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0-03-12 17:31:31

고종(고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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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23대 군주
高宗 安孝大王
고종 안효대왕
묘호 고종(高宗)
시호고려 안효대왕
(安孝大王)
충헌왕
(忠憲王)[1]
절일 경운절(慶雲節)
성씨 왕(王)
진(瞋)[2] / 질(晊) → 철(㬚)
대명(大明) / 천우(天祐)
왕후 안혜태후(安惠太后)
왕태자 왕정(王禎)
왕태손 왕심(王諶)
왕자 왕창(王淐)
부왕 강종 원효대왕
모후 정강원덕태후(貞康元德太后)
능호 홍릉(洪陵)[3]
사망지 고려국 강도(江都)[4] 강화군(江華郡) 신하 유경의 자택
생몰연도 음력 1192년 1월 18일 ~ 1259년 6월 30일
양력 1192년 2월 3일 ~ 1259년 7월 21일 (67세 185일)
재위기간 음력 1213년 8월 무인일 ~ 1259년 6월 30일
양력 1213년 8월 27일 ~ 1259년 7월 21일 (45년 339일)
1. 소개2. 시호, 묘호, 존호3. 생애
3.1. 여몽전쟁3.2. 강도(江都)에서3.3. 최후
4. 평가5. 기타6. 대중 매체에서7. 관련 문서

1. 소개

사신(史臣)이 말하기를: “고종(高宗)의 시대에는 안으로는 권신(權愼)들이 서로 이어가며 국정을 마음대로 운영하였고, 밖으로는 여진(女眞)과 몽고(蒙古)가 군대를 보내어 해마다 침입하였으므로 당시 나라의 형세는 매우 위태로웠다.

그러나 왕은 조심스러운 마음으로 법을 지키고 모욕과 치욕을 참아냈기에 보위(寶位)를 보전할 수 있었으며 마침내 정권이 다시 왕실로 복귀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적이 오면 성을 굳게 지켰고, 적이 물러가면 사신을 보내 우호 관계를 맺었다. 심지어 태자를 보내어 예물을 가지고 친조(親朝)하게 하였으므로 마침내 사직(社稷)이 훼손되지 않았고 왕업을 오래도록 전해줄 수 있게 되었다.”고 하였다.
- 고려사 세가 권제24.

고려 왕조의 제 23대 군주. 묘호는 고종(高宗), 시호는 고려가 올린 안효대왕(安孝大王), 원나라가 내린 충헌왕(忠憲王)이 있다. 보통 원나라의 시호와 고려의 시호를 합쳐서 충헌안효대왕(忠憲安孝大王)으로 불린다.

휘는 철(㬚). 자는 대명(大明) 혹은 천우(天祐). 강종 원효대왕의 아들. 권신 최충헌의 적(嫡)매형이자 사돈 간이기도 하다.[5]

2. 시호, 묘호, 존호

고려가 자주적으로 올린 공식 묘호는 '고종(高宗)'이다. 고종이란 묘호는 고조(高祖) - 고종(高宗) 高 자 세트로서 상당히 좋은 묘호인데 한 태조 유방의 존칭이 고조이며 청 건륭제의 묘호도 고종이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선 고종 시호를 받은 임금은 죄다 국가가 망하기 직전일 때의 임금들이다 보니 영 취급이 안좋다.

시호는 두가지가 있다. 하나는 고려의 천자로서 받은 독자적 시호인 '안효대왕(安孝大王)'. 시호가 태자 원종이 올린 시호뿐인데 이는 고려가 워낙에 혼란스럽고 원의 간섭을 받다보니 추가적인 시호를 올리지 못한 것이다.

두번째 시호는 '충헌왕(忠憲王)'. 원이 충선왕의 증조부이자 충렬왕의 조부이니 원의 제후로서 삼대조를 봉해준 것이다.

고종, 그의 태자 원종은 묘호를 받고 고려의 천자식 종묘[6]에 안치된 마지막 두 군주이다. 누구의 제후로 안치된 것이 아니기에 원이 '하사한' 시호도 없었지만 손자 충렬왕의 시호를 정할 때(1310년) 원은 충렬왕 포함 그의 윗세대 두명에게도 보냈다. 이는 원이 그들을 신하로 취급하는 정치적 계산을 한 것이다.

고종은 재위 기간 동안 천자(天子)[7], 만년천자(萬年天子)[8], 지존(至尊), 성황(聖皇)[9], 아황(我皇), 제(帝) 등으로 불리었다. 고려는 자국 내에서 천자국으로 군림하였으며 이 점은 여진, 거란, 몽고 등 외부의 '야만족'에 대해 보수적으로 변하게 되는 요인 중 하나가 되었다.

3. 생애

고려의 역대 왕태자
왕지[10] 왕철 왕정
1192년 1월 18일 아버지 강종이 태자이던 시절에 태어났다. 만 5살 때인 1197년, 할아버지 명종이 최충헌에 의해 폐위되면서 아버지와 어머니는 모두 강화도로 유폐되었다. 어린 고종은 어떻게 됐는지 고려사에 등장하지 않는다.

1212년 아버지가 최충헌에 의해 국왕으로 옹립되면서 서해도 풍주 안악군에서 다시 개경에 돌아왔다. 이후 만 20세의 나이에 태자로 책봉된다. 고령의 아버지가 재위 1년 8개월만에 승하하면서 22세 때 천위(天位)에 오른다.[11]

재위 2년(1215년)에 아버지를 태묘에 모시면서 선조들[12]에게 시호를 추가하고 위봉루에서 사면령을 내리며 국정운영을 본격적으로 시작한다. 이규보는 고종에게 "성황조향태묘송(聖皇朝享太廟頌)"을 지어 올리며 고종을 "성황(聖皇)", "제(帝)"라고 찬양했다.[13] 고종은 왕실 제사를 크게 치루며 권위를 회복하려 한듯 하지만 고종이 움직일 때 최충헌이 어가에 같이 타는 등 최충헌에 계속 끌려다녔다.[14]

재위 3년(1216년)에 금나라에 반란이 일어나고[15] 가뭄이 드는 등 나라 꼴이 막장이 되자 금나라가 구원 요청을 하기 위해 사신들을 보내지만 모두 무시하고 차단했다. 하지만 금나라 사람들이 곡식을 사기 위해 온갖 재화를 들고 고려 국경에 와서 당시 밀무역이 흥했다고 한다.

1216년 8월 금에서 반란을 일으킨 거란족들이 고려에도 선전포고를 해오자 군대 인사를 재조정 했고 9월달부터 작은 전투가 벌어진다. 또한 이 때 "달단군", 즉 몽골군이 금나라와 전투를 벌이기 시작했다는 정보가 입수된다. 거란 유민들의 고려 침공을 참고.

1217년엔 거란군이 대대적으로 침공해와 황주[16]가 속절없이 공격당했다.

재위 5년(1218년)은 금나라 반란군[17]후요까지 침공하며 북방이 개판이 되었다. 그리고... 12월에 몽골군이 포선만노와 힘을 합쳐 거란을 죽인다는 이유로 고려 북방에 들어왔다.

1219년 1월엔 몽골과 고려의 정식 접촉이 성사됐다. 하지만 몽골의 장군들은 무례하고 고려의 예법을 몰라[18] 그냥 자신들의 털옷과 활을 찬 채로 고종에게 다가가 손을 잡으려 했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로 고종의 안색이 변하고 좌우가 당황했을 때 한 신하가 "감히 추한 노예(醜虜)가 지존(至尊)에게 다가갈려 하다니!"[19] 라고 외치고 나가라고 하자 결국 몽골 장군들은 고려 예법대로 고려식 의복을 입고 읍을 했다.[20]

또한 1219년 9월 20일 5대 무신정권 집권자이자 초대 최씨 집권자였던 최충헌이 죽고 최우가 집권자가 된다.

이후 1221년 9월에 몽골 사신이 또 오고 늘 했던대로 오만하게 굴자 고종은 몽골을 내쫓고 사신을 더이상 받지 않으려 했지만 신하들이 반대해 화를 냈다고 한다. 고종은 고려국왕이 아무리 왕권이 추락했다고 해도 고려 안에선 천자(天子)로서 군림했으니 몽골의 무례를 참기 힘들었을 것이다.

재위 10년(1223년)에 황태후(皇太后)를 태황태후(太皇太后)로 올리고 사면령을 내렸다. 이 태황태후는 당시 사망한 희종의 모후 선정태후와 생존해 있던 고종의 모후 원덕태후 둘 중 한 명으로 보인다.

재위 11년 ~ 12년(1224 ~ 1225년)에 고려와 몽골 간에 문제가 생긴다. 1224년 1월에 신하들이 최우의 집에서 논의하여[21] 몽골 사신에게 예물을 쥐어주고 화친의 뜻을 담아 돌려보낸다. 근데 이 놈들은 이상하게 비단 등을 국경에서 버리고 자기들이 요구했었던 수달 가죽만 들고 간다. 그리고 1225년 1월, 몽골로 돌아가던 길에 몽골 사신들이 강도에게 죽는다. 대체 누가 죽였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고려는 진상확인을 한 뒤 강도에게 죽었다고 전했으나 몽골은 이를 믿지 않고 결국 단교했다. 이 사건은 나중에 길고 긴 여몽전쟁의 도화선이 된다.

3.1. 여몽전쟁

고종 4년인 1216년부터 몽골의 고려 침입이 시작되었다. 자세한 것은 여몽전쟁 문서 참조.

고종의 치세는 최씨 일가에게 끌려다니는 굴욕, 몽골과의 전쟁 이 두 가지로 표현된다.

이 때의 유일한 업적이 있다면, 이 시기에 고려대장경[22]을 조판했다는 점이다. 그런데 비용은 최우가 댔다. 사실 뭘 하려고 했어도 최씨 세력이 정권을 잡고 있어서 할 수 있는게 없긴 했다.

3.2. 강도(江都)에서

최우에게 강제로 강화도로 끌려간 고종은 섬 밖으로 나오지 못하고 계속 강화도에 머무를 수 밖에 없었다. 고종은 강도(江都) 고려궁지에 살면서 온갖 도량을 벌인다. 도량은 불교 기도식인데 역대 고려 국왕들이 자주 행했지만 고종만큼 자주 한 국왕이 없다. 아마 국난을 기도로라도 풀길 바랬을 것이다.

천병신중(天兵神衆) 도량, 공덕천(功德天) 도량, 화엄신중(華嚴神衆) 도량, 인왕(仁王) 도량, 제석천(帝釋天) 도량[23] 등. 보통 도량은 승려가 기도문을 읽는데 몇몇 도량은 고종이 직접 기도를 했다고 한다.

1249년 11월 6대 무신정권 집권자이자 2대 최씨 집권자였던 최우가 죽고 최항이 집권자가 된다.

1254년 7월, 고종 재위 41년 째에 강화도를 잠시 나와 승천부(昇天府)[24]에 있는 궁궐[25]로 가 몽고의 사신들에게 자신이 강도에서 나오겠다고 언급한다.

1257년 4월 7대 무신정권 집권자이자 3대 최씨 집권자였던 최항이 죽고 최의가 집권자가 된다.

최의는 1년 정도 밖에 정권을 유지하지 못하고 1258년 3월에 죽고 김준이 9대 집권자가 된다.

1258년 5월, 8월에 다시 바다를 건너 승천부의 궁궐로 가 몽골 사신들을 접견했다.

3.3. 최후

강화협정에 따라 태자 왕전이 원나라에 입조하려 간 사이 몸이 좋지 않아서 신하 유경의 집에 머무르고 있었다가 결국 1259년 6월 30일에 붕어하였다.

그의 유조(遺詔)는:
"내(余) 덕은 박한데 부담은 중하니, 병이 날로 심해진다. 생각컨데 왕위(王位)는 오래 비워 놓을 수 없다.

내(予) 원자(元子)는 덕이 위까지 알려질 정도니 자리를 이어받도록 명한다.

너희 관료와 부서는 사왕(嗣王)의 령을 듣도록 하되 사왕(嗣王)이 떠나있을 기간 동안은 군국(軍國)의 임무는 태손(太孫)이 처리하라.

산릉의 제도는 검소하게 하고 제사는 삼일안에 끝내도록 하라."
- 고려사 고종 세가 중. 임금의 마지막 조령(詔令)이다.

당시 무신 집권자였던 김준이 고종의 둘째 아들인 안경공 왕창을 왕위에 올리려고 했으나 여러 신하들이 거부한데다 고종이 죽기 직전 남긴 유조(遺詔)에 의해 태손 왕심이 임시로 나랏일을 맡게 되었고, 태자는 그 이듬해인 1260년에 귀국해서 정식으로 왕위에 오르게 된다.

4. 평가

고려 왕 중 가장 재위기간이 길었다. 무려 46년.[26] 하지만 그 기간 내내 권력을 최충헌을 비롯한 최씨 정권에게 빼앗긴 채 그들의 눈치를 봐야 했고 수도를 개경에서 강화도(강도)로 옮기며 7번에 벌어진 몽골 침략에 시달렸던 왕이다.[27][28] 그래도 최충헌 집권 때 5살로, 최씨 정권의 흥망(최충헌, 최우, 최항, 최의 4대)을 모두 지켜본, 풍운의 왕이다.[29]

강화도에 들어와서 나오지 못한 채로 승하했다. 재위 기간 후반부 대부분을 몽골과의 전쟁으로 보낸 인물이다. 최씨 정권이 망하자 심한 낭비로 이를 질책하는 관리들의 상소가 좀 있었다고 한다.[30]

그런데, 고종의 업적 중 저평가 받는 부분이 있는데, 그것은 자신의 아들인 태자를 몽골에 입조토록 한 점이다. 고종은 9차에 걸친 몽골의 침입을 몸소 겪으면서 더이상의 전란을 막기 위해 화약을 맺도록 한 것이다. 당시 고종 본인이 나이가 많고 건강도 좋지않아 직접 입조할 수 없어 태자 왕정(훗날 원종)을 입조토록 했고, 이 부분은 몽골도 이해를 해줬다. 무인들의 반발을 누르고 오랜 전란의 시대를 마감케 하였지만, 그것이 항복으로 평가되기에 저평가되지 않았나 싶다. 무엇보다 고려 고종은 오랜 기간을 버티었고 그 재위동안에 경험을 살려서인지 외세의 도움없이 무오정변 때 간접적으로나마 개입하여 자체적으로 최씨무신정권을 종식시킨 인물이 되었다. 그러나 하필 상대는 여기에 가담한 김준이었으니 문제였다.

동국통감에서는 그야말로 붙어사는 왕으로 취급받지만 분수를 지켜 장기간의 재위를 했다는 점을 빌려 사직을 지킨 마지막 왕이 되었고 그로 인해 권신들을 자체적으로 제거한 것은 좋았으나 문제는 장기간의 재위동안 권신들의 연이은 권력 독점에 손놓고 있었다고 평한다. 최우가 죽기 일보 직전에도 최항이 연이에 집권하기 직전에 손도 못썼다. 또한 고려 원종에 대한 견제를 다 놓아 안경공이 원종과 사이가 매우 안좋았고, 결국 안경공이 왕에 올랐으나 폐위되어 원종이 왕에 올라 안경공이 제거되는 상황을 만들고 그 사이 숱한 역모와 반란이 터지는 등 후사 문제를 말끔히 해결짓지 못했다. 조선 인조와는 상반되는 길을 걸었으나 오히려 고종은 그 반대로 나간 덕택에 고종 나름대로 독이 되는 상황을 스스로 만들었다고 볼 수 있을듯. 오랜 재위를 바탕으로 무오정변을 이룩하는데 간접적 영향을 주며 내정면에선 원종보다 그나마 나았으나 권신들이 대를 이어 나라를 파탄내도 지켜만 보았고 무오정변 이후 왕권을 공고히 할 기회를 놓쳤다는 점에서 큰 평가를 받지 못하였다. 대신 외교에선 괄목한 성과를 거두었다. 이 점에서 보면 조선의 중종과 꽤 비슷했다. 외치에서 성과를 거두고 권신들의 농락 속에서 재위를 오랜 기간 버틴 것은 높은 평을 받으나 단지 그뿐이었고 고려에선 재위기간을 놓고 볼때는 잘하지도 못하지도 않은 평범한 군주였고 그래서 평타만 치던 왕이었다. 이점은 고려 인종과 비슷했다. 무엇보다 하필 이 시기가 무신정권이었고, 여몽전쟁이 터진 시점에서 본다면 꽤 안습의 군주였다.[31]

5. 기타

  • 2019년 11월 고종이 강화로 수도를 천도한 기념으로 강화군 송해면에서 강화천도공원을 조성하였다

6. 대중 매체에서

파일:attachment/이규보/이규보.png
징기스칸 4 일러스트[34]
  • 코에이징기스칸 시리즈에서 고려 군주로 자주 등장한다. 능력치는 전반적으로 C 대라 안습. 그나마 매력이 B로 상대적으로 높은 게 위안이다. 원조비사 정발판에서 원판의 희종 대신 플레이 가능 군주로 선택이 되는데. 고증에서 오류를 겪고 있다. ## 징기스칸 4에서는 1229년 시나리오에서 고려 군주로 등장 하는데 명종(고려)공민왕과 달리 35세의 젊은 나이로 시작 하며 10살의 원종(고려)이 왕자로 있기 때문에 빨리 자식을 만들지 않아도 된다. 원종과 김경손은 공예소를 만들어 돈을 벌고 이규보를 간첩으로 보내서 금나라의 완안진화상몽골 제국의 한인 장수로 고종과 문화권이 같아서 빼내기 쉬운 야율초재, 장유, 사천택, 곽간[35]을 빼내고 이 게임 최고의 문관인 야율초재도 간첩 유닛으로 돌려서 회령에 있는 젊은 쿠빌라이, 훌라구 등을 고려로 영입하면 수월하다.
  • KBS 대하드라마 무인시대에서는 오현철이 연기했다. 태자 시절에서는 최충헌의 위세에 밀려 황실의 권위를 세울 수가 없다는 사실을 우려하기도 했지만, 황위에 오른 뒤에는 최충헌의 뜻을 거스르지 않는 얼굴마담에 불과하게 된다. 여담으로 이 배우는 태조 왕건에서 왕건의 어린 시절을 연기하기도 했는데, 최충헌 역이 태조 왕건에서 종간을 맡았던 김갑수였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 MBC의 사극 무신에서는 선덕여왕알천으로 유명한 배우 이승효가 연기했다. 실제 역사대로 무신정권에 눌려 별다른 힘을 내지 못한 유약한 군주로 그려진다. 정치적 실권은 최씨 상국들이 대를 물려가며 독점했고, 고종의 곁에는 이장용과 그 외 소수의 신하, 환관들만이 있을 뿐. 이 때문에 몽골과 전쟁을 시작할 때, 최우가 수도를 강화로 옮길 때, 김약선이 역모 누명을 쓰고 숙청될 때, 최항이 권력을 승계 할 때 등등 극중 중요한 고비가 있을 때마다 황실에 불똥이 튀지는 않을지 전전긍긍하는 모습을 보인다.

7. 관련 문서



[1] 고려사 고종세가에 따르면 처음 시호를 올릴 때 원의 시호는 없었는데 50년 뒤인 1310년에 강제로 보냈다.[2] 눈목 변 대신 날일 변[3] 인천광역시 강화군 강화읍 국화리[4] 현 인천광역시 강화군으로 천도하면서 원 양광도 강화현이었던 행정단위를 강도 강화군으로 확 올렸다. 도(都)는 광종이 처음 사용한 지역단위로 경(京)보다 더 높은 의미로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성종 때 도(都)는 폐지됐지만 고종 때 다시 사용되었다. 별칭으로 강화경(江華京)이 있다.[5] 최충헌은 부왕 강종의 서녀와 재혼하였는데, 아들 원종의 장인이었던 김약선은 최충헌의 아들인 최우의 사위였다.[6] 칠묘제 구실 종묘.[7] 이규보 묘지명, 보한집 권하.[8] 동국이상국전집 17권.[9] 동국이상국집 성황조향태묘송.[10] 희종(고려)의 태자.[11] 희종이 폐위되고 강종이 올려지는 과정에서 고종을 왕위에 올리는 조건으로 강종과 최충헌 사이에 밀담이 오갔을 것이라는 의견도 있다.[12] 태조, 혜종, 현종, 선종, 숙종, 예종, 인종, 신종, 강종. 당시 고려 종묘가 천자식 9실 7묘제였기 때문에 9명에게 올렸고 사실상 당시 대표적 군주 전원에게 올린 것이다.[13] 동국이상국전집 19권 기록.[14] 최충헌의 중방이 조정을 마음대로 다루고 왕실의 건물을 부수는 등 만행은 여전했다.[15] 포선만노라가 동하를 세웠다.[16] 현 황해북도 황주시. 고려 초 황보제공, 신정왕후 황보씨, 천추태후, 헌정왕후, 황주량 등을 배출한 고구려계 황주 호족의 본거지이기도 하다.[17] 포선만노의 동하.[18] 당시 몽골은 그 어떤 나라도 막지 못하는 최강의 국가였으니 무례한건 당연(?)했고 고려와는 단절되어 있었으니 당연히 고려의 예법을 몰랐다.[19] 고려사 원문에 실제로 이렇게 기록됐다.[20] 원래 고종에게 절을 해야하지만 그러지 않았다.[21] 여전히 왕권이 회복되지 못한 상태임을 보여준다.[22] 현재 팔만대장경으로 유명하다.[23] 일반적으로 제석원에서 이루어졌다.[24] 원 정주(貞州)로 개경 개성부의 경기(京畿), 즉 부속 도시였다. 예종이 자신의 어머니인 명의태후의 고향이란 이유로 승천부로 떼어냈다.[25] 승천궐(昇天闕)이라 한다. 승천부에 있는 궁궐이라 승천궐.[26] 2위는 37년의 문종, 3위는 33년 혹은 34년의 충렬왕(충선왕에게 물려준 7개월의 공백기가 있었다). 한국사 전체를 보아도 8번째로 오래 재위했다.[27] 최항 집권기에는 말 그대로 개굴욕을 당하기도 했다. 당시 강화도로 도망갔던 최항은 미친듯이 술잔치를 열어제꼇는데 정작 고종 본인은 왕실 재산이 바닥나는 바람에 점심 식사를 줄이는 지경에 이르렀다. 게다가 이 일을 지시하기 위해 좌창별감 윤평(말 그대로 창고지기)을 불렀는데 윤평은 두세 번이나 쌩까고 오지 않았다. 그래도 왕이라고 고종은 분노하여 윤평을 파직시키려 했으나 '오늘 내쫒아도 내일이면 다시 복귀할 테니 이게 뭔 징계냐'라는 말과 함께 그만두었다. 이쯤 되면 진짜 허수아비보다도 못한 신세다. 동시에 최항이 고종을 얼마나 우습게보고 푸대접했는지 알수 있다.[28] 얼마나 최씨 정권에 쌓인 게 많았는지 후에 김준이 마지막 집권자 최의를 죽이고 이를 아뢰었을 때, 공을 치하하며 눈물을 흘렸을 정도.[29] 그의 할아버지인 명종도 같은 일을 겪었다.[30] 대궐을 나와 신하들 집에 머물면서 문을 걸어 잠그고 미친듯이 바둑과 술 잔치에만 빠져 들었다고 한다. 물론 당시 기준에서도 욕을 많이 먹었지만, 특이하게도 고려사의 사관은 '최씨 정권 밑에서 고생하다가 이제 살만해지니까 늙어 노망든 거니 적당히 까여야 된다'는 평가를 내렸다. 쉽게 말하면 좀 봐주자는 얘기.[31] 애초에 고종 자체가 최씨 정권의 초대 권력자인 최충헌이 아니었다면 왕위에 오르지 못할 인물이었다. 최충헌이 고종의 할아버지인 명종을 폐위시키면서 동시에 그의 아들이자 고종의 부왕인 태자시절의 강종을 강화도로 쫓아보내고 명종의 동생인 신종을 왕위에 올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후에 신종의 후계자로 왕위에 오른 희종이 최충헌에 대항하다가 역으로 폐위당한 뒤 강종이 즉위하면서 고종 역시 태자로써 왕위에 오를 수 있어졌다. 결국 즉위 초부터 권력기반이 전무했기에 4대 62년간 이어진 최씨정권의 만행을 막을 수 없었던 것이다. 희종도 권력기반이 전무한 상황에서 최충헌을 타도하려들다가 역으로 그에게 당하고 만다.[32] 고려 고종 46년, 조선 - 대한제국 고종 43년.[33] 생몰연도가 각각 정확히 660년 차이가 난다.[34] 그런데 고려의 문신 이규보과 동일한 얼굴이다.[35] 곽간은 동아시아 지역에서 재야로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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