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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 에포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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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 에포크
La Belle Époque
파일:1280px-Le_Chateau_d'eau_and_plaza,_Exposition_Universal,_1900,_Paris,_France.jpg
1900년, 프랑스 파리의 만국박람회장[1]

1. 개요2. 시작과 끝3. 밝은 모습
3.1. 평화로운 국제관계3.2. 민주주의와 여러 사상의 발전3.3. 산업과 기술 발전
4. 어두운 이면
4.1. 식민지4.2. 사회적 불평등
5. 이후6. 유사 시기
6.1. 미국: 광란의 20년대(Roaring 20's)6.2. 영국: 빅토리아 시대(Victorian Era)6.3. 프랑스: 광란의 시대(Les Années folles)6.4. 독일: 황금의 20년대(Goldene Zwanziger)6.5. 포르투갈: 폰티스무(Fontismo)6.6. 일본: 다이쇼 로망(大正ロマン)6.7. 중화민국: 난징 10년(南京十年)6.8. 제2차 세계 대전 이후의 유사 시기
7. 대중매체
7.1. 드라마 청춘시대의 배경이 되는 집
8. 여담9. 영상자료10. 관련 문서11. 외부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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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벨 에포크(Belle Époque)[2]유럽사시대 구분 중 하나로, 프랑스어로 '아름다운 시절'이란 뜻을 지닌 단어이다. 보통 19세기 말부터 제1차 세계 대전 발발 전까지 전 유럽이 평화를 누리며[3] 경제, 문화가 급속하게 발전한 태평성대를 뜻한다.

비슷한 시기로, 팍스 브리타니카 시기인 1815년 나폴레옹 전쟁 종결 이후부터 1914년 제1차 세계 대전 발발 직전까지 아울러 '백년 평화(Century of peace)'라고 지칭하기도 한다.

2. 시작과 끝

정확한 연도를 따지자면 벨 에포크의 끝이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한 1914년이라는 것에는 이견이 없지만 벨 에포크의 시작을 정확히 몇 년도로 잡는지는 역사학자마다 조금씩 다르다.

역사학자 도미니크 르준은 1896년으로 잡고(출처) 또다른 역사학자 도미니크 칼리파는 1900년으로 잡으며(출처), 크리스티 경매의 공식 웹사이트의 벨 에포크 시기 미술품 소개 페이지에서는 프랑스 제2제국의 붕괴(1870년)를 시작으로 잡고 있다.(크리스티 공식홈 소개 페이지)

비슷한 시기로 팍스 브리타니카(1815~1914[4])가 있다. 1차 대전 발발 이전의 평화롭던 시기라는 것은 비슷하나, 팍스 브리타니카는 정치외교적 의미가 강한 시대 구분인데 비해 벨 에포크는 단순히 평화 뿐만 아니라 경제와 과학기술, 문화적 양식이나 스타일까지 포함한 의미의 시대구분이다. 하지만 통상적으로 두 시기 모두 역사상 전쟁이 별로 없는 평화로운 시기였기 때문에 벨 에포크와 팍스 브리타니카 두 용어를 혼용하는 편이며, 따라서 1815년 나폴레옹 전쟁 종결부터 1914년 제1차 세계 대전 발발 이전까지의 시기를 '백년 평화'라고 역사학계에서는 지칭한다.

3. 밝은 모습

3.1. 평화로운 국제관계

백년평화라고 지칭된 이 시기는 오스트리아 제국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존속한 시기(1804 ~1918), 독일 제국이 존속한 시기(1871~1918)와 거의 일치한다. 이 시기의 평화가 메테르니히비스마르크의 외교적 능력에 의해 이루어지게 된 것임을 암시하는 대목이다.

메테르니히는 1815년 빈 회의를 통해 나폴레옹 전쟁 종결 이후 유럽에 다시는 나폴레옹과 같이 유럽의 균형을 뒤엎는 인물이 나오지 않도록 하려고 애쓴 인물이다. 그는 각국의 이해관계를 잘 조율해서 유럽에 힘의 균형이 유지되는 평화로운 체제를 만들었다. 그와 프랑스의 탈레랑 등 당대 명외교관들의 노력으로 인해 형성된 체제는 빈 체제라고 불리워지며 향후 백년평화의 토대가 된다. 그렇기에 1800년대 초중반은 메테르니히 체제라고 불리기도 한다.

하지만 1800년대 중반이 되면서 이 평화롭던 체제의 균형이 한번 휘청이는데, 각국에 민족주의가 팽창하고 시민계급이 성장해서 전근대적인 귀족 세력이 주도해서 만들었던 빈 체제에 여러 불만을 제기했고, 프로이센과 러시아의 국력이 빈 체제 형성 시기보다 강해지면서 균형의 무게추가 기울기 시작한 것이 주 원인이었다.[5] 프로이센은 자신의 팽창을 억제하려는 오스트리아와 프랑스를 상대로, 러시아는 오스만과 영국을 상대로 갈등을 키워나갔다. 이런 갈등은 결국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 프로이센-프랑스 전쟁, 크림전쟁 등으로 터져 나온다. 하지만 이런 갈등이 대전쟁으로 확전되지 않게 빠르게 갈등을 수습하고 다시 균형을 되찾은 것에는 비스마르크의 기여분이 컸다.

비스마르크도 전쟁을 일으키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6] 그는 외교적 수단을 더 선호하고 외교적 수단을 다 써도 목적을 달성할 수 없을 때에 쓰는 최종 수단으로만 전쟁을 했다. 독일 제국 성립 후의 비스마르크는 식민지 확보에 대해서 회의적인 편이었던 데다가[7] 아직 영국, 프랑스, 러시아와 동시에 싸우기에는 독일의 힘이 부족하고, 그럴 필요도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영국, 러시아와의 관계를 돈독히 하거나 최소한 대립관계는 만들지 않기 위해 애썼다.[8]

특히 그는 전쟁을 외교의 연장선으로만 여겼기에 전쟁으로 달성할 수 있는 한계를 명확히 이해했다. 그렇기에 오스트리아와 프랑스를 상대로 승전했음에도 패배한 국가들도 납득 가능한 수준의 평화조약을 제시해 빠르게 종전하고, 그들이 독일에게 쉽사리 보복전쟁을 일으키지는 못하도록 영국, 러시아와 우호관계를 맺어 대국적인 판세를 독일에게 유리하게 조성해놨기 때문에 유럽의 평화가 지속될 수 있었다. 또한 크림전쟁에서도 영국과 러시아의 갈등을 조율해 종전을 빠르게 끌어내는 협상자 역할을 잘 수행했다.[9] 게다가 독일 국내에서 성장한 시민계급들이 주장하는 복지 정책, 의회 개편 등의 의견도 잘 수용해서 체제 내부 갈등도 무마했다. 그렇기 때문에 1800년대의 후반기는 비스마르크 체제라고도 불린다.

이렇게 걸출했던 두 사람을 포함한 당대 집정자들과 외교관들의 노력으로 인해 유럽에서는 나폴레옹 전쟁이 종결된 1815년부터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는 1914년 이전까지 약 100년 동안 평화가 지속되었다. 이 시기에도 전쟁은 있었지만 대부분 발칸반도 등 동남유럽이나 유럽이 아닌 아시아, 아메리카, 아프리카 등에서 일어났고 유럽 주요 열강(영, 프, 독, 오, 러)[10] 사이의 전면적 전쟁은 거의 없었다. 있었다 해도 크림 전쟁[11], 제2차 슐레스비히 전쟁[12],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 프로이센-프랑스 전쟁 정도였으며, 다 합쳐도 44개월 정도에 불과했다.[13]

3.2. 민주주의와 여러 사상의 발전

이 시기에 시민혁명이나 참정권 확대 운동을 통해 민주주의가 점진적으로 발전했다. 대표적으로 프랑스에서 일어난 7월 혁명2월 혁명, 영국에서 일어난 차티스트 운동이 있다.

또한, 민족주의가 본격적으로 유럽에서 꽃핀 시기이기도 했다. 그 결과, 1830년그리스오스만 제국으로부터 독립했고,[14][15] 독일과 이탈리아 지역에서는 분열된 상태를 끝내고 통일을 이룩하기 위한 움직임이 일어나게 되었다. 이러한 움직임의 결과, 독일에서는 1834년프로이센 주도로 관세동맹이 체결되었으며, 1848년에 독일 통일방안을 논의하기 위해 프랑크푸르트에서 국민의회가 열렸고, 1867년북독일 연방이 결성되어 독일 통일의 기틀을 닦았다. 또한, 이탈리아에서는 이탈리아 통일운동이 전개된다. 결국 1870년이탈리아의 통일이, 1871년독일의 통일이 이루어졌다. 반면, 다민족 국가인 오스트리아는 민족주의의 대두로 인해 위기에 빠졌고, 이러한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오스트리아는 1867년헝가리와 대타협을 하여 이중 제국인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을 만들게 된다.[16]

사회주의가 대두된 것도 이 시기이다. 당시 노동자의 비참한 생활과 잉여 자본으로 인한 엄청난 빈부격차는 사회주의 사상이 대두되는데 좋은 조건을 제공해주었다. 특히 카를 마르크스가 사회주의 사상을 총집대성하여 자본론을 집필하고, 공산당 선언을 만듦으로써 사회주의 사상이 유럽 전역으로 퍼지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여기에 대항하기 위해 유럽 각국은 사회주의 사상가와 단체에 대해 엄청난 탄압을 가했으며[17], 한편으로는 노동자의 처우를 개선하기 위한 정책을 펼치기도 했다.[18] 하지만 제1차 세계 대전 개전 이후 사회주의 탄압 정책이 한계에 달하자 러시아 혁명, 스파르타쿠스 봉기 등의 형태로 사회주의 세력이 반란을 일으키는 사례가 등장하게 되었다.

마지막으로 이 시기는 제국주의가 절정에 달한 시기이기도 했으며, 일본근대화를 시작한 시기이기도 하고, 미국이 조용히 힘을 키워나간 시기이기도 했다.

3.3. 산업과 기술 발전

파일:external/www.flatrock.org.nz/crystal_palace.jpg
1851년 건설된 런던수정궁
이 시기에 엄청난 양의 혁신적인 기술들이 쏟아져 나왔으며, 과학모든 문제를 해결할 거라는 진보적 사상에 많은 이들이 희망에 부풀어 있던 시기이기도 했다. 대책없는 낙관주의라고 탓하기도 뭐한게, 수세식 화장실부터 전화, 무선통신, 철도, 엘리베이터, 자가용, 여객선, 비행기에 이르기까지 현대인의 생활 전반에 큰 영향을 미치는 것들의 초기형태가 이 시대에 만들어져 보급되었으며, 이러한 인프라를 바탕으로 관광업이 본격적으로 발달하기 시작한 것도 이 시기이다. 이런 상황 속에서 나폴레옹 전쟁을 보고 자란 노인들이 자기 손자가 주말에 기차타고 바캉스를 가는 걸 보고 있으면 미래에 대한 낙관과 희망이 생기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4. 어두운 이면

파일:인간 동물원.jpg
파일:식민지 착취.png[19]
파일:아동 노동.jpg

4.1. 식민지

거대한 경제 발전을 이룩한 산업혁명, 그리고 민주적 절차를 형성한 시민혁명으로 유럽은 세계를 선도하는 지역이 되었으나 이는 유럽 이외의 다른 지역의 희생을 필요로 했다. 유럽 국가들은 이런 번영을 유지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제국주의 경쟁을 펼쳤고, 백인의 짐과 같은 식으로 이를 정당화했다.

식민지들은 서구 열강에게 자원을 강탈당하고 대신 종주국의 상품을 떠맡는 신세가 되었다.[20] 프랑스가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에서 술과 아편의 제조 및 판매를 독점했듯이 돈이 되는 상품들은 서구 열강이 독점하는 사례 역시 있었다.[21]

식민지의 문화와 관습, 사상은 야만으로 묘사되었고 식민지인들은 외양이나 협력 여부에 따라 등급이 나뉘어졌다. 당연히 미개하고 열등한 인종이 되는 이들은 서구 열강의 지배에 저항한 민족들이었다. 영국 인도청이 인도 내 민족들의 사진집을 발간한 적이 있는데 영국인들은 이 책에서 세포이 항쟁에 가담했던 민족들은 폭력적이고 불법적인 야만인이라 묘사한 반면 동인도회사에 호의적이고 세포이 항쟁에 가담하지 않은 민족들은 그나마 문명화된 민족으로 묘사했다고 한다.[22] 이러한 유럽인들의 시각은 다윈의 진화론에서 파생된 사회진화론이 보편적인 기저 사상으로 자리잡았기 때문이다.

식민지들이 독립할 수 있던 시기는 제2차 세계 대전으로 기존 식민제국들의 힘이 어느 정도 빠지고, 완벽한 열강인 미국과 소련이 모두 식민 경제 자체를 파괴하는 것에 동의한 뒤였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식민지 시절 상전이었던 유럽 국가들의 경제 문화적 영향력이 계속 이어지는 것과 유럽의 인종차별 문제[23] 역시 이 시기에서 비롯된 것을 보면 벨 에포크 시대에 식민지와 유럽에 드리운 어둠이 얼마나 큰 것이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24]

4.2. 사회적 불평등

비단 식민지 지역뿐 아니라 열강 역시 자국 내에서 극심한 불평등에 시달렸다. 하층의 노동자들은 하루에 십수시간에 달하는 노동과 주말에도 쉬지 못하고 일했음에도 주어지는 돈은 푼돈에 불과했고 이는 사회주의 운동의 원인이 되기도 하여 러시아 등지에서 반정부 혁명과 뒤이은 러시아 제국 정부 전복 등으로 나타난다.

토마 피케티는 1789년부터 2010년까지 프랑스의 상속문서와 여러 자료들을 토대로 부의 불평등정도를 조사했는데 1789년 프랑스 혁명이란 대사건이 있었음에도 프랑스의 부의 불평등도는 줄기는 커녕 1914년 제1차 세계 대전까지 늘어만 왔다는 것을 증명했다. 특히 이 불평등은 벨 에포크 시대(1880~1914년) 때가 정점이었다고 하며 1900년대 기준으로 프랑스 상위 1%의 전체 부의 점유율은 55%에 근접했고 파리의 경우는 1%의 점유율이 1910년 기준 68%에 근접했었다. 1789~1914년까지 상위 10%에게 평균적으로 국부의 80~90%가 집중되어 있었던 것이다.

복지 제도, 고용보험 등 사회적 안전망 구축이 독일, 영국 등 몇몇 국가에서 서서히 시작되긴 했지만 제대로 갖춰져 있지는 않았던 시대라 유럽 내에서도 노동자들에겐 매우 힘들었던 시기이며, 이 때문에 곳곳에서 사회주의 운동이 발생했다. 공산당 선언을 쓴 카를 마르크스 또한 이 당시 사람이다. 차티스트 운동 등의 치열한 투쟁 끝에 성인 남성의 보통 선거권은 인정받게 되었지만, 여성은 여전히 정치적 참여에서 배제되었으며 시간이 지나 1차대전이 끝나서야 여성에게 참정권이 부여되었다. 이마저도 전쟁 이후 풀려나온 자본에 의한 잠시의 호황기 때문이 아니라, 1차 대전으로 공장에 남자들이 비어버리자 그 자리를 급하게 대체한 여성 노동자들이 끊임없이 요구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남성 노동자들은 그래도 그나마 벨 에포크 이전 시기보다는 대우가 좋아지고 사회적 인식이 향상된 시기라고 하지만, 어디까지나 그 이전 시대와 견줘 나아졌을 뿐 여전히 절대적인 삶의 질 개선은 미미하고 매우 열악한 수준이었다. 여성 노동자의 경우 남성 노동자 못지 않게 노동력의 많은 부분을 차지했지만 여성들의 임금은 낮았고 그들의 노동 역시 하찮게 취급되었다.[25] 아동 노동자 역시 이전보다는 법령상 보호규제를 받을 수 있었지만,[26] 여전히 높은 강도의 노동과 열악한 노동 환경에서 혹사당했다. 3D산업 노동자들은 온갖 산업재해로 다쳐 평생 장애를 안고 살아가야 하더라도 턱없이 부족한 보상을 받았으며, 심지어 사망하더라도 제대로 보상조차 받을 수 없었다. 이처럼 노동의 가치가 존중받지 못하는 사회였기에 파업 등의 노동운동과 사회주의 운동이 무섭게 벌어지고, 그 결과로써 공산주의 담론이 대두되게 된 것이다.

사회에 반대한 가시적인 사회운동들도 벌어졌으나, 대부분 무자비한 폭력으로 진압당했고 주동자들은 처형당했다. 법과 제도의 개선으로 19세기에 비해서는 많이 나아지긴 했지만 그래도 열악한 환경은 매한가지였다.

이 당시에 영국, 프랑스, 독일, 스페인, 이탈리아, 포르투갈 등에서 아메리카와 오세아니아로의 이민이 성행했던 이유도 여기에 있었으며 이들 후예는 아메리카와 오세아니아 인구에 있어서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5. 이후

작금(昨今)의 유럽은 화약고이고, 지도자들은 무기고 위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을 뿐이야. 작은 불씨 하나가 우리 모두를 집어삼킬 전쟁을 일으킬 거야. 언제 그 폭발이 일어날지는 모르겠지만, 어디서 일어날지는 말해줄 수 있지. 발칸에서 벌어질 저주받을 바보짓폭발을 일으킬 거야.
오토 폰 비스마르크[27]
1912년, 당대 최고 수준의 기술로 만들어진 최대, 최고급 여객선인 RMS 타이타닉빙산에 충돌해 허무하게 침몰하여 탑승 인원 중 오직 1/3만 목숨을 건지는 충격적인 대참사가 일어나며 낙관적이던 벨 에포크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었다.

결정적으로 1914년 발발한 제1차 세계 대전에서 수많은 장병들이 전사하면서 낭만적인 벨 에포크는 막을 내리게 된다. 사냥과 호신에 쓰이던 총들은 전장으로 돌려졌고, 발달한 기계공학과 융합해 방아쇠만 당기고 있으면 알아서 장전하며 수십 명을 죽일 수 있는 기관총, 장애물을 넘어 요새를 무너뜨릴 정도로 파괴적인 포격을 날릴 수 있는 신형 곡사포박격포가 등장했다. 한때 관광객들을 실어 날랐던 철도는 군수물자 조달에 사용되었고, 고귀한 이들을 모시던 자동차들은 장갑판과 기관총을 달고 정찰과 기동전에 투입되었으며, 농사와 중량물 운송에 쓰던 트랙터들은 본래의 모습을 완전히 잃고 장갑을 두르고 대포를 실은 움직이는 요새로 탈바꿈했다. 이 밖에도 비행기, 비행선, 군함, 잠수함 등, 문명의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리라 믿었던 과학 기술이 그 혜택을 누린 문명인들을 살육하는 데 동원된, 이전의 전쟁들과 완전히 다른 양상을 제시한 이 대사건은 벨 에포크의 기반이 된 모든 것을 부정했다. 이로 인해 전간기는 빈말로라도 낭만적이라고 느낄 수 없는 우중충한 시대가 되었다.

위에서 언급한 사회적 불평등에 대한 해결책으로 제시되었던 공산주의 역시 1차 대전 이후 소련이라는 현실 공산주의 국가의 탄생으로 본격화되었다. 카를 마르크스, 프리드리히 엥겔스를 비롯한 좌익 인사/세력들은 현실 개선이 아닌, 제도적 개선에 그치는 민주주의의 현실에 분개하여 '하위 계급'들을 위해 필요한 것은 위선적이고 느린데다 나약한 민주주의가 아닌, 하위 계급과 하위 계급 세력의 대표들을 통해 이뤄지는 독재 체제라고 했다. 공산주의식민지의 크고 작은 '프롤레타리아'에 해당하는 피지배 민족들을 지원하며 기존 제국주의 열강의 질서를 붕괴시키는 데 일조했다.

이후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 뒤에는 미국소련전성기를 맞이하여 세계냉전을 열어젖힌다. 영원할 것만 같았던 호화를 누리던 유럽은 두 차례의 세계 대전을 치르고 입은 피해 탓에 세계를 선도하던 지위를 잃고 그 자리를 미국과 소련에게 내주었으며, 유럽 지역의 안보도 이 두 초강대국에게 휘둘리게 되었다.[28] 낭만적인 분위기 역시 온데간데 없이 냉전 내내 언제고 핵전쟁이 발발할지도 모른다는 공포에 떨어야 했다. 물론 오늘날 유럽인들의 생활 수준은 여전히 세계 최고 수준이지만[29] 더는 세계를 좌지우지하는 정점으로서 그 영향력을 행세하지는 못하고 있다. 때문에 유럽에서는 벨 에포크 시기를 좋았던 옛날로 추억하는 경향이 있다.

6. 유사 시기

6.1. 미국: 광란의 20년대(Roaring 20's)

유럽과 달리 미국은 전성기 시절이 약간 차이가 난다. 실제 벨 에포크와 동시대는 도금 시대(Gilded age)라 하여 강도 귀족이란 미국의 거대 자본가들이 맹위를 떨치던 시대로 기억되지만, 미국사에서 벨 에포크의 이미지와 가장 비슷한 시기는 소위 말하는 광란의 20년대, 혹은 재즈 에이지라고 부르는 1920년대에 해당하며, 1918년 제1차 세계 대전 종전 이후부터 1929년 대공황이 터질 때까지를 지칭한다. 금주법으로 인해 알 카포네를 비롯한 마피아들이 전성기를 누리던 시기를 떠올리면 쉬울 것이다. 해당 시대를 모티브로 한 SF, 판타지 작품들을 벨 에포크풍이 강한 스팀펑크와 구별하여 디젤펑크로 다루기도 한다.

6.2. 영국: 빅토리아 시대(Victorian Era)

영국에서는 벨 에포크보다는 빅토리아 시대(Victorian era), 에드워드 시대(Edwardian era) 등 군주의 재위기간으로 시대구분을 하는 일이 일반적이며, 흔하지는 않지만 팍스 브리타니카(Pax Britannica) 시대의 부분으로 인식하는 경우도 있다. 다만 쓰이는 단어가 좀 다를 뿐이지 사실상 동 시대라고 봐도 무방하다.

6.3. 프랑스: 광란의 시대(Les Années folles)

프랑스에서는 벨 에포크가 1차 세계대전 이전의 낭만적인 모습을 서술하는 용어라면, 안네 포르(Années folles)는 1920년대의 낭만적인 모습을 묘사하는 용어로 쓰인다. 미국사에서 1920년대 호황기를 지칭하는 광란의 20년대와 같은 의미로 쓰인다고 볼 수 있다.

6.4. 독일: 황금의 20년대(Goldene Zwanziger)

독일은 1918년, 제1차 세계 대전에서 패전했다. 이후 독일 제국은 해체되고 바이마르 공화국이 출범하는데, 이 시기에 문화적으로 역설적인 부흥을 누린 짧은 시기를 황금의 20년대(Goldene Zwanziger)라고 한다. 기간상으로는 채 10년도 되지 않는 시기이며, 보는 이의 관점에 따라서 5년 정도의 기간으로 보기도 한다.

제국 체제에서 공화국으로 변화한 독일은 불안한 정치상황 속에서 문화적 해방감이 극에 달했다. 막대한 배상금에도 불구하고 바이마르 공화국은 화폐를 마구 찍어냈고, 유래없는 초인플레이션이 일어났지만 독일은 이를 효과적으로 방어한다. 이윽고 대공황이 올 때까지 의외의 황금기를 맞는다. 베를린카바레는 그 광기의 상징과도 같았으며, 하늘에서마저도 각종 럭셔리 가구들과 도자기를 실은 제펠린이 날아다녔다.[30] 정치풍자 역시 활발했으며, 예술적 기조의 등장과 발전은 '빈 공방(Wiener Werkstätte)'과 '바우하우스'로 대표된다.

그러나 이후 1조 : 1에 달하는 렌텐마르크의 문제가 발목잡아 결국 발생한 디플레이션은 감당할 수 없는 수준으로 불어나 경제가 몰락했고, 바이마르 공화국은 가장 처참한 형태로 변화한다. 이 시기를 "빌려온 시간(Borrowed Time)"이라고도 한다.

6.5. 포르투갈: 폰티스무(Fontismo)

포르투갈에서는 포르투갈 내전 이후 안정을 찾고 산업화가 이뤄지고 도로, 철도, 교량 등 사회간접자본 건설이 활발했던 19세기 후반(정확히는 1868년부터 1889년까지) 기간을 당시 총리를 지낸 유력 정치인 폰트스 페레이라 드멜루(Fontes Pereira de Melo)의 이름을 따 폰티스무(Fontismo)라 일컫는다. 다만 이러한 번영은 실질적으로는 영국에서 빌려온 차관으로 이뤄낸 빚잔치에 불과했고, 1890년 남부 아프리카 내륙지역에서 포르투갈군 철수를 요구한 영국의 최후통첩을 정부가 굴욕적으로 수용하며 정치적 안정이 무너지기 시작해 왕 카를루스 1세 암살 등의 사태를 거쳐 1910년 공화국 전환이 이뤄진다.

6.6. 일본: 다이쇼 로망(大正ロマン)

일본의 경우는 다이쇼 시대(1912년~1926년)가 벨 에포크와 유사하다고 여겨진다. 이 시기 다이쇼 데모크라시로 사회적, 정치적 변화에 대한 기대감이 차오르고 하이칼라(ハイカラ)라는 키워드로 대표되는 서양 문물의 전파 등으로 일본과 서구 문물이 뒤섞여 이색적인 분위기를 자아내는 시대로 묘사된다.

다이쇼 시기의 풍요는 제1차 세계 대전전간기의 호황에 기인한 바가 크다. 일본이 본격적으로 산업혁명을 진행한 시기는 에도 막부 말기나 메이지 유신 때가 아니라, 청일전쟁으로 막대한 배상금 수입을 확정지을 때를 전후해서였다. 그만큼 세계 경제에 편입되는 시기도 늦었고, 그때 이후로 러일전쟁 부채를 갚아나가며 대공황 이전까지 국내외적으로 경제와 인구가 성장할 여지가 충분히 많았다.[31] 그리고 그러면서 전쟁도 쉬고 덴노가 바뀐 김에 정치사회적으로도 한숨 돌렸을 때가 다이쇼 때. 일본 초기의 현실적 사회주의 정치세력이 등장한 것도 이 시기.

물론 어디까지나 이런 자유로운 사조와 별개로 식민지에 대한 지배력이나 처우는 실질적인 진전을 보이지 않았다. 물론 문화통치와 같은 유화책을 내세우며 이전에 비해서는 온건한 통치를 약속하긴 했으나, 영국이 인도를 식민지배하면서 후진적인 자민다르를 기반으로 한 토지제도를 오히려 강화시켰듯이 조선을 식민지배한 일본 역시 경찰 인력과 조선주둔군을 늘리고, 치안유지법 제정과 조선총독부 훈령 강화를 통해 조선인에 대한 통제의 고삐를 늦추지 않았다. 다만 이전이나 이후에 비해 조금은 풀어진 모습이 있기도 했다. 딱히 온정적인 태도라기보단 배가 부르니 독기는 없었다는 수준. 사람은 배고프면 아이도 잡아먹듯이, 국가는 불황기에 보다 독해지고 비이성적이 된다는 맥락이다.

일본 창작물에서는 이 시기를 추억하는 이야기가 나오기도 한다. 이른바 다이쇼 로망이다. 2010년대 말 들어 한국 쪽에서 일제강점기에 대한 반감으로써 다이쇼 로망 묘사에 반발하는 모습도 나타나고 있다.[32] 자세한 것은 해당 문서 참조.

6.7. 중화민국: 난징 10년(南京十年)

중화민국국민정부가 수도를 난징으로 정한 1927년 4월 18일부터 중일전쟁 직전인 1937년까지가 번영기였다. 국민혁명이 완수되자 장제스는 중국이 통일되었음을 선포하고 중국을 강대국으로 육성하기 위해 산업, 통화, 농업, 국방 전 분야에 걸쳐 개혁을 실시했다.

강력한 공업화 정책이 실시되어 독일 기업들과의 합작으로 비행기와 자동차들이 자체적으로 생산되기 시작했고 고층 빌딩과 수력발전소가 건설되었으며 인프라에 대한 투자 역시 활발하게 이루어져 4800킬로미터의 철로가 건설되어 베이핑에서 광둥까지 기차를 타고 이동할 수 있었다. 2만 6천킬로미터의 도로도 건설되어 전국의 총 도로길이는 11만 킬로미터에 달했다.

농업에서는 농민들을 위한 은행 설립, 품종 개량, 상업 작물 보급, 토지개혁, 일부 농산물세 감면, 수입식량에 대한 과세, 농업실험소 설립, 농업생산 지도, 농업보급지역 개설, 수리시설 확충 등의 정책을 취해 농민들의 삶을 개선하고자 했다. 비록 지주들의 권력을 약화시키고 농민들의 염원을 모두 이루기엔 부족했지만. 농민들의 공산주의에 대한 관심도를 떨어뜨리고 국가에 충성을 바치도록 유도하는데 기여했다.

통화개혁은 일련의 개혁 중에서 가장 성공적이었다. 특히 1935년 법폐개혁을 통해 국민정부는 유력은행들의 손에 맡겨져 있던 통화발행권을 장악, 증앙정부의 권력을 획기적으로 강화하고 경제에 대한 통제력을 확보할 수 있었다. 또한 신용이 있는 새 화폐가 빠르게 중국 전역에 유통되면서 난징 정부의 화폐는 차차 각 성의 고유 화폐와 은량을 대체해갔고, 중국의 경제는 빠르게 안정화되어 고속 성장을 이룩할 수 있었다.

또한 외교적인 면에서도 성과를 거두었는데. 이 시기에 열린 거의 모든 국제회의엔 중화민국 외교관들이 나타나서 자신들의 존재를 과시했다. 그 덕분에 중국은 불평등조약으로 빼앗긴 권리들을 차례로 회복하여 영국의 조차지였던 웨이하이웨이톈진 조계벨기에 구역을 반환받았고. 관세 자주권, 해관세, 염업 전매권 등을 되찾아왔다.

국방정책의 경우, 위의 공업화 정책과 연계되어 중국 내부에서 자체적으로 총기, 차량, 화포, 항공기 등을 생산하는데 성공했고. 독일을 비롯한 여러 국가들에서 고문단을 초빙해 군벌군과 똥별, 마적, 오합지졸의 집합체던 국부군의 질을 향상시켰다. 다만 이는 장제스 휘하 중앙군에 집중되어 다른 군벌들의 사병들은 이전과 다를 바 없었다. 이 때문에 중일전쟁 초반 군벌군이 주축이 된 화북 전선에서 중국군이 일본군에게 허무하게 패배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하지만 이러한 성과에도 불구하고 부족한 재정, 난징과 상하이 등의 직할령을 제외한 다른 군벌들의 영지에 대한 통제권 미비, 국민당 내부의 부정부패와 종파주의, 오랜 혼란과 내전을 거치며 파탄난 행정력 등으로 동부 해안 지역을 제외한 내륙 지역에서는 난징 10년의 과실을 거의 누릴 수 없었다. 그리고 중일전쟁이 발발해 중국 전체가 쑥대밭이 되며 난징 10년은 막을 내리게 된다. 다만 난징 10년이 허사만은 아닌게 그렇게 축적된 경제 역량을 1949년 국민정부가 대만으로 옮겨갈 때 상당수 가지고 와 이후 대만 경제의 고속 발전의 요인이 된다.

중국에서는 중일전쟁 이전 짧은 번영기의 문화를 복고적으로 바라보는 문화도 존재하며, 이런 근대 중국의 문화를 민국풍이라고 지칭한다.

6.8. 제2차 세계 대전 이후의 유사 시기

제2차 세계 대전 이후에도 벨 에포크와 비슷하게 풍요를 누린 시기들이 존재한다. 다만 벨 에포크라는 말은 현대 이전의 근대라는 이미지가 좀 있어서인지 아래에서 언급된 시대들은 벨 에포크와 잘 비교되지는 않는다.
  • 미국은 2차대전 이후부터 베트남 전쟁 전까지 소위 '황금시대'라는 또다른 번영기가 있는데, 상대쪽에선 소련이 있어 2차대전 이후 이 둘이 한창 보이지 않는 힘겨루기를 하던 냉전의 절정기이기도 하다. 이 당시엔 원자력이 전쟁을 끝낸 무기이자 첨단기술임과 동시에 세계를 끝장낼 공포이기도 해서 엄청난 영향력을 가졌고, 이를 반영한 아톰펑크라는 하위 파생장르도 나왔다. 경제적으로는 적수가 전무한[33] 최전성기이기도 했다. 소련 붕괴 후 다시 미국은 황금시대에 들어가 탈냉전 시기인 1993년부터~ 2008년(대침체)까지는 사실상 미국이 세계패권을 독점했으며, 빌 클린턴이 대통령으로 재임하던 시기는 경제적으로 호황을 구가하기도 했다.
  • 서유럽은 전반적으로 이 시기에 마셜 계획에 힘입어 중산층의 확대가 이루어지는 풍요를 누렸다.
    • 프랑스에서는 2차대전 이후 재건기 프랑스가 누리던 호황을 영광의 30년(Les Trente Glorieuses)이라 한다.
    • 동 시기 독일의 급속한 재건은 라인강의 기적이라고 부른다.
    • 같은 시기, 2차대전을 겪지 않았던 스웨덴이 산업시설이 파괴되지 않은 덕분에 안정적이면서도 빠른 성장을 누리던 시기를 기록 시대라고 일컫는다.
  • 일본의 1980년대 일본 거품경제는 전세계의 주목을 끌었다. 군사적/정치적 장악 없이[34] 경제력만으로 세계를 휘어잡은 세계사에서도 유일무이한 예이다. 이 시기는 경제 활성기뿐 아니라 거품이 꺼진 것으로도 유명하다는 것이 또다른 특징이다.
  • 한국의 1980년대 중반(삼저호황) ~ 1990년대 중반(1997년 IMF 직전) 역시 현대의 황금기로 꼽힌다. 이 시기는 88 서울 올림픽민주화를 기점으로 대한민국의 경제 및 문화의 발전이 두드러지는 시기이기도 했으며[35], 해외여행 자유화 등도 이 시기에 맞물려서 풀려 국민들의 의식 수준이 국제적인 눈높이로 상승하는 계기가 되었다. 다만 박정희식 경제 체제를 온전히 탈피한 것은 아니었고 이후 발생하는 1997년 IMF 사태로 인해 완전히 무너져내리고 만다. 그나마 하나회 등의 독재를 행한 세력들을 대규모로 숙청해둔 덕분에 군부 독재 시기로 회귀하지는 않았다.[36] 이렇듯 1980~90년대 호황기는 다사다난한 20세기 한국사에서 그나마 긍정적이고 낙관적인 시기이기 때문에 지금도 한국에서는 이 시기를 낭만적으로 보는 풍조가 있고, 응답하라 시리즈와 같이 복고 문화의 중심 배경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그런 발전상 이면에는 정부 주도의 재개발계획을 명분으로 하층민들이 아무런 보상없이 주거지에서 내쫓기거나[37], 가혹한 노동환경으로 인한 파업,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를 비롯한 대형 참사가 많이 일어나 사고공화국이라는 오명도 얻었으며, 사회 전반적으로도 똥군기가 횡횡하여 가정 폭력, 교사에 의한 과도한 체벌 문제[38][39], 병영부조리 문제[40], 대학교나 직장에서의 부조리가 심심치 않게 일어난 시기이기도 했다.
2차대전 이후의 이러한 풍요는 벨 에포크를 그리워하는 이들에게 반례로 제시되곤 한다. 벨 에포크 시기는 좋은 시절 같아보이지만 사실 열강 외부의 착취를 기반으로 하고 있었고, 중산층 확대도 미흡하여 오늘날 현대인이 생각하는 것만큼 '좋은 시절'은 아니었다는 식이다. 오히려 2차대전 이후의 현재는 비록 제국으로서 세계를 좌지우지할 만한 영향력은 없을 수 있어도 생활 수준은 훨씬 더 많이 향상되었다는 식으로 이야기된다.

7. 대중매체

이 시기에 만들어진 작품들은 낙관적인 경향이 있다. 쥘 베른해저 2만리80일간의 세계일주 같은 소설이 그 예이다.

영국빅토리아 시대와 마찬가지로 내부 모순들이 많이 표출되던 시기라 모리스 르블랑아르센 뤼팽 시리즈가스통 르루 등의 추리소설들도 인기를 끌었으며 판토마 같은 반사회적 소설도 인기를 끌었다.[41] 특히 추리소설은 합리주의가 대두되는 한편 수사 기술은 아직 원시적이었기 때문에 큰 인기를 끌 수 있었다. 요즈음이라면 유전자 감식이나 CCTV 같은 첨단 기술로 간단하게 밝혀질 사건도 탐정이라는 영웅을 통해 흥미진진하게 전개할 수 있는 이점이 있었다.

스팀펑크 작품은 대개 빅토리아 시대나 벨 에포크 시기를 배경으로 한다. 때문에 특유의 밝고 명랑한 분위기인 경우가 많다. 20세기 세기말 감성을 기반으로 한 사이버펑크와 대조된다. 물론 작가가 어떻게 그리느냐에 따라 천차만별인 창작물인 만큼 사이버펑크 저리 가라 할 만큼 어두운 작품이나 잔혹동화처럼 표면적으론 명랑한데 잘 읽어보면 어두운 이면이 있는 작품도 있다. 또한 앞서 말한 식민지와 제국주의 사회의 문제를 포함하고 있는 만큼 이를 고발하는 성격의 작품들도 상당수 존재한다.

주로 발전된 사회상을 추억하는 매체들이 많으나, 여전히 남아있는 전근대적인 면모를 강조하며 기술 고도화 이전 사회의 낭만주의나 여유, 자연친화성과 같은 생활상에 주목해서 만드는 작품들도 좀 있다.

여전히 미숙한 점이 많았던 의료 기술들의 영향인지 의외로 호러물 배경이 벨 에포크 시대인 경우도 있다. 프롬 헬, 아메리칸 호러 스토리 등등, 러브크래프트도 이 시대 인물이다.

7.1. 드라마 청춘시대의 배경이 되는 집

2016년 JTBC 드라마 청춘시대에서 주인공들인 하메들이 사는 집으로 연남동에 위치. 유래는 당연히 위에서 소개한 벨 에포크이다. 드라마 제목과 잘 맞아 떨어지는 명칭이기도 하다.

실제론 겉모습만 빌려오고 내부는 세트장 촬영. 실 용도는 한방 카페(...)와 한의원이다.

8. 여담

벨 에포크 시대의 유럽은 산업혁명으로 근대화에 가속도가 붙었지만 사회적, 문화적 측면에서 여전히 전근대의 잔재가 많이 남아있었다. 미국과 유럽 내에서도 자동차는 상류층이나 탈 수 있었고 범선[42], 우마차[43], 전서구 등 전근대적 운송 통신 수단이 여전히 대중적으로 활용되었으며, 귀족같은 전통적인 지배계층은 아직 상당한 권위를 지니고 있었다. 이 시기를 다루는 매체들은 대체로 현대인에게 친숙한 기술들을 묘사하면서도 묘사 대상은 그런 기술을 활용할 수 있었던 상류층에 집중되어 있기 때문에 창작물만 보면 정말로 평균적으로 좋은 시절이었다고 오해하기 쉽다.[44]

전화, 전보, 라디오 등의 통신수단도 막 개발되어 아직 걸음마 단계였고, 대개 군용으로 우선 보급되어 쓰이고 있었다. 이들은 1차대전 이후인 1920년대에 들어서야 보편화된다. 의료기술이나 위생의식 역시 아직 미비해 페니실린 등의 항생제도 없고 위험한 외과수술이나 마약, 독성약품의 처방 등 야만적인 치료술이 시행되며, 정신질환자나 중증 장애인은 무조건적으로 감금시키거나 단종수술을 하는 등 인권유린도 흔하던 시기였다.

9. 영상자료

벨 에포크 당시 유럽 각국의 모습을 담은 영상자료들이다.
1900년의 프랑스 파리

1899년의 러시아 제국 상트페테르부르크
1900년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1900년의 독일 제국 베를린
1900년의 영국 런던

10. 관련 문서

11. 외부 링크


[1] 1900 파리 올림픽과 동시에 개최되었던 행사다. 그러나 박람회만 중시한 나머지 올림픽의 파행 운영으로 올림픽 행사를 망쳤던 엑스포이기도 하다.[2] 관사를 붙여서 La Belle Époque라고도 한다.[3] 물론 이 시기에도 전쟁이 있었으나, 이 시기에 전쟁은 유럽의 변방인 발칸반도에서 벌어지거나 미국-스페인 전쟁이나 러일전쟁처럼 아시아-태평양 지역에서 유럽 국가와 다른 대륙 국가가 맞붙은 사례가 주를 이루었으며 유럽이 주 전장인 경우는 드물었다. 물론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이나 프로이센-프랑스 전쟁 같은 예외도 있긴 했지만, 그나마도 비교적 짧은 시일 내에 전쟁이 마무리되었다.[4] 대표적으로 옥스포드 영어사전과 함께 가장 역사가 오래되고 권위있는 영어사전인 웹스터 영어사전에서 팍스 브리타니카를 1815년에서 1914년 사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출처[5] 메테르니히 또한 1848년 오스트리아의 3월 혁명으로 실각한다.[6] 그의 주도하에 덴마크와의 전쟁,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이 치러졌다.[7] 이러한 통찰은 매우 옳았다. 이미 이 시기에 대부분의 식민지는 열강들에게 분배된 상태라서 새 식민지를 얻으려면 반드시 다른 열강과 갈등을 야기할 수밖에 없었고, 식민지 확보를 통해 얻는 이익보다 식민지를 유지하기 위하여 들이는 비용이 더 큰 상태였기 때문이다(식민주의/영향 참고).[8] 특히 비스마르크가 중점적으로 신경을 썼던 것이 영국, 러시아와의 관계였다. 그는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에서 패배한 프랑스가 독일을 향한 복수의 칼날을 갈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에, 영국과 러시아와의 관계를 신경써서 프랑스를 고립시키고자 했다. 만약 두 나라와 동시에 적대국이 되는 순간 필연적으로 영국과 러시아는 독일을 견제하기 위해 프랑스와 손을 잡을 것이고, 이는 육상으로는 프랑스, 러시아와 국경을 접하고, 해상으로는 영국과 근접해 있었던 당시 독일의 특성상 양면전선이 형성되어 독일에게 매우 불리한 환경이 조성될 것이기 때문이었다.[9] 비스마르크는 양국과 다 우호관계를 유지하고 싶었지만 프랑스를 견제하는 데에는 영국의 가치를 더 높게 평가했기 때문에 러시아에 다소 불리하게 협상을 진행했다. 이로 인해 러시아와 독일과의 관계는 이 협상 이후로 약간 악화되었다.[10] 이 시기에 비서구권은 늦은 근대화로 한참 뒤처져있었고, 일본은 20세기에야 두각을 드러낸다. 미국은 이 시기에 아메리카 외 지역에 큰 관심이 없었다. 그러니 이들이 거의 세계 패권을 주도하는 강대국의 전부였다.[11] 전장은 동유럽에 위치한 크림 반도였지만, 서유럽 국가인 영국, 프랑스, 샤르데냐 왕국이 참전했다.[12] 슐레스비히-홀슈타인 영유권을 놓고 프로이센과 덴마크가 전쟁을 벌였고, 이때 프로이센은 오스트리아를 전쟁에 끌여들였다. 결국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연합군이 덴마크에게 승리를 거둬 슐레스비히-홀슈타인은 프로이센의 영토가 되었고, 지금도 일부 지방을 제외하고는 독일의 영토로 되어있다.[13] 불과 한세기 전인 18세기에는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 사국 동맹 전쟁, 폴란드 왕위 계승 전쟁,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 7년 전쟁, 그리고 프랑스 혁명전쟁까지 거의 짧으면 수년, 길면 10여년마다 한번씩 전면적인 전쟁이 일어났고 그 기간을 모두 합하면 거의 30여 년이 될 정도로 바람 잘 날 없던 시기였다. 비교해보면 어마어마한 차이가 있는 셈이다.[14] 이 과정에서 유럽 각국의 지원을 받았다.[15] 이는 한 민족이 하나의 국가를 가진다는 것이 단순히 열강만의 특권이 아님을 보여줬고, 곧 유럽 전역의 소수민족의 독립에 대한 의지를 고무시켰다.[16] 하지만 이것은 임시방편에 불과했으며, 결국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내 구성원 간의 긴장과 발칸반도 위기가 겹쳐 제1차 세계 대전이 터지게 되고 여기에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패전하여 멸망하게 된다.[17] 역사상 최초의 사회주의 정부였던 파리 코뮌이 무력으로 진압당한 것도 이 시기의 일이다.[18] 대표적인 사례가 비스마르크가 주도하여 실시한 사회보장제도이다.[19] 해당 짤의 원본은 1904년에 독일 제국의 Simplicissimus 잡지에 게재된 만화의 일부로, 독일 제국, 대영제국, 프랑스 식민제국, 벨기에 식민제국을 다룬 만평이다.#[20] 아프리카의 경우 1884년 베를린 회담 이후 라이베리아와 에티오피아를 제외한 모든 지역이 분할되었다.[21] 송정남, 〈프랑스의 베트남 식민지 개발 - 1885년에서 1930년까지 -〉, 《부산사학》 제38집, 2000.[22] 이광수, 〈‘야만인 만들기’와 ‘문명인 따라 하기’〉, 《역사와 세계》 제49집, 2016[23] 이 시기에 등장한 진화론과 사회진화론의 영향 때문이며, 특히 광대한 식민지를 거느린 영국과 프랑스, 인도네시아와 수리남을 식민지배한 네덜란드, 콩고민주공화국, 르완다, 부룬디를 식민지배한 벨기에는 이 시기부터 식민지의 주민들이 이주해오기 시작하면서 인종 간 갈등이 발생해 지금까지도 심각한 사회문제로 손꼽힐 정도이다. 이 중 벨기에스위스와 더불어 타국 국적의 백인에게도 인종차별을 악랄하게 행하는 TOP 국가로 손꼽혀서 이미 몇몇 여행객들 사이에서는 스위스와 더불어 반드시 피해야 할 국가로 평가받을 지경이다.[24] 식민지배를 겪었던 국가들은 오늘날까지도 옛 종주국의 정치경제적 영향력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굳이 따지자면 GDP 측면에서 인도영국에 견주고 인도네시아네덜란드를 앞서는 예, 대한민국의 경우 선진도에서는 일본과 어깨를 견줄 만한 반열에 올라선 예 등을 들 수 있을 뿐이다. 미국의 경우 국력과 선진도 양면에서 옛 종주국인 영국을 넘어섰다고 볼 수 있으나, 미국은 현지 원주민들의 독립 투쟁이 아니라 영국인 이주자들이 주축이 된 국가인지라 적절한 사례가 아니다.[25] 가정 이데올로기와 더불어 여성 노동이 부차적인 것이라는 사회 기조 때문이다.[26] 19세기 초 '공장법(Factory Acts)' 도입, 18세 이하 아동과 여성의 노동시간을 10시간 이내로 단축한 법안. 이는 근로 환경 개선을 위한 최초의 법률적 규제이다.[27] 비스마르크의 시대가 끝난 이후 유럽의 미래를 내다본 예언으로 비스마르크는 사라예보 사건 이전인 1898년에 사망했다.[28] 1991년에 소련이 붕괴된 뒤에는 유일한 초강대국으로 남은 미국에게 안보를 현재진행형으로 의존하고 있다.[29] 사회적 안정성은 미국보다도 높은 수준이다. 오히려 국제 무대에서 물러나 첨예한 국제 갈등에 주도적으로 관여하지 않아도 됐기 때문에 이러한 안정적인 사회가 이루어질 수 있었다는 관점도 있다.[30] 이 때 비행선에 다는 엔진을 공급하던 회사가 바로 마이바흐며, 비행선에 달린 12기통 엔진을 개량하여 출시된 차량이 마이바흐사의 '체펠린 DS7'이다.[31] 그리고 조선은 처음부터 그 인구를 부양할 쌀 산지로 점 찍은 상태였다. 나중에 가면 조선 전체의 인프라를 일본 수준으로 고치며 일본인을 조선으로 식민하고 조선인을 만주로 식민하려는 계획으로 바뀌지만.[32] 당장 귀멸의 칼날의 배경이 다이쇼 시대라 한국에서 욕먹었다. 다만 귀멸의 칼날은 시대배경이 말만 다이쇼지 실제로는 그 이전 시대에 더 가깝다는 것에서 다른 방향에서 욕먹기도 한다.[33] 세계 GDP의 40%를 미국 한 국가가 독점하고 1972년까지는 스위스, 룩셈부르크조차도 미국보다 1인당 GDP가 낮았으며, 당시 미국은 1인당 GDP도 세계 1위였다.[34] 사실 군사적 장악이 불가능한 것에 가깝다. 제2차 세계 대전 패전 이후 제정된 일본 헌법으로 인하여 일본은 군사적 영향력의 행사가 제한되었고 전략자산 같은 굵직한 군사적 안보는 미일안보조약에 의해 주일미군이 담당했다. 그나마도 자위대라는 형태로 군사력을 지닐 수 있었으나 표면적으로 군대가 아니기 때문에 군사 행동에 여러모로 제약을 받을 수밖에 없다. 경제적으로만 보자면 군대는 완벽한 소비집단이므로 군사적 비용을 상당 부분 타국에 위임한 것은 경제성장에 오히려 유리한 요소이다.[35] 1인당 GDP가 세계 평균을 넘긴 게 1987년이고 세계 평균의 2배/1만 달러/포르투갈을 모두 넘긴 것이 1994년이다. 그리고 1997년에는 IMF로부터 선진국으로 분류가 변경되었다.[36] 그나마 군부독재 회귀 위험성이 가장 컸다고 여겨지는 사건인 2017년 계엄령 문건 사건도 시간이 흐르면 변화한 한국의 시대상과 국제적 입지를 감안하면 성공 가능성이 진리국 건국과 동급 수준이었다는 게 정설이다.[37] 그 과정에서 벌어진 대표적 사건이 광주 대단지 사건이다. 다만 이 사건은 한국이 최빈국을 벗어난지 얼마 안 되었던 1971년 발생했다.[38] 심지어 이 체벌로 인해 학생이 상해를 입어도 교사는 경미한 처벌만 받았으며, 이 분위기는 2010년대 초반대까지 지속되었다. 그리고 교권이 상당히 침해되었다는 2020년대 현 시점에서도 대구경북, 서부경남과 같이 보수세가 매우 강한 지방에 위치한 학교, 보수적인 분위기를 자랑하는 학교에서는 심심치않게 이런 일이 일어나고 있다.[39] 이것에 대한 반향으로 2010년대 중반부터 교권을 제약하고, 학생의 인권을 신장시키는 정책이 펼쳐졌는데, 이것에 대한 반대급부로 학생이 교사에 대해 무시하는 언행, 폭행을 해도 교사가 이에 대해 훈계하면 학생이 교사를 아동학대나 폭행 혹은 상해죄로 검경에 고발해 교사가 파면되고 형사처벌을 받아 전과자가 되는 일이 일어났고, 결국 교사들은 민형사상 불이익을 피하기 위해 학생통제를 포기하고 말았다. 결국에는 이를 못 견딘 교사가 극단적 선택을 한 사건인 서이초등학교 교사 사망 사건과 같은 일이 일어나고, 교직을 포기하는 MZ세대들이 많은 상황이며, 1990년대생들은 이러한 현상을 제대로 경험한 탓에 자신들을 끼인 세대라고 자조하는 상황이 펼쳐지고 있다.[40] 2014년 윤일병 사건, 임병장 사건이 일어나기 전까지의 대한민국 군대에서는 선임이 후임을 이유없이 폭행하거나 집합을 거는 일이 예사로 일어났으며, 계급별 인계사항도 있어 병영환경은 말 그대로 지옥이었고, 지금도 몇몇 부대에서는 이런 일이 일어나고 있다.[41] 사실 아르센 뤼팽 시리즈 역시 판토마처럼 반사회적 경향이 있다. 애초에 주인공 아르센 뤼팽부터가 도둑이니... 다만 그래도 뤼팽은 어지간하면 판토마처럼 선을 넘지는 않는 편.[42] 그나마 19세기 말부터는 기범선이 주류가 되었지만 얼마 안가서 완전히 증기선으로 교체된다.[43] 열차 비용은 서민들도 부담할 순 있었지만 주요 도시간에만 연결되어 있었고, 시내 이동이나 지방 이동때에는 여전히 마차가 유효했다. 이는 서부개척이 아직 진행중이었던 미국도 비슷했다.[44] 특히나 오늘날엔 기술의 대중화가 폭넓게 이루어져 어지간한 기술은 하류층도 활용할 수 있기에 더욱 갭이 크다. 현대에 스마트폰은 최극빈층이 아니고서야 누구나 갖고 있는 물건이지만(이제는 중앙아프리카공화국, 남수단, 북한, 에리트레아 같은 극빈국 중에서도 최하위권의 극소수 국가들을 제외하면 휴대전화 보급률이 40%를 밑도는 나라는 없다. 심지어 부룬디조차 오지 시골에 사는 사람도 2G폰만큼은 가지고 있을 정도로 휴대전화 보급률이 60%에 육박하는 세상이다) 벨 에포크 시대에 전화란 상류층에 국한된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