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4-09 01:41:51

칼가강 전투

파일:몽골 제국 및 원나라 문장 white.svg 몽골 제국의 대외 전쟁·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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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칼가강 전투의 배경3. 양군의 전력4. 칼가강 전투 전개
4.1. 전초전4.2. 전면전
5. 칼가강 전투 결과 및 영향

1. 개요

1223년 벌어진 몽골 제국 최초의 유럽 침공[1]이자, 이후 오늘 날의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지역 지배의 시작을 알린 전투이다. 당시 루스 공국 연합군은 수적 우세에도 불구하고, 몽골군의 정면 공격도 제대로 받아치지 못할 만큼 무기력하게 패하고 마는데, 덕분에 이후 루스 공국들은 연합하여 몽골 제국을 상대할 생각도 하지 못한 채 자기들의 영지 보전에만 몰두하게 되었고, 시간이 지나 바투 등의 서방 원정군이 본격적으로 침입해오자 모두 각개격파당했다.

참고로 이때 몽골군은 딱히 우크라이나-러시아 지역을 공격하려던 의도는 없었는데, 중앙아시아에서 호라즘 왕국 추격전을 벌인 다음 카스피해 건너편으로 돌아가기 위해 북쪽으로 빙 돌아 귀환하던 도중에 루스 18개 공국 연합군이 먼저 선공을 하면서 확대된 전투였다. (병력도 루스 연합군이 훨씬 많았다.)

2. 칼가강 전투의 배경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Khwarezmian_Empire_1190_-_1220_%28AD%29.png
(호라즘 왕국과 그 주변 지역 지도. 몽골군이 어떤 방향으로 나아갔는가를 짚어보자. 물론 루시 연합군과의 전투가 벌어진 지역은 더 북쪽이다.)

1219년 칭기스칸은 중앙아시아에 위치한 호라즘 제국과 외교적인 마찰을 빚은 후 호라즘으로 쳐들어가서 부하라 등 여러 도시를 점령하고는 마침내 수도인 사마르칸트를 포위하기에 이르렀다.

불과 11일 만에 사마르칸트를 집어 삼켰지만 술탄 알라 웃 딘 무함마드가 이미 몽골군을 피해 도망갔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칭기즈 칸은 자신을 충실히 따르는 장군이자 당대 명장들로 손꼽혔던 제베수부타이에게 두 개의 만인대를 맡겨 그의 뒤를 쫓도록 했다. 이들은 카스피 해 연안에 있던 호라즘 제국의 여러 도시를 차례로 무너뜨리면서 술탄을 추격했지만, 이미 무함마드 2세가 카스피 해 안의 섬에서 1220년 12월에 사망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2]

이에 두 장군은 칭기스 칸에게 앞으로의 행보를 물었고, 다음 명령을 기다리며 북쪽으로 올라갔다.

일단 이 둘은 1221년 타브리즈를 포위해서 항복시킨 후, 북쪽으로 올라가면서 때마침 근처에 있었던 캅카스 일대의 조지아 왕국을 털어 먹었다. 물론 캅카스의 험준한 산악 지대까지 진출하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나름 지역에서 잘 나가던 조지아 왕국이 몽골군과의 대결에서 너무나도 무력하게 당하는 것을 두 눈으로 직접 지켜 본 아제르바이잔 일대의 토후국들은 경악을 금치 못한 채 몽골군에 허겁지겁 제물을 바치며 항복을 청했고, 그럼에도 몇 개 도시는 몽골군 심기를 건드려 도시째 무너진 후 처참히 응징당했다. 이후 몽골군은 목초지를 찾아 카스피 해 북쪽 초원 지역까지 올라갔고 이 지역에서 튀르크계 킵차크족을 흡수하면서 부족한 전력을 채웠다.

1223년 초 칭기즈칸은 이들에게 전리품을 가지고 몽골 초원으로 귀환할 것을 명령했고, 때마침 캅카스 지역민들이 킵차크족과 연합해 몽골군에게 대항하자 제베와 수부타이는 이들을 제압한 뒤 돌아가는 김에 좀 더 가서 크림 반도까지 진출하여 약탈하고, 전리품을 들고 귀환하기로 정하고, 실행에 옮긴다. 이 과정에서 크림 반도 일대에 형성되어 있었던 제노바 공화국의 식민도시들이 몽골군에 의해 철저히 약탈당했다.

그런데 이후 전리품도 충분히 챙겼다고 여긴 몽골군이 귀환할 준비를 하고 있을 때 사단이 났다. 몽골군에게 두들겨 맞고 서쪽으로 피난갔던 킵차크족들이 북쪽에 위치한 루시의 여러 공국들로 가서 '우리가 몽골군한테 완전 털렸어. 그리고 그 다음에는 너네를 털러 가고 있어.'라고 하면서 몽골군을 먼저 선제공격하라고 부추긴 것. 이걸 듣고 깜짝 놀란 루시 공국들은 당시 러시아권의 수장 격이었던 키예프 공국을 중심으로 연합군을 편성하였고, 루시 제 공국의 연합군은 한참 돌아갈 채비를 하던 몽골군 쪽으로 다가오게 된다.

3. 양군의 전력

파일:external/weaponsandwarfare.files.wordpress.com/bbdc1cadd8.jpg

몽골군의 전력은 기록상 확인되는 바로는 2개 만인대(투멘)이었다. 보통 1개 만인대는 정원이 10,000명에 달하나, 실제로 이런 정원을 다 채우는 경우는 드물었고 보통은 7~8,000명 내외였다고 한다. 여기에 장기간의 추격전으로 입은 전력 손실도 있으나, 카스피해 북부 스텝 초원에서 한해를 나면서 주변 부족들을 복속시키고 전력을 충원했기 때문에 전체 전력 규모는 15,000~20,000명 사이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에 반해 루시 연합군은 약 80,000명이라는 큰 규모의 병력이었다. 전력 구성은 갈리치아의 대공 므스티슬라프 흐라브리, 볼리니아의 대공, 쿠르스크의 대공, 키예프와 체르니고프 대공, 수즈달의 대공, 로스토프의 대공이 힘을 합쳐 이루어졌다.

4. 칼가강 전투 전개

4.1. 전초전

루시 군은 전투 직전 몽골군에게 페이크를 하나 걸었다. 몽골군이 군대를 모은 루시 연합군에게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자 '우린 그저 반란을 일으킨 쿠딘족을 토벌하기 위해 온 거지 님들과 싸우려 하는 게 아님'이라며 사신을 보내 거짓으로 둘러댄 것. 때마침 친지 볼 생각에 동쪽으로 돌아가기 바빴던 수부타이제베는 이 말만 믿고 약 1,000여 명의 병사들만 남긴 채 동쪽으로 떠났는데, 이때부터 본색을 드러낸 루시군은 강가에 있던 이들 1,000여 명의 몽골군을 포위해 싸그리 죽이고, 돌아가는 몽골군마저 추격해 공격을 가했다.

그러나 이건 호랑이의 꼬리를 밟은 격이었다. 특히 얌전히 돌아갈 생각이었던 몽골군은 루시의 기습적인 선공에 분노하여 방향을 바꿔 이들과 맞서 싸우기로 결심한다.

4.2. 전면전

기습공격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몽골군은 침착하게 진영을 갖추고 궁술과 기마술을 운용해 루시군의 공격을 어렵지 않게 받아 넘겼다. 여기에 선봉에 나섰던 킵차크족 전사들이 철수할 수 있게 열어놓은 루시 진영 틈을 몽골군이 철수하는 킵차크족 뒤에 바싹 붙어서 난입해 들어오자 루시군은 그야말로 충공깽하며 무너졌다. 이후 몽골군은 언제나 하던 것처럼 양익을 길게 펼쳐 퇴로를 막고 루시군을 철저히 학살했다.

키예프 대공은 이때 자기 진영에서 패잔병들을 받아들이며 기다렸다가 이후 달려온 몽골군에게 포위당했다. 10,000여명에 달하는 병력을 확보했지만 이걸로는 몽골군을 막아내는데만 급급한 정도였으며, 3일간의 공격 이후 몽골군이 항복하면 무사히 돌려보내 주겠다고 회유하자[물론] 잔존 루시군은 항복했다. 그러나 몽골군은 먼저 후위를 친 루시군을 당연히 살려 보낼 생각이 없었고, 포로로 잡은 고위 귀족들을 뺀 나머지 루시군은 모조리 죽고 만다.

5. 칼가강 전투 결과 및 영향

이 전투에서의 참패로 인해 루시군의 야전 수행 능력은 사실상 사라지고 만다. 학자들에 따르면 최소 2/3 이상의 루시군이 이 전투에서 전사했다고 한다. 포로로 잡힌 귀족들은 몽골군에 의해 피를 보지 않는 방식으로 모두 처형되었다.[4] 간신히 살아남은 루시군 수뇌부는 강가의 모든 배를 파괴해 몽골군이 강을 건널 생각을 못하게 만드는데 급급했다고 한다. 그리고 이 피해는 1237년에 몽골의 서방 원정 때 분열된 루스 공국들이 힘없이 무너지는 나비효과를 불러오고야 만다.

이 전투 이후 몽골군은 무리하게 현재의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지역으로 진격할 생각은 하지 않은 채 여태껏 획득한 전리품을 가지고 칭기즈 칸이 있는 곳으로 출발했다. 다만 이 사태의 원흉이랄 수 있는 킵차크족은 가만 놔둘 수 없었는지, 돌아가기 전에 별동대를 조직해 후환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 킵차크족의 칸을 추적, 없애버렸다.[5] 임무를 달성한 몽골군은 트란스옥시아나의 시르다리야 강으로 돌아가 칭기즈 칸의 군대에 합세했다.

귀환 도중 병에 걸린 제베는 그대로 병사했다. 그러나 제베와 더불어 몽골군을 대표하는 명장인 수부타이는 이 일대의 지형과 부족들에 대한 정보를 온 몸으로 체득하였고 10여 년 뒤 벌어진 몽골군의 서방 원정에서 그 정보들을 바탕으로 정복 사업을 벌이게 된다. 그리고 이 서방 원정에서 러시아 공국 대부분이 몽골군의 말발굽에 짓밟혀 킵차크 칸국의 지배를 받게 되었고, 노브고로드 공화국 같은 러시아 일부 공국은 지구 반대편의 고려처럼 국체만 간신히 유지한 채 속국 신세로 전락하고 만다.

러시아 우월주의자들에게 있어 이 시기는 그야말로 굴욕의 역사이기에, 소련이 건재하던 시절엔 반지배 상태이던 몽골에서 이 전투는 은폐되면서 가려졌으나, 공산 정부가 사라진 이후부턴 몽골에서도 널리 배우고 있다.

러시아 시인 푸쉬킨은 이 전투를 굴욕의 역사라며 한탄하는 시를 짓기도 했다.

에이지 오브 엠파이어 2에서 몽골, 쿠만 시나리오로 등장한다. 칭기즈 칸 캠페인에서는 호라즘 왕조 정벌이 메인이고 킵차크+루시는 옆에 있다가 곁다리로 함께 쓸려나가는 걸로 묘사되는데 반해 코티얀 칸 캠페인에서는 몽골+타타르가 압도적인 전력으로 포위, 추격해오고 쿠만 패잔병은 간신히 도망가는 걸로 묘사되었다.

에이지 오브 엠파이어 4의 몽골 캠페인 첫 미션으로 등장한다.

조조전 모드 칭기스칸에서는 전투 조금 전부터 병에 걸린 제베가 헥헥거리는데, 전투를 할지 안 할지 선택할 수 있다. 역사대로 이 전투를 하면 제베와 무카리가 죽고, 이 전투를 하지 않고 넘어가면 두 사람이 산다. 엔딩 분기와 관련 있으니 여유가 있다면 둘 다 해볼 것을 추천.


[1] 1221년 조지아 왕국 침공 과정에서 벌어진 쿠난 전투를 최초의 유럽 침공으로 보기도 한다.[2] 무함마드 2세가 죽은 섬은 아베스쿤이라는 이름으로 불렸으며 오늘날에는 물에 잠겨 그 흔적조차 찾을 수 없다고 한다.[물론] 거짓 회유였다.[4] 무라키마 히루키의 장편 《태엽 감는 새》에 그때의 피를 보지 않는 처형 방법이 언급되는데 그 방법이란 루시 귀족들을 바닥에 눕혀놓고 그 위에 몽골군이 올라가 집단 군무를 추는 거였다고 한다. 한 마디로 압사.(...) 참고로 몽골군의 명예(?)를 위해 첨언하자면 그들의 풍습상 피를 보지 않는 죽음을 미덕으로 삼기 때문에 귀족들이랍시고 나름 대접(?) 해준 것이라고 한다.[5] 이러면 서로 자기가 칸이 되려고 해서 킵차크족 내부의 분열이 발생해 서로 쪼개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