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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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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수
大隋 | Sui Dynasty
파일:Cheui_Dynasty_581_CE.png
지도의 붉은색 부분 (609년 기준)
581년 ~ 618년
<rowcolor=#ece5b6> 성립 이전 멸망 이후
북주
별칭 수조(隋朝), 양수(楊隋)
위치 중국 화북 전역
중국 전역
수도 대흥(大興) (581년 ~ 605년)
낙양(落陽) (605년 ~ 619년)
면적 3,000,000km² (589년 기준)[1]
4,670,000km² (593년 기준)
5,040,000km² (609년 기준)
인구 50,320,000명 (609년 기준)
민족 선비족, 한족
언어 중세 중국어, 한문
문자 한자
종교 대승 불교, 유교, 도교
화폐 오수전[2]
정치체계 전제군주제
국가원수 황제
국성 홍농 양씨()
주요 황제 고조 문황제 (581년 ~ 604년)
세조 명황제 (604년 ~ 618년)
현재 국가
[[중국|]][[틀:국기|]][[틀:국기|]]

[[베트남|]][[틀:국기|]][[틀:국기|]] (일부)
1. 개요2. 시초3. 역사4. 영향5. 군사6. 여담7. 역대 황제

[clearfix]

1. 개요

581년 동호 계통의 선비족이 창건하여 후한 말기 이래 수세기 동안 이어져온 대분열 시대를 종식시키고 중국을 통일한 왕조이다. 하지만, 통일 이후의 짧은 평화 이후 무리한 대외 원정과 폭정으로 3대 만에 멸망한 단명 통일 왕조이기도 하다. 북주를 계승한 남북조시대의 마지막 왕조이기도 하여 북조의 역사를 기록한 《북사》에 수나라 항목이 들어가 있기도 하다.

2. 시초

시조인 수문제 양견의 조상은 북위 초기 북변의 요충지인 무천진(武川鎭)으로 이주했고, 양견의 아버지 양충에 이르게 되었다. 양견은 호한융합시대에 태어났으며 원래 이름은 하사받은 보륙여견(普六茹堅)이었다. 또한 양견의 어릴 적 이름은 금강나라연(金剛那羅延)으로 나라연은 산스크리트어로 금강불괴를 의미한다. 보륙여씨는 우문태한테 하사받은 것으로 선비어로 버들이라는 뜻이었다.[3]

황실의 출신을 따지면 선비족인지 한족인지 불분명하다. 수 황실 자체는 족보가 주나라 시대까지 이어진 한족 명문가인 홍농 양씨를 자처했고, 그중 후한의 태위인 양진의 직계 후손이라고 주장했다. 다만 선비계 가문이 호한융합시기 한족 명문가의 족보를 위조한 걸로 보는 사람이 많다.

그러나 수나라 황실은 혈통과 관계없이 언어나 관습, 문화를 모두 한족의 것을 따랐기 때문에, 수나라를 최초의 이민족 출신 중국 통일왕조라는 타이틀의 정복왕조나 제국주의 국가의 식민지처럼 보는 것은 곤란하다. 수나라는 침투왕조 중 하나였으며, 황실에서 한족과 다른 언어, 관습, 문화를 가지고 이를 더러 한족에게 강요하기도 한 원나라청나라와 성격이 달랐다.

3. 역사

3.1. 천하통일-위진남북조시대 종결

수문제는 북주의 어린 황제인 정제로부터 선양을 받아 수나라를 개국하고 즉위 후 장안으로 도읍을 정했다. 원래 문제는 낙양을 수도를 삼으려고 했으나, 서방으로 진출하기 위해서 장안을 수도로 삼았다. 장성을 복구해 돌궐(쾩튀르크)에 대한 방어력을 강화하고, 회수와 장강을 이었으며 뒤이어, 곧 북조에 의해 세워진 괴뢰정권인 강릉 일대의 후량을 병합하여 남정의 전초기지로 삼았다.

수나라 군세는 회하를 따라 늘어선 남조 진나라의 요새를 정복해야 한다든지, 혹은 기나긴 보급선을 유지해야 한다든지 등의 걱정들에서 해방된 상태였다. 왜냐면 이미 북주 시절부터 남조의 수도 건강을 방어하기 위한 필수요소인 회수 인근 장강 북쪽을 모조리 다 장악했고, 장강 상류의 (쓰촨성)까지 손에 넣었기 때문이었다. 이제 수나라는 과거 사마씨의 서진280년 오나라를 멸망시켰을 때(오멸망전)와 마찬가지로, 대규모 함대를 촉 땅에서 강을 따라 내려보낼 수 있었고, 진나라는 과거 동오가 그랬듯이 양면전선을 맞이해야 했다.

후주 진숙보가 그나마 멀쩡했다면 멸망의 시기는 조금 늦춰졌을지 모르겠지만, 당시 수나라의 인재풀을 보면 사실상 조금 유예가 더 길어진 정도였다. 강남(중국) 정권이 화북 정권의 공격을 막으려면 전통적으로 형주(양번) 방어선과 사천(백제성) 방어선 그리고 회남 일대를 차지하고 합비 쪽 방비를 단단히 해야 하는데, 진숙보 시절에 이미 저 요충지는 모조리 다 수나라에 넘어간 상태였다.

수나라의 진나라 정벌 준비는 587년에 시작되었다. 산둥 반도, 후베이성, 한수(漢水), 그리고 가장 선박이 많이 건조되던 촉의 영안(永安)까지, 대규모 전함 건조가 여러 장소에서 행해졌고 수 제국의 대장군 양소는 영안에 머물면서 향후 자신이 지휘할 함대의 규모를 보고받고 있었다. 북쪽의 역대 국가들은 기병을 동원한 육상전에는 강했지만 수상전에 능하지 못했던 반면, 남쪽의 육조 국가들은 대대로 선박의 건조와 함대의 운용에 능했다. 그렇기에 수도 건강의 정복을 위해서 북조 정권은 어떻게든 장강에서 남조 수군을 정면에서 몰아낼 힘을 지닌 독자적이고 강력한 함대를 건조해야 했다.

제일 거대했던 선박은 오아전선(五牙戰船)이라고 불린 거대한 전함들이었다. 오아(五牙)엔 5층에 달하는 누각이 세워졌고, 800명에 달하는 병사를 실었으며, 뾰족한 가시가 잔뜩 박힌 철구를 단 박간(拍竿)이란 긴 장대를 달고 있었다. 박간을 수직으로 떨어뜨리면 적 함선을 손상시킬 수 있었고, 혹은 한 장소에 단단히 고정시켜 도망치지 못하게 함으로써 투사무기를 이용한 집중적인 근거리 사격을 퍼부을 수 있었다. 다음 가는 함선급으론 황룡전선(黃龍戰船)이 있었는데, 각 황룡전선은 100명의 병사를 태울 수 있었다.

588년 가을, 문제는 과거 오나라를 치던 서진처럼 진나라에 남정군을 파견했다. 이 시기 남정군의 총사령관은 차남이었던 진왕 양광이었고, 518,000명이라는 대군으로 진나라를 침공했다. 수나라 8개 군이 촉부터 황해에 이르기까지, 장강 북변 전면에 배치되었다. 수나라 대군을 상대할 진나라의 전력 약 100,000명은 장강 상류부터 황해 바다에 이르는 모든 구간을 막아내야 했다. 진나라의 군대는 주로 전선의 서쪽 끝과 수도 건강 인근에 집중적으로 배치되었다.

수나라의 기본 전략은 장강 상류의 양소 군단이 진나라의 수군을 묶어둠으로서, 진나라의 수도 건강을 마주보고 있었던 총사령관 양광이 이끄는 본군이 장강 하류를 빠르게 도하하는 최적의 시간을 만들어내는 것이었다. 만약 이 전략이 실패로 끝나 진나라의 수군이 건강 방어를 위해 탈출하는 사태가 벌어지더라도, 여전히 양소의 수군은 장강을 따라 동진하며 건강을 공격하는 수나라 육군을 지원할 수 있었다.

한편 진나라에선 장강을 지키던 장수가 이걸 보고 여러 차례 장계를 올렸으나, 시문경이 묵살하고 상소하지도 않았다. 진나라 황제 진숙보는 이걸 알면서도 태연히
"왕기가 여기 있다. 북제의 군대가 세 번, 북주의 군대가 두 번 쳐들어왔으나, 패배하고 돌아갔다. 천명이 여기 있는데 저놈들이 뭘 하겠는가?"
라며 큰소리만 쳤다. 또 공범도 맞장구를 치며 여전히 대비도 않고 술을 마시면서 시를 짓고 풍악을 울렸다.

정명 3년(589년) 정월, 수나라 오주총관 하약필이 교묘하게 장강을 건너 경구를 점령하고 종산으로 진격했다. 건강에는 무려 100,000명의 군대가 있었으나, 진숙보는 공신이자 대장군이었던 소마하의 후처를 범하는 병크를 저질렀고, 이에 소마하는 종군을 거부했다.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진숙보의 즉위에 공을 세운 소마하가 수나라 군사를 요격하러 갔으나, 그동안 진숙보는 소마하의 아내를 입궁시켜서 놀아났고, 이 소식을 들은 소마하는 홧병으로 쓰러져 죽었다고 한다. 덕분에 진나라 군사는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흩어졌다.

이후 겁쟁이 진숙보는 그제서야 겁을 먹고 밤낮으로 울기만 했다. 여러차례 장군들이 싸우자고 건의했으나, 시문경은 이를 모두 허락하지 않았다. 589년 수나라의 본대가 장강 하류를 도하하여 진나라의 수도인 건강을 손쉽게 함락했다. 진숙보가 측근 10여 명을 데리고 경양전을 나와 우물에 뛰어들려고 하자 후각사인 하후공운이 막았으나 진숙보는 기어이 우물에 들어가 숨어 있었다. 얼마 후 수나라 군사들이 우물을 살펴보고 불렀으나 대답이 없자 돌을 던지려고 했는데 당황한 진숙보가 자신의 존재감을 마음껏 알렸다. 결국 수나라 군사들이 진숙보를 새끼줄로 끌어 올렸으며 진숙보는 하약필을 보자 무서워 식은땀을 흘리고 벌벌 떨면서 연거푸 절을 했다. 이렇게 어이없게도 진나라는 멸망했다.

4월, 진숙보는 진나라 황족인 진씨들과 함께 장안으로 끌려갔는데 이때도 항상 술에 취했으며 깨어 있는 날이 드물었다. 그것으로도 모자랐는지 수문제에게 궁궐을 화려하게 하고 사치를 즐기라는 서신을 보내서 수문제와 신하들로부터 "아직도 자기가 왜 망했는지 모른다"는 비웃음을 당했다. 진숙보와 함께 진나라를 말아먹었던 장귀비, 공귀빈, 공범, 시문경 등은 간신으로 지목되어 장안에서 처형되었다.

이렇게 후한이 멸망한 이후 400여 년 가깝게 지속되던 위진남북조시대가 끝이 났다. 문제 양견은 진숙보의 진씨 황실과 양나라의 후예들인 소씨들을 전부 숙청했고 숙청을 피한 나머지는 서쪽 변방에 이주시켰다. 하지만 몇년 후에 문제 양견은 서쪽에 이주시킨 진숙보의 진나라 일족 전부와 양나라의 후예들을 전부 노비로 삼으니 그 노비의 수가 매우 많았고, 이후 역사 기록에서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3.2. 개황의 치

기나긴 분열 시대가 종결되고 천하통일이 되어 사회가 안정되자 인구가 증가했다. 수문제는 희대의 성군이었는데, 귀족들의 강력한 반발을 억누르며 각자 토지를 지닌 소규모 자작농들을 대규모로 늘렸고 삼장제균전제를 확립시키는 등 지대한 업적을 세웠다. 수문제가 확립한 이런 토지 정책은 중국의 마지막 왕조인 청나라 시기까지 이어질 정도로 통일 왕조들이 시행한 토지 정책의 뼈대로 작용했다.

조세를 낮추고 하사물을 성대하게 내렸음에도 국고가 모두 차 넣어둘 곳이 없어 곁채에 쌓았을 정도였으며, 수문제가 선양을 받은 초기에 집계된 민호가 채 400만 호를 채우지 못했으나 재위 말년에는 890만 7,000여 호(606년, 추정 4,600만 명)로 늘어나는 업적을 이루었다.

이후 수나라의 붕괴 과정에서 누락된 수많은 인구들은 측천무후~당현종 시절의 전성기가 되어서야 906만 9,000여 호(754년경, 약 5,288만 명 추정)로 겨우 복구가 되었다. 이를 다르게 보면 수양제 양광이 중국사 최고의 명군들 중 한 명인 당태종 이세민이 수습하지 못할 정도로 대실책을 벌였던 셈이다.

인구뿐만 아니라 경제력 또한 막강했는데, 훗날 당나라는 수문제 시기의 경제력을 '비단과 금을 분토처럼 여긴' 당현종 천보 연간 초엽이 되어야 따라잡았다. 이때 쌓인 국부가 상상을 초월해 그 이전 왕조들은 꿈도 꾸지 못했던 황하~장강을 연결시키는 대운하 건설을 처음으로 시도했던 것이 수문제 양견이었다. 다만 양견은 대운하 공사를 시작하고 얼마 안 되어 신하들이 대운하 건설로 백성들이 고통받는다는 간언을 하며 만류하자 곧바로 대운하 건설을 중단했기에, 훗날 수양제 양광이 대운하를 완공한다.
파일:수나라의 대운하.jpg
수나라가 완공한 대운하(갈색).

수문제는 사치를 줄이고 검소한 생활을 하면서 세금을 줄여주었고, 어떤 해에는 아예 세금을 징수하지 않았다. 또한 지방까지 관리를 파견하고 500가를 향으로, 100가를 리로 조직하여 통치 체계를 한 차원 높게 끌어올렸으며, 어느 정도 제국의 기틀이 잡히자 관료들에게도 따로 경비를 마련해 주어 관료들과 귀족들이 함부로 백성들에게 폐를 끼치지 못하도록 했다.

황권 강화를 위해 임용 제도를 개혁하여 사실상 이 시점에선 무력화된 구품중정제를 폐지하고, 연고지 복무를 금지했으며, 과거제도의 전신인 선거제를 도입했다. 물론 강력한 귀족 세력을 없애지는 못했으나 이후 당나라 시대까지 관롱귀족의 견제 세력인 과거 출신자들을 기용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했으며, 사유화되어가던 관직의 공공성을 고취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처럼 수문제는 스스로 조악한 옷을 입고, 검소한 식단을 유지하며, 모든 일을 하층민의 삶에 따라 시도하려 한 보기 드문 성군이라 할 수 있었고, 이에
'한나라한고조가 세우고 문경지치를 거쳐 한무제 시절에야 이룩한 번영을 수문제 양견은 그가 통일하고 그가 이루어냈다.'
라는 찬사를 받을 정도의 뛰어난 정치능력을 선보였다. 그리하여 그가 이룩한 정치 제도들은 후에 당나라 율령제의 기초가 되어 이후 중국 통일 왕조 체제의 뼈대로 군림하게 된다.

그러나 수문제가 붕어하고, 둘째 아들인 양광이 뒤를 이어 양제로 즉위하면서 수나라는 얼마 못가 쇠퇴하기 시작했다. 특히 이 양광이 즉위 과정에서 수문제를 암살했다는 의혹도 있었다. 양제는 즉위 이후 대운하를 비롯한 수많은 토목사업을 벌였으며, 용선을 타고 지방으로 자주 유람을 다니는 등 꽤나 사치스러운 행태를 보였다. 또한 남북조시대 동안 무너진 주변국과의 질서 회복을 위해 돌궐과 서역에 위치한 토욕혼(土谷渾)을 정벌하기도 했다. 참고로 이때 추위가 얼마나 극심했는지 이 과정에서 양제는 얼어죽을 뻔했다.

3.3. 고구려-수 전쟁과 멸망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고구려-수 전쟁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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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external/study.zumst.com/%EA%B3%A0%EA%B5%AC%EB%A0%A4%EC%99%80%20%EC%88%98%EC%9D%98%20%EC%A0%84%EC%9F%81.png

6세기 후반 수나라가 남북조를 통일했을 때 돌궐이 수나라를 위협했다. 당시 고구려돌궐과 협력하여 수나라에 대항하려고 했다. 수양제가 돌궐의 계민가한을 방문했을 때 고구려 사신을 목격함에 따라 고구려돌궐의 연계를 경계하게 된다. 598년 영양왕이 다스리고 있었던 고구려는 요서(遼西)를 선제 공격했고 수나라는 이를 방어했다.

이후 수나라는 대군을 동원해 양제(煬帝) 재위 기간에 고구려를 침략했으며, 113만 명에 달하는 대병력을 동원해 고구려에 대한 원정을 시도했다. 《자치통감》에서는 113만 명의 병사에 수송대가 그 2배였다고 서술하고 있으므로 엄밀히 따지면 300만 명의 대병력이었다. 다만 그렇다고 300만 명의 대병력이 모두 요동전선에서 전투를 벌였던 것은 아니었다. 113만 명은 고구려의 방어선을 공격했고, 나머지 200만 명은 중국 본토에서 요동전선까지 보급품을 실어나르거나 혹은 병사들이 싸우기 위한 노동력을 제공했다.

이 기록은 약 1,300년이 지난 후 제1차 세계 대전에서 일어난 베르됭 전투의 등장으로 깨진다. 여담으로 세상에서 가장 많은 전투 병력을 동원한 작전은 세상에서 가장 피비린내가 나는 독소전쟁의 개막인 바르바로사 작전이었다(총 430만 명, 독일 국방군 및 동맹국군).

수나라와 고구려 간에 대전쟁이 일어난 이유는 수나라 중심의 천하관 확립과 관계가 있었다. 당시 수나라는 중국이 중심이 된 나름의 세계관을 가지고 있었고, 고구려와 같은 독자적인 천하를 인정하지 않으려 했기 때문에, 상대방을 인정하지 않는 수나라의 천하관과 독자적인 천하질서를 유지하려고 하는 고구려의 세계관 사이의 충돌이 전쟁이라는 형태로 나타나게 된 것이었다.

하지만 을지문덕을 비롯한 고구려군의 맹렬한 저항으로 인해 수나라는 3차례의 원정에서 모두 패배했다. 당시 고구려는 <여수장우중문시>까지 지으며 수나라를 조롱했다. 다만 고구려도 피해가 워낙 큰터라 양제가 4차로 침공해왔을 때는 고구려로 망명해온 곡사정을 돌려보내며 수나라에 귀부하겠다고 제안하여 양제가 이를 받아들이면서 고구려와의 전쟁은 종결된다.

이 전쟁에서 수나라는 많은 병력과 물자를 잃었는데 살수대첩만 하더라도 《자치통감》에는 수나라의 군대가 처음 요하에 이르렀을 때는 305,000명의 병력이었으나 요동성으로 돌아온 자는 오직 2,700명이라고 했다. 302,300명이 원정 한 번에 증발한 것이다. 전투병 30만 명이 증발하는 것은 지금도 뒷감당이 안 되는 손실인데 전근대에 대규모 원정을 갔다가 얻은 것 하나 없이 저런 참패를 당했으니 수나라의 손실과 피해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컸다. 심지어 이것도 살수대첩이라는 전투에 한정해서 일어난 피해였고, 요동에서 발목이 잡혀 수 개월 동안 공성전을 벌였던 병력들의 손실까지 포함하면 전쟁 전체로 따졌을 때는 더 많은 피해를 입었을 것이다. 결국 수나라는 민심이 바닥을 쳤고, 나중에 가면 양제에 대한 불만이 폭발하여 제국 전역에서 반란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당시 수나라의 민심은 연이은 대규모 원정에서의 실패와 그에 따른 인명 및 물자 손실에 대한 불만의 목소리가 매우 높았다. 심지어 양제가 직접 고구려를 공격하는 도중에 군량보급을 담당하던 예부상서 양현감이 대규모로 반란을 일으켰고, 양제는 이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고구려에서 철군할 수밖에 없었던 적도 있었다. 거기에는 훗날 당태종이 되는 이세민도 끼어 있었다. 수문제가 경제력을 키워놨고 수나라의 인구도 5,000만 명을 웃도는 수준이라 이 정도 선에서 그친 것이지, 수나라가 아닌 다른 나라가 이 정도의 피해를 입었으면 반란 정도가 아니라 나라가 그 즉시 망해버리고, 심하게는 계승 국가마저 사라져 제국이 갈갈이 찢어져버렸을 수도 있었다.

수양제는 강남(중국)의 강도로 피난을 갔지만 결국 618년, 우문화급의 반란군이 양제를 교살하여 처형했다. 이후 당국공 이연에게 옹립되어 양제의 뒤를 이은 공제당고조 이연에게 선양하면서, 남북조를 통일한 첫 번째 왕조로 위세를 떨쳤던 수나라는 건국 이래 고작 40년도 버티지 못하고 허무하게 멸망했다.

4. 영향

파일:external/www.chinaknowledge.de/mapDaYunhe.jpg
수나라 때 세워진 운하.

비록 수나라는 40년도 안되는 2대 37~38년 만에 단명한 왕조이지만[4], 이후의 중국 역사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 이때 물리적인 통일뿐 아니라 통일 왕조로서 정치, 행정, 법, 문화, 사회 기간망 등을 새로 만들거나 재정비하여 유산으로 남겼고, 이는 곧 당나라를 포함한 후대 왕조들의 기틀이 되었다는 점에서 절대 영향력이 적지 않다.

대표적으로 율령의 핵심인 3성 6부제, 과거제의 원형이 만들어졌고, 수문제와 수양제가 굴착한 대운하는 상업이 발달함에 따라 중국 경제의 중추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또한 중국의 광주, 항주, 소주, 정주, 원주나 북한의 의주, 해주 그리고 남한의 파주, 원주, 청주, 전주, 광주, 경주, 진주처럼 후대 동아시아의 여러 도시들이 [-주]로 끝나게 된 것도 수나라 때 행정구역 개편의 산물이다. 반세기도 되지 않는 시기 동안 여러 방면에서 동아시아 체제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것(ex. 통일신라의 9주, 발해의 62주). 또한 607년 수나라 시기 행정구역에는 수많은 군(郡)들도 개편되었다.

무엇보다도 수나라가 중요한 이유는 바로 중국의 재통일이었다. 후한 말기의 황건적의 난 이후로 삼국시대오호십육국시대, 남북조시대 등을 거치며 400년간 혼란의 연속이었던 중국 대륙을 평정하여 이후 당나라의 전성기에도 영향을 미쳤다.[5]
파일:수나라 목걸이.jpg
수나라 시대의 목걸이.
또한 200여년 간 분열의 시기였던 남북조시대를 통일한 개방적인 국가였던만큼 수나라의 문화는 여러 민족들의 문화와 남북조의 문화가 섞여 있었다. 이러한 수나라 문화는 당나라 초기에도 이어져 당나라 문화에 영향을 끼쳤다. 게다가 수나라 시대에 지어진 교량과 수로 등의 기간 시설은 후에도 수백 년, 길게는 현재까지 사용되고 있다. 당나라 시기의 장안성도 원래 수나라 때에 지어져 당나라까지 이어진 것이다.
파일:중국 안지교 1.jpg
수나라 때에 세워진 안지교 (스자좡 부근). 현존하는 중국 최고(最古)의 다리이다.

5. 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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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fffff,#191919> 삼국시대 위군 촉군 오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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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에서는 수나라가 고구려를 공격했다가 패배한 살수대첩의 인식 때문인지 수나라 군대를 매우 약체로 여기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 1차 고구려 원정 당시, 수의 초대 황제인 문제는 무려 약 30만명의 정예병력을 편성했으며, 당시 이들중에 포함된 9만 6000명에 달하는 수나라의 기병들도 100% 정예기병들이었을 만큼 수나라는 막강한 군사 강국이었다.[6] 이렇게 동아시아에서 기병들을 대규모로 편성할 수 있는 나라는 고구려 다음으로 수나라였으니, 이는 멸망하기 전까지는 수나라가 당시 군사력이나 국력이 매우 막강했음을 알 수 있다. 수나라군의 군사 시스템은 당나라군에게도 영향을 주었다.

6. 여담

  • 국명인 '수(隋)'는 초대 황제 문제가 북주에서 '수왕' 작위를 받은 것에서 유래한 국명이다. 헌데 수왕 시절과 개국 이후 정한 나라이름은 서로 한자가 다르다. 원래 '수왕(隨王)'의 '수'는 (따를 수)를 썼는데 개국 이후 한자를 고쳐서 '수()'로 정한 것. 때문에 현재도 '隋'의 한자 독음은 '수나라 수'라고 불린다.
  • 문제가 아들인 양제에게 살해당했다는 추측이 진짜일 경우, 왕조의 역대 황제 전원이 피살되는 최후를 맞는 기록을 세운 제국이 된다. 왕망과 궁예처럼 본인들 당대로 끝난 나라들은 제외한 기준.
  • 역사가 상당히 짧은 제국 중 하나였다보니 위진남북조시대나 당나라와 같이 묶여서 언급되는 경우가 많다. 비슷하게 춘추전국시대 통일 이후의 진나라도 춘추전국시대나 한나라와 같이 묶여서 언급되는 경우가 많다.
  • 수나라가 지금의 오키나와 일대인 유구국을 정벌하거나 복속시켰다는 기록이 있으나, 그 당시의 유구국이 오키나와인지 확실하지 않으며 지금의 대만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 중학교 2학년 역사 교과서에는 남북조시대가 끝나는 589년에 수나라를 건국했다고 나와 있다.
  • 문제는 수의 황제로 즉위한 후, 전 왕조인 북주의 우문씨들을 모두 도륙냈는데, 훗날 우문화급의 난으로 그의 후손들인 양씨 역시 대거 주살된다. 우문씨들에게 가한 업보라고 하는데 정작 본인의 가계는 북주와 관계가 없다. 그나마 증손자인 양정도는 기적적으로 목숨을 건져 대를 이어나가게 된다.
  • 진나라와 약간 비슷한 위치에 있다는 의견도 있다. 진시황이 중국을 통일하여 도량형과 문자도 통일되었고, 이러한 기반이 진나라 멸망 후 한나라가 오랜 기간 동안 융성할 수 있는 기틀로 작용하였듯이, 수나라 또한 중국을 통일하고 3성 6부제, 과거제 등의 제도를 실시하여 당나라 건국과 융성의 기틀을 마련하였다는 것이다. 그리고 두 나라는 초대 황제가 제국을 창설하고 기틀을 마련한 후 2대째에 그 모든 것이 한순간에 붕괴되어 망했다는 공통점이 있다.[7] 그리고 둘 다 역대제왕묘에 이름을 올리지 못했다.

7. 역대 황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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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제2대 제3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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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ECE5B6> 대수 재위기간 묘호 시호 성명 연호 능호
추존 추존 - 태원부군
(太原府君)
양혜하
(楊惠嘏)
- -
추존 추존 - 강왕(康王) 양렬(陽烈) - -
추존 추존 - 헌왕(獻王) 양정(楊禎) - -
추존 추존 태조
(太祖)
무원황제
(武元皇帝)[8]
양충(楊忠) - -
1대 581~604 고조
(高祖)
문황제
(文皇帝)
양견(楊堅) 개황(開皇, 581~600)
인수(仁壽, 600~604)
태릉(太陵)
2대 604~618 세조
(世祖)
명황제
(明皇帝)[9]
양광(楊廣) 대업(大業,605~618)[10] 양제릉(煬帝陵)[11]
임시 618 - 진왕(秦王) 양호(楊浩) - -
추존 추존 세종(世宗) 효성황제(孝成皇帝)[12] 양소(楊昭) - -
3대 617~618 - 공황제
(恭皇帝)
양유(楊侑)[13] 의녕(義寧, 617~618) 장릉(莊陵)
임시 618~619 - 월왕(越王), 황태주(皇泰主)[14] 양동(楊侗) 황태(皇泰, 618~619) -


[1] Taagepera, Rein (1979). "Size and Duration of Empires: Growth-Decline Curves, 600 B.C. to 600 A.D.". Social Science History. 3 (3/4): 129. #[2] 오수전으로 통일하면서 각종 화폐의 난립을 막았다.[3] 출처는 ^ アーサー・F・ライト《隋代史》(法律文化社)P64は、普六茹をモンゴル語で柳の一種(楊)を意味する「ブルスカン」の転じたものとみる。姚薇元《北朝胡姓考》(修訂本)(中華書局、2007年)P72-73は、楊氏(普六茹氏)は雁門茹氏、つまりは茹茹(蠕蠕、柔然)の後裔とみる。[4] 수나라가 40년을 못채우며 단명했다고 하더라도, 당 고조수 양제이종사촌 관계이기도 하는 등 수나라와 당나라가 아예 무관한 왕조라고는 할 수 없다. 즉, 수와 당은 혈통상으로도 어느 정도 이어진 관계이며, 서양 유럽 왕조의 경우 수와 당의 예시처럼 서로 다른 왕조가 방계 또는 모계로 이어지는 경우가 매우 많다.[5] 사마씨의 서진도 삼국시대를 끝내고 통일은 했다지만 사마염의 방종과 팔왕의 난, 영가의 난 등 갖가지 난리통으로 얼마 안 가 다시 분열되었다. 물론 수말당초 시기에도 군웅할거가 있었지만 상대적으로 짧고 오히려 수당교체기는 서진에서 동진으로 변했을 때에 비하면 그래도 평화적 교체에 가까웠다.[6] 양제의 고구려 침략 당시 수나라 기병의 병종 특성다만 링크에 걸린 게시물에도 약간의 오류가 있는데, 수나라를 대체한 당나라 역시 상당한 규모의 정예기병들을 보유했다. 당나라 경기병이 중기병을 멸망시켰는가? 터무니없는 소리! 중세 중국의 중무장 기병대[7] 물론 진나라의 경우 이미 시황제 때 있었던 지나치게 급진적인 폭정으로 인해 그 근간이 크게 흔들리고 있었으며, 뒤를 이은 이세황제는 양제와 달리 이렇다 할 통치행위 조차 하지 못하고 자결로 생을 마감하였다.[8] 문제 추증[9] 보통은 당나라가 비하할 목적으로 올린 양제(煬帝)라는 시호가 더 잘 알려져 있으나, 정식 시호는 명황제이다. 그 외에 민황제(閔皇帝)라고도 한다.[10] 3대 황제 수공제와 재위기간이 어느 정도 겹치는데, 이것은 수양제는 강남(중국)으로 피난가서 죽었기 때문이다.[11] 양저우 근교에 정식 능호 없이 양광의 무덤으로 알려진 무덤이 전해지고 있었으나, 2013년에 양저우에서 수양제의 진짜 무덤이 발굴되었다.[12] 황태주 추증[13] 당고조 이연에 의해 장안에서 옹립된 황제. 재위기간이 약간 겹치는 것은 당고조가 수양제를 태상황으로 간주(즉 폐위)했기 때문이다. 말 그대로 꼭두각시 황제였으며, 선양후 619년 암살당했다.[14] 공황제(恭皇帝)라고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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