.
  • 빌리 브란트
    노르웨이에서 반나치 활동을 하다 체포된 뒤 사형당하였다. 현실에선 독일의 국제 위상을 끌어올린 위인이었지만 주인공의 역사 개변으로 인해 독일을 배신하고 외국에 협력한 매국노가 되고 말았다.
  • 윌리엄 조이스
    원 역사처럼 '독일이 부른다(Germany Calling)'라는 선전방송을 하지만, 반유대주의를 배제하고 영국의 식민통치를 비난하고 처칠의 행적을 폭로해 처칠이 열폭을 터뜨리는 원인을 제공한다.
  • 베르너 하이젠베르크
    아인슈타인과 함께 우란프로옉트에 참가해 세계 최초의 핵폭탄 발퀴레를 만들었다. 원폭에 중압감을 가진 아인슈타인과 달리 하이젤베르크는 독일의 승리를 위해서라면 마땅히 감내해야 할 일로 여기고 개의치 않아 하는 모습을 보인다.

4.2. 영국

  • 윈스턴 처칠
    독일이 노르웨이를 침공하지 않으며 본인이 계획한 노르웨이 공격이 먼저 실행되었고 독일에 의해 노르웨이 전역에서 패전하자 책임을 체임벌린에게 떠넘기려 하였다. 그러나 격노한 체임벌린의 폭로로 지지를 받지 못해 총리가 되지 못하였다. 하지만 이후에도 샤를 드골과 접촉하는 등 음모를 꾸미고 있다. 결국 태평양 전쟁 개전 후 자신의 책임인 말레이 해전 참패는 감추고 패전의 책임을 핼리팩스에게 돌려 그를 사임시키고 총리 자리에 올랐다. 그리고 소련을 경계하고 있음에도 더 큰 적인 독일을 상대하기 위해서 뒤에서 소련과 손을 잡고 독일이 IRA를 지원했다는 누명을 씌워 반독 여론을 고조시킨다. 이후 히틀러에게 자기가 구상한 연설문[19]을 베껴지는 굴욕을 당한다. 그래서 히틀러의 연설을 듣고 저거 내가 구상한 거라고 하지만 증거가 없어서 비서관도 처칠이 한심하다고 여긴다...

    결국 불리한 상황에서도 독일의 IRA 지원을 명분으로 행복회로를 돌리며 기어코 전쟁을 일으켰다. 그러나 전쟁을 선포하자마자 런던이 V2에 의해 폭격당하며 벙커에 틀어박히는 신세가 되었다. 이러한 미쳐돌아가는 상황에서도 태연하게 포르투갈하고 스페인에게 선전포고를 하자고 했다가 장군들에게 대차게 까이는 추태를 보여준다. 여윽시 미스터 갈리폴리 그 와중에도 독일과의 평화협정은 있을 수 없다는 태도를 고수한다.

    독일군이 영국에 상륙하자 런던에 남아 끝까지 항전하겠다고 선언하고 미국에게 지원을 요청한다. 그러나 독일군의 공습으로 부상을 입는 바람에 반강제로 글래스고까지 후송되었고, 본의는 아니었지만 결과적으로 런던에 남겠다고 해놓고 혼자 도망간 꼴이 되어 이 일로 안 그래도 낮은 영국군의 사기가 더 떨어진다. 영국 본토 대부분이 점령당하는 와중에도 캐나다로 도주하는 것을 거부하고 항전하다가 스코르체니한테 생포되어 독일로 이송되어 히틀러와 독대한다. 그리고 히틀러에게 농락당하고 영국이 갈가리 찢겨나갈 것이라는 히틀러의 말에 절규한다.

    전후 독일이 모스크바에서 연 전범재판에 회부되어 변론에서 자신은 무죄라고 강변하며 판검사들을 도발하지만 결국 사형 선고를 받고 교수형으로 처형당한다. 유언은 "대영제국 만세! 국왕폐하 만세! 신이시여, 영국을 보호하소서!".
  • 네빌 체임벌린
    우리 시대의 평화까지는 원 역사의 행보와 같으나 처칠이 노르웨이 침공과 패전의 책임을 자신에게 떠넘기려 하자 격노해 처칠의 행각을 폭로하고 물러났다.
  • 에드워드 우드
    일명 '핼리팩스 경'으로 불리는 영국의 외무장관. 원 역사와 달리 처칠 대신 본인이 총리가 되고 독일과 강화조약을 맺었다. 일본의 기습으로 태평양 전쟁이 개전된 뒤에도 독일에 더 신경을 쏟는 루스벨트를 한심하게 여기지만, 처칠이 영국의 동방 식민지들이 점령당한 것을 핼리팩스의 탓으로 돌리며 선동하는 바람에 책임을 지고 물러나게 된다.
  • 조지 6세
    독일군이 영국에 상륙하자 해외 도피를 거부하고 런던에 남기로 한다. 이후 버킹엄 궁전이 폭격당해 생사불명이 된다. 이후 궁전을 점령하고 수색한 독일군들에 의해 부인인 엘리자베스 왕비와 같이 시신으로 발견되나, 영국인들이 이를 알게 되면 결사항전으로 나올 것을 우려한 히틀러에 의해 은폐되었다가, 해리스의 런던 폭격 때 이 사실을 역이용한 히틀러에 의해 영국군의 오폭으로 사망한 걸로 알려지게 된다.
  • 버나드 로 몽고메리
    독일군이 영국에 상륙하자 군을 지휘해 맞서면서 원정군으로 파견된 패튼과 티격태격한다. 최후까지 항전을 이어나가다 독일군에게 사살당한다.
  • 더글러스 베이더
    슈퍼마린 스핏파이어를 타고 독일 공군에 맞서지만 압도적인 전력 탓에 고전을 면치 못한다. 끝내 바다사자 작전으로 독일군이 영국에 상륙하고, 부하와 동료들이 하나둘씩 하늘의 별이 되어가는 중에도 출격을 포기하지 않는다. 자세한 묘사는 없지만 정황상 그 또한 하늘에서 장렬한 최후를 맞이한 것으로 추정된다.
  • 아서 해리스
    폭격기 해리스답게 독일에 대한 폭격을 이어간다. 그리고 독일군이 런던을 점령하자 런던에 톨보이 폭격을 하지만 이 일로 인해 국왕을 죽였다는 오명을 쓰게 되고, 최후까지 항전을 이어나가다 궁지에 몰리자 자살을 시도했으나 실패하고 포로로 잡힌다. 전후 독일이 모스크바에서 연 전범재판에 회부되어 사형 선고를 받고 교수형으로 처형당한다. 유언은 "나는 내 의무를 다했을 뿐이다! 이제 하느님 곁으로 간다!".
  • 클레멘트 애틀리
    영국이 독일에게 패배하자 캐나다로 도망쳐 영국 망명정부의 총리가 된다. 현실 역사와 다르게 인도 제국의 유지를 위해 발악하지만 결국 현실을 인정하고 인도에서 물러나야만 했다. 듀이의 조언을 받아들여 인도에서 철군하는 대신 힌두교와 무슬림 간의 분열을 배후에서 유도한다.
  • 오스왈드 모슬리
    영국 파시스트 연합의 당수. 독일과의 화평을 주장한 탓에 구금되었지만 전쟁 중 혼란을 틈타 지지자들의 도움을 받아 탈출했고 히틀러와의 접선에 성공한다. 이후 클라리지스 호텔에서 친독 방송을 하다가 아서 해리스의 톨보이 폭격 도중 충격파로 인한 파편에 관자놀이를 맞지만 무사히 살아남는다. 그리고 독일 점령 하 영국의 초대 총리가 된다.

4.3. 프랑스

  • 필리프 페탱
    원 역사처럼 스페인에서 프랑스로 귀국하여 새 총리로 선출되고 독일에 항복하게 된다. 다행히 원 역사보다는 프랑스가 받은 처분이 관대하였기에 후대에 받을 원망은 적을 것으로 보인다. 독소전쟁이 발발하자 히틀러와의 약속대로 참전을 결심한다. 이후 대영전에도 참전하여 그 대가로 아프리카의 영국 식민지를 할양받게 되지만 막상 식민지에 주둔하고 있는 영국군의 저항이 거세서 새 식민지는 차지하지도 못하고 되려 동남아시아 식민지가 독립하고 아프리카의 프랑스 식민지에서도 독립 여론이 일어나게 된다.

    결과적으로 히틀러에게 사기당한 꼴이 되자 후회하지만, 현실을 직시하고 어떻게든 남아있는 식민지라도 유지하기 위해 식민지에 대한 탄압을 중단하고, 모든 식민지인들을 프랑스인들과 동등하게 대우하고, 마을마다 학교와 병원도 지어주고, 최대한의 자치권을 부여하고 독립만 하지 않으면 뭘 하든 상관하지 않겠다는 폭탄 선언을 한다. 하지만 이 선언 탓에 쿠데타 미수 사건이 일어나자 비록 반대파가 숙청되면서 본인의 권력은 더욱 강화되었지만 이를 빌미로 독일의 간섭이 더 심해질 것을 내다보고 한탄하면서 앙리 지로의 사형만큼은 면하게 해달라고 부탁한다. 그 뒤 원 역사보다 2년을 더 살다가 낮잠을 자던 도중에 사망한다.
  • 피에르 라발
    페탱 밑에서 프랑스의 총리를 맡고 있다. 페탱보다 더 적극적인 친독 성향을 보이며, 독소전쟁이 발발하자 페탱에게 독일을 감동시켜 프랑스에 대한 양보를 이끌어낼 좋은 기회라 주장하며 페탱에게 적극적으로 참전을 주장한다. 페탱이 사망한 후 국가원수 직위를 물려받는다.
  • 샤를 드골
    낫질 작전을 시도하는 독일군에게 반격을 시도했으나 패배하고 도주하던 중 폭격을 맞아 생사불명이 되었다. 그러나 생존하여 원 역사처럼 영국에 망명정부인 자유 프랑스를 세웠다. 하지만 영국이 독일과 강화조약을 맺으며 입장이 난처해지고 푸대접을 받게 된다.[20] 그러나 처칠이 그와 접촉한 후 정권을 잡게 되면서 그에게 지원을 받게 되고, 처칠이 불리한 상황에서도 기어코 독일을 상대로 전쟁을 일으키자 너무 이르다는 주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샴페인을 터트린다. 이후 디에프 상륙작전에 참가하나 작전의 대실패로 3년 만에 돌아온 프랑스 땅에서 다시 도망가야 했다. 이후 영국마저 독일에게 패배하면서 영국 땅에서도 도망가야 했고, 캐나다에 도착한 뒤 이전보다도 더욱 푸대접을 받는 처지가 된다.[21]
  • 앙리 지로
    원 역사처럼 독일군에게 붙잡혀 포로가 되었다가 1942년에 탈출하는 대신 독일에 의해 석방되어 프랑스로 돌아왔다. 그러나 독일에 대한 복수심을 드러내다 페탱에게 핀잔을 듣고 권한이 축소되었지만, 기어코 페탱의 선언에 불만을 품고 식민지를 지키고 독일에 복수하기 위해 공산당과 손을 잡고 쿠데타를 일으키려고 한다. 하지만 계획이 누설되어 실패로 돌아가고 체포되어 독일에서 재판을 받게 되는데, 페탱의 부탁으로 사형은 면하고 종신형을 선고받고 자신이 수감되었던 쾨니히슈타인 요새에 재수감된다.
  • 자크 뒤클로
    프랑스 공산당의 2인자로 모리스 토레즈가 소련으로 도망친 후 프랑스에 남아 레지스탕스를 이끌며 독일에 저항했지만 소련이 독일에게 패배하고 시베리아로 물러나면서 당원들이 줄줄이 발을 빼는 바람에 입지가 좁아진다. 이에 상황을 타개하고 프랑스를 해방하기 위해 군부 소장파와 손을 잡고 쿠데타를 일으키려고 한다. 하지만 계획이 누설되어 실패로 돌아가고 도망치다 궁지에 몰리자 독약을 먹고 자살한다.
  • 프랑수아 미테랑
    라발이 사망한 후 국가원수 직위를 물려받는다. 그리고 68운동을 연상케 하는 시위가 일어나자 시위대의 요구를 즉시 받아들여 빠르게 시위를 해산시킨다. 시위대가 독재의 완화를 외치긴 했어도 반독을 외치진 않았고, 미테랑도 반독 성향은 보이지 않았기에 독일도 뭐라고 하지 않았다고.

4.4. 이탈리아

  • 베니토 무솔리니
    원 역사에서는 그나마 독일의 존재 덕에 2차대전사에 이탈리아가 나름 이름이라도 남길 수 있었지만, 여기서는 히틀러가 이탈리아 편을 안 드는 걸 넘어서서 아예 적으로 돌아서면서 원 역사보다 한층 꼬인 처지가 되고 만다. 그 결과 독일과 손잡는 대신 영국, 프랑스와 손을 잡고 오스트리아 일대를 공격하지만 여기서도 무솔리니의 공격은 독일 산악 사단에 막히고(...) 역공을 당해 밀라노, 제노바, 베네치아 등 북부 도시들이 폭격을 받으며 졸전 전설을 써내려 가는 중에도 매일같이 술과 마약, 여자에 빠져 살다 원 역사보다 일찍 총리직에서 잘린다. 이후 이탈리아는 로마를 비롯한 주요 도시들이 폭격을 당한 끝에 항복하게 되고 무솔리니는 자택에 연금된다. 이후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나고도 몇 년이 지나서야 풀려나게 되지만 이따금 산책이나 할 뿐 여전히 자택에 틀어박힌 채 모습을 드러내지 않으며 뒷방 늙은이로 전락한다. 그래도 원 역사에서 어떤 꼴로 죽었는지를 생각하면 나름 수혜를 본 셈이 되었다.

    그 뒤 내전이 터진 후 스위스로 도주하려다 실패하고 몇 안 남은 지지자들과 살로에서 발이 묶였다가 독일군에 의해 구출된다. 구출 후 히틀러와 만나 이탈리아 새 정부의 수장직을 제의받지만 이탈리아 국민들은 더 이상 자신의 집권을 바라지 않을 것이고, 자신이 이제 애국하는 방법은 복수를 포기하고 조용히 살다 죽는 거라 말하며 거절한다.[22] 아이러니하게도 두체였을 때는 허황된 목표에 빠져 상황 파악을 못하다가 권력을 잃고 나서야 현명하게 상황을 판단한 인물.
  •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
    무솔리니에게 묻혀서 그렇지 이쪽도 상당한 암군. 무솔리니를 자른 이후 보여주는 행보에서 여실히 드러나는데 자기들이 먼저 전쟁 벌여놓고 체통을 유지하고 싶었는지 배상금 한 푼 없이 트렌티노알토아디제만 넘겨주는 조건으로 휴전하라고 하여 바돌리오 총리의 뒷목을 잡게 하고 당연히 이를 받아들이지 않은 독일은 로마를 불바다로 만드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한다. 이에 분노한 이탈리아 국민들은 왕정 폐지를 부르짖었고 결국 이에 굴복한 비토리오는 그보다 더한 조건을 인정해야 했다. 그러나 이후에도 여전히 정신을 못 차렸는지 독일에게 배상금 탕감과 영국 식민지 할양을 대가로 자기들도 대영전에 참전하겠다는 제안을 하지만 히틀러에게 단칼에 거절당한다. 전후 경제가 갈수록 안 좋아지는 와중에도 반대 세력 탄압에만 급급하다가 결국 내전이 터지자 황급히 로마를 떠나 나폴리로 도주한다.

    독일의 개입으로 인한 내전 종결 후에 히틀러의 종용과 이번 사태에 책임을 지기를 원하는 국민들의 시위가 끊이질 않자 아들인 움베르토 2세에게 양위하고 퇴위한다.
  • 움베르토 2세
    부왕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의 퇴위로 국왕으로 즉위한다.
  • 피에트로 바돌리오
    현실 역사와 비슷하게 무솔리니가 국왕의 명령으로 실각한 후 이탈리아 총리가 되었다. 하지만 되도 않는 억지를 부리며 협상을 방해하는 국왕 때문에 뒷목을 잡는다. 독일이 납득할 리 없는 조건이라고 반발하지만 국왕의 압력으로 어쩔 수 없이 독일에게 터무니없는 조건으로 협상을 시도해보지만 당연히 독일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아 피해만 더 커지고, 결국 에마누엘레 3세가 현실에 굴복하자 그제야 독일과의 강화에 돌입한다. 그리고 강화협상 마무리를 위해 만난 히틀러에게 하와이안 피자를 대접받았다....[23] 이후 처칠의 참전 제안을 피해 복구가 우선이라는 명목으로 단칼에 거절한다. 전후 디노 그란디에게 총리직을 넘기고 은퇴한다.
  • 갈레아초 치아노
    협상 자리에서 국왕이 내건 휴전 조건을 두고 리벤트로프에게 한껏 비웃음을 받는 수모를 당한다. 전후 내전이 터지자 지원을 요청하기 위해 독일에 방문하였고 이때 리벤트로프에게 또다시 조롱당한다.
  • 알치데 데 가스페리
    이탈리아 기독교민주당 당수. 국왕과 파시스트당을 몰아내기 위해 혁명을 일으킨다. 혁명 실패가 확실시되고 독일군과 정부군의 진압이 코앞으로 다가오자 보노미를 따라 청산가리 알약을 깨물어 자살한다.
  • 팔미로 톨리아티
    이탈리아 공산당 당수. 국왕과 파시스트당을 몰아내기 위해 혁명을 일으킨다. 자살한 가스페리, 보노미와 달리 당원들을 이끌고 프랑스로 탈출해 미국을 거쳐 소련으로 가겠다는 계획을 세우나 부하들의 배신으로 체포당한 후 독일로 압송되어 게슈타포에 의해 처형당했다.
  • 이바노에 보노미
    전직 총리이자 이탈리아 민주사회당 당수. 공화정을 주장하는 가스페리, 톨리아티와 달리 왕정에 호의적인 남부의 반발을 의식해 왕정 자체는 유지할 것을 주장한다. 하지만 독일의 개입으로 전세가 역전되고 혁명의 실패가 확실시되자 절망하여 권총자살한다.

4.5. 덴마크

  • 크리스티안 10세
    원 역사에서는 나치 독일에 대한 저항의 상징이었지만 여기서는 독일이 덴마크와 노르웨이를 침공하지 않았고 오히려 영국의 공격으로부터 보호하면서 히틀러와 우호적인 관계가 되었다. 다만 영국에게 자국민들이 무고하게 공격받았다는 사실에 워낙 충격을 받았는지 복수귀로 각성해서는 자국이 다 굴릴 수 있을지 모를 양의 무기를 요청해 히틀러를 곤란하게 만들기도 한다.
  • 닐스 보어
    유대인 태생이라 나치의 탄압을 피해 스웨덴, 영국을 거쳐 미국으로 도피해 맨해튼 프로젝트에 참여한 원 역사와 달리 역사 개변으로 우란프로옉트에 참가해 독일의 핵무기 개발에 일조했다.

4.6. 노르웨이

  • 비드쿤 크비슬링
    노르웨이의 파시스트이자 전직 국방장관. 히틀러와 처음 만났을 때는 쿠데타를 일으킬 생각임을 밝히고 지원을 요청하지만 히틀러에게 현실성 없는 계획이라고 욕만 먹는다. 나흘 후 다시 만났을 때는 자신의 생각이 짧았음을 인정하고 히틀러에게 영국이 노르웨이를 침공할 것이니 그때까지 조용히 있으면 그 후에 위상이 높아질 것이란 조언을 받는다. 이후 정말로 영국이 노르웨이를 침공하자 순식간에 유명세를 얻어 노르웨이의 총리로 선출되었으며, 독소전 참전을 망설이는 호콘 7세에게 강력하게 참전을 주장하여 노르웨이의 참전을 이끌어낸다.
  • 호콘 7세
    영국이 독일과의 교역을 중단하라 협박하자 불쾌하게 생각하여 이를 거절하였다. 때문에 영국이 노르웨이를 침공하자 줄기차게 독일과의 동맹을 주장하던 크비슬링의 말이 결과적으로 맞았음을 인정하고 그가 아니라 자신이 광대였다며 한탄한다.

4.7. 유고슬라비아 → 세르비아

  • 파블레 카라조르제비치
    원 역사처럼 페타르 2세에게 축출당했으나 유고슬라비아 침공으로 유고슬라비아가 해체된 후 세르비아의 국왕인 파블레 1세로 즉위한다. 그러나 세르비아에서 신 흑수단이 결성되어 유고슬라비아 시절로의 회귀를 외치며 활개치고 다니자 이들을 탄압하고 반독을 외치는 국민들을 달래느라 진땀을 빼지만 그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갈수록 상황이 안 좋아지다 결국 폭동이 터지자 황급히 루마니아로 도피하고, 독일을 비롯한 주변국들의 도움을 받아 폭동을 진압한다.
  • 페타르 2세
    원 역사처럼 파블레 왕자를 축출한 후 그리스를 끌어들여 알바니아를 침공하는 짓을 벌인다. 이에 독일이 당장 알바니아에서 손 떼라는 최후통첩을 날려오자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이려 했으나, 왜곡된 보도 탓에 다 이긴 전쟁이 독일 때문에 무위로 돌아갔다고 생각한 시위대가 베오그라드의 독일 대사관을 습격하는 사건이 일어나 결국 유고슬라비아 침공이 시작되자 루마니아로 도피한 후 원 역사처럼 미국으로 망명한다.

4.8. 스페인

  • 프란시스코 프랑코
    원 역사처럼 스페인 내전을 거쳐 정권을 잡는다. 이후 영국에 선전포고하고 지브롤터를 공격해 점령하고 그 대가로 영국령 서인도 제도를 할양받게 된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거기까지 갈 방법이 없고 미국이 자기 앞마당에 추축국 식민지가 들어서는 걸 용납할 리 없어서 실제로 차지하지는 못하고 결과적으로 히틀러에게 사기당한 꼴이 된다.

4.9. 포르투갈

4.10. 터키

  •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
    작중에서는 이미 고인. 무솔리니와 스탈린에 대해서는 원 역사와 똑같이 평가했지만, 히틀러에 대해서는 보통의 독재자와 차원이 다른 인간이라며 제2의 비스마르크나 제2의 카이저 중 하나가 될 것이라고 평가했다.
  • 이스메트 이뇌뉘
    독소전쟁이 한창일 무렵 히틀러와 만나 캅카스를 대가로 참전할 것을 권유받지만 아직까지는 독일의 승리에 확신이 없었기에 거절하고 중립으로 남았다. 하지만 전세가 완전히 독일로 기울자 생각을 바꿔 영국에 선전포고하고 키프로스를 점령한다.

4.11. 소련

  • 이오시프 스탈린
    독일이 프랑스를 패배시키자 큰 두려움에 빠지게 되었다. 이후에도 히틀러가 보내는 우호적인 제스처도 불신하며 독일과 관계가 틀어진 일본과 협력하려고 한다. 그리고 히틀러의 의중을 떠보기 위해 그를 모스크바로 초청하여 회담을 열었다. 그러나 소련 측이 숙소에 도청장치를 깔아둘 것을 예측한 히틀러가 흘린 역정보에 낚여 유능한 인재들을[24] 대거 숙청시켜버렸다. 그리고 독일이 소련을 공격할 것이라는 편집증적인 믿음 때문에 결국 선제공격을 명령한다.

    하지만 예상과 달리 독일군의 철통수비로 소련군의 진격이 지지부진한데 이어 역으로 본토가 공습까지 당하자 분노하여 책상을 뒤엎는 모습을 보여준다. 전황이 심상치 않게 돌아가고 있음을 본능적으로 느끼곤 몰로토프에게 영국의 참전 날짜를 알아내라고 닥달한다. 그러나 영국의 상륙작전이 처참히 실패하자 독일과의 평화협상을 시도한다. 그러나 독일이 당초에 넘겨줄 생각이던 발트 3국, 벨라루스, 우크라이나 이상을 요구하자[25] 생각을 바꾼다.[26] 결국 본인의 뻘짓들[27]과 독일군의 미칠듯한 진격이 환장의 콜라보를 이루어내며 독일군이 모스크바 시내에 진입하는 역사적인 장면이 연출되고 본인은 찌질하게 몰락의 스탈린 버전을 찍으면서 모스크바를 탈출하고, 탈출하면서 뒷처리를 주코프에게 맡기면서 끝까지 주코프에게 엿을 먹이고 갔다.

    1차 독소전쟁 패배 후 쿠이비셰프에서 힘을 비축해 모스크바 탈환을 시도하려는 계획을 세웠으나 패전의 책임을 뒤집어씌우기 위해 2차 대숙청으로 세묜 티모셴코 등 그나마 남아있던 유능한 인재들마저 죽여 버리고, 소수민족 탄압을 강화하자 곳곳에서 분노한 소수민족들이 무장 봉기를 벌이는 데다[28] 숙청하려고 한 쿨리크가 쿠데타를 일으키는 등 혼란이 심해지자 독일이 재침공을 벌이고, 쿠이비셰프마저 버리고 우파로 도망가나 우파에 핵이 떨어져 생사불명이 된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살아있었으나 벙커에 갇혀 죽을 날만 기다리다가 우파에 진입한 독일군에게 생포되어 독일로 끌려온다. 처칠처럼 히틀러에게 말로 농락당하며 부들거리다가 히틀러에게서 재판을 받고 그에 걸맞는 처벌을 받을 것이라는 말을 듣고 절망에 빠진다.

    전후 독일이 모스크바에서 연 전범재판에 회부되어 자신의 혐의를 모두 부정하지만 쿨리크가 증인으로 출석하자 경악과 동시에 분노한다. 그리고 사형 선고를 받고 난 후, 히틀러와 마지막으로 독대하여 자신이 독일 스파이를 숙청했던 것이 사실은 히틀러의 낚시였다는 사실을 깨닫고 절규한다. 이후 교수형으로 처형당한다. 유언은 남기지 않았다.
  • 뱌체슬라프 몰로토프
    스탈린의 충실한 수족 역할을 하지만 독소전쟁이 터진 후 스탈린에게 매일같이 갈굼받고 영국과 미국에게 연료를 구걸하는 처지로 전락해버린다. 이후 독일에게 평화협상을 시도하지만 결렬되는데, 막상 협상이 결렬되었음에도 히틀러에게 환대를 받고 고급 시계까지 선물받는다. 사실 이것은 히틀러가 스탈린의 의심병을 키워 스탈린이 직접 몰로토프를 숙청하게 만들기 위한 수작이었고, 이후 아내 폴리나가 유대인 박해가 심해져 마음이 편치 않다고 한 것과 카가노비치와 술을 마시며 독일과 강화를 맺어야 한다고 한 것이 NKVD의 귀에 들어가며 숙청되어버린다.
  • 라브렌티 베리야
    소련을 방문한 히틀러와 독일 사절단을 감청하여 스파이로 판정된 사람들을 체포하고 스탈린에게 보고하나 밝혀진 게 이 정도면 더 있을 거라고 생각한 스탈린에게 무능하다는 낙인이 씌여졌고 질책받게 된다. 종국에는 제대로 빡친 히틀러의 역공으로 자신이 지금까지 숙청했던 이들과 마찬가지로 스탈린에게 내쳐지면서 비참하게 생을 마감한다.
  • 게오르기 주코프
    히틀러의 역정보 희생양에 포함되었으나 본인이 아니라 친척에게 독일 스파이가 접촉했다는 내용이었던 점, 그리고 유능함이 증명된 인재라는 점들 덕분에 친족들만 잡혀가고 본인은 감시만 받는 선에서 끝나게 되었다. 하지만 언제라도 친족들과 자신이 숙청당할 수 있는 상황이기에 예스맨이 되어 버렸다. 그럼에도 자신이 할 수 있는 권한 내에서 최대한 노력하며 전쟁의 방향을 바꿔보려 노력하지만 스탈린의 트롤링과 소련군 자체의 한계로 인해 대부분 실패로 돌아가고, 결국에는 모스크바에 남겨져 모스크바를 지키다 전사한다.
  • 세묜 티모셴코
    독소전쟁 중 자신이 할 수 있는 권한 내에서 최대한 노력하며 전쟁의 방향을 바꿔보려 노력하지만 스탈린의 트롤링과 소련군 자체의 한계로 인해 대부분 실패로 돌아가고, 전후 패전의 책임을 뒤집어쓰고 숙청당한다.
  • 그리고리 쿨리크
    소련군의 발전을 방해하는 똥별. 독소전이 1941년에 발발하지 않아 본인이 밀던 A-43가 완성되자[29] T-34는 이제 필요가 없다며 생산중지를 스탈린에게 건의한다. 이외에도 기관단총, 53-K, ZiS-3도 불필요하니 모조리 생산중지하자고 건의해 승낙을 받아내는 등 소련군 역량을 스스로 깎아먹는 짓을 하고 있다. 이후 소련의 패전으로 전쟁이 끝나자 패전의 책임을 돌릴 희생양을 찾으려는 스탈린에 의해 숙청 대상으로 지목되어 모스크바로 소환 명령을 받으나, 선수를 쳐서 체포조들을 전부 사살하고 쿠데타를 일으킨다. 하지만 결국 보로실로프와 부됸니가 이끄는 진압군에게 밀려 소련의 각종 기밀정보들을 팔아먹는 조건으로 중국으로 망명한다. 하지만 망명 후 이전의 호화로운 생활을 누리지 못하는 것을 한탄하다 독일 측의 꼬드김에 전범재판에 증인으로 출석해 스탈린의 만행에 대해 증언한다.
  • 라자르 카가노비치
    소련 철도인민위원회 위원장직을 역임해 독일의 공습으로 파괴된 철도의 복구를 맡으나 연료 부족으로 지지부진한데다 어쩌다 복구해도 매번 독일의 공습으로 부서지는 탓에 스탈린에게 매일같이 갈굼받고 유대인 혈통이라는 점까지 겹쳐서 단단히 찍힌다. 그러다가 몰로토프와 술을 마시며 독일과 강화를 맺어야 한다고 한 것이 NKVD의 귀에 들어가며 숙청되어버린다.
  • 막심 리트비노프
    몰로토프가 숙청된 후 외무장관으로 복직해 대미 외교통 역할을 한다. 2차 독소전쟁이 터지자 미국에 파견되어 지원을 구걸하지만 자기 측근들의 반대로 손을 쓸 수 없었던 월리스에게 거절당한다. 이후 우파에 핵이 떨어졌을 때 미국에 있었던 덕분에 살아남았고 귀국한 후 허망하게 독일과 평화협정을 맺는다.
  • 안드레이 예료멘코
    독소전 중 모스크바에 남겨져 최후까지 싸우다 결국 항복하고 포로로 잡힌다. 전후 독일이 모스크바에서 연 전범재판에 회부되어 자신의 혐의를 인정하고 반성하는 태도를 보여 간신히 사형은 피하고 25년형을 선고받는다.
  • 클리멘트 보로실로프
    스탈린과의 친분 덕분에 대숙청에서도 살아남았고 쿨리크의 반란 진압을 맡는다. 이후 우파에 핵이 떨어졌을 때 시베리아에 있었던 덕분에 살아남았고 생존자들 중 가장 직책이 높고 나이도 많은 덕에 임시로 지도자 역할을 맡아 독일에게 항복하기로 결정한다. 평화협정이 체결된 후 정식으로 서기장이 되어 이르쿠츠크로 천도하고 껍데기만 남은 소련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한다. 그리고 중국이 몽골을 침공하자 소련군을 보내 중국군을 격퇴한다.
  • 세묜 부됸니
    스탈린과의 친분 덕분에 대숙청에서도 살아남았고 쿨리크의 반란 진압을 맡는다. 이후 우파에 핵이 떨어졌을 때 시베리아에 있었던 덕분에 살아남았다. 그리고 중국이 몽골을 침공하자 소련군을 지휘해 중국군을 격퇴한다.
  • 니키타 흐루쇼프
    원 역사에선 스탈린의 뒤를 이어 서기장이 되지만 여기서는 스탈린에게 벌벌 떨며 갈굼당하는 신세다. 쿨리크가 반란을 일으킨 후 진압이 늦어지자 스탈린의 명을 받고 시베리아로 날아가 보로실로프와 부됸니에게 경고를 전달하는데, 이후 우파에 핵이 떨어졌을 때 시베리아에 있었던 덕분에 살아남았다.
  • 안드레이 비신스키
    소련 검찰총장. 원 역사에서는 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의 수석 검사였으나 여기서는 반대로 2차 독소전쟁에서 패배하고 시베리아로 도망치려다 부하의 배신으로 독일군에 붙잡혀 자신이 피고 신세가 된다. 그리고 사형 선고를 받고 교수형으로 처형당한다. 유언은 "언젠가 네놈들도 나처럼 목이 매달리고 말 거다! 파쇼 돼지들아!".
  • 겐나디 주가노프
    현대 시점의 소련 서기장. 독일과 자유 러시아 간의 회담을 비난한다.

4.12. 자유 러시아

  • 안드레이 블라소프
    독소전 중 가망이 없음을 깨닫고 독일에 항복한 뒤, 원 역사대로 자유 러시아군을 이끌고 소련과 맞서 싸운다. 전후 자유 러시아 공화국의 초대 대통령으로 취임한다.
  • 콘스탄틴 로자예프스키
    만주국에서 생활하던 중 독일과의 관계가 악화된 일본에 의해 러시아 파시스트당이 해산되자 지지자들과 함께 지구를 한 바퀴 도는 고생을 한 끝에 독일에 도착한다. 히틀러와 만나 러시아 파시스트당을 지원해주면 독소전쟁이 터졌을 때 러시아인들을 선동해 반란을 일으키고 파시스트 국가를 세우겠다는 계획을 설명하는데, 히틀러는 그의 계획이 현실성 낮다는 것은 알지만 독일에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해 이를 받아들인다. 전후 자유 러시아 공화국의 초대 총리로 취임한다.
  • 세르게이 타보리츠키
    러시아인이지만 독일 시민권자에 나치당원인지라 예전부터 독일에 거주하고 있었으며 로자예프스키의 러시아 파시스트당이 독일에 정착하자 러시아 파시스트당에도 들어갔다. 독일 시민권자 겸 나치당원이라는 점이 반영되어 전후 자유 러시아와 제3제국 간의 소통을 맡는다.
  • 드미트리 웃킨
    현대 시점의 자유 러시아 대통령. 소련과 국경에서 충돌하는 문제로 독일과 회담을 갖는다.

4.13. 미국

  • 프랭클린 D. 루스벨트
    원 역사처럼 반독 성향을 갖고 있다. 그러나 히틀러가 진주만 공습을 경고하였음에도 무시하였다가 큰코다치고 만다. 하지만 그럼에도 반독 성향을 버리지 못하고 전쟁 중인 일본보다도 독일을 상대로 더 신경을 쏟으며 히틀러가 보내는 러브콜도 무시하고 뒤에서 영국, 소련을 지원한다. 하지만 독일의 뒷공작으로 원 역사의 영미 내의 소련 스파이들이 일찍 적발되면서 기존의 친소 행보로 말미암아 위기에 몰리게 되고 결국 소련 연료 지원안을 철회하며 소련이 독소전에서 궁지에 몰리게 되는 원인을 제공한다.

    그러나 반독 성향은 여전해서 중국에 지원하는 물자를 빼돌리는 식으로 계속해서 소련을 지원하고, 독일군이 영국에 상륙하자 의회에서 여론을 형성하고 설득한 끝에 거센 반대에도 불구하고 기어코 대독 선전포고 결의안을 통과시키지만, 터스키기 매독 생체실험 사건진주만 공습 경고를 묵살했다는 사실이 밝혀지며 역풍을 맞게 되고, 전국적으로 시위와 폭동이 일어나고 오언스의 사망으로 흑인 파시스트 반군(BFR)이 결성되어 BFR과 KKK가 총격전을 벌이며 서로를 학살하는 등 준 내전 상태에 빠지자 버티지 못하고 계엄령을 선포하지만, 소련 스파이 사건 후에도 소련을 지원했다는 폭로까지 이어져[30] 민심을 완전히 잃고 하야와 탄핵 여론이 들끓자 결국 지병인 고혈압이 악화되어 3선을 채 마치지 못하고 원 역사보다 빠르게 사망한다.
  • 헨리 A. 월리스
    루스벨트의 사후 대통령직을 승계받아 터스키기 사건과 오언스의 사망으로 분노한 흑인들을 달래고, BFR과 KKK를 강경 진압해 어떻게든 혼란을 수습해나가지만 루스벨트 이상의 반독, 친소 성향을 가지고 있어 독일의 평화협정 제안을 거부하고 계속해서 영국에 대한 지원을 이어가지만, 점차 전황이 안 좋아지자 그제서야 영국, 독일과 평화협상을 시도하지만 결렬되고, 결국 영국이 패전하고 나서야 독일과 평화협정을 맺는다. 이후 2차 독소전쟁이 터지자 소련을 지원할 생각을 하지만 모든 측근들이 결사반대하여 시도도 하지 못하고 소련이 망하는 꼴을 지켜봐야 했다. 그 뒤 다가올 냉전에 대비해 독일처럼 핵무기 개발을 밀어붙이는 한편, 일본을 무너트리기 위해 고민하다 결국 그렇게 싫어하던 독일에 도움을 요청한다. 전쟁이 끝나고 1944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지만 낙선하여 백악관을 떠난다.
  • 제시 오언스
    베를린 올림픽에서 메달을 땄고, 히틀러에게 원 역사보다 더 환대받는다. 이후 미국으로 귀국하여 자신과 흑인들을 무시하는 백악관을 비판하였다. 이후 터스키기 매독 생체실험 사건 폭로로 인해 시작된 미국 흑인 민권 운동을 이끌었으나 시위 진압대가 쏜 총에 심장을 맞아 사망한다. 그의 죽음은 이미 끓어올랐던 흑인들의 분노를 완전히 폭발시켜 준 2차 미국 내전을 일으키는 계기가 된다.
  • 코델 헐
    전쟁 중인 일본보다 독일에 더 신경을 쏟는 루스벨트를 말린다. 독일과의 전쟁이 터진 후 영국이 독일에게 패배하자 아이슬란드, 그린란드, 얀마옌 섬을 구매하는 형식으로 차지하는 조건으로 독일과 평화협정을 맺는다. 그 뒤 일본과의 전쟁을 마무리짓기 위해 독일군을 돈으로 사서 대일전에 끌어들이자는 아이디어를 낸다.
  • 윌리엄 리히
    전쟁 중인 일본보다 독일에 더 신경을 쏟는 루스벨트를 말리며 독일이 선전포고하지 않는 이상 대독전은 절대 불가능하다고 못박는다. 그러나 기어코 독일과의 전쟁이 터진 후 미국이 준 내전 상태에 빠지자 독일과의 전쟁이 가망이 없으니 과감히 접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 조지 C. 마셜
    철저히 공사를 구분하는 강직한 성격으로 독일이 위협적인 상대임은 인정하면서도 일본과의 전쟁이 우선이기에 전쟁 중인 일본보다 독일에 더 신경을 쏟는 루스벨트를 말린다. 독일과의 전쟁이 터진 후 군인으로서 명령에 따라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연이은 폭로로 루스벨트가 몰락하고 유럽 전선에 파병된 원정군도 독일군에게 속절없이 밀리자 그조차도 내심 희망이 없다는 것을 자각한다. 유럽 전선 종결 후 패튼과 아놀드의 말을 듣고 독일의 무기에 대항할 신무기 개발을 주도한다. 이후 독일이 핵무기를 개발하자 월리스의 지시로 핵무기 개발의 뼈대를 잡는다. 전후 정권이 공화당으로 교체된 후 원 역사처럼 국무장관으로 추대되었고, 장제스에게 몽골 침공 계획을 포기하고 부정부패를 해결하지 않으면 원조를 끊을 것이라고 경고한다.
  • 어니스트 킹
    태평양 전쟁 개전 후 미 해군을 지휘하며 일본군과 싸운다. 하지만 전쟁 중인 일본보다 독일에 더 신경을 쏟는 루스벨트에게 불평한다.
  • 헨리 아놀드
    전쟁 중인 일본보다 독일에 더 신경을 쏟는 루스벨트를 말린다. 유럽 전선 종결 후 독일의 전투기보다 강한 전투기를 개발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후 원 역사처럼 부정맥이 일어났는데도 독일보다 뛰어난 전투기를 만들어야 한다며 은퇴를 거부하고 전투기 개발에만 집중한 결과 원 역사보다 3년 빨리 사망했지만 그 대가로 신형 전투기들이 원 역사보다 더 빨리 개발되었다.[31]
  •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유럽 전선 최고사령관으로 임명되어 아이슬란드에서 원정군을 지휘하지만 결국 패배한다. 매우 불리한 상황에서도 본인은 최선을 다했지만 결과적으로 패배한 것은 사실이기에 패장으로 낙인찍혀 원 역사와 달리 대통령은커녕 정계 진출도 하지 못한다. 그 대신 대통령이 된 맥아더에 의해 국방장관으로 임명된다.
  • 조지 S. 패튼
    대독전에 참전하여 선제공격을 계획하나 몽고메리의 제지를 받는다. 독일군은 보통 상대가 아니라는 몽고메리의 만류에도 공격이 최선이 방어라며 공세를 가하지만 처참하게 실패한다. 그제서야 독일군이 강군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방어전으로 돌입하나 결국 패배하여 아이슬란드로 도망친다. 유럽 전선 종결 후 미국에 돌아와 패배의 원인을 분석하고 독일의 전차들보다 강한 전차를 개발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그 결과 기동성은 내다버리고 중장갑, 고화력에 집중한 초중전차에 가까운 괴상한 물건들이 탄생한다.[32] 본인은 유럽 전선에 이어 태평양 전선으로 파견되어 싸운 덕분에 패장 신세는 면했지만 매일같이 설욕을 꿈꾸다가 포클랜드 전쟁이 터지며 설욕의 기회가 주어지자 연합군 총사령관으로 임명되어 아르헨티나군을 털어버린다.
  • 더글러스 맥아더
    탁월한 이미지 관리 능력에 더해 유럽 전선의 패배와 대비되는 태평양 전선의 승리로 미국에 승리를 가져다준 전쟁 영웅이 되어 대중의 지지와 인기를 독식하다시피 한다. 연합군 점령하 일본 최고사령관이 된 후 기회를 살려 정계에 진출해 대통령이 될 생각을 한다. 이 때문에 처음엔 원 역사처럼 히로히토를 살려서 꼭두각시로 쓸 생각을 했지만 정부와 국민들의 여론을 의식해 히로히토의 사형을 묵인한다.

    듀이 정권이 끝나갈 때쯤 공화당에 영입되어 원 역사의 아이젠하워를 대신해 1952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 출마해 당선된 후, 마틴 루터 킹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연설을 통해 본격적으로 독일에 대한 적대 기조를 드러낸 후 성조기 아래에서 하나된 미국을 주장하면서 매카시를 시작으로 인종차별주의자, 파시스트, 공산주의자들을 작정하고 때려잡고, 인종차별 성향이 강한 남부에서 일어난 시위들도 강경 진압한다. 시위대가 발포할 경우 이쪽도 발포하라는 명령은 덤이다.

    그리고 대통령이 되기 전부터 친독 성향 때문에 고깝게 여기던 아르헨티나포클랜드 전쟁을 일으키고 몇 차례의 경고도 무시하자 먼저 브라질을 움직여 아르헨티나를 공격하고 경제제재를 가하는 사이 군대를 소집해 본격적으로 아르헨티나를 털어버리고 철저한 미국의 사냥개로 만들어버린다. 한편으로는 적대 기조를 드러냈던 독일에게 중립을 요청하고, 히틀러에게서 미독 공동 우주 탐사와 핵무기 감축을 제안받자 히틀러의 의도가 무엇인지 고심하다가 결국 무시해버리지만, 독일이 인공위성 발사에 성공하자 충격을 받으면서도 포기하지 않고 DARPANASA를 신설해 본격적으로 우주 경쟁에 뛰어든다. 그 뒤 소아마비 백신 개발에 성공하지만 뜻밖에도 독일이 지분을 주장하지 않자 정말로 히틀러가 공존을 원하는 것인지 고심한다.

    1956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도 무난하게 승리한 뒤, 이번엔 인도네시아에서 북보르네오와 뉴기니의 영유권을 주장하며 전쟁을 일으키려고 하자 살벌한 경고를 보내 전쟁을 막는다. 그러나 쿠바 혁명 탓에 지지율이 흔들리자 오히려 정면돌파로 솔직하게 사과하면서 바티스타 정권의 무능함을 부각시켜 되려 지지율을 올리고, 쿠바에 경제제재를 가한다.

    그리고 독일과 서로간에 정찰기를 보내고 있던 중 유럽 상공에서 U-2가 격추당하는 사건이 일어나자 당황했지만 뜻밖에도 독일에게서 정상회담을 제안받자 응한다. 그리고 닷새 간의 회담을 통해 서로 정찰기를 보내는 것을 그만두고, 게리 파워즈를 미국으로 송환하고, 제3차 세계 대전을 막기 위해 미독간 핫라인을 설치하고 군비 제한을 논의하였다.

    독일 문제를 해결한 뒤에는 쿠바 침공을 결정, 순식간에 카스트로 정권을 전복시키고 신정부를 세운다. 1960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도 승리하며 3선을 달성했고, ICBM 개발에 성공했으며, 독일과 두 차례 더 회담을 가져 전략무기제한협정과 미독 우주 개발 상호협력을 결정한다. 그 뒤 3선을 마치고 4선 출마를 거절하고 백악관을 떠난다.
  • 존 에드거 후버
    FBI 국장. 루스벨트의 친소 정책을 못마땅하게 여기지만 자신에게 해가 되지 않는 선에서 묵인하고 있으며, 히틀러의 폭로 덕분에 백악관 내부의 소련 스파이를 잡아낸다. 그러나 터스키기 매독 생체실험 사건과 루스벨트가 진주만 공습 경고를 묵살했다는 사실이 폭로되자 루스벨트에게 이번 사건을 해결하면 종신 국장 임명과 이런저런 특권을 안겨주겠다는 약속을 받지만, 루스벨트가 이미 침몰하는 배라는 걸 꿰뚫어보고 오히려 루스벨트가 소련 스파이 사건 후에도 소련을 지원했다고 폭로하여 그를 몰락시키는데 일조한다. 듀이 정권 하에서도 FBI 국장으로 남아 소아마비 연구를 위해 미국에 파견된 독일 과학자들을 감시한다. 맥아더가 집권한 후 종신 국장으로 임명되어 맥아더의 충실한 수족 노릇을 한다.
  • 조지프 매카시
    반공, 반나치, 반유색인종 선동으로 매카시즘을 퍼트리며 같은 공화당인 현 정권까지 공격하지만 맥아더 집권 후 역으로 자신에 대한 폭로가 이어지며 순식간에 몰락한다.
  • 로버트 A. 태프트
    공화당 경선에서 맥아더에게 패배한 대신 미국 부통령 후보로 출마해 당선된다. 그리고 1964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 출마해 당선된다. 독일의 달 착륙에 자극받아 5년 안에 미국도 달에 인간을 보내겠다고 발표했고, 원 역사보다는 2년 늦었지만 끝내 유인 우주선 개발에 성공해 정말로 5년 안에 닐 암스트롱을 달로 보내며 약속을 지켰다. 히틀러가 사망하자 베를린까지 직접 날아가 장례식에 참석했다.
  • 존 포스터 덜레스
    맥아더 취임 후 원 역사처럼 국무장관으로 임명되어 포클랜드 전쟁이 터지자 영국, 아르헨티나와의 3자 회담을 열고, 독일에 비밀리에 파견되어 히틀러와 회담을 가진다.
  • 알렉산드르 케렌스키
    원 역사처럼 미국으로 망명했으나 맥아더 집권 후 소련을 무너트리고 러시아 공화국을 재건할 꿈을 꾼다. 하지만 맥아더도 이게 허무맹랑한 소리라는 걸 알고 있었기에 받아들여지지 않은데다, 자유 러시아 쪽에서 접촉해오자 나치도 싫은 건 마찬가지였기에 단호히 거부했지만, 이를 트집 잡혀 보호를 명분 삼아 사실상 감금당하고, 미국 내 백계 러시아인들의 입지도 좁아지게 된다.
  • 닐 암스트롱
    원 역사보다는 2년 늦었지만 미국인 최초, 인류 세 번째로 달 착륙에 성공했다.
  • 조 바이든
    현대 시점의 미국 대통령. 멕시코 내전에 개입할 것이냐는 질문과 남미 각국에서 히틀러주의를 표방하는 정당들이 선거에서 연달아 승리하는 것에 대해서 어떻게 할 것이냐는 질문에 말을 아낀다.

4.14. 중국

  • 쑨원
    중국을 고평가하는 내용이 담긴 나의 투쟁을 중국인들에게 한 줄기 희망의 빛이라 언급하여 나의 투쟁 유행의 절정을 만들었다고 한다.
  • 장제스
    원 역사와 달리 중일전쟁 후에도 독일로부터 지원을 받으며 히틀러와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 중이다. 그리고 히틀러의 귀뜸을 받아 시안 사건을 피하고 장쉐량을 숙청하였으며 덕분에 제6차 초공작전을 예정대로 실시해 중국공산당 역시 박멸하였다. 소련이 국경을 닫는 바람에 독일과의 교류가 끊긴 후로도 미국에게 지원을 받아 일본에 대한 항전을 이어나갔고, 영국이 독일에 선전포고하자 우방국들끼리 전쟁을 하는 꼴이 되어 양국에 중재를 제안하지만 거절당한다. 그 뒤 영국이 패전하고 미국과 독일의 평화협정이 체결된 후 소련이 2차 독소전쟁에서 패전하여 중앙아시아 5국이 독립하면서 마침내 독일과의 육로가 다시 연결되어 교류가 재개되자 히틀러에게 검을 선물로 주고, 미국의 대일전 참전 요청을 전달한다.

    일본이 항복하며 영토가 해방된 후 피해 복구에 힘쓰면서 군벌들의 권한을 축소하고 중앙집권제를 강화하는 한편, 사실상 독립국이 된 티베트에도 지배욕을 보이고 있었으나 독일이 티베트를 정식 국가로 인정하고 수교하면서 다른 국가들도 줄줄이 티베트를 정식 국가로 인정하는 바람에 티베트 합병은 시도도 하지 못하고 포기해야 했다. 그렇다고 초강대국이자 우호국인 독일과 척을 질 수는 없었기에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끙끙 앓았지만, 영토 확장 야욕은 버리지 못해서 대신 몽골을 침공해 합병할 생각을 한다.

    문제는 독일이 아니었다면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을 티베트와 달리 몽골은 소련의 괴뢰국이라 미국은 몰라도 소련은 반드시 개입할 것이고, 아무리 소련의 사정이 좋지 않다고 해도 중국도 그다지 사정이 좋은 편이 아니라는 것. 여전히 전쟁 피해를 완전히 복구하지 못했고, 아직도 군벌들이 각지에서 날뛰고 있는데다, 중국국민당의 고질적 문제인 부정부패가 매우 심각해 미국의 지원으로 먹고 사는 처지인데도 얼마 안 되는 원조물자까지 횡령하는 탓에 굶어죽는 사람이 속출하는 상황이다. 히틀러와 팔켄하우젠도 이런 이유로 우려를 표했지만 장제스는 듣지 않고 있다.

    미국도 장제스의 계획을 눈치채고 마셜이 장제스에게 몽골 침공 계획을 포기하고 부정부패를 해결하지 않으면 원조를 끊을 것이라고 경고했으나, 장제스는 이마저도 듣지 않고 기어코 몽골을 침공했으나 히틀러와 팔켄하우젠의 우려대로 중국군은 소련군에 의해 격퇴당하고 되려 내몽골까지 밀려나지만 독일의 압박으로 소련군이 진군을 멈추며 간신히 내몽골은 지킬 수 있었다. 전쟁이 끝난 후 독일에 감사의 표시로 판다와 노획한 소련제 무기를 보내주지만, 전쟁을 일으킨 것에 열받은 미국이 원조를 축소한데다 늦게나마 부정부패를 척결하려 하자 사실상의 패전도 모자라 밥줄까지 끊기게 생긴 군벌들이 일제히 반란을 일으킨다.

    하지만 이것은 장제스의 계획이었고, 장제스는 몽골 침공 당시 미적거리는 태도를 보일 때부터 진작에 군벌들을 의심하고 다이리를 시켜 각 군벌의 중심부에 남의사 요원들을 심어둔 뒤였다. 그리고 반란이 일어나자마자 군벌들을 암살하여 반란을 진압, 부정부패 척결과 군벌들의 처리, 권력 강화까지 이뤄내고 본격적으로 개혁을 밀어붙인다. 이를 통해 중국이 강대국으로 부상할 수 있게 되었다.
  • 다이리
    남의사의 수장. 중일전쟁 중 독일에 파견되어 히틀러에게 지원 약속을 받아내었다. 그리고 각 군벌의 중심부에 남의사 요원들을 심어둔 뒤, 반란이 일어나자마자 이들을 시켜 군벌들을 암살한다.

4.15. 일본

  • 도고 시게노리
    주독 일본대사. 아내가 유대계 독일인이었기에 원 역사에서는 나치 독일에 부정적이었으나 본작에서는 히틀러가 반유대주의를 배척했기에 그를 긍정적으로 생각한다. 외무대신이 된 후 독일에 평화협정 중재 요청을 전달하지만 오히려 독일이 일본에 선전포고하자 다가올 결과를 깨닫고 절망한다. 전후 독일 정부에 체포되어 미국에 점령당한 본국으로 송환된 후 전범재판에 회부되어 금고 20년을 선고받는다.
  • 우다 신타로
    야기-우다 안테나의 개발자. 지도교수인 야기 히데츠구에게 모든 공을 빼앗기고 부려먹히는 처지였으나 그를 눈여겨본 히틀러에 의해 고용되어 독일 레이더 기술에 큰 기여를 하게 된다.
  • 야마모토 이소로쿠
    2차대전의 전개가 달라지며 원 역사와 달리 항공모함의 진가가 크게 드러나지 않는 바람에 상부의 지시로 진주만 공습을 전함까지 투입해 3차까지 진행하였다. 그러나 후소가 해안포에 격침당하며 3차 공습은 실패로 끝났다.

    전후 전범재판에 회부되어 자신의 죄를 인정하면서 전쟁을 일으키지 않으면 육군이 폭주하여 내전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주장하여 같이 회부되어 기소된 장군들이 광분한다. 결국 전쟁 이전부터 계속 대미개전을 반대해온 점과 반성하는 태도를 인정받아 금고 25년을 선고받는다.[33]
  • 히로히토
    2차대전에서 전세가 기울자 항복을 결정한다. 전후 미국에 의해 폐위된 후 전범재판에 회부되어 동생인 야스히토의 탄원에도 불구하고 사형 선고를 받고 교수형으로 처형당한다.[34]
  • 야스히토
    전후 미국에 의해 히로히토를 대신해 천황이 된다. 맥아더에게 히로히토의 사형만큼은 면하게 해달라 부탁해보나 정부가 결정할 일이라고 거절당한다.

4.16. 한국

  • 손기정
    베를린 올림픽에서 메달을 딴 뒤 히틀러의 초대를 받고 놀라며 그의 융숭한 대접에 감동한다. 이후 히틀러의 방한 때 올림픽 시절의 일을 기억한 김구의 초대로 히틀러와 다시 만나며 감격해한다.
  • 남승룡
    베를린 올림픽에서 메달을 딴 뒤 히틀러의 초대를 받고 놀라며 그의 융숭한 대접에 감동한다. 이후 히틀러의 방한 때 올림픽 시절의 일을 기억한 김구의 초대로 히틀러와 다시 만나며 감격해한다.
  • 이미륵
    원 역사처럼 독일에서 거주하고 있는 모습으로 등장. 일본이 독일 대사를 추방하면서 벌어진 독일 내의 동양인 대상 인종차별로 인해 곤혹을 치렀으나 히틀러의 단호한 대처로 위기에서 벗어난 뒤, 인종차별 범죄를 저질렀다가 히틀러의 지시로 발가벗겨져 공개 망신을 당한 어린이들의 기사를 보며 히틀러는 독재자가 맞지만 여타의 독재자들과는 확연히 다르다며 그가 플라톤이 말한 철인이 맞는지를 고찰한다.
  • 김구
    원 역사처럼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이끌다가 해방된 후 대한민국 초대 부통령으로 취임한다. 히틀러의 군국주의적 정책과는 거리를 두고 있지만 히틀러의 방한은 긍정적으로 여긴다. 이승만의 뒤를 이어 2대 대통령으로 취임한다.
  • 프란체스카 도너
    영부인. 히틀러가 이승만과 이야기할 때 히틀러의 통역을 맡는다. 히틀러와 같은 오스트리아 출신이라 히틀러가 한국에 우호적인 이유가 영부인이 동향 사람이라 그런 게 아니냐는 우스갯소리가 돈다고 한다.
  • 이범석
    초대 국무총리 겸 국방부장관. 독일에 방문한 경험 덕분에 나치즘에 우호적인 인식을 가지고 있어 히틀러의 방한을 반긴다. 김구의 뒤를 이어 3대 대통령으로 취임하였으며, 베를린을 참고해 서울을 재개발하였다.
  • 강세형
    초대 국방부 정훈국장. 베를린 훔볼트 대학교에 다니며 철학 박사 학위를 취득한 경험 덕분에 한국에서 몇 안 되는 독일통으로 활약하며 히틀러의 통역을 맡는다.

4.17. 베트남

  • 호찌민
    미국 OSS와 협력해 독립운동을 하였고 베트남 초대 주석으로 취임한다. 공산주의자임에도 미국과 죽이 잘 맞으며, 동시에 미국의 지원이 필요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어 미국이 가벼운 우려만 보냈음에도 즉시 자국 내 우익 인사들의 탄압을 중단하고, 쿠바의 지지 호소도 무시하는 것을 넘어 미국에 이 사실을 알린다.

4.18. 인도네시아

  • 수카르노
    미국에 의해 해방된 후 인도네시아 초대 대통령으로 취임한다. 그 뒤 북보르네오와 뉴기니의 영유권을 주장하며 전쟁을 일으키려고 했으나 맥아더가 살벌한 경고를 보내자 페론과 달리 이를 받아들여 물러난 덕분에 자리를 지킨다.

4.19. 인도

  • 찬드라 보스
    인도의 독립을 위해 독일과 손을 잡았다가 핼리팩스 경이 집권한 후 영독강화가 이루어지며 한동안 활동을 중단했으나, 처칠 집권 후 독일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는다. 그리고 '독일이 부른다(Germany Calling)'라는 선전방송에 출연해 영국을 비난한다. 이후 독일에게 패배한 뒤에도 인도를 손에서 놓지 않으려 하는 영국에게 독일의 지원을 등에 업고 맞서 싸운 끝에 마침내 독립을 이룩하지만, 막상 인도가 내부 갈등으로 분열되어가자 어떻게든 분열을 막으려고 노력한다. 간디의 암살 후 분열을 막기 위해 독일군을 끌어들이자고 제안하지만 네루의 반대로 실현되지 못한다. 그리고 진나의 암살 후 내전이 터지자 수습을 위해 노력하고 내전이 종결된 후 인도의 대통령으로 취임한다.
  • 모한다스 카람찬드 간디
    인도 독립운동을 하다가 영국에 의해 감옥에 갇힌다. 영국이 인도를 포기하고 물러나면서 석방되지만, 막상 인도가 내부 갈등으로 분열되어가자 어떻게든 분열을 막으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결국 원 역사처럼 나투람 고드세에게 암살당하고 만다.
  • 자와할랄 네루
    인도 독립운동을 하다가 영국에 의해 감옥에 갇힌다. 영국이 인도를 포기하고 물러나면서 석방되지만, 막상 인도가 내부 갈등으로 분열되어가자 어떻게든 분열을 막으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간디의 암살 후 생각을 바꿔 독일의 개입을 거부하고 파키스탄의 분리독립을 허용하려고 한다. 그러나 진나의 암살 후 내전이 터지자 수습을 위해 노력하고 내전이 종결된 후 인도의 총리로 취임한다.
  • 무함마드 알리 진나
    파키스탄의 분리독립을 위해 활동하던 중 나투람 고드세가 속한 라시트리야에게 암살당하고 만다.

4.20. 에티오피아

  • 하일레 셀라시에
    리벤트로프를 직접 맞이해 히틀러의 의중을 설명받고 독일과 비밀리에 군사동맹을 체결한다. 이탈리아에게 패배한 후 영국으로 망명하였으나, 이탈리아의 항복으로 에티오피아가 해방된 후 히틀러에게 고마움을 표하며 독소전쟁이 발발하자 아프리카 국가 중 유일하게 독일 편을 들며 참전을 선언, 독일을 돕기 위해 유럽으로 병력을 파견한다. 이후 영국에서 망명 생활 중 푸대접을 받은 것 때문에 독일에게 영국에 선전포고하고 영국령 소말릴란드를 공격하겠다고 제안하지만 히틀러가 이를 사양하고 대신 프랑스령 소말릴란드의 방어를 부탁하자 바브엘만데브 해협에서 영국군을 방해한다.
  • 메코넨 엔델카츄
    에티오피아의 총리. 리벤트로프와의 회담 자리에서 참여해 히틀러의 의중을 설명받는다.

4.21. 아르헨티나

  • 후안 페론
    전후 아내 에바 페론과 함께 독일에 방문해 포클랜드 제도를 탈환하기 위한 도움을 요청하지만, 히틀러가 사실상 거절하며 포기하라고 충고했는데도 야심을 버리지 못해 기어코 포클랜드 전쟁을 일으킨다. 하지만 히틀러가 충고한 대로 연합군을 당해내지 못하고 패전을 목전에 두고 쿠데타가 일어나자 독일로 망명한다.
  • 페드로 아람부루
    패전을 목전에 두고 책임을 면하기 위해 쿠데타를 일으킨다. 정권을 잡은 직후 연합군에 항복하고 권력 유지를 위해 철저한 미국의 사냥개가 된다.

4.22. 쿠바

  • 피델 카스트로
    쿠바 혁명으로 바티스타를 축출하고 집권해 쿠바 내 미국인 소유 재산을 몰수한다. 하지만 이 일로 미국에게 밉보이면서 경제제재를 맞고 사실상 물러나라는 요구를 받자 국제사회에 지지를 호소했지만 소용없었고, 결국 미국의 침공을 받아 아바나가 함락되기 전 수류탄을 터트려 자폭한다.
  • 체 게바라
    쿠바 혁명으로 바티스타를 축출한다. 하지만 미국의 침공을 받고 포위되자 아이티로 망명하려 시도했지만 실패하고 부하의 밀고로 생포될 위기에 처하자 청산가리 앰플을 깨물고 자살한다.

5. 개변된 역사

5.1. 독일

폴란드 침공 때까지는 대체로 원 역사와 같은 길(라인란트 재무장, 안슐루스, 뮌헨 협정, 체코 합병)을 걸어갔다. 다만 원 역사와 달리 빙의자 히틀러의 의중에 따라 인종차별을 공식적으로 배격하고 인종보다 독일인이라는 정체성을 우선시한다. 때문에 이 세계에서는 유대인이 나치 독일에 호의적인 아이러니를 보이고 있다. 독일 공군에 유대인 표식인 육망성을 그린 Bf 109가 날아다니고 폴란드에는 폴란드 저항군을 사냥하는 유대인 부대 존더코만도가 편성되어 엄청난 지원자가 모였으며 독일과 영국이 협상하자 영국 유대인 협회가 찬성 선언을 했다. 흑인, 일본 외 동양인들 역시 히틀러와 독일에 호의적이다. 또한 히틀러유겐트BDM은 정치교육은 일절 없고 가입도 자유인 국가 공인 헬스클럽으로 변모했고 덕분에 엄청난 인기를 끌어서 독일의 거의 모든 청소년이 가입했다.

원 역사에서 동맹이었던 이탈리아는 안슐루스를 위해 에티오피아에 군사고문단 파견과 무기 지원으로 이탈리아군의 전설과 국력 소모를 만들었고, 일본 역시 중국에 군사고문단과 무기를 지원하며 거리를 두었다. 또한 히틀러의 미래지식을 활용해 3호 전차 계획을 폐기하고 4호 전차비스마르크급 전함, 그라프 체펠린급 항공모함 등의 전쟁병기를 훨씬 효율적이고 우수하게 설계, 생산하였으며 독일군 미니어처 시리즈와 젠가 등을 개발해 판매하며 고정 수입원을 만들었고, 폴란드를 정복한 뒤 유화책을 실시해 독일의 폴란드 통치를 수월하게 만들었다. 폴란드 전역 이후에는 영국이 먼저 노르웨이를 공격하게 되면서 발트 지역에서 노르웨이, 덴마크, 스웨덴을 동맹으로 끌어들이게 되었다.[35] 그리고 노르웨이 전역에서 도이칠란트급 장갑함 둘을 잃는 대신 영국 해군에 큰 피해를 입히고[36] 승리하였다.

그리고 프랑스 침공에서 프랑스를 원 역사의 6주보다도 빠른 4주 만에 무너뜨리고, 됭케르크 철수작전마저 차단하며 압승을 거둔다. 이후 핼리팩스가 집권한 영국과 강화조약을 맺고 페탱이 집권한 프랑스로부터 알자스-로렌을 할양받고 프랑스 해군 대부분을[37] 뜯어갔으며 에티오피아 지원 때문에 사이가 악화되어 선전포고하였던 이탈리아도 힘으로 털어버리며 안슐루스 이전 오스트리아가 상실했던 영토를 모두 되찾고 이탈리아 해군 일부를[38] 인도받았다. 그리고 이탈리아가 병합한 에티오피아알바니아를 독립시켰다.

이후로는 더 이상의 전쟁을 피하려 했으나 유고슬라비아 왕국그리스 왕국이 해방된 알바니아를 침공하자 독립 보장으로 참전하여 유고슬라비아를 응징한다.[39] 그리고 베오그라드까지 뚫어버리며 유고전에서 가볍게 승전하고 유고를 해체하고 슬로베니아를 할양받는다. 그리고 그리스 역시 알바니아와 불가리아를 지원하여 간접적으로 응징한다.

그러나 그 뒤 일본의 진주만 공습을 미국에게 예고했으나 무시당하고, 영국에서는 처칠이 핼리팩스를 내쫓고 집권하고 독일에게 IRA를 지원했다는 누명을 씌워 반독 여론을 고조시키고, 소련은 일본과 불가침조약을 맺고 국경을 봉쇄하여 독일과 중국 간의 교류를 끊는 것도 모자라 기어코 독일을 선제공격할 계획을 세우는 등, 본래 적대할 생각이 없었던 국가들이 적으로 돌아서는 상황이 된다.

결국 소련의 선제공격을 당하지만, 직전에 탈영병을 통해 공격 시점을 파악하고 동원령 선포 및 대비를 맞춰놓았기에 역공을 가해 소련에 큰 피해를 입히고 종속됐거나 동맹을 맺은 유럽의 수많은 국가들을 독소전에 호출한다. 그리고 신무기와 뛰어난 전술을 바탕으로 소련군을 역으로 밀어내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원 역사의 나치가 저지른 실수를 담습하지 않기 위해 레벤스라움 계획은 폐기하고, 친독 괴뢰국들을 동유럽에 세우기로 방침을 잡는다. 다만 영토 확장을 바라는 부하들과 국민들의 눈치를 봐서 벨라루스 서부, 갈리치아까지는 독일의 영토화하기로 했다.

그리고 이 와중에 영국도 선제공격을 하자 그동안 빽빽하게 건설한 대공망과 루프트바페를 이용해 영국 공군을 사냥하고, V2 미사일로 영국을 폭격하고 식민지 각지에서 반군을 지원하고 주요 해역마다 기뢰를 도배하며 영국을 고립시킨다.

이후 영국이 전세를 뒤집기 위한 도박으로 디에프에 상륙하지만 미리 요새화를 시켜 손쉽게 막아냈으며 되려 지진폭탄 레제와 유도폭탄 프리츠 X전함 4척, 항공모함 2척을 격침시켜 영국 해군을 빈사 상태로 만든다.

그리고 모스크바 공방전에서 승리하고 소련군 최후의 공세까지 막아내며 독소전쟁을 승리로 끝내고 자유 러시아 공화국을 세운다. 그 다음 영국을 쓰러트리기 위해 바다사자 작전을 시행하여 영국에 상륙하고, 미국이 선전포고하자 터스키기 매독 생체실험 사건과 루스벨트가 자신의 진주만 공습 경고를 묵살했다는 사실을 폭로하여 내부 분열을 유도한다. 마침내 영국을 상대로 승리하고 미국과 평화협정을 맺는다.

전쟁이 끝나 동원령을 해제하고 병사들을 제대시키며 경제회복에 들어가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소련에서 내전이 일어나자 당초의 계획을 수정, 유럽에서 소련을 완전히 몰아내기로 결정하고 청색 작전을 개시, 2차 독소전쟁을 일으킨다. 그리고 마침내 우란프로옉트의 성공으로 핵무기를 개발해 소련에 투하하여 항복을 받아내며 2차 독소전쟁까지 승리한다.

그렇게 유럽 전체를 손에 넣는데 성공하는데, 한때 적으로 싸웠던 미국으로부터 대일전 참전 요청을 받자 이를 승낙, 일본에 선전포고하고 극동에 병력을 파병하여 만주에 있는 관동군을 분쇄해버린다. 그리고 일본의 항복마저 받아내며 마침내 제2차 세계 대전의 승전국이 된다. 전후 공을 세운 이들에게 훈장을 수여하는 한편, 모스크바에서 전범재판을 치른다.

미국과의 냉전에 접어들면서 인도의 독립을 지원하는 한편 미래를 대비해 수도를 재개발하고, 정상회담을 통해 전 세계를 독일과 미국의 영역으로 양분하고[40] 소아마비 백신을 공동 연구하기로 했다. 그리고 히틀러가 아시아 순방을 떠나 중앙아시아, 인도, 티베트, 중국, 그리고 한국을 방문하여 협력 관계를 맺었으며, 경제가 안정되면서 집집마다 폭스바겐 비틀이 보급된다.

한편 독일에게 패배한 이탈리아와 그리스의 정국이 불안해지자 예의주시하다 내전이 터지자 그리스 정부의 요청으로 먼저 그리스 내전에 개입한다. 그 와중에 아르헨티나에서 포클랜드 제도의 영유권을 주장하며 독일에 도움을 요청하지만, 거절 의사를 밝힌다. 그 뒤 이탈리아 정부의 요청으로 이탈리아 내전에도 개입하여 두 내전을 빠르게 끝낸다.

이후 스위스까지 중립을 포기하고 추축국에 가입하며 바티칸을 제외한 유럽 전체가 추축국에 가입하자 유럽연합을 창설한다. 그리고 원자폭탄을 넘어서 수소폭탄 개발을 위한 니체 프로옉트와 인공위성 발사를 위한 바그너 프로옉트를 진행한다. 그 뒤 중국-몽골 전쟁에서 중국이 밀리기 시작하자 자유 러시아를 움직여 소련을 압박해 전쟁을 끝낸다. 그리고 1950년 V4 로켓 개발에 성공하고, 1951년 니체 프로옉트에도 성공해 수소폭탄을 보유하게 된다. 그리고 대구 전쟁이 터지자 미영독 3자 회담을 통해 빠르게 끝내고 해가 가기 전에 IRBM인 V5 로켓 개발까지 성공한다. 또한 오록스 복원 연구가 계속된 끝에 오록스와 비슷한 거대한 소 품종 개발에 성공, 이를 이용해 라이히스부르거라는 맥도날드 비슷한 프랜차이즈를 창설한다.

그리고 미국에게는 미독 공동 우주 탐사와 핵무기 감축을 제안하고, 포클랜드 전쟁이 터지자 중립을 지키기로 한다. 그리고 ICBM인 V6 로켓 개발까지 성공하여 인공위성 발사를 준비하고, 마침내 1953년 10월 4일 최초의 인공위성 바그너 1호를 발사하는데 성공한다. 11월 3일에는 저먼 셰퍼드 블론디를 태운 바그너 2호를 발사하고, 1954년 5월에 바그너 3호까지 발사한다.

그 뒤 미국에서 소아마비 백신이 개발되자 이를 축하하며[41] 미국에게 백신을 공급받아 유럽에 배포하는데, 보헤미아-모라바 보호령과 폴란드 보호령, 세르비아에서 독일에 대한 의심 탓에 백신 반대 운동이 일어난다. 다른 둘은 소아마비가 확산되자 얼마 안 가 사그라들었지만, 세르비아에서는 백신 반대 운동도 모자라 반독 시위가 갈수록 심해지다 폭동이 터지자 주변국들과 함께 개입해 폭도들을 진압한다. 그리고 1958년 4월 12일, 체펠린 1호를 발사하며 최초의 우주 비행사 베른하르트 크라머를 배출한다.

그리고 미국과 서로간에 정찰기를 보내고 있던 중 유럽 상공에서 U-2를 격추하고 조종사 게리 파워즈를 생포했는데, 이를 계기로 미국에게 정상회담을 제안하였다. 그리고 닷새 간의 회담을 통해 서로 정찰기를 보내는 것을 그만두고, 게리 파워즈를 미국으로 송환하고, 제3차 세계 대전을 막기 위해 미독간 핫라인을 설치하고 군비 제한을 논의하였다.

이후 미국과 두 차례 더 회담을 가져 전략무기제한협정과 미독 우주 개발 상호협력을 결정한다. 그리고 라이히스부르거를 통해 벌어들인 돈과 미국이 지원해준 돈으로 원자력 발전소 건설과 우주 개발에 투자한다. 그리고 마침내 1966년 7월 21일, 에두아르트 샬모저가 최초로 달에 발을 디딘다. 그리고 32년 만에 히틀러가 은퇴를 선언하자 전국에서 반대 시위가 열렸지만 히틀러가 이를 철회할 생각이 없음을 밝히며 설득한 끝에 시위는 잦아들었으며, 괴링이 2대 총통으로 취임한다. 그 외의 히틀러의 측근들도 대부분 은퇴한다.

1972년 4월 30일 히틀러가 사망한 후 3주간의 국가 애도 기간이 선포되었으며, 각지에서 400여 명이 충격으로 졸도했고, 베를린은 추모객들이 밀려들어 대중교통이 마비되었고, 무려 3천만 명에 달하는 역사상 최고 기록의 조문객들이 다녀갔으며, 150개국에서 조문 사절이 파견되었고, 수많은 나라에서 히틀러의 장례식을 생중계하여 무려 8억 명 이상이 이를 시청했다. 히틀러는 베를린의 전사자 묘지에 묻어달라고 했지만 괴링에 의해 총통기념관이 건설되어 거기 매장되었고, 히틀러가 말년을 보낸 집과 생가는 기념관으로 지정되었다. 히틀러가 주창한 국가사회주의는 히틀러주의라는 이름으로도 알려져 타국에 상당한 영향을 끼쳤고, 1982년에는 화성에 최초로 지크문트 얀을 태운 유인 우주선을 보내는 것에 성공했다.

현대 시점에는 미국과 더불어 GDP 2위, 군사력 1위의 양대 초강대국으로 군림하고 있으며, 세계 각국에서 온 다양한 인종의 사람들이 자유롭게 거리를 노닐며 일상을 영위하는 이상적인 모습이 되었다. 또한 베를린 템펠호프 공항은 아돌프 히틀러 국제공항으로 개명되어 여전히 운영 중이며, 뮌헨 국제공항은 헤르만 괴링 국제공항으로 개명되었다. 라이히스부르거는 맥도날드와 함께 버거업계를 양분하며 여전히 인기를 끌고 있으며, 히틀러가 한식을 즐겼다는 사실이 알려져서 한식도 인기를 끌고 있다. 그리고 화성에 지크문트 얀 유인 우주기지의 건설을 추진 중이다.

5.2. 영국

우리 시대의 평화까지는 원 역사와 같았으나 처칠노르웨이 침공의 실패로 실각하고 이후 집권한 핼리팩스 경에 의해 독일과 강화조약을 맺었다. 하지만 태평양 전쟁 개전 후 처칠이 핼리팩스 경에게 책임을 돌려 실각시키고 총리 자리에 올라 뒤에서 소련과 손을 잡고 독일이 IRA를 지원했다는 누명을 씌워 반독 여론을 고조시킨다.

그러나 일본이 영국령 식민지를 침공해 일본과 전쟁 중이고 말레이 해전에서 죽을 쒀버린 상황에서 일본과 적대하고 암묵적인 공동전선을 형성하고 있는 독일을 굳이 공격할 명분이 없고, 인도 독립 세력과 아일랜드 정부, 심지어 처칠이 누명을 씌운 것에 열받은 IRA까지 정말로 독일에 붙어버린데다, 소련의 선빵으로 독소전쟁이 개전된 후 소련이 독일의 거센 반격에 일방적으로 털리게 되면서 함부로 독일을 칠 수 없는 상황이 된다. 그럼에도 소련을 지원하려 했지만 소련의 스파이였던 케임브리지 5인조가 적발되며 명분을 잃어버린다.

그러나 IRA의 과격파가 폭탄 테러를 일으키려다 실패하자 이를 명분 삼아 기어코 독일을 상대로 전쟁을 일으키고 프랑스, 벨기에, 덴마크에 폭격을 퍼부으나 빽빽하게 건설된 독일의 대공망과 분노에 미쳐서 추격해오는 루프트바페에게 사냥당함은 물론, 국토 전체가 V2 미사일의 사정권인지라 매일 폭격을 맞게 생겼다.[42] 그리고 북아일랜드, 인도, 이집트, 이라크, 팔레스타인 등 각지에서 독일의 지원을 받은 반군이 들고 일어났으며 바브엘만데브 해협, 지브롤터 해협, 수에즈 운하가 기뢰로 도배당하며 전쟁 수행에 엄청난 차질이 생겼다. 그리고 디에프 상륙작전도 실패하고 독일의 공격으로 전함 4척, 항공모함 2척이 격침되며 해군이 빈사 상태가 된다.

이후 독소전쟁이 독일의 승리로 끝나며 독일의 병력 상당수가 서부전선에 배치되는 와중에도 히틀러의 삼자회담 제안도, 중국의 중재 제안도, 내부의 반전 여론도 계속 무시하며 독일과의 전쟁을 이어가지만, 바다사자 작전이 시행되며 독일군이 영국 본토에 상륙하고 런던까지 독일군이 밀고 들어오자 그제서야 미국을 끌어들여 독일과의 평화협상을 시도하지만 결렬된다. 더군다나 독일군의 폭격으로 국왕 부부가 사망하였으나 이 일이 영국군의 소행으로 알려지며 사기가 바닥을 치게 되었고, 결국 독일에게 전 국토가 유린당하며 패배한다.

그 뒤 다수의 식민지들은 독립하거나 추축국에 할양, 북아일랜드아일랜드에 할양, 본토에는 독일의 지령을 받는 영국 파시스트 연합의 괴뢰정부가 설립되어 퇴위했던 에드워드 8세가 왕위에 복위한다. 다만 영향력은 본토에 한정되고 있다. 이 파시스트 영국이 아이슬란드와의 어업 분쟁으로 인해 대구 전쟁이 발생한다. 다행히 미영독 3자 회담을 통해 대구 전쟁을 끝냈지만, 아이슬란드의 소요 사태를 틈타 또다시 인근 해역에서 대구를 잡기 시작해 충돌의 여지가 남아있다.

한편 애틀리를 비롯한 내각이 캐나다로 도망쳐[43] 망명정부를 세웠는데, 영국 망명정부는 여전히 정통정부로 인정받으며 영연방 국가들을 상대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지만, 식민지의 독립 물결은 막을 수 없어 이집트, 이라크, 팔레스타인, 버마, 트란스요르단 등은 이미 독립해버렸고, 인도만이라도 지키려고 애를 썼으나 이미 인도의 독립은 시간 문제나 다름없는 상황에 돈과 인력을 갈아넣다 보니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 등 영연방 국가들에게도 적대감을 사게 되었고, 결국 인도를 포기하고 독립시키는 대신 종교, 민족, 카스트 간의 갈등을 이용해 분열시킨다. 그래도 아프리카 식민지들은 미국의 지원을 받아 여전히 유지하고 있으며, 그 외에도 세계 곳곳에 위성국과 식민지가 남아있어 다른 망명정부에 비하면 사정이 나은 편. 그러나 아르헨티나에서 포클랜드 제도를 노리며 기어코 포클랜드 전쟁을 일으키자 위성국과 식민지에서 군대를 소집해 아르헨티나와 싸우고 승전한다. 이 덕분에 망명정부의 위상은 지켜내면서 남아있는 식민지들은 여전히 유지할 수 있었다.

5.3. 프랑스

프랑스 침공에서 독일의 맹공으로 원 역사의 6주보다도 빠른 4주 만에 무너진다. 이후 필리프 페탱이 집권해 독일에게 알자스-로렌을 할양하고 프랑스 해군 대부분을[44] 넘겨주는 대신 프랑스군 포로 전원 석방, 프랑스 군정청 계획 취소[45]식민지 유지, 재무장 허용을 조건으로 강화조약을 맺었다. 이후 히틀러가 파리를 방문했을 때 미리 엘리베이터를 지키도록 지시해서 원 역사와 달리 에펠 탑 꼭대기까지 올라갔으며, 앵발리드 참배 후에는 르 트랑 블루에서 여유롭게 식사까지 하고 떠났다. 한편 샤를 드골이 영국으로 망명해 프랑스 망명정부를 세웠지만 어느 국가에게도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독소전쟁이 개전된 후 소련에 선전포고를 날린다. 그리고 영국이 독일을 상대로 전쟁을 일으키면서 영국군에게 폭격을 맞은 후 독일군과 함께 영국을 공격한다. 이후 독일이 영국을 상대로 승리를 앞두자 빈 회담에서 전후 아프리카의 영국 식민지 대다수를 넘겨받게 되면서 아프리카 대륙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엄청난 이득을 보게 된다. 다만 식민지에 주둔하고 있는 영국군이 여전히 망명정부에게 충성하며 프랑스군을 번번이 격퇴하고 있어 실제로 점령하지는 못하고 있다.

결과적으로 아프리카의 영국 식민지는 차지하지도 못하고 되려 동남아시아 식민지가 독립하고 아프리카의 프랑스 식민지에서도 독립 여론이 일어나는 등 입지가 좁아져가자 어떻게든 남아있는 식민지라도 유지하기 위해 페탱이 식민지에 대한 탄압을 중단하고, 모든 식민지인들을 프랑스인들과 동등하게 대우하고, 마을마다 학교와 병원도 지어주고, 최대한의 자치권을 부여하고 독립만 하지 않으면 뭘 하든 상관하지 않겠다는 폭탄 선언을 한다. 이러한 선언은 실제로 식민지인들의 환심을 사고 독립 여론을 가라앉혔으나, 정작 프랑스 본토에서는 불만을 사면서 쿠데타 미수 사건이 터지고 이를 빌미로 독일의 간섭이 더 심해진다. 그나마 페탱의 권력이 더 강해져 페탱의 의도대로 식민지는 유지하고 있는 중.

페탱의 사망 후 라발이 국가원수 직위를 물려받으며 더더욱 친독 성향을 보이고 있다. 라발이 죽고 미테랑이 국가원수가 된 후 68운동을 연상케 하는 시위가 일어나자 미테랑은 시위대의 요구를 즉시 받아들여 빠르게 시위를 해산시킨다. 시위대가 독재의 완화를 외치긴 했어도 반독을 외치진 않았고, 미테랑도 반독 성향은 보이지 않았기에 독일도 뭐라고 하지 않았다고.

5.4. 이탈리아

원 역사처럼 제2차 이탈리아-에티오피아 전쟁을 일으켜 에티오피아를 공격해 점령했으나 독일의 에티오피아 지원과 오스트리아 병합 때문에 독일과의 관계가 틀어지면서 2차대전에서 연합국 편으로 참전하였다. 하지만 여기서도 무솔리니의 공격은 독일 산악 사단에 막히고(...) 역공을 당해 독일에게 이탈리아 북부가 점령당하고 주요 도시들이 폭격당해 무솔리니가 원 역사보다 일찍 총리직에서 잘리게 되고, 국왕인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의 트롤링으로 로마가 불바다가 된 끝에 결국 항복하고 독일에게 트렌티노알토아디제, 이스트리아 반도를 할양하고 이탈리아 해군[46] 대부분을 독일에게 넘겨주고 막대한 배상금을 물어주고 알바니아, 에티오피아를 독립시켰다. 그나마 리비아, 에리트레아, 소말릴란드는 유지하고 있다.

이후 처칠이 독일과의 재전쟁을 준비하면서 이탈리아에 사람을 보내 참전 의사를 타진해보나, 압도적인 패배로 인하여 독일에 승산이 없는 것을 깨달은 바돌리오에게 피해 복구가 우선이라는 명목으로 단칼에 거절당한다. 이후 에마누엘레 3세가 독일에게 배상금 탕감과 영국 식민지 할양을 대가로 자기들도 대영전에 참전하겠다고 제안하지만 히틀러에게 단칼에 거절당한다.

전후에도 여전히 왕실과 파시스트당이 집권하고 있지만 경제가 갈수록 안 좋아지고 있어 미국이나 남미로 이민을 가는 젊은이들이 늘고 있으며, 국왕과 파시스트당은 물론 독일에 대해서도 조금이라도 비판하면 바로 체포될 정도로 독일의 눈치를 살피다 보니 반대 세력이 늘어나며 왕실과 파시스트당이 골머리를 썩고 있다. 이탈리아 공산당이 세를 불리고 로마에서 폭탄 테러 미수 사건이 일어나는 등 점차 심각해지다가, 로마에서 시위대가 검은 셔츠단을 구타하자 검은 셔츠단이 발포하며 '피의 토요일'로 불리는 대참사가 일어나면서 왕정 폐지와 국가 파시스트당 해체를 내건 국민해방위원회가 결성되어 로마를 점거하고, 국왕과 파시스트당이 나폴리로 도주하며 내전이 터지고 만다.

국민해방위원회를 지지하는 국민들이 4할 정도 되지만 여전히 국왕과 파시스트당을 지지하는 국민들도 6할 정도로 제법 많아 내전이 길어질 기미가 보이는데다, 로마 외에도 여러 도시에서 파업과 시위가 일어나고 있고, 내전으로 안 그래도 높은 물가가 끝을 모르고 치솟고 있으며, 리비아에서도 독립운동이 일어나는 등 수렁에 빠지고 있다. 갈수록 국민해방위원회가 유리해지자 별 수 없이 독일에 지원을 요청한다. 독일이 개입하자 순식간에 전세가 역전되어 정부의 승리로 내전이 끝나지만, 국왕과 파시스트당도 민심을 잃었기에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는 내전의 책임을 지고 아들인 움베르토 2세에게 양위하고 퇴위했고, 파시스트당 역시 해체 후 독일의 입맛에 맞는 새로운 정당이 창당되어 집권한다.

하지만 리비아의 독립운동은 이미 막을 수 없었고 결국 리비아의 독립을 승인한다.

5.5. 북유럽

원 역사에서는 독일이 베저위붕 작전으로 노르웨이를 침공하며 적국이 되었지만, 여기서는 처칠이 윌프레드 작전으로 노르웨이, 덴마크를 공격하고 스칸디나비아 3국의 국민들에 피해를 입혀 북유럽을 적으로 돌리는 바람에 노르웨이, 덴마크, 스웨덴[47] 3국이 독일의 동맹국이 되었다. 종전 이후로도 독일의 주요 우방국으로 대우받아 무기를 수입하고 있다.

한편 핀란드겨울전쟁에서 중과부적으로 패한 뒤 독일의 지원을 받아 재건되며 권토중래를 노리고 있다.

이후 독소전쟁이 터지자 친독 성향의 국가들이 일제히 소련에 선전포고를 날린다. 핀란드는 소련과 또 전쟁을 할 생각은 없었기에 소련군기가 독일을 폭격하려다 밀려나서 핀란드 영공을 침입한 것을 격추하자 얼른 생존자를 반환하였지만 의심병에 걸린 스탈린이 핀란드 재침공을 지시하며 계속전쟁이 시작되었다. 북유럽 국가들의 참전병력들은 핀란드 전선에서 소련과 싸우고 있다. 하지만 정작 핀란드는 독일의 지원은 지원대로 받아먹으면서 레닌그라드와 무르만스크 공략에 힘을 보태달라는 독일의 요구를 무시하고 겨울전쟁 당시 빼앗긴 자국 영토를 되찾는 것에만 집중하는 트롤링을 저지른다. 정작 그러고도 자국 영토 탈환을 실패한 건 덤.

독소전쟁이 독일의 승리로 끝남에 따라 승전국이 되었지만 전쟁 내내 핀란드의 트롤링을 잊지 않았던 히틀러는 카렐리야콜라 반도를 합병하게 해달라는 만네르하임의 요청을 무시하고 자유 러시아의 영토로 확정짓는다. 이 일로 독일과의 관계가 냉랭해졌지만 유일한 끈이 독일뿐임을 아는지라 어쩌지도 못하고 설설 기는 중.

이후 스칸디나비아 3국은 대영전에도 참전하여 활약하는데, 윌프레드 작전으로 반영 감정이 극에 달한 노르웨이와 덴마크가 점령지의 영국인들을 독일보다 훨씬 더 가혹하게 탄압하는 바람에 영국인들이 저항군을 결성해 이들을 공격하고 노르웨이와 덴마크도 영국인들을 더 심하게 탄압하는 등 점령지가 개판이 되었고, 영국이 패배한 후 영국 본토 관리를 맡게 되지만 워낙 가혹한 모습 때문에 영국인들의 반발을 우려한 히틀러에 의해 물러나고 핀란드가 그 자리를 대신 맡게 된다.

한편 아이슬란드그린란드는 윌프레드 작전 당시 영국이 점령했다가 핼리팩스가 집권한 후 강화조약을 맺으면서 덴마크에 반환했으나, 처칠이 집권한 후 영국이 독일에 선전포고하면서 다시 연합군이 점령하였다가 매각 형식으로 미국에 넘어갔고, 전후 그린란드는 미국에 합병되었고, 아이슬란드는 독립했다.

그런데 독일이 영국을 점령하면서 영국에 있던 피난민들이 아이슬란드로 몰려들었고, 전후에도 나치가 싫은 유럽인들이 자꾸 아이슬란드로 넘어와서 아이슬란드인은 14만 명인데 이민자가 그 3.5배에 이르는 50만 명이 되었고, 제3차 세계 대전을 대비해 연합군이 상시 주둔하며 아이슬란드인들을 통제하는 탓에 계속해서 불만이 쌓여가던 중, 파시스트 영국과의 어업 분쟁으로 대구 전쟁이 발생한다. 다행히 미영독 3자 회담을 통해 대구 전쟁을 끝냈지만, 이 과정에서 아이슬란드의 의중은 반영되지 않았고 결국 민심이 폭발해 대규모 시위가 발생한다. 결국 미국이 아이슬란드의 요구를 받아들여 지원을 늘리고, 통행 제한 조치를 대거 해제하고, 이민자들을 미국, 캐나다, 영프의 속령으로 이주시켜 사태를 마무리짓는다.

5.6. 남유럽

이탈리아가 독일에게 패배한 후 알바니아가 독립하였고, 스페인은 내전 후 철저히 친독 기조를 유지하며 독일에게 협력하고 있고, 포르투갈은 독일에게 굴복하여 군의 현대화를 대가로 아조레스 제도마데이라 제도를 조차하여 대서양으로 가는 길을 열어준다.

이후 독립한 알바니아를 유고슬라비아그리스가 침공하였고, 독일의 중재 시도가 무시당하고 베오그라드에서 독일 대사관이 습격당하는 일이 일어나자 결국 독일은 알바니아를 수호한다는 명분으로 유고슬라비아를 침공하게 된다. 유고슬라비아는 철저히 유린당하고 항복하였고 결국 해체당하게 된다.[48] 그리스는 독일이 불가리아와 알바니아를 지원하며 간접적으로 응징하였고 결국 둘에게 배상으로 영토를 넘기고[49] 독일의 자유로운 항구 이용과 독일군 주둔 허용을 조건으로 종전하게 된다.

이후 독소전쟁이 터지자 친독 성향의 국가들이 일제히 소련에 선전포고를 날린다. 그 뒤 영국이 독일을 상대로 전쟁을 일으키자 스페인은 지브롤터를 공격해 점령하고 전후 영국령 서인도 제도를 할양받게 된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거기까지 갈 방법이 없고 미국이 자기 앞마당에 추축국 식민지가 들어서는 걸 용납할 리 없어서 실제로 점령하지는 못하고 있다.

터키는 친독 성향을 보이면서도 독소전쟁이 끝날 때까지 중립을 유지하고 있었으나 히틀러의 제안으로 영국에 선전포고하고 키프로스를 점령해 차지한다.

전후 그리스에서 공화파와 공산당이 세를 불리며 왕정 폐지를 부르짖고 있다. 다만 이탈리아에 비하면 공산당에 대한 국민들의 시선이 곱지 않다 보니, 사람들을 선동해 시위를 일으킨 후 시위대에 섞인 공산당원들이 먼저 경찰에게 발포하고, 당황한 경찰들이 응사해 시민들이 죽게 만든 후 그 책임을 경찰에게 덮어씌우는 방법을 사용했고, 분노한 국민들이 전국적으로 시위를 벌이자 이때를 틈타 봉기를 일으키며 내전이 터지고 만다. 여기에 터키, 불가리아, 알바니아가 내전을 틈타 침공할 기미를 보이며 나라가 삼갈죽당할 위기에 처하자 독일에 지원을 요청한다. 이후 독일이 개입하면서 반군이 속절없이 밀리기 시작하고, 반군 점령지에서 학살까지 일어나며 여론이 정부 쪽으로 돌아선다. 그렇게 순식간에 정부의 승리로 내전이 끝난다.

한편 스페인령 모로코스페인령 사하라에서 독립운동이 일어나자 독일에게서 존더코만도와 형벌부대를 지원받아 이를 진압한다.

이후 세르비아에서 신 흑수단이 결성되어 유고슬라비아 시절로의 회귀를 외치며 추축국, 유럽연합 탈퇴, 1940년 국경으로의 회귀를 주장하고 백신 반대 운동을 주도하면서 갈수록 세를 불리며 기어코 폭동을 일으켰다가 독일을 비롯한 주변국의 개입으로 진압된다.

그 뒤 포르투갈 식민지에서 독립운동이 일어나자 포르투갈은 프랑스, 스페인에서 그랬듯이 식민지에게 최대한의 자치권을 보장하는 대신 저항세력들은 철저히 진압하여 포르투갈 식민지 전쟁에서 승리한다.

5.7. 동유럽

폴란드는 원 역사처럼 폴란드 침공에서 패배해 병합된다. 그러나 히틀러가 폴란드인 탄압을 금지하면서 비교적 안정적인 통치가 이루어지고 있다. 또한 폴란드 제2공화국 치하에서 탄압받은 폴란드 유대인들을 우대하며 폴란드인들과 유대인들 간의 민족갈등을 부추겨 원활하게 분할통치를 하고 있으며, 유대인들로 구성된 존더코만도 부대를 통해 파르티잔을 소탕하고 있다. 이후 존더코만도는 폴란드 외에도 동유럽 각지에서 활동하는 반독 게릴라들을 소탕하고 스페인령 모로코와 사하라에도 파견되어 독립운동을 제압하였다.

발트 3국벨라루스, 우크라이나는 독소전쟁에서 독일이 해당 국가들을 점령하고 현지인들과 협력 체제를 갖추기로 하면서 이들은 독립한다. 발트 3국은 스웨덴으로 망명했던 정부가 다시 복귀했다. 벨라루스는 망명정부가 반독 성향을 띠고 있어 이를 대신해 새로운 임시정부가 구성되었다. 우크라이나는 강경파 OUN-B 소속인 스테판 반데라와 야로슬라우 스테츠코가 각각 대통령, 총리로 취임하고 온건파인 멜닉이 대통령 상임고문 겸 민족위원회 최고의장으로 취임하며 견제 체제가 갖추어진 정부가 수립되었다.[50] 이후 영국 본토 침공이 시작되자 독일을 돕기 위해 병력을 파견하였다.

5.8. 소련

원 역사처럼 독일과 불가침조약을 맺지만, 독일이 프랑스를 패배시키자 스탈린이 두려움을 느끼고 독일을 경계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마침 뜻이 맞던 일본과 불가침조약을 맺고 남사할린을 다시 할양받는 대가로 자작극을 일으켜 중국-소련 국경을 봉쇄한다. 그러나 히틀러가 흘린 역정보에 낚여 유능한 인재들을 대거 숙청시켜버린다.

그리고 독일을 선제공격하지만 오히려 역공을 당하며 큰 피해를 입는다. 그리고 소련군의 공습을 함께 당한 루마니아, 헝가리, 독일에 우호적이거나 종속된 국가들인 슬로바키아, 크로아티아, 몬테네그로, 알바니아, 에티오피아, 프랑스, 네덜란드, 벨기에, 스페인, 노르웨이, 덴마크, 스웨덴수많은 국가들의 선전포고 스팸을 맞게 된다.[51] 그리고 바쿠 유전이 독일군의 지진폭탄 폭격으로 인해 약 6개월 이상 가동 중지되는 치명타를 입었다. 그 와중에 당장 참전할 생각은 없던 핀란드까지 의심하며 핀란드를 침공해 스칸디나비아 극단부터 흑해까지 전선을 지나치게 늘리는 악수를 두었다.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루마니아에게 헝가리, 불가리아에게 빼앗긴 영토를 되찾게 해줄 테니 편을 바꾸라는 제안을 하나 거부당하고 이것이 독일을 거쳐 불가리아에게 흘러가 불가리아가 단교를 선언하고 독일 편으로 참전하며 그나마 남아있던 우호국마저 잃고 말았다. 유일한 우호국은 괴뢰국인 몽골뿐이라서 사실상 없는 거나 마찬가지다. 설상가상으로 영국과 미국에 스파이를 심어놨다는 사실까지 히틀러에 의해서 뽀록나면서 미국에게서 오던 랜드리스가 중단되는 초유의 사태가 일어나면서 기름이 부족해져서 풍전등화인 상황이다.

어쩔 수 없이 더 이상의 공세를 포기하고 방어 태세로 전환하였지만, 스탈린선을 믿고 남부의 루마니아, 헝가리 방면에 군사를 집중시켰다가 독일이 열차포와 지진폭탄으로 정면돌파를 선택하며 통수를 맞고 밀리게 되었다. 그 상황에서도 스탈린이 후퇴 금지령을 내린 것 때문에 막대한 피해를 입게 되었다. 그리고 발트 3국벨라루스, 우크라이나가 독립해 독일에 붙어버렸고 병력 대다수가 죽거나 항복해 포로가 되거나 자유 러시아군으로 전향하였고, 내부에서는 스탈린의 숙청과 소수민족 탄압이 이어지며 혼란이 극에 달하고, 믿었던 영국의 상륙작전마저 실패하자 독일과의 평화협상을 시도하지만 결렬된다.

결국 모스크바 공방전에서 패배하며 독일군에게 모스크바가 함락되고 스탈린은 도망친다. 더군다나 히틀러에 의해서 카틴 학살까지 폭로되며 소련에 대한 이미지가 전 세계적으로 바닥을 치게 되었고, 마지막으로 남은 군사력을 영끌해 남부전선에서 소련판 아르덴 대공세를 펼치지만 결국 유의미한 결과를 내지 못하고 독소전쟁에서 패전, 발트 3국벨라루스, 우크라이나, 캅카스 3국의 독립을 인정해야 했고 모스크바를 비롯한 볼가강 서쪽 유럽 영토에는 자유 러시아 공화국이 세워진다.

볼가강 너머로 밀려난 뒤에도 신무기를 개발하며 권토중래를 노리고 있었지만, 스탈린의 대숙청과 소수민족들의 무장 봉기가 이어지며 혼란이 심해지고, 특히 반유대주의가 더 심해져 소련 내의 유대인들은 대부분 유대인 자치주로 강제 이주당하고 반발하는 이들은 처형되거나 굴라그로 보내졌다. 그러나 쿨리크의 반란이 기폭제가 되어 내전 상태에 빠지고, 유대인들도 반란에 호응해 유대인 자치주에서 이스라엘의 건국을 선언하였고, 그 틈을 타 독일이 침공을 개시하여 2차 독소전쟁이 발발하고 만다. 그나마 쿨리크와 유대인들의 반란은 진압하는데 성공했으나, 독일군은 당해내지 못하고 끝내 독일의 핵무기를 맞고 항복, 중앙아시아 5국의 독립까지 인정하고 유럽 영토 전부를 자유 러시아에 넘겨주고 물러나며 아시아 국가로 전락한다. 이후로도 독일에게 배상금을 갚느라 영토 탈환이나 공산주의의 확산은 꿈도 꾸지 못하고 가만히 있어야 하는 처지가 된다.

미독 냉전에 접어든 후 보로실로프가 새로운 서기장이 되어 이르쿠츠크로 천도하고 굴라그에 갇힌 죄수들을 석방하고 공포정치를 완화하는 한편, 비록 국민감정은 좋지 않아도 일단 독일의 적국인 만큼 미국의 지원을 받으며[52] 악착같이 체제를 유지하고 있다. 이후 장제스가 몽골을 침공하자 소련군을 보내 중국군을 격퇴하고 이 참에 내몽골까지 차지할 생각으로 밀고 들어갔으나 독일의 압박으로 진군을 멈추고 전쟁을 끝낸다. 내몽골은 먹지 못했지만 몽골을 지키는데 성공해 사실상 승전하며 마지막 자존심은 지켜낸다.

현대 시점에도 해체되지 않고 남아있으며 몽골도 여전히 괴뢰국으로 두고 있지만 자유 러시아, 중국과는 여전히 국경에서 자주 충돌하고 있다.

5.9. 자유 러시아

러시아 파시스트당자유 러시아군이 독일의 지원을 받아 독소전쟁에서 소련과 싸웠고, 소련이 볼가강 너머로 밀려나면서 모스크바를 비롯한 볼가강 서쪽 유럽 영토에 세워졌다. 사실상 소련으로부터 독립한 셈. 일단 소련에게 정식 국가로 인정받지는 못했지만 어느 정도 교류는 이어졌다.

이후 2차 독소전쟁에서 패배한 소련이 나머지 유럽 영토까지 넘겨주면서 독립국들을 제외한 소련의 유럽 영토 전부를 차지하고 소련에게 정식 국가로 인정받는다. 이후 미국 내 백계 러시아인들의 입지가 좁아지면서 많은 백계 러시아인들이 역이민을 오게 된다.

현대 시점에도 친독 국가로 남아있으며 소련과는 여전히 국경에서 자주 충돌하고 있다.

5.10. 미국

원 역사처럼 중립을 유지하고 있었으며, 히틀러가 제시 오언스를 환대한 것이 나비 효과가 되어 유럽에서 일어나는 전쟁에 대해 독일계와 아일랜드계 미국인들은 물론 파시스트, 흑인, 유대인 단체와 미국 공산당까지 반전파를 지지하고 특히 인종차별에 시달리던 흑인들의 여론이 불타오르자 되려 KKK가 적극적으로 참전을 주장하는 상황이 펼쳐진다.

그리고 일본에게 진주만 공습을 당하며 태평양 전쟁이 터지게 된다. 독일에 대해서는 여전히 중립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으나, 루스벨트가 전쟁 중인 일본보다도 독일을 더 경계하고 있어 독일에게 가장 큰 불안 요소로 남아있는 상태. 그러나 독일의 공작에 의해 미국 정부 내부에 소련 스파이가 있던 사실이 드러나 랜드리스를 중단하게 되었다.

작가가 미리 밝힌 바에 따르면 결국 독일과 붙는다고 한다. 사실상 최종 보스. #[53] 결국 영국에 독일군이 상륙하자 거센 반대 여론에도 불구하고 상원에서 단 1표 차이로 대독 선전포고 결의안이 통과되며 참전한다. 그러나 히틀러가 터스키기 매독 생체실험 사건과 루스벨트가 자신의 진주만 공습 경고를 묵살했다는 사실을 폭로하자 전국적으로 시위가 일어나고 특히 제시 오언스를 필두로 흑인들이 들고 일어나 미국 흑인 민권 운동을 벌였으나 시위 진압대가 이들을 쏴죽이는 대형 사건이 터진다. 이로 인해 분노한 흑인들이 흑인 파시스트 반군(BFR)을 결성해 백인들을 학살하고 KKK 역시 흑인들을 학살하는 등 준 내전 상태에 빠지고 버티지 못한 루스벨트가 계엄령을 선포한다. 그 와중에도 원정군 파견을 밀어붙이지만 독일군에 비하면 질도, 양도 터무니없는 수준이고, 병사들이 유럽행을 거부해 군사재판에 회부되거나[54] 흑인 병사들이 아예 자기를 차별하던 동료와 상관을 쏴죽이고 무장탈영하는 일까지 빈번하게 일어난다.

결국 루스벨트가 고혈압이 악화되어 사망한 후 대통령직을 승계받은 월리스가 터스키기 사건과 오언스의 사망으로 분노한 흑인들을 달래고, BFR과 KKK를 강경 진압해 혼란을 수습하면서도 선전포고를 철회하지 않고 영국에 대한 지원을 이어가지만, 결국 전쟁이 영국의 패전으로 끝나게 되자 독일의 유럽 패권을 인정하는 대신 아이슬란드, 그린란드, 얀마옌 섬을 구매하는 형식으로 차지하는 조건으로 독일과 평화협정을 맺으며 종전된다.

한편 대일전에서는 원 역사대로 승기를 잡아 일본을 몰아붙이고 있으나,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피로도가 쌓이자[55] 한때 적으로 싸웠던 독일에 돈을 미끼로 참전을 요청한다. 이 작전이 먹혀들어 결국 일본이 항복하면서 원 역사처럼 제2차 세계 대전에서 승전한다. 전후 도쿄에서 전범재판을 치른다.[56]

독일과의 냉전에 접어들면서 극동 지역의 식민지들의 독립을 승인하여 극동에서의 영향력을 굳히고[57] 독일을 경계해 핵무기를 비롯해 신형 전차, 전투기 등 각종 신무기를 개발하고 있지만,[58] 1944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토머스 E. 듀이가 승리해 정권이 공화당으로 교체된 후 정상회담을 통해 전 세계를 미국과 독일의 영역으로 양분하고[59] 소아마비 백신을 공동 연구하기로 했다. 다만 미국과 독일 사이에서 간을 보는 국가들이 있다 보니 독일에 이어 티베트를 정식 국가로 인정하고 막대한 양의 원조를 약속하거나, 한국이 독일에게서 무기를 수입하자 이에 질세라 한국에 무기를 팔고 원조도 늘려주는 등 외교전은 벌이고 있는 중. 그러나, 월리스와 듀이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인종차별이 심각한 상황이라고 한다.

1948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도 듀이가 무난하게 승리하였으며, 중국이 몽골을 침공할 계획이라는 걸 눈치채고 중국에 경고하지만 중국이 기어코 몽골을 침공하자 열받아서 원조를 축소해버린다.

그리고 1949년 8월 29일, 독일에 이어 두 번째로 핵무기 개발에 성공한다. 하지만 얼마 안 가 독일이 수소폭탄을 개발하자 이에 질세라 수소폭탄 개발을 밀어붙인다. 그리고 대구 전쟁이 터지자 미영독 3자 회담을 통해 빠르게 끝냈지만, 결국 아이슬란드의 민심이 폭발해 대규모 시위가 발생하고 내부에서는 매카시즘이 확산되자 골머리를 앓으면서도 어떻게든 아이슬란드 문제는 수습한다.

1952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맥아더가 당선되면서 본격적으로 기조가 바뀌어, 매카시를 시작으로 내부의 적으로 지목된 인종차별주의자, 파시스트, 공산주의자들을 작정하고 때려잡고, 인종차별 성향이 강한 남부에서 일어난 시위도 강경 진압하며 혼란에 휩싸인다. 이 틈을 타 아르헨티나포클랜드 전쟁을 일으키자 당장 포클랜드 제도에서 철수하라고 경고하지만 듣지 않자 먼저 브라질을 움직여 아르헨티나를 공격하고 경제제재를 가하는 사이 군대를 소집해 본격적으로 아르헨티나와 싸우고 승전해 아르헨티나를 철저한 미국의 사냥개로 만들어버린다.

한편 독일이 로켓 개발과 인공위성 발사까지 성공하자 바그너 쇼크에 휩싸여 자신들도 로켓 개발을 밀어붙이면서 DARPANASA를 신설, 본격적으로 우주 경쟁에 뛰어든다.

그 뒤 1954년 4월 12일, 소아마비 백신 개발에 성공한다. 1956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도 맥아더가 무난하게 승리하였으며, 이번엔 인도네시아에서 북보르네오와 뉴기니의 영유권을 주장하며 전쟁을 일으키려고 하자 살벌한 경고를 보내 전쟁을 막는다. 1958년 1월에는 독일에 이어 두 번째로 수소폭탄 개발에 성공하였고, 그 뒤 뱅가드 위성을 발사했지만 두 차례 모두 처참하게 실패하고 익스플로러 1호만 간신히 발사에 성공한다. 그리고 쿠바 혁명이 일어나자 바티스타 정권을 손절하고, 쿠바 내 미국인 소유 재산의 몰수가 시작되자 쿠바에 경제제재를 가한다.

그리고 독일과 서로간에 정찰기를 보내고 있던 중 유럽 상공에서 U-2가 격추당하는 사건이 일어나자 당황했지만 뜻밖에도 독일에게서 정상회담을 제안받자 응한다. 그리고 닷새 간의 회담을 통해 서로 정찰기를 보내는 것을 그만두고, 게리 파워즈를 미국으로 송환하고, 제3차 세계 대전을 막기 위해 미독간 핫라인을 설치하고 군비 제한을 논의하였다.

독일 문제를 해결한 뒤에는 쿠바 침공을 결정, 순식간에 카스트로 정권을 전복시키고 신정부를 세운다. 1960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도 맥아더가 승리하며 3선을 달성했고, ICBM 개발에 성공했으며, 독일과 두 차례 더 회담을 가져 전략무기제한협정과 미독 우주 개발 상호협력을 결정한다.

1964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는 태프트가 당선되었다. 태프트는 독일의 달 착륙에 자극받아 5년 안에 미국도 달에 인간을 보내겠다고 발표했고, 원 역사보다는 2년 늦었지만 끝내 유인 우주선 개발에 성공해 정말로 5년 안에 닐 암스트롱이 미국인 최초, 인류 세 번째로 달 착륙에 성공했다.

현대 시점에는 독일과 더불어 GDP 1위, 군사력 2위의 양대 초강대국으로 군림하고 있다. 다만 멕시코에서 내전이 터지거나 남미 각국에서 히틀러주의를 표방하는 정당들이 선거에서 연달아 승리하는 등, 앞마당이나 다름없는 남미에서 자꾸 문제가 터져서 골칫거리인 모양.

5.11. 중국

히틀러 집권 이전 중국의 성장 가능성을 긍정적으로 서술한 나의 투쟁이 유통되자 그를 우호적으로 보는 사람들이 대폭 늘어났으며, 이후 독일에게 군사고문단을 지원받는다. 또한 빙의된 히틀러의 도움으로 장쉐량을 사전에 처단하고 제6차 초공작전을 수행, 중국공산당을 완전히 박멸하는데 성공하였다. 또한 알렉산더 폰 팔켄하우젠주중 독일 군사고문단이 현실과는 다르게 잔류하여 중국을 돕고 있다. 이후 장제스가 독일에 대한 신뢰를 갖게 되었으며 장제스의 심복인 다이리가 직접 독일로 파견되어 무기 거래를 맡는 등 독일은 중국을 직접적으로 지원하는 거의 유일한 우방 열강이 되었다.

하지만 소련이 일본과 불가침조약을 맺고 자작극을 일으켜 중국 국경을 봉쇄하고 양국 간에 육로를 통한 교류가 끊기게 되고, 국경 봉쇄가 해제된 뒤에도 독소전쟁으로 인해 독일의 지원을 받지 못한다. 대신 태평양 전쟁 개전 후 미국의 지원을 받아 일본에 대한 항전을 이어나간다. 이 덕분에 친미, 친독 성향을 동시에 보이고 있다.

이후 영국이 독일에 선전포고하자 우방국들끼리 전쟁을 하는 꼴이 되어 양국에 중재를 제안하지만 거절당한다. 그 뒤 영국이 패전하고 미국과 독일의 평화협정이 체결된 후 소련이 2차 독소전쟁에서 패전하여 중앙아시아 5국이 독립하면서 마침내 독일과의 육로가 다시 연결되어 교류가 재개되고, 독일에 미국의 대일전 참전 요청을 전달한다.

결국 일본이 항복하며 영토가 해방되고 제2차 세계 대전에서 승전한다. 국민당이 집권하고 있어 여전히 수도는 난징이며 베이징은 베이핑으로 불리고 있고, 천안문에는 장제스의 사진이 걸리게 되었다. 전후 피해 복구에 힘쓰면서 군벌들의 권한을 축소하고 중앙집권제를 강화하는 한편, 사실상 독립국이 된 티베트에도 지배욕을 보이고 있었으나 독일이 티베트를 정식 국가로 인정하고 수교하면서 다른 국가들도 줄줄이 티베트를 정식 국가로 인정하는 바람에 티베트 합병은 시도도 하지 못하고 포기해야 했다. 대신 장제스가 몽골을 침공해 합병할 생각을 하고 있다.

문제는 독일이 아니었다면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을 티베트와 달리 몽골은 소련의 괴뢰국이라 미국은 몰라도 소련은 반드시 개입할 것이고, 아무리 소련의 사정이 좋지 않다고 해도 중국도 그다지 사정이 좋은 편이 아니라는 것. 여전히 전쟁 피해를 완전히 복구하지 못했고, 아직도 군벌들이 각지에서 날뛰고 있는데다, 중국국민당의 고질적 문제인 부정부패가 매우 심각해 미국의 지원으로 먹고 사는 처지인데도 얼마 안 되는 원조물자까지 횡령하는 탓에 굶어죽는 사람이 속출하는 상황이다. 히틀러와 팔켄하우젠도 이런 이유로 우려를 표했지만 장제스는 듣지 않고 있다.

미국도 장제스의 계획을 눈치채고 마셜이 장제스에게 몽골 침공 계획을 포기하고 부정부패를 해결하지 않으면 원조를 끊을 것이라고 경고했으나, 장제스는 이마저도 듣지 않고 기어코 몽골을 침공했으나 히틀러와 팔켄하우젠의 우려대로 중국군은 소련군에 의해 격퇴당하고 되려 내몽골까지 밀려나지만 독일의 압박으로 소련군이 진군을 멈추며 간신히 내몽골은 지킬 수 있었다. 이후 전쟁을 끝내는 대가로 몽골을 정식 국가로 인정하고 몽골, 소련과 불가침조약을 맺어야 했으며, 전쟁을 일으킨 것에 열받은 미국이 원조를 축소한데다 늦게나마 부정부패를 척결하려 하자 사실상의 패전도 모자라 밥줄까지 끊기게 생긴 군벌들이 일제히 반란을 일으킨다.

하지만 이것은 장제스의 계획이었고, 장제스는 몽골 침공 당시 미적거리는 태도를 보일 때부터 진작에 군벌들을 의심하고 다이리를 시켜 각 군벌의 중심부에 남의사 요원들을 심어둔 뒤였다. 그리고 반란이 일어나자마자 군벌들을 암살하여 반란을 진압, 부정부패 척결과 군벌들의 처리, 권력 강화까지 이뤄내고 본격적으로 개혁을 밀어붙인다.

장제스의 개혁이 진행되고 외국의 투자까지 더해지며 경제가 되살아나기 시작한 끝에 현대 시점에는 GDP 3위, 군사력 3위의 강대국이 되었다. 공산국가인 소련, 몽골, 베트남과는 여전히 국경에서 자주 충돌하고 있지만 한국을 비롯한 다른 주변국들과는 관계가 원만하며, 동북공정과 내정간섭도 없다. 한국군, 중국군, 미군이 합동군사훈련을 하는 수준이라고. 다만 위구르 독립운동은 원 역사처럼 일어나고 있으며 중국 정부는 이를 탄압하고 있지만, 그래도 신장 재교육 캠프 같은 건 없고 대화를 하려고 노력하고 있다고 한다.

5.12. 일본

독일이 성장하는 동안 우호적 관계를 유지하며 독일에 항공모함 설계도 및 각종 건함 기술을 알려주는 조건으로 독일에서 개발 중지된 3호 전차의 설계도를 받아오는 등 군사적으로 협력했지만, 독일이 예상과 달리 중국의 손을 잡고 중국에 군사고문단과 무기를 지원하는 등 서서히 거리를 두자 이에 맞서기 위해 소련과 손을 잡기로 한다. 이후 소련과 불가침조약을 맺고 남사할린을 다시 할양하는 대가로 중국-소련 국경을 봉쇄하여 독일의 지원을 차단시킨다.

이후 기어코 진주만 공습을 일으키며 태평양 전쟁을 일으키고, 중국과 동남아도 연이어 침공하면서 미국만이 아니라 영국을 비롯한 유럽도 적으로 돌리게 된다.

그러나 초반에만 승기를 잡았을 뿐 원 역사대로 미드웨이 해전, 과달카날 전역 등에서 패전을 거듭하며 점차 궁지에 몰리게 되고, 미국이 독일에 선전포고하자 적의 적은 나의 친구라는 논리로 독일에 동맹을 요청하지만 이미 일본의 패배가 확실한 상황에 개인적인 감정까지 겹쳐서 일본의 요구를 들어줄 생각이 없던 히틀러에게 거절당하고, 독일이 미국과 평화협정을 맺은 뒤 미국과의 평화협정 중재를 요청해보지만 역시 거절당하고 되려 미국의 참전 요청으로 독일마저 적으로 돌아서게 된다.

결국 더 이상 승산이 없음을 깨닫고 천황제 유지를 조건으로 항복하며 원 역사처럼 제2차 세계 대전에서 패전한다. 그나마 핵을 맞지는 않았고 소련이 대일전에 참전하지 않아 쿠릴 열도도 남아있지만, 원 역사의 나치의 나쁜 이미지를 전부 일본이 가져갔고, 소련이 아닌 독일과 미국 사이에 냉전이 일어나게 되면서 극동의 중요성이 낮아져 미국이 굳이 일본에게 자비를 베풀 이유가 사라졌으며, 한국이 분단되지 않아 6.25 전쟁이 터질 일도 없어졌으니 전쟁특수로 경제회복 가능성도 없어졌기에 앞날이 좋지 않을 것이 암시된다.[60]

전후 GHQ의 통치 하에 놓이게 되는데, 그나마 천황제 유지라는 조건은 지켜졌지만 전범재판이 원 역사에 비해 훨씬 더 철저하고 강경하게 치러지면서 히로히토를 포함한 전쟁 책임자들이 전범재판에 회부되어 줄줄이 사형과 종신형을 선고받았고, 전쟁 병기들은 해체되거나 수장되거나 식민지였던 신생 국가들에게 넘어갔고, 일본군은 완전 해체되고 향후 재무장도 금지되어 일본의 재무장 가능성도 사라졌으며, 재벌도 해체되고 기업인들도 전범재판에 회부되었고, 화족 제도도 폐지되고 방계 황족들도 모두 신적강하되었다.

현대 시점에서는 늦어지긴 했어도 경제 성장에 성공해 원 역사보다는 못하지만 GDP 15위의 선진국이다. 다만 자위대는 존재하지 않아 경찰과 해상보안청뿐이며 여전히 연합군이 주둔하고 있고, 맥아더가 일본인들의 교육을 철저히 했기에 역사 관련 문제로 타국과 마찰을 일으키는 일도 없다.

5.13. 한국

원 역사처럼 일본의 식민지였으나 소련과 일본이 손을 잡으면서 공산주의자에 대한 탄압이 덜해지자 역설적으로 공산주의자들이 민심을 잃었고, 자연스럽게 일본과 전쟁 중인 미국으로 민심이 쏠렸다. 1944년 6월 25일 일본이 패망하면서 원 역사보다 1년 빠른 35년 만에 해방되었는데, 소련이 독일에게 패배하면서 한반도에 개입하지 못해 온전히 미국에 의해 해방된 덕에 분단되지 않고 친미 국가인 대한민국이 건국되어 이승만이 대통령, 김구가 부통령으로 취임하였다.

독립한지 얼마 되지 않아 미국의 지원으로 먹고 사는 가난한 처지에, 군대를 키우고 싶어도 미국이 무기는 지원해주지 않아 이승만이 독일에게 무기를 팔아달라고 부탁해 이를 경계한 미국이 무기를 비롯한 각종 지원을 하게 만들 생각을 한다. 그런데 히틀러는 예상보다 많은 무기를 지원해주었고, 이승만의 계획대로 미국도 한국에 막대한 양의 원조를 퍼주면서 자주국방과 경제 성장의 길이 열렸다.

이승만은 사사오입 개헌, 3.15 부정선거, 4.19 혁명 등이 일어나지 않아 12년의 임기를 마친 후 무사히 퇴임, 김구가 2대 대통령으로 취임하며 대한민국 제1공화국이 그대로 이어지게 되었다. 이후 이범석이 3대 대통령으로 취임, 베를린을 참고해 서울을 재개발하면서 브루탈리즘 양식의 건물들이 세워졌고 국회의사당도 독일 국회의사당과 비슷하게 지어졌다. 독일 대사관도 미국 대사관에 준할 정도로 크고 견고하게 지어졌다. 조선총독부 청사는 철거하는 대신 위치를 옮겨 보존했다.

현대 시점에서는 GDP 13위의 선진국이며 국제사회에서의 위상도 큰 편이지만, 북한이 존재하지 않아 모병제이며 대한민국 국군 병력도 12만 명에 불과할 정도로 군사력은 원 역사보다 약하다. 그래도 장애인 징병이나 사회복무요원, 예비군 제도 등은 없다.

5.14. 동남아시아

원 역사대로 제2차 세계 대전 중 일본에 의해 점령당했다가 연합군에 의해 해방되었고, 그 뒤 식민지였던 국가들이 줄줄이 독립하여 미국의 영향권에 편입되었다.

독립국이었던 태국은 원 역사대로 2차대전 중 일본에 점령되었다가 연합군 쪽으로 편을 바꿨고, 버마아웅 산에 의해 독립, 라오스, 캄보디아는 왕국으로 독립했지만 베트남은 미국이 직접 호찌민이 집권하도록 지원하여 동남아시아에서 유일하게 공산화되었음에도 친미 성향을 보이고 있으며, 인도네시아는 일본이 물러난 후 독립해 수카르노가 집권했다. 자유 프랑스나 네덜란드 망명정부 등은 이들의 독립을 인정하지 않으려 했지만 망명정부 신세에 미국을 거스를 수 있는 힘이 없었기에 포기할 수밖에 없었고, 덕분에 인도네시아 독립전쟁 등으로 피를 보는 일도 없었다.

그러나 인도네시아에서 북보르네오와 뉴기니의 영유권을 주장하며 전쟁을 일으키려고 하자 미국이 살벌한 경고를 보내 전쟁을 막았다.

5.15. 인도

영국의 탄압으로 불만이 쌓여가던 중 독일의 지원을 받아 영국이 독일에 선전포고하자 마자 봉기를 일으킨다. 영국군의 진압으로 잠시 소강 상태에 접어드는 듯 했으나, 영국이 끝내 독일에게 패배하면서 다시 독립 열기가 강해진다.

영국 내각이 캐나다로 도망쳐 망명정부를 구상한 뒤에도 계속해서 인도를 유지하려고 발악했으나 독일의 무기 지원, 군사 훈련으로 잘 무장한 인도 독립군에게 영국이 밀려나기 시작하고, 결국 영국이 인도를 포기하면서 마침내 독립을 이룩하지만, 막상 영국의 수작으로 인해 종교, 민족, 카스트 간의 갈등이 심화되어 분열되어간다. 간디, 네루, 보스가 어떻게든 분열을 막으려고 했으나, 간디가 암살당하며 서로를 향한 테러가 연이어 일어나며 걷잡을 수 없어지고, 파키스탄의 분리독립이 코앞으로 다가온 순간 진나도 암살당하며 분리독립이 무위로 돌아가자 기어코 힌두교무슬림 간에 내전이 터지고 만다.

내전이 2년 넘게 이어지면서 무려 600만 명이 넘는 사망자가 나오고 어마어마한 사상자에 반전주의가 퍼지면서 내전이 탄력을 잃고 힌두교, 무슬림 할 것 없이 모두 지쳐버리자, 결국 협상 끝에 무슬림이 독립을 포기하는 대신 최대한의 자치권을 부여받기로 하면서 내전이 끝난다. 이후 보스가 대통령, 네루가 총리를 맡되 내각은 힌두교보다 무슬림, 시크교가 더 많이 자리를 차지하는 식으로 정부가 수립되고, 독일의 영향권에 편입된다.

이후 내전의 참화를 수습하고 독일의 투자를 받으며 성장을 거듭해나가 강대국이 되었다.

5.16. 에티오피아

이탈리아와의 전쟁 전 히틀러의 제안으로 독일과 비밀리에 군사동맹을 체결한다. 독일의 지원 덕에 제2차 이탈리아-에티오피아 전쟁에서 어느 정도 버텼으나 결국 이탈리아에게 밀려 식민지가 되었지만, 이탈리아가 독일에게 패배하며 해방되었다.

독소전쟁이 발발하자 아프리카 국가 중 유일하게 독일 편을 들며 참전을 선언, 독일을 돕기 위해 유럽으로 병력을 파견한다. 이후 하일레 셀라시에가 영국에서 망명 생활 중 푸대접을 받은 것 때문에 독일에게 영국에 선전포고하고 영국령 소말릴란드를 공격하겠다고 제안하지만 히틀러가 이를 사양하고 대신 프랑스령 소말릴란드의 방어를 부탁하자 바브엘만데브 해협에서 영국군을 방해한다.

5.17. 아르헨티나

기본적으로 친미 국가이기는 하나 제2차 세계 대전 중 독일군의 무기를 수입하고 독일 군사고문단을 파견받는 등 친독 성향도 보이고 있다. 전후 후안 페론이 아내 에바 페론과 함께 독일에 방문해 포클랜드 제도를 탈환하기 위한 도움을 요청하지만, 히틀러가 사실상 거절하며 포기하라고 충고했는데도 야심을 버리지 못해 기어코 포클랜드 전쟁을 일으킨다.

전쟁을 일으키자 마자 포클랜드 제도를 순식간에 점령하고, 몇 차례에 걸친 미국의 경고도 무시하고, 미국의 사주를 받은 브라질의 침공도 손쉽게 격퇴하면서 승승장구하는 듯했으나 자만심에 빠져 연합군 전체를 적으로 돌려버린다. 미국의 경제제재로 경제가 작살난 상황에서도 포클랜드 제도를 포기하려 하지 않다가 본격적으로 연합군이 공격해오자 순식간에 아르헨티나군은 작살나고 포클랜드 제도도 도로 빼앗긴데다 수도인 부에노스 아이레스까지 공습받자 결국 민심이 추락하고 쿠데타가 일어나 페론은 축출당하고 아람부루가 집권한 후 연합군에 항복, 대규모 군축과 배상금 지불, 연합군 상시 주둔 등의 조건을 받아들이고 철저한 친미 국가로 탈바꿈한다.

5.18. 쿠바

바티스타 정권이 쿠바 혁명으로 붕괴되고 카스트로가 집권해 공산주의 국가가 된다. 그리고 쿠바 내 미국인 소유 재산의 몰수가 시작되자 미국의 경제제재를 맞아 순식간에 경제가 나락으로 갔고, 미국의 지원을 받는 반공 게릴라가 날뛰자 별 수 없이 미국과 협상을 시도했으나 미국의 단호한 요구를 받아들이지 못해 협상은 파탄났다. 이에 국제사회에 지지를 호소했지만 같은 공산국가인 소련, 몽골, 베트남 모두 거절했고, 결국 미국의 침공이 시작되자 순식간에 함락되어 카스트로 정권은 붕괴, 미국에 의해 신정부가 세워진다.

원 역사에서 쿠바 미사일 위기로 세계를 핵전쟁의 위기로 몰아넣었던 것과 달리 역사 개변으로 인해 미국에 어떠한 피해도 주지 못하고 조용히 변화를 맞이하는 아이러니한 결과를 맞게 되었다.

6.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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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점 3.68 / 5.0 | 참여자 11명 2024. 03. 27. 기준



히틀러에 빙의했다는 흥미로운 소재로 인기를 끌고 있으나, 일부 전개에 대해서는 비판받고 있다.

초반에 1차대전 부분에서 주인공이 회귀를 여러 번 했다는데 너무 어리숙하다는 반응이 있었고, 특정 인물을 처음 본다는 듯 행동하는 것도 말이 되냐는 반응이 있었다.

본격적으로 독자들이 불타오른 것은 중화민국 사절단과 함께 독일에 방문한 대한민국 임시정부 지도자들을 히틀러가 환대하는 에피소드였는데, 독자들은 국뽕도 국뽕이지만 독소전도 안 벌어졌는데 한국을 지원하는 건 너무 빠르다며 비판했고 결국 작가가 사과문을 올리고 전개를 대폭 수정했다. # 다만 작가 역시 마뜩찮았지만 출판사의 권유로 어쩔 수 없이 한국 파트를 넣었다고 하며, 본인도 한국 관련 부분이 나오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다만 지금은 아니더라도 언젠가 한국 관련 부분이 나오기는 할 예정이라고.[61]

전투 과정에서 등장하는 병사 시점에 대해서도 매번 똑같은 방식(간략한 상황 묘사-전투 개시-전사 혹은 후퇴)으로 진행되어 지루하다는 의견이 있다. 작가도 해당 비판을 인지하여 병사 시점을 줄이고 전개 방식을 다양화하겠다고 공언했지만 이후에도 병사 시점이 많다는 의견이 간간이 보인다.

영국의 참전 과정도 억지라는 말이 많다. 전황만 봐도 영국이 엄청나게 불리하고, 소련 스파이 건으로 개전 명분도 없어지다시피 한 상황에서 독일의 지원을 받는 IRA의 과격파가 폭탄 테러를 계획 중에 미수에 그친 사건으로 여론이 반독으로 뒤집혀 참전하는 전개가 나왔기 때문. 이에 대해 그 처칠이니 아예 말이 안 되는 가정은 아니다, 예전에도 영국이 참전할 예정이라고 언급했었고 고구마 전개라 욕하는 독자들 때문에 급전개를 한 것이라는 의견과 그걸 감안해도 전개가 너무 빠르다, 전개를 천천히 하더라도 밑밥을 더 깔아 독자들에게 충분히 납득을 시켰어야 한다는 의견이 난무하고 있다. 독자들의 반응은 대체로 후자에 조금 더 가까운 편.

이 때문에 작가가 미국의 참전을 예고했을 때도 과연 납득할 수 있을지에 대한 우려가 많았다. 그리고 미국 참전 과정도 우려대로 되어가고 있는데 주인공은 철저하게 미국 건드리지 말라고 했지만 일개 유보트 함장이 그 명령을 씹는 모습을 보여서 독자들의 불안감이 높아지고 있다. 그나마 이 사건 자체가 미국의 선전포고로 이어지진 않았지만, 이후 독일군이 영국에 상륙한 것을 계기로 미국이 선전포고를 하자 히틀러가 터스키기 매독 생체실험 사건과 루스벨트가 자신의 진주만 공습 경고를 묵살했다는 사실을 터트려서 내분을 일으키는 장면이 나오는데 아무리 미국의 참전이 예정되어있었다고 해도 빠르게 터트렸으면 미국의 참전을 막거나 늦출 수 있었을 텐데 타이밍이 너무 뜬금없다는 지적이 나왔다. 이에 대해서는 작중에서 미국에서 필요 이상으로 내분이 일어나면 태평양 전쟁의 결과가 달라질지도 모른다는 우려와 루스벨트를 지나치게 자극해 참전을 유도할지 모른다는 걱정 때문이라고 설명하였다.[62]

이후 미국과 평화협정을 맺을 때도 아이슬란드, 그린란드를 미국에 넘겨주는 것을 두고 독일이 훨씬 유리한 상황에서 미국에 너무 굽히고 들어가는 것 아니냐며 댓글창이 불타올랐다. 이후 작가가 이에 대한 입장문을 올렸다. #

냉전 파트에 들어서는 2차대전 파트에 비해 재미가 없다는 평가가 늘면서 인기가 떨어졌다. 사실 이건 어쩔 수 없는 문제이긴 하나, 핵 맞고 우랄 산맥 너머로 쫓겨난 소련이 중국을 너무 쉽게 이기는 것, 미독 공동 우주 탐사까지 제안할 정도로 자꾸 미국에 저자세로 나가는 것, 친독 국가인 아르헨티나 문제에 침묵하는 것, 소련이 사실상 망한 상황인데도 쿠바에서 공산주의 혁명이 일어나고 미국은 그걸 묵인한 것 등 전개에 대해 비판받고 있다. 그래도 설명을 통해 어느 정도 개연성을 확보했고 완결 직전 연참을 하며 깔끔하게 완결을 내며 나름 호평을 받았다. 완결 후기

7. 기타

  • 대체역사 마이너 갤러리에서 연재하다가 문피아로 넘어간 케이스로 대역갤에선 히틀러됨 혹은 히틀됨이라는 호칭으로 통한다. 작가가 가끔 대역갤에 공지를 하거나, 추후 전개 방향이나 고증 등에 관한 질문을 하기도 한다.
  • 아무래도 소재가 소재인 탓에 타 플랫폼 런칭에 난항을 겪고 있다고 한다. 네이버 시리즈, 카카오페이지 런칭은 불발되었다. # # 불행 중 다행으로 조아라, 미스터블루 런칭에 성공했다. # 그리고 마침내 네이버와 카카오 런칭에도 성공했다. # 다만 동시연재는 아니고 문피아보다는 업로드 속도가 늦다.
  • 문피아에선 표지에 하켄크로이츠가 그려져 있지만 문피아를 제외한 타 플랫폼의 경우 표지에 하켄크로이츠가 없다. 아마 플랫폼 내부 사정상 검열된 것으로 추정된다.
  • 해외에도 알려졌다. 외국인들의 반응은 대체로 경악인데,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외국 특히 북미와 유럽권에서 히틀러와 나치의 이미지는 홀로코스트 등 각종 만행 때문에 알카에다, 탈레반, IS에 버금가거나 그 이상으로 좋지 않다. # # 하지만 대부분 '히틀러에 빙의했다'는 소재 때문에 놀라는 반응 위주고 작중 내용은 자세히 알려지지 않았기에 구체적인 비판은 없다고 보면 된다.
  • 히틀러로 빙의한 소설들 중 첫 문피아 런칭의 벽을 뚫은 작품이다. 그 전에도 문피아에 연재한 히틀러 빙의 소설은 있었으나 모두 무료 소설이었고, 슈타인호프내가 히틀러라니!는 종이책 단행본 출간 전에 홍보용으로 일부만 연재하다가 유료 연재는 카카오페이지로 갔다. 게다가 런칭 예정인 emcum의 18년도 소설도 있었지만 불명의 이유로 런칭이 취소된 듯하다.
  • 노벨피아에 동명의 웹소설이 있다. # 다만 이쪽은 자유연재물이다.
  • 노벨피아에서 연재하던 '총통 각하 만세'라는 소설이 이 소설의 내용을 사실상 복붙 수준으로 표절한 것이 발견되었으며, 그 과정에서 '단종은 한명회가 필요해요'라는 다른 소설을 표절한 정황 역시 드러났다. # # 이후 종이호랑이 작가는 이에 대한 입장문을 올렸으며 # 당사자는 해당 작품을 내리고 사과문을 올렸다. # #


[1] 물론 실제 HOI 시리즈가 모바일 버전으로 나온 적은 없으며, 패러독스사 게임 특유의 어마어마한 요구 사양을 생각하면 문명: Reign of Power처럼 MMOSLG로 갈아엎지 않는 한 앞으로 나올 가능성도 없다.[2] 부산 출신이며 동래구에 거주하고 있고 병역은 현역 육군 병장 만기 제대다. 작가의 전작인 대영제국의 폐급장교의 주인공과 이름이 똑같다.[3] 죽을 때마다 시간이 더욱 더 뒤로 가는 페널티를 받는다. 처음엔 제1차 세계 대전 이후였으나 회귀하면서 제1차 세계 대전 복무 중인 시간대까지 밀려나 전장에서 개고생을 한다.[4] 일단 기본적인 연설 능력도 뛰어나긴 한데 실제 연설들을 베껴서 써먹는 짓도 자주 한다. 윈스턴 처칠의 우리는 해변에서 싸울 것입니다를 베낀 게 대표적인 예시.[5] 내가 히틀러라니!를 의식했는지 독일에 의해 한국이 해방되면 파시즘 정권이 들어설 확률이 높고, 그렇다고 내버려뒀다가 원 역사처럼 분단되거나 소련에 의해 공산화되는 것은 더더욱 원하지 않기에 온전히 미국에 의해 해방되어 민주주의 정권이 들어서는 것을 최선으로 생각하고 있다.[6] 본인이 개발한 요리 중 치킨이나 티라미수(퓌러쿠헨)나 컵라면(퓌러누델) 같은 음식들은 인기를 끌었지만, 하와이안 피자나 김치 그라탕 같은 것들은 괴식 취급받았다. 그러나 김치 그라탕은 히틀러가 한식을 즐겼다는 사실이 알려지며 현대에 와서야 인기를 끌게 되었다.[7] 실제로도 히틀러는 지독한 금연주의자였으며, 본인 주변에서 담배를 못 피우게 하거나 대중교통에서 담배를 금지한 것도 실제로 일어난 일이다. 작중에서는 아예 흡연자인 군인에게 포상금과 휴가를 미끼로 금연서약서까지 받아내는 걸 보면 현대 한국인이었을 때도 담배를 매우 싫어한 듯하다.[8] 특히 1929년의 대공황, 일본의 침략 행보와 중국의 비상을 예측하였기 때문에 중국에서 엄청난 인기를 얻었고 대공황 발생 이후 세계 곳곳에서 불티나게 팔렸다. 다만 인터넷이나 인공지능, 화성 탐사 같은 너무 먼 미래 이야기는 터무니없다고 여겨질 거라며 뺐다.[9] 원래는 뒤에서 암암리에 배격하려 했으나,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의 편지를 받은 이후 일부러 독일의 여러 주 출신 인물들을 맨 앞 방청객으로 앉힌 후 자신도 오스트리아 출신이고 앞에 앉은 이들도 전부 다른 곳에서 다른 삶을 살았지만 우린 모두 독일인이라는 공통점이 있다며 인종이 아닌 독일인이라는 정체성으로 뭉치자고 연설하여 공식적으로 반유대주의를 배격하였다.[10] 히틀러 입장에서는 그냥 정답지대로 한 것뿐이고 또다시 전쟁을 일으킬 생각은 없었는데 되려 적수들이 히틀러를 안 믿어서 또다시 전쟁을 일으켰고, 히틀러도 어쩔 수 없이 반격해서 승전하고, 그렇게 독일이 또다시 팽창하고, 적수들이 또다시 히틀러를 안 믿어주고...의 반복이 되어버렸다.[11] 다만 영토 확장을 바라는 부하들과 국민들의 눈치를 봐서 벨라루스 서부, 갈리치아까지는 독일의 영토화하기로 했다.[12] 은퇴 선언은 샤를 드골의 하야 연설을 표절했다.[13] 이는 히틀러가 원 역사와 달리 대선에 출마하지 않아서 악감정이 생기지 않은 것 덕분이기도 하다.[14] 21세기면 군주제가 관광상품으로는 쓸모가 있겠지만 지금 시대에는 무슨 소용이 있냐고 했다.[15] 정작 원 역사에서는 본인이 돌대가리 밑에서 굴려지다가 자살한 게 개그 포인트다.[16] 사실 히틀러도 핵무기의 사용이 가져올 결과를 알고 있었기 때문에 사용을 주저했으나, 상대인 스탈린이 어린아이까지 자폭병으로 전선에 갈아넣으면서까지 발악을 하자 희생을 줄이기 위해서 총대를 매었다. 이에 아인슈타인도 데꿀멍해서는 돌아가는 장면이 압권.[17] 이 소식을 의무병으로 복무하고 있는 원 역사에서 하얀 장미를 이끄는 한스 숄이 듣고는 삼류 소설가가 배은망덕하다고 깐다.[18] 원 역사와 달리 홀로코스트도 없고 공산당과 사민당 외의 정당 해산도 없었기에 비교적 고분고분한 태도로 바뀌었다고.[19] 처칠의 연설 중 가장 유명한 "우리는 해변에서 싸울 것입니다. 우리는 계속해서 싸울 것입니다. 우리는 절대로 항복하지 않을 것입니다!"인 연설이다.[20] 아예 내레이션에게 정부 호소인 집합소라고 까이는 처지다.[21] 이때 댓글이 압권이다. '그러게 누가 지랬냐?\'라고(...).[22] 이 대답을 들은 히틀러는 하와이안 피자를 대접했던 바돌리오와는 달리 무솔리니에게 티라미수를 대접한다.[23] 이탈리아인들은 자신들의 음식에 마개조를 가하는 걸 싫어하니 이탈리아 정부수반에게 하와이안 피자를 대접하는 건 외교상 결례다. 사실상 능욕. 히틀러에게 아첨을 일삼는 카이텔도 이 접대만큼은 커버를 쳐주지 못했다.[24] 니콜라이 쿠즈네초프, 알렉산드르 노비코프, 콘스탄틴 로코솝스키, 키릴 메레츠코프 등의 장성들과 세르게이 코롤료프, 발렌틴 글루시코, 미하일 얀겔 등의 과학자들.[25] 히틀러도 원래는 이 정도만 요구할 생각이었으나 측근들이 이 영토들은 이미 손에 넣은 것들이니 더 요구할 필요가 있다는 점, 약한 태도를 보였다가는 소련이 전황을 유리하게 해석할 우려가 있다는 점, 그리고 소련의 전쟁 수행능력을 더 깎아야 한다는 점들을 들어 반대하자 생각을 바꿨다.[26] 다만 초반 밀릴 때의 전문을 보면 남러시아 전체를 넘겨줘야 할 거라 생각하긴 했다.[27] 후퇴 금지, 작전 회의에 자기 멋대로 참여하기, 히틀러 벤치마킹한다고 대역을 썼다가 대역이 사망함 등등 세기도 어려울 정도다.[28] 특히 유대인들에 대한 탄압이 더 심해졌는데, 원 역사의 나치 독일이 워낙 유명해서 그렇지 러시아도 유서 깊은 반유대주의 국가인데 여기서는 나치 독일이 유대인에게 호의적인 만큼 반대로 소련의 유대인 탄압이 더 심해져 소련 내의 유대인들은 대부분 유대인 자치주로 강제 이주당하고 반발하는 이들은 처형되거나 굴라그로 보내졌다. 원 역사에서 유대인 자치주로의 이주는 어디까지나 자원 형식으로 이뤄졌고 이주자에게 지원도 해줬던 걸 생각하면 사실상 소련판 홀로코스트로 변모한 셈이다. 그런데 쿨리크가 쿠데타를 일으키자 자치주의 유대인들이 이를 틈타 녹우크라이나가 있던 지역에 이스라엘을 건국하고는 하켄크로이츠를 휘두르면서(???) "히틀러 만세!(???)"를 외치면서 격렬하게 저항해댔다. 천하의 히틀러도 이 소식을 듣고는 어이없음에 멘탈이 나가서 뇌정지가 왔을 정도였다.[29] 화력은 T-34와 동급, 기동성은 살짝 우세, 방호력 우세로 전차 자체의 성능은 T-34의 상위 호환이지만 생산성에서는 T-34를 따라오지 못한다는 평을 받는다. 차체 중심이 전면에 쏠려있어 신뢰성도 T-34보다 떨어지는 것은 덤. 거기다 화력도 작중 88mm를 도입하고 있는 독일에 밀린다. 제식명은 T-43으로 변경되었다.[30] 앞의 두 사건과 달리 히틀러의 짓이 아니었는데, 존 에드거 후버가 한 짓이라는 게 암시된다.[31] P-80 슈팅스타, F-84 썬더제트, F-86 세이버, F2H 밴시, F9F 팬서 등.[32] M46 패튼이 차체 장갑 150mm, 주포 190mm, 중량 50t으로 개발되고, 그 외에도 차체 정면 150mm, 포탑 정면 300mm, 측면 200mm, T53 120mm 전차포를 탑재한 M29 중전차, M1 240mm 곡사포를 탑재한 M92 자주포 등이 개발되었다.[33] 태도가 다른 전범들과 같이 사형을 선고하게 되면 미국의 일방적인 보복으로 보이게 될 점을 우려한 면도 있다.[34] 히로히토가 처형당한 후 일본 각지에서 수천 명이 히로히토를 따라서 자살했다고 한다.[35] 스웨덴은 영국의 노르웨이 폭격에서 자국민이 사망하여 참전, 덴마크는 독일군의 자국령 통과를 허락했다가 영국에게 폭격당해 참전하였다.[36] 전함 3척(리나운, 워스파이트, 후드) 격침, 항공모함 3척(글로리어스, 커레이저스, 퓨리어스), 중순양함 2척(1척은 노르웨이군이 격침), 구축함 7척 이상 격침.[37] 구축함 16척, 순양함 7척, 전함 3척(리슐리외급 전함 리슐리외, 됭케르크급 전함 됭케르크, 스트라스부르), 항공모함 1척(조프리급 항공모함 조프리).[38] 리토리오급 전함 리토리오와 비토리오 베네토, 콘도티에리급 경순양함 4척, 구축함 일부.[39] 이때 처음부터 힘으로 밀어붙인 건 당연히 아니고 두 차례에 걸친 경고부터 했다. 1차 경고는 당연하게도 씹혔고 2차 경고에서는 유고 정부 측도 독일이 진심이라는 걸 뒤늦게나마 눈치까고 경고를 수용하려 했으나 이전까지 유고의 거짓 선전에 홀린 유고 국민들이 잘 되어가던 전쟁이 독일 때문에 망하게 생겼다며 분노해 독일 대사관을 습격해 그 직원들을 죽이거나 강간해버리는 사고를 치고 만다. 유고 정부는 당연히 경악하면서 이번 일은 유고 정부와 무관하며 범인들을 수사 중이라고 독일에 해명했지만 이미 독일의 분노는 임계점을 넘어버렸고 결국 대규모 침공이라는 결과로 돌아온다.[40] 독일의 영역은 본진인 유럽, 중동, 중앙아시아, 인도, 아프리카의 프랑스, 이탈리아, 스페인, 포르투갈 식민지와 독립국들이다. 중국은 공동 영향권.[41] 독일도 소아마비 백신 개발에 도움을 주긴 했지만 어차피 미국이 개발을 주도한 이상 굳이 지분을 주장해서 미독관계를 해칠 필요는 없었기 때문에 순수하게 축하하는 메시지만 보냈다.[42] 이때 영국을 조질 생각에 신난 육군 병사들의 묘사가 압권이다.[43] 이 과정에서 자유 프랑스, 네덜란드, 체코슬로바키아, 폴란드, 벨기에, 룩셈부르크 등 영국에 있던 망명정부들도 같이 도망쳤다.[44] 구축함 16척, 순양함 7척, 전함 3척(리슐리외급 전함 리슐리외, 됭케르크급 전함 됭케르크, 스트라스부르), 항공모함 1척(조프리급 항공모함 조프리).[45] 덕분에 페탱의 프랑스 정부는 비시로 가지 않고 그대로 파리에 머무르게 되면서 비시 프랑스라는 단어는 탄생하지 않게 되었다.[46] 전함 2척(리토리오급 전함 리토리오, 비토리오 베네토), 경순양함 4척(콘도티에리급 경순양함), 구축함 일부.[47] 영국의 노르웨이 폭격에서 자국민이 사망해 참전했다.[48] 슬로베니아는 독일에 할양, 크로아티아 독립, 메지무레와 바라냐는 헝가리에 할양, 마케도니아는 불가리아에 할양, 몬테네그로 독립, 코소보는 알바니아에 할양.[49] 불가리아에게는 서부 트리키아 할양.[50] 실제 역사에서 OUN-B는 나치도 곤란해할 정도로 제노사이드에 협력하다 못해 폭주했기에 이를 막기 위함이다.[51] 직접 선전포고한 국가들 외에도 불가리아, 터키, 그리스, 포르투갈 등의 남유럽 국가들이 독일군의 자국 내 군사기지 이용을 허락하는 등 유럽 내에서 소련에 우호적인 국가는 영국을 빼면 씨가 말랐다. 그 영국도 소련이 된통 당하는 걸 보고 바로 참전하지 않고 간을 보고 있는 중이다.[52] 다만 루스벨트와 달리 듀이는 미국이 지원해준 만큼 목재, 광물, 금괴 등을 받아오고 있으며 극동의 항구 및 기지를 조차하는 등 받을 것은 받아먹었다.[53] 사실 미국의 참전은 어느 정도 예상되고 있었는데 최종 보스를 맡아줄 것으로 예상된 소련이 너무나도 압도적으로 처발렸기 때문(...). 그렇기에 밸런스 패치를 위해서라도 소설상의 미국의 대독전 참전은 필요한 거 아니냐는 이야기가 나왔었다. 마침 작가가 모티브를 얻은 것으로 추정되는 게임 하츠 오브 아이언 4에서도 루스벨트의 특성이 독일 혐오자라 나오기에 이것도 복선 아니었냐는 이야기도 있다. 다만 게임에서는 민주독일 루트를 갈 경우 민주국가끼리 전쟁이 안 되기에 남미 건드리는 게 아닌 이상 미국이 독일 때릴 일은 없다. 그런데 게임에서도 민주독일의 선결과제는 히틀러 축출(...)이라 히틀러가 있는 한 어지간해선 미국과의 전쟁을 피하긴 어렵다. (물론 원 역사에서는 히틀러는 집권한 이후 독재정을 펼치긴 했으나 집권을 하는 과정은 민주적 절차를 거치긴 했다. 그래서 작가도 1차대전 시기 히틀러에 주인공을 빙의시킨 것으로 보인다.)[54] 당연히 이들은 민간의 열렬한 지원을 받았고, 이들을 위해 무료로 변호를 해주겠다는 변호사들이 쏟아졌다.[55] 아인슈타인이 독일에 남으면서 핵무기의 존재 자체가 우란프로옉트가 성공한 뒤에나 알려지며 맨해튼 계획이 한참 뒤로 미뤄졌고, 소련이 독일에게 패배하며 소련의 대일전 참전 가능성도 없어지면서 일본의 항복을 받아내려면 몰락 작전 정도는 시행해야 했기 때문이다.[56] 이때 영국 망명정부를 의식한 미국이 인도인 판사를 임명하지 않아 친일 성향의 라다비노드 팔이 임명되지 않았고, 원 역사에서 불기소된 이들도 대부분 기소되었고 심지어 히로히토마저도 전범재판에 회부되어 사형을 선고받는 등 재판이 더욱 철저하고 강경해졌는데, 독일이 모스크바에서 치르는 전범재판을 의식해 정의로운 이미지를 챙길 필요가 있었고, 냉전에서 일본의 중요성이 낮아져 미국이 굳이 일본에게 자비를 베풀 이유가 사라졌기 때문.[57] 이때 베트남에서 호찌민이 집권하도록 지원하고 친선을 맺어 베트남 전쟁 가능성도 사전에 차단되었다.[58] 아이러니하게도 유럽 전체가 독일의 손에 떨어진 덕분에 원래라면 마셜 플랜에 들어갔을 돈이 미국에 남아서 무기 개발에 투자되었기에 원 역사보다 더 빠르게 개발할 수 있었다.[59] 미국의 영역은 본진인 북미, 중남미, 아이슬란드, 소련, 동아시아, 동남아시아, 오세아니아, 사우디아라비아, 아프리카의 영국, 벨기에 식민지다. 중국은 공동 영향권.[60] 공교롭게도 작중에서 일본이 항복한 날이 1944년 6월 25일이다.[61] 결국 한국 관련 부분은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나고도 한참 뒤 히틀러가 직접 방한하면서 나오게 되었다.[62] 역사적으로 보면 말이 안 되는데 미국은 참전을 결정하고 바로 언론부터 통제에 들어갔기 때문에 저런 폭로를 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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