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19-07-13 18:50:31

황제

파일:나무위키+유도.png   동음이의어에 대한 내용은 황제(동음이의어) 문서를 참조하십시오.
문화권에 따른 황제의 호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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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나라 초대 황제 영정(嬴政) 로마 제국 초대 황제 가이우스 옥타비우스 투리누스(Gaius Octavius Thurinus)

1. 개요2. 어원3. 동아시아 한자문화권
3.1. 중국3.2. 일본3.3. 한반도3.4. 베트남
4. 유럽
4.1. 고대 로마4.2. 중세
4.2.1. 조건: 로마 황제의 후계자4.2.2. 번외: 교회의 인정
4.3. 근대 이후
4.3.1. 신성로마제국의 선출황제4.3.2. 19세기 유럽 - 나폴레옹과 그 이후4.3.3. 편법으로 황제가 되는 방법4.3.4. 19세기 서양에 황제가 있었던 국가들
5. 다른 문화권의 황제들6. 황제로 쳐주기 미묘한 사례7. 가짜(사칭) 황제
7.1. 중국7.2. 일본7.3. 러시아7.4. 미국7.5. 세르비아7.6. 루마니아
8. 황제라는 별명을 가진 실존 인물9. 황제 지위에 오른 가공 인물

1. 개요

Emperor[1]/ 황제(皇帝)https://en.wikipedia.org/wiki/Imperial,_royal_and_noble_ranks

자기 휘하의 직할지를 가지고 있으며 영지를 통치하는 제후를 거느리고 다스리는 군주(君主)이자 군주들 중 가장 높은 권위와 지위를 지니는 군주. 비슷한 개념으로 패왕이 있다.

일반적인 왕 또는 그 이하의 군주들과 달리, 명목상 또는 실질적으로 다른 국가의 군주인 왕을 자신의 밑에 둘 수 있다는 점이 황제와 왕의 차이점이다. 자신의 휘하에 왕을 신하로 둘 정도면, 그 영토 또는 정통성의 스케일이 다를 테니까 말이다. 다만 황제라고 해서 항상 영토가 크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어떤 나라의 군주를 해당 문화권의 주변 국가들이 자기네 군주들보다 실질적인 국력이나 권위 면에서 한 수 위라고 널리 인정한다면 그 칭호가 해당 문화권의 황제의 칭호가 되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즉, 민족주의가 대두하고 각 국민국가들이 기존 황제국의 정통성과는 어떠한 연관도 짓지 않은 채 독자적으로 황제를 칭하기 시작하는[2] 근대 이후가 아닌 그 이전의 황제 칭호는 주변을 억누를 수 있는 강대국의 역사와 결부된다.

황제라는 단어는 영어 어휘인 Emperor의 번역을 위해 쓰이기도 한다. 중국에서는 천자(天子)[3]라고도 한다. 아래에 서술되어 있듯이 황제와 Emperor의 개념은 완전히 같지 않다.

유럽의 황제는 로마의 정통성을 이어받은 군주만이 대외적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호칭이다. 동서 로마를 제외하고 로마의 후계를 자처한 황위는 총 3자리.
  • 러시아의 차르는 모스크바 대공이 동로마의 마지막 공주와 혼인하며 로마의 후계자임을 자처하며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차르는 라틴어 카이사르에서 온 명칭인데 일반적으로 로마의 황제로 번역되는 '아우구스투스', '임페라토르'가 아니다. 이 명칭은 3세기에 로마 황제의 자리를 분할하면서 부제(副帝)라는 의미로 사용했는데, 이 기준으로 보면 로마의 황제라고 하기에는 약간 애매하다. 다만 러시아의 군주 명칭은 다른 슬라브 국가들의 군주 명칭으로 차르가 이미 사용되어 왔기 때문에 이후에 아우구스투스, 임페라토르로 바뀌기는 한다.
  •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는 프랑크 왕과 독일 왕이 서로마의 정통성을 이어받은 것으로 여겨진 교황에게 로마의 후계임을 인정받으며 얻어낸 작위이다. 서기 800년에 프랑크 왕국카롤루스 대제가 신성 로마 황제의 관을 받았다. 카롤루스 대제 사후 신성 로마 제위는 중프랑크의 왕 로타리우스 1세가 가졌고, 로타리우스가 사망한 후 신성 로마 황제위는 이탈리아 왕국을 차지하는 자가 가졌다. 이탈리아 국왕 베렌가리오 2세가 교황령을 침공하자 962년 독일 왕국오토 1세는 이탈리아를 정벌하고 그 공로로 교황이 그를 신성 로마 황제로 대관해주었다.
    • 프랑스 왕국은 프랑크 왕국의 직계를 주장했기에 원칙적으로 카롤루스 대제 때에 획득한 제위를 요구할 수 있었으나 하지 않았고 나폴레옹이 프랑스에서는 프랑크 왕국 이후 최초로 제위를 차지한 사람이다. 신성 로마 제국은 나폴레옹 시대 이전에 이미 수백 개의 영방국가로 쪼개지면서 유명무실해졌으나 명목상으로나마 존재했는데, 나폴레옹에게 패배하면서 결국 사라졌다. 나폴레옹이 교황의 축성을 받은 것은 옛 로마의 황제위에 올랐다는 의미를 내포한다. 덧붙이자면 나폴레옹은 1804년 5월에 프랑스 제국 황제로 즉위하지만, 대관식은 12월에 하였다. 그리고 신성 로마 제국이 완전히 해체되는 해는 1806년이지만,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프란츠 2세가 오스트리아 황제를 자칭한 시기이때 프란츠 1세로 명칭이 변경는 1804년 8월부터다.
  • 로마 황제의 계보를 인정받지 못한 영국은 근세에 국력이 신장되었어도 황제의 칭호를 사용하지 못하다가 인도 제국을 설립한 후에 영국의 왕이자 인도 제국의 황제라는 명칭을 사용하였다. 물론 현재는 사용하지 않고, 영국 왕 조지 6세가 인도의 마지막 황제이다.

실제로 여러 왕국을 지배하지 않아도 황제의 호칭을 쓰는 경우도 많다. 과거 대한제국이나 현재의 일본이 그런 예라 할 수 있다. 자국이 세계의 중심이고 다른 국가를 따르는 것이 아니라 여러 군주들을 이끄는 강대국임을 자부하기 위해서다. 원래 뜻은 여러 왕국을 지배하는 자에게 주어지는 호칭에서 시작되었기 때문에 실질적으로 여러 왕국을 거느리지 않더라도 원 의미와 비슷하게 구색을 맞추려 했다. 고대 중국의 황제는 자국 영토 내에 태수 또는 번왕을 두었고 영토 밖의 국왕들과 함께 제후로 취급했다. 나폴레옹의 프랑스 제국의 경우도 스페인 왕국, 나폴리 왕국, 네덜란드 왕국, 스웨덴 왕국 등 여러 국가의 왕들을 휘하에 두었다. 이러한 대제국들과 동일한 나라임을 자부하기 위해 작은 제국들은 보통 자기 아들 등 핏줄들에게 왕의 칭호를 주거나 지방의 일부를 제후국처럼 명목상 취급하기도 했다.

이 외에 한자문화권에서는 황제라는 표준어(?)가 있음에도 천자나 황상(皇上)처럼 다른 단어로 돌려 부르기도 했다.[4] 유럽 문화권에서는 로마 제국 초기에 임페라토르카이사르 같은 단어들이 등장하지만 후에는 임페라토르로 굳어지고 카이사르는 동의어처럼 사용하였다.[5]

동양 한정으로, 패왕이라는 비슷한 개념이 존재한다. 황제와 패왕 둘 다, 자기 휘하의 직할지를 가지고 있으며 영지를 통치하는 제후를 거느리고 다스리는 군주(君主)이자 군주들 중 가장 높은 권위와 지위를 지니는 군주다. 사실상 개념이나 용례는 차이점 없이 완전히 동일하다.[6]

2. 어원

최초로 중국 전토를 통일한 진 시황제 영정(嬴政)이 새롭게 만든 천자의 칭호. 진시황 이전에 천자를 왕이라 불렀고 그 밑의 군주들을 제후라 불렀다. 그러나 전국시대 말기에 그 제후들이 너도나도 왕을 칭하게 되자, 왕이라는 작위의 가치가 떨어졌고, 이 왕들을 모조리 정복한 시황제가 새롭게 한 급 올려서 황제를 만들었다.그리고 나중에는 너도나도 황제를 칭하게 된다. 진나라가 쇠락하고 항우유방이 거병하던 시대에는 진나라 군주가 자진해서 왕으로 직위를 낮췄다.

황(皇)은 상고 시대에는 왕(王)과 동의어였으며, 제(帝)는 상나라 때부터 군주를 가리키는 어휘이긴 했으나 보통은 신의 의미로 사용되었다. 옥황상제나 기독교 신의 번역어로 중국에서 사용되는 상제(上帝)만 봐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황제라는 단어 자체가 원래 위대한(皇) 하느님(帝)이라는 뜻.[7] 주나라 이후 중국이 점점 인문화되다가, 시황제 시기에 이르러서는 帝라는 칭호가 신격화의 의미를 지니지 않게 되었다.

사기》의 <진시황본기>에 의하면 진시황이 천하를 통일한 후, 왕(王)[8]을 대신해서 천하의 지배자를 지칭하기에 적합한 명칭을 올리도록 이사(李斯)를 비롯한 신하들에게 요구했다. 이에 신하들이 천황(天皇), 지황(地皇), 태황(泰皇)중에 가장 존귀한 것은 태황(泰皇)이라면서 태황이라는 호칭을 바치자, 이를 거절하고 태황의 황과 신을 뜻하던 제를 붙여 직접 만든 것이 황제(皇帝)[9]라고 한다. 그 이전에도 삼황오제나 황천상제(皇天上帝) 등의 단어에서 보듯이 황(皇)이라는 단어와 제(帝)라는 단어가 각각 사용되었지만, '황제'라는 합성어를 만든 것은 진시황이 처음이다. 그리고 황제라는 어휘가 널리 사용되면서 오히려 황(皇)과 제(帝)는 황제라는 말의 약자로 여겨졌다.

참고로 진시황 사후 진 제국의 수도를 점령했던 항우는 황제라는 호칭 대신 - 명목상 서초 회왕의 신하였던 이유도 있었겠지만 - 스스로를 초패왕(楚覇王)이라 칭하고, 회왕 웅심(熊心)은 의제(義帝)로 높였다. 황제는 "천하를 통치하는 자"이고 패왕은 "힘으로 지배하는 자"라고 보면 되겠다.[10]

황제를 구성하는 두 단어인 황과 제 사이에서도 의미 차이가 있다. 그런데 기원부터가 왕(王)의 이체자였던 황(皇)보다 신격 상제(上帝)와 연결성이 있는 제(帝) 쪽이 더 강렬한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전설상의 삼황오제도 삼황은 매우 추상적인 존재이지만 오제는 대단히 구체적인 존재로 묘시되고 있다. 즉, 황은 권위는 있지만 추상적으로 위대한 존재라는 개념이며, 제는 실질적인 통치자로서의 개념이 강하다.[11]

한나라 시대에 황제의 아버지로서 명목상의 존칭을 받을 때는 태상황이라고 불렀지 '제'를 붙이지 않았다. 한서에 안사고(顔師古)는 이렇게 주석을 달았다. "천자의 부친이므로 '황'이라고 한다. 정치에 관여하지 않으므로 '제'라고 하지 않는다." 또 실질적인 권력을 장악하고 있을 때는 태상황제라고 불렸다. 이처럼 황과 제 양자가 거의 동격이기는 하나 실제로 '황'은 수식어에 가깝고, '제' 쪽에 더 실질적인 권한의 의미가 부여되어 있었다.#[12]

위와 같은 이유로 조선에서는 황(皇)은 왕(王)과 혼용해서 썼으나 제(帝)는 사용하지 않았다. 대표적으로 영조경종을 추억하며 '황형(皇兄)'으로 칭했던 것이 하나의 사례다.

여담으로 무협소설에서는 황(皇)을 제(帝)보다 높다고 주장하는 경향(예를 들어 열혈강호)이 있지만 실제로는 위에서 보듯 제(帝) 쪽이 높은 것을 알 수 있다.

3. 동아시아 한자문화권

3.1. 중국

진시황이 스스로 시황제(始皇帝)라 칭한 건 자신의 계승자들이 2대 황제, 3대 황제 하는 식으로 이어질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진 이세황제까지는 이어졌지만 진이 예상보다 일찍 붕괴돼버리는 바람에 그러한 생각은 오래 가지 못했고, 한나라 시대부터 청나라 시대까지 무제광무제태종이니 하는 식으로 시호와 묘호로 칭한다.

중국의 황제 개념은 원칙상으로 '천하의 지배자'지만, 실제로는 중국의 일부 지역을 장악하고, 이를 유지할 능력만 있다면 개나 소나 황제를 칭하는 일이 잦았다. 물론 지방의 자칭 황제들은 후대의 역사서에서 지역명+왕(또는 주主) 혹은 본명으로 기록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런데 남북조시대처럼 남북이 각기 역사 기록을 남긴 경우 서로 상대방을 참칭 황제라 서술하기도 한다. 또한 정통성 논란이 발생하는 중국의 분열 시대는 특정 국가만 후대에 정통으로 평가되기 어려우므로 여러 국가의 군주가 다 황제로 인정받기도 한다.

하지만 중국의 일부 지역을 지배하는 수준을 넘어 주변국을 신하로 대하며 작위를 준 경우도 많다. 한국인들에게 황제란 거대한 국가를 통치하는 유일무이한 지배자라는 이미지가 있는 까닭은 옆나라 중국의 군주 때문이다. 한자문화권을 넘어 먼 지역까지 제국의 위상을 높인 중국 황제들도 여럿 존재하였다. 대표적으로 정화의 원정대를 파견하어 인도양 인접 각국에 명나라의 국력을 과시하고 위상을 떨친 영락제.

동아시아의 황제는 휘하에 , 공작 등을 둘 수 있었다. 하지만 황제의 우위를 인정하나 독립국을 다스리는 군주인 왕이 아니라 황제의 아들 중에서 후계자인 태자를 제외한 다른 아들들에게 주는 작위로서의 왕(주로 친왕(親王))도 존재했다. 실제로 중국에서는 이 경우가 더 많았다. 왜냐하면 주나라의 봉건제가 무너진 후 군국제를 거쳐 전면적인 중앙집권적 군현제가 실시되자 황제국의 영토 내에서 반(半)독립적인 통치권을 지닌 지방 왕(주로 번왕(藩王))들은 황제권에 심각하게 위협이 되기 때문에 나중에 거의 폐위되었다. 역사적으로도 반독립적인 지방 왕들은 반란을 여러번 일으켰는데, 전한 시대에 옛 연나라 땅을 다스리는 번왕에 봉해진 노관이 반란을 일으킨 사건이나 전한 중기의 오초칠국의 난, 서진팔왕의 난, 청나라 초기의 삼번의 난 등이 그 예이다. 따라서 중국 역사에서는 개판이 아니고 작위로서의 왕이 더 많았다.

동아시아의 황제는 천명을 받아 '천하'를 다스리는 존재라면, 왕은 '나라'를 다스리는 자였다. 물론 중화사상에 입각하여 관념적인 천하의 지배자로 인정된 것이지, 실제로 세계를 지배한 것은 아니었고 황제는 타국으로부터 조공을 받고 명목상으로 다른 나라의 왕들을 승인하는 형식을 취했다.

황제가 내리는 명령은 칙(勅)이라고 부른다. 유교문화권인 동아시아에서 황제와 왕은 엄격하게 구별되었기 때문에 쓰이는 한자부터 달랐다. 한국사에서는 구한말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황제국이 된 후 대내외에 공식적으로 이 단어를 사용했다. 사극에서 흔히 나오는 어명보다 당연히 높다. 황제가 내리는 명령을 담은 칙서(勅書)를 신하가 성지(聖旨)로 전달하며, 칙명을 따라야 하는 제후와 신하는 황제가 실제로 그 자리에 있는 것처럼 무릎을 꿇고 받들었다. 이건 왕이 내리는 교서(敎書)도 마찬가지

중국 역사를 설명할 때 황제는 빼놓을 수 없는 요소이다. 진나라가 얼마 가지 못해 망했지만 최초로 중국을 통일했다는 점에서 중요한 시기였고, 몇년 후 다시 중국을 통일한 한나라가 400여년간 이어지면서 중국에서는 '국가 최고권력자 = 황제'라는 공식이 굳어졌다. 한나라 이후로는 환난이 와도 춘추전국시대처럼 뿔뿔이 흩어져서 살기 보다는 자신이 중국을 통일한 황제가 되겠다는 일념으로 서로 치고 박다가 결국 다시 하나의 국가로 모이곤 했다. 즉, 황제라는 자리는 그 자체만으로도 중화 세계의 1인자로서 사실상 중국의 정체성의 중심이다. 황제라는 구심점이 없었으면 중국은 유럽처럼 수많은 국가들이 지금까지 갈라져 있었을 수도 있다.

특이하게도 황제가 다른 나라 황제를 제후처럼 책봉하는 경우도 있긴 했다. 금나라남송 황제를 책봉했다(...). 금은 송나라를 완전히 정복하고 싶었지만 중국 전역을 완전히 차지할 능력이 부족했기 때문에 송나라 황제를 인정하되 자기네 황제가 책봉하는 방식을 썼던 것. 송나라로서는 굴욕적이지만 전쟁의 종결 및 휘종의 유해와 고종의 생모 위씨의 반환을 위해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13] 금나라는 송나라 외에도 괴뢰국인 초(楚)나라[14]와 제(齊)나라[15]라는 허수아비 국가를 세워 각각 황제를 책봉했다.

한편 오호십육국 시대 이래로 중국으로 진입한 비(非)한족 군주들은 선우카간 같은 고유 칭호 말고도 천왕(天王) 같은 한자식 조어도 사용하였는데, 시대가 갈수록 황제(皇帝)로 칭하는 경우가 더 많아졌다.[16] 남북조시대의 북조, 요나라, 금나라, 서하, 대리국, 원나라, 청나라 등이 비(非)한족 지배자의 황제국의 예.

기원전 221년에 등장한 황제 칭호는 1912년 대청제국이 신해혁명으로 멸망하면서 소멸하였다. 1916년 중화민국의 총통 위안스카이중화제국 건국을 선포하면서 제위가 일시적으로 부활하였으나, 전국 각지의 반발로 곧 취소되었다. 1917년 7월에는 장훈복벽이 발생, 청의 마지막 황제인 선통제가 황제로 다시 복위하였으나, 이 쿠데타는 11일 만에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멸망 후 청나라 소조정이라고 불리는 청나라 황실은 중화민국이 황실의 예우는 해주었으나 1924년 군벌 펑위샹에 의해 해체되어 명목상으로도 황제가 남지 않게 되었다. 이후 선통제가 일본에 협조하여 1932년 만주국 원수로 취임하고, 1934년에 만주국 황제가 되어 만주 지역이나마 제위가 다시 들어섰다. 하지만 1945년 일본 제국의 패망과 함께 만주국도 멸망하여 중국사에서 황제는 현재까지 존재하지 않는다.[17]

3.2. 일본

일본 군주 칭호는 중국 기록에 왕(王)으로 처음 등장한다. 적어도 5세기 후반에는 자국의 군주를 오키미(大君, 大王, 治天下大王)[18]로 좀 더 높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 외에도 여러 명칭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나 8세기 초의 율령제 시행과 함께 군주의 공식 칭호를 천황(天皇)[19]으로 고정하고 자국을 황제국으로 간주하였다. 다만 천황이라는 칭호가 공식화된 것은 8세기이지만, 7세기에도 天皇이라는 명칭은 다른 명칭들과 혼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런 행위는 중국 주도의 책봉 체제를 이반하는 정치 행위였지만, 지리적 위치상 일본에 군사적 압력을 가하기 어려운 중국에서는 '오랑캐 놈들이 뭘 몰라서 그런다'라는 식으로 넘어갔다.

그러나 일본 역사에서 실권을 행사한 천황은 많지 않았기 때문에 중세 이후 일본의 천황은 실제로 나라를 다스리는 최고 권력자로서의 황제라기보다는 일본 고유 종교인 신토의 수장 혹은 일본을 상징하는 존재로서 간주되는 경향이 강하다. 중국이나 조선 같은 주변국에서도 천황의 존재는 알고 있었지만[20], 실질적으로는 쇼군(정이대장군)을 국가 원수인 국왕(國王) 또는 대군(大君)으로 대했고, 일본을 중국과 대등한 황제국으로 여기지 않았다.[21]

메이지 유신 이후의 일본은 국호에 제국을 붙이기 시작하였는데, 이는 서구의 전통을 수용한 것이다. 전근대 동아시아에서 국호에 ~국(國)을 붙이는 경우는 있었고 자국을 드높일 목적으로 국호 앞에 대(大)자를 붙이는 정도였지만 ~제국, ~왕국 등의 정체(政體)를 표시하는 전통은 없었다. 일본이 국호까지 황제국임을 표명하기 시작한 후 다른 동아시아 국가들도 황제국임을 강조하고 외교적으로 일본 및 서양 국가들과 대등한 이미지를 주기 위해 국호에 제국을 붙여 외교 문서에 표기하였다. 그것이 바로 대청제국(大淸帝國), 대한제국(大韓帝國)이다.

자세한 사항은 천황 참조.

3.3. 한반도

일본과 달리 한반도는 중국의 책봉 체제를 크게 벗어나지 않아 대내적으로든 대외적으로든 '황제'[22]를 대놓고 자칭하는 군주는 극히 드물었다. 그러나 삼국 시대의 군주들은 독자적인 천하관을 가지고 중국 군주의 예법과 지배 질서를 모방하여 적용하였다.[23] 황제 질서 모방은 13세기 원 간섭기에 왕실 용어까지 제후의 예법을 따르는 것으로 격하되면서 사라졌기 때문에 남아 있는 기록이 많은 편은 아니다. 하지만 독자적인 연호 제정, 군주가 하늘에 직접 제사, 천문 관측, 삼성육부(三省六部)의 체계 도입, 탐라를 제후국처럼 대하는 등 여러 사례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기에 분명하게 흔적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고려시대에 군주를 지칭할 때 황상(皇上)이라고 하고, 다음 후계자를 태자(太子)라고 부르는 기록도 있어서 사실상 외왕내제(外王內帝) 방식을 취했음을 충분히 알 수 있다. 다만 한반도에서는 광종이 칭제하였다가 북송의 반발로 제위를 취소했던 사례처럼 황제라는 명칭을 직접적으로 사용하여 중국과의 외교적인 문제가 발생하는 것을 방지하고자 했다.

1894년 갑오개혁이 실시되자 조선 국왕은 대군주(大君主)로 한층 격상되었다. 그리고 청일전쟁으로 동아시아 책봉체제가 완전히 와해되자 고종1897년대한제국을 선포하고 황제가 된다. 그러나 이후 내실이 부족하여, 열강의 간섭이 심화되고 결국 대한제국은 일본제국에게 멸명당한다.

이후 광복 후 공화정대한민국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들어서면서 한국이 제정복고를 하지 않은 이상 황제라는 칭호는 쓸 일이 없다.

3.4. 베트남

진나라 멸망 후 혼란을 틈타 조타광둥베트남 북부에 걸쳐 남월을 건국하였다. 조타는 처음 왕을 칭했으나 전한 여태후 정권과의 대립이 심화되자 기원전 181년 칭제하였다. 이것이 베트남 황제[24]의 시초이다. 하지만 문제가 즉위하자 전한에 신종하고 조공을 바치기로 하여 명목상 대외적으로는 제후국이 되었다. 이를 계기로 베트남은 대내적으로 칭제건원하고, 대외적으로 칭왕하는 외왕내제 체제를 갖추는 전통이 생겨나게 된다(단, 남월의 군주들은 칭제만 했지 연호는 없었다.). 한반도의 군주들이 독자적 천하관을 갖고 황실 예법을 가져다 쓰면서도 국내에서 황제라고 대놓고 한 경우가 적다는 점과 비교해 보면 베트남 역대 황제국들이 좀 더 정석적인 외왕내제 체제를 갖추었다고 할 수 있다. 남월은 기원전 112년에 전한에 멸망하고 베트남 지역은 수백년간 중국 역대 왕조의 직할령이 되어 한동안 황제는 사라졌다.

544년 이족(俚族) 출신의 리비(李賁, Lý Bí)가 중국으로부터 독립을 선포하고 베트남 북부에 만춘(萬春)을 건국하며 제위가 부활하였다. 리비는 자칭 남월제(南越帝)라 하고 연호를 천덕(天德)이라 하여 중국식으로 칭제와 건원을 함께 하였다. 하지만 602년 수나라에 멸망해 베트남의 제위는 또다시 사라지고 만다.[25]

당나라가 멸망한 후 10세기 전반부터 사실상 반독립 상태가 된 베트남은 968년 딘보린이 대구월(大瞿越)을 건국하면서 황제 체제가 부활하였다. 그 이후로는 잠깐씩 외세의 지배를 당하기는 했어도 제위가 수세기 이상 끊기는 일은 없었다. 대외적으로는 안남(安南)이라고 불리며 외왕내제를 했던 베트남에서는 프랑스의 식민지가 된 후에도 황제의 칭호는 명목상으로나마 유지되다가 1945년에 소멸하였다. 마지막 황제인 바오다이는 이후 공식적으로 황제 칭호는 사용하지 않고 남베트남의 국가원수로 1949~1955년 사이에 재임했다.

4. 유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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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의 황제는 동아시아와 개념이 다르다. 동아시아의 황제는 혈통과 종법제도에 근거한 정통성을 강조하며, 그 혈통을 타고 내려오는 천명을 받아 천하를 통치하는 천자다. 그러나 유럽 세계의 황제는 기독교의 수호자인 로마 제국의 황제(임페라토르, 바실레우스)의 후계자이며, 세속 세계의 최고 군주이며 유럽 세계 전체를 지배했던 로마 제국의 권위를 획득한 군주를 의미한다. 로마 제국의 황제는 전통과 법에 강하게 영향을 받았으며, 신권 또한 동아시아보다 강해서 황제가 할 수 있는 일이 생각보다 많지 않았다. 동아시아의 황제=최고 종교인[26]인데 반해서 강력한 권력을 가져서 우상화되는 최고 시민인 로마 제국 황제[27]와는 개념이 다르다. 또한 기독교를 받아들인 후 독자적 종교 권력(교황)이 너무 강력해져서 오히려 신권을 기반으로 하는 왕권 강화가 더 힘들게 되었다. 유럽 왕조가 왕권신수설을 뒤늦게서야 주장하게 된 까닭은 교황을 중심으로 한 성직자들의 힘이 너무나 막강했기 때문이고, 이후에 성직자들의 힘을 어느 정도 제압하고 난 시대에서나 가능했던 것이다.

4.1. 고대 로마

로마의 '황제'는 혼란한 공화정을 군사력으로 갈아엎으면서 등장한 존재이다. 공화정 말기의 로마는 전례없는 영토의 확장과 시민의 증가를 겪었지만, 정치 체제는 여전히 도시국가 시절의 수준에서 크게 나아가지 못했다. 일례로 포로 로마노에 1만 명을 자기 사람들로 채울 수만 있다면 지중해를 지배하는 로마 전체의 정책을 입맛대로 결정할 수 있었다. 따라서 힘 있는 사람들이 자신의 세력을 동원하기 일쑤였고 지지자들끼리 유혈 사태가 일어나는 것도 일상다반사가 되었다. 시민들의 총의를 정상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불가능하게 되었다.

이러한 공화정의 혼란은 이윽고 공화정을 포기하려는 권력자의 등장을 불렀다. 그러나 그 카이사르조차도 로마에서 가장 강한 세력일지언정 모두를 제압하지는 못했고 결국에는 암살당하기까지 하였다. 아우구스투스는 여기서 교훈을 얻었는지 원로원에게 종신 호민관 특권(Tribunicia Potestas)과 임기 제한없는 군단 지휘권(Imperium Maius) 두 가지를 얻어낸다.[28] 이 두 가지 특권은 아우구스투스 이후로 자손들에게 계속 상속되었으며, 그의 후임들은 광대한 직할령[29]에서 나오는 막대한 자금력과 군사력, 구 체제의 권위를 더해서 로마 제국 전체를 통치할 수 있었다. 이렇듯 법적으로는 여러 시민 중 하나에 불과하지만 실제로는 초월적 지위를 누리는 특성을 고려해 아우구스투스의 제정을 원수정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즉 로마 초기의 황제라는 것은 'Emperor'라는 새로운 이름의 관직인 것이고, 그것 또한 완벽히 새로운 것이 아니라 공화정 시대부터 이미 만들어져 있던 기존 관직들의 권한을 약간 변형하고 조립해서 만들어진 것에 불과하다. 즉, 그 당시의 로마인 누구도 새로운 이 직책을 동양의 황제처럼 천하와 뜻을 받드는 고귀한 존재처럼 생각하지 않았다.

로마 황제의 권한인 호민관 특권과 로마군 최고통수권이 합쳐져서 어떻게 강력한 황제권으로 둔갑하였는지 그 비밀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 공화정 시기부터 호민관이 가졌던 권한은 ①원로원 의결에 대한 거부권 ②민회를 통한 입법권(원로원 의결과 동등함) ③신체에 대한 불가침 특권이다. 각 권한이 부여된 취지를 살펴보면 ①은 원로원이 귀족에게만 유리하고 평민에게 불리한 법이나 정책을 시행하는 것을 시행하는 것을 견제하고 ②는 평민의 입장을 반영한 법이나 정책을 제정하고 시행할 여지를 제공하며 ③은 힘을 가진 원로원 및 귀족세력이 평민의 입장을 대변하는 호민관을 함부로 해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부여된 것이었다.
  • 그렇다고는 하나 곰곰이 따져보면 매우 강한 권한으로 다른 나라였으면 전제군주나 다름없을 정도다. 발상을 전환해 본다면 ①을 통해서 현대로 치면 의회+내각(+법원) 정도에 해당하는 원로원의 결의라도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으면 뒤집을 수 있고, ②를 통해 지지자들을 모아서 자신이 원하는 법을 뚝딱 만들어 버릴 수 있으며[30] 마지막으로 ③을 통해 자신의 신변에 대한 위협을 공적으로 처벌하고 제재할 수 있는 권한을 얻은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 이러한 권한을 평민들이 가져갈 수 있었던 것은 호민관의 권력보다 원로원의 권력이 압도적으로 큰 로마의 정치적 상황 때문이었다. 다르게 말하면 이 정도 권한을 주어도 원로원은 호민관과 민회에 대해서 우세를 점하고 있었다[31]. 하지만 로마 황제가 가진 또 하나의 권한인 군단 지휘권이 호민관 특권과 시너지를 내자 이런 상황은 완전히 뒤집어진다. 로마 제국의 기반인 로마 군단병에 대한 통수권을 가지게 되면 호민관은 원로원의 눈치를 보지 않고 자신의 권한을 마음껏 앞에서 말한 것처럼 전용하여 사실상의 전제권력처럼 사용할 수 있게 된 것이다.
  • 그리고 황제는 이런 강력한 권한을 가진 직책을 본인의 사적인 '재산'으로 인정받는데까지 성공하여 자손이나 원하는 이에게 상속/수여할 수 있는 권리마저 따내고야 말았다. 즉 로마 황제의 직위는 '신성하고 역사적으로 정통성있는 공적인 군주의 자리'라기보다는 (짱 대단한 것이긴 하지만 어쨌든 상속 및 증여가 가능한) '사적인 개인의 재산'으로 여겨졌다는 것.[32] 이런 사고방식이 있었기 때문에 동양에서는 상상도 못할 디오클레티아누스의 4황제 제도 같은 것이 나타날 수 있었던 것이다. 본인이 가진 재산을 단지 분할증여한 것으로 본다면 신기할 것도 없다.[33]

이렇게 출발한 로마 황제직은 권력은 강했지만 권위는 부족하였다. 고귀한 특권 계층이라기보단 '큰 재산을 가진 시민'에 불과한 것으로 이해된 것이다. 외려 호민관의 피선거권은 평민에게만 주어졌기 때문에 황제는 반(反) 귀족적인 존재였다. 따라서 혼란의 불씨는 처음부터 있었다. 그나마도 초대 황가인 아우구스투스 가문이 오래오래 황위를 계승하면서 혈통의 의한 권위를 쌓아갔다면 모르겠는데, 그마저 중간에 갈려나가고 그 이후에는 다른 가문 또는 계파들에서 황제가 배출되었기 때문에 서로마 제국의 치세 내내 황제의 권위는 매우 불안정했다. 따라서 기회만 보이면 황제를 자칭하는 야심가들이 발호할 수 밖에 없었고, 군인황제 시대에 그 혼란은 절정에 달한다.[34]

군인황제 시대의 혼란을 누르고 로마 제국 전체에 자신의 권위를 확립한 디오클레티아누스는 황제를 넷으로 늘려 각각의 황제가 상대적으로 좁은 지역에서 보다 밀도 높은 권한을 행사하도록 하고, 대신 황제 간의 서열을 확고히 하여 기존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였다. 그가 현직에 있을 때는 그 자신의 권위가 사두정치를 유지시켰고, 그가 은퇴한 이후에는 그의 후임인 갈레리아누스가 체제를 유지할 수 있었으나, 갈레리아누스마저 급사한 뒤에는 네 명의 황제는 동등한 위치가 되어 혼란이 다시 시작되었다.[35]

결국 다른 황제들과 자칭 황제들을 격파하고 다시 정국을 안정시킨 콘스탄티누스는 동방의 군주제를 로마에 맞게 벤치마킹하면서 안정화 작업을 펼쳤다. 황제의 자리에 그리스도교의 보호자라는 권한을 주면서 정통성을 부여했고, 덤으로 아예 콘스탄티노폴리스라는 동방의 요충지로 이사를 가버렸다.[36] 이렇게 해서 동로마는 어떻게든 천 년을 더 버티게 되었지만 서로마는 그게 안되서 멸망할 때까지 이것이 나아지지 않았다. 이 이후에도 구 서로마 제국령의 황제는 근본적으로는 '힘있는 자 A' 그 이상으로 가지 못한다.

이러한 로마식 황제 제도는 이 후 다른 유럽 제국들의 군주 제도에도 영향을 크게 끼쳐서, 유럽의 군주제도는 동아시아인이 보기에는 굉장히 이질적인 모습을 갖추게 된다. 때문에 유럽 문화 배경의 창작물이나 역사물을 볼때 동아시아인들은 꽤 미묘한 느낌을 받는다. 한 국가 안에서 XX왕조 XX왕조 하는 식의 여러 왕조가 있다든지[37], 왕실의 혈통이 끊기자 외국에 있는 왕실의 먼 친척을 모셔와 왕으로 삼는다던지.[38]

4.2. 중세

서로마 제국이 붕괴한 뒤에 생긴 유럽의 황제는 필요 요건을 가지고 있었는데, 바로 로마 황제(혹은 그 후계자)라는 타이틀이었다. 이러한 의미에서 나폴레옹 시대 이전까지 서유럽에서는 신성 로마 제국황제가 서유럽 세계에서 유일한 황제로 인정받았다.

단, 동로마 제국의 군주는 쭉 황제로 인정받았다. 왜냐면 나라가 로마 제국 자체인 것이었기에 너무나도 당연했다. 신성 로마 제국 또한 어느 정도의 정당성은 있었으나, 아예 로마인들에게서 직접 이어지는 동로마 제국의 황위에 비하면 한 수 아래일 수밖에 없는 처지는 본인들이나 동로마측이나 이슬람측이나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바로 그랬기에 로마 총대주교 교황의 승인과 지지를 통한 권위의 보강이 필요했던 것이며, 동로마측은 이러지 않아도 되었기에 어디까지나 전체 기독교 세계 서열에선 2인자가 될 수밖에 없는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에게 승인을 요청하지 않아도 되었다.

적어도 황위 문제에 한해선, 서방교회인 카톨릭과 동방교회인 정교회의 분리보다는 옛 로마 세계의 서방에 종교계의 1인자인 교황이 있게 된 반면 동방에는 정치계의 1인자인 황제가 있게 되어 이러한 일이 빚어졌다고 보면 된다. 각각 로마의 뿌리는 같지만 지역과 종교가 분할되었기 때문에 로마도 둘, 기독교도 둘이 공존했으나, 서방은 종교적 권위가 보다 높았던 반면 동방은 정치적 권위가 보다 높아진 상황이 되었던 것이다. 오늘날에도 정교회에서 말하는 제1총대주교는 로마 주교지 콘스탄티노폴리스 주교가 아니다.

4.2.1. 조건: 로마 황제의 후계자

중세를 지배한 기독교적 세계관에 의하면 원칙적으로 전 그리스도교 세계에는 단 1명의 황제가 존재해야 했다. 다니엘서로 대표되는 "4마리의 짐승" 예언에 의하면 지상에는 4개의 거대 제국이 차례로 존재하며 이는 신바빌로니아, 아케메네스 왕조, 알렉산드로스 제국, 로마 제국으로 해석되었다. 따라서 온 유럽 세계의 제국은 로마 제국이 마지막이어야 했고, 그 제국이 멸망하면 바로 찾아올 천년왕국을 준비하기 위해 로마 황제는 계속 유지될 필요가 있었다. 즉, 새로운 정통성의 황제가 나타나는 것은 교리상 용납 불가하므로 본인을 황제로 칭하고 싶은 자는 로마 제국과의 연관성을 입증해야만 했다. (그렇지만 현실 세계에서는 시간이 지날수록 황제의 수는 불어나기 시작했다.)

종교적인 관점을 떠나서 현실 외교적인 관점에서 보았을 때에도 유럽에서 황제를 칭하려면 어떤 방식으로든 로마와 관련 있거나 승인을 받아야 했다. 첫째로 로마가 아닌 국가를 계승하는 황제가 되는 것은 의미가 없었다. 유럽세계의 실질적 전부를 지배한 사람은 로마 황제 말고는 있지도 않았기 때문에 권위에서 너무 차이가 났다. 둘째로 자신부터 시작하는 황제도 큰 의미가 없었다. 중세 내내 '로마 제국'과 어깨를 겨룰 정도의 국력을 갖춘 나라는 존재할 수조차 없었으므로 누가 인정을 해줄 이유도 없었다. 그러다 보면 자신의 권위는 매우 떨어져 있고 주변의 어그로만 끌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중세 초기에는 동방에 잔존한 동로마 제국그리스도교 세계의 유일한 황제 국가였으나, 이미 서유럽에서 영향력을 잃은 동로마 황제의 서방 영토에 대한 지배권은 형식뿐이었다. 그러던 중 800년 성탄 전야에 교황으로부터 프랑크 왕국의 국왕 카롤루스가 망한지 300년도 넘은 서로마 제국의 제위를 넘겨받으면서 상황이 급변하였다. 이 사건을 동로마 제국 측에서는 완전히 무시했으나, 이후 카롤루스 대제불가리아와의 전쟁으로 힘겨워하는 동로마 황제 미카일 1세로부터 811년 황제 자리를 승인받으면서 유럽의 황제 자리는 공적으로 이 되었다. 당시 서방의 황제는 단지 황제일 뿐이며, 로마 황제는 아니라는 조건을 달긴 했지만, 당대인들에게는 명실상부히 두 제국이 존재하게 된 것으로 여겨졌다. 그리고 1세기 후인 919년, 동로마 제국과 경쟁 중이던 불가리아 왕국의 시메온 1세가 불가리아의 황제로 인정받으면서 유럽에 3명의 황제가 존재하게 되었다. 이 일을 계기로 황제 직위가 평가절하될 듯 하였으나 불가리아 제국은 채 100년이 안 되어 멸망하고 동로마 제국에 복속되었다.

서유럽에서는 프랑크 제국이 3분되면서 황제 명칭이 잠시 유명무실해졌으나, 독일의 오토 1세가 황제 자리를 넘겨받아 동로마 제국 황제의 조카딸과 자신의 아들 오토 2세를 결혼시키면서 다시 한번 정통성을 획득하였다. 그가 창립한 작센 왕조의 신성 로마 제국은 이후 잠시 대공위 시대(황제가 없는 시대)를 맞이하기도 하였으나 1806년까지 계속하여 이어졌다.

프랑스의 경우, 카롤루스 대제의 혈통이 끊긴 이후 왕좌를 이어받은 방계 위그 카페로부터 혈통이 이어지는 대혁명 이전의 왕들은 황제를 자칭하지 못했다. 발루아 왕조의 프랑수아 1세가 신성 로마 제국 제위를 손에 넣으려고 혈안이었던 이유 가운데 하나가 바로 그것이었다.[39] 하지만 손꼽히는 강한 국력을 가진 프랑스의 왕은 오직 하느님에게서만 명령을 받는 왕을 표어로 하여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의 아래에 속하지 않는 독립적인 행보를 걸었다. 그것을 위해 카페 왕조와 그 자손들은 프랑스 왕의 대관식을 메로빙거 왕조의 시조 클로비스가 세례를 받은 랭스에서 개최함으로서 나름대로 황제에 버금가는 신성한 권위를 확보하고자 노력했다.

이처럼 유럽에서 황제를 칭하려면 로마 황제로부터 정통성을 내려받거나 인정받았다는 최소한의 족보가 있어야 했다. 그래서 나폴레옹 이전까지 수많은 유럽 국가의 왕들은 황제를 자칭할 수 없었다. 사실 9세기 무렵 크누트 대왕이 다스리던 잉글랜드, 10~11세기의 카스티야 등등에서 황제를 스스로 칭하는 경우가 있었으나 전혀 로마적 정통성이 없었기 때문에 외교적으로는 전혀 인정받지 못했고, 개중에는 스스로도 외교 문서 같은 데 쓰지 못하고 국내에서 몰래 몰래 쓰는 수준인 경우도 있었다.

4.2.2. 번외: 교회의 인정

서유럽의 황제에게는 다른 대륙 국가와는 차별되는 또 하나의 전통이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교황의 인정을 받는 것이다. 이 전통은 457년 이후 동로마 황제들이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에게서 제관을 받던 것을 시초로 볼수 있으나, 서유럽만으로 본다면 그보다 300년 뒤인 800년에 카롤루스 대제의 대관식을 로마 교황이 거행했던 것에서 기원한다. 그 이전에는 교황에게 서로마 제위를 수여하는 관습이나 권한은 전혀 없었다.

카롤루스 대제가 교황에게서 서로마 황제위를 받기 전까지는 로마 제국 그 자체인 동로마 제국의 황제가 유럽 전역의 기독교의 보호자였다. 소위 '서로마의 멸망' 이후 열린 5, 6, 7차 기독교 세계공의회 역시 당대의 동로마 황제가 소집한 것이었다.[40] 이때까지만 해도 로마 교황은 있는 그대로 말하면 '로마 총대주교'일 뿐이었다. 그러나 로마 교황은 동로마 황제의 부하1로 살고 싶은 마음은 없었고 이는 성상 문제 등의 일을 촉매로 양측의 갈등으로 번져나가게 된다. 그러던 와중에 동로마 제국은6~7세기 사이 내우외환의 위기를 겪게 되었는데 이때 랑고바르드족에게 밀려 이탈리아 반도에서의 동로마 세력권이 남부로 쪼그라들면서 동로마의 영향력에서 실질적으로 벗어날 수 있게 되었다. 이러던 중 랑고바르드족을 몰아낸 프랑크족의 카롤루스 대제가 교황으로부터 서로마의 제관을 요청한 것. 이를 통해 교황은 '황제를 제관해주는',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와 동등한 권위를 얻고, 카롤루스 대제로서도 '교황으로부터 제관을 받은' 권위를 손에 얻은 것이다.[41]

이 사건이 결론적으로는 서로에게는 윈윈이었지만, 당시에 둘의 관계가 밀월관계였던 것은 전혀 아니었다. 카롤루스는 원래는 동로마 제국과 발을 걸쳐보려고 노력하고 있었고, 로마 교황도 존경하기보다는 이용하기 위한 존재로 생각했다. 대관식도 교황의 작전으로 얼렁뚱땅 진행된 것으로, 카롤루스 입장에서는 내켜하지 않았다. 오히려 제관을 '받음당하면서' 자신이 교황의 아랫사람처럼 보이면 어쩔까 우려했다.

어쨌거나 로마 교황의 계략으로 연출된 이 한번의 '사건'은 그 뒤로 '관례'가 되었고, 카롤루스 대제 이후 서유럽 황제의 대관식은 교황이 집전하는 것으로 굳어졌다. 특히 카롤링거의 직계 혈통이 단절된 이후에 교황의 대관식 유무가 황제의 권위에 매우 중요해지면서, 어느새 신성 로마 제국의 군주가 되었다고 해도 자동적으로 바로 황제가 되는것은 아니라는 인식이 자리잡혔다. 군주를 선출하는 것은 독일 제후의 권리지만, 그렇게 뽑힌 인물이 황제의 자격이 있는지를 판단하는 권리는 로마 교황에게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게 된 것이다. 교황에게 제관을 받기 전에는 격이 떨어져서 '로마왕'이라고 칭해야 하며, 대립 황제와 같이 로마 교황의 인정을 아예 받지 못하는(무효인 경우) 경우에는 격이 또 한 단계 더 떨어져서 '독일왕'이라고 했다.

이로써 교황의 권위는 수직상승하여 서유럽 열국의 구심점 역할을 하게 되었다. 최전성기의 교황은 제위에 올라있는 황제도 파문 한방에 굴복하게 만드는 권력을 가지게 되었다. 그 대표적 사례가 바로 카노사의 굴욕.사실 황제가 교황에게 무릎 꿇은 것까지만 기억하는데, 파문을 취소받자마자 군대를 이끌고와서 교황을 교체했다.

이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국가는 혼란기에 회사가 세워지고 없어지듯이 없어지는데 교회는 그대로 있었기 때문. 처음에는 별 힘도 권위도 없었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조직도 커지고 오랬동안 잘 버텨온 것에 대한 보상으로 강한 힘이 주어진 것이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이 힘도, 권능도 없어지기 시작했다. 호랑이 없는 굴에 여우가 왕인 것이 이 체제의 근본이었기 때문에 국가들의 틀이 잡히고 각자의 지역에서 안정적으로 발전하기 시작하자 이젠 교회의 인정 따위는 필요가 없어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카노사의 굴욕 이후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하인리히가 칼을 갈고 닦은 뒤 1081년 교황을 폐위해 버리는 복수를 한 사건이 대표적.

그래도 교황이 제관을 씌워주는 일은 유지되었지만 이미 실추되기 시작한 교황권이 아비뇽 유수로 치명적 타격을 입고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카를 5세가 로마를 점령, 파괴를 한 이후 완전히 폐지 되었다. 카를 5세의 재위 중 사코 디 로마로 카를 5세의 군대가 교황령을 침공하고 로마를 약탈함으로서 이후 교황이 어떻게 대항해 볼 엄두가 나지 않게 되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종교개혁이 터지는 바람에 교황은 세속은 커녕 종교적으로도 위태롭게 되었다. 그래서 이후 교황이 '손수' 제관을 씌워준 사례가 다시는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교황의 형식적인 인정은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때까지도 여전히 이어졌다.

다만 동로마 제국 황제는 서유럽 황제와는 사정이 달랐다. 로마 제국 자체였기에 그 누구의 인정이 굳이 필요없는 권위와 정통성이 있었고 때문에 굳이 다른 누군가의 축성을 꼭 받아야 하는 건 아니었다. 때문에 황위에 대해서라면 교황이 개입할 건덕지는 없었고, 서유럽 가톨릭 세계와 동유럽 정교회 세계는 두 황제와 두 총대주교를 구심점으로 삼으며 정신적으로 자연스럽게 분리되기 시작했다.

다만 문제는 동로마 제국이 신성로마제국보다 일찍 망한 뒤에 발생했는데, 오스만 제국메흐메트 2세콘스탄티노폴리스를 함락한 이후 동로마 제국의 후계자를 칭해버린 것이다. 실제로 메흐메트 2세에 의해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로 선출된 옌나디오스 스콜라리오스는 메흐메트 2세를 로마 황제로 인정해버렸다. 오스만 제국도 셀림 1세 이후로는 5개의 총대주교구 중 로마를 제외한 4개를 보유하고 있으니[42] 어떤 의미에서는 나름대로 기독교의 보호자라고 할 만은 했다.

문제는 그들은 이슬람이라는 것이었고, 교황은 이딴 것을 인정할 마음이 전혀 없었다. 이때부터 기독교 세계관에서 오스만 제국이 가지는 동로마 제국의 제위는 멸망한 것 취급을 받았으며, 거꾸로 나머지 4개 총대주교의 권위가 바닥을 치게 되었다.[43]

러시아도 동로마 제국 멸망 이후 스스로 칭제하였다. 그들이 주장한 근거는 동로마 제국이 멸망하면서 정교회의 중심지가 모스크바로 이동하였고, 이반 3세가 동로마 제국 황제의 조카딸과 결혼했다는 것이었다. 신생 러시아 제국은 모스크바를 제3의 로마라 칭했다.(제2의 로마는 당연히 콘스탄티노폴리스) 이때 사용한 칭호 차르(Tsar)는 유럽의 공용어 라틴어가 아니었기 때문에 다른 유럽 국가에서는 칭제를 한 것이 아니라 'Tsar를 칭한 것' 정도로 취급당하며 철저히 무관심으로 일관했으며, 표트르 1세가 스웨덴과 싸워 이긴 후 차르 대신 라틴어로 황제(Imperator)라고 선포한 뒤에야 비로소 유럽에 비중있게 알려졌다. 이후 나폴레옹의 침략을 격퇴하는 등 점차 유럽 전체에서 열강으로서의 위신이 높아지면서 이때쯤에는 서유럽에서도 대충 황제라고 외교적으로 인정을 받게 된다.

4.3. 근대 이후

4.3.1. 신성로마제국의 선출황제

중세에서 근대로 이행하며 서유럽의 기독교적 세계관에 변화가 생기면서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의 자격에도 변화가 생긴다. 15세기 막시밀리안 1세를 기점으로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는 더 이상 교황의 인정을 필요로 하지 않고 오직 선제후들의 선거로만 황제직에 올랐다.

막시밀리안 1세 이전의 황제는 선제후들의 선거에 의해 황제로 선출된 후에도 일단 로마왕(독일왕) 직위에 머물렀다. 이후 교황의 대관식이 치뤄진 후에야 황제가 될 수 있었다. 그러나 중세 후기 교황과 황제의 대립이 이어지면서 교황은 대관식을 황제를 견제하는 수단으로 빈번하게 사용하며 독일에서의 영향력을 행사하려 하였다. 즉 교황의 마음에 들지 않는 인물이 황제로 선출되는 경우 그에게 대관식을 치뤄주지 않는 것이었다. 이럴 경우 선출된 황제는 황제가 되지 못하고 로마왕/독일왕 직위에 머물고 만다. 실제로 역대 신성 로마 황제로 선출된 이들 중 제법 많은 이들이 황제 대관을 받지 못해 공식적으로는 로마왕에 머물고 말았다.

중세 교황의 위세가 절정에 이른 시절에 황제 자리가 비게 되는 대공위 시대가 발생하기도 했고, 대공위 시대 이후 황제들은 한동안 교황 대관을 받지 못했다. 그러는 사이 교황의 위상에도 많은 변화가 생겼다. 연이은 십자군 원정의 실패, 14세기 기근과 흑사병 등의 재난, 아비뇽 유수와 서방 교회 분열 등을 거치며 교황의 권위가 크게 실추되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1356년 카를 4세금인칙서를 통해 황제 선출 방식을 명문화했다. 이 과정에서 카를 4세는 제후들의 타협을 이끌어내기 위해 황제 권한을 양보하여 황권이 더욱 유명무실해지는 부작용이 있었으나, 황제 선출과정에서 교황의 관여를 줄이는 데에는 성공했다.

15세기 합스부르크 가문막시밀리안 1세는 선거에서 황제로 선출된 후 교황의 대관을 받지 않고 스스로 황제를 칭했다. 이에 대해 교황은 물론이고 어떠한 세속 군주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심지어 막시밀리안 1세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의 공식 직함을 선출된 황제를 의미하는 Imperator Romanus Electus (Elected Roman Emperor)로 바꾸었다. 이 직함은 신성 로마 제국이 멸망할 때까지 황제의 공식 직함이 되었다.

막시밀리안 1세 이후 황제들은 로마의 교황 대관식 없이 프랑크푸르트에서 대관식을 하고 황제가 되었다. 그의 후계자인 카를 5세가 마지막으로 교황의 대관을 받은 황제가 되었다. 이전까지의 황제와는 달리 그는 대관을 받아서 황제가 된 것이 아니라 황제가 된 다음 대관도 받은 것이다. 그의 대관식은 황위에 오른지 11년 뒤에야 치뤄졌으며, 교황과의 권력 투쟁에서 승리한 것을 상징적으로 나타내기 위해서 추진한 것이다. 예전만큼의 중요성은 없는 단순한 세레머니에 불과했다.

4.3.2. 19세기 유럽 - 나폴레옹과 그 이후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에 이어 서유럽에서 황제가 된 이는 나폴레옹이었다. 그는 1804년에 프랑스 상원의 요청을 받아 요식적인 국민투표를 거쳐 프랑스인의 황제(Empereur des Français)가 되고 프랑스 제국을 선포했다. 그는 명목상 프랑스 혁명으로 대두된 혁명 정신과 공화국에 대한 신념을 부정하지 않았기에 '프랑스라는 국가를 소유한 황제'의 의미가 되는 '프랑스 황제'가 아닌 '프랑스인의 황제'라는 칭호를 썼고 프랑스의 정치체제를 '국가원수가 황제인 공화정'으로 포장했지만, 다른 유럽 국가에서는 '새로운 황제의 등장'으로 간주했다.

이미 근대 이후 신성 로마 제국의 선출황제 이래 황제 제위에 대한 중세시대의 규칙은 점차 그 중요성을 잃어갔다. 진정으로 중요한 것은 실력으로 인정받는 것일 뿐이다. 그래도 권위라는 것은 덕지덕지 붙이면 좋은 것이기 때문에, 나폴레옹은 나름 명목상 제위에 대한 조건을 충족하려고 했는데, 카롤루스 대제 - 위그 카페 -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로 정통성이 이어진다는 '제3의 반열'이라는 사상을 급조해 로마의 후계자로서의 정통성을 주장했다. 그리고 교회의 인정이라는 조건을 맞추기 위해 교황이 집전하는 대관식을 열었는데 본인이 로마로 가지 않고 교황을 파리로 직접 오도록 했다(...) 또 교황이 대관식을 집전하기는 했는데, 왕관을 자신의 손으로 직접 썼다(...). 또한 나폴레옹은 그의 아들 나폴레옹 2세로마왕에 책봉하고, 점령지를 제후국으로 삼으면서 최대한 신성 로마 제국과 비슷하게 구색을 갖추려고 노력했다.

나폴레옹 이전까지 서유럽에서 오직 신성 로마 제국 황제만이 황제로 인정받았으나, 나폴레옹에 의해 왕권신수설의 논리가 무너지고 힘에 의해 스스로 황제를 자칭하는 사례가 나타나자 로마 제국의 계승과는 별개로 힘으로 다른 나라를 정복하여 편법으로 황제를 자처하는 식민 제국 국가들이 서서히 늘어나기 시작해 '황제 인플레' 현상이 나타났다. 교황의 대관 따위는 더 이상 필요치 않았다.

나폴레옹이 황제에 즉위하자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인 프란츠 2세는 프랑스 제국에 꿀리지 않기 위해 1804년에 합스부르크 세습령들을 통합하여 오스트리아 제국을 선포하고 오스트리아 황제 자리에 올랐다. 그리하여 프란츠 2세는 두 개의 황제 제위를 가졌다.

아우스터리츠 전투의 패배로 프란츠 2세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제위를 내려놓았으며, 이로서 신성 로마 제국은 멸망한다. 그러나 프란츠 2세는 오스트리아 황제라는 명칭을 계속 유지했으며, 외교적으로도 계속 황제 대우를 받았다. 나폴레옹 또한 현실적으로 오스트리아 황제를 인정하였는데, 조세핀과 이혼하고 오스트리아 황녀 마리 루이즈와 결혼하여 자신의 권위를 더욱 드높이려 하였다.

1815년 워털루 전투에서의 패배로 나폴레옹이 실각하면서 프랑스에서는 제정이 무너지고 다시 부르봉 왕조가 들어섰다. 나폴레옹 이후 루이 18세샤를 10세는 다시 왕을 칭했다. 그러나 1848년 혁명 이후 들어선 공화정의 대통령이 된 나폴레옹 3세는 친위 쿠데타를 일으코 스스로 황제가 되었다.

1870년 보불전쟁에서 승리한 호엔촐레른 가문프로이센 왕국도 오스트리아가 배제된 독일 제국을 세우고 황제를 자칭했다. 황제의 명분은 당연하게도 독일 땅에 세워졌던 신성 로마 제국을 계승한다는 것이었다. 오스트리아를 제외하면 신성 로마 제국 시절 제후국들이 거의 그대로 독일제국의 제후국이 되었으나 신성 로마 제국 때와 달리 제후들의 실권은 크게 제한되었고, 제국은 황제의 권한이 크게 강했다.

러시아의 차르 역시 진작부터 서유럽에서 황제로 대접받았다.

하지만 시대가 변해버렸기 때문에 독일 제국 성립 이후 50년도 되지 않아 제1차 세계 대전을 거치며 유럽에서 황제는 완전히 사라지고 말았다.

4.3.3. 편법으로 황제가 되는 방법

재미있는 것은 이때까지 보았듯이 유럽인들은 황위에 있어서 정통성과 권위를 극히 중시했지만, 정작 유럽 밖의 황제들에 대해서는 '아 그런 게 있나보다'하고 쿨하게 인정하고 넘어갔다는 점이다. 유럽의 대부분을 차지한 제국은 로마 제국이 유일했으므로 '유럽 내의' 황제는 로마 제국의 황제 뿐이지만, '그 외의 땅'에 대해선 로마 제국의 황제가 아닌 다른 황제가 있을 수도 있다고 순순히 인정하는 것이다.

유럽의 열강들이 너도나도 황제를 칭하자, 영국에서도 황제 직위에 대해 갈망하는 이들이 있었다. 영국의 수상 디즈레일리는 자신이 모시는 빅토리아 여왕을 황제로 만들기 위해 편법을 동원했다. 즉 식민지였던 무굴 제국의 타이틀을 이용해 빅토리아 여왕에게 인도 황제의 칭호를 추가했던 것. 유럽인의 관념에서는 이것이 통하는 방법이기는 했다. 왜냐면 중세 유럽의 모든 국가와 칭호는 개인이 아닌 땅에 귀속되며 세속은 칭호와 국가가 아닌 그 칭호와 국가를 가진 땅을 넘김으로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애초에 황제 자체도 고대 로마의 세습 가능한 관직(또는 특권)에 가까운 것에서 출발한 것이고. 하지만 이런 시도는 영국 국내 여론에서 무의미한 허례허식으로 취급되어 조롱받았고, 빅토리아 여왕은 Empress라고 불리기보다는 여전히 Queen이라는 칭호를 썼다.

이런 꼼수의 원조는 포르투갈브라질 제국이다. 인도제국보다 50년 빠르다. 더 웃긴 건 인도제국은 형식적으로라도 원래 있던 무굴제국으로부터 제국 타이틀을 얻었는데 브라질 제국은 그냥 포르투갈의 브라간사 왕조와 브라질 사람들이 제멋대로 선포한 거다. 물론 브라질 땅에 로마 제국이 힘을 미친 적이 없으니 빈 땅에 황위를 제수해버리는 것 자체도 유럽적인 관념에서는 틀린 것이 없을 수 있다. 그러나 포르투갈은 나폴레옹 전쟁때문에 국력이 쇠약해지는 바람에 결국 2개월 만에 왕조 가문만 그대로고 나라와 군주는 따로 놀았다.

2차 대전 때로 가게 되면 무솔리니가 이끄는 파시스트 이탈리아가 에티오피아를 정복하고 에티오피아 황제 직위를 이탈리아 국왕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가 겸임하면서 이런식으로 황제를 자칭한 적이 있었다. 다만 그 후 1943년 이탈리아가 추축국을 탈퇴하면서 에티오피아 황제 자칭은 폐지했고, 몇 년 뒤 군주제도 소멸해버렸다.

4.3.4. 19세기 서양에 황제가 있었던 국가들

5. 다른 문화권의 황제들

5.1. 인도

인도에서는 마우리아 왕조찬드라굽타 마우리아를 최초의 황제로 본다. 그리고 그의 손자 아소카전륜성왕 황제(Samraat Cakravartin)인정한다. 그 후 라자(서구의 Prince에 비견되는 칭호다.) 칭호를 쓰는 북인도, 데칸, 벵갈의 여러 왕조가 난립했고 이슬람 세력이 진입해오면서 술탄이란 칭호를 도입하기도 하였다. 무굴 제국이 페르시아의 영향으로 파디샤 칭호를 도입하기도 하였다. 무굴 황제들은 미르자라는 칭호를 쓰기도 했는데, 이는 페르시아어로 아미르의 아들이라는 뜻의 amirzadeh가 변형된 것으로 아미르 티무르의 후손이란 의미에서 쓴 것이지 황제격과는 관련이 없다. 마라타 제국에서는 전통적인 국왕의 의미인 마하라자(직역하면 대왕)에 더해서 마하라자디라자(왕중왕)이란 칭호를 쓰기도 하였다. 영국이 인도 전역을 지배한 후 인도제국을 성립하자 영국왕이 인도황제를 겸하게 되었다.

5.2. 서아시아

동아시아의 황제와 유럽의 imperator에 비견될 만한 지위로는 고대 서아시아의 왕중왕(王中王, king of kings)이 있다.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도시국가 군주들을 평정한 앗시리아 제국에서 처음 쓰기 시작했으며, 사용 시기로 따지면 황제격 칭호들 가운데 가장 오래되었다. 이후 서아시아 일대를 1100여 년간 지배한 이란계 제국들(아케메네스 왕조, 아르사케스 왕조, 사산 왕조)의 군주들이 모두 군주의 기본 호칭으로 왕중왕을 쓰면서 로마의 imperator augustus에 맞먹는 황제격의 칭호로 자리잡았다. 그러나 사산 왕조가 이슬람 세력에 의해 정복된 이후 중세 서아시아에서는 이슬람식 군주 칭호가 더 널리 쓰여 왕중왕이라는 칭호는 한동안 자취를 감추었다. 이후 근세에 들어 이란 국가의 정체성을 부활시킨 사파비 왕조 시대부터 이란의 왕중왕이라는 표현이 다시 쓰이기 시작했고, 팔레비 왕조 시절에 '샤한샤(왕중왕)'의 공식적인 번역을 황제로 정하기도 했다. 오늘날에는 팔라비 왕조가 이슬람 혁명으로 무너졌기 때문에 왕중왕 칭호도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페르시아어 칭호 중에는 파디샤(pad-e shah, padishah)라는 것도 있는데, 이는 왕(shah)들의 주인이라는 뜻으로 역시 왕보다 한 단계 높은 황제격의 칭호이다. 이란 본토와 직접적 관련은 없었지만 페르시아 문화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던 근세 오스만 제국무굴 제국의 군주들이 군주의 기본 칭호로 이 파디샤를 썼다.

페르시아나 이집트의 수장들은 신이거나 신의 위치에 준하는 자들이었으며, 이러한 종교적, 봉건적 수직 질서 아래 일반인들은 평생 보지도 못하고 고위 관료들조차도 황제를 만날 때는 특수한 예를 갖춰야 했다. 한마디로 황제는 형이상학적인 국가 자신 그자체였다.이집트의 파라오는 하늘에서 내려온 神 호루스에서부터 시작되었다고 하고, 살아 생전에는 神 라의 아들, 神 호루스의 지상대리자이며, 죽어서는 神 오시리스와 동일시되는 존재이다. 따라서 당시의 다른 중동의 체계와 비슷하게 고위 관료들이 담당하는 직무가 군주의 개인적인 업무와 관련되는 경우가 많지만, 다른 곳들보다 더 심하다.(파라오의 면도담당자, 파라오의 신발담당자 등)

이슬람 문화권의 칼리프, 술탄들의 경우 보통 칼리프를 술탄의 상위 군주로 보고 황제와 왕의 관계와 동일시하는 경우도 있으나 실상은 조금 다르다. 물론 칼리프가 명목상 술탄의 상위 군주이긴 하지만, 이미 10세기부터 정치적 실권을 상실하여 세속 군주들의 종교적 권위 강화를 위한 수단으로 전락했기 때문이다. 굳이 비교하자면 교황에 더 가까울 것이다. 칼리프가 세속 권력을 장악하고 있던 이슬람 초창기에는 술탄이 세속 군주의 칭호로 쓰이지 않았다. 칼리프의 지방 통제력이 무너진 뒤 사실상 독립 세력화된 지방 군주들이 명목상 이슬람 세계의 최고 지도자인 칼리프의 권위를 존중하되, 그를 대신하여 실권을 가지고 다스린다는 의미에서 왕(아랍어로 말리크, 혹은 페르시아어로 샤)을 쓰지 않고 대신 쓰기 시작한 호칭이 술탄이다.

술탄이라는 단어는 그냥 지배자 정도의 의미라서, 일반적으로 왕과 동격으로 보긴 하지만 꼭 같다고는 할 수 없다. 술탄은 도시 몇 개나 지방 하나 정도를 다스리는 소국의 군주일 수도 있고, 여러 지방과 민족을 아우르는 제국의 군주일 수도 있다. 오스만 제국의 황제들은 군주의 격을 한 단계 올린다는 의미에서 술탄 중의 술탄이라는 칭호를 썼지만, 이는 오스만 제국에서만 쓰인 특수한 경우이며 상술했듯 오스만 황제들은 술탄보다는 파디샤라는 칭호를 더 많이 썼다. 다른 대부분의 거대 이슬람 국가들(셀주크 왕조, 아이유브 왕조, 이집트 맘루크 왕조, 델리 맘루크 왕조 등)은 그냥 술탄, 혹은 大 술탄 정도의 칭호를 썼다.

5.3. 중앙아시아 유목제국

중앙아시아튀르크, 몽골 문화권에서 (Khan)은 왕이나 부족장 격에 해당하며, 몽골 제국이 성장하며 황제 격에 해당하는 칭호인 Khagan(카간 혹은 카안)이 생겼다. '카안'이라는 칭호는 본래 오고타이 칸이 스스로를 타자화하기 위해 붙인 칭호이나, 몽골 제국이 팽창하며, 제국 전체를 지배하는 최고 지위의 칸을 이르는 보통명사화 된다. 보통 한자문화권에서는 이를 "대(大)칸"으로 번역한다.

이후 몽골 제국중국 전토를 장악하면서 몽골의 대칸이 원나라 황제가 되지만 그렇다고 대칸 지위 대신 중국의 황제가 된 것은 아니고 둘 다 겸하고 있었다.[48] 이후 원나라가 주원장에 의해 북원으로 쪼그라들어 다시 내몽골 고원으로 쫓겨나고(북원) 이후 중국식 원 황제 지위는 포기하고 대칸 지위만 이어지다[49] 훗날 청나라가 내몽골을 정벌한 이후 청나라 황제가 대대로 몽골 대칸의 지위도 세습하였다.[50] 그리고 투르크계인 오스만 제국페르시아어인 파디샤와 함께 칸호(Han)를 사용했다. 예를 들면 술탄 술레이만 한이라든가 하는 식으로 아랍식과 투르크식 군주 칭호를 같이 썼고 유럽 국가를 상대할 때에는 룸 카이세리(로마 황제)도 자칭했다.

5.4. 기타

아메리카의 국가들 중에서는 아즈텍, 잉카의 군주들도 황제라고 불리며, 오세아니아의 국가들 중에서는 투이 통가 제국의 군주들을 황제라고 불린다.

서구에서 아직까지 Emperor로 칭해 주는 군주는 일본천황이 유일하다. 다만 일본의 정식 국명은 1947년 이후부터는 '일본 제국'이 아닌 '일본국' 이다.

아프리카에서는 에티오피아에서 1889년부터 하일레 셀라시에가 폐위된 1974년까지 황제가 있었다. 솔로몬과 시바 여왕을 전설적 조상으로 한 솔로몬 왕조가 그것인데, 황통(皇統)이 3000년간 이어져 왔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일본 황실이 만세일계라고 주장하지만 실은 아닌 것처럼 사실 에티오피아의 황통 자체는 여러 줄기에서 이어져 왔던 것이며 3천 년 황통설은 근대 국가를 확립한 메넬리크 2세 시대에 만들어진 신화라는 설이 유력하다.

서아프리카의 말리제국에서는 황제를 만사라고 칭했고 유명한 만사로 만사 무사가 있다.

이외에도 중앙아프리카 공화국 대통령인 장 베델 보카사가 잠시 황제를 칭하고 제정을 선포한 적이 있었다.

6. 황제로 쳐주기 미묘한 사례

고려에서는 광종이나 경종 등 군주 중 일부가 스스로를 황제라 자칭하였다. 그러나 중국 같은 나라를 상대할 땐 외교상 황제라 하지 않았다. 중원의 천자와는 별개로 고려만의 천자를 자칭한 것이다. 그 외에도 고구려, 백제, 신라, 발해 등 한국 고대왕조들은 황제라는 명칭은 사용하진 않았지만 황제국 체제를 어느 정도 사용하였다. 중국에는 형식상 번국 행세를 했지만 내부적으로는 중국의 군주와 동등하다는 생각을 한 것. 사실 조선도 관행적으로 황제국 격식을 섞어 썼다가 정유재란명나라의 정응태한테 트집이 잡히기도 했다. 예를 들어 묘호를 쓰는 것도 황제만 하는 건데 조선에서 썼다가 트집을 잡힌 것.

조선에서 고종이 1894년에 군주의 지위를 대군주로 올렸는데 이게 황제에 준한 건지 애매하다. 일단 호칭으로는 '대군주 폐하'로 불리긴 했다. 사실 황제보다는 서양 국가들의 king을 참고해서[51] 황제의 간섭을 안 받는 독자적인 칭호를 만들어낸 것에 가깝다. 하지만 동아시아의 오랜 관점에서는 애매한 칭호이기 때문에 결국 3년 뒤 칭호를 황제로 업그레이드시켰다.

11세기 무렵 스페인 왕국의 전신인 레온-카스티야 왕국의 알폰소 6세는 자신을 전 스페인의 황제로 자칭한 적이 있었다. 문제는 위에 나온것처럼 유럽에서 황제를 칭하려면 명목상 로마 제국을 계승해야 했기 때문에 주변국의 불평을 대차게 사고, 그가 죽자마자 이 칭호는 폐지되었다.

제4차 십자군 전쟁으로 인하여 동로마 제국이 붕괴하고 잠시 라틴 제국이 들어섰다. 그로 인해 동로마 제국 재건을 위해 서 아나톨리아에 황제의 사위 가문이었던 라스카리스 가문의 니케아 제국, 트레비존드(옛 트라페주스) 지방에 옛 황제 가문이었던 콤네노스 가문의 트레비존드 제국이 생겨났으며, 니케아 제국은 후에 팔라이올로고스 가문이 제위를 찬탈하고서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수복해 동로마 제국을 재건하는데 성공했다.

1946년까지 불가리아의 공식 국호는 불가리아어로 차르스트보 벌가리야(Царство България)로 불가리아의 왕은 불가리아어로는 '차르'로 불렀다. 그러나 이 국호는 타 언어로는 "불가리아 왕국"이라 번역되고 불가리아의 차르는 "왕"으로 번역된다. 비슷한 예로는 19세기부터 1970년대까지의 그리스 왕국이 있다. 국왕을 동로마 제국 황제가 썼던 '바실레우스' 칭호로 불렀다.

제2차 세계 대전이탈리아는 1936년 에티오피아 제국을 점령하고 인도 제국을 본따 당시 국왕인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에게 이탈리아 국왕 겸 에티오피아의 황제 칭호를 주었다.[52] 그러나 국제사회는 이를 사칭으로 보고 인정하지 않았으며 1941년 영국에 의해 에티오피아 제국이 해방되면서 명목만 남았다. 게다가 1943년 9월 베니토 무솔리니가 실각하고 피에트로 바돌리오 내각이 들어서면서 이탈리아 왕국이 추축국을 탈퇴하자 허울뿐인 에티오피아 황제 겸임도 공식 폐지되었다.

수 많은 왕조에서는 살아생전에 황제를 한 적이 없지만 후손을 잘 둬서 죽은 이후 황제로 추서된 사람들이 상당수 있다. 삼국지에만 여러명이 등장하는데 그 예가 조등, 조숭, 조조(이상 위나라), 손종, 손견(이상 오나라), 사마의(진나라) 등이 있다. 조선왕조도 대한제국 선포 후 건국자인 태조정조에서 철종까지의 임금들을 황제로 추존하였다.

7. 가짜(사칭) 황제

나라에 혼란이 올 때 실제로는 황제도 아니면서 황제라고 사칭하거나 황위계승권자도 아니면서 황위계승권자라고 사칭해서 황제 자리를 차지한 가짜 황제들도 여럿 있었다. 삼국지만 해도 원술이 가장 대표적인 예이며 일본의 경우 타이라노 마사카도가 천황을 사칭했었다.

7.1. 중국

  • 궐선
  • 마상
  • 원술
  • 장거
  • 허창
  • 스딩우(石顶武:1947~1953), 스진신(石金鑫: 1983) - 스딩우는 대중화불국이라는 거창한 나라를 세우고(...) 황제에 올랐으나, 중공당국에 의해 반란죄로 체포되어 처형. 아들 스진신은 후주가 되어 국가를 재건했으나 다시 체포되어 처벌받는다.
  • 딩싱라이(丁兴来:1981-1990) - 사이비교주. 도덕금문교를 창시하고, 스스로 황제에 올라 도덕금문황제라고(...) 자칭. 재상과 비빈을 책봉했으나 행정력이 미치지 못해 10년후에 발견되었다. 체포후 처벌.
  • 장칭안(张清安:1982) - 중원청정국의 창업자. 승상과 문무백관을 임명하고, 장제스를 위국왕으로 봉하고(...) 인민공화국을 토벌하기 위한 친정을 감행하려고 했으나 역시 관계당국에 체포된다.
  • 린원융(林文勇:1980-1982) - 성조국(聖朝國)의 창업자. 역시 공안당국에 체포된다.
  • 차오자위안(曹家元:1982) - 옥황대제(...)를 자칭했다.
  • 리청푸(李成福: 1990~1992) - 만순천국을 세웠으나 경찰 세 명한테 체포당한다.
  • 쩡잉룽(曾应龙) - 계획생육정책에 반기를 들고 대유국을 세운다. 군사를 일으켜 병원을 점거하고 의사와 간호사들을 포로로 삼았으나 인민해방군에 의해 제압당한다. 경찰에 허무하게 당했던 다른 군주들과는 달리 군대까지 출동시켰으니 그나마 반란다운 반란.

7.2. 일본

7.3. 러시아

7.4. 미국

  • 노턴 1세: 대담하게도 스스로를 미국의 황제라고 자칭한 사람인데, 이 사람은 황제를 자칭한 다른 사람과는 다르게 엄청난 대인배에다가 사람을 인종, 빈부에 따라 차별하는 것을 싫어했던 인도주의자였기에 이 항목에 있는 다른 가짜 황제들과는 달리, 지금까지도 칭송을 받고 있다.

7.5. 세르비아

  • 시메온 우로스
  • 존 우로스
  • 스메데레보의 폴

7.6. 루마니아

  • 조번 네바드

8. 황제라는 별명을 가진 실존 인물

한국에서는 보통 한 분야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점하거나, 엄청난 존재감을 과시하는 인물에게 국적을 가리지 않고 황제라는 최고의 미칭을 붙여주는 사례가 종종 있다. 다만 이러한 용법은 한국 내에서만 제한적으로 쓰이는 별명으로 특히 서양권에서는 '황제(Emperor)'라는 칭호 자체가 천하를 주름 잡거나 패권을 거머쥔 왕의 상위 단계라는 느낌 보다는 로마가 무너진 이후 로마를 계승하는 군주에게 주는 고유 명사의 성격이 짙기 때문에 황제라는 별명 보다는 오히려 '왕(King)'이 더 의도하는 바와 어울린다고 볼 수 있으며 실제로 이런 왕(King)을 최고의 미칭으로 더 여긴다.

9. 황제 지위에 오른 가공 인물


[1] Em(Im, In)+Pir(Par=준비하다, 명령하다)의 합성어로 제국, 제왕의 통치권, 절대 통치권 등의 의미로 발전하였다.[2] 대표적으로 나폴레옹프랑스 제국대한제국.[3] 대략 황제는 정치적 의미, 천자는 종교적 의미로 봐도 무방하다.[4] 사실 천자가 황제보다 더 오래된 어휘이다. 본래 왕(王)으로 칭해지던 천자의 호칭을 한층 격을 높인 것이 황제인 것. 따라서 중국 천자라고 하면 선진시대의 왕과 진(秦) 시황제 이후의 황제들을 포괄한다.[5] 로마제국을 개창한 옥타비아누스는 공화정이라는 틀을 유지하는 선에서 자신의 위치를 가장 높게 하고자 하였다. 따라서 아우구스투스(Augustus, 존엄한 자), 임페라토르(Imperator, 全勝의 능력을 지닌 자/군 최고사령관), 폰티펙스 막시무스(Pontifex Maximus, 최고 제사장)>, 프린켑스(Princeps, 시민의 제1인자), 트리부니키아 포테스타스(Tribunicia potestas, 호민관의 특권을 가진 자)등의 칭호를 사용하였는데, 각각이 모두 로마 공화정체에서는 극존칭들이였지만, 황제라는 의미와 동일한 것은 아니였다. 따라서 역사학에서는 이를 원수정이라고도 하는데, 원수로 번역할 수 있는 명칭은 프린켑스이다. 이후 동방의 전제군주제가 수용되면서 황제의 의미를 가진 명칭은 아우구스투스가 되었고, 부황제(副皇帝)로 카이사르라는 명칭이 사용되었다. 또한 아우구스투스가 사실상 황제가 될 수 있었던 이유는 카이사르로부터 승계받은 군단 때문이었는데, 이 때문에 임페라토르라는 명칭도 황제의 의미로 쓰였다.[6] 실제로, 역사상 유일하게 패왕이라는 칭호를 사용했던 항우도 재위 기간이 짧았을 뿐, 황제와 다를 바 없는 취급을 받았다. 역사서 '사기'에서 항우를 당시 전중국의 지배자(황제)로 간주하고 황제의 일을 기록하는 '본기'에 적었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7] 서주 시대 청동기에는 황상제(皇上帝)라는 낱말이 쓰여 있는데 위대하신 하느님이라는 뜻이다. 《상서》 여형(呂刑)편에서 이 황상제는 한 글자씩 빠져서 "황제"와 "상제"로 나온다.1851년 태평천국을 일으킨 홍수전은 기독교의 신을 天父上主皇上帝라고 불렀다.[8] 백스터-사가르(Baxter-Sagart)에 의하면 상고음은 /*ɢʷaŋ/[9] Baxter-Sagart의 상고음 재구 소리값은 /*ɢʷˤaŋ tˤek-s/이다. 중세 소리값인 중고음으로는 /ɦwɑŋtei/, 현대 표준중국어로는 huángdì라고 읽는다. 청나라를 통치한 만주 황실의 만주어 발음으로는 ᡥᡡᠸᠠᠩᡩᡳ(hūwangdi)이다.[10] 소설 초한지에서는 항우가 자신의 호칭을 어떻게 할까 고민할 때에 범증이 유방의 책사 장량을 위태롭게 하고자 장량에게 호칭을 어떻게 할지 물어보는 것으로 묘사된다. 이를 눈치챈 장량은 항우에게 3황과 5제의 칭호를 설명(인의로 천하를 교화하고, 덕으로 통치하는 자)하였으나, 항우는 자신과는 어울리지 않기에 다음의 것을 물었고, 춘추오패(왕에게 충성하며, 제후들을 통솔하여 이민족을 방비하고, 정의를 세우는 자)를 설명하자 마음에 들어하는 것으로 나온다. 나중에 범증은 패왕이라는 명칭이 천하를 경영할 만한 호칭이 아니라고 하였으나, 항우가 그냥 사용하였다.[11] 실제로 3황(천황, 지황, 태황 혹은 태호 복희, 염제 신농, 황제 헌원)은 사마천의 시대에 이미 전설 속 인물로 여겨졌다. 반면에 5제는 실존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여겨졌는데, 전근대 동아시아인들이 역사상 가장 태평한 시대로 미화하는 요순 시대의 요(堯) 임금과 순(舜) 임금은 5제의 마지막 2명에 해당한다.[12] 확실히 하늘을 지칭하는 명칭은 상제였고, 황제의 제호(帝號)는 ~帝였기에 이에 맞겠지만, 시황제가 처음 황제라는 칭호를 사용하였을 때에도 이렇게 생각하였을 지는 미지수이다. 무엇보다도 진나라는 후대 왕조들의 제호(帝號) 법과는 다르게 시황제를 시작으로 2세, 3세 황제 식으로 이어지는 것으로 보이기에 더욱 그러하다.[13]해릉왕의 남침 실패 이후에 이 군신관계는 숙질관계로 바뀐다.[14] 송나라 정통론자들은 가짜 초나라라는 뜻에서 위초(僞楚)라고 불렀다. 괴뢰 황제의 성을 따서 장초(張楚)라고도 한다. 수도는 현재의 난징인 금릉(金陵)이었다.[15] 송나라 정통론자들은 가짜 제나라라는 뜻에서 위제(僞齊)라고 불렀다. 괴뢰 황제의 성을 따서 유제(劉齊)라고도 한다. 수도는 현재의 한단(邯鄲)인 대명부(大名府)였다. 참고로 한단은 전국시대 조나라의 수도였다. 금나라가 북송을 멸망시켰지만 새로 점령한 장강 이북 지역의 한족들을 당장 직접 통치할 자신이 없어서 대신 북송의 신하였던 장방창(張邦昌)과 유예(劉豫)를 각각 괴뢰 황제로 책봉했던 것. 그런데 초나라 황제로 책봉된 장방창은 금나라의 요구를 거부하고 황제가 되지 않으려 했지만 금나라가 "변경(북송 옛 수도)이 피바다가 돼도 상관 없다 이거지?"라고 협박하는 바람에 금나라 사신이 돌아갈 때까지만 억지로 황제 행세를 했다(...). 하지만 금나라 군대가 물러간 뒤 남송으로 도망쳐 버려 초나라 건국이 취소됐고, 유예는 어쨌든 제나라 황제로 버텼으나 남송에 털렸고 결국 금·남송 간 합의에 따라 폐위된다(...). 대신 유예는 금나라 황제에 의해 촉왕(蜀王)으로 새로 책봉되었다.[16] 한족이라고 해서 천왕이라고 칭한 예가 없는 것은 아니다. 태평천국의 군주가 그러하다.[17] 간혹 현대 중국이나 대만 국민정부의 독재자들이 황제로 비유되기도 하지만, 어디까지나 그들의 독재를 비꼬기 위한 비유일 뿐 실제로는 공화정체의 지도자라는 점에서 진짜 황제와는 차이가 있다.[18] 와카타케루 대왕(獲加多支鹵大王)이라는 명문이 유랴쿠 천황의 왕릉으로 비정되는 고분에서 발견[19] 고대에는 주로 훈독을 하여 스메라미코토(すめらみこと)로 발음했으며, 중세 이후로는 점차 한자 그 자체대로 음독하기 시작하여 덴와(てんわう), 덴오(てんおう)를 거쳐 현재는 덴노(てんのう)라고 발음하고 있다.[20] 예컨대 신숙주해동제국기를 저술하며 天皇이라는 단어를 언급하였고 일본 황실의 내력에 대해서 기록했다.[21] 막부 시대까지는 이 문제로 조일간 외교적 마찰이 별로 발생하지 않았으나 1867년 쇼군이 천황에게 권력을 반납하는 대정봉환이 발생하자 일본은 대외에 황제국임을 재천명하며 조선과 갈등을 빚게 되었다.[22] 고대 한국어 발음은 알 수 없으나 적어도 조선 전기에는 황제를 한글로 '황뎨'로 표기했다. 조선 후기에는 구개음화 현상이 일어나면서 ㄷ이 ㅈ로 바뀐다.[23] 이는 '우리도 중국 못지 않은 위대한 나라다'임을 내세우려는 의도도 있지만 유교 사상에 정통하지 못해 아무렇게나 가져다 썼던 흔적일 수도 있다.[24] 현대의 표준 베트남어 발음으로는 호앙데(hoàng đế).[25] 베트남의 재독립 이전까지 칭제했던 인물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당나라 시대인 722년에 마이툭로안(梅叔鸞, Mai Thúc Loan)이 거병하여 매흑제(梅黑帝)로 자처하였지만 신속히 진압당했다.[26] 동아시아의 황제는 그 시작부터 천하 제패를 스스로 하늘과 땅에 제사를 올려 보고하는 제사장과 같은 위치였다. 황제 등장 이전 춘추전국시대에 이미 '한 나라의 왕이 부덕하여 천명이 다른 필부에게 옮겨가는 개념'이 등장했으므로 황제=신의 등식은 엄밀히 말해 성립하지 않는다.[27] 로마 제국 황제의 자리에 오르면 우상화가 진행되었다. 아우구스투스는 삼두정 시절부터 양아버지인 카이사르를 철저히 신격화하여 "신의 아들"(Divi Filius)이라는 호칭을 썼다.[28] 카이사르가 행정수반인 집정관의 비상시 관직인 독재관으로써 정권을 획득하였지만 결국 실패하였기에, 옥타비아누스는 공식적인 공직에서 물러나는 대신에 비토권을 가진 호민관의 특권으로써 로마의 행정과 입법에대한 권한을 장악하였고, 카이사르 사망 이후 유산으로 받은 군단에 대한 지휘권은 원로원의 인정과는 상관이 없는 것이였지만, 대외적으로 보이기에 좋게 보이기 위하여서 반납하였다고 되돌려 받는 모습을 취하였다.(물론 카이사르에게서 받은 군단을 바탕으로 안토니오스와 클레오파트라와 싸우면서 원로원으로부터 군단의 확장을 허가받기는 했다. 그러나 카이사르 이전시기부터 로마의 군대는 장군이나 재력가들에게 귀속된 사병과 같아졌기에 명목상에 불과한 것이다.)[29] 대표적으로 이집트[30] 현대와 같은 체계적인 국민투표 시스템은 상상하기도 어려웠던 당시 상황에서, '민회를 통한 결의' 라는것은 공정한 대중의 의견수렴이 아니라 포럼을 지지자들로 채울 수만 있다면 자신의 주장을 '민회의 결의'로 포장하여 통과시킬 수 있는 것이었다. 더구나, 대부분의 로마 시민들이 한 도시에 모여있던 도시국가 시대와 달리 광대한 제국 전역에 시민권자들이 흩어져 있는 제국 시대에 들어서면서 명색이 황제인 자가 사람을 못 모을 리는 없으니 이런 민회의 의결이란 단순한 요식절차에 지나지 않게 된 것.[31] 호민관 특권이 사실상 전제군주권과 다름없이 작용할 수 있다는 가능성과, 반면 호민관 특권의 명분상 권력이 군사력이나 자금력과 같은 현실권력(=원로원) 앞에서는 생각보다 무력하다는 한계를 처음으로 보여준 인물이 바로 그라쿠스 형제 였다. 그라쿠스 형제 이전의 호민관들은 대부분 호민관 임기를 마친 후 원로원 의원이 되어 정치경력을 이어갔다. 즉 로마인들의 정치관념에서는 '호민관이 무사히 임기를 마치면 승진하여 원로원 의원이 되는 것', 말하자면 호민관보다 원로원 의원이 더 격이 높은 직급이었던 셈이다. 하지만 생각하기에 따라 이건 좀 이상한 것이... 이렇게 원로원 의원이 된다고 해 봤자 행사 가능한 영향력은 고작 300표중의 한 표, 그것도 의회제 체제 내에서는 필연적으로 영향력이 제한될 수 밖에 없는 신참자의 한 표에 불과한 것이다. 물론 고대 로마의 모든 권력이 집중된 원로원에서 300표중의 한 표라면 현대로 치면 국회의원 한 명의 권력보다 훨씬 강력한 권력이긴 한데, 정작 원로원 의원보다 격이 낮다는 호민관은 단독으로 원로원 결의를 거부하거나 원로원 결의와 동등한 입법행위를 할 수 있으니 혼자서 원로원 전체와 맞먹을 수 있는 강력한 권한을 가지고 있는 것.(물론 평민집회의 지지를 얻어야 가능한 일이긴 하지만, 애초에 호민관 자체가 평민집회에서 선출되는 관직이다. 즉 호민관으로 당선된 시점에서 이미 상당한 명성과 영향력을 가지고 있을 것이므로, 합리성적인 입법안이라면 충분히 지지 확보를 기대할 수 있는 것.) 그리고 이 점에 주목한 그라쿠스 형제는 어차피 원로원에서 주장해봤자 씨알도 안 먹힐 것이 불보듯 뻔한 친 평민적 정책을 호민관의 권한을 통해 추진하기 시작했고, 이것이 당대 로마에 큰 충격을 안겨주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전까지 다른 호민관들이 죄다 바보라서 호민관 특권이 얼마나 강력한 권력의 도구로 사용될 수 있는지 몰라서 못 사용했다는 것도 말이 안 되는 소리고... 결국 막대한 자금력과 군사력, 영향력을 가진 원로원은 원로원 최종경고라는 새로운 수단까지 만들어내어 그라쿠스 형제의 계획을 무너트리고 말았던 것이다.(물론 그라쿠스 형제도 바보는 아니었으므로 원로원이 여러 수단을 이용하여 자신들에게 반격해 올 것을 모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다만 이 부분에서는 말하자면 원로원의 행태가 그라쿠스 형제의 예상보다 좀 더 뻔뻔하고 파렴치했던 것에 가깝다.) 결국 똑같이 호민관 특권을 이용하여 로마의 국정을 장악하려던 아우구스투스와 그라크스 형제 사이의 차이는 단 하나였다. 명분상의 권력을 뒷받침해줄 현실권력을 갖추고 있는가, 그렇지 못한가.[32] 이는 현대적 관점에서는 해괴한 해석이지만... 유럽의 경우 고대뿐 아니라 중세, 심지어 근대 무렵까지도 관직을 그 사람의 '재산'으로 여겨 사고 팔거나 상속하는 것을 그리 이상한 일로 여기지 않았다.[33] 로마의 황제는 자신의 개인적인 영토인 이집트에서 들어오는 재물을 바탕으로 사병집단인 군단에 충성을 받는 인물이였고, 공식적인 지위가 평민들의 대표였기에 평민들의 지지를 얻고자 자신의 부를 바탕으로 여러가지 오락<콜로세움>과 음식을 제공하였다. 굉장히 복잡하면서 이해하기 어려운 사항인데, 로마라는 국가는 황제 개인의 재산으로써 방위하고 운영될 뿐, 여타 귀족들은 공직에 있을 때에나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나설 뿐이였으며, 평민들은 로마가 팽창하면서 대다수들이 빈민화되면서 사실 시작부터 붕괴되는 체계였다, 다만 대외원정을 통한 재물획득과 황제의 개인적인 인기를 바탕으로 유지될 뿐이였다. 그러나 가장 찬란했다는 5현제시기에 로마의 팽창이 멈추면서 붕괴가 시작되었고, 5현제라는 현명한 자에게 대를 이어가는 제도가 마지막황제인 아우렐리우스에 의해서 파괴되면서 옥타비아누스가 만든 체계는 완전히 붕괴되었다.[34] 앞서 이야기하였지만, 옥타비아누스는 카이사르의 군단을 상속받았고, 이집트라는 부유한 젖소를 획득함으로 사적인 체계를 구성할 수 있었다. 그러나 부유한 젖소라도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는 비용<군단 유지비와 빈민층 복지-콜로세움 운영비와 음식비 지출, 어찌되었든 황제는 평민들의 대표로서 평민들의 지지를 받아야하는 존재였기에 불만이 생기는 것을 방지할 책임이 있었다.->을 모두 충당한다는 것이 사실 불가능하였다. 이를 그나마 채우던 것이 외정으로 적들을 약탈하는 것이였는데, 로마의 팽창이 한계가 되자 이것도 더 이상 불가능하게 되었다. 결국 돈으로 산 충성은 돈으로 무너지기에 군대는 자신들을 보다 더 잘 대우할 사람을 황제로 옹립하게 된 것이다.[35] 혼란한 제국을 평정한 디오클레티아누스와 그가 지명한 후계자는 조정자로서 권한을 가졌지만, 각자가 군대를 가진 세력가들 사이에서 황제와 부제로 누구를 임명할 것인가는 매우 어려운 문제였다. 설사 임명이 되었다고 하더라도 비슷한 세력가들 사이에서 불만이 커지고, 종국에는 또다시 혼란이 올 수 밖에는 없는 구조였다.[36] 당시 동방지역은 서방지역보다 발전되고, 번화한 지역이였다. 이에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동방에 군주제를 채용하면서, 오랜기간 쇠락하였지만 공화정의 향수가 남아 있던 로마를 버리고, 새로운 기반을 조성하였다.[37] 동아시아의 경우는 특정 왕조의 종말은 곧 국가의 교체로 보았다. 몇몇 예외는 있었으나, 왕조가 교체되면 국가 이름까지 갈아버리는게 일반적이었다. 왕조의 단절을 국가의 멸망으로 보지 않는 견해는 비유럽권에서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으며, 한국사의 신라만 하더라도 중국과의 교류가 적었던 초기에는 세 가문이 왕을 돌려먹는 등 현대 동아시아인의 관점으로는 꽤 이질적이었다.(그러나 王의 후계자로 아들뿐만 아니라 사위 혹은 딸까지 포함되는 것<다만 혼인이 가능한 족속이 박, 석, 김씨로 제한>이였기에 사실은 많이 괴이한 것은 아니다.)[38] 이는 동아시아식 왕조에서는 상상하기도 어려운 일이다. 일부일처제가 기본인 유럽식 군주와 달리, 동아시아식 군주는 많은 첩(후궁)을 거느리기에 혈통이 끊기는 일이 거의 불가능했다. 물론 서양의 왕이나 황제들 역시 개인적으로 정부를 두었고 정부의 자식도 있었지만, 정부는 첩과 달리 법적인 아내로 인정받지 못했기 때문에 정부의 소생은 모두 사생아로 취급되어 왕위 계승권이 없었다.[39] 사실 그 이전에 샤를 8세콘스탄티노스 11세의 조카 안드레아스 팔레올로고스에게 헐값으로 사들인 전통 로마 제국 황제의 타이틀도 명목상 보유하고 있긴 했으나, 스페인도 안드레아스의 유언을 통해 동일한 타이틀을 확보한 상태였고, 따지고 보면 공식적인 타이틀 자체는 '임페라토르 콘스탄티노폴리타누스(Imperator Constantinopolitanus)', 즉 '로마 제국의 황제'가 아닌 '콘스탄티노폴리스의 황제'였다. 더구나 동로마 제국이 오스만 제국에 완전히 정복된 터라 신성 로마 제국 황위와는 달리 아무런 권한이 없는 명예직이었으며, 계승한 수단이나 경로도 좀 그렇고(...) 주권 국가의 지도자로서는 이탈리아로 도망친 그리스인들에게라면 모를까 아무래도 누구 앞에 내놓기 영 민망한 껍데기에 불과했다.[40] 비록 제관은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가 했지만, 옥타비아누스가 가진 칭호 중에 하나인 폰티펙스 막시무스를 계속해서 황제가 가지고 있다고 했기에 동로마의 황제는 자의적으로 교황으로써 역할도 담당하고 있었다.(참고로 폰티펙스 막시무스는 현재 로마 교황의 비공식적인 칭호 중에 하나로써 사용된다.)[41] 사실 5대 총대주교라고 지칭하지만, 로마와 알렉산드리아, 안티오크의 총대주교는 비교적 정통성을 가진 직위인 것과는 다르게 예루살렘과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는 뒤늦게 만들어진 자리였다. 다만 예루살렘은 그 자체적인 중요도에서 넘어 갈 수 있으나, 콘스탄티노폴리스는 수도가 이전되면서 높아진 것이였다. 이슬람이 커지면서 안티오크와 예루살렘, 알렉산드리아가 넘어가게 된 이후에야 콘스탄티노폴리스는 기독교 사회에서 2인자의 위치를 차지할 수 있었다. 로마는 베드로와 바울의 후계를 이어간다는 의미에서 가장 앞선 주교였고, 알렉산드리아는 이슬람에게 넘어가지 전까지도 기독교 사회에서 2인자로 공인되었다. 알렉산드리아 총대주교는 아프리카의 교황을 겸하였다. 지금의 아프리카와 동일하다고 할 수는 없지만, 로마에서도 이 명칭을 인정했다. 안티오크는 시리아와 아시아를 담당하던 곳이였으나, 예루살렘이 총대주교가 되면서 약화되었다. 그러나 아리우스파가 안티오크 교구에서 나왔음을 보면 오래되고 정통성을 가진 곳이였다.[42] 콘스탄티노폴리스, 알렉산드리아, 예루살렘, 안티오키아.[43] 물론 교황과 별개로 서유럽 국가들은 외교적으로 오스만 제국의 술탄을 황제로 인정했다. 그렇지만 그것은 동로마 제국의 후계자였기 때문이 아니라, 칼리프였기 때문이다. 이는 기독교적 세계관과는 무관한 것이므로 '다른 문화권의 황제들' 항목에서 다루어야 할 것이다.[44] 윈저가의 황제 직위는 조지 6세 때 끝이 났다.[45] 인도 황제로서만.[46] 홀슈타인 - 고트로프 가문은 표트르 3세의 아버지 카를 프리드리히(1700년 ~ 1739년)에서 나왔다.[47] 에티오피아 제국 황제 한정.[48] 그러나 몽케가 사망한 이후 쿠빌라이와 아릭부카가 카안 자리를 두고 다투면서 서방의 汗國들은 자체적으로 운영되었다. 이후 쿠빌라이가 카안자리에 올랐음에도 서방은 그 통치에서 벗어났기에 카안의 통치력이 크게 훼손되었다. 그럼에도 에케 몽골 울루스의 통치자라는 관념만 유지될 수 있었다.[49] 영락제가 북원의 잔당들이 다시는 일어서지 못하게 때려대면서 실질적인 힘을 모두 잃어버렸고, 이후에는 보르지긴 혈통의 인물을 초원세력가가 옹립하는 것으로 명맥만 유지되었다. 그러다가 다얀칸이 초원을 다시 재통일하면서 부흥의 기초를 마련하였다.[50] 청의 중국통일 이후 청나라의 황제는 중국의 황제, 몽골의 대칸, 만주의 한(han) 그리고 강희제 이후에는 티베트 불교의 보호자 칭호까지 겸하게 된다.[51] 그래서 외국의 king도 대군주로 번역하였다.[52] 1939년에는 알바니아 국왕도 (자칭)겸임한다. 이 역시 1943년에 포기.[53] 위에 서술되어있는 이주일과는 또 다르다.이주일은 모든 코미디를 통합한 황제라고 본다면, 이경규는 흔히들 말하는 예능 이라는 장르의 황제라고 보면 된다.[54] 포어로는 O Rei do futebol,즉 축구의 왕이라고 불리었다.[55] 이것 역시 직역하면 L'Ottavo Re di Roma, 로마의 여덟번째 왕이라 불리었다.[56] 2000년대 초반 한정, 06년 이후 몰락한다.[57] 스타크래프트가 정립된 이후로 보통은 그냥 '황제'라고 부른다. 그냥 테란만의 황제라기엔 스타판 전체에 영향력이 너무나 막강해졌기 때문.[58] 영어로는 The king of Rock 'n' Roll. 그러나 항목에 가보면 알겠지만 제왕이라고 표기되있다. 하지만 영어로보면 왕이다.[59] 한국 한정. 영어로는 The king of pop. 즉, 황제가 아닌 왕이다.일본에서는 으로 불린다 카더라[60] 한국 한정. 미국에서 많이 쓰이는 단어는 왕을 3인칭으로 지칭하는 his highness의 말장난인 his airness. 물론 중계를 보다보면 the king도 나오고, 역대 최고의 선수로 널리 인정받던 워싱턴 위저즈 시절엔 대놓고 중계자가 the greatest of all time이라고 했다.(물론 경기력은 이때가 제일 안 좋았다) 문서화할땐 GOAT라고 쓰인다. 한술 더 떠서 basketball god(!!)이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사실 god이란 수식어는 한 분야에서 역대최고수준의 달인을 지칭할 때 종종 쓰는 단어다.예를 들어 guitar god인 에릭 클랩튼. 물론 이 수식어가 붙으려면 웬만한 달인이 아니라 조던이나 클랩튼처럼 정말 역대최고라고 할 정도로 뛰어나야 한다. 예를 들어 조던을 제외하면 god이란 수식어를 달고 있는 농구선수는 없다. 조던의 위치가 그만큼 독보적이기 때문이다. 반면 음악의 경우 여러명이 있는데(제프 벡이나 지미 헨드릭스 등), 종목 특성상 객관적인 우열을 가리기 힘들기 때문.[61] 과거에는 지금은 은퇴한 강진우김대겸을 말하기도 했다.[62] 1박2일에서 황태자 에서 성인이 되 황제로 불렸으나, 사실상 장난식으로 황제라 불렀지만, 당시 찬란한 유산1박2일 두개의 프로로 시청률 70%를 자랑하던 한때는 진짜 황제였다.[63] 김범수의 얼굴이 독보적으로 못생긴건 연예계에서 아주 유명한 얘기라서, 김태호 PD가 대놓고 못친소 페스티벌 특집에서 그를 얼굴 황제(...)라고 칭송해 마지 않으면서 해당 특집의 1부와 2부에서 내내 황제니, VVVIP(...)니 하는 수식어가 다닥다닥 붙었다.[64] 그덕에 방송만 키면 시청자들이 백성을 자처해서 황제 폐하 문안드리러 왔다는 드립이 매번 나온다.근ㅡ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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