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3-19 17:59:30

허정(삼국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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촉서(蜀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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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8000><colcolor=#ece5b6> 촉한의 사도
許靖 | 허정
(許)
이름 (靖)
문휴(文休)
장부(臧否)
생몰 150년 이전[1] ~ 222년
출신 후한 예주(豫州) 여남군(汝南郡) 평여현(平輿縣) (現 허난성 주마뎬시의 일부)
최종 직위 사도(司徒)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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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한
(영제)
상서랑(尙書郞)
후한,(동탁), 파군태수(巴郡太守)[2]
후한,(유장), 파군태수(巴郡太守), 광한군태수(廣漢郡太守)→촉군태수(蜀郡太守)
촉한,(유비), 좌장군장사(左將軍長史)→진군장군(鎭軍將軍)→태부(太傅)→사도(司徒) }}}}}}}}}

1. 개요2. 생애3. 평가4. 기타5. 미디어 믹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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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후한 말의 관원이자 유장 휘하의 관료, 삼국시대 나라의 인물.

2. 생애

본래 예주 여남군 평예현 사람으로 여남 태수 유익(劉翊)의 천거로 효렴에 등용되었고 상서랑으로 임명되어 관리 선발을 맡았다. 영제가 죽은 후 동탁하진 사후 낙양에 입성하면서 주비를 이부상서(吏部尙書), 오경 등과 함께 그의 밑에서 일을 하게 되었다. 이때 동탁에게 각지의 태수를 추천하였는데 동탁은 그들의 추천에 따라 한복을 기주목으로, 유대를 연주자사로, 공주를 예주자사로, 장막을 진류태수로 삼았다. 허정 자신은 파군태수가 되었으나, 임지로 떠나지 않고 조정에 남아 어사중승(御史中丞)을 보좌하였다. 이 태수들이 죄다 동탁에게 반란을 일으키는 바람에[3] 주비, 오경은 처형되고 진국상을 맡고 있던 허정의 사촌형 허탕(許湯)도 예주자사 공주와 협력하고 있었으므로 허정도 처형당할까 두려워 자신이 추천했던 예주자사 공주에게로 몸을 피했다.

이후 공주가 죽자 양주로, 양주에서 다시 회계 태수 왕랑에게로 옮겨가는 험난한 여정을 겪었는데 이때 원술의 밑에 있던 손책이 회계를 공략, 왕랑 등과 함께 바닷가로 몰려 캐스트 어웨이(...)의 인생을 살게 된다. 바닷가를 떠돌다 정착한 곳이 교주였는데 교주는 바로 사섭이 다스리는 곳으로 중국의 최남단이었다. 도주할 당시 다른 사람들을 먼저 챙기고 자신은 마지막까지 머무르는 대인배적 행동을 보여 여러 사람들에게 귀감이 되었다. 교주를 통치하고 있던 사섭의 예우를 받았다. 당시 사섭에게 몸을 의지했던 원휘는 순욱에게 허정의 인물됨을 칭찬하는 편지를 보냈다.

이후 조조에게 탄원서를 보내 형주를 통과해서 북쪽으로 올라올 수 있게 도와달라고 하나 장상이라는 관리가 허정에게 자신의 밑에서 일하라는 청을 거절받은 바 있었으므로 편지를 버려 도착하지 못했다. 그리고 후에 유장이 사자를 보내어 청하자 따라가서 익주에서 일하게 되었다. 파군과 광한군의 태수로 임명되었다. 211년, 촉군태수 왕상이 죽자, 그의 뒤를 이어 촉군태수가 되었다.

산양공재기에 따르면 이때의 허정에 대해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212년 9월 경술일(21일), 황자 유희를 제음왕(濟陰王), 유의를 산양왕(山陽王), 유막을 제북왕(濟北王), 유돈을 동해왕으로 세웠는데 당시 허정이 파군(巴郡)에 있었는데, 여러 왕들을 세웠다는 말을 듣고 말했다, "장차 움츠러들게 하려면 필히 잠시 뻗게 해줘야 하고 장차 빼앗으려거든 잠시 주어야 한다더니, 바로 맹덕(孟德, 조조)을 두고 하는 말이로구나!"

그리고 얼마 후 214년, 유비익주에 입성하여 유장을 공략, 성도를 포위하자 성벽을 넘어 도주하여 투항하려다 잡혔다.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가는 중이라 죽지는 않았고 유비군이 입성하면서 구출되었는데 유비는 허정의 적전도주 행위를 두고 그를 기피하였으나 법정이 말하길 '허정은 헛된 명성을 가지고 있으나 사람들이 그 명성에 미혹되므로 그의 명성을 이용해야 합니다.'라고 진언하여 유비의 휘하로 들어오게 된다.

유비가 한중왕(漢中王)에 오를 당시 허정은 진군장군(鎭軍將軍)을 맡고 있었으며, 유비가 한중왕에 오른 뒤에는 태부로 봉해졌다. 220년 조비가 헌제에게 양위받아 황제가 되었고, 촉에서는 헌제가 살해되었다는 그릇된 소문이 전해졌다. 이에 221년 허정은 다른 문무백관들과 함께 유비에게 황제에 즉위하도록 권했고, 유비가 황제에 오르자 사도가 되었다.

222년 죽었다. 아들 허흠(許欽)은 허정이 세상을 떠나기 전 요절하였으며, 손자 허유는 경요 연간(年間)에 상서(尙書)가 되었다.

형의 외손자인 진지가 어려서 부모를 잃고 허정에게 의탁하자 받아들여 양육하였고, 후에 진지는 유선에게 깊이 신임과 총애를 받아 중용되었다.

본격 험난한 인생을 산 인물로 그의 여정을 보노라면 거의 중국을 낙양을 기준으로 오른쪽으로 크게 한 바퀴 돈 셈이다. 거기다 심지어 지금의 베트남인 교주까지 훑은 셈이니 말 다했다. 말년에는 좀 추태를 보이기도 했지만 조조나 유장 등이 그를 끌어쓰려고 한 것을 보면 상당한 인물이었던 것 같다. 또 당시 시대상 그리 까일 일도 아니고...

유비가 한중왕이 되자 허정을 태부로 삼는데 이것은 미축, 제갈량보다 높은 직위였다. 그 뒤 유비가 황제가 되자 사도의 지위에 오르는데 승상인 제갈량의 바로 아래의 직위였다. 태부나 사도나 지위만 높고 실권은 적다는 걸 생각하면 명성을 고려하여 일종의 명예 벼슬을 준 셈이다. 참고로 촉은 허정이 사도에 임명된 것 이외에는 삼공을 임명한 적이 없다. 즉 허정은 촉의 유일한 삼공인 셈.[4]

이릉대전이 일어나는 시기를 전후로 해서 사망한다. 이때 그의 나이 70세가 넘었다. 대륙을 한바퀴 돌며 엄청나게 고생하는 독특한 행보를 걸었지만 말년에는 무난했던 것으로 보인다.

3. 평가

진수는 진복전에서 허정을 두고 다음과 같이 평한다.
허정은 일찍부터 명예가 있었고, 독실함으로 평판을 받았으며, 또 인물 추천에 마음을 두었다. 비록 그가 행위나 일을 처리하는 데 있어 모두 타당성이 있는 것만은 아니었지만, 장제는 대체적으로 조정의 대들보 신하라고 할 만하다고 말했다.
즉 대체로 법정이 평한 것과 흡사하다.

삼국시대에 활동한 명성이 높은 명사이지만, 그 실력이나 인망은 그에 미치지 못한 전형적인 사례다. 그의 업그레이드 버젼이 공융인데, 공융의 최후를 고려하면 조조에게 가지 않은 것은 그가 천수를 누리는 데에 상당한 도움이 되었다.

4. 기타

  • 화흠, 왕랑, 진군의 아버지인 진기, 원환 등과 친한 후덜덜한 인맥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화흠, 왕랑, 진군은 위나라 건국 초년에 허정에게 편지를 보내 우호관계가 두터움을 확인했다는데 내용이 길어 본전에는 전해지지 않고 위략에 왕랑이 보낸 편지의 내용이 남아있다. 편지 내용은 회계에서 헤어지고 30여 년이나 만나지 못한 것에 대한 아쉬움, 가정 사정, 위나라의 정통성 주장, 촉에 대한 평가, 위에 대한 귀순 권유 등 다양한 내용이 서술되어 있다. 특히 왕랑의 가계 사정이 세세하게 적혀있는데 왕랑은 헤어진 이후 아들과 딸 한명을 잃었으며 아들 왕숙을 회계에서 낳았는데 29살이라 하고 그 다음 아들은 낳은 지 1년여밖에 안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편지를 여러 통 보냈는데 유비가 죽고 유선이 즉위한 걸로 적혀있고, 이전 편지에 대한 답장이 없어 다시 보낸다는 문구도 있는 것을 보면 왕랑이 보낸 편지를 받을 시점에 허정이 죽었을 가능성이 있다.
  • 허정의 사촌동생은 '월단평'이라는 인물평가로 유명하고 조조의 인물평을 남긴 허소였다.[5] 허정 또한 인물평으로 유명했으나, 사촌동생 허소와는 사이가 나빴고 그가 허정을 배척하여 출사하지 못하게 하고 봉록을 받을 수 없었다고 한다.

5. 미디어 믹스

파일:삼국지3허정.png
삼국지 3
파일:external/san.nobuwiki.org/0222.jpg
삼국지 12, 13, 14

코에이 삼국지 시리즈에서의 능력치는 딱 간손미 수준의 문관. 다만 특기가 훨씬 부실하다. 공주가 군주로 등장하는 경우 유일한 부하 장수며, 왕랑 수하일 때에도 왕랑이나 우번에 비해 매력이 높아 매우 중요하게 쓰인다.

그의 험난한 여정을 반영하듯 삼국지 게임을 보면 허정이 여기저기 소속을 시나리오별로 옮겨다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시나리오 1에선 재야, 시나리오 2에선 공주, 시나리오 3에선 왕랑, 시나리오 4, 5에선 유장, 이후 유비...

삼국지 5 허정의 리즈(?) 시절 사기책략인 점술을 특수능력으로 가지고 있다. 점술매니아라면 초주와 더불어 내정으로 경험치를 올려서 점술을 빨리 얻도록 해주자. 삼국정립 시나리오에서 같은 세력내 제갈량, 허정과 더불어 유비군 점술 3콤보를 전쟁에서 활용할 수 있다. 반동탁연합 시나리오에서는 어찌된 영문인지 공주의 세력에 있지 않고 동탁의 세력에 있다.(...) 하지만 궁합이 동탁이랑 완전히 상극에 있는 유비 쪽인데다가 AI 동탁은 허정의 충성도는 제대로 관리를 하지 않아 충성도가 80이 안되는 경우가 종종 있어서 빼오기는 쉬운 편이다.

삼국지 9에서의 능력치는 통솔력 13/무력 13/지력 72/정치력 82. 병법은 혼란, 매도를 가지고 있다.

삼국지 10에서의 능력치는 통솔력 4/무력 4/지력 67/정치력 78/매력 69에 특기는 총 4개.(상업, 혼란, 반박, 명사) 상업 특기가 있기 때문에 상업 셔틀로 잘 써먹을 수 있고 명사 특기는 덤. 직접 플레이 시 산적을 설전으로 상대할 수 있기는 한데 지력이 67에 설전 특기는 반박 하나로 끝이고 통솔이 저주스럽게 낮은 지라 플레이 하기엔 애로사항이 많다.

삼국지 11에서의 능력치는 통솔력 3/무력 5/지력 67/정치력 79/매력 68에 창병 적성 B. 특기는 없다. 전작에 이어 지력이 70이 안 되기 때문에 군사로 삼을 수가 없어 안 그래도 어려운 공주군의 난이도 상승에 한몫했다.

삼국지 12 일러스트는 아무래도 성도에서 빠져나와 유비에게 투항하려던 때를 묘사한 거 같은데, 그런 거 치고는 묘한 여유가 느껴진다.

삼국지 13에서의 능력치는 통솔력 23/무력 5/지력 68/정치 79. 병과적성은 B/C/C에 특기는 상업 2, 교섭 1, 언변 2를 갖고 있다. 중신특성은 없고 전수특기는 상업이며 전법은 창병수비진.

삼국지 14에서의 능력치는 통솔 3, 무력 5, 지력 67, 정치 79, 매력 68로 전작에 통솔력이 2배, 지력이 1 하락했다. 개성은 명성, 인맥, 주의는 명리, 정책은 태학 Lv 3, 진형은 학익, 전법은 없고 친애무장은 사섭, 왕랑, 왕상, 원환, 진군, 허공, 화흠, 혐오무장은 없다. 잡문관이지만 내정용으로 쓰인다.

창천항로에서는 그가 1등으로 도주하자 유장이 '허정 자네 정도의 인물이!'라며 충격받은 모습을 보인다.


[1] 허정이 허소의 사촌형이니 이전에 태어났을 것이다.[2] 단, 임지로 부임하지는 않고, 중앙 조정에 남아있었다[3] 동탁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여러분들은 훌륭한 선비를 발탁하여 등용해야만 한다고 주장했고, 나는 여러분들의 건의에 따라서 천하의 인심을 배반하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들이 임용 한 사람들은 취임하는 날 돌아와 나를 공격했습니다. 내가 어떻게 의지하겠습니까!"[4] 상관승이라는 사람이 태위라는 기록은 있으나 《신당서(新唐書)》 재상세계표(宰相世系表)라는 후대 기록이라 진위여부는 불확실하다.[5] 흔히 관상쟁이로 알려져 있으나, 허소나 허정은 지금으로 말하자면 음식점에 평점을 매기듯 사람을 평가하는 사람들이었다. 조금 더 자세히 설명하면 당시는 평판이라는 것이 지금보다 더 중요하였고, 주요 관직도 사실상 상속되거나 아니면 천거로 올라가거나 둘 중 하나였다. 삼국지의 초기 주요인물들이 모두 거치는 관직인 의랑과 효렴이 각각 의롭다거나 효자라거나 라는 식의 천거직이다. 그래서 그 평판을 얻는 것이 중요해졌고, 소위 명사들이 인물평을 하면 그 사람에 대한 평판이 정해졌다. 이때 가장 신뢰도가 높았던 것이 허소와 허정의 월단평이다. 이런 점을 알면 조조가 왜 평가 한 마디 들으려고 물고 늘어졌는지를 알 수 있다. 그나마 조조는 평가에 목을 매기는 했지만 젊은 시절에 뭇사람의 인정을 많이 받지 못한 것 외에는 딱히 이렇다할 패널티가 없었으나 얼자 출신의 원소는 평판을 위해 6년상이라는 고행을 해내어야 했고 유비는 공융이 자기 이름 한번 언급해줬다고 기뻐했을 정도며 명사들의 특별한 평판도 없어서 썌빠지게 구르며 자기를 증명해야 했다. 손견 역시 여포와 화웅이 이끄는 동탁군을 발라버리고 낙양에 입성하는 등 실력은 나무랄 데 없는 인물이었으나, 이러한 평판이나 인맥이 부족하여 원술 밑에서 뒤치닥거리나 해야 하는 처지였다. 유비가 이렇게 구르던 젊은 시절에, 중원의 사족(귀족) 출신 군웅들은 원래부터 잘 알거나 아예 친인척이던 같은 사족 출신들을 인재로 모으며 훨씬 수월하게 군웅할거를 준비하고 있었다. 하지만 알다시피 이들 거의 모두가 본격적인 국가체계를 세우기도 전에 리타이어되어 당연하지만 역사상으로 유비보다 못한 사람으로 남게 되었고, 이렇게 젊을 때 쭉쭉 빼놓은 진도(?)의 격차를 계속 유지해 나가던 것은 조조뿐이었다. 이렇게 보면 세상에 영웅이란 조조 본인과 유비 자네뿐이라는 논영회에서의 조조의 멘트가 새삼 달리 보이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