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주 낙안국 사람으로 정현의 문인 아래에서 학문을 배웠으며, 사람들은 손염을 동주의 큰 유학자라 불렀다. 위 조정에서 비서감으로 임명했지만 나가지 않았으며, 왕숙이 성증론을 편찬해 정현의 단점을 풍자하자 손염은 반박해 정현을 변호했다. 손염은 주역, 춘추례, 모시, 예기, 춘추삼전, 국어, 이아 등의 모든 주석을 달았고 주석 10여 편을 지었다.
진나라의 무제와 이름이 같았기에 피휘로 인해 진수가 정사 삼국지에 기록할 때 자로 기록했다.
육익의 산동통지에 따르면 손염이 지은 것에 대해 짤막하게 언급되는데, 춘추삼전 3권이 있고 국어주 1권이 있다고 하지만 다른 문헌에서는 그 기록을 찾아보기 어렵다고 한다.
조선 후기의 백과사전인 오주연문장전산고에서는 반절과 번뉴에 대한 변증설에서 반절의 학문은 비록 손숙연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하나, 손숙연은 범가의 음절을 취해 만든 것이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