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1-16 01:44:31

야호령 전투

파일:몽골 제국 및 원나라 문장 white.svg 몽골 제국의 대외 전쟁·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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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배경3. 전초전 : 오사보 전투4. 전개5. 2차 격전 : 회하보 전투6. 결과
전투 일정
1211년 8월~10월
장소
야호령(현 허베이성 장자커우시 완치안 구)
교전국
대금제국 몽골제국
지휘관
병력
약 350,000명[1] 기병 90,000~110,000 명
피해 규모
궤멸 사상자 20,000명~30,000명
결과
몽골군의 대승리
영향
몽골군이 몽골-금 전쟁에서의 주도권을 잡다.

1. 개요

야호령(野狐嶺) 전투

1211년 8월, 금나라몽골 제국 간에 벌어진 전투로, 이 전투에서 승리를 거둔 몽골 제국이 이후 23년간 이어지는 금나라와의 전쟁에서 우위를 차지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2. 배경

12세기 이후 동아시아의 강자로 떠오른 금나라는 몽골 고원에 있는 여러 부족들을 관리해서 변방의 안정을 유지하려고 했다. 이 과정에서 몽골 부족들 사이를 이간질해서 서로 싸우게 하거나 일부 부족들을 포섭해서 금나라에 적대적인 부족들을 견제했다. 이러한 금의 대외 정책은 몽골의 힘을 약화시키는데 있어서는 성공적이었지만, 다른 한편으로 많은 몽골 부족들이 금나라에 대해 깊은 원한을 가지게 만들었다. 13세기에 접어들면서 몽골 부족 중 하나인 카마그 몽골에서 테무진이라는 인물이 나타나 초원의 여러 부족들을 평정했고, 마침내 1206년, 몽골을 통일하면서 칭기즈 칸이라는 칭호를 받게 되었다. 금나라에 적대적이었던 칭기즈 칸은 먼저 제도를 정비하며 힘을 키우고, 통합된 몽골 군대를 총동원하여 금나라를 침공하려고 했다. 한편 칭기즈 칸의 몽골 통일로 인해 영향력을 상실한 금나라는 다가오는 몽골군의 습격에 대비하여 국경 지대를 따라 약 300km에 걸쳐 요새와 장벽을 건설했다.

3. 전초전 : 오사보 전투

1211년 3월, 10만명 가량의 몽골 군대가 금나라 정벌에 나섰다. 자신의 셋째 아들인 오고타이를 시켜서 서경(현 다퉁)을 공격하도록 하고 징키스칸 자신은 본대를 이끌고 국경 근처의 요새인 오사보에 도착했다. 오사보엔 금군 기병 3만명~5만명 정도가 있었으며, 이들은 오사보를 지키고 있었다. 6월까지의 전투 끝에 금나라군이 한큐에 박살이 나면서 오사보를 함락시켰다.

이에 금나라의 총사령관 완안승유(完顏承裕)는 흩어져 있던 군대를 모아서 30만명 정도의 대군을이끌고 몽골군을 한번에 전멸시키기로 했다. 완안승유는 기병 위주의 몽골군을 상대하기 위한 전장으로 산악 지대에 있는 야호령을 선택하고, 이곳으로 금나라의 주력군을 집결시켰다. 잠시 몽골군을 휴식시키며 금나라와 외교 협상을 벌였던 칭기즈 칸 역시 적군이 야호령으로 집결하고 있다는 첩보를 듣자 금나라의 주력군을 격파하기 위해 야호령으로 몽골군을 이동시킴으로써 1211년 8월, 야호령 전투가 벌어지게 되었다.

4. 전개

야호령의 산악 지형은 기병이 활동하기에 적절하지 않아서 기병들도 말에서 내려 보병처럼 싸워야 했다. 이는 경기병 위주로 구성된 몽골군에게 심각한 페널티였지만, 반면에 금나라 입장에서도 험준한 산악 지형에서 각 부대가 이동하거나 다른 부대와 연계 공격을 펼치는데 제약이 많아서 수적인 우세를 활용하기 어려웠다. 이에 몽골군은 병력을 집중시켜 지형을 따라 흩어져 배치된 금나라 군대를 각개격파하기로 했다.

칭기즈 칸은 먼저 부하 장수 잘라이르 무칼리에게 결사대를 주어 환아취(獾兒嘴)로 보내 기습을 시켰다. 무칼리는 이때 "금군을 격파하기 전에는 살아서 돌아오지 않겠습니다"라고 약속하고 떠났다. 무칼리의 군대가 금나라 진영을 우회하여 배후를 공격하는 사이, 몽골의 주력은 결사적으로 싸워 금나라의 정면을 돌파하고, 완안승유의 중앙 군영에까지 도달했다. 험한 지형 때문에 부대간의 연락에 어려움을 겪고 있었던 금나라의 좌익과 우익은 제때 중앙을 구원하러 오지 못했고, 무칼리에 의해 후방까지 교란당하면서 금군은 수적 우위를 살리지 못하고 무너져 내렸다. 지휘 체계가 붕괴된 금군은 수백리나 정신없이 후퇴해야 했고, 결국 이 전투에서 약 20여만명을 상실했다.

5. 2차 격전 : 회하보 전투

이후 완안승유는 약 5만명 정도의 금나라의 패잔병을 회하보(澮河堡)에서 수습했다. 그러나 곧 추격해온 몽골군이 당도하여 1211년 10월, 회하보 전투가 벌어졌다. 3일간 벌어진 전투에서 몽골군은 칭기즈 칸이 직접 3,000명의 기병을 이끌고 돌격해올 정도로 격렬하게 싸웠고, 사방을 포위한 몽골군의 이러한 집요한 공격에 금군은 전멸하고, 완안승유 역시 겨우 목숨만 건져 빠져나올 수 있었다.

6. 결과

금나라는 전성기에 동원 가능한 최대 병력 수가 약 90만~100만 가량으로 짐작되는데, 오사보,야호령,회화보에서 무려 35만명 정도를 한큐에 상실했다. 뿐만 아니라 그 이후 화북지역의 목초지들을 빼앗기면서 금군의 기병 전력이 크게 약화되었다. 비록 금나라의 인구가 몽골보다 40배나 많고, 경제력의 차이는 그 이상이라, 이후 공성전에 미숙한 몽골군을 상대로 어찌저찌 20여년을 버티기는 했지만 주력군, 특히 중기병을 상실한 금군은 야전에서의 우위를 확보하지 못했다.

반면 몽골군도 최소 2만 정도 사상자가 나왔지만, 그 뒤의 병력을 감안하면 사상자는 많아봐야 3만명 정도로 추정된다. 즉 말 그대로 몽골군의 대승이라고 봐도 무방했다.

위기에 빠진 금나라는 남송을 정복하여 세력을 회복하려고 했는데, 결국 남송을 정벌하지 못했고, 오히려 남송이 몽골에 협력하게 되는 계기가 되어 버린다. 그 유명한 남송의 명장 맹공과 겨뤄 오히려 산둥까지 뒤집어질 뻔 했다. 그나마 금나라에게는 다행스럽게도 1219년부터 몽골군의 주력이 호라즘 왕조를 비롯한 서역의 전장으로 이동하면서, 금군은 한동안 동아시아 전역에 남겨진 몽골군과 일진일퇴를 거듭하며 근근히 버틸 수 있었다. 그러나 서역을 정벌하던 칭기즈 칸의 아들들이 몽골군의 주력을 이끌고 돌아오면서 결국 1234년 몽골-남송 연합군에 의해 멸망하게 된다.


[1] 오사보 50,000명, 야호령+회하보 300,000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