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1-05-01 11:21:45

제후

1. 개요2. 이름의 연원3. 역사
3.1. 주나라3.2. 춘추전국시대3.3. 진나라3.4. 한나라3.5. 삼국시대3.6. 위진남북조 시대3.7. 당나라3.8. 송나라3.9. 원나라3.10. 청나라
4. 천자와의 관계5. 서양과의 비교6. 주변국과의 외교관계에서 적용7. 한국사의 제후
7.1. 설명7.2. 목록
7.2.1. 왕작(王爵)
7.2.1.1. 고조선7.2.1.2. 고구려7.2.1.3. 백제7.2.1.4. 당나라7.2.1.5. 아스카 시대 일본7.2.1.6. 돌궐7.2.1.7. 신라7.2.1.8. 탐라7.2.1.9. 우산국7.2.1.10. 발해7.2.1.11. 후백제7.2.1.12. 고려7.2.1.13. 원나라7.2.1.14. 대한제국7.2.1.15. 일본제국
7.2.2. 공작(公爵)
7.2.2.1. 당나라7.2.2.2. 고려7.2.2.3. 조선7.2.2.4. 일본제국
7.2.3. 후작(侯爵)
7.2.3.1. 고조선7.2.3.2. 고구려7.2.3.3. 백제7.2.3.4. 고려7.2.3.5. 일본제국
7.2.4. 백작(伯爵)
7.2.4.1. 고려7.2.4.2. 조선7.2.4.3. 일본제국
7.2.5. 자작(子爵)
7.2.5.1. 고려7.2.5.2. 일본제국
7.2.6. 남작 (男爵)
7.2.6.1. 고려7.2.6.2. 일본제국
8. 같이보기

1. 개요

제후()는 봉건 시대에 일정한 영토를 가지고 그 영내의 백성을 지배하는 권력을 가지던 사람을 뜻한다.[1] 중국에서 만들어졌으나 우리나라 같은 동아시아 주변국들에도 그 개념이 들어와 전근대시대에는 제도로서 존재하기도 하였다.

2. 이름의 연원

'제후'라는 용어는 천자가 임명한 지방의 통치자들의 작위(오등작) 중에 가 가장 많았기 때문에 등장했다. 글자 그대로 풀어 쓰면 '여러 후(侯)들'이라는 뜻이지만 단지 어원이 이렇다 보니 관용적으로 어휘가 굳어진 것일 뿐 당연히 후작말고 나머지 왕, 공, 백, 자, 남도 제후이다.

엄밀히 말하면 진나라 때 철후(徹侯)라는 20등급 작위 중 제일 높은 관직이 있었는데 한나라 때 한무제 유철의 피휘를 위해 뜻이 비슷한 통후(通侯), 또는 열후(列侯)라고 부르던 것이 이후 보편적으로 열후=제후로 불리게 되었다. '철후'의 철과 '통후'의 통은 모두 '통한다'는 뜻인데, 공적이 커 황실에 내왕할 수 있음을 뜻한다고 한다. 또한 열후의 列에는 諸와 마찬가지로 '여러'라는 의미가 있어서 서로 통한다.

3. 역사

3.1. 주나라

주나라무왕상나라(商나라)를 멸망시키고 각 지역을 왕족, 전쟁 공신, 상나라의 주요 인물 등에게 나눠주어 번병(藩屛)으로 삼았다. 초기 제후국은 총 71개였고, 이 중 53개가 희씨를 사용하는 친척들에게 돌아갔다.[2] 나머지는 18명은 성이 다른 공신이다.

이렇게 천자에게 각 지역을 하사 받은 귀족을 제후라고 했다. 그런데 이때는 아직 황제라는 칭호가 생기기 전이었고 천자가 이었으며 제후들은 공후백자남의 오등작의 계급만 해당하였다. 이것이 주나라봉건제이다.

이 제후들은 천자에게 공물을 바치거나, 군사를 파견해야 할 의무가 있었다. 중앙의 천자회맹이라는 절차를 통해 제후들의 군사력을 소집할 수 있었다. 무왕이 죽고 성왕이 등극하자 상나라 왕족 무경녹보, 주나라의 관숙삼감의 난이라는 반란이 일어났을 때 주공, 소공의 활약과 회맹을 통해 군사를 소집하여 난을 신속히 진압할 수 있었고 주의 통치는 더욱 강력해졌다. 그리고 주공소공섭정으로 황허강 유역에 핵심 제후국 50개국을 봉한 뒤 그 제후국들이 다른 80여 개의 제후국을 지배를 굳혔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친척관계가 멀어짐에 따라서 제후와 천자 간의 사이는 멀어졌고, 거기다 유왕포사의 잦은 봉화대 낚시라는 희대의 뻘짓이 터지자 제후들과 천자 간의 관계는 완전히 금이 갔다. 그래서 견융족이 쳐들어와서 긴급하게 봉화를 올렸음에도 제후들은 또 포사의 낚시일 것이라 여기고 군사를 소집하지 않았을 정도이다. 결국 수도 호경은 견융족에 초토화되었고, 주나라는 수도를 낙읍으로 천도해야 했다.

3.2. 춘추전국시대

견융의 침략 이후 천자의 권위가 바닥에 떨어지며 제후들의 위상이 높아져서 힘을 키우게 되니 춘추시대가 열리게 되었다. 이때는 후대의 전국시대와는 다르게 명분상으로는 춘추오패가 주나라 왕실을 받들긴 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명분에 불과하였고 당시 천자의 말을 듣기 싫은 제후들은 힘이 센 한 명의 제후가 천자를 대신해 회맹을 소집하기도 했는데, 이 힘이 센 제후를 패자라고 불렀다.

전국시대 들어서는 주왕실의 권위가 땅바닥까지 추락하여 춘추시대까지는 명목상으로 나마 주왕실을 모시던 제후들이 더이상 주왕실을 섬기지 않게 되었고 힘이 센 제후들은 주왕실의 권위에 도전하여 도 자칭하는 혼란의 시기가 되었다.[3] 당연히 주나라는 완벽하게 개판이 되었고, 끝내 소양왕, 진시황의 공격으로 멸망했다.

3.3. 진나라

이후 천하를 통일하고 을 세운 진시황은 주나라 멸망의 원인이 된 봉건제를 폐지하고 강력한 중앙 집권 제도인 군현제를 전국적으로 실시[4]하였는데, 군공이 없는 종실의 작위를 박탈하고 군공이 있는 종실의 작위를 후(侯)로 제한하며 실권을 박탈하여 조세 징수권만을 갖도록 하였으며, 백성을 다스리는 일은 중앙정부가 임명한 관리(현령 등)에 의하여 이루어지도록 하여 제후의 힘을 크게 빼고 중앙집중제를 이룩한다. 이때 전통적 의미의 제후는 폐지되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너도나도 칭해 희소성이 떨어진 왕이라는 호칭 대신 왕 위에 황제라는 칭호를 만들어내고 본인이 그 자리에 오르게 된다. 이때부터 황제는 천자를 칭하게 되고 왕도 제후의 반열로 확립된다.[5]

3.4. 한나라

그러나 진시황의 가혹한 통치와 이세황제 호해가 저지른 여러 가지 병크로 인하여 각지에서 일어난 반란으로 진나라가 멸망하고, 항우18개의 왕국을 분봉하면서 다시 봉건제로 회귀하여 제후가 부활하...는 듯하였으나, 유방에 의하여 한나라가 세워지면서 군현제봉건제를 절충한 군국제가 실시되었다. 이때는 다시 실권을 가진 제후[6]가 임명되었으나, 오초칠국의 난으로 인하여 군국제가 폐지되면서 다시 군현제가 전면적으로 자리잡고, 제후는 실권이 없는 명예직의 존재가 된다. 그러나 이후에도 황족을 왕이나 공으로 봉하고, 공신들을 후로 봉하여 식읍을 주는 제후 제도 자체는 계속 유지되었다.

3.5. 삼국시대

화무십일홍으로 영원히 지속될것만 같았던 한나라환관의 횡포와 무능한 황제들로 인해 쇠퇴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천자의 권위가 떨어지고 지방이 중앙정부의 통제를 벗어나는 시기가 도래하는데 이것이 삼국연의로 유명한 삼국시대이다. 이때에는 조조, 유비, 손권, 원소, 유표등의 지방의 군벌들이 할거하기 시작해 과거의 춘추전국시대와 같은 양상이 벌어졌다.

그런데 이때는 춘추전국시대와 다른 양상이 있다. 이전의 지방 군웅들은 '제후'의 작위에 있는 자들로서 제후의 지위에 오른 사람들은 왕, 공, 후 등등의 작위로 호칭되며 자기 영지에서 합법적인 정치 주권을 행사했다. 그런데 후한 말의 군웅들은 주목, 주자사, 태수, 교위 등등 제후의 '작위'가 아닌 '관직'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이는 이들이 지방에서 땅을 분봉받아 그 안에서 자주적인 주권을 행사하는 '제후'가 아니라, 순전히 중앙 정부의 임명을 받아 지방에 부임하여 중앙 정부의 주권을 대행하는 '지방관'으로서 임명된 사람들임을 뜻한다. 후한은 이전의 주나라 혹은 전한 초기와는 다르게, 봉건제봉건제적 요소가 절충된 군국제가 사라지고 중앙집권적인 군현제를 완성한 상태인 나라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삼국지의 지방관료였던 군웅들이 마치 제후처럼 지역 패권을 장악하고 세력 확장을 위해 서로 쟁탈전을 벌일 수 있었던 것은 한나라의 중앙집권적 시스템이 붕괴하고 중앙 정부의 권위가 무너진 후한 말의 혼란기에서 나타난 예외적이고 비정상적인 상황이었기 때문에 그런것이고 사실 이들은 그럴 권한이 없었다. 이들은 제후같은 자기 지역의 군주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중앙에서 파견한 지방관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들은 제후로 분봉되지만 않았을뿐 실질적으로는 제후나 다름없는 상황이었다.[7]

이후에 유씨만 왕이 될 수있다는 유방의 유훈을 깨고 승상 조조가 한황실을 겁박하여 위왕에 오르고 수도를 업성(邺城)에 두어 자체적인 조정을 갖춘 제후의 반열에 오르게 되고 유비손권도 각각 한중왕과 오왕에 오르게 된다.

3.6. 위진남북조 시대

조위, 특히 조비는 황위를 넘볼수 있는 조씨 종친들을 경계해 일가친척에게 힘을 주지 않았지만 오히려 이점 때문에 조씨 친왕 제후들이 무력해져 사마의와 사마씨에게 나라를 빼앗기게 된다. 이를 타산지석으로 삼은 서진은 황실 종친들에게 강한 권력을 준다. 그러나 이는 사마씨 제후들이 황권을 위협하는 팔왕의 난을 일으키는 원인이 되었고 결국 서진은 북방 민족의 침입을 받아 강남으로 도피하면서 동진이 되었고 이후 남북조 시대가 시작되었다.

3.7. 당나라

당나라에는 평왕(平王)이라는 왕작이 있었는데 동서남북의 사평왕이 있었으며 후기 혼란기에는 절도사들에게 하사했다. 나중에 이들이 당나라에 독립하여 독자적으로 칭제건원하게 되어 5대 10국의 일부를 이룬다. 전반적으로는 이미 삼국시대 부터 그런것 처럼 이미 봉건제가 사라지고 중앙집권화 되어 사평왕이 아닌 군웅들은 기본적으로 절도사 '관직'을 가진 사람들이었지 제후의 '작위'를 가진 사람들이 아니었다. 그러나 실상은 제후 못지 않은 권력을 가져서 자기동네에서는 왕 또는 공후백자남이나 다름없었다.

3.8. 송나라

당나라의 평왕(平王) 왕작이 이어졌는데 송나라는 절도사를 사실상 폐지했고[8] 사평왕 중 서평왕은 서하의 군주에게 봉작하고 남평왕은 베트남 리 왕조의 군주를 책봉했다.고려한테 동평왕 자리 줘도 될 것 같은데?

3.9. 원나라

원나라에는 심양왕(瀋陽王)이라는 왕작이 있었는데 고려왕족에게 하사했다.

3.10. 청나라

청나라는 좀 독특해서 제후들이 반드시 지정된 곳에만 살아야 했다. 베이징의 내성이 만주족 구역이었다. 이는 한족만주족을 분리시켜 만주족이 한족에 동화되지 않게 하려는 민족분리책의 일환이었다. 그리고 친왕도 황자라고 해서 반드시 임명하지는 않았고 공이 있어야 임명했다.

4. 천자와의 관계

제후는 천자의 신하로서 제후국을 흔히 천승지국(千乘之國)이라 하는데, 주나라 제도에 전쟁이 일어나면 천자는 전차 1만 승(乘)과 6군을 거느린다고 했으며 제후는 전차 1천 승과 3군을 거느린다고 해서이다. 천자의 나라는 만승지국, 대부 또는 작은 제후국은 백승지국이라고 했다. 그래서 제후를 '천승의 몸' 등으로 부르기도 했다. 제후는 자기 영토를 다스리는 것에는 천자와 다를 바가 없으나 어디까지나 주나라 영토안에 있는 비독립적인 상태이기 때문에 천자는 언제든지 신하인 제후를 갈아 치울 수 있고 더 큰 공이 있는 다른 신하를 제후로 삼을 수도 있었다. 또한 주군인 주왕실에 대한 병사를 대고 세금을 내는 의무를 지니고 있었다. 유럽의 봉건 기사들을 생각하면 비슷한 개념이다.

물론 제후들은 중앙의 권위가 무너지면 할거하며 주변의 여러 제후국들과 전쟁하기도 하였으나 그들의 권위는 애초부터 중앙에서 천자가 본인을 대신해 파견된 대리자들이란 것은 변함이 없었다.

5. 서양과의 비교

주나라는 유럽의 봉건시대와 같이 천자가 주나라 영토 내에 제후들을 두고 간접지배하는 체제였다. 다만 유럽은 계산적인 쌍무 계약관계를 바탕으로 군주영주가 관계를 맺었다면, 주나라는 유교적 가족관계를 천자와 제후의 관계에 규정한 것이 차이점이었다. 그래서 주 왕실은 큰집이 되고 제후들은 작은 집이 되는 섬기고 섬김을 받는 가족들이었고, 천자국제후국과의 관계를 설정할 때 '부자관계', '형제관계', '숙질관계' 등으로 급을 따지며 이런 것들을 중요시하는 것은 서양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6. 주변국과의 외교관계에서 적용

주나라부터 시작된 천자와 제후들과의 관계는 원래 중국 내부적 제도였으나 중국이 주변 민족들과 접촉하기 시작하자 천자와 제후들과의 관계를 주변 민족들과의 관계에도 적용하고자 하였다. 그래서 중국을 세상의 중심인 '중국'으로 설정하고 천자를 세계의 지배자로 보았으며 주변 이민족 국가를 번병으로 규정했고 그 군주는 제후로 삼았다. 이런 중화질서에 편입을 거부하는 이민족은 중국의 신앙상 하늘로 부터 천하의 지배권을 부여받은 신성한 천자와 가족관계인 제후제도를 모르는 패륜아같은 금수의 야만족, 즉 오랑캐로 보았고 교화해야 할 대상으로 여겼다.

그런데 중국 내부로 편입되지 않은 외국은 중국 내부와는 엄연히 차이가 나는 곳이었고 제후로 임명하고 봉국으로 삼아도 중국 내부의 봉국들과는 차이가 컸다. 그래서 이런 제후국을 외번(外藩)이라 하였고 내부의 제후국을 내번(内藩)이라 구분 하였다.

그래서 중국의 황제국들에게는 중화적 천하관의 사상적 배경상 외국 이민족과의 동등한 외교관계라는 것은 있을 수 없었고 오로지 천자국과 신하인 제후국이라는 개념만이 있었다. 그래서 몇 번의 예외[9]를 제외하고는 외국과 단 한번도 대등한 외교관계를 맺어본적이 없었다. 이는 아편전쟁에서 청나라가 패하고 대영제국을 비롯한 서구열강들과 동등한 외교관계를 성립하게 됨으로서 깨지게 된다.

7. 한국사의 제후

7.1. 설명

제후라는 것은 중국 주나라를 비롯한 중국의 개념이었으나 전근대에 많은 중국의 제도가 한국사의 국가들에게 들어온 것처럼 제후제도 역시도 통용되었다. 다만 한국사 왕조들이 중국의 천하관인 조공, 책봉체제에 들어가 군주위를 중화사상 체계속 황제(皇帝)의 제후 중 하나인 (王)으로 선택한 이후에는 한반도 왕조의 군주는 서열상 중국 천자의 제후 중 하나에 불과하였기 때문에 한국사에서 제후란 사실 왕으로 있는 군주들 자신이었다. 그래서 유교관념과 제후제도의 이론상으로 제후는 천상으로부터 권능을 부여받은 천하와 인간세계의 주인인 천자만이[10] 제후를 봉할 수 있는 것으로 천자가 아닌 천자가 임명한 제후 스스로 자신을 대리할 제후를 또 책봉한다는 것은 사실 유교적 예법상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주나라의 유교적 예법상으로는 천자는 지방의 대리통치를 봉한 '국(國)'의 우두머리에게 제후의 작위오등작을 내리고 제후는 제후국에 소속된 '가(家)'의 가신에게 내리는 작위군호를 내린다.

그러나 조선시대 이전에는 한국사의 왕조들에게 유교적 가치관이나 중화사상은 그다지 엄밀하지 않았고 의 위엄을 높이기 위해 자체적으로 제후를 봉하기도 하였다. 이는 외왕내제의 한 예로 볼 수 있다. 황제의 고유권한을 행사해 황제노릇을 했으니 말이다. 특히 고려 왕조에서 이것이 절정에 달하였다. 하지만 조선 왕조에 들어서는 이전 왕조들보다 더 고도화된 유교적 가치관의 확립과 중화사상의 수용으로 태종이 제후국의 제도로 자체적인 제후를 책봉하는 것은 예법상 맞지 않다고 한 이후 황제에게 책봉받은 작위인 조선왕 왕작(王爵) 하나만을 제외하고 중국 황제가 아닌 한국 왕이 자체적으로 임명하는 일체의 공후백자남 제후작위를 없애 버린다. 그리고 오로지 제후가 가신에게 봉작하는 작위인 군호만 신하들에게 내렸다.[11] 그러나 살아서 제후로 봉해진 자는 더이상 없었으나 과거의 유산으로 신하들의 시호에 공(公)을 붙이기는 했다. 대표적으로 유명한 공(公)으로는 충무공(忠武公) 이순신이 있다. 또한 왕도 묘호를 붙였다.

그 후 거의 오백년 뒤에 고종은 대한제국을 건국하고 칭제건원하여 황제가 된다. 이때는 고려 왕조처럼 불완전한 체계가 아닌 완전한 황제국을 표방하여 이 대한제국의 약 13년 동안은 한국사에서는 가장 주나라 예법에 가까운 거의 완벽한 천자국의 제도를 갖추게 된다. 그래서 고려시대처럼 왕에 오르고 황제처럼 취급하는 게 아닌 명실상부한 황제에 오르고 완편된 제후 작위들을 갖추어 황실 직계는 왕족(王族)으로, 방계는 공족(公族)으로 임명한다. 그래서 한국사에 유래가 없던 친왕 작위들도 최초로 봉작되었는데, 대중적으로 유명한 영친왕의 작위도 이때에 만들어진다.[12] 그러나 대한제국은 기반이 튼튼하지 않은 나라였고 금새 일본제국에 병탄당한다. 그러나 대한제국의 제후들은 나라는 없어졌지만 왕공족조선귀족으로 살아남았으나[13] 1945년 일본의 제2차 세계 대전 패전 이후 1947년 GHQ 체제하에서 신적강하를 거쳐 평민으로 강등 당하였으며 1948년 한반도에서도 별다른 제정복고의 움직임도 없이 남북에서 각각 자유민주주의인민민주주의의 공화정체가 들어서서 복벽이 이루어지지 않음으로서 신분제는 타파되고 한국사 왕조들의 군주들도 포함되었던 작위인 과 다른 공후백자남의 작위들도 이로써 역사에서 최종적으로 사라지게 되었다.

7.2. 목록

※ 한국사의 군주들은 대부분이 (王)으로서 중국 황제(皇帝)에게 책봉 교서를 받은 경우는 '왕작'(王爵)으로 정식 임명된 제후에 해당하지만 여기서는 기본적으로 한국사의 군주가 아니면서 한국사 군주에게 제후 작위를 수여받은 신하의 경우만 왕, 공, 후, 백, 자, 남과 시대순, 가나다순으로 작성하고 군주는 제후 작위가 한국사에서 특이 사례인 경우만 예외적으로 작성하고 '(군주)' 표시로 군주임을 병기합니다. 또한 작위는 아니나 시호성씨, 별칭인 경우는 '(시호)', '(성씨)', '(별칭)'로 따로 표시합니다.

7.2.1. 왕작(王爵)

7.2.1.1. 고조선
7.2.1.2. 고구려
7.2.1.3. 백제
7.2.1.4. 당나라
7.2.1.5. 아스카 시대 일본
7.2.1.6. 돌궐
7.2.1.7. 신라
7.2.1.8. 탐라
  • 탐라국왕(군주)[22]
7.2.1.9. 우산국
  • 우산국왕(군주)[23]
7.2.1.10. 발해
7.2.1.11. 후백제
7.2.1.12. 고려
고려 제후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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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1.13. 원나라[27]
7.2.1.14. 대한제국
7.2.1.15. 일본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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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2. 공작(公爵)

7.2.2.1. 당나라
7.2.2.2. 고려
7.2.2.3. 조선[39]
7.2.2.4. 일본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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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3. 후작(侯爵)

7.2.3.1. 고조선
7.2.3.2. 고구려
7.2.3.3. 백제
7.2.3.4. 고려
7.2.3.5. 일본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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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4. 백작(伯爵)

7.2.4.1. 고려
7.2.4.2. 조선[43]
7.2.4.3. 일본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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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5. 자작(子爵)

7.2.5.1. 고려
7.2.5.2. 일본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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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6. 남작 (男爵)

7.2.6.1. 고려
7.2.6.2. 일본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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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표준국어대사전[2] 이들을 동성제후국이라 부른다.[3] 다만 그래도 어디까지나 천자는 주왕이었고 주왕이 천자로서 분봉하는 형태가 기본이었다. 그래서 형식상 왕 아래 왕이 있게 되는 상황이었다. 천자라는 주왕실의 권위는 썩어도 준치라고 전국시대 끝까지 있기는 있었다. 유명한 후대의 삼국시대 한나라 황실을 생각하면 비슷하다.[4] 군현제 자체는 통일 이전에 이미 상앙의 개혁을 통해 진나라에 실시되고 있었으며, 통일 이후 전국을 36군으로 나누어 본격적으로 군현제를 실시하였다.[5] 물론 전국시대도 왕이 제후의 한 종류라고 볼 수는 있다. 왜냐하면 주왕은 천자이긴 했지만 초왕이나 연왕이 천자는 아니었고 주왕에게 분봉받은 경우도 있었기 때문에 왕중에는 천자도 있고 제후도 있는 상황이었다.[6] 초기에는 한신(한왕) 등 공신을 제후인 으로 임명하였으나 이후 이들을 숙청하고 황족인 유씨인 동성제후만 왕이 될 수 있도록 제도를 변경 하였다.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왕작에 해당하는 것으로 공후백자남은 유씨가 아니라도 가능했기에 유씨가 아니면 제후 자체를 할 수 없다는 얘기는 아니었다.[7]손견은 '오정후'(烏程侯)로서 후작이었다.[8] 명목상으로는 남아있었으나 그냥 이름만 있는 수준이었다.[9] 흉노를 형으로 인정하고 흉노의 동생이 된 전한의 케이스, 요나라와 송나라, 금나라와 송나라, 그리고 청나라가 러시아와 대등한 관계에서 국경을 확정한 네르친스크 조약이 그 것 이전 문서에서 요나라와 송나라의 관계에서 송나라가 형이었다고 하는데 형동생관계 역시 기존의 중화적 천하관과는 거리가 멀다. 물론 실질적으로는 요나라는 물론이고 고려의 사신조차 송나라를 개무시했다.[10] 이럴때 흔히 관용적으로 쓰이는 말이 '억조창생의 주인'이다.[11] 조선 건국 직후에는 고려의 오등작이 그대로 사용되었다. 대표적 예로 봉화백 정도전, 청해백 이지란이 있다. 태종 이방원의 경우도 원래의 작위는 정안대군이 아닌 정안공이였다.[12] 고려시대의 역사기록에 친왕이라는 단어가 나오기는 하나, 이는 고려가 군주를 황제가 아닌 왕으로 하면서 부르기는 황상, 폐하 등의 황제국 용어로 부른 것과 유사한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고려사에 왕자가 친왕으로 임명된 사례는 없었고 왕자들은 공이나 후로 임명되었다. 물론 이것도 제후는 제후니 조선시대보다는 격이 높고 제후를 임명하는 것은 황제의 고유권한이니 외왕내제의 한 예로 의미가 있다.[13] 단 합방 당시 황제였던 순종은 창덕궁 이왕으로, 상황이었던 고종은 덕수궁 이태왕이 되고 친왕들도 공이 되고 공들은 조선귀족으로 한 단계식 강등당했다. 그리고 조선귀족은 오등작 중 최고위인 공작에 임명된 이가 없었으며 오로지 그 아래의 후작부터 남작까지만 봉작받았다.[14] 책봉이 아닌 자칭인데 전국시대주나라 천자의 권위가 떨어지자 각지의 군웅들이 왕을 자칭하는데 이때 역왕(易王)도 자칭 왕이 되었다. 그러자 바로 연과 경쟁관계였던 인접국 고조선조선후도 주왕실을 받든다는 명분으로 왕을 자칭하고 연을 치려하였으나 대부 례가 말려서 전쟁은 일어나지 않았다.[15] 조선후가 왕을 칭한뒤 왕위가 계속 내려온것으로 보인다.[16] 고구려 멸망 이후 보장왕의 후손들은 당의 수도인 장안에 머물며 고구려 유민들을 대표하여 고려조선군왕(高麗朝鮮郡王)의 작위를 세습하였다.[17] 백제멸망 이후 당나라는 부여융과 부여융의 손자 부여경을 대방군왕(帶方郡王)으로 봉했다. 참고로 식민통치기관인 웅진도독부의 7주 중 하나도 이름이 같은 대방주(帶方州)였다. 흑치상지는 행대방주장사(行帶方州長史)로 임명되었으며 구당서 현종본기의 태산 봉선의식의 조회하러온 내신 번국에 '백제 대방왕'이라는 기사가 있다.[18] 보장왕고구려부흥운동을 꾀하자 보장왕을 파촉으로 유배보내고 손자인 고보원을 충성국왕으로 삼아 요동을 관할하게 했다. 충성국왕의 충성은 일반적으로 의미하는 충성의 그 뜻이다. 하지만 고보원도 충성하지 않고 고구려부흥운동을 일으키려 하였다.[19] 정확히는 천황에게 하사받은 작위가 아니라 사성(賜姓) 받은 성씨다. 백제멸망 이후 일본에 있었던 백제유민들의 대표자였던것으로 추정된다.[20] 안승문무왕에게 임명받은 제후왕의 작위이다.[21] 살아있을 때의 작위는 아니고 시호로서 대상자는 김유신이다.[22] 백제와 신라에게 입조하였다.[23] 신라에게 입조하였다.[24] 견훤이 925년 후당장종(莊宗)에 입조하고 봉작받은 작위로 백제왕 뿐 아니라 관직 등의 여러 칭호도 함께 받았는데, 다 합치면 '검교태위겸시중판백제군사지절도독전무공등주군사행전주자사해동사면도통지휘병마제치등사백제왕식읍이천오백호'으로 상당히 길다.[25] 1281년(충렬왕 7년) 음력 3월 20일에 원세조충렬왕에게 하사한 작위의 이름이다.[26] 정식작위는 아니고 윤시우가 권세가 높아 불려진 별칭이다.[27] 원나라는 중국사와 몽골사에 속하나 역사적 사건들로 인해 한국사와도 접점이 많은데 심왕이 대표적이다.[28] 기자오의 진작된 작위로 급이 높은 일자왕(一字王)의 작위다.[29] 신돈원나라 작위이다.[30] 원래는 심양왕이었으나 충숙왕이 원나라의 권세가가 되면서 더 급이 높은 일자왕(一字王)인 심왕으로 격상되었다.[31] 기황후의 3대조까지를 추증할 때 기자오가 받은 작위다.[32] 김인문에게 당고종이 하사한 작위로 봉지 임해군은 백제의 서해안 지방에 해당한다.[33] 김유신당고종으로 부터 하사 받은 작위이다. 뿐만 아니라 관작과 식읍도 받았는데 봉상정경(奉常正卿)과 식읍 2,000호 이다. 그래서 합쳐 부르면 봉상정경평양군개국공식읍이천호(奉常正卿平壤郡開國公食邑二千戶)이다. 다만 김유신에게 내려진 영지인 평양을 신라나 김유신의 가문이 실효지배하지는 못한것으로 보이며 당과 신라, 이후에는 발해, 신라의 완충지가 되었다. 참고로 고구려를 무너뜨린 설인귀의 작위는 평양군공(平陽郡公)으로 고구려멸망에 큰공을 세우고 안동도호부의 도호로 임명되어 고구려 지방을 다스린 적이 있으므로 고구려의 수도 평양의 작위라 헤깔리기 쉽지만 설인귀 작위 평양의 양(陽)자가 한국 평양의 양(壤)자와 다르고 중국어 독음도 다르다. 설인귀 작위의 평양(平陽)은 현재의 중국 산시성에 위치한 다른 지역으로 서로 다른 지역이다.[34] 주열(朱悅)의 작위이다.[35] 공예태후의 아버지 임원후(任元厚)의 시호다.[36] 왕서(王恕)의 작위로 정화궁주의 조부이다.[37] 홍군상(洪君祥)의 진봉된 작위[38] 공예태후의 아버지 임원후(任元厚)가 정안후(定安侯)에서 진봉된 작위다.[39] 조선은 초기 잠깐동안만 오등작을 봉하고 이후에는 군호만 썻으나 시호로 공(公)을 쓰는 일은 많았다.[40] 홍군상(洪君祥)의 작위[41] 공예태후의 아버지 임원후(任元厚)의 작위다.[42] 제주고씨 장흥백파의 시조인 고중연의 작위로 홍건적의 난 시기 공민왕을 호종하여 호종공신에 임명되면서 받은 작위이다.[43] 초기의 잠깐 동안만 백작을 봉했다.[44] 이들의 직위는 대부분 태수, 자사였기 때문에 사실 제후가 아니다. 제후의 작위를 가지고 있던 인물은 오정후(烏程侯) 손견이 유일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