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02 21:08:31

변(성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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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색: 2015년 기준으로 총 인구 100명 미만인 성씨
한자 표기가 다르더라도 한글 표기가 같으면 합산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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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卞 (법 변)
2.1. 항렬표
3. 邊 (가 변)4. 실존 인물
4.1. 卞 (법 변)4.2. 邊 (가 변)4.3. 한자 미상
5. 가상 인물

1. 개요

한국의 성씨. 한자로는 성씨/법 변卞 또는 가 변邊을 쓴다. 卞씨는 경북 남부[1], 경남, 충북, 평안, 황해, 경기도에 많이 살고 간간이 전남 서부에도 집성촌이 있다. 邊씨는 전라, 제주, 강원, 충남, 함경, 경북 북부에 많이 산다. 그래서 집성촌이 겹치는 대구에 변씨들이 상당히 많이 산다.

로마자 표기는 과거에 일반적으로 Byon/Byun이라고 썼으나 로마자 표기 개정 이후 공식적으로는 Byeon이라고 표기한다. 하지만 여전히 Byun으로 쓰는 사람도 많으며, Byoun으로도 표기하는 경우가 꽤 있다. 한편 경상도 쪽에서는 동남 방언의 영향인지 Byeun이라 적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2. 卞 (법 변)

본관은 초계(草溪)[2], 밀양(密陽) 등이 있으며 인구는 2015년 기준 78,156명이다. 초계 지역에는 지금도 초계 변씨들[3]이 많이 사는 지역이다. 그 외에도 충청북도 청주시, 괴산군에도 집성촌이 크게 있다.[4] 경상북도 의성군[5], 경상남도 하동군[6]에 세거하는 변씨들은 특이하게도 밀양 변씨 시조의 직계 후손임에도 본관을 초계로 하고 있다. 한편 밀양 변씨 중 정작 현재 밀양시에 사는 인구는 별로 없으며, 집성촌은 인접한 거창군[7], 청도군[8], 그리고 경기도 부천시[9]에도 집성촌이 있으며, 평안남도 안주시[10]에도 집성촌이 있으나 월남을 한 종원은 거의 없는 듯하다.

밀양 변씨 시조 변고적(卞高迪)은 초계 변씨 시조 변정실(卞庭實)의 증손자, 정확히는 변정실의 차남 변요(卞耀)의 손자이다. 그래서 초계 변씨와 밀양 변씨의 항렬자는 종종 혼용된다. 1980년대에 대동보를 편찬하면서 통합 항렬표를 만들었는데 파에 따라서는 여전히 별개의 항렬자를 사용하는 경우도 있으며, 초계 변씨가 밀양 변씨 항렬자를, 밀양 변씨가 초계 변씨 항렬자를 쓰는 경우도 종종 있다.

2.1. 항렬표

초계 26세 鍾○ [11]
초계 27세 ○洙 밀양 24세 ○永
초계 28세 相○ 밀양 25세 東○, 秀○
초계 29세 ○燮, ○煥 밀양 26세 ○煥[12]
초계 30세, 밀양 27세 在○[13]
초계 31세, 밀양 28세 ○錫
초계 32세, 밀양 29세 泰○[14], 泳○
초계 33세, 밀양 30세 ○模, ○植
초계 34세, 밀양 31세 熙○, ○喜
초계 35세, 밀양 32세 ○均

3. 邊 (가 변)

본관은 황주(黃州)[15], 원주(原州)[16], 장연(長淵)[17] 등이 있으며 인구는 2015년 기준 60,633명이다.

원주 변씨 별좌공파(別座公派) 회장 변덕희는 “일제가 자신들이 쓰는 한자가 아니라는 이유로 변씨 성을 마음대로 바꿔버렸다”며 “이걸 바로잡기를 원한다”고 말했다.[18]
“우리 조상들의 이름이 적힌 고문서를 보면 다 갓 변(邊)이 아닌 성 변(파일:성 변자(한자).png)을 썼습니다. 그런데 일제의 창씨개명을 거치면서 갓 변이 성으로 둔갑했습니다.”
위 기사에 나온 이체자는 ‘파일:성 변자(한자).png’과 같이 생겼는데, 가 변()에서 스스로 자(自)를 흰 백(白)으로, 갓머리(宀)를 민갓머리(冖)로, 모 방(方)을 입 구(口)로 바꾸어 쓴다. 유니코드에 할당되지 못한 한자이기에 워드한글, 인터넷상으로 입력할 때는 ‘邊’으로 대체하여 쓴다. 또는 한/글 문자표에서 가장 비슷한 이체자 邉(U+9089)를 사용할 수 있는데, MJ코드로 MJ060239, IVS코드로 9089_E0111에 할당되어 있다. 어떤 폰트(주로 일본어 계열)에서는 이 글자의 갓머리(宀)가 민갓머리(冖)로 표시되어 위 기사의 이체자와 더 비슷해진다.

그러나 다른 고문헌들과 금석문 등을 종합적으로 검토하면, 위 글자는 오로지 성씨에만 쓰이는 글자가 아니고 단지 ‘邊’의 수많은 이체자들 중 하나임을 알 수 있다. 같은 인물의 성씨를 어디서는 ‘邊’과 유사한 형태로, 어디서는 ‘邉’과 유사한 형태로 기록하는 수많은 예시들이 확인되며, 성씨가 아닌 인명이나 다른 단어에 나오는 邊을 ‘邉’과 유사한 형태로 쓰거나 인쇄한 사례도 많다. 따라서 ‘邊’으로 쓰는 것이 일제 때문이라는 위 문중의 주장은 설득력이 떨어진다. 실제로 이체자자전에 따르면 가 변의 이체자는 종류가 수십 가지에 이르고, 물론 위 문중에서 주장하는 글자도 여기에 실려 있다. 점 하나, 획 하나가 있고 없고의 차이는 유의미하다고 보기 어렵다.

4. 실존 인물

4.1. 卞 (법 변)

4.2. 邊 (가 변)

4.3. 한자 미상

5. 가상 인물


[1] 그 가운데서도 청도군에 상당히 많이 산다.[2] 현재의 경상남도 합천군 초계면, 청덕면, 쌍책면, 적중면, 덕곡면.[3] 시조 변정실의 삼남 변휘(卞輝)의 후손.[4] 이쪽은 변정실의 장남 변광(卞光)의 후손.[5] 변중량의 차남 변구상(卞九祥)의 후손.[6] 변계량의 아들 변지상(卞智祥)의 후손. 그러나 변계량은 어째서인지 변지상을 아들로 인정하지 않았다고 한다. 변지상의 모친 안동 권씨 부인과 변계량이 이혼[21]한 것과 관련이 있는 듯.[7] 변중량의 장남 변길상(卞吉祥)의 후손.[8] 변계량의 서자 변영수(卞英壽)의 후손. 앞서 말했듯이 변지상이 변계량의 아들로 인정받지 못했기에, 세종이 특별히 변영수를 적자로 승격시키고 변계량의 제사를 받들게 했다는 기록이 조선왕조실록에 있다.[22][9] 변길상의 증손자 공장공(恭莊公) 변종인(卞宗仁)의 후손.[10] 변중량, 계량 형제의 맏형인 변맹량(卞孟良)의 후손. 참고로 변맹량, 중량, 계량 3형제는 밀양 분관조 변고적의 6대손이다.[11] 밀양 변씨 23세는 항렬자가 파마다 제각각이다.[12] 청도 각북면 쪽 문중에서는 ○祚자를 사용했다.[13] 청도 각북면 쪽 문중에서는 世○자를 사용한다.[14] 성이랑 붙이면 변태○가 되어버리는 탓에(...) 이 대에선 항렬자 사용률이 급감한다.[15] 황해도를 본관으로 하지만, 전라도 쪽에 많이 사는 듯하다.[16] 본관인 원주시를 위시로 한 강원 영서, 그리고 인접한 경북 북부, 또한 제주도에도 상당히 많이 산다.[17] 집성촌이 이북인 것으로 보인다.[18] "한자 바로잡기 나선 원주 변씨 종친회", 정장열, 주간조선[19] 아난됐[20] 청주 출신인 것으로 보아 초계 변씨로 추정.

[21] 조선 초기까지만 해도 유교 예법이 완전히 정착하지 않아 이혼이 가능했던 모양이다. 허나 기록에 따르면 당대에도 비난 여론이 있었다고는 한다.[22] 실록에는 아예 적자가 없어서 변영수를 후사로 삼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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