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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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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 1990년대 2000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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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20세기 21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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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천년기 제2천년기 제3천년기

1. 개요
1.1. 1990년대의 대한민국: 에서 으로1.2. 1990년대의 미국: 20's 시즌 21.3. 1990년대의 일본: 잃어버린 10년
2. 문화
2.1. 출판계2.2. 문학2.3. 음악
2.3.1. 서양 음악2.3.2. 한국 음악2.3.3. 일본 음악
2.4. 게임2.5. 패션2.6. 영화2.7. 언론
2.7.1. 정치적 측면2.7.2. 상업적 측면
2.8. 드라마2.9. 방송2.10. 예능2.11. 만화, 애니메이션
3. 기타
3.1. 이 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작품3.2. 이 시대에 시작된 것들3.3. 이 시대에 쇠퇴한 것들
4. 이 시대에 나온 말들5. 이 시대의 상징들
5.1. 인물
5.1.1. 대한민국
5.1.1.1. 정/관계5.1.1.2. 재계
5.1.2. 해외
5.2. 이 시대를 풍미한 것5.3. 이 시대의 유행어
6. 1990년대생
6.1. 사회·정치적 성향
6.1.1. 공통된 특성6.1.2. 남성6.1.3. 여성
6.2. 행정구역 개편에 따른 1990년대생의 고향 변동
7. 1990년대에 들어가는 해8. 관련 문헌

1. 개요

서기 1990년부터 1999년까지를 가리키는 말.

세계적으론 냉전이 종식되고 미국 주도의 국제 질서가 확립 된 시기. 그리고 대한민국에선 1980년대 후반부터 이어지고 있던 경제 호황이 정점을 찍었던 황금기이자, 동시에 1997년 IMF 외환위기로 인한 최악의 경제적 시련기이기도 했다.

1990년, 동서독 통일과 이듬해 발생한 소비에트 연방의 붕괴 사건 등, 체제 경쟁에서 공산주의 진영이 몰락하고, 자유(자본주의) 세계가 승리하면서 세계 질서는 미국 주도로 재편되었다. 2차 세계대전의 종전 이후 50여 년간 지속되어 온 냉전 체제가 종식되고 드디어 인류에게 평화의 시대가 찾아 오는가 했지만, 냉전 시절 잠자고 있던 극단적-폐쇄적 민족주의가 기승을 부려 콩고 전쟁·걸프전·유고 내전·체첸 사태·보스니아 내전·코소보 전쟁 등이 세계 각지에서 터졌다.[1]

또한, 1990년대는 정보 혁명[2]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시기로 평가받는다. 대중들에게 정보통신(IT) 기술이 본격적으로 전파된 것이 이 시대로, 휴대전화, 무선호출기, 고성능 컴퓨터 등의 통신 기기들이 많이 등장하였다. 특히 월드 와이드 웹의 등장은 세계인들의 삶을 획기적으로 바꾸어 '국경 없는 세계'를 만들어냈으나, 그 이면엔 불법사이트 범람, 미디어파일 저작권 문제, 짧은 디지털자료 수명 등 새로운 문제가 산재했다.

금융과 경제 영역에서의 세계화와 신자유주의화가 아주 활발히 진행되어 경제 장벽을 무너뜨려 약육강식이 지배하는 '경제 정글'을 만들어냈는데, 1993년 우루과이라운드 타결 및 1995년 세계무역기구 출범이 대표적이었다. 미국은 이런 환경에서 아주 극적인 경제 성장을 이룰 수 있었다. 물론 중남미 지역은 그런거 없었다. 게다가 구미권은 이에 그치지 않고 전세계 경제체제를 미국/유럽식 경제체제로 포맷시키도록 만드는 데 앞장섰고, 이에 따라 '아시아의 네 마리 용' 처럼 현지 특화 자본주의나 독자적 경제체제는 통하지 않게 되었다. 그런 연유로 1997년 동남아 경제위기 및 한국 외환위기가 터졌다. 심지어 새천년을 앞두고 세계 도처에서 '반세계화 시위'도 터졌다.

신자유주의를 앞세운 보수주의가 정국을 주도했던 1980년대와 달리 전세계적으로 ‘신진보주의(신자유주의를 가미한 진보)’의 시대였다. 빌 클린턴토니 블레어가 대표적으로, 1990년대 말 유럽은 대부분 제3의 길 성향의 사민주의 정권이 집권했다. 이른바 ‘장밋빛 유럽’. 다른 한편으로 서구권 등 선진국에서 젊은 층을 중심으로 '정치적 올바름(PC)' 운동이 처음으로 정치권의 주류에 진입해, 일본 자민당, 이탈리아 줄리아노 아마토 내각 등 부패정권을 투표로서 몰아냈고, 미국에선 빌 클린턴 정부의 주도로 '흑인(Black)'을 '아프리카계 미국인(African American)'으로 바꾸기도 했다.사실상 오바마 등장의 최대 지원자[3]

그러나 유럽 경제는 점차 문제점을 드러내기 시작했는데, 북유럽 국가들 중 냉전의 수혜자였던 핀란드가 소련 붕괴로 경제불황을 겪었고, 스웨덴도 마찬가지로 어려움을 겪었다. 서유럽 선진국조차도 과도한 복지비용, 강성 노조, 실업률 증가, 공장 해외이전 등 문제점이 폭로되며 개혁의 목소리가 높아져갔다.

북한은 1990년대 초 소련 등 공산주의 정권 붕괴에도 나라 문을 단단히 닫고 살았고, 1992년 IAEA 핵사찰을 받아들인 후 처음으로 핵개발 의혹이 불거졌다. 1994년 반세기 가까이 집권하던 김일성심장마비로 사망하고, 김정일이 뒤를 이어 1997년 정식 집권 전까지 '유훈통치'란 비정상적 체제로 돌입했다. 하지만 동구권 붕괴와 제3차 7개년 계획 실패, 각종 자연재해, 수교국 감소 등으로 인한 경제난으로 고난의 행군이 시작되어 중국과 러시아 파견 노동자를 통한 본격적인 북한 주민의 이탈이 시작됐다.

한국뿐만이 아니라 태국을 시작으로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필리핀 등을 습격한 아시아 금융위기로 인도네시아에서는 30년간 집권한 수하르토 정권이 퇴진하였고, 1999년에 동티모르가 국민 투표로서 독립을 선언하는 단초를 마련했다. 말레이시아는 외환위기를 헤지펀드 등 해외 금융업계의 농간이라 보고 해외 금융자본을 철저히 봉쇄했다.

그 외에 미얀마나 라오스 등 몇몇 국가들을 빼고 '민주화와 평화' 진전의 시대가 도래했는데, 필리핀은 1992년 피델 V. 라모스 전 국방장관이 첫 자유선거로 대통령에 취임해 공산당을 합법화시켜 내전 종식의 기반을 마련했고, 마르코스 독재 때 무너진 경제 재건에 주력했다. 태국 국민들은 1992년 5월에 목숨까지 걸고 수친다 내각을 퇴진시켜 군부정권을 60년 만에 종식시켰고, 캄보디아는 1993년 UN 감독 하에 독립 이래 최초로 자유선거를 치뤄 입헌군주국으로 회귀 후 50여 년에 걸친 내전을 종식시켜 '킬링필드' 이미지를 벗었다.

해체된 구소련 지역에게는 그야말로 헬게이트의 시대였다. 체제전환의 진통과 외국 자본 및 재벌들의 약탈에 나라는 만신창이가 되었고, 유럽 연합에 편입되어 구제를 받을 수 있었던 발트 3국조차도 정치 및 경제적으로 엄청난 고생을 하였다. 1인당 국민소득이 9천 달러에 육박하던 러시아권의 경제는 이 시기 바닥을 찍게 되었으며, 2000년 푸틴의 집권으로 그나마 상승세를 그리는 중. 그러나 그 사이에 세력권은 쪼그라들었고 경제는 만신창이가 되었으며 인구는 줄었다.

구소련에 속했던 나라들 말고도 공산권에 속했던 여러 나라들은 사회주의에서 자본주의로 체질개선을 하느라 여러 성장통을 겪어야만 했다. 체코슬로바키아는 그래도 비교적 그 정도가 덜한 편이었지만, 역시 힘들었고, 폴란드도 심한 경기 부침을 겪어야 했다. 내전까지 간 유고슬라비아는 전술한 대로 폐쇄적 민족주의가 기승을 부려 1991년부터 1999년까지 1990년대 내내 전쟁터였던 셈이다. 심지어 쿠바도 1995년 보트피플 사태까지 터졌다. 냉전 시기 중립을 유지해 소득을 챙겼던 스위스와 핀란드도 혼란과 경제위기로 몰아닥쳤다.

반면 아프리카는 이 시기를 즈음해 '폐쇄적 민족주의'가 기승을 부리며 소말리아, 르완다, 라이베리아, 콩고민주공화국, 앙골라 등을 비롯해 내전이 일어나면서 지옥이 되어가기 시작한다. 부족전쟁이 주 원인인데[4] 그나마 이건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소강상태로 접어들지만 적대 관계를 청산한 것은 아니다. 북쪽에서 진짜 무시무시한 폭풍이 몰려오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한편 중국장쩌민의 3세대 지도부 하에서 급속도로 성장하기 시작했는데, 이미 이 시기에 중국의 초강대국화가 예고되었다. 다만 지금만큼 커진 건 10년 정도 앞당겨진 결과이다.

이 시대의 주를 이룬 학창세대는 아마 윾신 태생1972년생 ~ [5]1993년생까지일 것이다.

1.1. 1990년대의 대한민국: 에서 으로

대한민국에서는 1988년 서울 올림픽의 성공적 개최로 세계에 위상을 떨치는 데 성공하였고, 사회적으로도 독재 시대의 종식과 1990년대 중반까지 이어지는 장및빛 경제 등으로 인해 대체로 반은 ‘좋은 시절’로 기억되는 경향이 많지만. 하지만 동시에 성수대교 붕괴사고, 아현동 도시가스 폭발 사고, 삼풍백화점 붕괴사고 등의 여러 인재(人災)로 인한 참극이 잇달아 일어났던 시기이기도 하다.
Seoul MyeongDong 1993 서울 명동거리.[6]

경제적으로는 1980년대의 경제최대 호황기와 1986~89년의 삼저호황(저유가, 저환율, 저금리)의 달콤한 열매의 효과가 1988년 이후부터 시들어지긴 했지만[7] 후광은 1990년대 중반까지는 갔으므로 장및빛 경제를 예상하는 현상이 높았다. 또 한국에서 가장 인구가 많은 구간인 베이비붐 세대 386세대가 이미 결혼도 하고 어느 정도 아이들도 성장한 상태로서(물론 1965년 이후 386 후반생들은 제외) 본격적인 경제 활동을 하면서 어느 때보다 보기 힘들었던 소비의 규모가 커졌으며 샐러리맨 월급이 처음으로 백만 원을 넘어섰다 1995년에 1인당 GDP 1만 달러를 돌파해 염원하던 국민소득 만 불(萬弗) 시대에 접어 들었고[8] 1995년에는 국내총생산 세계 11위를 차지하였으며 1996년에는 일본에 이어 아시아에서 두 번째로 OECD 회원국이 되었다. 물론 명목상 달러화 기준으로 한국의 소득수준은 여전히 전통적인 의 비해 40~ 60% 수준이었지만 80년대 20 ~30%대 소득 수준에 비하면 상당히 빠른 속도로 따라잡았다.

또한 1980년대 중후반부터 1990년대 초반 당시에 사회문제점으로 꼽혔던 부동산 가격의 폭발적인 상승도 1991년을 정점으로 1기 신도시 분양 및 토지 공개념 3법으로 대표되는 부동산 값 억제정책으로 하락세로 접어들었고 이후로 부동산 가격이 90년대 내내 안정세를 보였던데 반해 소득증가율은 두자릿수대를 유지했기 때문에 소득이 오르면 곧바로 소비 및 저축의 증가로 이어지는 선순환 과정을 거쳤으며 1990년대 환율은 1달러=700~800원대를 선점해(1981년에 1달러에 600~700원 하던 수준의 환율을 경제적 호황의 후광으로 1990년 중반까지 700~850원 사이를 왔다갔다하면서 유지해옴) 소비자물가지수가 1994년을 제외하면 OECD 평균을 밑도는 정도로 굉장히 안정되었고 서민들의 생활비 부담도 적었던 시절이다. 또 1970년대부터 증가하기 시작한 중산층이 1980년대는 더욱 두터워졌으며 이 층들이 1990년 중반까지도 유지해 당시 자기가 중산층이라고 대답한 사람이 70%가 넘었다.(이 수치도 IMF이후로 확 줄어든다.) 하지만 지나친 저환율 정책으로 인해 경상수지 적자는 1990년 이래로(1993년에 소폭의 흑자를 낸 것을 제외하면) 매년 적자를 기록했으며 1997년부터 외환보유고는 점점 바닥이 나고 있다가 1997년 말 외환위기가 발생하는데... 그 파장으로 수많은 기업들이 도산하고 하루 아침에 수십만 명의 실업자가 양산되었으며 환율은 급속도로 올라가 1996년 13,137달러였던 1인당 국민소득은 1998년에는 8,083달러로 떨어졌다가 마지막 해인 1999년에 10,410달러로 소폭 증가로 마무리했다.

문화적으로는 이 시기의 청소년과 대학생들은 1980년대의 이념적인 면에서 탈피하여 자유로운 사고를 했으며, 특히 이 시기에 등장한 X세대[9]는 개성을 중시하고 대중 문화에 열광하는 뭔가 모순되어보이는 모습을 보여주었다.[10] 그래서 음반시장도 세계 수위권에 들 정도가 되었다. 1980년대부터 시작된 전자/통신혁명은 더욱 세를 불려 위성방송, PC통신, 케이블TV, 인터넷 등으로 나타났으며, 더 나아가 1998년 사이버 가수 '아담' 및 사이버 작가 '새파란'을 탄생시키기도 했다.

여하튼 덕택에 학교 그러나 X세대는 주체적인 문화를 창조하기보다는 상업문화의 소비주체로 전락하며 사회의 질을 떨어뜨리는 데에 일조하였다는 비판 역시 공존한다.[11] 이 시대의 구호가 “서른 잔치는 끝났다.” 그렇지만 문화적으로 자유로워졌다고 하지만, 훨씬 이전부터 존재했던 문제인 과도한 사교육 문제나 학생인권 침해는 이 시대에도 별반 다를 건 없고 오히려 일부 부문에서 악화되기까지 했다.

우선 1986년에 교복의 부활이 이루어졌다고는 하지만 일단 1990년대 초반까지는 교복을 착용하지 않는 학교를 심심치 않게 볼 수 있었던 데 반하여 1990년대 초반부터 교복이 대부분의 학교에서 부활하면서 교복을 지정하지 않은 학교를 찾아보기 힘들 지경이 되었고,[12] 학교에서 빠따 같은 것이 잘만 돌아다니고 야간자율학습이 적용된 건 마찬가지였으며 방과후 학원 혹은 학습지 여러 개 시키기, 선행학습 등의 사교육도 1990년대에도 변함없이 진행되었으며[13], 경제력의 향상과 더불어 사교육비는 지속적으로 향상되었기 때문에 사교육비 문제가 엄청난 사회적 문제가 되어갔다. 이에 대한 안티테제로 '대안교육' 및 '공동체교육'이 확산됐다.

교과 내용 면에서 변화가 좀 있었는데, 1994년 '국민교육헌장'이 교과서 앞표지에서 사라지고 고교 교련교과 중 군사훈련 부분이 사라졌으며, 국사 교과서에서도 5.16 군사혁명이 '군사정변', 4.19 의거가 '혁명' 등으로 각각 바뀌었다. 1997년부터 반공소년 이승복 이야기도 도덕 교과서에서 빠졌다. 그러나 국어 교과서에 월북 문인 해금작품이나 재야 문인 작품 등은 싣지 않았고, 국사 역시 좌익 항일투쟁 등은 일절 다루지 않았다.

노태우 정권기 탄압받았던 전교조도 문민정부 때도 지속됐으나 합법화가 안 되어 여전히 정부와 대립했다. 그러나 1994년 정부가 전교조 해직교사 1,490명 중 1,329명을 복직해 새 전기를 맞이했는데, 이들은 전교조 탈퇴를 전제로 복직이 됐지만, 여전히 해직까지 감수하며 전교조 활동을 지속했다. 1998년 김대중 정부 출범 후 노사정 합의를 거쳐 1999년 교원노조법 제정에 따라 합법화됐다.

1980년대 후반 '참교육 운동' 때 성행하던 고등학생운동도 1990년대 초반 들어 정부와 학교의 탄압으로 직선제 자주학생회도, 동아리도 급속히 와해되어 교내에서 더 이상 활동할 수 없었다. 이에 불구하고 비공개 조직들을 중심으로 소규모나마 활동하긴 했다. 반면 고운 1세대들은 졸업 후 1991년 관악지역 청소년운동단체 '참배움일꾼청소년회(참일청)'을 시초로 1990년대 초반 동안 '청소년단체 샘', '푸른벗' 등 지역 청소년조직이 발족돼 문화활동을 하며 정치/사회투쟁을 했지만, 1994년 주사파 파동 시기 '청소년단체 샘 사건', '<새날열기> 사건' 등 공안사건이 터져 정치적인 고등학생운동이 와해됐다.

그러나 1995년 춘천고 학생 최우주가 강제자율학습 및 보충수업 폐지 민원을 청와대, 교육부, 강원도교육청 등에 올리고 관련 글을 하이텔에 게시하면서 학생 개인의 인권침해 문제와 입시교육, 교육구조 문제 등이 PC통신 토론방의 주 화제로 떠올랐다. 이러한 움직임으로 하이텔에 '중고등학생복지회'가 결성돼 '청소년 인권운동'이 탄생했다. 초기 학복회를 중심으로 한 온라인 청소년 인권운동은 활동방향 및 지속성에 난항을 겪었고, 단체 자체가 언론에 알려짐에 따라 학교측의 탄압도 가중됐다. 1998년 교육부가 세계인권선언 50주년을 맞이해 '학생인권선언'을 제정했지만 학생 및 일선 교사가 배제된 모호한 조항이라 흐지부지됐고, 11월 3일 나우누리 및 하이텔 학복회가 '중고등학생인권선언'을 발표했다.

다만 2010년대 현재와 비교하면 1990년대의 문화 및 사회풍토는 지금에 비해 여전히 보수적인 면이 많았고, 촌지, 주6일 근무+야근이나 갑을 문제, 여성 혐오, 남아선호사상으로 인한 유소년층의 성비불균형, 장애인과 성소수자, 외국인 노동자 차별 같은 사회부조리들도 여러모로 강했기도 했다. 부분적으로 현재 진행형이다. 특히 IMF 외환위기 이전은 '단군 이래의 최대 호황'이라는 표현이 회자되고 1인당 GDP가 1만 달러를 넘고 그 여세를 타서 OECD에 가입하는 데 성공을 거두었을 정도로 한국 경제가 부흥하고 있던 시기였지만 그러면서도 점진적으로 진보화되었기는 했지만 사회적으로 보수적인 경향이 여전히 강했고 단군이래 최대호황기라고 불리던 시기라 해도 이전시기부터 지속적으로 이루워진 사회적인 부조리도 많았기도 했다. 개인주의는 2018년 현재는 특히 젊은 층 사이에서 조금씩 라이프스타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추세이지만, 당시만 하더라도 개인주의를 이기주의와 동급 취급 하면서 배척하려는 분위기가 여전히 어느 정도 있었고 당대 신문기사에서도 오렌지족이 어쩌니 하는 기사들도 많이 나왔으며 샴페인, 과소비 타령도 많이 나오기도 했다. 다만 신토불이가 강조되었던 것은 단순히 민족주의의 영향이라기는 어폐가 있고 당대 농촌이 인구감소와 저소득 문제, 수입 농산물 유입 등으로 지속적으로 지속적으로 황폐화되던 상황을 어떻게든 타개하려던 노력의 산물이었다.[14] 물론 결과적으로 보았을 때 농어촌 지역의 지속적인 황폐화를 막지 못한 채 아예 지방소멸 얘기까지 나올 지경이 되었지만 말이다.

한마디로 외환위기 전까지는 한국의 황금기이며 재미교포가 한국으로 일하러 오던 시대다. 명목상 경제지표는 2000년대 이후가 1990년대보다 더 성장했으나 이 당시의 희망찬 사회 분위기와 정서는 되돌리지 못하고 있다. 그렇다 보니 이는 단순히 물가 상승으로 인한 숫자 놀음이라는 평가도 많다.

1991년부터 외국인 노동자이 '산업연수생'이란 이름으로 입국이 허용되어 매년 수십만의 외노자들이 들어오고 불법체류자들도 대량 양산되는 계기가 되는데[15] 이는 1990년대 중반부터 국내노동자들의 임금 하향화의 원인이 되었다. 또한 1980년대의 호황취업경기도 1990년대 초반부터는 서서히 서늘해지기 시작한다. 결정적으로 1996년에는 노동법 날치기 통과로 '변형근로제'가 도입돼 1997년 외환 위기로 가속화되어서 비정규직이 급격히 늘어나기 시작했다.

대학교 입학률도 급격히 늘어나기 시작했으며, 대학교들도 전국에 우후죽순 생겨났다. 인구 분포에서도 청소년층이 줄고[16] 386세대 - X세대를 위시한 성인층이 급격히 증가하고 노년층도 급격히 증가하는 시기이기도 하다. 또한 대학진학률이 증가하였고[17] 상고와 공고를 천시하고 인문계를 중시하는 풍토가 만연하게 되고, '대학만능론'[18]은 2000~2010년대 이후 사회의 이 되고 있다.[19]

대한민국의 정치 분야로 들어가자면, 보스 정치, 3김 정치로 대표되는 시절로, 정당 간 정책대결은커녕 거물급 정치인들을 중심으로 하는 이합집산이 비일비재했었다. 그럼에도 문민정부하나회를 해체했고, 전임 대통령을 비자금 횡령 혐의로 감옥으로 보내버리는 등 군정의 잔재가 어느 정도 척결되는 등의 변화는 있었기는 했다.[20]

1990년대는 1970년대1980년대에 비해 정치적, 사회적으로 굵직한 '역사적'이라 할만한 사건은 많이 없었다. 물론 그와 별개로 1970-80년대 고도 성장기의 반작용(부실공사, 안전의식 부재) 격으로 벌어졌던 대형사고는 참 많이 일어났다. 사실 정치적으로 변동이 없었다고 보기에도 뭐한 게, 1990년 3당 합당 시기 이후부터 PK지역이 보수권으로 넘어가는 등의 변화는 엄연히 있었기 때문이다. 다만, 그 이전 시대에 비해 눈에 띄는 정치·사회적인 사건이 눈에 덜 띄었던 것은 사실이다.

박정희-전두환의 군사독재가 종식됨으로써 제6공화국 체제하의 형식적 민주주의가 확립되어 더 이상의 정치 체제상의 변동이 없을 뿐 아니라 공산권의 몰락과 북한과의 군사적 격차가 현저히 커짐에 따라 안보적 위기 역시 줄어들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1990년대는 한국인의 삶과 가치관이 가장 크게 변화된 시대였다고 할 수 있다. 안정된 민주주의와 경제적 풍요, 그리고 개인용 컴퓨터, 휴대전화 등의 정보기기 보급에 의한 정보기술의 발전 속에서 한국인들의 삶은 은밀히, 그러나 획기적으로 바뀌었다.

1980년대까지의 권위주의적이고 무거운 사회 분위기를 떨쳐내고 좀 더 다양하면서도 깃털처럼 가벼운 사회 분위기로 바뀌었다.[21] 더불어 경제적 풍요와 넘쳐나는 상품들 속에서 더 소비지향적인 분위기가 확산되었다. 사람들의 의식 역시도 좀 더 다양성에 대해 관대해지고 소비 트렌드에 민감해졌다.

1990년대는 1980년대까지의 대한민국과 단절하면서, 이후 시대인 밀레니엄 이후 시대의 모든 사회적 요소들의 맹아를 품고 있었던 시대이기도 하다. 21세기의 환상을 가지고 있었다. 예능, 아이돌, 한류, IT산업, 온라인 게임, 개인용 PC, 한국산 블록버스터, 핵가족, 휴대폰, 오타쿠, 엽기, 패러디, 해외여행 등등 오늘날 우리가 너무나 당연하게 여기는 무수한 문화 요소들이 모두 이 시대에 뚜렷하게 드러나기 시작했다. 즉, 한국의 새로운 시대를 연 시대라고 보아도 되겠다. 2000년 이후의 한국 사회는 사실상 1990년대의 연장선상에 가깝다. 그렇다 보니 2010년대에 30~40대에 접어든 세대는 2010년대의 10대~20대 문화에 잘 적응하는데 비해 50대 이상 세대에서는 적응을 못하는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이 시기 영상세대들은 메세지보다 이미지를, 활자보다 영상을, 편지보다 전자통신을 더 선호했다. 의사소통 매체는 유선전화 외에도 무선호출기, 휴대폰, PC통신 등으로 다양화됐고, 영상매체 발달 및 대중문화의 변화는 연예인 등 영상 스타들에 대한 열기를 불러일으켰으며, 신세대들 사이에 신체조건에 대한 과도한 집착이 나타났다. 영화배우나 TV 탤런트, 광고모델, 스포츠 스타들이 영상시대 최대 우상들이었고, 다이어트는 젊은 여성 뿐만 아니라 중년 여성, 그리고 남자들에게도 필수적 문제로 받아들여졌다.

영상문화의 열기는 X세대만 나타나는 현상이 아니었다. '애인 같은 아내'라 불리는 미시족의 등장과 그들의 현시적 문화 욕구가 중년층에게 파급되었다. 1996년 유동근-황신혜가 주연으로 나온 드라마 <애인>이 인기를 얻자 '애인과 배우자가 공존할 수 있다'며 너도나도 애인 열풍에 휩싸였다. 성에 대한 과도한 집착도 여기에 연계돼 있었다.

뿐만 아니라 운동권[22], 절대적 빈곤 등 이전 시대의 산물들이 확실하게 몰락해 버렸으며, UN에 가입하고 경제적 수혜국에서 지원국으로 지위가 바뀌는 등 국제적 위상도 올라갔다.

1997년 외환위기 사태 당시의 분위기 역시 오늘날 2010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사고방식에 큰 영향을 미쳤다. 바로 더 이상 한국이 무한히 성장하기만 하는 국가가 아닐 것이라는 자각, 무절제한 소비에 대한 경각심, 그리고 기업과 국가의 경제가 제대로된 운용에 실패할 수도 있다는 우려 등이다.[23]

이를 종합해 볼 때, 언론학자 강준만 교수는 2006년 낸 <한국 현대사 산책> 1990년대편 1권 머릿말에서 이 시기를 '이념에서 소비로 넘어가는 시기'라고 정의했다.

1.2. 1990년대의 미국: 20's 시즌 2

1990년 독일이 공식적으로 통일되고 이듬 해 소련을 비롯한 공산권 국가들의 연쇄적인 붕괴가 시작되면서 말 그대로, 미국이 세계 유일 초강대국 위치에 등극함과 동시에 빌 클린턴 정부가 들어서면서 경제적으로 상당한 호황을 누린 시기이도 하며 이는 아래의 다우 존스 지수 그래프를 통해 그 추세를 확인할 수 있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Dow_jones.png
1990년대의 미국은 종종, 제1차 세계 대전의 승전 직후인 1920년대와 비견되기도 하며, 두 시대는 많은 유사성을 보인다. 다만, 1920년대는 미국이 세계의 유일의 초 강대국이 아니었고, 패권 국가들 중의 하나로 올라서게 된 시기였지만, 1990년대는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약 50여 년간 지루하게 대결해 왔던 소련 및 동구권의 붕괴를 지켜보며 미국이 1극의 국가로 등장하게 되었으므로 대개 1920년대보다 1990년대를 더 화려하게 보는 경향[24]이 짙다.

1990년 이후, 중국이 G2로 떠오르기 전까지 약 20년간은 세계의 정세를 미국이 자유자재로 통제 가능했던 시기였으며, 이라크 전쟁2008년 세계 금융 위기를 겪은 이후부터 현재까지도 군사력 세계 1위이다.

1.3. 1990년대의 일본: 잃어버린 10년

1990 - Yokohama Walkabout 横浜散歩 (901208)
파일:일본주식.png
(1988년~2010년)일본의 주식 시장 흐름
일본잃어버린 10년으로 더 이상 호황을 누리지는 못하게 되었다.
파일:일본부동산.gif
(1980년~2010년)일본의 주택 시세 흐름
1990년대 일본의 부동산 폭락은 매우 유명한 거품붕괴의 선례가 되었다.

1990년, 일본은 주식부동산 거품이 꺼지면서 10년간의 장기불황에 접어든다. 많은 기업과 은행이 도산했고 평균 성장률은 0%에 달했다.
이웃 나라 이야기 2부 필패신화

해당 시기를 일본인들은 잃어버린 10년이라 칭한다. 이 불황은 2010년대까지도 지속되어 잃어버린 20년 또는 잃어버린 30년라는 명칭으로 대체되었다.
1.경기부양 2.부동산 거품 양산 3.거품 붕괴 4.경기 침체/1번 경기부양으로 무한 반복

이후 일부 경제학자들이나 관련 전문가들은 1990년대 일본의 부동산, 주식 폭락을 예로 들면서 경기 부양으로 인한 거품양산과 그로 인한 거품붕괴, 침체의 사이클에 대하여 설파하게 된다.[25] 만화가 이원복 교수는 <먼나라 이웃나라> 일본편 1권에서 1990년대 일본 암흑기 형성 원인으로 경직된 관료주의, 정경유착으로 인한 부정부패, 고품질로 인한 고비용, 낮은 소비율, 연공서열 및 종신고용제의 폐해 등 후진국적 요소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1980~1989)일본과 주요 국가의 명목 GDP 흐름[26]1990년1991년1992년1993년1994년1995년1996년1997년1998년1999년
단위: 10억 달러(약 1조 원)
미국 전체 명목 GDP 5,979 6,174 6,539 6,878 7,308 7,664 8,100 8,608 9,089 9,660
일본 전체 명목 GDP 3,103 3,536 3,852 4,414 4,850 5,333 4,706 4,324 3,914 4,432
독일 전체 명목 GDP 1,547 1,815 2,068 2,008 2,152 2,525 2,437 2,159 2,181 2,133
프랑스 전체 명목 GDP 1,278 1,279 1,411 1,331 1,404 1,610 1,614 1,462 1,512 1,502
영국 전체 명목 GDP 1,024 1,069 1,112 998 1,080 1,181 1,243 1,384 1,477 1,518
중국 전체 명목 GDP 404 424 499 641 582 756 892 985 1,045 1,100
대한민국 전체 명목 GDP 284 332 356 391 458 559 603 560 376 486

일본은 성장 동력이 꺾여 오히려 경제규모가 줄어든 연도(1996년, 1997년, 1998년)도 있었던 시기다. 그래도 거시경제면으로 바라보면 경제의 규모는 여전히 세계2위였다. 하지만 미국과의 격차는 점차 고착화되었으며 미약하지만 차이가 벌어졌다. 게다가 유럽 국가들이 조금씩 일본을 추격하고 있었으며 한국과 중국도 경제 성장기에 접어든다. 그렇다고 국민들로부터 개혁하자는 목소리가 있지만, 보수 기득권층과 경직된 관료주의로 난항을 겪었다.

정치적으로는 변화에서 회귀로 대변되는 시기인데, 만년 여당 자민당은 1991년 교와 스캔들, 1992년 사가와규빈 스캔들까지 각각 터져 국민들의 신임을 잃었다. 이에 일부 자민당 의원들이 신생당, 일본신당, 신당사키가케 같은 신당들을 만들어 공산당을 뺀 타 야당과 연합했고, 1993년 7월 총선에서 자민당을 쓰러뜨려 정권을 잡아 호소카와 모리히로 중심 연립정권을 수립했다. 그러나 연립정권이 1년도 못 가 무너져 1994년 자민당이 사회민주당과 연합정권을 수립해 혼미상태로 접어들었고, 1996년 하시모토 류타로 총리 집권 후 자민당 독주체제로 자리잡았다.

사회 면에선 1995년은 비극의 해였는데, 고베 대지진으로 충격을 준 데 이어 옴진리교 사린가스 살포사건, 쿠니미츠 경찰청장 피습 사건으로 '안전 신화'가 무너졌다는 평을 받기도 했다.

2. 문화

2.1. 출판계

1980년대 후반까지 우위를 점하던 이념서적은 1990년 동구권 및 소련 붕괴, 1993년 문민정부 출범 등으로 쇠락해 출판계도 가벼움, 일상성, 구체성을 지향하는 쪽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주류인 문예물은 순수 문예물보다 대중성을 지향하는 쪽으로 나아가게 됐는데, 김진명의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나 이우혁의 <퇴마록> 같은 가공소설이 베스트셀러로 등극했다. 또 양귀자 역시 정통 문예물에서 벗어난 <천년의 사랑>을 내기도 했다. 정통 작가들 중 이청준도 <서편제>나 <축제>가 영화화되면서 또다시 전성기를 맞이했고, 박경리의 <토지>, 조정래의 <태백산맥> 및 <아리랑>도 여전히 호응을 얻었다. 시 분야에선 정호승의 <사랑하다가 죽어버려라>나 최영미 작품 <서른, 잔치는 끝났다>가 호응을 받기도 했다. 심지어 류시화 작품 <외눈박이 물고기의 사랑>은 문단들의 외면 속에서도 베스트셀러 지위를 유지했다.

1980년대 후반부터 성행한 에세이, 전기류, 신변잡기류 등 '비소설 부문'도 여전히 인기를 구가하고 있었다. 1995년 전여옥 작 <일본은 없다>가 히트치면서 한동안 책 제목에까지 '있다'나 '없다' 붐을 형성시키기도 했고, 1996년 경기불황 속에서도 <좀머 씨 이야기> 같이 여유와 잔잔함을 추구하는 책도 인기를 얻었다. 1997년 외환위기를 즈음해 '몇 가지'류 책들이 성행하기도 했다. 이러한 비소설류는 영상문화 도래 및 감성세대 등장, 불황으로 기성소설에 무거움을 느끼는 사람들에게 청량제가 되어 주었다.

심지어 개인용 컴퓨터 보급과 1994년 세계화 선언, 해외여행 붐 등의 영향으로 <컴퓨터 길라잡이> 류 컴퓨터 관련 도서나 <꼬리에 꼬리를 무는 영어> 등 어학도서, 여행/관광/레저스포츠 등 여가 관련 도서도 날개 돋친 듯 팔렸다. 거기에 퇴조할 것처럼 보였던 인문/사회교양계도 1994년 유홍준 교수 저서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히트로 활기를 되찾았고, 당시 사람들도 풍요로운 현대 속에서 과거를 돌아보자는 경향에 따라 박영규 저서 <한권으로 보는 조선왕조실록> 등 새로운 인문교양서가 뜨기도 했다.

출판물은 날로 꾸준히 늘어나는데도 출판사 경영실태는 영세성을 벗어나지 못했다. 1993년 기준 등록출판사 수는 총 8,380개이나, 1년 동안 한 권도 내지 않은 무실적 출판사만 5,708개로, 전체 출판사 중 60%에 이르렀다. 발행 실적있는 출판사도 연평균 3.7종이며 체제/제도적 측면에선 낙후성을 못 벗어났다. 1995년부터 영상매체 발달과 식상한 기획, 독서보다 해외여행으로 외양을 다지는 대중들의 생활패턴에도 영향을 미쳐 출판계가 불황에 빠졌고, 1997년 3월 고려원 부도를 시초로 서적도매상이 서서히 부도나 출판 기반까지 위협했다. 이에 출판계도 김대중 정부에 긴급지원을 요청하며 자구책을 마련했다. 트렌드도 IMF 여파로 점차 달라져, 1998년 들어 주로 경제서적이 많이 출판되고 정영진의 <청년 박정희>나 이인화의 <인간의 길>, 조갑제의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 등 박정희 관련 서적이 상당수 나왔다. 이 와중에 김진명 소설 <하늘이여 땅이여>와 이우혁의 <왜란종결자> 등도 베스트셀러에 올랐다.

1999년 들어 독일 베텔스만 사가 외국 출판사로서 한국에 처음 진출했고, '예스24'나 '알라딘' 등 인터넷 서적쇼핑몰이 문을 엶으로서 온라인 책 판매가 활기를 띠었다. 당년도 출판계에선 '101가지 이야기'나 'XX하지 마라' 같은 명상서/수행서가 인기를 끌었는데, <영어공부 절대로 하자 마라>나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 <무소유>, <풍경>, <만행> 등이 대표적이었다.

2.2. 문학

1980년대 후반 ~ 1990년대 초반에 걸친 변혁기를 지나 그 열기가 가라앉으면서 한국 문학은 한동한 방향감각을 상실했다. 이에 따라 민중/노동문학이 쇠퇴하고 개인적 일상과 삶의 의식에 따른 내면추구와 탈정치화가 대세가 됐다. 이러한 변화/모색 과정에서 가장 선풍을 일으킨 건 1994년 최영미 작가의 시집 <서른, 잔치는 끝났다>였는데, 최영미 자신도 운동권 출신이었지만 경직된 이념과 사회성에 얽매이지 않고 감각적 언어와 내밀한 고백체로 엮어 문단계에 돌풍을 일으켜 '최영미 신드롬'으로 호평받았지만, 운동권과 일부 평론가로부터 "운동의 패배주의를 확산시키고 상업성에 영합했다"고 매몰차게 비판을 가했다. 이런 시대적 상황으로 '후일담 문학'이란 말이 유행했는데, 이 말은 평론가 김윤식 교수가 공지영, 박일문, 김영현 등의 작품들을 평하면서 처음 쓰기 시작했고, 해당 문학은 운동의 중심 및 분류, 실제 과정보다 운동권 주변 및 운동권들의 후일담을 다룬 것이다.

위와 같은 모색기를 지나 신경숙을 비롯해 공지영, 윤대녕, 김소진, 구효서, 은희경 , 공선옥, 김인숙, 이청해, 채영주 등 '30대 신진 작가'들의 활동이 크게 주목을 받았고, 조정래도 <태백산맥>에 이어 <아리랑>, <한강> 등을 내며 건재를 과시했다. 그 외에 송기숙, 한승원, 한수산, 이청준, 홍성원, 최인훈, 최명희, 김남일, 김주영, 이순원 등 중진 작가들 역시 꾸준히 창작활동을 전개했다. 그러나 소설과 달리 시는 꾸준한 창작활동에도 불구하고 대중적 호응이 떨어져 침체기를 겪었고, 이념/사회성 대신 문명 비판적인 환경시 및 생명시 등 신서정시가 강세를 뚜렷이 나타냈다. 특히 미당 서정주, 고은, 구상, 조병화, 황동규, 정현종, 김지하, 김혜숙, 허영자, 김후란 등 원로/중진들의 시에서 더 큰 경향을 드러냈으며, 일부 신인들에게도 이러한 경향을 나타냈다. 그 외에도 곽재구가 <첫눈>, 전영애가 <카프카, 나의 카프카>, 정호승이 <사랑하다가 죽어버려라>를 내는 등 여전히 건재를 과시했다. 같은 시기 이종록, 신정숙, 임후성, 서림 등 참신한 감수성을 지닌 신세대 시인들의 활약도 흥미를 더했고, 진보 문인 박노해, 백무산, 박영근 등은 1980년대식 급진성 대신 차분하게 삶을 응시하는 쪽으로 변화해갔다.

1990년대 들어 개방화/자유화가 진행되는 와중에 문단계에서 '표현의 자유' 문제가 더욱 부각을 받았다. 1992년 <즐거운 사라> 작가 마광수 교수, 1997년 <내게 거짓말을 해봐> 작가 장정일이 음란문서 제조죄로 각각 법정구속되었다. 특히 장정일은 성에 대한 사회의 이중적 태도를 비판코자 했으나 공안의 잣대에 걸렸고, '표현의 자유'는 여전히 사법적 판단 대상이었다. 그리고 진보 문인에 대한 법정구속도 여전해 1993년 황석영, 1996년 김하기가 각각 국가보안법 위반혐의로 감옥에 갔고, 소설가 조정래도 <태백산맥> 이념시비 때문에 1994년부터 11년간 법적 갈등에 돌입하게 됐다. 1996년 이문열 작가가 페미니즘이나 여성을 부정적으로 바라본 <선택>을 내면서 큰 파문을 일으켰다.

1998년 들어선 IMF 여파로 문학계에도 안 좋은 영향을 미쳤다. 고학력 주부 및 사무직 여성이 독자층에서 대거 이탈해 시는 거의 빈사 상태였고, 소설 역시 시장이 위축됐다. 그러한 상황 속에서도 이혜경 창작소설집 <그날에>나 이치은 장편소설 <권태로운 자들> / <소파씨의 아파트에 모이다> 등 양질의 작품이 나왔고, 대중소설 쪽으로 전환한 양귀자의 <모순>도 베스트셀러 대열에 합류했다. 이어 박완서, 은희경, 공지영, 김형경, 신경숙 등도 시대적 욕망을 반영한 작품들을 내놨다.

1999년 문학계는 영상매체 확장에 따른 위기감이 확산되는 중에 새 돌파구를 마련하지 못했다. 20~30대 청년작가군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경향의 완성도 높은 작품이 무수히 나왔지만 문학계 전반은 사회적 파장을 지닐 만한 뜨거운 논쟁이나 새 세기를 준비하는 움직임은 없었다. 위와 같은 어려움 속에서도 <검은 이야기 사슬> 등을 낸 정영문, <청동거울을 찾아라>의 민경현, <엘리베이터에 낀 그 남자는 어떻게 되었나>의 김영하 등 독특한 상상력을 지닌 신예 작가들의 활약이 돋보였고, 강석경의 <내 안의 깊은 계단>, 최인석 창작집 <나의 사랑 나의 귀신>, 이경자 장편소설 <정은 늙지도 않아> 등도 하반기 독서시장에서 화제를 일으켰다. 또 당년도 베스트셀러는 말 그대로 '여인천하' 였는데, 신경숙의 <기차는 7시에 떠나네>가 28만 권을 기록한 걸 비롯해 은희경 창작집 <행복한 사람은 시계를 보지 않는다>가 18만 권, 전경린 장편소설 <내 생애에 꼭 하나뿐일 특별한 날> 및 공지영 창작집 <존재는 눈물을 흘린다>가 각각 11만 권을 돌파했다. 반면 시집은 황지우의 <어느날 나는 흐린 주점에 앉아 있을 거다>가 8만 5천 권을 기록했다.

반면 판타지 소설계는 이우혁의 <퇴마록>이 히트한 후 1998년부터 사이버 공간을 벗어나 서점에까지 큰 반향을 일으켰고, 1999년 들어 상업적 성공으로 문학출판 시장에서 주목할 만한 현상으로 떠올랐다. 이 즈음 이영도의 <드래곤라자> 등이 50만 부 이상의 판매고를 올리며 히트했다. 또 문화관광부는 1999년 문예진흥원을 통해 외환위기 이후 생활고를 겪는 문인들을 위해 상/하반기 걸쳐 지원금 10억 원씩을 보탰다.

1999년 문학계에 새로 불거진 이슈는 바로 <문학과 사회> 및 <문학동네> 등 유력 문학계간지들이 겪은 '문학권력 논쟁'이었다. 김정란 시인은 <인물과 사상> 12권 기고문 '그들의 문학 - 그 치명적 얽힘: 권성우, 고종석의 글에 대한 발론'에서 <문학동네>를 "특정 언론매체와 결탁한 상업주의의 온상"이라 비판했고, 권성우 등도 <문예중앙> 여름호에서 <문학과 사회>에 대해 "특정 학연 등을 중심으로 한 문학계의 권력집단"이라 질타했다.

2.3. 음악

2.3.1. 서양 음악

1990년대를 평정했던 음악은 흑인음악이다. 마이클 잭슨이 1980년대에 음악계에서 흑인의 장벽을 깨부순 이후 그동안 인기는 있었으나 상대적으로 묻히는 음악이었던 힙합은 'Golden Era'라 불리는 시대를 맞아 스눕 독, 2pac노토리어스 B.I.G.으로 대표되는 황금기가 시작됐으며, 갱스터 랩이 힙합 문화에서도 우위를 점했다. 이러한 흐름을 타고 힙합 문화가 한국에도 수입되어서 한국 힙합씬이 태동하기 시작하였다.

또한 수많은 R&B가수들이 탄생해 대중음악과 결합하였다. 그전까지는 대중음악과 거리가 멀었던 R&B음악들이 휘트니 휴스턴, 머라이어 캐리, 셀린 디옹의 3대 디바와 보이즈 투 멘, 마이클 볼튼 등의 남성가수들에 의해서 팝과 일체화 되었고 본격적인 대중음악의 절정기를 만들어내었다.

록 음악의 경우, 록 음악의 헤게모니가 하드 록에서 출발한 메탈 계열에서 펑크 록에서 출발한 얼터너티브 록로 완전히 돌아선 시기라고 할 수 있으며, 이 변화는 아직까지 유효하다. 얼터너티브 록 쪽에서 너바나의 <Nevermind>, 펄 잼의 <Ten> 등의 명반이 등장하였으며, 스매싱 펌킨스와 같은 그룹도 1990년대 초부터 후반까지 큰 인기를 끌었다. 그리고 얼터너티브 락은 현재까지도 락 씬을 주도하고 있다. 물론 1990년대 초반까지는 메탈의 기세도 여전히 등등해서 건즈 앤 로지스가 최고의 전성기를 누리고, 메탈리카Metallica를 발매하며 대중적 인기를 드높였다. 그러나 1990년대 초가 지나면서 메탈의 인기는 식어갔으며, 그나마 판테라 정도가 자존심을 지켰다. 하지만 오히려 노르웨이, 스웨덴등의 북유럽에서는 Darkthrone, Mayhem 같은 밴드의 블랙 메탈멜로딕 데스 메탈필두로 메탈이 얼터니티브와 관계없이 기세등등했다.

1990년대 중반에 오면 1980년대 끝무렵에 더 스미스, 스톤 로지스 등을 통해 비롯된 브릿팝 음악이 본격적으로 부상한다. 스웨이드를 시작으로 블러, 오아시스 등이 커다란 인기를 끌었으며, 라디오헤드는 1990년대 중후반 <The Bends>와 <OK Computer>라는 명반을 내놓음으로써 1990년대 록 음악을 집대성하고 'Radioheadism'이라는 음악 풍조를 탄생시키기까지 한다. 이는 2000년대 초반까지 이어져, 콜드플레이Muse, 엘보우, 과 같은 밴드들에게 영향을 준다.

일렉트로니카 음악이 이 시기에 매우 발전했다. 펫 샵 보이즈 류의 신스팝이나 테크노 등에 머무르던 일렉트로니카는 이 무렵 정말 다양한 스타일로 분화되게 된다. 프로디지, 케미컬 브라더스 등의 메가 히트 밴드들이 등장하였으며. 에이펙스 트윈은 비단 일렉트로니카만이 아닌 대중 문화 전반에 큰 흔적을 남겼다.

2.3.2. 한국 음악



대중음악계에선 음반의 100만 장 판매 시대가 본격적으로 시작됐고 200만 장이 넘게 팔리는 더블밀리언 앨범도 볼 수 있었다. 여러모로 음반판매량의 황금기나 다름없었던 시절이다. 이후 오프라인 음반시장은 ADSL의 보급으로 2000년에 정점을 찍었다.[27] 음반판매량에 있어서는 댄스와 발라드음악이 절대적으로 그 비중을 차지하던 시대였다. 따라서 힙합문화의 도입을 제외한다면 장르적 다양성은 차라리 1980년대가 나았다고 볼 수 있다. 물론 그럼에도 전람회, 015B와 같이 대학생들이 가요계에 데뷔하는 경우가 있었다.[28]

서태지와 아이들, 듀스, 김건모, 신승훈 등의 아티스트가 등장하였고, 서태지와 아이들의 경우 댄스, 랩 장르의 뮤직을 주류로 이끌었으며 기존 가요와 다른 파격적 시도들을 함으로써 명실공히 1990년대 한국 가요계의 아이콘으로 등극했다.

김건모, 신승훈 역시 각자의 장르[29]에서 걸출한 실력과 압도적인 위치를 뽐냈고 서태지 못지않은 인기와 히트곡들, 엄청난 상업성을 누리며 1990년대 한국 대중음악계의 3대장의 위치를 가졌다.

듀스는 1993년에 데뷔하여 매니아층을 만들었고 대표적 곡인 '여름안에서', '우리는' 등을 내놓고 인기를 누려가고 있었으나 1995년 11월 20일 김성재의 사망으로 이후 듀스는 중단되었다. 이현도가 미발표곡 등을 담은 <Deux Forever>라는 베스트 앨범을 끝으로 듀스는 해체되었다.

뮤직비디오 문화 등 '듣는 음악'에서 '보는 음악' 시대로 전환되기 시작한 것도 1990년대였다. 서태지가 음악이 아닌 비주얼적인 면에서도 세일즈 포인트가 있었기 때문에 한국에서도 본격적인 뮤직비디오 제작시장이 갖추어지기 시작하며, 이는 1995년 m.net이나 KMTV 같이 케이블 TV 시대를 맞아 생겨난 음악 채널들의 탄생과도 궤를 같이했다. 이전까지만 해도 한국 음악시장에서 뮤직비디오라고 할만한것은 없었으며, 토요일 토요일은 즐거워 같은 음악 쇼 프로그램에서 즉석무대를 갖춰주는 일종의 유사 뮤직비디오들이 그나마 갖출 수 있는 가수들의 비주얼 판촉수단이었다. [30][31] 이에 따라 가요 프로그램 립싱크도 무분별하게 증가하면서 '립싱크 논란'이 가요계나 음악 애호가들 사이에서 크게 제기되었다. 이로 인해 1997년 KBS2 <가요 톱10>이 립싱크 표시를 붙여 구분시키고, MBC <인기가요 베스트 50>이 국내 최초로 올 라이브 무대로 전환했다.

서태지와 아이들은 1992년에 데뷔하였고, '난 알아요', '하여가' 등을 내놓으며 승승장구했지만 1994년에 '교실이데아'라는 곡을 거꾸로 돌리니 '피가 모자라'가 들린다며 여론이 시끄러웠다. 그 뒤 그들은 'Come back home'으로 활동하며 '시대유감' 사전검열 문제에 저항하며 1990년대 대한민국 최고의 문화 아이콘으로 등극했고, 이들의 음악들은 한결같이 기성 가수들의 것과 달리 내용/형식 면에서 차별성과 독창성을 지녔고, 우리 사회 속의 온갖 억압적 요소들에 얽매인 청소년들에게 강렬한 감동을 주었다. 이후 서태지와 아이들은 '창작의 고통'을 이유로 1996년 1월 성균관 유림회관에서 은퇴 선언을 했고, 태지보이스를 따르던 벗들은 '서태지와 아이들 기념사업회(서기회)'란 비영리 문화단체를 세워 그의 자유와 도전정신을 기렸다.

그 이후부터는 서태지의 영향을 받은 H.O.T.를 필두로 한 1세대 아이돌 음악의 홍수가 시작되었으며, 심지어 'IDOL' 등과 같이 중~고등학생까지 가수판에 뛰어들기도 했다. 다만, 이들은 태지보이스만큼 독창성 및 대중화에 독특한 전략을 지니지 못했고, 초창기였던 만큼 일본과 영미권 음악산업을 데드 카피하는 악습의 잔재가 많이 남아있었고 이에 대한 비판 역시 직면했었다. 지금은 한류다 뭐다 해서 아이돌 음악의 위상이 나아지긴 했지만 이때는 현재와 같은 아이돌 문화가 걸음마를 떼던 단계였던지라 성숙하지는 않았던 셈이다.

1995년 홍대 일대의 클럽 드럭을 중심으로 펑크 록 위주의 인디문화가 태동하기 시작한다. 이듬해인 1996년 11월 기념비적인 앨범인 Our Nation Vol.1이 발매되고 '스트리트펑크쇼' 등을 통해 새로운 문화가 알려지기 시작한다.

민중 노래판에선 조국과 청춘, 꽃다지, 희망새, 천지인 등이 크게 활약했다. 특히 1992년부터 활동한 서총련 노래단 '조국과 청춘'은 종전 대학 노래패 단위 창작활동에서 '지역 대학생 노래단 중심'으로 바꾸는 데 일익했으며, 이들의 성공은 부경총련 '좋은친구', 경기남부총련 '천리마', 남총련 '한반도' 등 지역별 대학생 노래단 탄생에 자양분이 됐다. 또 '천지인'이라는 노래패는 민중가요 사상 최초로 락을 받아들이기도 했다. 그러나 1990년대 이래 신세대 열풍과 연세대 사태 등으로 민중가요의 영향력은 서서히 빛을 잃어 갔다.

일제 및 독재시기 산물이던 '음반 사전심의제도'에 대한 문제제기도 이때 이루어졌는데, 민중가수 정태춘-박은옥 부부가 1990년 <아, 대한민국...>, 1993년 <'92 장마, 종로에서>라는 두 음반을 사전심의 없이 냄에 따라 불법 딱지를 받은 데서 기인했다. 이에 그는 1993년 이후 음반 사전검열제를 타파키 위해 헌법재판소에 위헌제청을 하고 음비법 개정을 위해 국회 문공위 소속 의원들을 찾아다니는가 하면, 일반 국민 여론형성에도 힘을 기울였다. 1995년 서태지와 아이들 '시대유감 사건'을 계기로 기폭제가 되어 1996년 6월 7일 개정 음비법 시행에 따라 사전심의제가 사라졌고, 10월 헌법재판소가 위헌 판정했다.

국악/클래식계 입장에선 의미있는 시대였는데, 1993년 <서편제>의 성공으로 판소리에 관한 국민적 관심이 높아졌고, 국악계와 언론이 전통음악 전체로 눈을 쏠리게 만들면서 1994년을 '국악의 해'로 정하게끔 만들었고, 1994년 들어 국악의 해 외에 '동학농민운동 100주년' 및 '서울 정도 600주년', '중요 무형문화재 지정 30주년' 등이 맞물려 이를 기념하는 대형 행사 및 무대가 펼쳐졌고, 차이코프스키 콩쿠르에서 백혜선, 제니퍼 고, 엘린 문이 참가자 284명 중 3, 2, 4위를 각각 따내 큰 주목을 받았고, 바이올리니스트 줄리엣 강이 폴란드 비에니아프스키 콩쿠르, 첼리스트 장한나가 프랑스 파리 로스트로포비치 콩쿠르에서 각각 우승했다. 바이올리니스트 장영주도 미국 뉴욕 카네기홀에서 독주회를 열어 주목을 받았다.

1990년대 들어 조수미, 장영주, 정경화, 정명훈, 백건우, 백혜선, 신영옥, 홍혜경, 유진 박 등 해외파나 교포 스타들이 떠올랐고, 임헌정 부천필하모닉 상임지휘자 등 국내파도 떠올랐는데, 이들은 '세계화 시대의 도래'를 실감케 할 뿐더러 일부 계층만이 아닌 모든 대중들에게 사랑을 받은 게 당대 특이점이었다. 재야사학자 임영태의 견해에 의하면, 그 요인으로는 TV와 같은 영상 매체의 발달, 국민들의 국제화에 대한 의식 진전, 생활수준 향상에 따른 문화적 욕구 증진 등이 꼽힌다.

클래식 음반 중에선 1994년 조수미 1집 <새야 새야>가 히트를 치기 시작해 1996년 <디어 아마데우스>, <베스트 앨범> 등 2개 음반이 10위권 안에 들었다. 신영옥 앨범 <아베 마리아>가 발매 2달 만에 6만 장이나 팔려 1996년 12월 판매순위 1위에 올랐고, 장한나 데뷔앨범도 6만 장이나 팔려 1996년 국내 클래식 앨범 판매순위 10위권에 들었다.

1996년 국악계에선 가장 큰 성과로는 서울 서초동에 국악전용극장 '예악당'이 문을 연 걸 꼽을 수 있다. 9월 4일엔 서울 예술의전당 음악당에서 공연된 김덕수-안숙선 합동공연 <공감>은 제목에 걸맞게 관객들의 공감을 크게 불러일으켰다.

2.3.3. 일본 음악

일본도 한국과 비슷하게 다양한 장르들의 음악이 여럿 나왔으며, 음반 판매량이 최고를 기록하던 시기였다. 일본이 장기적 경제 불황에 빠져들었던 상황을 고려해보면 상당한 성과라고 볼 수 있는 부분. 물론 장기적 경기 침체가 오히려 음악과 같은 대중문화 소비를 늘렸다는 분석도 여럿 있다. Mr. Children, B'z, Spitz와 같은 록밴드들이나 시부야계 아티스트들이 크게 인기를 끌었으며 1980년대 후반부터 활동한 X JAPAN을 통해 비주얼계 록 음악도 성행했었다.

또한 에이벡스의 Super Eurobeat 시리즈가 컴필레이션 앨범의 딜레마와 한계를 딛고 오리콘 순위 상위권을 차지하고, 아무로 나미에V6유로비트 장르로 1990년대 중후반을 휩쓰는 등 유로비트도 약진했었다. 그리고 이는 2000년 5월에 발매되었던 슈퍼 유로비트 110집이 70만 장이라는 어마어마한 판매량과 오리콘차트 3주간 1위라는 엄청난 성과를 내게 되는 씨앗이 되었다.

2.4. 게임

콘솔 게임계에서는 1990년대 초중반엔 게임보이, 슈퍼패미컴, 메가드라이브, PC엔진 등의 16비트 콘솔 게임기가 본격적으로 등장하여 콘솔 전쟁이 1980년대보다 상당히 치열해지기 시작했다. 16비트 콘솔 싸움은 결과적으로 슈퍼패미컴이 승리하였지만 1980년대에 패미컴이 온갖 게임 시장을 장악하던 때를 생각하면 엄청나게 치열한 싸움이었다.

1990년대 초중반때만 해도 후반 때와는 달리 1980년대 전반의 게임들과 같은 선상에 있거나 약간 상위호환에 있는 편이였다. 실제로 1991년에 등장한 희대의 명작 스트리트 파이터 2의 등장이라는 어마어마하게 큰 사건을 제외하면 게임의 역사에서는 본격적으로 게임이 발달하기 시작한 1980년대 중반 때부터 1990년대 초중반까지를 같은 세대로 취급된다.

그러나 이것이 딱히 문제점인 것도 아니며 이때부터 게임이 점차 더 대중적으로 변모했기 때문에 1980년대 전반 게임들의 장점들과 스타일을 지니면서 더 대중적이고 더 세련된 모습을 보이게 되어 1990년대만의 특징을 부여하기도 했다.

1990년대 중후반부터 본격적으로 16비트에서 32비트로 넘어가기 시작한 5 콘솔 시대로, 이 시기에 비디오 게임의 비약적인 그래픽 상승 경향이 보이기 시작했다. PC에서는 둠 시리즈가 그래픽 혁명, 미스트 시리즈가 CDROM의 대용량 매체를 적극 활용한 인터랙티브 혁명을 이끌어 냈고, 콘솔 쪽에서는 32비트 게임기들이 보다 제대로 된 폴리곤 그래픽 지원과 세가 새턴은 2D가 훌륭한 대신 타 32비트 기종보다 3D가 구리긴 했지만 일단은 CDROM 매체를 이용한 풀모션 비디오[32] 활용으로 3D 게임의 중흥기를 이끌어내기 시작했다.

특히 1990년대 중후반은 세가 새턴플레이스테이션, PC-FX등의 게임기들이 경합하며 만들어낸 2D 게임의 전성기라 할 수 있다. 특히 세가소니의 너 죽고 나 죽자식의 치열한 무한경쟁이 수없이 많은 2D 수작 게임들이 탄생한 배경이 되었다. 1990년대말 플레이스테이션 2드림캐스트가 등장하며 보다 완연한 3D게임 시대가 열렸으나 그전까지만해도 폴리곤 기술은 텍스쳐의 해상도도 낮고 해서 아직 조악한 수준이었으며 1999년까지는 2D의 우세가 지속된다. 그나마 새턴과 플스의 초반 싸움에서 새턴이 플스하고 호각을 뜬 이유도 새턴이 2D 쪽에서는 확실히 우위를 점했기 때문. 그 게임 이후로 새턴이 밀릴때에도 2D 격투게임/슈팅게임의 이식률이 좋은 새턴은 이쪽 장르 매니아들에게 여전히 수요가 높았었다. 2000년대 초반, 6세대 콘솔의 등장을 거치면서 3D 구현기술이 발전해 2002년쯤에는 완전한 3D의 우세가 굳혀졌다.

휴대용 게임의 경우는 게임보이가 1990년대를 주름잡았고 전 세계를 평정했다. 게임보이는 아직 흑백 8비트 그래픽으로 작동되었다. 하지만, 당시로선 성능이 매우 좋았던 혁명적인 휴대용 게임기였다.

PC 게임계는 한동안 DOS 2D 디스켓 게임 일색이었다가 1991년 세계 최초로 <호버탱크 3D>란 3D 게임이 등장했다. 1994년 들어 CD 지원 게임이 점차 나오고 1995년 들어 윈도우 지원 게임들도 등장했다. 1993년 미국 웨스트우드 스튜디오가 세계 최초로 RTS 게임 <듄 2>를 제작했고, 뒤이어 블리자드 엔터테인먼트도 1994년 <워크래프트>를 제작했다. 1997년 케이브독은 세계 최초로 3D 그래픽 RTS <토탈 어나힐레이션>을 개발했다. 1998년 이전까지 <커맨드 앤 컨커> 시리즈가 우세였다가 이후 <스타크래프트>가 압살했다.

한국 게임계의 최고 호황기는 아이러니하게도 IMF폭탄을 맞은 직후였는데, 바로 스타크래프트의 등장이다. 그 많던 당구장이 우수수 폐업하고, 그 자리에 게임방이 들어섰다. 오락실 게임이 죽어가던 와중에 청소년들은 또다른 게임 문화에 순식간에 적응했고 IMF 극복기에 절정에 달해 상가 건물은 조금만 규모가 커도 한 건물에 게임방이 두 개씩 들어가 있는 광경도 이상한 게 아니었다. IT 투자 붐(거품이었다)이 게임 업계에도 흘러들어 아트록스, 아마게돈 따위의 스타 아류작이 수도 없이 나타났다 사라지기 일쑤였고, 90년대 초부터 중소규모 업체 위주로 소소하게 이어져 오던 게임 개발업계는 거품이 꺼짐과 동시에 확실하게 가지치기를 당해 현재는 소위 3N이라는 업체들만이 살아남아 중견 기업으로 성장했다. 우습게도 이 중에서 그렇게 다들 만들지 못해 안달이었던 RTS(더 정확히는 스타 아류)로 성공한 업체는 없다. 1994년 KBS2 <생방송 게임천국>을 시초로 유료 ARS 게임도 어린이들 사이에 성행했고, PC통신에선 머드게임이 유행했다가 1996년 넥슨이 <바람의 나라>를 국내 최초로 내놓으면서 인터넷 기반 온라인 게임이 생겨났다. 이후 1999년 ADSL 보급과 더불어 온라인 게임이 집집마다 보급될 토양을 마련해 주었다.

2.5. 패션

90년대 패션은 크게 초반, 중반, 후반에 따라 나뉘어 진다.

90년대 초반은 주로 해외 교포 출신의 오렌지족들과 압구정 문화가 유행을 선두했으며, 이들을 통해 게스, 캘빈 클라인 등 해외 브랜드가 국내에 소개되는 계기가 되었다. 과장됨이 핵심이던 80년대와 달리 90년대부터는 헤어와 패션 전반적으로 훨씬 자연스러운 느낌을 추구했다. 그리고 X세대의 등장과 함께 유니섹스 패션이 자리잡았고 여성들은 배꼽티와 핫팬츠를 입으면서 성적으로도 개방되기 시작했다.

90년대 중반은 경제 호황기를 타고 국내 패션 브랜드가 최전성기를 누린 시기였다. 닉스, 스톰 같은 국내 브랜드가 명품 브랜드 뺨치는 가격대에도 불구하고 젊은층에서 엄청난 인기를 모았다. 특히 스톰은 소지섭, 김하늘, 송승헌 등 톱스타들이 모델로 데뷔한 스타 등용문이었으며, 브랜드 팬클럽까지 생길 정도로 매니아 층이 있었다. 이 시기에 10, 20대를 보낸 사람이라면 '292513=STORM'이라는 브랜드 명을 아직도 기억할 것이다. [33]

여성들의 메이크업 변화도 크게 두드러지는데, 이 시기 여성들의 화장은 진한 파운데이션과 벽돌같은 어두운 색 립스틱이 기본 스타일로 기존 원색 위주의 화장과는 차원이 다른 과감한 다크 컬러가 유행했다. 90년대 중후반부터는 이게 더욱 심화되어 거의 특수분장 수준의 회갈색, 회보라 같은 엄청난 색상의 립스틱이 유행하기도 했다.

또 그전까지 국내에서는 생소했던 힙합 패션이 가수나 아이돌을 통해 전파되면서 바지통이 넓은 힙합 바지와 실버 액세사리가 유행했다. 그리고 이 시기부터 청소년 문화가 급성장하기 시작했는데, 청소년의 패션취향도 다양해짐에 따라 강남에서는 힙합패션이, 강북에서는 복고패션이 유행하며 갈래가 나뉘기도 했다.

90년대 말에는 세기말의 분위기를 타고 장식이나 화려함을 최소화한 디자인에 채도와 명도가 낮은 어두운 톤의 미니멀리즘 룩이 유행했다. 특히 IMF 외환위기의 여파로 방송국에서 자체적으로 연예인들의 염색이나 화려한 의상과 액세사리에 규제를 가하는 바람에 모자나 두건으로 머리를 가리는등 한동안 패션 암흑기를 겪기도 했다.

2.6. 영화

1990년대 초반 들어 국산 영화계에선 우일영상(대우), 미도영화사(선경), 드림박스(삼성) 등처럼 재벌의 영화참여가 늘어났고, 1993년 <서편제>가 120만 관객을 동원해 대 히트를 기록했다. 여기엔 시대적 상황이란 변수가 끼어 있었는데, 이 시기 불어닥친 개방화 열풍은 다른 쪽에서 '우리 것'에 대한 소중함을 일깨워 주었고, 감동적인 비극적 스토리 및 예술에 대한 집념이 뒷받침되어 신비감과 비극미를 더해 주었다. 이 영화는 국악 등 한국 문화에 대해 새롭게 재조명할 계기를 만들어 주었으며, 국산 영화 역시 잘 만들면 외국과 경쟁할 수 있다는 걸 일깨워 주었다. 이후 1994년 <투캅스>, 1996년 <은행나무 침대>, 1997년 <접속> 등으로 상업적 히트가 이어졌으며, 1996년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과 <꽃잎> 처럼 사회성을 지닌 영화도 탄탄한 작품성에 상업적 성공을 거뒀다. 이미 1994년 <태백산맥>도 히트를 쳤으나, 이는 원작 소설의 인기에 편승했다.

이와 더불어 홍상수, 강제규, 양윤호, 정병각, 한지승, 임순례, 이민용, 이창동, 송능한, 장윤현, 이경영 등 젊은 세대의 감성을 대변하는 신진 감독들이 등장해 국산 영화의 새 발전을 예고했다. 배우로는 한석규, 최민수, 박상민, 박중훈, 심혜진, 황신혜, 최진실, 이덕화, 문성근 등이 크게 활약했다.

이 시기 국산 영화계에서 주목할 만한 사건은 국내 최초의 국제 독립영화제 '1995 서울국제독립영화제' 개최였다. 출품작 중 가장 주목받는 작품으론 이란 감독 압바스 키아로스타미의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 배용균 감독의 <검으나 희나 땅에 백성>, 그리고 변영균 감독의 다큐멘터리 영화 <낮은 목소리: 아시아에서 여성으로 산다는 것 2> 등이었다. 1996년에는 국내 최초 종합영화제 '부산국제영화제', 1997년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가 각각 개봉되어 성공을 거뒀다. 그리고 1996년 헌법재판소 결정에 따라 공연윤리위원회의 영화 사전심의가 위헌으로 판결나 '가위질 시대'가 끝을 고했던 것 역시 큰 주목을 받았다. 반면 장산곶매 등 운동권 영화집단들은 1990년 독립영화 <파업전야>를 만들어 '완성된 민중영화'를 선보였고, 이는 1991년 <어머니 당신의 아들>, 1992년 <닫힌 교문을 열며>로 이어졌다.

문민정부 시기 5년 동안 국산 영화가 수 많은 성과를 거뒀지만, 그 이면에는 미국 영화 직배체제의 잠식으로 토종 영화계가 궁지에 몰리기 시작했다. 1988~1989년 직배반대 투쟁에도 불구하고 국산 영화 제작은 1988년 87편에서 1997년 59편으로 줄었고, 토종 영화자본 역시 빈약해져갔다. 반면 미국영화 직배 수는 1997년 53편으로 늘어나 세계 10대 영화수입국이 됐고, 이에 따라 로열티가 매년 30% 가량 증가해 직배 활동 시작 이래 1996년까지 5개사 송금액은 무려 1,367억 원, 1997년 기준 1,600억 원으로 각각 증가했다. 결국 1988년 직배반대 투쟁에 나섰던 영화인들 사이에선 "한국이 쇳덩이(자동차)를 사려고 미국혼(영화)까지 사들였다"고 신랄히 비판했으며, 이는 영화가 상품이나 오락 차원을 넘어 인간의 사고와 세계관에 영향을 미친다는 점에서 정당하다고 볼 수 있다. 결국 한국은 준비되지도, 원치도 않은 상황에서 일방적으로 영화시장을 개방해 미국 우월주의를 비롯해 미국의 세계지배 이념, 인종차별, 성 도착, 폭력, 살인, 전쟁 등 우리 정서상 해로운 것까지 들여오는 역효과를 낳았다. 이렇게 되자 김영삼 시기 5년 동안 국산은 <서편제>만 1백만 관객을 돌파했지만, 수입영화 쪽은 <스피드>, <쥬라기 공원> 등 10여 편에 달했다. 평균으로 쳐도 1년에 2편씩 1백만 이상을 동원한 셈이다. 위와 같은 위기상황 속에서도 몇몇 영화인들은 영화직배에 대해 "미국의 문화 침략에 대한 자각을 일으키면서도 영화시장을 키우는" 순기능도 있다고 견해를 제시했다. 또한 제작편수는 줄어도 희소가치가 생겨 미국 메이저 영화와 맞설 수 있는 측면도 있다.

또 공권력에 의한 영화탄압도 여전했는데, 노태우 시절 1990년 <파업전야> 상영 당시 민중영화가 상영되는 대학가나 재야단체마다 경찰 병력이 들이닥쳐 필름을 압수하고자 했고, 문민정부 초기에도 1994년 <해적> 등과 같이 가위질 수난도 있었다. 1996년 영화 사전검열 위헌판정 후 1997년 공윤이 '한국공연예술진흥협의회'로 출범되고 같은 해 개정 영화진흥법에서 '등급 외 전용관'을 명문화했지만, 여당 등의 반대로 전용관이 허용이 안 되어 등급외 영화들은 영화관에 내걸리지 못했다. 게다가 하반기 들어 '제1회 서울퀴어영화제'가 취소되고 제주 4.3 사건을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 <레드 헌트>가 인권영화제에서 상영되었다 하여 서준식 인권운동사랑방 대표가 국보법 위반으로 구속되기도 했다. 이에 서준식의 변호인단 103명이 "<레드 헌트>는 미군정 자료 및 역사학계의 연구 결과를 토대로 4.3 사건을 객관적으로 다뤘으며, 영화학과 교수들의 추천을 받아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상영된 것이니만큼 이적표현물로 볼 수 없다"고 보석 신청을 해 구속 3개월 만에 서준식이 풀려났다. 그러나 완전히 무죄로 판정되기까지는 약 6년이 걸렸다.

1998년 들어서도 외국 영화들은 겉으로 화려하나 실속 없는 영화가 판을 쳤다. 수입작 중 <타이타닉>이 서울 232만 명을 기록해 최고 흥행성적을 기록했고, 그 외에 <아마겟돈> 및 <딥 임팩트>가 각각 135만 및 76만 명을 동원해 크게 성공했다. 애니메이션 중에 월트 디즈니 작품 <벅스 라이프> 및 <뮬란>이 각각 90만 명을 돌파해 건재를 과시했다. 반면 국산 영화계는 외환위기 여파로 지각변동이 일었는데, 삼성, SK, 현대 등이 영화사업을 정리하고 산은캐피탈, 일신창업투자 등 금융권이 그 자리를 메꿨다. 동년도 제작편수는 1996년 64편, 1997년 59편에 이어 43편으로 감소했으나, <여고괴담>, <처녀들의 저녁식사>, <퇴마록>, <조용한 가족> 등 공포물이 성공하고 <편지>나 <8월의 크리스마스>, <해가 서쪽에서 뜬다면> 등 멜로영화들도 건재를 과시했다.

또 동년도 대형 이슈는 바로 일본 영화 개방이었다. 문화관광부가 11월 20일부로 '일본 대중문화의 단계적 개방 방침'에 따라 <하나비> 및 <카게무샤> 등 국제영화제 수상작 2종이 들어왔으나, 업계의 시장 10% 잠식 예상과는 달리 흥행은 실패했다. 그리고 '스크린쿼터 사수투쟁'도 이슈거리였는데, 미국측이 연초부터 한미투자협정 협상 과정에서 '스크린쿼터 축소'를 요구하자 7월 27일 각 영화계 인사들이 '스크린쿼터 사수 범영화인 비상대책위원회'를 결성해 제동을 걸기 시작했다. 11월 제3차 실무협상에서 해당 문제가 논의되자 이들은 12월 1일 광화문 등 도심에서 시위를 벌였다. 영화인들은 철야 농성에 돌입했고, 경실련, 환경운동연합 등 시민사회단체들도 '우리영화 지키기 시민사회단체 공동대책협의회'를 구성해 문화예술계 인사와도 연대했다.

이 와중에도 한국 영화는 국제무대에서 존재감을 과시해 <8월의 크리스마스>를 비롯해 <아름다운 시절>, <강원도의 힘> 등이 칸 영화제 공식부문에 초청됐으며, 특히 <아름다운 시절>은 도쿄국제영화제 등 4개 영화제에서 상 5개를 받았다. 1999년 들어 강제규 감독 작품 <쉬리>가 서울관객 244만 8천 명을 기록해 <타이타닉>의 흥행기록을 깼다. 이 작품의 흥행은 일약 뉴스거리가 됐고, 일본과 동남아 등지에 수출됐다. 또 내용상으론 냉전 시대 사고방식에 고착됐음에도 불구하고 밀도와 긴장감, 풍부한 볼거리로 '한국형 블록버스터'의 틀을 제시했다는 평도 이어졌다. 뒤이어 <주유소 습격사건> 등 국산 영화들이 흥행하여 1998년까지 20%대였던 시장점유율을 40%까지 끌어올리기도 했다.

결국 쉬리의 개봉으로, 한국의 영화계는 어마어마한 발전들을 겪게 된다.

2.7. 언론

2.7.1. 정치적 측면

노태우 때까지만 해도 권력의 눈치를 보며 적당한 영향력을 행사한 언론은 1993년 김영삼의 문민정부가 들어서며 유례 없이 강해졌다. 그러나 문민정부 시절 '권력이 언론 눈치를 본다'라 할 정도로 불렸기에 '밤의 대통령'이라고도 불렸다. 방송은 직/간접적으로 정부의 통제를 받았으나, 신문/뉴스통신은 서울신문과 연합통신을 빼곤 상당수가 민영이라 '언론재벌'까지 오르는 경우도 있고, 소유로 보면 정부로부터 독립돼 있으나 5공 때 정권의 언론통제로 눈치를 보다가 1987년 6.29 선언 뒤 언론 자율권이 확대되어 문민정부 들어선 완전히 자율권을 행사했다. 그렇다고 해도 '언론자유 형성'이라고 보긴 어려웠는데, 이미 1980년대에 확대된 상업주의와 언론 권력화가 합쳐져 수익성을 노리며 여론 조작 및 통제를 일삼아 영향력을 행사했고, 권력 대신 기업 차원에서 기자들의 편집권 및 언론자유를 빼앗았기에 1980년대 후반부턴 "권력과 자본으로부터 편집권 독립을 해야 한다"는 말이 나왔다. 문민정부 들어서도 언론은 여전히 상업주의 논리에 따라 돌아갔다.

김영삼 시절 언론이 지대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던 것은 대선 당선의 일등공신이 '언론' 그 자신이었기 때문이었다. 정부 장악으로 편파보도가 불가피한 방송과 달리 신문들은 하나같이 차기 정권에서 영향력을 행사코자 특정 후보를 밀어줬다. 대표적인 예로 1992년 14대 대선 때 <조선일보>가 정주영 네거티브 보도로 김영삼 득표율 상승에 공헌했고, 1997년 15대 대선 때 <중앙일보>도 이인제를 공격하며 이회창을 밀어줬다.

또 언론은 정부 장단에 맞추어 춤을 추면서도 사안에 따라 정반대 주장을 폈는데, <조선일보> 등 보수 언론들의 김영삼 개혁정책 공격이 그 예였다. 그래서 문민정부 내내 '개혁의 적은 언론이다'란 말이 나왔다. 심지어 국내 정치문제 외에도 남북관계 및 외교에도 의제설정을 하며 친재벌적 주장을 했는데, 언론이 재벌이고 재벌이 언론을 소유하는 현실상 당연할지 모르나 언론의 본래 이념인 '불편부당과 시시비비'로 본다면 부적절하다. 1994년 주요 언론에 대한 세무조사가 실시됐지만 시민사회단체의 공개 요구에도 불구하고 공개되지 않았다.

심지어 1990년대 중후반기 보수언론이 했던 '이승만 살리기'나 '박정희 신드롬' 조장 등에서 보듯 역사관 문제까지 제기됐는데, 언론이든 사람이든 역사 해석은 다를 수 있고 주장은 자유지만, 명백히 드러난 사실조차 자의적으로 해석/왜곡하는 것은 언론의 역사해석 범주를 벗어난 문제이다. <월간조선>이 저질렀던 1993년 한완상 저작 왜곡 및 1998년 최장집 사건처럼 비이성적 매카시즘 조장 및 노골적인 반개혁주의 선동 등 언론의 반사회/반 역사적 반동화가 드러나기도 했다.

이러한 보수언론의 반개혁적 태도에 저항하는 진보 진영의 움직임도 여전했는데, <한겨레신문>은 제도언론으로서 정론직필을 고수했고, 대중 정론지 포지션을 점차 확립했다. <월간 말>이나 <시사저널> 외에 1991년 <사회평론 길>도 더 창간했고, 강준만 전북대 교수도 1997년에 무크지 <인물과 사상>을 냈으며 문부식 등 3명도 같은 해 <당대비평>을 창간했다. 그 외에 시민사회단체들도 방송모니터 활동 등 언론감시 활동을 꾸준히 이어나갔다.

1997년 외환위기 뒤 재벌언론의 분리가 점차 진행되기 시작했다. 1998년 <문화일보>와 <경향신문>이 현대와 한화로부터 분리해 사원주주제로 태어났고, 1999년 <중앙일보>와 <국제신문>이 삼성과 롯데 품을 각각 벗어났다. 1999년은 언론 역사상 소용돌이가 크게 몰아친 해인데, 그해 10월 홍석현 중앙일보 회장이 보광그룹 탈세 혐의로 구속되자, 중앙일보 측은 '언론 탄압'이라 주장했다. 동월 25일 정형근 한나라당 의원이 <성공적 개혁추진을 위한 외부환경 정리방안>이란 문건을 발표하면서 '정부의 언론장악 음모' 논란을 불러일으켰고, 정언유착 구조화가 처음 드러났다.

2.7.2. 상업적 측면

이 시기 언론시장에서 눈여겨볼 만한 점은 신문의 독자 확보 경쟁이 치열했다는 점이다. 특히 신문사의 생명은 광고인데, 1950년대 구독수입이 76.1%, 광고수입이 21.5%였던 게 1970년대에는 55.1% / 44.8%로, 1980년대에는 34.2% / 60.2%로 각각 늘면서 광고수입이 구독수입을 앞섰다. 신문사들은 광고 확보에 혈안이 됐고, 이는 증면 및 부수 확대 경쟁으로 이어졌다. 더불어 경품 경쟁도 과열되기도 했다. 이러한 무한경쟁은 1996년 7월 조선일보사 남원당지국장 살해사건으로 이어져 사회적 물의를 일으켰다.

이처럼 신문사 간 무한경쟁이 벌어졌던 원인으로 '재벌의 언론참여'가 가장 컸는데, 기존에 삼성 외에 현대, 한화, 대우, 롯데, 갑을, 대농 등 대기업들이 줄줄이 언론사업에 뛰어들었고, 기존 거대언론들에 도전장을 던졌다. 이로써 문민정부 시기에 '언론재벌 vs 재벌언론' 구도가 더 가속화되었다. 이 치열한 무한경쟁은 신문사들이 점차 막대한 빚을 지게 만들었고, 1997년 외환위기 후 어떤 업종보다 먼저 구조조정 대상에 올랐다.

1990년대 초반 언론들은 CTS 시스템 구축으로 납활자나 펜, 잉크 등을 완전히 추방시켰고, 지방 분공장을 신설해 전국 동시 발매를 시도하며 지방신문 시장을 점차 공략했다. 심지어 1990년 민영방송 설립 허용을 전후해 방송사업 진출에도 의욕을 보였으나, 당시에도 여전히 정간법상 신방겸영이 금지되어 있기에 대신 인터넷, 전광판 등 '뉴미디어'란 유사방송매체 사업에 진출했다. 이 분야의 선구자는 조선일보와 중앙일보였다. 신문사들이 유사방송매체에 주력코자 한 건 미래 미디어사업에서 종이신문이 사양화될 거라는 예측에서 나왔다.

2.8. 드라마

경기 호황이 이어지면서 드라마 시장이 기하급수적으로 커진 시대. 최초의 해외 올 로케이션(여명의 눈동자), 최초의 트렌디 드라마(질투), 컴퓨터 그래픽을 사용한 최초의 호러 드라마(M), 역대 최고의 마스터피스 사극(용의 눈물) 등 기념비적인 작품들이 나왔고 중화권을 대상으로 드라마 수출이 시작되었다.

90년대 초반에는 질투, 사랑을 그대 품안에 같은 트렌디 드라마가 인기를 끌었다. 일본에서 80년대 후반에 시작된 트렌디 드라마 장르가 한국에 이식된 것으로 비슷했던 한일 양국의 사회 분위기를 반영했다. 드라마의 소재도 스포츠(마지막 승부, 아이싱), 군대(파일럿, 창공, 신고합니다), 불륜(애인) 등 다양해졌다.

시대의 변화에 발맞춰 과거에 다루지 못했던 민감한 사회 문제를 재조명한 드라마도 많았다. 아들과 딸은 우리 사회에 뿌리 깊히 박혀 있던 성차별 문제를 다뤘고 모래시계는 국내 최초로 5.18 민주화운동을 소재로 삼았다.

1990년 피플미터의 도입으로 객관적인 시청률 집계가 가능해지면서 이 때부터의 시청률을 공식 기록으로 삼는다. 따라서 공식적인 역대 드라마 시청률 1위는 첫사랑(65.8%)이다. 그 외에도 사랑이 뭐길래(64.9%), 모래시계(64.5%), 젊은이의 양지(62.7%), 그대 그리고 나(62.4%), 아들과 딸(61.1%)이 60% 이상의 시청률을 기록했다. 즉 공식적으로 시청률 60% 이상을 기록한 드라마 8편 중 6편이 1990년대에 나왔다.[34]

2.9. 방송

1990년 7월 방송법 개정으로 민영 종합방송이 다시 허가되었고 10월 새 민방 사업자로 태영이 선정되어 11월 14일 서울방송(SBS)이 출범했다. SBS는 1991년 3월 20일 AM 라디오, 12월 9일 TV을 개국했고 1996년 11월 14일에는 FM 방송을 시작했다. SBS는 수도권 지역 민방으로 개국했기 때문에 한동안 지방에서는 볼 수 없었다. 1995년 5월 14일 부산, 대구, 광주, 대전 지역민방이 개국하면서 전국 네트워크를 구축했고, 1997년 울산, 청주, 전주 지역민방의 개국으로 네트워크를 확대했다. 반면 인천방송은 최초로 비 SBS계 지역민방으로서 처음 개국했다.

KBS의 교육 채널[35]EBS로 독립한 것도 이 시기다. 1990년 12월 27일 KBS의 교육방송 편성권이 제작처인 한국교육개발원으로 이관되면서 독립된 교육방송이 출범했고, 기존 KEDI 교육방송본부는 '교육방송원'으로 승격했다가 1997년 '한국교육방송원법' 제정으로 한국교육방송원으로 독립했다. 단, 송신은 2019년 현재도 KBS가 맡는다.

1995년 3월 1일에는 케이블TV 방송이 출범하면서 뉴스전문채널 YTN과 훗날 종합편성채널로 전환되는 MBN, 음악 전문 채널 엠넷을 비롯한 20개 채널이 개국했다. 같은해 8월 1일에는 한국 최초의 홈쇼핑 채널인 삼구쇼핑이 개국했고 12월 1일 투니버스 등 5개 채널이 추가 개국했다. 다만 이 시기에는 아직 케이블 방송 보급률이 낮아 의미 있는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1996년 1월 14일 '무궁화 위성 2호' 발사에 성공하자 7월 1일 KBS가 디지털 위성 TV 시험방송을 개시했고 1997년 8월 27일에는 EBS가 위성 방송을 개시했다.

또 이 시기에 특기할 만한 건 TV 매체가 정치권에서도 위력을 보인 것이었다. 1987년 처음 시도된 TV정치는 1992년 14대 대선과 1997년 15대 대선 때도 본격화됐는데, 14대 대선 때 김영삼 후보 측의 소극적 태도 및 방송사의 무성의로 토론회를 못 열었으나 후보자 및 지지자의 TV유세와 공정선거를 위한 TV 토론회 등이 열려 본격적으로 'TV 정치시대' 개막을 알렸다. 1995년 선거법 개정으로 방송 연설, 경력 방송, 후보자 토론 무제한 허용 등 TV 정치방송 활성화가 이루어지면서 제1회 지방선거 때 첫 막을 올렸다. 이로써 후보들은 유세장보다 방송을 이용하는 데 총력을 기울였으며, 광역단체장 후보 55명 중 46명이 TV 연설 및 광고를 이용했고 광고는 총 105회, 연설은 60회나 방영됐다. 방송 3사 중 가장 많은 광고/연설을 유치한 MBC는 선거 특수로 15억여 원을 벌었다.

이들 중 관심을 끈 건 국내 최초로 개최된 후보자 토론회 생방송이었는데, 특히 서울시장 후보로 나선 조순-박찬종-정원식 3파전이 더 관심을 쓸었으나, 후보자의 실속보다 말빨 등 겉만 부각되는 '감각 의존 선거'가 될 여지도 있고, 군소 후보들에 대한 푸대접 문제까지도 거론됐다. 15대 대선 들어서는 'TV 정치'의 위력을 여지없이 보여줬는데, 김대중-이회창-이인제 3파전 토론은 국민들의 높은 관심 속에서 공정히 진행됐다. 비록 정책 토론보다 상대 약점 물고 늘어지기에 치중했다는 비판이 있지만, 중요 쟁점문제들이 대다수 거론되어 후보자에 대한 국민들의 이해를 높였다.

이러한 TV 정치시대 개막과 더불어 연예인들의 정치진출이 전보다 더 늘어났는데, 신영균, 최희준, 변웅전, 이주일, 정동영, 변웅전, 이윤성 등 대스타들이 등이 여야를 막론하고 대다수 국회에 진출했다. 낙선자까지 포함한다면 정계진출을 시도한 연예인들은 수도 없이 많았다.

2.10. 예능

1990년 MBC 일요일 일요일 밤에가 정통 코미디에서 토크 버라이어티로 포맷을 변경하면서 기존의 쇼와 코미디와는 다른 버라이어티라는 개념이 도입되었다. 특히 1991년에 시작된 몰래카메라는 폭발적인 인기와 더불어 오락 프로그램의 범위를 스튜디오 밖으로 확장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1990년대 예능은 스튜디오 녹화와 주로 야외에서 진행되는 코너들로 구성되었다. 메인 MC는 안정적인 진행 실력을 갖춘 非개그맨[36]이 주로 맡았고[37], 개그맨들은 주로 메인 MC 옆에서 코너와 웃음을 담당했다. 90년대 초반에는 몰래카메라, 인생극장(이상 일밤), 금촌댁네 사람들(슈퍼 선데이) 등 콩트 코미디적 요소가 강한 코너들이 편성되다가 90년대 후반 들어 영파워 가슴을 열어라(기쁜 우리 토요일), 고향에서 온 편지(좋은 세상 만들기), 캠퍼스 영상가요(슈퍼TV 일요일은 즐거워) 등 일반인 참여 코너들이 등장했다.

1989년 자니윤 쇼에서 시작된 토크쇼 장르도 90년대 주류 예능 장르였다. 특히 SBS 이홍렬 쇼는 '쿠킹토크 참참참', '칵테일 토크' 등 색다른 시도로 평일 심야 예능 사상 최초로 시청률 30%, 2시간 편성이라는 기록을 세웠다.

1990년대는 시트콤 장르가 처음 등장한 시기다. 1993년 SBS <오 박사네 사람들>을 필두로[38] LA 아리랑, 순풍 산부인과 등 가족 시트콤이 SBS를 통해 방송되었다. 또 1996년에는 MBC에서 한국 최초의 청춘 시트콤 남자셋 여자셋이 방영되었다.

방송 환경의 변화로 80년대까지 주류를 이뤘던 장르들은 변혁의 시기를 맞았다. 90년대 중반 토요일 토요일은 즐거워 같은 정통 가요쇼가 버라이어티로 포맷을 변경하면서 10대 위주의 순위제 가요 프로그램이 주도권을 가져왔고, 1998년에는 순위제 프로그램의 본좌였던 가요톱10이 폐지되고 몇달 후 뮤직뱅크가 신설되었다. 순위제 프로그램의 인기는 1세대 아이돌의 전성기가 끝나는 2000년대 초반까지 이어진다. 다른 한편에서는 다양한 분야에서 음악성을 갖춘 뮤지션들이 출연하는 열린음악회심야 음악프로그램들이 첫선을 보였다.

코미디의 경우, 1991년 KBS, MBC의 중견 개그맨들이 SBS로 스카우트되면서 이듬해 청춘행진곡(MBC)과 유머 일번지(KBS)가 연이어 폐지되었다. MBC는 이후 오늘은 좋은 날, 웃으면 복이 와요로 코미디 패권을 되찾는데 성공했지만 KBS는 감자골 사태 등 세대교체에 어려움을 겪으며 침체기에 접어들었다. 개그맨들을 스카우트한 SBS도 90년대 중반들어 버라이어티와 시트콤에 집중하면서 코미디에 대한 관심이 떨어져 갔고 결국 1998년 IMF를 계기로 코미디를 폐지했다. 90년대 후반 KBS가 코미디 세상만사로 명맥을 잇다가 1999년 9월 개그 콘서트를 런칭하면서 공개 코미디 시대에 돌입한다.

2.11. 만화, 애니메이션

한국 만화애니메이션은 양적 전성기를 맞은지 불과 몇년 만에 급격한 변신과 쇠퇴를 겪었다. 80년대 후반에 정립된 만화잡지와 TV 애니메이션이 90년대 초 황금기를 맞았고,[39] 잡지 플랫폼도 인기투표 순위나 신인작가 공모 등 일본 소년만화 잡지의 방식들을 받아들였다. 만화가 인맥구도도 종래의 문하생 출신 중심에서 동인 출신으로 점차 바뀌었고, 연령도 10대 후반 ~ 20대로 하향화되어 작품 성향도 동년배 독자들의 관심을 공유하는 쪽으로 전환되었다.

위와 같이 양적으론 관심이 증폭했는데도 여전히 개선되지 않은 기성세대의 부정적 인식과 정부/기업 차원에서 지원한 소위 대작 애니메이션의 잇따른 실패, 일본 출판만화 무차별 정발, 그리고 IMF 사태로 인한 시장 규모 축소로 고난의 시기를 맞았다. 특히 1997년 청소년보호법 파동으로 성인만화 시장은 사실상 쑥대밭으로 전락했다.

반면 일본 애니메이션은 제3차 아니메 붐으로 기억되는 전성기를 맞았다. 1992년부터 세일러 문, 크레용 신짱, 슬램덩크, 포켓몬스터 같은 세계구급 인기작이 쏟아져 나왔지만 어떤 평론가는 작품 자체의 완성도가 높아서가 아니라, '캐릭터 붐'이었다는 평을 내리기도 했다. 2000년 이후에 몰아닥친 캐릭터 모에 붐에 빠진 아니메 오타쿠들이 자라나는 시기였다. 각 방송사들이 황금시간대(저녁 7시대)의 애니메이션 편성을 줄이는 대신 심야 애니메이션이 활성화되는 등 저출산의 영향이 본격적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분명 이 시기의 일본 애니메이션은 작품성에서 타 시대의 추종을 불허한다. 1995년 안노 히데아키 감독의 신세기 에반게리온과 1997년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모노노케 히메는 골수 팬들조차 이해하기 어려운 메시지로 오히려 센세이션을 일으켰고 공각기동대카우보이 비밥도 뛰어난 완성도로 찬사를 받았다. 반면 1991년 CATAS 중단으로 사실상 중단 상태였던 애니메이션 제작 디지털화는 1992년 <북두의 권> 게임 데이터 작성을 계기로 진전을 보았고, 마침내 1997년 도에이동화가 업계 최초로 <게게게의 키타로> 64화를 '레타스프로' 소프트웨어로 제작해 디지털화를 완수해냈다. 이로써 셀과 물감, 필름이 주류이던 애니메이션 공정은 점차 컴퓨터가 대신하기 시작했다.

일본 만화에서도 다양한 인기작들이 나왔는데 위에서 언급된 세일러 문, 크레용 신짱, 슬램덩크 등은 원작이 만화인 작픔이다. 일본의 대표적인 만화 잡지인 소년 점프는 90년대 초반 드래곤볼, 슬램덩크, 유유백서[40] 등으로 황금기를 누리다가 이 세 작품이 모두 연재를 종료한 1995~1997년 시점에는 암흑기를 겪게 되고, 경쟁지 <주간 소년 선데이>가 명탐정 코난소년탐정 김전일로 상승세를 거듭했다. 이후 1998년에 원피스와 1999년에 나루토가 흥행에 성공하며 다시 전성기를 맞이하는 큰 굴곡을 겪었다. 나카요시, 리본 등 소녀 만화 잡지들도 전성기를 맞았으며, 그 중 세일러문을 배출한 나카요시는 1993년 월 발행 200만부를 돌파하기도 했다. 같은 시기 게임제작사 에닉스가 <소년 간간>을, 미디어웍스가 <월간 코믹 전격대왕>을 각각 창간해 틈새시장을 형성했다.

미국 출판만화계는 침체기라고 할 수 있는데, 이미 DC 코믹스는 1989년 영화화 이후부터 시작된 배트맨 붐과 1991년 만화책 <슈퍼맨의 죽음> 700만부 달성 등으로 잠깐의 전성기를 구가했다. 반면 1980년대까지 수 많은 영웅들을 배출하며 번성했던 마블 코믹스는 코믹북 시장 사양화와 사주 로버트 페렐만의 문어발식 M&A로 1996년에 파산 선고를 받아 문 닫을 위기에 처했다. 그러나 1997년 칼 아이칸을 거쳐 토이 비즈에 인수된 마블은 타개책으로 주력업종인 만화책 출판에서 영상 중심의 '종합 콘텐츠 플랫폼'으로 바꾸고자 했다.

영미권 극장 애니계는 단연 '디즈니 천하'라고 할 수 있는데, 1989년 <인어공주>로 침체기를 벗어난 월트 디즈니 엔터테인먼트가 1991년 <미녀와 야수>, 1992년 <알라딘>, 1994년 <라이온 킹>, 1995년 <포카혼타스>, 1996년 <노틀담의 꼽추>, 1997년 <헤라클레스>, 1998년 <뮬란> 등을 잇따라 발표해 극장 애니 시장을 사실상 압살했고, 특히 <미녀와 야수>는 종전 디즈니 프린세스들이 지녔던 고전적 여성상을 탈피했다. <알라딘>은 사상 최초로 유색인종 디즈니 프린세스를 배출했다.

3D 애니메이션 제작사 픽사도 디즈니와 함께 세계 최초로 풀3D 장편애니 <토이 스토리>를 제작해 대혁명을 이뤄냈다. 1998년에 신생 영화사 드림웍스도 최초로 장편애니 <개미>를 제작해 디즈니의 아성에 도전했다.

TV애니계에선 1991년 니켈로디언 측이 <더그의 일기>, <야! 러그래츠>, <렌과 스팀피> 3종을 처음으로 내놓아 사이코틱한 애니 '닉툰'을 확립시켰고, 이에 타임 워너가 니켈로디언과 디즈니 채널에 맞서기 위해 '카툰네트워크'를 개국해 1990년대 중후반에 <덱스터의 실험실>, <핑키와 브레인>, <파워퍼프걸> 등을 히트시켰다. FOX와 워너브라더스도 1990년과 1995년에 각각 'FOX Kids'와 'WB Kids'를 각각 개국하고 1990년대 중후반부터 일본 애니메이션 편성을 점차 확대했다. 반면 음악채널 MTV는 1993년 <비비스와 벗헤드>, 오락채널 코미디 센트럴은 1997년 <사우스파크>를 각각 방송해 나름 인기를 누리기도 했다.

3. 기타

그 유명한 공전절후의 수집품인 띠부띠부씰이 나왔던 시기였다.

2010년대 들어 건축학개론, 응답하라 시리즈 등 1990년대를 추억팔이하는 영상물이 많이 제작되고 있다. 거꾸로 말하면 1990년대에 청소년기를 맞은 1970년대, 1980년대 초중반 출생들이 주요한 소비세력으로 진입한다는 의미. 또한 오버뮤직씬에서는 UV, 인디뮤직씬에서는 1990년대 K-POP을 컨셉으로 한 기린(뮤지션)[41]이라는 아티스트가 등장하기도 하였다. 서울의 이태원과 홍대 등을 시작으로 밤과 음악사이라는 1990년대 가요를 튜닝해주는 주점형 클럽 체인점도 이런 맥락에서 히트치고 있다. 설립 자체는 2005년이지만 근년의 1990년대 복고풍 붐에 이어서 항상 문전성시를 이루고 있다고 카더라.

묘하게 세기말적 분위기가 감돌기도 하였는데 1990년대 초에는 다미선교회가 시한부 종말론(휴거) 소동을 일으켰다. 1990년대 말로 갈수록 노스트라다무스 떡밥과 Y2K 문제 등이 이런 분위기에 일조했다. 한국에서도 IMF 시대라는 경제적 원인이 이런 분위기에 편승하는 데 일조하기도 했다.

이 시기 젊은이들의 패션을 다룬 뉴스 영상이 갑자기 2016년에 재발굴되어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이렇게 입으면 기분이 좋거든요 문서 참고.

3.1. 이 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작품

3.2. 이 시대에 시작된 것들

3.3. 이 시대에 쇠퇴한 것들

이전 시대에 나와 지속적으로 쓰인 것들을 적을 것.
  • 경양식
  • 국민교육헌장: 1994년 교과서 속표지에서 삭제됨.
  • 납활자 인쇄: 신문업계에선 1994년 동아일보를 끝으로 자취를 감추었다.
  • 대한뉴스
  • 민무늬 전투복/기동복: 국군에선 1992년, 경찰에선 1993년, 소방/교정기관에선 1996년에 각각 사라졌다.
  • 백골단: 1997년 진압복 개선 이후 점차 사라졌다.
  • 소련: 1991년에 해체되었다. 그 와 함께 냉전도 종결되었다.
  • 비디오물 사전검열: 1998년 위헌 판정 후 이듬해에 음비게법 제정으로 사라짐.
  • 영화 사전검열: 1996년 영화진흥법 시행 후 위헌 판정되어 사라짐.
  • 음반 사전검열: 1996년 개정 음비법 시행 후 위헌 판정되어 사라짐.
  • 만화 검열제: 1997년 청소년보호법 시행 후 '청소년 유해매체 지정제'가 도입되면서 사라짐.
  • 오디오
  • 운동권: 1996년 연세대 사태로 사실상 쇠퇴의 길로 접어들었다.
  • 최루탄: 1999년부터 무최루탄 원칙이 발표되었고, 다음 해인 2000년부터 한국 내에서는 최루액을 섞은 물대포를 사용하고 있다.
  • 학력고사: 대학수학능력시험의 시행으로 폐지되었다.
  • 협궤열차: 1995년 12월 31일 수인선 협궤열차를 끝으로 운행이 중단됐으나, 수인선 자체는 2012년 통근전철로 부활한다.
  • LP: CD가 등장하면서 망했다. 하지만 LD, 배타맥스, VHS, 카세트 테이프, VCD 등이 시대의 변화를 이기지 못하고 단종된 것과 달리 이쪽은 쇠퇴한 뒤에도 한시적으로 생산 중이다.
  • VCD
  • 사상전향제도: 1998년 '준법서약제도' 도입으로 사라짐.
  • 산아제한 정책: 1990년대 들어와서도 출산율이 다소 반등하기는 했어도 2명대를 지속적으로 밑돌게 되자 1996년도에 전면적으로 폐지되었다. 하지만 늦어도 너무 늦었다
  • 항공기관사: B747-300까지만 해도 조종실에 이 포지션이 존재하였으나 -400을 시작으로 조종실이 디지털화되고 이 포지션의 역할을 기장,부기장이 대신하게 되고 항공기관사가 탑승하는 기종의 퇴역으로 사라져갔다.
  • 도농통합 행정정책에 따라 폐군 및 통합된 시군 단위 지역들
  • 통폐합된 정부부처들
    • 건설부: 1994년 교통부와 통합됨.
    • 경제기획원: 1994년 재무부와 통합됨.
    • 교통부: 1994년 건설부와 통합됨.
    • 내무부: 1998년 총무처와 통합됨.
    • 동력자원부: 1993년 상공부와 통합됨.
    • 문화부: 1993년 체육청소년부와 통합됨.
    • 상공부: 1993년 동력자원부와 통합됨.
    • 재무부: 1994년 경제기획원과 통합됨.
    • 체육청소년부: 1993년 문화부로 통합됨.
    • 총무처: 1998년 내무부와 통합됨.
  • 다른 은행과 합병되거나 IMF로 퇴출된 은행들
    • 경기은행
    • 대동은행
    • 동남은행
    • 동화은행
    • 보람은행
    • 한국장기신용은행
    • 충청은행
    • 평화은행
    • 충북은행
    • 강원은행
  • 대우그룹 : 1999년 IMF로 인해서 국내 재벌로서는 부도 및 파산이 확정되어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대우의 계열사들은 자동으로 분리, 분산되어져서 다른 그룹에 인수되거나 자강으로 운영되었다.
  • 삼풍그룹: 1995년에 일어난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로 해체되었다.
  • 조선총독부 청사 : 일제 잔재 중 하나였으며, 김영삼 정부 지시로 경복궁 2차 복원계획에 따라 1995년에 해체되었다.
  • 뉴코아그룹, 신동아그룹, 동아그룹, 한보그룹 등 7~80년대를 풍미했던 재벌들 : IMF 등으로 해체되었다.

4. 이 시대에 나온 말들

5. 이 시대의 상징들

5.1. 인물

5.1.1. 대한민국

5.1.1.1. 정/관계
5.1.1.2. 재계
  • 강말길 LG유통 사장
  • 강진우 롯데쇼핑 사장
  • 구본무 LG그룹 회장
  • 구자경 LG그룹 명예회장
  • 구자홍 LG전자 부회장
  • 김낙준 금성출판사 회장
  • 김광호 삼성전자 부회장
  • 김석원 쌍용그룹 회장
  • 김석준 쌍용그룹 회장
  • 김선홍 기아그룹 회장
  • 김성필 성원토건 회장
  • 김주진 아남그룹 회장
  • 김진호 골드뱅크 대표이사
  • 김우중 대우그룹 회장
  •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
  • 김웅세 롯데물산 및 호텔롯데 월드사업부 사장
  • 김의철 뉴코아그룹 회장
  • 김태구 대우자동차 회장
  • 나승렬 거평그룹 회장
  • 담철곤 동양제과 부회장
  • 류호담 아이템풀 회장
  • 문용식 나우콤 대표이사
  • 박건배 해태그룹 회장
  • 박문덕 하이트맥주 사장
  • 박성훈 재능교육 회장
  • 박용오 두산그룹 회장
  • 박창호 갑을그룹 회장
  • 배순훈 대우전자 회장
  • 손경식 제일제당그룹 회장
  • 손길승 SK그룹 회장
  • 신격호 롯데그룹 회장
  • 안병균 나산그룹 회장
  • 윤석금 웅진그룹 회장
  • 윤세영 태영건설 회장
  •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
  • 이수빈 삼성생명 회장
  • 이순목 우방그룹 회장
  • 이의철 쌍방울그룹 부회장
  • 이인희 한솔그룹 고문
  • 이재관 새한그룹 부회장
  • 이찬진 한글과컴퓨터 대표이사
  • 이헌조 LG전자 회장
  • 장성원 호텔롯데 사장
  • 장수홍 청구그룹 회장
  • 장진호 진로그룹 회장
  • 장치혁 고합그룹 회장
  • 장평순 (주)교원 대표이사
  • 전성원 현대자동차 부회장
  • 전윤수 성원그룹 회장
  • 정강환 태일정밀 대표이사
  • 정몽구 현대그룹 경영자협의회 의장
  • 정몽근 현대백화점 회장
  • 정몽규 현대산업개발 회장
  • 정몽헌 현대그룹 경영자협의회 공동의장
  • 정상영 KCC그룹 회장
  • 정세영 현대산업개발 명예회장
  • 정인영 한라그룹 명예회장
  •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
  • 정태수 한보그룹 총회장
  • 최명재 파스퇴르유업 회장
  • 최종현 SK그룹 회장
  • 한상수 세진컴퓨터랜드 대표이사
  • 허동수 LG칼텍스정유 사장
  • 허태학 삼성에버랜드 사장
  • 현소환 연합통신 사장
  • 현재현 동양그룹 회장

5.1.2. 해외

5.2. 이 시대를 풍미한 것

5.3. 이 시대의 유행어

6. 1990년대생

1990년부터 1999년 사이에 태어난 사람들을 뜻한다. 기준으로 [age(1999-12-31)]~[age(1990-01-01)]세이다. 2000년생을 제외하면 20세기제2천년기를 살아본 가장 어린 세대이다. 대한민국에서 일시적으로 출산율이 올랐던 시대의 산물인 1991년생~1995년생이 여기에 속해 있다.

90년대 출생 세대는 대한민국 역사상 유례없는 남초 세대이기도 한다. 자세한 건 해당 문서로.

현재 20대 중후반인 1990년~1994년생들은 88만원 세대 못지 않게 한국 사회의 문제점으로 인해 고통 받는 2030세대에 속한다. 이들은 유년기 시절에 1997년 외환위기를 겪었다. 성인이 된 현재는 취업난도 극심한 상태.

또한 2000년대 초반생과 함께 놀토를 제대로 겪은 유일한 세대이다. 1980년대생까지는 토요일에 정상 등교한 세대이고, 2000년대 중후반 이후생은 전면적 주 5일제 도입 이후이기 때문이다. 지상파에서 틀어주는 애니메이션들을 보고 자랐다. 이게 이 세대의 특징 중 하나이기도 한데, 이 시기 이전까지는 지상파 애니메이션이 대세가 아니었고, 주로 방영되던 일본 애니들은 국민의 정부 이전까지 아예 대한민국에 들어올 수도 없었다. 이 시기 이후에는 대부분 케이블로 옮겨가 지상파에서 방영을 안 했기 때문. 그 애니들의 상당수가 로봇 만화였고, 이는 이 세대 남자 아이들에게 엄청난 영향을 끼쳤다. 또한 투니버스가 황금기를 맞았을 때의 대상이 바로 이 세대이다. 인터넷이 대중화 되기 시작해 스타크래프트, 크레이지 아케이드, 메이플스토리, 카트라이더 등을 하고 놀았고 각종 사이트들에 출몰해서 무개념한 행동, 욕설등을 난무하여 개초딩이라는 단어를 탄생시켰다. 오프라인에선 미니카나 탑블레이드 등을 갖고 놀았다. 디지몬 카드나 유희왕 카드를 열심히 모은 세대이다.

초·중·고등학생 시절 동방신기, 버즈 슈퍼주니어, 빅뱅, 원더걸스, 소녀시대, 카라 등을 보면서 열광했다.

1990년대생들 중에 1990년 1월 1일생~ 1993년 2월 24일생은 노태우 정권에서 태어났으며, 1993년 2월 25일생~1998년 2월 24일생은 김영삼 정권에서 태어났고, 1998년 2월 25일생~1999년 12월 31생은 김대중 정권에서 태어났다. 이들은 유아기를 노태우 정권과 김영삼 정권에서 보내고, 어린시절과 유년기를 김영삼 정권과 김대중 정권, 노무현 정권과 이명박 정권, 박근혜 정권에서 각각 보냈으며 현 20대에서는 이명박 정권과 박근혜 정권, 문재인 정권에서 보내고 있는 중이다.

6.1. 사회·정치적 성향

다른 세대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특이한 점이 있는데, 성별에 따른 편차가 생긴 최초의 세대라고 정의할만큼 남녀의 정치적 지지성향이 엇갈리기 시작한 세대이다. 이는 페미니즘 등의 영향으로 인해 래디컬 페미니즘에 우호적인 정당에 대한 여성들의 압도적인 지지세, 그리고 천안함 피격사건, 연평도 포격 도발, 서부전선 포격 사건, 북한의 핵개발 등을 눈앞에서 겪은 남성들[57][58]간의 정치 성향 차이로 인한 현상이다. 대북 문제에 있어서, 많은 수의 1990년대 남성들은 보수 정치인들이 안보 위협을 들먹이며 국민을 겁박하는 것이나 진보 정치인들이 같은 민족 운운하며 무조건적인 대북 유화책을 주장하는 것 모두를 혐오한다. 그래서 본 문서에서 서술하는 대부분의 정치적 특성은 남과 여, 둘 중에 한 쪽에만 해당되는 경우가 많다. 젊은 나이인 만큼 1990년대 정치인은 거의 보기 힘들 정도로 드물다.

6.1.1. 공통된 특성

온라인에 익숙해진 면모와 이를 통해 자기 주관을 드러내는 것이 강한 세대이기에 일베, 워마드 같은 극단적인 성향의 커뮤니티 사이트에 주도적으로 활동하는 어두운 모습들을 보여주기도 한다. 더 나아가서는 윗 세대와 고리타분한 관습에 대한 공격성향 못지않게 자국이성혐오도 상당히 심한 편이다. 윗 세대와의 갈등, 자국이성혐오, 비리로 점철된 정재계와 여러모로 불안하기만한 사회분위기, 앞으로의 불투명한 장래등이 시너지 효과가 나면서 자국 혐오적인 성향도 강하게 드러내고 있는 세대이며 그래서인지 '헬조선', '탈조선', '이민만이 답이다'같은 주장도 서슴없이 하는 세대이다.

다만 이러한 자국혐오나 이성혐오같은 현상은 단순히 성별을 떠나서 바로 전 세대인 1980년대생과도 공유하는 특성이다. 그도 그럴게 IMF 이후 취직하기 힘들고 경쟁적인 사회분위기가 심해지는데 이에 따른 사회현상을 최초로 경험하며 고통받은 세대가 70년대 중후반생과 더불어 80년대생이다. 거기에 숨막히는 사회에 불만을 가지고 그러한 분노를 본격적으로 표현하기 시작한것도 80년대생이다. 후 세대인 90년대생은 열심히 공부하고 치열하게 노력해도 소수를 제외하면 보상을 받기는 커녕 불행해보이기만 하는 앞선 세대의 선배들을 바라봤고 결국 80년대생이 인터넷에서 퍼트린 자국혐오와 이성혐오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게 됨과 동시에 더욱 심화된 것이다.

90년대생들은 윗세대보다 인구수가 적다. 90년대 초반 한정으로 잠시 출산율이 늘어났지만, 부모 세대처럼 폭발적인 증가세를 보인것도 아니며 90년대 중반에 접어들면서 다시 줄어들었다. 행정안전부의 연령별 인구현황 통계를 보면 20대 6,830,784명, 30대 7,295,146명, 40대 8,536,791명, 50대 8,595,114명이며, 20대에 속하는 90년대생들의 인구수는 윗세대보다 훨신 적다는 결과가 나왔다.

6.1.2. 남성

정치혐오 무당층이 많은 세대.[59]

또한 바른미래당에 대한 지지율이 다른 계층에 비해서 높아지고 있는 세대이기도 한데, 왜냐하면 하태경이나 이준석 등이 자신의 의견을 들어주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소위 말하는 감성팔이(언더도그마)에 대해 극도의 혐오감을 보이는 세대이다. 언더도그마를 반박하기 위해 이 세대에서는 엄벌주의가 대세로 자리잡았다.[60][61] 사회에 진출할 시기에는 본격적으로 경제성장이 둔화되며 N포세대라는 단어가 나와 사회진출에 대한 두려움을 갖게 되었다.

자유한국당 정치인들에 대한 반감은 물론이거니와[62], 극단적 페미니즘에 대한 반발과 문재인 정부의 자유주의 · 개량주의 엘리트들에 대한 실망감, 참담한 경제적 현실, 한국 정치인들 중에서 그 누구도 20대 남성에 대해 지속적인 관심과 도움을 주지 않는 현실 때문에 다른 정당에 대해서도 비판하는 정치혐오 무당층이 늘어나고 있다.

대부분은 이전세대인 1970년대생과 1980년대생하고는 다르게 반중, 친미성향이 가장 짙은 세대이다.[63]

일부는 아예 대안 우파 비슷한 성향을 띄기도 하며, 독자적인 세력화를 추구하는 부류도 있다.

문재인 정부가 사회 이슈로 떠오른 페미니즘적 이슈와 혜화역 시위를 기점으로 분석한 정부 보고서에서 이루어진 20대 남성에 대한 분석에선 자신들에 대한 지지율이 떨어진 이유로 젠더 갈등이 주된 원인으로 파악하고 있으며 그 이유로는 20대 남성들이 경제적 생존권과 실리주의를 우선시하게 되면서 정치적 유동성이 강한 실용주의 집단으로 변모 했으며, 법과 원칙의 공정한 적용만이 자신의 미래 개척에 대한 유일한 수단이라 의지했으나 정부의 친 여성 정책등에 대해 그런 원칙들이 흐려지며 느낀 상대적 박탈감과 좌절감을 정치적 지지 철회로 표현했다고 분석하고 있다. 또한 20대 남성의 이익이나 입장을 대변할 정치적 우군이 없다는 인식이 그들에게 팽배하며 20대 남성은 보편적 인권이나 연대의 가치 보다는 개인의 인권(생존권)을 더 중시함으로써 사회적 배려심이 매우 낮다고 평가하고 있다. # 물론 사회적 배려심에 대한 문제는 생각해 볼 여지가 있다. 상술 되었듯, 청년 실업들의 경제적 문제가 사회 인식에 있어서 남성에게 좀 더 가중되는 경향이 있고 개인의 생존권을 확보하고 중시할 수 밖에 없는 환경에 처해 있기 때문이다.

6.1.3. 여성

제19대 대통령 선거에 대한 한국갤럽여론조사에 의하면[64], 문재인심상정에 대한 지지율이 20대 여성에서 각각 56%, 18%를 기록하며 더불어민주당정의당에 통합 74%의 지지를 보냈다. 그리고 자유한국당에 대한 반감이 제일 강하기도 한다.

하지만 3040대와 달리 사회민주주의 등 구좌파나 사회자유주의에 대한 지지는 극히 미약한 편이다.

6.2. 행정구역 개편에 따른 1990년대생의 고향 변동

1995년 문민정부행정구역 개편 및 도농통합 정책으로 이들은 출신도 엇갈리거나 애매한 편이기도 하다. 1995년에 통합된 충청북도 충주시는 이전에는 충주시와 중원군으로 나뉘었는데 충주시 동 단위 출신들은 충주시, 읍면 단위 출신들은 중원군으로 분류되었기 때문이었다. 본래 군 단위지역 중 읍 단위 지역들이 자치시로 승격되면서 군에서 분리된 영향으로 시와 군으로 나뉜 영향이 컸는데 문민정부가 행정구역 개편 및 도농통합 정책을 하면서 일부 통합되지 못한 시·군을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시로 통합되어 오늘에 이른다. 1995년 이전에 태어난 충주시 읍·면 단위 출신들은 중원군 출신으로 분류되었으며 1995년 중원군이 충주시로 통합되면서 충주시 출신으로 분류하게 된다. 강원도 강릉시도 강릉시와 명주군으로 나뉘었던 시절에는 1994년생까지 강릉시 시내 출신은 강릉시, 읍·면 출신은 명주군으로 분류되었다가 1995년 강릉시로 통합되면서 강릉시 출신으로 통합되었다.

울산 출신들의 경우 1997년 상반기 출신까지는 경상남도 울산시 출신으로 등록되었는데 그 해 울산이 광역시로 분리·승격 되면서 1997년 하반기 출신부터 울산광역시 출신으로 등록된다. 때문에 이전 광역시 분리 이전 출신들은 경상남도민으로 분류된 적이 있었다.

인천 강화군, 옹진군(인천) 출신들은 1995년 2월까지는 인천시민이 아닌 경기도으로 분류되어 있었다. 그 당시까지는 강화, 옹진이 인천이 아닌 경기도 군이었기 때문. 1995년 3월 1일에서야 정부 행정령에 따라 경기도에서 인천으로 강화, 옹진이 편입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인천 서구 검단 지역도 1995년 2월까지는 경기도 김포시였기 때문에 그 당시 출신들은 김포시 출신으로 분류되었다가 3월 출신부터 인천 서구 출신으로 분류된 것이다.

그리고 1992년 시로 승격되어서 일산신도시 러시를 맞았던 고양시 출신들은 1992년생을 기준으로 고양시 출신으로 불렸지만 92년 이전생들은 고양군 읍·면 출신으로 분류되었다. 여기에 고양 일산과 성남시 분당구1기 신도시화가 되면서 일산과 분당에서 태어난 이들은 고양과 성남이 아닌 일산과 분당 출신이라고 자칭한다.

7. 1990년대에 들어가는 해

1990년 - 1991년 - 1992년 - 1993년 - 1994년 - 1995년 - 1996년 - 1997년 - 1998년 - 1999년

8. 관련 문헌

  • 한국 현대사 산책 1990년대편: 3당합당에서 스타벅스까지(전 3권) - 강준만 저. 인물과사상사. 2006.


[1] 특히 1994년 상반기에는 보스니아, 르완다, 하반기에는 체첸이 각각 내전을 겪으며 현실에 지옥도가 펼쳐져 폐쇄적 민족주의의 단점을 제대로 드러냈다.[2] 과거 선사 시대농업 혁명, 18세기산업 혁명과 더불어 인류 문명을 획기적으로 변화시킨 3대 혁명 중 하나에 해당된다. 그 첨병은 바로 인터넷.[3] 이는 미국 흑인들 사이에선 거의 신화급으로 받아들여진다. 심지어 08년 대선 민주당 경선 초기엔 흑인인 오바마 상원의원보다 빌 클린턴의 부인이었던 힐러리 상원의원이 흑인들 사이에서 지지율이 압도적으로 높기까지 했었으니[4] 교양만화가 이원복 교수 등 일부 학자/전문가들이 언급했듯, 식민지 시절 열강이 멋대로 그은 경계선 때문이라는 시각도 있다.[5] 빠른 93[6] 뒷부분에는 종로성신여대입구역 근처의 모습도 나온다.[7] 하지만 이 당시 시중 자금이 부동산으로 대거 몰려든 덕택에 집값과 전월세비 상승폭이 임금 상승률을 추월할 정도로 폭등하여서 실제 일반인들 체감은 이에 못미쳤다. 물론 자가용이 한창 대중화되어갔고, 해외여행 자유화에 따라 해외여행객도 급속히 증가하기 시작했기 때문에 어쨌든 이전과는 확연히 다르다는 느낌이 들기는 들었다.[8] 그 해에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의 국민소득은 2만 달러 초반대였고 미국, 독일은 2만 달러 후반대였으며 일본만이 3만 달러가 넘던 시기였다.[9] 더글러스 커플랜드라는 캐나다 작가의 소설에서 유래한 단어로, 원래 뜻은 1970년대에 태어나 석유파동의 후유증을 보며 자란 뒤 실업률이 급증한 상태에서 좋은 직장에 들어가려는 꿈은 포기했으나 옷차림 등을 통해 개성을 표현하려는 욕구는 넘쳐났던 세대를 가리키는 단어였다.(출처는 이원복의 현대문명진단과 시사저널 1993년 8월 19일자 기사) 다만 한국에서는 사회 분위기가 보수적이었던 데다 1996년경까지 호황기였던 관계로 뭔가 다른 의미가 된 것.[10] 그러나 이는 자연스러운 현상인데, 대중 문화는 본래 취향의 '선택'으로 이루어지며 그러한 과정이 수용자의 개성을 확정짓는 역할을 하게 되어 있다. 한국의 대중문화는 이 당시까지는 성숙되지 않았기 때문에 이러한 '선택' 범위가 그리 많지 않아서, 개성을 추구하지만 결과적으로는 획일적으로 보이게 된 것이다.[11] 이 시기의 문화 소비에 대해 일명 '명품세대'라는 용어도 있다.[12] 1980년대 후반-90년대 초반에 방영된 영심이달려라 하니, 천방지축 하니, 사랑이 꽃피는 교실, 푸른교실과 1990년대 중후반에 방영된 신세대 보고 어른들은 몰라요, 학교 시리즈, 사춘기(드라마), 나(드라마)를 보면 등장인물로 나오는 학생들의 복장이 확 다르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13] 애초에 서슬 퍼런 5공화국 시절에도 과외는 금지시켰지만 멀쩡히 운영하고 있던 학원들까지 죄다 문을 닫게 할 수 없는 노릇인지라 학원들이 운영하였고 그 덕택에 사교육 문제는 여전히 문제점이었으니 당연한 수순일 수밖에 없기는 했다.[14] 정확하게 얘기하자면 1980년대까지는 그래도 농촌지역 인구수가 지속적으로 줄어들었어도 그나마 수는 되었지만, 이것도 인구유출이 지속되는 상황에서는 무력했던 데다가 1980년대 이후로 저출산 현상까지 나타나면서 농촌 지역 자체의 인력이 부족해지게 된 것이다.[15] 1990년대부터 기업주들이 싼 임금의 유혹으로 인한 이기주의가 팽배하여 외노자들이 급격히 늘어났다.[16] 사실 이는 당연한 것이 1980년대 산아제한 정책의 영향으로 출산율이 1.5명대까지 줄어들면서 1984년부터 1990년까지 출생아수가 60만 명대까지 떨어졌고, 이 시기에 태어난 세대들이 한창 학창생활을 보냈을 때가 1990년대 ~ 2000년대이다. 이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1980년대의 저출산 경향 참조. 물론 당대에는 남아선호사상을 제외하면 그다지 큰 문제로 부각되지는 않았지만, 농어촌지역이나 탄광촌에서 고령화와 인구감소 문제가 대두되었다. 그러나 이에 비례해서 인구정책이 따라온 것은 아니라서 산아제한 정책은 1996년도에 와서야 폐지되었다.[17] 사실 1990년대 초반까지는 대학진학률은 20-30%대 정도의 수준이었고 대학에 입학하는 것 자체가 위낙에 빡센 일이었기 때문에 덜했던 정도였다. 물론 대입시험 보느라 생고생했던 사람은 많았지만.[18] '사람은 무조건 대학을 가야 한다', '대학 안 가면 사람 새끼가 아니다'라는 용어.[19] 1990년대~2000년대 당시 중학교에서는 인문계를 중시하고 상고와 공고를 천시했으며, 인문계고교에서는 무조건 대학 입학만 중시하고 학생의 진로와 생각을 편협하게 만드는 교육을 북한처럼 세뇌교육 형식을 통해 교육했다(한국판 북한 학교). 학부모들도 역시 이에 격렬하게 동조하였고 당연하게도 당대에도 많은 사회문제가 되었지만 이후에도 대학을 가야 안정된 직장에 취직하기 쉽다는 메리트 때문에 변하지 않았다. 그리고 2010년대엔...[20] 최근 2018년 6월 22일자로 마지막으로 살아있었던 김종필이 별세하면서 3김 정치는 막을 내렸다.[21] 대통령에 대한 호칭이 각하에서 님으로 바뀐 것도 이때다. 강원국의 '대통령의 글쓰기'에 따르면, 연설문에서도 권위적인 면을 줄이려고 노력했다고 나와있다.[22] 1991년 분신정국 후 점차 약해지다 이후 X세대들의 입학, 1996년 연세대 사태로 운동권은 NL이고 PD고 간에 헤드샷을 맞아 쇠퇴하고 말았다.[23] 엄밀히 말하자면 1970년대 오일쇼크 때도 있었기는 했지만 너무 간격이 멀고(...) 1990년대 초반에도 3저호황이 끝나고 해서 중소기업들의 파산률이 크게 늘어나고 경상수지도 적자로 돌아섰으며 물가도 급상승하는 테크를 밟았지만 그래도 성장률은 5% 이상 정도의 수준은 유지하기는 했다.[24] 이 무렵 헐리웃에선 에어 포스 원, 아마겟돈, 진주만 등 미국 중심 사관의 영화들이 전성기를 이루고 있었는데, 이는 냉전에서 승리한 당시 미국민들의 자신감을 반영하는 것이기도 하다.[25] 어설픈 경기 부양과 인구 감소로 집값 폭락한 일본[26] (1990~1999)일본과 주요 국가의 명목 GDP 흐름[27] 이후 추락을 거듭하여 2007년부터는 800억대 선까지 내려왔으나 온라인 음반시장은 자리를 잡아가면서 꾸준히 상승하고 있다.[28] 확실히 이건 MBC 대학가요제의 공이 컸다. (그런데 015B는 전신이었던 무한궤도부터 생각하자면 1988년 데뷔다.) 하지만 대학가요제로 대학생이 가수로 데뷔하는 건 대학가요제가 만들어진 시기인 1970년대 후반부터 있었다. 단지 1970년대 후반의 대학생들이 아마추어의 풋풋함이 있었다면 1980년대 후반 이후 등장한 대학생 가수들은 등장부터 이전 선배들과는 다른 프로 뮤지션으로서 데뷔했다는 차이가 있다.[29] 김건모의 경우 레게 팝을 비롯한 흑인 음악과 댄스곡, 신승훈은 정통 발라드[30] 거꾸로 말하면, 한국에서 레이저디스크가 영 힘쓰지 못한 이유도 여기에 있으며 특히 이러한 분위기가 팽배했던 1980년대 이전 가수의 평가기준은 순수하게 가창 실력 및 음악 그 자체에 집중되었기 때문에, 조용필 등이 이러한 시스템 하의 최대수혜자(중 하나)라는 의견도 존재한다.[31] 이 문단은 독자연구/집단연구임을 밝힌다.[32] 게임외적인 부분의 CG/실사동영상을 재생하는 용도가 메인이었지만 몇몇 게임은 이러한 풀모션 비디오를 배경에 일부 박아넣는 식의 연출 용도로 활용하기도 했다. 대표적으로 파이널 판타지 7에서 이런 기법이 많이 사용되었다.[33] 그러나 이 브랜드들은 모두 IMF 시기에 회사가 망하거나 인수되면서 현재는 사라졌다.[34] 허준의 경우 방송 시작은 1999년이지만 최고 시청률(63.7%)은 2000년에 기록했다.[35] KBS 3TV, 교육FM.[36] 임백천, 최수종, 이수만, 이문세[37] 이홍렬, 서세원 등 진행력이 좋은 개그맨들도 메인 MC를 많이 맡았다.[38] 1990년 KBS2에서 인기 개그 코너 쓰리랑 부부의 후속작으로 방영된 <쓰리랑 가족>을 최초의 시트콤으로 보기도 한다.[39] 지금도 깨지지 않는 날아라 슈퍼보드의 최고 시청률(42.8%)이 이 무렵에 세워진 기록이다.[40] 이 중 드래곤볼은 1980년대에 연재가 시작되었다.[41] 후자의 경우, 정확히는 1990년대 초중반의 서태지와 아이들, 듀스 같은 뉴 잭스윙, 힙합, 브레이크비트성 댄스 뮤직이다.[42] 주인공인 황경민, 정종석이 15년 전 중학교에 입학했을 때 김철이 존재했을 당시의 중학교 시절을 회상한 시기로, 김철이 "부모? 야, 내가 국민학교 때 아빠라는 인간은 사업 망하자마자 도망쳐버렸어. 우리 버리고..."라고 말하는데 그 대사를 봤을 때 '국민학교'라는 단어는 1995년까지 사용했다. 그리고 일부 장면에서는 워크맨도 언급했다.[43] 물론 오락실2000년대 시망했지만.[44] 1995년 4월부터 출고되는 입석형 버스에는 냉·난방장치가 설치되서 나온다.[45] 정확히 말하면 대책으로 내놓은 2번째 프로그램이다. 1번째는 브라보신세대...[46] 1995년 1월에 통합된 다른 시와 다르게 1998년 4월에 통합됨.[47] 스트리트 파이터가 맨 처음 나온 때는 1987년이다. 그때도 당연히 1980년대에도 인기가 있었다. 스트리트 파이터 2 시리즈는 연장선인것.[48] 당시 전뇌회선상 유머의 주 매개체였다. 인터넷 보급은 90년대 말이 되어야 보급이 되었다.[49] 이 외에도 PC통신으로 시작된 유머 시리즈들은 많지만, 그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기에 언급해본다.[50] 오늘날의 포털 사이트 카페 서비스 같은 개념이다.[51] 1990년대 말을 풍미했던 당시 휴대전화통신 시스템.[52] 한국에서는 스타크래프트 때문에 잘 와닿지 않지만, 의외로 게임 완성도와 재미를 떠나 세계적으로 오카리나라는 악기의 인기를 견인하는 데에 큰 역할을 했다.[53] 다만 90년대 중반 이후로 주도권을 CD에게 내줘야만 했다.[54] 귀를 뚫지 않고 귓바퀴에 끼워 거는 식의 악세사리.[55] 당시 이렇게 개작해서 많이 하곤 했다.[56] 캡틴의 줄임말이다. 하지만, 실질적인 어원은 일진문화에 두고있다는 게 씁슬하다. 그래서 근성모는 그레이트 캡짱이라는 만화를 내놓았나보다?[57] 특히 이 사건들을 군복무 도중 겪은 사람들이 주로 1990-95년생 남성들이다.[58] 정치 성향을 떠나서 북한에 대한 경멸적인 시선이 강하다. 심지어 극좌, 사회주의 성향이라도 북한의 사회주의적 성격을 아예 인정하지 않는 국가자본주의론이나 관료집산제 이론, 세습 봉건 왕조론 등을 지지하는 경우가 절대다수이며 주체사상, NL에 대해서는 극혐하는 경향이 우세하다. 다만 이들 중에서도 원래부터 북한에 포용적이었거나 문재인 정부의 대북 유화 정책으로 인해 생각이 바뀌는 이들도 많다.[59] 한국갤럽 2018년 10월 여론조사 통합 자료에 의하면, 무려 39%의 20대 남성이 무당층인것으로 나왔다.[60] 노점 철거 갈등, 리쌍 곱창집 사건만 봐도 무조건 약자를 옹호하지 않고 법에는 법대로 엄벌주의 사고방식에 입각한다. https://m.fmkorea.com/best/1283661685[61] 이전, 이후 세대와 달리 유독 이들 세대만 이런 현상이 나타나는 이유로는 이들의 발달된 인터넷 문화, 현재 실정 영향이 크다.[62] 한국갤럽 여론조사에서 20대 남성의 자유한국당 지지율은 극도로 낮은 편이다.[63] 그중 일부는 일본 서브컬처물의 영향을 받아 친일 성향을 띤다. 다만 이는 문화적 영역에 한정되고, 일본의 역사왜곡, 일본의 독도 영유권 주장, 일본군 위안부 문제, 일본 해상초계기 저공위협 비행 사건, 신일철주금 강제징용 소송에 따른 2019년 일본의 대한국 수출 통제 등 정치, 군사 이슈에 대해서는 철저히 반일 스탠스를 취한다.[64] 선거 전전날~전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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