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2-15 10:47:54

조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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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위 曹魏 촉한 蜀漢 손오 孫吳
초대 초대 초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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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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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한의 역대 위왕
조조 조비 조위 건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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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위 초대 황제
조비 | 曹丕
파일:Cao_Pi_Tang.jpg
출생 187년 겨울
후한 예주 패국 초현
(現 안후이성 보저우시)
즉위 220년 11월 25일
후한 예주 영천군 허창
(現 허난성 쉬창시)
사망 226년 6월 29일 (향년 39세)
조위 사례 하남윤 낙양 황궁 가복전
(現 허난성 뤄양시)
능묘 수양릉(首陽陵)
재임기간 후한의 승상
220년 3월 15일 ~ 220년 11월 25일
재위기간 후한의 위왕세자
217년 ~ 220년 3월 15일
후한의 위왕
220년 3월 15일 ~ 220년 11월 25일
조위 초대 황제
220년 11월 25일 ~ 226년 6월 2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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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08b><colcolor=#ece5b6> 성씨 조(曹)
비(丕)
부모 부황 태조 무황제
모후 무선황후
형제자매 25남 6녀 중 3남
배우자 문소황후, 문덕황후
자녀 10남 1녀
자환(子桓)[1]
작호 위왕세자(魏王世子)
→ 위왕(魏王) → 황제(皇帝)
묘호 고조(高祖)[2], 세조(世祖)[3]
시호 문황제(文皇帝)
연호 황초(黃初, 220년 ~ 226년)
}}}}}}}}} ||
1. 개요2. 가족 관계3. 생애4. 평가
4.1. 인간성4.2. 외정4.3. 내정4.4. 환관과 외척의 배척4.5. 문학가로서
5. 삼국지연의6. 미식가7. 기타8. 미디어 믹스9.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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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후한의 두 번째 위왕(魏王)이자, 삼국시대 위나라창업군주이며 초대 황제. 자는 자환(子桓), 시호는 문제(文帝), 묘호는 고조 혹은 세조.

조조의 3남으로,[4] 선대에 마련된 강대한 세력을 물려받고 선양을 통해 한나라를 멸하고 위나라를 건국하였다. 이후 부친의 정책을 계승하는 한편 남정을 통해 천하통일을 꾀하였으나,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2. 가족 관계

조조의 3남이자 무선황후 변씨의 소생.[5] 본디 위로 조앙(曹昻)과 조삭이란 이복형들이 있었지만 그들이 젊은 때 죽은 이후 조비가 사실상 장남이 되었다.

흔히 조비가 장남이나 차남이라고 알려졌지만 이 문서에서 그를 삼남이라고 하는 이유는 조앙, 조삭과 조비의 나이 차이 때문이다. 조앙은 이미 197년에 조조를 따라 종군할 정도로 장성한 상태였고 조비는 187년 생이니 조비가 둘째라고 하기에는 나이 차가 다소 크다. 더군다나 조앙과 조삭은 유부인의 소생인데 생모가 일찍 세상을 뜨면서 조조의 정실인 정부인에게 입적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만약 조비가 차남이고 조삭이 187년 이후 출생이라고 하면 조앙과 조삭의 나이 차가 크게 되어 유부인이 조삭을 낳은 후 요절했다고 하기에는 적지 않은 나이가 된다. 유부인이 일찍 죽었다는 기록에 비추어 보아 조앙이 장남, 조삭이 차남, 조비가 삼남이라는 것이 현재의 정설이다.[6]

아내로는 문소황후 견씨문덕황후 곽씨가 있다. 그리고 습유기와 고금주에는 조비의 첩으로 설영운, 막경수, 단교소(段巧笑), 진상의(陳尙衣)가 기록되어있다. 재미있게도 문소황후는 조비보다 5살, 곽여왕은 3살 연상인데 아내들이 모두 연상인 걸 보면 조비의 취향이 연상이거나 우연의 일치로 둘 다 연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조비는 헌제의 장녀와 차녀를 귀인으로 삼았다. 조조의 딸들이 헌제에 시집을 갔으므로 헌제와 조비는 겹사돈을 맺은 셈이다. 중국에서는 춘추전국시대 이후로는 유교의 종법이 확립되어 근친혼은 금기였으므로 앙연히 헌제의 딸들은 조씨 핏줄과는 무관했을 것이다.[7][8]

조비의 자녀로는 견씨와의 사이에서 낳은 조예동향공주, 구소의와의 사이에서 낳은 조림이 있다. 이외에도 여러 자녀를 두었으나 조졸하였다.

3.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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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평가

부친인 무제는 도덕성에 문제가 있었기에 호불호가 갈리긴 하지만 적어도 후한 말의 난세에 정국을 수습한 능력만큼은 인정받으며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의견도 있었다. 이런 부친의 기반을 물려받은 조비는 능력은 있었으나 뛰어난 명장인 부친보다는 군사적 능력이 떨어졌다거나 도량이 작아 성격이 나빴다는 결함이 결점으로 지목된다. 또한 역성혁명으로 한나라를 멸망시키고 위나라를 건국한 창업군주로서는 너무나도 일찍 요절했다는 점 때문에 상대적으로 아쉬운 평가를 받는다.

하지만 그것과 별개로 조비는 위나라를 건국하고 무난하게 나라를 다스렸으며, 후한을 망하게 했던 황실의 사치[9]나 환관이나 종친[10], 외척 정치를 차단하고, 조조시대로부터 내려오던 여러 무거운 세금이나 요역을 감면해주고 형벌을 완화하여 나라의 내실을 기했다. 비록 조위를 건국하고 황제가 된지 6년만에 39세라는 젊은 나이로 죽었으나 그의 치세 시절엔 조위의 국가 시스템은 아주 멀쩡히 작동하고 있었기 때문에, 조비가 좀 더 오래살아 나라를 건국한 창업군주이자 초대 황제로써 원래 역사에서 보여준 본인 치세기간 동안의 무난한 통치를 오래 지속했다면 조위의 수명이 좀 더 늘어났을 가능성도 있다.

아버지를 본받아서 문재도 뛰어났다. 현재까지 남아있는 그의 글은 위진남북조시대 내내 동복 동생인 조식과 함께 뛰어난 문인의 글로 칭송받았으며 이후 시대에도 여러가지로 높이 평가받았다.

진수는 정사 삼국지 문제기에서 조비를 두고 “문제는 천부적인 글솜씨가 있었고, 붓을 들면 곧 문장이 되었다. 아는 것도 많은데다가 기교와 예술성을 겸비했다. 만약 여기에 넓은 도량과 공평함, 도와 덕을 더했다면, 어찌 옛날의 현명한 임금들과 멀다고 할 수 있겠는가"[11] 라고 평가했다. 조비의 문학적 재능에 대해서 극찬하면서도, 아래 지적되는 인간성이나 올바르지 않은 도덕, 좁은 도량에 대해서는 대놓고 부정적 평가를 내렸다고 할 수 있다.

4.1. 인간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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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외정

조비 치하에서 위나라는 오나라를 세번이나 공략했으나 모두 실패했고, 삼국정립에 안주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좋은 시기를 놓친 조비는 현실적으로 오나라든 촉나라든 당시 위나라의 국력으로는 공략해 병탄하기는 거의 불가능함을 깨달아, 내정에서 현실적인 정책을 펼쳤다고 할 수 있다.

조비의 남정에 대해서는 유난히 더 악평을 듣지만, 실상 사서를 통해 남정 과정을 잘 살펴보면 이 전쟁은 매우 전형적인 위의 동오 침공, 나아가 이후 중국에서 북조가 남조를 전면적으로 공격하는 루트를 충실히 따른 전쟁 중 하나였다. 당시 대오전선 방면을 담당하던 조인, 조휴를 필두로 장료, 장패 등 위나라 주요 장수들이 참전해 전형적인 침공 루트로 진격했다가 전형적인 이유로 패배하고 전형적으로 병사들이 전염병에 걸려 퇴각하길 반복한 전형적인 패전이었다.

이런 남정 실패는 조비의 능력이라기보다는, 사실 화북에서 일어난 정권이 호수와 강을 여러개 끼고 있는 화남의 정권을 토벌하는 것은 쉽지 않으며, 이런 지리적 문제 때문에, 중국 역사상 장기간의 남북대치가 여러번 있었으나 생각 이상으로 북조가 남조를 공격할때는 북조 역시 국력을 모두 동원해 전력을 기울지 않으면 몹시 힘들었다고 할 수 있다.

호주의 동양 역사학자인 라프 데 크레스피그니가 지적했듯이 조비, 그리고 그 아버지 조조가 이전의 통일제국 건국군주인 광무제보다 운이 나빴던 것은 손권의 오월정권은 중국 역사상 처음으로 서방, 혹은 북방을 통일한 관중, 화북, 중원 정권에 맞설 실력이 있는 남방 정권이었다는 것이다. 이뿐 아니라 이후 남조 정권들은 결코 실력면에서 북조보다 밀리지 않았다. 손오가 기틀을 잡은 이래 이 기틀하에서 정권을 꾸린 육조시대의 남조 정권 전원이 그러했으며 심지어 이들 중 오보다 사정이 더욱 어려웠던 남조의 진나라 역시 북벌로 회남을 차지하는 등의 성과를 거두었다. 남송이 역사상 가장 강력한 유목제국인 몽골 제국 상대로 40여년 이상 대공세를 버틴건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비교적 어이없게 무너진 남방정권인 남명, 태평천국, 후대의 중화민국도 보면 사실 남조가 약해서라거나 화북세력의 강력한 군사력으로 인한 것이라기보단 남부정권의 내분이나 무능, 부패로 인해 스스로 무너졌던 사례이다. 하물며 당시 오나라의 군주가 명군이라고 평가받는데다가 조조도 물리친 손권이었으니 조조보다 군사적 재능이 부족한 조비로서는 처음부터 성공하기 힘든 일이었다.

연의에 등장하지 않아 조비의 업적으로 잘 알려지지 않은 것이 있는데, 바로 위나라와 맞닿고 있던 여러 북방 오랑캐를 토벌하거나 혹은 구워 삶아서 회유해 복속시킨 것이다. 이는 위나라 건국전인 220년부터 조비가 죽을때까지 6년간 계속 되었으며, 이때 활약한 것이 진서장군 조진이다. 연의에서는 조진이 뜬금없이 조조의 친족이라는 이유로 제갈량의 북벌 당시 대촉전선의 총사령관으로 임명된 것처럼 나오지만, 조진은 바로 이 당시 강족-선비족과의 전쟁에서 큰 전과를 올렸고 그 전공을 바탕으로 기대를 받고 제갈량을 막아내기 위해 임명된 것이다. 어쨌든 이런 조비의 업적으로 약 80년간 중국은 북방오랑캐의 걱정은 덜게 되며, 사마씨는 이렇게 북방을 안정시킨 조비의 업적을 바탕으로 촉나라와 오나라를 멸할 수 있게 된다.

한편 한나라가 혼란에 빠진 이후 오랫동안 중단되었던 서역 도시국가들과의 교역 및 외교관계도 조비 대에 와서 부활할 수 있었다.

4.3. 내정

조비는 조조 이래로 주변의 군벌들과 전쟁을 하기 위해 백성들을 쥐어짜던 전시국가 체제였던 조위를 전한 시절의 정상국가로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그리하여 한나라의 법을 참고해 위의 법을 만들되 육형을 부활시키자는 주장을 거부하거나 한나라의 법 중 지나치게 가혹한 법은 철폐하라고 명하는 등, 위의 법이 지나치게 가혹하고 엄격했다는 통념과 달리 나름대로 정도를 조절하고자 했다.[12] 또한 세금도 깎아주고, 여러 동원령도 철폐하였다. 즉, 조씨 정권의 조조시절의 국정 목표가 질서회복이었다면, 위나라가 건국된 후 조비시절에는 어느정도 민생안정을 생각한 것이다. 또한 유학을 진흥시켜 공자 사당을 건립하고 공자의 후예인 공선(孔羡)을 찾아내 연성공(당시 벼슬 직함은 종선후)에 임명했고, 유교적 소양을 갖춘 사람을 관리로 임용하도록 노력했다. 여러모로 조비는 한나라 초기의 문경지치, 혹은 문치주의[13]의 복원을 목표로 삼은 듯 하다. 조비는 자신의 평론집인 <전론>의 첫머리를 "무릇 문장은 나라를 다스리는 대업이며 불후의 사업이다(盖文章經國之大業,不朽之盛事)" 라고 시작하는데, 이것을 보면 그의 문치적 지향이 바로 드러난다.

재정면을 살펴보면 농업에 대해서는 대대적인 호구조사 사업을 벌였고, 경작 면적에 따라 세금을 부과하는 정책을 펼쳤다. 또한 한나라시대에는 작황에 관계없는 고정세율이었으나, 조비는 이를 작황의 좋고 나쁨에 따라 유동적으로 세율을 조정하게 했다. 상업에 대해서는 상품에 부과하는 관세를 1/10로 통일했다. 국가가 주관하는 각종 전매사업을 확대하여 소금, 철, 일부 수공예품을 국가가 판매하도록 하였으며, 이 때문에 국가의 재정이 좋아졌다. 물론 해결하지 못한 과제도 있었는데, 동탁이 장안으로 도주한 이후 발행한 악화를 비롯해, 중원의 전란으로 인해 발생한 초인플레이션 폐해는 조비 치세 때까지 계속되었기 때문에, 후한의 상품 경제를 완전히 붕괴시킨 오수전의 붕괴를 회복하진 못했던 것이다. 조비는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 아예 오수전의 유통을 금지하고 물물교환으로만 거래가 이루어지게 하는 극약처방을 썼다. 이는 상업 발달에 지장을 준 사례임에는 맞으나, 당시 초인플레이션의 여파는 계속되었기 때문에 어쩔수 없는 일이었다.[14]

또 아버지 대에부터 이어받은 유능한 관료들을 등용해 종요-화흠-왕랑으로 이어지는, 조예 초까지 지속되는 유능한 삼공라인을 구축해 내정을 안정시켰으며, 진군의 제안을 받아들여 구품중정제를 실행해 한나라식 천거 방식의 폐단을 시정하고자 했다. 또, 한나라 시대에 황제의 직속 관청으로서 환관이 독점하며 지나치게 막강한 권한을 누렸던 상서성을 아버지 조조의 노선을 계승해[15] 중서성을 쪼개 권력분할을 시도하는 한편 일반 사인들에게도 개방하여 환관, 외척정치 등 한나라의 고질병이었던 정치의 폐단을 시정하고, 이들(환관, 외척)의 정치 참여를 아예 원천적으로 금지했다. 이 원칙은 위가 망할 때까지 잘 작동한 편이었다. 조비가 시행한 중서성 분할은 후대 남북조 시대를 거쳐 수-당 시대에 문하성이 신설되고 휘하 6부 관청이 정비되면서 3성 6부제로 완성된다. 또 군사적으로는 조조가 하후돈을 남방26주제군사로 임명한 걸 계승해 아예 도독제를 시행, 정비하였다. 이 도독제는 촉과 오에서도 비슷하게 시행되었는데, 도독직을 비워두기도 했던 촉과 오와는 달리 위나라는 전선이 위치한 각 주별로 도독을 상시 배치했다는 차이가 있다.

또한 왕실내 사치를 금지하며, 귀족이나 황족의 장례를 간소하게 치르라는 칙령을 내렸고, 실제로 조위를 기점으로 전한시대의 화려한 고분은 소박해진다. 또한 후한 멸망의 원인이었던 외척과 환관의 국정개입을 근본적으로 차단했다. 이후로 서진 때까지 적어도 외척과 환관은 국정에 끼어들지 못한다.

경제면에서도 조비시대에 성과가 있었다. 농업안정을 최우선으로 삼고 황건적의 난 이래 황폐화된 토지에 사민정책을 실시하여 인구가 많은 지역에서 농민을 이주시켜 농지로 개간했으며, 곡물과 비단의 유통을 활성화시켰다. 이 바탕으로 위나라의 재정은 안정되어 갔다.

조비가 종친을 배제해 멸망의 단초를 깔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이는 사서를 제대로 보지 않은 것이다. 조식과 같이 자기 형제 등 직계 종친을 배제한 것은 사실이지만, 조진, 조휴, 하후상, 하후무, 하후패 등 2세대 인사들의 주요 커리어는 모두 조비 대에 시작했다. 조비는 즉위 직후 도독제를 시행하며 조인을 하후돈의 뒤를 이어 26주제군사로 임명한 뒤 형주와 양주에 각각 조휴와 하후상을 배치했으며, 후방인 청주와 서주엔 장패를 도독으로 임명해 대오전선을 구축했다. 한편 대촉전선에는 조진을 옹양주도독으로, 하후무를 관중도독으로 배치했으며 북쪽에는 자기 측근인 오질을 도독으로 임명했다. 한편 하후돈이나 조인 등 군 원로에게는 군 고위직을 수여하는 등 최대한의 배려를 했다. 조비는 종친과 측근을 주요 군부직에 배치하면서도 한사람에게 권한이 집중되지 않도록 위에서도 보듯 한 전선이라고 2명씩 나눠서 배치하였다.

반면 비판하는 쪽에선 남방 원정의 실패나 구품중정제의 도입으로 인한 폐단 등을 거론한다. 구품중정제는 주먹구구식으로 임용되던 관리 임용을 추천관이 추천대상을 심사하면서 관리의 질을 향상시키려는 의도였다. 문제는 시간이 갈수록 추천하는 사람이 귀족의 자제를 더 높이 평가하는 일이 벌어짐으로써 귀족이 관직을 독점하는 현상이 나타난다.[16]

4.4. 환관과 외척의 배척

부인이 정치에 관여하는 것은 혼란의 근본이 된다. 지금부터 모든 신하들은 태후에게 일을 상주하지 마라. 황후의 일족은 정치를 보좌하는 임무를 할 수 없고, 또 이유 없이 영토를 갖지 못하며 작위를 받을 수 없다. 이 조칙을 후세에 전하라. 만일 이 조칙을 위반하는 자가 있다면 천하가 함께 그 자를 주살할 것이다.

아울러 산기상시(散騎常侍)와 시랑(侍郞)을 각각 네 명씩 두고, 환관 중에서 벼슬을 하는 자는 각 부서의 령(令) 이상을 오르지 못하게 하였으며, 이런 명령을 황금으로 된 간책에 기록하게 하여 돌로 된 방에 보존케 하였다
정사 삼국지 문제기

조비는 한나라가 외척, 환관의 발흥으로 멸망한 것을 반면교사로 외척과 환관을 억눌렀다. 이는 제도상으로 후한의 폐단을 막으려 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는 것이라고 하겠다. 그게 지나친 나머지 자기 동생을 포함해 정권을 지켜줘야 할 혈족 및 종친들까지도 중앙 정치에서 배제시키는 한편 제후왕으로 임명해 지방으로 보내버린 뒤 어떠한 권한도 주지 않고 집중적으로 견제하는 거의 편집증적인 종친 견제를 했고, 결국 문벌귀족 사마씨가 정권을 잡아 조위의 명을 단축하게 되는 원인이 되지만 말이다. 더불어 사마씨가 조씨에게 황위를 찬탈하려 할 때 조비의 법령을 무시하고 유교의 '효'를 앞세워 조위의 '태후'에게 명령을 내리게 해 황제들을 폐위시킨 것도 역사의 아이러니라고 할 수 있을 듯 하다. 일단 조상만해도 환관과 결탁하는 모습이 보이기는 하지만 아예 효과를 보았다고 보기 힘들다는 말은 좀 지나치기는 하다. 최소한 전대의 후한이나 촉처럼 환관이 정면에 나서서 전횡을 부리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다만 외척 배척과 혈족 배척은 조금 다른 케이스로 파악해야 할 것이다. 외척 배척의 경우 조조도 했던 것이고 심지어 헌제의 외척을 상대로도 행하였지만 조조는 혈족 자체를 배척하지는 않고 오히려 중용하여 자기 기반의 안정화를 도모하였다. 조비의 외척 배척 또한 조위의 이러한 흐름하에서 이루어진 건 마찬가지이겠지만, 혈족 배척의 경우 조조와 반대인데, 이는 조비의 정통성이 취약한 편이라 조씨 세력의 지도자를 넘볼 수 있는 자들도 배제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다른 조씨 종친은 몰라도 친동생들인 조창이나 조식에 대한 견제까지 잘못되었다고 할 수는 없다. 둘 다 조비 즉위시점까지 강력한 자기 세력을 가지고 후계구도를 위협하고 있던 종친이어서 심지어 나중에 조비가 권좌에 오른 후에까지 조비 본인에게 위협이 되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조창은 아버지 조조가 죽은 후 군권을 가지고 수도로 들어와 조식과 연합을 시도하면서 이미 조조 생전에 정해진 후계구도를 위협하기 위해 옥새를 요구하는 등 대놓고 조비에게 선제공격을 감행하여 도전장을 내민적이 있었기에 조비가 조창에게 쪼잔하다는 인식과 달리 실제로는 역으로 조창이 조비에게 엄청난 위협이었으며, 조식만 해도 조비 사후 아들 조예가 황위를 계승한 뒤 장안으로 행차했을때 그를 지지하는 세력이 조예가 죽었다는 소문을 내고 무선황후를 내세워서 조식을 옹립하려는 시도까지 일어난 적이 있었다. 역으로 말하면 조비 생전에도 조창이나 조식을 황제로 지지하는 세력이 암중모색하면서 죽지 않은 상황이었기에 조비가 도저히 이들에게 세력을 주고 중하게 쓸 상황이 되지 않았던 것이다.

조창이 조비에게 죽었다는 뒷소문이나 야사 같은 것이 지금까지도 전해지는 이유는, 따지고 보면 조창이 역으로 부친이 정해준 후계구도를 거역하고 형에게 선빵을 치려다가 실패했으며, 그 때문에 조창을 죽일만한 실제 동기가 조비에게 충분히 있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동생들이 대놓고 그에게 도전하거나 위협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조비가 나중에 조식과 화해하기까지 하거나[17] 조식이 조비의 아들 조예 시절까지 황실의 종친으로써 대우받은 점, 전세계 역사상 여러 군주들이 친혈육들을 단호하게 숙청한 사례들만 봐도 조비는 되려 친동생들에게는 관대한 편에 속한다. 예를 들어 호해는 친형제 이복형제 불문하고 혈육을 모조리 죽였으며, 명군이라고 칭송받는 당태종 이세민만 하더라도 현무문의 변을 일으켜 동복형제인 친형 이건성과 친아우 이원길을 죽였다.[18]

4.5. 문학가로서

조비의 정치적 평가는 일단 접어두더라도, 이 시대의 문학가로서는 태두로 꼽힌다. 저서로 열이전(列異傳) 3권과 문집 23권도 있었다 한다. 그 중 전론(典論)은 최초의 문학 비평이며, 남북조의 남조(육조)에서 성행한 문학론의 선구가 된 책으로 원래 5권이었으나 현재는 모두 소실되어 거기 실린 글 1편만이 전한다. 현재 남아있는 그의 작품은 문장 30여편, 시가 40여수 있는데, 모든 작품이 수준급이라서 후한말의 문단의 대표자중의 한명이라고 해도 손색이 없다. 예를 들어 그가 쓴 <연가행>[19] 은 칠언시를 확립한 작품이며, 이 장르는 당나라때 이르러서는 한시의 표준이 된다. 즉, 그는 칠언시라는 장르를 확립한 것이다. 그는 주로 시적화자로 여성을 설정해 창작했는데 독특한 운율과 애틋한 서정성을 지닌 이 시는 멀리 떨어져 있는 남편을 향한 젊은 여성의 깊은 그리움을 표현하고 있다. 여기에 풍경의 묘사와 감정의 표현이 서로 보완되어 시 전체를 독특한 기풍으로 치우고 있다.

조비 시의 어휘는 아름답고 정교하며, 표현은 서정적이고 우아하다. 특이할만한 점은, 여러 작품에서 전쟁에 대한 비극적 감정이나 평화애 대한 갈구를 표현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위에서 말했듯이 조비가 전쟁을 통한 삼국통일보다는 세력균형을 통한 평화를 선호한 것과도 일맥 상통하는 바가 있다. 예외적으로 <여양작>처럼 군대를 이끌고 전장에 나가는 장수의 기상과 필승의 결의를 묘사한 것도 있다.

조비는 이런 시뿐만 아니라 문학이론에도 크게 기여했다. 즉, 중국 문학사상 없었던 비평이라는 장르를 확립한 것이다. 그는 <전론>이라는 평론에서 문학 이론을 개진했다. 이 글은 중국문학사에서 처음으로 체계적으로 문학비평을 다룬 것으로, 문학비평의 태도, 작가의 개성과 작품의 양식, 문체의 구별, 문학의 가치 등 중요한 문제를 논하고 있다. . 이 작품에서 조비는 문학 작품의 질과 작가의 기질을 밀접하게 연결하면서 처음으로 '문기(文氣)'라는 개념을 제안했으며, 이런 문학 이론의 도입은 중국 문학사상 비평 발전의 새로운 길을 열었다.

조비는 후대에 "건안문학"이라고 불리는 당대 여러 작가들의 글을 직접 읽고 몸소 평을 남겼으며, 이시기 이름난 문인인 7명을 직접 선정해 건안칠자라고 명명했다. 위에도 나오지만 진수도 붓을 대면 문장이 되었다고 평가했으니 대단한 문장가였다.

특히 조비는 조조의 심기를 건드렸다가 역적으로 몰려 멸문당한 공융을 복권했으며, 조조 시절 금지어였던 그 이름을 당당히 건안칠자의 첫머리로 세우고 산산히 흩어진 그의 글을 포상금까지 내걸며 모으려했다. 중문학 사상 첫번째로 비평을 시도한 작가답게 건안칠자들에 대해서 각각 평을 남겼는데, 공융에 대해서는 문체는 기품있고 현묘한 것이 옛 위대한 문인들인 반고/양웅에 비견할 만 하다고 추켜세우면서도 '그러나 논리 전개는 썩 좋지 못하고', '조롱하는 태도가 지나치다'라고 지적했다. 이외에도 건안칠자들 한명마다 (왕찬, 서간, 진림, 유정 등등) 각각의 글에 대한 문학적 비평을 남겼다. 본인이 기득권 중의 기득권이었음에도 체제비판적인 문학론을 펼친 왕충의 논형을 좋아했다고 전해진다.

이외에도 전설이나 괴담을 좋아했는지, 본인이 직접 자작한 <열이전(列異傳)>이라는 단편소설집을 펴냈는데, 모두 전설의 고향식의 괴이한 이야기들이었다. 이것도 중문학사적으로 전기체 소설의 효시로 일컬어고 있다.

조비가 조식에 비해 문학적 재능이 드러나지 않지만, 중문학사상 조비의 업적은 절대로 조식에 뒤지지 않는다. 실제로 남북조시대 유협이 쓴 문학비평서 문심조룡에서 조비와 조식의 문학을 높이 평가하면서 기존의 설명들이 조비는 폄하하고 조식은 치켜 세운다며 조비의 경우 지위의 존귀함 때문에 그 재능을 깎아내리고 조식의 경우 그가 처한 곤궁한 입장 때문에 동정을 받아 명성이 올라갔다고 평가했다.

이렇듯 중국문학사에서 조비의 위상은 어마어마하다. 조비는 건안문학의 중요한 성원일 뿐만 아니라 중국 문학비평사의 선구자이기도 하며, 전기체 소설의 효시이기도 하다. 그의 문학 작품과 문학 이론은 후세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유협이 말했듯이 조비가 삼국지에서 악역으로 등장하기 때문에 마땅이 평가받아야 할 문학가로서의 위상마저 가려졌다고 할 수 있다.

5. 삼국지연의

삼국지연의》는 조비의 찌질함과 원정 실패를 극대화시키는 등 조비를 까는 데 집중한 편이다. 이는 이후 조비가 헌제로부터 선양을 받아 이름뿐이던 후한을 멸망시키고 위나라를 건국했기 때문에 촉한정통론에 기울어져있던 민담이나 연의에서는 매우 부정적이 면만 강조된다.

첫 등장은 관도대전이후 숨어있는 원희의 아내 견씨를 보고 반해 아내로 삼는 장면이다.[20] 당연히 독자들에게 호색한이라는 나쁜 인상을 주기 충분하다.

이후 등장은 조식과의 후계자 경쟁 와중에서 나오는 여러 부정적 모습이데, 사실 이는 조비뿐만 아니라 이후에 여러 왕조에서 반복된 일이고 심지어는 현대 한국의 재벌가에서도 자주 볼 수 있는 왕자의 난의 전형적인 패턴이지만, 연의나 민담의 저자들은 이를 조비의 개인적 인격탓으로 몰아붙였다.

위나라를 건국하고 황제로 즉위한 이후에도 마찬가지로 굴욕을 계속 당한다. 오로 침공이 실패한 데다 오가 적극적으로 움직이지 않자 분노를 이기지 못하고 남방 정벌을 감행한다. 촉을 먼저 치자는 중신들의 의견마저 무시하고 그럼 배라도 더 만들자는 사마의의 말에 조선 시설을 풀가동하여 배를 늘리고 바로 삼로로 밀고 내려갔으나 결과는 위에 적힌 대로 와장창.

가장 대규모였던 조비의 첫 원정은 육손어복포에서 호되게 당한 뒤 미리 위의 침공을 경계해 바로 물리쳤으며,[21] 2, 3차 원정은 용주를 끌고 장료를 대동하였으나 서성의 가짜 군세에 속아 크게 깨지고 서황의 분투로 도망했으며, 그 과정에서 장료마저 정봉의 활에 맞아 후유증으로 죽어버린 것으로 묘사된다.

이렇듯 연의에서는 긍정적인 면은 거의 안보이고 부정적인 면만 강조된지라 조비는 연의의 피해자라고 할 수 있다.

6. 미식가

조비는 미식에 대한 애호가 있었으며, 여러가지 일화가 남아있다. 특히 돌에서 캐는 꿀, 석청을 좋아했고, 포도와 배와 같은 과일를 좋아하며, 그 맛과 특징을 자세히 서술하였다. 뿐만 아니라 진미를 좋아해서 신하들과 같이 먹기도 하고, 손권에게 귀한 식재료를 선물로 주기도 했다.

촉에서 귀순한 맹달에게도 촉나라의 요리에 대한 것을 물었다.[22]인데, '마'를 담당하는 화자오는 원산지가 다름 아닌 촉 지방이니 이 시대에도 향신료로 요긴하게 썼겠지만 '라' 부분을 맡는 고추는 미대륙에서 건너온 식물이라, 이때는 우리가 아는 사천 요리식 매운맛을 낼 수 없었다.] 그 기록이 남아있는 덕분에 1800년전 촉에서는 요리에 주로 달콤한 재료를 쓴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사실 꿀이나 엿으로 요리를 한다는 거 자체가 은 서민들이 얻기 쉬운 감미료라 그렇다 쳐도 은 많은 곡물을 사용하여 엿기름을 고아 만드는 것[23]이기에 그만큼 시간과 품삯도 많이 들고 옛날엔 고급 식재료였다.

태평어람에 기록된 조비의 조서를 보면 조비는 포도를 매우 좋아했음을 알 수 있다. 조비는 포도를 찬양하면서 달콤하고 말랑거리고 상큼하며 맛은 최고에 즙이 많으며 걱정을 없애고 지루함을 풀어 주며 술로 빚으면 취하기도 좋고 깨기도 쉽다고 길게 늘어놓았다. 전반적으로 단 것을 좋아했던듯 한데 예문유취와 태평어람에 그런 조비의 어록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신하들에게 이를 조(詔)하기도 했다.
오왕이 위 문제에게 귤을 바치니, 문제는 신하들에게 조(詔) 하기를
남방에 귤이라는 과일이 있으나, 이가 갈라질 만큼 시고 단 것은 아주 가끔씩 밖에 없다.
위 문제 왈:
남쪽 나라의 용안, 여지(리치)가 어찌 서쪽 나라의 포도, 석청에 비하겠느냐? 시기만 할 뿐 중국(중원)의 대추만도 못하니, 안읍(대추 명산지)의 대추에는 비할 바도 아니다.
위 문제 왈:
진정군(眞定郡)의 배는 주먹 같이 크고 꿀과 같이 달콤하며 눈과 같이 아삭하니, 근심을 잊게 하고 갈증을 없애 준다.
위 문제가 신하들에게 조하기를
신성 태수 맹달이 말하기를 촉의 가축은 맛이 진하지 않아 촉 사람들은 요리에 엿/꿀 등을 더해 맛을 낸다고 한다.

다음은 조문제집의 <여오감서>에 나오는 조비의 포도 찬양이다.
중국에는 귀한 과일이 많다. 여기서는 포도에 대해 논해보겠다. 포도의 제철은 늦여름과 초가을이다. 이때 아직 약간 더위가 남아있는데, 술에 취해 잠에 들었다가 아침에 깰 때, 포도에 이슬이 맺혀 있을 때 먹으면 아주 맛있다. 촉촉하고, 전혀 기름지지 않고, 신맛 없이 달콤하며, 차갑지 않으나 시원하며, 뒷맛이 길고 과즙이 풍부하여 걱정과 피로를 해소하기에 딱 좋다. 포도주는 곡물주보다 더 달고 향기로우며 취해도 숙취없이 쉽게 일어날 수 있다. 포도는 직접 맛보는 것은 물론, 얘기하는 것만으로도 군침이 돌게 만든다. 남쪽의 귤은 신맛도 나고 달콤하기도 하지만 어찌 포도에 비하겠는가?

7. 기타

의서 외대비요에 조비의 어의가 조비의 탈모가 심해져 치료를 시작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외대비요에는 그가 처방받은 탈모약의 재료와 정량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이 남아있다.

검명(劍銘)에 따르면 영보(靈寶), 함장(含章), 소질(素質)의 세 명검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아래는 본인의 평론집인 <전론>[24]의 일부분인데, 본인의 학식의 대단하다고 자화자찬하고 있다. 본인의 자뻑처럼, 현재 남아 있는 그의 글들로 미루어볼 때, 조비의 학식이나 문장력이 당대의 평범한 선비들보다는 훨씬 더 뛰어났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으며, 이를 볼 때 본인이 주장한대로 어렸을 때부터 공부를 열심히 했을 것이다.
(나는) 어려서부터 시와 논(論)을 읊었고, 자라서는 오경(五經), 사부(四部)를 모두 겪었으며, 《사기》, 《한서》, 제자백가의 말을 두루 아니 본 것이 없었다.
삼국지 위지 문제기 평왈 배송지주#

조비와 손권은 전쟁터에서 몇번 창칼을 맞댔지만, 가끔식 선물을 교환하기도 했다. 오나라의 특산물인 코끼리나 보물 등을 받기도 했고, 본인은 '향부자'라는 약재를 손권에게 불로 장수하라고 보낸 적이 있는데 위나라 사신이 약재 이름을 까먹어서 향기가 나고 참새머리를 닮았다고 임기응변으로 작두향이라고 소개했고 향부자의 다른 이름이 작두향이 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이와 함께 이릉대전이후 촉나라에서 위나라로 귀순한 황권을 아껴 계속 벼슬을 높여주었는데, 유비가 죽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위나라는 모두 기뻐했으나 황권만은 슬퍼했다. 위나라의 신하들은 황권을 처벌해야 한다고 주청했지만 조비는 이를 듣지 않았고 황권을 옹호했다. 관우에 항복했다가 살아돌아온 우금을 조롱해 분사시킨 것과는 매우 다른 태도인데, 이걸 보면 우금은 조비와 이전부터 사이가 좋지 않았거나 혹은 조비가 우금을 싫어했던 것 같다.

기록에 의하면 알까기와 비슷한 놀이인 탄기(彈碁)를 아주 잘했다고 한다.
탄기는 위대 궐내에서 화장품 상자를 사용한 놀이에서 시작되었다. 문제(조비)는 특별히 이 놀이를 잘 했는데 수건 모서리로 바둑알을 튕기면 맞추지 못하는 게 없었다. (후략)

아버지 때부터 활동했던 원로 중신 종요와의 특이한 일화가 있는데, 70대를 넘긴 종요가 정실 손씨를 내치고 48살이나 어린 첩 장창포를 새아내로 삼으려고 하자 무선황후가 조비에게 이런 상황을 막아야 한다고 권유해 조비도 종요에게 손씨와 다시 재결합하고 명을 내리나 종요가 자살시도를 하면서까지 못하겠다는 뜻을 내비치자 결국 포기했다고 한다.[25]

고금주에 따르면 조비가 헌제에게 선양을 받아 위나라를 건국하고 황제위에 올랐을 때 다음과 같은 일화들이 전한다.
위나라 문제 때의 궁인들 중에서 매우 총애받은 자들로, 막경수, 설야래, 전상의(田尚衣), 단교소(段巧笑) 네 명이 있는데, 밤낮으로 문제의 곁에 있었다. 막경수는 선빈(蟬鬢)을 만들었는데 멀리서 보면 매미(날개)와 같았기에 선빈(蟬鬢)이라 하였다. 단교소는 처음으로 비단을 명주 신발에 입히고 자줏빛 분을 만들어 얼굴에 발랐으며, 전상의는 춤과 노래에 능했고, 설야래는 의상을 만드는 걸 잘했으니, 일세의 으뜸(冠絕)이었다.
고금주 『잡주』
위나라 문제는 궁인들로 하여금 백화계(百花髻)와 부용귀운계(芙蓉歸雲髻)를 하게 했다.[26]
중화고금주
(대모자大帽子는) 본래 초야의 늙은이들이 쓰던 것이다. 위나라 문제 때에 이르러 백관에게 조서를 내려 입동에 귀천에 따지지 않고 통용해서 쓰게하니, 이것을 온모(溫帽)라 하였다.
중화고금주
잠방이(군褌)는 삼대(三代)에는 서술된 바가 보이지 않는다. 주나라 문왕이 만든 잠방이는 길이가 무릎까지였는데, 이를 폐의(弊衣)라고 했도 미천한 사람은 입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기에 양의(良衣)라고도 했으며 대개는 양인(良人)의 옷이었다. 위나라 문제 때에 이르러 궁인들에게 비교당(緋交襠)을 하사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오늘날의 잠방이다.
중화고금주

훗날 위나라의 실권을 찬탈하고 건국의 기반을 다진 측근인 사마의보다도 8살 이상 적다. 사마의가 오랫동안 산 편이지만[27] 죽은 나이로 따져도 조비의 사망 당시 나이는 사마의 사망 당시 나이의 절반에 불과했다.

8. 미디어 믹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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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조(三曹)
조조 조비 조식

[1] 조비 외에도 조창, 조식 및 조비의 사촌들 대부분도 자는 '자'자 돌림으로 쓴다.[2] 정사 삼국지[3] 자치통감[4] 그러나 형들이 일찍 죽었기 때문에 사실상 조조의 장남으로 성장했다.[5] 조비, 조창, 조식, 조웅이 모두 변씨 소생이다.[6] 신삼국대군사 사마의에서는 이런 정설을 무시하고 조비를 '이공자'라고 칭한다. 즉, 조비를 차남으로 본 것이다.[7] 대군사 사마의에서는 이 설을 따라 조비가 헌제의 딸들을 보고 "내 누이가 산양공의 부인이니 이 아이들은 내게는 조카가 아닌가?"라며 마뜩찮아 하자 조진이 "어차피 공주의 소생도 아니잖습니까?"라고 대답한다.[8] 이런 유력가문의 겹사돈은 한국의 고대사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김유신김춘추가 겹사돈을 맺었다. 다만 한반도는 고려시대까지 유교질서가 확립되지 않아서 이 결혼은 조씨-한나라 황실간의 결혼과는 달리 근친혼이며 김춘추와 문희의 딸이 김유신의 아내가 되었다.[9] 예를 들어 한나라 시대 유행했던 주검에 입히는 옥의는 조비가 공식적으로 금지령을 내려서 이후 사라졌다.[10] 이후 황실을 위협하는 종친 군벌이 될 수 있었던 조홍이나 조식에 대한 탄압도 이 일환으로 볼 수 있다.[11] 文帝天資文藻,下筆成章,博聞強識,才藝兼該;若加之曠大之度,勵以公平之誠,邁誌存道,克廣德心,則古之賢主,何遠之有哉[12] 사실, 한나라의 법도 법가를 기본으로 만들어진 것이라 만만치 않게 엄격했다. 근데 이걸 무시하고 위나라의 법이 엄격해 백성들이 힘들었다고 하는 건 체리피킹이다. 오히려 촉한의 법 또한 엄격했다고 볼 만한 증거가 사서에 많고, 당시는 전쟁이 일상이던 시절이었기에 애초에 법이 엄하지 않을 수가 없기도 했다.[13] 문치(文治)라는 말은 예기가 출전이기는 하지만 중국에서는 잘 쓰지 않는 말이다. 그런데 일본인들이 메이지 유신 이후 이 단어를 자주 썼다. 왜냐하면 중세 일본은 사무라이(무사)들이 문벌귀족을 뒤엎고 막부를 세워 무력으로 백성을 다스린데 반해, 메이지 유신이후에 세워진 신정부는 관료제를 확립하고 학식있는 인재들을 관료로 대거 등용하면서 과거 막부와 다르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중국에서는 춘추전국시대부터 청나라까지 계속 선비나 사대부들이 지배층으로 통치를 담당했기 때문에 굳이 이를 강조할 이유가 없었다.[14] 결국 오수전의 회복은 조비의 아들 조예 대에 사마지의 주도하에서 간신히 이루어진다.[15] 조조는 순욱이 사망한 직후 비서령이라는 관직을 신설해 상서령의 권한을 쪼갰고, 조비는 비서령도 두개로 쪼개 중서성을 독립 관청으로 신설했다.[16] 마치 한국에서 도입했다가 더 큰 공정성 논란을 빚은 입학사정관제와 비슷하게 흘러가게 된다.[17] 조식의 문집 조자건집에 나오는 내용으로 조비가 죽기 몇개월전에 조비가 조식이 있던 곳으로 행차해서 그를 만나 형제의 정을 나누고 화해했다고 조식이 기록했다.[18] 이세민의 경우엔 이건성과 이원길이 이세민의 공적을 시기해서 모함 끝에 독살하려 했기에 이세민은 더 이상 기다리다가 정말 죽을 지 몰라 미리 선수를 친 것이라는게 전통적인 시각이었으나 역사 연구가 진행됨에 따라 형과 동생에 대한 과도한 역사왜곡을 주도한 것이 드러나 현대 사학계에서는 그의 주장을 전적으로 신뢰하진 않는다.[19] 당나라시인인 고적의 작품과 혼동말자.[20] 이런 약탈혼은 조비의 인성을 보여주는 것으로 회자되는 경우도 있지만, 전근대 시대에는 상당히 흔한 일이며 현재의 기준으로 평가하기는 어렵다. 손책, 주유, 장비도 포로가 된 여인을 아내나 첩으로 삼았다. 애당초 전근대시대에는 혼인 당사자의 의지로 맺어지는 일이 드물었다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21] 육손은 조비의 간사함은 조조 못지 않다고 촉군 추격을 포기하고 위에 대비하는 이유를 설명한다.[22] 사천 요리 매운맛의 양대 축이 [[마라#s-5]|마와 라][23] 조청 1kg을 얻으려면 쌀 2kg에 엿기름 500g을 때려부어 6시간 동안 삭히고, 그걸 또 한나절 꼬박 졸여야한다. 보다시피 쌀과 장작이 엄청 들어가기 때문에 수수조청 2kg 정도이면 가격이 10만 원은 가볍게 넘어간다. 고대에는 꿀이 오히려 흔했던 건 자연환경이 지금보다 오염이 덜해서 그만큼 벌들의 서식지도 많았기에 가능한 일이다.[24] 이 책은 송나라 이전에 소실되었고, 현재는 이렇게 다른 서적에 인용된 단편적인 문장만 남아 있다.[25] 재밌게도 자기보다 어린 여인을 정실로 삼은 종요와는 달리 조비는 자기보다 나이가 많은 여인들을 정실로 맞아들였다.[26] 선빈이니, 백화계니 하는건 머리 모양이다.[27] 오래 산 편이지만 90대 중반에 사망한 동생 사마부같은 사람도 있고 위나라 중신중에 조조-조비-조예 3대에 걸쳐 활약한 사람이 워낙 많아서 특출나게 오래 산 케이스는 아니다. 물론 의학과 위생, 영양 상태가 부실한 서기 2~3세기 무렵에 70대까지 살았으면 굉장히 오래 산 축에 속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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