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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하십시오.위에 쓰인 글자는 "BRITS OUT! (영국 놈들은 꺼져라!)"[1]
위쪽 사진의 대원들이 들고 있는 소총은 AR-18[2]이다.[3]
1. 개요
영어: Irish Republican Army아일랜드어: Óglaigh na hÉireann
아일랜드의 무장단체. 1910년대 말 아일랜드 독립전쟁에 뛰어든 독립군으로 시작해 각 시기별로 IRA의 이름을 쓴 수많은 단체가 있었으나 다른 설명이 없이 언급할 경우의 IRA는 1969년부터 존재해온 Provisional Irish Republican Army, 즉 "임시 아일랜드 공화국군"[4]이라는 단체를 일컫는다. 1970~80년대에는 많은 테러를 행했으나 2000년대 들어 온건주의 노선을 표방하면서 무장 투쟁을 포기한다는 공식 입장을 밝혔다.
IRA는 1916년 부활절 봉기 이후 마이클 콜린스, 리처드 멀카니 등 아일랜드 독립군의 잔여 세력이 재규합하여 결성한 것으로 시작되었다. 1919년에서 1921년까지 영국군과 싸우다가 결국 아일랜드 독립을 이루어냈으나 1922년 영국-아일랜드 협정에서 영국계 주민이 다수인 얼스터 지방은 영국 내에 잔류한다는 조건이 문제되어 이에 대한 찬성, 반대 입장으로 갈라져 IRA도 양분되었다.
이후 협정에 찬성한 쪽은 현대 아일랜드 국방군의 전신이 되었고 반협정 IRA(Anti-Treaty IRA)라고 불린 반대파는 여전히 영국은 물론 독립국 아일랜드 정부와도 싸우면서 무장 투쟁을 계속 해 오다가 결국 50~60년대에 들어서는 말라 죽어가는 사멸 직전의 조직이 되었다.
명칭에 유의해야 하는데 IRA가 칭하는 "아일랜드 공화국군"이란 아일랜드 공화국(Irish Republic)의 군대라는 뜻이다. Irish Republic은 1919년에 아일랜드 독립진영이 선포한 공화국을 말하는 것이며 현재의 아일랜드(Republic of Ireland)와는 개념적으로 다르다.
2. 아일랜드 공화주의 준군사조직의 계보
- 1760년대 백의당(Whiteboys) - 영국인 지주의 수탈에 저항하기 위한 아일랜드 농민들의 비밀결사. 흰 옷을 입어 피아식별을 했다.
- 1791년 연합 아일랜드인회(SUI) - 프랑스 혁명의 영향을 받아 만들어졌고 1798년 프랑스 공화국의 지원을 받아 반란을 일으켰으나 진압되었다.
- 1810년대 리본멘(ribbonmen) - 천주교도 농민들의 비밀결사. 1830-1850년대에 개신교도 단체인 오렌지멘과 국지전 수준의 항쟁을 벌였다.
- 1842년 청년 아일랜드당(YI) - 1848년 혁명의 일환으로서 봉기를 일으켰으나 진압되고 가담자 대부분이 호주 유형에 처해졌다. 이들이 프랑스 공화주의자들에게 받아 온 삼색기로부터 현재의 아일랜드 국기가 유래되었다.
- 1858년 아일랜드 공화주의 형제단(IRB) - 청년 아일랜드당의 재건세력.
- 1913년 아일랜드 의용군(IVA) - 부활절 봉기 주도세력 중 민족주의 조직.
- 1914년 아일랜드 여성평의회(C na mB) - 부활절 봉기 주도세력 중 여성조직.
- 1913년 아일랜드 시민군(ICA) - 부활절 봉기 주도세력 중 사회주의 조직.
- 1917년 원조 아일랜드 공화국군(IRA) - IVA의 재건조직. 아일랜드 독립전쟁 주도세력.
- 1922년 조약 찬성파 아일랜드 공화국군(PTIRA) - 현재의 아일랜드군의 전신.
- 1922년 조약 반대파 아일랜드 공화국군(ATIRA) - 아일랜드 분단에 반발, 아일랜드 내전을 일으켰으나 진압되었다.
- 1969년 공식 아일랜드 공화국군(OIRA) - 마르크스주의 세력. 1972년 무장투쟁 포기.
- 1974년 아일랜드 국민해방군(INLA) - OIRA의 무장투쟁 포기에 반발한 조직원들이 형성. 1998년 무장투쟁 포기, 2009년 무장해제.
- 1986년 아일랜드 인민해방기구(IPLO) - INLA에서 제명당한 조직원들이 형성. 마약범죄 등의 이유로 1992년 PIRA에 의해 강제해산.
- 1969년 임시 아일랜드 공화국군(PIRA) - 강성 민족주의 세력. 북아일랜드 분쟁의 주요 참여 세력. 1994년 무장투쟁 포기. 2005년 무장해제.
- 1986년 연속 아일랜드 공화국군(CIRA) - PIRA 이탈세력 중 소수파.
- 2006년 오글리 너 헤런(ÓnahÉ)
- 1997년 진짜 아일랜드 공화국군(RIRA) - PIRA 이탈세력 중 다수파.
- 2012년 마약에 반대하는 공화당 조치(RAAD) 및 소규모 무장세력과 합병하여 New IRA라 자칭. 그러나 여전히 그냥 RIRA라고 스스로를 부름.
3. 독립
아일랜드 독립 전쟁 이후 1921년 12월 6일 조약을 체결하여 아일랜드는 독립하였다.4. 아일랜드 내전
그러나 영국에서 제시한 독립 조건은 아일랜드의 '완전한' 독립을 지지하는 측에게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들이 많았다. 이에 대해 찬반 의견이 대립하여 영국을 상대로 힘을 합쳐 싸우던 IRA는 분열, 서로에게 총부리를 돌리고 내전을 벌인다.여기서 조약 반대 측이 찬성 측에 의해 궤멸에 가까운 타격을 받으면서 몰락해 IRA는 분열되었다.
5. 북아일랜드 분쟁
다 죽어가던 IRA가 다시 힘을 키워 20세기 후반 서유럽 최대의 무장 투쟁의 핵심에 있는 단체가 된 것은, 1960년대 후반 북아일랜드 분쟁의 시작과 IRA의 분열 때문이었다. 1960년대 후반 북아일랜드에서는 다시 가톨릭계 주민들과 영국계 성공회 주민들의 분쟁이 터졌는데, 말이 분쟁이었지 사실상 수적으로나 정치, 사회, 경제적으로나 압도적인 우위인 개신교 영국계 주민들의 일방적인 가톨릭 박해에 가까웠다.그러나 이 상황에서 IRA는 공식적으로 전통적인 가톨릭 민족주의가 아닌 마르크스주의를 이념으로 채택하고 있었고, 무엇보다 세력 자체가 너무도 약해져서 효과적으로 가톨릭 주민들을 보호하지 못하였다. 이에 반발한 IRA 내부의 세력들이 IRA를 탈퇴하고 PIRA(Provisional Irish Republican Army)를 세우고 잔류한 IRA는 스스로를 OIRA(Official IRA : OIRA)로 부름으로서 IRA는 양분되었다.
초기에는 IRA의 그나마 남아있는 전력을 가지고 있었던 OIRA가 더 세력이 강하였으나, OIRA는 무장 투쟁을 포기한 반면 PIRA는 가열찬 투쟁을 벌여 점점 더 가톨릭 주민들의 지지를 얻게 되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1972년 영국군 공수부대가 데리 시에서 평화적인 시위를 벌이던 비무장 시위대에게 발포하여 13명의 민간인이 죽은 피의 일요일 사건을 계기로 PIRA는 대대적인 단체로 성장하게 된다.
1970년대면 세계 대전이 끝난지도 시간이 꽤 흘렀고 1960년대의 각종 시위들도 끝물을 보이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선진국 중에 선진국이라는 영국에서 갑자기 이런 상황이 발생한 것이다.
피의 일요일 사건 당시만 해도 북아일랜드의 가톨릭 주민들은 영국 정부를 적이 아니라 개신교 주민들의 박해에서 보호해 줄 중재자로 보았으나, 이 날을 계기로 북아일랜드에서는 영국 자체의 지배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분위기가 널리 퍼졌다. 그리하여 이 날부터 IRA는 줄기차게 30년에 가까운 세월을 영국군과 프로테스탄트계 무장 세력을 상대로 자기 나름대로의 의로운, 또 외로운 투쟁을 벌였다.
투쟁 과정에서 당시 각종 테러 사건을 통해 영국과 한창 각을 올리던 무아마르 카다피의 리비아와, 피델 카스트로의 쿠바, 로비와 머릿수, 언플로 인해 연방정부와 치안 당국이 눈을 감아 준 미국의 아일랜드계 미국인들의 지원을 받아 공간적으로 상당히 제한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돌격소총과 RPG, 심지어 스팅어 대공미사일도 보유해 저강도 분쟁을 벌이기에는 충분한 화력과 물리력까지 얻었다.
뿐만 아니라 팔레스타인의 PLO와 서로 교관과 훈련 장소를 교환하기도 하고, 저 멀리 중남미 콜롬비아의 FARC와도 관계를 맺는 등 전 세계로 아들딸들을 보낸 아일랜드의 역사적 전통에 충실하게 범세계적인 커넥션까지 구축했다. 여기에 전직 영국군 출신 인사들도 받아들일 정도로 양적 규모도 커졌다.
이후 IRA는 영국 왕족인 루이 마운트배튼 백작[5] 암살 사건으로 영국을 뒤흔들게 된다. 1979년 8월 27일 IRA는 마운트배튼 백작이 요트에 폭탄을 설치하여 끔살해버렸는데, 이 과정에서 동승한 가족 일부와 선원도 같이 사망했다. IRA는 엘리자베스 2세에게 '피의 일요일' 사건으로 죽은 민간인 희생자에 대한 복수라고 발표하였다. IRA의 성명서 원문에선 아예 '살해'(murder)가 아니라 사형(execution on Lord Mountbatten)을 했다고 표현했다. IRA를 지지하던 현지 언론은 "영국 왕족도 바다 위에서 죽으니까 한낱 물고기 밥이 되었을 뿐이다."라고 찬양했던 적도 있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같은 날 IRA는 한 건의 폭탄 테러를 더 감행하여 북아일랜드 워렌포인트(Warrenpoint)에서 영국 군인 18명이 사망하기도 하였으나 마운트배튼 백작이 원체 거물이었다 보니 이 사건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6]
이들은 지속적으로 영국의 정부 요인을 노린 테러를 행하면서 영국군에 대한 공격도 멈추지 않았다. 결국 해마다 영국이 북아일랜드에 쏟아붓는 인명과 예산은 날로 불어났고 그에 비례해서 IRA의 활동도 더욱 과격해지기 마련이었다. 북아일랜드 시가지에서 L1A1 SLR을 쓰고 있는 영국군 병사들이 찍힌 사진에는 이런 안타까운 뒷배경이 있다.
그러나 문제는 영국군만이 아니라 전혀 관계없는 민간인들까지 말려들어서 피해를 입는 일이 늘어나는 데에 있었다. 이를 구실로 내부적으로도 IRA를 비난하는 여론이 높아졌고 냉전이 해체되면서 화해 무드도 불겠다, 이래저래 테러 활동이 좋은 소리를 듣지 못하게 되자 1990년대 들어 신페인당[7]도 강경 노선에서 전환하여 테러보다 민주적인 정치적 투쟁으로 아일랜드 통일을 달성하겠다고 점차 노선을 바꾸게 된다.
이럼에도 불구하고 아일랜드 민족주의파, 얼스터 연합주의파, 영국 정부 사이의 지지부진한 교섭으로 인해 정세 불안정이 계속되다가 1998년 아일랜드 정부, 영국 정부와의 3자 협상으로 벨파스트 협정을 체결했으며, 신페인당과 영국과의 협상을 통해 2005년에는 공식적으로 무장 투쟁을 철회하고 비축한 무기들을 파기함으로서 총이 아니라 선거로 투쟁 방식을 바꾸었다. 아직 갈등의 골은 크지만 20년 전 당시만 해도 이 문제는 거의 발칸반도 급 문제로 답이 없다고 취급되었으니 장족의 발전을 이룬 것이다.
6. 분열과 현재
굿 프라이데이 협정 이후 IRA 조직원의 대다수는 신 페인으로 흡수되었으며, 이 때문에 신 페인은 오랫동안 과격파 이미지를 벗지 못하고 군소정당에 머무르다가 2010년대 이후 경제위기를 발판 삼아 북아일랜드의 주류 민족주의 정당이었던 사회민주노동당을 대체하고 민족주의 좌파 진영의 1당 자리를 차지했다. 한편 남쪽의 아일랜드 공화국에서도 역시 신 페인의 지지율이 고공행진 중으로, 특히 브렉시트 이후 섬 전체에서 과거와는 달리 진지하게 아일랜드 통일 담론이 대두되고 있는 상황이다.그러나 협정에 반발한 소수의 과격파는 무장 해제에 반대하며 지금까지도 산발적으로 테러를 반복하고 있는데, 이런 무장 투쟁을 일으키는 사람들은 이후 리얼(REAL) IRA라고 지칭되고 있다. 1986년 PIRA에서 갈라져 나온 아일랜드 공화국군 연속파(Continuity Irish Republican Army; CIRA), 1997년 PIRA의 무장 투쟁 포기에 반발해 나온 아일랜드 공화국군 진정파(Real Irish Republican Army; RIRA) 등이 있다. 그리고 2012년 7월 26일, 이런 잔존 분파들의 대부분이 새로운 IRA(New IRA)를 구성하였다.
이들은 성명을 통해 '영국이 북아일랜드에서 철수해야만 아일랜드의 자유를 얻기 위한 무장 투쟁을 피할 수 있을 것'이라고 하며 '도발과 분쟁을 선택한 것은 우리가 아니라 영국'이라고 주장하였다. 이들 CIRA와 RIRA는 아일랜드 정부가 지정한 불법 단체이며, 영국 정부, 미국 정부는 CIRA, RIRA를 테러 조직으로 규정한다.
CIRA는 세력이 작아서 2000년대 중반 이후 별 활동을 않고 있다. RIRA는 마약상이나 갱스터 같은 범죄자들과도 연루되어 있으며, 특히 더블린에서 이러한 아일랜드 마피아 같은 범죄자들과 제휴 및 협력, 혹은 갈등으로 갱전쟁까지 벌인 혐의로 비난받고 있다.
한동안 잠잠했던 상황이 브렉시트로 인해 바뀌어버렸다! 브렉시트 후에는 큰 사건은 없지만, 무기 소지 등 체포는 이어지고 있다.#
이들로 인해 여전히 북아일랜드 경찰의 모든 경관들은 영국에서 유일하게 총기를 소지하고 다닌다.[8]
7. 장비
- 배럭 버스터 (Mark-15 Barrack Buster, Barrack buster)영어 위키 - 1972년부터 현재까지 IRA이 주로 애용하는 수제 박격포. 비뢰포와 유사한 수제 박격포이다. 수제 무기라서 정밀 타격은 기대하기 어렵지만, 재료를 구하기 쉽고 가격이 저렴하고 북아일랜드 주둔 영국군과 왕립 얼스터 경찰과 친영 세력인 개신교도들에게 속을 박박 긁어 주는 효과가 있다. 물론 압수당해 몇번이나 파괴되지만 앞서 말한 장점 덕에 또 만들어서 쓰고 있을 정도(상황에 따라 개량되기도 했다). 이것 때문에 다우닝 가 10번지 문을 철문으로 바꾸게 한 정도.[9] 뿐만아니라 1994년 히스로 공항도 포격하는 사건(1994 Heathrow mortar attacks, Heathrow mortar attacks)이 발생했다. 여담으로 저 멀리 일본에서 신좌파(新左翼)들이 나리타 국제공항 공격할 때 쓴다. 물론 IRA이 쓰는 것과 다르다.
8. 북아일랜드 IRA에 대한 관점
8.1. 옹호론
북아일랜드 가톨릭교도들 상당수에게는 애국자라고 생각되기 때문에 아일랜드 출신 가수 시네이드 오코너를 비롯한 이들은 "그들이 테러리스트라고? 그렇게 따지자면 영국은 테러 유발국가 아니던가?"라면서 옹호하는 경우도 많다.사실 옹호론과 반대론을 떠나 영국 정부가 아일랜드에 못할 짓을 한 것은 역사적 사실이며, 억울한 아일랜드인들을 잡아다 IRA로 몰아가는 일도 분명히 있었다. 영화로도 제작된 제리 콘론(Jerry Conlon)의 길드포드 4인(Guildford Four) 사건이 가장 잘 알려져 있지만 이는 새발의 피일 뿐이다.
무엇보다 이들의 테러 활동의 근원은 영국의 억압적인 지배에서 시작되었다. 당시 영국 정부는 북아일랜드인들을 무고하게 잡아가둬서 몇 달 정도 구타하고 심문한 경우가 상당히 많았다. 그래놓고 도저히 증거를 찾을 수 없어서야 풀어준 사례가 굉장히 많다. 고문 후유증이라든지 트라우마, 직장에서도 쫓겨나며 경제적인 타격이라든지 여러 모로 극심한 피해를 당하자 북아일랜드인들은 영국에 대한 증오로 이를 갈며 IRA에 스스로 들어온 사람도 많았다.[11] 이러다 보니 시네이드 오코너가 옹호한 것도 무리는 아니다. 특히 IRA에 대항한다는 명목으로 개신교 측에서 조직한 반IRA 폭력단체(예: UDA(얼스터 방위협회), UVF(얼스터 의용군), OV (주황 의용군))가 영국 정부의 비호하에 북아일랜드인들에게 폭력과 사적제재, 살인을 일삼았다.[12] UVF가 1974년에 벌인 더블린 폭탄 테러에서는 약 33명의 사상자가 나왔으며, 이들이 죽인 가톨릭 신자들의 숫자 또한 수백 명에 달할 정도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IRA 측은 적어도 가능하다면 민간 시설을 대상으로 한 테러는 사전 경고를 하거나, 테러의 목표도 일반적으로는 개신교 신자 친영파 민간인이 아니라 북아일랜드 왕립 경찰단, 영국군 등의 '교전 상대'를 대상으로 설정했지만, UVF와 UDA 등의 친영파 계열의 무장 단체들은 교전 상대와 일반 민간인을 가리지 않고 무차별적으로 가톨릭계 민간인들을 학살했다. 당장 희생자 비율만 봐도 IRA 측은 군대나 경찰, 개신교계 민병대 등이 70%, 민간인이 30% 정도인 반면 개신교계 무장단체는 그 비율이 정반대이다.
분쟁기간 내내 친영파 무장집단들은 반영 민족주의파 무장집단중 가장 큰 PIRA는 커녕 훨씬 소수파인 마르크스주의 계열 INLA (Irish National Liberation Army 아일랜드 민족해방군) 같은 소규모 무장세력이랑 겨우 맞먹을 만큼의 세력밖에 없었고, 그나마 가장 숫자가 많은 얼스터 방위 협회(Ulster Defence Association)의 경우 구성원 태반은 사실 IRA의 무장투쟁과 동일선상에서 비교하기도 힘든 정치적으로 친영파 동네 어르신들의 친목회, 정치적 압력 집단으로 활동이 훨씬 컸다. 반면 개별 사건 차원에서 보면 기본적으로 영국군 주둔지, 얼스터 경찰서 등에 집중했던 IRA와 달리 태반이 그냥 인근 카톨릭 시민들이 모이던 술집 같은 순수한 민간인 상업 시설 등이다. 반영 무장단체나 친영 무장단체나 분쟁이 지리멸렬해지면서 마약 밀매 같은 그냥 범죄집단으로 전락하는 현상은 공통이라 해도 북아일랜드 사상 가장 심각한 연쇄살인 사건이며, 심지어 원래 이들이 속했던 친영파 무장단체 본인들도 고개를 저으며 손절하게 만들었던 션킬 도살자 사례도 있다. IRA가 많은 민간인을 죽인 건 사실이나, 말콤 서튼의 보고서에 따르면 친영파 무장단체에 의해 사살된 사람 중 85%가 민간인이었다. 반면 IRA는 약 35% 정도로, 적은 건 아니지만 친영파 무장단체의 그것에 비할 바는 아니다.
북아일랜드 분쟁의 궁극적인 원인을 결국 따지고 보면 1970년대까지도 주거, 취업, 참정권에서 악질적으로 가톨릭계를 차별했던 스토어몬트의 개신교가 지배하던 북아일랜드 의회와 이를 철저히 방임했던 런던 영국 정부에 있다. 북아일랜드는 1970년대까지도 1인 1표의 보통 선거제가 아니라 보유한 재산에 따라 투표권을 주는 제한 선거제를 유지하고 있었다. 따라서 경제력에서 게임이 안되는 가톨릭계가 정치적으로도 제대로 된 영향력을 발휘할 수 없었고, 이러한 차별에 항거해 196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미국의 흑인 민권 운동과 당시 유럽을 휩쓸던 68 혁명의 영향을 받은 비폭력 시민 저항 운동이 강하게 일어났으나, 피의 일요일 사건로 인하여 영국에 대한 불만이 폭발해 '평화적으로는 아무것도 이룰 수 없다'라는 분위기가 확산되어 무력 충돌이 본격화된 것이다.
8.2. 반대론
IRA는 영국 정부나 정부관계처를 공격하는 것 이외에도 경비가 느슨한 민간인, 민간 시설을 노리거나 어린이도 상관하지 않고 무차별 공격하는 경우도 많았다. 1972년에는 10명의 아이들을 키우고 있던 진 맥콘빌이라는 무고한 여성을 증거도 없이 영국의 스파이로 몰아서 납치, 살해하고 암매장한 사례가 있다. 런던이나 맨체스터 등지에서 폭탄 테러를 벌여 수백명을 다치게 하고 마지막으로 1998년 RIRA는 북아일랜드 오머(Omagh)에서 민간 시설이 아닌 정부 청사를 노렸고 실수였다곤 하지만 폭탄 테러를 벌여 6명의 어린이를 포함한 미성년자 12명과 임산부 1명, 그리고 스페인 관광객 2명까지 총 29명의 사망자[13]와 200여명의 부상자를 내며 전형적인 테러리스트의 작태를 보였다. 그래서 위에 나온 시네이드 오코너도 이런 건 옹호하지 않고 비난했다.이러한 막장성은 RIRA가 분리되어 나오면서 더욱 강해졌지만 이전부터 그러한 경향은 있었다. 원래 RIRA가 분열되기 전인 PIRA 시절부터 활동자금을 얻기 위하여 밀수나 협박, 갈취, 강도 등의 범죄 행위를 저지르기도 했고, 그 희생자에는 외국인은 물론이고 정치 사상이 다르다는 이유로 동포인 아일랜드인까지 포함되었다. 원류가 동일함에도 무장 투쟁을 포기했다는 이유만으로 OIRA도 그 공격대상이 된 시기가 있었다. 조폭집단처럼 변해 이권 다툼에 열을 올리고 목격자들에겐 IRA일이라고 침묵을 요구하기도 했다. 25년간의 투쟁동안 이들에 의해 희생된 사람들의 수만 1,700명이 넘는다.#
9. 독립국 아일랜드와 북아일랜드 IRA
독립한 아일랜드는 초기부터 북아일랜드 IRA와 사이가 나빴는데, 이미 20년대부터 IRA는 마이클 콜린스를 암살한 것을 비롯해, 아일랜드 자유국의 온건파 정치가들을 배신자, 민족 분열 책동자로 규정하여 납치, 암살해왔기 때문이다.여기에 영국의 압력까지 겹쳐, 아일랜드 정부는 IRA에 대한 지원과 IRA의 자국 내 활동을 일절 금지하고 해군과 공군을 동원해 IRA의 해외 무기 밀수를 적발하고 테러 자금을 추적해 압수하는 등 IRA에 적대적인 정책을 시행했다. 당시 아일랜드군의 국내 주요 임무가 IRA를 규제하고 감시하는 것이 되었을 지경이었다.
게다가 아일랜드군은 북아일랜드 주둔 영국군과는 충돌이 거의 없었으며, 오히려 IRA단원들의 국경 침투를 감시하고 무기 밀매를 단속하는 등 영국군을 간접 지원하는 역할을 더 많이 했다. IRA는 이에 반발하며 아일랜드의 은행과 우체국 등을 습격해 자금을 탈취하여 군자금으로 쓰는 테러 행위를 일삼았고, 이로 인해 IRA와 아일랜드 정부의 관계도 날이 갈수록 악화되었다.
그러나 개개인의 차원으로 가면 IRA에 동조하는 아일랜드(공화국)인들 또한 굉장히 많았고, 아일랜드 경찰과 국방군 내에서도 이런 동조자들은 많았다. 북아일랜드 분쟁 당시 말로는 서로 적대하는 관계라지만 UDA와 UVF를 비롯한 친영 무장 단체들과 영국군, 왕립 얼스터 경찰단의 내부 협조가 공공연한 비밀이었다면, IRA 또한 아일랜드 국방군과 정부 내의 협조자들 여럿의 지원을 받고 있다는 것도 알 사람은 다 아는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그리고 이들을 처벌한다는 건 IRA나 아일랜드 정부 모두가 공유하는 아일랜드 민족주의에 반하는 행동으로 인식되어 아일랜드 정부도 이런 내부의 불법 커넥션을 알면서도 적극적으로 처벌하지 못했다.
또한 현실적으로 아일랜드 정부는 북아일랜드 인구의 반 이상을 차지하는 친영파 신교도들을 국민으로 수용하기가 대단히 어려웠기 때문에 아일랜드 통일에 소극적일 수밖에 없는 사정이 있었다. 특히 UDA, UVF를 비롯한 친영파 신교도들은 무장민병대를 조직해서 IRA와 충돌했고, 친IRA 성향의 아일랜드인들에게 위협을 가하기도 했다.
그래서 아일랜드 국민 일부는 IRA에 동조하여 단원으로 가담하거나, 불법 모금으로 군자금을 지원하기도 했지만, 일부에서는 과격 IRA 단원의 모금 협박과 절도 범죄, 부유층 납치 인질극 등으로 피해를 입고 IRA 규탄 운동을 전개하는 등 국론이 분열되어 아일랜드에서도 심각한 골칫거리로 취급되어 갔다. 현재도 아일랜드에서 북아일랜드 IRA, 특히 PIRA와 RIRA에 대한 견해는 극과 극으로 갈리며, 국가의 치부로 여겨 언급 자체를 매우 꺼리는 실정이다.
10. 매체에서의 IRA
10.1. 영화
- 세상에서 가장 위험한 사나이(Hennessy)- 1975년 영국 영화이다. 당시 엄청난 논란 속에 영국에선 IRA 옹호영화라고 비난이 터져 제대로 개봉하지도 못하고 독립영화관에서나 잠깐 개봉했다. 헌데, 영화를 보면 둘 다 까기에 돈 샤프 감독(1921~2011)은 "영화나 보고 그런 소리 지껄여라!"고 비난했다. 원제목인 헤네시는 주연인 로드 스타이거 극중 이름이다. 북아일랜드에서 살고 있던 2차대전 참전용사이자 폭탄전문가였던 주인공 헤네시는 IRA와 영국군과 대치 상황에서 진짜 영국군 오발 때문에 아내와 딸이 개죽음당한 것에 대한 복수로 영국 엘리자베스 2세 여왕과 왕실가족들이 영국 국회의사당에서 연두교서를 발표할 때 그들 전부를 폭탄으로 다 폭사하려는 계획을 세우고 (폭탄을 스스로 몸에 감고 주인공 자신도 연두교서에 참석하는 영국 상원의원으로 변장해서 잠입하려고 함) 그것을 눈치챈 영국정보부와 IRA가 같이 막으려고 한다. 해당 제목은 1988년에 일진비디오에서 나온 국내 비디오 제목이다.
- 롱 굿 프라이데이(1980) - IRA 관련 영화는 아닌 갱스터 느와르 영화지만 IRA가 중요한 요소로 나온다.
- 패트리어트 게임(1992)
톰 클랜시 원작 소설을 바탕으로 해리슨 포드가 주연을, 숀 빈이 IRA 소속사망 플래그으로 나온 패트리어트 게임은 닥치고 이들이 악역으로 나온다. 실수한 동료를 가차없이 쏴 죽인다든지 자신들 목적을 방해한 전직 CIA 요원인 주인공의 아내와 딸에게 테러를 가한다든지, 이런 식으로 묘사하여 북아일랜드에서는 언짢은 반응을 보였고 당시 국내 영화지 로드쇼에서도 IRA를 그저 악당으로 묘사한 영국 봐주기 영화에 지나지 않는다고 깠다. 물론 이런 식으로 한 쪽이 그냥 나쁜놈인 매체가 흔히 써먹는 "일부 극단 과격파" 클리셰가 들어갔다. 악역들은 IRA 소속이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IRA 정식 지휘계통을 개무시한 테러를 벌이고 다니는 건 물론이고, 제지하는 동지들을 죄다 죽여버리기까지 하는 극단주의자들이다. 흥행은 꽤 성공적이었다. (4,500만 달러로 제작하여 전세계에서 1억 7,800만 달러 수익)
- 아버지의 이름으로(1993)
다니엘 데이 루이스, 피트 포스틀스웨이트가 명연기를 보여주고 엠마 톰슨도 나온 영화 아버지의 이름으로는 보면 영국 정보부야말로 개객끼라고 할 정도로 정반대이다. IRA를 찬양하지 않으나, 영국 정보부는 1974년에 벌어진 IRA폭탄 테러 용의자로 무고한 사람인 제리 콘론(1954~2014)을 IRA로 몰아 잡아가서 고문한다. 당연히 제리는 울며불며 모른다고 1년 넘게 버티지만 1976년에 영국 정보부는 아버지 주세페 콘론까지 잡아와 고문하는데, 주세페는 아들을 위하여 자신이 용의자이며 아들은 아무것도 모른다고 거짓 자백을 한다.
세월이 지나 무려 14년 동안 복역하던 제리는 1989년 무죄 판결을 받고 나오지만 아버지 주세페는 고문을 견디지 못하고 1980년에 옥사하였고, 제리는 석방을 기뻐할 수가 없었다. 이 끔찍한 사건은 실화이다. 이걸 보면 IRA가 나올 만하다고 할 정도로 패트리어트 게임과 이걸 보면 극과 극이다. IRA에 휘말린 일반인이 14년 동안 고문받던 이 사건에 대하여 토니 블레어 전 영국 총리가 1998년에서야 사죄했을 정도로 영국에서 감춘 추악한 실화인데, 톰 클랜시는 이 영화를 봤냐는 질문에 안 봤다고 말을 피했다고 한다. 이 작품도 1,200만 달러로 만들어져서 전세계에서 7,000만 달러 정도 벌어들이며 흥행도 성공하고 1994년도 베를린 영화제 대상인 황금곰상도 받았고 오스카에서 감독상 부분에 노미네이트(짐 셰리던) 되는 등 평도 성공했다. 제리와 어머니 사라(1926~2008)는 죽을 때까지 영국 정보부를 비난하고 아버지와 남편의 억울한 죽음을 알리며 활동했다. 영화 끝나고는 자막으로 '이 영화에 나온 것처럼 온갖 고문과 인권 침해를 저지른 이들은 누구 하나 처벌당하지 않았다'고 나온다. 다만 진짜 폭파범인 IRA 단원 조도 상당히 눈치없는 비겁자로 그려진다.
- 더 복서(1998): 위의 아버지의 이름으로와 같은 감독(짐 쉐리단), 같은 주연(다니엘 데이 루이스)이 만든 영화다. 이 영화 역시 실화다. 이 영화의 IRA 과격파는 평화로운 현장에 테러를 가하거나 평화 제스처를 취한 영국인 경찰을 살해하며 같은 아일랜드 동포도 테러, 살해하는 등 어두운 면을 묘사하며 IRA의 테러에 비판적인 시각을 보인다.
- 크라잉 게임(1993)
- 마이클 콜린스(1996)
- 데블스 오운(1997)
데블스 오운은 중립적으로 본다. 패트리어트 게임에서 IRA 테러범과 미워하여 맞서던 해리슨 포드가 여기에선 아일랜드계 미국인 경찰인 톰으로 나오며 1972년 블러디 선데이 학살로 아버지가 억울하게 영국 경찰에게 사살당한 걸 보고 자라나서 영국에 대하여 증오를 가지고 IRA에 들어간 주인공 프랭키를 브래드 피트가 맡았다. 이미 미국인이 된 톰은 처음에는 IRA를 테러범으로 보긴 하지만 그 정체를 모르고 미국에서 무슨 목적을 가지고 거주하던 프랭키와 친해지면서 그의 정체를 알고 고민한다. 테러를 벌이는 것이 옳지 않다고 여기지만 미국은 영국 편을 들어주고 누구도 편들어주지 않은 조국 북아일랜드에 대하여 우린 당하고 있어야 하냐며 따질때 고민한다. 테러에 대하여 부정적이고 그 피해를 따지지만 차별당하고 어렵게 사는 북아일랜드 대다수 사람들 피해를 따지는가?...이런 질문을 한다. 소피의 선택 등으로 유명한 앨런 J. 파큘라 감독 유작으로 이걸 찍고 다음 해, 차기작을 준비하고 기획에 들어갔으나 교통사고를 당해 70세로 죽었다.
- 블러디 선데이(2002)
-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2006)
영국을 대표하는 거장 켄 로치[14]가 감독한 2006년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 수상 작품이다.
- 헝거(2008)
- '71 (한국 제목은 71: 벨파스트의 눈물)(2014)
영국 영화 71은 당시 벨파스트에 파병된 영국군이 낙오되어 살아남는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제법 긴장감 있는 연출에 그 전까지 다루지 않았던 벨파스트 사태의 여러 면을 다뤘으나 민감한 표현들이 있어서 북아일랜드와 영국 양쪽에서 비난을 받았다.[15] 비평은 좋았으나 810만 파운드로 만들어 290만 파운드를 벌어들이며 흥행은 망했다. 2016년 7월 21일에 한국에 개봉했다.
- 더 포리너(2017)
성룡 주연의 영화로 여기서는 그냥 테러리스트 집단으로 묘사된다.
10.2. 만화, 애니메이션
- 마스터 키튼 - IRA 관계자를 죽이는 영국 정보부원이 나온다. 사실 그도 과거에 IRA를 추격하다가 폭탄 테러에 휘말렸고, 부상을 입고 살아남았지만 건물 잔해에 깔린 채로 며칠동안 갇혔는데 동료는 온 몸이 박살나 모가지만 남아 그 시체를 눈 앞에서 맞닿은 채로 그 며칠을 견뎌야 했다. 뭐 중립적으로 이야기하려고 한 셈이지만 결국 IRA랑 상관도 없는 키튼도 방해한다고 죽이려드는 걸 보면...
- 기동전사 건담 00에서 리얼 IRA라는 명칭으로 3화 마지막에 잠깐 등장한다. 무려 400년 동안이나 항쟁했다고.[16]
- 용오 - 한국 정발 이름은 용오인데 일어판 원제는 유고. 여기서에서 IRA를 더 좋게 봐준다.[17] 일본인인 내고시에이터인 유고(한국 정발판은 용오)를 영국 정보부가 잡고 고문한다. 하지만 유고는 IRA에 대하여 테러를 비난하며 중립적으로 나선다. 막판에 영국 정보부원들이 기지를 습격하지만 양복 차림에 깔끔하게 준비한 리더만 남아 일부러 생방송 중인 영국 텔레비전 화면 앞에서 연설한다. 리더는 연설로 욕설같은 건 없지만 은근히 영국 정보부원을 자극하며 유고와 알던 정보부원이 권총을 겨눈다. 하지만 리더는 무서워하긴 커녕 되려 미소지었고 그 뜻을 알아차린 주인공 유고가 막으려 했으나 늦은 다음이었다. 사살당한 리더가 가진 권총은 총알이 없었다. 게다가 다른 휘하 조직원들은 장비나 정보, 모든 걸 깨끗하게 들고 철수한 다음이었기에 텅 빈 기지는 아무 것도 없고 그 리더 홀로 남아 있었다. 그리고 그는 자기 목숨을 바쳐 IRA를 거룩하게 홍보한 것이었다. 방송으로 죽음 전에도 리더는 전혀 비굴하지 않고 멋지게 연설했으며 총알도 없는 걸 그저 닥치고 쏴버린 것으로 북아일랜드 전역에 방송된 터라 화면을 보던 북아일랜드 민중들이 분노하면서 여론이 IRA를 편들어버렸다. 유고는 북아일랜드를 떠나면서 다시 끝도 없는 충돌이 이어진다고 씁쓸해한다.
- 먼나라 이웃나라 - 영국 편에 북아일랜드 문제가 나오지만 2012년 개정판에서 사라졌다. 먼나라 이웃나라/개정판에서 달라진 부분 항목 참조.
10.3. 드라마
- 스트라이크 백 - 시즌 4 6화에서 NATO의 운용사항이 담긴 드라이브를 얻기 위해 IRA가 헝가리 부다페스트에 있는 영국 대사관에 테러를 감행한다.
10.4. 음악
아이리쉬 레벨 송(Rebel song) 참고10.5. 게임
- 명일방주에 귀혼대로 불리는 더블린 세력이 등장한다. 수도가 외세에 털리고, 부패한 군부는 도시에 더티밤을 떨궈버린데다, 귀족들간의 이권다툼이 심화되는 혼돈속에서 귀족들 중 하나의 후원까지 받아내면서 세력이 실제보다 훨씬 더 거대해졌으며 한발 더 나아가 본국 수도 입성에까지 성공한다. 시민 대다수가 암묵적으로 테러세력에 동조하고 거기에 대고 민간인 지역에 더티밤 포격을 갈겨버린 자칭 애국자들의 폭주로 피해를 입은 사람들이 다시 더블린에 합류해 세력이 커지는 과정을 현실과 비교해보면 의외로 꽤나 고증이 잘 되었다. 그렇다고 묘사가 긍정적인 편은 아닌데 일단 같은 타라인도 목적을 위해 서슴없이 죽이거나 당장 더블린의 리더 에블리나는 권력을 위해 타라인들을 장작으로 태워넣고 있다고 비유되며 온건파를 상징하는 전 바지사장이 설립한 신생 더블린조차 합류한 타라 난민들의 인성이 개차반으로 묘사된다.
- 게임 카운터 스트라이크 온라인에서 자경단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한다.
11. 기타
이들이 자신들의 테러 활동을 위해 불법으로 입수, 개조한 미국산, 일본산 무기를 사용한 것 때문에 양국의 IRA에 대한 인식은 그다지 좋지 못하다. 특히 일본의 경우, 이들이 면허 생산한 AR-18이 북미로 수출되었다가 다시 북아일랜드로 흘러들어갔고, 때문에 무기 수출에 대해서 자체적인 규제를 하게 되었다. 계속된 항쟁에 쓰인 결과 AR-18은 과부 제조기라는 불명예스러운 이름이 붙게 된다.물론 AR-18뿐만 아니라 미군의 M16A1과 XM177도 IRA의 손에 노획되었다.
들어간 사람들 중 소년병들도 있었다고 한다. 주로 중, 고등학생의 10대 중순의 나이로, 왜냐하면 영국군이 시위진압이나 테러범 잡다가 민간인을 죽이는 일이 많이 있었고 거기에 무고한 민간인을 IRA로 몰아 잡아가서 고문해서 사망케 하거나 반송장을 만들었고 때문에 유족들이 IRA에 많이 들어갔다. 그러다 보니 복수심에 차서 총을 들게 된 소년병들도 생겨나게 되었다고...
홍콩 경무처의 비호대(SDU)가 탄생한 원인도 삼합회 및 이 단체이다. 영국령이었던 홍콩은 영국항공의 아시아 지부인 영국아시아항공(英亞航空公司)이 한동안 국적기 노릇을 했던 곳으로 영국 이권이 많이 있어서 테러 대상에 포함되었다. 안 그래도 기승을 부리던 삼합회도 손 봐 주고 IRA의 기습 공격도 막을 겸 경찰에 테러진압 특공대를 창설하도록 총독이 지시, 1978년 영국군 SAS에서 교관을 초빙해 와 훈련시킨 PTU(폭동진압 기동대) 대원들을 중심으로 SDU를 창설해 현재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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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위 사진은 IRA가 폭동을 일으켰을 때 여성 IRA 대원이 영국인을 수색하는 사진이다.[2] 이때 AR-18들중 일부가 일본의 호와 공업에서 라이센스 생산했던 총기였다. 평화 헌법에 묶인 일본에서 만든 총이 IRA손에 들어가 영국군을 쏴죽인셈(...)이다. 결국 호와 공업은 AR-18 제조권을 영국에 넘기게 되었다.[3] 맨 아랫사진의 대원은 의외로 서방 무장세력답지 않게 AKM으로 추정되는 소총을 겨누고 있다. 전방손잡이가 달린 것으로 보아 루마니아제로 보인다. 80년대 무아마르 카다피가 IRA에게 지원을 많이 해 줬기 때문에(특히 셈텍스 같은 폭약) IRA 대원들 중 동구권 무기를 사용하는 경우도 은근 있었다.[4] 혹은 아일랜드 공화국군 임시파. 왜 임시인고 하니, 공화국군의 주장에 따르면 현행 체제인 북아일랜드 자치 정부와 아일랜드 정부 모두 불법적인 1922년 분단 조약에 기반하여 세워진 불법 정권이며 한 단계 더 나가 1960년대 말 IRA의 분열 당시의 IRA 최고 군사 평의회도 무장 투쟁과 가톨릭 아일랜드인에 대한 보호를 포기했으니 정통성을 잃었다며 진짜배기 아일랜드 전역의 합법적인 정부는 자신들의 군사 평의회라는 명목으로 붙인 것이다. 즉, 한국어로 그 느낌이 통하도록 적절하게 의역하면 아일랜드 공화국 임시 정부군 정도가 된다.[5] 전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 2세의 부군 필립 마운트배튼의 숙부로 당시 79세의 나이였다. 2차대전 당시 서남아시아 전선 사령관이기도 했다.[6] 사건 이후 IRA가 주류인 지역에서는 "13 dead and not forgotten, we got 18 and Mountbatten"((피의 일요일 날) 열셋이 사망하였고 우린 잊지 않았다. 우린 (영국 병사) 열여덟과 마운트배튼 (백작)을 잡았다)이라는 그래피티가 자주 출몰했다고 한다.[7] 신페인당은 PIRA의 우당(友黨)으로 상호 밀접한 연관이 있다.[8] 반면에 영국 본토 경찰들은 강압적인 경찰의 모습이 아니라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따르는 모범스러운 경찰의 모습을 원하기에 지금도 영국본토내에 무장경찰은 얼마되지 않는다.[9] 1991년 이것을 탑재시키고 위장한 트럭을 이용해 다우닝가 10번지(영국 총리 관저) 입구에다 포격을 가하는 사건을 발생했다. (Downing Street mortar attack)[10] 2000년 IRA이 영국 비밀정보부(SIS)에 공격하는 사건(2000 MI6 attack)에서 이것을 사용하였다.[11] 이로인해 가족의 복수를 한다며 소년병들도 생겨나기 시작했다.[12] 이들의 폭력행위 역시 만만치 않아서 미국 국무부로부터 테러조직으로 지정된 친영파 민병대들도 상당하다.[13] 카톨릭 교도만 18명이 죽었다.[14] 진보적 사고방식으로 북아일랜드에 대한 영국의 태도를 비난해왔기에 영국 보수파와 사이가 나쁜 감독이다. 그의 작품 중엔 노동 문제나 여러 모로 사회 문제를 다룬 작품이 많다.[15] 작 중 등장하는 영국의 정보기관 MRF에 의해 IRA와 신교도 민병대가 놀아나고 폭탄 테러, 목적 완수와 조직 장악을 위해 팀킬까지 시도하는 등 사실상 모두 까기식 표현이 있었다.[16] IRA 저항가요 중 Go On Home British Soldiers라는 노래 가사에 '우리는 두려움 없이 너희(영국)와 800년 동안 싸워왔고, 앞으로도 800년간 싸울 것이다.'라는 가사가 있다.[17] 정확히 말하면 IRA 강경파가 잔혹한 테러리스트라는 것은 부정하지 않지만 역으로 영국 정부의 잔혹한 행태가 그런 IRA 강경파가 나타나게 된 원인이라는 것 역시 명확하게 묘사하는 편이다. 상당히 공정한 시선이 돋보이는 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