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2-04-24 22:03:03

칭기즈 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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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 제국 초대 대칸
ᠴᠢᠩᠭᠢᠰ ᠬᠠᠭᠠᠨ | 칭기즈 칸
원 추존 황제
太祖 | 태조
파일:800px-YuanEmperorAlbumGenghisPortrait.jpg
묘호 <colbgcolor=#ffffff,#191919>태조(太祖)[1]
시호 법천계운성무황제(法天啓運聖武皇帝)
칸호 칭기즈 칸
成吉思汗(성길사한), 青吉思汗(청길사한)
ᠴᠢᠩᠭᠢᠰ ᠬᠠᠭᠠᠨ
Чингис хаан
보르지긴
孛兒只斤(패아지근)
ᠪᠣᠷᠵᠢᠭᠢᠨ
Боржигин
테무진
鐵木眞(철목진), 特穆津(특목진)
ᠲᠡᠮᠦᠵᠢᠨ
Тэмүжин
신장 약 180cm[2]
생몰 기간 1162년 11월 12일?[3] ~ 1227년 8월
재위 기간 1206년 ~ 1227년 8월
1. 개요2. 칭호3. 일대기
3.1. 가계3.2. 어린 소년시절3.3. 고난의 세월3.4. 세력 확장3.5. 통일 전쟁3.6. 통일 전쟁 이후3.7. 세계 정복
3.7.1. 서하 원정3.7.2. 금나라 원정3.7.3. 서요 원정3.7.4. 호라즘 원정
3.8. 최후
4. 평가
4.1. 인재 중시4.2. 위대한 정복자4.3. 성격4.4. 세계 각국의 평가
4.4.1. 몽골4.4.2. 동아시아
4.4.2.1. 한국4.4.2.2. 중국4.4.2.3. 일본
4.4.3. 중동, 남아시아, 중앙아시아4.4.4. 서양
4.5. 총평
5. 가족 관계6. 이야기거리7. 이름 표기8. 어록?
8.1. 인터넷발 칭기즈 칸 어록
9. 각종 매체에서10. 같이보기11. 둘러보기

[clearfix]

1. 개요

몽골 제국의 건국자이자 초대 대칸이며 전 세계를 통틀어 가장 땅을 많이 넓힌 군주로, 인류 최대의 정복군주이다.[4] 또한 상상을 초월하는 수많은 대량학살과 잔혹한 전쟁 범죄를 저지른 최악의 학살자이도 했다.

본명은 보르지긴 테무진, 성이 보르지긴[5]이고 이름이 테무진이다. 현대 몽골어로는 Боржигин Тэмүжин(Borjigin Temüjin), 한자로는 孛兒只斤 鐵木眞(패아지근 철목진)이라고 적는다. 몽골어로 철인(人)이라는 뜻이며[6] 아버지 예수게이가 전투에서 쓰러뜨린 적 부족장의 이름을 땄다고 전해진다. 손자 쿠빌라이 칸원나라를 개창한 이후 태조라는 묘호를 받았다.

여러 가지로 볼 때 현대 국가인 몽골의 시조다. 칭기즈 칸의 통일 이후 《대(大) 야삭》(ᠶᠡᠬᠡ ᠵᠠᠰᠠᠭ / Их Засаг)[7]이라는 사실상의 법률과 문자가 만들어졌다. 또한 전 세계가 깜짝 놀랄 정도의 눈부신 군사적 업적을 통해 인류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였다. 몽골인들도 자랑으로 여기는지 수도 울란바토르의 칭기즈 칸 광장[8]과 제 1의 공항인 칭기즈 칸 국제공항 등에 그 이름을 기리고 있다.

독일의 아돌프 히틀러와 비슷한 잔인한 정복자[9]에서부터 동서 문명의 교류를 촉진시킨 영웅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면서도 상반된 평가를 받는 인물. 살기 위해 벌인 숱한 전쟁에서 살아남다 보니 태초의 의도와 달리 거물이 되어버린 양반이다. 특히 대항해시대를 열어서 서유럽이 현대 세계를 만들었다고 보는 학자들은 "칭기즈 칸과 몽골의 등장은 세계사에서 아주 중요한 사건"이라고 평가를 내린다. 그러나 이에 대해 부정적인 사람들에게는 여전히 갈아 죽여버려도 시원치 않은 악당 취급을 받고 있다. 중동이나 러시아처럼 철저히 유린당했던 나라[10]는 싫어하는 편이고,[11] 그루지야, 헝가리, 불가리아, 베트남 등 칸국들이나 원나라와 엎치락뒤치락 싸웠던 나라들은 내심 몽골을 막아낸 업적에 자긍심을 느끼고, 서유럽 같은 곳은 몽골인을 직접 대면하진 않았기 때문에 싫어한다기보단 군사에나 통달한 유목민 이미지가 강하다. 의외로 동유럽에서도 이미지가 그렇게까지 부정적이진 않다. 침략을 당하긴 했지만 러시아와 달리 몽골의 지배를 받지 않았고 오히려 막아내는 데 성공했기 때문. 가장 싫어하는 곳은 역시 직접 제대로 털린 서아시아다. 이쪽에서는 이름도 함부로 못 꺼낸다는 말이 있다. 다만 터키는 중동 지방에서는 좀 독특하게도 무슬림의 원조인 아랍 계통이 아니라 유목민족인 튀르크이기 때문에 같은 유목민족인 몽골족과 통혼한 역사도 있고 해서 테무진 같은 몽골식 이름으로 불리는 사람들이 있다. 그 외에 터키에는 텡기즈(칭기즈), 아틸라 등의 이름을 가진 사람들도 있다.

역사 관련 팟캐스트 진행자인 Dan Carlin은 몽골 제국 관련 에피소드를 소개하면서 "나폴레옹 1세나 카이사르나 알렉산드로스 3세나 대단한 업적을 남긴 위인으로 칭송받지만, 결국엔 자신의 권력을 위해 학살하고 약탈을 한 인간들이며, 그들이 남긴 '업적'들은 죄다 그 권력 다툼의 부산물"이라며 "칭기즈 칸이라고 그들보다 더 사악하다고 볼 순 없다"는 식으로 얘기했다.[12] 실제 칭기즈 칸이 나쁜 놈이긴 하지만 학살과 파괴를 너무 잘했을 뿐이지 다른 독재자/정복자와 본질적으로 같으며 더한 사람이라고 볼 순 없다는 서유럽 학자들도 많다.

2. 칭호

칭호인 칭기즈 은 1216년부터 칭하기 시작했다. 칭기스의 정확한 뜻에 대해서 2~3가지 설이 존재하나 확실치는 않다. 그 중 하나는 위대한이라는 뜻이다.[13] 당시의 몽골어로는 '칭기스 칸'이라고 부르는 것이 실제 발음에 가장 가깝다고 하며,[14] 오고타이 칸 이후로는 '칭기스 카간', 13세기 후반 이후로는 '칭기스 카안' 으로 불렸다고 한다. # 현대 몽골어로는 발음이 '칭기스 하앙 [ˈt͡ɕʰiŋɡɪs χaːɴ]'에 가깝고 표기되어 있으나, 실제 현대 몽골인들은 징기스로 발음한다. (KBS 역사의 그날, 실제 몽골인들의 육성 발음 참조)

'칭기스'(Чингис)는 몽골어로 '위대하다'를 뜻한다. 어원에 대해 다양한 설이 존재하는데 라시드 앗 딘은 '칭'의 의미는 '단단하고 강하다' 는 뜻이며 '칭기즈'는 '칭'의 복수형이라고 기술했다. 또한 학자 펠리오에 의하면 몽골어에서 '칭'의 복수형이 칭기스가 될 수 없고, 호수, 바다를 의미하는 튀르크어인 'tangiz'에서 온 것으로 추정했다. 이 견해를 받아들이면 칭기즈 칸은 '사해의 군주', '세계의 군주'라는 의미가 된다.

이 외에도 중국어 '천자'(天子)나 새가 우는 소리를 나타내는 의성어에서 비롯되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3. 일대기

3.1. 가계

칭기즈칸의 부족인 몽골은 튀르크계 위구르 제국의 해체 이후 바이칼 호수 방면에서 남하해 몽골 고원의 북동부에 퍼져 살았다. 칭기즈칸의 생애를 그린 몽골의 전설적인 역사서 《몽골비사》(원조비사)에 의하면, 그의 원조는 하늘의 명령을 받고, 바이칼 호수에 강림한 보르테 치노[15]와 그의 아내가 될 코아이 마랄[16]이었다고 한다. 보르테 치노의 11대손인 도분 메르겐('명궁')은 알란 코아('미인')와의 사이에서 두 아들인 벨구누테이(벨구누드 씨족의 조상)와 부구누테이(부구누드 씨족의 조상)를 두었지만 일찍 죽었고, 도분의 사후, 알란 코아는 하늘에서 내려온 신의 빛을 받아 남편없이 3명의 아들, 즉 부쿠 카타기(카타긴 씨족의 조상), 부카투 살지(살지오드 씨족의 조상), 보돈차르 문카그(보르지긴 씨족의 조상)를 낳았다. 칭기즈 칸의 가계인 보르지긴씨[17]의 선조가 되는 보돈차르 문카그는 알란 코아가 낳은 아들들 중 막내였다.

보돈차르 문카그의 자손은 번창하여 다양한 씨족을 형성했다. 보돈차르 문카그의 7대손 카불 칸(1120년~1149년 재위, 카이두의 증손)이 처음 몽골족의 지파를 통일하고, 카마그 몽골을 건설한 후, 대칸의 칭호를 획득했다. 카불 칸의 후계자는 그의 6촌인 암바가이 칸(1149~1156년 재위)이었다. 뒤에 카불 칸의 후손들은 키야트 가문, 암바가이 칸의 자손은 타이치우드 가문으로 분화되었다. 칭기즈칸의 아버지 예수게이는 카불 칸의 4남인 카마그 몽골 제3대 칸, 쿠툴라 칸(1156~1161년 재위)의 조카였다.

3.2. 어린 소년시절

칭기즈칸은 오늘날 몽골 동부 헨티 아이막(Хэнтий аймаг)[18]에 흐르는 오논 강 유역에서 몽골족의 한 갈래인 보르지긴 오복 키야트[19] 씨족의 씨족장 예수게이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머니 호엘룬은 콩기라트(온기라트, 옹기라트) 부족의 올쿠누드 씨족[20] 출신으로 원래 메르키트족의 칠레두와 결혼했으나, 남편과 함께 올쿠누드에서 메르키트로 떠나던 도중에 예수게이에게 납치되어서 그와 결혼하게 되었다.[21] 칭기즈칸이 태어난 날에 아버지 예수게이가 죽인 타타르족[22] 장수 테무진 우게의 이름을 따와서 이름을 테무진이라 했다.(출처: 《몽골비사》 1권 59절)

이후 테무진이 9살 되던 해(1171)에 예수게이가 테무진을 데릴사위로 보낸 뒤 홀로 돌아오는 길에 적대적인 타타르 부족장들에게 독살당하는 사건이 일어났다{시라 케헤르('초원')의 변}.[23] 그러자 예수게이의 카리스마로 뭉쳐져 있던 부족민들이 흩어지고, 테무진 일가에게는 엄청난 시련이 닥쳤다.

칭기즈 칸은 아버지의 독살로 평생 타타르에 대한 깊은 원한을 갖게 되었다. 물론 아버지를 독살한 것만으로도 충분한 사유가 되지만, 다른 측면도 작용했다. 몽골 초원에서는 '접대의 관습'처럼 '아무리 적대시하는 인물이라고 해도 일단 손님으로 방문한 사람은 해치지 않고 후하게 대접하는 관습'이 있었다. 예수게이도 이를 알고 있었기에 적대하던 타타르를 만났을 때도 '설마 손님 자격인 나를 해칠까'라고 생각하고 잠깐 방심했는데, 타타르족은 되려 이를 악용해 손님으로 대접하는 척 하고 그를 독살한 것이다. 차라리 대놓고 칼싸움을 벌여서 죽였다면 모를까, 이런 식의 뒤통수 치기는 당시 몽골의 풍습에서도 대단히 질이 낮은 행위였다. 그래서 칭기즈 칸은 타타르족에 대한 원한이 유독 컸던 것이다.

테무진이 예수게이의 아들이 아니기 때문에 예수게이 사후 부족민들이 테무진 일가를 매정히 버렸다고 하는 견해도 있는데, 그럼 테무진의 형제는 왜 버렸을까라는 의문이 생긴다. 혈통 때문에 테무진의 가족을 버렸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그리고 《몽골비사》의 기록을 신뢰한다면 호엘룬은 예수게이에게 시집간 후 몇 년 동안 자식을 못 가졌다. 즉 나중의 주치의 사례와 달리 테무진이 메르키트족의 아이일 수는 없다. 게다가 유전자 감식 같은 기법은 없는 시대라도 양이나 말 등을 많이 키우는 유목민 사회에서는, 동물의 임신이나 출산에 해박하고 자연히 인간의 임신이나 출산에도 정통하게 된다. 따라서 산달이나 다른 남자와의 접촉 등을 깐깐하게 따지기 때문에, 임신기간이나 출생에 조그마한 의심점이라도 생기면 계승권은 고사하고 목숨 부지하기도 힘들다. 일례로 칭기즈 칸의 맏아들인 주치 역시 칭기즈 칸이 일단 아들로 받아들였지만, 결국 모호한 출생 문제 때문에 후계자 다툼은커녕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먼 변방으로 밀려나 씁쓸히 병사했다.

예수게이 사후 키야트 보르지긴 씨족의 행방은 기록마다 다른데, 우선 《몽골비사》에 따르면 아버지 사후 친척들과 씨족 사람들 모두 떠나버렸다. 카불 칸의 장남 오킨 바르칵의 후손들인 키야트 주르킨 씨족, 암바가이 칸의 후손들인 타이치우드 씨족으로 가서 가문이 완전히 망해버려 남은 부족 인원이라곤 자신과 어머니, 형제들을 포함해서 성인 남성이 하나도 없이 고작 아홉 명이 돼버렸다. 어찌나 차갑게 버림을 받았는지, 예수게이의 부하인 콩고탄 씨족의 차카라 노인이 떠나가는 부족 사람들을 붙잡으며 가지 말라고 하자 그대로 투두엔 기르테에게 죽임을 당하는 일도 있었다. 더불어 훗날 테무진이 자라서 부족을 버린 것을 보복할까봐 두려웠던 다른 부족장들은 테무진을 죽이기 위해 추격꾼까지 풀어버리는 짓을 벌였고, 때문에 테무진과 가족들은 초원을 떠나 숲 속과 산 속에서 숨어 살며 매우 가난하게 살아야 했다. 지금의 남시베리아에서 여자와 어린이가 포함된 아홉 명이 추적자를 피해 늑대를 쫓아내고, 고기 잡으며 살아야 했으니 그 고생은 엄청났을 것이다.(출처: 《몽골비사》 67절 ~ 75절)

이러한 시기에 테무진의 이복 형제였던 벡테르, 벨구테이[24] 테무진 형제의 사냥물을 빼앗아가 자주 갈등을 빚었다. 그리고 어느 날 낚시한 생선을 벡테르 형제가 빼앗아가자 분노가 폭발한 테무진은 동생 카사르와 같이 벡테르를 활로 쏘아 그를 죽여버린다. 다만 벡테르가 자신의 가계를 잇게 해달다는 간청에 동생 벨구테이는 살려준다.[25] 이로 인하여 어머니 호엘룬에게 "친구라고는 그림자밖에 없는 처지에 자기 형제마저 죽인 놈" 이라며 욕을 들었다.(《몽골비사》 2권 76~78장)

테무진의 형제 살인을 두고 벡테르가 나이를 앞세워 어머니 호엘룬과 결혼해 테무진으로부터 가장의 지위를 빼앗으려 해서 죽였다는 설도 있다. 유교 문화권과 달리 당시 몽골 지역 풍습상 아버지가 죽으면 아들이 (친어머니를 제외한) 아버지의 남은 부인들을 자신의 부인으로 거둘 수 있었기 때문에[26] 어머니 호엘룬과 벡테르가 결혼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다만 라시드 앗 딘의 기록은 조금 다른데, 예수게이가 죽고 부족민들이 뿔뿔이 흩어진 것까지는 같지만 그 직후 테무진의 어머니 호엘룬이 직접 말을 타고 깃발을 들며 부족민들을 추격했고, 호엘룬을 따르는 사람과 따르지 않는 사람사이에 전투가 벌어졌다고 한다. 전투 끝에 부족민들은 많이 축소되었지만 어느 정도 세력을 유지할 수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다 테무진은 중국의 노예로 잡히고, 포로가 되어 갖은 학대를 당하게 되었다. 그러나 붉은 만월의 날을 기리며 축제가 벌어지자 테무진은 방심한 틈을 노려 탈출을 시도하였고, 이때 평소에도 포로인 자신을 잘 대해주던 술두스 씨족인 소르칸 시라와 가족들[27]의 도움으로 양털 수레 속에 숨어서 탈출에 성공해 코르초코에서 흩어진 가족들과 재회했다. (출처: 《몽골비사》 2권 76절 ~ 88절)

이때 테무진을 공격해 포로로 만든 사람의 이름이 기록마다 다르다. 《몽골비사》에는 부족장 타르고타이 키릴투크[28] 라고 되어 있고, 라시드 앗 딘의 기록에는 자다란(자지라트) 씨족의 족장 자무카 세첸이 자기 친척인 테구 타치르가 울레게이 불락에 방목하던 테무진의 가축을 훔치러 갔다가 테무진의 노예[29]인 주치 타르말라의 손에 죽게 된 일로 앙심을 품어 테무진을 공격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3.3. 고난의 세월

천신만고 끝에 사지에서 도망쳐 나온 테무진은 얼마 후에 가족들의 말을 훔쳐 달아난 말도둑을 잡으러 갔다가 훗날 사준사구의 일원이 되는 보오르추를 만나서 인연을 맺었으며, 그의 도움으로 말을 되찾아오기도 하였다. 또한 어릴 적에 약혼한 옹기라트(콩기라트) 부족의 올쿠누드 씨족 출신으로 데이 세첸의 딸이었던 보르테라는 여인과 재회하여 혼인했다.

어느 정도 여유를 되찾은 테무진은 아버지 예수게이와 '안다의 서약' 을 맺어 의형제[30]를 맺은 적{카라 툰('검은 숲')의 맹약}이 있었던 케레이트 부족의 족장인 토오릴 칸[31]을 찾아가 검은 담비 가죽으로 만든 외투를 선물하고 아버지와 아들의 예를 맺음으로써 부족을 보호해주겠다는 약속을 받아내었다. 이로써 세력을 키울 기회가 생긴 것 같으나 그의 인생에 가장 중요한 사건이 일어난다.(출처: 《몽골비사》 2권 96절)

토오릴 칸을 만나 세력을 회복한 듯 싶었으나 테무진의 세력은 여전히 초원에서는 약자에 불과했다. 어느 날 메르키트 부족이 테무진의 키야트 보르지긴 씨족을 습격하여 아내 보르테를 납치해가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때 테무진의 가족들이 가지고 있는 말이 아홉 마리여서 메르키트족이 오는 걸 처음 발견한 노파와 벨구테이의 어머니 소치겔, 그리고 보르테를 버려야할 만큼 미약한 세력을 가졌었다. 당연히 테무진은 스스로 아내를 되찾아오는 일도 불가능했다.[32]

테무진은 토오릴 칸과, 어린 시절부터 친구였던 자다란 씨족의 수장 자무카[33] 등의 도움을 받아 40,000명의 케레이트-자다란-키야트 연합군으로 메르키트를 보오라 초원(부쿠라 케헤르) 전투(1182년)에서 개발살내고, 간신히 아내를 되찾을 수 있었다.[34] 그러나 아내인 보르테가 메르키트족에게 붙잡혀있는 동안 메르키트족의 장수였던 칠게르에게 겁탈당했으며[35] 테무진이 구하러 왔을 때에는 이미 임신 중인 상태였다. 그래서 이때 태어난 장남 주치는 두고두고 '남의 씨앗' 이란 의혹을 받아 은근히 천대를 받아야 했다. 다만 칭기즈 칸 스스로는 주치를 자신의 장남으로 대우했고 후계자를 뽑으려 할 때도 제국을 주치에게 물려주려 했다. 그럼에도 주치의 출신 문제는 두고두고 후계 계승 문제에서 갈등을 빚는 요인으로 작용했다(메르키트 콤플렉스).

아내를 되찾은 후에도 조금씩 부족 세력을 불려갔으나 여전히 테무진의 힘은 미약하기만 했다. 일단 그 시작부터가 자무카의 부장 정도에 불과했으며 가문빨이 끝내주던 자무카와 달리 테무진의 가문은 아버지가 독살당하던 시절에 부족민들이 배신하고 흩어져 버렸기 때문에 지원을 받을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36] 그야말로 의지할 데라고는 자기 자신과 부하들뿐이었던 것이다.

3.4. 세력 확장

메르키트족의 습격은 테무진의 일생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으로 여겨지는데, 그 이유는 이때부터 그의 전사로서의 삶이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타타르, 타이치우드, 메르키트 같은 강한 부족과 만나면 죽는 비정상적인 상황이 반복되었기에 테무진은 힘을 합쳐 메르키트를 무찌른 후에 잠시 동안 자무카의 자다란 부족에 몸을 의탁했다. 자무카는 성공적인 메르키트 토벌에서도 알 수 있듯이 군사적 재능이 뛰어난 자로 의형제 테무진이 아내를 뺏기고 군사가 한 줌도 없었던 시절에 20,000명의 군사를 불러모을 수 있었다. 그러나 주르킨 씨족[37]과 같은 왕족들도 있는 마당에 검은 뼈인 자신이 이들을 모두 다스리기엔 부담이 되었는지 테무진을 공동의 우두머리로 두는 과두정치를 행했다. 이 시절에 테무진은 부하라고는 혈통상 아무 관련 없는 아를라트 보오르추와 노예 출신 우량카이 젤메뿐이었던 만큼 부하들을 혈통, 출신에 상관 없이 능력과 충성에 따라 대하였다. 이런 태도 때문에 테무진의 인기는 부족 내에서 날이 갈수록 올라갔고, 자무카는 이를 경계해 테무진과 결별을 선언했다.[38] 결별할 때 자무카를 따르던 사람들이 테무진을 따라서 같이 갔는데 자무카를 떠나는 와중에 원수인 타이치우드 씨족을 만났다. 이때 타이치우드 씨족은 테무진이 자신들을 알아보고 해코지할까봐 황급히 떠났다. 자무카에서 갈라나온 테무진 세력이 (부족이 아닌) 씨족 중에 매우 강했던 타이치우드보다 강했다는 것은 자무카의 세력이 그만큼 강했으며(타이치우드를 제외한 몽골족을 거의 통일했을 가능성이 높다.) 테무진이 세력의 틀을 형성한 때가 자무카의 부장 시절이고 여기에 옹 칸의 공은 적었음을 알 수 있다.

이후에 자신을 지지하는 부족들에 의해 카마그 몽골의 칸으로 추대되었다(1189년).[39] 그리고 그 동안 자신을 따라준 장수들과 부하들, 형제들에게 관직을 나누어 주는 등 논공 행상을 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테무진 칸의 말을 지키던 말지기들이 말을 빼앗아 타고 달아나는 말 도둑을 활로 쏘아 죽인 사건이 일어났다. 문제는 그 말 도둑[40]이 자무카의 사촌 아우 다이차르였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자무카와 테무진 칸의 관계는 급속히 악화되었다. 그리하여 테무진과 자무카는 각각의 세력을 13 쿠리엔[41]으로 구성해 13익의 전투(또는 달란 발주트 전투)를 벌였다(1190년). 하지만 이 싸움에서 테무진 칸은 참패를 당하고 살던 곳에서 밀려나 제레네 협곡으로 물러나야만 했다. 이 패배로 본인 직계 가족으로 이루어진 1익, 본인과 친위병으로 이루어진 2익을 제외, 친족으로 이루어진 11개 진영 중 8익을 제외한 나머지 진영이 모두 떠나가 버렸다. 이 후 기록에 4년의 공백이 있는데 일부 학자들은 이후 금나라가 케레이트 자카 감부[42]와 테무진에게 토오릴 칸을 도와 타타르족을 공격할 것을 명령한 것으로 보아 이 시기 칭기즈 칸이 금나라의 노예로 있었거나 금나라에 정치적 망명을 떠난 것이 아닌가 추측하기도 한다[43][44]

1194년 테무진 칸은 타이치우드족의 족장 타르고타이 키릴투크와 쿠이텐 들판에서 싸워 타르고타이를 격파했다(제1차 쿠이텐 전투). 이에 타이치우드 휘하 베수드 씨족의 지르고가타이도 도망갔다. 후신 보로클이 지르고가타이를 추격했는데 이때 보로클은 테무진 칸의 입술이 백색인 말을 타고 있었다. 도망치던 지르고가타이는 보로클이 탄 말의 경추골을 정확하게 쏘아 맞춰고 달아날 수 있었다. 후에 지르고가타이는 숲에 숨어있다가 결국 투항했는데 테무진 칸은 자신의 말의 경추골을 쏘아 맞춘 자라 하여 '제베'('화살촉')란 이름을 하사했다. 그때 옛 은인이었던 술두스 소르칸 시라의 아들 티라운도 함께 투항했다.

이후 오로오드족과 망고드족[45]이 테무진 칸의 세력에 합류하게 되어 오난(오논) 강 숲속에서 이를 축하하는 자리를 가졌는데, 이 자리에서 테무진 칸의 보르지긴 오복 키야트와는 같은 혈통에 속하는 주르킨 씨족[46]이 행패를 부리자 테무진 칸이 화가 나서 술을 마시다 말고 이들과 패싸움을 벌였다.[47] 결국 싸움은 화가 머리 끝까지 치솟은 테무진 칸이 주르킨 씨족 족장 사차 베키의 어머니(선대 칸의 부인들)를 인질로 잡고 협박한 끝에 끝이 났다. 이래저래 세력이 약해서 밀리는 형국에다가 같은 부족에 속하는 씨족들마저 말을 들어먹지를 않으니 단단히 짜증이 난 모양이다. 나중에 술이 조금씩 깨자 어느 정도 적당한 선에서 화해를 하고 물러나지만 이후 앙금이 풀리지는 않았다.

이렇게 힘든 세월을 보냈지만 금나라의 황제 장종(1189~1208 재위)이 '왕경 승상'[48], 즉 승상 완안량에게 명령하여 금나라를 배신한 타타르 족장 메구진 세울투를 토벌하게 했다. 완안량의 요청을 받아 테무진 칸은 케레이트의 토오릴 칸과 함께 금나라 군대와 연합하여 타타르족을 정벌하게 되었다.[49] 1194년 겨울, 타타르족과의 코소토 시투엔 전투에서 승리한 테무진 칸은 오랜 숙적이었던 타타르를 무찌르고 타타르 족장 메구진 세울투를 잡아 죽이는 등 크게 활약하며 명성을 떨쳤다.

이 일로 공로를 인정받아 금나라로부터 '백부장'('자오드 코리')의 별 볼 일 없는 직위를 하사받았지만 이로써 테무진 칸의 세력은 본격적으로 성장하게 되었다.[50][51] 이때 말을 듣지 않아서 술판에서 싸움이 났던 주르킨 씨족도 델리운 볼닥 전투에서 이겨 완전히 씨를 말려버렸고(1194년 겨울~1195년 봄), 주르킨 족장 사차 베키는 그 후 추격하여 죽였다[52]. 또한 이복동생 벨구테이의 어깨를 칼로 베었던 원수인 부리를 잡아 벨구테이의 손에 죽게 하였다.[53][54]

타타르 정벌전 이후 1195년 케레이트의 옹 칸은 나이만의 이난차 빌게 칸에게로 도망쳤던 동생 에르케 카라의 공격을 받아 패전하고 서요로 달아났다. 하지만 서요에서도 쫓겨난 옹 칸은 낙타 피를 마시며 겨우 초원으로 돌아왔다. 이런 그를 테무진 칸은 맞아들이고, 다시 한번 의부로 삼으며 케레이트의 수복을 약속했다. 1196년 테무진 칸은 곧장 케레이트의 에르케 카라를 공격하여 카라 툰('검은 숲') 전투에서 승리한 후 옹 칸을 복위시켰다.

이후 테무진은 1197년 가을 메르키트족의 톡토아 베키를 공격하여 모나차 산 전투에서 대승을 거둔 뒤 노획물 전부를 케레이트의 옹 칸에게 보내며 그의 세력을 회복시키는 데 큰 도움을 주었다.[55] 세력이 회복된 옹 칸은 1198년 테무진에게 알리지도 않고 메르키트족을 급습해 부쿠라 케헤르 전투에서 승리한 후, 그 노획물을 혼자서 독차지하였다. 이러한 옹 칸의 욕심과 그로 인한 전리품 분배 과정의 인색함은 둘 사이의 불화를 싹트게 만들었다.

이후 양의 해(1199년) 테무진 칸은 옹 칸과 함께 나이만족을 정벌, 당시 내전중이던 동나이만의 타이 부카[56]와 서나이만의 부이룩 칸 형제[57]를 동시에 공격했다. 먼저 테무진 연합군은 부이룩 칸이 다스리던 키질 바시를 공격했다. 켐 켐치우트[58]로 피신한 부이룩 칸은 부하인 이디 투클룩[59]을 파견했지만 테무진의 전초군대에 패배하고 투클룩 본인도 낙마해 사로잡혔다.[60] 그 뒤 같은 해 겨울 테무진 칸과 옹 칸 연합군은 바이타락 벨치레에서 부이룩 칸의 부하 쿡세우 사브락[61]과 대치했는데 전투를 계획한 바로 전날 밤 갑자기 옹 칸이 주둔지의 불을 피워둬 '테무진'을 속인 뒤 밤중에 군대를 철수했다. 웁치리타이 쿠린 바하두르 등이 옹 칸의 철수를 만류했지만 옹 칸은 결국 타탈 토쿨라로 도주했다.[62] 다음 날 '옹 칸'의 도주를 안 테무진은 "옹 칸이 나를 재난과 화염 속에 던지고 혼자 도망치려 했다"고 분노했고, 전황이 나빴기 때문에 테무진도 사리 케헤르로 철수했다. 테무진 연합군이 철수한 것을 안 쿡세우 사브락은 반격을 시작, 먼저 옹 칸을 뒤쫒아가던 옹 칸의 두 동생 빌카과 자카 감부의 군대를 이데루 알타이에서 급습하고, 그 뒤 옹 칸의 울루스[63]가 있는 달라두 아마사라를 공격, 옹 칸의 백성들과 재산 가축 등을 노획한 뒤 옹 칸의 본진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여기에 정벌당했던 메르키트 족이 쿠두와 칠라운을 중심으로 옹 칸에게 반기를 들기 시작했다. 케레이트가 안밖으로 쑥대밭이 되고, 자기 목숨까지 위험해지자 결국 옹 칸은 얼마 전에 배신했던 테무진에게 사자를 보내 "내 자식(양아들로 삼은 테무진)에게 4마리 준마[64]를 청하노라"라는 내용의 구원 요청을 했고, '테무진'도 이에 응해 4명의 장수, 즉 아를라트 보오르추, 잘라이르 무칼리, 후신 보로클, 술두스 티라운을 보냈다. 옹 칸은 홀랄하 산 전투에서 부하 티킨 쿠리와 이투르겐 얀다쿠가 전사하고, 아들인 일카 셍굼마저도 부상당해 몰살당할 위기에서 테무진의 구원군이 도착해 승리하면서 간신히 목숨을 건졌고, 옹 칸은 테무진 칸에게 잘못을 빌면서 자신의 아들인 셍굼과 테무진 칸으로 하여금 서로 의형제를 맺게 함으로써 상황을 간신히 무마시켰다. 그러나 이때부터 테무진 칸과 옹 칸의 사이는 크게 벌어지게 되었다. 옹 칸은 테무진 칸을 두려워하며 이를 제거할 마음을 품었던 것 같다.

원숭이해(1200년) 테무진은 옹 칸과 사리 케헤르에서 쿠릴타이를 개최했다. 라시드의 기록에 따르면 이 회의에서 옹 칸은 테무진을 제거하려고 했지만 우수 노얀이 견제해서 실패했다고 한다. 그 뒤 테무진은 우수 노얀에게 바아린 씨족의 만호 직위를 주었다고 한다. 쿠릴타이 직후 테무진과 옹 칸은 타이치우드를 공격했다. 테무진 연합군은 타이치우드 군대를 오논(오난) 강 전투에서 격파했다(1200년 초). 이로써 카마그 몽골 울루스 내에서 키야트 보르지긴 씨족과 정통성을 놓고 경쟁했던 암바가이 칸의 후예들인 타이치우드 씨족은 큰 타격을 받고 쇠락하게 되었다.

한편 타이치우드의 패배 이후 이들과 친하고 반대로 테무진을 적대시하던 카타긴 씨족과 살지오드 씨족은 다른 타타르, 두르벤, 쿵크라트(옹기라트)족을 모아 테무진, 옹 칸과 전쟁을 하기로 알쿠이 볼락('샘')에서 서약하고 연합군을 결성했다. 테무진은 쿵크라트 사람 데이 세첸의 밀서로 이 연합을 파악하고 다시 군대를 모아 부이르 나우르(노르, '호수') 전투(1200년)에서 패퇴시켰다.

1200년에는 달란 네무르게스 전투에서 카마그 몽골의 원수이자 5대 부족 중의 하나인 타타르족과 격전을 벌여 마침내 전멸[65]시킴으로써 테무진 칸은 초원 전역에 강력한 위용을 떨치게 되었다.

이후 1201년 옹기라트, 이키레스, 코룰라스, 두르벤, 타타르, 카타긴, 살지오드 등의 씨족들이 켐 강에서 회합하고 자무카를 구르 칸으로 추대했다. 구르 칸 자무카는 자다란, 타타르, 타이치우드, 메르키트로 구성된 연합군으로 공격해왔으나 이 첩보를 들은 테무진은 다시 옹 칸과 연합하여 이디 코르칸[66] 전투에서 자무카의 연합군을 격파했다. 자무카는 도망갔고, 옹기라트족은 테무진 칸에게 투항했다.

옹 칸과 함께 자무카를 꺾으며 초원의 강자로 거듭난 테무진 칸은 과거에 자신을 사로잡아 노예처럼 부리며 굴욕을 주었던 타이치우드족을 섬멸하여 복수하고, 타타르의 잔여 세력을 추격하여 1202년 봄, 달란 네무르게스를 넘어 올코이 강의 지류인 실루겔지트 강 지역에 들어와 있었던 알치 타타르와 차강 타타르를 공격했다(실루겔지트 전투). 이미 달란 네무르게스 전투에서 대부분의 주력 병력을 잃고, 지리멸렬 상태에 있었던 타타르족은 이 전투를 끝으로 영원히 역사속으로 사라지게 되었다. 이때 테무진은 승리를 거둔 후 자신이 직접 모든 전리품을 분배해주겠다고 공언했다.[67] 이전에는 장군들이 직접 약탈을 통해 전리품을 얻고 그 일부를 칸에게 바쳤는데, 테무진은 자기가 모든 결정권을 가지겠다고 한 것이다.[68] 유목민의 오랜 관습과 어긋나는 것에 불만을 품은 알탄(카마그 몽골 제3대 칸 쿠툴라의 아들)과 쿠차르(테무진 칸의 사촌 형제로 네쿤 타이시의 아들)라는 귀족과 테무진의 숙부 다리타이 옷치긴이 이후 자무카에게 귀순하였다[69]

곧이어 1202년 가을에 테무진 칸에게 박살났던 서나이만의 부이룩 칸을 위시한 타타르, 메르키트, 타이치우드, 살지오드, 오이라트, 두르벤, 카타긴 등이 연합하여 테무진과 옹 칸을 섬멸하기 위해 집결했다. 테무진과 옹 칸은 연합하여 금나라가 세운 알란 요새에 들어갔다. 겨울에 알란 요새에서 출격한 테무진은 쿠이텐 들판으로 향했고, 옹 칸은 자무카를 견제하기 위해 출격했다. 부이룩 칸은 무당에게 바람을 부르라고 명했는데, 갑자기 바람이 반대로 불어 눈바람에 반 테무진 연합군은 혼란에 빠졌다. 테무진군은 이틈을 타서 돌격했고 연합군을 대파했다. 한편 옹 칸과 대치중이던 자무카는 퇴각하여 인근의 부족을 약탈했다.

그러나 제2차 쿠이텐 전투(1202년)[70] 승리 이후 타이치우드[71]의 족장 앙쿠 후쿠추를 추격하던 테무진이 적의 화살에 목을 맞아 피를 많이 흘려서 사경을 헤메게 되었다. 다행히 사준사구 중 하나인 우량카이 젤메가 밤새도록 테무진 칸의 피를 입으로 빨고 뱉으며 지혈해주고[72] 적진으로 들어가 말 젖을 훔쳐와 마시게 함으로써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고 한다. 타이치우드족의 앙쿠 후쿠추는 사로잡혀 처형되었다.[73]

3.5. 통일 전쟁

한편 테무진은 케레이트의 옹 칸과 결혼 동맹을 맺기 위해 맏아들 주치와 옹 칸의 딸 차오르 베키, 자신의 딸 코진 베키와 옹 칸의 손자이자 셍굼의 아들인 투스 부카(토사카)를 결혼시키려 했으나 옹 칸의 아들 셍굼이 이 제안을 거부하게 되면서 옹 칸과 테무진 사이는 더더욱 악화되었다. 이에 자무카, 알탄, 쿠차르 등이 셍굼과 연합을 했고 셍굼은 아버지를 설득, 결국 옹 칸과 테무진 사이의 전투가 벌어지게 되었다. 옹 칸은 혼인 제의를 받아들이겠다고 거짓말을 한 후 갑작스럽게 배신을 하고 테무진을 급습하였다(1203년).[74] 옹 칸 연합은 칼라 칼지드 사막(칼라진 엘레트) 전투(1203년, 발주나 전투 혹은 제3차 쿠이텐 전투)에서 테무진의 군대를 급습했고[75] 수적으로 불리했던 테무진 칸은 사기가 떨어져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이에 테무진 칸의 '안다'(의형제)였던 망고드 쿠일다르가 선봉장이 되어 케레이트군의 중앙을 돌파하고, 후방에 있던 쿠이텐 산(또는 굽타 산) 정상에 깃발을 꽂았다. 이에 카마그 몽골군은 일제히 돌격을 감행했다. 물론 쿠일다르는 며칠 있다가 부상으로 사망하게 되었다. 쿠일다르와 오로오드 주르체데이의 분전과 케레이트 셍굼의 부상 덕에 완전한 궤멸은 면했지만 그 피해는 심각하여 이후 점검을 한 결과 병사의 숫자가 2,600명에 불과하였다고 한다. 그 후 발주나 호수[76]에서 19명의 지휘관[77]발준투(즉 '발주나에 같이 있었던 사람들'이라는 뜻이었다.)로 불리게 되었다.]들과 함께 서로의 충성과 신의가 계속될 것이라는 맹약을 하고, 호수의 흙탕물을 술 대신 들이킨다.

이후 테무진 칸은 발주나에서 세력을 회복하며 옹 칸, 셍굼, 알탄, 쿠차르, 자무카 등에게 서신을 보내 이들을 이간질시키고 약화시키려 하였다. 효과가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자무카와 알탄은 옹 칸을 암살하려다 실패하여 동나이만의 타양 칸에게로 도망치게 되었고, 자무카에게 속해있던 다리타이 옷치긴을 비롯한 일부 몽골 부족민, 그리고 이때 옹 칸의 처신에 실망한 케레이트 부족민들이 테무진과 연합하게 되는 결과를 낳았다. 이러던 중 테무진의 동생인 카사르가 발주나에 도착하자 테무진은 이를 이용하여 카사르의 이름으로 옹 칸에게 항복한다는 서신을 보냈다. 옹 칸은 이러한 기만책에 단단히 속게 되고, 테무진은 무방비 상태로 제지르 운두르('고지') 산에서 연회를 하던 중인 옹 칸을 밤중에 급습하였다(1203년 가을). 제지르 운두르 산 전투에서 케레이트족은 끈질기게 3일 동안 저항하였으나 결국 패배하고 항복하고 말았다. 옹 칸과 그 아들인 셍굼은 그야말로 목숨만 건져서 달아났다.[78]

이렇게 몽골 중앙 고원의 최강 세력이었던 케레이트를 제압한 테무진 칸은 몽골 서부 고원의 최강 세력이었던 동나이만의 타양 칸 또한 공격하여 차키르마우트 전투(1204년 가을, 또는 시라 케헤르 전투, 카키드마우드 전투)에서 격파하고, 케레이트에 이어 동나이만도 괴멸시켰다.

이제 카마그 몽골에 의한 통일 전쟁은 거의 끝나가고 있었다. 테무진 칸은 자신의 아내를 납치한 원수이자 5대 부족 중에 마지막으로 남은 메르키트족도 1204년 겨울, 재차 공격하여 다이칼 코르간(타이칼 코르가) 전투에서 톡토아 베키의 군대를 격파한 다음, 도망가는 잔당을 쫓아 철저히 붕괴시켰다. 메르키트의 일부 씨족들은 테무진 칸에게 투항했고, 톡토아 베키와 그 아들은 서나이만의 부이룩 칸에게로 도망쳤다.[79] 테무진 칸은 원한으로 얽혔던 메르키트를 초토화하는 것으로 복수를 단행함으로써 몽골 초원의 최강자로 떠올랐다. 그리고 동나이만에 가서 붙어있던 자신의 친구이자 숙적이었던 자무카의 세력을 완전히 꺾어서 재기 불능의 상태로 만들어버렸다.

이후 자무카는 대여섯 명 정도의 부하들만을 데리고 탄누 산맥속으로 숨어 들어가 도적 생활을 하던 중에 부하들에게 배신당하여 테무진 칸 앞으로 끌려오게 되었다. 테무진 칸은 자무카를 끌고 온 그의 부하들을 비겁하다고 모조리 처형시켰다. 그리고 자무카에게 자신과 함께할 것을 권유하였으나 자무카가 명예로운 죽음을 원하자 피를 보지 않고 죽도록 해주었다(1206년).[80] 이렇게 케레이트의 옹 칸, 동나이만의 타양 칸, 자다란의 자무카, 메르키트의 톡토아 베키 등을 비롯한 모든 숙적들과 싸워 승리를 거둔 테무진 칸은 몽골 초원의 명실상부한 독자 세력으로 부상했다. 그리고 통일 전쟁을 거의 마친 1206년 봄, 오논 강 하류에서 소집한 쿠릴타이(몽골 지역의 대족장 회의)에서 에케 몽골 울루스(몽골 제국)를 세우고, 칭기즈 칸의 자리에 올랐다.[81] 같은 해(1206년), 칭기즈 칸은 제베를 보내 서나이만의 부이룩 칸을 수자우 강에서 사로잡아 처형시킴으로써 마침내 몽골 초원의 난세를 완전히 종식시켰다.

이듬해인 1207년부터 칭기즈 칸은 몽골 북쪽의 부족들을 복속시키는 작업에 들어갔다. 그 일은 장남 주치가 맡았다. 주치는 먼저 바이칼 호 근처에 살던 키르기스족을 복속시켰다. 1208년, 오이라트족도 몽골 울루스 안으로 들어왔다. 바르군, 우르수드, 캉가스, 투바스, 부리야트 등 몽골 외곽의 숲에서 살던 부족민들도 잇따라 주치를 만난 뒤 몽골에 귀순했다. 이들을 전투도 치르지 않은 채 대거 귀순시킴으로써 주치는 칭기즈 칸으로부터 큰 칭찬을 받았다. 1209년에는 중국 서부, 오늘날의 신강에 살고 있었던 튀르크계 위구르족이 사신을 보내 충성을 맹세했다. 위구르는 몽골 고원 외부의 세력들 중 칭기즈칸의 세력을 인정한 첫 번째 사례였다.

3.6. 통일 전쟁 이후

몽골을 완전히 통일한 이후 칭기즈 칸은 부족 내부 문제를 해결하고, 법과 질서를 바로잡으며, 무엇보다도 칸의 귄위와 권력을 강화하는 데 노력을 기울였다. 또한 그동안 입은 피해를 회복하고 힘을 보충하는 데 주력하였다.

칭기즈 칸이 가장 먼저 한 일은 칸 못지 않은 권력을 지녔던 무당[82]을 처형한 것이다. 칭기즈 칸은 몽골 고원을 통일하는 과정에서 무당의 신탁을 선전용으로써 곧잘 써먹었다. 그런데 샤먼 텝 텡게리가 자신의 동생 카사르를 구타해 카사르가 칭기즈 칸에게 억울함을 호소하는 일이 일어났다. 그러나 칭기즈 칸은 카사르에게 '평소에 잘난 척 하더니 뭔 소리냐'하는 식으로 냉대하자, 토라지고 만다. 이에 텝 텡게리는 카사르가 위험하다며 제거를 종용하였고, 칭기즈 칸은 카사르를 문책한다. 이 소식을 들은 어머니 호엘룬이 '같은 젖 먹고 자란 놈이 쌈박질이냐?' 라는 식으로 상반신 노출 시위를 하며 다그치자, 칭기즈 칸은 부끄러워하며 카사르에 대한 문책을 그만두었다. 그러나 어머니 몰래 카사르의 백성을 빼앗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말제 테무게 옷치긴 역시 텝 텡게리에게 모욕을 당하고, 하소연하였다. 그러자 부르테가 "당신이 살아있는데도 횡포가 이러한데 당신이 죽으면 우리가 어떻게 되겠어요?" 라고 말하니, 그제서야 동생들의 말을 들어준다. 결국 칭기즈 칸은 무당을 체포해서 등뼈를 끊어버리는 형벌을 내려 죽여버렸다. 이때 무당을 죽이고 길을 나서던 칭기즈 칸은, 텝 텡게리의 여섯 형제들에게 위협적으로 둘러싸였으나, "비켜라, 나가야겠다!" 라고 말한 뒤 그들을 뿌리치고 나왔다. 이후 텝 텡게리 자리에는 온순하고 나이 든 샤먼을 임명했고 그 결과 몽골에서 칭기즈 칸에 대적하는 자는 없었다.[83]

이 갈등은 정치적 지도자인 칭기즈 칸과 종교적 지도자인 무당 간의 권력 싸움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하지만 자료를 살펴보면 애초에 이 당시 샤먼들은 정치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하거나 간섭을 하는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다. 샤머니즘 신앙은 당시 몽골 고원에 광범위하게 뿌리내리고 있었고 샤먼은 이 환경에서 특수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지만, 그들이 담당한 직능 즉 치병, 예언 등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할 경우 힐책당하거나 살해당하기까지 하였다. 텝 텡게리가 통상적인 샤먼들 가운데서 왜 유독 튀는 존재였는지 생각해보면 다른 정치적인 이유가 있을 가능성이 농후하고, 그가 살해된 것 역시 정치적인 힘 싸움의 과정에서 발생한 사건으로 이해할 여지가 있는 것이다.

몽골 통일 이후 글도 없었던 상태에서 나이만 부족의 재상이었던 타타통아에게 몽골 문자를 만들도록 지시함으로써 오늘날 몽골 문자의 기틀을 잡았다. 이 몽골 문자로 몽골 역사서를 기록하게 하였는데 그것이 바로 《원조비사》다. 현재는 몽골 문자(위구르친 몽골문)로 기록된 것은 전해지지 않고, 한자로 음사한 것이 전해진다.

또한 몽골 초원의 모든 부족들이 지켜야 할 하나의 공통된 법률을 제정하였으며 이는 곧 '《야삭》' 이라는 법전으로 성문화하였다. 현재 원본은 남아있지 않지만 고려를 포함해 다양한 기록이 남아 있는데, 특징으로는 처벌이 강한 편으로 금지 행위의 대부분이 사형으로 끝난다. 그 내용은 대개 몽골의 낡은 풍습이나 악습 등을 폐지, 개혁하며 오래 전부터 초원에서 생겨났던 크고 작은 사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것들이 주를 이루었다. 이 《야삭》은 관습법적 측면도 강했는데, 불에 칼을 대는 행위, 문지방을 밟는 행위, 물에 손을 담그는 행위, 동성애 등을 엄격히 금지하고 어길 시 처형했다. 또 초원 사람들이 더 이상 다른 사람의 신부나 신랑을 강탈해가지 못하도록 법률로 금지한 반면 지참금 제도를 구체적으로 서술하고 있었다고 한다.[84] 유목민으로서의 전통을 잃지않기 위해 이슬람 방식과는 다른 방식의 도축 방법을 고수할 것을 명시했고 유목민답게 수간을 금하거나 말을 훔친 자는 아홉 마리로 배상하고 배상할 수 없으면 자식을, 자식들도 없으면 자기 목숨을 바쳐야 한다는 조항도 있었다. 반대로 종교의 자유를 보장하는 등 선진적인 조항도 있었다고 한다. 칭기스 칸 자신도 이 《야삭》을 어기지 않았으며, 공통 문자와 법률의 제정은 몽골 내부의 통치를 튼튼히 하고 칸의 권력을 강화하기 위한 초석이 되어주었다.

경제 체제도 개혁하여 유목과 수렵에 의존하는 대신 상업을 발달시키려고 했다. 그에 따라 교역로를 개발하고 주위에 존재한 나라들과 교역을 시도하였다. 이 과정에서 서하서요, 호라즘 왕국 등의 외국들과 접촉하지만 곧 여러 가지 이유로 충돌이 발생하여 교역로가 침략로로 변하였다. 결국 원할한 교역로를 닦으려는 노력이 전쟁으로 변하게 되어버렸다는 것.

3.7. 세계 정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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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크멘터리 전쟁사 - 칭기스칸과 몽골제국의 세계 정복전쟁

칭기즈 칸의 대외 정복에 대해서는 다양한 이야기가 있다.

그 중 하나는 칭기즈 칸이 본래 관심을 가졌던 쪽은 바로 세계 정복이 아니라 교역이었다는 것이다. 원래는 북중국과 서요[85] 정도로 만족하려고 했고 서쪽과의 교역은 호라즘 왕국과 교류하는 정도로 그치려고 했는데, 호라즘 왕국이 거부하는 바람에 "그럼 직접 길을 트겠다" 라는 식이 되버렸다는 것. 그래서 서쪽으로 계속 진출하다보니 일이 더 커졌다는 결론이다.

다른 가설로 몽골족은 원래 싸움이 끊이지 않다가 겨우 통일 국가를 이룩한 상태라서 얼마든지 내부 분쟁의 씨앗이 존재했고, 이러한 내부 불만을 억제하기 위해 밖으로의 원정을 감행했다는 설도 있다. 또 다른 한편으론, 테무진이 "칭기즈 칸"의 호칭을 얻으면서부터 세계를 지배한다는 사상에 심취하게 되었고, 그것이 타국과의 외교 정책에도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는 시각도 있다.

칭기즈 칸의 정복 활동을 살펴보면 연경을 포위한 후에도 정치적 복속과 조공품의 상납만 약속받고 초원으로 돌아가는 등, 정말로 '지배' 하는 것에 큰 욕심을 가졌다고는 보이지 않는 점이 많다. 그의 원정은 지배가 아니라 대부분 재정을 충당하기 위한 목적이 짙었으며, 이 과정에서 응징과 복수를 명분으로 내걸었을 뿐이다. 몽골이 그나마 정복전에 가까운 전쟁 양상을 띄게 된 것은 오고타이 칸 시절부터이며, 아무리 빨리 잡아도 칭기스 칸 말년부터다.

칭기즈 칸이 정복한 대외 영토가 워낙 넓은지라 평생을 대외 정복에 힘 써온 것으로 착각할 수 있는데, 칭기즈 칸의 생애 대부분은 몽골 통일 전쟁을 하면서 보냈다. 가문이 망하고 부족들이 흩어진 후 적대 부족에 노예로까지 붙잡히는 등, 완전히 밑바닥에서부터 일어났기 때문이다.[86] 몽골 통일이 1206년이고 칭기즈 칸 사망년도가 1227년이니, 대외 정복에 힘을 기울인 시기는 21년밖에 채 되지 않는다. 고작 그 정도 기간에 세계 제국의 건설이라는 엄청난 성과를 세운 것이다.

3.7.1. 서하 원정

몽골 통일을 마치고 제도를 정비하며 힘을 키운 칭기즈 칸은 가장 먼저 탕구트족[87]이 세운 서하를 침략하면서 본격적인 대외 정복의 신호탄을 쏘았다(1207년). 서역과의 교역로를 마련하려는 목적도 있었지만 서하에 칭기즈 칸과 싸워서 패한 나이만족의 잔당들이 여전히 붙어있었기 때문이다.

3차(1205년 1차, 1207년 2차, 1209년 3차)[88]에 걸친 전쟁 동안 서하군은 우수한 기동력을 바탕으로 산개 전술을 펼치는 몽골군에게 참패를 면치 못하였다.[89] 몽골 군대는 쳐들어올 때마다 수많은 서하인들의 목숨을 빼앗았고, 약탈까지 일삼으면서 서하인들에게 죽음의 사자와도 같은 존재로 여겨지게 되었다.

결국 몽골군은 서하군의 저항을 물리치고 수도 영하(현 인촨)를 포위하는 데에 성공하였으나 공성전 경험이 부족해서 이래저래 난항을 겪었다. 둑을 지어서 황하 물줄기를 돌려 영하를 물에 잠기게 하려는 작전도 펼쳤지만 몽골인들이 물줄기를 다루는 법에 무지해서 되려 수해를 겪는 일도 있었다.

하지만 어찌되었던 수도가 포위당한 상황에서 급한 쪽은 서하였고, 7대 황제 양종은 금나라에게 원군을 요청했으나 거절당하자 결국 오랜 대치 상황을 버티지 못하고 1209년, 칭기즈 칸에게 막대한 공물과 황녀를 바치고 항복을 청하였다.

3.7.2. 금나라 원정

몇 년 후인 1211년, 칭기즈 칸은 금나라 원정을 전격 단행하였다.

북중국을 지배하며 남송과 대치하고 있었던 금나라는 과거에 칭기즈 칸의 선조들 중 한 명인 카마그 몽골의 제2대 암바가이 칸을 사로잡아서 목마에 못박아 목숨을 잃게 한 일이 있었다. 따라서 칭기즈 칸에게 금나라는 조상의 복수를 위해 반드시 제압해야 할 원수였다. 혹은 그렇지 않더라도 금나라가 대대로 북방의 유목 민족들에게 서로 싸움을 붙여 견제해왔는데[90] 칭기즈 칸이 몽골을 통일하자 이를 경계하고 나섰으므로 불가피하게 이들과 싸워야 했을 것이라는 설도 있다.

여하튼 몽골군이 금나라를 전격적으로 침공하자 거란족들이 이들을 적극적으로 도와주었다. 금나라를 세운 여진족들이 과거에 거란족에게 쌓인 원한이 있어 이들을 박해했기 때문이었다. 1211년 8월, 몽골족과 거란족 연합군은 거용관 부근의 야호령에서 금나라 총사령관 완안승유[91]의 40만 대군과 맞붙어 이들을 크게 격파하고(야호령 전투), 이어 회하보(澮河堡)에서 남은 금군을 수습한 완안승유와 다시 맞붙어 3일간의 포위 끝에 전멸시키는 대승을 거두었다(회하보 전투). 이때 칭기즈칸도 자신이 직접 기병 3,000기를 이끌고 돌격해 격렬하게 싸웠다고 전해진다. 아무튼 이 두 번의 전투로 금나라의 야전군 주력 절반이 궤멸되었다. 이후 만리장성 부근의 장애물을 모두 밀어버리고 길이 활짝 열리자 장성으로 밀고나갔으나 역시 공성전에는 익숙하지 못하여 관문을 돌파하고 화북으로 진입하는 데 꽤나 어려움을 겪기도 하였다.[92] 그럼에도 불구하고 칭기즈 칸은 후주(도시 이름)를 점령한 후, 거용관의 완강한 저항을 뚫고[93] 들어가 금나라의 수도인 중도(오늘날의 북경)까지 공격하였다.

설상가상으로 이때 금나라의 동경 유수(요양 태수) 포선만노가 반란을 일으키고 스스로 왕위에 올라 동진을 건국하는 상황이 발생했다. 그 결과 금나라는 만주 지역에 대한 영향력을 완전히 상실해야 했다. 또한 칭기즈 칸을 도와주었던 거란족의 수장 야율유가도 이때 동요를 건국하면서 만주 지역은 이때부터 여러 세력이 난립하기 시작했다.

상황이 이 지경에 이르자 금나라 7대 황제 위소왕승상 호사호에게 목숨을 잃었고, 위소왕의 조카 오도보가 8대 선종으로 즉위했다. 금 선종은 칭기즈 칸에게 암바가이 칸의 유물을 돌려주면서 화의를 청했고, 마침 물자 부족에 시달리던 칭기즈 칸이 받아들여 막대한 전쟁 배상금을 챙기고 철수하였다. 그러나 선종이 1214년 5월 수도를 중도에서 개봉(오늘날의 카이펑)으로 천도하자(정우의 남천) 칭기즈 칸은 금나라 황제가 변심을 했다고 여겨 다시 한 번 중도를 포위 공격하였다. 그동안 중국의 단단한 성벽들을 공격하면서 단련된 몽골군은 능숙하게 공성전을 수행해나갔고, 오랜 포위에 지친[94] 중도는 방어 사령관 완안복흥[95]이 스스로 목숨을 끊음으로써 끝내 무너졌다. 성을 함락한 몽골군은 중도를 쑥대밭으로 만들고 엄청난 약탈을 하고 돌아갔다.

이 무렵에 칭기즈 칸은 당시 요나라 황족 출신의 금나라 관리였던 야율초재를 등용하였다. 실무와 정치에 능한 야율초재는 이후 몽골 제국의 내정을 다듬는 데 일조하였다. 본래 칭기즈 칸은 금나라 땅을 점령한 후에 그곳에 살던 농민들을 모두 죽이고 모든 땅을 가축을 키우기 위한 방목지로 개간할 생각이었으나 야율초재의 조언에 따라 점령지의 농민들을 죽이지 않는 대신 조세를 거둬들여 막대한 이익을 얻었다.[96]

3.7.3. 서요 원정

이후 칭기즈 칸은 서요로 도망간 나이만의 왕자[97] 쿠츨루크를 사로잡기 위해 제베를 사령관으로 삼아 서요로 군대를 급파했다. 당시 서요의 상황은 매우 어지러웠는데[98] 서요의 말제[99] 야율직로고는 쿠츨루크를 크게 신뢰해서 자신의 부마로 삼는 등 환대했으나 쿠츨루크는 야율직로고가 호라즘을 응징하기 위해[100] 군을 일으켜 원정을 간 사이 모반을 일으켜 서요 본국을 장악한 후 야율직로고를 폐위시켜[101] 오히려 자기가 제위에 오르는 은혜도 모르는 행동을 저지르고 만다. 그런데 쿠츨루크는 제위에 오른 뒤 선정을 베풀기는 커녕 오히려 이슬람교를 탄압하는 등의 폭정을 일삼았기 때문에 서요 백성들의 원성이 높아질 수 밖에 없었다.[102] 당시 칭기즈 칸은 쿠츨루크를 처리하기 위해 서요로 들어갈 방법을 고심하고 있었는데 이는 침략의 좋은 구실이 되었다. 제베 지휘하의 몽골군이 서요를 침공하자 쿠츨루크의 학정에 지친 서요 백성들은 오히려 침략자인 칭기즈 칸을 반갑게 맞았다.[103] 결국 쿠츨루크는 전투에서 대패하고 도망치다가 붙잡혀 죽음을 당했다.[104] 거란족의 마지막 제국 서요는 끝내 멸망하고 말았는데 몽골 제국의 침공으로 멸망한 첫 번째 국가라는 기록을 남겼다(...)

3.7.4. 호라즘 원정

한편 칭기즈 칸은 아바스 칼리파조를 누르고 중동의 새로운 강자[105]로 군림하던 호라즘 제국과 교역을 하기 시작했다.[106]

그러나 칭기즈 칸이 호라즘에 보낸 사절단이 오트라르 성의 성주인 이날축에게 물건을 모두 빼앗기고 살해당하는 사건이 일어나면서 호라즘과의 관계는 차츰 험악해졌다. 이후 칭기즈 칸이 사과를 요구하는 전령을 보냈으나 사절단을 해친 이날축은 호라즘 샤 무함마드 2세의 동생이었기 때문에 처벌을 받지 않았다. 사과를 받으러 갔던 전령들은 되려 수염이 깎인 채로 돌아오는 수모를 겪었다.[107]

이에 격노한 칭기즈 칸은 친히 20만 명의 대군을 이끌고 호라즘 원정을 떠났다. 당시 쇠퇴한 아바스 칼리파조를 무너뜨리고 짧은 전성기를 맞이하고 있었던 호라즘 제국은 40만 명에 달하는 대군을 거느린 만만치 않은 상대였다.

호라즘 샤 무함마드 2세는 아들 루큰 앗 딘에게 본토 수비를 맡기고, 본인은 군대를 이끌고 호라산, 사마르칸트, 잔드를 거쳐 투르키스탄 국경지대까지 향한 뒤 킬리 강와 카임치 강 사이에서 몽골 군대와 대치했다. 당시 무함마드 2세가 대치하던 몽골군대는 수베테이 바하두르와 토가차르의 군대였는데 원래 이 부대는 쿠두를 치기 위한 군대였다. 무함마드 2세의 공격에 몽골군은 물러나면서, 칭기즈칸의 명령이 없어 호라즘과 싸울 의향이 없다고 밝혔지만 무함마드 2세는 무시하고 공격했다. 그러나 호라즘 군대는 역으로 포위되어 샤 무함마드 2세까지 포로가 될 위기에 처하게 되었고, 무함마드 2세는 아들 잘랄 웃 딘 밍부르누의 활약으로 간신히 탈출해 사마르칸트로 귀환했다. [출처1-2-2-2-5]

외형적으로는 호라즘 제국이 몽골 제국에 크게 뒤쳐지지 않는 것처럼 보였지만, 위의 영토 확장 부분에서도 설명했다시피 대부분의 영토는 6~70년에 이르는 혼란기를 거친 끝에 군사적으로 막 제압된 상황이었으므로 아직 국가의 통치력이 확고히 자리잡지 못한 상황이었다. 그래서, 위에 서술한 대로 호라즘에 이를 갈던 여러 부족들은 칭기즈 칸을 환영하고 협력했다. 그들이 지리적 정보라든지 여러 정보를 제공해 몽골에겐 큰 도움이, 반대로 호라즘에게 재앙으로 다가온 셈.

칭기즈 칸은 이렇게 협력한 부족들에게 무역이라든지 여러 권리를 보장하여 보답했다. 이렇게 하여 한층 유리해진 칭기즈 칸이 엄청난 속도로 군대를 몰아쳐 새 수도인 사마르칸트[109] 트란스옥시아나의 핵심 도시들을 격파하자 호라즘 세력은 바로 지리멸렬해졌다.

몽골군의 위력을 본 무함마드 2세는 전면전에서 승산이 없다고 판단하고 도주했으며, 몽골군에 저항한 도시들은 외부 지원 없이 자력으로 저항하다 점령된 뒤 학살당했다. 이란 서부 지역으로 돌면서 병력을 모아 보려던 무함마드 2세는 별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카스피해의 한 섬에서 병에 걸려 사망했다. 무함마드 2세를 쫓던 몽골의 추격대는 추격 도중 러시아인들의 땅까지 도달하는데 이것이 이후 깊은 악연을 맺게 된 러시아와 몽골의 첫 대면이었다.

전쟁의 원인을 만들었다고 알려진 오트라르 영주 이날축은 오트라르 성이 함락된 후 몽골군에 붙잡혀서 두 눈에 을 녹인 [110]을 들이붓는 끔찍한 방식으로 처형당했다고 전해진다. 칼 드로고

도주 중에 샤위를 계승한 무함마드 2세의 아들 잘랄 웃 딘 밍부르누(1220 ~ 1231)는 옛 수도인 구르간즈와 왕조의 거점인 호라즘 지역을 포기하고 가즈니 방향으로 갔다. 아프간 지역에서 병력을 충원한 잘랄 웃 딘은 카불 근교의 파르완에서 몽골군을 격파하는 데 성공했으나(파르완 전투), 칭기즈 칸이 직접 군대를 몰아 추격해 오자 인도 방면으로 도주했다. 결국 인더스 강변에서 따라잡힌 잘랄 웃 딘의 군대는 몽골군에게 궤멸당했으나 잘랄 웃 딘 본인은 간신히 탈출해 인도 맘루크(노예) 왕조의 수도인 델리로 갔다.

잘랄 알 딘은 맘루크 술탄 샴스 알 딘 일투트미쉬에게 몽골과 싸우자고 제안했으나 일투트미쉬는 거부했고, 잘랄 알 딘이 토착 세력과 손을 잡고 라호르를 점령하자 일투트미쉬가 직접 군대를 이끌고 그를 몰아내러 나섰다.

구자라트, 신드 등을 약탈하다 인도에서 쫓겨난 잘랄 웃 딘은 1224년 기회를 보아 이란으로 갔고, 몽골군이 일시 철수한 틈을 타 분열되어 있던 이란 일대의 군소 영주들을 복속시켰다. 그러나 몽골군에게 또다시 패배하여 이란에서의 패권이 무너지자 이번엔 아제르바이잔을 점령하여 새로운 거점으로 삼았다.

잘랄 웃 딘은 세력을 더욱 확대하기 위해 조지아 왕국을 공격, 수도 트빌리시를 약탈한 뒤 서쪽으로 눈을 돌렸는데, 이곳에서 서방의 무슬림 국가인 룸 셀주크 왕조, 아이유브 왕조와 대립하게 되었다.

결국 1230년 잘랄 웃 딘의 군대는 룸 술탄 카이쿠바드 1세가 이끄는 아이유브-셀주크 연합군에게 패배했고, 몽골군이 아제르바이잔을 점령하여 거점까지 잃게 되었다. 살아남아 도주하던 잘랄 알 딘이 쿠르드족 노상강도(혹은 암살자)에게 살해당하면서 호라즘 왕조는 완전히 막을 내리게 되었다.

크게 참패한 호라즘 샤는 모든 것을 잃고 카스피 해의 작은 섬으로 들어가 숨어있다가 그곳에서 최후를 맞았으며 수도인 부하라가 함락당하면서 그의 아들들은 몰살당하였다. 또한 이날축의 처벌을 반대했던 호라즘 샤의 어머니 테르켄 카툰은 수도가 함락된 후에 몽골군에게 끌려가서 몽골인들의 하녀로 전락했다.

그러나 몽골군은 호라즘 샤의 첫째 왕자 잘랄 웃 딘은 끝내 생포하지 못하였다. 칭기즈 칸은 달아난 잘랄 웃 딘을 추격하여 그가 숨어있던 사마르칸트까지 박살내버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잘랄 웃 딘은 기여코 몽골군의 추격을 따돌려 인도 인접 지역까지 달아나서 끝까지 대항하였다. 호라즘에 치를 떨던 칭기즈 칸도 잘랄 웃 딘만큼은 높이 사고 인정해줬다 한다.[111]

그리고 몽골은 끝내 인도를 정복하지 못하고, 서아시아로 전력을 집중했다. 심지어 인도는 후에 차가타이 칸국과의 전쟁에서 승리했다.

3.8. 최후

1224년, 칼가강 전투(1223년)에서 러시아 공국 연합군을 격파한 제베와 수부타이가 회군을 시작했으나 제베는 중도에 병사했다. 칭기즈 칸은 1223년에 죽은 무칼리의 후임으로 그의 아들 보로를 국왕에 임명하고, 서하와 금나라 정벌을 지속하게 했다. 호라즘 정벌을 마치고 카라코룸으로 돌아온 칭기즈 칸은 1225년 4명의 아들들에게 제국을 분봉했다. 이것이 4대 칸국의 시작이었다. 그해 가을, 서하를 완전히 정벌하기 위해 직접 출정을 감행하였다(제6차 몽골의 서하 침공. 몽골과 서하의 마지막 전쟁이었다.). 몽골군이 오랫동안 원정을 위해 몽골을 떠나있는 동안에 서하의 8대 황제 신종이 칭기즈 칸의 물자 지원 요청을 거절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몽골 영토를 침입해왔기 때문이다.[112] 그런데 갑자기 서하 원정이 한참이던 1226년에 칭기즈칸의 절친한 친구이자 어린 시절부터 테무친을 따랐던 보르오초가 병으로 사망하고 곧바로 다음해 1227년 장남 주치가 원정 중 역시 병사했다. 아끼던 사람 둘이 잇따라 사망함으로써 당시 고령이였던 칭기즈칸의 심적 충격이 컸으리라 추측된다.

1227년 7월, 서하 원정 도중에 칭기즈 칸은 11월 아르보카에서 낙마 사고를 당했으며, 이후 중병에 걸려 앓아누웠다. 사고를 당했을 당시의 칭기즈 칸은 이미 60세가 넘은 고령이었기 때문에 낙마는 굉장히 치명적이었을 수밖에 없다.《원조비사》에 따르면 이때 이후로 건강이 크게 악화되기 시작했던 것으로 보인다.

1226년 봄 서하를 정벌 중인 칭기즈 칸은 낙마 이후 투병 중에 악몽을 꾸고 자신의 생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직감했다. 그래서 3남 오고타이와 막내 툴루이를 소환하여 오고타이를 차기 대칸으로 지목하고, 또한 차남 차가타이에게도 유명을 전하라고 명령했다.[113] 칭기즈칸은 죽기 전에 서하 정벌을 마무리 짓기 위해 서둘렀다. 한편 멸망의 위기에 처한 서하는 7월 9대 헌종이 죽고, 10대 황제 이현(말제)이 즉위했다. 투병 중이던 칭기즈 칸은 중원 공략을 무칼리의 아들 보로에게 맡기고, 북중국, 즉 중원을 공신들에게 분봉했다.

1227년 봄 칭기즈 칸은 서하의 수도 중흥부를 포위하고 지방을 모조리 공격했다. 당시 서하의 황제는 말제 이현이었고, 재상은 야사감푸였다. 서하군은 나름 강력하게 저항했으나 식량이 떨어지고, 피해가 커지자 이에 6월, 말제 이현이 항복을 청했고, 1개월 간의 유예를 달라고 말했다. 이때 야사감푸는 칭기즈 칸의 앞에 끌려오자 목숨을 구걸했으나 칭기즈 칸에 대해 모욕을 한 적이 있어 용서받지 못했다. 결국 야사감푸는 처형당했다.[114] 죽음이 임박했던 칭기즈 칸은 계략을 부려 서하의 투항을 받아들인다고 말했다. 그는 자신의 죽음을 비밀에 부치고, 서하 황제가 출성하면 모조리 죽이라고 명령했다.

결국 칭기즈 칸은 1227년에 3남 오고타이를 후계자로 임명하고, 몽골로 귀환하던 중 7월 12일, 66세의 나이로 서하 부근의 영주 육반산에서 파란만장한 일생을 마쳤다. 몽골군은 칭기즈 칸의 관을 들고 회군을 개시하여 초원으로 돌아와 대칸이 생전에 자신의 매장지로 선택한 부르칸 칼둔에 매장했다. 당시 몽골군은 운구 행렬 도중 조우하는 모든 생물을 죽여 칭기즈 칸의 매장지를 극비에 부쳤다.

그리고 얼마 뒤 서하도 완전히 멸망했다. 서하의 마지막 황제 이현은 마침내 출성하여 칭기즈 칸의 게르 앞에서 알현 예식을 했고, 이후 대칸의 유언대로 모조리 학살당했다. 칭기즈 칸이 죽어가면서도 서하인들을 남김없이 죽이라고 명령을 내린 탓에 현재까지도 그 후손이 거의 없다고 한다.[115]

칭기즈 칸은 죽어가면서 자신의 아들들에게 "금나라의 성들이 단단하니 남송에게 길을 빌려달라고 해서 남쪽에서 공략하라" 라는 말을 유언으로 남겼다. 칭기즈 칸이 죽은 후에 아들들은 아버지의 유언을 충실히 받들어 황하 이남의 개봉(현재 카이펑)에서 근근히 명맥을 유지하던 금나라를 남송과 함께 양면에서 공격하였다.[116] 결국 금나라는 마지막 황제인 말제 완안승린이 금나라 애종에게서 제위를 물려받은 지 한 나절 만에 몽골군에 잡혀 목숨을 잃음으로써 1234년에 완벽히 멸망하였다.

칭기즈 칸의 최후는 여러 이야기가 나오고 있지만, 《원조비사》에 기록된 낙마 후유증설이 유력하다.

4. 평가


이후에 나오겠지만 평이 아주 많이 엇갈린다. 위의 영상은 TED에서 이에 대해 다룬 강의.
몽골인들이 세계를 지배하는 문명들인 이슬람, 중국, 유럽 문명과 달리 자신들은 기록을 남기는 데 관심이 없던 유목민이었으니, 남들 입장으로만 역사가 기록되어 나쁜 놈이 될 수밖에 없었다. 한편으로 당시 몽골 민족들은 심리전의 일환으로 자신들을 나쁜 놈으로 표현하는 데 능숙했다고 하며 이것이 그대로 반영되었을 수도 있다.

실제로는 계급 폐지[117], 종교의 자유 보장[118], 약탈혼 금지[119], 인종차별 금지[120] 등등 지금 관점에서 보기에는 상당히 훌륭한 정치를 펴기도 했다.

다만 위에 언급한 제도적 개선이 다른 민족, 다른 지역에는 기존 지배층을 다 잡아 죽이고, 종교 질서도 다 뭉개놓고, 우리 모두 평등이란 식이어서 토착민들의 입장에서 몽골인 정복자들에 대해 증오심과 혐오감이 드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게다가 유목민족인 그들은 기록을 거의 하지 않으니, 아무래도 학살당한 피해자들의 입장에 근거한 기록들로만 추정하였으니 좋은 소리가 있을 리 없다. 게다가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협박같은 것도 많이 했으니... 하여튼 이 통에 네스토리우스교가 덕을 많이 봤고 이는 프레스터 존의 전설이 퍼져나가는 데도 영향을 주었다.

한편 세계사에서도 역대 최고 스케일로 수많은 정복 전쟁을 일으키면서, 무수한 잔혹한 전쟁 범죄를 저지르기도 했다. 칭기스 칸의 정복 전쟁은 전쟁의 잔혹함의 종합세트라 할 정도로 유래 없는 대량 살상과 잔혹함이 존재했다. 칭기스칸에 의해 아예 지구상에서 DNA가 멸절된 민족이 한둘이 아니다. 풀한포기도 남기지 않았다는 표현이 단순히 수사가 아니라, 정말 유사 이래 이렇게 잔혹하게 대량학살, 민족 자체를 멸절을 기획한 이는 히틀러와 더불어 유이하다 할 수 있으며, 히틀러는 유대인 멸절에 실패했지만 칭기스칸은 중앙아시아의 여러 민족을 실제로 멸절시켰다.

4.1. 인재 중시

인재를 다루는 것은 상당히 높게 평가받을 수 있다. 그는 이상하게도 사준사구처럼 가족보다 자기와 가까운 관계에 있는 친구들을 더 중시하거나 적이었던 사람들에게 중요한 역할을 맡겼다. 물론 칭기즈 칸의 혈통이나 아군이 낮은 대우를 받은 것은 아니었다. 이는 여러 효과가 있었을 수도 있다.

통일 전쟁 과정에서 자무카와 다른 적들은 칭기즈 칸 가문을 얼마나 조롱했던지[121] 칭기즈 칸은 적인 귀족에게 혹독한 편이었다.

칭기즈 칸은 일생에 걸쳐 가문이나 부족보다는 스스로 얻은 '인재'를 믿은 편이었다. 친척이라는 사람들은 그를 자주 배신했지만[122][123] 혈연 없이 맺어진 관계는 끈끈했고[124] 이 때문에 가족보단 다른 사람을 더 믿는 때도 있었다. 타타르족 학살 후 테무르의 휘하에 있던 남은 타타르 부족인들 역시 마찬가지였다고.

칭기즈 칸은 본인이 좋은 혈통을 가지긴 했지만 한 번 몰락한 후 혈통으로 이어진 자들에게 배신당했고, 자신과 혈연이 없는 부하들의 능력을 활용해 성공했기 때문에 핏줄빨로 먹고 사는 귀족을 낮게 본 것. 호라즘 왕국만 해도 왕인 무함마드 2세의 어머니 테르켄 하툰을 하녀로 만들었는데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다리우스 3세의 어머니와 아내를 존중하며 잘 대접해준 것과는 차이가 난다. 물론 알렉산드로스와 다리우스 3세는 별다른 은원관계 같은 것이 없는 단순한 적장의 입장일 뿐이었고[125] 무함마드 2세의 어머니는 모든 일의 원흉이라 할 만했지만(호라즘 왕국 항목 참고). 이런 잔인하고 가차 없는 점이 전통과 예법을 토대로 국가를 형성해온 대다수의 문명권들에서 안 좋게 보는 이유 중 하나다.

4.2. 위대한 정복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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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기즈 칸 사망 당시 몽골 제국의 영토.

살아생전에 몽골고원을 통일함은 물론이고 인류 기원부터 20세기 초까지 등장했던 수많은 정복자들보다 더 넓은 영토를 정복했다. 워낙 임팩트가 강해서 칭기즈 칸 시대에 중국 끝까지 다 밀어버린 것처럼 착각하는 사람들도 의외로 있긴 있다. 칭기즈 칸은 금세종의 절정기 이후로 쇠퇴기에 접어들던[126] 금나라를 손봐주는 데 그쳤다. 다만 금나라의 경우는 호라즘과는 달리 자리를 잡은 지 오래되고 생산력 역시 강대한 나라라 꽤나 여러 번 공격을 해야 했고 결국 칭기즈 칸 시대에는 완전히 멸망을 시키지 못했다.[127] 이건 칭기즈 칸이 금나라를 공격하다가 어느 시점부터 서쪽으로의 진군에 집중한 탓도 크지만.

여하간 다른 전선에 신경을 쏟았기 때문에 의외로 칭기즈 칸은 생전에 중국 땅에 그리 오래 있지 않았다. 칭기즈 칸 생전에 대 중국 전선을 주로 담당한 사람은 무칼리였다.

그리고 정복 영토의 경우 과거 카라한 왕조 등이 있던 서요 등의 지역은 실질적으로 의미가 있는 영역에 비해 영토가 워낙 큰 편이라 지도를 그리면 엄청나게 커지는 점은 고려하는 편이 좋다. 칭기즈 칸이 직접 친정하여 물리친 호라즘의 경우는 확실히 그 위세는 절정기였지만 워낙 빠르게 복속이 된 탓에 '제국' 이라고 부를 만한 기반은 전무한 상태였다. 이를 테면 아프가니스탄이 호라즘에 속한 건 몽골군이 쳐들어오기 4년 전이었고 서부 페르시아가 호라즘의 영역이 된 것 역시 칭기즈 칸이 진군하기 불과 3년 전이었다. 부하라사마르칸트는 호라즘에 속한 지 10년도 아직 되지 않았으며 사마르칸트는 수많은 기습과 학살이 벌어졌던 곳이었다. 호라즘의 영역이 확정된 것은 가장 빠르게 봐도 1217년의 일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내부 기반을 다져야 할 상황에서 어그로를 끌어 몽골군이 쳐들어오게 했다는 게... 그래도 상대인 무함마드 2세도 제법 정복군주였다는 점을 감안하면[128] 무시할건 못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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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기즈 칸의 진격로.[129]

칭기즈 칸 본인은 유럽 땅을 직접 밟은 적이 없지만 그의 명령하에 호라즘의 칸을 추격하던 수부타이제베가 카프카스로 빠졌다가 칼가강 전투(1223년)에서 키예프 공국을 중심으로 뭉친 연합군을 발라버린 적은 있다. 이 전투로 러시아 공국들의 야전 역량이 뿌리채 뽑혀 이후 몽골의 서방 진군 때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하고 각개격파당한다. 당시 러시아는 흔히 알려진 제국이 아니라 공국들의 연합체였다. 게다가 내부의 도시들은 몇몇 대도시를 제외하면 목책에 둘러싸인 마을이었고 나무를 많이 쓰다보니 몽골군의 화공에 속수무책이었다. 결국 이후 바투수부타이가 이끄는 황금 부대에게 현 우크라이나 지역은 완전히 초토화되었으며 북쪽 도시 몇 개만이 살아남았는데 대표적인 곳이 몽골군이 발길을 돌렸던 노브고로드 공화국과 세금을 징수하던 모스크바였다.

4.3. 성격

공사의 구분이 매우 뚜렷했던 사람이었으며 적에게는 역사에서 유례가 없이 무자비했으나 자신의 백성들에겐 대단히 자비로웠다. 지도자의 자질 중 가장 중요한 것은 베풀고 나누는 것임을 제대로 깨닫고 있었으며 실제로 이를 실천하여 베푸는 걸 즐겼다.

그 때문에 과거 몽골 부족과 달리 습격 과정에서 전사한 모든 병사의 과부와 고아에게도 일반 병사와 똑같은 몫을 주기로 하거나 후방에서 전쟁 물자 등 보급을 담당하는 사람들에게도 전리품 배분을 신경써 주었다. 조직을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 어떤 배려를 해줘야 하는지를 제대로 꿰뚫고 있었던 것. 현대사회의 조직 운영에서 상식이 된 "기여한 만큼 대가를 줘라"를 이미 몇백 년 전 과거 사람인 데도 제대로 알고 있었던 셈이다.

인간적으로는 털털하고 소박하며 때로는 소심하기까지 했지만 한 번 결심하면 끝없는 끈기와 추진력으로 한 번에 밀고 나가는 인물이었고[130] 그가 두 번 이상 직접 침공한 나라는 금나라 정도였다. 반란이 있을 것 같으면 아예 도시를 갈아버렸기 때문에 반란 가능성도 최대한 줄였다.[131] 항복해서 한 번 용서해주었더라도 반란을 일으키면 다 갈아버렸다. 그의 후손을 자처한 티무르가 같은 땅을 몇 번이고 침략해야 했던 데 비하면 칭기즈 칸의 성격이 잘 드러난다.

참고로 저런 말살 명령을 보면 은근히 비유적인 문구가 많다. 수레 바퀴보다 큰 남성은 다 죽이라거나 두 발로 걷는 것들은 다 죽이라거나...[132]

지휘관으로서의 재능은 뛰어난 편으로 13익 전투, 카라칼지드 사막 전투 외에는 패배를 당한 적이 없었다.[133] 기후 변화가 승리의 주요 요인으로 꼽히는 쿠이텐 전투에서조차 신속한 기동력을 이용해 유리한 지형을 점거하는 노련함을 보이고 차키르 마우트 전투에서는 횃불을 이용해 나이만을 속이는 등 군사적 재능도 뛰어났고 특히 몽골 통일 이후에 그의 군사적 능력은 빛을 발휘하면서 금나라 정벌, 호라즘 정벌, 서하 정벌 등 자기가 지휘한 전투에서는 모두 승리를 거둔다.[134] 문맹인데도 불구하고 슬로-슬로-퀵-퀵 같은 몽골의 전략 전술을 짜낼 정도다. 성격도 잔혹해서 권력에 도전한 자는 벡테르든 아니면 자신의 성공을 예언했던 집단이든 가차없이 죽였다. 몽골의 전통적인 교육마저 제대로 받지 못해서 은근히 무시를 당하기는 했지만 자무카 같은 경우는 그를 진짜 괴물처럼 묘사했다. 이러한 군사적 재능과 괴로운 경험이나 고난을 겪으며 이를 이기는 인내, 긍정적인 성향, 이로 인해 당시 초원의 여타 지도자들이 제시한 바 없던 공평한 사회[135]의 비전을 지녔고 그것이 그를 승리하게 했다.

하지만 테무진 자신은 인간적으로는 강인한 전사 내지는 마초로만은 해석될 수 없는 부분이 주를 차지하는 남자였다. 인간적으로도 상당히 털털하고 소박한 사람이었던 것으로 보이며 세계 정복 프로젝트가 이뤄지던 말년의 죽기 며칠 전에 한 말이 "다시 태어난다면 평범한 사람으로 평범한 게르(Ger, 몽골식 천막)에서 살다 평범하게 늙어 죽고 싶다" 라는 부분은 그의 전반기 인생 여정을 보여주는 것은 물론 자신의 악행을 결코 후회하지 않는다는 유언도 있다.[136] 이러한 테무진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 및 분석은 딴지일보에서 연재한 기획물 '<테무진 to the 칸>' 에 잘 녹아있다. 현재까지 나온 인터넷 연재물 중 칭기즈 칸과 몽골사 전반에 대한 가장 치밀한 분석이 담긴 연재물이다.

다만, <테무진 to the 칸> 시리즈의 경우 엄밀한 역사 서술이라기 보다는 역사적 사건을 이야기 형태로 풀어 들려주는 내러티브 히스토리의 특성을 가지고 있고, 이런 서술 방식은 필연적으로 저자의 감상이나 관점이 강하게 드러날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읽을 때 다소 주의할 필요는 있다. 예를 들어, 해당 기사의 경우 칭기즈 칸의 인간적 측면에 무게를 싣고 서술했지만 그가 인간적이고 공정한 면모와는 별개로 죽이기 시작하면 정말 미친 듯한 학살을 아무렇지도 않게 저지르는 사람이었다는 점은 상대적으로 잘 드러나지 않는다. 더불어 자무카의 전술적 능력에 대해 지나치게 과대평가 한다는 점도 감안해야 할 필요가 있다.

몽골족 풍습을 죽을 때까지 따랐고 사치를 싫어했다. 자신을 높이는 형용사마저도 싫어하여 황족은 그를 테무진이라 불렀으며 공문서에도 그의 이름 앞에 다른 명칭이 붙는 것을 싫어했다. 각종 종교들에게 관용적인 태도를 보였지만 이 때문에 몽골의 풍습이 침식되는 것은 절대 바라지 않았다.[137] 이러한 태도는 현대 몽골인들이 그를 존경하는 이유 중 하나이며 그의 후손으로 몽골 제국의 중국화를 몇 단계나 가속시켰다고 평가되는 쿠빌라이 칸과 자주 비교되는 모습이기도 하다.

그가 죽을 무렵 도교의 사제 장춘 진인(구처기)에게 편지를 보냈는데 이때 그 자신에 대한 상세한 얘기를 했다. 칭기즈 칸 본인은 자신의 능력이 뛰어나서 승리한 것이 아니라 적들이 사치스럽고 불경하여 승리한 것이라고 얘기했고[138] 본인은 사치를 싫어한다고 얘기했다. 그의 백성은 자식처럼, 능력 있는 자는 출신을 불문하고 형제처럼 대했다고 얘기했으며 그의 장군들과는 끈끈한 우애로 이어져 있다고 얘기했다.[139]

장춘 진인은 처음 칭기즈 칸을 만났을 때 칭기즈 칸이 살육을 멈추도록 설득하려 했지만 실패했다. 하지만 칭기즈 칸은 그와 긴 시간 얘기한 뒤 그를 마음에 들어해서 그가 중국으로 돌아갈 때까지 편안히 가도록 조치를 취해주었으며 그로 하여금 중국의 도사들을 통제하도록 해주었다. 장춘진인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자신을 잊지 말아달라고 덧붙이기도 했다. 알렉산드로스 3세가 자신을 따라온 아리스토텔레스의 조카 칼리스테네스가 아시아식으로 자신을 숭상하는 것을 거부하자 나중에 죽인 데 비해 칭기즈 칸은 장춘 진인이 칭기즈 칸의 저녁 초대를 거부하고 도사로서 술을 거부해도 그를 공경하며 대했다.

칭기즈 칸의 주 전술은 심리전이었다. 대표적으로 일부러 마을들을 공격한 뒤 마을 사람들을 성 안에 몰아넣어 성 안의 식량이 떨어지게 만들어 스스로 공격하게 하는 것. 또한 몽골군에 대한 악명을 부풀려서 적들이 스스로 기게 만들었다. 이런 소문이 과장되어 중동 역사서에서는 나쁜 부분만 적히게 되었고 칭기즈 칸을 사이코패스로 보는 서양인도 존재.[140] 타임지에서는 13세기의 인물로, 워싱턴 포스트도 칭기즈 칸을 지난 1,000년간 가장 중요한 사람 중 하나으로 골랐지만 깡패라고 썼다. 반대로 19세기 유럽이 아시아를 야금야금 정복하는 일에 반발한 아시아인들 사이에선 칭기즈 칸을 영웅으로 보기도 했다(예로 인도의 네루). 물론 같은 아시아지만 서아시아는 직접 갈렸기 때문에 유럽 이상으로, 아니 끔찍하게 싫어한다. 처음에야 살육만 했지만 원정을 하면서 도시의 가치를 인정하게 되었다.

칭기즈 칸 본인은 고문을 법적으로 금지하고[141] 죽일 거면 그냥 죽이고 살릴 거라면 그냥 살렸다. 후일 구육 칸 때 구육 칸이 정치에 간섭한 여인 파티마를 죽이며 이 법을 깼다. 또한 살육으로 유명하지만 《원조비사》에서 호라즘 왕국 정벌시의 이야기에선 자신의 허락 없이 근접 국가를 공격한 부하에 분노하는 모습을 보였다. 죽일 땐 엄청 죽이지만 이유 없이 죽이지는 않은 것. 자무카를 잡았을 때도 자무카가 자신을 죽여달라고 하자 이유 없이 그를 죽일 수 없다고 해서 먼 과거에 있었던 일을 죄명으로 하고 죽였다.

참고로 선전포고 없이 쳐들어간 적은 없다. 선전 포고는 언제나 "내가 참작할 기간 줄 테니까 그때까지 항복해. 항복 안 하면 어느 한쪽이 죽을 때까지 싸울 것이니 기대해라" 라고 했고 이 말을 어긴 적이 없다. 물론 당연하게도 자신이 죽은 적도 없다. 물론 처리도 엄격해서 항복한 지역에서는 약탈을 금지했고, 맞서 싸웠던 곳은 철저히 파괴했다.

몽골 통일 과정에서 점령한 부족과의 사이를 호전시키기 위해 그들의 여자들과 결혼하고 각 부족에서 찾은 아이들을 자신의 어머니로 하여금 입양하게 하여 자신의 형제의 위치를 주었다. 초창기(보르테를 되찾은 첫 전투부터 자무카와 결별하기 이전까지쯤)엔 아버지가 죽은 후 고생했던 자신의 어린 시절에 대한 일종의 보상 심리에 따른 행동이었지만 나중엔 몽골 통합에 큰 도움이 되는 정치적 행동이 되었다. 또한 '우리는 모두 (의)형제' 라는 의식에서 반란을 방지하기 위함이기도 했고. 야율초재를 처음 만났을 때도 야율초재가 금나라에 멸망당한 요나라의 황족 출신임을 감안해 그를 대신해 원수를 갚아주겠다고 얘기했다. (야율초재가 거부하긴 했지만).[142]

야만스럽고 잔인하면서도 자신의 사람, 믿는 사람에겐 관대하며 친절한 사람이었다. 일단 장수를 채용할 때 제1조건이 바로 능력과 충성이었다. 자신에게 반항했던 첫 아들 주치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자 며칠 동안 자신의 게르에 틀어박혀서 아무도 접근하지 못하게 했다. 자신의 친아들이 아닐지도 모르는 주치를 큰아들로서 사랑한 것만 봐도 인간적인 부분이 있는 사람인데 동양권에선 이 부분에 신경 쓰지만 당연히 서양권에서는 신경 안 쓴다...

적을 용서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지만 유일한 예외가 의형제였던 자무카. 자무카와 몇 번이고 싸웠음에도 불구하고 자무카가 자신에게 잡혀오자 그를 자신의 2인자로 회유하려고 했다. 하지만 자무카가 죽여달라고 간청해서 결국 피를 보지 않는 방식으로[143] 자루에 넣은 뒤 말발굽에 밟히게 해 죽이게 된다. 다만 자무카의 죽음에 대해서는 여러 전승이 있다. 자무카 항목 참고.

반면 자신의 명령을 어기는 자는 그 누구도 용서치 않았다. 아들들이 자신의 말을 안 듣고 싸웠을 땐 엄청 화가 나있다가 볼츠의 중재로 설교로 끝났지만 항복한 도시는 약탈하지 말라는 그의 명령을 어긴 칭기즈 칸의 사위는 즉시 일반병으로 강등되어 싸우다 죽었다. 이 덕분인지 페르시아의 역사서에서도 '칭기즈 칸 그 자식 재수 없긴 한데 나름대로 공평한 면은 있었다' 라고 기록한다.

어릴적 아버지 예수게이가 죽자마자 아버지 부하들에게 배신받아 일가족 전체가 고생한 덕분에 배신자들을 매우 싫어했다. 물론 전쟁 전에 자신에게 항복한 자들은 환대하였지만 자신들 주군이 강성할 때는 온갖 꿀을 빨다가 자신들 주군이 전쟁에 져서 불리할 때 자신들 주군을 배신하거나 죽여서 항복한 자들은 신뢰가 없는 자라 하여 모두 사형에 처했다. 그중에 자무카를 배신하여 자무카를 포박하여 투항한 자무카의 옛 부하 다섯 명을 사형에 처하였고[144] 어린 시절의 자신과 자신의 가족을 버린 것도 모자라 죽이고자 했던 키릴투크의 목을 잘라서 온 키릴투크의 옛 부하들도 모두 처형하였다.

또한 미리 자신의 뒤를 이을 후계자로 오고타이 칸을 선정해서 기존 흉노, 돌궐 같은 유목 제국들의 고질병이었던 제위 계승 문제를 예방해서 몽골 제국이 다른 유목 제국과 달리 급속하게 무너지지 않고 계속해서 확장을 할 수 있도록 하였다.[145]

4.4. 세계 각국의 평가

동서양 가리지 않고 털어먹었음에도 불구하고, 서양에서 공포의 상징이었던 동양인이라거나 역사상 가장 큰 제국이기 때문인지, 동양에서는 몽골에게 호되게 당한 국가라도 유난히 이미지가 좋다.

서양에서는 야만인 취급. 직접 피해를 받은 서아시아러시아 등의 지역에서는 악마 취급이다.

4.4.1. 몽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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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에 있는 40m 기마 동상. 2010년에 세웠으며 현존하는 기마 동상 중 가장 높다. 저 동상의 말 머리에 올라갈 수 있는데 칭기즈 칸 동상에서 사람들이 나오는 위치가 심상치 않다.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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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의 화폐인 투그릭에도 박혀있다.

당연히 신적으로 추앙받는다. 비록 죽은 지 800년이 다 되어가는 사람이지만 몽골인에겐 민족의 시조이자 국부와도 같은 존재로써 한국사에서의 단군왕검+광개토대왕+세종대왕급 대위인으로 숭상하고 있다. 몽골 사람들은 칭기즈 칸이 없었다면 외국인들은 몽골이란 나라가 존재하는 줄도 몰랐을 거라고 말한다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 칭기즈 칸이 몽골 부족들을 하나로 모아 통일하지 못했더라면 몽골 또한 역사의 격렬한 물살에 휩쓸려 초원 여타 부족들이 그러하듯 사라져버렸거나 소수민족으로 전락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146] 때문에 몽골 인의 칭기즈 칸 사랑은 한도 끝도 없을 정도. 사실 그도 그럴 것이 칭기즈 칸이 바로 몽골의 문자를 만들고[147] 법전도 만들고 이름값도 높인 사람이다. 거기다가 본인도 자신의 고향을 매우 사랑했으니 국부로 모시기엔 이만한 사람도 없었을 것이다. 한국의 단군, 고대 로마로물루스에 비할 수 있는 위상인데 단군과 로물루스가 신화 속 인물인데 반해 징기스 칸은 역사적 인물이니 몽골사적으로 거의 신화적인 존재라고 할 수 있다.

허나 20세기 공산주의 시절에는 칭기즈 칸에 대한 찬사가 금지되었던 역사가 있다. 키예프 공국 시절 몽골-타타르의 멍에에 대한 트라우마가 도진 소련위성국인 몽골에게 압력을 넣었기 때문이다. 때문에 공산주의 시절 몽골에서는 징기스칸에 대해 역사 시간에 제대로 배우지도 못했고, 공식적으로 언급도 거의 하지 못했다고 한다. 지금처럼 공개적으로 칭기즈 칸을 국부로 대우하게 된 것은 동유럽 혁명소련 해체냉전이 끝나고 소련의 영향력이 사라진 후의 일이다.

몽골에서는 좋은 것이나 랜드마크에는 죄다 칭기즈 칸을 붙이고 있다. 칭기즈 칸 국제공항 등이 그 사례. 이런저런 상표에도 쓴다. 2013년에는 한때 수흐바타르 광장이었던 울란바토르 시내 광장 이름을 칭기즈 칸 광장으로 바꿔서 정치권의 옛 공산주의 세력들과 민주화 세력 간의 갈등이 있기도 했는데 결국 명칭 변경이 위법이라는 사법부의 판결을 받고 다시 수흐바타르 광장으로 돌아갔다.

4.4.2. 동아시아

4.4.2.1. 한국
고려 시대에 몽골의 침략에 전 국토가 짓밟히고 치욕을 당한 역사가 있다. 서아시아와 더불어 몽골 제국의 침략으로 가장 처참하게 짓밟힌 곳이 한반도를 포함한 동아시아다. 다만 여몽전쟁은 칭기즈 칸 사후에 칭기즈 칸의 유언과도 무관하게 일어난 전쟁이라는 걸 감안해야 할 것이다. 그래서 칭기즈 칸을 좋게 평가하면서도 여몽전쟁 당시의 몽골 제국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평가를 하는 한국인들이 적지 않다. 물론 몽골이 고려와 형제국을 맺으면서 고려에게 행패를 부리기 시작한 게 칭기즈 칸 때 일이니 여몽전쟁에 간접적인 영향을 주었다고는 할 수 있다.[148] 워낙 오래 전 일이고 현재의 몽골은 과거에 비해 한국에 주는 영향이 주변 국가들에 비해 매우 적을 정도로 국력이 축소되어 한국과 직접적으로 국경을 접하지 않아 더 이상 분쟁의 소지가 없었다. 직접 고려를 침공한 적이 없는 데다 여몽관계가 본격적으로 파토나게 된 계기인 저고여 피살 사건은 1225년에 일어났지만 이 당시 칭기스칸은 서하 원정 중이라 당시 몽골의 대 고려 정책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었고, 여몽전쟁이 시작되기 4년 전인 1227년에 사망한다. 물론, 몽골-칭기즈 칸 숭배는 서양까지 동양의 힘을 떨쳤다는 서양에 대한 열등감을 해소하는 옥시덴탈리즘 대리만족적 성향이 강하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그리고 고려가 이웃에 있던 금나라, 남송, 서하가 완전히 갈려나가고 원나라 통일 후에도 하충계급 취급 받았다는 문제에 비하면 그나마 나은 대우를 받았다 여겼다는 점도 있다.[149] 하지만 고려 및 조선 시대에는 원나라의 약화와 사대주의 등의 영향으로 초기부터 고려는 오랑캐에 굴복했다는 걸 강조했기에 굉장히 이미지가 악화되기도 했다.
4.4.2.2. 중국
"20살이 되자 ‘우리의’ 칭기즈칸이 유럽을 정복했으며 그때가 우리나라의’ 최전성기였다는 말을 들었다. 그러나 25살이 되었을 때 소위 ‘우리나라(중국)의’ 최전성기는 사실은 몽골인중국을 정복해서 우리를 노예로 만들었을 때였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루쉰

中 “칭기즈칸은 위대한 중국인” 억지
중국인 징기스칸....그가 중국인이어야만 하는 이유

중국에서는 한족을 중시하는 대한족주의자 위주로 칭기즈 칸을 싫어하는 사람도 적지 않지만 전반적으로 어느 정도나마 좋아하는 편이다. 중국인들의 논리에 따르면 일단 칭기즈 칸 자체가 몽골족이고 몽골족은 중국의 소수민족, 즉 몽골인⊂중국인이며 북방 한족들은 혈통상으로 몽골족과 매우 가까우니[150], 단순 역사적 논란이 있는 쿠빌라이 칸이나 원나라뿐만 아니라 "칭기즈 칸도 중화영웅이고 몽골 제국중화제국이다." 몽골 제국을 중국사라는 식으로 주장한다. 심지어 시진핑 찬양가에서도 이 논리를 써먹고 있다. 이 노래에 따르면 칭기즈 칸은 삼황오제, 진시황, 한무제, 마오쩌둥, 시진핑 급 중화 영웅이다(...).

실제로 칭기즈 칸과 몽골의 원정 관련 동영상들을 보면 "중화민족이 세계를 재패했다.", "이것이 중화의 힘이다!"라며 흡족해하는 중국인들의 댓글(...)을 심심찮게 볼수 있다. 나아가 중화사상에 써먹는 모델로서, 내몽골 자치구에서 가짜 무덤까지 만들고, 몽골이 지배한 곳은 죄다 중국 땅이라는 주장을 하고 있다.

대체로 내몽골족 출신 중국인들과 북방 지역 한족들이 칭기즈 칸을 중국인이라 주장하고 있다. 남중국 출신 중국인들은 원나라 황제뿐 아니라 칭기즈 칸에 대해서까지는 그렇까지 각별하게 생각을 안 한다는 경우가 많지만 아래 사례를 보면 꼭 그런 건 아니다.

북방 지역 한족들 뿐만 아니라 홍콩인, 대만인, 화교 등 중국 외 중화권에서도 칭기즈 칸이 중국인이라는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어느 정도 나오고 중화인민공화국이 건국되기 이전 시대 사람인 루쉰도 칭기즈 칸이 중국인이라는 말을 들었던걸 보면 중국인들의 칭기즈 칸 사랑이 꼭 단순 중공의 막북공정식 팽창주의적 역사 공정의 결과물인것조차 아니다. 평생 홍콩에서 활동하여 중국의 영향력으로부터 거의 자유로운 입장이었던 무협 작가 김용의 대표작 《녹정기》에서도 '칭기즈 칸은 중국의 황제니까 칭기즈 칸이 정복한 땅은 다 중국 땅' 이라는 논리로 러시아인들을 갈구는 장면이 등장한다. 김용의 작품들이 가지는 강한 중화사상적 측면을 생각해 보면 칭기즈 칸+몽골제국사를 중국사로 끌어들이려는 해석은 중공뿐 아니라 중국의 중화사상 지지자들 사이에서 상당히 오래됐으며 광범위한 지지를 받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중화민국 시대에는 몽골이 중국 땅이라고 주장했으며 중국 국민당타이완으로 정착한 뒤 요즘도 타이완에서 판매되는 중국 지도를 사서 보면 몽골이 중국 영토로 되어있다. 즉, 칭기즈 칸을 중국인으로 주장하되 몽골인의 나라 정도는 인정하는 중국과는 달리, 대만은 아예 한술 더 떠서 몽골인의 나라자체를 인정하지 않으며 몽골국은 중화민국이 되찾아야 하는 고토라고 주장한다.지만 이것도 2012년 후에는 옛말이 됐다. 대만/영유권 주장 지역 참고.

2020년 10월, 프랑스 낭트 박물관에서 칭기즈 칸 몽골 전시회를 하자 바로 중국에서 칭기즈 칸은 중국인이라고 항의하면서 무산시켜 버렸다.
4.4.2.3. 일본
일본에서는 아주 나쁘게 보는 시각은 별로 없는데 그 이유는 비록 자연 재해 때문이라지만 원나라의 침공을 저지한 것은 사실이고 그 때문에 오히려 원나라와 칭기즈 칸을 띄울수록 그걸 막았다는 자신들의 자부심이 더 높아지기 때문이다. 코에이의 게임 징기스칸 시리즈에서도 제목부터가 몽골이 주인공에, 몽골계 세력도 매우 강력하며 부정적인 묘사는 전혀 없는 모습으로 등장한다.

4.4.3. 중동, 남아시아, 중앙아시아

반면 아시아 대륙 안에서도 서쪽으로 가면 평가가 크게 갈리는데, 페르시아의 역사서에서 칭기즈 칸은 아예 악마와 손을 잡았다고 기록되기도 하고 《로마 제국 쇠망사》에서 에드워드 기번은 칭기즈 칸과 그의 후손들 때문에 전 세계가 떨었다고 쓸 정도였다. 이들에게 칭기즈 칸은 아돌프 히틀러와 같은 사악한 침략자이자 학살자, 전범으로 취급되며, 실제로 이들은 그렇게 느낄 만한 피해를 입었었다. 거기다가 기독교 연대기 중에도(《Chronicle of Novgorod》) 몽골군은 신이 내린 징벌이라 불릴 정도의 포스[151]를 보여주었으니 서구 쪽에서 좋게 보긴 힘들겠다. 거기다가 살아 생전에 초상화도 못 그리게 하고 그에 대한 역사도 못 쓰게 했던지라 그에게 당했던 국가들은 온갖 나쁜 이미지를 그에게 덮어씌웠고, 나중엔 '자신들의 나라가 못 사는 건 몽골족이 다 수탈해가서' 란 식으로 얘기하는 사람이 있을 정도였다. 예로 이란 정치인들이 칭기즈 칸이 중동을 발라버리지 않았다면 미국보다 핵폭탄을 먼저 만들었을 거라고 할 정도. 뭐, 실제로 몽골 침입 이후 메소포타미아의 관개 설비가 완전히 파괴되어 농업이 괴멸하고, 이란 지역 역시 아케메네스 왕조 이래 1,000여 년간 축적해 온 국력과 문화적 저력의 상당 부분을 몽골의 수탈로 상실한 것은 사실이다. 핵폭탄을 누가 먼저 만들었을지야 따져봤자 별 의미 없는 뻘짓거리지만, 중동권에 비해 문화적, 기술적, 경제적으로 명백히 열세였던 서유럽권이 중동을 따라잡고, 추월하게 된 계기 중 하나가 몽골 제국의 공격으로 인해 중동 지방이 받은 타격이었음은 부정하기 어렵다.[152]

아프가니스탄이나 이란, 이라크, 시리아, 팔레스타인 같은 중동권 나라들에선 알렉산더 대왕과, 티무르와 함께 가장 최악의 침략자 중 하나로 꼽히는 인물이다. 《론리플래닛》 지은이인 토니 휠러가 이 나라들에 가서 칭기즈 칸 이야기를 했다가 아프가니스탄에서 멱살까지 잡히고 "그 XX 이야기는 왜 하는데? 이름만으로도 기분 더러워. 또 그 말 하면 당신 가만 안 둬" 이런 소리까지 들을 정도였다. 몽골인의 후손으로 여겨지는 하자라족은 아프가니스탄과 이란에서 흔한 화풀이 대상이기도 하다. 오죽하면 대놓고 괴롭혔다는 목격담이 많을 정도다.[153] 다른 나라에서도 이야기하니까 정말이지 기분 좋게, 긍정적으로 대꾸하는 사람을 도통 볼 수 없었다고 한다. 하긴 국토가 뿌리째 갈려나갔으니 그 나라 사람들이 학을 뗄 만도 하다. 이쯤 되면 오히려 동유럽이 온건해 보일 정도이다.

다만 몽골 제국의 침공을 당하지 않았던 리비아나 알제리, 튀니지, 모로코 같은 북부 아프리카와 사우디아라비아, 카타르, 오만, 아랍에미리트, 예멘 등 아라비아 반도의 아랍권 국가들에서는 이란이나 이라크 등에 비해 크게 악평을 받지는 않는 편이다. 다만 이 국가들에서도 문헌에 징기스칸과 오고타이 칸 등 몽골 제국의 역대 칸들과 몽골 제국을 경계하는 기록을 현지 역사가와 이슬람 율법학자들이 서술하기도 했다.

터키카자흐스탄에선 조금 다르다. 굴욕이라고 부르며 싫어하는 이도 있지만 튀르크인과 같은 유목민으로서 그 위치와 여러 가지 원인으로 싸우긴 했어도 이슬람이라고 탄압한 게 아니고 종교적으로 관용을 베푼 점이라든지 다른 유럽 기독교 나라보단 낫다는 평을 내리곤 한다. 일부 범투란주의자들은 칭기즈 칸을 터키 민족의 영웅이라고 보기도 한다. 애초에 터키인 남성 이름 중에서 상당히 많이 찾아볼 수 있는 이름 중 하나가 바로 '젱기즈(Cengiz)' 혹은 '티무친(Timuçin)'이다. 카자흐스탄에서도 '승그스(Шыңғыс)'라는 이름이 흔하며 여기에서 파생된 '승그소프(Шыңғысов, 남성형)/승그소바(Шыңғысова, 여성형)'라는 성씨도 있다. 양쪽 모두 당연히 칭기즈 칸을 의미하는 것이다. 사실 튀르크인과 몽골인은 원래 같은 생활 공간을 공유했고 오랜 유목 생활로 제법 많이 섞이기도 했다. 그리고 튀르크계인 러시아의 투바 공화국은 몽골의 영향을 걸쭉하게 받았다.

사실 중동권에서 칭기즈 칸을 무척이나 증오하고 미워하는 이유는, 오히려 그들이 칭기즈 칸 이후로는 대대적으로 외세에게 침략 전쟁을 받은 적이 없기 때문이다. 서양 열강들의 침략 방식은 단순무식하게 군대로 밀어버리고 초토화시키는 방식이 아닌, 지능적으로 이권과 국체를 야금야금 베어물고, 필요한 만큼 뜯어냈으면 나머지는 그냥 두는 일종의 뷔페식 정복이었다.[154] 반면 칭기즈 칸은 그야말로 불도저같이 군대와 무기로 밀어버리는 방식이었고, 그 때문에 비슷하게 군대로 주변국을 마구 밀어버리는 방식을 취했던 히틀러 취급을 받는 것이다.

반면 원나라 때 색목인 계급으로 우대받았던 위구르인들의 경우 칭기즈 칸과 원나라를 대단히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으며[155], 파키스탄과 인도, 방글라데시의 경우에도 자신들이 몽골 제국티무르 제국의 후신인 것과 몽골 제국의 부마국임을 주창한 무굴 제국의 후예라는 식의 정체성을 가져서인지 몽골 세력에게 점령당한 다른 국가들에 비해 칭기즈 칸에 대해 긍정적이다. 파키스탄/인도/방글라데시계 무슬림 이름 중 제일 흔한 이름 중 하나가 바로 'Khan'으로, 무슬림 국가나 지역 중 이름으로 'Khan'을 많이 쓰는 나라는 위 세 나라밖에 없다.[156]

4.4.4. 서양

몽골군이 유라시아와 아랍 지역에서 이슬람 교도들을 박살낼 때 유럽 기독교 나라들은 전설 속의 기독교 왕인 프레스터 존이 구원하러 왔다고 멋대로 착각을 했다. 이슬람 측에서 구원을 요청하러 보낸 사신이 "아니다... 저들은 기독교도가 아니다. 지금까지의 적이던 우리가 갑자기 구원을 요청하다니 이가 갈리겠지만 저들은 우리보다 더하다. 우리가 당한다고 기뻐하지 마라. 곧 당신들 차례가 올 것이다."라고 급하게 말할 때, 유럽 기독교인들은 사신을 비웃으며 내쫓았다.

근데 정작 동유럽이 점령당하고 중부, 남부 유럽이 잠깐 갈린 것 빼곤 딱히 접촉이 없었고[157] 오히려 십자군 왕국들은 일 칸국의 유력한 동맹 후보국으로 몇 차례씩 동맹 요청 사신이 오갔다는 걸 감안하면 프레스터 존의 전설이 딱히 틀린 것만도 아니었을 듯. 캅카스에 있던 기독교 국가인 조지아 왕국 같은 경우에는 몽골과 많이 엮여서 고생하긴 했다. 조지아는 몽골군과의 치열한 싸움 끝에 존중을 얻고 몽골의 속국으로 편입되었으나 당시까지만 해도 후진 약소국이었던 러시아는 노브고로드 공화국을 제외하면 말할 것도 없이 갈렸다. 후손인 몽케 칸이 본격적인 유럽 정벌(로마까지..)을 준비하다가 병들어 죽는 통에 몽골의 전통에 따라 이미 떠난 원정군들도 쿠릴타이에 참석하기 위해 반쯤 갈아놨던 중부 유럽을 그냥 포기하고 돌아오다보니 때를 놓치고 무산되어버렸다. 만일 몽케 칸이 이때 안 죽고 좀 더 살았더라면 정말로 이슬람 사신이 말한대로 유럽 여러 나라가 몽골 말발굽에 밟혔으리라는 주장을 펼치는 이도 있지만.

아마 서양에 가장 잘 알려진 동양인 중 하나일 것이다. 지옥에서 만나게 될 사람 목록에 올라가 있다거나(히틀러, 스탈린, 마오쩌둥과 함께), 훈족의 수령 아틸라와 더불어 완전 무식한 야만인으로 묘사된다. 닥터후에서만 봐도 닥터가 "칭기즈 칸의 군대가 다 몰려와도 타디스는 안전했다" 라고 말하면서 완전 야만인 취급. 칭기즈 칸의 몽골 통일을 다룬 영화 몽골의 리뷰 중엔 칭기즈 칸의 인간적인 모습이 나오자 헛소리하지 말라고 야유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안 좋거나 희화화된 이미지와는 반대로 몽골과 칭기즈 칸을 역사상 최고의 Badass 취급하면서 숭배에 가깝게 좋아하는 서유럽인도 많다. 아무래도 몽골에게 직접 피해를 입지 않은 지역이기 때문에 그런 듯하다.

해롤드 램은 몽골인을 이란튀르크계의 혼혈로 보았다만 이 사람은 몽골인의 이야기 몇 개를 듣고 그걸 야사의 법문이라고 써놨다고 하니 믿음이 갈 리가 없다. 원래 유목 민족들이야 서로 같은 유목 생활권을 공유했고 거기다 동돌궐이나 위구르는 원래부터 내•외몽골에 있었으며 더 나아가 위구르 수도 카라발가순은 현재 울란바토르 인근이다. 두 민족이 얽히는 거 자체는 당연하다. 그리고 이곳에 잔류하던 튀르크인들은 서아시아의 연계성은 거의 없었고 중국과의 접촉이 가장 많고 돌궐이야 당에게 시시때때로 괴롭히고 정복하러 다닐 정도로 밀접한 관계였다.

오래전부터 평이 엇갈려서 중동 쪽에선 아예 갈아먹을 악당으로 묘사되지만, 초서의 《켄터베리 이야기》에서도 이름이 언급되는데 여기선 킹왕짱이란 식으로 묘사된다. 이름이 라틴어식인 Camius Khan의 변형이라 설명이 없으면 이게 누군지 알기 힘들지만... 연회를 여니까 아랍의 왕들이 알아서 선물을 보내올 정도로 묘사되지만 《켄터베리 이야기》가 원래 역사적 고증 같은 건 잘 안 따지는지라 칭기즈 칸이 우크라이나 남쪽에 살고 러시아와 싸운 걸로 유명한 걸로 나온다.[158] 거기다가 태어날 때부터 이슬람 교도였다고 나온다... 도요토미 히데요시크리스천이라는 것 같은 소리다. 참고로 이 이야기가 나오는 건 수습 기사(Squire)의 이야기인데 아쉽게도 미완이다. 여하간 칭기즈 칸이 좋은 이미지로 나오는 드문 중세 유럽의 이야기일 것 같지만... 위에 나온 대로 중세 유럽에서 몽골을 기독교 나라로 멋대로 좋게 쓴 편이였다는 걸 생각하면 외외로 더 많을지도 모른다.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을 봐도 원나라에서 기독교에 흥미가 있다고 쓴 걸 봐도.

러시아에서는 중근동에서 생각하는 이상으로 씹어먹을 철천지 원수로 여긴다. 러시아 지방은 작은 소공국으로 나뉘어 있던 지역이긴 했지만 이런 러시아를 무너뜨리고 240년이나 지배한 몽골-타타르의 멍에를 치욕으로 여기며 몽골 타타르의 대칸들 중 가장 유명한 칭기즈 칸도 당연히 증오의 대상이다. 그리고 타타르계 칸국은 러시아가 독립한 뒤에도 수백년간 러시아인들에게 살인, 강간, 약탈, 납치, 인신매매를 저질렀기 때문에[159] 한국과 중국에서 생각하는 왜구 이상으로 어그로가 쏠려있는데 그 최고 원조인 칭기즈 칸을 싫어하지 않으면 이상할 노릇. 러시아의 유명한 시인 알렉산드르 푸시킨은 타타르의 지배는 파괴말고는 남긴게 없다고[160] 글을 남길 정도였다. 실제로 몽골 지배 이후 러시아는 다른 유럽 지역에 비해서 굉장히 낙후된 상태로 사실상 처음부터 시작해야 했다.[161]

결국 키예프 루시의 공국 중에서는 후발주자로서 세력이 작은 편이었던 모스크바 공국킵차크 칸국의 세금 수취를 대리하는 과정에서 세력을 축적하여 러시아를 통합하게 되지만... 이 과정에서 러시아는 키예프와 그 일대에 대한 영향력을 상당히 상실하였으며, 이는 현대의 우크라이나러시아와 별개의 정체성을 주장하며 친 서방 행보를 보이는 경우가 많은 데까지 이르고 있다. 즉, 러시아의 입장에서 보면 키예프 공국 성립 이후 350년간 개발이 진행되었던 알토란 같은 영토를 몽골의 침입으로 인하여 상실하고, 춥고 척박한 동북쪽에서 새로운 영토를 개척해야 하는 처지가 된 것. 그리고 무엇보다도, 250년 가까이 몽골의 지배를 받는 과정에서 러시아는 심각한 문화적 정체와 사회적 퇴보[162]를 겪었고, 그 사이 과거 대등한 상대였던 서유럽 국가들은 러시아를 아득히 추월하며 발전하였으며, 러시아는 18세기 ~ 19세기가 되어서야 이를 다시 어느 정도 따라잡을 수 있었다. 애초에 러시아가 열강으로서 유럽사에 다시 모습을 드러낸 것이 18세기 초중반, 표트르 1세의 개혁 이후임을 생각해 보면... 몽골의 지배에서 벗어난 이후 피폐해진 국력을 수습하는 데 200년 이상의 세월이 걸렸음을 알 수 있다.

여기서 몽골의 침략과 정복, 지배가 열강 러시아의 탄생에 미친 긍정적인 영향을 찾아보자면 기존의 루시 공국들을 철저하게 파괴하여 모스크바 공국에 의한 재통합을 용이하게 만들었다는 정도인데, 그 철저한 파괴를 수습하고 회복하는 데 걸린 시간이 수백년에 이르는 상황에서 이것을 몽골의 을 본 것이라 할 수 있을까? 사실 몽골의 침략 이전 교통과 통신, 통치 기술의 미비로 인하여 루시 공국들은 도시 국가 연합체 비슷한 형태로 분열되어 있었지만, 그 와중에도 종주국격인 키예프 공국에 의한 재통합이 몇 차례 이루어졌음을 생각한다면 몽골의 파괴가 없었다고 한들 루시 공국들의 통합은 불가능했을 것이라는 의견 자체가 섣부른 면이 있다. 이를 두고 몽골 제국 덕분에 러시아가 통일되어 대제국이 될 수 있었다고 하는 것은 일제와 김일성 덕분에 한국이 신분제의 잔재를 털어내고 현대 국가로 거듭났다고 주장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163]

소련은 몽골에서 칭기즈 칸에 대한 흔적을 없애고자 갖은 노력을 다 했으나 몽골의 친소파 정치인 같은 허수아비들조차도 칭기즈 칸만은 위대하다고 여겨 목숨 바쳐가며[164] 칭기즈 칸의 흔적을 보존하고 연구하는 데 앞장섰다. 그리고 소련이 무너지는 시기에 몽골은 아주 열심히 찬양하며 기리며 소련의 이런 뻘짓을 소심하게 복수했다고 비난한다. 다만 이런 소련의 행태를 꼭 몽골 제국의 지배에 대한 복수라고 봐야 할지는 의심스럽다. 꼭 몽골이 아니더라도 원래 소련은 특유의 세계 인민주의(?)로 자국이나 위성국에서 민족주의적 성향이 발호하는 것을 싫어했다. 몽골 이외의 위성 국가에서도 이는 마찬가지였던 것. 그 예로 스탈린만 해도 고향인 조지아에서 민족주의를 똑같이 처절하게 박살냈고 이전이나 이후에도 소련은 각 위성 국가 민족주의자 및 독립주의자는 학살로 싸그리 대했다. 이런 성향은 예전의 중국도 마찬가지로 문화대혁명을 일으키며 옛것들은 다 봉건잔재이므로 없애야 한다고 그런 점에서 공산권의 성향 때문에 그런 것이라 볼 수도 있다.

미국에서는 몽골 제국의 치세를 좋게 얘기해서 팍스 몽골리카팍스 아메리카나와 비교해서 자신들을 띄운다고 한다. 여하간 죽은 뒤에 이곳 저곳에서 정치적이나 쫀심 싸움에 쓰이는 신세가 되었다.

기독교를 특별히 싫어하지 않은 데다가 중립적으로 대하고 손자인 쿠빌라이 칸바티칸에 요청하여 선교사를 보내달라고 한 사례 등 때문에 의외로 정교회를 제외한 그리스도교에서는 큰 감정은 없는 편이다. 훈족아틸라 마냥 유럽에 '하느님의 징벌' 급의 포스를 뽐내었지만, 정작 서유럽은 점령 당하지 않은 것도 있고. 물론 동방 교회 쪽은 위에 언급했듯이 몽골에게 분명 타격을 크게 입었다.

이런 칭기즈 칸의 다양한 면모가 조명되고 있는 현재, 전반적으로 서양 쪽에서는 지도자로서는 최고(Best Leader)였지만 적으로서는 최악(Worst enemy)의 인물이었다고 평가하고 있다.

4.5. 총평

칭기즈 칸이 고결한 지도자이자 훌륭한 통치자인지, 반대로 피에 굶주린 살인자인지는 당신이 누구에게 묻느냐에 달려 있다. 오늘날 몽골에서, 그는 그들이 좋아하는 나라의 아버지이고, 그의 많은 정치 개혁은 선구적이었다고 지지받고 있다. 그러나 이전에 점령지였던 이라크나 이란에서는 그를 학살적이고, 견디기 힘든 파괴와 피해를 일으킨 광적인 폭군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의 스토리가 위대함인지 잔인함인지에 대한 논쟁과 온갖 과장과 관계없이, 그는 의심할 여지 없이 고대 세계에 가장 중요하고 영향을 많이 끼친 지도자이며, 그의 유산은 오늘날까지 강하고 뚜렷하게 남아 있다.
- 문명 5 백과사전
칭기즈 칸의 등장과 몽골의 부흥은 세계사의 시각에서도 그야말로 혜성과 같았는데, 이를 좋게 말하자면 그만큼 몽골이란 나라가 큰 족적을 남겼다는 것을 뜻하며, 부정적으로 생각하자면 서양에서 재앙의 징조로 여겨졌던 혜성에 빗댈 수도 있다.

누군가는 동양의 알렉산드로스 대왕이라고 하고, 누군가는 중세의 히틀러라고 할 만큼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칭기즈 칸이지만, 적어도 세계 역사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거인이라는 것 하나만큼은 결코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흔히 비교되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을 수식하는 '설령 위대한 군주가 아니었다고 해도, 거대했던 군주'라는 칭호는 칭기즈 칸에게 좀 더 알맞다는 말이 많다. '동양의 알렉산드로스 대왕vs중세판 스탈린' 같은 양자택일식 이분법은 맞지 않다. 누군가에게 영웅이 다른 누군가에게는 학살자가 되던 때가 전근대 시기이기 때문이다. 따지고보면 알렉산드로스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학계에서는 대중들이 집착하는 "이 사람은 영웅이냐 학살자냐" 식의 선악 나누기 평가를 21세기 들어서는 잘 하지 않는다.

물론 평가가 갈리는것은 인성, 정치등에 관한 얘기이며, 군사적 능력에 대해서는 이론의 여지 없는 역사상 최고의 명장이자 정복군주중 하나다.

한편으로 그는 글로 도저히 담기조차 힘든 역사상 최악의 잔혹한 전쟁 범죄와 대규모 학살을 수없이 자행한 최악의 인간말종이기도 했다. 인간이 잔인해지면 어디까지 갈 수 있냐 한다면 칭기스칸을 들면 된다.

그리고, 칭기즈 칸에 대해 평가할때는 이 인물이 몽골 내부적으로는 씨족과 부족의 틀을 넘어 사회를 개편하고 국가의 기반을 건설한 개혁자이자 입법자이고, 몽골 외부적, 즉 세계적으로는 역사상 가장 넓은 영토를 정복한 정복자라는 점을 분리하여 생각할 필요가 있다. 전자의 업적은 물론 후자의 업적의 기반이 되었지만 이 둘은 엄연히 다른 업적이다. 즉, 칭기즈 칸은 역사상 가장 넓은 영토를 정복한 정복자이고, 이 정복으로 탄생한 국가(몽골 제국)의 영역 내에서 일어난 방대한 교류가 세계사적 전환의 계기가 된 것은 사실이지만 칭기즈 칸이 그의 제국 전체에서 입법자이자 개혁자였다고 볼 수는 없다. 흔히 자연공동체에 가까운 부족/씨족과 그 관습적 체제를 탈피하여 보다 광범위하고 공적인 사회의 기반을 만들고, 그 기반에서 통용될 성문화된 법을 만들었다는 것이 창기즈 칸의 대표적 업적으로 꼽히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몽골 초원 안에서'나 선구적이고 혁신적인 개혁이었지, 초원 바깥의 세계에서는 빠르면 수천년, 늦어도 수백년 전에 이미 진행되고 있던 현상이다. <테무진 to the 칸> 같은 매체에서는 이 두 영역을 제대로 구별하지 않다보니 마치 칭기즈 칸이 그가 정복한 제국의 영역 전체에 대해 위대한 입법자이자 정치개혁자였다고 잘못 묘사하게 되고, 그러다 보니 몽골 제국을 '세계 최초의 근대국가' 라는 황당한 서술까지 나왔다.[165]

5. 가족 관계

제1오르도 관리
  • 제1황후(皇后): 광헌익성황후 홍길랄씨(光獻翼聖皇后 弘吉剌氏)
    • 장남: 목종 주치(穆宗 朮赤), 추존황제(追尊皇帝)
    • 차남: 성종 차가타이(聖宗 察合台), 추존황제(追尊皇帝)
      • 장남: 무투겐
        • 4남: 카라 훌레구: 차가타이 칸국의 초대 칸
    • 3남: 태종 오고타이(太宗 窩闊台), 몽골 제국의 제2대 대칸
    • 4남: 예종 툴루이(睿宗 拖雷), 몽골 제국의 임시 대칸
    • 장녀: 창국대장공주 코첸 베키(昌國大長公主 火臣 別吉), 창충무왕 패독(昌忠武王 孛禿)에게 하가(下嫁)
    • 차녀: 연안공주 체체 이켄(延安公主 撦撦亦堅), 토랍이길(土拉而吉)에게 하가(下嫁)
    • 3녀: 조국대장공주 알카이 베키(趙國大長公主 阿剌海 別吉), 불안석반(不顔昔班), 북평왕 진국(北平王 鎭國), 조무의왕 패요합(趙武毅王 孛要合)에게 하가(下嫁)
    • 4녀: 운국공주 투멜룬(鄆國公主 禿滿倫), 적굴(赤窟)에게 하가(下嫁)
    • 5녀: 아아답로흑 공주(阿兒答魯黑 公主), 태출(泰出)에게 하가(下嫁)
  • 황후(皇后): 홀로륜 황후(忽魯倫 皇后)
  • 황후(皇后): 활리걸담 황후(闊里桀擔 皇后)
  • 황후(皇后): 탈홀사 황후(脫忽思 皇后)
  • 황후(皇后): 첩목륜 황후(帖木倫 皇后)
  • 황후(皇后): 역련진팔랄 황후(亦憐眞八剌 皇后)
  • 황후(皇后): 불안홀독 황후(不顔忽禿 皇后)
  • 황비(皇妃): 홀승해 비자(忽勝海 妃子)
  • 황비(皇妃): 야간 비자(耶干 妃子)
  • 황비(皇妃): 야축 비자(耶逐 妃子)

제2오르도 관리
  • 제2황후(皇后): 홀란 황후 올와사씨(忽蘭 皇后 兀洼思氏)
    • 6남: 활렬견 태자(闊列堅 太子)
  • 황후(皇后): 고야별속 황후(古兒別速 皇后)
  • 황후(皇后): 역걸렬진 황후(亦乞列眞 皇后)
  • 황후(皇后): 탈홀사 황후(脫忽思 皇后)
  • 황비(皇妃): 야진 비자(也眞 妃子)
  • 황비(皇妃): 야리홀독 비자(也里忽禿 妃子)
  • 황비(皇妃): 찰진 비자(察眞 妃子)
  • 황비(皇妃): 합랄진 비자(哈剌眞 妃子)
  • 황비(皇妃): 내만녀 비자(乃蠻女 妃子)
    • 8남: 출아철 황자(朮兒徹 皇子), 요절(夭折)

제3오르도 관리
  • 제3황후(皇后): 야수 황후 탑탑아씨(也遂 皇后 塔塔兒氏)
  • 제5황후(皇后): 야속간 황후 탑탑아씨(也速干 皇后 塔塔兒氏)
  • 황후(皇后): 홀로합랄 황후(忽魯哈剌 皇后)
  • 황후(皇后): 아실륜 황후(阿失侖 皇后)
  • 황후(皇后): 독아합랄 황후(禿兒哈剌 皇后)
  • 황후(皇后): 찰합 황후 이씨(察合 皇后 李氏)
  • 황후(皇后): 아석미실 황후(阿昔迷失 皇后)
  • 황후(皇后): 완자홀도 황후(完者忽都 皇后)
  • 황비(皇妃): 혼도로알 비자(渾都魯? 妃子)
  • 황비(皇妃): 홀로회 비자(忽魯灰 妃子)
  • 황비(皇妃): 날백 비자(剌伯 妃子)

제4오르도 관리
  • 제4황후(皇后): 공주황후 완안씨(公主皇后 完顔氏)
    • 7남: 찰올아 황자(察兀兒 皇子), 요절(夭折)
  • 황후(皇后): 홀답한 황후(忽答罕 皇后)
  • 황후(皇后): 합답안 황후 속륵손도씨(合答安 皇后 速勒遜都氏)
  • 황후(皇后): 알자홀사 황후(斡者忽思 皇后)
  • 황후(皇后): 연리 황후(燕里 皇后)
  • 황후(皇后): 독해 황후(禿該 皇后)
  • 황비(皇妃): 완자 비자(完者 妃子)
  • 황비(皇妃): 금련 비자(金蓮 妃子)
  • 황비(皇妃): 완자태 비자(完者台 妃子)
  • 황비(皇妃): 노륜 비자(奴倫 妃子)
  • 황비(皇妃): 묘진 비자(卯眞 妃子)
  • 황비(皇妃): 쇄랑합 비자(鎖郞哈 妃子)
  • 황후(皇后): 모개 황후(謨蓋 皇后)
  • 황비(皇妃): 숙량합 비자(肅良合 妃子) : 고려인(高麗人)
  • 황후(皇后): 아복합 황후(阿卜哈 皇后)
  • 황비(皇妃): 팔불별걸 비자(八不別乞 妃子)
  • 황비(皇妃): 탑탑아녀(塔塔兒女)
    • 5남: 올로적 황자(兀魯赤 皇子)
  • 황비(皇妃): 불명
    • 9남: 올로찰 황자(兀魯察 皇子), 요절(夭折)
    • 6녀: 고창공주 야립 가돈(高昌公主 也立 可敦), 파이술 아아특 적근(巴而術 阿兒忒 的斤)에게 하가(下嫁)
    • 7녀: 포역색극 공주(布亦塞克 公主), 공주(公主)의 외모가 추해 부마(駙馬)가 그녀를 좋아하지 않자 칭기즈 칸이 크게 노해 부마를 죽였다.

48명의 황후 및 황비들에게서 총 9남 7녀를 두었다.

해당 명칭들은 원나라에서 쿠빌라이 칸이 올린 것이다. 황후는 몽골어로 의 여성형인 '카툰'이라고 불렀으며, 내명부오르도를 관리했다.

알려진 딸들은 이키레스족의 보투 쿠레겐과 결혼한 코친 베키, 오이라트족의 투랄치 쿠레겐과 결혼한 체체겐(치체겐), 칭기즈 칸의 딸 중 가장 지략적인 공주로 부친을 대신해 내정을 관리하고, 전장을 나간 적도 있다고 전해지며 웅구트족의 셴구이와 결혼한 알라가이 베키, 옹기라트 부족(황후족)의 싱쿠 쿠레겐과 결혼한 투말룬, 역시 옹기라트 부족의 차우르 세겐과 결혼한 알탈룬이 있다.

현재 칭기즈 칸의 자손으로 밝혀진 사람은 직·방계를 통틀어 1,600만 명이 넘는다.[166]

6. 이야기거리

그의 최후에 대해선 전염병이나 화살에 맞은 상처가 악화되어 죽었다거나 벼락 맞아 죽었다거나 말에 떨어져 죽었다거나 심지어 복상사[167]했다고 전해질 정도로 여러 설들이 많은 편이다. 그러나 일단은 《원조비사》에서 기록된 대로 말에서 떨어진 이후 쇠약해졌고 이로 인해 병을 얻어 죽었다는 설이 정설로 취급된다.

그의 무덤은 아직도 어디 있는지 미스터리. 여기에 대해 좀 으시시한 전설이 하나 있다. 칭기즈 칸의 무덤을 옮기는 과정에서 마주친 살아있는 모든 것을 몰살시켰다는 것이다. 이걸로도 모자라 칭기즈 칸의 무덤은 묻은 후 파헤쳐지는 것을 막기 위해 기병대가 수없이 짓밟음으로써, 무덤을 평지로 만들어 아무도 찾을 수 없도록 만들었다고 한다. 당연히 말들과 기수들도 모두 몰살되었다 카더라. 부르한 산 참고. 물론 전설일 뿐 확실한 건 아니다.

칭기즈 칸의 유해를 그의 충복이 '그냥 평범하게 몽골식 장례를 치렀다'고 한다. 칭기스 칸이 생전에 사치를 싫어하고 유목민의 전통을 지킨 것을 상기하면 이쪽도 상당히 신빙성이 있다. 당시 몽골식 장례는 시신을 말에 실은 후 달려나가서, 말이 지쳐서 멈춰선 곳을 파 돌로 시신 주변을 두르고 묻는 것이었다고 한다. 천하를 제패한 대칸의 장례로는 너무 소박한 것 같지만 그야말로 몽골인이었던 칭기즈 칸의 장례로 어떤 의미로는 적절하다고도.

일본이 중일전쟁 때 찾으려고 무진 애[168]를 썼지만 실패하고 대신 몽골의 고고학 기술만 어마어마하게 발전했다고 한다.

그의 친위대인 케식(한자로는 겁설, 怯薛)은 몽골 기병의 스테레오 타입으로 유명하며, 몽골을 주제로 한 게임이나 매체에서는 심심치 않게 들어간다. 이 친위대는 원래 1203년 칭기즈 칸이 다른 부족의 자객을 막으려고 창설한 부대인데 원래 100명에서 시작했던 게 전성기까지 10,000명이 배출되었다고 한다.

자식들은 서로 사이가 안 좋은 편이었는데 다른 것보다 주치가 문제였다.[169] 주치의 진짜 아버지가 누구냐는 문제로 2남인 차가타이와 갈등이 있었고 이런 와중에 오고타이가 칸이 되었다.

아시아의 약 8%(전 세계의 0.5%)의 남성 인구는 같은 Y염색체를 가지고 있다(#)고 하며 이들의 조상이 칭기즈 칸이라는 학설도 존재한다. 다만 이 설은 현재는 부정되는 것으로 보인다.(#)[170]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 초반부에 영국인이면서 이 아저씨 후손인 사람이 나오는데 선량한 사람이지만 현관에 도끼를 장식하고 싶어한다든지, 가끔씩 피와 연기와 말울음 소리의 환상에 시달린다든지, 털모자에 대한 깊은 애착을 보인다. 하지만 한국과 일본 등지에는 없다고. 있을 리가 없는 게 칭기즈 칸 생전에는 고려에 대한 침공은 없었고[171] 수부타이만 고려 근처에 가서 종이를 받아왔을 뿐이며 당연히 일본은 구경도 못했다. 고려와 몽골의 전쟁은 오고타이 칸 때 발발하였다.

내셔널 지오그래픽에서 꼽은 가장 중요한 정치인 50명 중 하나로 꼽히기도 했다. 하지만 워싱턴 포스트의 예를 볼 때 좋은 얘기는 별로 안 썼을 듯하다.

다만 워낙 효과적으로 정복하고 부하들 관리도 잘한지라 비즈니스 계에선 꽤나 호의적으로 보는 듯하다. 칭기즈 칸의 경영을 배우자는 얘기는 동양 뿐 아니라 서양에서도 간간이 나오는 얘기다.

칭기즈 칸의 후손을 황금씨족이라 부르기도 한다.

6.1. 환경전사 칭기즈 칸

카네기연구소와 막스 플랑크 협회에 따르면 칭기즈 칸은 본의 아니게 지구 환경을 급격히 개선시키는 역할을 하였다.

칭기즈 칸이 주도한 몽골 제국의 정복 전쟁이 당시 아시아-유럽 구대륙 세계 인구의 1/4을 학살하는 방법으로 진행되었고, 이 때문에 당시에 급증하던 이산화 탄소 배출량이 급격히 줄어들었는데 그 양이 약 7억 이나 되었기 때문이다.이는 2009년 세계에서 배출된 온실가스의 총량과 맞먹는다. 칭기즈 칸이 세계적인 대학살을 하고 다닌 덕분에 지구 온난화는 무려 200년이나 더 미뤄졌다고 한다. 기사

이 시기에 이산화탄소 배출량이 이토록 어마어마했던 이유는 상당부분 송나라에 기인하는데, 송나라 자체만으로도 1억에 가까운 인구가 배출하는 이산화 탄소량도 엄청난데다, 이 시대 송나라는 한창 석탄 산업이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남송의 경우에는 석탄을 대량으로 채굴해 작업용, 난방용으로 때기도 했다. 물론 코크스증기기관을 쓴 건 아니라서 효율은 창렬이었다.

게다가 송나라가 이후의 영국처럼 산업혁명의 기반을 닦고 있는 상황과는 상당히 다른 중세 농경국가에 불과했기에(자세한건 송나라 문서 참조) 무의미하게 지구환경만 파괴하여, 중국은 물론 근처의 한반도의 대기 오존에까지 큰 악영향을 줄 수 있었던 것을, 그 누구도 예상치 못한 칭기즈칸의 탄생으로 인해 그 가능성이 차단됐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문명들을 침공하고 파괴하여 탄소 배출량을 줄였다는 연구 결과가 나오자, 농담으로 칭기즈 칸을 환경전사라 칭하기도 한다.[172] 원 출처 또는 지구가 스스로 치유하기 위해 칭기즈칸이란 인간을 낳았다는 농담도 있다.

7. 이름 표기

표기 언어 발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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ᠴᠢᠩᠭᠢᠰ ᠬᠠᠭᠠᠨ
몽골어(몽골 문자) 칭기스 카간
Чингис хаан 몽골어(키릴 문자) 칭기스 항
ᠴᡳᠩᡤᡳᠰ ᡥᠠᠨ 만주어 칭이스 한
جنكيز خان 아랍어 진키즈 한
چنگیز خان 페르시아어 창기즈 한
Genghis Khan 영어 겡기스 칸 혹은 젱기스 칸
Чингисхан 러시아어 친기스한
Dschinghis Khan 독일어 징기스 칸
Cengiz Han 터키어 젱기즈 한
Çingiz xan 아제르바이잔어 친기즈 한
Чыңгызхан 타타르어 층그즈한
Шыңғыс хан 카자흐어 셩그스 한
成吉思汗(Chéngjísī Hán) 중국어 청지쓰 한
チンギス・カン[173] 일본어 친기스 칸
Thành Cát Tư Hãn 베트남어 타인 깟 뜨 한

8. 어록?

"가장 좋은 삶이란 너의 적들을 쳐부수고 그들이 네 발 앞에 쓰러지는 걸 보며 그들의 말과 재산을 빼앗고 그들의 여자들의 울음 소리를 듣는 것이다."[174][175]
페르시안 사서 중
이 말은 대중 사이에서 코난영화화 버전에도 쓰일 정도로 Bad Ass하다고 여겨졌다.[176] 전문은 "사람의 쾌락은 배신자를 복종시키고 적을 모두 멸망시켜 그 소유물을 약탈하고 그들의 종복들에게 소리 높여 울게 하여 그 얼굴이 콧물과 눈물로 얼룩지게 하고 우스꽝스럽고 우둔한 그들의 말에 걸터앉으며 그들 처첩의 배와 배꼽을 침대나 이부자리로 삼고 그 장밋빛 뺨을 즐기며 입 맞추고 그 붉은 입술을 빠는 데 있다"로, 페르시아의 사료에서 나온 말이며 잭 웨더포드 같은 칭기스 칸 옹호파와 일각에선 페르시아의 기준에서 나온 자료이니 사실이 아니라는 말이 나오고 있긴 하다. 허나, 이것이 사실이든 아니든 정복당한 나라들이 그를 얼마나 무자비한 사람으로 바라보았는지 잘 알려주는 말이다. (“The greatest happiness is to vanquish your enemies, to chase them before you, to rob them of their wealth, to see those dear to them bathed in tears, to clasp to your bosom their wives and daughters.”)
"모두가 내 발 밑에 쓰러지기 전까진 승리했다고 말하지 마라."(#)
"하늘의 도움으로 너희를 위해 커다란 나라를 정복했다. 하지만 세계를 정복하기에 내 삶은 너무 짧았다. 그 일은 너희에게 달린 일이다."
이 말은 죽기 전 아들에게 했다는 말도 있다. 하지만 다른 사서에서는 죽기 전에 금나라 정복을 완수할 작전을 얘기하고 죽었다고 한다.
"나는 수많은 잔혹한 행위를 하고 수많은 사람들을 죽였고 내가 한 일이 옳은지도 모르고 행했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든 신경 쓰지 않는다."
"다시 태어난다면 평범한 사람으로 평범한 게르(Ger, 몽골식 천막)에서 살다 평범하게 늙어 죽고 싶다."
"나의 자손들은 훌륭한 옷을 입을 테지, 맛있는 것을 먹고 준마를 몰고 아름다운 계집을 안을 테지, 그 모든 것이 누구의 덕분인지도 모르는 채."[177]
죽기 전에 말했다는 이 말 역시 위에서 나온 페르시아 사서(일 칸국의 재상이었던 라시드 앗 딘의 '《집사》')에서 나온 말로 전문은 "우리가 죽은 뒤 내 부족의 자손이 비단 바탕에 호화찬란하게 금실로 짠 옷을 몸에 걸치고 맛있는 안주와 좋은 술을 제멋대로 마시며 좋은 말을 타고 미녀를 품에 안고도 그것을 가져다준 것이 그 아버지와 제 형임을 말하지 않거나 우리와 그 위대한 날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이들 외에 부하라 점령 후 지배 계층에게 설교를 했다는 얘기도 있는데, 이건 주와이니의 사서에서만 나오는 말이다. 내용은 신이 그들에게 자신과 같은 재앙을 내린 것은 그들의 왕이 너무나도 부도덕하고 음란했기 때문에 벌을 내리기 위한 것이라는 말이다.

위에서 볼 수 있듯이 칭기즈 칸 이야기는 이런저런 설이 막 엇갈리며 모든 말이 사실인지 아닌지에 대한 진위 여부의 논란이 있다.

8.1. 인터넷발 칭기즈 칸 어록

참고로 "집안이 못났다고 실망하지 마라" 식으로 전개되는 칭기즈 칸이 했다는 말은 사실 '김종래' 라는 기자가 그의 일생을 토대로 독자를 격려하는 내용의 가상의 글을 만들어서 《칭기스칸의 리더십 혁명》이라는 책에 쓴 것인데 어느샌가 그 얘기가 쏙 빠지고 칭기즈 칸의 어록이 되어버렸다. 원문은 다음과 같다. 출처
“한국의 젊은이들아! 한국의 미래를 짊어질 푸른 군대의 병사들아. 집안이 나쁘다고 탓하지 말라. 나는 어려서 아버지를 잃고 고향에서 쫓겨났다. 어려서는 이복형제와 자랐고, 커서는 사촌들의 시기에 두려워했다. 가난하다고 하지 말라. 나는 들쥐를 잡아먹으며 연명했고, 내가 살던 마을에서는 시든 나무마다 시린내, 누린 나무마다 누린내가 났다. 나는 먹을 것을 위해 수많은 전쟁을 벌였다. 목숨 건 전쟁이 내 직업이고 유일한 일이었다. 작은 나라에서 태어났다고 하지 마라.

나는 그림자 말고는 친구도 없는 곳, 꼬리 말고는 채찍도 없는 곳에서 자랐다. 내가 세계를 정복하는데 동원한 몽골인은 병사로는 10만, 백성으로는 200만도 되지 않았다···. 나는 그들을 위해 목숨을 걸고 전쟁터를 누볐고, 그들을 위해 의리를 지켰다···.

너무 막막하다고, 그래서 포기해야겠다고 말하지 말라. 나는 목에 칼을 쓰고도 탈출했고, 땡볕이 내리쬐는 더운 여름날 양털 속에 하루 종일 숨어 땀을 비오듯 흘렸다. 뺨에 화살을 맞고 죽었다 살아나기도 했고, 가슴에 화살을 맞고 꼬리가 빠져라 도망친 적도 있었다. 나는 전쟁을 할 때는 언제나 죽음을 무릅쓰고 싸웠고, 마지막에는 반드시 이겼다. 무슨 말이 더 필요한가? 극도의 절망감과 공포가 얼마나 큰 힘을 발휘하는지 아는가? 나는 사랑하는 아내가 납치되었을 때도, 아내가 남의 자식을 낳았을 때도 눈을 감지 않았다. 숨죽이는 분노가 더 무섭다는 것을 적들은 알지 못했다.

군사 100명으로 적군 10,000명을 마주칠 때도 포기하지 않았다. 나는 죽기 전에 먼저 죽는 사람을 경멸했다. 숨을 쉴 수 있는 한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나는 아직 결정되지 않은 미래를 개척해나가고 있었다. 적은, 밖이 아닌 내 안에 존재했다. 그래서 나는 그것들을 깡그리 쓸어 버렸다. 나 자신을 극복하자 나는 칭기스칸이 되었다.”
《칭기스칸의 리더십 혁명》. 도입부.
작가는 자기가 쓴 글을 감동적인 역사 인물의 실제 어록이라면서 인쇄해 들고 온 지인을 보고 멘붕했다고 전해진다.

거기다 덤으로 나중에 불멸의 이순신 붐이 일어나면서 또 이걸 바탕으로 만들어진 '이순신 어록' 이란 게 유포되어 이순신이 역적 가문 출신이었다는 오해가 생기기도 했다. 아무튼 징기스칸 버전과 이순신 버전이 하도 퍼진 나머지 10년 전만 해도 어른들이 한마디씩 언급하거나 심지어 학교나 군대에서 관련 자료까지 준비해서 가르치기도 했다.

칭기즈칸이 홧김에 자신의 매를 죽이고 "분노로 한 일은 실패하기 마련이다."라는 말을 남겼다는 일화가 국내 인터넷에 퍼져 있는데, 이 또한 사실이 아니다. 반박문

9. 각종 매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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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4권 「철길사등전(撒吉思等傳)」
철길사 · 월합내 · 석반 · 철련 · 애설 · 활활 · 독홀로 · 당인조 · 타아적 · 화상 · 유용 · 가로납답사 · 활리길사 · 소운석탈홀련 · 알라사 · 타라태 · 야선불화
135권 「철가술등전(鐵哥朮等傳)」
철가술 · 탑출 · 탑리적 · 탑해첩목아 · 구아길 · 홀도 · 패아속 · 월거련적해아 · 아답적 · 명안 · 홀림실 · 실랄발도아 · 아속철리 · 갈랄 · 걸태 · 탈인납 · 내만태화상
136권 「합랄합손등전(哈剌哈孫等傳)」 137권 「백찰한등전(伯察罕等傳)」
합랄합손 · 아사불화 · 배주 백찰한 · 곡추 · 아례해아 · 혁혁저아이정 · 탈열해아
138권 「강리탈탈등전(康里脫脫等傳)」 139권 「내만태등전(乃蠻台等傳)」
강리탈탈 · 연철목아 · 멸아길태백안 · 마찰아태 · 탈탈 내만태 · 타아지 · 타이직반 · 아로도 · 뉴적해
140권 「별아겁불화등전(別兒怯不花等傳)」 141권 「태불화등전(太不花等傳)」
별아겁불화 · 하유일 · 철목아탑식 · 달식첩목이 태불화(太不花) · 찰한첩목아
142권 「답실팔도로등전(答失八都魯等傳)」 143권 「마조상등전(馬祖常等傳)」
답실팔도로 · 경동 · 야속 · 철리첩목아 · 납린 마조상 · 노노 · 자당 · 아영 · 소운석해애 · 태불화(泰不華) · 여궐
144권 「답리마등전(答里麻等傳)」 145권 「역련진반등전(亦憐真班等傳)」
답리마 · 월로첩목아 · 복안철목아 · 성길 · 복수 · 도동 역련진반 · 염혜산해아 · 월로불화 · 달례마식리
146권 「야율초재등전(耶律楚材等傳)」 147권 「장유등전(張柔等傳)」
야율초재 · 점합중산 · 양회중 장유 · 사천예 · 사천상
148권 「동준등전(董俊等傳)」 149권 「야율유가등전(耶律留哥等傳)」
동준 · 엄실 야율유가 · 유백림 · 곽보옥 · 석천응 · 야율독화 · 왕순(王珣)
150권 「석말야선등전(石抹也先等傳)」
석말야선(3) · 하백상 · 이수현 · 야율아해 · 하실 · 학화상발도 · 조진 · 석말명안 · 장영 · 유형안
151권 「설탑랄해등전(薛塔剌海等傳)」
설탑랄해 · 고요아 · 왕의(王義) · 왕옥 · 조적 · 저순 · 왕선 · 두풍 · 석말패질아 · 가타라콘 · 오돈세영 · 전웅 · 장발도 · 장영
152권 「장진형등전(張晉亨等傳)」
장진형 · 왕진 · 양걸지가 · 유통 · 악존 · 장자량 · 당경 · 제영현 · 석천록 · 유빈 · 조유
153권 「유민등전(劉敏等傳)」
유민 · 왕즙 · 왕수도 · 고선 · 왕옥여 · 초덕유 · 석천린 · 이방서 · 양환 · 가거정
154권 「홍복원등전(洪福源等傳)」 155권 「왕세현등전(汪世顯等傳)」 156권 「동문병등전(董文炳等傳)」
홍복원 · 정정 · 이진 · 석말안지 · 알지리 · 정온 왕세현 · 사천택 동문병 · 장홍범
157권 「유병충등전(劉秉忠等傳)」 158권 「요추등전(姚樞等傳)」 159권 「송자정전(宋子貞等傳)」
유병충 · 장문겸 · 학경 요추 · 허형 · 두묵 송자정 · 상정 · 조자량 · 조벽
160권 「왕반등전(王磐等傳)」
왕반 · 왕악 · 고명 · 이치 · 이창 · 유숙 · 왕사렴 · 이겸 · 서세륭 · 맹기 · 염복
161권 「양대연등전(楊大淵等傳)」 162권 「이홀란길등전(李忽蘭吉等傳)」
양대연 · 유정(劉整) 이홀란길 · 이정(李庭) · 사필 · 고흥 · 유국걸
163권 「이덕휘등전(李德輝等傳)」
이덕휘 · 장웅비 · 장덕휘 · 마형 · 정사렴 · 오고손택 · 조병
164권 「양공의등전(楊恭懿等傳)」
양공의 · 왕순(王恂) · 곽수경 · 양환 · 양과 · 왕구 · 위초 · 초양직 · 맹반린 · 상야 · 이지소
165권 「장희등전(張禧等傳)」
장희 · 가문비 · 해성 · 관여덕 · 조갑랄 · 주전 · 공원 · 주국보 · 장립 · 제병절 · 장만가노 · 곽앙 · 기공직 · 양새인불화 · 선비중길 · 완안석주
166권 「왕준등전(王綧等傳)」
왕준 · 수세창 · 나벽 · 유은 · 석고산 · 공언휘 · 채진 · 장태형 · 하지 · 제병절 · 맹덕 · 장영실 · 석말구구 · 초정 · 번즙 · 장균 · 단신저일 · 왕석랄 · 조굉일
167권 「장입도등전(張立道等傳)」
장입도 · 장정진 · 장혜 · 유호례 · 왕국창 · 강욱 · 장초 · 여질 · 담자영 · 왕운
168권 「진우등전(陳祐等傳)」
진우 · 유선 · 하영조 · 진사제 · 진장경 · 조여표 · 요천복 · 허국정
169권 「하인걸등전(賀仁傑等傳)」
하인걸 · 가석랄 · 유합라팔도로 · 석말명리 · 사중온 · 고휴 · 장구사 · 왕백승
170권 「상문등전(尙文等傳)」
상문 · 신도치원 · 뇌응 · 호지휼 · 왕이용 · 창사문 · 장소 · 원유 · 장방 · 학빈 · 고원 · 양식 · 오정 · 양덕규
171권 「유인등전(劉因等傳)」 172권 「정거부등전(程鉅夫等傳)」
유인 · 오징 정거부 · 조맹부 · 등문원 · 조원용 · 제이겸
173권 「최빈등전(崔斌等傳)」 174권 「요수등전(姚燧等傳)」
최빈 · 최욱 · 엽이 · 연공남 · 마소 요수 · 곽관 · 협곡지기 · 유갱 · 야율유상 · 학천정 · 장공손
175권 「장규등전(張珪等傳)」
장규 · 이맹 · 장양호 · 경엄
176권 「조백계등전(曹伯啟等傳)」
조백계 · 이원례 · 왕수 · 왕의(王倚) · 유정(劉正) · 사양 · 하약우 · 조사로 · 유덕온 · 울지덕성 · 진기종
177권 「장사명등전(張思明等傳)」 178권 「양증등전(梁曾等傳)」 179권 「하승등전(賀勝等傳)」
장사명 · 양원규 · 장승 · 장몽해 · 진호 양증 · 유민중 · 왕약 · 왕결 · 송도 · 장백순 하승 · 양타아지 · 소배주
180권 「야율희량등전(耶律希亮等傳)」 181권 「원명선등전(元明善等傳)」 182권 「장기암등전(張起巖等傳)」
야율희량 · 조세연 · 공사회 원명선 · 우집 · 게혜사 · 황진 장기암 · 구양현 · 허유임 · 송본 · 사단
183권 「왕수성등전(王守誠等傳)」 184권 「왕도중등전(王都中等傳)」
왕수성 · 왕사성 · 이호문 · 패출로충 · 이형 · 소천작 왕도중 · 왕극경 · 임속가 · 진사겸 · 한원선 · 최경
185권 「여사성등전(呂思誠等傳)」 186권 「장정등전(張楨等傳)」
여사성 · 왕택민 · 간문전 · 한용 · 이직 · 개묘 장정 · 귀양 · 진조인 · 성준 · 조감 · 장저
187권 「오고손양정등전(烏古孫良楨等傳)」 188권 「동단소등전(董摶霄等傳)」
오고손양정 · 가로 · 녹로증 · 공사태 · 주백기 · 오당 동단소 · 유합랄불화 · 왕영 · 석말의손
189·190권 「유학전(儒學傳)」
조복 · 장수 · 김이상 · 허겸 · 진력 · 호일계 · 황택 · 한택 · 동서 · 안희 · 호장유 · 웅붕래 · 대표원 · 모응룡 · 정저손 · 진부 · 동박 · 양재 · 유선 · 한성 · 오사도 · 주문규 · 주인영 · 진려 · 이효광 · 우문공량 · 합랄로백안 · 섬사
191·192권 「양리전(良吏傳)」
담징 · 허유정 · 허즙 · 전자 · 복천장 · 야율백견 · 단직 · 암도랄 · 양경행 · 임흥조 · 관음노 · 주자강 · 백경량 · 왕간 · 노기 · 추백안 · 유병직 · 허의부
193·194·195·196권 「충의전(忠義傳)」
이백온 · 석규 · 유합랄발도 · 임지 · 야율특말 · 보바르 · 합랄보화 · 유천부 · 소경무 · 장환 · 이보 · 이제 · 곽가 · 저불화 · 주희동 · 변침 · 교이 · 안유 · 왕사원 · 양박 · 조련 · 손총 · 석보 · 성소 · 양승 · 납속랄정 · 백안불화적근 · 번집경 · 전보암철리 · 주당 · 섭병 · 유경손 · 유술조 · 계완택 · 추려 · 패라첩목아 · 팽정견 · 왕백안 · 유준 · 타리불화 · 조야준대 · 진군용 · 복리아돈 · 조해 · 위중립 · 보안불화 · 민본 · 배주 · 조홍의 · 정옥 · 황후 · 백첩목이 · 질리미실 · 박새인불화 · 정호례
197·198권 「효우전(孝友傳)」
왕윤 · 곽도경 · 소도수 · 곽구구 · 장윤 · 전개주 · 영저구 · 필야속답립 · 번연 · 유덕천 · 곽회 · 공전 · 장자기 · 진걸아 · 양일 · 장본 · 장경 · 원선 · 조육 · 호광원 · 진소손 · 조일덕 · 왕사총 · 철철 · 왕응초 · 정문사 · 왕천 · 곽전 · 양호 · 정문충 · 소경조 · 호탁 · 손수실 · 이자경 · 종기 · 조영 · 오호직 · 여병 · 서옥 · 윤신 · 유정양 · 유통 · 장왕구 · 장사효 · 두우 · 장수 · 손근 · 장공 · 자여도 · 왕용 · 황윤 · 석명삼 · 유기 · 유원 · 축공영 · 진사효 · 강겸 · 호반려 · 왕사홍 · 하종의 · 합도적 · 고필달 · 증덕 · 근병 · 황도현 · 사언빈 · 장소조 · 이명덕 · 장집 · 위경익 · 탕림 · 손억 · 석영 · 왕극기 · 유사경 · 여우 · 주락
199권 「은일전(隱逸傳)」
두영 · 장특립 · 두본 · 손철 · 하중 · 무각
200·201권 「열녀전(列女傳)」
왕추추 · 진로화진 · 마영 · 조옥아 · 풍숙안 · 조왜아 · 주숙신 · 갈묘진 · 장의귀 · 이동아 · 탈탈니 · 주면가 · 귀가 · 이지정 · 채삼옥 · 범묘원 · 서채란 · 우숙정 · 진숙진 · 야산홀도 · 여언능 · 반묘원 · 유취가 · 나묘안 · 이새아 · 도종원 · 안정동
202권 「석로전(釋老傳)」 203권 「방기전(方伎傳)」
팔사파 · 구처기 · 전절 전충량 · 근덕진 · 장강 · 이호 · 손위 · 아로와정 · 역사마인 · 아니가
204권 「환자전(宦者傳)」 205권 「간신전(奸臣傳)」
이방녕 · 박불화 아합마 · 노세영 · 상가 · 철목질아 · 합마 · 삭사감
206권 「반신전(叛臣傳)」 207권 「역신전(逆臣傳)」
이단 · 왕문통 · 아로휘첩목아 철실 · 패라첩목아
208·209·210권 「외이전(外夷傳)」
고려 · 탐라 · 일본 · 안남(진조) · 면국 · 점성 · 섬국 · 유구 · 삼서
(1) 121권의 속불태(速不台)와 122권의 설불태(雪不台)는 동일인물이므로 122권에서는 설불태를 생략한다.
(2) 131권의 완자도(完者都)와 133권의 완자도발도(完者都拔都)는 동일인물이므로 133권에서는 생략한다.
(3) 150권의 석말야선(石抹也先)과 152권의 석말아신(石抹阿辛)은 동일인물이므로 152권에서는 생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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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사망한 직후에는 쓰지 않았고, 손자 쿠빌라이 칸이 중국식 명칭을 도입하면서 추존된 것이다.[2] 출처 미국 사이트에서 칭기즈 칸의 키가 매우 크다는 기록을 통해 추정한 신장이다.[3] 《집사》를 저술한 라시드웃딘은 칭기즈 칸이 1155년에 태어났다고 주장한 반면 《원사》, 《성무친정록》 등에서는 칭기즈 칸이 1162년에 태어났다는 기록을 전하고 있다. 1167년 출생설을 지지하는 견해도 있다. 이렇듯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현대 몽골에서 '칭기즈 칸 탄신일'로 기념하는 날은 1162년 11월 12일이다. 관련 기사[4] 몽골에서 담딘 수흐바타르와 함께 국가적 영웅으로 여겨진다.[5] 정확히는 씨족명이 보르지긴. 적갈색 (또는) 회색 눈이라는 뜻.[6] 철을 뜻하는 '트므르'의 옛 말과 사람, 직업을 뜻하는 '-чин'의 옛말이 합쳐져서 이루어졌다는 설이 있다. 《원사》에는 그 뜻이 ‘무공을 가리키는'(志武功) 것이라고 되어 있다.[7] 현재 영어로는 'Yasa'나 'Yasaq' 등으로 칭해지지만, 현대 몽골어 발음은 '이흐 자슥'에 가깝다. 고전 몽골어 표기는 'Yehe Zasag'(예헤 자삭).[8] 현재는 몽골 정치권 등의 갈등 탓에 수흐바타르 광장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이게 이 광장의 원래 이름이기도 했고.[9] 특히나 서아시아에선 나치에 준하는 취급을 받는다.[10] 러시아가 몽골의 지배 하에 있던 시기를 일명 타타르의 멍에라고 칭하면서 유목 민족들을 매우 증오했다.[11] 단, 러시아의 경우, 현대 러시아에는 몽골계 소수 민족이 많기 때문인지 서아시아처럼 무작정 부정되지는 않는 분위기가 있다. 바이칼 호의 알혼 섬처럼 칭기즈 칸의 이름 값을 이용하기도 하고 차 브랜드로 칭기즈 칸이 있기도 하다.[12] 다만 그렇다고 해서 칭기즈 칸의 모든 것을 옹호하는 건 아니고, "더 나쁜 놈이라고 볼 순 없지만 동시에 더 좋은 놈이라고도 볼 수 없다"고 얘기하며 팟캐스트 내내 칭기즈 칸의 파괴와 학살을 옹호하는 수정주의자 역사가들을 비난했다. "몽골이 동서의 교류를 활성화시켜서 중국에겐 더 큰 도움이 되었다"는 학자의 말에 "당신이 당시 중국인이면 가족들의 목숨이랑 경제적인 부랑 비교를 할 수 있겠냐"라는 식으로 반박했다.[13] 테무진보다 세력이 더 컸던 의형제 자무카는 내심 칸이 되기를 기대했으나 주르킨 씨족 등의 강력한 지지로 테무진이 칭기즈란 칭호를 받고 칸이 되었다. 이후 자무카는 자신의 지지세력을 결집해 멋대로 '온 세상의 왕' 이라는 칭호를 붙이고 '구르 칸'에 올라 칭기즈칸을 상대로 벌인 전쟁에서 상당히 강력한 모습을 보여주었지만 결국 진압되었고 패주하는 도중 부하의 배반으로 칭기즈칸에게 붙잡혀 사형당한다.[14] Lister, R. P. (2000 c1969). Genghis Khan. Lanham, Maryland: Cooper Square Press. ISBN 0-8154-1052-2. 모토무라 료지, 《말이 바꾼 세계사》.[15] 孛兒帖赤那, 《몽골비사》에서는 脫卜赤顏, '푸른 늑대'라는 뜻이다.[16] '흰 사슴'이라는 뜻이었다.[17] 보르지긴이라는 씨족명은 보돈차르 문카그에서 유래한 것이 아니고, 보돈차르의 족보상 증조부인 보르지기다이 메르겐(Borjigidai Mergen)으로부터 유래했다.[18] 아이막(аймаг)은 한국으로 치면 도(道)에 해당하는 몽골의 행정 단위. 실제 발음은 '애맥' 에 가깝다.[19] 몽골의 시조 보돈차르의 직계손으로 불리는 씨족이었다. 훗날 테무진에게 갈리는 타이치우드, 주르킨과 함께 몽골의 칸을 배출한 하얀 뼈 씨족으로 분류되는 가문으로 서열로 따지면 위 두 부족보다는 낮았지만 모계가 명문인 올쿠누드 씨족이었다.[20] 본래 올쿠누드 씨족은 몽골의 왕족들에게 딸을 시집보내는 부족이었다. 예수게이의 보쌈은 자신들 몽골에게 시집와야 할 여자를 다른 부족에 시집보내는 올쿠누드 씨족에 대한 분풀이의 일환이었다는 말이 있다.[21] 이에 대한 보복으로, 호에룬의 원래 신랑인 칠레두의 동생 칠게르가 훗날 테무진 일가를 공격해서 테무진의 아내 보르테를 납치했다. 후에 칭기즈 칸이 칠게르를 개박살내고 보르테를 구하긴 했으나 그 직후 태어난 장남 주치는 그 아버지가 누구인지 정확히 알 수 없게 되어버렸다. 우선 칭기즈 칸 본인은 주치를 아들로 인정했지만, 이러한 불확실한 출생은 평생 주치를 옭아매는 치명적인 약점으로 작용하여 동생들과의 사이에 분란의 소지가 되어버렸다(메르키트 콤플렉스).[22] 당시 타타르는 금나라의 이이제이 정책의 파트너로서 초원의 제 부족들을 억압하던 강자였고, 예수게이는 이에 대항하는 포지션에 있었다. 이후 금나라의 마름으로서의 타타르의 역할은 테무진이 토오릴 칸(옹 칸)과 함께 금나라의 명령으로 타타르를 제압하면서 토오릴에게 넘어간다.[23] 원래 유목민은 손님을 잘 맞아주는 전통이 있고, 지금도 중동 투아레그족부터 현대 몽골족까지 거의 보편적으로 이어지고 있다. 접대의 관습 문서를 보면 알겠지만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손님을 해치는 것은 불명예스러운 일로 간주되었는데, 타타르족이 예수게이를 손님으로 맞아들이고 독살한 것.[24] 예수게이와 다른 여인 사이에서 태어난 서자로 어머니 이름은 소치겔이다.[25] 벨구테이는 훗날 이복 형인 테무진에게 충성을 다 바쳐 수많은 전공을 세워서 몽골 제국 건국의 주역 중 하나가 된다.[26] 당장 한국에도 유교가 본격적으로 도입되기 전에는 형사취수제라는 비슷한 풍습이 존재했다.[27] 이때 자신을 도와줬던 소르칸 시라의 아들이 훗날 사준사구의 일원이 되는 티라운이었다.[28] "타르고타이"는 별명이며 키릴투크가 본명이다. '타르고타이'는 뚱뚱한 사람을 뜻하는 몽골어로 실제로 키릴투크는 《몽골비사》에 따르면 고도의 비만이라 말도 제대로 타질 못했다고 한다.[29] 위에서 언급한 대로 라시드 앗 딘의 기록에 의하면 테무진의 키야트 보르지긴 씨족은 예수게이 사후에도 그럭저럭 유지되는 상황이었다.[30] 이는 예수게이가 토오릴이 케레이트의 후계자 전쟁에서 밀리던 시절 그를 지지하여 역전승을 이끌어냄으로 인해 가능한 일이었다. 왕좌를 차지한 토오릴은 자기 형제들을 숙청하여 초원과 부족에서 평판을 잃는다.[31] 이때에는 '토오릴 칸'이라 불렸으나 후에 금나라로부터 왕의 칭호를 하사받고 옹 칸이라 불리게 되었다.('옹'은 '왕'이란 뜻이다.)[32] 메르키트 부족은 본래 테무진의 어머니 호엘룬이 시집가려던 부족이었다. 아버지 예수게이가 메르키트 사람의 아내인 호엘룬를 납치했으니 그 복수로 테무진의 아내를 빼앗아간 것으로 해석된다.[33] 몽골 부족 중에서도 테무진이 속한 보르지긴 씨족과 같이 칸이 될 수는 없지만 그래도 명문으로 분류되는 검은 뼈 씨족인 자다란 씨족 출신이었다.[34] 이는 《몽골비사》의 기록이다. 《집사》에는 메르키트족이 보르테를 케레이트의 토오릴 칸(옹 칸)에게 선물하고 토오릴 칸이 자신의 며느리뻘인 그녀를 테무진에게 돌려주었다고 적혀 있다. 이 기록의 진위에 대해서는 학자들의 의견이 엇갈린다. 어떤 학자들은 일 칸국 칭기즈 왕조의 후원을 받아 쓰여진 《집사》가 칭기즈 왕조의 명예를 위해 사실을 왜곡하여 기록했고, 메르키트를 약탈할 정당한 명분이 있어 자무카와 토오릴 칸이 도와주었다고 보는 반면에 다른 학자들은 테무진의 미약한 세력을 고려하면 토오릴 칸이나 자무카 등이 그와 같이 움직일 이유가 없다고 생각하여 《집사》의 기록이 더 설득력 있다고 본다.[35] 아내로 삼았다는 기록도 있다. 그게 그거 같긴 하지만.[36] 다만 칭기즈칸과 자무카의 가문빨 비교는 다소 조심스럽게 할 필요가 있다. 일단, 둘의 경력 시작 시점을 비교해보면 상당한 세력을 가졌던 자무카의 자다란 씨족에 비해 테무진의 보르지긴 오복 키야트 씨족은 예수게이 사후 풍비박산난 상태라 세력 기반이 되어줄 자기 씨족이 있는 자무카에 비해 테무진이 맨손으로 시작해야 했던 입장인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일단 자무카의 자다란이 검은뼈 씨족이었던 데 비해 테무진의 보르지긴 오복 키야트는 하얀뼈 씨족이었고, 테무진 자신은 카마그 몽골의 선대 칸이던 카불 칸의 직계 증손자였다. 애초에 테무진보다 먼저 자기 세력 기반을 갖춘 자무카가 테무진을 파격적으로 부장(2인자)로 삼아준 것 자체가 테무진과의 우정 이상으로 테무진이 가진 정치적 가치(혈통빨이 뒤떨어지던 자무카에게 강력한 정당성을 부여해줄 수 있는 혈통) 때문이라는 분석도 있다.[37] 또는 유르킨. 카불 칸의 장남 오킨 바르칵의 후예들이었다.[38] 《원조비사》에 따르면 자무카는 테무진에게 2인자 자리를 제안했지만 보르테의 반대로 테무진이 떠났다고 묘사하고 있다.[39] 몽골 일부 종족의 칸이 되었을 뿐이고 그래서 단순히 테무진 칸으로 불렸다. '칭기즈 칸'이란 호칭은 초원을 통일하고 나서 1206년 몽골 제국을 완전히 성립한 다음에 받은 칭호다.[40] 말을 중요시하는 유목 민족에게는 말 도둑은 무조건 사살이라는 불문율이 존재한다.[41] 몽골 초원의 전투 단위로 하나의 거대한 움직이는 유목민 진영이라고 거칠게 설명할 수 있겠다. 《집사》에 따르면 쿠리엔(혹은 구리옌)이란 '고리'를 뜻한다. 한 종족이 어떤 지점에 진영을 칠 때 고리 같은 모양을 이루고 그들의 지도자는 그 원 안의 점처럼 위치했다. 블라디미르초프에 따르면, 이 쿠리엔은 유목 생활의 한 형태이기도 했는데, 쿠리엔 외에도 아일 유목 방식이란 것도 있었다. 쿠리엔이 대목군(大牧群)의 방식으로 유목을 하는 것이라면, 아일 유목 방식은 가축, 특히 말이 많은 부자가 단독 혹은 소집단으로 유목하던 것이었다. 따라서 아일 유목은 사회 질서가 안정된 조건에서 가능했다.[42] 토오릴 칸(옹 칸)의 동생. 1203년 제지르 운두르 산 전투 당시 자카 감부는 다른 곳에 있다가 형 옹 칸의 패전 소식을 듣고 테무진에게 투항했다. 테무진은 자카 감부의 딸 이바카 베키가 자신의 아내였고, 베투트미시는 장남 주치의 아내였기에 자카 감부의 투항을 받아들이고, 그의 속민을 그대로 인정해 주었다. 그러나 1204년 동나이만과의 전투때, 자카 감부는 다시 배신하여 반란을 일으켰고, 테무진은 주르체데이를 보내 자카 감부를 살해했다. 테무진은 아내 이바카 베키를 주르체데이에게 내려주어 아내로 삼게 했으며, 오로오드 씨족 4,000호를 다스리라고 명령했다. 자카 감부의 딸 케레이트 소르칵타니는 테무진의 막내아들 툴루이의 카툰이 되었으며, 헌종 몽케 칸, 세조 쿠빌라이 칸, 일 칸 훌라구, 대립 칸 아리크부카를 낳았다. 뭉케, 쿠빌라이는 훗날 대칸이 되었고, 훌라구는 일 칸, 뭉케 사후 아리크부카는 수도 카라코룸에서 쿠릴타이를 열어 즉위했으나 친형 쿠빌라이는 이를 인정하지 않고, 자신을 대칸이라 주장하며 양측은 내전에 돌입했다. 즉 자카 감부는 4명 칸의 외조부가 되었다.[43]황금사》(알탄 톱치)와 《몽고원류》에는 고려(솔롱고)에 가 있었다고 기록했으며, 남송 조공의 《몽달비록》에는 테무진이 금나라에 가 10년간 노예 생활을 했다고 기록했다.[44] 칭기즈칸 노예설의 가장 큰 문제는, 칭기즈 칸이 평생동안 중국어나 여진어는 커녕 튀르크어도 못 하고 몽골어만 쓸 줄 알았다는 것이다. 정치적 망명이라면 그래도 자기 세력은 데리고 들어와서 살았다는 이야기니 부하들을 통역가로 부리고 다녀서 말을 익힐 기회가 없었다고 하면 말이 되지만, 아무리 언어 습득에 재능이 없는 사람이라도, 노예로 살았다면서 여진어나 중국어를 어눌하게라도 익히지 못했다는 게 말이나 되는 소리일까?[45] 보르지긴 오복에 속한 씨족들로 이들은 13익 전투때, 자무카의 편에 서서 테무진에 대항했으나 자무카의 승리에도 불구하고 테무진의 편에 서기로 하여 훗날 테무진의 듬직한 우군이 되었다. 이들이 자무카를 떠난 계기는 치노스(늑대) 씨족의 귀족 70명을 삶아 죽인 자무카의 잔혹성으로 인한 것으로 보인다. 이들은 원거리 기동전을 위주로 하는 몽골 전사들 중에서도 특이하게 근접 돌격전에 특화된 전사들로 훗날 케레이트 칸국과의 칼라 칼지드 사막 전투나 동나이만 칸국과의 차키르마우트 전투 등의 대회전에서 몽골군의 전위대로 대활약했다.[46] 혈통 면에서는 키야트보다 우위에 있는 말하자면 하얀 뼈였다.[47]원조비사》에 따르면 이때 주르킨 사람들이 테무진 칸의 집사장인 시키우르를 술 따르는 순서를 틀렸다 해서 구타하는 등 무례를 범했으며, 주르킨 씨족의 족장 사차 베키의 씨름꾼이자 목장 관리인이었던 부리가 테무진 칸의 이복 아우이자 역시 목장 관리인이었던 벨구테이와 말다툼을 하다가 칼로 베어 부상을 입혔다고 한다. 특히 벨구테이가 씨름으로 말 다툼을 해결하려고 했는데, 이를 부리가 칼로 베었다는 것은 부리가 벨구테이를, 나아가 키야트 주르킨 씨족이 테무진과 키야트 보르지긴 씨족민들을 낮잡아 본 것이라 더욱 문제가 되었다는 말도 있다.[48] 본명이 아닌 '왕경(연경, 오늘날 북경)의 승상'이란 금나라의 직책명이다. 조선으로 치면 좌의정. 몽골 발음으로는 '옹깅 칭상'.[49] 테무진 칸이 금나라의 요청을 듣고는 마침내 인근의 병력을 동원하여 오논 강으로부터 맞이하여 타타르를 토벌하고자 했고, 이에 주르킨 씨족에게 유지를 내려 원조하러 오게 했다. 무려 6일을 기다렸으나 주르킨 씨족은 오지 않았다.[50] 케레이트의 토오릴은 금장종으로부터 '왕'의 작위를 하사받았다. '왕'은 '옹'으로 발음되었으므로 이후 옹 칸으로 불리게 되었다.[51] 지금 우리들의 생각으로는 어처구니 없게 보이겠지만 대국으로부터 받은 관직은 당시의 부족 단위의 유목민들에게는 강력한 권위의 상징이 되었다.[52] 1196년 겨울 텔레투 협곡에서 섬멸했다.[53] 주르킨 씨족의 족장이었던 사차 베키는 타타르 정벌 당시 자신의 주군이었던 테무진 칸에게 협조도 안 하면서 오히려 빈집털이를 시도하는 등 온갖 못된 짓을 골라했기 때문에 테무진 칸 입장에서는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다. 물론 이는 사차 베키만의 문제가 아니라 유목민들한테서 흔하게 일어났던 일이다.[54] 화룡점정으로, 테무진이 타타르 원정에서 승리한 후 화해의 표시로 전투에서 얻은 전리품을 상당수 실어 주르킨 씨족에게 보냈으나 어이없게도 주르킨 씨족은 전리품을 빼앗고 호송병들도 죽였다. 전리품은 주르킨 씨족에게 원래 주려던 것이었던 것을 감안하면, 주르킨 씨족은 제 발로 무덤을 판 격.[55] 《원조비사》와 《집사》의 기록이 상충되어 있어서 여러모로 헷갈리는 부분이 많지만 적어도 이 시점에 옹 칸의 세력이 매우 약화된 상태였음은 분명하다.[56] 라시드 앗 딘의 기록에 따르면 타이 부카는 별칭으로 타양 칸이라 불렸다. 이난차 빌게 칸의 아들인 타이 부카는 '왕'이라는 호칭을 받아 '타이 왕'이라 불렸는데 이게 잘못 알려져 '타이왕->타양'이라 불렸고 여기에 '칸'의 호칭을 붙여 '타양 칸'으로 잘못 알려졌다고 한다[57] 둘의 아버지는 '이난차 빌게 부쿠 칸'이라고 라시드는 기록한다.[58] 러시아 투바공화국 예니세이 강 상류지역[59] '일곱 개의 깃발을 가진 자'라는 뜻[60] 《원조비사》에는 부이룩칸에 대한 원정이 자무카의 구르칸 선출 이후로 기록하고 있으나 이는 원정 당시 자무카가 옹 칸의 진영에 있었다는 사실 등과 모순된다. 구르칸 즉위 시기는 1201년이다.[61] '사브락 지역의 목 쉰 사람'이라는 뜻으로, 천식 환자로 추정된다[62] 《원조비사》에서는 이를 자무카가 부추겼기 때문이라고 기록하였다.[63] 중신들, 세력회의에 참가하는 사람들로 세력회의에 참가하느냐 마느냐는 중신과 부하의 차이였다.[64] 훗날 사준사구로 불리는 4명의 명장[65] 한 때 초원의 절대 강자였던 타타르는 이때 수레 바퀴 크기보다 키가 큰 성인 남자가 모두 학살당하는 비극을 겪었다. 그러나 테무진은 잔여 세력인 여자와 아이들을 모두 몽골의 집안에 편입시킴으로써 이후의 타타르 세대를 자기 세력 안에 편입시킨다.[66] 카일라르강 지류의 테니 코르칸[67] 그 외에도 적에 의해 퇴각하면 처음 공격한 곳으로 돌아오라는 명령도 내렸다. 이러한 명령은 규율 잡힌 군대를 만드는 데 필수적인 것이기도 했다.[68] 간단히 말하면 모든 전리품은 테무진 자신의 것이며, 자신에게 우선권이 있다는 것이다. 이는 그가 죽을 때까지 이어진 규율로써 자신의 아들들이 이를 어겼을 때도 엄청난 분노를 표했다[69] 이들 세 명은 테무진 칸의 약조를 어기고 관습대로 약탈물을 챙기다가 칸의 분노를 사 바를라스 쿠빌라이와 베수드 제베에 의해 약탈물을 압수당했다.[70] 《원조비사》에 이 전투가 서술되어 있는데 자무카 연합이 주술을 일으키는 '자다'라는 돌을 가지고 승리하려 했지만 오히려 비바람이 본인들에게 휘몰아쳐서 흩어져버렸다고 되어 있다.[71] 타이치우드의 지도자 '뚱보 칸' 타르고타이는 예수게이가 죽자 테무진을 버리고, 키야트 보르지긴 씨족들을 이끌고 갔으며, 테무진이 서형 벡테르를 죽이자 버릇을 고쳐준다는 명목하에 그를 납치해 조리돌림한 바 있었다. 테무진 입장에서는 철천지 원수였다.[72] 그런데 현대 의학 관점으론 이 행동은 하등 좋을 게 없는 헛짓. 오히려 그 가공할 충성에도 불구하고 죽지 않은 것이 기적이었다.[73] 《원조비사》에서는 위에 언급한 제2차 쿠이텐 전투 이후에 술두스 소르칸 시라와 베수드 제베가 투항하는 기사가 실려 있다. 즉 《원조비사》는 제2차 쿠이텐 전투(1202)에 제1차 쿠이텐 전투(1194)의 제베를 끌어다 쓴 것이다. 우선 《원조비사》는 원 태종 오고타이 칸 당시 집필된 것으로 추정되는 《성무친정록》과 이를 바탕으로 기록된 라시드 웃 딘의 《집사》에 비하면 기록의 신뢰성이 상당 부분 떨어진다. 년도나 인물, 순서 등이 뒤죽박죽인 경우가 상당히 많다. 《성무친정록》 및 《신원사》에는 제2차 쿠이텐 전투 직전 벌어진 타타르 정벌전에 제베의 기록이 나오기 때문에 제2차 쿠이텐 전투 때의 제베는 당연히 테무진 칸 소속이었다.[74] 이때 옹 칸 측에 아들 주치의 혼인 면담을 하러 수행원 몇 명만을 데리고 길을 떠나던 테무진은 케레이트 측의 두 평민, 바다이와 키실릭이 위기를 알려주어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다고 한다. 테무진의 평판이 부족을 막론하고 초원의 피지배층 전반에 호의적이었다는 증거. 이때 테무진 측은 수행원 몇 명으로 시작하여 하룻밤 사이에 한반도 크기에 달하는 영지 전체의 유목민들에게 총동원령을 전달하여 군대를 소집한다. 참고로 《사조영웅전》에서 곽정이 테무진 칸과 처음 만나는 장면이 바로 이때이다. 즉, 테무진 칸에게 배신을 알린 두 평민이 바로 곽정과 이평(곽정의 어머니)인 셈.[75] 《원조비사》에 따르면 이때 자무카가 테무진에게 케레이트족 군대의 배치와 전열에 관해 알려주었다고 한다.[76] 원조비사를 영역한 Urgunge Onon 교수에 따르면, 대략 위도48 경도119에 위치했다는데 이는 후룬베이얼시 남서쪽이다.[77] 훗날[78] 후에 옹 칸은 나이만족으로 망명하려 했으나 보초병들이 옹 칸의 꾀죄죄한 행색을 보고는 당신이 어떻게 옹 칸일 수 있냐면서 내쫓았지만 옹 칸이 자꾸 우기자 화가 난 보초병이 냅다 죽여버렸다. 셍굼은 황무지로 도망쳐 마적이 됐다가 자기 부하에게 배신당해 목숨을 잃었다. 그리고 이 부하도 테무진 칸에게 사형당해 죽는다. 테무진 칸은 약속을 잘 지키는 사람을 좋아했다고 하며, 군신간의 관계도 약속으로 봤다.[79] 그 유명한 수부타이에게 철제 마차를 하사해 메르키트를 섬멸할 것을 명한다. 그리고 수부타이는 명령대로 조지아까지 쫓아가 임무를 수행한다. 이 과정에서 조지아를 포함한 캅카스 지방이 박살난 건 덤.[80] 몽골 초원의 전통 신앙에 따르면 몸에서 피가 나며 죽은 영혼은 하늘 신의 품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몸에서 피가 안 나게 죽는 것이 가장 이상적인 죽음이었다고. 자무카가 '정확히' 어떻게 죽었는지는 이야기마다 전부 다 다르게 묘사되어 있다.[81] 라시드 앗 딘이 저술한 《집사》에 따르면 뭉릭의 아들 쿠쿠추가 이 칭호를 정했다고 한다. 칸이라도 이름 외에 다른 칭호를 쓰는 건 드문 일이고, 세력이 강대한 경우나 옹 칸의 경우처럼 금에 의해 왕으로 봉해진 경우에 제한적으로 쓰인 일종의 정치적, 군사적 의도가 내포된 것이다.[82] 아버지 예수게이의 충실한 부하였던 콩고탄 씨족 뭉릭 에치게의 아들 쿠쿠추 텝 텡게리(Kököču Teb-Tenggeri). '쿠쿠추'가 이름이고, '텝 텡게리'는 칭호였다. 이 칭호의 의미는 간략히 말하면 '天巫', '드높은 천신' 정도가 된다. 텝 텡게리는 테무진이 초원의 주인이 될 것이라는 예언을 하면서 초원의 여론을 테무진 측으로 이끌어온 공신이었다.[83] 잭 웨더포트를 포함한 연구자들은 칭기즈 칸이 무당의 영적인 힘을 두려워해서 그랬다고 생각했지만 칭기스 칸은 자신을 배신하려는 무당의 허리를 꺾어 죽인 뒤 시체를 치우고 그가 하늘로 올라갔다고 말했다. 영적인 것을 두려워해서 벌인 행위로 보긴 어렵다. 여기서 설명되는 텝 텡게리의 일화는 《몽골비사》의 내용을 근거로 하는 것인데, 《집사》에서는 이와 다르다. 《집사》에서는 처음부터 카사르와 칭기즈 칸이 쿵짝이 맞아서 둘에 의한 텝 텡게리 살해가 이루어진 것으로 나오는 것이다. 이는 《집사》가 일 칸국에서 권력 투쟁이 심각했던 시기를 딛고 작성되었기 때문에, 몽골 황금 씨족들의 화합을 호소하는 목적이 강하게 투영되어 있어, 황금 씨족 간의 분란을 최대한 숨기려는 의도로도 보인다.[84] 자신의 아내가 메르키트 족에게 납치당했었던 칭기즈 칸의 괴로운 개인적 경험에서 비롯된 것 같다. 애초에 메르키트 족이 아내를 납치한 이유도 아버지인 예수게이가 원래 메르키트 족과 혼인하기로한 어머니 호엘룬을 납치해서 결혼한 것에서 비롯됐기 때문이다.[85] 당시 서요는 몽골 통일 이후 칭기즈 칸에게 패하여 도주했던 나이만 족의 왕자 쿠츨루크가 장악한 상황이었다.[86] 겨우 세력을 일으킨 초창기에는 강한 부족들이 다수 포진하고 있었으며, 특히나 전략에 능한 자무카가 그의 라이벌이었다. 자무카는 끈질기게 테무진을 붙잡고 늘어졌으며, 마침내 자무카를 꺾은 다음부터는 몽골 통일 과정이 순식간에 진행되었을 정도.[87] 《삼국지》에 자주 나오는 티베트계 강족의 후손이다.[88] 1205년 1차는 몽골 제국이 세워지기 전 자무카를 추격하는 과정에서 벌어진 일종의 약탈전 성격을 띠었다.[89] 사실 서하군이 몽골군보다 약해서 고전을 면치 못한 것은 아니다. (실제로 몽골군은 서하의 '흑장군'이라 불리는 장수가 지키는 카라호토라는 성을 공격하다 크게 혼쭐이 나기도 했다.) 서하는 대대로 중개 무역으로 국가의 부를 쌓아오던 나라였는데, 전쟁 상황에서는 성에 들어가 농성을 해야되기 때문에(특히 적이 위에서 언급했듯이 기동력을 이용한 산개 전술을 펼칠 시) 제대로 된 무역이 어렵다. 결국 계속된 몽골 침략은 국가 경제를 붕괴시켰고 설상가상으로 그때 서하에는 지진이 잦았다. 당시 동아시아의 주요 강대국들이 몽골군과의 회전에서 맥을 못추는 이유를 군대의 편제 차이로 보는 시각도 있다. 동아시아 강국들의 군대의 주축이 되는 병종은 중갑을 입은 중기병이었는데 이러한 중기병은 보병을 상대로는 매우 유리하지만 기병끼리의 전투에서는 매우 불리하다. 당시 몽골군은 경기병 위주로 편제되어 있었고, 이는 적과의 대규모 회전에서 몽골군을 최강으로 만들어주어 어떤 적도 몽골군의 상대가 되지 못하게 했다... 는 것인데 실상 중기병은 기병간 전투에서 우위를 점하기 위해 나타난 병종이기 때문에 현재로서는 많이 부정되는 가설이다. 칭키즈 칸의 군대에서도 중기병을 많이 사용했고, 에초에 제대로 된 중기병을 처음 운용한 게 유목민족이다. 단지 전투에서 기병을 제압하는 데는 최고인 중기병이지만 영토 내를 돌아다니며 약탈해 국가 경제를 마비시키는 전략엔 대응할 수 없다.[90] 이것이 반간계라는 기미책의 한 전략으로서 분할하여 지배하라는 전략이다. 큰 나라가 주변의 작은 나라들이 힘을 못 키우게 견제하는 방법이다. 물론 원정을 통해 조져버릴 수도 있으나 예나 지금이나 원정은 돈이 엄청 많이 든다. 이럴 때 싸고 효과도 좋은 것이 바로 반간계이다. 그러나 반간계를 이겨내고 힘을 키워 오히려 자신들에게 반간계를 사용한 커다란 나라를 작은 나라가 역관광해주는 경우도 역사에 비일비재했다. 금나라도 마찬가지로 요나라가 여진 부족들에 행한 반간계를 극복하고 요나라를 정복하였고, 자신들이 반간계를 행한 몽골에게 정복당했으며, 그 후예인 만주족들 역시 반간계를 극복하고 청나라를 건국한다.[91] 또 다른 이름은 완안구근[92] 사실 거용관은 대대로 난공불락의 요새로 심지어 중일전쟁 때도 교전이 벌어진 적이 있었다. 복원이 잘 되어 있으니 사진을 검색해보기를 추천한다.[93] 이때 만리장성 부근에 거주하던 옹구트족의 도움을 크게 받았는데, 이후 옹구트족은 칭기즈 칸의 신임을 받으며 몽골 제국에 대대로 중용된다.[94] 이때 포위가 얼마나 극심했는지 중도성 내부에 식량이 다 떨어져 사람들이 인육을 먹는 지경에 이르렀다.[95] 또 다른 이름은 완안승휘[96] 다만 야율초재 항목을 보면 알 수 있듯 해당 일화가 사실인가엔 의문의 여지가 있다. 또한 방목지로 개간을 한다고 기후가 달라지는 건 아니므로 금나라 정복 중에도 기후 때문에 중간중간 몽골 초원으로 돌아갔던 칭기즈 칸이 과연 이 땅에서 그런 말을 했을지도 의문이다. 야율초재가 학식과 점술로 칭기즈 칸의 신임을 얻은 것은 사실일 가능성이 높지만, 정치적 영향력이 그렇게 크다고 볼 수는 없는 인물이다.[97] 나이만의 타양 칸의 아들이다.[98] 서요는 요나라의 황족 야율대석이 중아 아시아의 모든 이민족을 누르고, 나라를 세운 후 대대로 그곳에서 강대국 노릇을 하고 있었는데 서요 내부의 권력 다툼으로 제국이 분열하려는 조짐을 보이자 휘하에 거느리고 있었던 여러 속국들이 자립했다.[99] 비참하게 죽은 마지막 황제를 부르는 비공식 호칭이다. 왜 비공식 호칭이냐면 나라가 통째로 망해서 시호를 올려줄 신하조차 없기 때문이다. 동시대의 비슷한 처지의 인물로는 서하의 말제 이현과 금나라의 말제 완안승린이 있다.[100] 당시 호라즘은 서요에게 틈만 나면 압박을 받는 일종의 속국의 처지에 있었는데, 무함마드{밑에도 언급되겠지만 칭기즈 칸의 침공을 받고 쫒겨다니는 호라즘의 샤(왕)}에 의해 서요에게서 자립하고 전성기를 막 열려는 상태였다. 호라즘 왕국 항목에도 있듯이 호라즘은 서요에게서 완전 자립한 이후 전성기를 맞으려던 와중에 칭기즈 칸의 대대적인 침공을 받아 전성기를 제대로 맞지도 못한 채 멸망하고 말았다.[101] 야율직로고가 폐위 직후 바로 살해당한 듯이 알려져 있는데 야율직로고는 그 이후에도 명목상으로는 상황 대접을 받으며 2년을 더 살았다.[102] 쿠츨루크는 본디 기독교인이었고, 서요의 부마가 된 후에는 불교도로 개종하였다. 그런데 당시 서요의 피지배층이 대부분 이슬람교를 믿는 이민족이었기 때문에 불만은 더 심했을 것이다. 서요는 소수의 거란족이 다수의 이민족을 지배하는 전형적인 불안정한 정복왕조로 나라가 혼란에 휩싸이자마자 붕괴했다.[103] 어떠한 종교를 신봉해도 된다는 종교의 자유를 인정한 칭기즈 칸의 칙령이 있었기에 종교적으로도 해방군으로 인식하였다.[104] 쿠츨루크는 칭기즈 칸에게 대패하고 살해됐기 때문에 서요의 '결제'라고 불린다.[105] 서요에 대한 칭신 관계를 완전히 청산하고, 셀주크 투르크하고도 대등하게 붙게 된 그 당대에 바로 몽골의 침공을 받았다. 불과 10년도 되지 않는 짧은 전성기가 몽골군에 의해 날아간 셈.[106] 처음으로 호라즘 제국에서 상인이 왔을 때 상인들 중 한 명이 몽골인들을 상대로 자신들이 가진 보물 같은 건 못 본 촌놈들이라고 우습게 보며 바가지를 씌우려 하자 몽골인들은 되려 금나라에서 약탈해온 금은보화를 보여주며 "이것을 봐라!" 하며 그의 물건을 빼앗고 체포했다. 그 후 다른 상인들이 더이상 바가지를 씌우지 않게 되자 몽골인들은 처음에 물건을 뺏은 상인을 포함해 모든 상인들에게 물건 원값 이상의 돈을 주면서 화해를 청했다고 한다.[107] 당시에 수염은 남자의 상징과도 같은 것이었다. 이를 깎여버린 것은 곧 거세와 비슷한 굴욕이었다.[출처1-2-2-2-5] 라시드 앗 딘, 《집사》, 2권 <칭기즈칸 기>, 2편 2장 5절[109] 몽골군이 수도 사마르칸트를 공격할 당시 이들에게 내려진 지령은 "두 발로 걷는 것은 모두 죽여라."였다고 한다.[110] 녹인 은, 녹인 금, 끓는 수은... 언급하는 곳마다 말이 다 다르다. 2005년에 지상파에서 방영되었던 드라마 칭기즈 칸에서는 '녹인 금' 설을 채택했다. 확실한 것은 그의 탐욕을 조롱할 겸 이런 방식으로 죽였다는 것. 2006년에 한국 지상파를 탔던 드라마 칭기즈 칸에선 끓는 수은을 부은 것으로 표현되어 있다. 소설 천년영웅 징기스칸에서는 금을 녹여서 눈과 귀에 부은 다음 마지막에는 입 안에 금을 부어서 죽인 것으로 묘사했다.[111] 그러나 잘 랄 웃딘은 중과부적이었던지 끝내 큰 피해를 입은 채 도주하다가 그에게 원한을 품고 있던 쿠르드족의 손에 목숨을 잃고 만다.[112] 당시 서하는 지속적인 몽골의 침공과 자연 재해(지진)로 나라가 크게 어려운 상황이었는데, 이렇게 어려운 때에 오히려 금나라를 공격하는(금나라에게 몽골을 함께 막자고 제안했으나 거절당했다.) 정책을 펼쳤다. 그렇게 쥐어짜서 간 금나라 공격은 대실패였고 많은 군사만 잃었다. 금나라도 남송에게 비슷한 실수를 했다. 몽골의 끊임없는 습격으로 제국이 황폐화되가는 와중에도 집요하게 남송을 공격했다. 공격은 당연히 모두 막혔고 서하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많은 군사만 잃었다.[113] 당시 차가타이는 원정을 떠나 아직 돌아오지 못했다.[114] 이때 야사감푸는 죽는 순간까지 칭기즈 칸에게 소인배라고 욕했으나 칭기즈 칸은 웃으면서 무시했다.[115] 몽골군이 서하인들을 대부분 죽여서 현재 서하인의 후손이 별로 없는 것도 하나의 이유지만 그것보다 더 정확한 이유는 바로 서하가 멸망한 후 서하인들이 몽골 제국의 일부가 되어 완전히 융화되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원나라 건국 후 적지 않은 서하인이 조정에 등용되었다. 요나라 유민인 거란족도 몽골 제국의 지배를 거부한 이들은 서하인들과 다를 바 없이 몽골군에 의해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고, 몽골 제국의 지배에 순응한 이들은 훗날 원나라 조정에 등용되었음을 감안하면 거란족과 비슷한 최후라고 볼 수 있다.[116] 당시 금나라는 남송에게 구원을 요청하면서 '우리가 망하고 나면 다음은 너희야!' 하고 울부짖었지만 남송에게 금나라는 옛 원한때문에 몽골보다 더 혐오스러운 나라였고, 결국 금나라 사신은 쫓겨나고 말았다. 그런데 사실 금나라 입장에서는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위에서도 언급했지만 금나라는 나라가 망해가는 와중에도 틈만 나면 남송을 공격하고 통수를 쳤다. 하루 빨리 남송을 정복하여 남송의 자원을 바탕으로 몽골에 저항할 생각이었는데 남쪽 개봉으로 수도를 옮길 정도로 몽골에게 처절하게 털려 목숨이 간당간당한 나라가 자신들의 전성기에도 정복하지 못했고, 훗날 40여 년간 세계 최강국과 치고박고 싸우는 당시 세계 제1의 경제 대국 남송을 친다는 것 자체가 무리였다. 그리고 남송도 북송 시절에 거란의 요나라가 비실거릴 때 금나라에게 길을 빌려주어 요나라를 끝장냈다가(해상의 맹) 그대로 금나라에게 다시 털린 형국을 그대로 다시 재현한 거나 마찬가지였고, 결국 오래 항전하다가 애산 전투에서 처절하게 대패하며, 몽골에게 멸망한다.[117] 모든 15세 ~ 70세 사이의 남자는 전사로 명시했다. 당시 몽골에서는 전사의 위상이 높고 대장장이, 양치기 등은 하층 계급으로 이해되었는데, 이 제도를 통해 사실상 신분제를 철폐하고 인구의 군사화를 추진한 것. 여성은 이 룰에서 예외라 한계가 있긴 하지만, 당시 유목민들 사이에서는 비교적 여성의 위상이 높은 편이었다. 그리고 유목민 사회 여성이 당하기 쉬운 약탈혼을 법으로 금지한 점도 나름대로 평가할 만하다.[118] 몽골의 신앙은 하늘(Tengri) 숭배 수준이었지 별다르게 조직화된 것이 없었다. 유입된 종교도 별로 높은 수준으로 이해하지 못했고... 해서 '하늘 숭배' 를 직접적으로 배격하지만 않는다면 종교들은 관대하게 받아들였다. 칭기즈 칸이 상대했던 나라들은 대부분 불교, 기독교, 이슬람교 국가들이었는데, 잘 알려져있다시피 기독교와 이슬람교는 유일신교로서 자기 종교 이외 다른 모든 종교는 거짓이라고 부정하는 배타성이 기본적 교리다. 그리고 이 당시에는 지배층과 피지배층의 종교가 다른 경우 종교를 탄압하는 일이 흔했다. 몽골의 종교에 관대한 성격은 이런 점에서 정복한 땅 사람들의 환심을 얻기 쉬웠다.[119] 본인 입장에서는 자기 자신부터가 약탈혼으로 태어난 존재이며 2대에 걸쳐 약탈혼 때문에 영 좋지 않은 일이 생겼으니 약탈혼이 싫을만도 하다.[120] 단, 후대 몽골 제국 원나라에서는 1위 몽골인, 2위 색목인, 3위 한인, 4위 남인 순으로 등급을 나눠 관직 진출이 가능한 한계나 직업의 자유, 거주지 이전의 자유 등을 제한하며 철저한 인종 차별 정책을 펼쳤다. 참고로 고려인은 3순위에 포함이었다. 다만 원나라가 워낙 방대한 영토를 가지고 있어서 인종 차별을 할 행정력이 부족하고 또 이주 정책 등으로 동화하려는 정책을 펼치지 않아서 체감하기 힘들었을 것으로 보인다.[178] 물론 후대 원의 경우 행정력이 미치는 중심부에서는 구분이 철저하게 이루어졌고 계급마다 부르는 명칭도 달랐다고 한다. 그리고 이러한 정책이 인종 차별 정책이 아니라는 주장도 존재한다. 몽골 제국이 복속민들의 고유한 풍속(예를 들어 법규 적용에서 몽골인에게는 자삭을, 중국인에게는 중국 법규를, 색목인들에게는 각자 귀속된 집단의 법규를 적용.)을 인정해주기 위해 이런 정책을 행했다는 것이다.(출처: 《몽골제국과 세계사의 탄생》-김호동) 이는 오스만 제국밀레트 제도와 흡사하다.[121] 처음부터 격이 낮았다면 실력을 입증한 것이니 조롱은 커녕 칭송을 받았겠지만 잘나가던 명가에서 몰락했다가 고생 끝에 겨우 숨 좀 돌린 처지가 된 주제에 의도했든 아니든 자신들보다 윗줄이라 나서는 모양새였으니 다른 명문 귀족들 입장에선 조롱할 만도 했다.[122] 당장 자무카와의 대결인 13익의 전투 때 본인 직계가 아닌 친족들로 이루어진 익들은 대다수 항복하였다. 또한 함께 고생했던 친동생 카사르조차 반란에 가까운 움직임을 보여서 견제했던 적이 있을 정도. 반면 테무친에게 친형 벨테르가 살해되었던 이복동생 벨구테이는 어찌보면 친형의 원수인데도 단 한 번도 불온하게 움직인 적이 없었기에 테무친에게 신뢰받았다.[123] 이 외에도 이미 아버지인 예수게이 대부터 이미 친척들은 그리 사이가 좋지 않은 이들이었다.[124] 밑바닥까지 떨어져 고생했던 경험에서 나온 건진 몰라도 칭기즈 칸은 Give & Take 이상의 충성을 부하들에게 요구한 적이 없었다. "전황이 불리하면 도망쳐라"가 몽골 제국의 정식 군율 중 하나였을 정도. 그러나 오히려 그 때문에 부하들로부터 절대적인 충성을 받았으며(오늘날엔 별 것 아닌 것 같아 보여도 그 당시까지 초원은 우두머리가 모든 걸 가지는 독식 체제로, 그런 와중에 군주들 중 칭기즈 칸처럼 Give & Take의 원칙을 따른 사람은 없었다.) 그 부하들 중에서 배신자는 단 한 사람도 없었다. 칭기즈 칸의 부하 중 한 사람이 남긴 기록 曰 "그가 물을 가리키면 물에 뛰어들고 불을 가리키면 불에 뛰어들었다". 결과적으로 보면 배신에 대한 뼈아픈 경험 때문에 나온 Give & Take 정책이 부하들에게는 '자신의 안위를 걱정해주는 주군' 이라는 이미지를 갖게 해 절대적인 충성심을 이끌어냈다는 얘기다. 참 아이러니도 이런 아이러니가 없다. 또한 이런 Give & Take 정신은 스스로도 철저히 지켜 먼저 요구하지 않은 신하의 단독행동이더라도 충성을 보였다면 충성에는 반드시 상응하는 보상을 수여했다. 신하들의 의욕이 높았던 것은 당연지사.[125] 게다가 알렉산드로스는 (다리우스 3세가 죽어버려서 성사되진 못했지만) 처음에는 다리우스 3세로부터 선양(?)을 받아 페르시아 왕국의 정통성을 확보하려고 했었으므로 다리우스 3세의 어머니와 아내를 존중하며 대접해줘야 하는 게 맞다. 하지만 호라즘 왕국의 정통성따위를 확보할 이유가 없었던 칭기즈 칸 입장에서는 그럴 필요가 없었다.[126] 엄밀히 말하자면 몽골이 통합될 수 있었던 것도 금나라의 쇠퇴기가 영향이 있을 것이다. 금나라의 영향력이 몽골에 닿는 시대라면 통합하기 어려우니까.[127] 칭기즈 칸은 금나라 장군 흘석렬구근(紇石烈九斤) / 완안구근(完顔九斤)의 부대를 격퇴했는데 다퉁에서는 빗나간 화살을 맞아서 부상을 당하기도 했다.[128] 내실을 다지지 못했을 뿐이지 그의 재위 전만 해도 서이란, 호라산, 호라즘 일대를 제패하던 강국이긴 했지만 여전히 주변국인 고르 왕조에게 시달리고 서요에게 복속된 상태이던 호라즘 왕조였지만 무함마드 2세는 (약해져가고 있었지만) 서요와의 관계를 청산하고 고르 왕조 역시도 멸망한 후 그 영역을 장악하고 카라한 왕조를 멸망시키는 등 나름 정복군주였다. 물론 그 기반이 어머니인 테르켄 하툰에게 있었기에 그의 능력만으로 이룬건 아니긴 하다.[129] 참고로 여기서 한반도 방향으로의 진격로는 고려를 침공한 것이 아니라 강동성 전투를 의미한다.[130] 이는 그가 12세 때 나이로는 형이었던 이복 형제 벡테르를 죽이는 데에서도 명확히 드러난다.[131] 이게 악명의 가장 큰 원인이라고도 볼 수 있다. 몽골족은 유목 민족이라 도시의 필요성을 못 느꼈기 때문에 거리낌 없이 갈아버렸지만 정복당한 사람들은 도시민들(고려부터 유럽에 이르기까지)이니 당연히 악마처럼 보일 수밖에.[132] 이는 《원조비사》 자체가 문자가 없던 시절 구전에 의존해 역사를 전한 유목민의 전통에 따라 운문으로 쓰였기 때문이기도 하다. 《말무사》의 경우 이 원어를 그대로 작중 말풍선에 복붙하여 읽다보면 몽골 사람들이 래퍼로 느껴질 정도다.[133] 패배는 패배지만 그 카라 칼지드 사막 전투에서도 케레이트의 군기를 빼앗고 주요 지휘관 중 한명인 옹 칸의 아들 셍굼을 부상 입히는 전과를 올린다. 물론 이건 칭기즈 칸의 종친인 주르체데이쿠일다르의 활약이 컸지만 케레이트의 기습에서 벗어나서 얼마 안되는 생존 병력을 모아서 케레이트와 혈전을 벌일 정도의 능력을 보여주기는 했다.[134] 대표적인 사례로 몽골 제국에게 첫 패배를 안겨준 잘랄 웃 딘도 칭기즈 칸이 직접 군대를 이끌고 지휘해서 격파했다.[135] 이 공동체는 사실 현대인의 입장에서도 단순히 공평할 뿐 아니라 전쟁 시스템적인 측면에서 매우 효율적이다. 타타르 학살을 위시한 몽골의 세계 정복 과정에서의 학살 과정은 근대적인 의미에서의 공장 작업 공정과도 유사하게 진행되는 측면이 있다.[136] 한 이맘과의 대담에서 이맘이 칭기즈 칸이 지나치게 학살을 하여 역사에 기록되지 않을 것이라 하자 이 세상엔 수많은 왕들이 있고 그들이 모두 자신의 이야기를 할 것이라고 대답했다.[137] 대표적인 예로 몽골은 씻을 때 그 기운이 빠진다고 여겨 세정 의식을 거부했지만 이슬람교는 세정 의식을 중시한다. 또한 이슬람에서 가축을 도축하는 풍습은 피를 신성시한 탓에 가축을 잡을 때도 가슴 부위만 약간 절개한 뒤 손을 집어넣어 심장 동맥을 따서 즉사시키는 도축 방법을 쓰던 몽골인들과 큰 차이를 보였다. 이 때문에 이슬람교와 몽골 정복자들의 갈등은 컸다.[138] 그의 후예를 자처한 티무르도 비슷한 말을 했다. 대충 "걔네들이 개기지만 않았어도 그런 일은 없었을 것을..." 로 요약할 수 있겠다.[139] 일례로 몽골 통일 때 오로오드 족의 수장으로 자무카의 부하였다가 13익 전투에서 패배한 자신을 따라온 주르체데이(Jurchedei)의 경우 천호장으로 만들고 자신의 아내 중 한 명을 주기까지 했다. 자신을 진심으로 따른 부하들에겐 더 없이 너그러운 사람이었다.[140] 그런데 그냥 과장된 소문이라고 하고 넘어가기엔 어려운 충격적인 만행을 자주 저질렀던 것도 사실이다. 뒤통수 때린 도시는 여자와 노인, 아기들까지 싸그리 죽인다던가, 공성전 시 포로를 앞세워 돌격시켜서 수성측의 화살을 소모시키고 포로의 시체로 해자를 메운다던가..[141] 당연히 몽골의 기록만 봐도 자기가 하고 싶으면 하긴 했다.[142] 야율초재는 칭기즈 칸의 말에 "저도 그렇고 제 조상들도 금나라에서 벼슬 했는데 원수고 뭐고 있나요?" 라는 식으로 말했다.[143] 당시 몽골인들은 피를 영혼과 연결된 것으로 생각해 피를 흘리지 않는 죽음을 명예로운 것으로 여겼다.[144] 자무카도 이들이 어찌 될 지 알고 있었는지 부하들이 자신을 포박해 끌고 왔을 때 칭기즈 칸과 대면했는데 칭기즈 칸 앞에서 "친구여 이놈들은 주인인 나를 배신하고 이렇게 붙잡아 왔다. 이런 배신자들을 넌 용납하지 않을 테지?" 라고 말했다. 이에 칭기즈 칸의 대답이 걸작 "물론 주인을 배신해서 적에게 팔아먹는 쓰레기들을 받아줄 리 없지"[145] 다만 후계자를 미리 선정하는 것은 스스로 생각한 것은 아니고 뒤에 서술되었듯 황후 타타르 예수이의 충고에 따른 것이다.[146] 유명 유목민족 중에 끝이 제일 좋은 민족 투탑이 바로 몽골 족과 튀르크이다. 역사에 이름을 떨친 유목민족인 흉노·선비·거란도 그때 잠깐 빛났을 뿐 차례차례 사라졌던 것을 볼 때, 청나라까지 이어진 후금을 세운 누르하치여진과 함께 연약했던 부족들을 끌어모아 유목제국을 일으켜 하나의 민족으로 단단히 뭉친 칭기즈 칸의 업적은 확고하다. 게다가 여진족의 후예인 만주족이 오늘날 나라 없는 민족이 된 걸로 모자라 언어, 문화적으로 한족에 거의 동화되어 사라질 위기에 처했음을 감안하면 칭기즈 칸의 몽골 통일이 더더욱 대단한 셈이다. 단 몽골족은 만주족과는 달리 운도 작용했는데 만주족은 약 300년에 가까운 짧지 않은 시간 동안 중원을 지배하였으며 상당히 한족의 문화를 받아들였다. 이러니 한족에 동화되는 것은 나름 필연적인 일이었지만 몽골 족은 100여 년 정도의 짧은 시간에 그나마도 국가 주도의 한화를 보이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한족이 주로 살던 강남에까지 제대로 된 행정력을 발휘하지도 않아 결과적으로 한족과의 접촉도 적고 지배기간도 짧은 원나라의 특성, 그리고 청나라 치하 몽골이 청이 붕괴되어 몽골 국민국가로 독립할 수 있었던 역사 등의 요소 덕에 민족성을 유지할 수 있었다고 봐야 한다.[147] 근데 몽골 문자는 본국에서는 별로 쓰이지 않고 오히려 중국 내몽골에서 자주 쓰이는 희한한 상황이다. 이렇게 된 이유는 처이발상 시절에 문자 개혁을 한답시고 표기 문자를 키릴 문자로 갈아엎었고, 공산 체제가 붕괴된 후에 문자를 되돌릴까 했지만 키릴 문자 표기가 확고히 정착된 데다가 이미 가로 쓰기에 익숙해있던 몽골인들에게 세로 쓰기로 표기하기 때문에 가독성에서 문제가 있어서 되돌리려는 노력이 실패했기 때문. 반면에 내몽골 지역에서는 표기 문자를 갈아치우지는 않았고 덕택에 현재까지도 내몽골 지역의 몽골어는 몽골 문자로 표기된다. 그런데 중화인민공화국이 민족 언어 교육을 점차 줄여가는 반면 몽골 정부는 2025년까지는 몽골 문자를 부활시키겠다는 의지를 드러냈으니 몽골 본국에서도 몽골 문자가 주류 문자가 될 가능성이 있다.[148] 정확히는 몽골과 고려가 수교를 개시한 이후 칭기즈 칸은 서방원정을 갔고, 이 당시 고려와의 관계는 그의 동생인 테무게 옷치긴이 맡고 있었다.[149] 고려 자체가 원 제국의 제1번국으로 취급받았고, 고려 왕가가 황금씨족의 일원으로 편입되기도 했을 정도. 직위 자체만 보면 동방 삼왕가에 버금가는, 혹은 그와 대등한 위치까지 올라갔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왕실을 제외한 고려인의 취급은 사실 구 금나라 고토의 북방 한족인 한인과 같은 취급을 받았다.[150] 몽골족의 중국 지배 이전에도 같은 몽골 제민족인 선비족거란족이 중국 북부를 다스리며 북방 한족들과 혼혈된 바 있다.[151] 이건 아틸라훈족이 동유럽에서 깽판 치던 시절 로마인들 사이에서도 나왔던 소리이기도 하다. 한마디로 훈족의 재림.[152] 당시 중동의 최강국이었던 호라즘은 과학기술이 상당히 발전해 있었고 술탄 무함마드는 몸소 출진한 칭기즈칸을 필두로 하여 진격해오는 25만의 몽골군에 맞서 첫 전투에만 무려 40만 대군을 동원할 정도로 기본적인 국력도 강했다. 그러나 상술한 첫 전투에서 시르다리야 강가에 대기하고 있던 호라즘군은 몽골의 기습으로 무려 16만의 병력을 잃는 대참패를 당했고, 이후에도 연전연패를 거듭하면서 몽골에게 승기가 완전히 넘어갔다.전쟁 중 호라즘의 도시는 불태워졌으며 주민들은 황야로 내쫓겼다. 무함마드는 요새 도시 사마르칸트로 피신했으나 몽골군은 중국에서 들여온 공성무기로 간단히 성을 함락시키고 도주하는 무함마드를 추격해 죽였다.[153] 하자라족이 받는 차별에 관해서는 아프가니스탄 출신 베스트셀러 작가 할레드 호세이니의 《연을 쫓는 아이》에 잘 묘사되어 있다.[154] 모자란 인구로 그 거대한 땅을 직접 통치하려고 하면 아주 좆된다는 사실은 열강도 알고 있었다. 몽골 제국이 몰락한 이유들 중 하나도 그것이었다.[155] 반면 위구르인의 가까운 친척뻘 민족인 우즈베크인들은 자신들의 선조격인 호라즘 왕조가 칭기즈 칸 치세의 몽골 제국에 의해 무너진 것 때문에 위구르인들에 비하면 칭기즈 칸에 대한 평가가 부정적인 편이다. 아이러니하게도 그것과 별개로 칭기즈 칸의 후손인 티무르를 국부로 추앙하고 있지만...[156] 물론 주변의 네팔, 스리랑카, 미얀마, 부탄도 소수의 무슬림들이 'Khan'이라는 이름을 쓰는 경우가 있다. 다만 몰디브의 경우 무슬림이 대다수인 것과 별개로 몽골 및 튀르크 문화권의 영향을 받지는 않아서 몰디브 내에서 'Khan'이라는 이름을 쓰는 이들은 절대다수가 조상이 남아시아의 다른 나라에서 이주해온 케이스다.[157] 그리고 원정이 대체로 순탄하게 진행된 러시아와는 달리 몽골군이 남송에서처럼 고전한 일도 많다.[158] 칭기즈 칸 본인은 러시아로 간 적이 없다.[159] 납치와 인신매매가 얼마나 심한지 '슬라브 금발미녀 노예'가 이슬람 제국으로의 정기 수출품일 지경.[160] 정확하는 몽골인들을 “대수학을 갖추지 못한 아랍인”이라고 표현했다.[161] 실제로 러시아/역사 항목이나 모스크바 대공국 문서에 일괄적으로 이런 식으로 '몽골 덕분에 러시아가 통일되어 대제국이 될 수 있었던 것' 이라는 서술이 현재 전부 수정되었다. 방금 언급된 항목들에서 반박된 바와 같이 몽골의 러시아 지배 중 부작용으로 발생한 일부 긍정적 측면에만 집중하고, 몽골로 인해 러시아가 입은 막대한 피해는 전혀 고려하지 않은 편파적이고 왜곡된 주장도 섞여있다고 봐야 한다. 당장 몇줄 위의 서술처럼 '러시아 지방은 춥기만 하고 아무 쓰잘데기 없는 땅' 이라는 인식 자체에 문제가 있다. 키예프 공국의 중심지인 키예프 일대는 유럽 전체에서도 가장 손꼽히는 곡창 지대 중 하나인 초르노젬(흑토) 지대로, 농업 생산력이 곧 인구 부양력과 국력의 척도이던 당시 기준으로는 꿀땅도 이만한 꿀땅이 드물었다. 그리고 몽고 침략 이전까지 동로마 제국의 문화적 영향력을 직접 받았던 러시아의 문화적 수준 역시 당시의 서유럽보다 높으면 높았지 절대로 낮지는 않았다. 오히려, 러시아라고 하면 춥고 척박한 땅이라는 이미지야말로 몽골 제국의 정복 이후 형성된 것이다. 정확히 말하면, 몽골의 침략 이후 현재의 우크라이나 흑토 지대에 해당하는 키예프 - 루시의 중심 지역이 약탈과 학살로 철저하게 파괴된 이후 폴란드-리투아니아가 이 지역을 접수하는 바람에 러시아의 중심지가 춥고 척박한 동북쪽으로 이동한 것.[162] 농노제가 더욱 각박하고 잔인해졌다.[163] 일제와 6.25 전쟁으로 인하여 기존의 사회 구조가 완전히 파괴되면서 한국에서 신분제적 잔재 역시 사라진 것을 사실이라 해도 이로 인하여 우리가 김일성의 을 보았다고 말할 수는 없다.[164] 실제로 1960년대에 교육부 장관이 칭기즈 칸 관련 유적을 발굴하다가 (소련의 외압으로) 해임되어 고향으로 돌아갔는데 얼마 후 살해되었다.[165] 아이러니하게도 몽골의 근대화에 크게 기여한 인물은 칭기즈 칸의 후손들을 몰살시켰다는 설이 있는 허를러깅 처이발상이다.[166] Wade, Nicholas. Before the dawn: Recovering the lost history of our ancestors. Penguin, 2006.[167] 칭기즈 칸에게 원한을 품은 여인이 자신의 중요 부위에 날카로운 비수를 넣어두고, 성관계를 할 때 칭기즈 칸의 성기가 잘려 죽었다는 야사도 전해진다.[168] 일본이 칭기즈 칸의 무덤을 그렇게 찾으려고 했던 이유는 칭기즈 칸이 일본인(미나모토노 요시츠네)이었다는 일본 내 속설을 증명하여 당시 중국 및 몽골 지배를 억지로 정당화하고자 하기 위한 것이었다. 참고로 북경 원인 같은 뼈까지도 일본은 당시 손에 넣으려고 했었다. 북경 원인이 일본인의 조상이며 그러니 당연히 중국은 우리가 차지해야 한다는 또다른 억지였지만.[169] 반대로 호라즘 왕조의 잘랄 웃 딘의 경우 할머니에게 암살당할 뻔한 것을 정작 그가 제거된 후 후계자로 옹립될 예정이었던 동생이 이를 거부하고 형에게 달려가 알린 덕분에 목숨을 건졌을 정도로 형제 간 사이가 좋았다. 잘랄 웃 딘의 활약을 칭기즈 칸이 보고 "저런 아들을 둔 아버지는 행복할 것이다" 라고 말했다는 전승이 있는데, 형제간의 우애를 알았다면 더더욱 부러워했을지도?[170] 하지만 이 반박자료도 문제가 있는데, 혈통 논란으로 당대에도 말이 많았던 맏아들 주치의 후손들이 다른 후손들과 Y염색체가 다르다는 조사결과를 뭉개버렸다는 점이다.[171] 다만 1218년 거란의 잔당 소탕을 명분으로 고려에 진입한 것이 고려와 동맹을 맺기 위해서 의도한 것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고려사》 <조충전>에 칭기즈 칸의 명령으로 형제 맹약을 맺는다고 적혀있기 때문.[172] 칭기즈 칸에 대한 반감이 강한 사람들은 이 농담을 싫어하기도 한다.[173] チンギス・ハーン(친기스 한)으로 표기하는 경우도 상당히 많다.[174] '그들의 여자를 취하는 것이다' 라고 말했다는 버전이 많이 알려져 있다.[175] 여담으로 리그 오브 레전드의 챔피언인 사이온의 과거 대사들 중 하나가 이 어록을 그대로 본 떠 만들어졌다.[176] 칭기즈 칸을 Bad Ass로 보는 사람 중엔 그를 Bad Ass 중에도 최상급으로 치는 사람이 많다. Urban Dictionary에서 Genghis Khan 항목 참조.[177] 이 말은 에이지 오브 엠파이어 2의 칭기즈 칸 캠페인에서 칭기즈 칸이 죽을 때 한 말로 나오기도 한다.


[178] 같은 지역 내에 다른 민족이 없다면 차별이 있어도 의미 없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