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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080><colcolor=#ece5b6> 위 魏 | Wei Dynasty | ||
지도의 붉은색 부분 (262년 기준) | ||
220년 ~ 265년[1] | ||
<rowcolor=#ece5b6> 성립 이전 | 멸망 이후 | |
한나라(후한) | 사마진(서진) | |
별칭 | 조위(曹魏) | |
위치 | 중국 화북 | |
수도 | 허도(許都) (220년) 낙양(洛陽) (220년 ~ 265년) | |
면적 | 2,030,000km² (262년 기준) → 3,100,000km² (264년 기준) | |
인구 | 4,932,000명 (촉한 합병 전) → 6,014,000명 (촉한 합병 후) | |
민족 | 한족 | |
언어 | 상고 중국어[2], 한문 | |
문자 | 한자 | |
종교 | 유교, 도교, 불교, 중국 토속 종교 | |
화폐 | 오수전 | |
정치체제 | 군주제 | |
국가원수 | 황제 | |
국성 | 패국 조씨 | |
주요 황제 | 문제 (220년 ~ 226년) 명제 (226년 ~ 239년) | |
주요 실권자 | 조상, 사마의, 사마사, 사마소 | |
현재 국가 | [[중국| ]][[틀:국기| ]][[틀:국기| ]] [[몽골| ]][[틀:국기| ]][[틀:국기| ]][3] [[북한| ]][[틀:국기| ]][[틀:국기| ]][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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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삼국시대의 삼국 가운데 하나. 후한 말기의 혼란한 상황 속에서 황제를 확보한 조조가 기반을 닦았고, 그 아들 조비가 헌제 유협을 상대로 무력을 사용하여 강제로 황제 자리에서 끌어내리면서 선양을 강요하였고 결국 헌제가 조비에게 선양을 하면서 후한은 멸망하고 위나라가 건국되었다. 그러나 이후 황제가 살해당하는 등 조조의 충신이던 사마의서 시작된 권신 사마씨 일족에게 휘둘리다가 후한과 같은 운명을 맞았고 천하통일이 가까웠던 국가였으나 그 기반을 사마씨에게 빼앗기고 만다.국호인 위(魏)는 조조가 위공(魏公)에 봉해진 것에서 유래했다.
워낙 삼국지의 유명세가 강해서 보통 '위나라'라고만 지칭하면 사람들이 가장 많이 떠올리는 나라지만, 중국사에는 위나라가 여럿 있었기에[5] 구별을 위해 국성을 따서 '조위(曹魏)'라고 부르기도 한다. 또한 의외로 춘추전국 시대 연나라, 서한, 서진 못지 않게 한국사에 깊은 영향을 미친 중국 왕조기도 하다.
2. 국력
후한 13주 중 9주, 그 당시 '중원'이라고 칭할 수 있는 화북 전체를 혼자 차지한 만큼 인구 수와 그에 따른 생산력이 촉한과 손오와는 일대일 구도로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압도적이었다. 인구만 해도 《후한서》에 등재된 기록을 기준으로 263년에 이미 443만 명에 달했는데, 이는 동시대 촉의 4배, 오의 2배에 달하는 인구 수이다. 학자들 중에는 천하의 7~8할을 가졌다는 견해가 있을 정도. 때문에 촉한과 손오는 필사적으로 싸워야 했다.[6]그러나 조위가 천하 7~8할을 장악했다는 식으로 말하는 건 과대평가다. 일단 절대적인 기준에서 보자면 조위는 그 당시 중원의 가장 알토란 같은 지역인 화북을 장악했지만 후한 말부터 이어진 수십 년간의 전무후무한 난세 대혼란 끝에 자리 잡은 왕조인 터라 태생적으로 급감한 인구수와 바닥을 친 중앙 권력의 통치력 같은 치명적인 한계를 안고 있었다.[7] 그래서 조위의 중앙 권력이 확보한 인구수는 500만 명 정도였다.[8][9] 인구가 곧 국력이고 생산력인 전근대 농경사회에서 이 정도 수준의 국력은 유구한 중국사를 통틀어 화북을 장악한 여러 왕조들 가운데 단연 하위권에 불과하다.
이렇게 당대 조위가 확보한 인구수는 촉한의 인구 4배, 손오의 2배 정도였으니 국력 역시 딱 그 정도 차이가 난다고 보면 합당하다. 그러니까 조위가 확보한 중화의 지분은 많아봐야 6할 정도가 된다고 보면 된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후한서 군국지 기준으로 삼국이 확보한 인구는 총 8,534,000명이고 조위의 인구는 4,932,000명이니 대략 58%가 조위의 지분이다. 그리고 촉한은 12%, 손오는 30% 정도라고 보면 된다. 당대 중화권 최강국인 건 사실이지만 절대적인 패권국이라고 보기는 힘든 수준이다.
실제로 삼국 정립 이후 조위가 촉한이나 손오를 상대할 때를 보면 그다지 압도적인 전력으로 밀어붙인 적이 별로 없다. 일부 식자들의 평대로 당대 조위가 정말로 중화의 7~8할을 독식했고 나머지 2~3을 촉한과 손오가 나눠가졌다면 일어날 수 없는 현상이다. 조위가 촉한 혹은 손오와 일대일 구도일 경우라면 압도적으로 우위인 국력을 자랑할지는 몰라도 촉한과 손오가 힘을 합치고[10] 북방 이민족이라는 변수까지 추가하면 그 모든 타세력의 합을 압도할 만큼 강력한 세력이라고 보기는 힘들다. 때문에 촉한과 손오가 필사적으로 싸운 만큼 조위 역시 사활을 걸고 주변국들과 싸워야 했다. 조위가 촉한보다 국력이 5배 더 강하다고 해서 대촉전에 5배의 군사력를 동원하고 손오보다 2배 더 강하다고 해서 대오전에 2배의 군사력을 투입하고 그랬던 게 절대 아니었단 얘기다.
가령 제갈량의 북벌 당시를 보면 조위는 10만 정도의 군세를 동원한 촉한과 맞서 싸우면서 4배나 되는 인구차가 무색하게 촉한의 북벌군과 비슷하거나 조금 상회한 정도의 군세밖에 서북 전선에 투입하지 못했다. 1차 북벌 때처럼 되레 촉한의 군세가 더 많은 적(기록상 20만 명)도 있을 정도다. 특히 위나라가 역으로 침공한 흥세 전투에서는 참패하여 20여 년간 수세로 일관했을 정도로 삼국의 최약체가 촉한인데도 그 최약체를 상대로 뚜렷한 성과를 보이지 못했다가 촉 내부에서 일어난 갈등을 틈타 정벌에 성공한다.
그리고 손오를 상대한 회남 전선에서는 외려 손오보다 항상 더 미약한 군세로 대적했다. 합비 공방전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합비 전선의 대표 군사 지휘관들인 장료, 만총, 장특 등은 손오의 북진을 상대하면서 단 한 번도 군사 숫자로 우위에 선 적이 없었고 항상 극심한 열세였다. 조위와 손오의 대립구도에서 군세 상 우위의 포지션에 있던 건 손오의 2배 이상의 국력을 갖춘 조위가 아니라 언제나 손오였던 것이다. 그것도 장료군 7,000명 vs 손권군 10만 명, 장특군 3,000명 vs 제갈각군 20만 명 같은 예가 있다. 즉 손오가 회남 전선에서 번번이 좌절한 건 지휘관의 역량 문제지[11] 조위가 회남 전선에 동원한 병력이 손오의 병력보다 많아서 그런 것이 아니다. 회남 전선에서 손오는 조위보다 물량이라는 측면에선 항상 압도적으로 우위를 점하고 있었다. 회남 전선에서 조위가 어마어마한 물량을 보여준 적이 있긴 한데 오나라와의 싸움이 아니라 제갈탄의 난. 제갈탄은 둔전병까지 긁어모아 15만을 동원했고 사마소는 후방 병력까지 탈탈 털어서 26만을 동원했는데 이걸 합치면 무려 위나라 군대 41만이 회남에 집결한 것이다.
또한 사마의가 동연을 정벌할 때나 관구검이 고구려와 싸울 때를 봐도 이들의 군세는 항상 상대보다 약했지만 지휘관의 뛰어난 역량으로 승리한 케이스다. 동연이나 고구려는 조위의 국력에 비하면 정말 미약한 규모의 세력이었지만, 조위는 이러한 동연이 수성병을 제외하고 수만명의 야전병을 동원할 때 40,000명을 겨우 모아 사마의에게 붙여줬으며, 관구검은 고작 10,000명의 군대로 고구려의 동천왕이 이끄는 고구려 최정예 철갑기병 5,000명이 포함된 20,000명의 군대와 상대해야 했다.
이처럼 조위는 촉한과 손오를 상대할 때는 물론이고 이들보다 세가 훨씬 작은 북방의 이민족을 상대할 때조차 당대 최강국이라는 위상이 무색할 만큼 우위의 전력으로 밀어부치는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당대 조위를 둘러싼 국제 정세가 여러 적대국들이 조위를 빙 둘러 포위한 구도였던 터라 전선이 워낙 길기도 했고[12], 조위의 국력 또한 생각만큼 그렇게 강한 편은 아니었기에 이런 현상이 벌어진 것이었다. 코에이 삼국지 시리즈 같은 삼국지 관련 2차 창작물의 영향 때문인지 물량빨 이미지가 강한 조위지만 사실 이는 편견이자 과대평가로 외려 오늘날 삼국지 팬덤의 인식에서 조위 소속의 인물들의 군사적 역량이 과소평가 됐다고 보는 게 합당하다.
결론적으로 조위가 당대 최강국인 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촉한과 손오가 힘을 합쳐도 아예 극복하지 못할 만큼 압도적으로 격차가 벌어질 정도로 국력이 우위인 패권 국가였던 것은 아니었다. 게다가 조위는 북방 이민족들까지 상대해야 했기에 그 격차는 더욱 줄어들게 된다.[13] 상술했듯 촉한과 손오를 상대로 조위가 그리 압도적인 군사 동원력을 보여주지 못한 것이 이를 반증한다. 특히 대오 전선인 회남-합비 전선 같은 경우는 손오가 무능해서 그렇지 조위의 군세 상황만 보면 상당히 아슬아슬한 경우[14]가 많았다. 당대 촉한의 최고 위정자들인 제갈량이나 강유, 그리고 노숙 이후 유일하게 비전과 능력을 겸비하고 손오의 대전략을 제시한 리더인 제갈각은 이 점을 염두에 두고 분명 힘들지만 해볼 만한 도전이라고 생각하고 북벌을 시도한 현실주의자였지, 불가능한 목표에 집착한 게 결코 아니었다. 북벌이 현실적으로 어려울 망정, 북벌에 성공하지 못하면 장기적으로 자신들이 소속된 국가가 사라진다는 것이야 말로 명약관화한 '현실'이었기 때문이다.[15]
다만 '위가 천하의 7, 8할을 차지했다'는 것이 근거가 전무한 상태에서 나온 엉뚱한 주장만은 아니다. 실제로 위나라가 후한 13주 중 약 70%에 해당하는 9주를 차지했고,[16] 동오 지역이 하북 지역에 비해 개발이 덜 되고 중앙의 지배가 비교적 느슨한 점 등을 감안하면 위나라의 지배력을 최대한으로 보면 저렇게 평가할 수도 있다. 문제는 위나라라고 지배력이 과거 전성기 한나라만큼 완전했던 것은 아니었다는 것. 이는 근본적으로 당시가 서기 200년대였기 때문이다. 교통이건 통신이건 현대는 물론이고 거의 천 년 뒤인 고려시대보다도 훨씬 떨어지는 시대였다. 당시에는 어떤 지역을 점령했다는 것은 그 지역의 거점이 되는 중심지를 지배했다는 의미이며, 그 지역에 사는 모든 사람들을 지배했다는 의미는 아니다. 이 점은 후한 말에 5천만 명이 훌쩍 넘던 인구가 불과 70여 년 만에 위/촉/오 통합해 같은 지역인구가 770만 명 정도, 7분의 1도 안 되는 쪼그라든 것을 보면 알 수 있으며, 또한 이 13주의 인구가 서진이 삼국을 재통일한 직후에 조사하자 갑자기 1,600만 명 이상으로 불어난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현실적으로 한 세대도 지나지 않았는데 갑자기 (후한 13주 중) 인구의 6분의1이 사망하고, 또 거기서 한 세대도 안 지났는데 인구가 갑자기 두 배로 불 리가 없다는 것을 생각하면 저 인구는 실제 저 땅에서 사는 인구가 아닌 '저 땅에 위치한 정부의 행정력 밑에 있던 인구'라고 보는 게 타당하다.
즉, 통일왕조였던 후한 시절이라면 위나라에 해당하는 영토가 전체 국력 7할 정도였을 수 있었겠지만[17], 당시엔 전란의 시대였고 이제 갓 해당지역을 지배한 위나라가 저 지역을 온전히 지배하기는 불가능했기 때문에 위나라가 그만큼의 국력을 갖는 건 불가능했다고 볼 수 있다.[18][19] 이런 측면에서 볼 때 위에서 언급한 대로 인구수를 기반으로 국력을 비교하는 것이 타당하다. 실제 그 땅위에 몇 명이 살고 있던 간에 조위가 조사한 인구가 490만 명이란 건, 정부에 세금을 바치고 군역을 지닌 인구가 490만 명이란 소리, 즉, 그 나라의 경제력과 군사력의 기반이 되는 인구가 490만 명이 된단 얘기가 되기 때문이다.
3. 역사
200년 | 관도대전 |
213년 | 조조가 위공으로 책봉됨 |
216년 | 조조가 위왕으로 책봉됨 |
220년 | 조비 황제로 즉위 / 위나라 건국 |
227-234년 | 제갈량의 북벌 |
249년 | 고평릉 사변 |
254년 | 조방의 친위 쿠데타 발각 |
260년 | 조모의 친위 쿠데타 실패 |
263년 | 촉한 정벌 |
265년 | 조환이 사마염에게 선양 / 위나라 멸망 |
조조가 죽은 뒤 조비가 위왕의 자리를 잇는다. 그리고 조비는 헌제로부터 선양을 받아 껍데기만 남은 후한을 멸망시키고 천자의 제국 조위를 건국한다. 그리고 얼마 못 가 조비가 죽은 뒤 조비에 이어 조예가 제위에 올랐다. 처음에는 조진과 조휴 등 황족들이 실권을 잡고 있었으나 조진은 얼마 못 가 죽고 조휴는 석정 전투에서 대패하여 분사하였다.
조예가 자식을 남기지 못하고 죽으면서 조위는 직계 혈통이 끊어져버린다. 게다가 조예가 양아들로 들여서 새로 황제가 된 조방의 혈통이 불확실했기 때문에 황실의 권위와 정통성이 실추된다.
사마의가 공적을 세워 조위의 주요 세력으로 부상하자 조예는 죽기 직전 조진의 아들인 조상에게 실권을 주어 조씨 황실을 지키려 했지만 결국 고평릉 사변으로 사마의에게 정권을 빼앗겼고, 조조와 조비 대의 공신들의 후손들이 사마씨로 갈아타면서[21] 황제는 허수아비가 되었다.
그렇다고는 해도 사실 조위 역시 천하를 한두 해 다스린 것은 아니고, 나라가 그렇게까지 막장으로 치달은 것도 아니었고, 사마씨 세력 역시 위나라의 모든 신하를 다 손에 넣은 건 아니었다. 조위 말기에 사마씨에 대항하여 일어난 반란이나 음모는 조방, 관구검과 문흠, 제갈탄, 이풍, 조모의 친위 쿠데타 등으로 손꼽아보면 적지 않게 많고 그 규모도 작지는 않았다. 제갈탄의 난 당시에는 아예 오에서 원군이 오기도 했고 강유도 그틈을 타 수만 명을 이끌고 장성을 습격했다는 기록도 있다. 따라서 이들이 따로 놀 게 아니라 손을 잡고 대규모로 거병을 일으켰다면 삼국시대는 길어질 망정, 적어도 서진은 탄생하지 못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이런 '반사마씨 세력'이라고 해서 어떤 통일성이나 연결점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황제가 이들과 적극적으로 연계를 한 것도 아니라 손에 손을 맞잡은 대규모 반란이 일어나지는 못하고 그저 중구난방으로 단독으로 거병하거나 몰래 음모를 꾸미는 것이 고작이었다. 거기다 지지기반이 부실하거나 내부에서 불화가 발생하기도 했고 이들의 역량도 사마씨에 크게 못 미쳐서 사마씨에 대항하는 반격 계획은 번번히 지리멸렬하게 끝나버렸다. 오히려 이를 명분으로 하여 사마씨는 반대 세력을 숙청할 수 있게 되었고, 조위 황실의 명운은 점점 깎여나가게 된다.
조방은 사마의가 죽고 두 아들들인 사마사와 사마소 형제가 정권을 잡자 친위 쿠데타를 일으키려 했으나 오히려 발각되어 허무하게 실패하고 자신이 폐위당하고 만다. 조방을 제거한 사마사는 그의 사촌 동생인 조모를 데려다가 제위에 올렸다. 조모는 형 사마사가 죽고 동생 사마소가 정권을 잡자, 역시 친위 쿠데타를 일으켜서 사마씨 세력을 무너뜨리려 했지만 오히려 백주대낮에 사마씨의 군대에 시해당하고 만다. 사마소는 아예 꽤나 먼 황족 조환을 데려다가 제위에 앉힌다. 이로서 황실은 완벽하게 사마씨의 꼭두각시화되고 조위는 이 시점에서 사실상 멸망한 것이나 다름없게 되었다.
촉한이 사마소에 의해 멸망[22]한 지 불과 2년이 지난 후, 마지막 황제인 조환이 사마소의 아들인 사마염에게 선양을 하면서[23] 허울만 남아있던 조위도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특히 마지막 황제들이었던 조방과 조모, 조환의 최후는 조조와 조비에게 밀려난 후한 헌제의 처절한 모습과 매우 흡사해서 역사는 반복된다는 좋은 교훈을 보여주고 있다.[24][25]
평하여 말한다. 고대에는 천하를 공공의 것으로 생각하고, 오직 현자들에게 주었다. 후세에는 왕위를 세습하여 적자를 후계자로 세웠다. 만일 적자가 없으면 방계 친족 중에서 덕행이 있는 사람을 선발하였는데, 가령 한나라의 문제와 선제가 그러했으니, 이는 바꿀 수 없는 법칙이다. 그런데 명제는 이와 같이 하지 않고 사사로운 애정을 중시하여 어린아이를 어루만지며 기르고, 그에게 천자의 자리를 전해주었고, 또 적합한 인물에게 위탁의 책임을 맡기지 않고 일족을 정치에 참여시킨 결과 조상은 주살되고, 제왕 조왕도 자리에서 쫓겨났다. 고귀향공 조모는 재간이 있고 총명하며 어린 시절에 완성을 보았으며, 의론을 좋아하고 문장을 애호하여 문제의 풍모를 갖춘 인물이었다. 그러나 사람됨이 경솔하고 분노에 차면 함부로 행동하여 끝내는 스스로 큰 재난 속으로 빠져들었다. 진류왕(조환)은 정사에 관해 묻지 않고 재상이 정치를 하도록 하고 한위(漢魏)의 전례를 받들어 진(晉)에게 양도하였다. 그래서 진나라로부터 대국(大國)으로 봉해지고, 진 왕조의 빈객이 되어 산양공(山陽公; 후한의 헌제 유협)보다 더 총애를 받았다.
《위서 삼소제기 진류왕기》의 마지막 평론
조위가 망한 후, 선양을 받은 사마씨는 이전에 받은 작위에 따라 나라의 이름을 대진(大晉)이라 했는데, 오늘날에는 역사 속의 다른 진(晉)나라들과 구분하기 위해 서진이라 부른다. 서진의 황제들은 위나라의 전례를 밟지 않기 위해 같은 사마씨 일족들의 힘을 키워주며 마침내 천하를 통일하지만, 후한의 문제점에 대해 전혀 개선되지 못한 채 통일제국을 건국하였고, 그 이후의 결과는 망했다.《위서 삼소제기 진류왕기》의 마지막 평론
수도는 조비가 헌제에게 선양을 받아 위나라를 건국한 직후에 후한의 마지막 수도 허(허창)를 그대로 썼으나 곧 낙양으로 천도했다.
여담으로 황제들이 재위 기간이 끝날 때의 나이가 나중 대로 갈수록 더 어려진다는 희귀한 징크스를 가진 제국이었다. 문제 조비 41세 붕어, 명제 조예 35세 혹은 36세 붕어, 소제 조방 23세 폐위, 폐제 조모 20세 붕어, 원제 조환 20세 폐위 등. 추존 황제인 무제 조조 역시 66세에 붕어했다는 것을 감안하면 참으로 묘한 징크스이고, 이렇게 점점 단명하는 황제들이 조위의 황권을 약화시키는 결과를 낳기도 했다.
4. 정치
진군이 주창한 구품관인법이 만들어졌다. 대개 위나라 시기의 가장 중요한 역사적 변화라면 이것을 꼽으며, 세계사 교과 시간에 후한 말기나 중국 삼국시대에 넘겨짚고 가는 역사적 업적도 사실상 이 제도 뿐이다.[26]위나라 관료들은 크게 조씨의 가향인 초, 패 출신자와 여(여남), 영(영천) 출신자가 많았다.[27] 본질적으로 위나라는 강력한 군벌인 조조가 연주, 영천, 여남 일대의 호족들을 포섭하고 지지를 받아내어 기반을 마련하였으며, 나중에 기반을 물려받은 아들인 조비가 헌제에게 선양을 받아 한나라를 멸망시키고 건국한 나라다. 삼국지연의는 물론 삼국지 관련 매체에서 조조 휘하의 모사나 무장으로 묘사되는 인물들도 사실은 대개 지역 호족들이다.[28] 애당초 조인, 조홍, 조휴를 배출한 조조의 고향 초의 조씨 집안부터가 호족 집안이며, 하후돈 등을 필두로 하는 하후씨 일족이나 순욱을 필두로 하는 순씨 일족. 뒷날 위를 무너뜨리는 서진 정권의 기반을 구축하는 사마의의 사마씨 역시 호족이다. 구품관인법의 정비로 관료제가 발달하여 관리 서열의 상하관계가 명확하게 설정되었다. 하지만 구품관인법의 중정제가 일으킨 부작용으로 호족의 귀족화가 나타나게 되고, 귀족의 대두로 정치가 귀족들에게 좌우되기 시작한다.[29] 서진 이후로 지배층으로 군림하는 이른바 문벌귀족이 바로 이 시기의 호족들이 중앙정계로 진출하면서 귀족화된 계층이다.
위의 가장 큰 약점은 황통으로, 실제 위나라의 황통은 상당히 불안정했다. 뒤늦은 후계자 책봉[30]과 이후 머지 않은 조조의 사망 때문에 조비는 왕위를 놓고 경쟁하던 아우들을 매우 의심하여 직계 황족들을 시골의 봉지에 연금시켜 사실상 감금 상태로 만들어놓았다. 이후 조예가 후사 없이 사망하면서 황실의 혈통이 위기를 겪었으며 황제의 정통성에 큰 손상을 가져왔다. 조예도 아버지 쪽 혈통에는 문제가 없는 데다가 대외적으로 알려진 지 오래되지 않았지만 그래도 조비의 아들인 건 확실했기에 별 문제가 없었는데 조방은 어느날 갑자기 조예가 양자로 삼겠다고 데려온 데다 그 가계조차 알려져 있지 않아서 조예의 친자가 아닌건 둘째치고 조씨 출신이 맞느냐부터가 불분명했다. 물론 조예도 어머니 쪽 문제는 있었다. 심지어 조예도 조비의 친자가 아니라는 풍문도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사마씨가 정권을 탈취하는 틈을 얻을 수 있었다.
후한의 가장 큰 문제점 중 하나인 환관과 외척을 척결하려는 시도도 진행되었다. 조조는 권력자로 등극하면서 이들을 밟아놓았고[31] 외척은 천한 출신으로 삼았고 이를 이어받은 조비는 위나라를 건국한 후에 아예 제도면에서 환관의 직책을 제한하고 태후에게 정치를 아뢰지 말라는 법을 비롯해 외척세력의 발흥을 막으려 했다. 게다가 본인들 뿐만 아니라 한나라 황제의 외척들을 상대로도 숙청을 저질렀다. 다만 후일 환관이 등장해 국정을 농단한 촉한 정도는 아니었어도 환관문제를 시스템적으로 잘라냈다고 하는 위나라에서도 조상 일파와 밀접히 결합해 연락하면서 국정을 주무른 장당이라는 환관이 있었다.[32] 또 사마사가 하후현과 이풍을 주살할 때 보면 하후현전에서 종육이 상주하길 이풍과 그 일당이 환관과 결탁했다는 얘기가 나온다. 이후 조방이 폐위된 걸 보면 환관이 권력에서 아예 배제되었다 보기 힘들다.[33] 외척의 경우도 조방이 사마사를 죽이기 위해 장인 장집과 조예의 딸 제장공주의 시아버지 이풍과 모의했다는 점을 생각하면 조위는 스스로의 제도를 어기고 황실의 권력을 위해 외척과 손을 잡으려 했다는 게 드러난다. 결국 어느 정도 권력이 강성할 때는 외척과 환관 배척의 원칙도 강하게 내세웠겠지만 불안정해지면 어쩔 수가 없었던 것이겠다. 거기다가 사마씨는 태후가 정치에 간여할 수 없다는 법을 유명무실하게 만들고 조위의 태후를 협박해 황제를 갈아치웠다. 사실 촉과 오 역시 외척의 발흥은 없었다. 외척 문제는 삼국시대 바로 후에 발생하는데, 후한시대의 외척문제 때문인지 조위는 노이로제 수준으로 외척을 배척하였고, 그 조위를 계승한 서진은 반대로 황족, 외척을 중용하였다. 위나라의 패망을 보고 반면교사를 삼은 듯 한데, 그들의 중용 때문에 서진은 멸망 테크를 타게 된다.
이에 대한 대책으로 위진이 구품관인법이나 '종친 중심의 등용'을 개혁책으로 내놓았지만 그 결과물은 영 좋지 못했다. 위나라의 구품관인법은 귀족체제의 공고화와 더불어 그 자체도 무력화되어 과거제로 변모되기까지 폐단을 낳았고 진무제와 그 뒤를 이은 진혜제가 정신줄을 놔버린 탓에 종친 중심 등용체계는 그냥 주나라의 봉건제나 전한의 군국제만도 못한 것이 되어 버렸다. 이 때문에 주나라가 춘추전국시대의 수순을 밟았듯이 위나라는 사마씨에 의해 멸망, 진나라는 팔왕의 난과 영가의 난으로 순식간에 무너져 버린다.
5. 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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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한 말기의 혼란을 극복하기 위해서 둔전제와 세병제가 실시되었다. 조조의 강병 정책이 성과를 거두어, 위나라는 매우 강력한 군대를 갖추었다.[34] 군법이 매우 엄격하여 군사적인 배신자는 가족까지 연좌제에 걸어서 벌을 줄 정도로 강력하게 처벌하였다. 다른 나라에 항복한 자가 나오더라도 그 가족들이 관직에 오를 수 있던 촉한과의 차이점.[35]
내지 둔전은 조위에서 처음 시작한 것은 아니다. 도겸은 진등을 전농 교위로 삼아 서주 경내에 둔전을 실행해 효과를 거두었고, 유주의 공손찬도 역경에서 둔전을 실시해 군량을 비축했다. 그러나 대규모로 둔전을 운용한 것은 조조 정권이 처음으로 조조는 이들을 참고삼아 대규모로 내지 둔전을 실시했다.
조위의 둔전은 본래 민둔과 군둔의 구분이 없었는데 근대 학자들이 서술과 연구의 편리를 위해 민둔과 군둔으로 구분지었다. 사실 둘을 명확하게 구분짓기는 어렵다. 민둔과 군둔의 공통점은 군량 공급을 위해 만들어졌고, 군사 편제를 따랐다는 것이다. 유사시에는 민둔의 노역자들도 무기를 들고 전투에 참여했다. 오와 촉의 변경 지대 둔전객들은 방위의 임무도 겸했으며, 내지 둔전객들은 반란 등이 일어날 경우 징집되어 참전하기도 했다. 경제가 회복되며 이들을 군역과 요역에 동원하는 경우가 점점 많아졌다.
단순 병력의 물량으로는 다른 국가들을 압도했지만[36] 문제는 전선. 워낙 세력이 크다보니 단순히 촉, 오뿐 아니라 다른 이민족 등도 고려해야 했기에 압도적인 수로 적을 밀어버린다거나 하는 모습은 자주 나타나지 않는다.[37][38]
조위의 갑옷 제작 기술 역시 뛰어났다. 조식은 '선제사실개표'에서 흑광개, 명광개, 양당개, 환쇄개, 매개 등 다양한 갑옷의 명칭을 들고 있다. 이런 갑옷은 당시에는 매우 진귀한 고급품이었으나 후에는 군대의 주요 장비로 발전했다. 그중에서 마개는 전투마를 보호하는 갑옷을 말한다.
6. 경제
당시의 생산은 대부분 농업 생산이었고 가장 중요한 자원은 인구였는데, 결과적으로 인구가 국력이고 경제였다. 그런 의미에서 위나라는 촉의 5배, 오의 두 배가 되는 압도적인 경제력을 자랑했다. 당시에는 장강 이남의 남중국에서 개발이 시작되는 시기였고, 아직 남중국에는 미개척지가 많아서 기후도 현재보다 온난습윤하여 황하를 끼고 있는 화북 지방의 농업 생산량은 현재보다 훨씬 좋았다.[39] 일단 조조가 집권하여 둔전 등의 여러 정책을 펼쳐 전란으로 소실된 토지를 재건하고 유민을 정착시키자 바로 생산이 급등하였다. 둔전제는 고대로부터 전해진 둔전제를 백성들 전체를 상대로 도입한 아주 중요한 제도로, 많은 왕조들이 군사 운영의 중요한 방편으로 따랐다. 그러나 백성들을 강제 동원하는 등 그 폐해도 만만치 않아서 점점 생산성이 떨어졌고 결국 조위가 멸망하기 1년전인 264년에 폐지된다.어쨌거나 조위는 동한 말의 혼란기에 황폐해진 경제를 다시 복구하는 데 여념이 없었다. 예컨대, 양회(兩淮)지역은 "수춘에서 도성에 이르기까지 둔전을 일구니 (고을마다 사람이 많아) 닭과 개 짖는 소리가 나고 천맥(밭 사이의 길)이 서로 종횡으로 이어졌다, 돈과 식량이 비축되고 수해가 없다" 등의 모습으로 번창했다. 또 좌사의 《위도부(魏都賦)》에 "면수(비단의 일종)는 양읍이요, 나기(무늬 있는 비단)는 조가며, 면광(솜)은 방자요, 겸백(명주비단)은 청하다" 라는 서술이 있는 것으로 보아서 동한 말에 와해되어 거의 자취를 감췄던 방직산업이 다시 회복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렇듯 민생이 안정되고 국력이 신장되면서 동한 말년에 황폐한 폐도였던 낙양은 조위의 수도가 되면서 번창하여 조방 시기(239~254)에 "백성이 사방에 섞여 살고, 대 호족이 많이 기거하며, 상인과 이민족 등 천하 모든 곳에서 이익을 좇아 모여들었다"라고 할 만큼 거대 국제도시로 발전할 수 있었다.
현재의 산둥성 지역인 북해는 소금 산지[40], 서량, 병주, 유주 지역은 기병에 필수적인 말의 산지였다. 당시는 상업이 그다지 발달하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나라는 수백 년간 한족의 활동 무대였기 때문에 상업도 다른 곳보다 크게 발달되어 있었다. 한나라 시절엔 개개인이 동전으로 인두세를 냈는데, 동탁이 소전을 만들던 시점을 전후해서 전국적으로 화폐경제(+호적 조사)가 와장창 무너진 바람에 조조, 조비 때에 호구 기준의 현물납으로 바뀌었다. 동탁 시대 이후로 대륙에서 (한동안) 화폐 사용이 딱 끊겼다. 이와 관련해 후한 말-위의 조세제도가 동전을 내는 인두세에서 현물을 내는 호포제로 바뀐 것이다. 조조가 인두세를 폐하고 호포제를 실시했고 화폐납 대신 현물납을 택한다.[41]
이렇듯 동탁의 병크 등등으로 화폐의 공신력이 바닥을 쳐버려서 오수전이 폐지되었는데, 그 후 조비, 조예 시기 화폐 재건 시도가 있었다. 공식적으로 위나라를 건국한 조비도 즉위 초에 오수전 회복을 시도했고 조예가 즉위하고서도 폐지했던 오수전을 다시 발행하자고 한 것이다. 당초 조비가 221년 초에 후한 말 난리로 인해 폐지된 오수전 사용을 회복시켰다가 위나라에서 곡물값이 너무 비싸니까 다시 오수전을 폐지하고 곡식과 비단(穀帛)을 사용하도록 하였는데, 사람들 사이에서 이를 교묘하게 속이는 방법이 점차 많아졌다. 서로 다투어서 곡식을 물에 적셔서 이익을 보려 하였고 얇은 비단을 가지고 교역을 하여서, 비록 엄한 형벌에 처한다고 하더라도 금지시킬 수 없었다. 사마지 등이 조정에서 크게 토론을 벌이며 생각하길 "전(錢, 돈)을 사용하는 것은 나라를 풍요롭게 할 뿐만 아니라, 또한 형벌을 줄일 수 있으니, 지금 오수전을 만들어서 편하게 하는 것만 한 것이 없습니다."라고 했다. 이에 227년 여름 4월 을해일에 다시 오수전을 통용하게 하였다.
그러나 화폐경제를 어느 정도 복구시킨 촉한을 제외한 중원에서는 이런 현물거래가 계속 성행했으며 오나라는 촉한의 화폐를 사용하기도 했다. 하후현전 주석 위략에 따르면 장제가 호군으로 있을 때 아문(牙門)에서 자리를 얻고 싶으면 1천 필(匹)을 바쳐야 하며, 백인독이 되고 싶으면 5백 필을 바쳐야 한다는 말이 떠돌았는데 사마의는 장제와 가까워서 어느 날 그를 불러서 그 사실을 물어 보았다. 장제는 아무런 해명도 하지 못하고, 농담으로 낙양의 시장에서 물건을 살 때는 1전(錢)이라도 부족하면 안 되는 법이라고 했으며 사마의도 쓴웃음을 짓고 말았다. 하후현이 장제를 대신하여 호군이 되었지만 이러한 인사를 막지 못했다가 사마사가 호군이 된 후 이런 폐단을 없었다. 즉, 당시 중원에서는 '필(匹)'과 '전(錢)' 이 동시에 사용되고 있었으며, 조예 대 사마지 등의 건의로 화폐를 재건하기 위해 오수전이 발행되었음에도 포백(布帛)의 화폐 기능을 제거할 수 없었다는 걸 보여준다.
대개 내륙에서 농업을 생계로 삼던 사람들과 비교할 때 해안가 사람들의 생업활동에 대한 통치자들의 시선은 그리 좋지만 않았던 것 같다. 정혼과 사마지와 등애로 대표되는 조위 위정자들의 시각으로 볼 때 해안 지역의 생업활동은 장려의 대상이라기 보단 계도의 대상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7. 문화
후한 말기의 전란으로 소실된 문화를 재발굴하는 작업이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조위는 여러모로 후한의 문화를 계승하려 했다.한편으로는 호족 세력이 발달하여 귀족화되면서 귀족적인 화려하고 사치스러운 문화가 나타나게 된다. 조조, 조비, 조식 삼부자를 필두로 하여 문학이 발달하였는데, 건안 문학이라 불리며 높이 평가받고 있다. 조비는 위나라를 건국하고 황제로 즉위한 이후 당시 가장 뛰어나기로 정평이 난 7명의 문인들의 시를 묶어 건안칠자라 명명하고, <문자경국지대업>이라는 서문까지 작성했다. 또한 조식은 이 시대의 가장 대표적인 시인으로서 이백과 두보가 등장하기 전까지 운문에서 아주 독보적인 위치에 있었다.
후한 말의 황폐한 상황을 여러 가지 정책 시행으로 어느 정도 극복하면서 귀족적인 문화가 융성하기 시작했다. 당시 귀족 남자들 역시 패셔니스트하게 노는 것을 즐겼던 모양. 하안은 얼굴에 분칠을 했다고 하고, 조예는 청백색의 소매가 짧은 옷을 입고 머리를 바닥에 닿을 정도로 길게 길렀다고 한다. 하지만 식자들은 이를 안 좋게 보았다. 이러한 풍조는 서진 시대까지 지속되어 왕개나 석숭 같은 사람이 나타나는 배경이 된다.
후한 말기에 널리 퍼져 세력화되었던 민간 도교가 민간의 도인들이 왕과 귀족들에게 초빙을 받는 식으로 제도권으로 편입되면서 귀족들에게 널리 받아들여졌다. 이것은 후에 죽림칠현 같이 세상에 초탈하려 했던 사람들이 등장하며 귀족 사회에 청담사상이 유행하는 기반이 되었고 오석산 같은 부작용이 나타났다.
세설신어의 묘사나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의 중천왕 시기 관나부인의 기사에 따르면, 위나라에서는 장발의 미남미녀가 인기였던 듯하다.
8. 한국사와의 관계
고구려와의 충돌이 유명하다. 사실 고구려는 처음부터 위나라와 사이가 나쁘지 않았는데, 이유는 동연이 고구려가 차지한 영역을 넘보면서 고구려와 마찰을 빚었기 때문이다. 동연은 위나라와 우호 정책을 유지하면서 고구려와 마한 일대에 세력을 뻗쳐 장래를 기대한다는 의도였겠지만, 고구려와 마한은 그 전 한나라 시기와 달리 국력이 성장한 상태였다. 당초 의도했던 바와 달리 불필요한 마찰로 국력을 낭비하게 되었고, 고구려와 마한 제압은 시작도 못한 상태에서 위나라에게 등을 돌렸다. 이렇게 되자 고구려와 위나라는 우호적인 협력 관계가 될 수밖에 없었다. 오나라 사신이 고구려에 왔을 때 동천왕은 오나라 사신의 목을 베어 위나라에 보냈고, 위나라가 공손연을 칠 때 고구려도 1,000명의 병력을 보내 도왔다. 일단 공손연 세력이 멸망하여 두 나라의 목표는 합치되는 듯 했으나, 위나라가 고구려는 한 게 별로 없다며 보상을 해주지 않자 당연히 고구려가 화를 내게 되었다. 고구려가 반발해도 위나라는 이를 묵살할 뿐이었고, 이에 격분한 고구려가 선제 공격을 가하면서 전쟁이 시작된다. 『삼국사기』에 남아있는 기록은 다음과 같다.- 242년, 동천왕이 병력을 보내 서안평을 침공했다.
- 246년 8월, 관구검이 1만의 병력[42]을 거느리고 침입하였다. 동천왕은 5천 명을 거느리고 공격했지만 크게 패하여 죽은 자가 18,000명이었다.(비류수 전투) 10월, 환도성을 함락시켰다.
- 259년 12월, 위나라 장수 울지해가 병사를 거느리고 쳐들어왔다. 중천왕이 정예기병 5천 명을 선발하여 양맥의 골짜기에서 싸워 이기고, 8천 여명의 목을 베었다.(양맥 전투)
한편 정사 삼국지 위서 관구검전에는 "고구려(高句驪)가 수차례 침범하고 반란을 일으키자"라고 명시했기 때문에 고구려와의 충돌이 남은 기록보다 더 많았던 것으로 추정이 가능하다. 다만 이 위나라의 짧고도 강력한 개입으로 복속시켜온 옥저, 동예 등이 고구려의 통제에서 도로 이탈하고 말았으며, 이후 다시 복속시켰지만 고구려가 한반도로 남하하는 흐름이 적어도 한 세대 정도 늦춰지고 만다.
삼국의 실제 행정력을 묘사한 지도.[43] |
당시 위는 한나라를 계승하였기에 한사군도 그대로 지배하였으므로 한반도 북서부도 위의 직접 지배 아래 있었다. 한사군이 소멸한 시기는 4세기 초반이다. 한사군의 경우 과대평가했다는 반발이 나올 법 하지만, 기준이 246년 기리영 전투 직후 시점이라면 다소 말은 된다. 기리영 전투 직전 비류수 전투로 동예와 옥저 일대가 낙랑의 관할로 들어가버린 데다, 기리영 전투 직후 마한 목지국과 관할 문제로 역시 갈등을 빚던 황해도 일대는 물론이요 경기도 동북부와 강원도 일부까지 대방군 관할이 되어 버렸기 때문. 또한 낙랑군, 대방군만은 위나라가 요동의 동연을 복속시킨 이후로는 실질적으로 관할한 건 맞다. 물론 위나라 내군처럼 모든 관직을 중국인만 차지하고 세금 징수와 인력 징발도 내군 태수의 자의에 따르는 형태는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지배 영역이 아니라고 할 순 없다. 변군이어서 현령 이하 관직은 현지인에게 주는 것이 원칙이었고, 세금 징수와 인력 징발 또한 현지인에게 전폭적으로 맡겼던 점이 다를 뿐.[44]
그리고 고구려와의 충돌이 주로 유명하지만 마한과 크게 충돌하여 목지국, 신분고국을 비롯한 마한 주류 세력에게 큰 타격을 가하고 그 결과 백제국이 별안간 급성장하는 계기를 제공한 나라 또한 이 삼국시대 위나라임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동연은 낙랑군과 대방군에게 삼한 일대의 교역권을 나눠주어서 한반도 남부에서 힘을 갖춘 국가가 나타나는 걸 방지했는데, 위나라는 이에 한술 더떠 아예 낙랑군의 교역권 자체도 마한과 진한으로 세분화하여 마한을 대놓고 견제하려는 의도를 숨기지 않았다. 마치 현대의 비양심적인 대기업이 독점 하청 기업이 장래에 경쟁 기업으로 클 수 있다고 통보도 없이 별안간 독점권을 폐지하고 발주처를 합의 없이 다각화하는 행태를 방불하게 하는데, 이걸 당하는 하청 기업이 화날 수밖에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는 마한, 특히 임진강 이북 소국들을 참을 수 없이 화나게 만들었다. 그러나 천안 청당동 목지국이 주도하는 마한은 위나라와 벌인 기리영 전투에서 패배했고, 황해도 및 경기도 동부, 강원도 서부의 적지 않은 마한 소국들이 그 결과 목지국 대신 낙랑군에게 충성하게 되면서 마한왕은 심각한 위상 실추를 경험한다.[45] 물론 목지국 마한왕이 잃어버린 리더십의 공백을 백제가 급성장해서 금방 채운 건 위나라와 목지국이 전혀 예측하지 못했던 뜻밖의 사태였으며, 그렇게 그렇게 강해진 백제가 목지국을 등지고 낙랑군에게 붙은 마한 일부 소국들을 모조리 타멸[46]하여 직접 지배령으로 편성하여 위나라 입장에선 그 전 마한보다 다루기 만만찮은 국가가 된 건 더 큰 나비효과였으나, 마한이 삼국시대 위나라의 낙랑군에게 받은 타격은 상당했다.
후대에 가져온 더 큰 나비효과는 위나라의 기리영 전투 승리 결과 위나라, 즉 낙랑군 및 대방군이 마한을 통하지 않고 진한과 직거래하게 되는 루트가 한동안 구축한 것이다. 사실 위나라가 마한의 무역 독점을 철폐하려고 마음 먹은 건 그간 진한의 실력이 마한 못지 않게 성장한 것도 큰 이유였다. 이 루트는 고구려가 서안평을 함락하여 서진의 한반도 영향력이 완전히 끝났음을 명명백백히 드러낸 4세기 초반까지 계속된다. 물론 백제가 이 시점에서는 임진강 하류 일대를 완전히 장악하고 강원도 영서 일대까지 손을 뻗쳐 대방군-진한 직교역 경로 일부가 백제의 강역 안에 들어가버리고 말았긴 하였으나, 백제왕은 마한왕을 겸하긴 했으되 서진과 활발한 문물 교류 중이었기에 서진의 비위를 거슬르면서까지 위나라가 확립한 무역 관행을 고칠 수가 없었다. 때문에 이 진한-중국 직교역 루트는 적어도 수십 년 동안은 제대로 기능하여 사로국을 비롯한 진한의 경제적, 군사적, 문화적 성장에 크게 이바지하게 된다.[47]
9. 역대 황제
<rowcolor=#ece5b6> 대수 | 초상 | 묘호 | 시호 | 성명 | 재위 | 능호 |
추존 | - | - | 고황제(高皇帝) | 조등(曺騰) | - | - |
추존 | - | - | 태황제(太皇帝) | 조숭(曺嵩) | - | - |
추존 | 태조(太祖) | 무황제(武皇帝) | 조조(曺操) | - | 고릉(高陵) | |
1 | 고조(高祖) | 문황제(文皇帝) | 조비(曺丕) | 220 ~ 226 | 수양릉(首陽陵) | |
2 | 열조(烈祖) | 명황제(明皇帝) | 조예(曺叡) | 226 ~ 239 | 고평릉(高平陵) | |
3 | - | - | 소릉여공(邵陵厲公) | 조방(曺芳) | 239 ~ 254 | - |
4 | - | - | - | 조모(曺髦) | 254 ~ 260 | - |
5 | - | - | 원황제(元皇帝) | 조환(曺奐) | 260 ~ 265년 | - |
9.1. 계보
- 남색: 황제로 즉위한 인물 또는 황제로 추존된 인물(양자로 입적된 경우 글씨가 남색)
- 분홍색: 황족 또는 혈연관계
- 회색: 불확실한 관계
- 무색: 양자
조절 | ||||
조등 | ||||
조숭 | ||||
조조 | ||||
1. 조비 | 조창 | 조우 | ||
2. 조예 | 조림 | 조해 | 5. 조환 | |
3. 조방 | 4. 조모 | 조방[48] |
10. 창작물
전통적으로 위나라는 삼국지 관련 창작물에서 최종 보스의 역할을 맡았는데, 압도적인 규모의 군사력과 인재풀, 경제력 등에서 최종 보스의 역할을 하기엔 이보다 더 좋은 세력이 없다. 특히나 위나라의 기반을 마련한 조조의 카리스마로 인해 넘사벽의 최종 보스란 기믹이 너무나 잘 어울리는 세력.[49]그렇다고 주연이 되기엔 작가의 내공을 많이 요구하는데, 우선 위나라의 기반을 마련한 조조의 삶이 너무 파란만장하다보니 조조가 죽으면 위나라 얘기가 심심해진다. 조조가 온갖 삼국의 영웅들과 싸우는 모습을 읽고 난 다음에 가끔씩 촉이나 오가 쳐들어오는 거 보면 아무래도 좀 허전하다. 이렇기에 주로 위나라 중심의 창작물에선 조조 사후에 사마의를 주연으로 대두시키는 경향이 대부분이다. 다만 이렇게 되면 필히 사마씨의 찬탈, 즉 조위의 멸망으로 이어지기에 위빠로선 허무해진다. 즉, 위나라를 주인공으로 하려면 조조라는 절대적인 카리스마의 공백을 잘 메우는 것이 중요하다.
예외적으로 군사연맹(한국명: 대군사 사마의)에서는 오로지 위나라만을 보여주며 이야기를 이끌어나가는데 성공했는데,[50] 이쪽은 사마의를 주인공으로 해서 위나라 정권 내부의 갈등을 다룬 정치극이 됨으로서 가능했다. 사마의가 주인공이며 조비 등 다른 조씨 캐릭터들도 캐릭터를 잘 다져둔 덕분에 조조가 죽은 이후에도 스토리를 알차게 꾸릴 여지가 많이 남았다. 여기에 갈등의 주요 요소가 천하통일이 아니라 위나라 내부의 정치다툼이 되다보니 전쟁이 아니더라도 살벌한 암투가 많이 나온다. 조비와 조식의 세자 경쟁이 끝났나 했더니 사마의가 구품관인법을 진군과 만들어 조씨 외척과 대치하는 등, 전쟁이 없어도 긴장감 있는 스토리를 만들고 있다. 더불어 기존에 주연급으로 주목받지 못한 양수나 정의 등의 인물들도 재조명해서 이야기를 밀도 있게 꾸몄다.[51]
사마의가 후반부 위나라의 주인공으로 부상하면서 생긴 새로운 트렌드가 있는데, 바로 찌질하고 무능한 조씨 일족.[52] 이는 사마의의 고평릉 사변을 변호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사마의가 "주인공" 급으로 격상되다 보니 그와 대립하게 된 조씨 일족이 오히려 이미지상 손해를 보게 된 것. 라이벌 제갈량이 촉나라 내부의 문제로 발목잡히는 것처럼 사마의도 압도적인 위나라의 국력과 제갈량 못지 않은 자신의 능력에도 불구하고 다른 정적 때문에 고생하는 스토리가 종종 나온다.
일례로 신삼국 같은 경우는 조진이 무능하게 나오는데, 사실 위나라가 재조명받기 전엔 오히려 사마의보다는 못해도 위나라를 떠받치는 총사령관으로서의 위엄을 보였다. 삼국지 공명전에서는 사마의에게 능력이 부족한 자신 대신 위나라를 지켜달라고 부탁하는 충신의 모습을 보이기도 했고, 오히려 위나라가 폄하되었다고 얘기되는 몇몇 연의의 판본에서는 제갈량이 조진을 경계하는 묘사가 나오는 경우도 있었다. 이와 달리 위나라 중심인 대군사 사마의에서는 사마의의 정적으로 등장하며 외척 부심을 부리며 부정적인 이미지를 보이고 있는 것은 덤. 조홍 같은 경우도 대군사 사마의에선 굉장히 무개념한 인간으로 묘사되며 진삼국무쌍의 경우 진나라 시나리오가 추가된 작품들에서는 조상 같은 캐릭터가 찌질하게 나온다.
이런 작품들에선 기존의 '제갈량의 맞수는 오직 사마의'라는 인식이 더 강해져서 사마의를 제외한 조씨 일족은 제갈량에게 영혼까지 털리는 주제에 사마의가 어떻게 해 보려고 하면 발목을 잡는 모습도 보인다. 특히나 대군사 사마의의 경우 후반에 선악대비가 심해지며 악역으로 대두된 것이 조홍과 조진으로 치졸하고 무식한 방식을 쓰는지라 1부 초반에 가문을 살리고 흠모하는 조식을 위해 음모를 꾸미는 복잡한 이미지의 양수와 크게 비교된다.[53]
이외의 난점은 아무래도 기록이 풍부하다 보니 위군 장수들이 능력이 대단하다는 것은 알겠는데, 기록이 거의 다 전공 관련이다 보니 재밌는 캐릭터를 만들려면 작가의 상상력이 좀 뛰어나야 한다. 그렇다보니 정사 삼국지로 위나라 중심으로 스토리를 짜도 은근슬쩍 삼국지연의의 캐릭터성을 넣는 경우가 종종 있으며(특히 하후돈), 굳이 역사 고증을 크게 신경쓰지 않아도 되는 경우는 진삼국무쌍 시리즈의 장합같이 역사적 배경과는 전혀 다른 캐릭터가 되는 경우도 있다. 즉, 주인공 세력으로 쓰려면 의외로 난이도가 좀 있는 편이다. 열전에서 성격의 장단점이 잘 드러나거나 임팩트 있는 활약이 종종 보이는 촉/오의 인물들과는 달리 위나라 측은 대부분이 모범생에 인품이 훌륭하고 받은 임무를 잘 시행하며 잘 싸웠다는 게 대부분이었다. 그나마 장료는 합비공방전에서 보여준 무쌍이나 항장이었다가 위나라의 명장으로 거듭나는 과정의 스토리가 있으며, 장합은 커리어의 굴곡이 뚜렷한 편.
삼국지 시리즈에선 최강의 세력으로 등장해왔다. 조조부터가 총합 능력치 1위를 항상 먹는 먼치킨 군주인데다가 인재풀도 두텁다 보니 가장 약한 초반 시나리오에서도 다른 약소 세력과 비교하면 플레이하기 쉽고, 높은 난이도에서 인공지능이 플레이하면 순식간에 다른 세력들을 처묵하며 비대해지는 세력을 본다. 반란군과 적대 이민족 개념이 없는 삼국지 13에선 다른 세력이 홀로 상대하기 힘들다. 아직 조위가 정식으로 건국된 후의 시나리오는 없지만, 사실상 조위의 기반이 만들어진 것이나 다름없는 조조의 하북 차지 후의 시나리오에선 정말 답이 없다. 내부의 걱정거리도 없겠다 조조가 모든 하북과 중원에 빽빽히 밀집해 있는 도시들의 병력을 전부 다른 세력 침공에 동원할 수 있기에 동원력부터가 다른 세력들과 비교가 되지 않는다.
SD건담 삼국전에서는 '기가'라는 이름으로 나오는데 조비 건담이 신하들에게 위나라의 건국을 선포한다.
보통 위나라를 주인공이나 주역으로 하면 대개 현실주의적이고 냉철한 다크 히어로 내지 안티 히어로처럼 묘사하는 경우도 있으며, 그 미화 정도가 심하면 오히려 반감을 사기도 한다[54]. 다만 특이하게도 위나라 중심이면서도 주인공을 극딜하는 경우도 있다. 일례로 대군사 사마의는 1부에서는 사마의를 미화하나 했더니 2부에서는 후반으로 갈수록 잔혹해지는 사마의를 보여주며 보기에 따라선 사마의의 처세술도 기회주의자, 위선자로 볼수 있는 여지를 남겨두었다. 더불어 왕 샤오레이의 소설 "삼국지 조조전"의 경우 백성들의 힘든 삶을 보여주며 이를 고치려는 조조의 모습도 보여주지만 조조가 점점 권력을 탐하며 비열하게 변해가는 모습도 보여준다.
코에이 사의 삼국지 시리즈, 진삼국무쌍 시리즈 등의 게임에서는 상징색이 파란색으로 나오지만, 요코야마 미츠테루 삼국지 등의 작품에서는 빨간색으로 나오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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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213년에 조조가 후한의 위공으로 책봉되어 봉국 형태로 기반이 생겨났으며, 216년에 조조가 위왕으로 책봉 되었다가 220년에 조비가 한나라 헌제로부터 제위를 선양받으면서 정식으로 위나라가 건국되었다.[2] 이 시대의 언어는 중고한어로 넘어가는 과도기에 있었다. 상고한어에 속하는 시대긴 하지만 후한 중국어(Eastern Han Chinese)라는 용어로 따로 분류하기도 한다.[3] 지도에서 보다시피 북서쪽에 아주 살짝 걸쳐진 수준일 뿐이라서 큰 의미는 없다.[4] 고구려와의 전쟁에서 한반도 일부를 차지하기도 했다.[5] 위(魏)나라뿐 아니라 춘추전국시대에 위(衛)나라도 있어서 이 나라와도 혼동이 오는 경우도 있다. 이 두 나라는 현대 한국어뿐만 아니라 표준 중국어로도 발음이 같다.[6] 제갈공명의 천하삼분지계가 금세 무력화된 것도 이 때문이다. 천하삼분지계는 세 나라 가운데 하나가 10의 힘을 가지면, 나머지 5의 힘을 가진 나라 둘이서 연합하여 10대 10의 구도로 견제하며 균형을 유지한다는 개념이다.[7] 다만 이건 촉과 오도 마찬가지였다. 아니, 오히려 미개발 지역이 많은 촉과 오에 비해서 어쨌든 개발된 화북 전역을 먹고 있는 위나라가 아무리 통제력이 약해졌어도 이들보다 국력이 강한 게 정상이다. 당장에 촉의 4배, 오의 2배에 달하는 인구수를 가졌다고 했는데 그럼 촉:오:위=1:2:4로 위나라의 인구가 촉과 오를 합친것보다도 많다. 물론 이걸로 7, 8할을 운운하는건 불가능하고 촉과 오는 인구수가 적은 대신 촉은 기반이 된 익주 지역은 유비의 원정만 빼면 전란에 휘말리지 않았고 오의 양주와 형주 지역의 경우 양주는 손책 시기에 빠르게 손씨가문이 장악해나갔고 형주는 유표 사후 주인이 유종-조조-유비-손권으로 이어지는 혼란기가 찾아오긴 했지만 그래도 유표 생전에는 나름 평온했다.[8] 최대로 잡는 학자도 600만을 넘지 않는다. 삼국시대 실질적 행정능력으로 통제 가능한 인구는 위, 촉, 오를 도합하여 900만 명 수준이었다.[9] 비교를 위해 언급하면 삼국과 거의 비슷한 지역을 지배했던 후한의 인구가 조조가 태어날 때쯤에 5600만 명이 넘었다. 한 세대 만에 인구가 10분의 1 수준으로 줄어들었다는 건데, 서주대학살이나 계속된 전쟁을 감안해도 몇 십 년 만에 인구 90%가 죽었다는 건 말이 안된다. 실제로 사망자가 그만큼 나온 게 아니라, 난세로 인해 중앙 정부의 힘이 그만큼 약해졌고, 세금을 바치거나 군역을 지는 인구가 그만큼 줄어들었단 의미라고 봐야할 것이다. 실제로 조위에서 서진으로 넘어가자 인구가 갑자기 1600만 명 이상으로 폭증하는데, 당연히 이는 중앙정부가 통제하는 인구가 그만큼 늘었단 소리다. 앞서 언급된 후한의 인구, 후한보다 약간 많아 5700만 명대였던 전한, 수나라, 당나라 시절에도 전성기 때 4,5천만 이상이었던 것을 감안하면 서진조차도 중국의 패권 국가들 중에서는 국력이 하위권에 속하고, 조위는 거의 최약체 수준이다. 고구려의 경우 구당서에 69만 7000호란 기록이 있고, 호구수로만 따지면 오히려 66만 호란 기록이 있는 조위보다 많다. 어찌됐건 숫자만 보면 전성기 고구려도 전혀 꿀릴 게 없는 국력이란 것. 물론 현실적으로 고구려의 전성기를 연 광개토대왕/장수왕이 태어나기도 100년 전이었기 때문에 위나라 관구검에게 국토가 침범당하는 수모를 겪기도 했다.[10] 실제로 둘은 확고한 동맹까지는 아니고 이릉대전처럼 싸우기도 했지만 그 외 기간에는 한쪽이 치고 올라가면 위나라가 한 쪽 전선에 집중하지 못하도록 비슷한 타이밍에 같이 공격해주거나, 적어도 서로 싸우는 건 자제하는 사실상의 불가침조약을 맺어 협력했다.[11] 실제로 총 지휘관이 손권에서 손권보단 군재가 위인 제갈각으로 바뀌자 손오는 대놓고 조위와 회전을 시도하려고 했다. 물론 조위가 이런 전략에 넘어가질 않아 제갈각 역시 결과는 손권과 같았다.[12] 조위의 인구가 삼국 중 가장 많기는 했지만 문제는 국경선 전체가 전선이다. 이는 최약체이기는 하나 현지 이민족과 그나마 잘 지낸 편인 촉나라나 현지의 이민족과 사이 안 좋기는 그래도 마찬가지지만 흉노, 선비족, 고구려, 강족 정도의 수준의 규모는 되지 못한 오나라와는 차이점이다. 이런 상황이니 인구가 많아도 지켜야 할 전선이 타국보다 넓은 위나라는 많은 인구의 장점을 살리기 어려웠을 것이다. 물론 이런 이민족들을 어느정도 통제하는 게 가능하긴 했는데 고구려의 사례에서 보듯 이민족이라고 조위의 말을 잘 들은 건 아니었다.[13] 게다가 이 이민족들은 앞서 말했듯 흉노, 강, 선비 등 촉이나 오가 상대했던 이민족들과는 다르게 굉장히 강한 이들이었다. 수십년 뒤 오호십육국 시대를 열어버리는 이들이 그들이며 흉노의 경우 이 시기를 기준으로는 굉장히 옛날 일이지만 한나라를 상대로 우위를 점했던 적도 있었다.[14] 특히 양번 공방전 당시 관우에 의해 양번이 함락 직전까지 몰리자 멘붕에 빠진 조조가 회남 전선의 총사령관인 장료까지 차출했을 때가 정말 위험한 상황이었다. 손권과 여몽이 결과적으로 조조에게 힘을 실어주는 선택을 해서 그랬지, 이들이 그 공백을 틈타 그대로 회남을 뚫었으면 조조는 관우가 양번을 뚫었을 때보다 더 큰 위기에 직면하게 된다. 양번과 허도 사이에는 남양 땅이라도 가로막고 있지만 회남이 뚫려버리면 조조의 본거지인 허도가 위험하게 된다. 훗날 일이지만 제갈탄이 봉기해 회남을 장악하고 손오까지 끌어들이자 조위의 권력자인 사마소는 지체없이 대촉 전선의 군대까지 차출해 20만의 물량을 쏟아부어 즉각 제갈탄의 난을 진압한다. 그만큼 중원 땅을 방어하는 데 있어서 회남이 중요하기 때문이었다.[15] 대체적으로 강남에서 시작한 국가는 결국 하북에서 일어난 국가에게 먹히는 패턴이 반복되었고 그나마 강남에서 시작한 세력이 천하통일을 한 것도 대체적으로는 하북이고 강남이고 쫙 갈라진 채 이합집산을 반복하던 때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근본적으로 강남이 강북을 넘어서는 경제력을 갖춘 것도 무려 송나라 시대에 이르러서다. 육조시대 말 진나라만 해도 인구가 800만 명 남짓이었는데 북쪽의 수나라는 무려 4,000만 명이었으니 결국 하북의 왕조를 격파하지 못하면 자기가 멸망하는 건 당시 강남 왕조들의 숙명이었다.[16] 물론 이렇게 봐도 과대평가인 게 당연히 각 주의 경제력이나 이를 기반으로 한 국력이 대등한 게 아니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파촉지방을 통째로 차지하고 개발도가 높은 익주와 유독 인구가 적은 병주는 비교도 안 된다. 위나라가 보유한 중원의 중심에 있는 주들은 인구밀도도 높고 풍요롭긴 하지만 면적이 작기 때문에 넓은 익주, 형주보다 인구가 많은 주는 없었다.[17] 익주는 영토가 비옥하고 경제력이 좋은 지역이었지만 후한의 지배자들은 이 지역을 완전히 통치하진 못했다. 뛰어난 인재였던 유비가 익주를 지배한 이후 삼국시대 최고의 행정가인 제갈량이 국가체계를 갖추고, 주변 이민족들과 지배/동맹 체제를 구축하고 익주 지역의 인구와 거기서 나오는 부를 국가에 편입시켰기 때문에 (물론 나라 자체가 작으므로 손오나 조위에 비해 약하긴 하지만) 나라 규모에 비해 상당히 강했던 국력을 확보한 것이다. 이는 익주를 온전히 지배했던 유언이 훗날 촉한만큼의 국력이나 군사력을 보유하지 못했던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심지어 유언의 후계자 유장은 익주를 다스리면서도 고작 한중 지역만 세력권에 두고 있던 장로에게 밀려 유비에게 SOS를 치기도 했다. 즉 '후한 왕조가 익주를 지배하면서 추가된 국력'은 실제 익주의 생산량이나 인구에 비해 상당히 작은 수준이었다.[18] 실제 역사는 삼국지 게임이 아니다. 게임에서야 어떤 지역을 군대로 쳐서 점령하면 그 지역의 인구와 경제력 등 모든 것이 내 것이 되지만, 실제 역사에서는 주요 도시와 군현 등을 군사적으로 굴복시킨 후 그 지역의 관을 재구성하고 해당지역에 거주하는 사람들을 조사 후 세금을 메기고 군역을 지우는 등 복잡한 과정이 필요하다. 즉, 지배 후 그 지역의 경제력과 인구를 온전히 활용하는 데는 시간이 필요하다.[19] 여담으로 제갈량이 (소설과 달리) 신묘한 계책이나 엄청난 군사적 성과까진 없는데도 사기캐 취급을 받는 게 이릉대전 대패 이후 (즉 촉한의 인프라와 경제력이 어마어마한 손실을 받은 이후) 불과 몇 년 만에 북벌이 가능할 정도로 나라가 회복되었으며 소국이 대국을 치는 북벌기간 도중 경제적 번영과 삼국 중 가장 발전된 법제정비, 성공적인 화폐 개혁, 이민족 연계와 한중 개발까지 이뤄냈다. 즉 현재로 따지면 경제, 입법 및 사법, 금융, 외교, 행정까지 완벽하게 이뤄낸 것이다. 물론 익주가 보통 주가 아니긴 하지만 어쨌거나 한 주 밖에 차지하지 못한 제갈량이 위나라를 위협할 수 있었던 것도, 위가 지나치게 긴 전선 때문에 약화된 것도 크지만 저런 식으로 그 지역에 대한 개발과 제도 정비를 통해 최대한 효율적으로 국가를 운영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괜히 제갈량이 높은 평가를 받는 게 아니다.[20] 일본의 막부 정권이 교토의 천황 조정과는 별도의 정부를 구성한 것을 생각하면 된다.[21] 조모가 시해되는 데 큰 공을 세운 왕침과 함께 서진의 예를 제정한 순욱의 아들 순의, 조위를 무너뜨리는 데 가장 큰 공을 세운 가규의 아들 가충, 그 외 진교의 아들 진건, 악진의 아들 악침, 배잠의 아들 배수, 왕창의 아들 왕혼 등 많은 개국 공신 후손들이 이때 조씨를 버렸다. 이들은 순욱을 주축으로 한 영천 호족 청류파 집단을 중심으로 하고 있었는데, 순욱이 조조에게 버림받은 만큼 조씨 일가의 힘이 약해졌을 때 이들이 조씨를 배반하는 것도 어찌보면 사필귀정이다.[22] 정확하게는 등애가 멸망시켰다.[23] 촉한을 멸망시킨 공적으로 위세를 올려서 선양을 받을 분위기를 조성했다고 할 수 있다.[24] 그나마 얌전히 퇴위를 한 조방과 조환은 후한의 헌제처럼 서진 조정으로부터 나름 대우를 받으며 안락하게 살다가 천수를 다했지만 조모는 대놓고 신하들에게 시해당하여 이는 훗날 서진 왕조의 대의명분 상실과 이후에 벌어질 남북조시대의 선양 피바람의 시초가 되었다.[25] 흥미롭게도 후한의 마지막 황제 헌제가 황제가 되기 전 작위가 진류왕이었고 조위의 마지막 황제인 조환이 폐위 후 받은 작위가 진류왕이었다.[26] 이것 이외에 그나마 세계사 시간에 언급해볼 만한 삼국시대의 내용은 황건적의 난과 장로의 오두미교를 중심으로 한 도교문화의 발달, 손오 정권에 의한 남방 개척, 최초로 호 단위로 거둔 것 정도를 꼽아볼 수 있다. 오히려 삼국지의 내용은 역사 시간보다는 한국 고전문학이나 한시, 고사성어 등에 간간히 인용되어서 공부하게 될 때가 더 많을 정도.[27] 위진남북조사, 이공범.[28] 사실 삼국지에서 등장하는 인물 대부분이 다 이렇다. 유비 세력도 미축 같은 경우는 서주 출신 호족이었다. 이러다 보니 위오촉 전부 황제를 중심으로 한 중앙정부가 있고 그 안에 호족 출신 신하들이 있는 구도였다. 이런 원인은 한나라의 체제와 후한말에 있는데 한나라의 체제는 황제, 외척, 환관으로 구성된 중앙권력과 호족 출신 사대부 관료로 구성된 지방권력이 있는데 문제는 후한 말에 들어 외척과 환관의 대립이 격해지다가 끝내 환관이 승리하고 외척은 호족출신 사대부, 즉 청류파와 협조적이었지만 환관은 그렇지 않았기에 당고의 금으로 그들의 영향력을 막아버렸다. 이렇게 중앙권력에서 배제당하게 되자 호족들은 자기 지역에서의 영향력을 강화하게 되고 황건적의 난, 십상시의 난, 삼보의 난 등으로 거의 중앙정부가 붕괴되다시피하자 이렇게 지역에서의 영향력을 강화시킨 호족들이 군벌화 혹은 그들의 휘하에 들어가게 되었다. 조조나 손견-손책-손권 라인도 따지고 보면 비슷하다. 이렇게 놓고 보면 위오촉을 세운 조조, 유비, 손권은 이 군벌들의 난립 끝에 살아남은 최종 승리자인 셈.[29] 사실 삼국시대의 세 나라는 모두 호족의 영향으로부터 벗어나 중앙집권체제를 공고히 하려 노력했지만 결국 세 나라 모두 멸망할 때까지 호족의 영향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30] 217년에야 공식적으로 조비가 후계자로 정해졌는데 이 때 당시 조조 나이는 62세이며 죽기 불과 3년 전이다. 유비가 한중왕을 칭한 219년에 유선을 세자로 세웠고 이 때 유비 나이가 57세였고 손권은 장남 손등을 221년에 세자로 세웠는데 이 때 손권의 나이는 39세였다. 유비야 뒤늦게 기반을 마련했으니 공식적인 후계자 선정은 늦어졌다고 할 수 있고 손권 또한 오왕에 오르고 얼마 안 가서 후계자를 정한 반면 조조는 위왕이 되고도 1년이 지나서야 후계자를 정한 거다. 그것도 자기 나이가 60이 넘어 당시 기준으로 내일 갑자기 쓰러져 죽어도 이상할 거 없는 나이임에도 말이다.[31] 조조 세력의 중심들이 한창 젊을 때 환관과 외척에 의해 나라가 패망한 경험을 겪은 게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32] 조상이 왜 중서령을 안 거쳤느냐 하면 손자, 유방 일파가 완전히 자기 사람이 아니라 봤기 때문일 것이다.[33] 사실 중요 사대부에 대한 처벌만 기록되어 있으며 '환관 따위 처벌에 지면을 할애하지는 않았을' 가능성도 있다.[34] 영토가 북쪽에 위치하여 북방의 유목 민족들과 거래가 많았다. 그래서 그 유목민들을 용병으로 고용하여 조위는 막강한 기병 부대를 보유하고 있었다.[35] 대표적 예로 황권의 아들인 황숭이 있다.[36] 오와 촉은 물론 이민족들과 고구려에게도 압도적인 강국이라서 그들도 위와 맞설 생각을 함부로 하지 못했다.[37] 이게 반영이 되지 않은 삼국지 13처럼 반란군이나 이민족이 아예 등장하지 않는 창작물에선 정말 압도적이다.[38] 건국 기반을 마련하는 초기에 특히 변수로 작용한 것이 반란이었는데, 조조가 당대 통치자치고도 정복활동 중 지나치게 잔인한 행보를 보이며 민심을 많이 잃은 데다가 그에 대항하는 촉한이 (당시 기준) 명분 쪽에서 많이 앞섰기에 촉한 쪽이 위를 공격하면 유독 촉한 쪽에 호응하는 반란이 많았다. 관우의 북벌 당시 그에게 동조하는 무리들이 허도 근처에까지 있어 천하를 진동시켰다는 기록도 있고, 제갈량의 1차 북벌 당시에도 북진을 시작하자마자 천수, 안정, 남안이 촉한에 호응해 넘어갔다. 가정전투 전까지 촉한은 그야말로 파죽지세로 세력을 넓혀갔는데, 지휘관의 역량도 있겠지만 위나라에서 촉한에 동조하는 세력이 그만큼 많았다는 얘기다. 다만 시간이 지나고 나라가 안정될수록 이런 반란의 비중은 줄어들게 된다. 마속의 가정 전투 패배가 뼈아픈 또 하나의 이유가 촉한에게 동조하는 세력이 적지 않던 초창기에 서쪽 지역을 확실히 점령하고 압박할 수 있었고, 이 승리로 위나라 내부를 더 흔들 수 있었기 때문이다.[39] 현재는 장강 이남은 2-3모작을 하는데다가, 기후도 훨씬 좋기 때문에 이쪽의 농업 생산량이 훨씬 많다. 그러나 삼국시대에 오나라가 강남 개척을 시작하기 전에는 장강 이남의 상당수가 밀림으로 뒤덮여 있었고, 현재 중국 최고의 경제력을 자랑하는 광둥성과 홍콩은 아예 남만의 영역이었다.[40] 한나라 시절 소금은 국가의 전매품이었기 때문에 국가 재정과 깊이 연관되어 있었다.[41] 한대의 인두세는 어른 기준으로 1년에 120전이었다. 아이면 이보다 적은 액수를 냈고. 징세 대상의 연령에 따라 개인 단위로 세금을 받는 건 인구 파악이 철저하게 이루어져야 가능한 조세 방식. 즉 다 깨강정 나서 인구이동이 혼란하던 후한 말엔 어림도 없다.[42] 일설에 따르면 10만의 오기(오탈자)라고도 한다. 기록에 따르면 위군은 1차 전투에서 3,000명 + 2차 전투에서 3,000명으로 6,000명이 죽었는데, 10,000명명 중 6,000명이 죽으면 사실상 전투불능이라, 25,000명의 대군을 상대해 1만 8천을 죽일 수는 없기 때문에, 10만 설을 지지하는 학자도 있다.[43] 이 지도의 원본은 중국어 위키백과에서 온 것이다.[44] 동북아역사재단 발간 전통시대 동아시아의 외교와 변경기구 서적 참조[45] 소위 한반도 말갈로도 전해지는 '위말갈'이 바로 이 기리영 전투의 결과로 위나라의 강대한 힘을 체감하고 목지국의 리더십에서 이탈한 일부 마한 소국들이다. 한국군사사 제1권 참조[46] 이상하게도 3세기 중후반 시절에 위나라가 이 소국들을 거의 제대로 지원해주지 못했고, 오히려 백제가 강해진 기정 사실을 인정하여 타협하려는 행동을 보인다. 원래라면 자국 보호 아래 있는 옛 마한 소국들을 보호해줘야 정상적인 데 말이다. 이때는 잠깐 침묵해 있던 고구려가 다시 기지개를 편데다 북방, 촉한, 오 등의 전장이 다시 상황이 나빠지기 시작한 게 이유로 생각된다.[47] 이후 신라는 이백 년이나 지나서야 한강 유역을 손에 넣어 백제와 고구려에게 가로막힌 중국과 직거래하는 경로를 뚫게 된다.[48] 위씨춘추나 세설신어에는 조방을 조해의 아들이라 기록했으나 신빙성이 부족하다.[49] 특히 조조는 실존인물이나 연의상의 인물이나 도덕적으로 문제시되는 행동을 수차례 저지른 반면, 능력치가 너무나도 뛰어나기 때문에 '사악하지만 매우 뛰어나고 강력한' 최종보스 기믹에 그야말로 딱이다. 실제로 삼국지연의도 그런 식으로 그려진 작품인데, 조조를 부정적으로 그렸다는 오해와 반대로 실제 역사를 많이 참고해서 긍정적인 면모도 넣으며 악역으로서 조조를 입체적으로 그려낸 작품이다. 당시 극이나 설화 속에서 조조는 1차원적인 악당에 불과할 정도로 대중들 사이에서 조조의 이미지는 나빴다. 연극배우가 그저 조조를 연기했을 뿐인데 성난 관중들에게 살해당하는 막장까지 벌어질 정도로 조조 그 자체를 대중들이 어떻게 여겼는지 알 수 있는 대표적인 예가 있다.[50] 전쟁은 1부 내내 나오지도 않으며, 심지어는 관우는 배역조차 없다.[51] 다만 군사연맹도 조조가 죽자마자 드라마가 사마의가 주인공임에도 힘이 빠져버린다.[52] 정확히는 조조와 그 아들들을 제외한 조씨 일족.[53] 그나마 조진은 2부에서 제갈량에게 농락당한 뒤 사마의에게 군권을 맡기는 모습을 보인다. 그래도 사마의를 견제해야 된다고 조예에게 얘기하기는 하지만.[54] 진삼국무쌍 8이나 창천항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