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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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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하십시오.
연대
1970년대 1980년대 1990년대 2000년대 2010년대
세기
18세기 19세기 20세기 21세기 22세기
밀레니엄
제1천년기 제2천년기 제3천년기

1. 개요2. 정치, 경제, 사회
2.1. 대한민국
2.1.1. 개괄2.1.2. 정치2.1.3. 경제2.1.4. 사회
2.2. 미국: 20's 시즌 2
2.2.1. 정치2.2.2. 경제2.2.3. 사회
2.3. 일본: 잃어버린 30년의 시작2.4. 중화권2.5. 러시아
3. 문화
3.1. 출판계3.2. 문학3.3. 음악
3.3.1. 서양 음악3.3.2. 한국 음악3.3.3. 일본 음악
3.4. 게임3.5. 패션3.6. 영화3.7. 언론
3.7.1. 정치적 측면3.7.2. 상업적 측면
3.8. 드라마3.9. 방송3.10. 예능3.11. 만화, 애니메이션3.12. 미술3.13. 연극/춤3.14. 스포츠3.15. 두뇌스포츠3.16. 20세기 말까지 대한민국에 존재했던 생활 모습들3.17. 언어3.18. 기타
4. 이 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작품5. 이 시대에 시작었거나 만들어진 것들6. 이 시대에 쇠퇴한 것들7. 이 시대에 나온 말들8. 1990년대에 들어가는 해9. 참고/관련 문헌

1. 개요

서력기원 1990년부터 1999년까지를 가리키는 말이다.

세계적으로는 냉전이 종식되고 미국 주도의 국제 질서가 확립된 시기이다. 그리고 대한민국에서 1980년대 후반부터 이어지고 있던 경제 호황이 정점을 찍었던 황금기이자, 동시에 1997년 아시아 금융위기가 일어나기도 했다.

2. 정치, 경제, 사회

1990년, 동서독 통일과 이듬해 발생한 소비에트 연방의 붕괴 사건 등, 체제 경쟁에서 공산주의 진영이 몰락하고, 자유(자본주의) 세계가 승리하면서 세계 질서는 미국 주도로 재편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의 종전 이후 50여 년간 지속되어 온 냉전 체제가 종식되고 드디어 인류에게 평화의 시대가 찾아 오는가 했지만, 냉전 시절 잠자고 있던 극단적-폐쇄적 민족주의가 기승을 부려 콩고 전쟁·걸프 전쟁·유고슬라비아 내전·체첸 사태·보스니아 내전·코소보 전쟁 등이 세계 각지에서 터졌다.[1]

1990년대는 정보 혁명[2]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시기다. 즉 디지털이라는 정보전달방식이 인류에 첫 등장했던 시기인 셈이다. 정보통신 기술의 획기적인 등장으로 휴대전화, 무선호출기, 고성능 컴퓨터 등 여러 통신 기기들이 등장해 대중화되었다. 특히 월드 와이드 웹으로 대표되는 인터넷의 등장은 세계인들의 삶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는데, 인터넷의 발달로 '국경 없는 세계' 라 불리는 정보망 사회가 구축되는데 성공했고 제약 없이 정보를 주고받을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었다. 물론 인터넷의 발달로 인해 디지털 세계에서의 새로운 문제점[3]이 산재되기 시작한 것도 이때부터이다. 이러한 인터넷의 원년은 Windows 95가 출시된 1995년으로, 대체적으로 이 시기부터 디지털이 인류 사회에 확립된 것으로 본다.

2000년대 까지는 1990년대부터 디지털 시대로 보는 사람도 많았으나 스마트폰 시대가 도래한 2010년대부터 1990년대는 '아날로그'의 시대로 여겨지고 있는데, 정확히는 1990년대는 멀티미디어와 디지털이 처음 시작된 시기로 아날로그와 디지털의 과도기에 가깝다.[4] 이 때문에 세대별로 디지털과 아날로그를 구분하는 시기가 다르게 여겨지기도 한다.[5] 심지어 2020년대 현재는 2000년대 및 2010년대 초반 조차도 아날로그 시대로 보는 경향도 있다. 인터넷을 필두로 한 정보 혁명은 1990년대와 2000년대를 거치며 격변을 가져왔고 결국 2010년대에 스마트폰 등 '스마트'가 붙은 IT기기들이 일상생활 속 남아있는 아날로그 기기들까지 대체하면서 완전히 정착되었으며, 전자 및 IT업계도 1990년대 중반까진 '멀티미디어'를 슬로건에 강조시켰고,[6] 1996년을 기점으로 제품명이나 슬로건 등지에 '사이버'나 '디지털'을 갖다붙였다.[7]

1993년 북미자유무역협정 출범과 우루과이 라운드 타결, 1995년 세계무역기구 출범으로 금융과 경제 영역에서의 세계화신자유주의화가 아주 활발히 진행되어 경제 장벽을 무너뜨려 약육강식이 지배하는 '경제 정글'을 만들어냈는데, 미국은 이런 환경에서 아주 극적인 경제 성장을 이룰 수 있었는데 물론 중남미 지역은 그런거 없었다. 게다가 구미권은 이에 그치지 않고 전세계 경제체제를 미국/유럽식 경제체제로 포맷시키도록 만드는 데 앞장섰고, 이에 따라 '아시아의 네 마리 용'처럼 현지 특화 자본주의나 독자적 경제체제는 통하지 않게 되었다. 그런 연유로 1997년 동남아 경제위기 및 한국 외환위기가 터졌고, 무한경쟁에 따라 빈부격차도 점점 커져 2000년대 들어 20:80 사회로 고정되는 데 기여했다. 또 새천년을 앞두고 세계 도처에서 '반세계화 시위'도 터졌다. 신자유주의가 무르익다 보니 세계 사람들은 자본주의가 유일한 승자처럼 인식돼왔고, 미국의 정치학자 프랜시스 후쿠야마도 저서 <역사의 종말>에서 인류의 역사는 자본주의에서 끝난다고 전망했다.

신자유주의를 앞세운 보수주의가 정국을 주도했던 1980년대와 달리 전세계적으로 ‘신진보주의(신자유주의를 가미한 진보)’의 시대였다. 빌 클린턴토니 블레어가 대표적으로, 1990년대 말 유럽은 대부분 제3의 길 성향의 사민주의 정권이 집권했다. 이른바 ‘장밋빛 유럽’. 다른 한편으로 서구권 등 선진국에서 젊은 층을 중심으로 '정치적 올바름(PC)' 운동이 처음으로 정치권의 주류에 진입해, 일본 자민당, 이탈리아 줄리아노 아마토 내각 등 부패정권을 투표로서 몰아냈고, 미국에선 빌 클린턴 정부의 주도로 '흑인(Black)'을 '아프리카계 미국인(African American)'으로 바꾸기도 했다.

그러나 유럽 경제는 점차 문제점을 드러내기 시작했는데, 북유럽 국가들 중 냉전의 수혜자였던 핀란드가 소련 붕괴로 경제불황을 겪었고, 스웨덴도 마찬가지로 어려움을 겪었다. 서유럽 선진국조차도 과도한 복지비용, 강성 노조, 실업률 증가, 공장 해외이전 등 문제점이 폭로되며 개혁의 목소리가 높아져갔다.

북한은 1990년대 초 소련 등 공산주의 정권 붕괴에도 나라 문을 단단히 닫고 살았고, 1992년 IAEA 핵사찰을 받아들인 후 처음으로 핵개발 의혹이 불거졌다. 1994년 반세기 가까이 집권하던 김일성심장마비로 사망하고, 김정일이 뒤를 이어 1997년 정식 집권 전까지 '유훈통치'란 비정상적 체제로 돌입했다. 하지만 동구권 붕괴와 제3차 7개년 계획 실패, 각종 자연재해, 수교국 감소 등으로 인한 경제난으로 고난의 행군이 시작되어 중국과 러시아 파견 노동자, 함경도 지역 국경지대 주민을 통한 본격적인 북한 주민의 이탈이 시작됐다. 북한에 대한 배급제, 수령에 대한 절대적 충성심과 같은 외부에서 생각하는 클리셰는 이 사건을 기점으로 크게 달라졌으며, 90년대 말부터 시장을 이용하는 것이 대세가 되어갔고 한류가 도시 지역이나 국경지대를 중심으로 알려지기 시작했다.

태국을 시작으로 대한민국,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필리핀 등을 습격한 1997년 아시아 금융위기로 인도네시아에서는 30년간 집권한 수하르토 정권이 퇴진하였고, 1999년에 동티모르가 국민 투표로서 독립을 선언하는 단초를 마련했다. 말레이시아는 외환위기를 헤지펀드 등 해외 금융업계의 농간이라 보고 해외 금융자본을 철저히 봉쇄했다.

동남아에선 미얀마나 라오스 등 몇몇 국가들을 빼고 '민주화와 평화' 진전의 시대가 도래했는데, 필리핀은 1992년 피델 V. 라모스 전 국방장관이 수십년 만에 열린 자유선거로 대통령에 취임해 공산당을 합법화시켜 내전 종식의 기반을 마련했고, 1980년대 이래 무너진 경제 재건에 주력했다. 태국 국민들은 1992년 5월에 목숨까지 걸고 수친다 내각을 퇴진시켜 군부정권을 60년 만에 종식시켰고, 캄보디아는 1993년 UN 감독 하에 독립 이래 최초로 자유선거를 치러서 입헌군주국으로 회귀 후 50여 년에 걸친 내전을 종식시켜 '킬링필드' 이미지를 벗었다.

해체된 구소련 지역에게는 그야말로 헬게이트의 시대였다. 체제전환의 진통과 외국 자본 및 재벌들의 약탈에 나라는 만신창이가 되었고, 유럽 연합에 편입되어 구제를 받을 수 있었던 발트 3국조차도 정치 및 경제적으로 엄청난 고생을 하였다. 1인당 국민소득이 9천 달러에 육박하던 러시아권의 경제는 이 시기 바닥을 찍게 되었으며, 2000년 푸틴의 집권으로 그나마 상승세를 그리는 중이다. 그러나 그 사이에 세력권은 쪼그라들었고 경제는 만신창이가 되었으며 인구는 줄었고, 아직 독립을 못한 무슬림 자치구 체첸과 타타르스탄, 불교도 자치구 칼미크 공화국 등이 자주독립운동을 끈질기게 요구하여 러시아 정부를 궁지에 몰아넣었다.

구소련에 속했던 나라들 말고도 공산권에 속했던 여러 나라들은 사회주의에서 자본주의로 체질개선을 하느라 여러 성장통을 겪어야만 했다. 체코슬로바키아는 그래도 비교적 그 정도가 덜한 편이었지만, 역시 힘들었고, 폴란드도 심한 경기 부침을 겪어야 했다. 내전까지 간 유고슬라비아는 전술한 대로 폐쇄적 민족주의가 기승을 부려 1991년부터 1999년까지 1990년대 내내 전쟁터였던 셈이다. 심지어 쿠바도 1995년 보트피플 사태까지 터졌다. 냉전 시기 중립을 유지해 소득을 챙겼던 스위스와 핀란드도 혼란과 경제위기로 몰아닥쳤다.

반면 아프리카는 이 시기를 즈음해 '폐쇄적 민족주의'가 기승을 부리며 소말리아, 르완다, 라이베리아, 콩고민주공화국, 앙골라 등을 비롯해 내전이 일어나면서 지옥이 되어가기 시작한다. 부족전쟁이 주 원인인데[8] 그나마 이건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소강상태로 접어들지만 적대 관계를 청산한 것은 아니다. 북쪽에서 진짜 무시무시한 폭풍이 몰려오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아프가니스탄도 소련군 철수 후 군벌들이 대립하다 1996년에 탈레반이 정권을 장악해 이슬람 원리주의 국가로 만들었다. 사우디아라비아 부호 출신인 오사마 빈 라덴은 '알카에다'의 수장으로서 1998년 케냐 및 탄자니아 주재 미국대사관 테러를 계기로 반미 무장투쟁의 선봉으로 점차 올라섰다.

이 연대에 음력 윤달이 생겼던 해는 1990년 (5월), 1993년 (3월), 1995년 (8월), 1998년 (5월)이 있다. 이 연대에는 음력 윤5월이 2번 생겼으며, 특히 1998년 윤5월은 20세기 마지막 윤달이었다.

2.1. 대한민국

2.1.1. 개괄

대한민국에서는 1988 서울 올림픽의 성공적 개최로 세계에 위상을 떨치는 데 성공하였고, 사회적으로도 독재 시대의 종식과 1990년대 중반까지 이어지는 장밋빛 경제, 1996년 OECD 가입 등으로 인해 대체로 반은 좋은 시절로 기억되는 경향이 많다.

하지만 경제적 호황과 별개로 시민의식은 이를 뒤따라가지 못해 성수대교 붕괴 사고, 아현동 도시가스 폭발 사고,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 등의 여러 인재(人災)로 인한 참극이 잇달아 일어났던 시기이기도 하다. 인권의식, 권위주의와 부조리도 지금 기준으로 여전히 열악하던 시기다.

1990년대는 1970년대1980년대에 비해 정치적, 사회적으로 굵직한 '역사적'이라 할만한 사건은 많이 없었다. 물론 그와 별개로 1970-80년대 고도 성장기의 반작용(부실공사, 안전의식 부재) 격으로 벌어졌던 대형사고는 참 많이 일어났다. 사실 정치적으로 변동이 없었다고 보기에도 뭐한 게, 1990년 3당 합당 시기 이후부터 PK지역이 보수권으로 넘어가고, 중산층이 보수화되는 등의 변화는 엄연히 있었기 때문이다. 다만, 국민 대다수가 정치에 무관심한 탓인지 그 이전 시대에 비해 눈에 띄는 정치·사회적인 사건이 눈에 덜 띄었던 것은 사실이다.

박정희-전두환의 군사독재가 종식됨으로써 제6공화국 체제하의 형식적 민주주의가 확립되어 진정한 민주주의 국가로 거듭나며 더 이상의 정치 체제상의 변동이 없을 뿐 아니라 공산권의 몰락과 북한과의 군사적 격차가 현저히 커짐에 따라 안보적 위기 역시 줄어들었다.

한편 특유의 기이한 사건들이 많아서 훗날 강한 자만이 살아남는 90년대라는 유행어가 만들어지기도 했다. 문서 참조.
1993년의 서울 중구 명동 거리.[9]

2.1.2. 정치

전체적으로는 보스 정치, 3김 정치로 대표되는 시절로, 정당 간 정책대결은커녕 거물급 정치인들을 중심으로 하는 이합집산이 비일비재했다. 그럼에도 문민정부하나회를 해체했고, 전두환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들을 비자금 횡령 혐의로 감옥으로 보내버리는 등 군정의 잔재가 어느 정도 척결되는 등의 변화는 있기는 했다.[10]

1988년 13대 총선 이후 여소야대 정국 속에서 주도권을 못 잡은 노태우 당시 대통령은 1990년 1월 22일 김영삼 통일민주당 총재, 김종필 신민주공화당 총재와 함께 3당 합당을 선언하고 다음달 민주자유당을 창당함으로서 민자당 중심의 여대야소 정국으로 흘러갔고, 노동운동과 학생운동 등 재야세력에겐 강경하게 대응하는 '공안통치'로 돌입했다. 또 같은 시기 내각제 개헌을 둘러싸고 민정-민주-공화 3개 파벌이 싸우면서 하루도 조용한 날이 없었다. 또 그해 하반기에 보안사 서빙고 분실에서 복무하던 윤석양 이병이 재야인사 같은 민간인 사찰내용을 담은 디스켓 등 자료들을 폭로하여 양심선언하자, 노태우 정권은 '10.13 특별선언'을 발표하여 '범죄와의 전쟁'을 선포해 국민들의 관심을 그쪽으로 돌리려고 했다.

1991년 초 수서사건과 강경대 구타치사 사건으로 학생운동 등 재야운동 열기가 살아나 노태우 정권은 위기에 처할 듯 했으나, 김지하 시인의 <죽음의 굿판을 걷어치워라> 칼럼 파문과 강기훈 유서대필 조작사건, 정원식 총리 계란투척 사건 등을 계기로 정국이 노 정권에 유리한 쪽으로 흘러가면서 재야운동은 쇠퇴해갔으며, 동년 지방자치제 부활에 따른 지방 기초의회 선거에서 민자당이 독차지했다. 그러나 1992년 14대 총선으로 여당인 민자당이 과반수에서 1석이 모자란 149석밖에 차지하지 못해 다시 여소야대 구도가 이뤄졌다. 이 시기에 1960년 4.19 혁명과 유신시대 민주화 주역들이 점차 금뱃지를 달기 시작했다.

동년 12월 18일, 14대 대선에서 김영삼 민자당 후보가 김대중 민주당 후보를 꺾어 민간인으로서 최초로 대통령으로 당선되는 데 성공했으며, 1993년 2월 25일에 정식 취임하여 문민정부를 출범시켰다. 그는 집권 첫해부터 과감히 개혁 드라이브를 시동하여 자신을 포함한 모든 공직자들의 재산을 공개했고, 군부에서 하나회를 숙청시킨 후 안기부도 개혁했다. 또 금융실명제를 실시해 투명한 금융거래의 기반을 닦으면서 집권 초 지지율이 90%대나 올라 김영삼 대통령은 연예인까지 능가하는 인기스타가 됐다.

1994년 3월에 전교조 교사 1천여명을 복직시킨 뒤 1995년에는 첫 지방선거를 비교적 깨끗하게 치러 민선 지자체장 시대를 열였다. 또 부동산실명제도 마련해냈다. 문민정부는 집권 초기만 해도 신군부 처단과 진상규명에 대해 "역사의 판단에 맡기자"며 소극적인 입장을 보여 1995년 7월에는 신군부 인사들이 불기소처분됐으나, 그해 10월 박계동 민주당 의원의 노태우 비자금 폭로를 계기로 '역사바로세우기'에 시동이 걸려 11월엔 노태우가, 12월 전두환이 각각 구속됐다. 12월에는 5.18 특별법과 공소시효특례법 등이 국회를 통과했다. 1997년 4월에 대법원은 전두환에 무기, 노태우에 징역 17년을 각각 때렸으나 이마저도 1997년 12월에 사면되고 말았다.

그러나 문민정부는 후반기에 실정을 거듭했다. 취임 초기부터 장/차관들을 많이 갈아치우는가 하면 YS의 차남 김현철이 이곳저곳에서 월권행위를 하고 여러 의혹사건에 연루돼 위신이 추락했고, 1996년 15대 총선에서 신한국당은 혼탁한 선거상황 속에서 새정치국민회의와 통합민주당의 부진을 틈타 '여대야소' 정국으로 회귀해 노동운동과 한총련 등 학생운동에 대해서 무자비하게 탄압했다. 뒤이어 12월 24일에는 안기부법 및 노동관계법 개정안을 날치기 통과하자 한국노총과 민주노총이 공동으로 총파업을 일으켜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1997년 초부터 한보그룹이 부도나고 김현철마저 5월에 구속됐다. 그해 하반기에는 외환위기가 터져 국가가 파산 위기까지 이르자 정부는 IMF에 구제금융을 신청했고, YS는 1998년 2월 24일 '실패한 대통령'이 되어 청와대를 떠났다.

1997년 12월 18일에 열린 15대 대선에서 김대중 새정치국민회의 후보가 보수의 원로 JP와 함께 이회창 한나라당 후보를 꺾어 헌정사상 최초로 수평적 정권교체를 달성했고, 국민회의-자민련이 손을 잡은 '국민의 정부'가 수립됐다. DJ는 자민련과의 사상적 차이에도 불구하고 개혁 정책을 밀어붙이는 한편, 경제 회복과 더불어 IMF 구제금융을 졸업하기 위해 IMF의 권고를 받아들여 공기업과 금융기관 민영화에 주력하고 외국자본을 받아들이는 등 과감한 개혁을 시작했다. 1998년 6월 제2회 지방선거에선 국민회의가 서울을 포함한 271석을 확보하여 우위를 점했으나, 보수 정치권 및 언론에서는 '호남정권'이라 보며 안 좋은 소리를 했으며 취임 초부터 조폐공 파업유도 사건과 옷로비 사건, 보광그룹 탈세 사건 등 온갖 스캔들에도 시달려야 했다.

남북관계 면에서 진전을 보인 시기이기도 한데, 1990년 9월 남북고위급회담 본회담을 시초로 남북통일축구대회를 여는 등 체육교류도 활발했으며 1991년 9월 17일엔 북한과 함께 유엔에 동시 가입했다. 그해 12월에 '남북기본합의서'와 '한반도비핵화공동선언'이 체결되어 좀더 가까워지는 듯했으나, 1992년 미국의 북한 핵문제 제기로 남북관계는 원점으로 돌아갔다. 1993년 출범한 김영삼의 문민정부는 북한의 핵확산금지조약(NPT) 탈퇴 등 대북관계 악화 속에서도 종전의 한민족공동체통일방안을 보완한 '3단계 3기조 통일방안'을 만들어 진보인사 한완상을 통일부총리로 임명하고 비전향 장기수 이인모를 북으로 송환시켜 전향적인 태도를 보이는 듯했다. 그러나 같은 시기 북핵 문제가 점차 쟁점화된 데다 새로 출범한 미국의 클린턴 행정부는 초장부터 대북 강경책으로 일관했고, 문민정부도 같이 강경론으로 나가자 북한 역시 강경책으로 대응하며 49년만에 제2의 6.25 전쟁이 일어날 뻔했으나 지미 카터 전 대통령이 방북하여 김일성과 협상을 성사시켜 일단은 진정됐다.

동년 6월 17일에 김일성이 카터에게 남북정상회담을 열겠다고 뜻을 전했고, 김영삼도 이를 받아들여 역사상 첫 남북정상회담이 성사될 듯했으나 7월 8일에 김일성이 갑작스레 사망하여 무산되고 말았다. 사망 당시 국회에서 김일성 조문을 둘러싼 논란이 불거지자 정부는 조문을 불허했고, 이에 북한이 남북정상회담 준비 당시 중단했던 대남 비방방송을 재개하여 남북관계는 또 파탄났다. 1995년 북한이 대홍수를 맞을 당시 문민정부가 대북 쌀 지원을 함으로서 숨통이 트이는 듯 했으나 '인공기 사건'과 '삼선비너스호 선원 억류 사건' 등으로 정부 차원의 쌀 지원은 실패했고, 1996년 강릉 무장공비 침투 사건으로 대북 경협마저 얼어붙는 등 김영삼 집권 말까지 남북관계는 언제나 파탄 상태였다. 당시 문민정부의 통일 정책은 독자적이고 일관적인 비전과 철학 없이 상황에 따라 임기응변식으로 변화하는 편이었다.

1998년에 출범한 김대중 당시 대통령의 국민의 정부는 취임사에서 이전 정권들이 해왔던 대북 강경책을 버리고 햇볕정책을 창안했으며, 그해 6월에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이 소떼 500마리를 몰고 판문점을 넘었고, 10월에는 소떼 501마리를 몰아 판문점을 또 넘어 금강산 관광을 성사시켰다. 그러나 초기에 북한은 김대중 정부를 냉담하게 봤기 때문에 1998년엔 속초와 여수에서 잠수정 침투 사건이 터졌고, 1999년에 제1차 연평해전과 금강산 관광객 억류 사건이 터져 보수 언론으로부터 햇볕정책 자체가 시험대에 올랐으나, 김대중 당시 대통령은 화해와 협력노선을 포기하지 않고 남북통일농구대회 같은 교류사업을 적극적으로 벌여 화해 무드를 계속 이어나갔다.

2.1.3. 경제

1986년부터 시작된 3저 호황 효과와 더불어 1988 서울올림픽, 북방정책의 성공으로 한국의 위상은 겉으로 성장했으나, 정작 서민들은 이 효과를 제대로 보지 못했다. 1989년 하반기부터 물가는 날로 치솟아 1990년 정부 발표 기준으로 소비자물가가 10%로 올랐지만 체감지수는 더했다. 예컨대 자장면 값이 1986년 기준 700원에서 1990년 기준 1,700원으로 치솟는가 하면, 100원짜리 라면도 아예 자취를 감춘 것이다.

아무리 3저 호황이 1988년 이후부터 시들어지긴 했지만[11] 후광은 1990년대 중반까지는 갔으므로 장및빛 경제를 예상하는 현상이 높았다. 또 한국에서 가장 인구가 많은 구간인 베이비붐 세대 386세대가 이미 결혼도 하고 어느 정도 아이들도 성장한 상태로서(물론 1965년 이후 386 후반생들은 제외) 본격적인 경제 활동을 하면서 어느 때보다 보기 힘들었던 소비의 규모가 커졌으며 샐러리맨 월급이 처음으로 백만 원을 넘어섰다. 1994년[12]1인당 GDP 1만 달러를 돌파해 염원하던 국민소득 만 불(萬弗) 시대에 접어 들었고[13] 1995년에는 국내총생산 세계 11위를 차지하였으며 1996년에는 일본에 이어 아시아에서 두 번째로 OECD 회원국이 되었다. 물론 명목상 달러화 기준으로 한국의 소득수준은 여전히 전통적인 서구권 선진국에 비해 40~ 60% 수준이었지만 80년대 20 ~30%대 소득 수준에 비하면 상당히 빠른 속도로 따라잡았다.

또한 1980년대 중후반부터 1990년대 초반 당시에 사회문제점으로 꼽혔던 부동산 가격의 폭발적인 상승도 1991년을 정점으로 1기 신도시 분양 및 토지 공개념 3법으로 대표되는 부동산 값 억제정책으로 하락세로 접어들었고 이후로 부동산 가격이 90년대 내내 안정세를 보였던데 반해 소득증가율은 두자릿수대를 유지했기 때문에 소득이 오르면 곧바로 소비 및 저축의 증가로 이어지는 선순환 과정을 거쳤으며 1990년대 환율은 1달러=700~800원대를 선점해(1981년에 1달러에 600~700원 하던 수준의 환율을 경제적 호황의 후광으로 1990년 중반까지 700~850원 사이를 왔다갔다하면서 유지해옴) 소비자물가지수가 1994년을 제외하면 OECD 평균을 밑도는 정도로 굉장히 안정되었고 서민들의 생활비 부담도 적었던 시절이다. 또 1970년대부터 증가하기 시작한 중산층이 1980년대는 더욱 두터워졌으며 이 층들이 1990년 중반까지도 유지해 당시 자기가 중산층이라고 대답한 사람이 70%가 넘었다.(이 수치도 IMF이후로 확 줄어든다.) 하지만 지나친 저환율 정책으로 인해 경상수지 적자는 1990년 이래로(1993년에 소폭의 흑자를 낸 것을 제외하면) 매년 적자를 기록했으며 1997년부터 외환보유고는 점점 바닥이 나고 있다가 1997년 말 외환 위기가 발생하는데... 그 파장으로 수많은 기업들이 도산하고 하루 아침에 수십만 명의 실업자가 양산되었으며 환율은 급속도로 올라가 1996년 13,137달러였던 1인당 국민소득은 1998년에는 8,083달러로 떨어졌다가 마지막 해인 1999년에 10,410달러로 소폭 증가로 마무리했다.

2.1.4. 사회

사회/문화적으로는 이 시기의 청소년과 대학생들은 1980년대이념적인 면에서 탈피하여 자유로운 사고를 했으며, 특히 이 시기에 등장한 X세대[14]는 개성을 중시하고 대중 문화에 열광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15] 그래서 음반시장도 세계 수위권에 들 정도가 되었다. 1980년대부터 시작된 전자/통신혁명은 더욱 세를 불려 위성방송, PC통신, 케이블TV, 인터넷 등으로 나타났으며, 더 나아가 1998년 '사이버 가수 아담' 및 사이버 작가 '새파란'을 탄생시키기도 했다.

반면 X세대가 주체적인 문화를 창조하기보다는 상업문화의 소비주체로 전락하며 사회의 질을 떨어뜨리는 데에 일조하였다는 비판 역시 공존한다.[16] 게다가 문화적으로 자유로워졌다고 하지만, 아직도 학교는 일방적인 주입식 교육을 강요하는 데다 훨씬 이전부터 존재했던 문제인 과도한 사교육 문제와 학생 인권 침해는 이 시대에도 별반 다를 건 없고 오히려 일부 부문에서 악화되기까지 했다.

우선 1986년에 교복의 부활이 이루어졌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1990년대 초반까지는 교복을 착용하지 않는 학교를 심심치 않게 볼 수 있었던 데 반하여 1990년대 중반부터 교복이 대부분의 학교에서 부활하면서 교복을 지정하지 않은 학교를 찾아보기 힘들 지경이 되었고,[17] 1991년 UN 아동권리협약 가입이나 1995년 '5.31 교육대개혁' 같은 정부의 교육개혁 조치에도 불구하고 교육환경은 전근대적 수준이나 다름없었다. 학교에서 빠따 같은 것이 잘만 돌아다니고 개성이 충만한 청소년들을 무자비하게 짓밟고 멸시했으며, 교무실만 에어컨을 상시에 틀어놓은 채 교실에는 선풍기만 주야장천 틀어놓는 권위주의적 교육환경을 고집하기도 했다. 이것 때문에 장기결석을 하거나 자퇴하는 이들이 점차 늘어났는데, 에세이스트 김현진이나 소프트웨어 개발자 이상협, 최연소 KMTV VJ 전한해원 등 자퇴생 출신 유명인이 주목받았다.(시사저널 기사)

또 야간자율학습이 적용된 건 마찬가지였으며 방과후 학원 혹은 학습지 여러 개 시키기, 선행학습등의 사교육이 흔해졌다.[18] 그리고 경제력의 향상과 더불어 사교육비는 지속적으로 향상되었기 때문에 사교육비 문제가 엄청난 사회적 문제가 되어갔다. 이에 대한 안티테제로 '대안교육' 및 '공동체교육'이 확산되었다. 1990년대 초반부터 학교폭력 문제도 점차 급증하여 1990년 3,704건에서 1992년 5,192건으로 증가했고, 1995년 학교폭력 피해 학생 김대현의 자살 사건으로 학폭이 사회문제화되어 부친 김종기가 '청소년폭력예방재단(현 푸른나무재단)'을 세워 국민적 환기를 촉구시키기도 했다. 이러한 움직임에 따라 같은 해 정부가 '학교폭력 근절 종합대책'을 마련했고, 1997년 '청소년보호법'을 제정했다.

교과 내용 면에서 변화가 좀 있었는데, 1990학년도 때 국사 교과서에서 6.25 남침이 '전쟁'으로, 5.16 혁명이 '군사 혁명' 등으로 각각 일부 수정되었고, 1988~89년 월북 문인 해금의 여파로 1990년대 초반 이후부터 정지용 시인의 작품 <고향> 등 일부 작품이 중~고등학교 국어 교과서에 실리기도 했다. 제6차 교육과정 중이던 1994학년도 때 교과서 앞표지에 있던 '국민교육헌장'과 교련 과목의 제식훈련 등 군사훈련 부분이 공식적으로 완전히 사라졌다. 국사 교과서에서도 5.16 군사혁명이 '군사정변', 4.19 의거가 '혁명' 등으로 각각 바뀌었다. 1997년부터 반공소년 이승복 이야기도 도덕 교과서에서 빠졌다. 그러나 국어 교과서에 재야 문인 작품 등은 잘 싣지 않았고, 국사 역시 좌익 항일투쟁 등은 일절 다루지 않았다.

전교조는 문민정부 출범 뒤에도 존속했으나, 합법화가 안 돼서 여전히 정부와 대립했다. 그러나 1994년 정부가 전교조 해직교사 1,490명 중 1,329명을 복직해 새 전기를 맞이했다. 이들은 전교조 탈퇴를 전제로 복직이 되었지만, 해직까지 감수하며 여전히 전교조 활동을 지속했다. 1998년 김대중 정부 출범 후 노사정 합의를 거쳐 1999년 교원노조법 제정에 따라 합법화되었다.

1980년대 후반 '참교육 운동' 때 성행하던 고등학생운동은 1990년대 초중반 들어 정부와 학교의 탄압으로 점차 쇠퇴를 겪어 직선제 자주학생회도, 동아리도 급속히 와해되어 교내에서 더 이상 활동할 수 없었다. 이에 불구하고 비공개 조직들을 중심으로 소규모나마 활동하긴 했다. 반면 고운 1세대들은 졸업 후 1991년 관악지역 청소년운동단체 '참배움일꾼청소년회(참일청)'를 시초로 1990년대 초반 동안 '청소년단체 샘', '푸른벗', '희망', '나눔터' 등 지역 청소년조직이 발족돼 문화활동을 하며 정치/사회투쟁을 했지만, 1994년 주사파 파동 시기 '청소년단체 샘 사건', '<새날열기> 사건' 등 공안사건이 터져 정치적인 고등학생운동이 와해되었다.

그러나 1995년 춘천고 학생 최우주가 강제자율학습 및 보충수업 폐지 민원을 청와대, 교육부, 강원도교육청 등에 올리고 해당 글을 하이텔에 게시하면서 학생 개인의 인권침해 문제와 입시교육, 교육구조 문제 등이 PC통신 토론방의 주 화제로 떠올랐다. 이러한 움직임으로 하이텔에 '중고등학생복지회'가 결성돼 '청소년 인권운동'이 탄생했다. 초기 학복회를 중심으로 한 온라인 청소년 인권운동은 활동방향 및 지속성에 난항을 겪었고, 단체 자체가 언론에 알려짐에 따라 학교측의 탄압도 빈번했다. 1998년 교육부가 세계인권선언 50주년을 맞이해 '학생인권선언'을 제정했지만 학생 및 일선 교사가 배제된 모호한 조항이라 흐지부지됐고, 11월 3일 나우누리 및 하이텔 학복회가 '중고등학생인권선언'을 발표했다.

다만 2020년대 현재와 비교하면 1990년대의 문화 및 사회풍토는 지금에 비해 여전히 보수적인 면이 많았고, 촌지, 주6일 근무+야근이나 갑을 문제, 여성 혐오, 남아선호사상으로 인한 유소년층의 성비불균형, 장애인과 성소수자, 외국인 노동자 차별 같은 사회부조리들도 여러모로 강했기도 했다. 특히 IMF 외환위기 이전은 '단군 이래의 최대 호황'이라는 표현이 회자되고 1인당 GDP가 1만 달러를 넘고 그 여세를 타서 OECD에 가입하는 데 성공을 거두었을 정도로 한국 경제가 부흥하고 있던 시기였지만 그러면서도 점진적으로 진보화되었기는 했지만 사회적으로 보수적인 경향이 여전히 강했고 단군이래 최대호황기라고 불리던 시기라 해도 이전시기부터 지속적으로 이루어진 사회적인 부조리도 많았기도 했다. 개인주의는 2020년 현재는 특히 젊은 층 사이에서 조금씩 라이프스타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추세이지만, 당시만 하더라도 개인주의를 이기주의와 동급 취급 하면서 배척하려는 분위기가 여전히 어느 정도 있었고 당대 신문기사에서도 오렌지족이 어쩌니 하는 기사들도 많이 나왔으며 샴페인, 과소비 타령도 많이 나오기도 했다. 다만 신토불이가 강조되었던 것은 단순히 민족주의의 영향이라기는 어폐가 있고 당대 농촌이 인구감소와 저소득 문제, 수입 농산물 유입 등으로 지속적으로 지속적으로 황폐화되던 상황을 어떻게든 타개하려던 노력의 산물이었다.[19] 물론 결과적으로 보았을 때 농어촌 지역의 지속적인 황폐화를 막지 못한 채 아예 지방소멸 얘기까지 나올 지경이 되었지만 말이다.

한마디로 외환위기 전까지는 한국의 황금기이며 재미교포가 한국으로 일하러 오던 시대다. 명목상 경제지표는 2000년대 이후가 1990년대보다 더 성장했으나 이 당시의 희망찬 사회 분위기와 정서는 되돌리지 못하고 있다. 그렇다 보니 이는 단순히 물가 상승으로 인한 숫자 놀음이라는 평가도 많다.

1991년부터 외국인 노동자들이 '산업연수생'이란 이름으로 입국이 허용되어 매년 수십만의 외노자들이 들어오고 불법체류자들도 대량 양산되는 계기가 되는데[20] 이는 1990년대 중반부터 국내노동자들의 임금 정체 억제 하향화 그리고 질 개선 정체의 원인이 되었다. 또한 1980년대의 호황취업경기도 1990년대 초반부터는 서서히 서늘해지기 시작한다. 결정적으로 1996년에는 노동법 날치기 통과로 '변형근로제'가 도입되어 1997년 외환 위기로 가속화되어서 비정규직이 급격히 늘어나기 시작했다.

대학교 입학률도 급격히 늘어나기 시작했으며, 대학교들도 전국에 우후죽순 생겨났다. 인구 분포에서도 청소년층이 줄고[21] 386세대 - X세대를 위시한 성인층이 급격히 증가하고 노년층도 급격히 증가하는 시기이기도 하다. 또한 대학진학률이 증가하였고[22] 상고와 공고를 천시하고 인문계를 중시하는 풍토가 만연하게 되고, '대학만능론'[23]은 2000~2010년대 이후 사회의 이 되고 있다.[24]

그럼에도 1990년대는 한국인의 삶과 가치관이 가장 크게 변화된 시대였다고 할 수 있다. 안정된 민주주의와 경제적 풍요, 그리고 개인용 컴퓨터, 휴대전화 등의 정보기기 보급에 의한 정보기술의 발전 속에서 한국인들의 삶은 은밀히, 그러나 획기적으로 바뀌었다.

1980년대까지의 권위주의적이고 무거운 사회 분위기를 떨쳐내고 좀 더 다양하면서도 깃털처럼 가벼운 사회 분위기로 바뀌었다.[25] 더불어 경제적 풍요와 넘쳐나는 상품들 속에서 더 소비지향적인 분위기가 확산되었다. 사람들의 의식 역시도 좀 더 다양성에 대해 관대해지고 소비 트렌드에 민감해졌다.

1990년대는 1980년대까지의 대한민국과 단절하면서, 이후 시대인 밀레니엄 이후 시대의 모든 사회적 요소들의 맹아를 품고 있었던 시대이기도 하다. 21세기의 환상을 가지고 있었다. 예능, 아이돌, 한류, IT산업, 온라인 게임, 개인용 PC, 한국산 블록버스터, 핵가족, 휴대폰, 오타쿠, 엽기, 패러디, 해외여행 등등 오늘날 우리가 너무나 당연하게 여기는 무수한 문화 요소들이 모두 이 시대에 뚜렷하게 드러나기 시작했다. 즉, 한국의 새로운 시대를 연 시대라고 보아도 되겠다. 21세기의 한국 사회는 사실상 1990년대의 연장선상에 가깝다. 그렇다 보니 2020년대(2023년 기준)에 40~50대 중반에 접어든 세대는 2020년대의 10대~20대 문화에 어느정도 적응하는 반면 비해 50대 후반 이상 세대[26]에서는 적응을 못하는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당시 '영상세대'라고 지칭된 이 시기 젊은이들은 메시지보다 이미지를, 활자보다 영상을, 편지보다 전자통신을 더 선호했다. 의사소통 매체는 유선전화 외에도 무선호출기, 휴대폰, PC통신 등으로 다양화됐고, 영상매체 발달 및 대중문화의 변화는 연예인 등 영상 스타들에 대한 열기를 불러일으켰으며, 신세대들 사이에 신체조건에 대한 과도한 집착이 나타났다. 영화배우나 TV 탤런트, 광고모델, 스포츠 스타들이 영상시대 최대 우상들이었고, 다이어트는 젊은 여성 뿐만 아니라 중년 여성, 그리고 남자들에게도 필수적 문제로 받아들여졌다.

영상문화의 열기는 X세대만 나타나는 현상이 아니었다. '애인 같은 아내'라 불리는 미시족의 등장과 그들의 현시적 문화 욕구가 중년층에게 파급되었다. 1996년 유동근-황신혜[27]가 주연으로 나온 MBC 드라마 <애인>이 인기를 얻자 '애인과 배우자가 공존할 수 있다'며 너도나도 애인 열풍에 휩싸였다. 성에 대한 과도한 집착도 여기에 연계돼 있었다.

뿐만 아니라 운동권[28], 절대적 빈곤 등 이전 시대의 산물들이 확실하게 몰락해 버렸으며, UN에 가입하고 경제적 수혜국에서 지원국으로 지위가 바뀌는 등 국제적 위상도 올라갔다.

1997년 외환 위기 사태 당시의 분위기 역시 오늘 날 2020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사고방식에 큰 영향을 미쳤다. 바로 더 이상 한국이 무한히 성장하기만 하는 국가가 아닐 것이라는 자각, 무절제한 소비에 대한 경각심, 그리고 기업과 국가의 경제가 제대로된 운용에 실패할 수도 있다는 우려 등이다.[29]

이를 종합해 볼 때, 언론학자 강준만 교수는 2006년 낸 <한국 현대사 산책> 1990년대편 1권 머릿말에서 이 시기를 '이념에서 소비로 넘어가는 시기'라고 정의했다.

1990년대의 기후는 잦은 비로 일조시간이 적은 2000년대, 이상 고온이 심해서 여름이 매우 더워진 2010년대와 달리 살기 좋은 년대였다. 1990년대에 들어가면서 한파겨울은 없어지고 연속적으로 이상 고온 겨울이 발생했으며 특히 1월은 연례행사급 이상 고온이었다. 이 년대의 여름은 차이가 심했는데 1994년, 1997년처럼 폭염이 심한 해도 있는 반면[30] 1993년, 1998년처럼 이상 저온이 강한 해도[31] 있었다. 1996년은 평범한 편. 사실 1990년대의 기후가 그런 이유는 1999년을 제외하고는 모두 엘니뇨 해이기 때문이다.

세월이 지난 2010년대 중반부터 유튜브 등에서 이 당시의 영상이 다뤄지면서 강한 자만이 살아남는 90년대라고 불리기도 한다. 특히 MBC는 유튜브 채널 타M머신(구 타임머신 코리아)을 통해 자사의 축적된 뉴스 콘텐츠를 십분 활용하여 2015~2016년, 2019년에는 90년대~00년대 초반 뉴스를 올렸다. 대충 1호선이 갖는 느낌과 비슷하다. 각종 재난이나 실내 흡연 등 지금과는 다른 사회문화적 분위기에, 앞선 시대보다 대량의 영상 자료가 있기 때문이다. # 또한 서울역사박물관 측도 2014년 10월 29일부터 2015년 12월 17일까지 기증유물특별전 '응답하라 1994, 그 후 20년'을 열어 1990년대 초반을 살아 본 사람들의 추억을 환기시키도록 했다.

출산율의 경우 1990년 산아제한정책이 실질적으로 중단된 것의 영향으로 출산율이 1990년 1.57에서 1991년에는 1.71, 1992년에는 1.76까지 상승했으나 이후로는 1999년까지 계속해서 소폭 하락해서 1.42명까지 하락하게 되었다. 다만 아직 1.3명 미만의 초저출산으로 진입하지는 않았고, 출생아 수는 60만 명대를 유지해서 5000만명 정도의 인구를 유지할 수 있던 수치였기에 저출산 문제가 본격적으로 나타나지는 않은 시기였다. 초저출산 기준인 출산율 1.3명 미만은 다음 연대인 2000년대, 정확히 2002년 이후에 초저출산 국가로 진입한다. 그리고 2020년대에는 초초 저출산국가로 진입했다.

1994년부터 1997년까지는 국내에서 판다를 볼 수 있었으나 1998년에 중국으로 조기 반환되어 2016년까지 국내에서는 판다를 볼 수 없었다.

2.2. 미국: 20's 시즌 2

2.2.1. 정치

1989년부터 동구권 및 소련이 몰락하자 미국은 초강대국이 됐지만, 경제난 때문에 구 공산권 국가들을 물적으로도, 외교적으로도 적극 도와주지 못한 채 미국에 도전하는 또 다른 세력들과 쉴새 없이 싸워야 했다. 1990년에 사담 후세인 대통령이 집권하고 있는 이라크가 중동의 석유자원을 차지한다는 야심을 보여 페르시아만 확보를 위해 쿠웨이트를 침공하여 미국을 도발했다. 이에 조지 허버트 워커 부시 대통령이 석유자원을 되찾고자 영국, 프랑스, 한국, 독일 등을 끌어들여 다국적군을 결성하고 이라크에게 쿠웨이트 철수를 요청했지만 후세인은 이를 씹었다.

이에 미국 정부는 전쟁을 선언했고, 1991년 1월 17일 다국적군이 사우디로 모인 뒤에 노먼 슈워츠코프 사령관의 지휘를 받으며 최첨단 무기와 미국인들의 열렬한 지지 속에 '사막의 폭풍 작전'을 통해 1991년 2월 28일에 이라크군을 굴복시켰으나, 후세인 대통령을 처단하지 못했다.[32] 걸프전 승리로 부시의 지지율은 91%까지 올랐으나 1990년부터 시작된 불경기 때문에 경제가 어려워져 서민들과 중산층들이 부시에게 등을 돌렸고, 1992년 초에는 부시 대통령이 방일 중 졸도하는가 하면 로스앤젤레스 폭동으로 국가가 혼란스러워지기도 했다.

이 상황 속에서 민심은 경제 회복을 앞세운 '아칸소 촌뜨기' 빌 클린턴 민주당 후보에게 기울었으며, 클린턴 후보는 국방예산 감축, 중산층에 대한 세금 감면, 러시아 및 CIS 국가들에 대한 경제원조 등을 공약으로 내걸어 11월 대선 초반에 지지율 89%를 달성했으나 무소속 후보 로스 페로가 부시의 표 19%를 잠식해 43%라는 득표율로 겨우 당선됐다.

그는 취임 초기부터 주변의 우려와 정적들의 공격에도 불구하고 IT산업 활성화로 경제가 호경기를 맞아 국민들의 사랑을 무한정으로 받았으며, '흑인'을 '아프리카계 미국인'으로 바꾸거나 여성에게 고위직을 대폭 개방하는 등 인권 향상과 정치정의 향상에도 기여했다. 사회적으론 가정법을 개선해 여성의 권익을 더욱 보호하며 환경보호를 촉진했고, '범죄 삼진아웃제'를 마련하여 살기 좋은 사회를 만드는 데 노력했다. 국방 면에선 불필요한 외국 내정간섭을 자제하고 1992년부터 터진 보스니아 내전에 나토군을 투입한 후 내전을 제어시켜 '세계경찰' 포스를 보여줬고, 1994년에는 지미 카터 전 대통령을 특사로 보내 북한의 도발을 누그러뜨리고 제네바 협정을 맺는 데 공헌했다.

그러나 1995년 말에 1996년 예산안을 국회가 통과시키지 않자 정부가 파업을 하는 이례적 사건이 터졌다. 그리고 공화당 하원 원내총무 뉴트 깅리치가 일으킨 공화당 혁명 때문에 민주당은 1994년 중간선거에서 공화당에게 패배했고, 이 때문에 클린턴 행정부는 국정수행에 차질을 빚게 된다. 거기에 부동산 스캔들 '화이트 워터게이트'까지 터지는 악재가 있었다. 11월 대선에선 콜린 파월 같은 제3의 후보 등장 이야기가 나왔으나 이들은 전부 출마를 포기했고, 클린턴 대통령은 49%라는 저조한 투표율에도 불구하고 밥 돌 공화당 후보를 꺾어 재선에 성공했다.

하지만 2기 재임기 때도 순탄치 않아 1998년에 모니카 르윈스키 및 폴라 존스 스캔들이 터진 데다 클린턴 대통령 역시 케네스 스타 특별검사의 추적으로 궁지에 몰렸으며, 청문회에서 그가 거짓말을 한 게 밝혀지자 1999년 2월 탄핵 위기까지 갔다가 상원에서 부결돼 대통령 자리를 겨우 지켰다.

2.2.2. 경제

1989년부터 집권한 부시 행정부 때는 걸프전 승리로 정치적 지지율은 올랐으나, 경제는 갈수록 악화일로를 걸었다. 부시 대통령은 이미 전임 레이건으로부터 국가부채 2조 7천억불을 떠안게 되자 이를 해결키 위해 세금을 올렸지만 국민들은 레이건의 약속을 안 지켰다며 등을 돌렸다. 같은 시기 일본의 버블경제 붐으로 대일 무역적자 폭이 벌어지자 일본 기업들이 무차별 미국 시장을 휩쓸어 미국 입장에선 위기를 겪었다. 1991년 CIA 산하 RIT연구소 소속 앤드류 도허티(Andrew Dougherty)가 써서 파문을 일으킨 보고서 <Japan 2000>은 이러한 분위기를 반영한 바 있다.[33]

그러나 1993년 클린턴 행정부가 출범한 후 IT와 서비스업, 엔터테인먼트 산업 등 굴뚝 없는 '3M[34]' 산업들이 호황을 이루면서 불경기에 시달리기 시작한 일본을 따라잡았다. 경제호황에 고무된 클린턴 행정부는 캐나다, 멕시코와 함께 '북미자유무역협정'을 체결했고, 통신기술의 발달과 함께 글로벌화를 진전시켜 '미국식 자본주의'를 전 세계에 맞추자고 강요했다. 그러나 이는 개발도상국으로부터 반발을 일으켜 반미 및 반세계화 시위를 야기시켰다.

이는 아래의 다우 존스 지수 그래프를 통해 그 추세를 확인할 수 있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Dow_jones.png[35]

1990년대의 미국은 종종, 제1차 세계 대전의 승전 직후인 1920년대와 비견되기도 하며, 두 시대는 많은 유사성을 보인다. 다만, 1920년대는 미국이 세계의 유일의 초강대국이 아니었고, 패권 국가들 중의 하나로 올라서게 된 시기였지만, 1990년대는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약 50여 년간 지루하게 대결해 왔던 소련 및 동구권의 붕괴를 지켜보며 미국이 1극의 국가로 등장하게 되었으므로 대개 1920년대보다 1990년대를 더 화려하게 보는 경향[36]이 짙다.

1990년 이후 약 20년간은 세계의 정세를 미국이 자유자재로 통제 가능했던 시기였으며, 심지어 이라크 전쟁세계금융위기를 겪은 이후부터 현재까지도 여전히 경제력과 군사력을 종합한 국력이 세계 1위이다.

2.2.3. 사회

미국 내에서 1980년대 등장한 크랙, 코카인으로 인한 코카인 위기가 완전히 해소되지 않고 사회적으로 인종차별과 교도소 수감률 등 여러 사회적 문제점이 부각되는 와중에 제약회사들은 미국 내 만성통증 호소자들이 증가한다는 이유로 미국 의회에 진통제 처방 규제 완화를 요구하게 된다. 이로 인해 의사들은 오피오이드 계열 진통제 처방을 남용하게 되는 결과로 이어졌고, 오피오이드 관련 사망자도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게 된다. 이와 관련된 문제는 서서히 증가해 사회 내에서 크게 의식되지 않다가 2010년대에 들어서 오피오이드 관련 문제점과 중국으로부터 유입된 값싼 펜타닐의 영향으로 사회적 문제가 커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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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일본: 잃어버린 30년의 시작

1990 - Yokohama Walkabout 横浜散歩 (901208)
파일:일본주식.png
(1988년~2010년)일본의 주식 시장 흐름
일본잃어버린 10년으로 더 이상 호황을 누리지는 못하게 되었다.
파일:일본부동산.gif
(1980년~2010년)일본의 주택 시세 흐름
1990년대 일본의 부동산 폭락은 매우 유명한 거품붕괴의 선례가 되었다.

1990년, 일본은 주식부동산 거품이 꺼지면서 10년 동안 장기불황에 접어든다. 많은 기업과 은행이 도산했고 평균 성장률은 0%에 달했다.
[kakaotv(nVqaaCQ12Zw$@my)]
이웃 나라 이야기 2부 필패신화

해당 시기를 일본인들은 잃어버린 10년이라 칭한다. 이 불황은 2010년대2020년대까지도 지속되어 잃어버린 20년 또는 잃어버린 30년라는 명칭으로 대체되었다.
1.경기부양 2.부동산 거품 양산 3.거품 붕괴 4.경기 침체/1번 경기부양으로 무한 반복

이후 일부 경제학자들이나 관련 전문가들은 1990년대 일본의 부동산, 주식 폭락을 예로 들면서 경기 부양으로 인한 거품양산과 그로 인한 거품붕괴, 침체의 사이클에 대하여 설파하게 된다.[37] 만화가 이원복 교수는 <먼나라 이웃나라> 일본편 1권에서 1990년대 일본 암흑기 형성 원인으로 경직된 관료주의, 정경유착으로 인한 부정부패, 고품질로 인한 고비용, 낮은 소비율, 연공서열 및 종신고용제의 폐해 등 후진국적 요소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1980~1989)일본과 주요 국가의 명목 GDP 흐름[38]1990년1991년1992년1993년1994년1995년1996년1997년1998년1999년
단위: 10억 달러(약 1조 원)
미국 전체 명목 GDP 5,979 6,174 6,539 6,878 7,308 7,664 8,100 8,608 9,089 9,660
일본 전체 명목 GDP 3,103 3,536 3,852 4,414 4,850 5,333 4,706 4,324 3,914 4,432
독일 전체 명목 GDP 1,547 1,815 2,068 2,008 2,152 2,525 2,437 2,159 2,181 2,133
프랑스 전체 명목 GDP 1,278 1,279 1,411 1,331 1,404 1,610 1,614 1,462 1,512 1,502
영국 전체 명목 GDP 1,024 1,069 1,112 998 1,080 1,181 1,243 1,384 1,477 1,518
중국 전체 명목 GDP 404 424 499 641 582 756 892 985 1,045 1,100
대한민국 전체 명목 GDP 284 332 356 391 458 559 603 560 376 486

일본은 성장 동력이 꺾여 오히려 경제규모가 줄어든 연도(1996년, 1997년, 1998년)도 있었던 시기다. 그래도 거시경제면으로 바라보면 경제의 규모는 여전히 세계 2위였다. 그리고 90년대초에 흔들렸던 경제가 90년대 중반에 다시 완연하게 회복하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기에 예전처럼 미국을 앞설 수 있다는 견해는 많이 사라졌지만 미국과 함께 투톱의 경제대국의 모습을 유지할 거라 봤었다. 하지만 미국과의 격차는 점차 고착화되었으며 미약하지만 차이가 점점 벌어졌다. 게다가 유럽 국가들이 조금씩 일본을 추격하고 있었으며 한국과 중국도 경제 성장기에 접어든다. 국민들로부터 개혁하자는 목소리가 있었지만, 보수 기득권층과 경직된 관료주의로 난항을 겪었다.

정치적으로는 변화에서 회귀로 대변되는 시기인데, 만년 여당 자민당은 1991년 교와 스캔들, 1992년 사가와규빈 스캔들까지 각각 터져 국민들의 신임을 잃었다. 이에 일부 자민당 의원들이 신생당, 일본신당, 신당사키가케 같은 새 정당들을 만들어 공산당을 뺀 타 야당과 연합했고, 1993년 7월 총선에서 자민당을 쓰러뜨려 정권을 잡아 호소카와 모리히로를 총리로 앉힌 연립정권을 수립했다. 그러나 이조차도 자민당만큼 국정수행을 할 역량이 딸리다 보니 1년도 못 가 무너져 1994년 자민당이 사회민주당과 연합정권을 수립해 혼미상태로 접어들었고, 1996년 하시모토 류타로 총리 집권 후 자민당 독주체제로 자리잡았다.

사회 면에선 1995년은 비극의 해였는데, 고베 대지진으로 충격을 준 데 이어 옴진리교 사린가스 살포사건, 쿠니미츠 경찰청장 피습 사건으로 '안전 신화'가 무너졌다는 평을 받기도 했다.

2.4. 중화권

중국장쩌민 주석이 덩샤오핑의 개혁/개방정책을 이어받아 경제는 계속 성장했고, 특히 상하이, 베이징, 광둥성 등 경제특구와 대도시들이 성장했으며 1997년과 1999년에 영국령 홍콩과 포르투갈령 마카오를 각각 반환받아 자존심을 굳히기 시작했다. 그러나 중국 정부의 공업우선 정책 때문에 농촌이 급속도로 몰락했고, 농민들은 입에 풀칠하고자 저임금까지 마다하며 공업지대로 몰려들었으나 일자리는 이를 충족치 못했다. 거기에 폭력조직 '삼합회'의 손까지 뻗쳐져 중국 전 대륙에 임금착취가 판을 쳤다. 이런 풍토 속에서 기업가들은 폭군화되며 관료들도 봉건영주화돼 있으며, 부정부패도 판을 치는 데다 물가가 20%나 오르는가 하면 실업자가 1억이나 증가하는 등 사회불안이 이어지자 중국 농민들은 점차 반발했다. 이에 중국 정부는 반체제 인사들을 거듭 탄압하여 인권 문제가 전세계 여론의 도마에 올랐고, 2000 및 2008 베이징 올림픽 유치운동 당시 이러한 문제가 더욱 부각됐다.

반면 홍콩은 1997년 반환을 전후해 새 역사의 전환기에 섰다. 반환을 앞둘 당시 중국 본토에선 기대감이 커졌으나 정작 홍콩 사람들은 불안에 떨었는데, 특히 언론 분야에서 두려움이 더 컸다. 영국 점령시기 동안 언론의 자유를 맘껏 누리던 홍콩 언론들은 반환을 앞두고 중국 정부로부터 해코지를 당할까봐 불안에 떨었고, <사우스 차이나 모닝 포스트>의 예처럼 중국 신화사통신에 검열을 의뢰하거나 1995년에 중국 사형수의 장기적출 문제를 풍자한 시사만화 <릴리 웡> 작가 래리 페인을 해고하는 등 자체검열 움직임도 있었다. 그래도 1997년에 반환한 중국 정부는 '1국가 2체제'를 내세워 홍콩에겐 중국 영토임을 인정하는 대가로 영국 식민지 때와 같은 독자성을 보장해 주기는 했다.

2.5. 러시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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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를 방황하는 러시아의 비행청소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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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3년 러시아 헌정위기 당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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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의 GDP. 보리스 옐친 집권기인 90년대 동안 계속해서 하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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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의 경제성장률. 90년대의 뚜렷한 마이너스 성장이 눈에 띈다.

눈 내리는 나이지리아라는 러시아의 막장 이미지는 90년대에 형성되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러시아 역사의 암흑기 하면 항상 꼽히는 시기가 이때이다. 공산주의의 체제적 모순을 바로잡기 위해 미하일 고르바초프 서기장이 시행한 개혁정책 글라스노스트 & 페레스트로이카가 실패로 끝나자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 사고 수습, 아르메니아 대지진 복구, 폴류스 계획으로 대표되는 1980년대 초중반 미국과의 군비경쟁, 1980년대 중반 유가 폭락 등으로 한계에 달한 경제가 무너지기 시작했으며, 갑작스런 자유화로 인해 수십년간 억눌러 있던 연방 내 불만과 민족갈등이 수면 위로 떠올랐으며, 동유럽에서의 잇따른 자유주의 혁명으로 공산권을 이루던 구성국들이 싹 다 나가 떨어지면서 1990년대의 러시아는 세계질서의 주도권을 잃고 급격히 몰락해가던 소련과 함께 시작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더 이상 공산주의 진영을 유지하기 어렵다고 느낀 고르바초프 서기장은 바르샤바 조약기구, 코메콘을 해체했고 보수파와 개혁파 간 갈등을 타개하는 동시에 주권국가연맹을 중심으로 하여 연방 내 공화국들의 더 많은 자치권을 보장하는 신연방체제를 추진했으며, 각국 지도자들이 1991년 8월 20일 신연방조약을 체결하기로 합의하면서 현실화되나 싶었지만, 그 전날 일어난 소련 보수파의 쿠데타 시도는 이러한 희망을 산산조각내버렸다. 쿠데타는 진압되었지만 이 쿠데타에 정부를 지탱하던 정치인들이 죄다 참여해버리면서 고르바초프는 권력 기반을 상실했으며 대부분의 권력은 당시 러시아 SFSR 대통령 보리스 옐친에게 넘어갔다.

고르바초프의 실각과 함께 소련은 급격히 붕괴하기 시작했고 그 해 9월 발트 3국의 독립, 12월 1일 우크라이나 독립 투표에서의 압도적 찬성 이후 12월 8일 벨로베즈스카야 조약에서 러시아, 벨라루스, 우크라 3국의 지도자들이 소련의 해체와 독립국가연합의 창설에 합의하면서 소련의 해체는 확정되었다. 12월 25일 고르바초프 대통령이 사임하고 12월 26일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은 창설 68년 11개월 26일만에 공식적으로 해체되었다.

비록 소련 시절에도 러시아 경제사정이 그닥 좋은 것은 아니었지만, 소련 해체 이후 후유증이 대통령 보리스 옐친의 무능, 당시 재정부장관이자 총리 예고르 가이다르의 급격한 자유화 정책의 부작용과 겹쳐 러시아의 경제상황은 90년대 내내 바닥을 기었다. 1989년 소련의 1인당 명목 GDP는 2,748달러로 한국의 절반 정도였으나, 10년 후 1999년에는 절반인 1,330~1,445달러로 줄어버렸다. 이때 급격하게 나빠졌던 러시아인들의 생활 사정은 지금까지도 이어져 러시아가 '그나마' 먹고 살만해진 현재도 소련 시절보다 나아졌다고 보기 힘들다. 소련 시대에 비해 현저히 떨어진 저축률, 월세와 집값의 상승, 빈약해진 복지 제도가 이 사실을 뒷받침한다.

옐친과 가이다르의 경제 개혁의 결과로는 물가 폭등에 비해 봉급 상승률은 이에 한참 못 미치는 한편 루블화가 외환시장에서 매물로 쏟아져 나오고 국민들의 은행예금마저 휴지조각이 되어버리며 루블화 가치 하락으로 인한 인플레이션이 발생했고 러시아 국민들의 구매력은 아프리카 빈국 수준으로 추락해버렸다. 수많은 러시아 국민들이 직장을 잃고 실업자로 전락했으며 고급 인력들은 생존을 위해 좋은 조건을 제시하던 외국으로 유출되었다. 군대와 경찰에는 봉급이 제대로 지급되지 않아 많은 장교들이 제대하거나 뇌물을 받고 무기를 파는 등 부패가 만연했다. 이러한 방산비리 역시 현재까지도 러시아의 고질적인 문제이며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에서도 실태가 여실히 드러났다.

대규모로 민영화된 기업들은 부패한 올리가르히들의 손에 넘어갔고 이들이 러시아 정계, 레드 마피아와 결탁하는 한편 호화스러운 해외여행을 다니고 호화별장을 꾸리는 등 사치생활을 즐기면서 벌어들인 자금은 전부 외국으로 빼돌렸다. 이렇게 경제개혁의 최대 수혜자였던 올리가르히들은 옐친 대통령의 전폭적인 지원자가 되어 정계에 많은 영향력을 행사했다. 블라디미르 푸틴 역시 올리가르히들의 지원으로 총리가 되었으나 대통령 취임 이후에는 눈엣가시인 올리가르히들을 대거 숙청하면서 자신들이 지원해준 이에게 뒤통수를 맞은 격이 되었다.

이 시절 거리에는 비행청소년, 불량배들이 넘쳐나며 치안을 비롯한 사회적 상황은 최악이었고 뉴스에서는 러시아 경제가 파탄났다는 소식이 계속해서 전해져오고, 러시아인들이 돈을 벌기 위해 심지어 여대생이나 OL 등의 엘리트 여성들까지 한국매춘 등으로 일하러 오면서 러시아가 경제적으로 어려운 나라, 치안이 불안정한 나라라는 인상은 한국 국민들의 뇌리에도 깊게 박혔으며 21세기에 들어서도 이런 인식은 여전히 남아 있다.[39]

국내 정치도 개판인건 매한가지였다. 선거에서는 공산당러시아 자유민주당같은 민족주의 극우 정당 등 극단주의 정당들이 약진했으며 대통령 보리스 옐친과 최고회의 간에 헌법 제정을 두고 치른 갈등은 1993년 러시아 헌정위기로 발전했다. 러시아 국회의사당이 탱크에 의해 포격당하는 유명한 장면이 이때 나왔으며 이 사건을 계기로 옐친은 좌익계열 단체들의 활동을 금지하고 언론을 폐간시키는 등 자신의 독재권력을 강화하는 데에 써먹었다. 계속된 지지율 하락으로 1995년 총선에서는 겐나디 주가노프공산당이 1당이 되기도 했지만 1996년 대통령 선거에서는 올리가르히의 지원을 바탕으로 옐친이 승리했다.

또한 조하르 두다예프의 독립한 이치케리야 체첸 공화국에서 내전이 발생하자 두다예프의 실각을 꾀하며 반군을 지원했음에도, 계속해서 상황이 부진하자 1994년 러시아가 직접 체첸을 침공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결과는 처참한 실패. 이후 블라디미르 푸틴 주도로 2차 체첸 전쟁에서 승리하고 잔당들까지 소탕되며 체첸 문제는 일단락되었다.

계속된 경제 악화로 1998년 러시아는 모라토리엄을 선언하기에 이르렀으며 이때 옐친은 잦은 실정으로 권위가 만신창이로 떨어졌고 탄핵 위기까지 가기도 했지만 겨우 회생했다. 건강 악화로 1999년 8월 블라디미르 푸틴을 총리로 지명했는데 푸틴이 2차 체첸 전쟁을 손쉽게 승리로 이끌면서 일약에 국민들의 스타로 등극했고 옐친과 여당도 덕분에 자연스레 지지세를 회복했다. 12월 총선에서 친 옐친파 정당들이 선전했고, 옐친은 대가로 푸틴이 대통령에 오르게 된다.

3. 문화

3.1. 출판계

1980년대 후반까지 인기가 있던 이념서적은 1990~1991년 동구권 및 소련 붕괴, 1993년 문민정부 출범 등으로 쇠락해 출판계도 가벼움, 일상성, 구체성을 지향하는 쪽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주류인 문예물은 순수 문예물보다 대중성을 지향하는 쪽으로 나아가게 됐는데, 김진명의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나 이우혁의 <퇴마록> 같은 가공소설이 베스트셀러로 등극했다. 또 양귀자 역시 정통 문예물에서 벗어난 <천년의 사랑>을 내기도 했다. 정통 작가들 중 이청준도 <서편제>나 <축제>가 영화화되면서 또다시 전성기를 맞이했고, 박경리의 <토지>, 조정래의 <태백산맥> 및 <아리랑>도 여전히 호응을 얻었다. 시 분야에선 정호승의 <사랑하다가 죽어버려라>나 최영미 작품 <서른, 잔치는 끝났다>가 호응을 받기도 했다. 심지어 류시화 작품 <외눈박이 물고기의 사랑>은 문단들의 외면 속에서도 베스트셀러 지위를 유지했다.

1980년대 후반부터 성행한 에세이, 전기류, 신변잡기류 등 '비소설 부문'도 여전히 인기를 구가하고 있었다. 1995년 전여옥 작 <일본은 없다>가 히트치면서 한동안 책 제목에까지 '있다'나 '없다' 붐을 형성시키기도 했고, 1996년 경기불황 속에서도 <좀머 씨 이야기> 같이 여유와 잔잔함을 추구하는 책도 인기를 얻었다. 1997년 외환위기를 즈음해 '몇 가지'류 책들이 성행하기도 했다. 이러한 비소설류는 영상문화 도래 및 감성세대 등장, 불황으로 기성소설에 무거움을 느끼는 사람들에게 청량제가 되어 주었다.

심지어 개인용 컴퓨터 보급과 1994년 세계화 선언, 해외여행 붐 등의 영향으로 <컴퓨터 길라잡이> 류 컴퓨터 관련 도서나 <꼬리에 꼬리를 무는 영어> 등 어학도서, 여행/관광/레저스포츠 등 여가 관련 도서도 날개 돋친 듯 팔렸다. 거기에 퇴조할 것처럼 보였던 인문/사회교양계도 1994년 유홍준 교수의 저서 <나의 문화유산답사기>가 히트쳐서 활기를 되찾았고, 당시 사람들도 풍요로운 현대 속에서 과거를 돌아보자는 경향에 따라 박영규의 저서 <한권으로 보는 조선왕조실록> 등 새로운 인문교양서가 뜨기도 했다.

출판물은 날로 꾸준히 늘어나는데도 출판사 경영실태는 영세성을 벗어나지 못했다. 1993년 기준 등록출판사 수는 총 8,380개이나, 1년 동안 한 권도 내지 않은 무실적 출판사만 5,708개로, 전체 출판사 중 60%에 이르렀다. 발행 실적있는 출판사도 연평균 3.7종이며 체제/제도적 측면에선 낙후성을 못 벗어났다. 1995년부터 영상매체 발달과 식상한 기획, 독서보다 해외여행으로 외양을 다지는 대중들의 생활패턴에도 영향을 미쳐 출판계가 불황에 빠졌고, 1997년 3월 고려원 부도를 시초로 서적도매상이 서서히 부도나 출판 기반까지 위협했다. 이에 출판계도 김대중 정부에 긴급지원을 요청하며 자구책을 마련했다. 트렌드도 IMF 여파로 점차 달라져, 1998년 들어 주로 경제서적이 많이 출판되고 정영진의 <청년 박정희>나 이인화의 <인간의 길>, 조갑제의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 등 박정희 관련 서적이 상당수 나왔다. 이 와중에 김진명 소설 <하늘이여 땅이여>와 이우혁의 <왜란종결자> 등도 베스트셀러에 올랐다.

1999년 들어 독일 베텔스만 사가 외국 출판사로서 한국에 현지법인 형식으로 처음 진출했고, '예스24'나 '알라딘' 등 인터넷 서적쇼핑몰이 문을 엶으로서 온라인 책 판매가 활기를 띠었다. 당년도 출판계에선 '101가지 이야기'나 'XX하지 마라' 같은 명상서/수행서가 인기를 끌었는데, <영어공부 절대로 하자 마라>나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 <무소유>, <풍경>, <만행> 등이 대표적이었다.

3.2. 문학

1980년대 후반 ~ 1990년대 초반에 걸친 변혁기를 지나 그 열기가 가라앉으면서 한국 문학은 한동한 방향감각을 상실했다. 이에 따라 민중/노동문학이 쇠퇴하고 개인적 일상과 삶의 의식에 따른 내면추구와 탈정치화가 대세가 됐다. 이러한 변화/모색 과정에서 가장 선풍을 일으킨 건 1994년 최영미 작가의 시집 <서른, 잔치는 끝났다>였는데, 최영미 자신도 운동권 출신이었지만 경직된 이념과 사회성에 얽매이지 않고 감각적 언어와 내밀한 고백체로 엮어 문단계에 돌풍을 일으켜 '최영미 신드롬'으로 호평받았지만, 운동권과 일부 평론가들은 "운동의 패배주의를 확산시키고 상업성에 영합했다"고 매몰차게 비판을 가했다. 이런 시대적 상황으로 '후일담 문학'이란 말이 유행했는데, 이 말은 평론가 김윤식 교수가 공지영, 박일문, 김영현 등의 작품들을 평하면서 처음 쓰기 시작했고, 해당 문학은 운동의 중심 및 분류, 실제 과정보다 운동권 주변 및 운동권들의 후일담을 다룬 것이다.

위와 같은 모색기를 지나 신경숙을 비롯해 공지영, 윤대녕, 김소진, 구효서, 은희경, 공선옥, 김인숙, 이청해, 채영주 등 '30대 신진 작가'들의 활동이 크게 주목을 받았고, 조정래도 <태백산맥>에 이어 <아리랑>, <한강> 등을 내며 건재를 과시했다. 그 외에 송기숙, 한승원, 한수산, 이청준, 홍성원, 최인훈, 최명희, 김남일, 김주영, 이순원 등 중진 작가들 역시 꾸준히 창작활동을 전개했다. 그러나 소설과 달리 시는 꾸준한 창작활동에도 불구하고 대중적 호응이 떨어져 침체기를 겪었고, 이념/사회성 대신 문명 비판적인 환경시 및 생명시 등 신서정시가 강세를 뚜렷이 나타냈다. 특히 미당 서정주, 고은, 구상, 조병화, 황동규, 정현종, 김지하, 김혜숙, 허영자, 김후란 등 원로/중진들의 시에서 더 큰 경향을 드러냈으며, 일부 신인들에게도 이러한 경향을 나타냈다. 그 외에도 곽재구가 <첫눈>, 전영애가 <카프카, 나의 카프카>, 정호승이 <사랑하다가 죽어버려라>를 내는 등 여전히 건재를 과시했다. 같은 시기 이종록, 신정숙, 임후성, 서림 등 참신한 감수성을 지닌 신세대 시인들의 활약도 흥미를 더했고, 진보 문인 박노해, 백무산, 박영근 등은 1980년대식 급진성 대신 차분하게 삶을 응시하는 쪽으로 변화해갔다.

1990년대 들어 개방화/자유화가 진행되는 와중에 문단계에서 '표현의 자유' 문제가 더욱 부각을 받았다. 1992년 <즐거운 사라> 작가 마광수 교수, 1997년 <내게 거짓말을 해봐> 작가 장정일이 음란문서 제조죄로 각각 법정구속되었다. 특히 장정일은 성에 대한 사회의 이중적 태도를 비판코자 했으나 공안의 잣대에 걸렸고, '표현의 자유'는 여전히 사법적 판단 대상이었다. 그리고 진보 문인에 대한 법정구속도 여전해 1991년 박노해를 비롯해 1993년 황석영, 1996년 김하기가 각각 국가보안법 위반혐의로 감옥에 갔고, 소설가 조정래도 <태백산맥> 이념시비 때문에 1994년부터 11년간 법적 갈등에 돌입하게 됐다. 1996년 이문열 작가가 페미니즘이나 여성을 부정적으로 바라본 <선택>을 내면서 큰 파문을 일으켰다.

1998년 들어선 IMF 여파로 문학계에도 안 좋은 영향을 미쳤다. 고학력 주부 및 사무직 여성이 독자층에서 대거 이탈해 시는 거의 빈사 상태였고, 소설 역시 시장이 위축됐다. 그러한 상황 속에서도 이혜경 창작소설집 <그날에>나 이치은 장편소설 <권태로운 자들> / <소파씨의 아파트에 모이다> 등 양질의 작품이 나왔고, 대중소설 쪽으로 전환한 양귀자의 <모순>도 베스트셀러 대열에 합류했다. 이어 박완서, 은희경, 공지영, 김형경, 신경숙 등도 시대적 욕망을 반영한 작품들을 내놨다.

1999년 문학계는 영상매체 확장에 따른 위기감이 확산되는 중에 새 돌파구를 마련하지 못했다. 20~30대 청년작가군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경향의 완성도 높은 작품이 무수히 나왔지만 문학계 전반은 사회적 파장을 지닐 만한 뜨거운 논쟁이나 새 세기를 준비하는 움직임은 없었다. 위와 같은 어려움 속에서도 <검은 이야기 사슬> 등을 낸 정영문, <청동거울을 찾아라>의 민경현, <엘리베이터에 낀 그 남자는 어떻게 되었나>의 김영하 등 독특한 상상력을 지닌 신예 작가들의 활약이 돋보였고, 강석경의 <내 안의 깊은 계단>, 최인석 창작집 <나의 사랑 나의 귀신>, 이경자 장편소설 <정은 늙지도 않아> 등도 하반기 독서시장에서 화제를 일으켰다. 또 당년도 베스트셀러는 말 그대로 '여인천하' 였는데, 신경숙의 <기차는 7시에 떠나네>가 28만 권을 기록한 걸 비롯해 은희경 창작집 <행복한 사람은 시계를 보지 않는다>가 18만 권, 전경린 장편소설 <내 생애에 꼭 하나뿐일 특별한 날> 및 공지영 창작집 <존재는 눈물을 흘린다>가 각각 11만 권을 돌파했다. 반면 시집은 황지우의 <어느날 나는 흐린 주점에 앉아 있을 거다>가 8만 5천 권을 기록했다.

반면 판타지 소설계는 이우혁의 <퇴마록>이 히트한 후 1998년부터 사이버 공간을 벗어나 서점에까지 큰 반향을 일으켰고, 1999년 들어 상업적 성공으로 문학출판 시장에서 주목할 만한 현상으로 떠올랐다. 이 즈음 이영도의 <드래곤 라자> 등이 50만 부 이상의 판매고를 올리며 히트했다. 또 문화관광부는 1999년 문예진흥원을 통해 외환위기 이후 생활고를 겪는 문인들을 위해 상/하반기 걸쳐 지원금 10억 원씩을 보탰다.

1999년 문학계에 새로 불거진 이슈는 바로 <문학과 사회> 및 <문학동네> 등 유력 문학계간지들이 겪은 '문학권력 논쟁'이었다. 김정란 시인은 <인물과 사상> 12권 기고문 '그들의 문학 - 그 치명적 얽힘: 권성우, 고종석의 글에 대한 발론'에서 <문학동네>를 "특정 언론매체와 결탁한 상업주의의 온상"이라 비판했고, 권성우 등도 <문예중앙> 여름호에서 <문학과 사회>에 대해 "특정 학연 등을 중심으로 한 문학계의 권력집단"이라 질타했다.

3.3. 음악

3.3.1. 서양 음악

1990년대를 평정했던 음악은 흑인음악[40]이다. 마이클 잭슨이 1980년대에 음악계에서 흑인의 장벽을 깨부순 이후 그동안 인기는 있었으나 상대적으로 묻히는 음악이었던 힙합은 'Golden Era'라 불리는 시대를 맞아 스눕 독, 2Pac노토리어스 B.I.G.으로 대표되는 황금기가 시작됐으며, 갱스터 랩이 힙합 문화에서도 우위를 점했다. 이러한 흐름을 타고 힙합 문화가 한국에도 수입되어서 한국의 힙합씬이 태동하기 시작하였다.

또한 수많은 R&B 가수들이 탄생해 대중음악과 결합하였다. 그전까지는 대중음악과 거리가 멀었던 R&B음악들이 머라이어 캐리, TLC, 자넷 잭슨, 휘트니 휴스턴, 셀린 디옹 등의 여성가수들과 보이즈 투 멘, 베이비 페이스 등의 남성가수들에 의해서 팝과 일체화 되었고 본격적인 대중음악의 절정기를 만들어내었다. R&B는 1990년대 가장 인기 있었던 장르 중 하나로 R&B 가수인 머라이어 캐리는 명실 상부 1990년대 아이콘에 등극하며 데뷔와 동시에 센세이션한 인기를 누렸고 1990년대 가장 성공한 가수라는 타이틀까지 얻게 되었다. 1980년대 인기가수였던 휘트니 휴스턴과 자넷 잭슨도 1990년대에 인기를 과시하며 인기를 이어나갔다. 세계적으로 엄청난 인기를 자랑했던 흑인 걸그룹 TLC로 있었다.

록 음악의 경우, 록 음악의 헤게모니가 하드 록에서 출발한 메탈 계열에서 펑크 록에서 출발한 얼터너티브 록로 완전히 돌아선 시기라고 할 수 있으며, 이 변화는 아직까지 유효하다. 얼터너티브 록 쪽에서 너바나의 <Nevermind>, 펄 잼의 <Ten> 등의 명반이 등장하였으며, 스매싱 펌킨스와 같은 그룹도 1990년대 초부터 후반까지 큰 인기를 끌었다. 그리고 얼터너티브 락은 현재까지도 락 씬을 주도하고 있다. 물론 1990년대 초반까지는 메탈의 기세도 여전히 등등해서 건즈 앤 로지스가 최고의 전성기를 누리고, 메탈리카Metallica를 발매하며 대중적 인기를 드높였다. 그러나 1990년대 초가 지나면서 메탈의 인기는 식어갔으며, 그나마 판테라 정도가 자존심을 지켰다. 하지만 오히려 노르웨이, 스웨덴등의 북유럽에서는 Darkthrone, Mayhem 같은 밴드의 블랙 메탈멜로딕 데스 메탈필두로 메탈이 얼터니티브와 관계없이 기세등등했다.

1990년대 중반에 오면 1980년대 끝무렵에 더 스미스, 스톤 로지스 등을 통해 비롯된 브릿팝 음악이 본격적으로 부상한다. 스웨이드를 시작으로 블러, 오아시스 등이 커다란 인기를 끌었으며, 라디오헤드는 1990년대 중후반 <The Bends>와 <OK Computer>라는 명반을 내놓음으로써 1990년대 록 음악을 집대성하고 'Radioheadism'이라는 음악 풍조를 탄생시키기까지 한다. 이는 2000년대 초반까지 이어져, 콜드플레이Muse, 엘보우, 과 같은 밴드들에게 영향을 준다.

일렉트로니카 음악이 이 시기에 매우 발전했다. 펫 샵 보이즈 류의 신스팝이나 테크노 등에 머무르던 일렉트로니카는 이 무렵 레이브문화의 흥성을 시작으로 정말 다양한 스타일로 분화되게 된다. 프로디지, 케미컬 브라더스 등의 메가 히트 밴드들이 등장하였으며. 에이펙스 트윈은 비단 일렉트로니카만이 아닌 대중 문화 전반에 큰 흔적을 남겼다.

1990년대 중후반에는 걸그룹 스파이스 걸스가 전세계적으로 인기를 끌어 흑인 멤버들로만 구성된 그룹에서 '인종의 다양화'를 이 그룹이 처음 실천했고, 그리고 한국에서도 베이비복스, 에스이에스, 핑클 등이 스파이스 걸스의 영향을 받아 우리나라 걸그룹이 발전한 계기가 되었다.

1990년대 후반에는 80년대 후반 이후로 틴 팝이 10년 만에 유행하기 시작했다. 스파이스 걸스의 선두로 틴 팝이 다시 유행하기 시작해 틴 팝의 대명사인 백스트리트 보이즈, 엔싱크, 브리트니 스피어스, 크리스티나 아길레라 등이 전성기를 누렸다. 그리고 2000년대 초반까지 이어나갔다.

세계 3대 디바들인 휘트니 휴스턴, 머라이어 캐리, 셀린 디옹이 90년대를 씹어먹었다. 90년대 초반에는 휘트니 휴스턴의 전성기고[41] 90년대 중반에는 머라이어 캐리의 전성기고[42] 90년대 후반에는 셀린 디옹의 전성기다.[43]

3.3.2. 한국 음악

대중음악계에선 음반의 100만 장 판매 시대가 본격적으로 시작됐으며 200만 장이 넘게 팔리는 더블밀리언 앨범도 볼 수 있었다. 여러모로 음반판매량의 황금기나 다름없었던 시절이다. 90년대의 음반 판매량은 이후 한참이 지난 2015년 이후 K-POP 아이돌 팬덤의 규모가 한국뿐 아니라 세계구급으로 커지면서 다시 100만장이 넘는 음반의 출현을 회복했다. 다만 이 당시의 음반 판매량은 한류 열풍과 세계화 진출 이전의 순전히 내수와 대중성만으로 기록한 일들이었기에 현재의 음반 판매량과 일대일 비교가 다소 힘든 편이다.

이후 오프라인 음반시장은 1997년 야간정액제, 1998년 케이블 인터넷, 1999년 ADSL의 보급으로 2000~2001년에 정점을 찍었다.[44] 음반판매량에 있어서는 댄스와 발라드음악이 절대적으로 그 비중을 차지하던 시대였다. 따라서 힙합문화의 도입을 제외한다면 장르적 다양성은 차라리 1980년대가 나았다고 볼 수 있다. 물론 그럼에도 전람회, 015B와 같이 대학생들이 가요계에 데뷔하는 경우가 있었다.[45]

서태지와 아이들, 듀스, 김건모, 신승훈 등의 아티스트가 등장하였고, 서태지와 아이들의 경우 댄스, 랩 장르의 뮤직을 주류로 이끌었으며 기존 가요와 다른 파격적 시도들을 함으로써 명실공히 1990년대 한국 가요계의 아이콘으로 등극했다.

김건모, 신승훈 역시 각자의 장르[46]에서 걸출한 실력과 압도적인 위치를 뽐냈고 서태지 못지않은 인기와 히트곡들, 엄청난 상업성을 누리며 1990년대 한국 대중음악계의 3대장의 위치를 가졌다.

'현진영과 와와' 출신인 이현도와 김성재가 결성한 듀스는 1993년에 데뷔하여 매니아층을 만들었고 대표적 곡인 '나를 돌아봐', '우리는', '여름안에서', '굴레를 벗어나' 등을 내놓고 인기를 누려가고 있었으나 1995년 7월 콘서트를 끝으로 해체를 발표했고, 보컬이던 김성재가 11월 19일에 솔로 1집을 내고 같은 날 SBS <생방송 TV가요20>을 통해 데뷔공연을 열었으나, 다음 날인 20일 그가 의문사를 당하면서 활동이 중단되었다. 1997년 래퍼 이현도가 미발표곡 등을 담은 <Deux Forever>를 내면서 그룹의 역사를 끝냈다.

1992년 서태지와 아이들 등장 이후 불과 2~3년 사이에 가요계는 젊은 취향의 세련된 음악 위주로 교체되면서, 구시대 음악을 하던 86세대 이상의 기성 가수들 대부분이 가요계에서 "쓸려나갔다."

86세대 나이대의 가수들 중에서도 과거 트로트 위주의 가요에서 탈피해서 새로운 형식의 음악을 추구하고 변화에 동참한 이승철, 이승환, 박미경, 신효범, 김광진, 신승훈, 김건모, 김종서, 신해철, 임재범, 김현철, 이소라, 엄정화 등은 오히려 새로운 시대의 스타로 거듭났고 상당수는 21세기에 들어서까지 젊은 세대들에게 인기를 얻는 거장이 되었지만, 80년대까지의 성인가요풍 스타일에서 벗어나지 못한 가수들은 한순간에 구시대 퇴물 취급당하고 물러나야만 했다. 그들은 아예 가요계 활동을 접거나 라이브카페에서 활동한다든지, 트로트가수로 전향해 뒷골목 행사를 돌면서 메인스트림에서 멀어진 60년대생 이상 기성세대만을 위한 가수로 전락하고 말았다.

자기 세대가 즐기던 음악과 뮤지션들이 한순간에 사라진 것을 본 베이비붐 세대인 당시 30대들은 이때의 변혁에 피해의식을 갖고 증오하면서 "가요계가 10~20대 취향 위주로만 돌아간다"라고 주장하며 90년대 이후 새로운 음악을 선호하는 X세대이하와 갈등을 겪게 된다.

뮤직비디오 문화 등 '듣는 음악'에서 '보는 음악' 시대로 전환되기 시작한 것도 1990년대였다. 서태지가 음악이 아닌 비주얼적인 면에서도 세일즈 포인트가 있었기 때문에 한국에서도 본격적인 뮤직비디오 제작시장이 갖추어지기 시작하며, 이는 1995년 m.net이나 KMTV 같이 케이블 TV 시대를 맞아 생겨난 음악 채널들의 탄생과도 궤를 같이했다. 이전까지만 해도 한국 음악시장에서 뮤직비디오라고 할만한것은 없었으며, 토요일 토요일은 즐거워 같은 음악 쇼 프로그램에서 즉석무대를 갖춰주는 일종의 유사 뮤직비디오들이 그나마 갖출 수 있는 가수들의 비주얼 판촉수단이었다.[47] 이에 따라 가요 프로그램 립싱크도 무분별하게 증가하면서 '립싱크 논란'이 가요계나 음악 애호가들 사이에서 크게 제기되었다. 이로 인해 1997년 KBS2 <가요 톱10>이 립싱크 표시를 붙여 구분시키고, MBC <인기가요 베스트 50>이 국내 최초로 올 라이브 무대로 전환했다.

서태지와 아이들은 1992년 3월에 데뷔하였고, 1집 때 데뷔곡인 '난 알아요'와 '환상 속의 그대'로 처음 히트하여 1993년 여름에 '하여가' 등을 내놓으며 승승장구했지만 1994년 3집 활동 당시 '교실 이데아'라는 곡을 거꾸로 돌리니 '피가 모자라'가 들린다며 여론이 시끄러웠다. 1995년 10월에 4집을 내놓으며 'Come Back Home'으로 활동하며 '시대유감' 사전검열 문제에 저항해 1990년대 대한민국 최고의 문화 아이콘으로 등극했고, 이들의 음악들은 한결같이 기성 가수들의 것과 달리 내용/형식 면에서 차별성과 독창성을 지녔고, 우리 사회 속의 온갖 억압적 요소들에 얽매인 청소년들에게 강렬한 감동을 주었다. 이후 서태지와 아이들은 '창작의 고통'을 이유로 1996년 1월 성균관 유림회관에서 은퇴 선언을 했고, 태지보이스를 따르던 벗들은 '서태지와 아이들 기념사업회(서기회)'란 비영리 문화단체를 세워 그의 자유와 도전정신을 기렸다.

그 이후부터는 서태지의 영향을 받은 H.O.T.를 필두로 한 1세대 아이돌 음악의 홍수가 시작되었으며, 심지어 'IDOL' 등과 같이 중~고등학생까지 가수판에 뛰어들기도 했다. 다만, 이들은 독창성 및 대중화에 독특한 전략을 지니지 못했고, 초창기였던 만큼 일본과 영미권 음악산업을 데드 카피하는 악습의 잔재가 많이 남아있었고 이에 대한 비판 역시 직면했었다. 지금은 한류다 뭐다 해서 아이돌 음악의 위상이 나아지긴 했지만 이때는 현재와 같은 아이돌 문화가 걸음마를 떼던 단계였던지라 성숙하지는 않았던 셈이다. 그러나 1997년 외환 위기로 음반판매량이 줄고 주요 음반도매상들이 연쇄 도산했고, 50만 장 이상을 찍은 음반이 1997년 15개에 비해 1998년 들어 H.O.T., 서태지, 김경호 등 10개에 불과했다. 이보다 더 타격을 받은 건 데뷔앨범을 내려던 신인 댄스그룹들이었다.

1995년 홍대 일대의 클럽 드럭을 중심으로 펑크 록 위주의 인디문화가 태동하기 시작했고, 이듬해인 1996년 11월 기념비적인 앨범인 Our Nation Vol.1이 발매되고 '스트리트펑크쇼' 등을 통해 새로운 문화가 알려지기 시작했다. 1997년에 황신혜밴드가 펑크 음악을 대중화시키기도 했으나 외환위기로 인해 록이나 펑크 같은 실험적 음악들이 쇠퇴했고, 대신 박진영의 <Honey>나 엄정화의 <Poison> 같은 복고풍의 가벼운 댄스팝이 히트를 쳤다. 그 해에 김종환의 <사랑을 위하여>가 110만 장을 기록해 히트곡으로 급부상했고, H.O.T.의 <열맞춰>와 김건모의 <사랑이 떠나가네>, 신승훈의 <지킬 수 없는 약속> 등이 밀리언셀러를 기록했다. 특히 김종환의 2년 연속 빅 히트는 성인가요의 존재를 확인시켜줬는데, 이는 창법과 가사가 진부하긴 해도 당대 가요계 변방이던 주부층의 강력한 구매력이 메꿔줬다.

1999년 들어서 mp3 등 신종 음악매체가 등장하여 기존 음악유통 및 제작시스템에 변화를 불어넣었고, 기존 대형 음반사들도 mp3 시장에 연거푸 뛰어들었다. 이 시기 들어 뮤지션들도 인터넷을 통해 데뷔하거나 음반을 홍보하기 시작했는데, 이들 중 미국 버클리음대 유학생인 신인래퍼 조PD는 PC통신 나우누리를 통해 노래를 업로드하면서 뭇 청소년들의 각광을 받았으며, 한 매니저가 음반을 냈으나 욕설 때문에 19금 딱지를 받아 '표현의 자유' 논란도 불거졌다. 다만 그는 인터넷으로 인한 가수 시스템의 변화를 예고해 수많은 신인들도 인터넷에 음반을 홍보해왔다. 심지어 오락실에서도 음악과 비디오게임을 조합한 'DDR' 역시 한국에서 유행했는데, 이는 n세대가 디지털 첨단기술로 음악의 DIY를 즐기고 있음을 보여줬다.

새 천년을 앞두고 조용필은 각 언론들이 실시한 '20세기 한국 최고의 가수'로 선정됐고, 그의 히트곡 <돌아와요 부산항에> 역시 20세기 최고의 노래로 선정됐다. 그는 11월 중순에 대중가수로서 최초로 예술의전당 오페라하우스에서 공연해 큰 주목을 받았으며, 티켓 1만여 장이 공연 한 달 전에 매진될 정도로 변함 없는 인기를 과시했다. 동년 대중가요계에서 두드러진 가수는 단연 조성모인데, 이는 <후회>와 <슬픈 영혼식>을 불러 최단시간 내에 100만 장을 넘었고, 1~2집이 연속 밀리언셀러 반열에 오르내리기도 했다. 특히 <슬픈 영혼식>은 한 해 200만 장이 넘게 팔렸다.

1990년대 중후반 구미권에 열풍을 불러일으킨 테크노도 1999년 한국에 상륙했는데, 이는 '기계와 인간의 조화'라는 기본 이념과는 달리 단순한 형식을 모방하는 데 그쳤다. 그래도 전국 곳곳에 테크노 클럽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나고 그 안에서 젊은이들이 고개를 흔들어내는 춤 때문에 일명 '도리도리춤'이란 신조어까지 나왔다. 해외 뮤지션 내한공연 중 '마이클 잭슨과 친구들'의 콘서트가 수차례 연기 끝에 그해 6월 25일 서울 잠실 올림픽주경기장에서 개최됐으나 부진한 흥행성적을 냈다.

민중 노래판에선 조국과 청춘, 꽃다지, 희망새, 천지인 등이 크게 활약했다. 특히 1992년부터 활동한 서총련 노래단 '조국과 청춘'은 종전 대학 노래패 단위 창작활동에서 지역 대학생 노래단 중심으로 바꾸는 데 일익했으며, 이들의 성공은 부경총련 '좋은친구', 경기남부총련 '천리마', 남총련 '한반도' 등 지역별 대학생 노래단 탄생에 자양분이 됐다. 또 '천지인'이라는 노래패는 민중가요 사상 최초로 락을 받아들이기도 했다. 그러나 1990년대 이래 신세대 열풍과 연세대 사태 등으로 민중가요의 영향력은 서서히 빛을 잃어갔다.

일제 및 독재시기 산물이던 '음반 사전심의제도'에 대한 문제제기도 이때 이루어졌는데, 이는 민중가수 정태춘-박은옥 부부가 1990년 <아, 대한민국...>, 1993년 <'92 장마, 종로에서>라는 두 음반을 사전심의 없이 냄에 따라 불법 딱지를 받은 데서 기인했다. 이에 그는 1993년 이후 음반 사전검열제를 타파키 위해 헌법재판소에 위헌제청을 하고 음비법 개정을 위해 국회 문공위 소속 의원들을 찾아다니는가 하면, 일반 국민들로 하여금 여론형성에도 힘을 기울였다. 1995년 서태지와 아이들 '시대유감 사건'을 계기로 기폭제가 되어 1996년 6월 7일 개정 음비법 시행에 따라 사전심의제가 사라졌고, 10월 헌법재판소가 위헌 판정했다.

국악/클래식계 입장에선 의미있는 시대였는데, 이는 1993년 <서편제>의 성공으로 판소리에 관한 국민적 관심이 높아졌고, 국악계와 언론이 전통음악 전체로 눈을 쏠리게 만들면서 1994년을 '국악의 해'로 정하게끔 만들었고, 1994년 들어 국악의 해 외에 '동학농민운동 100주년' 및 '서울 정도 600주년', '중요 무형문화재 지정 30주년' 등이 맞물려 이를 기념하는 대형 행사 및 무대가 펼쳐졌고, 차이코프스키 콩쿠르에서 백혜선, 제니퍼 고, 엘린 문이 참가자 284명 중 3, 2, 4위를 각각 따내 큰 주목을 받았고, 바이올리니스트 줄리엣 강이 폴란드 비에니아프스키 콩쿠르, 첼리스트 장한나가 프랑스 파리 로스트로포비치 콩쿠르에서 각각 우승했다. 바이올리니스트 장영주도 미국 뉴욕 카네기홀에서 독주회를 열어 주목을 받았다. 그해 9월에 한국 최초로 '윤이상 음악제'가 서울, 부산, 광주 등 3곳에서 공연됐으나, 정작 윤이상 작곡가가 안기부와의 마찰로 조국에 오지 못했음에도 무난히 잘 치러졌다. 당시 연주됐던 곡은 오페라 <꿈>과 <교향악 제3번>, <클라리넷 5중주>, 실내악 작품 등 10곡이었다.

1990년대 들어 조수미, 장영주, 정경화, 정명훈, 백건우, 백혜선, 신영옥, 홍혜경, 유진 박 등 해외파나 교포 스타들이 떠올랐고, 임헌정 부천필하모닉 상임지휘자 등 국내파도 떠올랐는데, 이는 '세계화 시대의 도래'를 실감케 할 뿐더러 일부 계층만이 아닌 모든 대중들에게 사랑을 받은 게 당대 특이점이었다. 재야사학자 임영태의 견해에 의하면, 그 요인으로는 TV와 같은 영상 매체의 발달, 국민들의 국제화에 대한 의식 진전, 생활수준 향상에 따른 문화적 욕구 증진 등이 꼽힌다.

클래식 음반 중에선 1994년 조수미 1집 <새야 새야>가 히트를 치기 시작해 1996년 <디어 아마데우스>, <베스트 앨범> 등 2개 음반이 10위권 안에 들었다. 신영옥 앨범 <아베 마리아>가 발매 2달 만에 6만 장이나 팔려 1996년 12월 판매순위 1위에 올랐고, 장한나 데뷔앨범도 6만 장이나 팔려 1996년 국내 클래식 앨범 판매순위 10위권에 들었다.

1996년 국악계에선 가장 큰 성과로는 서울 서초동에 국악전용극장 '예악당'이 문을 연 걸 꼽을 수 있다. 9월 4일엔 서울 예술의전당 음악당에서 공연된 김덕수-안숙선 합동공연 <공감>은 제목에 걸맞게 관객들의 공감을 크게 불러일으켰다.

3.3.3. 일본 음악

음악 팬들에겐 J-POP의 전성기로 회자되는 시대로, 일본도 한국과 비슷하게 다양한 장르들의 음악이 여럿 나왔으며, 음반 판매량이 최고를 기록하던 시기였다. 일본이 장기적 경제 불황에 빠져들었던 상황을 고려해보면 상당한 성과라고 볼 수 있는 부분. 물론 장기적 경기 침체가 오히려 음악과 같은 대중문화 소비를 늘렸다는 분석도 여럿 있다. 프로듀서 코무로 테츠야가 코무로붐을 일으키며 엄청난 인기를 끌었으며, Mr. Children, B'z, 스핏츠와 같은 록밴드들이나 시부야계 아티스트들이 크게 인기를 끌었으며 1980년대 후반부터 활동한 X JAPAN을 통해 비주얼계 록 음악도 성행했었다.

또한 에이벡스의 Super Eurobeat 시리즈가 컴필레이션 앨범의 딜레마와 한계를 딛고 오리콘 순위 상위권을 차지하고, 아무로 나미에V6유로비트 장르로 1990년대 중후반을 휩쓰는 등 유로비트도 약진했었다. 그리고 이는 2000년 5월에 발매되었던 슈퍼 유로비트 110집이 70만 장이라는 어마어마한 판매량과 오리콘차트 3주간 1위라는 엄청난 성과를 내게 되는 씨앗이 되었다.

3.4. 게임

콘솔 게임계에서는 1990년대 초중반엔 게임보이, 슈퍼패미컴, 메가드라이브, PC엔진 등의 16비트 콘솔 게임기가 본격적으로 등장하여 콘솔 전쟁이 1980년대보다 상당히 치열해지기 시작했다. 16비트 콘솔 싸움은 결과적으로 슈퍼패미컴이 승리하였지만 1980년대에 패미컴이 온갖 게임 시장을 장악하던 때를 생각하면 엄청나게 치열한 싸움이었다.

1990년대 초중반때만 해도 후반 때와는 달리 1980년대 전반의 게임들과 같은 선상에 있거나 약간 상위호환에 있는 편이였다. 실제로 1991년 출시된 희대의 명작 스트리트 파이터 2의 등장이라는 어마어마하게 큰 계기를 제외하면 게임의 역사에서는 본격적으로 게임이 발달하기 시작한 1980년대 중반 때부터 1990년대 초중반까지를 같은 세대로 취급된다.

그러나 이것이 딱히 문제점인 것도 아니며 이때부터 게임이 점차 더 대중적으로 변모했기 때문에 1980년대 전반 게임들의 장점들과 스타일을 지니면서 더 대중적이고 더 세련된 모습을 보이게 되어 1990년대만의 특징을 부여하기도 했다.

1990년대 중후반부터 본격적으로 16비트에서 32비트로 넘어가기 시작한 5 콘솔 시대로, 이 시기에 비디오 게임의 비약적인 그래픽 상승 경향이 보이기 시작했다. PC에서는 둠 시리즈가 그래픽 혁명, 미스트 시리즈가 CDROM의 대용량 매체를 적극 활용한 인터랙티브 혁명을 이끌어 냈고, 콘솔 쪽에서는 32비트 게임기들이 보다 제대로 된 폴리곤 그래픽 지원과 CDROM 매체를 이용한 풀모션 비디오[48] 활용으로 3D 게임의 중흥기를 이끌어내기 시작했다.

특히 1990년대 중후반은 세가 새턴플레이스테이션, PC-FX 등의 게임기들이 경합하며 만들어낸 2D 게임의 전성기라 할 수 있다. 특히 세가소니의 너 죽고 나 죽자식의 치열한 무한경쟁이 수없이 많은 2D 수작 게임들이 탄생한 배경이 되었다. 1990년대 말 플레이스테이션 2드림캐스트가 등장하며 보다 완연한 3D게임 시대가 열렸으나 그전까지만 해도 폴리곤 기술은 텍스쳐의 해상도도 낮고 해서 아직 조악한 수준이었으며 1999년까지는 2D의 우세가 지속된다. 그나마 새턴과 플스의 초반 싸움에서 새턴이 플스하고 호각을 뜬 이유도 새턴이 2D 쪽에서는 확실히 우위를 점했기 때문. 그 게임 이후로 새턴이 밀릴때에도 2D 격투게임/슈팅게임의 이식률이 좋은 새턴은 이쪽 장르 매니아들에게 여전히 수요가 높았었다. 2000년대 초반, 6세대 콘솔의 등장을 거치면서 3D 구현기술이 발전해 2002년쯤에는 완전한 3D의 우세가 굳혀졌다.

휴대용 게임의 경우엔 게임보이가 1990년대 초 중반을 주름잡았고 전 세계를 평정했다.[49] 게임보이 컬러가 출시되지 않은 시점이었기에 게임보이는 여전히 흑백 8비트 그래픽으로 작동되었다. 하지만, 당시로선 성능이 매우 좋았던 혁명적인 휴대용 게임기였다.

PC 게임계는 한동안 DOS 2D 디스켓 게임 일색에 그래픽카드도 ATi 등의 2D 그래픽카드 위주였으나, 1991년 세계 최초로 <호버탱크 3D>란 3D 게임이 등장했다. 1994년 들어 CD 지원 게임이 점차 나오고 1995년 들어 윈도우 지원 게임들도 등장했다. 같은 해에 3dfx 사가 '부두 그래픽카드'를 개발하면서 풀 3D 게임 제작편수가 늘었고, 게이머들도 게임 소프트웨어를 고를 때 CPU, 운영체제 외에 그래픽카드도 필수 요건에 넣기 시작했다. '부두 시리즈'의 성공으로 엔비디아 등 후발주자들도 그래픽카드 사업에 뛰어들었다.

1993년 미국 웨스트우드 스튜디오가 세계 최초로 RTS 게임 <듄 2>를 제작했고, 뒤이어 블리자드 엔터테인먼트도 1994년 <워크래프트>를 제작했다. 1997년 케이브독은 세계 최초로 3D 그래픽 RTS <토탈 어나힐레이션>을 개발했다. 1998년 이전까지 <커맨드 앤 컨커> 시리즈가 우세였다가 이후 <스타크래프트>가 압살했다.

한편 90년대 말 한국 게임업계는 IMF폭탄을 맞은 직후[50] 스타크래프트의 등장으로 큰 변화를 가져왔다. 그 많던 당구장이 우수수 폐업하고, 그 자리에 PC방이 들어섰다. 오락실 게임이 죽어가던 와중에 청소년들은 또다른 게임 문화에 순식간에 적응했고 IMF 극복기에 절정에 달해 상가 건물은 조금만 규모가 커도 한 건물에 PC방이 두 개씩 들어가 있는 광경도 이상한 게 아니었다. IT 투자 붐(거품이었다)이 게임 업계에도 흘러들어 아트록스, 아마게돈 따위의 스타 아류작이 수도 없이 나타났다 사라지기 일쑤였을 정도로 스타크래프트의 인기는 컸고 스타크래프트를 능가하는 국산 RTS를 만들려는 시도들이 있었지만 대부분 실패하였다. 90년대 초부터 중소규모 업체 위주로 소소하게 이어져 오던 게임 개발업계는 거품이 꺼짐과 동시에 확실하게 가지치기를 당해 현재는 소위 3N이라는 업체들만이 살아남아 중견 기업으로 성장했다. 그 과정에서 한국 패키지 게임 시장도 몰락의 길을 걷게 되었다. 한편 스타크래프트의 인기는 e스포츠가 태동하는 기반이 되었고 이 무렵 최초의 프로게이머라 할 수 있는 신주영, 이기석 등의 인물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한동안 게임 수입업계는 SKC, LG소프트, 쌍용, 동서게임채널 등이 각축을 벌이다가 1998년 미국 일렉트로닉 아츠가 현지법인 '일렉트로닉 아츠 코리아'를 세우면서 게임 직배가 시작됐다.

1994년 KBS2 <생방송 게임천국>을 시초로 유료 ARS 게임도 어린이들 사이에 성행했고, PC통신에선 머드게임이 유행했다가 1996년 넥슨이 <바람의 나라>를 출시함으로서 국내 최초로 인터넷 기반 온라인 게임이 생겨났다. 이후 1999년 ADSL 보급과 더불어 온라인 게임이 집집마다 보급될 토양을 마련해 주었다. 90년대 말 한국 오락실 게임은 쇠퇴의 길을 걸었지만 그 시기에 나온 댄스 리듬게임인 DDR펌프잇업은 반짝인기를 얻었다.

3.5. 패션


자유화 이후 음악과 함께 10대에서 20대 초반들이 이전 세대들을 몰아내고 점령한 문화계 분야인데. 1990년대 패션은 크게 초반, 중반, 후반에 따라서 나뉘어 진다.

1990년대 초반은 주로 해외 교포나 유학생 출신의 오렌지족들과 압구정 문화가 유행을 선두했으며, 이들을 통해 게스, 캘빈 클라인 등 해외 브랜드가 국내에 소개되는 계기가 되었다. 과장됨이 핵심이던 80년대와 달리 90년대부터는 헤어와 패션 전반적으로 훨씬 자연스러운 느낌을 추구했다. 그리고 X세대의 등장과 함께 유니섹스 패션이 자리잡았고 여성들은 배꼽티와 핫팬츠를 입으면서 성적으로도 개방되기 시작했다.

1990년대 중반은 경제 호황기를 타고 대한민국 패션 브랜드가 최전성기를 누린 시기였다. 닉스, STORM LONDON 같은 한국/외국계 브랜드가 명품 브랜드 뺨치는 가격대에도 불구하고 젊은층에서 엄청난 인기를 모았다. 특히 태승트레이딩이 수입한 스톰 런던은 서태지가 쓴 비니 등 의상들을 후원했고[51] 소지섭, 김하늘, 송승헌 등 톱스타들이 카탈로그 모델로 데뷔한 스타 등용문이었으며, 브랜드 팬클럽까지 생길 정도로 매니아 층이 있었다. 이 시기에 10, 20대를 보낸 사람이라면 '292513=STORM'이라는 브랜드명을 아직도 기억할 것이다.

여성들의 메이크업 변화도 크게 두드러지는데, 이 시기 여성들의 화장은 진한 파운데이션과 벽돌같은 어두운 색 립스틱이 기본 스타일로 기존 원색 위주의 화장과는 차원이 다른 과감한 다크 컬러가 유행했다. 1990년대 중후반부터는 이게 더욱 심화되어 거의 특수분장 수준의 회갈색, 회보라 같은 엄청난 색상의 립스틱이 유행하기도 했다.[52]

또 그전까지 한국에서는 생소했던 힙합 패션이 MTVPC통신, 아이돌을 통해 전파되면서 바지통이 넓은 힙합 바지와 실버 액세사리가 유행했다. 그리고 이 시기부터 청소년 문화가 급성장하기 시작했는데, 청소년의 패션취향도 다양해짐에 따라 강남에서는 힙합패션이, 강북에서는 복고패션[53]이 유행하며 갈래가 나뉘기도 했다. 1997년에는 박찬호의 맹활약으로 LA 다저스 모자가 유행한 적 있었다.

1990년대 말에는 세기말의 분위기를 타고 장식이나 화려함을 최소화한 디자인에 채도와 명도가 낮은 어두운 톤의 미니멀리즘 룩이 유행했다. 특히 1997년 외환 위기의 여파로 방송국에서 자체적으로 연예인들의 염색이나 화려한 의상과 액세사리에 규제를 가하는 바람에 모자나 두건으로 머리를 가리는 등 한동안 패션 암흑기를 겪기도 했다.

영상물이나 광고계 등에서는 세기말 분위기의 영향을 받아 1999~2002년 전후의 대중문화에서 '테크노풍 + 은갈치 비주얼계 + α =국적불명' 으로 대표되는 특유의 'Y2K 퓨처리즘' 스타일이 유행했다. 이때 레쓰비이 세상 커피가 아니다[54] 등이 시간이 지나 유머글이나 기사 등으로 재조명되었다. 건축계에서도 각종 인테리어 노래방이 인기를 끌었다. 1999년 인천 인현동 호프집 화재 참사 이후 이런 형식의 노래방 내장재가 화재에 취약한 문제가 드러났고, 각종 건축에서 미니멀리즘 디자인이 본격적으로 유행하게 되면서 수많은 곳들이 폐업했으나 극소수는 영업하는 곳들이 남아 있다. 데몰리션 노래방이라는 사업체가 있는데, 이 노래방은 다른 노래방과 비교해도 영화 에이리언 시리즈 및 그 원조인 H.R 기거 아트웍의 영향을 받은듯한 SF적이고 다소 기괴한 인테리어를 포인트 중 하나로 삼았다. 다만 대놓고 제노모프와 흡사한 구조물을 비치한 경우도 많다. 이것들을 잘 모르는 사람들은 스타크래프트의 저그 컨셉으로 알기도 했다. 인기가 많아 창업한 지 2년 후에는 전국에 체인점이 200여개에 이르렀고, 미국지사까지 만들어졌다. 광고(후술할 용가리 노래방 등 비슷한 다른 노래방 사진도 있다.)까지도 있다. 종이 광고. 21세기에도 데몰리션노래방의 체인점은 제법 잔류하고 있는 편이다. 용가리노래방심형래의 영화 용가리에서 따왔으며 용가리 얼굴 입체 간판을 달고 영업했다. 노래방 내부도 용가리를 활용해 세기말 분위기를 냈다. 21세기에도 여전히 있다.

3.6. 영화

1990년대 초반에 들어 한국 영화계에선 우일영상(대우), 미도영화사(선경), 드림박스(삼성) 등처럼 재벌의 영화참여가 늘어났고, 1993년 <서편제>가 120만 관객을 동원하여 대히트를 기록했다. 여기엔 시대적 상황이란 변수가 끼어 있었는데, 이 시기 불어닥친 개방화 열풍은 다른 쪽에서 '우리 것'에 대한 소중함을 일깨워 주었고, 감동적인 비극적 스토리 및 예술에 대한 집념이 뒷받침되어 신비감과 비극미를 더해 주었다. 이 영화는 국악 등 한국 문화에 대해 새롭게 재조명할 계기를 만들어 주었으며, 한국 영화 역시 잘 만들면 외국과 경쟁할 수 있다는 걸 일깨워 주었다. 이후 1994년 <투캅스>, 1996년 <은행나무 침대>, 1997년 <접속> 등으로 상업적 히트가 이어졌으며, 1996년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과 <꽃잎>처럼 사회성을 지닌 영화도 탄탄한 작품성에 상업적 성공을 거뒀다. 이미 1994년 <태백산맥>도 히트를 쳤으나, 이는 원작 소설의 인기에 편승했다.

이와 더불어 홍상수, 강제규, 양윤호, 정병각, 한지승, 임순례, 이민용, 이창동, 송능한, 장윤현, 이경영 등 젊은 세대의 감성을 대변하는 신진 감독들이 등장해 국산 영화의 새 발전을 예고했다. 배우로는 한석규, 최민수, 박상민, 박중훈, 심혜진, 황신혜, 최진실, 이덕화, 문성근 등이 크게 활약했다.

이 시기 국산 영화계에서 주목할 만한 사건은 국내 최초의 국제 독립영화제 '1995 서울국제독립영화제' 개최였다. 출품작 중 가장 주목받는 작품으론 이란 감독 압바스 키아로스타미의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 배용균 감독의 <검으나 땅에 희나 백성>, 그리고 변영균 감독의 다큐멘터리 영화 <낮은 목소리: 아시아에서 여성으로 산다는 것 2> 등이었다. 1996년에는 국내 최초 종합영화제 '부산국제영화제', 1997년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가 각각 개봉되어 성공을 거뒀다. 그리고 1996년 헌법재판소 결정에 따라 공연윤리위원회의 영화 사전심의가 위헌으로 판결나 '가위질 시대'가 끝을 고했던 것 역시 큰 주목을 받았다. 반면 장산곶매 등 운동권 영화집단들은 1990년 독립영화 <파업전야>를 만들어 '완성된 민중영화'를 선보였고, 이는 1991년 <어머니 당신의 아들>, 1992년 <닫힌 교문을 열며>로 이어졌다.

문민정부 시기 5년 동안 국산 영화가 수 많은 성과를 거뒀지만, 그 이면에는 미국 영화 직배체제의 잠식으로 토종 영화계가 궁지에 몰리기 시작했다. 1988~1989년 직배반대 투쟁에도 불구하고 국산 영화 제작은 1988년 87편에서 1997년 59편으로 줄었고, 토종 영화자본 역시 빈약해져갔다. 반면 미국영화 직배 수는 1997년 53편으로 늘어나 세계 10대 영화수입국이 됐고, 이에 따라 로열티가 매년 30% 가량 증가해 직배 활동 시작 이래 1996년까지 5개사 송금액은 무려 1,367억 원, 1997년 기준 1,600억 원으로 각각 증가했다. 결국 1988년 직배반대 투쟁에 나섰던 영화인들 사이에선 "한국이 쇳덩이(자동차)를 팔려고 미국혼(영화)까지 사들였다"고 신랄히 비판했으며, 이는 영화가 상품이나 오락 차원을 넘어 인간의 사고와 세계관에 영향을 미친다는 점에서 정당하다고 볼 수 있다. 결국 한국은 준비되지도, 원치도 않은 상황에서 일방적으로 영화시장을 개방해 미국 우월주의를 비롯해 미국의 세계지배 이념, 인종차별, 성 도착, 동성애[55], 폭력, 살인, 전쟁 등 우리 정서상 해로운 것까지 들여오는 역효과를 낳았다. 이렇게 되자 김영삼 시기 5년 동안 국산은 <서편제>만 1백만 관객을 돌파했지만, 수입영화 쪽은 <스피드>, <쥬라기 공원> 등 10여 편에 달했다. 평균으로 쳐도 1년에 2편씩 1백만 이상을 동원한 셈이다. 위와 같은 위기상황 속에서도 몇몇 영화인들은 영화직배에 대해 "미국의 문화 침략에 대한 자각을 일으키면서도 영화시장을 키우는" 순기능도 있다고 견해를 제시했다. 또한 제작편수는 줄어도 희소가치가 생겨 미국 메이저 영화와 맞설 수 있는 측면도 있다.

또 공권력에 의한 영화탄압도 여전했는데, 노태우 시절 1990년 <파업전야> 상영 당시 민중영화가 상영되는 대학가나 재야단체마다 경찰 병력이 들이닥쳐 필름을 압수하고자 했고, 문민정부 초기에도 1994년 <해적> 등과 같이 가위질 수난도 있었다. 1996년 영화 사전검열 위헌판정 후 1997년 공윤이 '한국공연예술진흥협의회'로 출범되고 같은 해 개정 영화진흥법에서 '등급 외 전용관'을 명문화했지만, 여당 등의 반대로 전용관이 허용이 안 되어 등급외 영화들은 영화관에 내걸리지 못했다. 게다가 하반기 들어 '제1회 서울퀴어영화제'가 취소되고 제주 4.3 사건을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 <레드 헌트>가 인권영화제에서 상영되었다 하여 서준식 인권운동사랑방 대표가 국보법 위반으로 구속되기도 했다. 이에 서준식의 변호인단 103명이 "<레드 헌트>는 미군정 자료 및 역사학계의 연구 결과를 토대로 4.3 사건을 객관적으로 다뤘으며, 영화학과 교수들의 추천을 받아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상영된 것이니만큼 이적표현물로 볼 수 없다"고 보석 신청을 해 구속 3개월 만에 서준식이 풀려났다. 그러나 완전히 무죄로 판정되기까지는 약 6년이 걸렸다.

1998년에는 수입작 중 <타이타닉>이 서울 232만 명을 기록해 최고 흥행성적을 기록했고, 그 외에 <아마겟돈> 및 <딥 임팩트>가 각각 135만 및 76만 명을 동원해 크게 성공했다. 애니메이션 중에 월트 디즈니 작품 <벅스 라이프> 및 <뮬란>이 각각 90만 명을 돌파해 건재를 과시했다. 반면 국산 영화계는 외환위기 여파로 지각변동이 일었는데, 삼성, SK, 현대 등이 영화사업을 정리하고 산은캐피탈, 일신창업투자 등 금융권이 그 자리를 메꿨다. 동년도 제작편수는 1996년 64편, 1997년 59편에 이어 43편으로 감소했으나, <여고괴담>, <처녀들의 저녁식사>, <퇴마록>, <조용한 가족> 등 공포물이 성공하고 <편지>나 <8월의 크리스마스>, <해가 서쪽에서 뜬다면> 등 멜로영화들도 건재를 과시했다.

또 동년도 대형 이슈는 바로 일본 영화 개방이었다. 문화관광부가 11월 20일부로 '일본 대중문화의 단계적 개방 방침'에 따라 <하나비> 및 <카게무샤> 등 국제영화제 수상작 2종이 들어왔으나, 업계의 시장 10% 잠식 예상과는 달리 흥행은 실패했다. 그리고 '스크린쿼터 사수투쟁'도 이슈거리였는데, 미국측이 연초부터 한미투자협정 협상 과정에서 '스크린쿼터 축소'를 요구하자 7월 27일 각 영화계 인사들이 '스크린쿼터 사수 범영화인 비상대책위원회'를 결성해 제동을 걸기 시작했다. 11월 제3차 실무협상에서 해당 문제가 논의되자 이들은 12월 1일 광화문 등 도심에서 시위를 벌였다. 영화인들은 철야 농성에 돌입했고, 경실련, 환경운동연합 등 시민사회단체들도 '우리영화 지키기 시민사회단체 공동대책협의회'를 구성해 문화예술계 인사와도 연대했다.

이 와중에도 한국 영화는 국제무대에서 존재감을 과시해 <8월의 크리스마스>를 비롯해 <아름다운 시절>, <강원도의 힘> 등이 칸 영화제 공식부문에 초청됐으며, 특히 <아름다운 시절>은 도쿄국제영화제 등 4개 영화제에서 상 5개를 받았다. 1999년 들어 강제규 감독 작품 <쉬리>가 서울관객 244만 8천 명을 기록해 <타이타닉>의 흥행기록을 깼다. 이 작품의 흥행은 일약 뉴스거리가 됐고, 일본과 동남아 등지에 수출됐다. 또 내용상으론 냉전 시대 사고방식에 고착됐음에도 불구하고 밀도와 긴장감, 풍부한 볼거리로 '한국형 블록버스터'의 틀을 제시했다는 평도 이어졌다. 뒤이어 <주유소 습격사건> 등 국산 영화들이 흥행하여 1998년까지 20%대였던 시장점유율을 40%까지 끌어올리기도 했다.

결국 쉬리의 개봉으로, 한국의 영화계는 어마어마한 발전들을 겪게 된다.

해외 영화계는 흥행, 작품성 양면으로 엄청난 전성기를 맞게 된다. 펄프 픽션, 쇼생크 탈출 등 기라성같은 걸작들과 쥬라기 공원, 디즈니 르네상스 애니메이션(알라딘, 미녀와 야수, 라이온 킹) 같은 초메가히트 클래식 블록버스터들이 나오며, 1990년대를 최고의 전성기로 꼽는 팬들이 많다.

3.7. 언론

3.7.1. 정치적 측면

권력의 눈치를 보며 적당한 영향력을 행사한 언론은 김영삼의 문민정부가 들어서며 유례 없이 강해졌다. 문민정부 시절에는 '권력이 언론 눈치를 본다'라 할 정도였고, 일부 신문사주들은 '밤의 대통령'이라고도 불렸다. 방송은 직/간접적으로 정부의 통제를 받았으나, 신문은 서울신문을 빼곤 상당수가 민영이라 '언론재벌'까지 오르는 경우도 있고, 소유로 보면 정부로부터 독립돼 있으나 5공 때 정권의 언론통제로 눈치를 보다가 1987년 6.29 선언 뒤 언론 자율권이 확대되었다. 그렇다고 해도 '언론자유 형성'이라고 보긴 어려웠는데, 이미 1980년대에 확대된 상업주의와 언론 권력화가 합쳐져 수익성을 노리며 여론 조작 및 통제를 일삼아 영향력을 행사했고, 권력 대신 기업 차원에서 기자들의 편집권 및 언론자유를 빼앗았기에 1980년대 후반부턴 "권력과 자본으로부터 편집권 독립을 해야 한다"는 말이 나왔다. 90년대에도 언론은 여전히 상업주의 논리에 따라 돌아갔다.

김영삼 시절 언론이 지대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던 것은 대선 당선의 일등공신이 '언론' 그 자신이었기 때문이었다. 정부 장악으로 편파보도가 불가피한 방송과 달리 신문들은 하나같이 차기 정권에서 영향력을 행사코자 특정 후보를 밀어줬다. 대표적인 예로 1992년 14대 대선 때 <조선일보>가 정주영 네거티브 보도로 김영삼 득표율 상승에 공헌했고, 1997년 15대 대선 때 <중앙일보>도 이인제를 공격하며 이회창을 밀어줬다.

또 언론은 정부 장단에 맞추어 춤을 추면서도 사안에 따라 정반대 주장을 폈는데, <조선일보> 등 보수 언론들의 김영삼 개혁정책 공격이 그 예였다. 그래서 문민정부 내내 '개혁의 적은 언론이다'란 말이 나왔다. 심지어 국내 정치문제 외에도 남북관계 및 외교에도 의제설정을 하며 친재벌적 주장을 했는데, 언론이 재벌이고 재벌이 언론을 소유하는 현실상 당연할지 모르나 언론의 본래 이념인 '불편부당과 시시비비'로 본다면 부적절하다. 1994년 주요 언론에 대한 세무조사가 실시됐지만 시민사회단체의 공개 요구에도 불구하고 공개되지 않았다.

심지어 1990년대 중후반기 보수언론이 했던 '이승만 살리기'나 '박정희 신드롬' 조장 등에서 보듯 역사관 문제까지 제기됐는데, 언론이든 사람이든 역사 해석은 다를 수 있고 주장은 자유지만, 명백히 드러난 사실조차 자의적으로 해석/왜곡하는 것은 언론의 역사해석 범주를 벗어난 문제이다. <월간조선>이 저질렀던 1993년 한완상 저작 왜곡 및 1998년 최장집 사건처럼 비이성적 매카시즘 조장 및 노골적인 반개혁주의 선동 등 언론의 반사회/반 역사적 반동화가 드러나기도 했다.

이러한 보수언론의 반개혁적 태도에 저항하는 진보 진영의 움직임도 여전했는데, <한겨레신문>은 제도언론으로서 정론직필을 고수했고, 대중 정론지 포지션을 점차 확립했다. <월간 말>이나 <시사저널> 외에 1991년 <사회평론 길>도 더 창간했고, 강준만 전북대 교수도 1997년에 무크지 <인물과 사상>을 냈으며 문부식 등 3명도 같은 해 <당대비평>을 창간했다. 그 외에 시민사회단체들도 방송모니터 활동 등 언론감시 활동을 꾸준히 이어나갔다.

1997년 외환위기 뒤 재벌언론의 분리가 점차 진행되기 시작했다. 1998년 <문화일보>와 <경향신문>이 현대와 한화로부터 분리해 사원주주제로 태어났고, 1999년 <중앙일보>와 <국제신문>이 삼성과 롯데 품을 각각 벗어났다. 1999년은 언론 역사상 소용돌이가 크게 몰아친 해인데, 그해 10월 홍석현 중앙일보 회장이 보광그룹 탈세 혐의로 구속되자, 중앙일보 측은 '언론 탄압'이라 주장했다. 동월 25일 정형근 한나라당 의원이 <성공적 개혁추진을 위한 외부환경 정리방안>이란 문건을 발표하면서 '정부의 언론장악 음모' 논란을 불러일으켰고, 정언유착 구조화가 처음 드러났다.

3.7.2. 상업적 측면

이 시기 언론시장에서 눈여겨볼 만한 점은 신문의 독자 확보 경쟁이 치열했다는 점이다. 특히 신문사의 생명은 광고인데, 1950년대 구독수입이 76.1%, 광고수입이 21.5%였던 게 1970년대에는 55.1% / 44.8%로, 1980년대에는 34.2% / 60.2%로 각각 늘면서 광고수입이 구독수입을 앞섰다. 신문사들은 광고 확보에 혈안이 됐고, 이는 증면 및 부수 확대 경쟁으로 이어졌다. 더불어 경품 경쟁도 과열되기도 했다. 이러한 무한경쟁은 1996년 7월 조선일보사 남원당지국장 살해사건으로 이어져 사회적 물의를 일으켰다.

이처럼 신문사 간 무한경쟁이 벌어졌던 원인으로 '재벌의 언론참여'가 가장 컸는데, 기존에 삼성 외에 현대, 한화, 대우, 롯데, 갑을, 대농 등 대기업들이 줄줄이 언론사업에 뛰어들었고, 기존 거대언론들에 도전장을 던졌다. 이로써 문민정부 시기에 '언론재벌 vs 재벌언론' 구도가 더 가속화되었다. 이 치열한 무한경쟁은 신문사들이 점차 막대한 빚을 지게 만들었고, 1997년 외환위기 후 어떤 업종보다 먼저 구조조정 대상에 올랐다.

1990년대 초반 신문사들은 CTS 시스템 구축으로 납활자, 펜, 잉크 대신 PC와 노트북이 자리잡았고, 지방 분공장을 신설해 전국 동시 발매를 시도하며 지방신문 시장을 점차 공략했다. 심지어 1990년 민영방송 설립 허용을 전후해 방송사업 진출에도 의욕을 보였으나, 당시에도 여전히 정간법상 신방겸영이 금지되어 있기에 대신 인터넷, 전광판 등 유사방송매체(뉴미디어) 사업에 진출했다. 이 분야의 선구자는 조선일보와 중앙일보였다. 신문사들이 유사방송매체에 주력코자 한 건 미래 미디어사업에서 종이신문이 사양화될 거라는 예측에서 나왔다.

3.8. 드라마

경기 호황이 이어지면서 드라마 시장이 기하급수적으로 커진 시대. 최초의 해외 올 로케이션(여명의 눈동자), 최초의 트렌디 드라마(질투), 컴퓨터 그래픽을 사용한 최초의 호러 드라마(M), 역대 최고의 마스터피스 사극(용의 눈물) 등 기념비적인 작품들이 나왔고 중화권을 대상으로 드라마 수출이 시작되었다.

1990년대 초반에는 질투, 사랑을 그대 품안에 같은 트렌디 드라마가 인기를 끌었다. 일본에서 80년대 후반에 시작된 트렌디 드라마 장르가 한국에 이식된 것으로 비슷했던 한일 양국의 사회 분위기를 반영했다. 드라마의 소재도 스포츠(마지막 승부, 아이싱), 군대(파일럿, 창공, 신고합니다), 불륜(애인) 등 다양해졌다.

시대의 변화에 발맞춰 과거에 다루지 못했던 민감한 사회 문제를 재조명한 드라마도 많았다. 아들과 딸은 우리 사회에 뿌리 깊히 박혀 있던 성차별 문제를 다뤘고 모래시계는 국내 최초로 5.18 민주화운동을 소재로 삼았다.

1990년 피플미터의 도입으로 객관적인 시청률 집계가 가능해지면서 이 때부터의 시청률을 공식 기록으로 삼는다. 따라서 공식적인 역대 드라마 시청률 1위는 첫사랑(65.8%)이다. 그 외에도 사랑이 뭐길래(64.9%), 모래시계(64.5%), 젊은이의 양지(62.7%), 그대 그리고 나(62.4%), 아들과 딸(61.1%)이 60% 이상의 시청률을 기록했다. 즉 공식적으로 시청률 60% 이상을 기록한 드라마 8편 중 6편이 1990년대에 나왔다.[56]

당시 TV 탤런트계는 1980년대 중후반 점차 확대된 자유출연제 및 SBS 개국으로 출연량이 더 늘어날 거라 전망했으나, 주로 여성을 노린 드라마가 늘어나다 보니 방송사들은 이들의 인기에 영합하는 배우들을 써야 했으며 겹치기 출연도 전보다 더 빈번해졌다. 이런 추세 속에서 강민호와 태민영, 박건식, 임혁주, 강태기 등 일부 선 굵은 중견 배우들은 이런 추세를 이기지 못한 채 사극이나 단막극, 재연극 등으로 밀려나기도 했다.

3.9. 방송

1990년 3당 합당 후 노태우 정권은 이때를 기회삼아 방송민주화를 위해 진력하던 서영훈 KBS 사장을 사임시키도록 압박을 넣었고, 이에 따라 서영훈 사장이 물러나자 서기원 전 서울신문 사장을 KBS 사장에 꽂아넣어 관영방송화를 기도했다. 이에 양심적 방송인들은 방송민주화를 쟁취하기 위해 4월부터 총파업을 벌였지만, 공권력의 진압과 해직 등을 당해 탄압을 받았다. 이어 정부는 7월에 방송법을 날치기 통과시켜 민영방송을 허용하는 한편, 방송정책 의결권을 공보처가 맡고 방송위원회는 심의만 맡는 식으로 정부 주도의 방송장악 체계를 구축했다.

이러한 논란에도 불구하고 민영 종합방송이 다시 허가되었으며, 10월 새 민방 사업자로 태영이 선정되어 11월 14일 서울방송(SBS)이 출범했다. SBS는 1991년 3월 20일 AM 라디오, 12월 9일 TV 채널을 각각 개국했고 1996년 11월 14일에는 FM 방송을 시작했다. SBS는 수도권 지역 민방으로 개국했기 때문에 한동안 지방에서는 볼 수 없었다. 1995년 5월 14일 부산, 대구, 광주, 대전 지역민방이 개국하면서 전국 네트워크를 구축했고, 1997년 울산, 청주, 전주 지역민방의 개국으로 네트워크를 확대했다. 반면 인천방송은 비 SBS계 지역민방으로서 처음 개국했다.

KBS의 교육 채널[57]EBS로 독립한 것도 이 시기다. 1990년 12월 27일 KBS의 교육방송 편성권이 제작처인 한국교육개발원으로 이관되면서 독립된 교육방송이 출범했고, 기존 KEDI 교육방송본부는 '교육방송원'으로 승격했다가 1997년 '한국교육방송원법' 제정으로 한국교육방송원으로 독립했다. 단, 송신은 여전히 KBS가 맡는다.

1995년 3월 1일 케이블TV 방송 출범을 전후해 각 지역별로 점차 케이블SO들이 우후죽순 설립됐는데, 이들은 대기업이나 향토기업들이 출자한 것이다. 채널들 중 뉴스전문채널 YTN과 훗날 종합편성채널로 전환되는 경제채널 MBN, 음악 전문 채널 엠넷 등을 비롯한 20개 채널이 개국했다. 같은해 8월 1일에는 한국 최초의 홈쇼핑 채널인 삼구쇼핑이 개국했고 12월 1일 투니버스 등 5개 채널이 추가 개국했다. 다만 이 시기에는 아직 케이블 방송 보급률이 낮아 의미 있는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1996년 1월 14일 '무궁화 위성 2호' 발사에 성공하자 7월 1일 KBS가 디지털 위성 TV 시험방송을 개시했고 1997년 8월 27일에는 EBS가 위성 방송을 개시했다. 이런 와중에 기존 언론재벌과 재벌언론들이 전광판, 문자방송 등 유사방송매체(뉴미디어) 사업을 개시했으며, 삼성과 LG, 현대, 대우, 진로 등 유력 재벌들도 영상산업에 적극 진출하여 1990년 약 1조 2천억원에서 1995년 3조 1천억원으로 확대되어 2000년에 4조 9천억원대로 오를 지 모른다고 전망할 정도로 '블루오션 마켓'이 됐다. 이들의 영상산업 진출은 CATV는 물론 영화제작, 외국영화 수입, 멀티미디어 등지에 걸쳐 이뤄졌는데, 특히 CATV 시장에 진출하면 SO를 운영하지 않고도 프로그램 공급자로서의 역할을 충분히 할 수 있다는 걸 의미했다. 프로그램 공급자로 성장하면 위성방송 채널을 종전의 지상파 방송사로 감당할 수 없을 때 프로그램 공급능력을 지닌 영상업체들이 유리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1997년 외환위기로 대기업들이 점차 CATV에 손을 떼자 동양그룹과 제일제당그룹 등 신흥 미디어재벌들이 대두하기 시작했고, 1999년에는 여야 간 공방 속에서도 '통합방송법'이 통과되어 방송위원회가 방송정책 결정권을 되찾기에 이르렀다.

또 이 시기에 특기할 만한 건 TV 매체가 정치권에서도 위력을 보인 것이었다. 1987년 처음 시도된 TV정치는 1992년 14대 대선과 1997년 15대 대선 때도 본격화됐는데, 14대 대선 때 김영삼 후보 측의 소극적 태도 및 방송사의 무성의로 토론회를 못 열었으나 후보자 및 지지자의 TV유세와 공정선거를 위한 TV 토론회 등이 열려 본격적으로 'TV 정치시대' 개막을 알렸다. 1995년 선거법 개정으로 방송 연설, 경력 방송, 후보자 토론 무제한 허용 등 TV 정치방송 활성화가 이루어지면서 제1회 지방선거 때 첫 막을 올렸다. 이로써 후보들은 유세장보다 방송을 이용하는 데 총력을 기울였으며, 광역단체장 후보 55명 중 46명이 TV 연설 및 광고를 이용했고 광고는 총 105회, 연설은 60회나 방영됐다. 방송 3사 중 가장 많은 광고/연설을 유치한 MBC는 선거 특수로 15억여 원을 벌었다.

이들 중 관심을 끈 건 국내 최초로 개최된 후보자 토론회 생방송이었는데, 특히 서울시장 후보로 나선 조순-박찬종-정원식 3파전이 더 관심을 쓸었으나, 후보자의 실속보다 말빨 등 겉만 부각되는 '감각 의존 선거'가 될 여지도 있고, 군소 후보들에 대한 푸대접 문제까지도 거론됐다. 15대 대선 들어서는 'TV 정치'의 위력을 여지없이 보여줬는데, 김대중-이회창-이인제 3파전 토론은 국민들의 높은 관심 속에서 공정히 진행됐다. 비록 정책 토론보다 상대 약점 물고 늘어지기에 치중했다는 비판이 있지만, 중요 쟁점문제들이 대다수 거론되어 후보자에 대한 국민들의 이해를 높였다.

이러한 TV 정치시대 개막과 더불어 연예인들의 정치진출이 전보다 더 늘어났는데, 신영균, 최희준, 변웅전, 이주일, 정동영, 변웅전, 이윤성 등 대스타들이 여야를 막론하고 대다수 국회에 진출했다. 낙선자까지 포함한다면 정계진출을 시도한 연예인들은 수도 없이 많았다.

3.10. 예능

1990년 MBC 일요일일요일밤에가 정통 코미디에서 토크 버라이어티로 포맷을 변경하면서 기존의 가요쇼와 코미디와는 다른 버라이어티쇼라는 개념이 도입되었다. 특히 1991년에 시작된 몰래카메라는 폭발적인 인기와 더불어 오락 프로그램의 범위를 스튜디오 밖으로 확장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1990년대 예능은 스튜디오 녹화와 주로 야외에서 진행되는 코너들로 구성되었다. 메인 MC는 안정적인 진행 실력을 갖춘 非개그맨[58]이 주로 맡았고[59], 개그맨들은 주로 메인 MC 옆에서 코너와 웃음을 담당했다. 90년대 초반에는 몰래카메라, 인생극장(이상 일밤), 금촌댁네 사람들(슈퍼 선데이) 등 콩트 코미디적 요소가 강한 코너들이 편성되다가 90년대 후반 들어 영파워 가슴을 열어라(기쁜 우리 토요일), 고향에서 온 편지(좋은 세상 만들기), 캠퍼스 영상가요(슈퍼TV 일요일은 즐거워) 등 일반인 참여 코너들이 등장했다.

1989년 자니 윤 쇼에서 시작된 토크쇼 장르도 90년대 주류 예능 장르였다. 특히 SBS 이홍렬쇼는 '쿠킹토크 참참참', '칵테일 토크' 등 색다른 시도로 평일 심야 예능 사상 최초로 시청률 30%, 2시간 편성이라는 기록을 세웠다. 이 외에도 이승연이나 김혜수 등 여배우들이 자신의 이름을 내건 토크쇼도 인기를 끌었다.

1990년대는 시트콤 장르가 처음 등장한 시기다. 1993년 SBS <오박사네 사람들>을 필두로[60] LA 아리랑, 순풍 산부인과 등 가족 시트콤이 SBS를 통해 방송되었다. 또 1996년에는 MBC에서 한국 최초의 청춘 시트콤 남자셋 여자셋이 방영되었다.

방송 환경의 변화로 80년대까지 주류를 이뤘던 장르들은 변혁의 시기를 맞았다. 90년대 중반 토요일 토요일은 즐거워 같은 정통 가요쇼가 버라이어티로 포맷을 변경하면서 10대 위주의 순위제 가요 프로그램이 주도권을 가져왔고, 1998년에는 절대적인 권위를 자랑하던 가요톱10이 폐지되고 몇달 후 뮤직뱅크가 신설되었다. 순위제 프로그램의 인기는 1세대 아이돌의 전성기가 끝나는 2000년대 초반까지 이어진다. 다른 한편에서는 다양한 분야에서 음악성을 갖춘 뮤지션들이 출연하는 열린음악회심야 음악프로그램들이 첫선을 보였다.

코미디의 경우, 1991년 KBS, MBC의 중견 개그맨들이 SBS로 스카우트되면서 이듬해 청춘행진곡(MBC)과 유머 1번지(KBS)가 연이어 폐지되었다. MBC는 이후 오늘은 좋은 날, 웃으면 복이 와요로 코미디 패권을 되찾는데 성공했지만 KBS는 감자골 사태 등 세대교체에 어려움을 겪으며 침체기에 접어들었다. 개그맨들을 스카우트한 SBS도 90년대 중반들어 버라이어티와 시트콤에 집중하면서 코미디에 대한 관심이 떨어져 갔고 결국 1998년 IMF를 계기로 코미디를 폐지했다. 90년대 후반 KBS가 코미디 세상만사로 명맥을 잇다가 1999년 9월 개그콘서트를 런칭하면서 공개 코미디 시대에 돌입한다.

3.11. 만화, 애니메이션

한국 만화애니메이션은 양적 전성기를 맞은지 불과 몇년 만에 급격한 변화와 쇠퇴를 겪었다. 80년대 후반에 정립된 만화잡지와 TV 애니메이션이 90년대 초 황금기를 맞았고,[61] 잡지 플랫폼도 인기투표 순위나 신인작가 공모 등 일본 소년만화 잡지의 방식들을 받아들였다. 만화가 인맥구도도 종래의 문하생 출신 중심에서 동인 출신으로 점차 바뀌었고, 연령도 10대 후반 ~ 20대로 하향화되어 작품 성향도 동년배 독자들의 관심을 공유하는 쪽으로 전환되었다. 시사만화계에선 박재동 화백의 성공을 계기로 박시백, 박순찬, 김용민, 백무현, 장봉군, 김을호 등 젊은 진보 시사만화가들이 탄생했으며 중도/보수신문 쪽에선 김상택, 신경무, 양만금, 조대현, 김송번, 배계규, 조기영, 안중규 등이 나름 활약했고, 학습만화계에선 이원복 교수의 <먼나라 이웃나라>가 스테디셀러 지위에 올랐다.

1990년 국립공주대학교에 처음으로 만화학과가 생겨 만화가 학문으로 점차 인정받기 시작했다. 1995년 서울국제만화애니메이션페스티벌(SICAF)'을 시초로 한국에서도 제대로 된 만화행사를 치르기 시작했으며 1998년 경기도 부천시가 지자체로서 최초로 '부천만화정보센터'를 열어 만화/애니메이션 진흥사업도 꽃피기 시작했다.

위와 같이 양적으론 관심이 증폭했는데도 여전히 개선되지 않은 기성세대의 부정적 인식과 정부/기업 차원에서 지원한 소위 대작 애니메이션의 잇따른 실패, 일본 출판만화 무차별 정발, 그리고 IMF 사태로 인한 시장 규모 축소로 고난의 시기를 맞았다. 특히 1997년 청소년보호법 파동으로 성인만화 시장은 사실상 쑥대밭으로 전락했다.

일본 애니메이션은 80년대 말~90년대 초의 침체기를 거쳐 제3차 아니메 붐으로 기억되는 전성기를 맞았다. 1992년부터 세일러 문, 크레용 신짱, 슬램덩크, 포켓몬스터 같은 세계적인 인기작이 쏟아져 나왔지만 어떤 평론가는 작품 자체의 완성도가 높아서가 아니라, '캐릭터 붐'이었다는 평을 내리기도 했다. 2000년 이후에 몰아닥친 캐릭터 모에 붐에 빠진 아니메 오타쿠들이 자라나는 시기였다. 각 방송사들이 황금시간대(저녁 7시대)의 애니메이션 편성을 줄이는 대신 심야 애니메이션이 활성화되는 등 저출산의 영향이 본격적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분명 이 시기의 일본 애니메이션은 작품성에서 타 시대의 추종을 불허한다. 1995년 안노 히데아키 감독의 신세기 에반게리온과 1997년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모노노케 히메는 골수 팬들조차 이해하기 어려운 메시지로 오히려 센세이션을 일으켰고 공각기동대카우보이 비밥도 뛰어난 완성도로 찬사를 받았다. 반면 1991년 CATAS의 개발 중단으로 사실상 답보 상태였던 애니메이션 제작 디지털화는 1992년 <북두의 권> 게임 데이터 작성을 계기로 진전을 보았고, 마침내 1997년 토에이 동화가 업계 최초로 <게게게의 키타로> 64화를 '레타스프로' 소프트웨어로 제작해 디지털화를 완수해냈다. 이로써 셀과 물감, 필름이 주류이던 애니메이션 공정은 점차 컴퓨터가 대신하기 시작했다.

일본 만화에서도 다양한 인기작들이 나왔는데 위에서 언급된 세일러 문, 크레용 신짱, 슬램덩크 등은 원작이 만화인 작품이다. 일본의 대표적인 만화 잡지인 소년 점프는 90년대 초반 드래곤볼, 슬램덩크, 유유백서[62] 등으로 황금기를 누리다가 이 세 작품이 모두 연재를 종료한 1995~1997년 시점에는 암흑기를 겪게 되고, 경쟁지 <주간 소년 선데이>가 명탐정 코난소년탐정 김전일로 상승세를 거듭했다. 이후 1998년에 원피스와 1999년에 나루토가 흥행에 성공하며 다시 전성기를 맞이하는 큰 굴곡을 겪었다. 나카요시, 리본 등 소녀 만화 잡지들도 전성기를 맞았으며, 그 중 세일러문을 배출한 나카요시는 1993년 월 발행 200만부를 돌파하기도 했다. 같은 시기 게임제작사 에닉스가 <소년 간간>을, 미디어웍스가 <월간 코믹 전격대왕>을 각각 창간해 틈새시장을 형성했다.

미국 출판만화계는 침체기라고 할 수 있는데, 이미 DC 코믹스는 1989년 영화화 이후부터 시작된 배트맨 붐과 1991년 만화책 <슈퍼맨의 죽음> 700만부 달성 등으로 잠깐의 전성기를 구가했다. 반면 1980년대까지 수많은 영웅들을 배출하며 번성했던 마블 코믹스는 코믹북 시장 사양화와 사주 로버트 페렐만의 문어발식 M&A로 1996년에 파산 선고를 받아 문 닫을 위기에 처했다. 그러나 1997년 칼 아이칸을 거쳐 토이 비즈에 인수된 마블은 타개책으로 주력업종인 만화책 출판에서 영상 중심의 '종합 콘텐츠 플랫폼'으로 바꾸고자 했다.

영미권 극장 애니계는 단연 '디즈니 천하'라고 할 수 있는데, 1989년 <인어공주>로 침체기를 벗어난 월트 디즈니 엔터테인먼트가 1991년 <미녀와 야수>, 1992년 <알라딘>, 1994년 <라이온 킹>, 1995년 <포카혼타스>, 1996년 <노틀담의 꼽추>, 1997년 <헤라클레스>, 1998년 <뮬란> 등을 잇따라 발표해 극장 애니 시장을 사실상 압살했고, 특히 <미녀와 야수>는 종전 디즈니 프린세스들이 지녔던 고전적 여성상을 탈피했다. <알라딘>은 사상 최초로 유색인종 디즈니 프린세스를 배출했다.

3D 애니메이션 제작사 픽사도 디즈니와 함께 세계 최초로 풀3D 장편애니 <토이 스토리>를 제작해 대혁명을 이뤄냈다. 1998년에 신생 영화사 드림웍스도 최초로 장편애니 <개미>를 제작해 디즈니의 아성에 도전했다.

TV애니계에선 1991년 니켈로디언 측이 <더그의 일기>, <야! 러그래츠>, <렌과 스팀피> 3종을 처음으로 내놓아 사이코틱한 애니 '닉툰'을 확립시켰고, 이에 타임 워너가 니켈로디언과 디즈니 채널에 맞서기 위해 '카툰네트워크'를 개국해 1990년대 중후반에 <덱스터의 실험실>, <핑키와 브레인>, <파워퍼프걸> 등을 히트시켰다. FOX와 워너브라더스도 1990년과 1995년에 각각 'FOX Kids'와 'WB Kids'를 각각 개국하고 1990년대 중후반부터 일본 애니메이션 편성을 점차 확대했다. 성인취향 애니 쪽은 <심슨가족> 붐 속에서도 음악채널 MTV는 1993년 <비비스와 버트헤드>, 오락채널 코미디 센트럴은 1997년 <사우스파크>를 각각 방송해 나름 인기를 누리기도 했다.

3.12. 미술

민중미술은 1994년 들어 국립현대미술관이 '민중미술 15년전'을 열면서 예술로 인정을 받기 시작했는데, 이는 1994년 미술계를 통틀어 가장 큰 사건이었다. 다만 시대가 변했기 때문에 민중미술은 80년대와 같은 영향력을 지니지 못했다. 같은 해 동학농민운동 100주년을 기념해 '동학혁명 100주년 기념전(예술의전당)', '새야 새야 파랑새야(광주시립미술관)' 등의 대형 기획전도 열려 역사의 해석과 역사의 조형적 해석을 다시 점검하는 계기가 됐다.

1995년 9월에는 '미술의 해'에 걸맞게 제1회 광주비엔날레를 성대히 치렀다. 이 축제는 일부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두달 동안 관람인원 163만명이란 경이로운 성과를 기록했으며, 이로써 미술 올림픽 성격을 확립하여 180여억원을 투자한 대가도 충분히 찾았다.

3.13. 연극/춤

춤 분야에선 1994년 10월 발레리나 강수진이 존 크랭코 안무작 <지젤>을 갖고 내한공연을 해 각광받았다. 특히 강수진이 독일 슈투트가르트 발레단의 주역 무용수였기에 당대 얼마 안되는 해외파로서 큰 화제를 모았다. 연극에선 뮤지컬 <아가씨와 건달들>이 히트를 쳤고, 훗날 불후의 명작 뮤지컬이 될 <지하철 1호선>도 탄생했다. 반면 1993년에 여배우의 전라 출연으로 파문을 일으킨 연극 <마지막 시도>가 상연됐고, <미란다>는 1994년에 외설시비로 검찰에 고발돼 법적 공방까지 벌어졌다.

1996년 연극계의 가장 큰 수확은 뮤지컬 <명성황후(이문열 원작, 윤호진 연출)>였다. 1995년 말부터 1996년 초까지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에서 상연한 이 뮤지컬은 박동우의 뛰어난 무대미술, 김현숙이 공들인 의상, 김희갑의 음악실력 등이 시너지를 크게 일으켜 창작 뮤지컬 사상 초유의 전회 매진 기록을 달성했다. 이 작품은 1997년 미국 상륙에도 성공했다.

3.14. 스포츠

이 시대 한국에서 가장 성과가 있는 건 뭐니뭐니해도 '스포츠'다. 한국은 1980년대부터 이미 스포츠 강국이었고, 1990년대에도 그 지위를 유지하여 마라톤과 프로야구, 월드컵에서 각각 두드러진 활약을 보여줬다.

당대 마라톤에선 단연 돋보이는 아이콘이 '황영조'와 '이봉주'인데, 그 둘은 동갑내기에 명성 있는 '코오롱 사단'의 일원이었다. 황영조는 1992 바르셀로나 올림픽에서 우리 마라톤 역사상 최초로 태극기를 달고 금메달을 따 손기정 때 '일장기의 한'을 풂과 동시에 '몬주익의 영웅'으로 등극했다. 이후 부상에 시달리다가 1994 보스턴 마라톤에서 2시간 8분 9초로 한국 최고기록을 달성해 재기했고, 1994 히로시마 아시안 게임 마라톤 남자부에서도 일본의 하야타 토시유키를 제쳐 2시간 11분 13초로 4년 전 베이징 아시안게임 때 김원탁에 이어 2연패를 달성했다. 그러나 1996 애틀랜타 올림픽 국내 선발전에서 부진하여 예비선수로 선출됐고, 결국 은퇴를 선언했다.

그의 뒤를 이은 이봉주는 1996 애틀랜타 올림픽에서 스페인 선수 마르틴 피스에게 2위로 은메달을 땄음에도 '포스트 황영조'로 등극했으며, 12월 1일 일본 후쿠오카 국제 마라톤 대회에서 불굴의 투지로 스페인의 알베르토 후스타도를 4초 차로 제쳐 처음으로 금메달을 따서 스타가 됐다. 1998년 4월 19일 네덜란드 로테르담 마라톤 대회에서 2시간 7분 44초로 8분대를 깨서 황영조의 기록까지 뛰어넘었지만, 성적은 스페인의 론세로에 이은 2위였다. 그가 이렇게 한국 최고의 마라토너로 등극한 건 가난한 생활환경과 짝발이란 핸디캡, 정봉수 감독의 독사같은 지옥훈련을 견뎌내는 성실함이 한몫을 했다.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은 1986 멕시코 월드컵에 이어 1990 이탈리아, 1994 미국, 1998 프랑스까지 아시아 최초로 월드컵 4회 연속 진출이란 경이로운 기록을 보여줬는데, 특히 1993년에 열린 미국 월드컵 예선에선 일본에게 밀리다가 이라크의 도움으로 기적적으로 월드컵 티켓을 따내기도 했고,(도하의 기적) 본선에선 모두의 예상과는 달리 스페인과 볼리비아를 상대로 끈질기게 버텨 2무를 기록했고, 댈러스에서 열린 독일전에선 무더위 속에서도 상대 독일을 궁지에 몰아넣는 듯했으나 아쉽게 2-3으로 져서 16강을 못 갔다.

1997년 IMF 한파 속에 열린 프랑스 월드컵 아시아지역 예선전에서도 아시아 국가들 중 1등으로 또 월드컵 티켓을 따서 국민들에게 희망을 줬고, 당시 팀을 지휘한 차범근 감독은 전 국민의 영웅이 되어 방송과 광고 섭외가 늘었고, 국대 선수들과 응원단 '붉은악마' 멤버들이 입은 유니폼도 많이 팔렸다. 그러나 본선에선 멕시코전 때 하석주의 백태클로 1-3으로 졌고, 네덜란드에도 0-5로 지는 부진한 모습을 보여 국민의 분노를 사 차범근 감독이 쫓겨났고, 마지막 벨기에전에서 이임생의 부상투혼으로 최선을 다했으나 1-1로 패해 16강을 또 못 갔다.

그 외에 국민적 관심을 모은 건 박찬호와 선동열, 이종범 등 프로야구 선수들의 해외진출이었다. 이중 '무등산 폭격기' 선동열은 1996 시즌 때 주니치 드래곤즈에 이적료 3억엔 및 연봉 1억 5천만엔으로 이적해 순수 한국인으로서 최초로 일본프로야구에 진출했다. 초반에 고전하다 1997년 시즌 때 1승 38세이브로 포텐이 터져 '나고야의 태양'으로 등극했다. 이적 당시 엄청난 연봉과 이적료 외에도 시즌당 25세이브포인트에 2천만엔, 40세이브포인트에 5천만엔 등 별도 상여금을 지불하는 조건도 있어 눈길을 끌었다.

1997년 당시 전 야구팬들의 관심은 한국프로야구보다 박찬호의 메이저리그 활약에 더 쏠렸다. 1994년 로스앤젤레스 다저스에 입단한 박찬호는 초기에 마이너리그를 전전하는 등 무명시절을 보내다 1996 시즌엔 다저스 주전 자리에 처음으로 올랐고, 1997 시즌에 선발투수로서 14승을 달성해 '코리안 특급'이란 별칭이 붙어 수많은 방송과 광고에 출연하는 등 '국민의 우상'으로 등극했다. 해태 선수 이종범도 1998년에 선배 선동열을 따라 주니치로 갔다. 농구에선 NBA 열풍, MBC 드라마 <마지막 승부>의 인기폭증 등으로 인해 저변이 더욱 높아졌으며, 이것은 1997년 프로농구 출범에 자양분이 됐다.

실업에선 '허동택 트리오'를 앞세운 기아 농구단이 현대-삼성 양강 틀을 깨며 1988/89 시즌 첫 우승 이래 1992/93 시즌까지 5연속 농구대잔치 우승을 이뤘고, 1994/95 및 1995/96 시즌 두 차례 연속 우승을 이루며 농구대잔치 최다 우승 기록을 달성했다. 뒤이어 프로농구 출범 후 1997 시즌 및 1997/98 시즌 두 차례 우승을 이뤄 90년대 농구판을 장식했다.

대학농구 역시 형님뻘인 실업농구에 도전하는 모습을 보였는데, 80년대 후반부터 날을 매섭게 세운 연세대 농구부가 문경은-우지원-김훈-석주일-이상민-서장훈 라인업으로 1993/94 농구대잔치에서 상무를 꺾어 대학팀으로서 최초로 우승을 달성했고, 라이벌 고려대도 전희철-김병철-신기성-양희승-현주엽 라인업으로 1994/95 시즌 대학농구판에서 연세대를 앞지르고 1995/96 시즌에는 제1~2차 대학농구연맹전, MBC배, SBS배 고교대학농구최강전까지 석권해 대학농구판 그랜드슬램을 따냈다. 이들의 인기 덕에 여학생들은 콘서트장 외에도 연세대와 고려대 농구선수들을 보려고 농구장으로 찾아갔다.

남자배구에선 1991년 한양대, 1992년 상무의 대통령배 우승을 빼곤 1995/96 시즌까지 고려증권-현대자동차써비스 일색이었는데, 현대차는 마낙길, 하종화, 강성형, 박종찬, 임도헌 등 스타들이 포진한 반면, 고려증권은 상대적으로 빈약한 지원 속에서도 이성희, 박삼용, 이수동 등을 중심으로 조직력 배구를 구사했다.

그러다가 1996/97 시즌부터 김세진과 신진식이 이끄는 신생팀 삼성화재가 슈퍼리그를 우승하며 양강체제를 뚫어 왕조의 시작을 알렸다. 여자부에선 이도희, 장윤희, 정선희, 홍지연, 박수정 등이 이끄는 호남정유 여자배구단이 1991~1999년까지 9연속 대통령배-슈퍼리그 우승을 이뤄 현대와 미도파 양강체제를 종식시켰으며, 스쿼드 중 대다수가 국대에 차출돼 1994 히로시마 아시안게임 결승에서 일본을 꺾어 금메달을 차지하기도 했다.

그 외 종목에서도 대한 건아들의 활약은 더 두드러졌다. 탁구선수 현정화가 1993년 5월 스웨덴 예테보리에서 열린 제42회 세계탁구선수권대회에서 한국 탁구사상 최초로 여자개인 단식 금메달을 땄고, 1994 히로시마 아시안게임에선 금63, 은53, 동63개로 2위를, 1996 애틀랜타 올림픽에선 금7, 은15, 동 5개로 10위를 각각 기록했다.

또 특기할 만한 점은 남북한 체육교류가 전보다 더욱 활성화됐다는 점인데, 1990년엔 서울과 평양에서 남북통일축구대회가 열리고 1991년 4월 일본 지바 세계탁구선수권대회에서 분단 이래 처음으로 남북 양측이 단일 선수단을 꾸려 출전했으며 6월 포르투갈 세계청소년축구대회에서도 단일팀으로 출전했다. 김대중 정부 때인 1999년에 제1차 연평해전 등 어수선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8월에는 남북노동자 통일축구대회, 9월과 12월엔 서울과 평양에서 각각 통일농구대회가 열렸다.

정책적 측면에선 '탈 엘리트 체육'의 모습이 보인 때이기도 했다. 노태우 때까지만 해도 엘리트 중심이었다가 1993년 문민정부 출범 후 엘리트 체육 일색에 대해 반성하자는 움직임이 보여 생활체육의 필요성이 증대됐고, 김영삼 대통령은 문화부와 체육청소년부를 합쳐 '문화체육부'로 출범시키고 '국민체육진흥 5개년 계획'을 발표하여 생활체육 육성에 힘썼고, 1994 히로시마 아시안게임 전 방문을 빼곤 태릉선수촌 방문을 한 번도 하지 않았다. 다른 한편 스포츠 외교에도 힘을 기울여 1996년에는 2002 월드컵의 한국-일본 공동유치를 성사시켰다.

1998년 김대중 대통령의 '국민의 정부' 출범 후 문화체육부가 '문화관광부'로 바뀌면서 '체육'이 빠졌고, 체육 관련 부서도 2개에서 1개로 축소됐다. 거기에 전년도부터 제7차 교육과정이 시행된 뒤 체육수업 시수도 줄어 청소년의 체력에도 안 좋은 영향을 끼쳤다. 김대중 정부 정책자문위원을 했던 박세호 전 대한배구연맹 사무총장의 증언에 따르면 박찬호나 박세리가 성과를 거둬도 김대중 대통령은 축전을 안 보냈고, 오히려 뒤늦게 훈장을 주거나 국무총리를 시켜 포상을 하는 게 고작이었을 정도로 체육에 무관심했다고 한다.

3.15. 두뇌스포츠

1990년대 두뇌스포츠 중 단연 돋보이는 건 '바둑'이다. 이 시기 동안 한국은 동양증권배와 응씨배, 진로배, 후지쯔배, 삼성화재배 등지의 국제기전에서 중국, 일본을 제치고 '바둑 최강국'의 실력을 과시했다. 물론 중국도 만만치 않았지만 여전히 세계 최강 자리를 놓치지 않았다. 국내 무대에선 이창호 9단이 1인자 자리를 굳힌 가운데 조훈현 9단, 유창혁 9단, 서봉수 9단 등이 그 뒤를 좇았다.

1993년 한 해 동안 한국은 잉씨배 등 4대 기전을 모두 석권해 '그랜드 슬램'을 달성했는데, 국내 무대에선 이창호 당시 6단이 12개 타이틀을 석권한 반면에 조훈현 9단, 서봉수 9단, 유창혁 6단이 더 부진했다. 1994년에도 이창호 7단은 13개 타이틀을 차지해 1인 독주를 또 이어간 반면, 조훈현 9단이 5관왕, 유창혁 6단이 2관왕에 올랐으며 서봉수 9단도 대망의 1,000승을 달성했지만 무관에 그쳤다. 같은 해엔 진로배(2월 23일)와 동양증권배(7월 22일, 조훈현 9단), 후지쯔배(8월 6일, 조훈현 9단)를 각각 석권해 여전히 강세를 보였다.

1995년에도 이창호의 독주는 지속되어 타이틀전에선 16연속 우승했고, TV바둑 아시아선수권대회에서도 우승했다. 한국은 진로배에서 3연패를 달성하여 세계대회 8연속 우승 신기록을 세웠으며 서봉수 9단도 신사배 국제바둑대회에서 우승해 2년만에 슬럼프에서 벗어났다. 그러나 국제대회에선 중국에게 연패했으며, 이는 오히려 마샤오춘 9단이 아시아의 스타가 되는 계기를 제공케 했다.

1996년에는 중국에게만 밀리던 한국 바둑이 다시 국제대회 7개 중 6개를 우승하여 '준 그랜드 슬램'을 달성하는 등 바둑 최강국으로서의 모습은 건재하다고 과시했다. 특히 제4회 진로배에선 4연패를 기록하고 이창호 9단이 제7회 동양증권배까지 차지하며 국제기전 5관왕을 차지했다. 유창혁 9단도 응씨배에서 우승하며 제1회 삼성화재배에서 준우승했다. 같은 시기 교육부가 새 대학입학전형제를 발표하며 바둑대학 설립 붐이 일어 경기대학교와 경희대학교가 1997학년도부터 바둑 특기생을 받아들이기로 했고, 명지대학교 역시 바둑대학 설립에 앞서 체육학과에 바둑지도학 전공을 열었다.

1997년에도 한국 바둑은 여전히 강세였으며, 이창호 9단의 1인 독주는 여전했다. 이와 함께 신예 기사들과 맹활약을 펼친 가운데 조훈현과 서봉수 9단이 나름 선전했다. 특히 이창호에 대한 도전은 조훈현 9단을 필두로 서봉수 9단, 최명훈 6단, 이성재 4단 등 신-구 세력이 타이틀을 향해 돌진했다. 같은 해 이창호는 국내에서 타이틀 3~4개를 잃었지만 국제대회에선 제1회 LG배와 제2회 삼성화재배를 각각 차지했다. 서봉수도 제5회 진로배에서 필마 단기로 일본과 중국 선수들을 무찌르며 국제대회 사상 전무후무한 9연승 신화를 기록했다.

조훈현 9단도 제15기 KBS 바둑왕전에서 이창호로부터 타이틀을 뺏었고, 패왕전과 배달왕전까지 석권하며 동양증권배까지 우승해 6관왕에 올랐다. 또 정수현 9단도 명지대에 개설된 바둑학과 교수로 임용돼 세계 최초의 바둑교수가 나왔다. 반면 재일교포로서 일본 무대에서 활동하는 조치훈 9단의 활약도 주목받았는데, 그는 1996년 기성, 명인, 본인방 등 상위 3개전을 차지하여 대삼관을 달성했고, 1997년에도 이를 차례로 방어하여 대삼관 2연패를 달성했다.

1998년에는 IMF 여파로 진로배와 동양증권배가 사라지는 등 일부 악재가 있었지만, 이창호 9단은 마지막 동양증권배와 후지쯔 등 세계대회 2관왕, 국내대회 7관왕으로 여전히 독주했다. 이에 조훈현 9단은 국수전 및 패왕전을, 유창혁 9단도 배달왕을 각각 차지해 체면치레를 했으나 최명훈 6단은 테크론배 및 박카스배 결승에서 이창호에게 막혔고, 이성재 5단도 세계대회 8강 진출과 신인왕전 우승을 일궜으나 조훈현 9단에겐 패왕전 도진기에서 2승 3패로 졌다. 그 외에 안영길 2단이 최다 기록인 19연승을, 목진석 4단이 54승으로 최다승을 각각 기록해 나름 선전했다. 여류 프로기사 중 중국계 한국인 주부기사 황염 2단이 여류 세계대회와 여류국수전을 석권해 주목을 받았고, 대만인 기사 장정핑이 외국인으로서 최초로 입단대회를 거쳐 단증을 땄다. 같은 시기 조치훈 9단도 일본 무대에서 대삼관 3연패를 달성한 데 이어 생애 1천승에 본인방 10연패까지 달성해 '제2의 전성기'를 열었다.

1999년에도 이창호 9단의 독주는 여전하여 국내대회 6개를 차지하며 세계무대에선 삼성화재배와 LG배를 석권했고, 한국기원으로부터 바둑문화상 최우수기사상을 통산 5년 연속으로 받아 화제를 모았다. 유창혁 9단은 국내무대에서 배달왕 2연패와 왕위전을 각각 차지하며 후지쯔배도 우승했고, 조훈현 9단도 제18기 KBS 바둑왕전 및 제1회 춘란배를 우승해 건재를 과시했다.

3.16. 20세기 말까지 대한민국에 존재했던 생활 모습들

소위 인터넷에서 '90년대 생활상' 이라고 떠도는 내용들을 모아놓은 문단이다. 이러한 문화의 상당수는 2000년대까지도 어느정도 이어지는 경향이 있다. 거의 30년의 세월이 흘렀기에 1990년대에 연세가 지긋하셨던 어른들은 2023년 현재 대부분 이미 고인이 되셨다.

이촌향도 현상이 끝나가는 시점으로 도시 사람들 중에서도 많은 수가, 심지어 20~30대 청년만 가도 시골 출신이 많아 시골 문화가 많이 있으며, 이 목록에 등장한 사례들 중에서는 시골문화 특유의 인정이 남아있는 것들도 있지만 폐쇄적인 사회 속에서 생겨난 악습들도 많으므로, 이 시절로 돌아가야 된다는 생각보다는, 이 시절에는 이랬다 정도로 받아들이는 것이 좋다.
  • 어린 아이들 사이에서 다소 능력이 부족한 아이가 있으면 더 유리한 조건을 주고 놀이에 끼워주는 깍두기 문화가 존재했다. 물론 90년대 초중반에 도시 지역을 중심으로 사라지기 시작.
  • 오래된 작은 주택가들이 많았고 아파트 단지에도 노는 아이들이 어디든 바글바글 했었다. 전자게임과 컴퓨터가 지금처럼 발전되지 못했고 스마트폰도 없었기에 밖에서 놀이를 하고 노는 아이들이 많았다. 물론 그 이후로도 많긴 했지만 90년대 후반부터 컴퓨터가 더욱 발전하며 게임의 기술 수준이 많이 상승.
  • 아는 동네 어른이나 학교 선생님, 선배를 볼때 인사를 고개숙여 제대로 드리지 않으면 혼이났다. 지금보다 상하관계에 더욱 엄격했던 시절이었다.
  • 90년대만 해도 가정은 물론이고 학교, 학원에서도 얼차려와 체벌이 아무렇지 않게 자주 일어났다. 단체기합이 섞인 체벌도 많았다. 사실 특히나 남자애들은 대부분 어느정도는 맞고 살았다. 군대에서 역시나 지금은 상상도 못하는 병영 부조리, 선임들에 의한 가혹행위가 일어났다. 2023년 지금 같으면 학대로 이미 고발당할 일도 당시에는 "남자는 강하게 커야 대장부가 될 수 있다", "어리거나 젊은시절의 고생은 돈주고 사서도 한다"는 관념에 대부분의 어른들이 그냥 웃으면서 넘어갔다. 90년대에는 남자 애들끼리의 패싸움도 서로 주먹 몇번씩 주고받은 정도고 다치지만 않았다면 어른들이 그냥 넘어가는 수준이었다.
  • 친척들끼리 왕래가 지금보다 더욱 많았고 할머니, 할아버지 댁도 자주 방문했다. 명절에는 실향민이 아닌 이상 차가 막히는 민족대이동 도로를 10시간을 넘게 운전해서 고향에 갔으며 특히 1990년대 초반까진 명절에 해외여행을 가는건 상상하기 어려웠다.[63]
  • 오늘날처럼 음식점에서 파티가 아니라, 친구들끼리 돌아가면서 집에 초대해 모임을 가졌다. 음식도 모두 어머님이 손수 장만해서 상을 차렸다. 손님도 보통 가정집으로 많이 초대했다.[64]
  • 신문이 정보전달매체로서 전성기를 누리던 시절이었다. 이 당시에는 지하철에서도 신문을 읽는 승객들이 대다수였고, 지하철역 안에 있는 가게에서 신문을 팔았다.[65]
  • 199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화상통화가 어려웠고 그냥 멀리있는 사람과는 전화통화로 목소리만 듣고 대화를 나눴다.[66]
  • 휴대전화는 거의 대중화되지 않았고, 대부분 공중전화를 사용했으며[67] 삐삐로 서로에게 연락했다. 그나마 있는 아날로그 핸드폰(1G)는 큰 사이즈와 무게 때문에 벽돌폰이라고 불렸다.
  • TV는 LG(구 금성), 삼성 외에 대우, 아남에서 제조 및 판매했다. 이 당시에는 무거운 브라운관 TV가 대다수였고 평면보다 볼록이 더 많았으며, 화질도 지금보다 떨어졌다.[68] TV 채널은 지상파 방송채널 몇개밖에 없었고 정해진 시간에만 나왔다.[69] 따라서 연속극이나 뉴스, 영화, 만화를 볼때 모두가 TV앞에 모여 앉았다. 다른 시간에 TV를 보려면 비디오방에서 비디오를 빌려서 봐야했으며, TV와 VCR이 하나로 합쳐진 비디오비전도 있었다. 라디오, 음반을 구매해서 듣는 것도 큰 낙이었다.
  • 멀리서 만나는 약속 시간은 널럴하게 잡고, 만남 장소는 눈에띄는 유명한 장소로 잡아놓고 정시에 못와도 한시간 정도는 기본으로 기다렸다.
  • 가정에 전화번호부가 비치되어 있으며, 가족, 친척, 친구 전화번호를 20개 정도는 그냥 외우고 있었다.
  • 전화예절이 필수였다. 보통 집으로 전화를 해서 어른이 전화를 받으시면 정중하게 친구를 바꿔달라고 했었다.민수: "여보세요.", 석훈이 엄마: "누구세요?", 민수: "저 석훈이 친구 민수인데요.", "어어.", "혹시 석훈이 집에 있나요?", "응, 그래.", "혹시 석훈이 좀 바꿔 주실 수 있나요?"[71]
  • 지금처럼 물품이 많이 수입되지 못했기 때문에 수입산 식품부터 시작해서 의류, 공산품, 장식물은 서울 부촌이나 가야 구할 수 있었고 가격도 당시치고는 높았다. 그나마 1990년대 중반경이 되어서야 지방 광역시에도 백화점에 수입상품 코너가 생겼다. 당시는 국산과 미국, 독일, 프랑스, 영국, 일본에서 수입한 상품의 품질 차이가 많이나서 외제라면 다들 좋아했다. 아버지가 해외 선진국으로 출장이라도 다녀오시는 날에는 현지에서 구매해오신 물건들을 보면서 눈이 즐거워졌다. 수입 열대과일 역시 그렇게 흔하게 맛보기는 어려운 별미였다.
  • 1990년대 까지만 해도 당시 예쁘고 좋은 학용품은 대부분 일본산이었고 일본산 학용품의 인기가 아이들 사이에서 엄청났다. 당시만 해도 한국은 학용품을 예쁘게 잘 만들어야한다는 인식 자체가 별로 없었던 시대였다. 2000년대에 들어서야 한국도 학용품을 아기자기하고 예쁘게 디자인, 제조하기 시작했고 이로인해 현재는 더 이상 일본제 학용품은 한국에서는 큰 인기를 얻지 못하고있다.
  • 남자, 여자 할거없이 자발적으로 아니면 주변의 강요에 의해 나이 30세 이하에 95프로 이상이 다 결혼을 했었고 결혼 후 자연스럽게 애엄마, 애아빠가 되었다. 오늘날에는 혼인율, 출산율이 모두 많이 낮아졌지만, 당시 90년대 까지만 해도 한집당 자식을 두명은 가졌고 대부분이 결혼을 했기에 인구는 제법 늘었다.
  • 1980년대 말에 유학과 해외여행이 자유화 되었지만, 해외유학은 거의 선택받은 집안의 자제들만 가능했다. 그리고 소수의 선택받은 국비 유학생이 있었다. 해외여행 역시 집안사정이 좋은 사람들만 보통 갔었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신혼여행마저도 국내 여행이 많았다. 서울올림픽 전 까지만 해도 비행기를 타고 해외에 나갔다 들어왔다 할 수 있는 사람들은 선택받은 극히 일부의 특권층들이 전부였다. 그리고 서울올림픽 이후에도 해외여행이 자유화 됐을뿐 그리고 좀 더 그 대상 이 중상층으로 확대되었을뿐 그점은 여전했다. 또한 한국의 위상이 지금 같지는 않았기에 대한민국의 김포공항에서 비행기를 타고 해외로 나가면 한국어로 말을 해주는 사람이나, 한국어 표지판이 있는 공항이 없었다.
  • 지금보다 가부장적인 문화가 심했고 집안에서 아버지의 권위도 막강했다. 선생님의 권위도 강했고, 회사에서도 상명하복 문화가 더 강했었다. 대학교에서의 선후배 문화도 마찬가지. 현재 할아버지가 된 1950년대 출생자까지가 젊었던 시절, 그들의 권위는 매우 강했기 때문에 1990년대 당시 면접에서는 아버지가 엄격하고 무섭다는 얘기가 많았다.
  • 간통죄가 있던 시절이라 부부가 바람을 피우면 형사처벌을 받았다. 이 때문에 당시에는 불륜 현장을 상대방과 경찰이 덮치는 일들이 흔하게 일어났다.[72]
  • 토요일에도 출근을 하고 학교에 갔었다. 대신 일찍 끝났다.[73]
  • 아이들은 만화를 보기 위해 만화방에 갔고, 게임은 오락실에 가서 했다.
  • 금융실명제 이후 부정부패가 줄긴 했지만 80년대 까진 아니더라도 90년대도 부정부패가 굉장히 심했다. 한 예로로 교통경찰만 해도 운전단속자들이 법규를 위반했을시 2만원씩 찔러줬는데[74] 거의 무조건 현금을 들고 다녔고 폰카메라도 없고 차량블랙박스도 거의 없던 시절이라 돈 받는걸 찍힐일도 없어 교통경찰하면 돈 많이 벌수 있었다.
  • 또한 90년대까지만 해도 영상보안장치(CCTV)는 유지비 감당 가능한 대형 건물에나 있는 데다 차량 블랙박스가 거의 없던 시절이라 치안은 불안전했다. 특히 경제활동을 할 수 없어[75] 돈을 벌수 없는 10대들의 길거리 갈취가 매우 심했는데 당시만 해도 카드를 들고 다니는 경우가 거의 없고 대부분의 국민이 현금을 들고 다녔기 때문.
    어느 정도냐면 초등학생은 돈 갖고 오락실에 가면 십중팔구 중고등학생 형들에게 갈취를 당하기 때문에 돈을 소유한 채 오락실에 가기 힘들었으며 롯데월드에 가서 갈취를 하면 롯데월드 입장권의 몇배의 돈을 벌수 있다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
    경찰 입장에선 당시 정책상 민생치안보다 시국치안을 중시하는 경우도 있어 누가 신고한다 해도 길거리 갈취 잡범들을 수사할 의지도 없어 신고해봐야 그냥 피해자를 돌려 보냈다. 사실 의외로 옛날이 지금보다 10대들의 범죄 횟수는 훨씬 많았다.
    다만 거의 잡히지 않았을 뿐이다. 이런 모습은 CCTV, 차 블랙박스가 전국적으로 보급되고 휴대폰을 들고 다니고 결정적으로 현금 대신 체크카드,신용카드를 가지고 다니면서 거의 사라졌다.

  • 200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서울 강남 3구, 경기도 신도시를 제외한 구도심에는 아파트가 별로 없었기 때문에 아파트에 거주하는 가정이 많지 않았다. 구도심은 중산층도 평범한 빌라에 거주하는 경우도 종종 있었으며 학생이 주상복합 아파트에 거주 하기만 해도 좀 산다고 반에서 이야기 나올 정도였다.
  • 2000년대 중후반에는 교사가 두들겨 패는 체벌은 많이 줄었으나(두발 규정이라든가 학생이 교무실 대신 청소, 중앙계단 금지 같은 교칙이나 부조리는 아직도 심했으나 교사의 폭력은 70년대~90년대보다 크게 줄었다.) 학교 폭력은 여전히 심했으며 특히 구도심은 더 심했다. 중학교에선 서열이 낮은 학생에게 각종 힘든일 강제로 시키는 빵셔틀이라거나 물리적인 폭력,금품 갈취 또한 자주 일어났으며 진지하게 신고해야할 학교폭력으로 인식하기보다는 학폭 피해자를 조롱 하는것이 인터넷 유머로 소비되었다.
    1995년 김대현 자살 사건 후 학교폭력 문제가 점차 사회 문제화되어 1997년 '청소년보호법', 2004년 '학교폭력 예방 및 대책에 관한 법률' 제정/시행으로 점차 개선의 조짐이 보여 2011년 대구 중학생 자살 사건 이후 보편적으로 인식이 바뀐다. 사실 2000년대 중후반 중고딩이었던 90년대 초중반생의 부모 세대 까지만 해도 아무나, 심지어 알코올 중독자도 자녀 2명은 대부분 갖던 시절이라 자녀를 방치하거나 신경을 쓰지 않는 부모가 구도심에는 상당히 많았으며 학생이 학폭을 당해도 신경을 거의 안쓰니 학폭이 자주 일어날 수밖에 없는 환경이었다.
    지금과 같이 학생이 아파트 거주 + 부모가 자녀 세심하게 신경씀 + 학폭 거의 당할일 없음 등이 디폴트가 된거는 2010년대 초반부터다.
    학교 문화뿐만 아니라 2000년대는 인권이나 자유도가 20세기 보다는 크게 향상되었으나 지금이랑 비교하면 여전히 야생의 분위기가 잔재했었다. 2010년대 한국은 되야 2024년 한국과 거의 차이가 없는 모습으로 바뀐다.
  • 세계 온라인 마켓을 동원해 무엇이든 쉽게 구매할 수 있는 지금과는 다르게 구할 수 없는 물건들이 많았고, 특히나 인기상품이 아니라면 뭐 하나를 구하려고 해도 부지런히 인맥을 동원해 곳곳의 가게를 찾아다녀야 했다. 물론 아무리 찾아도 결국 실패하는 경우가 많았다. 소소한 물건인데 친구가 그걸 가지고 있을 경우 본인이 가진 물건 중 그 친구가 원하는 물건이 뭔지 보고 사이좋게 물물교환을 하기도 했었다.
  • 시골이든 도시든 개발이 안된 지역들이 곳곳에 있어서 곤충과 개구리처럼 작은 동물들이 적어도 지금보다는 아주 많았고 동물을 잡으면서 재미있게 놀기도 했었다.
  • 모닝글로리같은 문구체인점이 있긴 하나 큰 도시 번화가에 가야 있었고, 동네마다 작은 문방구가 있었다. 학교 준비물, 학용품 뿐만 아니라 아이들이 가지고 노는 대부분의 장난감은 동네 문방구에서 구매했고, 생일, 크리스마스를 비롯한 특별한 날에는 백화점에 데리고 가서 부모님이 비싼 장난감을 사주셨다. 일본제 가정용 전자오락기도 이때 주로 전자상가에서 구매했다.
  • 24시 편의점은 대도시 번화가에나 있었고, 대신 동네마다 소소한 먹을 것과 생필품을 구매할 수 있는 허름한 구멍가게가 있었다. 물론 2000년대~2010년대 초까지는 다소 남아있긴 했다. 2020년대 기준으로는 적어도 대도시나, 지방 번화가의 구멍가게들은 거의 없어지고 대부분이 24시 편의점으로 바뀌었다. 옛날식 구멍가게는 이제는 "ㅇㅇ리" 단위로 나가는 시골이나 가야 볼수있게 되었다.
  • 놀이터는 모래로 덮여있어 아이들이 흙장난도 많이 했었고, 놀이기구가 위험해 부상도 많았다. 현재는 고무바닥이 많이 있었으나 그 당시에는 거의 모래였다.
  • 군대에서의 아침점호 비슷하게 학교에서는 매주 월요일 아침마다 차려 자세 대열로 줄을 서 애국조회를 섰다. 특히 겨울아침 애국조회는 정말로 고역이었다.
  • 대한민국 사람들의 평균 수명이 선진국 중에서도 준수한 수준으로 올라간 지금과는 다르게 90년대 까지만 해도 평균 수명이 선진국들에는 못미쳤다. 따라서 어르신들 대부분이 회갑(60세)[76] 또는 칠순(70세) 잔치를 많이 했었다.[77] 요즘은 팔순(80세) 잔치가 더 많지만. 당시 부모 세대인 베이비붐 세대들이 1970~80년대 경제성장기 시절 생계를 위해 야근도 마다치 않고 몸바쳐 일하다 보니 음주/흡연이 잦아 40대 남성의 사망률이 1990년 기준 1000명당 8.1명꼴이며 미국, 일본 등 선진국의 2배였다. 당시 평균수명이 비슷한 칠레(5.8명), 폴란드(5.8명), 불가리아(4.8명)보다 더 높았다.# 또한 이 때까지만 해도 30대는 지금의 40대로 보였고, 55세 정도만 되어도 할아버지로 보이기도 했다.
  • 아동복지법이나 장애인복지법 등 복지 제도가 지금에 비해서 미약했기 때문에 장애인이나 거동이 불편한 노인들이 살기가 더 어려웠다. 특히 지하철역에 에스컬레이터엘리베이터가 그렇게 많이 설치돼있지는 않았다.
  • 담배와 흡연에 사회적으로 매우 관용적인 분위기였고 버스 실내를 포함해 공공장소에서의 흡연도 가능했으며, 또한 방송에서도 담배를 피는 장면이 별다른 검열 없이 그대로 송출됐다.[78] 또한 전자담배가 없던 시절이라 담배는 오직 연초뿐이었다.[79] 당시에는 어느곳에서든 담배를 아무렇지 않게 피울 수 있었기에 하루에 담배를 한갑 이상 피우는 골초 아저씨들이 흔했다.
  • 지금처럼 K-pop이 전세계적인 인기를 자랑하지 못했으며, 국내 인기 정도로 끝났다. 노래의 종류도 더 적었고, 아이돌이 그리 많지도 않았기 때문에 젊은 세대들끼리 공감대가 통하는 유행가는 거의 뻔하게 다 잘 알고있었다.
  • 아이들은 밖에서 놀때 롤러스케이드, 롤러블레이드, 자전거를 많이 타는 경우가 지금보다 많았다. 겨울에는 눈이오면 썰매를 탔었고, 스키와 스노보드는 고급 스포츠에 속했다. 그나마 1990년대에 와서 스키도 보급이 많이 되었으나 당시에도 비싸서 어지간한 사람들은 고작 1년에 한번정도 타보는게 전부였다.
  • 대한민국 철도는 KTX로 대표되는 고속열차가 아직 다니기 전이고 새마을호가 최상위 등급, 비둘기호가 최하위 등급으로 다녔다. 또한 대부분이 단선에 전철화가 이뤄지지 않았다.[80]
  • 열차 승차권은 모두 종이 승차권에 통일호비둘기호는 에드몬슨 승차권을 사용하였다.[81] 또한 대부분이 현장 발매로 이루어져 추석이나 설 등 명절에는 기차역에 표를 사려는 사람들이 장사진을 이뤘다.[82]
  • 수도권을 제외한 지역에 지하철이 있는 경우는 부산대구뿐이었다.[84]
  • 지하철 객차와 역 시설의 안전 시스템이 매우 부실했다. 좌석과 바닥, 연결통로 등 열차 내부가 대부분 가연재 성질로 제작되었고, 비상탈출 안내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비치된 소화기나 객실 내 통화장치도 점검을 잘 하지 않아 작동되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스크린도어는 커녕 안전펜스조차 없었다. 이 역시 개발시대 시절의 안전불감증인 셈이다.[85]
  • 에어콘은 큰 공중장소가 아닌이상 없었고 가정용 에어콘은 상류층들의 전유물이었다. 일반 가정은 선풍기 정도로 더위를 식혔고, 선풍기도 없었던 시절에는 부채가 전부였다. 학교에도 한 교실당 겨우 선풍기 몇개가 전부여서 여름에 5교시만 되면 찜통 교실에 학생들이 반도 넘게 꾸벅꾸벅 조는 명장면이 펼쳐졌다. 어머니가 싸주신 하루전에 얼린 얼음을 녹여서 물을 마시는게 생명수였다.
  • 오락실에 리듬 게임기가 설치되기 전이었다.
  • 정수기가 가정집으로 널리 보급되기 전이었고 생수보다는 보통 보리차, 옥수수차, 결명자차를 끓여서 식힌 후 물처럼 마셨다. 당시 델몬트 오렌지 주스를 먹고 남은 큰 유리병에 담아두고 마셨다.
  • 양문형이고 큼지막한 지펠 냉장고는 국내산이 아닌 전부 수입산이었고 가격이 비싸 대부분 상류층들만 썼다. 보통 사람들이 쓰는 냉장고는 대부분 위가 냉동실, 아래가 냉장실 형태의 작은 2도어 국산 냉장고였다.
  • 가정용 세탁기는 대부분 문이 윗쪽에 있는 일반 세탁기(통돌이)에 탈수기가 따로 되어 있는 2조식도 많았으며, 문이 앞쪽에 있는 드럼 세탁기는 주로 세탁소에서나 볼 수 있었다.
  • 전기밥솥은 전기압력밥솥보단 일반 전기밥솥을 주로 썼다.
  • 외환 위기까지 대형 건물을 중심으로 엘리베이터 안내양이 있었다. 이후 인건비 절감을 위해 안내방송으로 대체했다.
  • 도로는 우측통행이 원칙이나 보행경로는 일본식 좌측통행을 고집하는 엇갈린 풍토가 있었다. 이는 2000년대에도 유지되다가 2010년이 되어서야 우측통행으로 통일됐다.
  • 교육계에도 군사정권에서 비롯된 문화가 많아 소위 말하는 개성이 강하거나, 공부를 못하는 애들은 쓰레기 취급하는 인성이 문제인 선생님들이 학교는 물론 학원에도 중간중간 있었다.
  • 예쁘고 잘생긴 학교의 아이돌 노릇을 하는 등 예전보다는 약간 여려보이는 요즘 일진들과는 달리 당시 일진들은 싸움 실력이 가장 중요했기에 험하고 강한 이미지였으며 스타일링도 "깡패" 비슷하게 하는 경우가 많았다.
  • 교육은 많은 내용들을 학교에서 가르치고 최대한 요점들을 많이 외우게 시키는 전형적인 주입식 교육이었다. 소위 말하는 창의성은 그나마 방학숙제 정도에서나 발휘할 수 있었다.
  • 학교에서 안경을 쓰는 아이들이 컴퓨터 게임, 스마트폰 중독이 나타나는 애들이 더 많은 요즘보다는 많이 적었다. 당시 노인을 제외한 어른들중에 안경을 쓰는 사람은 극소수의 IT계열 엘리트나 학자, 보급이 널리 되기 전의 비싼 컴퓨터를 가지고 노는 소수의 엄친아들 밖에 없어서 당시에는 안경을 쓰면 사람들이 다 집안이 잘살거나 아니면 공부좀 한 똑똑하고 저명한 사람으로 보는 시선이 있었다. 요즘 안경을 쓰는 사람들이 너드 이미지를 벗기위해 라식수술을 받는 경우가 일부 있는 것을 보면 대조적이다.
  • 압축 경제성장에다가 환경에 대한 규제가 없어 전국의 대도시를 가로질러 흐르는 하천들이 심하게 오염된 똥물 하천이었다. 물론 이로인해 1990년대 후반부터 환경에 대한 규제가 강해지는 계기가 되었고, 결국 많은 노력을 통해 2000년대부터는 죽어가던 하천들이 생태하천으로 다시 거듭났다.[87]
  • 숙박업소는 일부 유명한 호텔들을 제외하고 지금처럼 모텔들이 없었고 조금 허름한 여관들이 많았다. 가족이나 친구 단위로 놀러갈때 잡는 펜션 역시나 환경이 다소 열악했으며, 지금처럼 내집처럼 아늑하고 깔끔한 펜션은 기대하기 어려웠다.
  • 시골, 도시지역 가리지 않고 초등학교 운동회는 동네 축제였다. 아이들은 물론이고 어른들끼리도 서로 모여서 담소를 나눴고 저렴한 값에 음식, 중고품을 분양하는 바자회도 중간중간 열렸다.
  • 1990년대 초반에는 단 돈 1000원으로 친구들끼리 모여 푸짐한 과자파티를 할 수 있었다. 90년대 말로 가며 화폐가치가 많이 하락했지만 그래도 1000원이면 혼자서 배불리 군것질을 하는데는 문제가 없었다.
  • 자동차는 요즘 시중에 나오는 차들처럼 곡면이 발달 되어있지 않고 제법 각이 진 투박한 디자인이었다.
  • 도시에서 조차도 많은 사람들이 작은 주택에 거주했다. 1990년대에 들어 잘 계획된 신도시가 생기면서부터 아파트가 주목을 많이 받기 시작했으며 2000년대에 들어서야 아파트가 거주의 표준이 되어버렸다.
  • 1970년대 까지만 해도 남자가 여자를 납치해서 결혼하는 파렴치한 "보쌈" 문화가 곳곳에서 일어났고, 당시만 해도 남자가 본인이 좋아하는 여자를 따라다니는게 법적으로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물론 2020년대 현재 시점에서 그렇게 했다가는 스토킹으로 신고되어 쇠고랑을 차게되고 몇년 동안 감옥살이를 할 수 있으니 주의해야되는 부분이다.
  • 대한민국에 과학기술 인프라가 충분히 적립되기 전이었기 때문에 새로운 연구분야가 많이 개설되어 박사학위를 받은 사람들이 정규직 연구원, 교수가 되기 매우 수월했다. 당시에는 박사학위를 받은 사람들이 그리 많지가 않았기 때문에 이런게 가능하기도 했었다.
  • 윗사람들에게 볼거리를 제공하기 위해 아랫사람이 의무적으로 장기자랑도 하면서 분위기를 띄우는 것이 필수로 인식되는등 구시대적인 풍토가 더러 있었다. 회사 행사에서는 물론이고, 가족들 끼리의 모임, 대학교 문화에서도 이런게 필수였는데 이를 잘 하지 못할 경우 숫기없고 노력이 부족한 사람 대접을 받았다. 이러한 문화는 2000년대까지도 이어지다가 2010년대에 들어서야 어느 정도 자중되는 분위기다.[88]
  • 1990년대까지 대한민국의 대기업은 사실상 현대그룹, 삼성그룹, 대우그룹의 삼국시대였다. 이 중 가장 강력한 파워를 자랑했던 기업은 정주영이 이끌던 현대였으며, 그 뒤를 대우와 삼성이 차지했다. 그러나 2000년대에 접어들면서 대우는 IMF의 여파로 다른 회사에 인수되어 사라졌고, 현대는 왕자의 난으로 계열사가 쪼개지면서 공중분해되었다. 삼성은 IMF 외환위기를 잘 버티고 21세기에 국내 재벌순위 1위를 차지하였다.
  • 1990년대는 정치적으로 대한민국의 민주화를 이끈 김영삼, 김대중, 김종필 이렇게 3김의 정치적인 활동이 가장 왕성하고 최고조에 달했던 시기였다.[91]
  • 전국이 1일 생활권이 이미 되기는 했지만, 완공된 고속도로경인고속도로, 경부고속도로, 중부고속도로, 영동고속도로, 호남고속도로, 남해고속도로 이렇게 밖에 없었기에 고속도로가 연결되지 않은 지역을 가려면 상당 시간동안 국도로 가야 했기에 더 불편했다. 88올림픽고속도로도 있었지만 2015년 이전까지는 확장이 되지않은 왕복 2차로라 사실 국도나 다름 없었기에 그냥 패스. 호남고속도로, 남해고속도로, 영동고속도로, 동해고속도로, 구마고속도로도 전 구간 혹은 일부 구간이 왕복 2차로였다. 고속도로 조차도 지금처럼 터널이 많이 뚫려있지 않아서 서행하면서 고개를 넘어가야 했기에 시간도 더 많이 걸렸다.
  • 수도 서울특별시의 경우 이미 1960~1970년대부터 신시가지가 개발되어 도시의 기능들이 구시가지에서 신시가지로 많이 이전을 했지만, 지방 광역시들만 해도 1980년대까지 구시가지가 대부분의 기능을 담당하고 있다가 1990년대에 들어서야 신시가지들이 개발이 되며 기능들이 슬슬 이전되기 시작했었다. 아파트가 1980년대 후반부터 많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 63빌딩 높이 안팎의 마천루들이 즐비하게 지방에까지 여러채가 들어선 지금과는 다르게 당시에는 서울 도심, 부도심에도 초고층 빌딩이 그렇게 많지가 않았다. 대한민국에서 마천루 건설 붐이 일어났던건 2000년대 부터였다.

3.17. 언어

서울 지역에서 했걸랑요, 맨들다 등의 서울 방언이 마지막으로 자주 쓰이던 시기였다. 2000년대 이후부터는 표준어와 더 가까운 서울말이 쓰이게 된다. 하지만, 아기->애기, 죽이다->쥑이다와 같은 전설 모음화는 구어에서 계속 살아남는다.

'ㅐ'와 'ㅔ'의 구별이 더 희미해져서, '네가'를 '니가'로 부르는 사람들이 훨씬 많아졌다. 단편적인 예로, 1987년 노래인 소방차의 어젯밤 이야기에서는 네가를 [네가]로 발음하나 1996년 노래인 H.O.T.의 전사의 후예에서는 장우혁의 초반 랩 파트에서 네가를 [니가]라고 세 번이나 발음한다.

3.18. 기타

그 유명한 공전절후의 수집품인 띠부띠부씰이 나왔던 시기였다. 그리고 유아 프로그램 텔레토비가 세계적으로 인기를 끌었다.

2010년대 들어 건축학개론, 응답하라 시리즈 등 1990년대를 추억팔이하는 영상물이 많이 제작되고 있다. 거꾸로 말하면 1990년대에 청소년기를 맞은 1970년대, 1980년대 초중반 출생들이 주요한 소비세력으로 진입한다는 의미. 또한 오버뮤직씬에서는 UV, 인디뮤직씬에서는 1990년대 K-POP을 컨셉으로 한 기린(가수)[92]이라는 아티스트가 등장하기도 하였다. 서울의 이태원과 홍대 등을 시작으로 밤과 음악사이라는 1990년대 가요를 튜닝해주는 주점형 클럽 체인점도 이런 맥락에서 히트치고 있다. 설립 자체는 2005년이지만 근년의 1990년대 복고풍 붐에 이어서 항상 문전성시를 이루고 있다고 카더라.

묘하게 세기말적 분위기가 감돌기도 하였는데 1990년대 초에는 다미선교회가 시한부 종말론(휴거) 소동을 일으켰다. 1990년대 말로 갈수록 노스트라다무스 떡밥과 Y2K 문제 등이 이런 분위기에 일조했다. 한국에서도 IMF 시대라는 경제적 원인이 이런 분위기에 편승하는 데 일조하기도 했다.

이 시기 젊은이들의 패션을 다룬 뉴스 영상이 갑자기 2016년에 재발굴되어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이렇게 입으면 기분이 좋거든요 문서 참고.

이때부터 드래곤공룡이 한국에 널리 알려지기 시작했다. 드래곤 하트, 드래곤 라자, 쥬라기 공원 등의 영화 및 소설과 쥐라기 월드컵, 포켓몬스터 같은 아동 만화에서 드래곤이나 공룡급의 몬스터가 등장하여 대한민국 전국으로 알려져 퍼져나갔다. 이후 수 많은 용덕후공룡덕후들이 늘어났다.

4. 이 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작품

해당 시기에 제작된 작품들 제외. 가상역사/SF물인경우 ▼.

5. 이 시대에 시작었거나 만들어진 것들

6. 이 시대에 쇠퇴한 것들

이전 시대에 나와 지속적으로 쓰인 것들을 적을 것.

7. 이 시대에 나온 말들

8. 1990년대에 들어가는 해

1990년 - 1991년 - 1992년 - 1993년 - 1994년 - 1995년 - 1996년 - 1997년 - 1998년 - 1999년

9. 참고/관련 문헌

  • 대한민국 50년사: 하권 - 임영태 저. 들녘. 1998.
  • 대한민국사: 1945~2008 - 저자/출판사 동일. 2008.
  • 사진과 그림으로 보는 한국 현대사(개정증보 3판) - 서중석 글/그림. 웅진지식하우스. 2020. p462~475.
  • 이원복 교수의 현대문명진단 - 이원복 글/그림. 조선일보사. 1993~1998. p90~91(2권), p26~27/82~83/240~241(3권).
  • 한국 현대사 산책 1990년대편: 3당합당에서 스타벅스까지(전 3권) - 강준만 저. 인물과사상사. 2006.
  • 21세기 먼나라 이웃나라 미국편 2~3탄 - 이원복 글/그림. 김영사. 2004~2005. p238~243(11권)


[1] 특히 1994년 상반기에는 보스니아, 르완다, 하반기에는 체첸이 각각 내전을 겪으며 현실에 지옥도가 펼쳐져 폐쇄적 민족주의의 단점을 제대로 드러냈다.[2] 과거 선사 시대농업 혁명, 18세기산업 혁명과 더불어 인류 문명을 획기적으로 진보시킨 3대 혁명 중 하나에 해당된다. 그 첨병은 당연히 인터넷이다.[3] 불법사이트, 저작권, 사생활 침해, 디지털 자료의 짧은 수명 등.[4] 소위 아날로그라고 불리는 PC통신, 무선호출기, 다마고치 등도 전부 디지털이다. 다만 스마트폰 시대의 디지털에 비하면 한 없이 퀄리티가 약할 뿐[5] 2020년대 기준 기성세대가 된 50대 이상은 1980년대~1990년대 초반까지를 아날로그로 꼽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1990년대 중반 등장한 인터넷과 컴퓨터의 대중화가 디지털의 상징처럼 여겨지기 때문이다. 그 밑 세대인 30~40대는 1990년대 및 경우에 따라 2000년대 초반까지를 아날로그 시대라고 뽑고, 10~20대 젊은 세대는 2000년대, 경우에 따라 2010년대 초반까지를 아날로그가 이어졌다고 평하기도 한다. 스마트폰이 대중화되기 전인 1990년대와 2000년대, 2010년대 초반이 두 정보체계의 과도기에 해당하기 때문에 이러한 결론이 나오는 것이다. 다만 스마트폰 대중화 이후인 2010년대 중반부터는 세대를 불문하고 완전 디지털 세상이 된다는 것에는 대부분 의견이 모아지고, 다들 인정한다.[6] 예시: '멀티미디어의 삼성전자', '하이미디어(LG전자)', '멀티미디어의 뉴프론티어(현대전자)' 등.[7] 예시: 삼성 디지털(삼성전자), DIGITAL ez LG(LG전자), Cyber World Leader(한국통신) 등.[8] 교양만화가 이원복 교수 등 일부 학자/전문가들이 언급했듯, 식민지 시절 열강이 멋대로 그은 경계선 때문이라는 시각도 있다.[9] 뒷부분에는 종로성신여대입구역 근처의 모습도 나온다.[10] 2018년 6월 22일자로 마지막으로 살아있었던 김종필이 사망하면서 3김 정치는 막을 내렸다.[11] 하지만 이 당시 시중 자금이 부동산으로 대거 몰려든 덕택에 집값과 전월세비 상승폭이 임금 상승률을 추월할 정도로 폭등해 실제 일반인들 체감은 이에 못미쳤다. 물론 자가용이 한창 대중화되어갔고, 해외여행 자유화에 따라 해외여행객도 급속히 증가하기 시작했기 때문에 어쨌든 이전과는 확연히 다르다는 느낌이 들기는 들었다.[12] 일반적으로는 1995년으로 알려져 있다.[13] 그 해에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의 국민소득은 2만 달러 초반대였고 미국, 독일은 2만 달러 후반대였으며 일본만이 3만 달러가 넘던 시기였다.[14] 더글러스 커플랜드라는 캐나다 작가의 소설에서 유래한 단어로, 원래 뜻은 1970년대 풍요로운 세상에서 태어나 석유파동의 후유증을 보며 자란 뒤 실업률이 급증한 상태에서 좋은 직장에 들어가려는 꿈은 포기했으나 옷차림 등을 통해 개성을 표현하려는 욕구는 넘쳐났던 세대를 가리키는 단어였다.(출처는 이원복의 현대문명진단 3권 'X세대와 Y세대' 편과 시사저널 1993년 8월 19일자 기사) 다만 한국에서는 사회 분위기가 보수적이었던 데다 1996년경까지 호황기였던 관계로 뭔가 다른 의미가 된 것.[15] 그러나 이는 자연스러운 현상인데, 대중 문화는 본래 취향의 '선택'으로 이루어지며 그러한 과정이 수용자의 개성을 확정짓는 역할을 하게 되어 있다. 한국의 대중문화는 이 당시까지는 성숙되지 않았기 때문에 이러한 '선택' 범위가 그리 많지 않아서, 개성을 추구하지만 결과적으로는 획일적으로 보이게 된 것이다.[16] 이 시기의 문화 소비를 가리키는 일명 '명품세대'라는 용어도 있다.[17] 1980년대 후반-90년대 초반에 방영된 영심이달려라 하니, 천방지축 하니, 사랑이 꽃피는 교실, 푸른교실, 맥랑시대 등과 1990년대 중후반에 방영된 신세대 보고 어른들은 몰라요, 학교 시리즈, 사춘기(드라마), 를 보면 등장인물로 나오는 학생들의 복장이 확 다르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18] 80년대 후반부터 과외 학원 금지가 사실상 없어지고 또 주로 어린이를 대상으로 하는 예체능 사교육은 80년대 중후반쯤부터 흔해졌다.[19] 정확하게 얘기하자면 1980년대까지는 그래도 농촌지역 인구수가 지속적으로 줄어들었어도 그나마 수는 되었지만, 이것도 인구유출이 지속되는 상황에서는 무력했던 데다가 1980년대 이후로 저출산 현상까지 나타나면서 농촌 지역 자체의 인력이 부족해지게 된 것이다.[20] 1990년대부터 기업주들이 싼 임금의 유혹으로 인한 이기주의가 팽배하여 외노자들이 급격히 늘어났다.[21] 사실 이는 당연한 것이 1980년대 산아제한 정책의 영향으로 출산율이 1.5명대까지 줄어들면서 1984년부터 1990년까지 출생아수가 60만 명대까지 떨어졌고, 이 시기에 태어난 세대들이 한창 학창생활을 보냈을 때가 1990년대 ~ 2000년대이다. 이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1980년대의 저출산 경향 참조. 물론 당대에는 남아선호사상을 제외하면 그다지 큰 문제로 부각되지는 않았지만, 농어촌지역이나 탄광촌에서 고령화와 인구감소 문제가 대두되었다. 그러나 이에 비례해서 인구정책이 따라온 것은 아니라서 산아제한 정책은 1996년도에 와서야 폐지되었다.[22] 사실 1990년대 초반까지는 대학진학률은 20~30%대 정도의 수준이었고 대학에 입학하는 것 자체가 위낙에 빡센 일이었기 때문에 덜했던 정도였다. 물론 대입시험 보느라 생고생했던 사람은 많았지만.[23] '사람은 무조건 대학을 가야 한다', '대학 안 가면 사람 새끼가 아니다'라는 용어.[24] 1990년대~2000년대 당시 그리고 길게는 2010년대 까지도 중학교에서는 인문계를 중시하고 상고와 공고를 천시했으며, 인문계고교에서는 무조건 대학 입학만 중시하고 학생의 진로와 생각을 편협하게 만드는 교육을 북한처럼 세뇌교육 형식을 통해 교육했다(한국판 북한 학교).학부모들도 역시 이에 격렬하게 동조하였고 당연하게도 당대에도 많은 사회문제가 되었지만 이후에도 대학을 가야 안정된 직장에 취직하기 쉽다는 메리트 때문에 변하지 않았다. 심지어 상고와 공고 출신들도 상당수가 취업이 아닌 진학을 선택했다.[25] 대통령 존영이 관공서에서 사라지고, 대통령의 호칭이 비공식적으로도 각하에서 님으로 바뀐 것도 1998년 김대중 정부 출범부터였다. 강원국의 '대통령의 글쓰기'에 따르면, 연설문에서도 권위적인 면을 줄이려고 노력했다고 나와있다.[26] 즉 1960년대 초중반생까지[27] 당시 유동근은 40세, 황신혜는 33세였다.[28] 1996년 연세대 사태와 1997년 외환위기로 운동권은 크게 쇠퇴하고 말았다. 물론 이건 90년대 초중반부터도 쇠퇴가 시작되었기도 했다.[29] 엄밀히 말하자면 1970년대 오일쇼크 때도 있었기는 했지만 너무 간격이 멀고(...) 1990년대 초반에도 3저호황이 끝나고 해서 중소기업들의 파산률이 크게 늘어나고 경상수지도 적자로 돌아섰으며 물가도 급상승하는 테크를 밟았지만 그래도 성장률은 5% 이상 정도의 수준은 유지하기는 했다.[30] 이 밖의 1990년, 1995년, 1999년도 더운 편이었다.[31] 이 밖의 1991년, 1992년도 이상 저온으로 시원했다.[32] 정확히 말하자면 '일부러' 처단하지 않은 것이다. 아버지 부시는 후세인을 제거할 시 후세인이란 구심점이 사라진 이라크가 붕괴되어 더 좋지 않은 결과가 일어날 것이라 판단하였기 때문에 제거하자는 강경파의 의견을 반려했다. 그리고 이 예측은 20여년 후 사실이 된다.[33] 이 보고서에 따르면, 오만한 일본이 경제적으로 약한 미국을 무시했고, 일본은 미국의 모든 정보를 훔쳐서 온갖 로비 장치를 총동원해 반일정책을 격침시킨다는 식이다. 다만 다른 쪽에선 CIA가 탈냉전 시기에 할 일이 없어지자 새로운 적을 만들기 위한 자충수라고 비판을 하기도 했다. 정작 저자인 도허티는 발표 1주일 후 RIT연구소에서 쫓겨났다.[34] 맥도날드, 마이크로소프트, 미키 마우스의 영문 첫글자를 줄인 단어다.[35] 잘 보면 1990년대 미국은 1980년대 일본의 버블경제 미국판이라 봐도 무방하다.[36] 이 무렵 할리우드에선 에어 포스 원, 아마겟돈, 진주만 등 미국 중심 사관의 영화들이 전성기를 이루고 있었는데, 이는 냉전에서 승리한 당시 미국인들의 자신감을 반영하는 것이기도 하다.[37] 어설픈 경기 부양과 인구 감소로 집값 폭락한 일본[38] (1990~1999)일본과 주요 국가의 명목 GDP 흐름[39] 이러한 현실은 이원복 교수의 해외토픽 만화 <현대문명진단> '외교관, 여기자, 그리고 콜걸(조선일보사판 단행본 3권 수록)'에도 반영되어 있다.[40] 사실상 서양에서의 흑인음악 비율이 과반수이기도 하다.[41] 영화 보디가드와 그 사운드트랙인 I Will Always Love You로 유명했다.[42] All I Want For Christmas Is You는 말할 필요도 없고 Fantasy, One Sweet Day로 빌보드 장기집권했다.[43] 영화 타이타닉의 대표곡 My Heart Will Go On으로 유명함.[44] 이후 추락을 거듭하여 2007년부터는 800억대 선까지 내려왔으나 온라인 음반시장은 자리를 잡아가면서 꾸준히 상승하고 있다.[45] 확실히 이건 MBC 대학가요제의 공이 컸다. (그런데 015B는 전신이었던 무한궤도부터 생각하자면 1988년 데뷔다. 하지만 일부 멤버를 015B에 맴버로 포함하게 된다. 따라서 015B는 사실상 무한궤도를 계승하는 그룹인 것이다.) 하지만 대학가요제로 대학생이 가수로 데뷔하는 건 대학가요제가 만들어진 시기인 1970년대 후반부터 있었다. 단지 1970년대 후반의 대학생들이 아마추어의 풋풋함이 있었다면 1980년대 후반 이후 등장한 대학생 가수들은 등장부터 이전 선배들과는 다른 프로 뮤지션으로서 데뷔했다는 차이가 있다.[46] 김건모의 경우 레게 팝을 비롯한 흑인 음악과 댄스곡, 신승훈은 정통 발라드[47] 거꾸로 말하면, 한국에서 레이저디스크가 영 힘쓰지 못한 이유도 여기에 있으며 특히 이러한 분위기가 팽배했던 1980년대 이전 가수의 평가기준은 순수하게 가창 실력 및 음악 그 자체에 집중되었기 때문에, 조용필 등이 이러한 시스템 하의 최대수혜자(중 하나)라는 의견도 존재한다. 다만 이 문단은 독자연구/집단연구임을 밝힌다.[48] 게임외적인 부분의 CG/실사동영상을 재생하는 용도가 메인이었지만 몇몇 게임은 이러한 풀모션 비디오를 배경에 일부 박아넣는 식의 연출 용도로 활용하기도 했다. 대표적으로 파이널 판타지 7에서 이런 기법이 많이 사용되었다.[49] 물론 이후론 PSP, 닌텐도 DS 등의 등장으로 인해 인기가 많이 사장되었지만 당시로선 저렴하고 휴대성이 좋은 게임기론 게임보이가 유일했기에 저연령층에서 인기가 좋았다.[50] 때마침 야간/할인시간정액제가 실시되어 요금걱정에서 자유로울 수 있었다.[51] 이주노는 보이런던, 양현석은 펠레펠레였다.[52] 곧이은 2000년대에는 이런 1990년대의 과감한 메이크업에 대한 반동으로 옅고 자연스러운 화장을 추구하게 된다. 다시 좀 더 진하고 과감한 화장이 유행하는 2010년대 기준으로 보면 2000년대 중반의 화장은 거의 쌩얼에 가까워 보일 정도.[53] 1980년대 중후반에 유행했던 하이틴 패션[54] 한혜진이 입은 옷은 영화 제5원소에서 밀라 요보비치가 입었던 옷과 비슷하다. 이 광고 제작진 중 하나가 이 글을 발견해 직접 댓글을 남기기도 했다.[55] 2000년대 이전까지만 해도 동성애는 한국 정서상 무조건 터부시되었다.[56] 허준의 경우 방송 시작은 1999년이지만 최고 시청률(63.7%)은 2000년에 기록했다.[57] KBS 3TV, 교육FM.[58] 임백천, 최수종, 이수만, 이문세[59] 이홍렬, 서세원 등 진행력이 좋은 개그맨들도 메인 MC를 많이 맡았다.[60] 1990년 KBS2에서 인기 개그 코너 쓰리랑 부부의 후속작으로 방영된 <쓰리랑 가족>을 최초의 시트콤으로 보기도 한다.[61] 지금도 깨지지 않는 날아라 슈퍼보드의 최고 시청률(42.8%)이 이 무렵에 세워진 기록이다.[62] 이 중 드래곤볼은 1980년대에 연재가 시작되었다.[63] 1990년대 중반에 들어서면서 해외여행이 성행하기 시작했다.[64] 1980년대패밀리 레스토랑이 처음 한국에 진출했지만, 비싼 가격 때문에 초반에는 매출이 거의 없을 정도로 부진을 겪었다. 게다가 1990년대 후반 터진 IMF 외환위기 때문에 한동안 이러한 고가 외식업이 성행하지 못했다.[65] 무료신문인 무가지는 2002년에 등장했다. 이후 신문은 2000년대 초반 최고 발매부수를 찍고, 2000년대 후반까지 성행하다가 스마트폰이 대중화된 2010년대 들어 급격히 위세가 꺾였다. 조중동이나 한경오 등 메이저 언론사들도 인터넷/모바일 서비스에 주력하고 있는 상황.[66] 영상통화는 대한민국에 3G 상용화가 된 2003년에 처음 등장했고, 대중화된 건 2000년대 후반 SHOW 론칭즈음부터였다.[67] 1992년 첫 등장한 우등고속버스도 공중전화가 있던 도입 초창기 시절이었다. 우등고속버스 공중전화는 일반 공중전화보다 통화료가 비쌌다.[68] LCD TV는 2008년에 들어서 CRT를 추월했고 2010년대부터는 완전히 대체했다. 대한민국에서 HD 방송은 2000년부터 시작되어 2010년대부터 완전 대중화되었다.[69] 2005년까지는 낮 정파가 시행되어 12시~4시 사이에는 방송을 하지 않았다. 그나마도 방송시간이 길어짐에 따라 낮 정파 시간이 짧아져서 그렇지, 1995년 이전에는 낮 정파 시간이 10시~5시 30분 사이였다.[70] 3.5인치는 2000년대 중반까지 널리 쓰였다.[71] 이유는 집전화로 연락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스마트폰 시대인 현재는 개개인에게 바로 연락이 가능하니 사실상 없어진 문화다.[72] 간통죄는 2015년 헌법재판소가 위헌 판결을 내리면서 폐지되었다.[73] 2004~2005년부터 주5일 근무제도가 시행되었으며 학교의 경우 격주로 토요일 등교를 하다가 2012년이 되어서야 완전 주5일 수업이 시행되었다.[74] 영화 <공공의 적>에서 설경구가 부패 교통경찰로 나온다.[75] 할려면 할수 있는데 20대 인력도 넘쳐나는데 굳이 고용주 입장에서 학교 다니는 10대를 고용할 일은 택배 상하차같은 일만곤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76] 1990년대 당시에는 환갑을 넘는 사람이 흔해졌지만 아직 문화 지체로 대부분이 환갑을 치렀다.[77] 문화 지체가 된 탓에 21세기에도 치르기도 한다.[78] 2003년 7월부터 공공장소에서의 흡연이 금지되었다. 방송에서의 흡연 장면 검열은 2003년 KBS와 SBS에서 처음 규제하였고 2005년에는 MBC도 규제하기 시작했다.[79] 전자담배는 2003년 중국에서 처음 개발되어 국내에서는 2000년대 후반 무렵부터 소개되었다.[80] 대한민국 철도의 중추라 불리는 경부선은 2003년에 수원-병점 구간의 전철화를 시작으로 2007년에 전철화 공사가 완료되었다.[81] 통일호도 일부 노선은 전산 승차권을 사용해 지정석이었다.[82] 2004년 KTX 개통을 앞두고 MS 승차권이 도입되었고 2000년대 후반부터 E-티켓 판매를 시작했다. 에드몬슨 승차권은 2004년 통일호 폐지 이후 사용이 종료되었다.[83] 철도청은 2005년 1월 1일 공사화되었다.[84] 2004년 광주 지하철이 개통되었고 2006년에 마지막으로 대전지하철이 개통되었다.[85] 2003년 대구 지하철 참사가 발생한 뒤 지하철의 안전시스템에 대한 대대적인 점검이 이루어졌고, 이듬 해인 2004년부터 교체 작업을 진행해 2006년부터 전국 지하철에서 운영되는 모든 객차는 불연재 소재로 제작된다.[86] 서울의 경우 2004년 티머니 발매와 함께 교통카드 이용률이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이전까지는 교통카드와 현금, 회수권이 쓰였다.[87] 서울의 경우 2005년에 복원된 청계천이 대표적이다.[88] 2018년 아시아나항공 사태를 보면 아예 없어지지는 않은 것 같다. 풍토라는 건 그리 쉽게 없어지는 게 아니다...[89] 조흥은행, 상업은행, 제일은행, 한일은행, 서울은행.[90] 한일은행과 상업은행은 1999년 합병되어 한빛은행이 되었고 2002년 우리은행으로 개명했다. 제일은행은 2005년 9월 스탠다드차타드은행에 인수되었고, 서울은행은 2002년 연말 하나은행에 합병되었다. 마지막까지 남은 조흥은행도 2006년 4월 신한은행에 합병됐다.[91] 김영삼과 김대중은 각각 1998년과 2003년에 대통령직을 퇴임하면서 정계를 은퇴했고, 김종필은 2004년 제17대 국회의원 총선거에서 낙선하면서 정계를 은퇴했다.[92] 후자의 경우, 정확히는 1990년대 초중반의 서태지와 아이들, 듀스 같은 뉴 잭스윙, 힙합, 브레이크비트성 댄스 뮤직이다.[93] 주인공인 황경민, 정종석이 15년 전 중학교에 입학했을 때 김철이 존재했을 당시의 중학교 시절을 회상한 시기로, 김철이 "부모? 야, 내가 국민학교 때 아빠라는 인간은 사업 망하자마자 도망쳐버렸어. 우리 버리고..."라고 말하는데 그 대사를 봤을 때 '국민학교'라는 단어는 1995년까지 사용했다. 그리고 일부 장면에서는 워크맨도 언급했다.[94] 애니메이션 판 한정으로 요르 포저의 생년이 1963년으로 나온다. 요르의 나이가 27세임을 감안하면 작중 배경년도는 1990년이다.[95] 노래반주기 자체는 1986년ASSA노래방을 통해 최초로 나왔지만, 노래방을 본격적으로 도입한 연도는 1991년이다.[96] 물론 오락실2000년대 시망했지만.[97] 1995년 4월부터 출고되는 입석형 버스에는 냉·난방장치가 설치돼서 나온다.[98] 정확히 말하면 대책으로 내놓은 2번째 프로그램이다. 1번째는 브라보 신세대...[99] 1993년 8월과 11월 시행.[100] 1995년 1월에 통합된 다른 시와 다르게 1998년 4월에 통합됨.[101] 서태지와 아이들이후 가요계의 판도가 뒤집히면서 등장한 용어로, 원래는 트로트뿐만 아니라 성인 취향의 발라드까지 포괄해 부르는 용어였으나 점차 트로트 혹은 트로트풍의 발라드/포크송 등만 가리키는 용어로 바뀌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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