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19-11-21 04:09:35

마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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촉서(蜀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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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호대장군(五虎大將軍)
관우 장비 마초 황충 조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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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정사
2.1. 초기 생애
2.1.1. 평양 전투
2.2. 중기 생애
2.2.1. 동관 전투2.2.2. 기성 전투2.2.3. 장로 휘하
2.3. 유비 휘하2.4. 죽음
3. 연의4. 가족 관계5. 평가
5.1. 명성5.2. 통솔5.3. 무력5.4. 패륜아 논란
6. 둘러보기7. 미디어 믹스

1. 개요

西川馬孟起(서천마맹기): 서천의 마맹기(마초의 자)는
名譽震關中(명예진관중): 명성이 관중에 떨치었는데
信布齊誇勇(신포제과용): 한신, 영포와 같이 자랑할 만큼 용맹하고
關張可竝雄(관장가병웅): 관우, 장비와 나란히 할 수 있는 영웅이네.

馬超
(176년 ~ 222년)

후한 말과 삼국시대 촉한의 인물. 는 맹기(孟起). 양주 부풍군 무릉현 사람. 유비의 관장마황조 가운데선 유일하게 생몰년대가 자세한 인물이다.

2. 정사

2.1. 초기 생애

마초의 할아버지는 천수 난간현의 현위 출신으로, 그는 낙향한 후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고 강족 여인과 결혼해 마등을 낳았다. 마등은 후한명장이자 개국공신 마원의 후손이다. 마원의 조상은 조나라 명장 조사였다. 본래 조씨 성을 가졌지만, 조사가 마복군이란 호를 받은 후 성을 고쳐 마씨라고 칭했다.

마등이 어릴 때는 집안이 가난했는데 영제 말 양주에서 일어난 반란을 진압할 때 자원해 공을 세웠으나 영제(168년 ~ 189년) 말, 변장, 한수 등과 함께 양주에서 군사를 일으켰다. 192년, 한수, 마등이 무리를 이끌고 장안으로 나아가니 한나라 조정에서는 한수를 진서장군으로 삼아 금성으로 되돌려 보내고 마등을 정서장군으로 삼아 사례 부풍군 미현으로 보내 주둔하게 했는데 마초는 뒤에 남아 본거지를 지켰다. 이후 차근차근 성장해 양주의 유력한 군벌로 자리잡았다. 이런 배경 때문에 마초는 자연스래 강족저족 등 서북지역의 이민족들과 가까워졌고, 이로써 그는 그들의 지지를 얻을 수 있었다.

애초에, 한수와 마등이 관중에서 난을 일으켜 자주 유장의 아버지 유언과 교류하여 믿었다. 그 뒤 마등이 장안을 습격했으나 패주하고 양주로 되돌아갔다. 이때 마등은 이각곽사에게 식량을 요청했다가 거절당하자 다시 반란을 일으켰으나 패배, 장안에서 마등과 호응하려던 세력들이 모두 숙청당했다.[1]

마등은 진서장군 한수와 결탁해 의형제가 되었는데, 처음에는 서로 매우 친했으나 뒤에 부곡(部曲)이 서로 침입하게 되자 원수 사이가 되었다. 마등이 한수를 공격하자 한수가 달아났는데 무리를 합쳐 돌아와 마등을 공격해 마등의 처자식을 죽였고 싸움이 연이어 풀리지 않았다.[2] 또 건안(196년 ~ 220년) 초, 국가의 기강이 위태롭고 느슨해지니 사례교위 종요, 양주목 위단을 시켜 그들을 화해하게 했다. 단 이 싸움이 끝난 뒤에도 마등은 한수를 비롯한 관중의 군벌들과 산발적으로 계속 대립했고 관중 군벌들은 이합집산을 거듭했다.

196년 마등과 한수가 반목하여 싸웠고 마등의 처자식이 한수에게 살해당하였다. 마등의 아들 마초 또한 건장하다고 칭해졌다. 염행은 일찍이 마초를 찔렀는데, 가 부러지자, 부러진 모로 마초의 목을 쳐서 거의 죽임에 이르렀다.[3]

2.1.1. 평양 전투

원상고간곽원에게 수만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흉노의 선우와 하동으로 침략하려고 할 때, 마등과 한수에게 사신을 파견하여 화친을 맺으려고 했다.[4] 당시 원씨 형제가 조조의 하북 진군을 일시적으로 막아내는데 성공하여 전열을 고를 수 있게 되자, 별도의 경로를 통해 조조의 배후를 칠 계획을 세운 것이다. 마등은 몰래 그것을 허락했다.

원상의 관서 공격은 나름대로 공들여 준비한 전략인지, 먼저 남흉노의 선우 호주천을 부추겨 조조를 공격하게 했고 호주천은 평양현을 점거하고 사례교위 종요의 주력병력을 묶어두었고 이 사이 곽원과 고간은 인근의 군현들을 공략해 모두 함락시키며 하동으로 향해 그 위세가 관서 전체를 진동시켰다고 한다.[5] 곽원은 원소군 내부에서 명장으로 치부받았으며 실제로 이때 곽원이 가한 위협은 상당한 것이었다.

종요가 아직 호주천을 격파하지 못하고 있던 상태에서 곽원이 평양[6] 인근까지 당도하자 그 전력은 매우 강해졌고 장수들은 모두 두려워해 하동을 버리고 도망치자고 진언했으나 종요는 여기서 약하게 보인다면 관서의 제장들이 모두 원상에게 돌아설 것이라 하여 거부하였다.

한편 사예주 3군의 반란이 장기화될 것을 우려한 순욱은 두기를 하동으로 파견했는데, 순욱의 예상대로 두기는 하동군 내부에서 반고간 세력을 규합해 고간 진영을 혼란스럽게 하였다. 사례교위 종요가 관중을 진수하게 되자 한수, 마등에게 서신을 보내 화와 복에 관해 진술했다. 당시 종요 혼자만의 힘으로는 흉노와 곽원 양쪽을 모두 상대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무리였다.

어쨌든 마등이 생각을 바꾸어 조조를 돕기로 하고 아들 마초를 보내 종요를 뒤따르게 하니 마초는 1만의 대군으로 사례교위(종요)의 독군종사가 되어 곽원을 토벌했는데 날아온 화살에 맞자 화살을 부러뜨린 후 주머니로 자신의 다리를 감싼 채[7] 싸워 곽원을 격파하고 참수했다. 그만큼 마초가 용맹하기에 기록될 수 있었던 기록인데 이마에 화살을 맞고도 멀쩡히 군대를 지휘했다고 기록된 관우의 일화가 연상되는 대목이다. 또 곽원이 하북의 명장으로 이름이 나 있었고 실제 관서를 진동시켰다 할 정도로 조조 세력을 심히 위협했던 만큼 자신의 군세보다 수배의 위세를 가진 대군을 단번에 격파한 마초의 군사적 능력도 무시할 수 없는 대목이다.

이후 조령으로 서주자사에 임명되고 그 뒤 간의대부에 임명되었다.

2.2. 중기 생애

조조는 형주를 징벌하려고 했지만, 마등 등이 관중에서 할거하고 있었으므로 또 장기를 보내 마등 등을 설득하여 부하들을 해산시키고 조정에 돌아오도록 하자 마등은 이것을 허락하였지만 여전히 다시 미적미적 하고 이전과 같은 행동을 하였으므로 장기는 그가 변란을 일으킬것을 두려워해서 여러 현에 문서를 보내 식량 등을 비축하도록 준비하도록 하고, 군수에게 교외까지 나가 맞이하도록 했다. 2천석 관리가 교외까지 마중을 나가니 마등은 어쩔수 없이 동쪽으로 출발했다.[8]

그 뒤 조조가 표문을 올려 마등을 위위로 임명하고, 마초를 편장군으로 삼고 도정후에 봉해 마등의 부곡(部曲)을 거느리게 했다. 마등이 받은 위위라는 직책은 삼공 바로 아래로 매우 높은 직책이다. 그러나 마초가 받은 편장군 벼슬은 명예직에 불과하다. 마등이 입조하게 되자 마초를 편장군으로 임명해 마등의 진영을 거느리게 했다. 또 마초의 동생 마휴를 봉거도위, 마휴의 동생 마철을 기도위로 삼고 그 가속들을 모두 업으로 이주시키니 오직 마초만이 홀로 남게 되었다.[9]

유장의 경우 마등의 아들 마초에 이르러서는, 관계를 되돌리고 서로 소식을 주고받으며 유장은 촉의 의(意)를 이으려는 뜻이 있었다. 왕상이 유장에게 고하여 말했다.
마초는 날래지만 어질지 못하여 얻는 것에 의로운 것을 보지 않으니, 만약에 이와 같이 그(마초)를 끌어들여 가까이 하시면 말미암아 호랑이를 길러 장차 스스로 근심을 남길 뿐입니다.
유장은 그 말을 따라 이에 길을 끊어 마초와 교류하지 않았다.[10]

한편 주유는 적벽대전에서 조조의 후방 불안 요소로 마초와 한수를 언급했으며, 죽기 직전에 언급한 자신의 대전략인 천하이분지계에서 유비의 야심을 경계한 주유는 주된 동맹의 상대로 유비가 아닌 관서의 마초를 지목했다.[11] 그만큼 이미 관서의 마초는 당대의 관서군벌의 대표적인 제후로 여겨졌다.

2.2.1. 동관 전투

이후 조조는 한중정벌 계획을 기획했는데 한중 정벌 계획은 유장과 그 부하들이 경계를 품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헌데 유장 외에도 또 다른 세력 또한 조조의 서진(西進)에 민감한 반응을 보였으니, 다름 아닌 관서군벌들이었다.
 
앞서 언급했다시피 조조가 강남 정벌을 단행하기 위해 남하하기 직전이었던 건안 13년(208년), 관중의 제장 중 한 사람이었던 마등은 병력을 장남 마초에게 넘기고 업성으로 들어왔다. 더불어 아들 마초를 편장군(偏將軍)에 임명하여 량주에서 마등의 세력을 이어받도록 해 준다. 즉 조조의 권위를 인정하고 그 영향력 아래 들어간다는 걸 보여준 셈이다. 조조는 보답으로 마등에게 위위(衛尉)라는 지위를 주었는데 구경(九卿)에 속하는 고위직이다. 대군이 강남으로 내려간 뒤 관서군이 준동할 것을 두려워한 조조가 마등을 조정으로 소환한 것이다. 본래도 하동에서 곽원을 상대로 싸울 때부터 조조와 친분을 다져놓기로 방침을 정한 데다, 위위라는 높은 벼슬에 혹한 마등은 식솔들을 데리고 조조의 비호 아래 들었다. 다만 관서의 군권을 완전히 포기할 수는 없었기에 마초를 남겨 휘하 부대를 통솔케 한 것이다.

마등은 조조에게 귀부할 때에도 어느 정도는 억지로 귀부한 듯한 장면이 보이고, 온전히 귀부한 것도 아니고 마초를 남겨 양주에 있는 자기 세력을 이끌게 했다. 이건 조정과 조조 세력에서 인정을 받으면서도 양주의 자기 세력은 유지하고 싶었단 건데, 이게 양립하기 어려운 목표라는 게 문제였다. 마초는 조정에 있는 아버지와 일족이 잘 먹고 잘 살게 하는 것이 아버지의 참 뜻인지, 양주에 있는 마씨 세력을 지켜내는 것이 목적인지 선택해야 했다. 결국은 둘 다 이루지 못했지만 말이다.
 
그로부터 몇 년이 지나 건안 16년(211년) 3월, 조조 휘하에서 손꼽히는 부관들인 종요하후연이 하동을 거쳐 장로를 토벌하려는 계획을 추진하기 시작하자 마초를 비롯한 관중의 제장들은 이것이 한중 정벌을 핑계 삼아 관서을 압박하기 위한 조치가 아닌가 의심했다. 이와 같은 분위기는 비단 관서 현지인들만의 것이 아니었는지, 조조의 속관으로 있던 고유(高柔)가 다음과 같은 진언을 올리기도 했다.
 
대군이 서쪽으로 출병하면 한수와 마초는 자신들을 칠 것이라고 의심하여 반드시 서로를 부추기며 군사를 움직일 것입니다. 마땅히 먼저 삼보三輔(=관중)의 사람들을 불러들여 평안케 해야 합니다. 삼보가 평정되면 한중은 격문 한 장을 보내는 것만으로도 능히 평정할 수 있습니다.[12]
 
그러나 어째서인지 조조는 고유의 말을 무시했다.

이때 관서 제장들은 겉으로는 귀부했으나 내심은 믿을 수 없었다. 사례교위 종요는 3천 병을 청해 관으로 들어가려 했는데, 겉으로는 장로를 친다고 칭했으나 내심 실제로는 그를 위협하여 인질을 얻으려는 것이었다. 위기 역시 고유와 같은 의견을 냈다.
서방의 제장들은 모두 천한 신분에서 몸을 일으켰으므로 천하에 웅거할 뜻이 없으니 실로 눈 앞의 안락을 구할 뿐입니다. 지금 국가에서 이들을 후하게 대우해 작호를 더해주어 그 뜻을 이루게 해 준다면 중대한 사고가 없는 한 변고를 우려할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의당 그 후에 도모해야 합니다. 만약 군사를 일으켜 관중으로 들어가 장로를 토벌한다면 장로는 깊은 산에 있어 도로가 통하지 않을 것이고 저들이 필시 의심이 품을 것입니다. 한번 놀라서 동요하게 되면 땅이 험하고 무리들이 강성하니 그 위태로움은 근심거리가 될 것입니다.

순욱이 위기의 의견을 조조에게 보고했다. 조조는 처음에는 그 말을 옳게 여겼으나 종요가 스스로 자신의 임무를 관장해야 한다고 하여 마침내 종요의 의견에 따랐다.[13]

결국 211년, 종요가 이끄는 부대는 계획에 따라 관을 넘어 서쪽으로 출진했고, 이 시점을 기해 마초가 무리를 통솔하게 된 후 마침내 한수와 굳게 맹세하여 서로 응하고 한수, 후선, 정은, 양추, 이감, 성의, 마완, 장횡, 양흥 등 10명의 제장들이 일제히 거병하여 도합 10부로 함께 조조에게 반기를 들었다. 각 부곡에서 징집된 병사가 1만 명씩은 되어 연합군의 규모는 총 10만 명을 헤아리는 어마어마한 대군이었다.[14] 종요와 하후연이 서쪽으로 기어이 출진하고 나자 그들은 더 이상 군사적 위협을 참지 않겠다는 듯 군사를 연합해 조조가 당황하게 만들 대군을 만들어낸 것이다. 이들은 위수(渭水) 북단을 단숨에 가로질러 관중 지역 최고의 요새인 장안성을 그대로 통과, 그 동쪽에 있는 동관(潼關)을 점거하고 조조군과 대치했다. 이들은 하수, 동수 일대를 점거하고 진영을 벌여 세웠다. 사서에서는 군벌들의 총 병력이 10만이라고 적고 있으며 액면 그대로 믿지 않더라도 6~7만 이상은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15]

당초, 한수가 서쪽에서 장맹을 토벌할 때, 염행에게 옛 영채를 지키도록 하였고, 마초 등과 결탁하여 모반할 때, 마초가 한수를 도독으로 삼았다. 마초는 한수에게 "예전에 사례교위 종요가 저 마초로 하여금 장군을 취하도록 하였으니, 관동인은 다시 믿을 게 못 됩니다. 지금 저 마초는 부친을 버리고 장군을 부친으로 삼으려 하니, 장군께서도 자식을 버리고 마초를 자식으로 삼으십시오."[16]라고 말하면서 서로 친분관계를 요청했다. 염행이 마초와 연합하지 말라고 한수에게 간하였으나 한수는 "지금 제장이 공모하지 않았음에도 뜻을 같이 하고 있는데, 이는 타고난 수명과도 닮은 것이오."라며 그리고는 동쪽의 화음으로 갔다.[17]

이렇게 한수, 마초가 봉기한 때, 홍농 및 풍익에서는 많은 현읍이 거병하여 그들에게 호응하였다.[18] 하동은 이들에게 인접한 곳이었으나, 주민 가운데 다른 마음을 품은 자가 없었다. 유웅명은 마초 등이 모반하였을 때, 마초를 따르지 않아, 마초가 그를 격파했고 왕랑전에 따르면 나중에 마초가 반란을 일으켜 가홍을 체포한 다음에, 그를 화음으로 데려가서는 포고문을 만들게 했는데, 가홍은 만들지 않을 수 없었다.[19]

이에 조조는 강릉에서 돌아온 뒤 대기 중이던 조인을 안서장군(安西將軍)에 임명하여 선발대로 출진시키되, 후속 부대가 도착할 때까지 절대로 마초와 함부로 교전하지 말고 수비에만 힘쓰라는 엄명을 내렸다. 아울러 자신의 아들이자 오관중랑장(五官中郞將)으로 있던 조비로 하여금 업성을 지키게 하고, 분무장군(奮武將軍) 정욱을 보좌역으로 남겼다. 그 외 좌호군(左護軍) 서선(徐宣)에게는 군무를, 거부장사(居府長史) 국연(國淵)에게는 행정을 맡겼다. 이와 같이 후방의 인사를 마무리한 조조는 가후를 종군 참모로 삼고 장합, 서황, 우금, 허저, 주령 등 쟁쟁한 장수들을 참전시켜 동관으로 출진했다.
 
이 당시 관서군의 기세는 무서운 수준이었다. 뒷날 자치통감에 주를 단 호삼성은
이때 관서 지역의 군대는 (천하에서) 가장 날카롭고 강하였다

고 평하고 있다. 그러나 여러 동등한 제장들의 연합으로 형성된 군이라 효율적이고 통일된 지휘 체계가 마련되지 못했다는 단점이 있었는데, 조조는 바로 이러한 장단점에 착안하여 정면 대결을 피하고 적을 내부에서부터 무너뜨릴 계책을 세워나갔다.
 
211년 7월 조조는 본대를 이끌고 동관으로 향했다. 배송지 주 위서의 기록에는 이민족과의 실전으로 단련된 관서병의 강함을 알고 있는 장수들이 "관서의 병사들은 긴 창(모)를 쓰는 데 익숙하니 선봉에 서는 군사들을 잘 선발하지 않으면 당해낼 수 없습니다." 며 관서군이 창술에 빼어난 병사들이 많다는 점을 우려하여 선봉군을 걱정했지만 조조는 이에 대해 "적이 비록 창에 익숙하다지만 장차 그들로 하여금 우리를 찌를 수도 없게 하겠다"며 오히려 호기롭게 받아 넘겼다. 애초에 그는 하루도 끊이지 않은 전투로 단련된 경험 많은 관서군을 상대로 회전을 치를 생각 따위는 추호도 없었다. 그는 별동대를 파견해 적을 고립무원의 처지로 떨어뜨릴 수 있는 방법을 고심했는데, 부장 서황은 그런 조조의 생각과 꼭 들어맞는 대책을 제시했다. 조조가 동관에 도착한 뒤 강을 건너지 못할 것을 두려워해 서황을 불러 물었다. 이에 서황이 말했다.
 
공의 성대한 군세가 이르렀음에도 불구하고 적이 포판(蒲阪)을 수비하지 않으니, 그들이 무모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지금 저에게 정예병을 빌려주시면 포판진蒲坂津을 건너 병력을 배치한 뒤 그들의 내부를 끊겠습니다. (이렇게 하면) 능히 적을 사로잡을 수 있습니다.[20]
 
조조는 그 말을 따랐다. 이후 조조 자신은 관서군과의 대치를 유지하면서 서황주령에게 4,000명의 병사를 주어 몰래 강을 건너게 했는데 지금의 산서 성 영제현 황하 입구인 포판을 건너 황하의 서쪽을 점거했다.[21], 관서군은 나름대로 신속히 대응하고자 했지만 서황이 그리 만만한 장수가 아니었다. 한밤중에 참호와 목책이 미처 완성되지 못했을 때 양흥이 밤중에 보기 5천여 명을 이끌고 서황에게 기습을 가해왔지만, 서황은 침착하게 대처하여 오히려 양흥을 격퇴시켰다. 이로써 조조군은 북안에 교두보를 마련할 수 있게 되었고, 이제 강물을 거쳐 서쪽으로 나아가면 관서군을 앞뒤에서 협공하는 것도 가능해졌다.
 
조조군의 동향을 주의 깊게 살피고 있던 마초는 즉시 조조가 어떤 주전략을 세우고 있는지를 직감했다. 그는 한수를 찾아가 위수 북안에 방어선을 마련하고 조조군의 도하를 막아야 한다, 그렇게 하면 조조군은 20일도 되지 않아 군량 부족으로 철수할 수밖에 없다고 주장했는데, 이해할 수 없게도 한수는 마초의 말을 무시해버렸다.[22] 사태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그는 되려 조조군의 도하를 방치하자는 황당한 의견을 꺼내놓았다. 한수는 조조군이 강을 건너오면 그대로 군사를 몰아 쓸어버리면 될 것이라면서 전황을 지나치게 낙관적으로 보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총사령이라고 해도 당장 서로의 발언권이 비등한 상황이라 한수나 여타 제장들의 동의 없이는 마초 혼자서 뭘 어쩔 도리가 없었다.
 
당연하지만 결국 옳게 본 사람은 마초였다. 어떤 경로에서인지는 알 수 없으나 그날 마초와 한수가 나눈 대화의 내용이 조조에게 입수되었는데, 마초가 이미 자신의 주전략을 꿰뚫어 보고 그것을 깨뜨릴 대안을 내놓았음을 알게 된 조조는 아찔함 반 안심 반으로 크게 탄식하며 말했다.
 
마초가 죽지 않는다면 내가 죽어도 묻힐 땅이 없겠구나![23]
 
새삼 조조로서는 그가 상대하고 있는 관서군이 마초의 직할 부대가 아닌 제장들의 연합군이라는 사실에 감사해야 할 판이었다. 만약 마초가 명목이 아닌 실질적인 총사령관으로서 관서군 내부에서 다른 제장들보다 우위를 점하고 군령을 내릴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면 전쟁의 향방은 상당히 다르게 흘러갔을 가능성이 높다. 직후 벌어진 교전에서 조조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든 장본인 역시 다름아닌 마초였기 때문이다.

윤 8월, 관서군을 포위하여 압박하는 전략의 마지막 단계가 실행되었다. 일부 병력만 남기고서 조조가 인솔하는 대군이 황하를 도하하기 시작한 것이다. 당시 조조는 병력과 물자를 먼저 도하하게 하고 자신은 허저와 그 휘하의 100여 명의 호위병을 곁에 둔 채 후미에 남았다. 그러나 미처 도하 작전이 다 끝나기도 전에 조조군의 움직임을 포착한 마초의 부대가 불시에 용맹하게 돌격하여 들이닥침으로써 그 자리에서 격전이 벌어졌다. 조조가 동관에서 북쪽으로 강을 건너려 했는데 미처 건너기 전에 마초가 배를 향해 달려와 급박하게 싸웠고, 조조가 장차 황하를 건너려 하여 선두 부대가 막건널 때 마초 등이 돌연 당도하여 날카롭게 돌격했는데 조조는 호상(胡床)에 앉아 일어서지 않았다.

장합 등이 사태가 급박한 것을 보고 함께 조조를 이끌어 배에 타게 했다. 이때 허저전에 따르면 마초는 보병과 기병 만여 명을 이끌고 조조군을 추격하여 왔는데 (휘하부대에게 마초가 명령하여) 화살이 비처럼 쏟아졌다. 허저는 조조에게 적군이 너무 많이 오고, 지금 병사들은 이미 다 건넜으니 떠나야만 한다고 말하고는 조조를 부축하여 배에 태웠다. 적군은 더욱 빨리 추격하였고 군사들은 배에 오르려는 자들을 죽이고 왼손으로 말 안장을 들어 조조에게 날아오는 화살을 막았다. 사공에게 빨리 노를 저으라 재촉했는데, 설상가상으로 노를 저어야 할 사공이 그만 마초군의 화살에 맞아 죽고 말았다. 이에 다급해진 허저는 말안장을 들어 조조를 가리는 방패로 삼고서는 반대쪽 손으로 직접 노를 저어 가까스로 강을 건널 수 있었다. 진수는 허저전에서 "이날 허저가 없었다면 (조조는) 큰 위태로움에 빠졌을 것이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헌데 당시 조조의 도주를 도운 사람은 허저만이 아니었다. 조조군의 교위로 있던 정비(丁斐)라는 인물이 있었는데, 그는 마초군의 추격이 급박한 것을 보고는 그의 관리하에 있던 소와 말을 한꺼번에 들판에 풀어놓았다. 이에 마초군 일부가 추격을 놓아둔 채 가축을 포획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어쨌건 이러한 허저의 노력과 정비의 기지로 인해 조조는 무사히 강 반대편에 진지를 구축할 수 있게 되었다.[24] 이에 제장들이 군이 패하는 것을 보았는 데다 또한 조조가 있는 곳을 알지 못해 모두 황망하고 두려워했는데, 조조를 만나보고는 슬퍼하고 또 기뻐하며 어떤 이는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조조가 크게 웃으며 "오늘 하마터면 좀도둑들에게 곤란을 당할 뻔 했구나!"라고 말했다.[25]

하여간 마초는 비록 조조의 전략을 파악하고 또 이를 파훼하기 위해 움직일 수 있었지만, 명목상 총사령관의 직책임에도 연합군이라는 군 체계의 특성과 동료 제장들의 의견차이로 인해 전황이 뒤집어지는 꼴을 속절없이 보고만 있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었다.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조조는 이후 황하를 따라 용도(담을 양쪽에 쌓아 만든 통로)를 건설하며 차근차근 남하한다. 마초군은 물러나 위수가 황하로 유입되는 입구(渭口)를 지켰다. 조조가 이미 도하에 성공하여 하서 일대를 장악한 이상 동관 방면에서의 교전은 의미가 없었던 것이다. 반면 이래저래 전전긍긍하는 적군의 모습을 지켜보게 된 조조는 이제 얼마든지 여유를 부릴 수 있는 입장에 섰다. 이에 조조가 속이는 군사(疑兵)를 여럿 두고는, 배에 군사들을 태워 몰래 위수로 들어가 부교를 만들고, 밤중에 군사를 나누어 위수 남쪽에 둔영을 세웠다.

이렇게 관서군과 직접 대적하는 위치에 서는 것은 본래 백병전에 능한 관서군을 상대로 정면 회전은 피한다는 조조의 방침에 비추어 보면 납득하기 어려운 행동이었을 테지만, 당시 조조에게는 참모 누규의 책략에 따라 준비한 대비책이 있었다. 강 남안이 모래밭이라는 정보를 입수한 누규는 당시 날씨가 점차 추워지는 절기에 접어들었음에 착안, 모래로 벽을 쌓은 뒤 물을 뿌려 얼림으로써 임시로 방벽을 구축하는 책략을 내놓았던 것이다.[26] 조조가 탐색전을 겸해 파견했던 소수 부대는 도하하는 족족 마초의 기병대에 의해 격퇴당했지만, 밤을 틈타 일제히 결행한 대규모 도하와 누규의 책략을 이용한 성채 급조에 대해서는 마초는 물론이고 관중 제장들 중 누구도 방비하지 못했다. 물론 마초라고 조조가 이러는 것을 모를 리는 없어서 조조가 이렇게 나온 후에 서둘러 군사를 이끌고 밤중에 둔영을 공격했으나 조조는 급조한 성채와 복병으로 이를 격파했다.

마침내 조조군이 위수를 도하하자 마초를 비롯한 관서군벌들은 가능한 한 피해를 최소화한 채 근거지인 양주로 돌아갈 수 있는 방법을 짜내야만 했다. 이에 그들이 어렵사리 꺼내든 패는 다름아닌 화친 요청이었다. 마초군은 한편으로는 자주 싸움을 걸고 한편으로는 연차적으로 땅을 떼어주며 화친할 것을 제안했다. 사실상 전의를 잃지 않은 유일한 제장인 마초는 몇 차례에 걸쳐 싸움을 걸었지만, 조조는 눈 하나 깜짝 않고 응전을 거부했다. 부동의 1인자인 조조와 달리 군벌연합의 수장으로서 서로 이해가 대립되던 군벌들을 무마시키고 조정해야 했던 마초 입장에서는 이도저도 아닌 장기전만큼 위험한 것은 없었다. 그렇게 얼마간 시간이 지나자 관중 제장들은 화평 조약을 맺고 화친을 하자고 합의한 의사를 담은 편지를 조조에게 전했다. 마초 또한 달리 수가 없었을 것이다. 다만 그는 관중 제장들의 영토를 보장할 것, 그리고 인질을 교환할 것을 조건으로 달았다. 그러나 조조가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사실 조조와 휘하제장, 참모들은 이를 그냥 무시할 작정이었다. 손해를 볼 생각 따위 하지도 않았다. 특히 종군 참모로 동행한 가후의 책략은 교묘하기 짝이 없었다. 마초와 위수 남쪽에서 싸우는 사이 그는 일단 겉으로는 휴전을 받아들이는 척 넘어가되, 뒤로는 공작을 펼쳐 관중 제장들을 이간시키자고 건의했다. 조조 역시 가후의 책모를 받아들여 "한수와 마초의 동맹을 풀어 버리겠소." 라고 말하였다.[27] 당시 관서군벌을 이끄는 건 한수와 마초였다. 이들 두 사람을 이간시킨다면 나머지 떨거지들이야 제풀에 무너지고 쓰러질 게 뻔했다. 조조는 특히 한수 쪽에 의심의 이목을 집중시키고자 하여 화평 조약을 맺을 때 양측의 수장이 직접 논의 자리를 마련하자고 제안했다. 한수와 동석할 자리를 만드는 것에서 이간책을 시작하고자 한 셈이다.
 
첫 번째 회담 자리에서 조조는 한수에게 유독 친근함을 과시했다. 조조는 한수의 부친과 같은 해에 효렴이 되었고, 또한 한수와 같은 시기의 동년배였다. 이에 말을 마주하고 서로 대화를 나누었는데, 군사에 관한 일은 말하지 않고 다만 수도에서 있었던 옛 일만을 얘기하며 손뼉을 치며 환담했다. 대화를 끝낸 뒤 마초 등이 한수에게 물었다. 무언가 이상하다는 생각을 한 마초는 의심하여 한수를 추궁했지만, 실상 조조가 왜 그런 행동을 하는 것인지 영문을 알 수 없기는 한수도 마찬가지였다.

두 번째 회담도 마찬가지였다. 당시 조조는 5,000명의 철기대를 이끌고 나와 "그대들은 조공을 보고 싶은가? 나는 눈이 네 개 달린 것도 아니고, 입이 두 개 달린 것도 아니다. 그대들과 같은 평범한 사람이되 다만 지모가 많을 뿐이다!"라고 외치며 위풍당당함을 과시했다. 그러면서도 여전히 휴전에 관한 중요한 이야기는 한마디도 꺼내지 않으니 마초 등 여타 제장들이 점차 한수가 내통 내지는 배신을 꾸미는 것이 아닌가 의심하는 것도 당연했다.[28]

한편 허저전에는 위의 기사와는 다른 양상의 회담이 기록되어 있다. 
 
조조가 한수, 마초 등과 회담을 가질 때 아무도 따르지 못하게 하고 단지 허저 한 사람만 수행하도록 했다. 마초는 자신의 용력에 의지하여 조조를 죽이려 했으나, 평소 허저의 용맹함을 듣고 있었기에 조조를 수행하는 기병이 허저임을 의심하여 물었다.

조공에게 호후(虎侯)가 있다 하던데, 어디에 있소이까?"

조조가 고개를 돌려 허저를 가리키자 허저는 눈을 부릅뜨고 마초를 노려보았다. 이에 마초 등은 감히 움직이지 못하고, 곧 각자의 진영으로 돌아갔다.
 
마초 역시 꾸미고 있는 바가 있었다. 조조가 관중의 군벌들을 이간시키려 했다면, 마초는 대담하게도 회담 중에 자신의 강력한 용력에 의지해 조조를 사로잡으려 했던 것이다. 삼국지 촉서 마초전에도 조조는 한수, 마초와 더불어 홀로 말을 타고 대화했는데 마초는 자신의 힘이 강함에 의지해 돌진하여 조조를 붙잡으려 은밀히 꾀했으나 조조 좌우의 장수 허저가 눈을 부릅뜨고 (경계하면서) 노려보았고 이에 마초는 감히 실행하지 못했다는 기록이 있다. 아무튼 조조가 일부러 한수와의 거짓 회담을 한 전후로 마초까지 참여하는 다른 회담이 몇차례 더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명색히 마초는 관서군벌을 이끄는 위치였으니만큼 조조가 마초를 무작정 배제하기는 어려웠을터이다. 또, 무작정 마초를 배제한다면 오히려 마초가 조조의 획책을 의심했을 수도 있는 노릇이고 이렇게 하는 편이 한수가 조조와 혼자 대화할때 의심하기 만들기도 좋았을 것이다.[29]

어느 쪽이든 간에, 처음부터 회담을 이간계의 씨앗으로 뿌리려 의도한 조조로서는 만족스러운 전개였다. 뒷날, 조조가 또 한수에게 서신을 보냈는데 여러 곳의 글자를 첨삭해 마치 한수가 고친 것처럼 보이게 하니, 이로 인해 마초 등은 결정적으로 한수가 조조와 내통 중임을 확신하게 되었다. 마초와 한수를 이간시키니 다시 서로 시기하고 의심하게 되었고 군이 대패하는 원인이 되었다.[30] 다수의 제장들에 의해 운영되는 관서군의 지휘 체계상 이러한 의심은 연합 자체를 와해시킬 수 있는 치명타였음에 틀림없다. 이에 조조가 날짜를 정해 어울려 싸웠다. 먼저 가벼운 몸차림을 한 병사로 싸움을 걸고 싸움이 매우 오래 지속된 후 용맹스러운 기병을 풀어 양쪽에서 공격하여 대파하고 성의, 이감 등을 참수했다. 한수, 마초 등은 양주로 도주하고 양추는 안정으로 달아나니 관중이 평정되었다.

그러나 마초와의 오랜 싸움으로 조조 역시 막대한 피해를 감수해야 했다. 종요의 군사가 처음 진격한 이래로 관서가 그들을 공격하는 것으로 의심해 들고 일어나 조조가 친히 정벌한 뒤에야 겨우 이를 평정할 수 있었고 전사자도 만 명을 헤아릴 정도였다.[31] 전사자만 만 명 단위였으니 포로나 부상자들은 헤아릴수 없었을 것이다.

조조는 관중 제장들이 산발적으로 들고 일어나는 대신 한꺼번에 차례대로 모여준 덕에 일거에 적군을 섬멸할 수 있었다는 말로 전장을 마무리했다.[32] 결과적으로 조조의 말이 당시 전황에 부합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다만 이 발언은 마초가 들었다면 매우 고까웠을 발언이었을 텐데, 당시 조조와 싸운 상대가 조조, 원소, 주유, 유비 같은 출중한 군략가의 지휘 아래 완벽히 일사분란하게 통제되는 정예군이 아니라, 통일된 지휘 체계를 갖추지 못한 명목상의 지휘관이 마초인 군벌 연합 집단이었다는 사실이다. 다수의 제장들은 지휘관으로서의 역량이 현저히 떨어졌고, 오직 마초만이 뛰어난 군사적 재능을 갖추고 있었으나 바로 그 한수 등 동료 장수들에 의해 자신의 뜻대로 전략을 펼쳐볼 수 없었다.

삼국지연의를 비롯 후대의 묘사에서는 마초가 허저, 장비 등의 맹장들과 막상막하로 무용을 펼치되 지략은 휘하장수 방덕에게 의존하는 모습을 보이나 실은 그렇지 않았다. 기록을 살펴보면 마초는 오히려 개인의 무용도 무용이지만 그보다 야전에서의 지휘능력과 상황 판단력에 더 뛰어난 모습을 보였다. 조조조차도 간담을 서늘하게 했다는 기록과 도하 작전 직전에 조조의 의도를 간파하고 그 책략을 깨뜨리기 위해 치렀던 일전에서는 확실히 그의 비범한 면모가 드러난다. 그러나 그는 관서군을 완벽하게 장악하는 게 불가했고 근본적으로는 각기 동등한 권한만을 갖춘 여러 제장들 중 한 사람일 뿐이었다. 바로 이것이 그와 조조의 결정적인 입장 차이였고, 동시에 승패가 극명하게 나뉜 근본적인 원인이기도 했다.
 
자치통감에 음주를 단 호삼성은 관서군을 들어 천하에서 가장 강한 부대라고 평가했으나 동시에 이 마디를 덧붙였는데, 그 내용이야 말로 관서군벌들이 패배한 근본 원인이라고 할 만하다. 그 말은 다음과 같다.
 
(관서군이) 조조에게 격파당한 것은, 법제가 통일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당연한 일이지만, 농서에서 이민족들과 주민들의 강력한 지지와 인심을 얻고 있었던 마초를 제외한 관중의 제장들은 전부가 재기하지 못하고 몰락했다. 양추는 동관에서 서쪽으로 달아나 안정(安定)에 숨었으나 이내 한 달도 지나지 않아 쫓아온 조조군에게 투항했고, 남전(藍田)으로 간 양흥은 한중 정벌을 중지하고 돌아온 하후연에게 토벌당했다. 그는 어찌어찌 부성(鄜城)까지는 달아났지만 결국 죽음을 피할 수는 없었다. 그 외 한수나 마초를 따라 멀리 양주까지 달아난 인물이 몇몇 있기는 했으나 그들도 거의 무사하지는 못했다. 특히 마초와 더불어 관서군벌의 거두로 손꼽히던 한수는 금성으로 달아났는데 몇 년 지나지 않아 하후연을 상대로 마초와 산발적 연합하던 시절 버릇을 못 버리고 똑같은 짓을 하다가 대차게 깨지고 부하들에 의해 살해당했다.[33] 그나마 장로에게 도망친 인물들은 나중에 장로가 조조에게 항복할 때 같이 항복하면서 지위를 회복할 수 있었다.

211년 10월, 마초는 달아나 여러 융족들에 의지하려 했고 마초를 쫒아 북상해 양추의 항복을 받아낸 조조는 이를 추격해 안정에 이르렀으나 때마침 조조 역시 북방에 일이 생겨 군을 이끌고 동쪽으로 돌아가려 했다. 이때 이 지역의 속관인 양부가 조조를 설득하며 '마초는 한신, 영포의 용맹을 갖추고 강족, 호족의 마음을 심히 얻고 있으니 만약 대군이 돌아가며 이를 엄히 방비하지 않는다면 농상의 여러 군들은 국가의 소유가 되지 못할 것'이라고 말렸다, 물론 조조는 그의 말이 옳다고 생각했지만 빠른 시간에 군대를 귀환시켰으므로 수비는 주도면밀하지 못했다.[34]

이런 기록을 보면 실제로 조조 또한 이번 전쟁에서 자신을 고전케 한 인물이 오직 마초뿐이었음을 잘 알고 있었고, 마초가 여타 관중 제장들과는 달리 군사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만만히 볼 만한 상대가 아니라는 인식을 엿볼 수 있다. 이 때문에 양부의 건의가 근거 없는 우려가 아니라는 것 또한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조조는 양부의 말이 옳다는 것을 알고는 있으면서도 그의 건의를 완전히 수용하지는 못했다. 당장 그가 자리를 비운 틈을 타 후방에서 전은(田銀)과 소백(蘇伯)이라는 자들이 주도한 농민 반란이 일어났고, 또한 멀리 강동의 손권은 유수(濡須) 지역에 보루를 건설하여 군대를 주둔시키는 등 노골적으로 북진을 계획하고 있었다. 덧붙여서 오랜 숙적도 힘을 기르고 있으니 이미 대패해 달아난 관서군의 동향보다는 동쪽의 일이 더 급했다.

조조는 하후연을 남겨 마초의 잔존세력을 토벌하게 했다.[35] 이렇게 조조 휘하 최고의 숙장 중 한 사람인 하후연이 장안에 남아 주둔하고, 서황과 장합 같은 일급 장수들이 하후연의 부장이 되어 역시 서부 전선에 주둔하게 된 것을 보면 조조가 마초에 대해 아무런 방지도 하지 않았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양부전에서 이러한 조치들이 그리 주도면밀한 것이 아니었다고 기록하고 있는 것을 보면, 조조가 마초에 대해 설마 다시 그가 재기해 근심거리가 되리라고는 생각치 못하고 방심한 것 또한 사실인 듯 싶다. 다른 관중 제장들은 몰락을 면치 못했으니까. 그러나 마초는 이때부터 몰락한 그들과는 다른 행보를 보이기 시작한다.

2.2.2. 기성 전투

이렇게 도주에 성공한 마초는 한양(천수) 상규(上邽)를 점거하면서 한숨을 돌릴 수 있었다. 비록 빈털털이가 되어 돌아온 양주였지만 어찌 됐건 그의 명망은 아직 주효했던 듯하다. 상규현의 현령 염온(閻溫)은 본래 조조 측 인사로서 마초를 받아줄 의향이 전혀 없었지만, 현내 사람들 중 절대다수가 오히려 현령의 뜻을 거스르고 마초에게 힘을 보태고자 했으므로 그는 공직을 포기한 채 달아나야 했다. 아직도 마초의 영향력이 죽지 않았음을 확인한 염온은 장차 관중 지역이 다시금 전란에 휩싸일지도 모른다는 불안감과 함께 기성(冀城)으로 향했다.[36]

한편 12월 중앙으로 돌아온 조조는 212년 5월, 마초의 아버지 마등의 삼족을 멸했으며 한수의 자손들도 죽였다. 아버지와 두 동생을 비롯한 마초의 일족 200여 명은 모두 이때 죽어 마초에겐 사촌아우 마대와 아내인 양씨, 아들들과 몇몇 일족만 남게 된다.

조조는 자신의 군사활동에 적극적으로 대항하자고 한 자의 가속을 죽이고 그렇지 않은 자들의 가속은 살려두는 이간책을 두어 본보기로 삼았다. 대표적인 예가 염행으로 조조는 염행이 한수를 말린 것을 알고 있었기에 한수의 자손들만 죽이고 염행에게는 "그대의 부모님은 감옥에 봉양할 공간도 없고 관청에서도 이제 못 모시는데 이제 어찌되려나"라는 내용의 편지를 보내니 이런 조조의 이간책에 염행은 마음이 흔들리기 시작한다. 이를 안 한수를 염행을 회유하기 위해 그를 사위로 삼지만 조조가 염행을 의심하자 더욱 초조해진 염행은 결국 반기를 들어 밤중에 한수를 급습하지만, 패배하자 일가를 이끌고 조조에게 의탁하고 만다.

이렇듯 조조 쪽에 우호적인 장수였기 때문에 그의 부모들은 조조에게 붙잡힌 상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목숨을 건졌다. 그러나 마초와 한수 등은 이들의 수괴였고 조조는 아직 토벌되지도 않은 이런 자들에게는 전쟁 중에 그들이 먼저 화해의 시도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에 대해선 그냥 무시하거나 이간계를 사용했고 이들을 격파한 이후에도 굳이 염행의 사례처럼 회유책을 쓰지도 않고 마등, 한수 일족을 그냥 몰살시켰다, 조조는 이들의 가솔을 죽여 자신에게 대항할 마음을 품은 자와 그렇지 않은 소극적인 자의 차이를 분명히 했다.

이로 인해 조조에게 더욱 이를 갈게 된 마초는 필사적으로 재기를 시도하여 관중 제장들 중에서는 이례적으로 다시 세력을 정비하는 데 성공했다. 막강한 군벌들이 대부분 죽거나 투항했지만 호족들과 이민족들까지 조조에게 복종하는 건 아니었다. 거듭된 전란으로 피폐해진 서북지역의 민심은 그곳을 통제하던 군벌들이 사라지자 극히 유동적으로 변했고 조조의 영토라기보단 분쟁지역에 가까웠으며 오히려 이 지역 민심을 장악한 마초의 땅에 가까웠다. 그 예로 농상의 군현들은 거의 모두 그에게 호응했다. 이후 마초는 다시 관중 공략을 시도하는데 거의 같은 시기에 이뤄진 유비의 익주 공략과 마초의 관중 공략은 전혀 별개의 전쟁이나, 결과에 이르러 후자가 전자에게 어느 정도 영향력을 끼치게 된다.

마초는 융족(강, 저족)의 우두머리들을 인솔하고 농상의 군현을 공격하였다.[37] 이렇게 조조에게 붙은 고을들을 공격해 평정했고 마초가 강족과 호족의 군대를 규합하자 그 위명에 농서의 거의 모든 고을들이 바람에 쓸리듯 마초에게 호응해 왔다. 현지의 조조군이 뭘 어쩔 틈도 없이 양주의 거의 전 지역이 마초의 발 아래로 들어간 것이다. 조조가 임명한 양주자사 위강(韋康)과 앞서 마초의 재기를 우려하며 조조의 주의를 환기시켰던 참군 양부가 지키는 오직 한 곳, 기성만은 주와 군의 관리들을 끼고 고수하며 성문을 닫고 마초에게 맞섰다. 마초는 농우의 병사들을 모두 겸병하였으므로, 심지어는 마초와 별다른 교류가 없던 장로조차 또 대장 양앙을 파견하여 그를 도왔다. 모두 만여 명이 성을 공격했다. 양부는 나라의 사대부와 종족 자제 중 전쟁에 참가한 천여 명을 인솔하고, 종제 양악에게 성벽 위에서 초승달 모양의 진영을 만들도록 하고 마초와 전투를 했다. 정월부터 8월에 이르기까지 저항하며 지켰고 거의 8개월을 버텨냈다. 그러나 구원병은 오지 않았다.[38]

그들의 항전이 그리 오래갈 수는 없었다. 상규에서 마초를 피해 기성으로 왔던 염온은 몰래 포위망을 빠져나가 장안성에 주둔하고 있는 하후연에게 지원을 요청하려 하였다. 적의 포위는 몇 겹에 이르렀으나, 염온은 밤중에 물 속에 숨어 탈출하였다. 다음 날, 마초군은 염온이 포위를 벗어난 흔적을 발견하고, 사람을 풀어 그를 쫓게 하여, 현친현의 경계에서 염온을 발견하여 이를 붙잡아 마초에게로 끌고 돌아왔다. 그가 무슨 목적으로 기성을 빠져나가려 했던 것인지 짐작한 마초는 마초는 그 포승을 풀어주었고 다음과 같이 그를 회유했다.
이제 승패의 향방이 보이겠지. 족하는 고립된 성의 구원을 요청하고자 하였다가 우리 손에 붙잡혔는데, 어떠한가. 혹여 내 말에 따르고자 한다면 곧 성에 돌아가 올 원군이 없다고 말하도록 하라. 이리 행하지 않는다면 바로 그대를 죽일 것이다

마초는 이렇게 그에게 구원병이 오지 않으리라고 성 안에 통보하라 지시했다. 이에 염온은 위협에 굴복한 듯 순순히 성 앞으로 가서 고할 말이 있다 외쳤으나, 그 뒤에 나온 말은 마초를 격분케 만들었다.
대군이 3일 안에 도달할 것이니 모두들 힘을 내시오!

성중에서는 이를 보고 모두 눈물을 흘리며 만세를 외쳤다. 절망을 사기로 바꾼 기성의 군사는 기세등등하게 마초군과 맞섰다. 딱히 승패의 결과가 바뀔 만큼의 차이를 만들어낸 것은 아니라 하나, 어쨌든 마초가 단숨에 기성을 점령하기란 어렵게 됐다. 마초는 노하여 그를 책망하면서 "족하는 목숨을 어찌 이리 가벼이 여기는 것인가!"라고 화를 냈으나 사실 마초는 협박했던 것과는 달리 당장 그를 죽이지는 않았다. 오히려 몇 차례에 걸쳐 염온을 회유하여 자신의 부하로 만들고자 했다.

염온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때 마초는 장기간 성을 공격하였으나 함락치 못하였기에 그를 회유하여 뜻을 바꿀 수 있을까 기대하였다. 이에 또 다시 염온에게 성중의 연고자 가운데, 자신에게 동조하려 하는 자가 있는지 없는지 물었으나 염온은 또한 답하지 않았다. 결국 엄히 그를 책하였으나, 염온은 "장부가 군주께 사관함에 이르러서는 죽어도 두 마음을 갖지 않는다 하오. 헌데 경은 장자에게 의롭지 못한 말을 하게끔 하려는 구려. 내 어찌 삶을 탐하는 자이겠소?"라고 말했다. 그러나 염온이 끝까지 마초를 따를 기색을 보이지 않자 이에 이르러 마초도 어쩔 수 없었는지 결국 마초는 그를 죽였다. 미관말직에 머물렀으되 의기만은 높았던 한 의사(義士)의 숙연한 최후였다.[39]

당연한 일이겠지만, 염온의 발언과 죽음이 기성의 전황을 크게 뒤바꾼 것은 또 아니었다. 3일의 시간이란 실상 염온이 어떻게든 기성의 군민을 분발시키기 위해 내놓은 거짓말에 불과했고, 하후연이 마초가 전격전을 벌이며 관중 지역의 수복을 꾀하고 있음을 알게 되는 것은 꽤 시간이 지난 뒤의 일이었던 것이다. 마초의 공격이 드높아지자 성안의 사람들은 배고픔에 시달렸다, 자사 위강은 원래 인자한 사람이었는데, 관리들과 백성들이 상하는 것이 두려워 마초와 화해하려 하였다. 건안(196년~220년) 연간에, 참군사가 된 조앙이 기성에 살고 있었는데 조앙은 그 의견에 반대하였다. 집에 돌아와 부인인 왕이에게도 말했는데 왕이는 스스로 궁농수(弓籠手)를 몸에 걸쳐 활을 쏘아 마초군에 대항해 싸웠고 남편 조앙 옆에서 싸우면서 귀걸이나 반지들을 조앙의 병사들에게 상으로 주었던 여장부였으므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군주에게는 그를 충고하는 신하가 있어, 신하는 위급할 때에 독단이 인정되고 있습니다. 독단이 꼭 나쁜 것이 아닙니다. 하후연의 구원이 근처까지 와있지 않다고는 단언할 수 없습니다. 당연히 병사들을 독려하고 높은 공을 위하여 같이 노력해야 합니다. 모두 절개를 완수하여 죽읍시다. 항복은 안 됩니다.

조앙이 돌아가 위강을 다시 설득하려 했지만, 이미 위강은 마초와의 화해를 도모하고 있었다.[40] 이미 자사와 태수는 낯빛을 잃었고, 마초에게 항복하자고 하는 이가 있기 시작했다. 양부는 눈물을 흘리며 "저 양부 등은 부모 형제를 이끌고 대의로써 서로 면려하며, 죽음에 이르러서도 두 마음을 갖고 있지 않습니다. 항복은 성공할 공업을 버리고 의롭지 못한 이름 속으로 빠지는 것입니다. 저 양부는 죽음으로써 이 성을 지킬 것입니다."라며 말하며 통곡을 했다. 결국 자사, 태수는 사람을 파견하여 화의를 요청하고, 성문을 열고 마초를 맞이하였다. 마초는 성 안으로 들어왔으며, 기성에서 양악을 구금하고, 양앙을 시켜 자사, 태수를 죽이도록 했다. 양부는 마초의 호의로 살아남았는데 관청을 차렸으니 군무를 살피고 사무를 관장할 행정관이 필요해 남겨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조조가 임명한 다른 지방관을 죽일때 극렬 친조조파 속관인 양부를 죽이지 않은 것은 실수였다.[41]

어쨌거나 213년, 마초는 여러 융족들을 이끌고 다시 일어나 기성을 제외한 농상의 군현들을 모두 손에 넣었다. 이후 공성전으로 기성을 장악한 마초는 정서장군(征西將軍) 병주목(幷州牧) 독양주군사(督涼州軍事)를 자칭하며 자신의 재기를 요란하게 선전했다. 그리고 이제 조조 휘하에서도 손꼽히는 명장인 하후연과 대결을 펼치게 된 것이다. 하후연은 본래 조조 휘하의 여러 장수들 중에서도 특히 신속한 용병으로 이름이 높았다. 이 때문에 관도대전 당시에는 최전선에 대한 보급 업무를 총괄했고, 하북 원정 때는 '엿새에 천 리를 간다'는 명성이 돌 정도로 화려한 용병술을 구사하기도 했다. 강동 정벌에 나선 조조가 굳이 그에게 장안성을 맡긴 이유 또한 하후연이라면 충분히 관중의 소요를 제어할 수 있으리라는 신임에서 기인한 것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이번에 그가 상대해야 할 적수는 저족 반란군이나 여타 관중 제장의 잔당이 아닌 마초였다. 하후연과 마찬가지로 기병대 운용에 능숙하고 속전속결형 전법을 선호하는 무장인 그는 앉아서 공격을 기다릴 생각 따위 전혀 없었다. 장안에 있던 하후연은 조조의 재가를 받느라 제때 원군을 대지 못했고 원군이 도착했을 때는 이미 모든 상황이 종료된 다음이었다. 마초는 농성전 대신 야전을 택했고 기성 밖 200리 지점에서 조조군에서도 손꼽히는 명장 하후연의 군세를 격파했다.

자세한 전황을 말하면 마초가 양주자사 위강을 양주 천수군 기현에서 포위하자 하후연이 위강을 구원하려 했는데, 도착하기 전에 위강이 패했다. 이런 상황에서 마초는 기성에서 2백여 리 떨어진 곳까지 신속하게 진격하여 하후연과 맞서 싸웠는데 마초는 단숨에 요격전을 벌여 자신의 방식대로 전투를 끌고 갔다. 아직 기성이 함락당했음을 알지 못했던 하후연에게 이것은 불의의 기습이나 다름없었다. 뛰어난 장수답게 일격에 궤멸당하는 것을 피하고 교전 태세에 들어간 것까지는 좋았지만, 군이 불리했고 전장의 주도권은 계속 마초에게 있었다. 결국 마초에게 질질 끌려다니던 하후연은 견저가 모반하고 저족이 군사를 이끌고 마초에게 협력하려 한다는 급보를 접하자 말머리를 돌려 퇴각했다. 하후연의 퇴각으로 한동안 농서 지역에서 마초를 견제할 만한 군세는 사라지게 된다.[42] 기성을 비롯한 관중 일대의 군현이 마초의 손에 넘어가고, 이를 저지하러 온 하후연까지 패퇴당한 이상 양주는 이제 온전히 마초의 영토였다.

그러나 전혀 엉뚱한 곳에서 엉뚱한 형태로 터진 반격은 이 일대의 전황을 급격하게 뒤바꿔 놓았다.

왕이는 남편에게 죽은 상관인 위강을 위해 복수하도록 권했다. 마초는 조앙의 적자 조월을 인질로 취하였는데 마초는 조앙을 자신을 위하여 사용하고 싶었지만 아직 크게 신뢰하지 못하였다. 마초가 양주 관리들을 믿지 않았기 때문인데. 왕이는 자신의 절개가 높다는 말을 듣고 자신을 초대한 마초의 아내 양씨의 환심을 사 이를 이용해 마침내 조앙도 마초의 신임을 받게 했다. 왕이는 양씨를 설득하여 조앙이 마초의 신뢰를 받을 수 있도록 하려고 이렇게 말했다.
지금은 나라가 안정되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난리를 평정하는 것은 사람을 얻는 데 있습니다. 양주의 군사와 말이야 말로 중원의 나라와 싸우는 데 딱입니다.

마초의 처 양씨는 깊게 감동하였으며, 양씨는 왕이를 신뢰하게 되었고 중요한 일에 대해서 왕이를 불러 상의하고 결정하곤 했다. 조앙이 마초의 신뢰를 받게 된 것과 모두 공을 세우고 화를 면한 것은 왕이의 노력 때문이었다.[43]

한편 살아남았던 양부는 마음속으로 마초에게 보복하려는 마음이 있었지만, 적합한 기회를 얻지 못했다. 그러다 양부의 아내가 갑작스럽게 죽어 장례를 치러야 할 상황이 됐다. 이를 빌미로 기성을 잠시 떠날 수 있게 된 양부는 역성(歷城)을 방문하여 강서(姜敍)를 만났다. 강서는 양부의 고종사촌 형으로 역성에 주둔하고 있었다. 양부는 어렸을 때 강서의 집에서 성장하였는데, 강서의 어머니와 강서를 만났을 때 이전에 기성에서 발생한 일을 말하고 탄식하며 눈물을 흘리고 매우 비통해 했다. 강서가 왜 우는지 묻자 양부는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성을 지켰지만 완전하게 할 수 없었고, 주인이 죽었는데 함께 죽을 수 없었으니 또 무슨 면목으로 세상에서 숨을 쉬며 살겠습니까! 마초는 아버지를 배신하고 군주를 배반했으며 주의 장수들을 죽였습니다. 어찌 저 양부 혼자만이 슬퍼하며 책임을 느끼겠습니까? 한 주의 사대부들은 전부 치욕을 받았습니다. 당신은 병권을 장악하고 전권을 휘두르고 있지만, 적을 토벌할 마음이 없습니다. 이것은 조돈이 사관들에게 반역자를 죽인 것이 아닌 주군을 죽인 것으로 쓰인 까닭입니다. 마초는 강대하지만 신의가 없고, 대부분 모순되는 것이 많아 무찌르기가 쉽습니다.

이 강서라는 인물은 단순한 친인척이 아니라 역성을 지키고 있던 장군으로, 어느 정도 병력을 갖추고 있었기에 양부는 그것을 밑천 삼아 마초와 대항하고자 한 것이다. 본래 강서는 늙은 어머니의 안전 때문에 잠시 머뭇거렸지만, 그 어머니가 양부에게 감동해 자신의 생사를 신경쓰지 말라고 강권하자 이에 마음을 다잡고 마초를 공격할 채비를 했다. 강서의 동향 사람들인 조앙, 윤봉(尹奉) 및 기성에서 기다리고 있는 양부의 동료 양관(梁寬) 등이 합류하면서 이와 동시에 외부의 고향 사람 강은, 요경, 공신, 무도 사람 이준, 왕령 등과 모의하는 한편 종제 양모를 기성으로 보내 양악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거기다가 안정현의 양관, 남안의 조구, 방공과도 손을 잡아 계획은 점차 구체적으로 발전되었다.[44]

이 가운데 조앙은 아들 조월(趙月)이 마초의 군영에 있다는 이유로 합류를 주저했지만, 그의 아내 왕이가 "군부의 치욕을 설욕할 때는 자신의 목숨조차 내놓아야 하거늘 하물며 아들 하나쯤이야 어떻단 말인가"라는 무서운 말로 설득한 탓에 조앙은 그대 말이 옳다고 하고 결국 계획을 밀어붙이게 되었다.[45]

훗날이야 어찌 됐건, 양부와 강서 등의 계획은 이랬다. 우선 계획의 주도자인 두 사람이 각기 병력을 이끌고 마초의 세력권을 공격한다. 그러면 마초는 필시 직접 그들을 격퇴하러 출진할 텐데, 그 사이 기성에 있는 동료 양관이 성 안의 마초 세력을 일소하고 기성을 장악하여 마초의 근거지를 없애버린다는 것이었다. 여기에 퇴각했던 하후연이 다시 돌아와 그들을 지원한다면 군사력으로도 밀릴 게 없다. 이상의 결론을 내린 양부 등은 즉각 계획을 실행에 옮겼다.

그렇게 벌어진 전투는 그야말로 처절함 그 자체였다. 마초는 양부, 강서가 노성에서 군사를 일으키자 직접 군대를 인솔하여 출전하였다. 이렇게 양부, 강서가 노성에서 군사를 일으키자 마초가 출군해 이를 공격했으나 함락하지 못했는데, 양관, 조구가 기성의 성문을 닫아 버리자 마초가 들어갈 수 없게했다. 그가 자리를 비운 사이 기성은 양관에 의해 점거되었으며 조구와 양관은 양악을 풀어주었고, 마침내 조앙, 양관 등은 성 안에 머물고 있던 마초의 아내와 남은 일가붙이를 모조리 살해했다. 살아남은 건 거기 없던것으로 추정되는 사촌동생 마대나 첩실일가 정도. 그러나 전투 자체는 그리 쉽게 끝나지 않았다. 양부가 비록 직접 미끼를 자청하여 마초와 교전을 벌였지만, 본래 장수가 아닌 그에게는 그야말로 지옥이 따로 없었다. 양부의 형제 일곱 명이 전사했고, 양부 본인 또한 다섯 군데나 부상을 입었다. 사실상 지휘선이 완전히 붕괴된 그 상황에서 되려 마초가 물러난 것은 오직 기성이 점거당했다는 급보 때문이었다. 이 시점에서 이미 마초는 전쟁에서는 패한 것이었다. 결국 마초는 가족이 죽은 복수라도 할 목적이었는지 강서의 근거지 역성을 습격하여 강서의 어머니를 붙잡았다. 강서의 모친은 그에게 욕을 퍼부었다.
너는 부친을 배반한 역적 놈이고, 군주를 살해한 흉악한 적이다. 천지가 어찌 너를 오래 살려두겠느냐? 네가 일찍 죽지 않는다면, 무슨 면목으로 감히 사람들을 보겠느냐!

마초는 격노하여 강서의 모친을 죽였다. 결국 기성전투는 서로가 서로의 일가를 멸한 끔찍한 전쟁으로 변한것이다.

이렇게 본거지와 일가를 잃고 마초는 진퇴가 낭패스럽게 되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곧 자신의 뒤를 쫓아올 하후연을 걱정해야 했다. 이제 더 이상 관서에는 발을 붙일 수 없다 여긴 그는 멀리 한중으로 달아났다. 앞서 군사를 지원했던 장로의 호의에 기대를 걸고 몸을 의탁하러 간 것이다.

해를 지나 건안 19년(214년) 봄, 장로에게 달아났던 마초는 포기하지도 않고 끈질기게 양주의 재공략을 시도했다. 그는 한중의 군사를 빌려 기산(祁山)을 공격했는데, 마초는 한양에서 다시 강족, 호인에 의지해 군사를 일으키자 저왕 천만이 모반하고 마초에 호응해 흥국에 주둔했다. 하후연을 시켜 이를 토벌하게 했다.[46] 한편 마초의 원수인 왕이는 남편과 함께 기산에서 마초와 30일간 맞서 싸웠다. 기산이 습격당하고 나서 기산의 수비에 조앙이 낸 아홉 가지의 기묘한 꾀에는 전부 왕이의 생각이 들어 있었다.[47] 또, 당시까지 현지를 지키고 있던 장수 강서는 급히 하후연에게 연락을 보내 상황을 알렸다. 대부분의 장수들은 함부로 출진하는 것보다는 우선 업군에 있는 여러 장수들이 의논하기를 조조의 절도(節度)를 기다려 행동에 나서자고 주장했지만, 앞서 간발의 차이로 기성을 빼앗긴 탓에 마초에게 패배한 경험을 잊지 않은 하후연의 생각은 조금 달랐다. 그는 보고를 받은 지금 당장 출진해야 한다고 말했다.
조공께서 업에 계시니 왕복하여 4,000리 거리요. 보고가 이를 무렵이면 강서 등은 반드시 패할 터인데, 이것이 급한 상황을 구할 만한 계책은 못 되는 것이잖소?[48]

마초의 요격에 호되게 당했던 만큼 이번만은 마초에게 선수를 빼앗기지 않겠다는 투였다. 다만 신중을 기해야 한다는 생각은 있었는지, 부장으로 있던 장합에게 보병과 기병 5천을 주어 선두에 서서 진창의 좁은 길을 따라 선봉으로 진격하라는 지시를 내리고 자신은 후방에 남아 군량을 감독하며 잠시 전황을 주시하기로 했다. 만약 장합이 마초에게 패하거나 밀리는 모습을 보인다면, 그때는 하후연이 지원군이 되어 뒤따라 출진할 태세였다. 그러나 전쟁은 의외로 싱겁게 끝났다. 장합이 위수 가에 도착하자 마초가 강족과 저족 수천 명을 이끌고 장합에 맞섰으나 곧 싸우기도 전에 마초가 퇴각하니 장합은 진군하여 마초군의 무기를 거두었다. 하후연이 도착했을 때는 여러 현들이 이미 다 항복한 상태였다, 아무래도 그는 하후연의 말대로 보고가 조조에게 들어아고, 또 그에 대한 지시가 장안으로 내려올 때까지는 시간이 있으리라 예상했던 듯 싶다. 그러나 작년의 전쟁을 거울삼은 하후연이 신속한 대처로 나오자 후퇴한 것이다. 이제 마초가 한중에서 더 나올 생각이 없는 듯 보이자 양주는 하후연의 독무대가 되었다. 하후연은 이후 이민족과 연합한 한수를 격파하고 양주를 종횡무진 평정하며 명장으로서 명성을 더욱 드높였다.

어쨌거나 이렇게 구원군이 오고 기산의 포위가 풀리자, 마초는 더 이상의 인질가지가 없어진 조앙과 왕이의 자식 조월을 죽이고 후퇴했다. 한편으로 이 부분은 여러 가지 의미로 해석이 가능하다. 상식적으로 가족에게 친근하게 접근해 마치 친구인 것처럼 행세하다가 눈앞에서 배신해 전부 죽여버린 원수 중의 원수인 여자이며, 아예 아들이 죽건 말건 상관하지 않는 냉혹한 상대의 자식을 인질로 잡고 있으면서도 마초는 인질을 바로 죽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원수라는 측면에서 보면 그는 기성에서 배신당해 일가족이 몰살당한 일로 역성에 가서 강서의 어머니도 비슷하게 할 수 있었지만 마초를 패륜아로 욕하자 죽였다, 그런데 마초는 그보다 더한 배신자인 조왕과 왕이의 자식을 한중까지 끌고갔다. 상식적으로 조앙과 왕이가 자식을 버렸다는 사실이 분명해진 상태에서 말이다. 한마디로 객관적인 시점이라면 조월의 인질로서의 이용가치는 여기서 이미 끝났는데도 마초는 그를 죽이지 않았다. 이 부분은 마초의 의외의 인내심이나 참을성 같은 인간성이 보인다고 할 수도 있다.

물론 기산에서 끝까지 조월의 인질로서의 가치를 파악한 후에 가치가 없다고 판단하고선 죽였다고도 볼 수 있다. 그런데 그렇게 본다면 이 행위는 조앙과 왕이는 지금이라도 기산을 버리고 나한테 항복해라, 너희에 대해서, 너의 아들의 목숨은 아직 나에게 인질로서의 가치가 있다. 마초의 메시지가 되어버린다. 단순히 화풀이였다면 이미 역성에서 강서의 어머니 상대로 그랬듯이 진작에 화풀이로 죽여버렸을 수도 있고 아니면 기산에서 싸우는 중에 얼마든지 전투 중 처죽여서 왕이 상대로 화풀이로 쓸 수도 있었다. 그런데 그는 마지막의 마지막에서야 그런 선택을 했다. 마초가 기산을 공격하는 건 단순 화풀이가 아닌 기산을 함락시켜 양주의 회복을 꾀하는 것이 분명하고, 따라서 마초는 분명 조월이 왕이의 마음을 약하게 하여 기산을 항복시킬수 있다고 믿고 그런 방책을 썼다는 소리이다.[49]결국 그는 왕이가 끝까지 그와 싸워 조월의 목숨이 어떻게 되건 상관없다는 식으로 나오니 그제서야 그를 죽였다.[50] 패륜아 논란에서도 알 수 있듯이 마초에게 전해지는 이런 에피소드는 대개 이런 식이라 과연 진짜 마초라는 인간이 과연 어떤 인간이었는지 알 수 없게 만든다.

2.2.3. 장로 휘하

마초는 다시 농상에서 패했다. 그 뒤 한중으로 달아났는데, 장로는 본래 마초의 용맹과 명성에 반해 마초를 도강좨주로 삼고 자신의 딸 장기영[51]과 결혼시켜 그를 자신의 사위로 삼으려 했지만, 어떤이가 말하길
이처럼 자신의 어버이를 사랑하지 않는 이가 어찌 남을 사랑하겠습니까?

라며 마초의 반란에 의해 그의 가족들이 희생당했음을 상기시키며 만류했다. 과연 듣고 보니 뭔가 껄끄러워지는 데가 있었는지 장로는 혼약을 없던 일로 했다. 이 시점에서 이미 장로는 마초를 믿기 어려운 인물이라고 인식했는지도 모른다.[52]
 
그러나 저러나 마초의 생활은 불우했다. 당초 마초가 반란을 일으키기 전 그의 첩의 동생인 동충이 삼보(三輔)에 머물렀는데 마초가 패하게 되자 동충이 먼저 한중으로 들어왔었다. 정월 초하루 아침, 동충이 마초에게 장수를 바라는 뜻으로 술잔을 올리자 마초가 가슴을 치고 피를 토하며 통곡하여 말했다.
 
온 가문의 근친 일족이 하루아침에 함께 죽었는데 지금 두 사람이 서로 축하한단 말인가?[53]

그 뒤 수차례 장로에게 군사를 청해 북쪽으로 양주를 탈취하려 하니 장로가 보내 주었으나 이로움이 없었다. 위에도 나왔지만 그를 바라보는 한중 사람들의 시선이 그리 고운 것도 아니었다. 특히 장로의 부장 양백(楊白)은 마초의 재능과 명성을 시기하여 공공연히 그에게 거부감을 표했는데, 결국 장로의 부하들이 모조리 한통속이 되어 자신을 몰아내려 한다는 생각이 든 마초는 여기에서조차 달아날 수밖에 없게 되었다. 이로써 그는 다시 한 번 가족들과 헤어졌고 심복인 방덕과도 이별하게 되었다. 마초의 첩 동씨와 아들 마추는 한중에 남아있다가 훗날 조조가 한중을 차지하고 나자 불행한 최후를 맞게 된다.
 
마초는 마침내 무도를 따라 달아나 저족 중으로 들어갔다. 어쨌건 자신에게 호의를 품고 있는 저족의 부락으로 간 마초는 막막한 심정으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는데[54], 홀연 익주에서 그를 찾아온 사람이 있었다. 유비가 익주를 평정하면서 새로 얻은 참모 이회(李恢)였다.

2.3. 유비 휘하

2.3.1. 유비의 입촉

이회전에 따르면 유비는 이회를 한중으로 파견하여 마초와 우호를 맺도록 했다. 마초는 그래서 유비를 따랐다. 마초는 장로와 더불어 일을 도모하기에 부족한 인물이라 생각하여 내심 근심하고 번민했는데 유비가 성도에서 유장을 포위했다는 말을 듣고 은밀히 서신을 보내 항복을 청했다. 유비가 사람을 보내 마초를 영접하자 마초는 군사를 거느리고 곧바로 성 아래에 도착했다.

유비는 유장과의 전쟁 와중에도 각지의 소식을 접하는 데 게으르지 않았던 듯싶다. 양주에서 용명을 떨쳤던 마초가 갈 곳 없는 신세가 되어 저족 사이에 몸을 숨기고 있다는 말을 들은 그는 즉시 이회를 보내 자신과 함께 하지 않겠느냐고 설득했다. 기왕 누군가에게 몸을 의탁해야 할 신세라면 실력과 인망을 겸비한 유비가 낫겠다 싶어진 그는 마침내 그때까지도 자신을 따라주던 군사들을 대동하여 몸을 돌려 성도로 향했다. 마초가 자신의 장수가 되기로 결심했다는 소식을 들은 유비는 기뻐하며 말했다.
 
이제 내가 익주를 얻었구나!
 
이는 결코 빈 말이 아니었다. 비록 모든 가족과 심복, 양주를 잃고 처량한 신세가 된 마초지만 그 명성과 영향력은 관서는 물론이고 그에 인접한 익주에까지 상당한 효력을 발휘한 것이다. 유비는 사람을 시켜 마초를 멈추게 하고 은밀히 군사를 대어 주었다. 마초가 도착하자 군을 이끌고 성 북쪽에 주둔하게 했는데, 마초가 도착한 후 열흘이 지나기 전에 성도가 무너졌다. 당시 성도의 성벽을 사이에 두고 수십 일 동안 대치하던 유비군과 유장군의 전쟁은 마초의 전향이라는 사태를 맞아 비로소 종지부를 찍게 된 것이다. 성안 사람들이 두려움에 떨며 유장이 이내 머리를 조아려 절하니 마초를 평서장군, 독임저로 임명하고는 예전대로 도정후로 삼았다. 이 해가 건안 214년이다.

관우는 마초가 항복해 왔다는 말을 듣고는 예전부터 친분, 내왕이 있는 이가 아니기에 제갈량에게 서신을 보내 마초의 사람됨과 재주가 누구에 비교될 수 있는지 물었다. 제갈량은 관우의 호승심이 강함을 알았으므로 이에 다음과 같이 답했다.
맹기(마초)는 문무를 겸비하고 웅렬이 남보다 뛰어난 일세의 호걸로 응당 익덕(장비)과 말머리를 나란히 해 달리며 선두를 다툴 수는 있으나 염(髥) 그대의 절륜 일군함에는 미치지 못합니다.

관우는 수염이 아름다웠으니 이 때문에 제갈량이 관우를 일컬어 염(髥)이라 한 것이다. 관우는 이 서신을 읽어보고 크게 기뻐하며 빈객들에게 보여주었다.[55]

마초는 유비가 후대하는 것을 보고 유비와 더불어 말하며 늘 유비의 자(字)를 부르니 관우가 노하여 그를 죽일 것을 청했다.[56] 유비가 말했다.
다른 사람이 궁박해져 내게로 귀의했소. 그런데 경 등이 분노하며 내 자(字)를 불렀다하여 죽이자 하니, 천하 사람들에게 무엇을 보이겠소!

장비가 말했다.
그렇다면 응당 예(禮)를 보여야지요.

다음 날, 크게 모이며 마초를 청했는데, 관우, 장비가 함께 칼을 쥐고 곧게 서 있었다. 마초는 좌석을 둘러보았을 때 관우, 장비를 보지 못했다가 그들이 서 있는 것을 보고 크게 놀라니 마침내 다시는 유비의 자(字)를 부르지 않았다. 다음 날 탄식하며 말했다.
내가 이제야 패망한 이유를 알게 되었다. 주인의 자(字)를 부르다 하마터면 관우, 장비에게 죽임을 당할 뻔 했구나.

이후로 유비를 존중하며 섬겼다.[57]

배송지는 당시 관우는 형주에 있었는데 왜 유비, 장비랑 같이 익주에 있냐고 주석을 달아 이 기록의 신빙성을 부정하였다. 다만 이 시점에서 마초의 지위가 명목상으론 형주를 진수하는 관우의 관할 구역인 임저독이었기 때문에 마초가 잠시 본인의 임지가 속한 형주로 와서 형식상 직속 상관인 관우와 대면했을 공산은 크다. 거기에 유비는 익양대치 때 형주에 군을 이끌고 온 적이 있었고 마초 역시 여기에 종군했을 가능성이 있다. 따라서 유비, 관우, 마초가 어떤 방식으로든 함께 만났을 가능성은 높고 잠시나마 모두 같이 형주에 머물렀을 확률 역시 높지만, 파서태수로서 조조가 공격한 한중의 움직임을 감시하고 방어해야 하는 장비가 형주에 왔을 가능성은 그다지 높지 않다.

사실 관계가 좀 틀렸다고 해도 이 기록은 많은 걸 시사한다. 유비, 관우, 장비의 성격적인 묘사, 유비의 포용력 있는 이미지, 마초는 충분히 유비의 자를 부를 만한 강력한 명망을 지닌 제후급 객장으로 여겨졌다는 것. 그리고 위기를 알아채고 주공을 존중하는 마초의 성격 등을 보여주는 셈이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마초가 객장이나 유비에게 완전히 복속되었다고 외부에서 보고 있었다는 증거가 된다.

2.3.2. 유비 휘하

이때 팽양은 자신이 먼 곳으로 진출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내심 불쾌하여 곧 마초를 찾아가 만났다. 마초가 팽양에게 질문했다.
그대는 재능이 특출나므로 주공께서는 그대를 중요하시며, 응당 제갈공명, 효직(법정) 등과 함께 발을 나란히 하고 달려갈 것이라고 했습니다. 어찌하여 외지의 작은 군에 임명되었습니까? 이것은 사람들의 그대에 대한 희망을 저 버린 것입니다.

팽양이 말했다.
늙어서 황당하고 어그려졌으니 또 무엇을 말할 수 있겠습니까!

또 마초에게 말했다.
그대가 외부를 맡고 내가 내부를 담당하면 천하는 충분히 평정되지 않겠습니까?

마초는 먼 곳에서 떠돌다가 촉나라로 투항해 왔으므로 항상 위험과 두려움을 생각하고 있었는데, 팽양의 말을 듣고 매우 놀랐으므로 대답하지 않았다. 팽양이 돌아간 후, 마초는 팽양의 말을 모두 상주했다. 이 때문에 팽양은 체포되어 담당 관리에게 보내졌다.[58] 이는 마초가 여러차례 고난을 겪고 안정된 생활을 원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팽양의 반란이 실현 가능성은 들째치고 이런 표현이 나왔다는 것은 마초가 매우 조심하면서 생활했다는 것을 뜻한다.

한편 마초가 양백들의 시기를 피해 무도 저족부락으로 피신해 있다가 촉으로 들어올 때 그의 첩인 동씨와 아들 마추는 남아서 장로에 의탁하고 있었다. 장로가 패망하자 조조가 이들을 손에 넣었는데, 동씨를 염포에게 하사하고 마추는 장로에게 주니 장로가 자기 손으로 직접 마추를 죽였다.[59]

2.3.3. 한중 공방전

218년, 유비가 제장들을 이끌고 한중으로 진군했다.[60] 유비는 장비와 마초 등을 파견하여 저(沮) 길로부터 나와 하변을 취하도록 하였으므로, 저, 뇌정 등 일곱 부족 1만여 부락이 모반하여 유비에게 호응했다.[61] 유비가 장비, 마초, 오란 등을 보내 하변에 주둔하게 하니, 조홍을 보내 이에 맞서게 했다.[62] 유비는 장수 오란을 보내 하변에 주둔하게 했다. 유비가 장비를 보내 고산에 주둔케 하여 군의 배후를 끊으려 했다. 의논하던 많은 사람들이 이를 의심하자 조휴가 말했다.
적이 실제로 길을 끊고자 하면 응당 복병으로 몰래 행군해야 하는데, 지금은 오히려 먼저 성세를 과장하니 이는 실제로는 그들이 이를 실행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마땅히 적군이 아직 집결하지 못했을 때 급히 오란을 공격해야 할 것이고 오란이 격파되면 장비는 달아날 것입니다.

조홍이 이를 좇아 진병했고, 오란을 공격해 대파하니 과연 장비는 달아났다.[63]

3월, 장비, 마초는 한중으로 달아났고, 음평의 저족 강단오란을 참수해 그 수급을 보내왔다.[64] 이후 마초의 기록은 보이지 않는데 한중으로 후퇴했다는 무제기의 기록도 그러하거니와 정황상 유비가 전군을 한중으로 이끌고 들어가서 싸웠으므로 마초도 이동하여 싸웠을 것으로 보인다. 한중 공방전의 승리 이후, 유비가 한중왕이 되고 유비가 마초를 좌장군, 가절로 임명했다. 마초 본인의 명성도 있었겠지만 그만큼 들어가서 공을 세운 것도 있었을 것이다. 조조와의 전면전이 예상되는 싸움에 조조에 대한 복수심이 강하고, 싸워본 경험도 있는 마초급의 지휘관을 유비가 무슨 여유가 있다고 놀게 놔뒀겠는가.[65]

이렇게 유비가 한중왕이 되어 황충을 후장군으로 임명하려 하니 제갈량이 유비를 설득하며 말했다.
황충의 명망은 본래 관우, 마초와 동등하지 않았는데 이제 곧바로 동렬에 두려 하십니다. 마초, 장비는 가까이에서 그의 공을 직접 보았으므로 그 뜻을 이해할 수 있으나 관우는 멀리서 이를 들으면 필시 달가워하지 않을 것이니 이는 불가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유비가 말했다.
내가 직접 이해시키겠소.

그리고는 마침내 관우 등과 더불어 나란한 지위에 두고 관내후의 작위를 내렸다.[66]

2.4. 죽음

221년, 표기장군, 영(領) 양주목[67] 으로 올리고 태향후로 올려 봉했다. 222년에 죽으니 이때의 나이가 47세였다. 죽음에 임해 다음과 같이 상소했다.
신의 종족 2백여 명이 맹덕(조조)에게 주살당해 거의 다 없어지고 다만 종제 마대가 남았으니 미천한 종족을 위해 제사가 이어질 수 있도록 폐하께 간절히 부탁드립니다. 그 외에 더 드릴 말씀은 없습니다.[68]

마초의 유언은 일가들의 무사함만을 비는 가장의 약한 모습이라고 밖에 할 수 없다. 마원 이래에 명가로 유명했던 한양 마씨의 후예이자 한때 관중을 호령했던 관중 제장의 맹주가 남긴 유언이라기에는 처량하다라고 할 수 있다.

마초는 한중 면현 정군산 부근, 뇌공산에 묻혔다. 면양 무후사와 약 1km 떨어져 산을 사이에 두고 있으며 한수를 사이에 두고 관자산의 여랑사(즉 장로의 딸 장기영의 묘)가 있다. 시호를 추증해 위후(威侯)라 했다. 아들 마승이 후사를 이었다. 마대의 관위는 평북장군에 이르렀고 진창후로 올려 봉해졌다. 마초의 딸은 안평왕 유리의 배필이 되었다.[69]

마초의 요절은 유비와 촉에 있어서는 여러모로 안타까운 일인데 마초가 사망한 시기는 이릉대전이 발발한 시기다. 이 무렵 촉은 관장황이라는 1세대 핵심 지휘관들이 순차적으로 사망했고, 몇 년이 지난 1차 북벌 이후에는 조운까지 사망했다. 마초는 관장마황조 중 가장 젊었다고 할 수 있기에 살아있었다면 이릉대전에서 크게 역할을 하거나, 특히 북벌 때는 마초 자신의 연고지였던 옹양주에서 일어나는 전투에서 중요한 비중을 가졌을 것으로 추측되지만 결국 요절하면서 이릉대전 전후를 기점으로 관장마황조는 모두 역사에서 퇴장한다. 역사에 만약은 없다지만 제갈량의 북벌 시기 인재 부족에 시달리던 촉으로서는 마초를 비롯하여 형주 공방전부터 이릉대전까지 잃어버린 인재들은 실로 돌이킬 수 없는 내상이었다. 살아남은 2세대 장수들인 왕평, 요화, 마충, 장익, 장억, 위연 등의 활약이나 공적을 보면 잃어버린 인재들이 더더욱 아깝게 느껴진다.[70]

3. 연의

삼국지연의에서는 외모가 수려해서 금마초(錦馬超)라는 이명이 생겼다. 정사에서는 마초의 외모가 어떻다는 언급은 없기에 연의의 창작으로 보인다.

우선 마초의 아버지 마등부터 이미지가 바뀐다. 정사에서 마등은 반란 세력에다가 동탁과도 연계할 정도의 인물이었다. 그러나 개인적인 인품이나 통치에 있어선 훌륭했으며 관서 군벌 자체가 이합집산과 서로간 통수 때리기로 일관했다는 점을 감안하면 그 시대엔 이런 일이 흔했다. 실제로 이 양반 동탁이 죽고나서 이각, 곽사에게 정서장군 직위를 받고 돌아온 다음에 익주의 유언과 손잡고 이각, 곽사를 칠 계획까지 짰던 인물이다. 어쨌거나 연의에서는 마등이 반동탁 연합군에 참가하고 나중에 유비와 함께 헌제혈서에 서명하는 등 반란자이자 난세를 틈탄 군벌에서 충신으로 이미지 체인지된다.

마초가 정사보다 일찍 등장한다. 장안을 점거한 이각 일파와 마등, 한수가 싸울 때 17세의 마초는 적장인 이몽, 왕방을 베는 활약을 보였으나 아버지인 마등이 패했기 때문에 패퇴했다.

연의에서 마등은 조조와 대립한 양주의 한 세력으로서 묘사되어 있기 때문에 원소의 잔당인 고간, 곽원과 마씨 일족의 전투는 연의에서 나오지 않는다.

연의에서는 마등이 조조 암살 계획에 가담했기 때문에 마초는 일족의 대부분을 조조에게 모살당하고 만다. 양주에 있어서 난을 피한 마초는 유일하게 살아남은 사촌 동생인 마대와 함께 복수를 위해 거병하게 된다. 마초는 상복을 대신해서 흰 전포를 입었는데 사자 형상의 투구와 더불어 마초를 상징하는 아이템이 되었다.

가장 큰 차이점은 마초가 불효자에서 효자로 변한 것이다. 정사에서 마초는 업에 자신의 일족들이 분명히 있는데도 한중쪽으로 이동하려는 조조군의 움직임을 보고 조조가 자신을 친다고 생각해 반란을 일으켜서 결국 마등 등 마초의 일족은 몰살돼버린다. 그러나 연의에서는 조조가 먼저 마등 등을 죽이고 마초는 그 복수를 위해 거병한다는 식으로 바뀌었다.

연의에서 한수의 부하들로 등장하는 수하팔부는 별로 비중이 없지만, 정사에서는 모두 관중의 유력 군벌들이었다. 봉기했을 때 마초군이 장안성을 함락시켰다는 것도 허구. 곧바로 동관으로 군사를 휘몰아 조조와 승부를 벌인다. 동관 전투에서는 마초의 용맹함이 과장되어 이통을 찔러 죽이고 조조를 추격하자 조조가 도망치면서 붉은 전포를 벗어던지고 수염까지 자르는 장면이 창작된다. 여기에서 정신없이 부랴부랴 도망친다는 뜻의 할수기포(割鬚棄袍)라는 사자성어가 생겨났다.

정사에서 이통은 마초에게 죽은 게 아니고 조조가 수염을 자르는 장면도 없다. 중간에 웃통을 벗은 허저와 일기토를 하는 장면이 있지만 창작이다. 마초는 허저와의 싸움을 통해선 "그 용맹이 지난날 여포에게도 뒤떨어지지 않는다."는 조조의 찬사를 듣는다. 가후의 이간계에 의해 마초는 한수를 공격해 그의 한쪽 팔을 잘라버리지만 패주한다. 연의에서 한수는 이후 조조에게 투항하지만 정사에서 한수는 그 후에도 조조에 대항해 거병하다가 죽었다.

기성에서 양부 등의 계략에 속은 마초는 자신의 눈 앞에 아내 양씨 등 자기 가족들의 목이 떨어트려진다. 마초는 역성을 습격하여 분풀이로 그곳의 강서, 윤봉, 조앙의 가족들도 다 죽여버리는데 조앙의 아내 왕이만 남편이 있는 기산의 군중에 가 있어서 죽음을 면했다고 나온다. 정사에서 마초가 역성에서 죽인건 강서의 어머니 뿐으로 나머지 강서. 윤봉, 조앙의 가족들은 멀쩡히 살았다. 아마도 나관중이 가족이 몰살당한 마초가 불쌍해서 이런 화풀이 장면으로 부풀린게 아닐까 생각된다.

그대로 장로에게 의탁하고 유장군의 원군으로서 파견되어 유비군의 장비와 일기토를 한다. 장비와의 대결을 통해서 유비와 제갈량으로부터 "과연 서량의 금마초다."라는 극찬을 듣지만 연의의 창작이다. 마초는 제갈량의 책략에 의해 양송의 참언에 혹한 장로에게 의심받아 돌아갈 수 없게 되었다. 여기서 양송은 실존하지 않았던 인물이고 정사에서는 제갈량의 책략도 아니었다. 정사에서 장로에게 마초를 시기한 것은 양송의 형으로 나오는 양백이다. 뜬금없이 이회에게 마초의 친구라는 설정이 붙었고 마초는 이회의 설득에 의해 유비군에 투항한다. 유장은 원군이 오지 않는 것을 깨닫고 유비에게 항복한다.

유비 진영에 합류한 이후의 활약도 대폭 늘어나 한중 공방전에서 조조군에게 광역 공포를 걸고 기습으로 적의 배후를 교란하며 맹활약, 마지막에는 복병으로 등장해 치명적인 타격을 입힌다. 정사에서는 관우, 장비, 마초, 황충이 사방장군에 임명되지만 연의에서는 이 멤버에 조운이 추가되어 오호대장군으로 바뀌었다.

정사에서는 유비가 죽기 1년 전에 죽었다. 그러나 연의에서는 수명이 늘어나서 유비 사후에도 조비의 오로군이 쳐들어왔을 때 제갈량의 명을 받들어 그중 한 갈래인 강족의 군대를 패기만으로 제압하는 등 활약을 이어간다. 다만 연의에서도 유비에게 귀부한 뒤로는 정사처럼 미묘하게 활약이 부족해서[71] 살짝 먹튀스러움이 남아 있다. 죽음 장면은 묘사되어 있지 않으나 제갈량이 북벌을 나서면서 마초의 묘를 방문하는 장면이 있다.

마초의 사촌 동생인 마대는 정사에서는 높은 관직과 작위를 받았음에도 딱히 비중이 없는 인물이지만 연의에서는 마초 버프를 받아 제갈량 세대 촉한의 필두 무장 중 하나로 활약한다.

4. 가족 관계

  • 마원 - 마초의 선조.
  • 마평 - 마초의 조부, 마등의 아버지.
  • 강녀 - 마초의 조모, 마등의 어머니.
  • 마등 - 마초의 아버지.
  • 마휴 - 마초의 남동생, 마등의 차남.
  • 마철 - 마초의 남동생, 마등의 삼남.
  • 마대 - 마초의 사촌 동생, 마등의 조카.
  • 양씨 - 마초의 본처
  • 동씨 - 마초의 첩, 염포의 아내.
  • 동충 - 마초의 처남, 동씨의 남동생.
  • 마추 - 마초의 아들. 한중이 정벌되고 나서 조조가 장로에게 주어서 처형당한다.
  • 마승 - 마초의 아들. 마초의 후사를 이었다.
  • 마씨 - 마초의 딸, 유리의 아내.

5. 평가

양희는 계한보신찬에 마맹기를 찬함(贊馬孟起)이런 글에서 '표기장군(驃騎將軍, 마초)은 분연히 일어나 (양주군벌들과) 합종연횡하여 먼저 삼진에서 하서(河西)와 동관(潼關)을 지켰더라. 조정(朝廷)을 위하여 계책을 세워 서로 의논했으나 혹은 다르고 혹은 같으매(마초와 한수가 갈라진 것을 말함) 적이 이 틈을 타니 집안은 깨어지고 군사들은 망하였다. 방도(方道)가 어그러지매 덕(德, 유비)있는 이에게로 돌이켜 봉(鳳)을 붙잡듯 용(龍)을 더위잡듯 하였다.(托鳳攀龍, 덕있는 이에게 귀부하여 의지함을 말함)'라고 평하였다.

학경(郝經)[72]은 '마초 부자의 용맹은 서주(西州)에서 으뜸으로, 한수와 더불어 날아올라 도적이 돼, 삼보를 해치고 멸하고, 한실(漢室)을 부수고 해쳐, 동탁이 이로 인해 그의 뱀과 돼지를 늘어놓아, 한나라는 마침내 망했다. 천하가 분열돼, 명에 덕이 있는 것을 따를 수 없어, 마침내 조조의 손에 떨어져, 모든 집안이 주멸되나, 엎어지고 망함을 후회하지 않았으니, 용기는 있으나 의리는 없어, 군자가 이를 슬퍼하였다. 그러나 동관(潼關)의 전투에서, 조조는 위태로움을 면할 수 없었고, 한 자루의 칼로 귀부하여, 곧 관우, 장비의 대열에 섞였으니, 마초 또한 기량이 뛰어난 인물이구나!' 라고 했다.

5.1. 명성

마초는 할머니가 강족이었기 때문에 자연스레 강족저족 등 서북 지역의 이민족들과 가까웠고, 이로써 그는 그들의 지지와 호응을 얻을 수 있었다.

사실 마등은 강족 어머니 이전에도 수 차례 혼혈이 일어나서 얼굴이 서구인같았다는 기록을 보면 실제 비율은 쿼터보다 더 높았을 것이다. 당대 이민족들의 혈통주의 문화를 생각한다면 마초가 이들에게 그만한 지지를 받았던 것은 그 때문으로 보인다. 하지만 중앙의 높으신 분들은 마초가 동한 개국공신 마원의 후손임에도 반오랑캐라고 디스했다. 거기다 이민족과 결탁했다는 이미지 때문에 후세에는 마초를 부정적으로 보기도 하였다.

일단 마초가 유비에게 귀부하자 유장이 그 소식을 듣고 벌벌 떨다 바로 항복했다는 기록이나 비록 터무니없다 부정되었으나 산양공재기에서 마초가 유비에게 귀부한 다음에도 유비의 자를 부를 것이라고 기록된 것을 보면 당대 마초에 대한 인식은 최소 한 곳을 뒤흔들 만한 제후의 반열로 여겨졌던 것 같다. 즉 명성에서만큼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는 것이다.
  • 조조와도 자웅을 겨뤄 일시적이나마 조조를 위기로 몰아붙여 당대의 호걸로 여겨졌다.
  • 마초는 당대에 피아를 가리지 않고 영포, 팽월 등 고대의 맹장들과 비견되는 극찬을 받았다.
  • 조조에게 전멸에 가깝게 패하고도 농서 지역을 일부 점유해 금세 일어설 수 있었으며 그가 봉기하자 이민족을 비롯 상당한 세력들[73]이 순식간에 호응했다.
  • 장로에게서 탈출해 유비에게 귀순할 때도 이민족인 저족의 영역을 자유롭게 경유했다.
  • 유비는 마초를 포섭하는 데 성공하자 "내가 익주를 얻었구나"라며 대단히 만족스러워했다. 실제로 유장은 유비에게 귀순한 마초의 군대가 성도에 당도한 걸 보고 완전히 전의를 상실해 벌벌 떨다 유비에게 항복한다.
  • 호승심으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관우는 마초의 평판에 대해 묻는 내용의 편지를 제갈량에게 보냈는데 제갈량이 관우가 마초보다 낫다는 평가를 하자 대단히 기뻐해서 사람들에게 편지를 보여줬다고 한다. 제갈량이 눈치 본 감도 있기는 하지만.
  • 유비가 한중왕에 오른 뒤, 이미 당대 전중국을 대표하는 명장으로 칭송받던 만인지적 관우, 장비와 동렬에 세워졌다.
  • 좌천된 팽양은 마초에게 반란을 부추기며 "당신이 외부(군사)를 맡고 내가 내부(내정)을 맡으면 천하가 충분히 평정되지 않겠습니까?"라는 말을 했다. 뻘소리지만 마초의 위상을 알 수 있는 발언이라는 측면에선 의의가 있다.
  • 양주에서 모든 걸 다 잃고 한중에서 무도로 도망가 있던 시절에도 저족에게 영향력이 있었고 후일 한중 공방전 때 장비와 함께 이 지역 저족을 비롯한 이민족 일곱 부족 1만여 부락이나 유비에게 호응시킨다. 마초의 이민족 영향력이 어느 정도 수준이었는지 알 수 있다.
  • 한중왕표에서 당시 유비의 휘하에 있던 부하들의 서열이 어찌 되는지 확인해볼 수 있는데, 마초가 가장 앞에 있다.(평서장군 도정후) 도정후는 본래 조정으로부터 받은 작위고 평서장군은 유비가 임의로 부여한 장군직이다. 아무튼 그의 이름이 가장 앞에 등장한 사실로 미루어보아 마초가 유비로부터 제후 대접을, 적어도 겉보기상으로는 동등한 입장으로 대우를 받은 게 아닌가 싶다.
  • 유비에 의해 촉한의 최초이자 최후의 영 양주'목'에 임명된다. 후에 북벌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위연이나 강유의 지위가 이보다 한급 낮은 '영 양주자사'였던 걸 감안하면 마초가 갖고 있던 위상과 관서지방에 행사할 수 있는 영향력을 짐작케 한다.

5.2. 통솔

연의에서 마초는 조위 제장 중 최강의 무력을 자랑하는 허저와의 일기토에서 우세한 무승부를 거두고 만인지적 장비와도 호각을 이루는 것으로 것으로 묘사되는 맹장형 캐릭터이나 정작 진짜배기 장수로서의 정수인 전략과 용병술에 있어서는 한수나 방덕에 의존하고 때론 성급하고 어리석은 모습을 보여 일을 그르치는 등 최상급의 일신의 무력에 비해 다소 미흡한 구석이 있게 그려진다.

그러나 실제 마초의 군사적 행적을 보면 마초는 일신의 용맹을 앞세우기보단 상당한 수준의 전략적 식견과 용병술에 의해서 군을 움직였고 상당히 인상적인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상대적으로 소수의 병력을 이끌고 곽원이나 하후연 같은 명장급 장수 상대로 이긴 전적도 있고 당대 최강의 조조의 군세를 상대로 국지적이나마 조조를 위기로 몰아넣는 등 상당히 선전하였다. 이러한 전적으로 봤을 때 마초의 군재는 충분히 뛰어났다.

다만 중과부적으로 조조의 군세에 연거푸 패하고 장로와 유비 휘하에선 별다른 공적을 세우진 못하였으니 군사적 커리어가 아주 우월하다고 볼 여지는 없다. 마초의 주요 군사적 커리어는 다음과 같다.
  • 어린시절부터 관중 호족과의 싸움에서 활동했고 20대 후반에 조조의 배후를 공격하며 관서를 진동케 하고 맹위를 떨쳐 사례 지역 제장들과 관원들이 모두 진압[74]하는데 실패한 고간 휘하의 하북의 명장 곽원을 쓰러뜨렸다. 이때 곽원이 이끄는 군세는 정확히 파악되지 않지만 견초전에서 고간이 진수한 병주의 총병력은 정예 5만으로 확인된다. 일시적이나마 사례지역을 발칵 뒤집어 엎은 곽원이 기세를 감안할 때 그가 이끄는 군세는 최소 2~3만 명으로 추정. 따라서 마초가 1만의 군대를 지휘해 자기 군세보다 최소 두 배 이상은 많았을 곽원을 공격해 그의 군대를 완전히 박살낸 것은 상당히 인상 깊은 군공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곽원이 도하 중에 기습한 것이긴 하나 그것도 정확히 예측하고 군을 일사분란하게 움직여 빠르게 치고 들어가야 성공할 수 있는 법이니 마초의 용병술은 의심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마초는 화살을 맞아가면서도 두려워하지 않고 부상투혼을 발휘해 종횡무진 군세를 이끌어 곽원군을 궤멸시키고 사례 방면을 안정시켰다.[75]
  • 30대 중반의 상대적으로 젊은 나이에 전투력은 강하지만 서로의 이해관계를 조율할 정치력의 결여로 조금만 수틀려도 와해되기 십상인 중구난방 서북의 군벌들을 규합하여 구심점이 되어 군벌 연합체를 이끌었다. 이때 마초는 분명 명성은 있었지만 기본적으로 딱히 두드러진 위상을 갖춘 게 아닌 여러 갈래의 서북방 군벌 가운데 한명에 불과했고 이 시점에 서북방 군벌 가운데 가장 알려진 인물은 좋은 의미에서든 나쁜 의미에서든 분명 수십 년의 세월에 걸쳐 끊임없이 중앙권력과 드잡이질을 벌여 명성(혹은 악명)을 쌓은 한수였다. 연령에 있어서도 한수는 이때 이미 환갑을 넘긴 관록 있는 인물인데 지금도 유교 문화권에선 리더 선출에 있어서 나이가 작용하는 여지가 생각보다 크다는 걸 감안하면 당대에 마초가 한수를 제치고 서북방 군벌 연합체의 우두머리가 된 건 꽤 파격[76]적이다. 이러한 불리한 정치적 입지를 뛰어넘어 서북방을 대표하는 군웅으로 선출된 걸 보면 마초의 군사적 재능과 리더십이 꽤 뛰어났음을 짐작[77]할 수 있다. 호삼성은 "이때 관서 지역의 군대는 천하에서 가장 날카롭고 강하였다"라고 평하고 있다.
  • 배후를 노리고 도하하는 서황과 주령을 보고 마초는 군사를 몰아 공격하고 싶어했지만 한수는 선봉군은 그냥 통과시키고 조조 본대가 도하할 때 일격을 가하자는 일종의 유인책[78]을 사용했다. 결과적으로 상황을 옳게 본것은 마초였고 관중 연합군은 서황과 주령에게 배후를 털리고 조조와의 대결에서 우위를 내주는 빌미를 제공하는 오판이 되었다. 조조는 마초의 전략적 통찰을 후에 전해 듣고 "마초 그 아이가 죽지 않는다면 내가 죽어도 묻힐 땅이 없겠구나!"라고 탄식하였다.
  • 조조는 선봉군이 무탈하게 도하하는 걸 보고 방심한 상태에서 도하하다 마초군의 기습을 받아 거의 죽을 뻔했다. 조조가 탄 배의 사공이 화살에 맞아 죽을 정도였으니 그 긴박함을 짐작할 수 있다. 허저의 불굴의 호위 덕분에 다행히 살 수 있었다.
  • 가후의 이간책에 속아 넘어가고 조조와의 연이은 야전에서 계속 패배했다.
  • 마초와의 전쟁을 통해 조조군 전사자가 만 단위였다는 기록도 있다. 10만 명 중 1만 명만 날아가도 전멸 운운했던 시대상을 감안할 때 마초를 상대로 대승을 거두긴 했어도 조조군의 피해 역시 만만찮았다는 반증이다.
  • 조조에게 대패했으나 겨우 1만 남짓한 군세로 농서 일대에서 재기에 성공했으며 적어도 자신보단 많은 병력을 거느렸을 당대의 유력한 야전 사령관 하후연을 야전에서 패퇴[79]시켰다.
  • 농서 일대를 일부 확보하고 재기를 노렸지만 억지로 항복시켰던 양부와 조앙 등을 중심으로 내부문제[80]가 불거지고 1차전에서 패배를 만회하고자 장합을 앞세운 하후연에게 끝내 패해 근거지 양주를 영영 상실한다. 사실 이때 장합이랑 진짜로 맞붙은 건 아니고 내부의 배신으로 재봉기 근거지인 농서를 잃고 방랑군으로 전락하다시피 하다 저왕 천만에게 붙어 구사일생으로 겨우 호흡기 유지하던 중 장합이 기병 5천을 이끌고 진창을 통과해 위수까지 육박[81]하자 불리하게 여겨 싸우지도 않고 한중으로 퇴각해버렸다. 어쨌든 마초의 패배는 패배다.
  • 장로[82]와 유비 밑에선 딱히 두드러진 모습을 드러내지 못하고 한중공방전을 마지막으로 군사적 커리어가 끊긴다.
  • 단 이 부분은 마초가 일부 평자들의 추측처럼 건강 문제가 됐든 어쨌든 간에 분명 예전 군웅 시절만큼의 능력을 보여주진 못한 건 맞는데, 한중공방전에서 어느 정도 군공이 있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순 없으니 활약이 아예 없었다곤 단정할 순 없다. 또 마초가 무도/음평 공략에 실패했다고 해서 무작정 심신이 피폐해서 기량이 저하됐네 어쨌네 하는 것도 비약일 수밖에 없는 게, 무도/음평 공략은 마초 혼자만 투입된 게 아니라 이전 탕거전투에서 장합을 격퇴시키고 한창 기세등등하던 만인지적 장비까지 참전했음에도 불구하고 공략에 실패한 케이스이기 때문이다. 이는 그만큼 조홍과 조휴가 무도/음평의 험준한 지형에 의지해서 수비를 잘 했다고 보는 게 합당[83]할 듯 싶다. 어쨌든 조홍조휴에 막혀 무도/음평 공략에 실패한 후 유비는 전군을 동원해 한중에서 조조와 엄청난 난타전을 벌였는데, 한중공방전은 장비, 마초, 황충, 조운, 그리고 향후 북벌군의 주력 상장이 되는 위연, 왕평 등도 모두 참여했으며 책사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한 법정, 황권 등 제갈량(후방 지원)과 관우(다른 요지 진수)를 제외한 촉한 최전성기의 최고의 인적자원들이 모두 투입된 전쟁이었기에 여기서 마초의 공이 없었다고 단정할 수 없다. 장마황에 비하면 약간 급이 떨어지는 조운도 이 싸움에서 현란한 무용과 기마술을 뽐내며 최선의 역할을 다했다는 걸 생각하면 마초 역시 최소 유비군 본대 소속으로 열심히 싸웠을 가능성도 배제할 순 없다. 가령 위연 같은 경우는 분명 한중 공방전에 종군했지만 무슨 활약을 보였다는 얘기조차 전혀 없는데 전쟁이 끝난 후 군공을 인정받아 한중 태수에 임명되었다. 그간 누적된 걸 감안한다 치더라도 정말로 한중 공방전에서 아무런 군공이 없었다면 상상하기 힘든 파격적인 인선이기에 위연은 유비군 본대 소속으로 많은 활약을 보여줬음을 짐작할 수 있다. 마초 역시 이와 비슷한 입장이었을지도 모른다.
  • 마초의 커리어를 논할때 가장 중요한 인물이라 하면 단연 방덕이다. 전장에서 늘상 적진에 돌격하여 적군을 격퇴하였으니, 방덕마등군 내의 최고의 무용을 지녔으며, 마등이 입조한 후에도 마초를 따라 반란에도 가담하고, 기성 전투에도 참가하는 등 꾸준히 마초를 지탱했다. 유비에게 관우, 장비가 있었던 것 처럼 맹장 방덕의 존재는 분명 마초에게 있어서 군재를 발휘하게 해주기 충분했다. 하지만, 장로 밑에 들어가고 마초가 유비에게로 도망치면서 둘의 운명이 갈렸다.[84] 유비가 먼저 황권을 통해 장로를 조조보다 먼저 영접하는데 성공했다면 마초에게도 가족을 비롯해 유능한 심복의 재가세로 뭔가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마초는 분명 뛰어난 군재를 가진 장수지만 그런 장수도 휘하 부장들의 힘을 빌려야 한다. 대장의 작전대로 잘 움직여줄 수 있는 유능한 부장이 있다면 그 장수는 뛰어난 활약을 보이게 될 가능성이 높다. 마초는 유능한 부관인 방덕을 잃었고, 이는 마초에게 통솔할 중간층의 소실로 한쪽 팔을 잃은 것과 같은 여력 상실을 일으켰을 것이다. 그리고 마초는 방덕의 빈자리를 채울만한 중간층을 재건하지 못하고 죽고 만다.

종합해 보면 독자적인 군벌이었을 때는 충분히 뛰어났지만 타세력 치하로 흡수된 이후로는 군벌 우두머리 시절의 위용을 회복하지 못한 케이스라고 볼 수 있다.

어쨌거나 마초의 용병술 중 특기할 만한 사항이라면 소수의 병력으로 속공과 기습에 능했다는 점이다. 마초의 군사적 커리어 가운데 가장 빛나는 순간들인 평양 전투에서의 곽원 참살, 동관 전투에서의 조조와의 대결, 농서에서 하후연을 패퇴시킨 것 모두 1만 명 정도의 상대보다 적은 소수의 병력을 이끌고 적군이 빈틈을 보이는 순간을 노려 순식간에 군사를 휘몰아 상대방을 위기에 빠뜨린 케이스다. 곽원과 조조 모두 도하 도중에 마초군의 기습을 받아 위기에 몰렸으며 하후연 같은 경우는 기성에서 200여 리 떨어진 곳에서 마초군의 요격을 받아 후퇴했다는 기록으로 볼 때 예상치 못한 지점에서 빠르게 육박한 마초의 기습에 당한 상황이라고 봐야할 듯싶다.

확실히 이런 측면에서 마초는 자신이 실제로 많은 사람들로부터 비견되기도 했던 급습의 달인 팽월과 군을 움직이는 스타일이 비슷하다. 파란만장한 마초의 일생에서 가장 정점에 다다랐던 순간은 관서 군벌군의 총수장으로서 당대 최고 군웅인 조조와 건곤일척의 대결을 벌인 것이었지만 실제로 마초가 군을 지휘하는 방식을 보면 동시대 제갈량, 주유, 육손 등처럼 한 국가의 군권을 총괄하는 총사령관의 그것이라기보단 한갈래의 군세를 이끄는 별동대 사령관으로서 한 전선을 책임지고 치고 빠지며 상대방을 괴롭히는 데 특화된 모습에 가깝다. 이런 마초의 지휘 스타일에 비춰볼 때 본인이 군권을 총괄하는 상황이 아닌 마초를 콘트롤 할 수 있는 일류 총사령관 산하의 상장으로서 활약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면 좀더 좋은 커리어를 쌓을 수 있었지 않냐는 상상도 가능하다.

실제로 마초가 비견됐던 팽월 같은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고작 약소한 수적떼의 우두머리[85]로서 속절없이 늙어가던 노인에 불과했던 팽월이 초한쟁패기에 맹위를 떨친 군벌로 급부상하고 종국엔 양나라 왕에까지 올라설 정도로 어마어마한 군공을 누적시킨 비결은 본인조차 몰랐을 법한 타고난 군사적 재능이 상상 이상으로 뛰어났기도 했지만 당대 최강의 세력인 항우에 대한 카운터 파트로서 항우군 본대를 상대로 수 없이 얻어 터지면서도 끝까지 항우의 바짓가랑이를 잡고 버텨낸 당대의 일류 총사령관 한고제 유방[86]과 제휴했기 때문에 오랫 동안 수적떼와 제후들 용병 생활을 전전하며 조탁했을 급습과 게릴라전에 최적화된 본인의 군사적 재능을 십분 발휘할 수 있는 최적의 환경을 만났던 요인도 컸다.

즉 역사에 만약은 없다지만, 그래도 만약에 마초가 좀 더 오래 살아 제갈량의 북벌에 종군했다면 정공법에 능한 당대의 일류 총사령관 제갈량과 속공과 기습에 능한 마초의 콜라보레이션은 엄청난 시너지 효과를 일궈냈을지도 모를 일이다. 제갈량 본대는 안정된 루트를 따라 전진하며 조위의 주력을 상대하고, 마초는 뛰어난 기동력과 용력을 앞세우며 독립적으로 일군을 이끌어 자신이 서북방 지역에서 갖고 있던 막강한 영향력과 이름값[87]까지 발휘, 주변의 호족들과 저강의 지원을 받아가며 해당 지역을 휩쓰는 양동작전을 펼쳤다면 삼국지의 역사는 우리가 아는 그것과 많이 달랐을지도 모른다. 특히 1차 북벌에선 조운까지 있었으니 마초가 종횡무진 활약했을 가능성이 있다.

실제로 마초가 더 살았다면 남정 땐 50세, 1차 북벌 때는 53세, 그리고 5차 북벌까지 나간다면 59세로 경륜이 쌓일만큼 쌓인 노련한 장수가 된다. 이건 강유가 죽은 당시 나이인 63세보다도 어린 것이다. 실제 관장마황조 중에서 제일 나이가 어린 사람이 마초일 가능성이 높기에 제갈량 같은 전략이 뛰어난 총사령관이 그의 전술적 능력을 최대한 활용하고 그가 가지고 있던 저강족에 행사할 수 있는 막강한 영향력+어느 정도 연륜이 쌓인 강유가 농서 지역에서 가진 상당 수준의 영향력[88]까지 행사할 수 있었다면 관서의 판도는 많이 달랐을지도 모른다.[89]

제갈량 입장에서도 마초의 이른 사망은 내심 안타까운 일이었을 것이다. 한명의 뛰어난 상장이라도 더 확보해야 하는 판국인터라 성질 더러운 위연과 찌질한 양의를 화해시키려고 화해를 요청하는 글까지 쓴 제갈량 입장에서 이들보다 커리어와 위상이 압도적으로 높은 선제 유비가 임명한 촉한의 최초이자 최후의 영 양주'목' 마초가 곁에 있었다면 무척 든든[90]했을 것이다. 또 본래 융중대에서 서북의 이민족과의 협력을 논하고 있는데 알다시피 이건 당시 강족 혼혈 군벌인 마등-마초와도 긴밀하게 연관된다. 마초가 보여준 장수로서의 역량 외에도 옹양주를 더 쉽게 제압할 수 있는 상징자본이 마초에게 있었다고 제갈량이 판단한 걸 생각하면 매우 아쉬운 일이었을 것이다.

5.3. 무력

심심하면 일기토가 난무하는 연의의 특성상 장수의 기량을 가늠하는 결정적 기준이 일신의 무용으로 아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연의에서 나오는 일기토는 대부분 창작으로 정사에서 일기토에 대한 기록은 매우 찾기 힘들다. 그러나 마초 같은 경우는 일개 장수도 아니고 당대의 군웅 중 한 명이면서도 일신의 무용을 언급하는 기록이 꽤 남았다. 이렇게 일신의 무용을 묘사하는 대목 자체가 마초의 용맹함이 비범하다는 것을 반증한다. 물론 염행이나 허저와의 일화를 신뢰할 경우 마초 일신의 무력을 연의에서 묘사된 수준의 만인지적의 용장으로 보기엔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무슨 이종격투기도 아니고 애초에 순간의 실수에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일기토에 나서고 직접 당대 최강의 군주의 암살을 시도할 생각을 한 것 자체부터가 대단한 용맹[91]이라는 점을 간과해선 안 될 것이다. 평양전투에서 보여준 부상투혼이 사서에 기록될 수 있었던 것도 그가 최소 일정 수준 이상의 용맹한 장수였기 때문에 특기할 만하다고 여겨져서이다.
  • 배송지 주 전략에 따르면 마초는 사례교위(종요)의 독군종사가 되어 곽원을 토벌했는데 날아온 화살에 맞자 주머니로 자신의 다리를 감싼 채 싸워 곽원을 격파하고 참수했다. 그만큼 마초가 용맹하기에 기록될 수 있었던 기록인데 이마에 화살을 맞고도 멀쩡히 군대를 지휘했다고 기록된 관우의 일화가 연상되는 대목이다.
  • 위략에 따르면 20대 초의 마초는 건장하다는 명성이 있었는데, 이때 염행이라는 한수 수하의 듣보잡 무장에게 거의 죽을뻔했다는 기록은 삼국지 팬들의 기존의 인식을 뒤흔들어 놓았다. 위략은 촉한에 대한 왜곡된 시각이 있는 사료라서 촉한의 맹장 마초의 명성에 흠집을 내기 위함이고 또 그렇게 묘사된 대로 마초가 치명상을 입었다면 고대의 의료 기술로는 무장으로 재기가 불능하지 않겠냐는 의혹도 있다. 그러나 배송지가 사료로 게재한 만큼 당시 마초가 어렸고 염행 개인의 무력이 엄청나게 강했다고 봐야 할 듯싶다. 또한 염행이 마초를 상대한 게 일기토였는지, 난전 중에 벌어진 일인지도 제대로 알 수 없다. 여기에 사료 원문의 서술[92]을 살펴보면, 싸우다가 우연히 날린 공격 한 번에 찌른 부러진 모의 날카로운 부분이 우연히 마초의 목을 쳐서 간신히 급소를 회피한 것으로 해석해도 된다. 이렇게 해석해도 거의 죽을 뻔했다는 서술은 가능하기 때문이다. 또 염행에 의해 죽을 뻔했다지만 애초에 자기를 향해 찌른 모가 부러졌다면 마초가 싸움중에 우위에 있었던 시간도 있었다는 결론이 된다.
  • 명나라 가정제 시절, 하량신이라는 장수가 예로부터 전해지는 검법을 언급할 때 '출수법'이라고 마초의 검법을 거론하였다. 재미있는 건 이때 동시대 인물인 유비의 검법(고응법)도 거론되었다는 것이다.
  • 연의에서 마초가 이통을 죽이지만 창작이니 신경쓰지 않는다.
  • 정사에서 직접 자신의 용력을 믿고 조조 암살(혹은 납치)을 마음 먹었다가 조조 곁에서 호위하고 있던 허저를 보고 단념했다고 하는 에피소드처럼 보는 관점에 따라선 굴욕일 수도 있는 기록이 또 있다. 단 허저가 그만큼 용맹무쌍하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집어넣은 기록일 수도 있다. 허저가 순진하게 혼자서만 조조를 호위하는 것이 아니라 휘하 호위병들도 있었겠지만.
  • 연의에서 웃통을 벗은 허저와 일기토를 벌이는 장면이 있는데 창작이다.
  • 연의에서 만인지적 장비와도 맞먹는 무용의 소유자로 이미지가 정립되었지만 장비와의 일기토도 창작이다.

5.4. 패륜아 논란



일단 정사에서 마초의 행동으로 인해 그의 일족과 부하들이 위해를 당한 비극이 여러번 언급된다.
  • 마초는 아버지 마등 등 자신의 일족이 중앙권력에 출사해 있는 상태에서, 즉 적의 손아귀에 인질로 있는 거나 다름없는 상황에서 조조에게 반기를 들었고 그 여파로 아버지를 비롯한 일족들이 조조에게 몰살되었다.[93]
  • 위략에 따르면 마초는 처음 한수와 결탁할 때, 한수에게 자신의 부친을 버리고 한수를 부친으로 삼겠다고 말했다. 심지어 한수가 마등의 처자식을 죽인 적이 있는데도 그와 결탁한 것이다.
  • 패륜로서의 행동은 아니나, 한중을 탈출해 유비에게 귀순할 때 첩 동씨, 아들 마추를 버리고 갔다.[94][95][96]

이렇게 정사에서는 그의 아버지와 일족을 버린 마초의 패륜을 언급하는데 사실 마초 이외에도 당시 인물들 중에는 패륜행위로 비난 받을 일들이 있었다.
  • 부하의 의견을 듣고 마초를 사위로 삼으려는 계획을 철회한 장로부터가 원래 유언의 부하였는데 유장이 유언의 뒤를 잇는 정권이양기의 공백을 틈타 반란을 일으켜 오두미도를 중심으로 한중 일대를 독자 세력화하면서 유장의 말을 무시하여 모친을 비롯한 일족 전체를 상대로 결과적으로 패륜에 해당하는 행위를 하였다. 마초를 비난한 장로임에도 마초와 가장 유사한 행동을 하였다는 점이 특이사항이다.
  • 원소는 원봉의 얼자로 이미 죽은 원성의 가문으로 입적된 상황에서 6년상을 치루어 효자로서 명성을 올렸었다. 하지만 동탁이 정권을 잡자 일족이 경사에 있으면서도 자기 혼자만 살겠다고 몸을 빼 관동에서 거병하여 수많은 사람들을 모아 조정에 적대하면서 정작 당시 동탁의 위세 아래에 있던 친어머니와 일족 50인이 몰살 당하게 하는 결과를 낳았으며, 동탁이 자리잡은 정부의 칙사를 살해하는등 기세가 등등하였다[97].

이 셋 중에서도 당대엔 유독 마초의 패륜행위가 자주 비판되었다. 그 사정을 논하면 다음과 같다.
  • 양부가 마초는 아버지를 배신했다고 언급한다.
  • 강서의 어머니가 마초를 꾸짖으며 부친을 배반했다고 언급한다.
  • 장로는 마초를 높게 평가해 자신의 딸 장기영과 결혼을 시키려고 했으나 마초가 가족을 아끼지 않는다고 반대하는 의견을 듣고는 생각을 바꿨다. 이는 마초의 전처가 적에게 죽었는데 장로의 딸이라고 그런 일을 당하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다는 뜻이다. 역시나 마초는 유비에게 투항할 때 처자를 버리고 갔다.

그런데 이를 자세히 살펴보면 당대에 마초를 주로 패륜아로 비난하던 이들은 그와 대결하던 조조 휘하 지방 속관들이나 그들의 가솔들이 상당히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거기에 장로의 경우엔 본인 스스로가 이미 마초와 같은 전적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기에 더더욱 마초를 꺼리게 된 원인이 되었을 것이다. 당대에 또 다른 군웅인 유비의 경우 그의 불효를 논하기보단 그의 재능이나 위명에 관심을 두어 마초를 얻자, 내가 익주를 얻었다며 기뻐한 사실도 분명 존재하였다. 또 마초가 일족을 배반했어도 농서지방의 수많은 호족들이나 이족들은 여전히 마초를 따르며 그와 행동을 같이하였다. 명성 항목에도 나오지만 그가 주로 패륜아 소리를 들었던 건 조조 휘하 지방 속관들 상대였을 때였고 무조건 당대에 패륜아라고 매도당하진 않았다는 것이다.

인간적인 측면으로 봐도, 마초가 가족에 대해서 무조건적인 냉혈한만으로는 볼 수 없는 대목도 존재한다.
  • 마초가 양주를 잃고 한중으로 도피했을때 눈치없이 정월을 쇠자는 첩 동씨의 동생 동충, 그러니까 처남의 부박함을 꾸짖으며 죽은 가족들을 생각하며 오열했다.
  • 임종을 앞두고 유비에게 일족이 마대밖에 안 남았으니 종족의 제사가 이어지게 해달라고 서글픈 유언을 남겼다.[98]
또한 마초 이외에도 당시 인물들 중에는 장로, 마초, 원소급은 아니지만 가족을 저버린 패륜행위로 비난받을 일들이 있었다.
  • 제갈각손권의 의심 혹은 숙청을 피하기 위해 장남 제갈작을 독살했다.
  • 왕이는 마초의 가족과 친하게 지내기 위해서 자식을 인질로 보내는 걸 허락했고 아버지 조앙이 자식의 안위를 걱정하자 그런 자식이야 군부보다 더 중하냐면서 죽어도 상관없다는 식으로 말하였다. 왕이가 조월의 계모도 아니고 엄연히 친모인데 이런 말을 했는데 조월이 왕이한테 무언가 잘못해서 이런 일을 당하게 된 것일까? 오히려 이후 마초는 자신의 가족들이 왕이에 의해 죽었을 때도 조월을 죽이지 않았고 왕이가 마초를 계속 공격하자 그제서야 죽였다. 그럼에도 그는 절개높은 부인으로서 황보밀의 열녀전에 실렸다.

    왕이는 마초의 처를 친구로 두고 친구를 배신했고 그들을 안심시키기 위해 볼모로 둔 아들을 끝내 외면했으니 그녀가 저지른 일이 결코 작지 않다. 특이 이 부분은 왕이 역시 마초를 군부와 아버지를 버린 자라며 비난한 자들과 연계한 사람으로서 이런 행동을 했다는 점에서 마초를 비난했던 자들이 무작정 마초를 도덕적으로 비난할 처지는 못 되었다는 것을 보여 준다.
  • 마초와 연합한 한수 역시 업에 자기가 볼모로 보낸 자신의 자손들을 조조에게 잃었다. 한수 역시 조조에게 위협을 느끼고 부하인 염행이 마초와의 동맹을 말렸음에도 자진해서 연합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후 한수의 상황이 더 웃기는 건 동관 전투 이후, 염행을 사위삼아 자기처럼 가족을 조조에게 잃게해 '불효자'로 만들어 자신에게 복속시키려는 한수와 마초와 한수의 친족들은 아무렇지 않게 죽였으면서도 친 조조 성향 관중군벌인 염행에게는 특별히 회유책을 구사해 '불효자가 되어선 안되지 않겠냐?'고 은근히 볼모로 잡힌 가솔들에 대한 협박과 이간책을 동원하는 조조간의 정략싸움 때문이다.[99]

    이 두 명의 늙은 능구렁이들에게 이용당하던 염행이 가족 때문에 오락가락 하다 결국 주인인 한수에게 반기를 들고 그게 실패해 조조에게 귀순하는 장면은, 후한 말 이 시대에 효(孝)라는 가치가 얼마나 정략적으로 이용되었는지 보여주는 것이었다. 염행이 불충이냐 불효냐 사이에서 고민하며 갈팡질팡하다가 결국 '불충'을 선택하며[100] 괴로워하는 장면은 한때 그와 단기접전을 벌인 '불효자 패륜아' 마초가 나중에 '일가친척이 다 죽었는데 기뻐할게 뭐가 있느냐?'면서 피를 토하면서 통곡한 장면과 묘하게 오버랩되는 부분이기도 하다.

분명 마초의 행위는 어리석음의 발로이자 그로 인해 결과적으로 패륜을 저지른 것은 부정할 수 없고, 당대에도 마초를 바라보는 시선 역시 패륜아, 냉혈한이라는 부정적인 이미지가 투영된 건 사실이다. 경위야 어찌되었든 마초가 스스로의 결단으로 패륜을 저지른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그를 인간적 감정이 없는 냉혈한으로 치부하는 것은 남겨진 기록을 봐도 무조건적으로 그렇다고 볼 순 없다. 차라리 경솔한 행동으로 인해 일족을 멸하게 했다는 것에 더 가깝다고 하면 모를까. 당대에도 이와 같이 자신의 결단으로 인한 결과로 가족을 위험에 처하게 하는 일이 없지 않았다, 또 굳이 마초 같은 사례가 아니더라도 이 혼란한 시대의 사람들이나, 군웅들에겐 그럴 의도가 있던, 혹은 그렇지 않던 종종 이런 종류의 일이 발생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관서 군벌이 봉기한 이유에 대해선 조조의 계략이라는 설도 있다. 이를 뒷받침 하는 것이
장로가 한중을 점거하니 3월에 종요를 보내 장로를 토벌했다. 공이 하후연 등에게 하동(河東)에서 나와 종요와 합류하게 했다. 이때 관중(關中)의 제장들은 종요가 습격하고자 하는 것으로 의심하니, 마침내 마초가 한수, 양추, 이감, 성의 등과 함께 모반했다.

라는 무제기의 기록이다. 이에 따르면 관중 군벌이 조조가 종요로 하여금 한중을 토벌할 것을 명했을 때, 이것이 양주 군벌들을 자극하여 조조가 습격하려는 것으로 보았다는 것이다. 일각에선 이것을 바탕으로 조조가 이를 기회로 반란을 유도했다는 의견을 보이는데 실제로 원나라 시기에 자치통감에 음주를 단 학자 호삼성은 이를 조조의 허허실실에 의거한 계략으로 보았다.[101]

당시 관서 군벌과 조조의 조정세력은 언제라도 서로 공격할 수 있을 정도로 팽팽한 긴장 상태를 유지한 것으로 보이며 정사에 남아 있는 기록들만 조합해도 이런 긴장 관계가 표면적으로 드러나고 있는 상황이다. 이런 상황에서 호삼성의 서술대로 마초가 조조의 선제도발 혹은 계략에 말려들어 자기 영역을 보존하려고 수동적으로 봉기한 군벌이라는 시각을 강화한다면, 마초의 행적은 분명 변호의 여지가 있다. 실제로 마초는 조조와의 전쟁이 장기화되자 먼저 사신을 보내 화해를 요청하고 자신의 영토를 보존해 줄 것을 청했다, 즉 마초 역시 처음부터 자신의 가족이 죽을 때까지 싸울 생각은 아니었던 것이며, 조조는 마초의 타협안을 거절하고 후일 마초가 격파되고 관서지방으로 도주해 천수에 도착하자마자 인질은 필요없다는 식으로 그제서야 마등의 일족을 죽인다. 물론 이는 군벌연합체의 수장으로서 전쟁의 장기화에 따른 구심력 와해를 우려한 제스처일 수 있겠지만 애초에 마초의 봉기가 조조에 대한 적극적인 대항의지에서 기인하는지에 대한 의구심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한 대목이다.

그리고 마초가 유비에게 투항할 때 부하 방덕을 버리고 갔다고 비판하는 시각이 타당하다면 유비 역시 전예, 진군, 진등같은 특급 인재들을 버린 셈이 된다. 피치못할 사정으로 데려가지 못했을 가능성이 높으며 가족조차 데리고 가지 못했을 정도였는데 방덕과 같이 유비에게로 귀순하는 것은 더더욱 불가능에 가까웠을 것이다.

장로, 원소와 같이 마초와 비슷한 경우가 있었고, 꼭 "패륜아"에 해당하진 않지만, 조조, 유비, 손권의 경우에도 세력화와 권력화의 과정에서 결과적으로 친인척이 위기에 빠지는 일이 있었다.

특히 원소와의 비교가 볼만한데 분명 마초와 같이 그 역시 중앙정부에 봉기하여 인질로 잡혀 있던 일족을 죽게 하였음에도 그는 오히려 충신열사로 명망을 더하고 패륜아라는 말이 나오지 않는다. 이는 원소가 6년상을 치르면서 천하에 효행으로 이름을 높은 명망, 역적 동탁을 죽여 나라를 평온케 한다는 명분이 마초와 차이가 있었기 때문이다. 마초와 비교하면 마초는 기껏해야 관서의 군벌 중 일부로 봉기 당시에는 오히려 한수가 더 명망이 높았던 상황이었으며[102] 명분 역시 관서군벌의 안전이라는 명분으로 원소의 '동탁이라는 천하를 혼란케 하는 대역적 토벌'보다 그 명분이 부족한 편이었다. 또 원소는 천하의 공적으로 찍인 동탁을 역적으로 규정하고 '그와 타협은 안한다!'는 자세로 갔지만 마초는 계속 협상을 요구하고 화해를 하려고 하면서 아울러 인질을 계속 요구하였는데 이는 업으로 가 있는 인질화된 일족에 대한 보험을 필요로 했다는 해석이 가능한 부분이다. 마초는 이쯤하면 우리가 그만두겠다는 자세를 취했으니 어쨌든 아직 천자의 신하로서 천하를 주무르던 조조에게 타협할 수 있다고 여겼다. 그가 한때 조조를 도와 고간곽원을 격파한 적도 있었으니...

결국엔 유사한 상황이어도 원소는 원씨 일족이 몰살당한 것에 대한 동정표가 더해졌으나 마초는 아비를 죽게한 패륜아 소리를 들었다. 한대의 법률에는 아무리 큰 죄를 저지른다 해도 어린아이와 늙은이에게 까지는 연좌시키지 않았으나 후한쯤 가면 거의 사문화 되어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원소의 일족이 몰살당할때는 이 규정으로 인해 원소가 동정을 더 받았었는데 마초는 그렇지 않았고 그냥 닥치고 욕을 먹었다는 차이점이 있었다.

또. 생각외로 중요한 두 사람의 차이점인데 마초는 아버지를 비롯한 일족들이 자기들 의지로 중앙에 가 있는 것이었기에 자신이 간섭해 여기에 머무르라고 할 상황이 되있지 못했다. 이후 중앙에 위협에 맞서 봉기한 이후 화해를 청하고 이쪽에서도 향후를 대비한 인질을 받아내려 했다. 또 마초는 아비를 버리고 한수를 아버지로 섬긴다고 말로만 그랬을뿐이지, 실제로는 서로를 전혀 믿지 못해 내분을 일으켰다. 한수가 마초의 말을 무시하고 작전을 내리거나 가후의 간단한 이간책으로 만으로도 아비라고 불리던 한수를 친 마초이다. 이랬는데 아버지 운운은 그저 당장이라고 무너지기 쉬운 관서군벌들의 집합을 결속하려는 말 이상은 되지 못했다고 봐야 할 것이다. 관서군벌의 수장으로서 아직 젊었던 그는 모래알 같은 결속력을 다지기 위해 자신과 버금가는 세력의 한수와 연합하는것이 무엇보다 중요했고 결국 그것때문에 무너졌다는 것을 상기해볼 필요가 있는 발언이라고 할 수 있다.

반면 원소는 당시 수도를 관장하는 사례교위였고 수도에서 몸을 뺄 때 동탁이 그의 명망을 보고 함부로 죽이지 못하고 바로 발해태수가 되었었으므로 일족을 소수라도 수도에서 빼낼 시간은 많이 있었다, 즉, 그는 동탁과 맞설 작정을 했고, 일족을 빼낼만한 위치에 있었음에도, 거병하기 이전에, 친어머니를 비롯해, 단 한명의 친족도 동탁의 위협에서 빼내오지 않았다. 더욱 섬뜩한건 이런 지경임에도 그는 여전히 효자라며 칭송을 받았다는 것이다. 거기에 원소는 이런 원가의 몰살로 인한 동정과 그 자신에게 주어진 원가로서, 효자로서의 명망으로 인해 마초와 달리 엄청난 세력을 결집시키는데 성공하고 유우 옹립 실패 이후에도 이런 명성을 바탕으로 하북을 제압하는 등 강한 결집력과 독재적인 카리스마를 유지할 수 있었다. 결국 그 독재적인 행동으로 인해 무너지지만 같은 처지에 처한 두 사람의 행동이나 처지가 완전 달랐다는 점은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앞 문단에 언급된 바와 같이, "역적의 토벌" VS "관서군벌의 안전" 이라는 명분의 차이와 더불어, 당시 원소는 6년상이라는 고행에 가까운 행위를 하면서 얼자 신분을 걷어내고 얻어낸 당대의 효자라는 명성도 있었기에, 원소의 행위로 인한 일족의 몰살은 마초와 달리 당대 인사들에게 오히려 동정을 샀다. 반면, 마초의 경우는 위의 명분의 차이에 더불어서, 마초 본인의 일가가 강족의 피가 섞인 이민족이었고 심지어 마등의 경우도 자기 아들과 똑같이 중앙정계에 반란을 일으켰던 군벌들 중 하나였기에 이런 동정을 받지 못하고 결국 '반 이민족이자 반란군 자식 놈이 괜히 봉기해 일족을 죽게 했다'는게 더 부각되었다. 실제로는 비슷한 행위임에도 평가가 갈리는 것은 바로 이런 연유가 있던 것이다.

굳이 더 따지면 한 사람은 오히려 어떻게든 자신의 영역을 지키고 사태를 종결시키기 위해 필사적으로 협상을 하고 다른 한쪽은 겉으로는 역적을 친다는 명분하에 자신의 야망을 위해 가족이 어떻게 되던 말던 밀어붙였음에도, 세간의 평가는 완벽히 정반대로 흘렀던 것이다. 이런 '자신의 것을 지키기 위해 일족을 버렸음에도 결국 효와 일족에 대한 정을 완전히 버리지 못했던 자''효를 자신의 입신양명에 철저히 이용한 자'의 대비되는 평가를 봐도 알 수 있듯이, 어찌보면 마초의 패륜아 논란은 명분으로서의 효와 실제적인 당대 인물들의 행동이 괴리되었던, 유교의 효가 정치적 이데올로기로서 이용되어 모순을 보였던, 혼란한 한 시대의 단면을 보여주는 것일지도 모른다.

정사 삼국지의 저자 진수는 "마초는 융족을 믿고 용맹에 힘입어, 그의 일족을 뒤집었으니, 애석하구나!(그러나) 곤궁함으로 인해 편안함에 이를 수 있었으니, 오히려 낫지 않은가!"라고 평가했다. 진수는 위진 정통론자이며 유교적 가치가 절대적이던 시대에 살았던 선비답게 어떠한 인물을 평가할 때 유교적 가치에 입각해 품성과 도덕성을 매우 중요시 한 사가였다. 그래서 아무리 재능이 뛰어나더라도 인격에 하자가 있다면 가차없이 비판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가령 당대 이미 전 중국 최강의 무장으로 높게 평가되던 만인지적 관우장비와 같은 경우라도 그들의 군재와 무용, 주군에 대한 충성심 같은 장점을 높이 평가하면서도 그들이 인격적 결함 때문에 곱게 죽지 못했다는 식으로 거침 없이 비판했다. 반대로 단독으로 일군을 이끈 경험이 별로 없어서 지휘관으로서의 재능엔 논란이 있는 촉한의 조운이나 무장으로서 군재는 아예 없다고 봐도 무방한 조위의 하후돈 같은 경우는 그들의 고결한 품성과 충성심, 인격을 높이 사 종합적으로 매우 후한 평가를 해주었다.[103]

그런 깐깐한 진수이기에 정말로 당대 사람들에게 마초가 패륜아로 이미지가 고착화 됐다면 당연히 마초를 혹평했을 법도 한데 정작 진수는 마초를 평할 때 마초와 극렬히 대립했던 조위 영향권 옹양주 명사들의 시각처럼 마초의 행적 가운데 패륜적인 측면을 부각하고 비판하는 게 아니라 자신의 용력과 이민족들의 인심에 의지해 군을 일으켰다 일족을 망치고 그런 곤궁함에 인해서야 태평한 방향으로 나간 안타깝고 불쌍한 사람으로 여긴 걸 보면 당대 사람들이 마초를 진정 어떤 인물로 간주하고 있었는지 그 단초를 알 수 있다. 진수의 이 평가가 실제 마초의 인물상에 가장 근접한 묘사일 듯 싶다.

6. 둘러보기

관중제장
마초 한수 후선 정은 이감 장횡 양흥 성의 마완 양추

오호대장군
관우 장비 마초 황충 조운


7. 미디어 믹스



[1] 삼국지 촉서 허정전 주석 익주기구전[2] 배송지 주 전략[3] 삼국지 위서 장기전 주석 위략[4] 삼국지 위서 종요전 주석 배송지 주 전략.[5] 가규도 이때 포로로 붙잡혔었다.[6] 사례(司隸) 하동군(河東郡) 평양국(平陽國)[7] 의학적인 측면에서 보자면 함부로 화살을 뽑았다가는 더 큰 출혈이 일어나기 때문에 위험하기도 하다.[8] 삼국지 위서 장기전, 자치통감[9] 배송지 주 전략[10] 삼국지 촉서 허정전 주석 익주기구전[11] 삼국지 오서 주유전[12] 삼국지 위서 고유전[13] 위기전 주석 위서[14] 배송지 주 전략[15] 연의와 달리 마초가 장안을 점거했다는 직접적인 기록은 정사 삼국지 내에 없다, 장안 넘어에 있는 동관을 포위했다고 나와 정황상 장안을 점거했을 수도 있다는 추측은 있으나 직접적으로 마초가 장안을 함락했다라는 식의 기록은 없으며 장안 점거를 한 건 아니고, 장안에서 못 기어나오게 위협만 한 후 우회를 하였다는 것이 대세. 실제 드라마 삼국에서도 이걸 염두해 마초가 장안을 무시하고 동관으로 바로 진격하는 식으로 나온다.[16] 이 발언은 역으로 업에 있는 마등과 일족을 보호하기 위함이라는 주장이 있다. 마등과의 표면적인 관계를 끊어 자신과 마등은 이제 상관이 없다는 것을 보여주어 일족이 연좌되는 것을 막으려 했다는 것이다. 실제 후대의 종회가 난을 일으키자 '종회는 책략에 의지하여 뜻 밖의 것을 지키기는 어려우므로 중요한 직책에 위임될 수 없습니다.' 라고 동생 종회와 선을 그어 말한 형 종육의 자손들은 연좌를 피할 수 있었다.[17] 삼국지 위서 장기전 주석 위략[18] 삼국지 위서 두기[19] 삼국지 위서 장로전 주석 위략[20] 삼국지 위서 서황전[21] 삼국지 위서 무제기[22] 삼국지 위서 무제기 주석 산양공재기[23] 삼국지 위서 무제기[24] 삼국지 위서 무제기[25] 삼국지 위서 무제기 조만전[26] 삼국지 위서 누규전[27] 삼국지 위서 가후전[28] 삼국지 위서 무제기 주석 위서[29] 일단 자치통감에서는 이 기록을 배제하였다. 자치통감의 국내 번역자인 권중달 교수는 원저자 사마광이 이를 사서에 수록하지 않은 것을 들어 허저전의 내용이 조작일 것임을 의심하고 있는데 다만 이 부분은 앞선 기록들에서 허저가 호위하여 마초가 실행하지 못했다는 것을 강조하기에 시도 자체는 사실이지만 내용을 허저의 용맹을 강조하기 위해 부풀린 기록이라는 의견도 있다.[30] 삼국지 위서 가후전[31] 삼국지 위서 위기전 주석 위서[32] 삼국지 위서 무제기[33] 이각, 곽사전[34] 삼국지 위서 양부전[35] 삼국지 위서 하후연전[36] 삼국지 위서 염온전[37] 강유의 아버지 강경이 이때 강족의 봉기를 막다가 전사했다는 설이 있으나 마초의 공격 말고도 강족과 저족을 수시로 이 지역에서 봉기를 일으켜왔기 때문에 시점을 확언할 수는 없다.[38] 삼국지 위서 양부전[39] 삼국지 위서 염온전[40] 양부전 주석 황보밀 열녀전 왕이[41] 삼국지 위서 양부전[42] 삼국지 위서 하후연전[43] 양부전 주석 황보밀 열녀전 왕이[44] 삼국지 위서 양부전[45] 양부전 주석 황보밀 열녀전 왕이[46] 삼국지 위서 무제기[47] 양부전 주석 황보밀 열녀전 왕이[48] 삼국지 위서 하후연전[49] 한 가지 가설을 내세울 수는 있다. 마초는 아내 양씨를 통해 조앙과 왕이를 신뢰하게 되었고, 그렇기에 그들에 대해서도 '기성에서 다른 사람의 반란에 휘말린 것뿐이지 그 자신들이 마초와 그 가족을 결코 저버릴 생각은 없었던 사람들'이라고 끝까지 그들을 믿었다면, 그리고 마지막까지 믿었다가 결국엔 배신당한 것이라는 걸 알았다면, 마초의 이런 행동이 아예 설명이 되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사서는 간략하게 마초가 마지막에서야 조월을 죽였다는 기록만 남겼을 뿐, 그가 그때 무슨 생각을 했는지는 설명하지 않는다. 결국 이 모든 건 하나의 추즉이자 가설로만 봐야 할 것이다.[50] 비슷한 예로 마초는 염온이 끝까지 마초에게 저항하여 기성공성전을 꼬아놓은 원흉임에도 몇 번 살려보아 자신의 부하로 쓰려고 했고 그게 되지 않자 결국엔 죽였다.[51] 나중에 조조의 아들인 조우와 결혼한다.[52] 배송지 주 전략의 기록[53] 배송지 주 전략의 기록[54] 마초는 모든 걸 잃은 시점에서도 유독 이민족들에 대한 영향력은 여전히 강력했다. 한수에게 붙었다 하후연에게 깨진 저족의 천만도 이 시기 마초에게 도망오기도 하고.[55] 삼국지 촉서 관우전[56] 자를 부르는 것은 상대방과 신분이 동등하거나 높을 때 가능하며, 하급자가 상관의 자를 부르는 건 불경하다 여긴다. 부하가 상관을 부를 땐, 직책으로 부르는게 일반적이다.[57] 마초전 주석 산양공재기[58] 삼국지 촉서 팽양전[59] 배송지 주 전략의 기록[60] 삼국지 촉서 선주전[61] 삼국지 위서 양부전[62] 삼국지 위서 무제기[63] 삼국지 위서 조휴전[64] 삼국지 위서 무제기[65] 그럼 왜 기록이 없는가 의문을 던지는 경우가 있을 텐데 촉이 멸망하고 강유가 종회와 손을 잡아 난을 일으켰을 때 영향으로 촉의 기록 대다수를 유실했으니 마초가 종군했을 때 기록도 상당수 유실됐거나, 따로 일군을 지휘하여 싸운 것이 아니라 본대에서 유비에게 직접 지시를 받는 휘하 장수 중 한명으로 참전했을 것이다.[66] 삼국지 촉서 황충전, 이를 통해 마초가 유비군 내에서 관우만은 못해도 장비나 황충보다는 높은 대우를 받았던 것을 짐작할 수 있다.[67] 이것은 굉장히 많은 부분을 시사하는데 이 양주목(양주자사) 자리는 촉한의 북벌에서 중요한 위치에 있는 인물들이 주로 받은 것이다. 대표적으로 위연이나 강유를 들 수 있다. 근데 이들도 '영 양주자사' 였을 뿐인데 마초는 그냥 '영 양주목'이다. 제갈량의 '영 익주목'을 생각해보면 마초의 계속 살아 그 위치에 있었다면 향후 있었을 촉한의 북벌에서 마초의 역할과 위상이 엄청났을 거라는 추측이 가능하다. 혹자들이 주장하는 마초 홀대설을 부정하는데 있어서 강력한 근거자료다.[68] 유비의 수하가 된 후 마초는 다시 가정을 꾸려 아들 마승을 얻어 그가 후사를 이었지만 마승이 어린 탓에 마대에게 가문의 제사를 맡기게 된 것으로 보인다. 유비에게 귀순하고 새로 가정을 꾸렸을 때가 214년 이후라 보고 222년 마초가 죽었으니 아이의 나이를 높게 잡아봐야 8세다.[69] 유리가 요절하는 바람에 딸은 젊은 나이에 과부가 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유리의 사망연도가 244년인데 가정을 꾸렸을 때가 214년 이후라 보면 당시 마초의 딸은 적어도 30세를 넘지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70] 마초는 제갈량보다 5살 연장자였다. 관장황조 등 1세대보다는 제갈량을 비롯한 2세대들에 더 가까웠다.[71] 그래도 한중 공방전에서 조창의 군대를 박살내는등 활약이 없다고 하긴 그렇다.[72] 원나라 초의 인물로 학경 속후한서의 저자.[73] 그러나 마초가 재기할 때 농서에 집결한 병력이 마초 직계 패잔병, 서북방 여러 이민족, 양앙이 이끄는 장로의 원군 포함 고작 1만 명 수준이었다는 기록을 감안한다면, 그리고 그 전까지 조위의 자장권이라고 보기 힘든, 외려 마초의 홈그라운드에 가까웠다면 가까웠을 곳에서 결국엔 내부의 친 조조 세력을 방치한 것이 문제가 되어 마초가 농서지역에서 축출된 걸 보면 마초의 전성기는 조조와의 대결에서 참패한 시점에 끝났다고 봐도 무방할 듯 싶다. 물론 애초에 농서 지역 자체의 인구가 적고, 마초가 농서 전체의 지배자라기보다는 연합세력의 수장이었다는 점, 농서가 이미 조조의 군세에 패배하며 인구가 줄어들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마초에 대한 농서 지역에서의 지지는 주목할 만한 대목이며, 마초가 농서를 둘러싼 여러 세력들, 그러니까 저, 강, 장로의 봉기를 유발시켰다는 건 분명한 사실이다. 마초가 양부를 죽여 내부의 조조 추종세력에 대한 정리를 분명히 했다면 양주는 마초에 손아귀에 들어왔을 가능성도 높았다고 볼 수 있다. 결국 마초 세력 자체가 전투에 특화된 군사 집단이기에 후방에서 내정을 돌볼 문관 성향의 인재가 거의 없었다는 한계가 재봉기 실패의 핵심인 셈이다. 양부는 당시 이미 중앙권력에 능력을 인정받은 인재이고 또 후에 유엽과 조조로부터 삼공급이라는 찬사를 들을 정도로 뛰어난 재능이긴 하지만 극친조조 성향의 인물인데 오죽 내정을 돌볼 사람이 없었으면 그런 양부마저 아쉬워서 강제로 기용할 수밖에 없을 정도였으니...[74] 뛰어난 인재라고 볼 수 있는 가규도 이때 곽원에게 포로로 잡혔다가 마초군에 의해 곽원군이 궤멸되자 비로소 풀려날 수 있었다.[75] 연의에서는 듣보잡이지만 실제 역사상에선 한시적이나마 조조에게 유효타를 성공시키고, 세력균형과 판도를 완전히 반전시킬 뻔 했던 고간과 그의 상장, 심배가 자세력 하북의 명장으로 인증한 곽원의 임팩트는 생각보다 크다. 고간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고간은 원담, 원상처럼 원소의 직계 가족은 아니었으나 적어도 원소의 유력 일족으로서 유표 휘하의 실세 채모처럼 엄청난 권력을 가지고 있었고, 잘 나갈 때도 별로 좋은 소리가 안나왔던 채모와는 달리 최소 한지역을 재패할 제후 수준의 뛰어난 명망과 능력을 갖춘 인물이었다. 만약 고간의 봉기가 성공해 독자세력화가 이뤄졌거나 적어도 할거 노선이 어느 정도 지속됐다면 조조는 북방의 원상과 인접해 있으며 막 점령해 민심이 적대적이었던 기주 북부/유주 일대에 고립되어 북쪽의 원상과 오환, 서쪽 병주의 고간의 압박을 받는 형세가 되고 더불어 고간이 사례까지 진출하는 데 성공했다면 조조에 적대적이었던 유표와 고간 사이의 연대와 소통이 원활해져 중원까지 공세를 받게 되는 등 조조 입장에선 최악의 구도가 확정된다. 이쯤 되면 조조는 그 동안 원상, 원담과 몇 년 동안 싸워가며 고생 끝에 먹었던 걸 도로 다 뱉어내야 함은 최소한이고 그 자신의 생명도 위태로운 지경이 될 가능성이 높다. 설사 이 정도 파국까진 치닿지 않더라도 고간이 업성 전복이 아니라 최소한 호관 봉쇄와 사예 장악까지만 성공했더라도 조조에겐 역시 치명타였다.[76] 비슷한 시기에 30대의 나이에 구장들을 제치고 한 국가를 진두지휘한 총사령관에 오른 주유나 육손 같은 경우도 있지만 이들은 비교적 확고한 권위를 갖춘 세력의 군주의 권력을 위임받은 입장이라 약간의 잡음은 있을지언정 얼마든지 내부반발을 무마할 수 있었지만 마초는 거의 동등하거나 위상과 권력이 더 높았다면 높았을 군벌들 틈바구니에서 리더로 선출된 격이니 더 파격적이다. 어찌 보면 반동탁 연합군의 수장으로 선출된 원소의 마이너 버전이다.[77] 물론 한수 항목을 읽어 보면 알겠지만 이 양반은 기본적으로 뭔가 일을 꾸밀 때 항상 얼굴마담을 앞세우고 자기는 배후에서 실세로 군림하는 음흉한 스타일이라는 걸 감안해야 할 것이다. 어쨌든 당시 관서에 난립한 군벌 가운데 아마 가장 젊었을 마초가 대표가 된 것은 파격적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78] 혹자는 이 대목에서 당시 관중연합군의 정치적 역학관계를 읽어내기도 한다. 이때 마초의 주장은 후에 전해 들은 조조조차 두려워할 정도로 조조군에게 큰 위협을 줄 수 있는 전술적 선택이었는데 한수의 발언권이 더 큰 걸 보면 실질적인 오너는 마초가 아니라 한수라는 얘기. 물론 한수의 유인책 역시 꽤 일리가 있었고 실제로 조조는 한수의 유인책에 말려들어 거의 죽을 뻔 했다. 실제로 습격으로 엄청난 성과를 낸게 마초였고 결과적으로 무산돼서 문제였지…[79] 마초와의 전투에서 패배해서가 아니라 하후연의 본대 내부에서 반란이 일어나 군을 물렸다는 주장도 있지만 사실상 하후연은 마초에게 패배한 게 맞다. 당시 마초가 양주자사 위강을 하후연이 구원하기 전에 포위해서 격파하고 하후연과 맞붙는다. 마초는 기성에서 2백 여 리 떨어진 곳까지 요격와서 하후연은 이에 맞서 싸웠는데 군이 불리했고 마침 견저가 모반하자 하후연은 군을 이끌고 퇴각했다고 기록돼 있다. 즉 하후연은 마초의 기세에 먼저 밀리고 마침 모반이 일어나서 이걸 기회로 퇴각한 것에 가깝다. 참고로 이때 마초가 이끈 병력은 1만 명을 조금 웃도는 수준으로 추정된다. 마초가 농서에서 재기해 양부를 중심으로 하는 기성을 공격할 때 이끈 병력은 본인 휘하의 패잔병을 포함해서 이민족, 한중의 장로 등으로부터 빡빡 긁어모아 고작 1만 명 수준이었고 기성에서의 저항도 만만찮았으니 전사자도 꽤 있었을 것이다. 농서 일대를 확보하고 어느 정도 증원됐다 하더라도 아마 1만 명 언저리 수준을 넘지 못했을 것이다.[80] 이 부분은 마초가 기성을 점령할 때 명망있던 친 조조라인 지방관 양주별가 염온과 양주자사 위강을 죽이는 등 지나치게 강경하게 나가 인심을 잃은 것도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물론 염온은 그가 포섭하려고 노력했지만 실패한 케이스이고 애초에 극강의 친조조 라인이었고 마초에 대해 극히 부정적인 입장을 보였던 양부 같은 경우는 마초가 어떤 태도를 보이느냐와 무관하게 배신했을 확률이 높지만...[81] 이때 마초를 농서에서 완전히 몰아낼 수 있었던 것은 장합의 공이라기보다는 하후연의 공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듯 싶다. 다른 제장들은 조조의 명령이 하달될 때까지 일단은 마초의 움직임을 지켜보자는 입장이었지만 하후연은 마초에게 빈틈을 허용하면 필시 다시 농서를 회복할 것이라고 보고 바로 장합을 파견해 마초를 몰아낸 것이다. 물론 이 부분은 무슨 대단한 전략적 식견이라기보다는 재고 따지는 것 없는 하후연 특유의 호전성으로 볼 여지가 다분하나 어쨌든 결과적으로 옳은 판단이었으니... 사실 마초와의 1차전에서 하후연이 기성에서 포위당한 위강을 제때 구원하지 못한 건 조조의 재가를 받느라 시간을 허비한 탓이 컸기에, 2차전에선 똑같은 실책을 반복하지 않고 자율적으로 군을 움직인 건 분명 현명한 선택이었다. 하후연의 판단은 춘추에 나오는 "장수는 국가에 이익을 줄 수 있을 경우 독단적으로 행동할 수 있다"라는 구절의 좋은 예일 것이다. 뭐 나쁜 예는 다들 알다시피... [82] 다만 한중의 장로 휘하에서 수차례 군사를 빌려 옹주 수복을 도모했다 실패했다는 기록으로 봐서 마초는 후에 제갈량과 강유의 북벌의 결정적인 장애요소인 한중분지와 관서지역을 가르는 진령산맥의 험준함을 먼저 온몸으로 절감했을 것이다.[83] 실제로 무도/음평이 촉한의 영향권에 든건 이로부터 10년 후 진식과 그를 지원한 제갈량 본대가 곽회를 쫒아내고 난 이후이다.[84] 자치통감에 마초가 신변의 위협을 느껴 저족 부중에서 투항했다는 기록이 있는 것을 보면 마초가 이 당시 방덕과 미처 협의를 못했을 것으로 추정된다.[85] 그것도 정작 본인은 별로 하고 싶지 않았는데 나이가 많다는 이유만으로 주변에서 떠밀었다.[86] 본인 라이벌 만인지적 항우와 부하 국사무쌍 한신의 임팩트가 워낙 크기도 하고 초한쟁패기를 다루는 2차 창작물에서 왜곡받은 것도 크게 작용해서 유방의 군재는 흔히 과소평가되지만 사실 유방의 군재는 당대 최고 수준이었다. 한신과 항우 포함 무조건 당대 베스트3 안에 들어간다. 사실 팽월의 성공도 그렇지만 한신의 북벌이 성공할 수 있었던 것도 유방군 본대가 당대 최강의 항우군 본대를 끈질기게 붙들고 있던 게 핵심이었다.[87] 마초는 군재를 떠나서 그 이름값만으로도 반위선전의 최선봉으로 써먹을수 있는 인물이다. 이민족 유화책의 핵심으로 쓸 수 있고, 한중전 당시 회유한 저족규모가 1만여 부락이다.[88] 강유가 촉한에 남았던 이유 참고. 강유는 제갈량의 영향도 있었겠지만 기본적으로 "정현의 학문을 좋아하며 입신양명에 관심이 가지고 자신을 위해 죽을 수 있는 병사들을 키웠다"라는 기록을 봤을 때 나름대로 입신양명의 꿈이 있었으며 해당 지역에서 한 유협 세력을 키울 정도로 상당한 수준의 인망과 세력을 갖춘 집안 출신일 가능성이 높다. 또 위략에 따르면 1차 북벌 당시 강유는 그 젊은 나이에 천수 기현의 대표자로 나설 만큼 주위의 신망과 인심을 얻던 젊은이였고, 그 지역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미친 인사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런 인물이 자신들을 적으로 여기고 배척한 조위 대신 자신의 진가를 더 잘 알아주고 인정해줬던 촉한에 가서 평생 충심을 바쳤다. 강유가 촉한에서 중직을 맡으면서도 꾸준히 해당 지역 사람들, 이민족에 상당한 영향력을 미쳤다는 점은 마초의 농서지역 영향력과 유사한 지점이 많다.[89] 물론 그때까지 살아있다 치더라도 마초의 건강이 버틸지는 모를 일이고, 실제로도 지천명을 앞두고 세상을 떴다. 경위야 어찌 되었든 결과적으로 자신의 선택과 과오로 일족을 죽음으로 내몬 셈이니 그것 때문에 심신이 많이 상했을 가능성이 있다. 한중에 있을 때부터 일족의 죽음에 비통해 하며 각혈까지 했다는 기록을 보아 그의 피폐한 정신상태가 신체적 건강까지 해치게 만들었다는 의심이 충분히 가능하다. 마초가 잘 나가다가 농서에서의 배신으로 남은 가솔들마저 모조리 잃고 한중으로 피신한 이후 갈수록 활약이 미미해지는 걸 두고 심신쇠약과 그로 인한 건강 악화 문제를 원인으로 보는 시각도 많다.[90] 또한 마초 같은 경우는 176년으로 알려졌는데 이는 촉한 5대장 가운데 아마 가장 젊은 연배였을 것이고 181년생으로 알려진 제갈량과 가장 비슷한 또래이기도 하다. 친분을 나눌 때 나이가 대단히 중요한 요소가 됐던 시대상을 감안한다면 양자 모두 서로에게 다가가기 쉬웠을 것이다. 실제로 제갈량이 관우에게 보낸 편지나 마초가 팽양과 나누는 대화를 살펴보면 제갈량과 마초 모두 서로를 높이 평가하고 존중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연의를 비롯 삼국지 관련 2차 창작물에선 주로 제갈량과 조운의 인연을 강조하는 경우가 많은데, 신선감을 불어넣는 차원에서 제갈량과 마초의 친분관계를 묘사하는 대목을 부각시켜도 괜찮을 듯 싶다. 사실 제갈량과 조운의 관계에 있어서 사적인 교분이나 서로에 대한 평가가 사서 액면상에서 직접적으로 드러나는 것은 아니다. 물론 공적인 차원에서 제갈량과 조운은 유비가 신야에서 유표의 객장으로 지리멸렬하던 시절부터 적벽대전, 남형주 점령, 입촉, 남반정벌, 그리고 북벌 1차전 같은 주요 역사적 분기점을 통과하며 그야말로 온갖 생사고락을 함께 한 사이고 군주인 유비가 기를 쓰고 추진한 이릉대전 같은 신하로서 감히 거부하기 힘든 정치적 난제에 있어서도 동시에 반대 의사를 표명해 의견합치를 보이는 등, 사서의 맥락과 행간을 읽어보면 두 사람이 충분히 친했다는 결론을 유추해도 전혀 무리가 없을 것이다. 또 흔히 간과되지만 제갈량은 관우를 향해서 별명인 "염(髥)"으로 호칭하는 걸 보아 관우와도 사적으로 꽤 친했음을 알 수 있다. 한때 유행(?)했던 제갈량이 관우를 견제해서 형주에 방치해 죽게 만들었다는 낭설은 전혀 근거가 없다.[91] 재밌는 건 곽사 같은 경우는 여포와 일기토를 벌여서 패했다는 영웅기의 기록이 삼국지 팬덤 사이에서 조명되면서 적어도 일신의 무용은 재평가를 받는 데 반해 비슷한 입장인 마초는 이미지가 많이 실추되는 정반대의 처지에 놓이게 됐다. 물론 이는 연의를 통해 형성된 '당대의 맹장' 마초의 이미지에 따른 반동일 것이다.[92] 行嘗刺超,矛折,因以折矛撾超項,幾殺之 어떤식으로 '거의 죽였다'는 설명이 없다.[93] 이 대목이 마초가 패륜아로 비판받는 가장 큰 근거이다.[94] 이때, 부하 방덕도 함께 남겨진다.[95] 다만 이는 장로에게 주변에서 마초는 어버이를 버린 인간이니 믿어서는 안 된다고 조언하여 장로와 사이가 벌어졌던 상황에, 장로의 지원군을 받았음에도 양주를 공략하는 데 실패했고, 장로의 장수인 양백이 마초의 유능함을 시기했기에, 이런 불리한 상황을 버티지 못한 마초가 저족에게로 달아났다가 결국은 유비에게 귀순했던 상황이다. 한마디로 장로군 내부에서 이리치이고 저리치이던 마초가 신변에 위협을 느껴 자기에게 호의적인 저족에게 도망가야 했을 정도로 마초의 상황이 좋은 게 아니었는데 유비의 제안으로 한줄기 구원을 얻은 셈인 것이다. 사실 이 점도 다시 고려해 볼 필요가 있다.[96] 거기에 당시 유비세력의 정황상 마초에게도 믿을 구석이 있었다. 유비 세력의 우선적인 대전략은 일단 기본적으로 형-익을 아울러 천하를 삼분해 조조에게 대항한다는 것이고 당시 파촉까지 얻은 상황에서 유비군이 이 계획에 따라 바로 얻어야 하는 곳이 한중이다. 따라서 유비 세력은 바로 한중에 있는 장로세력을 포섭하거나 공격해야 했는데 시간상으로 한중 옆에 있는 유비세력이 장로를 포섭하거나 공격할 시간은 충분히 있었고, 유비 세력에서 고위급 위치에 서게된 마초 입장에선 일단 유비에게 귀부해 일신의 위험을 피했으니, 얼마 후 유비가 한중을 얻으면 자연스럽게 가족과 심복을 돌려받을수 있는 공산 역시 충분히 있다고 나름대로 계산이 서기도 했을것이다. 그러나 얼마후 급작스럽게 형주에서 익양대치가 발생해 유비는 거기에 신경을 집중해야 했고 이 사이 조조가 한중으로 치고 들어가 한중을 점령하는 사태가 발생하고 만다. 유비는 익양대치 직후, 뒤늦게라도 황권의 조언에 따라 장로가 조조에게 패해 파중현으로 들어올 때 장로를 영접하려고 했으나 황권이 도착하기 전에 장로는 남정으로 돌아가 조조에게 투항해버렸는데 이 과정에서 마초의 아들 마추는 죽고 수하였던 방덕은 조조의 신하가 되어버린다. 214년 당시 유비에게 귀부하던 마초 입장에서 그 다음해 발생할 갑작스러운 익양대치나 장로의 동생 장위가 천혜의 요새지인 양평관에서 삽질(...)을 해서 장로가 제풀에 무너질것을 예상하기란 어려운 일이었을 것이다. 유비 입장에선 이후 한중을 공격해 조조의 최고위 상장 하후연을 죽이고 친정한 조조를 격파함으로써 세력에 최고조에 오르는 전화위복의 기회가 되었다지만, 마초 입장에선 또 다시 가족을 잃고 심복까지 잃는 통탄할 일이었다.[97] 다만, 이쪽은 동탁이 워낙 천하의 개쌍놈이었던 것을 감안하자. 만일 어떤 사람이 자기 가족들이 김정은에 의해 납북되었을 때, 가족들이 죽을 것을 알면서도 북한을 공격하자고 이야기하는 것을 마냥 뭐라할 수 없는 것과도 같다.[98] 패륜아 논란때문에 부각되지는 않지만 삼국지 시대에서 친족이 여러 번 잃은 비운의 삶을 살아간 사람이기도 하다. 유언자체도 남은 일족을 보호하려는 모습이다.[99] 사실 한수는 마등과도 서로 가솔들을 죽이면서 의형제라는 이상한 관계를 맺었던 작자이다. 이런 염행 상대의 장난질이야 이상할 것도 없는 셈. 조조야 더이상의 자세한 설명이 필요하지 않고.[100] 사실 한수의 '사위'였기에 '불효'도 되는 셈.[101] 이와 관련된 또 다른 기록이 고유전으로 이에 따르면 '고유가 간언하여, 지금 거대한 군대를 함부로 파견한다면 서쪽에 있는 한수와 마초가 자신들을 공격하는 것이라고 잘못 생각하게 되어 장차 서로 선동하여 반역을 일으키게 될 것이니, 우선 삼보(三輔)를 불러 모아서 삼보가 평정시킨다면, 한중은 격문만을 보내도 평정될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또 위기전 주석 위서에 따르면 이때 관서 제장들은 겉으로는 귀부했으나 내심은 믿을 수 없었다고 한다. 조조의 한중진공을 두고 조조 진영에서도 이쪽이 한중을 공격하려고 군대를 동원하면 관서가 반드시 위협을 느껴 공격할테니 한중보다 먼저 치자는 주장이 존재하고 있었으며 실제로 군벌들이 장로를 치려고 준비하는 것을 곧 관서 토벌의 징조라고 경계하고 있었다는 것.[102] 물론 이건 상대적인 비교로 주유가 언급했듯이 마초 역시 이전부터 관서의 대표적인 군벌로서의 명성은 있었다. 다만 한수는 워낙 오래전부터 마초보다 관서에 오래있으면서 그 지역의 유력자로 존재했기에 연륜의 측면에선 마초가 밀릴 수 밖에 없다는 것, 마초가 이후 한수를 넘어설 정도로 명망이 올라간건 오히려 조조와 싸워 조조를 곤경에 몰아붙인 덕이 컸다.[103] 물론 서주 대학살을 자행하는 등 무고한 민중에게 직접적인 피해를 끼친 전적에 있어선 동탁이고 이각이고 곽사공손찬이고 뭐고 다 초월해 당대 no.1인 조조 같은 경우는 별 비판 없이 초세지걸이라는 둥 찬양 일색인 예외적인 케이스도 있긴 하지만, 정작 무제기 본문엔 진수조차도 서주 학살에 대해서는 '잔륙(残戮, 잔인하게 도륙했다, 학살했다)'이라는 잔학한 뉘앙스로 기술했는데 정사 삼국지에서 저런 식으로 학살을 표현한 건 이게 유일하다. 역적으로 욕먹던 동탁의 양성 학살도 이 정도로 표현하지는 않았다. 상당히 드라이하고 간결한 문체로 유명(그래서 후대 유송의 3대 황제 유의룡이 읽다가 너무 간결해서 사건을 제대로 알기 힘들다는 이유로 배송지에게 주석을 달게 했다.)한 정사 삼국지의 레토릭을 감안하면 굉장히 이례적으로 엄청나게 부정적인 뉘앙스의 단어를 총동원해 정론직필 한걸 보면 그 폭거를 일으킨 조조에 대해 정말로 어떻게 생각했는지 능히 짐작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