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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량카이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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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역사
2.1. 몽골 제국 시대2.2. 만주의 우량카이와 올량합 3위2.3. 우량카이 투멘
3. 기타4. 갤러리5. 같이보기

1. 개요

【언어별 명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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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dcdcdc,#1c1d1f> 몽골어 ᠤᠷᠢᠶᠠᠩᠬᠠᠶ(몽골 문자) / Урианхай(키릴 문자) (오량하이 / Uriankhai)
영어 Uriankhai
러시아어 Урянхайцы
중국어 烏梁海 ㄨ ㄌㄧㄤˊ ㄏㄞˇ(정체자) / 乌梁海 Wūliánghǎi(간체자) (옛: 兀良哈 ㄨˋ ㄌㄧㄤˊ ㄏㄚ Wùliánghā)
일본어 ウリャンカイ
한국어 우량카이 (옛: 오랑캐) }}}}}}}}}

바이칼호 동남쪽 헨티산맥 일대에서 거주하던 몽골계 집단.

언어는 몽골어를 사용하고[1], 종교는 티베트 불교 혹은 몽골계 샤머니즘을 신봉한다. 오늘날에도 몽골 훕스굴 호와 헨티산맥 근방에서 거주하고 있다. 인구는 2010년 기준 26,654 명이다.

2. 역사

2.1. 몽골 제국 시대

이 시기 우량카이라는 말은 바이칼 호수 동남쪽 헨티산맥 일대의 삼림지대에 거주하던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이었다.[2] 이전 시기에도 우량카이의 조상으로 추정되는 부족들이 있지만 오늘날 우량카이의 직접적인 조상은 바로 이들이다.

《집사》(集史)의 <우량카트 부족지>에서는 우량카이를 북쪽의 숲에 사는 수렵민 우량카이족과 몽골화된 초원 지역에 진출한 유목민 우량카이족으로 양분하여 설명하고 있다. <우량카트 부족지>는 수렵민 우량카이족염소야크의 종류도 모르고, 목초지도 (펠트)천막의 주거도 모르며, 가죽 덮개를 하고 살아왔지만 우연히 자신들의 거주지를 헤매다가 양을 발견하게 되었고, 마침내 그 양이나 소의 생육 장소를 물색하던 중에 삼림 지대에서 초원으로 진출했다는 유목민 우량카이족의 근원 설화를 전하고 있다. 《집사》(集史)에서는 삼림 지대에 거주하는 전자의 '수렵민 우량카이족'을 숲의 우량카트라고 불렀다. 또 이 '숲의 우량카트'는 코리, 토마트, 키르기스 등과 경계를 접하고 있었다고 한다. 몽골 제국 시대에 활약한 우량카이 부족 출신 인물로는 이른바 사준사구젤메수부타이 두 사람이 있었다.

일 칸국의 재상이었던 라시드 앗 딘이 저술한《집사》에 의하면 칭기즈 칸과 그 후손들이 묻힌 헨티 산맥의 금전지를 수호하는 자는 우량카이의 수장이었다.

젤메의 후손은 우량카이를 분봉받고 그 일대를 지배했다.

사하인 또한 우량카이라 불렀는데, 몽골제국 시기 바이칼 호 근방에 살던 사하인들이 우량카이라는 말을 받아들이고, 이후 오늘날의 사하 공화국 근처로 이동한 후에도 계속해서 사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2.2. 만주의 우량카이와 올량합 3위

젤메의 후손이 다스리던 우량카이 중 일부는 옷치긴 왕가가 다스리던 만주로 이동한다. 이들은 만주에 유목하면서도 우량카이라는 이름을 그대로 사용하였다. 그러다 1389년 옷치긴 왕가의 군주인 아자스리가 명나라에 항복하자, 당시 이들을 이끌던 토쿠차르도 함께 항복하였다. 명나라는 아자스리가 다스리던 땅에 태녕위, 타안위, 복여위 3위를 설치하고 이를 올량합 3위[3]라 불렀다. 태녕위, 타안위, 복여위는 아자스리 밑에 있던 3개의 유력 부족들을 가리킨다. 올량합3위의 자세한 설명은 아래와 같다.
  • 태녕위(泰寧衛)는 본래 옹니우드라는 이름의 부족으로, 왕이 이끄는 부족이란 뜻이다. 여기서 왕은 요왕(遼王)을 가리킨다. 태녕이란 이름은 원나라 태녕로(泰寧路)에서 가져왔다.
  • 타안위(朶顔衛)는 본래 우량카이라는 이름의 부족으로, 위에서 설명한 것처럼 만주로 내려온 우량카이 사람들을 가리킨다. 타안이란 이름은 이들이 거주하던 예케 두얀 운두르(額客多延溫都兒)[4]에서 따온 것이다.
  • 복여위(福餘衛)는 본래 우지예드라는 이름의 부족으로, 삼림을 뜻하는 여진어 "우디"를 차용해서 부족명으로 사용했다. 원래 우량카이였다가 모종의 이유로 떨어져 나간 것으로 보인다. 복여란 이름은 옛 부여에서 가져온 것이다.

올량합 3위는 북원을 견제하려는 명나라에 협조하여 관직과 물자를 제공받았으며, 명나라와 조공-책봉 관계를 맺으면서 명나라의 통제 밖에 있었다. 3위는 북원 세력과 혼인 동맹을 맺으며, 이중적인 외교 노선을 취했고, 3위의 수령 임명과 작위의 계승 또한 스스로 결정하고, 추후 명나라에 통보하는 식이었다. 만주 지역에 거주하던 이들은 영락제가 명나라 국경을 남하하면서 연산산맥 바로 앞 지역에 공백이 생기자, 그 근처로 남하한다.

이 중에서 가장 강했던 부족은 우량카이족으로, 3위 중 가장 명나라와 가까이 있었다. 이후, 옹니우드는 차하르에, 우지예드는 내할하에 흡수되었다. 내할하에 흡수된 우지예드는 호르가치 하사르의 아들 쇼한 조릭투 홍바투르에게 분봉되었다. 쇼한 조릭투 홍바투르는 투멘 칸, 우량카이족과 함께 요동을 지독하게 공격하였다. 그래서 요동은 토만(土蠻)과 초화(炒花) 두 이름을 두려워했다. 이여송 또한 쇼한 조릭투 홍바투르에게 살해되었다. 우량카이족은 3위 중 유일하게 살아남았고, 존속하면서 청나라의 지배 아래 있었다.

2.3. 우량카이 투멘

젤메의 후손들은 북원 시대에도 계속해서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에르덴 톱치[5]에서 다얀 칸이 다음과 같은 말을 하는데,
"그리고 마찬가지로, 너희 우량카이 사람들은 할 일을 다하는 훌륭한 사람들로, 의 제국의 부를 지키고 있다."

여기서 제국의 부는 칭기즈칸 일족의 무덤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다얀 칸 시기에도 이들은 계속해서 칭기즈칸 일족의 무덤을 지키고 있었던 것이다. 다얀 칸은 에센 사후 혼란스러웠던 몽골을 통합하고 6투멘을 새로 조직했는데, 우량카이도 그 중 하나였다. 우량카이는 다얀 칸의 후손이 아닌, 젤메의 후손이 직접 지배했다. 우량카이를 제외한 나머지 5투멘이 모두 다얀칸의 후손들의 지배를 받게된 것을 생각해보면 이는 큰 혜택이라 볼 수 있었다.
파일:6투멘 지도.png
6투멘 지도

다얀 칸은 어머니와 왕세자비가 우량카이부 출신의 인물로 우량카이와 대칸 사이에는 친밀한 관계가 있었다. 그러나 다얀 칸의 뒤를 이은 보디 알라그 칸은 우량카이와 관계가 없어 우량카이부의 입장은 변화하게 되었고, 마침내 우량카이는 반란을 일으켰다. 알라그 칸은 군빌리크, 알탄 칸 등과 함께 반란을 진압했고, 투멘을 완전히 해체해버렸다. 우량카이 사람들은 나머지 5투멘이 나눠 가졌다. 우량카이 투멘의 해체는 몽골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가진다. 할하의 서진이 우량카이의 해체 덕분에 가능했기 때문이다. 동쪽에 있던 할하는 서쪽으로 알타이 산맥까지 진출하면서 오늘날 몽골 영역의 기틀을 만들었다.

우량카이 투멘 해체 후 우량카이는 일개 오톡[6]으로 전락한다. 우량카이 오톡은 게레센제의 막내 아들, 사무 부이마가 상속받는다. 일부 우량카이 오톡은 서진해서 할하 우익에 속하게 되었고, 투바 일대와 훕스굴 호, 탄누산맥, 알타이 근방에 거주했는데, 여기서 탄누 우량카이와 알타이 우량카이라는 말이 나왔다. 탄누 우량카이라는 말은 청나라 시대에도 그대로 사용된다.

3. 기타

  • 우량카이가 한국어 오랑캐의 어원이라는 주장이 있다. 하지만 현재 한국 사학계에서 오랑캐의 어원은 와르카를 가리키던 말로 보고 있다.
  • 인터넷 상에서 몽골인들이 우량카이를 멸칭으로 썼다고 하는데, 근거를 찾아보기 힘든 말이다. 몽골에서 우량카이는 단순히 삼림에 거주하는 부족을 뜻하는 말로 사용되었다.
  • 기록에 의하면 이들은 금발이었다고 한다. 현대 몽골에도 몇몇 소수의 자연 금발인 사람들이 있는데 이들의 후손인 것으로 보인다.
  • 여담으로 중국의 몽골족 성씨 중에 '우량카이'(兀良哈, 올량합)가 있다고 한다.

4. 갤러리

Uriankhai People
파일:external/c2.staticflickr.com/15637666641_9d46c2b93b_b.jpg 파일:external/c2.staticflickr.com/5675524392_8e8748e39b_b.jpg
파일:external/www.mongolia-attractions.com/mongolian-ethnicity-21597968.jpg 파일:external/skyetalk.files.wordpress.com/img_2988.jpg

5. 같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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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단, 탄누 우량카이라 불렸던 투바의 경우, 튀르크 계통의 언어를 사용한다.[2] 오늘날 몽골에서는 우량카이를 부족을 가리킬 때 말고는 쓰지 않는다. 사실 우량카이라는 말 자체가 원래 몽골어가 아닐 수도 있다. 프랑스 학자 D'Ohsson은 "Histoire Des Mongols, Depuis Tchinguiz-Khan Jusqu'À Timour Bey Ou Tamerlan"에서 퉁구스인들이 시베리아 동부 지방의 넓게 펼쳐진 땅을 우량카이라 불렀고 이를 몽골인들이 차용한 것이라 설명한다.[3] 명나라는 우량카이를 올량합(兀良哈)이라 불렀다.[4] 커다랗고 부유한 산이라는 뜻이다. 대흥안령에 위치한다.[5] 일명 몽고원류(蒙古源流)[6] 투멘 밑의 조직단위였다. 다얀 칸 시절부터 사용하기 시작했고, 기존의 밍간(천호)를 대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