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4-07 09:37:43

신분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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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분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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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개괄사3. 사례
3.1. 한국
3.1.1. 고조선3.1.2. 고구려3.1.3. 백제3.1.4. 신라3.1.5. 발해3.1.6. 고려3.1.7. 조선3.1.8. 대한제국3.1.9. 대한민국
3.2. 세계
3.2.1. 전근대 동아시아
3.2.1.1. 중국3.2.1.2. 일본
3.2.2. 인도3.2.3. 북한3.2.4. 태국3.2.5. 유럽
3.2.5.1. 영국
4. 오늘날 경제적 차별과 신분제5. 창작물6. 게임에서의 대우에 대한 비유7. 여담

1. 개요

신분제도(, caste system)는 '개인의 사회적 신분이 광범위하고 세습적으로 고정된 계급 제도'이다. 즉, 신분제란 정의에서부터 인간의 평등을 부정하는 제도라고 할 수 있다. 서열의 기준은 혈통, 가문, 정치적이거나 종교적인 논리 등 개인의 노력으로 바꿀 수 없는 것으로 주로 이루어진다.

2. 개괄사

전근대 사회에서는 매우 보편적으로 나타났지만 근대 시기에 부르주아 세력이 민주주의/자유주의 혁명을 일으켜 귀족 세력을 타도함에 따라 만민 평등 사상이 퍼지기 시작한다. 거칠게 설명하자면 부르주아는 평민이지만 재력만을 갖춘 존재인데,[1] 이들이 귀족의 정치적 패권을 빼앗기 위하여 일반 대중을 포섭하는 과정에서 신분제도의 파괴가 일어났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2] 프랑스 혁명에서 상당수 귀족들, 심지어 국왕 루이 16세와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마저도 단두대로 처형당한 사건은 신분제도 붕괴의 단초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3]

근대기에 같이 발생한 민족주의와 이를 바탕으로 탄생한 국민국가, 그리고 국민개병제 역시 신분제도와는 양립하기 어려운 개념이다. 민족주의는 국가 (혹은 국가를 이루어야 한다고 여겨지는 일대의 지역)의 다양한 인민들의 단결을 주장하는데, 각각의 신분으로 나뉘어 서로 지배하고 지배당하는 신분제도에서는 통합된 단결을 기대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국민개병제 역시 마찬가지이다. 평소에 종처럼 부려먹는 게 제도적으로 가능한 신분제 국가에서 국가에 무한한 충성을 강요하기는 어려운 일이었다.[4] 특히나 총력전을 겪은 국가에서는 기존의 신분 질서가 급격히 무너져내리는 양상을 보였다. 대한민국 역시 6.25 전쟁을 겪으면서 기존의 신분제에 대한 개념이 거의 사라지다시피한 국가 중 하나이다.

20세기 초에 나타나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전세계의 절반을 장악한 공산주의는 신분제도에 더욱 적대적이었다. 마르크스의 4대 사회발전론에서 귀족은 근대 자본주의 국가의 부르주아보다도 구태적인 중세 봉건제도의 상징으로 타도해야 할 대상일 뿐이었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기득권의 대표격이라고 할 수 있는 귀족 신분은 거의 소멸했으며 역시 왕국이 대부분 소멸해가는 과정 속에서 입헌군주제의 형태로 형식화되는 경향성을 드러내고 있다.

그러나 선진국후진국을 막론하고 암묵적인 형태로 잔존하고 있는 경우도 있다. 일단 군주가 존재한다면 일반 백성들과 왕족이라는 두가지 신분이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하기에 신분제 사회로 볼 수 있다. 개중엔 카스트 제도부라쿠민관습법 형태의 신분제의 흔적이 현재까지도 남아있는 곳도 있다. 특히나 인종차별인종이라는 혈통에 따른 차별이라는 점에서, 아파르트헤이트처럼 제도화된다면 사실상 신분제나 다를 것이 없다.

현재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이 지니는 권력이 커짐에 따라 재력을 지닌 자, 즉 부자들의 권력 행사가 만인의 평등을 위협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또한 재력에 따른 상하관계 외에도 여러 갑을관계에 따른 갑질이 나타나고 있다. 또한 일단 큰 돈을 지니고 있으면 돈을 벌기 쉬운 구조, 그리고 상속으로 부의 대물림이 이어지면서 양극화를 일으켜 신분 고착화를 가속화시키는 점 등이 지적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러한 현상들은 비록 고착화된 것처럼 보이기는 하지만 어쨌거나 태어난 그 즉시 결정되는 것은 아니고 유동적이며 개인의 행동에 따라 바뀔 여지가 있다는 점에서 전근대 사회의 신분제도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3. 사례

3.1. 한국

3.1.1. 고조선

8조법에 따라 절도 행위를 한 경우 노비로 격하한다는 규정을 갖고 있었고, 이로 말미암아 지배층과 피지배층이 존재했을 거라고 추측되고 있다.

3.1.2. 고구려

고구려의 신분제 관련 기록은 매우 희박하며 단편적으로만 존재한다. 왕을 포함한 왕족, 준왕족(俊王族), 5부족의 우두머리인 대가(大加)와 하위 관료군, 호족 등을 가리키는 좌식자(坐食子) 등이 지배계층이며 노예, 농노(農奴), 일반 백성 등이 피지배계층인 하호(下戶)로 있었다.

3.1.3. 백제

불확실한 면이 있으나, 왕족과 더불어 해씨, 연씨, 협씨 등 8성씨의 왕비족이 왕족과 함께 지배계층의 최상층부를 구성하고 있었다. 이들 왕비족은 왕비를 배출하면 해당 씨족이 관직을 독점했기 때문에 실제로 왕권을 능가하는 권력을 가지게 되었다. 하지만 해씨, 진씨 등이 서로 비등한 세력을 가지고 있었기에 암살을 통한 정권교체가 빈번했고 때문에 대성팔족 중 어느 한 가문이 장기간 독재를 하는 현상은 그다지 나타나지 않았다.

대성팔족 중에는 기존 마한, 가야에서 편입된 지방 귀족들이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목씨와 사씨 그리고 국씨가 대표적. 목씨는 목지국에서 기원한 것이 아닌가하는 추측이 있으며, 사씨는 금강 일대에 기반을 둔 귀족임이 거의 확실시 되고 있다. 사씨는 근초고왕 시기 침미다례 정벌 관련으로 가문의 위신이 세워지기 시작했고, 마침내 성왕 때에 수도를 사비로 옮기면서 왕비를 배출해내는 등 최고 가문으로 성장하였다. 국씨는 주로 가야 외교 관련으로 등장했다는 점, 이라는 한자가 일본에서 카라로 읽히고, 가야는 가라라고 불렀다는 점에 연관성을 두어 추측되는 부분이다. 물론 자세한 기록이 없어 명확한 것은 알 수 없다. 마찬가지로 자세히 알 수는 없으나, 일단 고구려 침공 당시 지방의 토착 귀족들이 보낸 군대의 규모와 그리고 백제 후기까지 독자적 세력을 형성했던 침미다례의 예를 따지면 대성팔족은 아니지만 상당한 권세를 가진 마한계 귀족들도 있었음을 추정할 수 있다.

야마토와의 관계가 각별했던 만큼 일본계 귀족들도 존재한다. 물부순의 물부씨는 야마토의 모노노베씨로 추측된다. 이들은 을사의 변 사례에서 알 수 있듯이 형벌을 담당하는 가문이었고 본토에서는 마냥 백제 친화적이지도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들 가문들 일부가 백제의 관료로써 성왕 시기 관산성 전투에 참여했다는 것과, 물부순 역시 흑치상지와 가족의 연을 맺고 있었다는 점에서 본가와는 방향을 달리하고 아예 백제에 뿌리를 내린, 귀화 가문으로 추측된다고 한다.

피지배계층은 일반 백성과 노비일 것으로 추정되고 있으나 역시 기록이 없어 확실히 알 수가 없다.

3.1.4. 신라

삼국시대의 국가들 중 유일하게 신분제 구조가 자세하게 전해져 오고 있다. 바로 골품제(骨品制). 성골(聖骨), 진골(眞骨)과 6두품부터 1두품까지의 두품제로 분류되어 있었으며, 대략 정리하자면 성골은 왕의 적통 왕족, 진골은 왕의 서계(庶系) 왕족, 6두품 ~ 4두품까지는 귀족, 3두품 ~1두품은 평민, 그리고 두품이 없으면 노비층(천민)이다. 신라에서는 골품에 따라 출세의 한계가 세세하게 규정되어 있었고 수없이 나라가 뒤집어졌던 고려와 달리 골품제는 신라가 멸망하는 그 날까지 지켜졌다. 자세한 사항은 골품제 문서로.

3.1.5. 발해

대씨 등의 왕족과 우성망족으로 대표되는 유력귀족과 49성으로 기록된 일반귀족으로 구성된 지배층과 평민, 노비, 부곡민 등의 피지배층이 있었다.

부곡민의 경우, 노비처럼 개인의 소유였지만, 소유자가 풀어 준다면 평민이 될 수 있었다. 부곡민은 평민보다는 낮고 노비보다는 높다고 한다. 노비는 순장당하기도 할 정도로 대우가 낮았다.

3.1.6. 고려

신라 때의 골품제를 폐지한 대신 지배층, 서민층, 천민층으로 구분하고 있었으며 왕족, 종친, 척신, 공신 등이 문벌귀족이 되어 중앙 관료와 지방관직을 차지하고 지방의 호족들이 향직(鄕職)을 맡아왔다. 그리고 과거 제도의 실시로 천인과 노비를 제외하고 왕족, 귀족, 지방의 향족(鄕族)들도 시험에 응시할 수 있었다. 중간계층으로 서인층(庶人層)이 있는데 남반, 잡기, 잡직 등이 있고 기타 양민층이 속하였다. 남반은 주로 왕실의 내시, 궁중당직, 시종 등이 있고 잡기는 기술을 통해 벼슬을 얻는 계층이며 잡직은 사역 등을 맡는 최하급 관리였다. 그리고 천인층(賤人層)도 있는데 진척, 역정, 양수척, 광대, 상인, 공장(工匠), 악공, 노비, 향, 소, 부곡, 도민(島民, 섬사람)으로 이들은 이 시대에서 가장 천대를 받아왔던 하층으로 분류되었다. 특히 고려의 국교(國敎)가 불교였기 때문에 승려들은 이 시대에서 왕족이나 양반 못지않은 특대를 받아오기도 하였다.

3.1.7. 조선

기본틀은 고려 때와 비슷했지만 적서제도(嫡庶制度)가 부가되었다. 홍길동전에서 홍길동이 아버지를 아버지라고 부르지도 못하고 형을 형이라고 부르지 못하는 이유도 이 적서제도 때문. 서얼 출신의 경우 적자 출신과는 달리 사실상 높은 관직까지 오를 수 없었고 무관(武官)의 말단직이나 기술직, 서리(胥吏) 등을 맡았던 편이었다.

이런 적서차별 이외에도 조선의 신분제는 고려보다 강화된다. 고려 때 천인에 속했던 장인(匠人)이나 상인(商人) 등은 조선에 들어서 평민으로 격상되었고, 다른 천인들 몇몇도 양인화를 시도했으나 실패하거나 도중에 다시 천인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음서공음전 제도를 통해 특권을 세습했던 고려의 문벌귀족과 달리 조선의 양반층은 과거 급제라는 신분 유지 조건이 있어, 과거 급제자를 배출하지 못한 가문은 평민이나 다름없는 잔반으로 몰락하는 등의 변화도 생겼다. 가장 큰 변화로 고려 때 높은 대우를 받아왔던 승려들은 조선의 숭유억불(崇儒抑佛) 정책과 건국 주도층 유림들의 특대로 인하여 결국에는 최하층 천민으로 분류되었다.

원칙적으로는 양민과 천민의 단 2가지 분류만이 있는 양천제 체제였지만 현실은 시궁창이였던지라 천 명 안팎의 관료를 의미하던 양반이 어느새 세습되는 상위계급이 되었다. 과거 제도는 일단 명목상으로는 낮은 신분의 사람도 시험을 잘 치면 신분이 올라가는 것이 가능했지만, 실제로는 교육의 기회가 더 있고 인맥도 있는 명문가가 대대로 잘 나가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지금이랑 비슷한데? 아예 과거 제도 자체가 명문가에게 유리하게 바뀌기도 하고, 돈이 있는 가문이 과거를 볼 수가 있었으나 지방에서 돈을 잘 벌어서 이 시험에 붙으면 벌열 가문의 이너 서클에 들지 못해 승진도 제대로 하기 힘들었다. 이것이 19세기 세도정치기라는 조선시대의 최악의 암흑기의 모습이다.

왕과 왕족을 포함하여 양반은 왕족과 관료 가문이 속했고 양반과 평민 사이에 중인이라고 의관, 역관 등이 속했으며 평민층은 장인, 상인, 일반 백성 등이 속했으며 최하층의 천민층은 광대, 창우, 승려, 기생, 노비, 역리(驛吏), 백정, 진정, 무당 등이 속했다. 1894년과 1895년 갑오개혁을미개혁을 실시하면서 제도적으로는 폐지되였으나, 일제강점기8.15 광복 직후까지 그 의식은 잔존하였다.[5]

조선시대 사회상에 대해 제대로 연구되지 않은 시기에는[6] 조선을 삼국시대 수준의 극단적인 신분제 사회로 해석하여 상민은 글을 못 배우게 했다느니 과거에 응시하는 것을 막았다느니 양반이 상민을 사소한 이유로 죽여도 죄가 되지 않고 글을 아는 상민은 역적이 될 놈이라고 처참하게 죽였다는 둥 황당한 묘사가 있는데 사실이 아니다. 일본이나 유럽에서도 비슷한 이야기가 내려오는 걸 보면 신분제에 대한 현대인의 몰이해로 취급해도 좋을 듯하다. 강력한 성리학 국가인 조선에서 상위 계층의 사람이 하위 계층의 사람을 마음대로 죽이면 그 사람은 인간 취급 못 받는다. 왕도 예외가 아니어서, 왕이 그렇게 한다면 이미지가 크게 실추되고 반발이 일어난다. 일단 조선 초기부터 세종의 노력에 의해 글을 아는 상민이 많았고, 노비의 경우에는 기본적으로 주인에게 의식주를 제공받는다. 게다가 그 노비가 어린아이라면 주인 입장에서는 잘 길러야 하고, 나이가 너무 많으면 주인이 수발을 들어주어야 한다. 그래서 요즘 말로 하자면 주인 입장에서 노비는 가성비가 좋지 못한 존재였다. 그래서 가난한 양반 입장에서는 노비가 오히려 경제에 부담되는데, 이 때문에 조선 후기로 갈수록 노비 수가 줄고 반대로 고공(머슴 또는 계약직)이 늘어난다. 반대로 노비 입장에서는 해방되고자 하지만 막상 해방되어 평민이 되면 집도 없고, 땅도 없고, 누군가 소작을 주는 것도 아니고, 전국을 떠돌다 결국 스스로 다시 노비가 되겠다고 옛 주인집으로 돌아가는 경우도 있었다. 가계를 위해서 자신을 포함한 일가족을 부유한 양반집에 판다는 문서도 발견되었다.

흔히 조선시대에는 노비를 사람이 아니라 그저 집안의 재산으로만 취급했었다고들 알고 있는데, 사실 반만 맞고 반은 틀린 소리다. 물론 학대를 당하여 완전히 짐승 취급을 받는 일도 많았지만, 정신이 똑바로 박힌 조선 사람들의 관념 속에서는 재산이긴 하되 물건은 아니고, 노비도 사람이었다. 주인에게 물건 취급받지 않았고, 주인 호적에 노비로 기재되었으며, 외거노비의 경우 별도로 호적을 만들어 스스로 호주가 되었다. 사노비가 국가에 부세를 납부하는 문서가 발견되었는데, 이는 다른 양인들과 마찬가지로 국가에 의무를 바치는 백성이란 뜻이다.

조선 말기로 갈수록 돈많은 상인에게 멸시를 당하는 몰락 양반들의 사례도 심심치 않게 나온다. 게다가 조선 말에 이르면 지역에 따라서는 호적상 유생(幼生)으로 등록된 인구가 70~80%가 넘어가는 곳도 있었다.[7][8]

3.1.8. 대한제국

1894년 갑오경장으로 형식적으로는 신분제가 완전히 사라졌다. 하지만 이후에도 일부 수구 성향의 양반층과 고위층들로부터 여전히 잔존하고 있었으며 여전히 평민과 천민으로 구분지었던 경우가 있었다.

신분제가 혁파된 이후로도 백정 등 천인 출신은 차별을 심하게 받아서 형평사라는 조직을 만들어 수 십년을 추가적으로 활동했었다. 이것을 형평운동이라 부르는데, 이 형평운동을 주동한 사람들이 "사회주의 국가인 소련처럼 모두가 평등한 사회를 만들자."라는 구호를 내걸었던 것이 일제 당국의 반감을 사서 결국 일제의 탄압을 받아 형평운동은 중단되고 말았다.[9]

3.1.9. 대한민국

대한민국 헌법 제11조
모든 은 법 앞에 평등하다. 누구든지 성별·종교 또는 사회적 신분에 의하여 정치적·경제적·사회적·문화적 생활의 모든 영역에 있어서 차별을 받지 아니한다.
사회적 특수계급의 제도는 인정되지 아니하며, 어떠한 형태로도 이를 창설할 수 없다.
③ 훈장 등의 영전은 이를 받은 자에게만 효력이 있고, 어떠한 특권도 이에 따르지 아니한다.
현재 대한민국 헌법에서는 신분제를 완벽하게 부정한다.

1960년대까지만 해도[10] 시골에서는 누가 양반, 평민, 천민 집안이였는지 대략 알았다. 1894년에 법적으로 신분제도가 폐지되었지만 시골 집성촌에서는 양반 혈통이 모여사는 마을과 평민, 천민 등 머슴 혈통이 모여사는 마을, 백정이 모여사는 마을이 있어서 신분제도가 암묵적으로 남아있었는데 1970년대 새마을운동이 일어났을 때 출신 성분에 상관 없이 전부 새롭게 바뀌면서 완전히 의미가 없어지게 되었다. 특히 이 때 수많은 사람들이 이촌향도를 하게 되면서 누가 양반, 평민, 천민 집안이였는지 구분할 수도 없게 되었으며, 1970년대 산업화 등 격동의 현대사를 거치면서 암암리에 존재하던 신분제는 명목상으로던 실질적으로던 대도시 지역에서는 완벽에 가깝게 소멸되었다.

현재에도 양반 집안이 어쩌고 하는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 분명 있지만 비웃음거리에 불과하다. 이석과 같은 고종의 손자에게 한 노인이 "옛날에 도둑놈이 앉았던 자리야 저기가. 청와대랑 똑같다."라고 황실을 비판하기도 할 정도다. 하지만 경제와 사회가 고속으로 성장하면서 조금이나마 변형된 모습을 볼 수 있는데, 토호 문서에서 보듯 수도권 도농복합시나 지방에서는 전통적인 지역 유지가 아직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다. 심지어 안동시/문화 문서에서는 진짜 종가를 따지거나 과거의 신분 때문에 명절 때 불편한 경우가 묘사되기도 한다. 그나마 이것도 독립운동을 하며 공통의 적을 만나다보니 기득권을 포기한 경우가 생겨 문제가 줄어들었다는 말도 있다. 1995년 지방자치제 시행 이후 오히려 다른 혜택을 입으며 살아가는 경우도 있다. 다만 정치인 가문의 영향력이 다른 나라보다 약한 것은 사실이다. 대신 해외는 민주주의가 자리잡은 곳은 정치인 자체가 권위가 한국만큼은 아니며, 한국보다 정치인의 출신이 다양한 경우가 많다.

그러나 이런 경향이 약한 지역에서도 직업 귀천 의식[11], 기업인[12], 정치인, 법조인, 교수 같은 아비투스의 절정에 이르는 사람들이나 간부급 공무원만이 고귀하게 취급되는 풍조나, ## 군대 같은 곳에서 흔히 접할 수 있는 기수제 등의 형태로 남아있다. '쌍놈'이라는 비속어 또한 신분제 하 보통 백성이라는 의미의 상민()에서 유래한다. 그나마 학력이나 직업 차별 같은 전통적으로는 신분제가 엄격하나 현대에는 차별의 이유가 없는 분야는 점차 차별이 줄어드는 추세라서 노동자의 인권을 보장하는 제도가 생기고, 공부를 잘 하던 사람이 연예인으로 데뷔하거나, 급여가 높은 회사의 생산직의 경쟁률이 치솟는 등의 변화가 생기고 있다.

3.2. 세계

하단의 내용은 세계의 신분제도가 직/간접적으로 도입되어있는 일부 국가들만을 설명한 것이며, 기본적으로 군주가 있는 국가들은 일반 백성과 군주 사이에 신분의 차이가 존재하므로 신분제도가 제한적으로 유지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3.2.1. 전근대 동아시아

3.2.1.1. 중국
3.2.1.2. 일본
일본의 경우 전근대적인 신분제는 메이지 유신으로 폐지되었다. 그러나 1947년 이전까진 귀족에 해당하는 화족이 있었다. 화족과 평민 사이에 사족(士族)도 있었지만 메이지 유신 이후 특권이 폐지되어 평민들과 다를 바 없게 되었다.

3.2.2. 인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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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사람들이 "원래 인도에서는 카스트가 법제화되어 있었으나 해방 이후 신헌법에 카스트의 폐지를 못 박았다."라고 잘못 알고 있는데, 인도사에서 카스트는 법제화된 적이 단 한 번도 없는 불문율성 종교 관습이었다. 그래서 암베드카르 초대 법무부장관이 헌법에 못 박은 말의 진의는 엄밀히 말하면 카스트 자체의 폐지가 아니라 카스트에 의한 차별 금지였었다. 애초에 법제화된 적도 없었던 카스트를 이제 와서 헌법에 "카스트를 폐지한다."라고 쓴다는 것 자체가 코미디였기 때문에 정확히 말하면 "카스트 등 어떠한 선천적, 후천적 요인을 이유로도 차별받을 수 없다."로, 카스트 자체를 폐지하니 법제화하니의 문제가 아니였었다.

물론 카스트는 엄연히 현재까지도 남아 있는 신분제이며 인도 정부 역시 카스트를 뿌리뽑기 위해 엄청나게 애를 써오고 있다. 불가촉천민의 후손에 대한 어퍼머티브 액션 등의 정책을 펼치고 있지만 상위 계급에 대한 역차별 논란도 있다.

사람뿐만이 아니라 소/원숭이에게도 카스트가 적용되었다는 것도 특이점이다. 자세한 것은 카스트 문서로.

3.2.3. 북한

북한은 사회주의 공화국을 표방하는 국가임에도 실질적으로는 독재 전제 왕정 국가나 다름없어서인지 사실상 4~50여 개의 계급(!)이 있다. 당연히 북한은 이러한 계층에 따른분류가 모든 공민이 평등하다고 주장하지만 탈북자들의 증언들을 들어보면 북한 내에는 이미 오래 전부터 계급이 있었고 그것이 당연하다듯이 여겨왔다고 한다.

크게 3개 계급으로 나누는데 구조는 다음과 같다.

또한 이들 신분은 자동적인 강등[14]은 가능하지만 상승은 김정은이 직접 신분을 올려주지 않는 이상 불가능하다.

3.2.4. 태국

태국/사회 문서 참조. 인도와 더불어 전통적 계급 차별이 세계적으로도 심한 곳에 속한다. 재산, 인품, 종교적 업보의 논리, 현대에는 학벌로 이어지는 하류층 차별의 논리가 매우 공고하였다. 이로 인한 부의 편중이나 각종 하류층에 대한 차별이 전통적 신분제의 잔재로 매우 심각한 나머지, 태국인들도 젊은 세대를 중심으로 이런 현실에 크게 반발하며 2020년 태국 민주화 운동 같은 일을 벌였다.

3.2.5. 유럽

과거 유럽은 신분제 사회였으며 귀족들에게만 쓸 수 있는 이름이 있다. 영국 같이 상당히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면 이름을 통해 "과거에 귀족이었구나"라는 정도만 알 수 있다. 프랑스의 대통령이었던 샤를 드골 또한 전치사 'de(드)'에서 알 수 있듯이 과거 선조들이 귀족 출신이었음을 알 수 있다. 현재는 영국을 포함한 여러 나라에서도 민주주의 운동으로 국가의 의사 결정에 관여하는 정치적 권한은 많이 사라지고, 상류층의 생활양식을 우월하게 보는 권위도 아시아 국가보다도 적은 편이다.
  • 독일: 폰(von), 추(zu)
  • 네덜란드: 반/판(van)
  • 스페인: 돈(don), 데(de)
  • 포르투갈 : 드(de), 두(do), 둠(dom)
  • 프랑스: 드(de)
  • 이탈리아: 디(di)
3.2.5.1. 영국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영국/사회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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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진국 중에서 뿌리 깊은 신분제도를 가진 나라로 대표적으로 영국이 있다. 다만 차티스트 운동, 노동조합 등의 민주주의 운동으로 상류층이 심하게 견제를 받아 상류층이 부도덕하다는 이미지 등도 상당하며, 귀족원은 서민원보다도 실권이 줄어드는 변화가 생겼다.

4. 오늘날 경제적 차별과 신분제

수천년 간 존재했던 법적 신분제 대다수가 사라졌지만, 경제 계급에 따른 분쟁이 마치 신분제와 같은 양상으로 번지고 있다.

임대 아파트와 일반 혹은 고급 아파트 주민의 대립은 대표적인 사례이다. jtbc 뉴스룸(2015년 2월 4일)의 사례를 보면 서로 같은 분교에서 다닐 수 없다는 고급 아파트 주민의 반발과 전학으로 분교가 붕괴되어버린 사건이 보도된 바 있다. 이 때문에 다른 임대 아파트 주민들이 유명 브랜드를 써달라고 해서 아파트 이름을 유명 브랜드로 바꾸었다. 그러자 바로 옆에 유명 브랜드 아파트에 사는 주민들이 평수의 값을 말하며 싫어했다. 이러자 임대 아파트 주민은 결국 임대 티를 내라는 것이라 말한다. 비록 하나의 사건이겠지만, 진중권 교수가 말하길 일본이 메이지 시대를 맞이해 신분제가 철폐되자 반발한 쪽은 귀족이 아니라 천민층 위에 있던 평민들이었다고 한다.

또 다시 jtbc 뉴스룸(2016년 6월 8일 방송)에서 또 다시 일반 아파트와 임대 아파트가 대립하였다. 일반 아파트 주민들은 마치 임대 아파트 주민을 빈민 취급하며 철조망을 설치해 분리해 놓았다. 그리고 학군도 나뉘어버렸다. 임대 주민들은 철조망을 풀고자 하지만, 일반 아파트 주민들은 원래 다르게 지어진 곳이라며 반대한다. 즉 심리적으로 임대아파트 사람들을 자기보다 아래로 보고 있다는 말이다. 그리고 이 세월이 10년이라고 한다. 신분제가 당연시되었던 옛날에 천민과 양민(귀족 및 상류층 아님)을 구분시켜가며 살았다. 그리고 양민들은 마치 당연하다는 듯이 천민을 천대하고 하대했다. 심지어 같이 밥을 먹는 것조차 모욕으로 여겼다.[15][16]

위의 나와있듯 단순 철조망을 세우는 것이 끝나는 것이 아니었다. 이번에는 임대아파트 주민이 자기 자식은 임대로 끝나게 하지 않으려고 분양아파트 주민의 자녀가 많이 다니는 학교로 자녀를 보낸다. 바로 옆에 학교가 있음에도 말이다. 문제는 단순히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임대 주민과 분양 주민의 갈등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분양 주민들은 임대 주민에게 집이 어디인지 물어보는데 이게 단순히 주소를 물어보는 것이 아니라 자기와 같은 계층인지 물어보는 것이었다. 결국 경제적 수준에 따른 신분제가 형성되고 있다는 것이다. 더 큰 문제는 이를 아는 임대 주민들은 불법을 저지르면서도 위장전입을 하는데 아마 분양 주민들의 차별이 원인일 것이다. 문제는 이를 관리할 교육당국과 시 당국은 서로 책임만 미루고 있다는 것이다.

5. 창작물

  • 살어리랏다 - 조선시대 때의 백정들의 이야기를 그렸던 영화. 이 영화에서 주연배우 이덕화는 러시아에서 열렸던 모스크바 영화제에서 한국배우 자격으로 남우주연상을 수상하였다.
  • 서편제 - 해방 이후 한국을 소재로 하였지만 극중에 등장하는 일부 한량 및 호걸 출신들이 주인공인 소리꾼 유봉을 보고 상놈, 상놈의 자식이라며 천대를 한다. 막판에까지 유봉이 씨암탉을 서리하여 닭주인이 달려가 매질을 할 때도 "요 상놈의 새X야!"라고 고함을 지른다. 사실 역사적으로 보면 광대는 조선시대에는 천민계급에 속했기 때문에 양반들이 가장 천시했던 존재였다.
  • 스타크래프트 시리즈 - 오래된 가문, 칼라이
  • 유림 - 소설가 최인호서울신문에 연재했던 사극소설. 소재는 당연히 양반계급의 유림.
  • 워크래프트 시리즈 - 명가(워크래프트 시리즈)[17]
  • 원피스 - 세계귀족[18]
  • 추노 - 도망 노비를 소재로 다룬 드라마.
  • 춘향전 - 양반가의 자제와 기생의 딸의 사랑을 소재로 다룬 고전소설.
  • 홍길동전 - 적서제도를 주요 소재로 넣었으며 주인공인 홍길동은 서자 출신이라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고 대감마님이라고 부른다.
  • Yuppie Psycho - 시민들을 A에서 최소 R까지 등급으로 나누고 있다.

6. 게임에서의 대우에 대한 비유

주로 다인원이 한 곳에서 플레이하는 온라인 게임, 특히 파티플레이가 기본인 MMORPG에 존재하는 개념으로 다인원 파티 플레이를 위해 파티를 직업별로 나눠서 구성할 때, 누구는 구하기 쉬워서 사람을 가려받을 수 있지만 누구는 구하기 어려워서 할줄만 알면 무조건 받아야 하는 직업별 분포의 불균형 때문에 발생한다.

귀족은 인구수가 적어서 구하기 힘든 직업, 천민은 썩어날 정도로 넘쳐서 공챗에 파티모집 말만 하면 귓말이 폭주하는 직업을 의미한다. 귀족 중에서도 그 정도가 심해서 "xx님만 오시면 출발" 같은 메시지가 돌 정도면 황족 내지는 신[19], 천민에도 급이 있어서 아예 안받는 불가촉천민급 직업이 있다. 이들을 부른 칭호는 돚거, 도냥법풀, 판금풀 등이 있다. 블레이드&소울 같은 경우에는 특유의 버그와 처참한 딜량으로 인해 외면받는 소환사를 가리켜 '솬업 폐기물'이라 부르기도 했고...

공통적으로 귀족의 특징은 구하기 힘들지만 파티 내에서 주요 역할을 하며, 막상 파티 플레이 들어가면 고생한다. 인구수가 적은건 다 이유가 있는 법. 대부분 솔로 플레이가 어렵거나 파티 내에서 하는 역할이 많고 피곤하거나, 조금만 실수해도 금방 티가나는 운영 난이도를 가진 경우가 대부분. MMORPG에서는 주로 힐러, 메인 탱커, 혹은 특정 역할이 절대적인 클래스가 이렇다. 천민들은 이와 반대인 경우가 많다. 솔로 플레이는 쉬워서 무개념 발컨 유저들이 득시글거리는데 파티 내에서는 하는 역할이 적고 이들이 하는 실수를 귀족들이 책임져야하는 상황이 종종 발생한다. 그런 면에서 대미지 딜러들이 천민이 되는 경우가 잦다.

이를 극단적으로 보여주는 문서가 바로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직업 별 레이드의 위치 문서. 읽어보면 신분제도를 확실히 느낄수 있다.

7. 여담

  • 신분제도의 상세는 문화권마다 차이가 있다. 예를 들어 옛날 한국에서 도축업자백정이라 해서 신분제에서 가장 아래였지만, 인도에서는 낮은 카스트가 음식을 만지면 부정 탄다는 인식이 있어서 한국과 반대로 도축업자는 가장 높은 카스트 신분인 브라만이 맡았다.
  • 귀족과 같은 신분제의 영향이 있는 나라는 겸손 같은 과소평가를 중시하는 경향이 있다. 예를 들어, 일본에선 자기 분수를 알란 뜻인 '미노타케(身の丈)'나 '미노호도(身の程)'라는 단어가 있다.


[1] 실상은 이보다 다소 복잡하기는 하다. 월러스틴의 "근대세계체제"를 참고하면 부르주아/귀족의 구별은 이처럼 명료하지는 않고, 프랑스 혁명 직전 구체제 시기를 보아도 '귀족'이라고 불린 이들 중에서도 상업 행위를 통해 귀족의 지위에 이른 이들이 상당수 존재했다.[2] 때문에 공산주의 진영에서는 이 자유주의 혁명을 '부르주아가 새로운 귀족이 되었을 뿐'이라고 평가절하하며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일으켜야 한다고 주장하곤 했다.[3] 사실 프랑스 혁명의 그러한 공포 통치적 이미지와는 달리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는 섣부르게 도망치지만 않았다면 목숨을 부지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다.[4] 일례로 조선에서 천민은 군역을 지지 않았다.[5] 광복 후에도 시골에서는 머슴들이 계속 있었고, 1950년 남한에는 25만명의 머슴이 있었다.[6] 사실 세간의 인식은 요즘도 비슷하다. 우선 신분제에 대한 몰이해 이외에도 현대 한국인들이 조선에 대해서 워낙 부정적으로만 보는지라(...)[7] 식민사학자 시카타 히로시의 영향을 받은 기존 통설 때문에 조선 후기가 되면 양반 매매가 횡행하여 양반 비율이 70%가 넘고 종갓집을 빼면 족보가 다 가짜라는 인식이 퍼졌으나, 연구를 할수록 다른 부분이 나타나기에 다시 생각을 해야 한다. 애초에 양반이라는 신분은 사람들의 인식 속에만 있었을 뿐 성문화되어 존재한 적이 없었고, 양반 매매 문서가 지금까지 단 한 건도 발견되지 않았으며, 일대일로 매매를 했으면 서로 맞바꿨다는 말이므로 비율이 그 정도로 늘어난다는 게 말이 안 되기 때문.[8] 정확히 말하면 호적상으로 유생(幼生)을 자칭하거나 목표로 삼는 사람들이 70~80%였다는 것일 뿐, 실제 향촌 사회에서 단순히 호적상으로 유생이나 학생을 자칭한다해서 진짜 양반 취급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은 아니었다. 일단 그 고을 양반들 사이에서 양반으로 인정받아야 했다. 그 기준은 이름난 학자를 조상으로 두었는가, 본인이나 가족 중에 이름난 학자나 높은 관직에 오른 자가 있는가 등이 있다. 즉 일차적인 기준은 혈통이다. 같은 양반이라도, 고을 내에서만 위상이 있는 양반, 도(道) 단위로 위세가 있는 양반, 전국적으로 위세가 있는 양반 등 차이가 있다. 고을 내에서 양반으로 인정된 자는 고을 향안(鄕案)에 이름이 등재된다. 다른 고을의 양반은 이 명부에 등재되지 못한다. 몰락 양반들은 '잔반'이라 불렸는데 어쩔 수 없이 생계를 위해 농사나 장사를 하는 경우도 있었고 글공부한 것을 바탕으로 서당의 훈장이나 중인들이 주로 하는 송사의 소송서 써주기나 의약업 등을 하며 간신히 체면을 유지하는 경우도 많았다. 최악의 상황으로가면 족보를 팔거나 족보에 신분상승한 사람을 넣어주고 돈을 받는 식으로 생계를 꾸려가기도 하였다. 다만, 이 경우는 사실 여부가 불분명하다. 지금의 문중 개념이 조선 후기에 생기고, 전국의 모든 양반들이 씨족 단위로 모여 살고, 심지어는 돈이 많아 여유가 있는 중인이나 평민들 중에도 그런 풍습을 본받아 씨족 단위로 모여사는 자들이 생기는데 혈통이 다른 자가 양반 사이에 안전하게 편입하기가 불가능했기 때문.[9] 당시 일제는 1917년 소련이 등장한 이후로 줄곧 소련을 가상적국으로 여겼고, 특히 소련에서 들어온 사회주의를 국가와 사회를 혼란케하는 위험한 불온사상으로 여기고 탄압했기 때문에, 그러한 사회주의의 영향을 받은 형평운동에 대해서도 부정적으로 여겼다.[10] 동학농민운동과 법적으로 신분제도가 폐지된 1894년 이전에 태어난 사람들이 아직 많이 살아있던 시절이고, 1923년 신분 형평사 운동이 일어난지 아직 50년도 안됐을 때라 이 때까지 머슴이 많았다.[11] 배관공이 주인공인 슈퍼 마리오나, 석공의 단체 프리메이슨이 세계 정치를 좌우한다는 주장도 나돌던 것을 생각해보면 직업관이 다른 나라와 다른 부분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양반은 집안에 4대째 과거 급제자가 안 나오거나 전업을 하면 신분을 박탈 당할 정도로 '학력'으로 자신의 지위를 유지하던 사람들이었는데, 근대화 과정에서 이것이 인텔리로 옮겨졌다. 현재는 약해졌지만, 과거 IMF 이전에는 학벌주의가 만연했다.[12] 다만 미국 같은 서구의 나라에 비하면 정치에 참여하는 비율이 낮은 잔재 정도는 남아 있다. 한국에서 국회의원은 다른 나라보다 법조인, 관료, 직업 정치인 출신이 많다. 규제와 같은 분야로 들어가면 관의 권력이 그래서 강한 편이다.[13] 북한에서는 재포, 째포 등으로 불린다.[14] 즉 김정은의 손길이 닿지 않아도 북한의 관료 체계 내에서 반동으로 판정된 특정 인민을 자동으로 강등시킬 수 있다.[15] 이 뉴스에서 더 무서운 것은 이 상황을 아이들도 인식하고 있다는 것이다. 즉 어릴 때부터 이러한 차별에 익숙해질 수 있다는 것이다.[16] 일반 분양으로 아파트를 구입한 주민들의 겨우 그 아이들조차도 임대 아파트나 빌라 등에 사는 아이들을 '휴거(휴먼시아에 사는 거지), '빌거(빌라에 사는 거지)', '엘사(LH에 사는 사람) 등으로 놀리고 천대하는 일까지 생겨나고 있는 정도이다.[17] 나이트 엘프의 귀족층 출신으로 현재는 나가로 변모함.[18] 세계귀족으로 거의 치외법권적인 권세와 특권을 지니고 있다.[19] 대표적인 경우가 WOW 오리지널 시절 드워프 사제. 당시만 해도 거의 제발 누가 키워만주세요 수준이었다. 이후 불성 때의 복원 술사나 리분 때의 특무술사 등이 같은 위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