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19-07-21 22:58:59

삼국지연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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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사대기서
삼국지연의 수호전 서유기 금병매


三國志演義

1. 개요2. 줄거리3. 상세
3.1. 과연 연의는 촉을 옹호했는가3.2. 형성에 관하여
3.2.1. 모종강본
3.3. 연의는 민족주의적 서사인가?
4. 비극적 성격5. 일관성이 없는 부분 및 고증오류6. 조선전래 및 유행7. 번역
7.1. 조루 현상7.2. 정사드립 주화입마
8. 관련 작품9. 기타

1. 개요

원나라 ~ 명나라대의 사람인 나관중이 저술한 역사소설[1]이다. 흔히들 삼국지연의라고 부르지만 본래 제목은 삼국지통속연의(三國志通俗演義)이다. 중국 본토에서는 '삼국연의'라고 부르는 경우가 많다. 한국에서는 그냥 삼국지라고만 하면 역사책보다는 본 문서의 연의를 가리킬 때가 더 많다.[2] 중국의 서적 중에서 전 세계적으로 유명한 서적 중 하나이며, 이른바 중국사대기서 중의 하나로 손꼽힌다. 동아시아권에서 현재까지도 자주 읽히는 고전소설이다.
진나라 평양후 진수가 남긴 역사 전기를
후학 나관중이 순서에 따라 편집했다. (晉平陽侯陳壽史傳, 後學羅貫中編次.)”

삼국지연의의 성격을 극명하게 드러내주는 첫머리의 글. 삼국지연의는 역사책이 아니라 역사책인 정사 삼국지를 바탕으로 만든 이야기책이라는 사실을 극명히 알 수 있다. 연의(演義)라는 말 자체가 "사실에 내용을 보태서 재미나게 설명한 책이나 창극"이라는 뜻이다. 즉, 제목을 의역하자면 '역사 기반 소설 삼국지'쯤 된다고 볼 수 있다.

즉 실제 역사는 절대로 이와 똑같지 않다. 따라서 정사 삼국지자치통감, 후한서, 진서 등 정사서를 읽지 않은 상태에서 연의를 역사서로 받아들이면 역사를 굉장히 잘못 알 수 있다. 소설은 소설일 뿐이다. 하지만 역사의 굵은 흐름을 이해하는 데는 어느 정도 참고가치가 있으며 "연의는 무조건 거짓이고 정사는 그 반대다" 라는 마인드로 추측하는 태도도 옳지 않다. 국내 역사드라마나 역사영화를 생각하면 될 것이다. 사극도 허구의 인물이 등장하거나 재미를 위해 창작한 장면도 많으나, 그렇다고 완전한 허구는 아니고 어느 정도 큰 줄기와 틀은 역사에서 따온 것이기에 적어도 그 시대의 분위기 정도는 느낄 수 있으며, 무엇보다 역사에 대한 흥미유발이란 점에서 가치가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실제 역사에 관심이 없던 사람이 사극을 보고 등장인물들에 흥미가 생겨 직접 조사해보고, 그러면서 역사를 배우듯이, 삼국지연의도 마찬가지다.

삼국지연의의 바탕이 된 역사서 정사 삼국지는 재미로 읽으라고 만든 책이 아니라 실제 역사를 되도록 체계적이고 정확하게 남기기 위해 만든 책이므로 일반인에게는 상당히 어렵고, 극적인 부분이 적어 지루할 수도 있는 내용인데, 그럼에도 역사학자도 아닌 많은 사람들이 그 어려운 정사 삼국지를 탐독하는 열의를 보이는 이유는 십중팔구 삼국지연의 덕분이다. 삼국지연의가 아니었으면 정사 삼국지에 관심도 없었을 사람들이 많은데, 삼국지연의를 통해서 그 시대의 분위기도 느끼고, 좋아하는 인물이 생기면서 등장인물들의 실제 모습이 어땠을지 호기심이 생겨 정사 삼국지에도 도전하는 등, 자칫하면 딱딱하고 지루하여 전문가들이 학문적 차원에서 다룰 법한 내용들을 재미있게 각색하여 타국에게까지 널리 퍼뜨린 공로가 있다.

2. 줄거리

3. 상세

"천하는 오랫동안 나뉘어져 있으면 반드시 합쳐지게 되고, 오랫동안 합쳐져 있으면 반드시 나뉘어지게 된다."
천하대세 분구필합 합구필분(天下大勢 分久必合 合久必分)
삼국지연의의 첫 문장으로 첫 문장이 유명한 작품에도 수록되어 있다.[3]

중국사에서 후한 말~서진 초까지의 역사를 배경으로 한 소설이다. 삼국지연의만 읽으면 그 시대에 유독 수많은 인재들이 있었던 것처럼 착각하기 쉬우나, 연의의 내용만 주목받기 때문에 생기는 착각이다. 중국이 난세가 되면 그 정도 숫자의 인재들은 항상 나타났다. 물론 청나라의 고증학자인 조익[4]의 의견처럼 50년 남짓되는 시간에 많은 숫자의 인재가 몰려서 '인재밀도'는 다른 시대에 비하면 높은 편이다.

단, 인재가 많았다는 사실과 그 시대의 인재들이 후대에 끼친 영향력에 대해서는 별개의 사건으로 보는 시각이 필요하다. 학문적으로는 훈고학, 경학의 시조로 꼽히는 정현, 논어의 주석을 남긴 하안, 노자의 주석을 남긴 왕필, 정사 삼국지를 편찬한 진수, 춘추좌전집해를 남긴 두예, 해서의 개조로 꼽히는 종요, 문학에서 유명했던 조조, 조비, 조식, 중경신부를 만든 순욱, 정치적으로는 위나라서진을 건국한 조비사마염, 둔전제를 건의한 한호구품관인법을 제정한 진군, 사회적으로는 황건적의 난을 일으킨 장각, 오두미도를 전파한 장로, 베트남과 관련해서 영향을 끼친 사섭 등이 사후 후대에도 영향을 끼친 인물들이라 손꼽힌다.

그러나 일본의 전국시대나 한반도의 후삼국시대, 삼국시대 앞 시대 중 하나인 초한전쟁시기를 살아간 사람들 중에서도 뛰어난 인물들이 많았지만 그 중에 후대에까지 영향을 줬다고 볼 만한 인물은 많지 않다. 문학에 영향력을 끼치지 못했다고 그 시대를 만든 삼국의 군주들인 유비, 손권이 조조보다 영향력이 못하다고 할 수도 없다. 제갈량 같은 인물은 저 중에 들어가지 못하는데도 지금까지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는 유명인이다.[5] 물론 역사학이라는 관점에서 삼국시대가 특별한 가치를 지니는 시대는 아니었고, 삼국시대만 특별히 더 대단한 인물들이 활동했던 건 아니므로 과도한 찬양은 분명 경계해야 하지만 무조건 별볼일 없는 시대, 별볼일 없는 인물들이란 시각도 지양해야 한다는 시각인 것이다.

또한 나관중은 삼국지의 배경이 되는 시대의 1천 년 후에 태어난 사람이라는 점을 간과하면 안 된다. 나관중이 당시 고고학이나 문화인류학의 전문가는 아니었기 때문에, 삼국지연의의 전반적 분위기는 후한 말 당시의 느낌보다는 원나라 말기의 느낌이 더 강할 수밖에 없다. '조조의 백만 대군'이나 관우가 송대 이후에나 등장하는 청룡언월도를 들고 나오는 것도 그 때문이다. 원나라 말기 쯤 되면 중국에서는 민중 봉기가 크게 일어나면 보통 규모가 수십만 명 정도였다. 그야말로 대륙의 스케일이다.

"삼국지를 세 번 이상 읽지 않은 이와는 상대를 하지 말라"는 말을 만들어냈을 정도로 동양 최고의 고전이자 필독도서로 인정받는 소설이며[6][7], 그 때문에 실제 역사와 다른 부분이 많음에도 정사 삼국지와 연의를 헷갈리는 이가 많을 정도다.

나관중 이전에도 삼국지 이야기는 인기가 많았고, 그걸로 벌어먹고 살았던 인물도 많았다. 그 사람들의 대본을 묶은 것이 바로 삼국지평화.[8] 정사를 뼈대로 하되 이전부터 존재했던 민담이나 설화등을 채용하여 재미의 추구에도 초점을 맞추었다. 대략 7할의 사실과 3할의 허구라는 청나라 학자 장학성(章學誠)의 평이다. 관우 신앙의 기폭제가 되었고 촉한정통론을 전면에 내세우는 등 현대 삼국지의 이미지를 정립하는데 큰 영향을 끼친 소설. 다만 이 모든 것을 나관중 개인이 정립시킨 것은 아니다. 어디까지나 당시에 널리 통용되던 이미지를 채용했을 뿐. 삼국지연의의 기반으로 평가받는 삼국지평화에서도 이미 이와 같은 방향성은 확립되어 있었다.

한때 촉을 옹호하고 위를 비방한 움직임 때문에 많은 비판을 받았지만, 찬찬히 음미하면서 읽어보면 오히려 나관중의 시각이 현대의 어설픈 이들보다 훨씬 낫다는 것을 알게 된다. 도리어 나관중은 촉을 은근히 비판한 것이 아니냔 소리를 듣는 경우도 있다.

현대의 번역본에서는 대부분 누락되지만 원본에서는 각 화가 끝날 때마다 드라마의 마지막 장면처럼 결정적인 부분에서 끝내면서 "그 다음을 알고 싶다면 다음 편을 보시오!"라는 문구가 나온다. 이건 나관중의 삼국지연의가 이전의 삼국지평화의 직접적인 영향력 아래 있다는 증거로도 이해되는데, 강사들이 다음 번에 또 들으러 오라고 절단신공을 구사한 흔적이기 때문. 이후의 연의 판본들은 모두 이 방식을 빌리고 있으며, 심지어 쌀과 소금의 시대라는 대체역사소설에서는 서양 작가가 이 문구를 빌려오기도 했다. 이문열의 '황제를 위하여'에서도 이런 문구를 빌려썼다. 다만 황석영 삼국지에는 이 문구가 없고, 독자의 편의를 위해 생략하였다고 서문에 간단히 언급했다.

삼국지연의의 주인공은 일단 유비다. 유비가 살아있을 동안에는 쭉 유비로 주인공을 이어오다가 유비가 사망하는 시점에서 제갈량으로 주인공이 변경된다. 또한 그 상태에서 주인공인 제갈량사마의와 겨루게 되고 제갈량이 사망하면 주인공 자리를 강유에게로 넘기게 된다. 강유는 종회의 반란 직후까지 주인공으로 활약하다가 사망하며, 삼국지연의는 이 시점을 기준으로 사실상 끝이 난다. 삼국지연의의 주인공은 이렇게 변경된다. 사실 100년 가까이 되는 기간이 삼국시대의 흐름인지라 한 명이 주인공을 차지하기엔 너무나 긴 시간이기도 하다.[9] 그리고 유비가 제갈량을 얻기 전까지의 초반부의 경우, 군사적 업적에서는 활약이 적다보니 이 부분에서는 조조가 주인공 수준으로 포커싱을 받는다. 이야기의 전개 흐름이 작품 전체의 주인공인 유비와 동등한 수준의 비중을 가질 정도다.

그런데 대부분의 삼국지연의는 정비석 삼국지라든가 고우영 삼국지라든가 대부분 제갈량이 사망하면 완결된다. 연의의 시작이 184년 황건적의 난이고 제갈량이 죽은 건 234년으로 딱 50년이다. 제갈량 사후에 진이 삼국을 통일한 것이 280년이므로 실제로 제갈량의 죽음은 역사상에서 보면 중간 반환점 정도인 셈이다. 고우영 삼국지의 경우 제갈량이 사망한 후 사마염이 최대한 얌체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유씨, 조씨, 손씨들을 비웃는 장면 하나가 끝이며 사마염이 중국 전토를 통일했다는 한 마디만 나오고 완결된다. 황석영 이충호 삼국지는 그나마 제갈량 사후부터 서진 통일까지의 묘사가 건재한 편이다.

현대로 넘어오면서 일본의 작가 요시카와 에이지가 번역한 것이 많은 영향을 끼쳤는데, 그것에 대해서는 요시카와 에이지 삼국지 문서를 참고.

3.1. 과연 연의는 촉을 옹호했는가

삼국지연의가 촉빠라는 설은 아무튼 송대 이후 지식인 사회에서는 촉한정통론이 대세였고, 제갈량이나 관우는 유교적 충신의 모범상으로 여겨질 정도로 촉의 인물이 높게 평가되었으므로 어쩔 수 없는 측면이 많다. 이에 대해 일본의 동양사학자 가토 도루(加藤徹) 교수의 견해가 흥미롭다. 그는 ‘남자’를 뜻하는 男(남), 漢(한), 士(사), 俠(협)의 예를 들며 男은 女의 상대로서 남자, 漢은 땀과 피를 흘리는 뜨거운 남자, 士는 높은 뜻을 품은 사대부의 남자, 俠은 신의를 위해 목숨도 태연히 버리는 남자라면서, 사서 ≪삼국지≫와 소설 ≪삼국연의≫가 재미있는 것은 漢ㆍ士ㆍ俠이 서로 얽혀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중 최고의 ‘협’으로 유비를, 이상적인 ‘사’로 제갈공명을 꼽았다. 그의 견해에 따르면, 중국인은 역사에서 미학(美學)을 찾는데, 천하쟁탈전에서 이기더라도 왕조의 수명은 얼마가지 않으나 역사라는 캔버스에 그려진 의(義)의 미학은 영원히 남는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보면 유비와 공명은 죽을 때까지 완고하게 자신의 미학에 얽매인 인물이었다. 유비는 촉(蜀) 땅에 웅거한 뒤에도 협(俠)의 용병 정신을 유지했고, 공명은 사대부로 사(士)의 미학을 관철시켰다. 유비와 공명은 최고의 협(俠)과 사(士)의 조합이었으며, 이는 후세만이 아니라 동시대 상대국 사람들의 마음도 사로잡았다. 그렇기 때문에 삼국지라는 대하드라마에서 이들이 주인공인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는 것이다.[10]

일단 실제 역사서와 비교해 봤을 때 촉한의 인물들에게 많은 비중을 할애하고 있으며, 이들의 행동을 미화하거나 업적을 날조 부풀리는 대목이 많은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비교의 기준을 정사에 맞춘다면 연의는 다분히 촉빠적인 성향을 띠고 있으며, 이 사실은 반박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비교의 대상을 원대 이전 시대의 삼국지 관련 창작물, 단적으로 삼국지평화와 비교한다면 연의는 상당히 발전한 점이 많은 작품으로서 상대적으로 삼국시대의 세 세력을 균형있게 묘사하고 있다. 그러므로 삼국지연의는 단순히 유관장 중심의 통속적인 영웅물이던 삼국지평화 수준을 뛰어넘어, 군상극적인 특성을 가진 복합적이고 비극적 요소를 갖춘 '군웅물'로써 평가할 수 있게 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착각하는 거지만 삼국지연의란 작품은 본래 나관중이 그런 내용으로 써서 사람들이 그렇게 알게 된 작품이라기보다는 그 당시 사람들이 그렇게 인식했기 때문에 나관중이 그런 내용으로 쓴 작품이다. 흔히 보이는 촉까들이나 '촉빠 나관중의 고의 왜곡' 같은 거 강하게 주장하는 이들이 종종 잊고 있는(혹은 아예 모르는)것. 누가 왜곡을 해서가 아니라 애당초 그 작품이 태어난 땅에서는 민심 자체가 늘 촉한 쪽에 기울어 있었다는 이야기, 당장 삼국지평화의 묘사를 보면 연의는 그 시대 작품치고 굉장히 다른 세력을 우대한 작품이다.

삼국지연의는 이전과는 달리 조조를 "단순하기 짝이 없는 평면적인 악당"으로만 묘사하지는 않는다. 연의의 조조는 군사적인 재능과 뛰어난 지략을 갖춘 영웅으로서의 외관을 갖추고 있으되, 내면적으론 형식적인 충심을 지녔으나 그 밑으로 끝없는 야망을 품고 있고, 의외로 인정많은 면을 지녔으되 자신을 위해 타인을 서슴없이 희생시키는 잔혹함을 동시에 갖춘 대단히 이중적인 인물로 그려지고 있다는 반론이 있다. 물론 조조는 이미 예전부터 악인으로 여겨지고 있었지만, 정사 등에 표현된 그의 장점도 버리지 않고 표현했다. 조조가 죽는 장면을 보면 그의 과거의 악행의 응보를 받는 것처럼 묘사하지만, 조조 본인은 죽을 것 같자 신하들이 하늘에 제를 올려보자고 하자 "하늘이 정한 천명이니 제를 올려도 소용없다"며 죽음을 받아들이고 처첩들에게 스스로 살림을 해서 살라고 얘기한다. 그리고 조조가 죽고 난 뒤 삽입된 업중가에선 "지략도 뛰어나고 문장도 잘 짓고 부하들과도 사이가 좋고, 이만한 사람이 그냥 신하로만 있겠냐"고 얘기하고 무정하다고 얘기할 수 없다고 표현했다. 또 업중가의 마지막 구절은 죽은 사람 가지고 평하기 좋아하는 서생들을 무덤 속에선 비웃는다라고 얘기하며 끝난다. 단순 악역이라기엔 너무나도 당당한 인물로 표현하고 있다.

보통 외면의 재능이 있으면 내면으로도 좋은 품성을 가지고, 외면이 찌질하면 내면도 찌질하기 마련인 고대 소설에서 이처럼 복합적인 인물은 찾기 어렵다. 물론 당시에는 "겉과 속이 다른 간웅"을 묘사하려는 의도가 컸겠지만, 이런 묘사는 "유교적 도덕성"에 둔감해진 현대에 와서는 오히려 조조의 평가를 상승시키는 요인이 되었다. 거기다가 삼국지평화에서는 같은 장면이라도 조조를 악인으로 묘사하는 게 한두 장면이 아닌데, 일례로 관우가 유비를 찾아 떠나려고 하자 조조는 관우를 계략을 써서 잡으려고 하고, 헌제의 아들을 길가에서 참수시키는 등 완전한 악역으로 등장했다.

또 이전의 삼국지 관련작에서는, 조조를 제외한 위나라 인물은 지극히 비중이 적었다. 심지어 삼국지평화에서는 조조가 "나에게는 모사가 없다"라고 한탄하는 장면까지 있다. 사실상 창작물의 세계에서 위나라의 신하들은 거의 존재감이 없었던 것이다. 그 때문인지 왠지 장료가 모사 취급을 받기도 했다. 이에 반해서 연의에서는 순욱 곽가 등의 위나라 측 인물에게도 어느 정도 존재감을 주고 있다.

의 경우도 이전의 삼국지 관련작에서는 단순히 손견이 잠시 출연하거나, 적벽대전에 이름을 올리거나, 관우의 죽음이나 이릉 전투에서 약간 등장하는 정도였지만, 연의에서는 오나라의 성립이나 멸망까지 잘 묘사하고 있다. 단, 손권 말년의 후계자를 둘러싼 삽질과 황실 내부의 암투가 빠져버리고, 마지막 황제 손호의 막장 행각도 대충 넘어가 실제역사보다 나아 보이게 되었다. 아마도 중국역사상 처음으로 강남에서 일어나 천하를 차지한 명대에 쓰여진 소설이라 같은 강남 기반의 오를 까기는 힘들었던 모양이다. 물론 삼국지는 군담소설이다보니 대놓고 쌈박질하거나 메인 플롯에 영향을 크게 주지 않는 만큼 굳이 다뤄야 할 필요를 못 느낀 나관중이 그냥 빼놓았을 수도 있다.

실제로 삼국지연의를 보면 위나 오의 인물들이 명백히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부분들이 짤막하게나마 많다.[11] 이런 부분에서 위나 오의 인물들은 각자 용기와 지혜를 통해 사태를 해결하는 부분을 보여주고 있어 그 전의 삼국지평화와는 차별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오나라가 멸망할 때 오의 승상 장제는 “지금 만약 임금과 신하들이 전부 항복하고 국난에 죽는 사람이 단 하나도 없다면, 그 역시 욕된 일이 아니겠소?”라고 하며 비장한 모습을 보인다. 즉, 주인공은 촉이되 다른 세력도 최소한 자신들의 에피소드에서만큼은 주인공으로서 그리고 있다.

유비의 경우는 진수의 정사 삼국지에서는 조조에 버금가는, 감정을 쉽게 드러내지 않고 어떤 역경에도 굴하지 않으며, 군략에도 뒤지지 않는 효웅으로 평가받는 데 반하여 연의에서는 전장에서의 활약은 전부 관우, 장비, 조운이 한 것으로 만들어 버리고, 전략적인 면은 죄다 제갈량의 뛰어난 지혜덕인 것으로 바꿔 놓아, 아무 활약이 없는 무능한 인간으로 만들어 놓았다. 심지어는 제갈량이 기용되기 전의 승리조차 제갈량 기용 후로 슬그머니 옮겨 가며 공로를 빼앗겼다.[12] 게다가 툭하면 울거나 신세한탄이나 늘어 놓아, 현대 독자들에게는 오히려 찌질이로 보일 지경이다. 거기다가 정사에서는 유비군도 적벽대전에 참전했고(연합군 병력도 유비군 2만, 손권군 3만으로 별로 밀리지도 않는다) 주유의 남군 공략도 도와줬는데도 불구하고 연의에선 적벽대전은 강건너 불구경하다 퇴각하는 조조군 뒷치기나 하고, 남군은 주유가 부상입으면서 필사적으로 싸워 조인을 몰아내자 손하나 까딱 안 하고 성만 낼름 먹어버리는 모습을 보인다. 손권이 계속 형주 돌려달라고 하는게 정사보다 연의가 더 정당성있어 보일 지경이다. 다만 작품 초반에는 유비가 지혜로운 모습을 보이는 부분이 꽤 많다. 황건적과 싸울 적에는 유비가 작전을 짜는 부분도 있으며, 서주 시절 조조의 견제를 받아 이호경식이나 구호탄랑 등의 계략에 당할 때도 오히려 유비는 조조와 순욱의 꾀를 꿰뚫어본다. 결국 계략에 빠진것도 조조가 황명을 이용하자 어쩔 수 없이 원술과 싸웠다가 여포의 뒷치기에 당한 것이며, 논영회때 조조의 눈을 속이기 위해 겁쟁이인 척하는 임기응변도 있다. 그러나 원소에게 의탁하고 여남에서 박살나 제갈량을 얻으면서 상대적으로 전과 같은 머리쓰는 장면이 적다. 사실 적벽 전후로 서서, 제갈량이나 방통, 법정 등 양적, 질적으로 우수한 참모진들이 나타나 굳이 유비가 직접 전처럼 계략을 짜낼 필요는 없다. 오히려 참모진의 의견을 따르고 그들에게 무한한 신뢰를 주는 모범적인 군주상으로 탈바꿈한다. 결국엔 제갈량이란 캐릭터의 필요성과 카타르시스를 위해 변모한 바가 있다고 봐야 할것이다.

나관중유교수호지의 영향을 받아, 유비를 무보다는 문에 치중하는 유학의 이상적인 군주상으로 잡은 데다가, '스스로 나서기 보다는 호걸들을 조정하는 역'인 수호지의 송강과 비슷한 인물상으로 그리려 하다보니 현대 독자들의 눈에는 찌질하게 보이게 바뀌었다는 것이 정설이다.[13] 이렇게 인덕을 강조하기 위해서 유비의 묘사는 팔이 길고, 귓볼이 두툼한 등 부처의 81상과 닮은 모습을 제법 보인다.

그러나 인덕이 강조되었다고 하지만, 근대 이후 유비는 중국인들에게조차 무능하지만 음흉한 인물로 여겨지니[14], 이렇듯 유비의 묘사는 소설을 위해서 많이 달라진 감이 많다.

이 부분에 대해 조금 더 정리하면, 유불도 삼교의 조화를 중심으로 한 중국 정서에서 보자면 그들에게 가장 완벽한 군주는 , 임금이다. 즉 '무위의 치'[15] 군주는 자비로움과 포용의 태도로 모두를 감싸안을 뿐 마구잡이로 군림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정사의 유비는 능력과 결단성도 뛰어난 편이나 이러한 면들이 연의에서는 거의 모두 사라져 버렸다. 전대의 한고제 유방과도 상당히 비슷한 경우, 유방 역시 정치적인 능력, 식견, 인용술, 야심, 군사적인 능력 모두 뛰어난 인물이었지만, 초한지 등 창작물에서는 군림하지 않으며 한 발짝 뒤에서 자신보다 뛰어난 부하들을 쓰는 모습만 강조되며 무능력하고 음흉해 보이는 것과 같은 경우다.

약간만 더 부연해 보자면 유비의 이런 캐릭터 정립은 시대가 지나면서 강고해진 촉한정통론이 유학 관점으로 재해석되는 과정에서 유비일당과 제갈량이 맨주먹으로 시작해 명분과 실리를 다 쟁취하기 위해 죽을 힘을 다해 줄타기하고 싸운 면모는 슬쩍 묻히고 유능한 선비 출신 신하(->제갈량)와 인덕있는 군주 유비라는 이상적인 군신관계 위주로 부각되어 가면서 생긴 일이기도 하다. 제갈량은 당대 이후로 최고의 재상이자 선비로서 치국의 근본을 안 인물이라며 사후에도 자국이나 적국에서나 칭송받은 인물이다. 당장 삼국을 통일한 서진의 초대군주 사마염부터가 '야, 제갈량만 한 신하 어디 없냐?'라고 했을 정도에 제갈량이 남긴 팔진도를 장수들에게 학습시키는 면모를 보였고 서진시기부터 시작해 많은 선비들이 그를 흠모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런 데다가 제갈량이 애당초 출사한 과정이라는 거 자체가 재야에 묻혀있던 '선비'가 '이상적인 군주'의 인정을 받아 등용되어 여차하면 니가 왕 하란 식으로 '전적인 신임'을 받고, 마음껏 원없이 자신의 이상과 능력을 펼치며 후대에도 명성을 날린다는 이상적인 얘기고[16] 여기에 그렇잖아도 북벌을 하고 싶어 안달하던 송나라 이후 한족의 분위기까지(한국으로 따지면 병자호란 이후 사회분위기) 영합하게 되면 선비들한텐 제갈량이야말로 꿈의 화신 같은 게 된다. 기본적으로 삼국지연의 같은 소설은 당대 관직진출이 좌절된 선비들이 주로 쓰던 것이었고 때문에 더 나아가 제갈량은 선비의 사표 중의 사표가 되어야 하고 그를 등용한 군주의 캐릭터 해석도 유가적인 이상의 극치인 군주 중의 군주다운 뭔가가 필요해지는 것으로 유비의 캐릭터 정립은 바로 이런 식으로 이루어진것이다. 여기에 관우 신앙까지 겹쳐져서 '그 관우'가 섬겼던 유비라는 군주 자체가 더욱 이상화되는 과정은 덤이다.

단, 나관중의 원작에 모종강 부자가 주석을 달면서 점차 친촉/반위적인 내용이 늘어난 것은 사실이다. 나관중의 관심이 "영웅 쟁패"였다면, 모종강 부자의 그것은 "권선징악"에 가까웠다.[17] 또한 루쉰이 정리한 차이점에 따르면 나관중 본은 촉에 불리하거나 덜 멋진 부분이 많다. 오랜 떡밥이던 "안량이 유비에게 관우에 대한 얘기를 듣고 말을 걸려다가 살해당한다"는 것은 가정본중 마이너한 버젼에서만 나오며 모종강 본은 삭제되어있다. 또한 손부인이 유비의 패배 소식을 듣고 자살하는 것은 모종강 본에서 추가된 것이며 심지어 나관중 본은 제갈첨이 등애에게 항복할까 망설이는 부분까지 있다. 한마디로 나관중은 촉의 인물들도 어느 정도 인간적으로 약한 모습 등을 묘사했지만 모종강 본에 가면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촉이 되는 것이다. 모종강의 인지도가 나관중에 비해 현저히 떨어지기 때문에 나관중이 자신과 관계 없는 부분까지 욕먹는 것[18].

제갈량의 북벌도 촉이 크게 패한 건 1차 북벌 한 번 밖에 없고 나머지 북벌에서 일어난 전투는 거의 다 이기거나 큰 피해없이 후퇴했는데 연의에선 진창에서 학소가 제갈량을 완벽히 발라버리고 사마의도 위수에서 한 번 제갈량의 작전을 간파해 큰 피해를 입히는 걸로 바뀌었다. 정작 정사에서 진창 전투는 좀 찔러보다가 안 되니까 그냥 물러난 것에 가깝고 사마의는 전투로는 제갈량을 한 번도 못 이겼다.

여기에 나관중 이전의 삼국지인 삼국지평화 같은 경우는 역사왜곡을 하면서까지 결국엔 촉한의 후예가 승리한다고 억지 해피 엔딩을 만들었다[19].

끝으로 정사를 참고하면서도 진나라 사관이었던 진수가 차마 건들 수 없었던 사마씨의 찬탈이나[20] 기전체 사료의 특성인 뒤죽박죽한 부분들(예컨데 합비전투)을 나름대로 매끄럽게 정리함으로서 정사보다도 서술이 낫다라고 할 수 있는 부분들도 없진 않다. 당대에 이런 민담 수준을 뛰어넘는 고퀄리티의 역사 소설을 남길 수 있다는 게 놀라운 지경이다.

3.2. 형성에 관하여

작가 나관중은 "민담"을 많이 인용했다고 알려져 있지만, 실제 삼국지연의를 그 이전 시대의 삼국지 관련 작품들과 비교해보면 의외로 민담의 비중은 적고, 많은 부분이 역사적 기록에 근거한 창작 과정을 거쳐서 구성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저본이 되는 삼국지평화의 내용 자체가 삼국지 연의의 총량 중 10% 수준이다. 마개조라는 말로도 부족하고 사실상 재창작이다.

실제로 가정본(1522년의 판본) 삼국지통속연의의 서문을 써준 장대기는 나관중이 정사 삼국지를 바탕으로 연의를 편차하였음을 밝히고 있다. 다만 현대의 연구에서는 정사 삼국지를 직접 참조하였다기보다는 자치통감의 축약본을 직접적인 자료로 썼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정사 삼국지는 기전체라서 구조가 복잡하여 자료로 쓰기 상당히 까다롭기 때문에, 편년체 형식인 자치통감이 이야기를 만드는 자료로서는 더 나았을 것이다. 물론 정사 자료를 참고를 안 했다는 것은 아니다. 정사 혹은 정사에서 인용된 사서에만 나오고, 자치통감에는 언급이 없는 일화들도 많을 뿐 아니라, 정사의 본문을 잘못 읽거나 혹은 필사본의 제작이 잘못되었을 때만 있을 수 있는 오류가 발견되기 때문이다.[21]
지난 원나라 시대에는 민간에 전해지는 역사를 바탕으로 평화를 만들어 이야기꾼에게 구연하게 했지만 그들의 이야기는 오류가 많고 너무나 저속하여 교양있는 사군자들이 대부분 싫어했다. 그래서 동원 땅 출신의 나관중이 진수의 삼국지를 바탕으로 역사적 사실을 신중하게 취사선택하여 편찬하고 삼국지통속연의라 이름했다. 그 문장은 심오하지 않고, 말투는 그다지 속되지 않으며, 사실을 기록하여 역사 본연의 모습에 접근했다. 독자 모두가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만든 것이다.
- 가정본 《삼국지통속연의》 서문 / 부산대 삼국지문화기행 교재에서 인용.

오히려 삼국지연의 이후 시대에 발생하는 민담이나 파생작품들은 대부분 삼국지연의에 기초하여 연의를 일부 변형하는 방식을 취하는 경우가 많다.

3.2.1. 모종강본

삼국지연의에 대해 논할 때 결코 빠트릴 수 없는 판본이 바로 모종강본이다. 청나라 강희 연간에 모종강 부자가 엮은 판본으로, 현재 한중일에서 가장 잘 알려진 판본이 바로 이것이다. 물론 고전소설의 특성상 모종강의 임의적 판단에 의해 삭제되거나 추가되거나 개편된 장면도 많다. 때문에 나관중본을 중시하는 사람들은 굉장히 싫어하는 판본이기도 하다. 이를테면 <삼국지가 울고있네>의 저자로 잘 알려진 리동혁 역시 모종강본을 비판한다.[22]

전 버전에서는 황석영 삼국지가 나관중본, 즉 가정본을 저본 삼아 번역했다고 되어 있으나 사실은 가정본이 아닌 1, 2권까지는 모종강본 계열로 추정되는 현토 삼국지[23]를 참조했다고 머릿말에서 밝혔고,[24], 3권 이후부터는 인민문학출판사본(이하 인문본)을 참조했다고 밝혔다. 대표적인 사례로 3권에서 조조가 오환 정벌을 할 때, 그 우두머리가 묵돌이 아닌 답돈이라고 수정된 것과, 4권에서 인문본 이전에 회계의 능통이라고 한 것을 낙통이라고 고친 부분과, 오찬(吾粲)의 이름이 吳粲에서 吾粲으로 바르게 수정된 것 등이 있다.

그런데 그렇다고 모종강본이 삼국지연의의 품질을 떨어트린 저열한 판본인가 하면... 그렇게 일방적으로 판단하기엔 여러모로 난점이 많다. 모종강본이 가지는 가장 큰 장점은 소설로서의 매력이다. 나관중본에서 관우의 최후 장면은 싸우다말고 승천하는 것으로 처리되는 등[25] 구전의 흔적이 강하게 남아있었지만, 모종강본에서는 이를 소설에 맞게 각색했다.[26] 특히 소설로서의 재미는 그 리동혁도 인정하는 부분이다.
모종강본이 나온 다음 소설로서의 질이 훨씬 올라갔으니 말인데, 나관중본은 사실 소설로서는 어수선한 데가 많았다. 품격으로 보아 나관중본은 아직 구전 이야기의 냄새가 짙다면 모종강본은 글을 아는 사람들도 볼 만했다.
리동혁, <삼국지가 울고있네>

무려 20여 가지나 난립하던 삼국지연의의 판본들이, 나중에는 모종강본 기준으로 교통정리가 된 것만 보더라도 이 판본의 위력을 알 수 있다.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건, 청대 이후 한자문화권에서 사랑받은 삼국지연의란 대체로 모종강본을 말했다는 것이다. 또한 리동혁의 모종강 비판에 대해 삼국지연의 전문가인 정원기 교수는 다음과 같이 반박했다.
가정본을 나관중(원)본이라 호칭할 뿐만 아니라, 가정본이 모종강본보다 우수하다는 표현을 수차에 걸쳐 언급하고 있는데, 이는 지나치게 편향적인 견해이다. 그렇다면 모종강본 출현 이후 3백 년 동안 가정본은 어디 가고 모종강본이 독서계의 주도권을 잡았단 말인가. 가정본이 엄연히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모종강본이 유일한 통행본이 되었다면 모종강본의 우수성이 입증된 것이다.
출처

다만 소설적 완성도와는 별개로, 모종강본에서 호오가 갈리는 것은, 소설의 주제의식과 메시지가 나관중본과는 달라졌기 때문이다. 나관중본은 '통속연의'라는 말 그대로, 여러 인물들이 보여주는 통속적인 이야기에 가까웠다. 즉 인물 개개인의 '멋짐'이라는 통속적인 면을 보여주던 소설이였다. 그런데 모종강은 여기서 강한 주제 의식을 넣기 위해, 촉한에는 버프를, 위에는 너프를 가한 것이다. 때문에 나관중본을 중시하는 쪽에서는 구시대적이고 케케묵은 가치관이 책에 배여버렸다고 싫어하는 사람이 많다. 물론 모종강본을 좋아하는 쪽에서는, 오히려 이런 강력한 주제의식을 더 선호하기도 한다.

물론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자면, 황실과 같은 유씨라는 이유로 한의 적통을 자처하는 유비가 어딜봐서 선이냐고 물을 수도 있지만, 전근대 동아시아에 공화주의가 보급된 것도 아니기에 너무 가혹한 잣대일 순 있다. 그리고 위선적이라고 비판도 많이 받지만 작중에서 그나마 주인공이라고 현대가치관으로도 긍정적인 인덕을 내세우는 군주는 유비 정도고 조조라고 딱히 민중을 위하는 혁명가도 아니다. 또 위에서도 나온 얘기인데 이러니 저러느니 해도 한때 엄청 격하된 조조에 대한 재평가의 시작은 이 삼국지연의이고, 모종강본이라고 이걸 아예 죽여놓지는 않았다. 당장 조조의 성격이 잘 드러나는 유명한 여백사 에피소드가 나오는 4화에서 모종강의 서시평을 보자.
조조가 백사 일가 사람들을 죽인 것은 실수였으므로 양해해줄 수 도 있다. 그러나 백사까지 죽이는 데 이르러서는 그 악독함은 극에 달했다. 그래놓고서는 다시 "차라리 내가 남을 배반할지언정, 남이 나를 배반하지는 못하도록 하겠다"고까지 말하는데, 독자들은 이에 이르러서는 그를 나무라고 욕하면서 그를 죽이려고 하지 않을 사람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 점이야말로 조조가 남들보다 뛰어난 점이라는 사실은 알지 못한다.

시험 삼아 천하 사람들에게 물어보라. 이런 마음을 가지고 있지 않은 자가 누구인가? 그리고 감히 입을 열어 이런 말을 할 수 있는 자가 누구인가? 도덕과 학문을 강의하는 사람들은 일단 이 말을 뒤집어서 "차라리 남이 나를 배반하게 할지언정, 내가 남을 배반하지는 말아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 말은 듣는이는 나쁘지 않겠지만, 그들이 하는 행동을 자세히 살펴보면 반대로 하는 일 하나하나가 모두 조조의 이 두 마디 말을 몰래 배우고 있다. 그러므로 조조는 말과 마음이 일치한 소인이었다고 할 수 있지만, 이런 무리들은 입은 옳아도 마음이 글러서, 그 말과 행동이 직설적이고 통쾌한 조조보다 도리어 못하다. 그래서 나는 말한다: "이것이 오히려 조조가 남들보다 뛰어난 점이다."

-삼국지연의 4회, 모종강의 서시평-

감히 말하건데, 과거 왕침의 위서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모종강의 이 평가를 능가하는 해석이 나왔던가? 아니 오히려 현대의 조조 재평가들이라는 것들이 나관중과 모종강이 수백 년 전에 짜놓은 그물에 걸려서 허우적거리는 꼴이 아닌가?

한편 모종강본의 특징 중 하나는 각 화마다 실린 서시평들과, 본문 중간중간에 적혀있는 협평들이다. 서시평은 각 화에 대한 모종강의 감상이고, 협평은 적절한 해설과 농담이 섞인 문장들이다. 1화의 몇몇 협평들 예시를 보면 다음과 같다.(협평은 괄호 안에 굵게 표시)
건녕 2년 4월 보름날, 황제가 온덕전에 나와 옥좌에 앉으려고 할 때 전각 모퉁이로부터 광풍이 일더니 푸른 구렁이 한 마리가 대들보 위에서 스르르 내려와서 옥좌 위에 똬리를 틀고 앉았다.(백사(白蛇)를 베어죽인 후 한나라가 일어났는데[27], 청사(靑蛇)가 나타나자 한나라가 위태로워진다. 청사와 백사가 멀찍이서 서로 대(對)를 이루고 있다.)
광화 원년에는 암탉이 수탉으로 변하는 일이 있었다.(이 징조는 더욱 환관들에게 들어맞는 것이다. 남자가 거세를 당하는 것은 곧 수컷이 암컷으로 변하는 것이다. 환관들이 정사에 관여하는 것은 곧 암컷이 또 수컷으로 변하는 것이다.)
황제는 일개 환관에 지나지 않는 장양을 높여서 아버지라 부르기까지 했다.(이러한 장씨 아비가 있으므로, 자연히 장각 등 장씨 형제 세 사람이 등장하게 되는 것이다)
당주(황건적)는 곧장 궁중으로 가서 거사계획을 고해 바쳤다.(환관은 반대로 첩자가 되고, 첩자는 반대로 자수를 하는데, 이를 통해 내부의 도적이 바같의 도적보다 더 나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현덕 曰: 나는 본래 한 황실의 종친으로 성은 유, 이름은 비라고 하오. 지금 들으니 황건적이 난을 일으키고 있다는데, 도적들을 깨트려서 백성들을 편안하게 해주고 싶은 뜻은 있으나 다만 내게 힘이 없어서 할 수 없는 것이 한스러워서 길게 탄식을 했던 것이오."
장비 曰: "나에게 어느 정도 재산이 있으니 고을 안의 용사들을 불러 모아 공과 함께 큰일을 도모해보는 게 어떻겠소?"(결국 재산이 있는 사람은 큰일을 하기가 쉽다.)
황제는 대장군 하진을 불러서 군사를 동원하여 마원의를 잡아다가 목을 베도록 했다. 그 다음에는 봉서 등 관련된 자들을 모조리 잡아들여 하옥시키도록 했다.(왜 즉시 죽여 버리지 않는가?)

또한 탐관오리 독오가 유비에게 뇌물을 요구하다가 트러블이 일어나고는 장비에게 매질을 당하는 유명한 에피소드에서는 이런 식으로 적기도 했다.
독오가 큰 소리를 버럭 지르며 말했다: "네가 황제의 종친을 사칭하면서 공적을 거짓으로 보고하는가? 이번에 조정에서 조서를 내린 것도 바로 너 같은 엉터리 관리들을 가려내서 퇴출시키려는 것이다."
(중략)
독오가 사정했다: "현덕공, 제발 날 좀 살려주십시오!"(내가 어찌 감히! 나는 본래 황제를 사칭하고 공적을 거짓 보고했던 사람인데 어찌 감히 공을 구해줄 수 있겠는가?)
현덕은 본디 마음이 인자한 사람인지라 급히 장비를 꾸짖어 매질하는 손을 멈추도록 했다.

읽어보면 알겠지만, 협평의 용도는 나무위키의 주석 및 취소선과 비슷하다. 권선징악적 주제라는 평 때문에 무겁게 느껴질 수 있지만, 협평의 문체는 매우 유쾌하고 농담이 많은 편이다.

3.3. 연의는 민족주의적 서사인가?

연의가 의도된 정치적 프로파간다, 반외세적인 성격을 띈 민족서사라고 볼 근거는 없다. 애초에 삼국지평화 자체가 원나라대 유행했다. 황실과 주군에 대한 충성과 권신에 대한 차가운 시선은 고대부터 중국의 전통적 관념이었다. 이를 굳이 외세에 저항하는 민족주의 구도에 끼워맞출 필요나 재료가 없다.왕조 사회서 찬탈자가 이야기의 악역 되는건 반외세 민족주의와 별 관련이 없다. 조조가 이민족인 것도 아니고, 찬탈자 악역 세팅이 딱히 원명 교체기라 그런 것도 아니고. 찬탈자가 악역이 되는 세계관이 유학 이데올로기적인 것이라고 지적할 수는 있어도, 그걸 반외세 민족주의와 동일시할 이유는 없다.

전근대 사회에서 왕=국가는 맞는데 그게 민족하고 일치하는 개념이 아니다. 삼국지 내에서 그걸 의도한 정황도 없고 유교의 국가 개념은 현대 민족 관념처럼 특정 혈통이나 역사, 언어, 문화에 기반한 민족국가 개념하곤 기본적으로 다르다. 그래서 조조가 악역이어도 굳이 외래민족으로 세팅될 필요가 없고 한 외부 피가 섞인 왕조인 이나 (한나라 이전)도 정통으로 인정받는 것이다. 민족이 국가를 구성한다는 개념은 근대의 창작품(논의의 여지는 있지만)에 가깝고 삼국지연의는 그런 개념에 관심이 없다. 한족하고 국가정통성하고 연결이 안 된다. 이 시대는 중화가 혈통에 한정된 개념이 아니다. 오랑캐여도 예 받아들이면 중화가 되는 개념이고 그건 이미 이위공문대나 진, 당의 정통 왕조 인정에서 보인다.

왕조의 정통성 개념에 영향을 받았는가 하면 맞지만 근데 그게 현대 민족적 개념이냐 하면 아니라는 것이다. 삼국지와는 더더욱 관련이 없고요. 중화랑 가장 흡사한게 로마제국 계승 관념인데, 두 관념의 특징은 그 계승이 문화적 이념적 개념이지 역사적 혈통적 개념이 아니라는 것이다. 민족과 달리 외부 혈통집단에 열려 있다는게 핵심이다.

촉한정통론동진 연간부터 나타나며 이는 북방민족의 침공 보다는 연달아 터지는 선양을 빙자한 찬탈 행각에 대한 경각심 때문이다. 삼국연의도 북방민족의 비중이 극도로 약하다보니 한족 민족주의 경향이 있다고 볼만한 요소가 없고 중심되는 사상은 찬탈자에 대한 대항일 뿐이다. 모종강 평본(評本)은 최근에는 정통, 천하, 대의명분 등의 해석을 두고 기존의 해석과는 다른 이야기를 하거나 시기에 따라 다르게 보는 관점도 있다.

삼국연의는 청대 금서였지만(판본에 상관없이), 워낙 재미있다보니 널리 유통되었고, 단연 모종강 평본이 인기였다. 느슨한 금서였던 셈인데, 만약 한흥반청 의도가 있었거나 그런 식으로 사람들에게 읽혀졌다면 청이 가만히 있었을까, 적어도 청 중기까지 책이 유통되기 힘들었을 것이다. 위촉오의 싸움이 한족끼리 대의명분을 놓고 벌인 것인데, 이 안에 이민족을 설정해 읽는 것도 좀 이상하다.

4. 비극적 성격

삼국지연의는 한 마디로 말해서 비극 작품이다.
일을 꾸미는 것은 사람이나 일을 이루는 것은 하늘이다. (謀事在人成事在天, 모사재인성사재천) - 삼국지연의의 제갈량

사마염중국을 통일하는 것으로 마무리되는 삼국지연의의 내용은 결국 유비, 조조, 손권 등 모든 영웅들의 노력이 대부분 허사로 끝났음을 보여주며, 뒷 사람들 탄식하며 공연히 가슴 설레네!(後人憑弔空牢騷)[28]라는 마지막 문장은 상당히 허무주의적으로 느껴진다. 사실 처음 삼국지를 읽은 사람들은 모두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허무하게 사라지고 실패하는 영웅들의 최후를 보면 인생무상이라는 말이 절로 떠오르는데, 고대 그리스의 수많은 비극 작품들과 비극 공연들도 그렇고, 옛사람들은 비극에 카타르시스를 느끼는 것을 좋아한 것 같다.[29]

실제로 유비촉한은 명분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힘이 없어 망해버리고, 조조위나라는 힘은 강했지만 찬탈로 건설된 나라인 만큼 신하였던 사마氏에게 무력하게 찬탈당한다. 작중 묘사를 보면 헌제동한을 빼앗기는 모습과 비슷하게 묘사하는데 아예 사마소가 "너희도 한에게서 찬탈했잖느냐"면서 빈정거리는 걸 보면 가히 역사는 반복된다는 걸 실감할 수 있다. 오나라도 결국엔 세력이 밀려서 멸망한다.

중국 현대 정치사상사 전공 학자인 피터 R. 무디 주니어는 "The Romance of the Three Kingdoms and Popular Chinese political thought"라는 글에서 이 엔딩과 전체 구성을 보고 시니컬하다고 평하기도 했다. 이건 삼국지연의라는 문학 작품에 드러난 심성에 대한 평가다.

이는 동양의 군담과 서양의 기사 이야기들은 그 테마가 좀 다른 데서 기인하는 평가로, 삼국지에 대해 서양식 기사 이야기를 일컫는 단어인 Romance를 붙여 번역하긴 하지만[30] 서양식 기사 이야기가 강적, 특히 이교도와 맞서 싸우며 기사도를 지켜내는 절대선에 가까운 용사를 칭송하는 이야기라고 하면 동양식 군담은 대개 권력다툼과 영웅들의 활약이 긴 역사 안에서 갖는 본질적인 허망함을 강조하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선악 대립에 익숙한 서양인들이 선악의 구별이 희미하고 선도 악도 세월 속에서 스러져버리는 동양식 세계관을 염세주의적이라고 느껴도 이상한 일은 아니다. 인생무상을 아주 잘 나타냈다고 평가받는 명문으로 시작하는 헤이케모노가타리[31]나 뒷사람들이 영웅들을 추억하는 쓸쓸한 이야기라 강조하며 시작하고 끝나는 삼국지연의가 대표적인 예시다.

하지만 보통 역사 군담 소설이 이런 경우고, 창작 군담 소설(유충렬전 같은)들은 서양식 기사 이야기와 비슷하게 볼 수 있는 면도 꽤 많다. 거기다 역사 군담 소설도 정사가 해피엔딩이면 당연히 해피엔딩으로 마무리된다. 정사 삼국지부터 서진의 승리로 끝나고 심지어 서진조차 자기들의 병크와 소빙하기의 발생으로 인한 남북조 시대의 서막으로 순식간에 망해서 자동으로 비극이 된 것이다. 그나마 동진은 오래 간 편이었다.

5. 일관성이 없는 부분 및 고증오류

삼국지연의는 현대의 시각에서 보면 앞뒤가 맞지 않는 경우도 있는데, 이는 삼국지연의를 집필할때 예전부터 구전되어오던 화소들을 상당부분 채택한 결과이다. 개개의 구전 화소들을 부분부분 붙이다 보면 역사적 사실이라든지 다른 화소들과 비교할 때 일관성이 없을 수밖에 없다.[32] 그래서 삼국지연의를 다루는 현대의 매체들은 이 부분들을 합리적으로 해석하려는 시도를 많이 하고 있다. 예를 들어 제갈량의 동남풍 사건은 사실 천문을 유심히 관찰해서 타이밍에 맞춘 연출이었다던가.
  • 장각이 과거에서 떨어졌다고 서술이 나오는데, 실제로 과거제수나라때부터 나온다.
  • 정원의 관직은 병주자사이며 형주자사가 아니다.(낙양입성 직후 집금오에 임명) 참고로 형주자사로 유명한 유표는 동탁 집권기에 형주자사로 임명된 사람이다.[33]
  • 관우의 천리행을 지도에 그려보면 방향을 제대로 잡지 못하고 빙빙 돌면서 가고 있다.[34]
  • 서서가 계책으로 조인을 물리치던 시점에 조인이 뜬금없이 번성에 주둔하고 있다. 번성은 유표의 거점인 양양의 바로 이웃에 있는 성인 만큼 유비가 주둔한 신야보다 남쪽에 위치하고 길도 하나뿐이라 조인이 신야를 우회해 번성으로 가서 주둔할 수 있을 리가 만무하다.
  • 제갈량이 적벽대전에서 동남풍을 불게 하여 이 동남풍을 이용하여 화공을 사용해 조조군을 격퇴시켰다고 묘사되었지만 그런 능력을 장합이나 사마의에게는 써먹지 못했다. 심지어 안개가 낄 것을 예측한 젊은 시절과는 달리 북벌중에는 소나기가 내릴 것도 예측 못해 상방곡에서 거의 다 잡을 뻔한 사마의를 놓치기도 한다.
  • 조조가 적벽대전에서 화공을 받은 직후 패주하다가 복병을 여러 번 만나는데[35] 연의 내용을 보면 조조는 남군 강릉으로 가기 위해 남이릉 길을 택하는데, 하늘에 기도를 해 동남풍을 불게 하고 유비 진영으로 귀환한 제갈량이 조운에게 형주/남군 가는 길 중 형주 가는 길을 막고, 장비에게 남이릉/북이릉 가는 길 중 북이릉 길로 가라고 한다. 그리고 퇴각하던 조조는 조운을 만나 털리고[36], 남이릉 길로 가던 중 장비에게 습격당한다
  • 적벽대전 이후 주유가 남군성을 공략하는 도중에 유비군에게 강릉, 양양, 남군을 스틸당하는데 그중 양양은 어느새 관우가 형주공방전으로 공격할때 어느새 조조의 땅으로 나온다.
  • 조비가 사마의의 조언을 받아 오로침공전에 선비와 남만에게 촉을 공격하라고 애기하는데, 일단 낙양과 익주의 거리가 멀고 가는 길이 험하고, 사신이 남만에 도착한다고 해도 최소 1년이 걸린다. 그렇다고 인접지역인 손권이나 사섭을 시켜서 남중의 반란을 획책한 것도 아니다. 실제로 위나라의 오로침공은 허구이며, 연의에서 촉을 치는 것으로 되어 있는 선비의 족장인 가비능은 오히려 촉한의 동맹이었다. 맹획의 거병은 손권의 명을 받고, 사섭의 권유로 통해 옹개가 끌어들여서 한 것이다. 그래도 워낙에 유명한 에피소드라 정조와 경연하는 자리에서 신하가 정사가 아님에도 이 에피소드를 인용할 정도였다.

6. 조선전래 및 유행

대략적으로 연의가 조선에 들어온 시기는 16세기 초중엽 쯤으로 추정되는데 2000년대에 16세기 중엽 판본으로 추정되는 삼국지연의의 금속활자본이 발견된 적이 있다.해당기사, 이후에도 적벽가 등에서 보듯이 어느 정도 조선만의 독자적인 삼국지 관이 형성되었던 듯 하다.

비슷한 시기 조선왕조실록에도 잠깐 언급되는데, 선조 2년(1569년)에 기대승이 선조 임금 앞에서 '삼국지연의라는 이 책이 나온 지가 오래되지 아니하여 소신은 아직 보지 못하였으나, 간혹 친구들에게 들으니 허망하고 터무니 없는 말이 매우 많았다고 하였습니다.' 라고 이런 책이 인출(印出, 인쇄)되기까지 했다며 개탄하고 연의와 함께 초한지, 전등신화태평광기까지 싸그리 모아서 깐다. 이 말 이전에 선조가 '장비의 고함에 만군이 달아났다고 한 말은 정사에는 보이지 아니하는데 연의에는 있다고 들었다'라고 한 것을 보면 어쨌거나 임금인 선조도 연의가 유행한 것을 주위에서 들었을 정도로 금세 알려진 책이던지, 아니면 선조도 실제로 봤는데 대놓고 봤다고 하면 좀 그러니까 그렇게 언급한 것일 수도 있다.해당 실록기사 어쨌거나 유학자의 입장에서, 실제의 역사가 아닌 창작물이 그럴싸하게 회자되는 세태가 우려되었던 듯 하다. 근데 솔직히 그만큼 재미있긴 하다. 온갖가지 오락물이 넘쳐나는 지금도 수많은 삼덕후가 양산될 정도인데, 조선시대 사람에게 이게 얼마나 흥미진진했을지는 알 만하다.

하지만 근대에 들어 자료를 접하기 어려워졌기 때문에 조선시대의 삼국지 문화는 현대에 별로 전달되지 못했다. 후일 문체반정을 일으켰을 정도로 문체적으로 보수적이었던 정조는 삼국지를 잡스러운 책이라고 나는 삼국지(연의)를 한 번도 보지 않았다는 기록이 있다. 정조는 이순신을 칭찬하면서 '제갈공명과 싸워도 누가 이길지 모른다'고도 했다지만 애시당초 조선이 성리학 국가였고 그 때문에 촉한에 대해 긍정적으로 생각한 경우가 많았던 걸 생각하면 진짜 역사서만 보고 연의는 안 봤을 수도 있다는 의견도 있다. 실제로 홍재전서를 보면 어떤 신하가 연의의 오로침공전 에피소드와 제갈량 거문고 공성계를 얘기했는데 그냥 넘어갔다. 이런 걸 보면 진짜로 안 봐서 지적을 못 한 걸 수도 있다.[37][38][39]

7. 번역

현대에 들어서도 한국에선 월탄 박종화, 김구용 등 많은 작가들이 삼국지 번역을 시도했으며, 근래에는 이문열 평역 삼국지, 황석영 삼국지 등이 현대어로 번역하면서 문학적 가치를 높였다 하여 유명해졌다. 하지만 의미를 올바르게 번역하지 않았다는 비판도 제기되어 본 삼국지, 정원기 교수의 정역 삼국지, 그리고 박기봉의 완역 삼국연의 등이 나타나게 되었다.

삼국지 번역자들을 살펴 보면 박종화, 이문열, 황석영 같은 소설가들도 있는데, 어째서 한학이나 중문학을 전공하지 않았을 이들 작가들이 삼국지를 번역하는가 하는 의문이 들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삼국지연의" 원문은 사서삼경 원문을 독해할 정도의 실력이면 한학이나 중문학 전공자가 아니라도 어렵지 않게 읽어 나갈 수 있다.[40] 다만 한자학, 중국어문학, 역사학 등 전문적인 배경 지식을 갖고 번역된 게 아니므로 이들 작가들의 번역본에는 대개 '평역'이라는 말이 따라붙는다. 말하자면 아마추어 번역이다. 대신 작가들이 번역한 작품들은 대체적으로 읽기 쉬운 문장을 쓰기 때문에 진입 장벽이 낮다는 장점이 있다. 반면 한학이나 중문학 전공자들이 번역한 작품은 번역이 충실하고 오류가 적지만 대체적으로 문장이 딱딱하고 읽기 어렵다는 단점이 생긴다.

일본의 경우, 삼국지 통속연의라는 제목으로 에도 시대에 널리 퍼졌다. 근대에는 소설가 요시카와 에이지가 번역한 판본(요시카와 에이지 삼국지)이 널리 읽혀졌으며, 이것이 우리나라에도 수입되어 국내 삼국지 번역계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고우영 삼국지 등 만화로 번역되는 경우도 많다. 대상 연령층을 낮게 잡은 것이 많으며[41] 이해하기 쉽다는 장점이 있지만 재미없을 것 같거나 만화로 표현하기 적당치 않은 부분을 뭉텅 잘라먹는 경우가 많다. 심할 경우 왜곡하는 경우도 있으므로 입문서로는 쓰되 맹신하지 말자. 또한 대부분 모본이 요시카와 삼국지가 많다보니 제갈량 사후부터는 생략하는 경우가 많다.

한국 삼국지연의의 번역본에 관해서는 삼국지/관련 작품 문서 참조.

7.1. 조루 현상

삼국연의는 대부분의 작가들이 평역 과정에서 조루 현상을 일으킨다. 작가들은 초반부에는 오리지널 에피소드를 적극적으로 섞으며 맛깔나게 창작한다. 이 때는 자신이 나관중을 능가할 수 있다는 패기가 느껴진다. 이 패기는 대개 적벽대전까지 지속된다.

그러나 적벽대전이 끝나고 나면 모든 작가들은 이 마귀 같은 대하소설에 손 댔다는 것을 후회하며 때려치우고 싶은 유혹에 시달리게 되는 듯. 그도 그럴 것이 적벽대전을 지나도 삼국정립까지는 한참 멀었다(). 원판 연의(이하 회수는 모종강본 기준)에선 삼고초려가 37회에 펼쳐지고 화용도가 50회인데, 추풍오장원이 104회다. 즉, 적벽대전은 절반에 조금 못 미친다.[42] 추풍오장원까지만 쓰더라도 지금까지 쓴 만큼 더 써야 한다.

서천 정벌 이후 관우, 장비, 유비차례대로 죽고, 메인 악역인 조조마저도 죽어버리는 84회의 이릉대전, 85회의 유비 사망에 이르면 처참한 비극에 작가는 정신적 충격을 받아 의욕을 상실한다. 그렇다고 이릉대전이 오가 대활약하는 계기가 되는 것도 아니라서 이후 오의 비중은 급감.

그 뒤로는 어떻게든 한시라도 빨리 이야기를 끝내기 위해 본래 연의의 내용에 따라 적당히 진행하게 된다. 다행히도 제갈량이 있어서 아직은 버틸 수 있다. 이제 부터는 제갈량 원 톱이다. 사실 연의에서 제갈량이 유독 띄워진 건 후반의 재미를 책임져야 할 원 톱이라 그런 걸 지도 모른다.

남만 정벌은 개그 캐릭터 맹획타사대왕, 올돌골 같은 정겨운 이민족들의 도움으로 근성 있게 버텨나간다. 사실 이미 판타지 소설이 되었으나 작가들은 아무런 위화감도 느끼지 못한다. 바로 전의 이릉대전이 줄초상인 걸 감안해 남만 정벌은 특별히 죽는 네임드 없이 가볍게 진행된다.

그리고 제갈량의 북벌. 드디어 최종보스사마의가 등장했다. 제갈량과 사마의의 치열한 대결이 벌어지자 작가들은 가까스로 남만의 독기에서 빠져나와 그나마 제정신인 내용을 쓰기 시작한다. 상대가 조조의 뒤를 책임질 "지장 스타일의 적"인 사마의라서 제갈량과 계략을 주고 받으며 싸운다. 조조와 유관장 시절 만큼의 간지폭풍 전개는 아니더라도 군담 다운 재미를 느낄 수 있다. 그러나 이전의 이야기들이 호쾌한 활약으로 앞날이 기대되는 희망찬 전개(특히 삼고초려-적벽대전-서천정벌로 이어지는 유비군 전성기.)였다면, 북벌은 그 제갈량이 나섰는데도 온갖 사건사고로 발목 잡히고 조운도 세상 뜨고 되는 일이 하나도 없는 속 터지는 전개.

결국 제갈량가을 바람 타고 세상을 떠나버린다. 그리고 대부분의 작가들은 여기에서 제갈량의 죽음과 함께 자신도 한계를 느껴 붓을 꺾고 쓰러지고 마는 것이다. 차라리 죽여라 사마의로 이야기를 진행하고 싶어도 사마의는 후반부에 툭 튀어나온 감이 있고, 상대하는 인물들이 기껏해야 조상 정도라 길게 진행하기가 힘들다(다만 하후돈-조인-조진 + 조휴-조상 등으로 이어지는 범 조씨 일족과 사마씨 일족 사이의 병권 다툼은 정치적인 에피소드이긴 하지만 충분히 많은 내용을 쓸 수 있다. 연의에서도 일단 고평릉 사변의 내막은 다루어주긴 했다). 이미 최강자인 제갈량과 맞수로 싸웠는데 그의 상대로 던져줄 자가 마땅치 않다.

나관중도 제갈량 사후는 지루했는지 1권으로 압축했다. 제갈량이 죽는 부분이 연의 104회인데, 나머지 10여 회가 그 후 46년을 다룬다. 시대 전체로 보면, 제갈량이 사망한 시점은 삼국지에서 다루는 시기의 중간 쯤이다. 연의가 총 96년의 역사를 다루는데, 제갈량이 사망한 시점이 50년이 흘렀을 때다. 역사적으로 분량을 제대로 맞추려면 제갈량이 죽었는데 지금까지 쓴 만큼 더 써야 한다는 것. 게다가 그 1권의 비중도 편차가 심하다. 대부분이 제갈량이 사망한 뒤 촉이 멸망하는 30년 정도만 크게 다루고 위의 멸망부터 진이 오를 정벌하여 천하통일하는 부분은 119회 마지막 몇 장 정도와 120회로 압축되었으며[43] 1권의 20분의 1 분량에 불과하다.

물론 후반부에도 강유등애 등 흥미를 끌 수 있는 인물들은 많으나, 이전 세대의 인물들이 워낙 캐사기급 포스를 가지고 있어서 묻히는 감이 없잖아 있다. 무엇보다도 제갈량 사후의 삼국은 전쟁을 일으키는 횟수가 많지 않았다. 촉은 다시 내정에 힘 썼고 타국 역시 마찬가지였다. 삼국이 개국 초기의 혼란기를 지나 안정기에 들 시기였다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는 예전 만큼의 재미난 장면-전쟁, 암투-이 많이 나올 수도 없다. 애초에 강유나 등애[44] 또는 다른 인물들이 자신의 포스를 발휘할 무대 자체가 많지 않았다는 것이다. 즉, 아예 재미나게 쓰기가 힘든 부분이다.

그래도 나관중은 조방의 폐위와 사마소의 위왕 시해, 제갈탄의 난 제갈각, 손준의 분쟁 등 위나라와 오나라의 중요 사건들도 한 둘씩 다루며 어떻게든 결말을 맺었다. 하지만 다른 작가들은 여기에서 근성이 다 떨어지며 제갈량 사후는 다룰 수가 없게 된다.

그래서 많은 삼국지 관련 창작물들이 제갈량의 죽음을 삼국지의 종료로 취급하고 있다. 책에서는 요시카와 에이지 삼국지, 영웅 삼국지, 드라마 삼국은 제갈량이 죽고 다음 화에서 사마의가 쿠데타에 성공한 직후 사망하며 끝난다. 요코야마 미츠테루 삼국지 역시 전 60권 분량 중 제갈량 사후 내용은 마지막 60권, 딱 한 권 뿐이다. 그나마도 촉이 멸망하는 시점까지만 다룬다.

대한민국의 판본도 사정은 마찬가지여서 요시카와 에이지본을 원작으로 한 고우영 삼국지, 장정일 삼국지 등은 원작대로 제갈량의 사망과 함께 작품이 끝나고, 이문열 평역 삼국지는 제갈량 사후 부분이 나오기는 하지만 원본에 비해 4분의 1 정도의 분량으로 축약되어 있고, 작가가 직접 축약하겠단 뜻을 밝히는 구절이 있다. 즉 1/4권만 할애하고 바로 사마염의 통일. 참고로 제갈량 사후의 비중은 자치통감에선 1/4, 모종강 본 삼국연의에선 1/8 정도라 알려져 있다.

한국의 삼국지 번역 가운데 그나마 조루 기운이 없는 건 비교적 원본에 충실한 박종화 삼국지(여섯 권 중 마지막 권 전체가 제갈량 사후 이야기다.), 본 삼국지, 정원기 정역 삼국지, 황석영 삼국지 정도. 황석영 삼국지나 본 삼국지와 정원기 삼국지야 괜히 창작 같은거 안 넣고 연의를 그대로 번역했으니 당연한 이치고. 그 중 상당수는 강유에게 할애되어 있는데, 위와 오를 다룰 만 하면 다시 촉으로 넘어가고 강유가 나타나는데 사실 연의도 뭐 비슷하다.

이 조루 현상을 깨고 정상적으로 삼국지 정사와 연의를 섞어서 후반부를 풀어나간 창작물이 한국과 중국에서 각각 2010년대에 하나 둘씩 나오고 있다. 바로 웹툰 삼국전투기화봉요원 그리고 대군사 사마의가 그것이다. 작가 최훈제갈량 죽었으니 삼국지 끝이라는 독자 앞에서[45] "아직 삼국지 1/4이나 더 남았는데"라고 말하는 컷을 그렸으며, 실제로 1/4을 채우고 결국 에필로그로 황건적의 난을 그려 삼국지 100년을 모두 묘사하게 되었다. 많은 독자들이 제갈량 사후의 역사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알게 되었고 이를 바탕으로 또 다른 재평가의 바람도 불고 있다. 여담으로 독발수기능의 난 등을 표현할 때는 오히려 정사 삼국지를 넘어서 진서 자료에서 구해서까지 쓰며, 최소한 삼국전투기 만큼은 그의 작품 중 조루라 불리지 않을 입지를 쌓았다.

물론 어디까지나 재미를 위해 연의와 정사를 혼합한 만화이니 사실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그리고 이 작품 역시 삼국전투기 문서에도 나오지만 삼국지 후반부의 조명을 잘했다는 점은 칭찬 받을 만 하지만, 작가 스스로도 미숙한 점을 후기에 인정했을 만큼 비판도 많이 받은 작품이다. 사실 삼국전투기도 아주 조루가 없던 건 아니고 시즌 2는 제갈량사마의의 대결로 구성한다고 해 놓고는, 정작 제갈량은 이도 저도 아닌 색기담당으로만 굴려지다 오장원 전투에서 허무하게 죽어 지각을 기다리며 매주 챙겨 본 독자들의 공분을 사기도 했고… 여러가지로 중간에 쉬는 기간도 있었고 악명 높은 지각 연재에 결국 10여 년을 끌어 간신히 완결시켰으니... 삼국전투기 후기의 이 작품을 그리려고 참고한 서적들이나 애시당초 연의에 정사 섞어서 쓰려고 했던게 실책이었다는 최훈의 토로만 봐도 창작물에서 삼국지 관련 매체를 다루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알게 된다. 삼국전투기 후기

한편, 중화권(홍콩)에선 또 하나의 삼국지 만화가 제갈량 사후 사마의의 사망까지 그리려 하고 있는데 바로 화봉요원이 그것이다. 연의와 역사적 사실을 섞은 비교적 가벼운 그림체로 그린 삼국전투기와는 달리 작가 나름대로의 해석을 통한 플롯과 각종 고전들을 인용해가면서 극화체로만 삼국전투기에선 나올수 없었던 대규모 전투신을 묘사해가면서 그려가고 있는데 15년 연재하고도 이제야 유비의 형남 4군 평정을 그리고 있으니 갈 길이 멀다. 더군다나 최훈과는 달리 이 작품의 작가 진모는 진짜 성실하게 그리면서 60여 권 가까이 그렸는데도 아직도 완결까진 한참 남았으니 가히 창작물에서 삼국지를 다루는게 얼마나 힘든 것인지는 능히 짐작이 갈 것이다.

또한, 대군사 사마의 역시 제갈량 사후 조상 일파와 사마의 일파의 권력투쟁, 사마의의 꾀병행각, 고평릉 사변과 이후 사마의 일파의 권력장악 과정을 그려내면서 그나마 21세기 삼국지 관련 영상물 중 제갈량 사후부터 사마의 사망까지를 제대로 그려낸 작품으로 손꼽히고 있다.[46] 물론 낙곡대전을 왜곡시킨 한계가 있지만, 이는 드라마 특성상 어쩔 수 없는 한계임을 감안할 필요가 있다.[47]

코에이삼국무쌍 시리즈도 이런 면을 보였지만 6편에선 이 점을 해결하고자 했는지 사마사, 사마소 등 종반기의 인물도 등장시키고 있다.

7.2. 정사드립 주화입마

삼국지연의를 개역하다가 흔히 빠지는 함정. 작가가 정사드립을 치기는 하는데 훈련이 제대로 안 된 나머지 주화입마에 걸리는 현상을 뜻한다.

정사랍시고 인용은 했는데 기전체의 특성을 잘 모르고 정사의 일부만 참조하여 다른 부분에 나온 기사를 보지 않고 "이런 일은 실제로 없었다."고 당당히 말하는 경우가 가장 대표적인 예다.

정사와 연의를 뒤죽박죽으로 뒤섞어서 기억하는 경우도 있다. 연의의 인물상을 중심으로, 정사의 에피소드를 끼워넣어서 캐릭터를 판단하는 것과 같은 예. 이렇게 되면 흔히 자기가 좋을 대로만 정사를 끼워넣고, 또 자기가 좋을 대로만 연의를 인용하면서 자기 스스로도 혼란에 빠지게 된다.

이문열 평역 삼국지에서 이런 현상을 흔히 볼 수 있어서 욕을 먹었는데, 사실 전문적으로 파고들지 않으면 이런 현상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8. 관련 작품

9. 기타

워낙 대작인 터라 이에 얽힌 야사도 많은데, 나관중이 이걸 쓰는 동안 반쯤 미쳐서 돌아다녔다든가(뭘 묻기만 하면 소설 내용을, 그것도 앞뒤가 안 맞게 이야기했다는 정도로), 처음에는 관우를 신나게 비판하다가 진짜 관우의 혼령이 내려와버려서 크게 놀라 다시 썼다든가하는 이야기 등이 전해내려온다. 물론 이는 그만큼 나관중이 이 작품을 잘 썼다는 이야기로 요약될 수 있을 것이다.서양에는 19세기에 소개되었는데 처음 연의가 소개될때 가장 인상깊게 소개된 인물은 제갈량이며, 이후에 나관중은 동양의 호메로스, 타키투스 취급을 받았다고 한다.

삼국지연의가 하도 유명하다 보니 중국의 모든 역사적 시기를 통틀어 정사와 소설을 혼동하는 사람들이 단연코 독보적으로 많다. 사실 삼국시대가 역사적으로는 시기가 짧고 비중도 적은 시대인데 소설이 워낙 유명하다 보니 이런 현상이 더 커지는 것이다. 웬만큼 배웠다는 사람도 자주 혼란을 일으키며, 정사 삼국지를 조금 읽은 사람은 무슨 마공인지 주화입마에 빠져서 연의와 정사의 내용이 머릿속에서 뒤죽박죽이 돼버리는 건 예사다. 예를 들면 낙봉파[49]에서 방사원을 어쩌고하는 시를 지었다가 소설가지고 시짓는다는 소리를 듣는 일 등이 생각보다 자주 벌어졌다.

이걸 엄격히 구분할 줄 아는 사람은 전문 연구가나 골수 삼덕후들밖에 없는데 이런 사람들도 가끔 혼란을 일으킨다.

한국의 사극에도 많은 영향을 끼쳤다. 특히 2000년대 대작 사극에서 등장하는 의형제 3인방 포지션의 인물들은 십중팔구가 유관장 삼형제의 영향을 받았다.[50]

삼국지연의는 한국뿐만 아니라 일본 중국 등등에서도 많이 차용되는 소설 중에 하나다. 사극또한 그러하다. 대게 동양 문학 입문과정에서 삼국지연의는 항상 나온다. 특히 게임의 경우 노부나가의 야망도 삼국지연의를 차용하는 흔적이 자주 보인다. 그도 그럴 것이 코에이 대표 게임 중 하나가 삼국지다.

작품 내에서 상대보다 압도적인 전력을 이끌고 온 군주가 오히려 적은 수의 적군에게 지는 경우가 많다고 느낄 수도 있는데(관도대전의 원소, 적벽대전의 조조, 이릉대전의 유비 등), 사실 대군이 패배한 경우가 묘사가 많고 임팩트가 크게 남아서 그렇지 실제 연의에서는 대병력에 밀리거나 항복하는 약소군주가 훨씬 많다. 유대, 교모, 한복, 여포, 원술, 유표, 마초, 장로, 맹획, 공손연 등 이외에도 대군에게 발린 경우가 수도 없이 많고 유비조차 조조의 대병력에 숱하게 박살나며 초창기의 조조 역시 서영의 대병력에게 박살난다. 선택적 기억의 문제라고 해야 할 것이다.

기본적으로 군담소설이기 때문에 문신들은 비중이 거의 없다. 제갈량이 군략가의 포지션이 된 것은 그가 역사대로 문관이 되면 후반부에는 혼자 비중이 적어지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것마저도 그나마 문신들이 비중이 높은 편에 속한다는 말이 있다. 당연한 것이 이것은 역사서가 아니라 소설이고, 더 넓게는 대중문학이다. 이전에는 판소리처럼 이야기꾼이 이야기하는 형식이었고, 원대에는 잡극이라고 해서 연극으로 다루는 내용이었다. 이런 이야기를 돈 받고 하면서, 읽는 사람, 듣는 사람, 보는 사람에게 임팩트와 재미를 주려면 내정보다는 전쟁, 전쟁보다는 일기토라고 불리는 일대일 결투를 벌여야 한다. 특히 원나라 시대를 주름잡았던 원대 잡극의 경우는 어지간한 것은 다 일기토로 때워버리는데, 연극하면서 관객들 하품할 내정 장면을 넣거나, 돈 많이 주고 엑스트라 동원해봐야 규모가 얼마 될 수 없는 전투 장면 넣느니 차라리 장군 둘이 맞싸움 벌이는 것이 보는 사람 이해하기 편한 것이다. 제갈량이 대놓고 칼 싸움 안하고 도술 안 부린 것을 다행으로 여겨야 한다. 단적으로 삼국지평화의 제갈량과 방통은 완전한 신선처럼 묘사되니 말이다. 삼국지의 제갈량은 수호전의 오용과 공손승을 8대 2 내지 9대 1정도 비율로 섞어놓은 듯한 이미지인데, 여기서 비율을 1대1로만 조절해도 봉신연의를 향해 달려가게 된다.

충무공 이순신이 애독했던 책이기도 하다. 청성잡기에 따르면 이순신에게는 은거기인 친구가 있었는데 충무공이 그 재능을 아껴 편지를 보내 같이 나랏일을 하자고 제안했지만 그 친구가 거절하면서 '중국의 선비인 나관중의 삼국지연의라는 책이 있는데 이 책을 숙독하면 도움이 될 것입니다'라며 삼국지연의를 충무공에게 보냈다고 한다. 실제 난중일기에도 가정본 삼국연의를 인용한 구절이 존재한다.#

이 소설과 수호전을 동시에 비판한 '쌍전(원제 쌍전비판)'이라는 책도 있다. 책사들인 제갈량과 사마의의 잔혹한 책략들, 자기 군주나 부하를 위해 다른 목숨을 함부로 버리는 행동(예를 들어 조운이 아두를 구출해 오자 훌륭한 장수를 잃을 뻔했다며 자기 아들인 아두를 버리려고 한 유비 등. 그러면서 백성은 또 아끼는 모습을 보여준다고, 유비가 이중잣대를 들이댄다고 비판했다.)[51]을 비판 소재로 삼았다.[52]


[1] 원말명초에 나관중이 집필한 원본은 현재 소실되었다.[2] 심지어 삼국지 관련 문서에도 역사책에 관한 서술과 연의에 관한 서술이 함께 있다.[3] 후한 말~삼국시대를 함축적으로 표현한 명문으로 꼽힌다. 다만, 국내외 삼국지 평역 작품들 중에 이 문장이 그대로 수록되는 경우는 드물다. 아무래도 서두에 해당되는지라 작가마다 개인의 감상을 적어 넣기 때문인 듯 하다. 평역이 아닌 일반적인 번역의 삼국지는 이 문장이 있다.[4] 이십이사차기라는 서적을 지어 청대까지 남아있는 정사서 22종에 대한 개인적인 견해와 비판을 남겼다.[5] 달리 말하면 관우, 제갈량처럼 아예 신으로 섬겨지거나, 그렇지 않더라도 유관장 등 조선왕조실록을 비롯한 후대의 온갖 서적에서 이런저런 대조를 위해 회자되는 이러한 인물들이 후대에 사회/문화적으로 지대한 영향을 끼친 것이 장각 등보다 결코 못하지 않다고 말할 수 있다. 당장 현대에도 동아시아 3국에서는 거의 모든 사람이 유비, 조조, 공명 정도는 알고 있으니까![6] 반대로 "삼국지를 세 번 이상 읽은 이와는 상대를 하지 말라"는 말도 있는데, 이는 삼국지에 워낙 온갖 교활한 술수와 책략들이 넘쳐 흐르다보니 삼국지를 3번이상 열독한 사람이라면 그만큼 사기꾼지략가일 가능성이 높다는 뜻이다.[7] 각자 특색이 강했던 동아시아 문화권이지만 삼국지에 등장하는 개개인의 인물상이나 명언, 사건 등을 공유하고 있고 생활에 적용하는 등, 동아시아 문화권을 하나로 잇는 대표적인 아이콘이기도 하다.[8] 다만, 삼국지평화를 읽어보면 삼국지연의와 얼마나 다른지를 알 수 있다.[9] 참고로 보통 황건적의 난이 일어난 184년부터 오가 멸망하는 280년까지를 연의의 배경으로 삼는데 이 기간 중 가장 많은 지분을 차지하는 사람은 사마부(180년 ~ 272년)다. 황건적의 난이 일어나기 전에 태어나서 서진 건국까지 보고 죽었다.[10] 이런 관점에서 보면 삼국지연의 마지막 주인공이 강유인 점도 납득할 수 있다. 그는 높은 뜻을 품은 사대부이자 신의를 위해 목숨도 태연히 버리는 남자였으니까 말이다.[11] 일례로 조조가 여포, 원소 등과 싸우는 부분이나, 손책이 강동을 정벌하는 부분이나, 혹은 합비공방전.[12] 연의에서 제갈량의 첫 활약이었던 박망파 전투는 사실 유비의 작품이다. 유비가 복병을 설치해, 하루아침에 자기 병영을 불사르고 거짓으로 달아나니 하후돈 등이 이를 추격하다 복병에게 격파당했다.[13] 수호지의 작가 시내암은 삼국지연의의 저자 나관중의 스승으로 알려져 있다.[14] 중국 속어중에는 유비가 아두를 땅에 던진 것은 인심을 매수하기 위해서라거나 유비는 울어서 강산을 차지했다라는 말이 있듯이. 이 속담들은 연의의 유행 이후 등장한 것이다.[15] 물론 중국문화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유교나 도교 단 하나만이 아닌 유불도 삼교를 모두 이해해야만 하며, 무위의 치 개념도 따라서 유교도교 양쪽으로 해석이 가능하다. 도교적 해석의 무위의 치는 다스리지 않으면서 다스리는 즉 순리에 어긋나는 행동을 하지 않는 정치를 말하고, 유교적 해석으로는 공자가 요순에 대해 평가했듯이 공손하게 자신의 몸을 낮추고, 자신의 몸 가짐을 바르게 하며, 어진이들을 불러 모으는 정치를 말한다. 그러므로 요순 시대를 극찬하던 것도 공자이기도 하고 여기서의 무위의 치 개념은 도교라기보다는 유교적 개념에 가깝다. 다만 그렇다고 도교와는 전혀 관련없는 개념이라는 것도 물론 아니다. 노자공자의 대화… 혹은 대화했다는 전설이라던가 초기 유교도교 개념들은 상당히 겹치는 것들이 많다.[16] 후대에 갈수록 관중 악의보다 거의 전설상의 인물들인 이윤여상에 제갈량이 자꾸 비유되는 것도 바로 이런 연유 때문이다. 전설적인 군주 탕왕의 재상 이윤이나 주문왕의 재상 여상도 이런식으로 재야에 머물다가 덕망있는 군주에게 등용된 케이스이기 때문. 제갈량은 여기에 더해서 선비로서 사심없이 충심을 다해 왕으로부터 전권을 이임받아 자신의 재능을 마음껏 발휘했다는 플러스 포인트도 추가된다.[17] 본디 나관중본은 구전적 성격이 많이 남아있었고, 당연히 통속적인 성격을 지닌다. 때문에 위/촉/오의 구성이 비교적 평균적이라 어느 소속이든 슬기롭고 충성스러우면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왜냐하면 말 그대로 <통속연의>이고, 아무튼 각 인물들이 멋있으면 그만이었다. 나관중본의 경우는 관우의 죽음도 그냥 하늘로 올라가 버리는 것으로 처리하기도 했다. 이를 적토마올가미에 걸려 넘어져 관우가 붙잡히고, 손권 앞에서 영웅적 최후를 맞는 것으로 소설적 성격이 강하게 각색한 것은 모종강본이다.[18] 한편으론 모종강이라고 100% 촉을 쉴드치진 않았다. 일례로 관우가 손권의 딸을 개의 딸 운운하며 모욕하는 장면에선 협평으로 그럼 유비는 그 개의 딸과 결혼한거냐며 비판한다. 여기에 노숙이 유비 측이 익주를 먹으면 형주를 돌려주겠다는 문서를 가지고 오자 주유는 이런 종이 쪼가리를 어떻게 믿냐며 분노하는데, 여기서 “원래 문서란 믿을 게 못 된다. 형주만 그런 게 아니다.”라는 협평이 들어간다. 유비 측을 은근히 사기꾼처럼 볼 수도 있는 협평이다.[19] 유비의 친척으로 설정된 유연의 아들 유총이 진나라를 멸망시킨다[20] 서진의 후신인 동진의 진명제가 그것과 관련된 진실을 듣고는 "그게 사실이면 그 진나라가 오래 못간건 당연하고 이 진나라도 오래가지 못할 것이오" 라고 한탄했을 정도로 사마씨의 찬탈은 탈법의 정수였다. 그러니 진수가 그걸 그대로 쓸 수 있을 리가 없다.[21] 단적인 예가 양대장이다.[22] 이에 리동혁의 「본 삼국지」는 모종강본에서 삭제된 부분을 나관중본 등 다른 11가지 판본에서 따와 되살렸는데, 이 점으로 지지자들에게는 '본좌 삼국지'라며 찬사를 받는 반면, 비판자들에게는 “리동혁은 모종강본을 너무 싫어한 나머지 12가지 각종 판본을 모조리 뒤섞어놓아서 내용을 엉망진창으로 만들었고 쓸데없이 나관중본을 문맥에 맞지 않게 끼워넣어 독자들에게 혼란을 가져 왔다. 「본 삼국지」는 초판본 11권 부록(인명·관직사전)밖에 가치가 없다''는 극딜을 당하는 등 양 극단의 평가를 받고 있다.[23] 즉 한자 사이에 ~하다. 같은 류의 것이 들어간 것. 사자소학을 읽어본 사람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예컨대 父生我身하고, 하는 식.[24] 증거는 인문본에서는 허사와 왕해가 원술에게 명상이 아닌 명공이라 칭한 부분이 결정적인 증거. 단, 개정판에서도 그대로 되었는지는 추가 바람.[25] "운장은 인간 세상에 너무 오래 머물렀다. 옥황상제의 조칙이 있으니 범부와 승부를 겨루지 말라"라는 목소리를 하늘에서 듣고는, 싸우다 말고 승천한다.[26] 흔히 알려진 관우의 최후는 바로 모종강본의 모습이다.[27] 한고조가 백사를 벤 고사를 뜻한다.[28] 삼국지연의의 결말은 연의 전체를 되돌아보는 고풍이라는 장편 시가 장식하는데, 이 시의 마지막 수이다.[29] 현대 그리스인들도 고대 그리스막장 드라마를 방불케 하는 비극 선호 정서를 이어받아서 지금도 희극보다 비극을 좋아한다.[30] 삼국지뿐만 아니아 동아시아권 고소설들은 대체로 로망스라는 단어를 써서 설명하는 편이다.[31] 주연 격인 타이라 가문이 권력의 정점에 올랐다가 미나모토 가문에게 멸망당한다는 내용의 이야기이다.[32] 구비 문학으로 시작한 문학의 공통적인 특징이다. 이를 나관중, 모종강 같은 이가 정리한다고 해도 개개의 화소들이 흥미를 불러 일으키는지라 통일성을 해친다고 무작정 쳐내지는 못하니 앞뒤가 맞지 않는 서술들이 남게 되는 것이다.[33] 이를 반영한 삼국지 5에서는 황건적의 난 시나리오의 정원이 신야에 위치한 군웅으로 등장한다.[34] 사실 고증오류가 아닐 수도 있는게 현대식으로 축척을 잰 지도가 나오는 건 한참 후다. 관우가 지도도 없이 잘 모르는 곳에서 가고 있다면 빙빙 돌아가는게 그렇게 이상한 일은 아니다.[35] 이 부분도 허구. 실제로는 복병을 만나기 전에 조조군이 무사히 퇴각하고 이후 뒤늦게 도착한 유비군이 불을 질렀다고 한다. 물론 정사에서 유비네가 공을 날로 먹은 건 아니고 강남을 장악한 손권이 겨우 3만 군사를 준비해올 때 한낱 객장 신분으로 2만명이나 되는 군사(+휘하 명장들)를 동원해서 온다.[36] 이 부분은 조조가 최초에 형주/남군 중 어느 쪽으로 가는지 나와있지 않기 때문에 조조가 형주 길로 가던 중 조운의 복병을 만나 패주한 후 남군 쪽으로 방향을 틀었을 가능성도 있다.[37] 근데 재밌는 부분은 정작 정조가 칭찬한 이순신은 삼국지연의를 봤다는 점이다.[38] 그리고 또 하나 정조 임금은 이순신을 제갈량보다 높게 봤지만 정작 이순신은 자신을 제갈량보다 못하다고 말했다. 물론 사회상 겸손의 의미일 수도 있긴 하지만[39] 대략 임진왜란 7년전쟁 막바지였던 무술년에 명나라 수군도독인 진린이 조선수군 수영에 온뒤 이순신의 인품에 감화된 일화중하나가 어느날 진린이 천문을봐서 장군성이 흔들리니 이를 이순신장군의 별이 흔들리는봐 다가올 전쟁에서 이순신 장군이 크게 다치거나 전사할 위험에대한 조짐이니 이순신에게 제갈무후의 고사를 들며[53] 이순신에게도 기도를 할것을 건의했으나 이순신장군은 본인의 능력과 업적은 무후만도 못할진데 어찌감히 무후처럼 기도를 올리겠냐며 정중히 사양하는 일화가 전해진다 이 일화를 보면 알듯이 적어도 당시 충무공또한 삼국지연의를 읽어보았거나 삼국지속 인물들이나 일화들을 알고있음을 알수가있다.[40] 실제로 박종화는 한학에 조예가 깊었다고 하며 이문열, 황석영도 한학에 소양이 있다. 박종화는 실록은 고사하고 연려실기술조차 국역이 안 되어 있던 1970년대 이전에 굵직한 역사물을 몇개씩 써내던 사람이다.[41] 물론 그렇지 않은 것도 꽤 있다. 일단 고우영 삼국지부터가 그렇다. 90년대까지는 5권짜리 삼국지들이 많이 나왔다.[42] 아동용 삼국지 중 5권으로 편집된 판본들에선 대개 적벽대전이 4권 쯤에 벌어진다. 엄청난 분량 삭제를 볼 수 있는 부분. 이런 삼국지들은 대개 촉 중심으로 돌아가는데, 다시 말해 촉 하나만 중심으로 해도 5권이나 되고, 위, 촉, 오 전부 다루려면 분량이 무지막지하게 늘어난다. 또 요코야마 미츠테루 삼국지의 경우 관도대전 같은 부분이 나레이션으로 넘어가고 제갈량 사후는 단 1권으로 촉한멸망까지만 다뤘는데도 60권이나 되는 분량이다. 정말 연의에 있는 내용을 다 그려냈다면 60권으로도 모자랄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43] 118~119회의 강유의 항복~종회의 난과 맞먹는다.[44] 이들은 그나마 진태와 더불어 강유의 북벌 장면에서 활약하기라도 한다. 그 외에는 모조리 지못미.[45] 여담으로 이 소리를 하는 독자는 최훈이 야구친구와 스카우팅 리포트에서 그렸던 최민규 캐릭터와 똑같이 생겼다.[46] 같은 세기에 촬영된 신삼국은 제갈량 사후를 다룬 것이 고평릉 사변 단 하나뿐이다. 그나마 그것도 전후맥락을 잘라낸 바람에 부실하게 다루어졌으며, 네러티브로 사마염이 황제에 오르고 사마씨의 진나라가 삼국을 통일했다는 이야기로 끝난다.[47] 낙곡대전을 제대로 그려내려면 반드시 사천성의 위험천만한 산악지대에서 촬영해야 하는 데, 그러면 시간과 돈이 엄청 많이 소요된다. 실제로 구삼국 드라마는 등애촉한 정복을 재현하고자 실제 등애와 휘하 군사들이 올랐던 산악지대에서 촬영을 했다.[48] 사실 삼국지연의는 삼국지평화나 당시 떠돌던 민담, 정사 등을 섞었기에 그 자체로 2차 창작물에 가까우며, 그러므로 삼국지연의를 기반으로 하는 파생 창작물은 2차 창작물이라기보다는 3차 창작물에 가깝다.[49] 낙봉파라는 지명 자체가 허구다. 그런데 지금 중국에는 삼국지의 허구 지명들이 속속 다 생겨있다. 제갈량의 거처인 융중을 자처하는 곳도 여럿이고(이쪽은 실존했던 지명이지만). 이게 다 관광객들 대상으로 하는 돈벌이용.[50] 태조왕건에서 왕건, 신숭겸, 박술희가 대표적이며 각각 유비, 관우, 장비의 캐릭터가 입혀졌다.[51] 사실 이중잣대니 뭐니해도, 당시에는 혈육에 얽메이지 않는걸 좋게 보는 풍조가 있었다. 전국시대에는 연소왕이 악의를 참소한 태자를 두들겨 팼던 이야기가 있고, 같은 삼국시대에 조조는 전위의 죽음을 조앙의 죽음보다 더 애통하게 여겼다. 더 넓게 보면 대의를 위해 혈육들을 희생시키는 행위가 장려받던 게 전근대의 시대상이었다. 위나라를 위해 아들을 사지로 내몬 왕이가 여장부로 칭송받고, 민담에서 아들을 호랑이에게 던져주는 효부의 이야기도 있을 정도. 현대에도 가진게 많은 사람이 혈육보다 타인을 챙기는 것을 좋게 보는 건 변하지 않았다.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52] 사실 약간 억지인 부분도 있다. 권모술수라는 말은 오히려 병법의 기본이고, 당시 시대상으로는 오히려 자신과 부하를 위하는 것이 중요했다. 한고제가 자기가 자식들을 버린 것은 유명한 일화. 심지어 유선을 구해온 조운은 유비와 가족같은 관계 였고 유비가 가장 신임하는 자였다. 오히려 대표적으로 서서같은 인물은 자신의 모친을 생각해서 유비의 신임을 얻고서도 유비에서 조조로 간 자도 있다. 이중잣대라 하면 오히려 이 책을 쓴 류짜이푸가 유비에게 대는 것이 아닐까? 제갈량과 사마의에 관해서는 제갈량은 남만을 해결하기위해 제압 도중 저항하다 죽는 남만인들을 보고 언제까지 저들을 죽어야 하나라고 탄식 한다. 그러나 제갈량은 가혹한 계책은 오히려 적에게 하고 백성들을 보살폈다. 한편 사마의는 자신의 입지가 부족해지는 상황이였다. 오히려 가혹한 계책을 내서 확실하게 입지를 다져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