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19-07-19 01:30:49

수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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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제국
파일:chinesycountry.jpg
존속기간 581년 ~ 619년
별칭 수조(隋朝)
위치 중국, 베트남 북부
수도 대흥(大興, 581~605)
낙양(洛陽, 605~619)
정치 체제 전제군주제
국성 (楊)
국가원수 황제
주요 황제 문제 양견
양제 양광
언어 중세 중국어
문자 한자
종교 대승 불교, 유교, 도교
종족 한족, 선비족
통화 오수전[1]
성립 이전 북주
멸망 이후 당나라
현재 국가 중국, 몽골, 베트남

1. 개요2. 고구려와의 전쟁3. 영향4. 역대 황제

1. 개요

남북조시대 이후 세워진 첫 통일왕조이며 중국 역사상 두 번째로 단명한 통일 왕조다(이 기록 덕에 역대 수나라 중 가장 잘 알려졌다). 어떤 면에서 보면 위진남북조 시대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왕조이기도 하다.[2]

선비족의 국가였던 북주(北周)가 멸망하고 수나라가 건국되었다. 황실의 출신을 따지면 선비족인지 한족인지 불분명하지만 북주의 우문부와 인척인 것으로 보아 한화된 선비족으로 보는 게 유력시되고 있다. 옛부터 '8주국'의 관롱집단은 혈통을 유지하기 위해 무천진 출신의 선비족 장수 집안끼리만 혼인을 하였다. 북주 때는 양씨(楊氏)는 북위 초기 무천진(武川鎭)으로 이주하였고, 양견의 아버지 양충에 이르게 되었다. 북위는 선비풍(鮮卑風)의 이름을 중국풍으로 고치는 정책을 펼쳤는데, 북주 때에 이르러 이를 다시 선비풍으로 되돌리는 정책을 실시하였다. 양견는 호한융합시대에 태어났으며 원래 이름은 보육여견(普六茹堅)이다. 양견의 어릴 적 이름은 금강나라연(金剛那羅延)이다. 보육여는 선비어로 버들이라는 뜻이었다. 북위를 건국한 선비족이 한족의 남조를 점령하고 통일하면서 선비족이 지배 집단으로서 수나라까지 이어진다는 학설에 대한 문헌의 증거들이 있다는 것이다.[3] 선비족으로 추정된다는 설도 있다.[4] 그러나 수나라 황실은 한화하여 스스로 선비족임을 주장하지는 않았고 이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들은 없었으므로 선비족 혈통인 것이 역사에서 큰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니다. 오늘날 수나라(+당나라) 황실의 혈통이 선비족이라는 점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데는 대개 수당의 황실이 한족이 아니므로 원나라, 청나라와 유사한 이민족 왕조에 불과하다는 식으로 중국 혹은 한족을 깎아내리려는 의도가 있다.

수도는 장안으로 결정되었고 이후 문제의 둘째 아들인 양광이 뒤를 이어 양제에 즉위하였다. 이 과정에서 문제를 양광이 암살했다는 의혹도 있었다.

양제는 즉위 이후 대운하를 비롯한 수많은 토목사업을 벌였으며, 용선을 타고 지방으로 자주 유람을 다니는 등 꽤나 사치스러운 행태를 보였다. 또한 남북조시대 동안 무너진 주변국과의 질서 회복을 위해 돌궐과 서역에 위치한 토욕혼(土谷渾)을 정벌하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양제는 얼어죽을 뻔했지만...

2. 고구려와의 전쟁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고구려-수 전쟁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파일:external/study.zumst.com/%EA%B3%A0%EA%B5%AC%EB%A0%A4%EC%99%80%20%EC%88%98%EC%9D%98%20%EC%A0%84%EC%9F%81.png

6세기 후반 수나라는 남북조를 통일하고 돌궐이 수나라의 위협이 되었다. 당시 고구려돌궐과 협력하여 수나라에 대항하려고 하였다. 수 양제가 돌궐의 계민가한을 방문했을 때 고구려 사신을 목격함에 따라 고구려돌궐의 연계를 경계하게 된다. 598년 고구려는 요서(遼西)를 공격하였고 수나라는 반격하였다. 수나라는 양제(煬帝) 재위 기간에 고구려를 침략하였으며, 113만 병력을 동원해 고구려에 대한 원정을 시도한다. 자치통감에서는 113만의 병사에 수송대가 그 두 배였다고 서술하고 있으므로 엄밀히 따지면 300만 대병이다.[5][6]

이러한 수나라와 고구려간에 전쟁이 일어난 이유는 수 중심의 천하관 확립과 관계가 있다. 중국의 중심이 된 수나라는 나름의 세계관을 가지고 있었고 고구려와 같은 독자적인 천하를 인정하지 않으려 했기 때문에, 상대방을 인정하지 않는 수나라의 천하관과 독자적인 천하질서를 유지하려고 하는 고구려의 세계관의 충돌이 전쟁이라는 형태로 나타나게 된 것이다.

하지만 을지문덕을 비롯한 고구려군의 맹렬한 저항으로 인해 수나라는 3차례의 원정에서 모두 패배하였다. 당시 고구려는 여수장우중문시까지 지으며 수나라를 희롱하였다. 자치통감에는 수나라의 군대가 처음 요하에 이르렀을때는 30만 5천이었으나 요동성으로 돌아온 자는 오직 2700명이라 하였다. 이 때문에 나라 재정은 파탄났고, 곳곳에서 반란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수양제는 강도로 피난가게 되고 결국 618년 우문화급의 반란군에 의해 양제가 효수되면서 멸망한다.

3. 영향

파일:external/www.chinaknowledge.de/mapDaYunhe.jpg
수나라 때 세워진 운하.
그렇지만 수나라는 이후 중국 역사에 막대한 영향을 미쳤다. 율령의 핵심인 3성 6부제, 과거제의 원형이 만들어졌고, 수문제와 수양제가 굴착한 운하는 상업이 발달함에 따라 중국 경제의 중추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수나라가 중요한 이유는 바로 중국의 재통일이었다. 후한 말기의 황건적의 난 이후로 삼국시대오호십육국시대, 남북조시대 등을 거치며 400년간 혼란의 연속이었던 중국 대륙을 평정하여 이후 당나라의 전성기에도 영향을 미쳤다.[7] 또한 2백여년 간 분열의 시기였던 남북조시대를 통일한 국가였던만큼 수나라의 문화는 남조와 북조의 문화들이 섞여져 있었다. 이러한 수나라 문화는 당나라 초기에도 이어져 당나라 문화에 영향을 끼쳤다.

진나라와 약간 비슷한 위치에 있다는 의견도 있다. 진시황이 중국을 통일하여 도량형과 문자도 통일되었고, 이러한 기반이 진나라 멸망 후 한나라가 오랜 기간 부흥할 수 있는 기틀로 작용하였다는 것이다. 수나라 또한 중국을 통일하고 3성 6부제, 과거제 등의 제도를 실시하여 당나라 부흥의 기틀을 마련하였다는 것이다. 그리고 두 나라는 초대 황제가 기틀을 쌓아 나라를 크게 발전시키고 2대째에 그 모든 것이 한순간에 붕괴되어 망했다는 공통점이 있다(...).그리고 둘 다 역대제왕묘에 이름을 올리지 못했다. 안습(...)

수문제는 전 왕조인 북주의 우문씨들을 모두 도륙냈는데, 훗날 우문화급의 난으로 그의 후손들인 양씨 역시 대거 주살된다. 우문씨들에게 가한 업보라고 하는데 정작 본인의 가계는 북주와는 관계가 없다. 그나마 증손자인 양정도(楊政道)[8]는 기적적으로 목숨을 건져 대를 이어나가게 된다.

4. 역대 황제

대수 재위기간 묘호 시호 성명 연호 능호
추존 추존 - 강왕(康王) 양렬(陽烈) - -
추존 추존 - 헌왕(獻王) 양정(楊禎) - -
추존 추존 태조
(隋太祖)
무원황제
(武元皇帝)[9]
양충(楊忠) - -
1대 581~604 고조
(高祖)
문황제
(文皇帝)
양견(楊堅) 개황(開皇, 581~600)
인수(仁壽, 600~604)
태릉(太陵)
2대 604~618 세조
(世祖)
명황제
(明皇帝), [10]
양광(楊廣) 대업(大業,605~618)[11] 양제릉(煬帝陵)
임시 618 - 진왕(秦王) 양호(楊浩) - -
추존 추존 세종(世宗) 효성황제(孝成皇帝)[12] 양소(楊昭) - -
3대 617~618 - 공황제
(恭皇帝)
양유(楊侑)[13] 의녕(義寧,617~618) 장릉(莊陵)
임시 618~619 - 월왕(越王), 황태주(皇泰主)[14] 양통(楊侗) 황태(皇泰, 618~619) -


[1] 오수전으로 통일하면서 각종 화폐의 난립을 막았다.[2] 이는 북사에서 수나라 항목이 들어간 것을 보면 알 수 있으며, 수나라 자체도 북주를 계승한 국가이기 때문이다.[3] http://igoindol.net/siteagent/100.daum.net/encyclopedia/view/63XX67600050[4] 출처는 ^ アーサー・F・ライト『隋代史』(法律文化社)P64は、普六茹をモンゴル語で柳の一種(楊)を意味する「ブルスカン」の転じたものとみる。姚薇元『北朝胡姓考(修訂本)』(中華書局、2007年)P72-73は、楊氏(普六茹氏)は雁門茹氏、つまりは茹茹(蠕蠕、柔然)の後裔とみる。[5] 300만의 대병이 모두 요동전선에서 전투를 벌였던 것은 아니고 113만 명은 고구려의 방어선을 공격하고 나머지 200만은 중국 본토에서 요동전선까지 보급품을 실어나르거나 혹은 군사들이 싸우기 위한 노동력 제공 역할 맡았다.[6] 이 기록은 약 1300년이 지난 후 제1차 세계 대전에서 일어난 베르됭 전투의 등장으로 깨진다. 여담으로 세상에서 가장 많은 전투병력을 동원한 작전은 세상에서 가장 피비린내가 나는 독소전쟁의 개막인 바르바로사 작전이다(총 430만, 독일 및 동맹국군).[7] 사마씨의 서진도 삼국시대를 끝내고 통일은 했다지만 사마염의 방종과 갖가지 난리통으로 얼마 안 가 다시 분열...[8] 양제의 차남 양간의 유복자.[9] 문제 추증[10] 보통은 당나라가 비하할 목적으로 올린 양제(煬帝)라는 시호가 더 잘 알려져 있으나, 정식 시호는 명황제이다. 그 외에 민황제(閔皇帝)라고도 한다.[11] 3대 황제 수 공제와 재위기간이 어느 정도 겹치는데, 이것은 수양제는 강남으로 피난가서 죽었기 때문이다.[12] 황태주 추증[13] 당고조 이연에 의해 장안에서 옹립된 황제. 재위기간이 약간 겹치는 것은 당고조가 수양제를 태상황으로 간주(즉 폐위)했기 때문이다. 말 그대로 꼭두각시 황제였으며, 선양후 619년 암살당했다.[14] 공황제(恭皇帝)라고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