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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8000><colcolor=#ece5b6> 초 楚 | Chu Dynasty | ||
기원전 206년 ~ 기원전 202년 | ||
<rowcolor=#ece5b6> 성립 이전 | 멸망 | |
후초 | 전한 | |
별칭 | 초(楚), 서초(西楚) | |
위치 | 중국 화둥(현 장쑤성 안후이성 저장성 일대 ) | |
수도 | 팽성(彭城) | |
민족 | 화하족[1] | |
언어 | 상고 중국어 | |
문자 | 한자 | |
종교 | 중국 토속 종교 | |
화폐 | 불명 | |
정치체계 | 전제군주제 | |
국가원수 | 패왕[2] | |
국성 | 항(項) | |
주요 군주 | 항우 (기원전 206년 2월 ~ 기원전 202년 12월) | |
주요 재상 | 범증 (기원전 278년? ~ 기원전 204년) | |
현재 국가 | [[중국| ]][[틀:국기| ]][[틀:국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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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항우의 근거지이자 서초의 수도인 팽성의 위치. |
중국 초한쟁패기 한나라의 유방과 천하를 다툰 항우가 건국한 고대 국가. 수도는 팽성. 공식적으로 초나라의 계승을 표방하였다. 기원전 202년 해하 전투에서 한나라를 건국한 유방에 의해 최종적으로 패배하고 항우가 자결하면서 멸망하였다.
2. 국호
공식적으로 초나라를 계승하였다고 스스로 표방하였으므로 정식 국호는 단지 초(楚)이다. 다만 중국사에서 초(楚)라는 국호를 쓴 나라가 많았으므로[3], 구분하고자 서초(西楚)라고 부른다.3. 역사
3.1. 연표
기원전 207년 | 항우가 후초의 상장군[4]으로 임명됨 / 거록대전 |
기원전 206년 | 항우 패왕 즉위 / 항우의 18제후왕 분봉 / 서초 건국 |
기원전 205년 | 팽성대전 |
기원전 204년 | 형양전투 |
기원전 203년 | 광무 대치 |
기원전 202년 | 고릉 전투 해하 전투 / 항우 사망, 멸망 |
3.2. 분봉 조치
초반, 항우가 18제후왕 분봉 결정을 내리자 수많은 제후들의 반발이 있었다. 특히 한왕 유방의 경우, 초의제가 먼저 진나라의 수도 함양에 입성하는 자가 관중왕이 되라 하였는데, 항우는 이를 무시하고 힘으로 유방을 몰아내 서초를 건국하고 스스로 서초패왕[5]을 칭했다. 그리고 파촉의 제후로 밀려난 유방은 이를 부득부득 갈며 복수를 준비한다.3.3. 유방의 삼진 평정
한편 복수할 준비를 마친 유방은 그 동안 양성했던 군사를 바탕으로 항우에게 대적하기 시작하였다. 기원전 206년, 한나라는 관중으로 출병해, 항우가 그 지역에 분봉한 세 왕국, 이른바 삼진(三秦)을 평정했다. 《사기》와 《한서》에서는 이 일을 돌아와 삼진을 평정했다.하여 환정삼진(還定三秦)이라고 일컫는다.3.3.1. 전개 과정
처음 한군이 진격할 때 옹나라가 진격을 막아서 유방은 돌아가려 했는데, 당시 알자(謁者) 조연(趙衍)이 다른 길을 찾도록 진언해 지날 수 있었다.한왕 원년(기원전 206년) 8월, 드디어 한신의 계책에 따라 출병해, 조참을 장군으로 삼고 옹나라의 하변(下辨)현과 고도(故道)현을 습격했다. 한편 옹나라 서(西)현승(丞)이 남하해, 한나라에서 별도로 파견한 장수 번쾌의 군대와 백수에서 만나 번쾌가 서현승을 격파했다. 이후 번쾌의 별군과 옹나라의 경거기(輕車騎) 부대가 옹현 남쪽에서 맞붙어 또 번쾌가 이겼다. 옹나라 왕 장한은 한나라 군대가 고도현을 습격했다는 소식을 듣고 한군을 진창현에서 요격했고, 한군이 이겨 장한은 달아났다. 조참은 태(斄)현을 공격했고, 옹현을 함락한 번쾌도 같이 태현을 공격해 성에 가장 먼저 올라갔다. 이후 호치현에서 다시 양군이 맞붙었는데, 한군은 조참이 장수가 되었고 옹군은 옹왕 외에 옹왕의 아우 장평(章平)의 군대까지 같이 있었다. 이 싸움에서 한군에서는 주발이 가장 활약했고, 옹군이 또 져서 장한은 옹나라의 서울 폐구로 달아났다. 장평 역시 호치 남쪽에서 조참에게 격파당했다. 조참은 호치를 포위해 양향을 획득했고, 삼진의 군대를 양향 동쪽과 고력(高櫟)에서 연이어 격파했다. 그리고 다시 장평이 지키는 호치를 공격하니, 번쾌가 가장 먼저 성에 올라갔고 장평은 달아났으며 호치는 함락됐다. 한나라 왕 유방은 옹나라를 평정하자, 장한이 농성하는 폐구를 포위하는 한편 여러 장수들에게 삼진의 나머지 지역을 석권하게 하고 자신은 함양에 이르렀다. 함양에서 옹나라의 조분(趙賁)과 내사 보(保)를 쳤고, 조참과 번쾌도 참여했으나 여기에서는 주발이 가장 활약했다. 이후 주발은 북으로 가 칠(漆)현을 치고 장평과 요앙(姚卬)을 쳤고, 서쪽으로 가 견(汧)현을 함락했고, 돌아와서 미(郿)현과 빈양(頻陽)현을 함락했다. 번쾌도 미현을 함락했고, 또 괴리(槐里)현과 유중(柳中)현과 함양현을 함락했다. 조참은 경릉(景陵)을 20여 일 간 지켰는데, 장평이 삼진의 군대를 거느리고 와서 조참을 쳤으나 패퇴했다. 조참은 장군이 돼 폐구를 포위하고, 중위가 돼 유방의 본대에 합류해 임진으로 갔다.
한왕 2년(기원전 206년) 10월 유방은 섬현에 이르렀고, 마침 진여의 공격을 받아 나라를 잃은 상산왕 장이를 받아들였다.
8월, 관영은 새나라의 서울 약양(櫟陽)을 공격해 함락시켰고, 새나라 왕 사마흔은 항복했다. 한나라는 새나라를 없애고 그 영토에 하상군과 위남군을 설치했다. 관영은 이후 폐구 포위에도 합류했으나, 얼마 못 가 유방의 본대에 합류했다. 8월, 정복(丁復)이 별군을 이끌고 주진(朱軫)이 기병대를 이끌고 적나라를 치니, 적나라 왕 동예도 항복했다. 한나라는 적나라를 없애고 그 땅에 적나라 분봉 이전처럼 상군을 설치했다.
11월, 한나라 기도위 근흡이 옹나라의 농서에서 장평을 격파하고, 농서 6현을 평정했다. 12월, 한나라 장군·농서도위 역상이 옹나라의 북지군과 상군을 함락했다. 역상은 오지(烏氏)에서 옹나라 장군을 무찔렀고, 순읍(栒邑)에서는 주유(周類)의 군대를, 이양(泥陽)에서는 소장(蘇駔)의 군대를 격파했다.
한왕 2년(기원전 205년) 정월에는 장평을 사로잡았다.
승상 소하는 파촉을 안정시키고 식량을 공급했다.
최종적으로 옹나라가 멸망한 것은 4월 팽성대전에서 한나라가 패배한 이후로, 약양으로 돌아온 유방은 6월 폐구를 수공으로 함락했다. 이 수공에서는 번쾌의 공이 으뜸이었다. 이때 장한은 자결했다.
3.4. 팽성대전
3.4.1. 발단
당시 부하 한신의 지휘로 관중 지방의 3왕을 쓰러뜨린 한왕 유방은 각지의 9제후왕들을 불러 모아 60만에 이르는 군사를 거느리고 초나라를 치기위한 종장이 되었다. 한편 항우는 제나라를 공격하다가 성양에서 뜻밖의 난관에 부딪혀 고전하였다.유방이 군사를 일으킬 무렵 초왕 항우는 자신의 눈에 거슬리던 제나라를 공격하고 그 잔당을 정리하던 중이었다. 유방은 그 사이에 60만 대군을 이끌고 초의 수도 팽성을 기습 공격했다. 팽성을 지키던 장수 팽월은 항복했으며 다른 초나라 장수들은 성에서 진귀한 재보와 항씨 족중, 미녀 등을 모두 이끌고 제나라로 도망쳤고 그로 인해 팽성은 쉽게 유방에게 함락된다.
제나라를 공격하던 항우는 도망쳐 오던 자신의 부하들에게 격분하고 정공, 정도에서 용저와 항타를 불러 유방을 치기로 마음먹었다. 당시 항우는 단지 강동에서 징집한 3만 강동 자제의 군사가 전부였지만 유방은 60만 대군이었다. 그러나 항우는 천리길을 달려 조용히 와서, 술에 취해 흥청거리느라 적병의 공격에도 대응을 못하고 있던 유방의 군사를 궤멸시켰다.
이외에도 호릉에서는 번쾌가 3만의 군대를, 팽성 외성인 소성에서는 조참, 관영, 위표가 10만 군사를 이끌고 지키고 있었고 북쪽에 군사 10만을 풀어놓고 동쪽에 약탈하러간 군사가 10만이 크게 넘고 팽성 수비 병력은 10만을 약간 넘어섰다.
3.4.2. 파란의 대승리
성양을 공격하던 항우는 노현(魯縣)[6]을 지나 호릉(胡陵)[7]을 거쳐 새벽 무렵에는 팽성의 서쪽인 소현에 이르렀다. 그리고 이곳에서부터 계속해서 동쪽으로 진격하면서, 눈에 보이는 한군을 개미 잡아 죽이듯이 박살내었다.마침내 항우의 군대는 팽성에 이르렀고, 정오가 될 즈음에는 한군을 완전히 개박살내버렸다. 완전히 혼란 상태에 빠진 한군은 동쪽으로 앞서거니 뒷서거니 하면서 달아났고, 팽성의 동쪽에 있는 곡수(穀水)와 사수(泗水) 부근으로 밀려나고 말았다. 항우는 이들을 끝까지 추격하여 무참하게 짓밞아 버렸고, 이 싸움으로 한군 10만 명이 떼죽음을 당했다.
동쪽이 아닌 남쪽으로 달아난 한군도 절망적인 상황에 빠진 것과 마찬가지였다. 영벽(靈壁)[8]에 이르기까지 초군은 한군을 사냥감처럼 추격하였고, 이 과정에서 셀 수도 없는 한군이 무참하게 짓이겨졌다. 게다가 영벽 동쪽에 있는 수수(睢水) 강안에 이르자, 완전히 몰린 한군의 병사들은 아예 수수에 몸을 던지는 병사들까지 있었다. 이 싸움으로 또 다시 한군 10만 명이 죽었다. 그리고 수수는 죽은 한군의 시체로 흐르지도 못할 지경이 되었다.
3.4.3. 결과
하지만 도주에 성공한 유방은 형양에서 대기중이던 여택의 군사와 합류해 방어선을 구축했고, 동시에 삐딱선을 타고 있던 영포를 부채질해 반란을 일으키도록 만들어 항우가 추격보다 본토 방어를 우선하게 함으로써 추격의 기세를 느슨하게 만들었다. 그러는 사이 사방으로 흩어졌던 한군이 형양으로 몰려들어 안읍 전투에서 초나라 추격군을 대파했고, 영포가 완전히 쫓겨나기까지의 반년 간 항우에게로 이반한 위표 등의 제후와 장수들을 짓밟아놓고 형양에 우주방어 태세를 갖춰놓았다.3.5. 멸망
팽성대전에서 한나라를 멸할 절호의 기회를 놓친 항우는 이후로 다시는 기회를 잡을 수 없었다. 유방은 형양과 성고에서 대항하고, 관중의 곡창지대를 바탕으로 항전하니 계속해서 초나라는 수세에 몰렸다. 이런 상황이 계속되다가 결국 해하 전투에서 패배, 패왕 항우는 죽음을 맞이하며 서초는 5년간의 짧은 역사를 끝내고 멸망한다.3.6. 멸망 이후 왕실
항우 사후 초나라땅이 모두 항복했지만, 정작 한때 항우의 봉토였던 노현 땅의 사람들이 항우와의 의리를 지키기 위해 결사항전하자, 유방은 항우의 목을 보여준 뒤 항복하는 것을 조건으로 항우를 노공(魯公)에 봉하고 곡성에 안장해주었다. 이후 남아있던 항씨 일족을 나름 관대하게 대우하였다. 대표적으로 초한전쟁에서 유방에겐 은인이나 다름 없던 항백은 통일이후 논공행상에서 사양후(射陽侯)에 봉해졌으며, 한나라의 국성인 유씨 성을 하사받아 이름을 유전(劉纏)으로 개명하였다. 이 외에도 공신후자연표에는 없는 도후, 평고후, 현무후는 항씨였으나 유씨 성을 하사받고 제후가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또한, 항우의 일족인지 확실치는 않지만 항씨 성을 사용하는 서초의 장수 항타도 유씨 성을 받고 평고후(平皋侯)에 봉해졌다.
4. 군사
초(楚)의 전사들은 한 명이 열 명을 당해내지 못하는 사람이 없었고, 부르짖는 소리는 천지(天地)를 흔들었으며, 제후들의 군사들은 서로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이에 이미 진(秦)의 군사를 깨뜨리고 항우(項羽)는 제후들의 장수들을 불러 보았는데, 원문(轅門)으로 들어오는 제후들의 장수들 중 무릎으로 기어서 앞으로 나아가지 않는 사람이 없었고, 감히 올려다보는 사람도 없었다.'''
《사기》(史記) <항우 본기>(項羽本紀)에서 거록대전 당시 초나라 군의 기세를 묘사한 기록
항우라는 뛰어난 야전 사령관의 존재가 크게 작용하긴 했지만, 서초는 당대 최강국으로 군림하였으며 당연하게도 군사의 양과 질 또한 상당한 수준이었다. 특히 사기에서 묘사되는 거록대전 당시 초나라군의 기세를 보면 초나라군은 그야말로 당대 중국 최강의 군대라 할 수 있을 정도이다. 《사기》(史記) <항우 본기>(項羽本紀)에서 거록대전 당시 초나라 군의 기세를 묘사한 기록
군사의 질 뿐만 아니라 병력 자체도 상당한 규모로, 눈앞에 유방이라는 호적수와 대치하고 있는 상황에서도 용저에게 호왈이긴 하지만 20만이라는 대군을 쥐어서 별동대로 제나라를 구원하도록 할 정도로 상당한 수준이었다. 물론 초나라의 모든 병력이 거록대전 당시에 활약한 병력처럼 강력한 것은 아니었지만, 종합적으로 보면 초나라의 군사는 당대 중국 최강의 질과 병력을 자랑했다고 봐도 무방하다.
4.1. 지휘관
西楚 서초의 대사마(大司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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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초의 지휘관이라하면 단연코 제일 먼저 떠오르는 사람은 초대 군주인 서초패왕 항우일 것이다. 처음 거병하여 서초의 근간을 다진 지휘관은 마찬가지로 군주의 자리에 있던 항량이었지만, 항량이 장한에게 패사한 뒤에는 항우가 독보적인 존재감을 보여주었다. 다만 초나라의 지휘관은 항우 한 명만 있던 것은 아니다. 엄연히 항우로부터 지휘권을 받아 별도의 군단을 지휘하던 지휘관들이 있었으니, 그들이 바로 서초의 대사마들이다.
그러나 이들은 모두 항우에게 도움이 되기도 했지만, 오히려 손실을 더 많이 가져다 주었다.
- 조구 - 항우의 명령을 어기고 한나라군의 도발에 넘어가 야전에서 싸우다 패사하였으며, 요충지인 성고와 형양을 잃고 다른 초나라의 명장인 종리말까지 포위당하게 만들었다.
- 용저 - 서초의 맹장으로서 주군인 항우를 따라 숱한 전투에 참여하였고, 이에 항우로부터 높은 신뢰를 받았으나, 무수한 군공을 세우며 하북을 평정한 명장 한신의 실력을 과소평가한 나머지 결국 부주의로 인해 패사하여 한신의 북벌을 저지하지도 못하고 본인의 죽음을 포함해 초나라 별동대가 궤멸하는 결과를 낳았다.
- 주은 - 대사마의 직위에서 서초의 본거지인 초국령을 관장했지만 영포와 밀약을 맺어 서초를 배신하고 한나라에 붙었다.
영포 - 항량에 이어 항우 휘하에서까지 군공을 세우며 거록대전 당시에는 포장군과 함께 별동대를 이끌고 싸우기도 했지만, 서초 건국 이후에는 독립된 세력이 되어버려 서초의 지휘관으로 보기는 어렵다.
그 외 지휘관이라 불릴만 한 사람은 종리말 정도이다.
- 종리말 - 별다른 직책이나 별동대 지휘 기록은 없지만, 항우가 팽성에서 전투를 했을때 용저는 종리매와 같이 제나라를 침공해 항복을 받아냈다.
5. 정치
군현제를 시행했던 진나라나 군국제를 통해 군현제와 봉건제를 병행하던 한나라와 달리, 서초는 봉건제를 시행했다. 항우의 18제후왕 분봉을 보면 이를 명확히 파악할 수 있는데, 이는 서초의 군주인 항우의 세계관이 봉건제에 머물러 있었음을 보여준다. 승상으로 범증이 있었기는 한데, 국정운영보다는 대전략을 제시하는 위치에 가까웠다.[9]그러나 초한전쟁 내내 소하가 관중에 자리잡고 나라의 종묘(宗廟)와 사직(社稷)을 세우고 궁실을 건축하며, 법령과 규약을 제정하고 관중 각 지역에 군과 현을 두어 행정조직을 완비하며 국가의 기틀을 다진 한나라와 달리 서초가 정치를 어떻게 했다는 기록은 딱히 찾아볼 수 없다.
그리고 초한전쟁이 길어지면서 보급조차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서[10] 초나라 군대의 기세가 크게 약화되는 모습을 볼 때, 후계 구도는 커녕 법령이나 행정조직을 제대로 만들었는지조차 의심되는 등, 행정력은 한나라에 비해 크게 떨어졌을 것이라 볼 수 있다.
6. 외교
군주인 항우의 잔학함과 옹색함, 그리고 정치적인 무지때문에 타국과 서초의 외교관계는 18제후왕을 분봉할 당시부터 크게 삐그덕 거리기 시작했다. 당연하게도 아군보다는 적군이 훨씬 많았다.- 한(漢) - 건국 이전부터 홍문연에서 군주인 유방을 죽이려했던 미수가 있었으며, 초의제와의 약조도 멋대로 어기고 유방을 관중왕인 아닌 한왕에 봉하며 파촉에 가둬버렸기 때문에 한나라와는 처음부터 불구대천의 관계가 되어버렸다.
그리고 그 싸움은 2200년이 지난 지금에도 이어지고 있다. - 제나라 - 역시 분봉 과정에서 억눌린 불만으로 전영이 반기를 들면서 외교마찰이 표면화되었고, 항우가 제나라를 침공하면서 둘의 관계는 최악이 되었다. 그러다가 한신이 제나라를 침공해오자 어쩔 수 없는 이해관계로 동맹을 맺게 된다.
- 진여 - 역시 분봉 과정에서 불만을 품고 전영을 부추겨 거병하도록 한 인물이다. 자신도 항우의 분봉체계에 반발하여 상산왕 장이를 축출하고 조나라를 아우른 뒤, 대나라 왕이 되었다. 그 뒤, 유방에게 속았다고는 하지만 한나라 군대에 합류하여 팽성대전에서 서초를 공격하기도 했다. 물론 속았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곧바로 한나라에 등 돌리긴 했지만, 이미 한나라와 함께 빈집을 공격했던 입장이라 서초와의 관계는 영 좋지는 못했다. 그리고 애초에 군주인 진여가 사실상 항우의 분봉체계를 뒤흔들게 될 신호탄을 날린 장본인이다.
- 구강국 - 비협조적인 동맹관계를 유지하다가 서초를 배신하고 한나라에 붙었다.
- 서위 - 팽성대전까지는 한나라의 편이었지만, 항우가 압도적으로 한나라 연합군을 격파하자 곧바로 사초에 붙었다. 그러나 군주인 위표의 성격을 봤을 때 믿을만한 동맹관계로 보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사실상 서위는 한나라나 서초 그 어느쪽에도 붙지 않고 독자적인 세력을 형성하려는 움직임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 임강국 - 그나마 우호적인 중립관계를 유지하던 제후국. 그러나 정말 중립적이어서 서초에 큰 도움을 주지도 않았다.
7. 역대 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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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적 | ||||
}}}}}}}}} |
<rowcolor=#ece5b6> 대수 | 시호 | 휘 | 작위 | 재위기간 | 묘호 |
초대 | -[11] | 항적(項籍) | 패왕(覇王) | BC 206년 2월 ~ 202년 12월 | - |
[1] 여기에 초족과 오월족까지 합쳐져 구성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2] 기원전 206년부터 칭왕[3] 단적으로 서초의 전신인 후초나 가까운 시기 진승이 건국했던 장초(張楚)도 초(楚)라는 국호를 사용했다.[4] 한나라에서 한신이 대장군을 받기 이전까지의 최고 군사 지휘관을 이른다.[5] 이때 항우는 서쪽 관중에 있었으며 이후 동쪽 팽성으로 간다.[6] 현재 산동성 곡부시(曲阜市) 경내. 춘추전국시대 노(魯)나라의 수도이자 공자가 태어난 곳으로 유명하다.[7] 산동성 위타이현.[8] 지금의 안휘성 숙현(宿縣) 서북.[9] 물론 범증도 장한과 동예, 사마흔을 각기 삼진왕으로 세워 유방을 견제하도록 항우에게 건의하며 봉토 배정이라는 국정운영에 손을 대기는 했다.[10] 물론 이는 서초의 보급로를 거의 황폐화 시킬 정도로 집요하게 공격했던 팽월의 지분이 상당히 컸기에 변명거리는 있다.[11] 사후에 한왕 유방에 의해 노공에 봉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