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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FB200><colcolor=#670000> 고려 명종의 왕녀 수안궁주 | 壽安宮主 | |
출생 | 미상 |
사망 | 1199년 6월 23일 |
능묘 | 미상 |
본관 | 부계 - 개성 왕씨 모계 - 명주 김씨 |
부모 | 부왕 - 명종 모후 - 의정왕후 |
형제자매 | 8남 2녀 중 차녀[1] 동복 형제 - 강종 동복 언니 - 연희궁주 |
배우자 | 창화후 왕우[A] (昌化侯 王祐) |
자녀 | 1남 1녀 아들 - 수사공(守司空) 왕현(王泫) 딸 - 폐태자비(廢太子妃) 왕씨[A] |
봉호 | 수안궁주(壽安宮主) → 수안공주(壽安公主) → 수안궁공주(壽安宮公主)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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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고려 제19대 왕 명종과 의정왕후의 차녀.2. 생애
명종 3년인 1173년 4월 25일에 수안궁공주(壽安宮公主)로 책봉되어 명종 9년인 1179년에 창화백(昌化伯) 왕우(王祐)와 혼인한다. 이후 창화백 왕우는 이후 창화후(昌化侯)로 봉해진다.명종 10년인 1180년에 명종이 총애하는 궁녀 명춘(明春)이 죽자 슬퍼하였다. 명종은 순주(純珠)에 이어 명춘까지 또 죽으니, 후궁 중에서 마음에 드는 자가 없었다. 그래서 수안궁주와 연희궁주를 불러들여 여러 업무를 관장하고 밤낮으로 곁을 떠나지 못하게 하며, 가끔 한 이불을 덮고 같이 자기도 하는 등 아끼는 정이 말할 수 없을 지경에 이르렀다. 이에 사위인 창화후 왕우가 여러 달 동안 홀로 지내다가 분을 이기지 못하여 이혼하려고 했다.
명종은 이 소식을 듣고는 창화후 왕우를 불러 수창궁(壽昌宮)의 동쪽 공예태후의 행궁(行宮)에 거처하게 하고, 날마다 수안궁주로 하여금 평상복 차림으로 가서 다독거리게 하였다. 이후 11월이 되어서야 수안궁주를 자기 집으로 돌려보냈다. 이로 인해 명종이 왕우를 불러들여 수창궁 동쪽의 태후의 행궁에 머물도록 하면서 날마다 수안궁주가 평상복 차림으로 가서 왕우를 다독였고, 11월이 되어 수안궁주는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1199년 4월 24일에 달과 토성이 서로 침범하는 것을 본 정통원(鄭通元)이 점을 쳐보니, 6월 하순에 여주(女主)의 상사(喪事)[4]가 있을 것이라 했는데, 6월 계미일인 6월 23일에 수안궁주가 사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