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19 23:17:11

개성 왕씨

한국의 성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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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국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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開城 王氏
개성 왕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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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향 <colbgcolor=#fff,#191919>경기도 개성시
비조 고려 국조 원덕대왕
시조 고려 태조 신성대왕
집성촌 경기도 개성시
경기도 이천시 율면 오성리
충청북도 청주시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경상북도 영양군
인구 22,452명(2015년)
링크 개성왕씨중앙종친회

1. 개요2. 시조가 누구인가3. 역사
3.1. 고려시대3.2. 조선시대
3.2.1. 탄압3.2.2. 복권
3.3. 현황
3.3.1. 여계 후손
4. 인물
4.1. 고관대작4.2. 연예인4.3. 언론인4.4. 체육인
5. 기타
5.1. 용손 전설
6.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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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고려국성으로 고려 왕조 개창 이후 474년 동안 번성하였던 대한민국의 성씨 집단이다.

2. 시조가 누구인가

시조는 고려 태조의 증조부 국조로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실제 왕씨 성을 분명코 썼다고 확답할 수 있는 건 왕건의 부친인 세조부터가 고작이다.[1]

국조세조의 문서를 보면 알겠지만, 당시 왕건의 조상이 왕씨 성을 썼는진 확신할 수 없다. 《고려사》 <고려세계>에는 태조 왕건의 조상이 누군지 알기 어렵다며 《편년통록》, 《편년강목》과 이제현의 <논평> 두 주장을 모두 실었다.

두 주장을 요약하면 《편년통록》, 《편년강목》은 세조 용건 혹은 태조 왕건 대부터 왕씨 성을 썼다고 한다.[2] 반면 이제현은 국조 대부터 이미 왕씨 성을 써왔다고 주장한다.[3] 현실적으론 태조 왕건이 신라계 귀족이 아닌 고(구)려계 지방 토호란 걸 감안하면 원래 가문에 성씨가 없었을 가능성도 있지만 지방 토호라고 성씨가 무조건 없진 않았다. 일례로 견훤의 아버지 아자개도 속성이 이씨(李氏)고 원선이란 이름을 따로 갖고 있었다.[4][5]

무엇보다 왕건의 가족 내력으로 보았을 때, 왕씨(王氏) 성은 이미 전부터 쓰이고 있었던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왕건의 사촌인 왕식렴왕만세, 그리고 그의 삼촌인 왕평달이 고려의 건국과는 상관없이 이미 왕씨 성을 쓰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렇다 해도 이상할 건 없는 게 고려시대에 성씨 문화가 본격적으로 한반도에 정착하기 전까진 성씨 사용 자체가 적극적이지 않았기 때문에 성씨가 있는 가문이었더라도 성씨가 있다는 사실 자체만 알고 그냥 이름만 사용한 기록이 많다. 이 때문에 기록에 남은 삼국시대 귀족들조차도 당사자의 성씨가 전해지지 않은 경우가 아주 많다.

《편년통록》, 《편년강목》은 당나라의 숙종이 고려 \'의조'의 친부라 하지만, 이제현의 <논평>은 당 숙종이 고려 \'국조'의 친부라고 했다. 결국 둘 다 고려 왕씨 왕실이 당나라 이씨 황실의 직계 후손이란 걸 드러내고자 하는데, 이런 부분은 태조 왕건, 나아가 세조 용건, 의조 작제건 등 왕씨의 조상들이 신라 김씨들이 김일제의 후예를 참칭하는 것처럼 왕권의 신성성을 부여하기 위한 숭조 사업의 일환으로 보인다. 당장 북송의 서긍이 저술한 고려도경에서는 고려 왕실인 왕씨가 고구려의 대족(大族), 즉 큰 씨족 또는 귀족이며, 왕씨가 고씨를 대체하였다는 식으로 고려의 개창을 서술하고 있다.[6][7]

현재는, 고려 개국공신 삼중대광(三重大匡) 유금필(庾黔弼)의 딸로 고려 태조의 제9비인 동양원부인(東陽院夫人)의 아들 효은태자(孝隱太子)의 후손이 현존하는 개성 왕씨(開城 王氏)의 90% 이상을 차지한다.

3. 역사

3.1. 고려시대

지방의 유력 호족들과의 결혼으로 수가 많았던 왕건의 후손 상당수가 혜종~경종대의 왕위 다툼, 특히 광종대의 숙청에서 대거 살해되기는 했으나, 왕건의 아들 효은태자(孝隱太子)[8]의 자손이나 왕건의 손자 현종이 살아남았고, 특히 고려 왕조를 중흥시키고, 100여 년이 넘는 전성기의 서막을 연 명군 현종의 자손들은 매우 번창했다. 왕씨들은 고위 귀족과의 정략결혼이나 왕씨 일족간의 근친혼을 했고, 이는 고려 말까지 지속되었다. 그러면서 상당한 수로 늘어났으리라 여겨진다.

다만 왕통에서 이어지는 직계는 인종을 마지막으로 급격하게 쪼그라든다. 인종 이후 의종부터 장성할 때까지 성장하는 적자가 많아야 둘셋이었고 출신성분이 낮은 서자들만 많았다. 이런 왕자들을 스님으로 출가시키는 풍속에다, 무신정권과 몽골이라는 외부세력에 의한 권력다툼과 폐위 등이 더해져 차근차근 대가 끊어지기 시작해 우, 창왕을 폐가입진으로 왕씨 호적에서 파냈을 땐 창왕의 18촌(모계 9촌)이자 신종의 둘째 아들의 셋째 아들의 둘째 아들의 현손자인 공양왕이 왕위에 제일 가까운 왕족이었다.

3.2. 조선시대

3.2.1. 탄압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왕씨 몰살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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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조(盧珇)를 상장군(上將軍)으로 삼고, 노관(盧琯)을 대장군으로 삼았다. 〈이 사람들은〉 왕우(王瑀)의 두 아들인데 외가(外家)의 성을 따르게 하였다. 노조는 고려 왕조의 정강군(定康君)이다.
- 태조실록 2권, 태조 1년 12월 13일 기미 1번째기사 왕우 아들의 성을 외가를 따라 노씨로 하게 하다
고려 왕조에서 왕씨(王氏)로 사성(賜姓)이 된 사람에게는 모두 본성(本姓)을 따르게 하고, 무릇 왕씨의 성을 가진 사람은 비록 고려 왕조의 후손이 아니더라도 또한 어머니의 성(姓)을 따르게 하였다.
- 태조실록 5권, 태조 3년 4월 26일 을미 1번째기사 왕씨의 성을 쓰지 못하게 하다

조선왕조가 들어서면서 개성 왕씨에게 약 20년에 걸친 시련이 닥쳤다. 태조 2년까진 도당과 대간이 왕씨를 주멸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중에도 태조의 보호를 받아 무사했으나 태조 3년의 박위의 점괘 사건으로 유력 왕족들은 백수십명이 삼척, 강화, 거제에서 처형되고 방계들은 성을 바꿔야 했다. 태조 이성계의 장남 진안대군 이방우의 사돈, 7남 무안대군 이방번의 처가였던 정양군(定陽君) 왕우(王瑀)[9]와 그의 두 아들이 고려 왕조에 대한 제사를 받들었지만 왕우가 병사하고, 두 아들 상장군 왕조(王珇)와 대장군 왕관(王琯)이 무인정사에 휘말려 목숨을 잃어 왕우의 대는 끊기게 되었다. 거기다 왕우의 장녀 삼한국대부인 왕씨는 이방번의 아내였는데, 자식도 없이 남편이 무인정사 때 사망하는 등 왕우의 자손들은 불운이 연달아 터졌다.

다행히 조선왕조가 안정된 태종 때부터 왕씨들에 대한 탄압을 풀어주기 시작해 세종과 문종을 거치며 복권되었다. 이중에 이름이 남은 이들이 후일 숭의전 부사로 고려 왕실에 올리는 제사를 맡게 되는 왕순례(王循禮)[10]와 개성 왕씨의 동양군파 중시조인 왕미(王亹) 등이었다. 왕미의 경우 그동안 외가 성인 민씨로 행세했다고 하는데, 《태조실록》 태조 3년 4월 26일 기사를 보면 왕손이 아닌 왕씨는 외가 성을 따르라는 명을 내렸기 때문이다.

3.2.2. 복권

태종 13년부터 왕씨들이 드러나도 처벌하지 않은 채 덮으며 넘어가고, 40여 년이 지나 문종 대에 이르러서는 전 왕조의 왕족들로 하여금 고려 왕실의 제사를 지내도록 하고 그에 따른 물품 등을 지급하는 식으로 예우해 주기 시작하면서 60여 년 동안 계속된 왕씨 탄압이 잦아들고 차츰 복성했다. 세조생일 잔치에 왕순례를 초대해 2품에 준하게끔 우대했다.

단종~세조 시기부터 개성 왕씨는 사족의 일원으로 조선 사회에 완전히 녹아들었다. 사족들은 중앙에서 벼슬한 쪽과 지역 향촌사회에서 영향력 확대에 주력한 쪽으로 갈리는데 개성 왕씨는 후자쪽이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과 1789년 편찬된 《왕씨 족보》를 참고하면 전라도 지역, 구례여산, 조선 왕실의 본향이기도 한 전주에 많이 거주했던 것으로 보이며 특히 구례 지역에선 왜란-호란 시기 의병활동을 바탕으로 확고한 지배 사족으로 자리잡았다. 다만 철학왕국인 조선 사회에서 내세울만한 이름난 학자를 배출하지는 못했다.

1789년 그때까지 전해오던 가전기록을 바탕으로 《왕씨 세보》를 다시 편찬했고, 태조 신성대왕 왕건이 수도로 정한 개성본관으로 했으며, 태조의 아들 중 종법상 서열이 15번째였던 왕원을 1세 조상으로 했다. 이것은 고려가 망한 지 거진 400여 년 만의 일로 정조 대에도 개성 왕씨를 찾아내 본성을 쓰게 하기도 했다. 퇴계 이황과 교분이 있었던 왕희걸은 왕씨 문중에서 최초의 문과급제자로 기록되었고, 홍문관 부제학을 역임했다. 선조 때 왕의성은 의병을 일으켜 청주 전투에서 공을 세워 순조 4년에 지평(持平)·도승지로 증직되었다. 흥선대원군 대에는 대원군이 왕씨 인물을 중용하겠다는 뜻을 밝혀, 동부승지를 지낸 왕정양 등이 대단한 벼슬을 한 정치인으로 이름을 올렸다.

3.3. 현황

왕미의 후손들이 현재 개성 왕씨의 90%를 차지하는 동양군(東陽君)파,[11] 이외에도 평양공(平壤公)파[12] 양양공(襄陽公)파,[13] 안경공(安慶公)파,[14] 시중공(侍中公)파[15] 등이 존재한다. 현재 남한에 존재하는 개성 왕씨 인구 2만 명 중에 동양군파 이외의 나머지 파인 사람들이 차지하는 비중이 겨우 2천 명이니 이 성씨가 얼마나 조선 시대에 근근이 이어져 내려왔는지 알 수 있다.

지금 수백 본이 이어지는 조선 전주 이씨나 신라 경주 김씨밀양 박씨, 가야 김해 김씨와 비교해본다면 그야말로 초라할 따름이다. 다만, 왕씨 복귀가 허용된 이후로도 복귀하지 않고 외가 성이나 바꾼 성을 그대로 쓰다가 본인들이 왕씨의 후손이라는 것도 잃어버린 이들이 많을 가능성이 더 크다. 21세기 역사 연구 결과로 구씨, 백씨, 임씨, 복씨 등은 다름아닌 그 대성팔족의 후예인 진씨, 백씨, 목협씨, 사택씨 등의 후손일 개연성이 큼에도 정작 이 세 성씨에서 그나마 추적해볼 전승이 남은 가문은 나주 임씨 하나 뿐인 사례가 그것을 뒷받침한다. 숨어살던 오랜 세월 동안 본인들 가문의 진짜 뿌리를 잊어버린 것으로, 후삼국시대~고려 초 때 나름 세력을 얻게 되지만 다른 가문들이 하던대로 그저 중국계 성씨로 전승을 가탁하고 만 것이다. 그나마 구씨, 백씨, 임씨, 복씨는 획이나 부수 및 본관 등을 역추적하면 쉽게 알 수 있으나 아예 모계 성씨로 바꿔버린 개성 왕씨의 후손은 그런 게 불가능할 뿐이다.[16]

본향인 개성시와 매우 유사한 운명이라고 할 수 있다. 고려 이전에는 역사에 존재감이 미미했다가 고려 시기에는 각각 왕성(王姓)이랑 왕도(王都)로 흥했다가 고려가 망하자 그저 그런 존재로나마 없어지지 않고 후대로 이어나갔다는 점, 즉 흥망성쇠를 각각이 왕성(王姓)/왕도(王都) 역할을 한 고려라는 국가와 함께했다는 점이 있다.

3.3.1. 여계 후손

왕위에 가까운 직계 남성들을 대상으로 왕씨 몰살이라는 노소불문한 학살로 왕씨 성을 이어받은 직계가 실상 단절되거나 은성(隱性)[17]하게 되면서 개성 왕씨는 오늘날 신라의 경주 김씨나 조선의 전주 이씨와는 달리 옛 위상에 비해 인구가 초라한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개국 초부터 고려 왕실 혹은 그 친족들과의 혼인 등을 경로로 개성 왕씨의 피가 흐르는 가문들이 다수 있다.

대표적으로 낙랑공주 왕씨에게서 파생된 경주 김씨, 언양 김씨, 신 안동 김씨의성 김씨처럼 김씨들 상당수가 있으며 파평 윤씨인천 이씨 같은 가문들도 이들 낙랑공주 소생의 김씨 후손들과의 혼인을 통해 태조 왕건의 혈통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 경주 이씨의 중시조인 이거명(李居明)의 손자인 이금서는 낙랑공주 왕씨의 사위이다.[18] 이외에도 남양 홍씨 당홍계의 7할을 차지하는 남양군파와 문정공파 등은 고려 예종의 서녀[19][20]의 후손들이며 교하 노씨는 모두 빠짐없이 고려 원종의 외손녀인 경혜비 왕씨의 자손들이다.[21] 다름아닌 양녕대군, 세종대왕, 효령대군의 외조부인 민제 또한 모계까지 추적하면 고려 현종의 딸에게서 나온 후손이며, 선조의 친어머니도 모계까지 추적하면 고려 원종의 딸까지 이어진다. 선조의 딸 정명공주가 낳은 남양 홍씨 가문 아들들도 대단히 자손이 번창했기에 고려 왕들이 남긴 DNA는 당대 살았던 그 어떤 인물들보다도 현대 한국인에게 많이 남았다고 할 수 있다.
<rowcolor=#f9d537> 해당 성씨 해당 인물
경주 김씨[22] 태조의 적녀인
낙랑공주 왕씨
언양 김씨[23]
의성 김씨
구 안동 김씨[24]
경주 이씨[25][26]
파평 윤씨[27]
인천 이씨[28]
광산 김씨[29][30]
선산 김씨[들성] 문종의 서녀[32]
무송 유씨[평주] 예종의 서녀인
부인 안씨
남양 홍씨 당홍계[34]
행주 기씨[35] 고종의 서녀
교하 노씨[36][37] 원종의 외손녀인
경혜비 왕씨

이처럼 통혼 등을 경로로 한 광범위한 혈연(血緣) 때문에 태조 왕건의 후손이 아닌 사람을 찾기가 더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한마디로 몰락은 남성들을 통해서 이어져오던 직계에 한정된 것으로, 고려 왕실의 여성들을 통해서 흐르는 개성 왕씨의 피는 오늘날 한국 성씨족 전반에 걸쳐 퍼져있다고 볼 수 있다. 다만 이렇게 따지면 대한민국 국민 거의 대부분이 온갖 성씨의 후손으로 얽히게 되므로 큰 의미가 없다.

4. 인물

4.1. 고관대작


<rowcolor=#f9d537> 이름 출생 관직 비고
고관 명단
왕은(王溫) 미상 국왕 고위정치인
왕정(王侹) 미상 국왕 고위정치인
국대비 왕씨(國大妃 王氏) 미상 왕비 고위정치인
원덕태후 왕씨(元德太后) 미상 왕비 고위정치인
왕원(王垣) 미상 왕족 고위정치인
왕만세(王萬歲) 미상 왕족 고위정치인
왕식렴(王式廉) 미상 왕족 고위정치인
왕기(王基) 1021년 왕족 고위정치인
왕영(王瑛) 1043년 왕족 고위정치인
왕순례(王循禮) 미상 고위관료 고위정치인
왕방연(王邦衍) 미상 고위관료 고위정치인
왕규(王珪) 1142년 고위관료 고위정치인
왕곤(王鵾) 1580년 고위관료 고위정치인
왕상은(王相殷) 1920년 국회의원 고위정치인
왕정홍(王淨弘) 1958년 방위사업청장 고위정치인

4.2. 연예인

4.3. 언론인

4.4. 체육인

5. 기타

  • 왕씨 일가의 대부분이 멸족을 당하게 되자 왕씨를 변형시켜 옥(玉), 금(琴), 마(馬), 전(田), 전(全), 김(金), 차(車), 신(申)씨 등의 다른 성씨 혹은 왕을 상징하는 용(龍)의 성으로 행세하며 숨어 살면서 혈통을 유지했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고려시대 과거합격자 명단인 《등과록전편(登科錄前編)》과 《고려문과방목(高麗文科榜目)》에서 동일인이 성만 바꾼 게 확인되는 옥씨(의령 옥씨 단일본)를 제외한 나머지 성관은 일방적인 주장 외에 근거가 전혀 없다.《개성 왕씨 세보》에 유(柳)씨, 이(李)씨 등 외가성으로 개성했다는 기록이 있는 왕씨들이나 태종 13년 왕거을오미가 외가성인 이씨성으로 살고 있었던 사례를 감안하면, 개성을 해도 외가성을 썼지 성씨를 만들어내는 사례는 많지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 옥씨는 문헌 기록에 남아 있는 근거 외에도 왕씨 집성촌이 경남 의령에 있을 정도로 근거가 많다. 다만, 개성 왕씨 족보를 보면 후손이 유(柳)씨로 변성했다는 인물들이 유난히 많이 나온다. 아마도 고려 왕비 중 유(柳)씨가 많아서 그런 것으로 보인다.
  • 왕서방의 임팩트 때문인지 해괴하게도 중국 성씨로 착각하는 경우가 많고, 또한 왕씨 성을 가진 사람에 대해서는 다짜고짜 중국인으로 몰아버리는 경우도 많다. 그리고 1983년 초반에 삼양식품에서 왕서방면이라는 중국식 우동맛을 살린 라면을 내놓았는데, 왕서방면이 유행을 타는 과정에서 개성 왕씨 성을 가진 어린이들이 놀림거리가 되어버리는 바람에 개성 왕씨 문중에서 항의를 해 동년 4월에 중화 우동면으로 이름을 바꿨다는 이야기가 있었다.[38][39] 또한 성범죄영구제명된 전직 유도선수 왕기춘의 경우도 데뷔 초기부터 이름만 듣고 중국인으로 안 사람이 많았을 정도다. 그러나 왕기춘은 조상들의 산소가 집안 대대로 정읍시에 있고, 왕기춘 본인도 정읍이 고향인 순수 토종 한국인이다. 그렇지만 그런데도 불구하고 지금도 중국인이나 조선족[40]이라며 손절한다느니 하는 반응들이 많은데, 물론 몰라서 그런다기보다는 조롱의 의미로 그러는 경우가 많다.

5.1. 용손 전설

고려 왕실은 거타지 설화를 베낀 의조 작제건과 원창왕후 저민의 설화를 바탕으로 서해 용왕의 후손을 자처했다. 우왕이 자신을 죽이러온 관원들에게 겨드랑이에 있는 비늘을 보여줘 혈통을 증명했다는 야사가 유명하다.

이는 고려의 왕실인 개성 왕씨가 왕위를 독점하기 위해 채택한 전략으로 임페리얼 컬트(Imperial cult)의 성향을 지닌다. 고려 왕가는 유교적인 천명론(天命論)으로 즉위의 정당성을 내세웠지만, 한편으로는 초월적 권위에 기대어 왕권의 절대권을 구축하기도 하였다. 다시 말해 성인군주론(聖人君主論)과 신성군주론(神聖君主論)을 병행하였다고 할 수 있는데, 후자의 모습을 여실히 보여주는 것이 바로 '개성 왕씨는 용손(龍孫)'이라는 혈통적 정당화라고 할 수 있다.

용손의식은 고려의 국초부터 형성되었다. 그러나 유교적 합리주의의 사고체계는 용왕이나 용의 후손이라는 다소 '고대적인' 논리가 설 자리를 빼앗고 있었기 때문에 용손의식이 제 기능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신성(神聖)을 끊임없이 수혈하는 시스템의 마련이 필요했다. 고려의 경우 신성의 수혈은 독점과 배제로 이루어졌다. 용손끼리의 근친혼을 지속함으로써 자기들만의 왕국을 만들어 독점을 강화하였다. 한편, 용손 안에서 자연 발생적으로 파생되는 소군(小君)을 배제하여 신성을 저해하는 요소를 끊임없이 제거시켜 나갔다.

위와 같은 과정을 통해 구축된 기반 덕분에 여러 강력한 도전에도 불구하고 개성 왕씨는 독점권을 잃지 않았다. 무신정권기 무인 집권자들은 개성 왕가의 독점권을 무력화시키기 위해 용손이 12대에 다한다(龍孫十二盡)이라는 참언(讖言)을 퍼트렸지만, 그러한 노력은 도리어 용손 의식의 뿌리가 당시에 얼마나 강고했는지를 여실히 보여줄 뿐이었다.

그러나 고려 왕가가 몽골의 등장 이후 몽골 황실과의 밀착을 이룸으로써 왕권 강화와 권위 회복을 동시에 이루면서 용손 의식은 타격을 받기 시작한다. 대원 관계가 지속됨에 따라 왕권이 상대화되고 말았으며, 이는 권위 하락과 용손 의식 쇠퇴로 이어졌다. 그로 인해 고려 영내에서 개성 왕가에게 있던 왕위 독점권이 서서히 부정되기 시작했다. 그것은 심왕(瀋王)의 왕위도전으로 우선 표출되었고, 나아가 왕위 계승권을 그 동안 원천 차단당하였던 소군들의 도전으로 이어졌다. 물론 소군들의 도전은 번번이 실패하였지만, 그것이 사실상 소군이라고 할만한 우왕의 즉위를 유발했다는 측면에서 상당한 의의가 있다.

그런데 우왕의 즉위는 고려왕가에 전혀 예상치 못한 결과를 초래했다. 왕권의 상대화와 소군들의 도전에 따른 용손의식의 붕괴가 고려 후기 고려 왕가에게 왕권의 정통성을 제공하는 원천이었던 원나라의 쇠락과 함께 이루어짐으로써 고려왕이 정통성을 기댈 근거가 희박하게 된 것이다. 결국 왕권의 정당성을 입증할 이데올로기가 고려 왕가에 없게 된 것이었는데, 이런 와중에 우왕과 창왕왕씨의 후손이 아니라는 우창비왕설'(禑昌非王說)이 제기됨으로써 고려는 멸망하게 되었다.[41]

6. 관련 문서


[1] 이상 국조의 족보관계는 《고려사》가 인용한 이제현의 <논평> 기준이다. 《편년통록》, 《편년강목》은 또 다르다.[2] 의종 대에 전해져 내려오는 전설을 인용.[3] 실전된 기록 《왕대종족기》와 《성원록》을 인용.[4] 후삼국시대 호족들은 이총언처럼 족보에 쓰거나 중국을 상대할 때 쓰는 중국식 이름이 따로 있었는데 나름대로 세력이 만만찮았던 아자개도 그러했던 것이다. 후백제가 결말이 안 좋아지고 아자개 자신도 계속 견훤과 불화를 빚다보니 원래 이름만 알려지고 '이원선'이라는 다른 공식 명칭은 완전히 묻혀버렸을 뿐이다.[5] 물론 중국에서 귀화한 경우는 집안이 미약해도 원래의 성씨를 유지한 경우가 많았다. 즉, 성씨 사용이 세력의 유무를 나타내기보단 한반도에서는 아직 중원에서 유래된 그런 문화가 적극적으로 정착하진 않았었다는 것. 견훤의 경우도 아버지가 이씨였다는 기록이 있고 국왕의 자리까지 올랐음에도 정작 왕실에서 성씨를 사용했다는 기록이 없다.[6] 실제 패서를 기반으로 했던 고구려의 고조선계 낙랑 왕씨 일족은 왕고덕, 왕산악, 왕사례, 왕모중 등 여러 인물들을 배출하였다. 고구려 보장왕의 손녀인 고씨부인의 묘지명에 따르면 고구려 왕실과도 혼인 관계를 맺을만큼 밀접한 관계를 맺었던 대귀족 가문임을 알 수 있다.[7] 중국측 논문에서는 후당 측이 왕건이 보내준 정보를 바탕으로 왕건을 '장회무족'이라 함을 근거로 왕건이 산동성 일대 중국인 왕씨의 후손이라고 하였다. 물론 이는 학설로 볼 수 없는 동북공정의 연장선에 그칠 뿐이지만, 장회무족이란 단어는 왕건측이 원하는 정보를 후당 측이 복붙해서 집어넣었다는 결론은 국민대 박종기 교수도 동의하는 사항이다. 단 국내의 반론 또한 그다지 썩 개운하진 않다. “회수(淮水)라는 이름은 회이(淮夷)들이 많이 살아서 붙여진 이름이다. 회이는 동이족(東夷族) 가운데 가장 저명한 족속이다. ‘장회무족’은 고려왕실이 동이족 가운데 명문거족이라는 뜻이다.” (김상기, 『역주 고려사』, 동아대) 그러나 회이라는 용어가 그저 동이족 중 가장 저명하여 신라 왕가가 선조를 김일제라고 잠깐 주장했던 것처럼 고려 왕씨 일가가 주장했다고 보기엔, 이후에 고려 왕조가 아예 당숙종을 꺼내들었던 걸 봤을 때는 좀 설득력이 부족하다. 또한 회이는 선진 시기에 중화 세계가 아직 요서에 접하지도 못했을 시기에 동이로 일컬어지던 여러 족속 중 하나에 불과했고, 이후 적어도 전국 시대에 이르러 선진 시기에 원래의 동이로 일컬어지던 족속들 대부분은 제, 연, 초 등에게 평정되었기 때문이다. 선진 시기의 동이와 진한 시기 이후 동이의 연관에 대해 혼동하는 김상기 교수 및 김기동 교수의 혼란은 중국 측에게 좋은 빌미를 제공할 여지가 다분하다. 회수 일대가 고구려 유민인 이정기가 절도사로 부임해있던 평로치청번진의 영역이었던 건 사실이지만, 작제건의 부계가 정확히 어떻게 되는지는 현재로선 미지의 영역에 있다.[8] 어머니는 후삼국통일전쟁의 명장 유금필의 딸 동양군부인 유씨였다. 효은태자 본인은 광종 때의 역모에 연루되어 처형되었으나 그 아들들은 달아나 목숨을 건졌고 강조의 정변 이후 복권되었다.[9] 신종의 7대손이자 충렬왕의 외현손자로 공양왕의 형제였다. 이방우의 서자 순녕군 이덕근과 무안대군 이방번에게 딸을 시집보냈다. 이외에도 흥국사 공신 심덕부의 아들이자 세종의 장인이 되는 심온의 아우 심정, 태종의 총신 박석명을 사위로 두어 조선 건국세력과 밀접한 관계를 형성했다.[10] 성과 이름을 고쳐 제우지(劑牛知)라는 성명으로 살았으나 이웃과 밭 경계를 놓고 다투다 이웃이 관가에 왕씨라고 밀고해서 정체가 드러나게 되었다. 이 때 왕씨인 것이 들통났으니 죽을 것이라고 두려워했지만, 문종의 어명으로 복권되었다.[11] 광종 때 피살된 왕건의 아들 효은태자로부터 파생되었다. 정사에는 그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개성 왕씨 족보》에는 왕원(王垣)으로 기록되어 있다.[12] 평양공의 다른 후손은 모두 대를 잇지 못하거나 조선 건국 후 성씨를 바꾸었고, 청화후의 3남이며 승화후영녕공의 동생인 사공 왕정(王珽)의 후손만 평양공파로 남아있다.[13] 신종의 차남 양양공 왕서(王恕)로부터 파생되었으며 그의 6대손이 공양왕이다.[14] 고려 고종의 차남 안경공 왕창(王淐)으로부터 파생되었다. 족보상 안경공부터 왕희까지는 독자로 이어지는데, 왕희는 본래 개성 왕씨가 아니라 전주 왕씨였다. 자세한 것은 왕희 문서 참조.[15] 충정왕서자 왕제(王濟)로부터 파생되었다고 하는데 이 부분은 논란의 여지가 있다. 자세한 것은 충정왕 항목 참조.[16] 실은 견훤의 후손들도 후백제가 망한 후에는 다들 견훤의 아버지 아자개의 성씨인 이씨를 쓰다가 뿌리를 잊지 않은 일부만 간신히 견씨로 복성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 나머지는 본인들이 견훤의 후손이었음도 망각하고 그저 이씨 성만 간직하게 된 것. 아자개 자체도 실은 후삼국시대에서도 많고 많았던 서라벌 6부 그 이씨의 후예일 개연성이 크니 견씨를 되찾기엔 더욱 어려운 상황이다.[17] 직계와는 거리가 먼 효은태자의 자손이 개성 왕씨의 대다수를 차지한다.[18] 이제현 묘지명.[19] 부인 안씨(安氏). 평주 유씨 유응규의 부인.[20] 한편, 예종의 적녀이자 왕녀였던 승덕공주의 혈통은 자연스럽게 교하 노씨로 이어지게 되었다.[21] 노태우 전 대통령 등.[22] 후삼국 통일 직후 고려 왕실과 가장 밀접한 관련을 맺게된 가문이자 신라 왕실. 현종을 전후로 고려의 국왕들은 모두 신라 왕실의 피가 흐르게 되었으며 반대로 경주 김씨 가문과 그 분파들도 낙랑공주의 피를 잇기에 이른다.[23] 김취려의 가문으로 널리 알려진 고려 중후반기의 명문가.[24] 김방경의 가문으로 널리 알려져 있으며 그 후손으로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진주 대첩김시민 장군이다.[25] 이제현의 가문.[26] 경주 이씨들은 전부 고려 태조의 외손서인 이금서의 후손들이다.[27] 윤언이 대부터 개성 왕씨의 피가 흐르게 된다. 윤관의 아내가 다름아닌 인천 이씨 시조 이허겸의 후손이다.[28] 시조 이허겸이 낙랑공주 왕씨의 손녀사위이다.[29] 낙랑공주 이외에도 광산 김씨들의 대표적인 조상으로 왕가도, 이자연, 이정 등이 있다.[30] 김양감, 김의원, 김약온 등 고려 초중기의 내로라하는 문벌 귀족들은 물론, 조선시대에 이르러 국반 지위를 획득한 신라계 대명문가이기도 하다.[들성] 들성 김씨라고도 불린다.[32] 고려 문종과 그의 비첩 사이에서 태어난 딸로, 여진 정벌 당시 활약한 김한충에게 시집갔다.[평주] 평주 유씨와 사실상 동성동본이다.[34] 남양 홍씨의 거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남양군파조 홍주(洪澍), 문정공파조 홍언박(洪彦博), 판중추파조 홍언수(洪彦修) 모두 부인 안씨(安氏)의 후손들이다.[35] 행주 기씨인 대장군 기온(奇蘊)의 아내.[36] 부원배이자 시조인 노책의 가문. 오늘날 교하 노씨는 전부 경혜비 왕씨의 후손들이다. 이 분도 얄짤 없이 빼도박도 못한 경혜비 왕씨의 후손이 되겠다.[37] 개성 왕씨 시중공파 외엔 고려 왕실 직계에 가장 가까운 혈통이라고 볼 수 있다. 오늘날의 개성 왕씨 대부분은 직계와는 거리가 먼 효은태자의 자손이기 때문이다.[38] 이 이야기는 지금은 종영된지 꽤 된 MBC타임머신이라는 프로그램에서 "왕서방 열 받았다!(7회, 2001년 12월 30일 방송분)"는 제목으로 극화한 바가 있으며, 타임머신 제작진이 삼양식품의 홍보 팀장을 만나 인터뷰를 진행했는데 왕서방면에서 중화 우동면으로 상표를 바꾸는 데만 비용이 무려 1983년 당시 거액이었던 7억 원이 들어갔다고 한다. 이러한 거액을 감수했던 건, 삼양식품의 회장이 학창시절 집단따돌림의 피해자였기에, 놀림을 당하는 어린이들의 괴로움에 깊이 공감했기 때문이라고.[39] 참고로 1983년 당시 강남의 60평(약 200㎡) 아파트가 5,000만 원 하던 시절이었다. 참고로 1983년 당시 7억 원을 2020년 화폐 가치로 환산하자면 24억 6,540만 원에 달하는 비용이다. #[40] 애초에 조선족은 엄연히 한국계 중국인이다. 당연한 상식이지만 성씨는 혈통에서 나오는 거고, 혈통이 한국이니 응당 한국계 성씨를 가지는 게 자연스러운데도 중국계 성씨로 착각해서 조선족으로 몰아가는 것은 매우 무식한 소리이다. 물론 한족 혼혈이거나 모종의 이유로 한족의 성으로 개성(改姓)한 경우이면 한족 계열 성씨를 사용하는 것도 가능하기는 하다.[41] 출처: 高麗 王家의 龍孫意識과 왕권의 변동(이정란 고려대학교 연구교수, 한국사학보 2014 5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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