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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태자(太子) 또는 세자(世子)는 군주국에서 군주의 지위의 계승이 예정된 후계자를 일컫는 칭호이다. 영어로는 'Crown Prince'로 부른다.원래는 '태자'와 '세자' 자체로 고유한 칭호였으나, 띄어쓰기나 문장부호가 없는 한문의 특성상 문맥의 의미를 명확히 하거나 어느 지위를 계승하는 후계자인지 구분하기 위하여, 황제의 후계자는 '황태자(皇太子)', 왕의 후계자는 '왕태자(王太子)' 또는 '왕세자(王世子)'로 칭하기도 했다.
일반적으로 군주의 아들이 후계자가 되었기에, 간혹 후계자가 군주의 손자일 경우에는 태손(太孫), 동생일 경우에는 태제(太弟), 딸일 경우에는 태녀(太女) 등으로 고쳐부르기도 했다. 다만 정종 이방과의 동생이었던 태종 이방원이 후계자로 지정되었음에도 '세제'가 아닌 '세자'로 책봉되었듯, 무조건 고쳐부른 것은 아니다.
2. 한자문화권
한자문화권에서 '태자'는 황제 내지는 자주국 군주의 후계자를 지칭하는 용어로, '세자'는 제후국 국왕의 후계자를 지칭하는 용어로 알려져 있다.하지만 원래부터 '태자'와 '세자'의 격에 차이가 있던 것은 아니었으며, 실제로 《사기》나 《한서》에서는 천자나 제후의 구분없이 적통 후계자는 모두 일제히 '태자'로 칭하고 있다. 제후왕의 후계자를 태자라고 하는 것은 물론이고, 심지어는 극포후(棘蒲侯) 시무의 후계자인 시기(柴奇)가 반란을 일으켰을땐 그를 "극포후태자"로 지칭했다.[1] 즉, 주나라부터 전한 때까진 천자와 제후에 관계없이 적통 후계자는 모두 '태자'로 칭했던 것이다. 당시에도 '세자'라는 어휘가 없던 것은 아니었으나, 세자는 직함을 가리키는 고유명사가 아니라 적장자 또는 계승권자를 의미하는 보통명사처럼 쓰였던 것으로 확인된다. 이러한 관례를 인지하지 못하여 나무위키 등에서 전한 이전에 '태자'로 지칭되는 인물들을 임의로 '세자'로 수정하는 사례도 종종 보인다.
군주의 후계자만 '태자'로 지칭되기 시작하는 것은 신-후한 교체기인데, 명확한 기록은 나오지 않으나 정황상 왕망이 태자와 세자의 격을 구분하기 시작한 것으로 추측된다. 다만 수나라 때까지 제후의 후계자는 그 작위의 격에 관계없이 모두 '세자'로 지칭했다. 작위에 따른 구분이 필요할 때 제후왕의 세자는 왕세자, 공작의 세자는 공세자(公世子), 후작의 세자는 후세자(侯世子), 백작의 세자는 백세자(伯世子), 자작의 세자는 자세자(子世子), 남작의 세자는 남세자(男世子) 등으로 지칭된 것이다.
당나라 이후로는 제후의 후계자라도 왕의 후계자만 세자로 부른 것으로 확인되며, 그 이외의 제후 후계자는 딱히 공식적인 칭호를 받지 않았다. 명나라에서는 친왕의 후계자만 '세자'로 책봉하는 것으로 제한했으며, 군왕의 후계자는 '장자(長子)'로 구분하여 책봉하기 시작했다. 청나라에서 왕작은 무조건 세습되는 지위가 아니었으나, 외번 왕작이거나 특례를 통해 세습이 허용된 경우에는 명나라 때와 마찬가지로 친왕 후계자를 '세자', 군왕 후계자를 '장자'로 책봉했다.
특이하게 고려 초기에는 여러 왕자가 태자로 책봉되면서, 적통 후계자는 따로 '정윤(正胤)'이라는 지위를 부여하기도 했다.[2] 이러한 관례는 현종 이후로는 보이지 않는데, 정황상 기존의 태자 지위를 국공(國公)으로 대체한 것으로 보인다.
2.1. 황태자
자세한 내용은 황태자 문서 참고하십시오.2.2. 왕태자
왕태자(王太子)는 독립된 주권을 가진 왕국의 왕의 보위를 이을 왕자를 지칭하는 말. 즉 자주국 왕의 후계자다.한국은 고대부터 기본적으로 왕태자라는 말을 사용하였으나 조선 시대 이후로 중국과 조공책봉 관계를 바탕으로 외교를 했기 때문에, 이전 왕조들과는 달리 자국의 군주를 자주국의 군주가 아닌 제후왕으로 지칭했고, 이 탓에 '왕태자'라는 용어 자체가 사멸하였다. 물론 조선 이전에도 한반도의 왕조들은 중국과 조공책봉 관계를 맺어왔지만 형식적일 뿐 기본적으로 외왕내제를 따르는 경우가 많았다.
보통 전근대에는 15세 전후로 태자가 책봉되었다.
고조선[3]부터 고려 중기까지 왕태자를 사용하다 고려 후기 원나라의 지배를 받기 시작하면서 그 호칭이 왕세자로 격하되었다. 그것이 조선 시대까지 이어졌으며 고종 32년(1895) 군주의 칭호가 대군주로 바뀔 때 함께 왕태자로 복귀되었고, 광무 원년(1897년) 칭제를 하며 제위 계승자의 칭호를 황태자로 격상하였지만 13년 만에 대한제국이 경술국치로 멸망하면서 황제직이 일본 제국에 의해 이왕으로 격하되어 황태자 칭호 역시 이왕세자로 격하되었다.
갑오개혁 이전의 조선과 달리[4] 갑오개혁 이후의 조선은 군주의 칭호가 대군주로 바뀌어 왕실 호칭이 격상되어서인지 왕태자 뿐만이 아니라 왕족에게도 전하라는 용어를 사용하였다. 독립신문의 기록을 보면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하기 이전인데도 불구하고 의화군(의친왕)과 흥선대원군을 가리켜 전하라고 한 기록들이 존재한다.[5]
현대 한국인들은 왕태자를 어색하게 여기는 경우가 많다. 상술했듯 한반도에서 '왕태자'라는 칭호는 고조선부터 고려 시대까지 쭉 사용되었으나, 한국인들에게 가장 익숙한 조선 왕조가 500년을 넘는 기간 동안 '왕세자'라는 용어를 사용했기 때문이다. 조선의 역사만 보면 왕세자를 가장 오랫동안 사용했으나 한국사 전체를 따졌을 때는 왕태자가 훨씬 더 오랫동안 사용되었다.
또한 동아시아에서는 진시황 시기 황제 제도가 성립한 이래로 유교적 시스템이 점차 자리를 잡게 되면서 천자국은 '황(제)+태(太)', 제후국은 '왕+세(世)'의 조합이 자연스러운 것으로 정착했다.
2.2.1. 역대 고려 왕태자
<colbgcolor=#670000> 고려 정윤 황태자 · 왕태자 · 왕세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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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왕세자
세자은(는) 여기로 연결됩니다.
인터넷 방송인에 대한 내용은 세자(인터넷 방송인) 문서 참고하십시오.王世子
명나라, 청나라 작위로서의 왕작(보통 황족), 주변 제후국 군주로서의 왕의 뒤를 이을 왕자. 차기 왕위(王位) 계승자. 황제의 자손인 친왕의 자식도 세자(친왕세자)라는 말을 썼다.[6]
한편, 현대 한국에서는 사극 이외에는 유럽이나 중동의 차기 왕위계승자를 표현할 때 번역어로 주로 사용한다. 중국에서는 외국의 차기왕위 계승자를 번역할때는 황태자나 왕세자보다는 황저(皇儲), 왕저(王儲)라고 표현하는 편이다. 일본에서는 보통 황태자 간혹 왕태자를 사용하는 편이며, 왕은 아니지만, 룩셈부르크의 차기 공위를 계승할 공자에게는 공세자라는 표현을 쓰며, 경칭은 전하를 쓴다.[7] 그러면서 또, 룩셈부르크 대공에게도 경칭을 전하라고 표기하고 있다. 배우자는 대공비.
세자 칭호는 4세기 중후반에 제작된 칠지도, 5세기 초반에 제작된 광개토왕비문에 세자 또 삼국사기 고국원왕 4년에서 그 칭호가 보이나 문제점은 한국의 삼국사기[8], 삼국유사나 일본의 일본서기, 속일본기 등에는 백제에서 세자(왕세자) 칭호가 사용된 기록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는 것과 일본 역사학자 모리 기미유키, 하마다 고사쿠의 주장으론 칠지도에서 옅볼수 있듯이 당시 동진의 연호를 사용하는 백제가 동진과 책봉 관계에 있었기 때문에 본래 백제에서 사용하던 태자 칭호를 세자로 고쳤을 것으로 추측하는 견해가 있는 것을 보아 해당 기록들이 백제 국내에서 자체적으로 세자 칭호를 사용한 근거가 되지는 않는 것으로 본다는 것이다.
하지만 고구려의 경우에 광개토왕릉비를 보면 영락(永樂) 원년, 영락(永樂) 6년 영락(永樂) 10년 꼬박꼬박 고구려의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했지만 태자/세자 칭호 문제에서는 추모왕의 세자 유리왕이라고 적혀있다.[9] 하술하겠지만, 이러한 이유로 당시 삼국시대의 국가들은 세자, 태자를 혼용 했다고 볼 수 있으며, 조공책봉 관계와는 얽매이지 않았다고 추정할 수 있다.또 광개토왕비문의 세자 칭호를 근거로 세자 칭호가 사용되거나 태자와 세자가 혼용되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으나 저 세자 칭호가 5세기 당대에 사용된 용어라 장담할 수 없고 (왜냐면 고구려는 국초부터 유기(留記)라는 역사서를 편찬했기 때문에 거기에 쓰여진 고구려 초기 기록대로 세자라고 호칭했을 가능성이 있다) 애당초 저 기록도 광개토태왕비문이 국내 사람만이 아닌 중국이나 외국 사신들도 볼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책봉 관계를 고려해서 일부러 세자로 고쳤을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책봉관계에 그렇게 신경 썼기 때문에 자국의 태자를 세자라고 칭하면서 능비에 떡하니 독자연호를 썼다는 점에서 이러한 주장은 넌센스다. 그것도 까마득한 옛날 옛적 추모왕의 아들 유리왕을 세자라고 칭하면서 장수왕 3년인 당대에 아주 인접한 시점에 사망한 부왕의 연호를 기록 했다고 하는 점에서, 오히려 중국의 눈치를 봤다면 반대로 연호를 중국 연호를 사용하고 까마득한 옛날의 유리왕을 태자라고 칭했거나 아니면 둘 다 세자와 중국연호를 사용했을 것이다. 게다가 능비에는 고구려 중심의 천하관이 극치에 달하고 신라와 백제를 훈도, 교화 해야하는 대상으로 보며, 부여 백제 신라에게 조공을 받는 점을 강조한 것을 보면 유기(留記)에 세자라고 적혀 있다고 고지고대로 받아 적었다는 점 자체도 납득할 수 없다. 능비의 성격상 참조된 원문이 세자라고 적혀 있어도 태자라고 고쳐 기록했을 가능성이 큰데 세자라고 기록한 것을 보면 세자, 태자 칭호 자체를 별로 신경을 안 썼거나 혼용되었다는 방증이다.
게다가 일본서기에 기록된 세자(후에 양원왕이 되는 인물)를 둘러싸고 벌어진 내전을 전하는 기사에서도 태자를 세자로 부르고 있기 때문에 고구려 측에서는 태자와 세자를 혼용했을 가능성은 있어보인다.
是歲, 高麗大亂. 凡鬪死者二千餘. 百濟本記云, 高麗, 以正月丙午, 立中夫人子爲王. 年八歲. 狛王有三夫人. 正夫人無子. 中夫人生世子. 其舅氏麁群也. 小夫人生子. 其舅氏細群也. 及狛王疾篤, 細群·麁群, 各欲立其夫人之子. 故細群死者, 二千餘人也.
_이 해에 고구려에 대란이 있었다. 무릇 싸우다 죽은 자가 2천여 명이었다. 『백제본기』에서 “고구려에서 정월 병오에 중부인(中夫人)의 아들 주를 왕으로 세웠다. 나이가 8살이었다. 코마 왕(狛王)에게는 3명의 부인이 있었다. 정부인(正夫人)에게는 아들이 없었다. 중부인(中夫人)이 세자(世子)를 낳았다. 그의 외할아버지가 추군(麁群)이었다. 소부인(小夫人)도 아들을 낳았다. 그의 외할아버지는 세군(細群)이었다. 코마 왕이 병에 걸려 위독해지자 세군과 추군이 각각 부인이 낳은 아들을 즉위시키고자 하였다. 그래서 세군 측에서 죽은 자가 2천여 명이었다.”고 한다.
일본서기, 546년
이것은 당대에 작성된 백제본기의 내용을 그대로 차용했기 때문에 고구려는 세자/태자를 조공-책봉 관계에 얽매이지 않고 혼용한 것으로 보인다._이 해에 고구려에 대란이 있었다. 무릇 싸우다 죽은 자가 2천여 명이었다. 『백제본기』에서 “고구려에서 정월 병오에 중부인(中夫人)의 아들 주를 왕으로 세웠다. 나이가 8살이었다. 코마 왕(狛王)에게는 3명의 부인이 있었다. 정부인(正夫人)에게는 아들이 없었다. 중부인(中夫人)이 세자(世子)를 낳았다. 그의 외할아버지가 추군(麁群)이었다. 소부인(小夫人)도 아들을 낳았다. 그의 외할아버지는 세군(細群)이었다. 코마 왕이 병에 걸려 위독해지자 세군과 추군이 각각 부인이 낳은 아들을 즉위시키고자 하였다. 그래서 세군 측에서 죽은 자가 2천여 명이었다.”고 한다.
일본서기, 546년
반면에 5세기 중반에 제작된 충주 고구려비에는 왕의 아들을 태자라 호칭하고 있는데 여기서 태자 공은 고조다(문자명왕의 아버지)가 아니라 장수왕의 다른 아들로 보이기 때문에 왕의 적장자가 아닌 다른 아들에게 태자 칭호를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는 것이다. 태자에는 보통 왕위 계승자를 지칭하는 용례와 왕의 장자를 지칭하는 용례가 있기 때문이다. 춘추필법에 의거해 충주 고구려비에 기록된 태자는 요절한 장수왕의 장자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학계의 중론은 중원 고구려비의 태자는 고조다를 칭한 것으로 보는 것이다.
이에 대해 백제 칠지도와 인물화상경에 대해 새로운 학설을 주장한 건국대학교 홍성화 교수는 고대 한국사에서 태자와 세자의 구분에 대해 왕위계승권을 가진 왕자를 태자라 칭하고, 왕위계승권이 없는 왕자를 세자라 칭한 것이라 추측하였다.
고려 초기에는 여러 왕자가 태자 칭호를 받았기에 따로 정윤으로 임명된 태자가 실제 후계자였다. 경종의 차남인 효화태자를 마지막으로 더이상 일반 왕자들에게 태자 칭호가 주어지지 않게 되면서 태자는 후계자 전용의 칭호가 되었으나, 원 간섭기에 들어서 원나라의 압박으로 태자 칭호를 '세자'로 낮췄다.[10] 그 칭호가 조선 시대까지 이어졌다가 1895년에 고종이 대군주 칭호를 사용하면서 왕태자로 복귀되었고, 1897년에 대한제국을 선포하면서 황태자로 고쳤으나, 경술국치로 대한제국이 망하면서 황제는 이왕으로 격하되었으며 황태자에 대한 칭호도 이왕세자로 격하되었다.
태자는 동궁(東宮), 춘궁(春宮)이라 부르기도 하는데 이는 태자가 기거하는 거처가 왕궁을 기준으로 동쪽에 있는 것이 원칙이었었기 때문이다. 신라의 동궁과 월지, 고려의 수춘궁이 그 예시다. 따라서 태자의 거처가 되는 장소도 동궁이라 부르고 태자 본인도 비유적으로 동궁이라고 많이 불렀다.
2.3.1. 조선 왕세자
조선에선 대중에게 친숙하진 않지만 저궁(儲宮), 저군(儲君), 저사(儲嗣)라고도 했으며, 그래서 세자위(世子位)를 저위(儲位)라고 했다.관련 명칭으로 동생이 왕위를 이을 후계자로 지명되면 왕세제라 했다. 왕세손은 세자의 적장자로서 세손위를 받은 자에 대한 호칭이다. 원손 책봉 후 일정 나이가 되어[11] 세손 책봉을 받아야만 세손이라 한다. 경칭은 '저하(邸下)'와 마노라(말루하). 조선 말기에 들어 마노라 호칭이 여성호칭으로 변하고, 궁중 내 손위여인을 이르던 마마가 남성에게도 쓰이며 마마라고 불렀다. 근대를 거쳐 현대에는 "마누라"가 평범한 남편들이 아내를 부르는 표현의 하나가 되어 버렸는데, 이는 관직명칭인 영감, 양반 등이 속된 표현으로 되어버린 현상과 비슷하다고 볼 수 있을 듯하다.
다만 조선 초기까지도 고려식 외왕내제의 전통이 완전히 정리되지 않아서, 태종은 이제를 세자에서 폐할 때 그 아들을 세손으로 세울 것을 고려하면서 '왕세손'이라 할지 '왕태손'이라 할지 논의하라고 지시하기도 했다.
갑오개혁 이전의 조선에서는 세자와 대군, 군이 같은 군주의 아들이어도 존칭은 엄밀히 구분했다.[12]
유교 사회에서의 적장자 계승원칙으로 인해, 특별한 경우[13]가 아니라면 보통 적장자(嫡長子)[14]가 세자가 되어 왕위를 잇는 것이 보통이다. 기본적으로 적장자>적자>서장자 순이다. 그리고 왕이 이 순서에 가까울수록 정통성도 아주 높아진다. 그 때문에 장남이 요절하면 적장손이 뒤를 잇는다.[15] 유럽의 경우에도 맏손자의 경우 갓난아기, 심지어 뱃속에 있는 태아[16]한테도 철저하게 왕위를 물려줬다. 대습상속[17]이 전세계적으로 보편화 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유명한 사례가 정조. 그런데 정조도 실은 사도세자의 장남이 아니다. 형인 의소세손이 3살 때 죽으면서 차남이었던 그가 사실상의 장남이 된 것.[18]
대중들은 흔히 적장자가 부재하면 적차자에게 왕위가 돌아간다고 생각하는데, 실제로도 조선사를 통틀어 적장자 부재 시 적중자에게 후계자 자리가 돌아간 경우가 적장손에게 돌아간 경우보다 훨씬 많다.[19] 하지만 원칙적으로 적장자가 유고상태가 되면 이 지위는 적차자가 아니라 적장손에게 세습되어야 하는데, 이런 사례는 조선왕조 500년을 통틀어 정조(조선)와 헌종(조선)뿐이다. 조선에서 적장손이 아닌 차자가 계승한 사유들을 보면 다음과 같다.[20]
- 이방우: 공식적으로 고려 왕조의 충신으로써 집안 전체가 왕위계승권을 포기한 것으로 공표.
- 양녕대군: 적장자를 폐한 상황에서 그 아들을 세우는 전례가 없다는 조정의 여론.[21]
- 덕종: 찬탈로 수립된 세조 정권 특성상 종법에 따라 어린 세손을 세우는 데 대한 부담.[22]
- 소현세자: 청에서 비호하는 소현세자와 대립하던 인조가 소현세자 사후 원손을 세손으로 책봉해야 한다는 대신들의 여론을 물리치고[23] 막무가내로 차자 봉림대군을 세자로 책봉, 이후 민회빈 강씨를 역모죄로 몰아 소현세자 가계의 왕위계승권을 박탈.
조선 때는 세자가 아직 어린 아이에 불과한데 임금이 승하하여 그 뒤를 잇게 된다면, 새로운 왕의 직계존속 중 대비[24] 중에서 서열이 제일 높으신 분이[25] 수렴청정을 하였다(왕의 할머니나 왕의 어머니).[26] 그 외 동아시아에서 보편적으로는 섭정을 하는 케이스가 제법 된다.
임금이 병으로 누워서 정사를 돌볼 수 없거나, 외국 원정 또는 특정 사업에 올인하기 위해, 또는 차기 국왕 수업의 일환이나 퇴위 전 인수인계 등을 이유로 세자가 임금을 대리하여 정사를 돌보는 경우도 있었다. 이를 대리청정이라고 한다.
조선과 대한제국에서 왕세자 & 황태자로 책봉된 나이는 의안대군 11세, 정종 42세, 태종 34세, 양녕대군 11세, 세종 22세, 문종 8세, 단종 10세, 덕종 18세, 예종 8세, 연산군 8세, 폐세자 이황 6세, 인종 6세, 순회세자 7세, 광해군 18세, 폐세자 이지 11세, 소현세자 14세, 효종 27세, 현종 11세, 숙종 7세, 경종 3세, 진종 7세, 장조 2세, 문효세자 3세, 순조 11세, 문조 4세, 순종 2세이다. 단종을 제외하면 10살 이상으로 세자가 된 이들은 아버지가 본디 왕이 아니었다가 정변 등으로 왕이 되었거나 어떤 이유로 세자가 교체되었거나 늦게 책봉된 경우다. 그나마 단종도 세자가 된 게 10세지 세손은 그 이전이었다.
단종과 현종은 왕세손이었다가 할아버지가 사망하고 아버지가 왕이 된 후에 왕세자가 되었고, 영조는 왕세자가 아니라 왕세제이며 정조는 할아버지 영조 재위기간에 아버지 사도세자가 사망했으므로, 왕세자가 아니라 왕세손으로 보위를 물려받아서 왕세자였던 적이 없다.
창업군주 이성계는 첫 임금이기 때문에 왕세자가 아니며, 세조는 계유정난으로 권력을 잡은 후 선왕의 아들이나 동생이 아닌 선왕보다 항렬이 높은 숙부이기 때문에 왕세자 책봉을 받지 않고 양위받아 즉위했고[27] 중종과 인조는 각각 중종반정과 인조반정으로 즉위해서 왕세자 책봉을 받은 적이 없고 명종은 인종의 동생으로 즉위하기는 했으나, 인종이 아들 없이 죽는 바람에 왕위 계승의 법칙에 따라 왕이 된 것이지 왕세제 책봉 없이 바로 왕이 되었고 성종, 선조, 철종, 고종은 왕통의 직계가 단절되어 친척에서 섭외하여 즉위시켰으므로 역시 왕세자 책봉을 받은 적이 없다.
참고로 원래 세자는 중원왕조에서 친왕의 뒤를 잇는 정식 후계자의 봉작이다. 그렇기에 원래 세자의 정실 역시 세자빈이 아닌 세자비(妃)였다. 중원왕조는 황제의 정실을 황후(后)로 하고, 황태자의 정실과 다음 가는 후궁을 비(妃)라 하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조선은 살아있는 중궁이 왕비(妃)였기에[28] 어쩔 수 없이 그 다음 가는 봉작이 빈(嬪)이 되다보니 발생한 현상이다.
2.3.1.1. 조선의 왕세자 교육
조선의 경우 왕세자의 호위는 1418년(태종 18년), 그 해 2월 세자가 된 이도의 안위를 위해 '세자익위사(世子翊衛司)'을 설치하여 담당하게 했다. 세자익위사는 계방(桂坊)이라고도 불렀다. 왕세손의 호위는 1448년(세종 30년), 그 해 세손이 된 이홍위의 안위를 위해 '세손위종사(世孫衛從司)'를 설치하여 담당하게 했다. 세손위종사는 갑오개혁 때 폐지되었다.세자의 생활은 사관학교 생도를 방불케 할 정도로 엄격하다. 아침 기상시간과 저녁 취침시간이 아예 정해져 있으며 일정수준의 학문과 무예를 주기적으로 갈고 닦게 했다. 이 엄격한 훈련을 거쳐서 조선의 임금으로 즉위한다.
대개 원자가 세는나이로 8~9세가 되면, 즉 일반적으로 소학(小學)에 입문한다고 여겨지는 나이에 세자로 책봉했다. 이제 충분히 그 자질이 검증되어 이유여하를 불문하고 왕의 자리를 맡을 자격이 있음을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것이다. 때문에 만 2세에 아버지를 잃은 월산대군이나 역시 만 4세에 부왕이 사망한 제안대군은 '너무 어리다'는 이유로 아버지의 지위를 물려받지 못했다. 하지만 인종의 경우에는 남곤의 주청으로 예외적으로 이른 6세에 책봉이 되었고 조선 후대에 가면서 왕자 복이 귀해져서 곧잘 세자로 책봉되곤 했다. 경종, 사도세자, 순종황제 등이 대표적이다. 연산군은 "중국은 황자가 태어나면 바로 태자로 책봉하는데, 왜 우리나란 8~9세는 되어야 책봉하는가?"라고 예조에 묻기도 했는데, 예조에서는 이렇게 대답했다.[29]
예조(禮曹)가 아뢰기를, “세자를 8~9세에 책봉하는 것이 어찌 일정한 규정이 있겠습니까? 중국 조정의 일은 또한 알 수가 없습니다만 지금의 황제께서 태자(太子)를 책봉하는 조칙(詔勅)에 ‘조정에 있는 신하들이 태자를 일찍 세우도록 청하므로 여러 사람들의 권유에 못 이겨서 책봉한다.’ 하였습니다. 우리 조정에서는 나이 8~9세가 되기를 기다려 책봉하는 것은 생각건대 반드시 성립(成立)하여 행례(行禮)를 감내할 수 있으리라는 것을 참작하고서 책봉한다는 것인 듯합니다. 또 책봉의 예절도 또한 어려운 것이 아니며, 다만 책명(冊名)만 받을 뿐입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세자를 일찍 세우는 것만 같지 못한데, 만약 일찍 세워려고 한다면 책봉(冊封)에 관한 여러 가지의 일은 준비할 수가 있겠는가?” 하매, 예조가 아뢰기를, “만약 성명(成命)이 있다면, 봉책에 관한 모든 일은 1개월 안에 준비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
2.3.1.2. 역대 조선 왕세자
3. 유럽
유럽의 왕위 계승자들은 거의 Crown Prince라고 한다. 예외적으로 근대 이후 프랑스 제1제국, 프랑스 제2제국, 브라질 제국의 황태자를 Prince Imperial이라고 한 적이 있지만[81] 이 역시 Crown Prince의 한 종류였고,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이전까지 서유럽의 유일한 제국이었던 신성 로마 제국의 경우 선거군주제였기 때문에 황태자라는 자리 자체가 없었다. 황제 생전에 제위 계승자를 미리 선출시켜 독일왕이라는 칭호를 받게 하였으나 황제 사후 선출된 마티아스, 레오폴트 1세, 카를 6세 같은 사례도 있었기 때문에 엄밀히 따지면 황태자는 아니었다. 로마 제국은 프린키파투스(원수정) 아래에서는 프린켑스 유벤투티스, 카이사르 칭호 중 하나 혹은 두 개 모두를 수여했다. 이는 2세기 후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시대 이후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를 차례로 수여하는 방식으로 바뀌지만 보통 공동황제로 삼거나 차기황제로 공인할 경우 내린 칭호는 카이사르와 프린켑스 유벤투티스였다.[82] 이런 전통을 계승한 동로마 제국에서도 카이사르라는 칭호를 내렸다. 다만 동로마 제국의 경우에는 프린키파투스 체제 이후인 사두정치 시기의 부제 칭호인 카이사르에서 유래한 것이다.엄밀히 말하면 근대 이전의 유럽에서는 왕위를 이을 후계자에게 웨일스 공(영국)이나 아스투리아스 공(스페인) 등 별도의 작위에 책봉했다. 확정 상속인(Heir apparent)과 추정 상속인(Heir presumptive)이 구분[83]되는데, 확정 상속인은 그 자신이 확실한 후계자로, 본인이 사망하지 않는 이상 무조건 작위를 이어받는 확정된 지위이다. 예컨대 영국 국왕 찰스 3세는 영국 왕실이 아들 우선 상속법을 시행할 때 선왕 엘리자베스 2세의 맏아들로 태어나 확정상속인으로서 웨일스 공이 되었다.[84] 반대로 추정 상속인은 계승법칙 상 1순위인 후계자가 존재하지 않을 때 주어지는 자리로, '일단은' 후계자이지만 우선권이 높은 상속자가 태어날 경우 후계자 자리를 넘겨주게 된다.[85] 순전히 법률적인 의미이기 때문에 우선권이 높은 상속자가 탄생할 실질적인 가능성은 고려하지 않는다.
예를 들면 아들 우선 상속법 기준으로 남자 형제가 없는 군주의 장녀는 잠재적으로 군주의 후계자이다. 그러나 후에 남동생이 태어난다면 남동생이 군주의 새로운 후계자가 된다. 유럽에서 지금까지 대부분의 여왕들은 추정상속인 위치에서 왕위를 이어받았다. 엘리자베스 2세 또한 마찬가지로 즉위 전까지 Princess of Wales[86]가 아니라 추정상속인(일반적인 공주)이었다.
유럽의 확정상속인들은 이에 걸맞은 작위를 부여받는데, 예컨대 유명한 영국 왕위 계승자는 웨일스 공위[87]와 콘월 공작위[88] 및 로스시 공작위[89]를 받는다. 만약 왕세자가 왕세손을 낳은 채 왕보다 먼저 사망하면 왕세손은 왕세자의 뒤를 이어 웨일스 공에 책봉되지만, 콘월 공작위와 로스시 공작위는 받지 못한다. 스페인은 아스투리아스 공위[90]와 히로나 공작위[91], 비아나 공작위[92], 몽블랑 공작위 등을 받고, 벨기에는 브라반트 공작위, 네덜란드는 오라녀 공위를 받는다.
스웨덴과 덴마크[93], 노르웨이는 별다른 작위 없이 왕세자(Kronprins)에 책봉한다.
브라질 제국은 그랑 파라 공작위를 황태자에게 주어졌다.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프랑스 제국은 황태자에게 로마왕작위를 내렸다. 이탈리아 왕국 태자의 작위는 사보이아 공국과 사르데냐 왕국 시절에는 피에몬테 공(Principe di Piemonte)[94]이었고, 통일 이탈리아 왕국 수립 이후에는 피에몬테 공 혹은 나폴리 공[95]으로 바뀌었다. 나폴리 왕국과 시칠리아 왕국의 후계자들은 칼라브리아 공작위를 받았다. 포르투갈 왕국은 1822년에 브라질이 독립하기 전까지 상속자의 작위가 브라질 공(Principe do Brasil)이었고 브라질 독립 후엔 알가르브 공작으로 변경되었다. 포르투갈 왕위계승자인 장자에게는 베이라 공작위도 주어졌다. 불가리아는 터르노보 공작, 루마니아는 알바이울리아[96] 대공이라는 작위가 수여되었다.
근대 그리스 왕국의 왕세자는 디아도코스(Διάδοχος)라고 불렸는데 디아도코이의 단수형이다. 즉, 상속자라는 뜻이다. 원래 요르요스 1세는 세자인 콘스탄티노스 1세에게 스파르타 공작이라는 작위를 내렸지만 귀족 작위를 허용하지 않는 헌법과 충돌된다는 이유로 의회에서 반발하였다. 나중에 의회의 승인을 받기는 했지만 이후 사용이 중단되었다. 그래서 스파르타 공작이라는 칭호를 쓴 왕세자는 콘스탄티노스 1세가 유일하다.
3.1. 칭호
3.1.1. 현존하는 군주국
- 영국 - 웨일스 공(Prince of Wales)
- 스페인 - 아스투리아스 공(Príncipe de Asturias)
- 네덜란드 - 오라녀 공(Prins van Oranje)
- 벨기에 - 브라반트 공작(Duc de Brabant)
- 덴마크, 스웨덴, 노르웨이 - 왕세자(Kronprins)
3.1.2. 과거의 군주국
- 포르투갈 왕국 - 브라질 공(Príncipe do Brasil)[97] → 알가르브 공(Príncipe do Algarve)[98]
- 그리스 왕국 - 디아도코스(Διάδοχος)[99]
- 루마니아 왕국 - 알바이울리아 대공(Mare Voievod de Alba Iulia)
- 불가리아 왕국 - 터르노보 공(Княз Търновски)
- 브라질 제국 - 그라오파라 공(Príncipe do Grão-Pará)
- 이탈리아
- 나폴리 왕국, 양시칠리아 왕국 - 칼라브리아 공작(Duca di Calabria)
- 사보이아 공국, 사르데냐 왕국, 이탈리아 왕국 - 피에몬테 공(Principe di Piemonte)[100]
-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 황태자(Kronprinz)
- 보헤미아 왕국 - 모라바 변경백(Moravský markrabě)
- 러시아 제국 - 체사레비치(Цесаревич/Tsesarevich)
- 프랑스
- 프랑스 왕국 - 도팽(dauphin)
- 프랑스 제1제국 - 로마 왕(Roi de Rome)
- 7월 왕정 - 왕세자(Prince royal)
- 프랑스 제2제국 - 황태자(Prince impérial)
- 독일 제국 - 황태자(Kronprinz)
4. 기타
[1] 사기 권10 효문본기, 사기 권118 회남형산열전, 한서 권44 회남형산제북왕전.[2] 고려사, 고려사절요 등의 기록 상 혜종, 경종, 성종 세 사람이 정윤에 봉해졌다.[3] 기록상으로 위만조선에서 '우거가 항복을 청하고 태자를 보내어 말을 바치게 하였다.'라는 기록이 확인된다.[4] 갑오개혁 이전의 조선에서는 세자는 저하, 세자가 아닌 왕자는 대감이라고 달리 불렀다.[5] 독립신문 1897년 1월 9일 토요일# 및 1897년 7월 31일 토요일#[6] 황제-친왕-세자 이며 일본의 경우에는 천황-친왕(父)-친왕(子)으로 이어지다가 천황의 증손 대부터 왕이 된다. 조선은 국왕-대군-군이다. 조선의 경우,친왕급 예우를 받았지만 중국의 왕급 귀족들과 조선왕이 사용하는 경칭이나 예법이 상당히 다르다. 현실적으로 조선왕은 작위보다는 군주로서의 성격이 강해서 예법에 의하면 황제만이 사용할 수 있는 용어들을 많이 혼용하거나, 따로 조선만의 용어를 만들어내기도 한다. 그래서 예법에서 규정한 제후국의 그것들과는 상당히 차이가 있다.[7] 중국과 일본에는 저하라는 표현이 없다. 저하는 한국만의 고유 호칭이다.[8] 고구려의 경우에 삼국사기 고국원왕 10년 왕세자 칭호와 영류왕 치세기 그의 태자 고환권이 보인다. 그러나 이것이 왕위 계승자에 대한 호칭인지는 불명. 정론은 고국원왕의 계승자 소수림왕은 340년 즈음에 태어났을 거라고 추정하기 때문에 시기상 계승자인 소수림왕이 아닐 경우가 크다. 그렇기에 원 (元)태자는 요절 했을 가능성이 있다. 마찬가지로 영류왕의 경우도 그의 후계자가 보장왕이었던 것을 보면 환권이라는 태자는 요절했을 가능성이 있다. 참고로 보장왕은 영류왕의 아들이 아닌 조카다. 환권은 중국측에서는 태자라고 기록 했지만 삼국사기에서는 세자라고 기록되어 있다. 공교롭게도 두 사람 전부 왕위에 오르기 전에 요절 한 것으로 보인다. 이를 보아선 당대의 중국왕조와 고구려는 태자/세자라는 용례를 특별히 신경쓰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9] 일본 학계에서는 조공책봉과 연호를 연계시켜 칠지도에 있는 원문에 사용된 세자라는 칭호를 이용하여 중국 연호라고 주장하고 더 나아가 아예 동진에서 제조된 도검이라고 주장하는 경향성이 강하며 이는 하마다 고사쿠, 모리 기미유키 등을 위시한 일본사학계에의 통설이다.[10] 이 때 모든 칭호를 한 단계 낮게 바꿨다. 그렇기에 후(后)는 비(妃)로, 비는 빈(嬪)으로, 태(太)는 대(大)나 세(世)로 교체했다. 즉, 왕후는 왕비, 태왕태후는 대왕대비, 태자는 세자라 했다. 대군·부원군·군 등도 공(公)·후(侯)·백(伯) 등의 작위를 사용할 수 없어서 격을 낮추기 위해 만든 것이다.[11] 다만 이 기준이 워낙 애매한데 보통은 여덟살이라고 하지만 인종은 여섯살에 세자가 되었다. 심지어 사도세자는 아예 1~2세때 세자가 되었다.[12] 왕세자는 저하, 마마가 모두 허락되었으나 이외의 왕자는 모두 자가였다. 이들을 절대 마마라 부르면 안 된다. 부르면 역모...[13] 양녕대군처럼 엄청난 막장일 경우.[14] 정실부인의 장남[15] 단적으로 세종은 생전에 아예 세자(문종) 뿐 아니라 세손(단종)도 봉해놓았는데 이 역시도 적장자 다음은 적장손이라는 원칙에 따른 것이다. 심지어 진짜로 적장자 다음은 적차자라면 세조는 계유정난을 일으킬 필요도 없었다.[16] 남자로 태어나는 조건으로[17] 상속자가 사망할 때 직계비속이 상속하는 것.[18] 물론 정조는 의소세손이 죽은 이후에 태어났기 때문에(의소의 몰년과 정조의 생년이 1752년으로 같다), 생전에 차남 취급을 받은 적은 없었다고 봐도 된다.[19] 이방우-이방과, 양녕대군-세종대왕, 덕종(조선)-예종(조선), 소현세자-효종(조선) 등.[20] '특수 상황'이 정상적인 적장손 계승보다 많기는 하지만, 애초에 세자의 사망이라는 상황 자체가 흔히 일어나지 않는 비상 사태이다.[21] 즉 단순한 유고가 아닌 폐위이므로 그 가계 자체가 대종으로서 자격을 잃은 것으로 간주되었다. 이러면 아들은 아버지의 지위를 자연계승하는 게 아니라 아버지를 제껴버린 꼴이 되기 때문이다. 사도세자의 폐위와 비슷한 상황으로 볼 수도 있지만 이 때는 이미 이산을 세손으로 책봉해놓은 상태였고 그 가계는 효장세자 아래로 입적시켜 잇게 했으며, 어떻게든 폐세자를 죽이는 데 성공하자 기다렸다는 듯 그 신위를 회복시켜주었다.[22] 길게 말할 것도 없이 월산군이든 잘산군이든 어린 세손과 단종(조선)은 아주 좋은 비교대상이 된다. 결국 이렇게 왕위를 물려받은 예종 역시 자기 아들인 제안대군에게 자리를 물려주지 못하고 다시 형의 아들에게 왕좌가 넘어간다.[23] 인조실록 46권, 인조 23년 윤6월 2일 임오 1번째기사[24] 왕비라고 기술되어 있었는데 왕비는 어디까지나 현직 왕의 정실부인일 뿐이다. 애초에 왕이 수렴청정을 받아야 할 정도의 나이라면 그 아내도 당연히 어리다.[25] 이 서열은 당연히 나이 등 연공서열에 따라 달렸다. 단적으로 성종 시기, 대비의 서열은 세조의 아내였던 정희왕후가 1등이었고 다음은 성종이 어머니인 인수대비 다음이 예종의 아내였던 안순왕후였고 그래서 정희왕후가 수렴청정을 했던 것인데 정희왕후가 1등인 이유는 인수대비와 안순왕후는 각각 덕종(의경세자), 예종의 아내였지만 정희왕후는 의경세자와 예종의 어머니였다. 즉 인수대비와 안순왕후는 모두 정희왕후의 며느리였던 것. 이러니 당연히 정희왕후가 1등일 수밖에[26] 단 왕의 할머니나 어머니라 해도, 후궁은 수렴청정을 할 수 없었다. 정실인 대왕대비/대비만이 수렴청정을 할 수 있었다. 또 군주의 어머니와 큰어머니가 있으면 큰어머니가 더 서열이 높겠지만 어머니가 수렴청정 한다[27] 이 사례가 조선이 건국된 후 처음으로 왕세자 책봉 없이 왕으로 즉위한 사례이다.[28] 사후에는 왕후(王后).[29] 당시 명 황태자였던 주후조가 만 0세에 책봉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중국 역시 이렇게 어릴 때 책봉하는 경우는 드물었고 주후조의 경우는 아버지 홍치제가 스물 넘어 본 귀한 아들이라 곧바로 황태자로 책봉해버린 것이었다. 다만 모든 중국 역사가 이런 것은 아니고 후한 말기에 영제 유굉은 자기 아들들 중 유변과 유협 중 누굴 황태자로 책봉할 지 결정하지 못하고 죽는 바람에 하진이 사실상 날치기에 가깝게 유변을 황태자 없이 바로 황제로 즉위시켰다. 하지만 십상시의 난을 진압하러 여러 군웅들이 낙양에 왔는데 그 중 하나인 동탁이 정권을 장악한 이후 유변을 폐위시킨 뒤 유협를 즉위 시켰다.[30] 단종처럼 세손이었지만 아버지인 세자가 살아있던 경우는 제외한다. 단종은 조부 세종이 금상으로 있고 아버지 이향이 아직 세자였을 때 세손으로 책봉되었고, 아버지가 문종으로 즉위한 후에 세자로 진봉되었다.[음력] [사망] [33] 즉위 후 피휘를 위해 이경(李曔)으로 개명[즉위] [35] 정종의 동생이라 왕세제가 되어야 맞지만, 정종이 "방원 아우를 아들로서 삼노라"라고 선언하고 왕세자로 책봉해주었다.[즉위] [폐위] [즉위] [즉위] [즉위] [사망] [즉위] [즉위] [폐위] [즉위] [사망] [즉위] [48] 생모는 공빈 김씨[폐위] [사망] [즉위] [즉위] [즉위] [즉위] [55] 생모는 희빈 장씨[56] 왕세제[즉위] [58] 생모는 숙빈 최씨[사망] [60] 생모는 정빈 이씨[사망] [62] 생모는 영빈 이씨[63] 왕세손[즉위] [65] 1759년 세손에 책봉되었고 1762년에 부친 사도세자가 죄인이 되어 사사되었다. 이후 정통성과 왕위계승권을 유지하기 위해 조부 영조에 의해 1764년에 백부 효장세자의 양자가 되었으며 왕위 계승 서열 1위가 되었다.[66] 생부는 사도세자[67] 생모는 혜빈 홍씨[사망] [69] 생모는 의빈 성씨[즉위] [71] 생모는 수빈 박씨[사망] [73] 왕세손[즉위] [75] 세자였던 부친 효명세자 사후 세손으로 책봉되면서 왕위 계승 서열 1위가 되었다.[즉위] [77] 왕세자(1875. 03. 25. ~ 1895. 01. 12.) → 왕태자(1895. 01. 12. ~ 1897. 10. 12.) → 황태자(1895. 10. 12. ~ 1907. 07. 19.)[78] 황태제가 되어야 하는 것이 맞지만, 순종이 조선 초기에 태종이 왕세자로 책봉된 예를 들어 동생인 이은을 황태자로 책봉했다.[경술국치] [80] 생모는 순헌황귀비[81] 이들은 근대의 혁명이나 전쟁으로 인해 탄생한 황제들로서 그 이전의 봉건적인 군주들과는 차이가 있다.[82] 다만 제정을 연 아우구스투스의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 시대에는 가문의 개인 성씨 자체가 카이사르였기 때문에 굳이 카이사르 칭호를 부여하지 않았다. 따라서 아우구스투스의 직계혈육들(가이우스 카이사르, 루키우스 카이사르, 게르마니쿠스, 드루수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티베리우스 게멜루스)과 양자 티베리우스, 아우구스투스의 증손자 가이우스(칼리굴라)의 경우에는 공화정 전통에 따라 이를 유언장과 원로원을 통한 특권 수여 특별법을 통해 부여됐으며, 굳이 하나를 명시적으로 줄 경우에는 프린켑스 유벤투티스나 호민관 특권, 집정관 대행권한 등을 수여했다. 티베리우스 게멜루스는 가이우스 카이사르, 루키우스 카이사르와 마찬가지로 프린켑스 유벤투티스를 수여받았다.[83] 예를 들어 덴마크에선 확정 상속인에겐 Kronprins til Danmark(Crown Prince of Denmark) 작위를, 추정 상속인에겐 Arveprins til Danmark(Hereditary Prince of Denmark) 작위를 주었다. 이는 아주 먼 방계 친척이 아닌, 군주의 친동생이라도 마찬가지였다. 가장 최근에 Arveprins til Danmark 작위를 받은 이는 現 덴마크 군주인 마르그레테 2세의 숙부이자 프레데리크 9세의 남동생인 크누드 왕자였다. 이후 프레데리크 9세가 왕위 계승법을 수정하면서 마르그레테 2세가 덴마크 여왕으로 즉위했다.[84] 이후 2015년 계승 법칙이 아들딸 가리지 않고 절대적 맏이 상속법으로 바뀌지만, 그 전에 태어난 찰스의 장남 웨일스 공 윌리엄의 항렬까지는 구법이 적용된다. 다만 찰스 3세 본인과 윌리엄 왕세자, 윌리엄의 장남 웨일스의 조지 공자까지도 큰아들이자 모든 자녀들 중 맏이인지라 별일이라도 생기지 않는 한 조지 왕세손 세대까지는 구법으로도 신법으로도 확정상속인 지위에 흔들림이 없게 된다.[85] 예를 들어 이탈리아 왕국에서 움베르토 2세가 태어나기 전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의 추정 상속인은 사촌이었던 아오스타 공작 에마누엘레 필리베르토였다.[86] 이 단어는 왕세녀가 아니라 왕세자비의 칭호로 쓰인다. 다만 찰스 3세의 배우자 카밀라 파커 보울스는 사용하지 않았다.[87] 잉글랜드 왕위 후계자의 작위.[88] 잉글랜드 국왕의 장남의 작위.[89] 스코틀랜드 왕위 후계자의 작위.[90] 스페인의 경우 추정상속인도 이 칭호를 받는다. 따라서 역대 아스투리아스 공이 매우 많다.[91] 아라곤 왕국의 후계자 작위.[92] 나바라 왕국 후계자 작위.[93] 덴마크가 노르웨이를 속주로 두던 시절에는 왕세자를 노르웨이 공(Prins til Norge)으로 책봉했었다.[94] 대립교황 펠릭스 5세로 알려진 아메데오 8세가 사보이아 가문의 후계자들을 위해 만든 유서 깊은 칭호이다.[95] 움베르토 1세와 움베르토 2세는 피에몬테 공을,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는 나폴리 공(Principe di Napoli)을 받았다.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만 예외적으로 나폴리 공 칭호를 받은 것은 나폴리에서 태어나서 그렇다. 할아버지인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가 남부 이탈리아인들의 민심을 사로잡고자 수여했다. 여담으로 전 이탈리아 왕위 요구자인 비토리오 에마누엘레는 나폴리 공을 칭했으며 그의 아들 에마누엘레 필리베르토는 베네치아 공(Principe di Venezia)을 칭하고 있다. 이들과 별도로 이탈리아 왕위 계승권을 주장하는 분파인 아오스타 공작가의 경우, 현 6대 공작 아이모네의 장남 움베르토는 전통적으로 사보이아 가문 후계자들이 사용하던 피에몬테 공을, 차남 아메데오는 5대 공작이 생전에 (명목상) 수여한 아브루치 공작(Duca degli Abruzzi)을 칭하고 있다.[96] 원래 이 도시는 헝가리가 오스만 제국의 지배를 받던 시기 헝가리인의 문화와 민족정신을 보존한 트란실바니아 공국의 수도였던 곳이다.[97] 브라질 독립 이전[98] 브라질 독립 이후[99] 콘스탄티노스 1세만 예외적으로 스파르타 공작(Δούκας της Σπάρτης)으로 책봉되었다.[100]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만 나폴리에서 태어나 예외적으로 나폴리 공(Principe di Napoli)으로 책봉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