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19-09-27 10:48:54

수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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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제국
파일:chinesycountry.jpg
존속기간 581년 ~ 619년
별칭 수조(隋朝)
위치 중국, 베트남 북부
수도 대흥(大興, 581~605)
낙양(洛陽, 605~619)
정치 체제 전제군주제
국성 (楊)
국가원수 황제
주요 황제 문제 양견,(581~604),
양제 양광,(604~618),
언어 중세 중국어
문자 한자
종교 대승 불교, 유교, 도교
종족 한족, 선비족
통화 오수전[1]
성립 이전 북주
멸망 이후 당나라
현재 국가 중국, 몽골, 베트남

1. 개요2. 천하통일 - 위진남북조시대의 종말3. 개황의 치4. 고구려와의 전쟁과 멸망5. 영향6. 역대 황제

1. 개요

남북조시대 이후 세워진 첫 통일왕조이며 중국 역사상 두 번째로 단명한 통일 왕조다(이 기록 덕에 역대 수나라 중 가장 잘 알려졌다). 어떤 면에서 보면 위진남북조 시대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왕조이기도 하다. 이는 북사에서 수나라 항목이 들어간 것을 보면 알 수 있으며, 수나라 자체도 북주를 계승한 국가이기 때문이다.

선비족의 국가였던 북주(北周)가 멸망하고 수나라가 건국되었다. 황실의 출신을 따지면 선비족인지 한족인지 불분명하지만 북주의 우문부와 인척인 것으로 보아 한화된 선비족으로 보는 게 유력시되고 있다. 옛부터 '8주국'의 관롱집단은 혈통을 유지하기 위해 무천진 출신의 선비족 장수 집안끼리만 혼인을 하였다. 양씨(楊氏)는 북위 초기 무천진(武川鎭)으로 이주하였고, 양견의 아버지 양충에 이르게 되었다. 북위는 선비풍(鮮卑風)의 이름을 중국풍으로 고치는 정책을 펼쳤는데, 북주 때에 이르러 이를 다시 선비풍으로 되돌리는 정책을 실시하였다.

양견은 호한융합시대에 태어났으며 원래 이름은 보육여견(普六茹堅)이다. 양견의 어릴 적 이름은 금강나라연(金剛那羅延)이다. 보육여는 선비어로 버들이라는 뜻이었다. 북위를 건국한 탁발선비족이 한족의 남조를 점령하고 통일하면서 선비족이 지배 집단으로서 수나라까지 이어진다는 학설에 대한 문헌의 증거들이 있다는 것이다.[2] 선비족으로 추정된다는 설도 있다.[3] 그러나 수나라 황실은 한화하여 스스로 선비족임을 주장하지는 않았고 이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들은 없었으므로 선비족 혈통인 것이 역사에서 큰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니다. 오늘날 수나라(+당나라) 황실의 혈통이 선비족이라는 점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데는 대개 수당의 황실이 한족이 아니므로 원나라, 청나라와 유사한 이민족 왕조에 불과하다는 식으로 중국 혹은 한족을 깎아내리려는 의도가 있다.

2. 천하통일 - 위진남북조시대의 종말

수문제선양 받아 수나라를 개국하고 즉위 후 장안으로 도읍을 정했다. 원래 문제는 낙양을 수도를 삼으려고 했으나, 서방으로 진출하기 위해서 장안을 수도로 삼았다. 장성을 복구해 돌궐에 대한 방어력을 강화하고 회수와 장강을 이었으며 뒤이어, 곧 북조 괴뢰정권인 강릉 일대의 후량을 병합하여 전초기지로 삼았다. 수나라 군세는 회수를 따라 늘어선 적의 요새를 정복해야 한다든지, 혹은 기나긴 보급선을 유지해야 한다든지 등의 걱정들에서 해방된 상태였다. 왜냐면 이미 북주 시절부터 남조의 수도 건강을 방어하기 위한 필수요소인 회수 인근 장강 북쪽을 모조리 다 장악했고, 장강 상류의 (쓰촨성)까지 손에 넣었기 때문이다. 이제 수나라는 과거 서진이 279년 행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대규모 함대를 촉 땅에서 강을 따라 내려보낼 수 있었고 진은 과거 가 그랬듯이 양면전선을 맞이해야 했다. 진숙보가 그나마 멀쩡했다면 멸망의 시기는 조금 늦춰졌을지 모르겠지만, 당시 수나라 인재풀을 보면 사실상 조금 유예가 더 길어진 정도다. 강남 정권이 화북 정권의 공격을 막으려면 전통적으로 형주(양번) 방어선과 사천(백제성) 방어선 그리고 회남 일대를 차지하고 합비쪽 방비를 단단히 해야 하는데, 진숙보 시절엔 저 요충지가 모조리 다 화북쪽에 넘어간 상태였다.

수나라의 정벌 준비는 587년 시작되었다. 산둥 반도, 후베이성, 한수(漢水), 그리고 가장 선박이 많이 건조되던 촉의 영안(永安)까지, 대규모 전함 건조가 여러 장소에서 행해졌고 수 제국 대장군 양소는 영안에 머물면서 향후 자신이 지휘할 함대의 규모를 보고받고 있었다. 북조 국가들은 기병을 동원한 육전에는 강했지만 수전에 능하지 못했던 반면, 남쪽의 육조 국가들은 대대로 선박의 건조와 함대의 운용에 능했고 건강의 정복을 위해선, 북조 정권은 어떻게든 장강에서 남조 수군을 정면에서 몰아낼 힘을 지닌 독자적인 함대를 건조해야 했기 때문이다. 제일 거대했던 선박은 오아전선(五牙戰船)이라 불린 거대한 전함들이었다. 오아(五牙)엔 5층에 달하는 누각이 세워졌고, 800명에 달하는 병사를 실었으며, 뾰족한 가시가 잔뜩 박힌 철구를 단 박간(拍竿)이란 긴 장대를 달고 있었다. 박간을 수직으로 떨어뜨리면 적 함선을 손상시킬 수 있었고, 혹은 한 장소에 단단히 고정시켜 도망치지 못하게 함으로서 투사무기를 이용한 집중적인 근거리 사격을 퍼부을 수 있었다. 다음 가는 함선급으론 황룡전선(黃龍戰船)이 있었는데, 각 황룡전선은 100명의 병사를 태울 수 있었다.

588년 가을, 문제는 과거 오나라를 치던 서진처럼 진나라에 원정군을 파견하였다. 이 시기 원정군 총사령관은 차남 진왕 양광이었고, 51만 8천이라는 대군으로 을 침입했다. 수나라 8개 군이 촉부터 황해에 이르기까지, 장강 북변 전면에 배치되었다. 수나라 대군을 상대할 의 전력 약 10만은 장강 상류부터 황해 바다에 이르는 모든 구간을 막아내야 했다. 진의 군대는 주로 전선의 서쪽 끝과 수도 건강 인근에 집중적으로 배치되었다. 수나라의 기본 전략은 장강 상류의 양소 군단이 진의 수군을 묶어둠으로서, 진의 수도 건강을 마주보고 있던 총사령관 양광이 이끄는 본군이 장강 하류를 빠르게 도하하는 최적의 시간을 만들어내는 것이었다. 만약 이 전략이 실패로 끝나 진의 수군이 건강 방어를 위해 탈출하는 사태가 벌어지더라도, 여전히 양소의 수군은 장강을 따라 동진하며 건강을 공격하는 수나라 육군을 지원할 수 있었다.

한편 에선 장강을 지키던 장수가 이걸 보고 여러 차례 장계를 올렸으나, 시문경이 묵살하고 상소하지도 않았다. 진나라 황제 진숙보는 이걸 알면서도 태연히 "왕기가 여기 있다. 북제의 군대가 세 번, 북주의 군대가 두 번 쳐들어왔으나, 패배하고 돌아갔다. 천명이 여기 있는데 저놈들이 뭘 하겠는가?"라며 큰소리만 쳤다. 또 공범도 맞장구를 치며 여전히 대비도 않고 술을 마시면서 시를 짓고 풍악을 울렸다.

정명 3년(589년) 정월, 수나라 오주 총관 하약필이 교묘하게 장강을 건너 경구를 점령하고 종산으로 진격했다. 건강에는 10만 명의 군대가 있었으나, 진숙보는 공신이자 대장군 소마가의 후처를 범하는 병크를 저질렀고, 이에 소마가는 종군을 거부하였다.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진숙보 즉위에 공을 세운 소마가가 수나라 군사를 요격하러 갔으나, 그 동안 진숙보는 소마가의 아내를 입궁시켜서 놀아났고, 이 소식을 들은 소마가는 홧병으로 쓰러져 죽었다고 한다. 덕분에 진나라 군사는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흩어졌다.

이후 겁쟁이 진숙보는 그제서야 겁을 먹고 밤낮으로 울기만 했다. 여러차례 장군들이 싸우자고 건의했으나, 시문경은 이를 모두 허락하지 않았다. 589년 수나라의 본대는 장강 하류를 도하하여 진나라의 수도 건강을 손쉽게 함락했다. 진숙보가 측근 십여 명을 데리고 경양전을 나와 우물에 뛰어들려고 하자 후각사인 하후공운이 막았으나 진숙보는 기어이 우물에 들어가 숨어 있었다. 얼마 후 수나라 군사들이 우물을 살펴보고 불렀으나 대답이 없자 돌을 던지려고 했는데 당황한 진숙보는 자신의 존재감을 마음껏 알렸다. 결국 수나라 군사들이 진숙보를 새끼줄로 끌어 올렸으며 진숙보는 하약필을 보자 무서워 식은땀을 흘리고 벌벌 떨면서 연거푸 절을 했다. 이렇게 어이없게도 진나라는 멸망했다.

4월, 진숙보는 진나라 황족들과 함께 장안으로 끌려갔는데 이 때도 항상 술에 취했으며 깨어 있는 날이 드물었다. 그것으로도 모자랐는지 수 문제에게 궁궐을 화려하게 하고 사치를 즐기라는 서신을 보내서 수 문제가 신하들과 함께 "아직도 자기가 왜 망했는지 모른다"며 비웃음을 당했다. 진숙보와 함께 나라를 말아먹었던 장귀비, 공귀빈, 공범, 시문경 등은 간신으로 지목되어 장안에서 처형되었다. 이렇게 후한이 멸망하고 400여년에 가깝게 지속되던 위진남북조시대가 끝이 났다.

3. 개황의 치

기나긴 분열 시대가 종결되었고, 사회가 안정되자 인구는 증가했다. 수문제는 당대의 명군으로 귀족들의 강력한 반발에도 불구하고, 각자의 토지를 지닌 소규모 자작농을 대규모로 늘리고 '삼장제'와 '균전제'를 확립시키는 지대한 업적을 세웠다. 수문제가 확립한 이런 토지 정책은 중국의 마지막 왕조 청나라 시기까지 이어진 통일 왕조들의 토지 정책의 뼈대로 작용했다.

조세를 낮추고 하사물을 성대히 내렸음에도 국고가 모두 차 넣어둘 곳이 없어 곁채에 쌓았을 정도였으며, 수 문제가 선양을 받은 초기에 집계된 민호가 채 4백만 호를 채우지 못하였으나 말년에는 890만 호로 늘어나는 업적을 이루었다. 이후 수나라의 붕괴 과정에서 누락된 수많은 인구들은 측천무후-당현종 시절의 전성기 당나라에 가야 겨우 복구가 된다.[4] 인구뿐 아니라 경제력 또한 막강해져서 훗날 당나라는 수 문제 시기의 경제력을 '비단과 금을 분토처럼 여긴' 당 현종 천보 초엽이 되어야 따라잡는다. 이때 쌓인 국부가 상상을 초월해 그 이전 왕조들은 꿈도 꾸지 못했던 황하-장강을 연결시키는 대운하 건설을 처음으로 시도했던 것이 수 문제 양견이었다. 다만 양견은 대운하 공사를 시작하고 얼마 안 되어 대운하 건설로 백성들이 고통받는다는 말 때문에 곧바로 대운하 건설을 중단했고, 후일 수 양제 양광이 대운하를 완공한다.

문제는 사치를 줄이고 검소한 생활을 하면서 세금을 줄여주었고, 어떤 해에는 아예 세금을 징수하지 않았다. 또한 지방에까지 관리를 파견하고 500가를 향으로, 100가를 리로 조직하여 통치 체계를 한차원 높게 끌어올렸으며, 어느 정도 제국의 기틀이 잡히자 관료들에게도 따로 경비를 마련해 주어 관료들과 귀족들이 함부로 백성들에게 폐를 끼치지 못하도록 하였다. 황권 강화를 위해 임용 제도를 개혁하여 사실상 이 시점에선 무력화된 구품중정제를 폐지하고 연고지 복무를 금지했으며, 과거제도의 전신인 선거제를 도입했다. 물론 강력한 귀족 세력을 없애지는 못했으나 이후 당대까지 관롱귀족의 견제 세력인 과거 출신자들을 기용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했으며, 사유화 되어가던 관직의 공공성을 고취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처럼 수 문제는 스스로 조악한 옷을 입고, 검소한 식단을 유지하며, 모든 일을 하층민의 삶에 따라 시도하려 한 보기드문 명군이라 할 수 있었고, 이에 '한이 고조가 통일하고 문경지치를 거쳐 한무제 시절에야 이룩한 번영을 양견은 그가 통일하고 그가 이루어냈다.'라는 찬사를 받을 정도의 뛰어난 정치능력을 선보였다. 그가 이룩한 정치 제도들은 후에 당나라 율령제의 기초가 되어 이후 중국 통일 왕조 체제의 뼈대로 군림하게 된다.

이후 문제의 둘째 아들인 양광이 뒤를 이어 양제로 즉위하였다. 이 과정에서 양광이 문제를 암살했다는 의혹도 있었다. 양제는 즉위 이후 대운하를 비롯한 수많은 토목사업을 벌였으며, 용선을 타고 지방으로 자주 유람을 다니는 등 꽤나 사치스러운 행태를 보였다. 또한 남북조시대 동안 무너진 주변국과의 질서 회복을 위해 돌궐과 서역에 위치한 토욕혼(土谷渾)을 정벌하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양제는 얼어죽을 뻔했지만...

4. 고구려와의 전쟁과 멸망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고구려-수 전쟁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파일:external/study.zumst.com/%EA%B3%A0%EA%B5%AC%EB%A0%A4%EC%99%80%20%EC%88%98%EC%9D%98%20%EC%A0%84%EC%9F%81.png

6세기 후반 수나라는 남북조를 통일하고 돌궐이 수나라를 위협하였다. 당시 고구려돌궐과 협력하여 수나라에 대항하려고 하였다. 수 양제가 돌궐의 계민가한을 방문했을 때 고구려 사신을 목격함에 따라 고구려돌궐의 연계를 경계하게 된다. 598년 고구려는 요서(遼西)를 공격하였고 수나라는 반격하였다. 수나라는 양제(煬帝) 재위 기간에 고구려를 침략하였으며, 113만 병력을 동원해 고구려에 대한 원정을 시도한다. 자치통감에서는 113만의 병사에 수송대가 그 두 배였다고 서술하고 있으므로 엄밀히 따지면 300만 대병이다.[5][6]

이러한 수나라와 고구려간에 전쟁이 일어난 이유는 수 중심의 천하관 확립과 관계가 있다. 중국의 중심이 된 수나라는 나름의 세계관을 가지고 있었고 고구려와 같은 독자적인 천하를 인정하지 않으려 했기 때문에, 상대방을 인정하지 않는 수나라의 천하관과 독자적인 천하질서를 유지하려고 하는 고구려의 세계관의 충돌이 전쟁이라는 형태로 나타나게 된 것이다.

하지만 을지문덕을 비롯한 고구려군의 맹렬한 저항으로 인해 수나라는 3차례의 원정에서 모두 패배하였다. 당시 고구려는 여수장우중문시까지 지으며 수나라를 희롱하였다. 자치통감에는 수나라의 군대가 처음 요하에 이르렀을때는 30만 5천이었으나 요동성으로 돌아온 자는 오직 2700명이라 하였다. 이 때문에 나라 재정은 파탄났고, 곳곳에서 반란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수양제는 강도로 피난가게 되고 결국 618년 우문화급의 반란군이 양제를 교살하여 처형했다. 이후 당국공 이연에게 옹립되어 양제의 뒤를 이은 공제당고조 이연에게 선양하면서 멸망한다.

5. 영향

파일:external/www.chinaknowledge.de/mapDaYunhe.jpg
수나라 때 세워진 운하.
그렇지만 수나라는 이후 중국 역사에 막대한 영향을 미쳤다. 율령의 핵심인 3성 6부제, 과거제의 원형이 만들어졌고, 수문제와 수양제가 굴착한 대운하는 상업이 발달함에 따라 중국 경제의 중추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수나라가 중요한 이유는 바로 중국의 재통일이었다. 후한 말기의 황건적의 난 이후로 삼국시대오호십육국시대, 남북조시대 등을 거치며 400년간 혼란의 연속이었던 중국 대륙을 평정하여 이후 당나라의 전성기에도 영향을 미쳤다.[7] 또한 2백여년 간 분열의 시기였던 남북조시대를 통일한 국가였던만큼 수나라의 문화는 남조와 북조의 문화들이 섞여져 있었다. 이러한 수나라 문화는 당나라 초기에도 이어져 당나라 문화에 영향을 끼쳤다.

진나라와 약간 비슷한 위치에 있다는 의견도 있다. 진시황이 중국을 통일하여 도량형과 문자도 통일되었고, 이러한 기반이 진나라 멸망 후 한나라가 오랜 기간 부흥할 수 있는 기틀로 작용하였다는 것이다. 수나라 또한 중국을 통일하고 3성 6부제, 과거제 등의 제도를 실시하여 당나라 부흥의 기틀을 마련하였다는 것이다. 그리고 두 나라는 초대 황제가 기틀을 쌓아 나라를 크게 발전시키고 2대째에 그 모든 것이 한순간에 붕괴되어 망했다는 공통점이 있다(...).그리고 둘 다 역대제왕묘에 이름을 올리지 못했다. 안습(...)

수문제는 전 왕조인 북주의 우문씨들을 모두 도륙냈는데, 훗날 우문화급의 난으로 그의 후손들인 양씨 역시 대거 주살된다. 우문씨들에게 가한 업보라고 하는데 정작 본인의 가계는 북주와는 관계가 없다. 그나마 증손자인 양정도(楊政道)[8]는 기적적으로 목숨을 건져 대를 이어나가게 된다.

6. 역대 황제

대수 재위기간 묘호 시호 성명 연호 능호
추존 추존 - 강왕(康王) 양렬(陽烈) - -
추존 추존 - 헌왕(獻王) 양정(楊禎) - -
추존 추존 태조
(隋太祖)
무원황제
(武元皇帝)[9]
양충(楊忠) - -
1대 581~604 고조
(高祖)
문황제
(文皇帝)
양견(楊堅) 개황(開皇, 581~600)
인수(仁壽, 600~604)
태릉(太陵)
2대 604~618 세조
(世祖)
명황제
(明皇帝)[10]
양광(楊廣) 대업(大業,605~618)[11] 양제릉(煬帝陵)
임시 618 - 진왕(秦王) 양호(楊浩) - -
추존 추존 세종(世宗) 효성황제(孝成皇帝)[12] 양소(楊昭) - -
3대 617~618 - 공황제
(恭皇帝)
양유(楊侑)[13] 의녕(義寧,617~618) 장릉(莊陵)
임시 618~619 - 월왕(越王), 황태주(皇泰主)[14] 양통(楊侗) 황태(皇泰, 618~619) -


[1] 오수전으로 통일하면서 각종 화폐의 난립을 막았다.[2] http://igoindol.net/siteagent/100.daum.net/encyclopedia/view/63XX67600050[3] 출처는 ^ アーサー・F・ライト『隋代史』(法律文化社)P64は、普六茹をモンゴル語で柳の一種(楊)を意味する「ブルスカン」の転じたものとみる。姚薇元『北朝胡姓考(修訂本)』(中華書局、2007年)P72-73は、楊氏(普六茹氏)は雁門茹氏、つまりは茹茹(蠕蠕、柔然)の後裔とみる。[4] 수 문제가 재위 중이던 606년 수나라 인구가 890만 7천여 호(약 4,600만 명으로 추정), 당 현종 재위 당시인 754년경의 당나라 인구가 906만 9천여 호(약 5,288만 명으로 추정). 그 말은 수양제가 중국 최고의 성군 중 하나라는 이세민이 수습하지 못할 정도로 막장짓을 했다는 거다.[5] 300만의 대병이 모두 요동전선에서 전투를 벌였던 것은 아니고 113만 명은 고구려의 방어선을 공격하고 나머지 200만은 중국 본토에서 요동전선까지 보급품을 실어나르거나 혹은 군사들이 싸우기 위한 노동력을 제공하였다.[6] 이 기록은 약 1300년이 지난 후 제1차 세계 대전에서 일어난 베르됭 전투의 등장으로 깨진다. 여담으로 세상에서 가장 많은 전투병력을 동원한 작전은 세상에서 가장 피비린내가 나는 독소전쟁의 개막인 바르바로사 작전이다(총 430만, 독일 및 동맹국군).[7] 사마씨의 서진도 삼국시대를 끝내고 통일은 했다지만 사마염의 방종과 갖가지 난리통으로 얼마 안 가 다시 분열...[8] 양제의 차남 양간의 유복자.[9] 문제 추증[10] 보통은 당나라가 비하할 목적으로 올린 양제(煬帝)라는 시호가 더 잘 알려져 있으나, 정식 시호는 명황제이다. 그 외에 민황제(閔皇帝)라고도 한다.[11] 3대 황제 수 공제와 재위기간이 어느 정도 겹치는데, 이것은 수양제는 강남으로 피난가서 죽었기 때문이다.[12] 황태주 추증[13] 당고조 이연에 의해 장안에서 옹립된 황제. 재위기간이 약간 겹치는 것은 당고조가 수양제를 태상황으로 간주(즉 폐위)했기 때문이다. 말 그대로 꼭두각시 황제였으며, 선양후 619년 암살당했다.[14] 공황제(恭皇帝)라고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