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4-22 17:13:07

삼봉산 전투

파일:몽골 제국 및 원나라 문장 white.svg 몽골 제국의 대외 전쟁·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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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봉산 전투
三峰山 戰鬪
<colbgcolor=#2e8b57,#251327><colcolor=#ece5b6> 시기 1232년 (금 애종 9년) 2월 9일
장소

삼봉산 (현 중국 허난성 쉬창시 일대)
교전국 몽골
(공세)
<rowcolor=black>
(수세)
주요 인물
지휘관

파일:몽골 제국 국기.svg 오고타이 칸 (원 태종)
파일:몽골 제국 국기.svg 툴루이
지휘관

[[금나라|
大金
]] 완안진화상
[[금나라|
大金
]] 완안합달
[[금나라|
大金
]] 이랄포아
병력 몽골 기병군: 50,000명 금나라군: 150,000명
- 기병: 20,000명
- 보병: 130,000명
피해 피해 규모 불명 군 궤멸
결과 몽골의 대승
- 몽골의 결정적 승리
- 금나라의 멸망
1. 개요2. 배경3. 전투 경과4. 결과

[clearfix]

1. 개요

  • 이 영상의 출처는 퍄퍄킴이 올린 금나라에 관한 마지막 역사 파트 영상이다.

서기 13세기 초중반인 1232년 2월 9일, 삼봉산(三峰山. 현재 중국 허난성 쉬창시 서남쪽)에서 금나라군과 몽골 제국군이 맞붙은 전투. 금나라의 멸망을 확정지은 결정적인 전투이다.

2. 배경

1211년 칭기즈 칸이 이끄는 몽골군이 남침한 이래, 금나라는 야호령 전투 등 여러 전투에서 참패하고, 수도 중도(오늘날의 베이징)까지 포위당했다. 금선종은 칭기즈 칸의 먼 선조인 카마그 몽골의 제2대 칸이었던 암바가이 칸의 유물을 전해주고[1] 막대한 금액의 보상금을 지불하면서 화의를 간청했다. 칭기즈 칸은 이를 받아들이고 본국으로 돌아갔다.

이후 선종은 1214년 5월 수도를 본래 북송의 수도였던 개봉으로 천도했다(정우의 남천). 그러자 칭기즈 칸은 천도를 적대 행위로 간주하고, 전쟁을 재개하여 중도를 함락시킨 뒤 주민들을 학살하며 약탈을 자행했다. 이후 그는 호라즘 왕조와의 전쟁이 벌어지자 중국 전선을 4준의 한 명이었던 잘라이르 무칼리에게 맡겼고, 무칼리는 40,000명밖에 안 되는 병력으로 북중국 각지를 종횡무진하며, 금군의 반격을 모조리 물리치고, 금나라의 영역을 잠식했다. 이제 금나라에게 남은 영토는 섬서성 일부와 수도권인 하남성 일대에 국한되었다. 금선종은 무칼리에게 화의를 간청했지만, 무칼리는 나라를 바치고 항복하지 않는다면 받아들이지 않겠다며 묵살해 버렸다.

1224년 1월 금선종이 붕어한 뒤, 3남 금애종이 뒤를 이었다. 그는 형벌을 엄격히 하여 완안씨 황족이라 해도 사람을 함부로 해치면 가차없이 처벌하였고, 나라를 부흥시키기 위해 어떤 간언이든 귀를 기울였다. 또한 완안진화상 등 뛰어난 장수들을 대거 발탁해 몽골의 예정된 침략에 대비했다. 이러한 금애종의 정책은 효력을 발휘하여 1228년 완안진화상이 이끄는 400명의 충효군이 대창원에서 몽골군 8,000명을 격파했다. 이후 완안진화상은 정원대장군 겸 평량 부판관에 임명되어 하남, 섬서 일대를 전전하며 몽골군을 수차례 격파하였고, 1229년 몽골군에게 포위된 위주 구원전에서 선봉을 맡아 승리에 기여했다.

1230년, 오고타이 칸은 금나라를 정복하기 위해 대대적인 원정을 단행하기로 결의했다. 그는 친히 대군을 이끌고 섬서 일대를 휩쓴 뒤 하중부로 진격했고, 4구 중의 한 명이었던 우량카이 수부타이는 별동대를 이끌고 동관을 공격했다. 그러나 1231년 완안진화상이 이끄는 충효군 1,000명이 출동하여 수부타이를 격파하고 도회곡까지 추격했다.[2] 동관의 수비가 견고하여 쉽게 뚫릴 것 같지 않자, 오고타이 칸은 여러 왕공을 불러모아 어찌할 지 물었다. 이때 툴루이가 주위를 물리친 뒤 자신의 계책을 밝혔다.
"일전에 봉상을 공략할 때 이창국이라는 투항자가 말하길, '금 황제가 개봉으로 천도해서 의지하는 것은 황하동관 뿐입니다. 만약 보계를 통해 한중으로 들어가면, 한 달도 되지 않아 당주, 등주에 이를 수 있습니다. 금나라 병사들이 이를 들으면 우리 군이 하늘에서 뚝 떨어졌다고 생각하지 않겠습니까?'라고 했는데, 그 작전이 괜찮을 것 같습니다."

오고타이는 이 제안을 받아들여 그에게 일로군(一路軍)을 맡겨 동관을 우회하기 위해 한수를 따라 거슬러 내려가다가 한중을 거쳐 등주로 가게 했다. 금애종은 이 소식을 듣고 신료들을 모아놓고 어찌할 지를 물었다. 신료들이 하남의 여러 성들이 청야 전술을 구사하게 하고 적과 상대하지 않게 하면 적이 알아서 물러날 거라고 주장하자, 금애종은 탄식하며 말했다.
"남쪽으로 천도한지 이제 20여 년이다. 백성은 농토와 주택을 폐허로 만들었고, 처자식을 내다 팔며 군대를 양성했다. 이제 우리의 군사가 20여 만에 이르렀다. 그런데 적이 와도 맞아 싸우지 않고 단지 스스로 수비하고 백성을 지키지 않는다면, 설사 그렇게 해서 도성을 보전할 수 있더라도 어찌 나라라고 할 수 있겠는가? 짐은 이에 대해 심사숙고하였다. 나라의 국운은 그저 천명에 달려 있다. 그러나 짐은 백성을 저버리지 않아야 한다고 본다."

그는 대장군 이랄포아와 완안합달, 그리고 완안진화상에게 속히 등주로 가서 적을 막아내라고 지시했다. 이랄포아 등은 기병 2만, 보병 13만, 합계 15만명에 달하는 대군을 이끌고 등주에 도착했다. 최고 지휘관 이랄포아는 적이 강을 다 건너고 나면 쳐부수겠다는 입장을 표명했다. 군중에서는 강을 건너지 못하게 막아야 한다는 주장이 일었지만, 이랄포아의 뜻을 바꾸지 못했다. 그리하여 강을 건넌 몽골군은 금군 진영을 수차례 공격했다. 하지만 병력이 4만명 밖에 되지 않았고, 완안합달 등이 도망치는 장수와 병졸을 손수 쳐죽이며 전투를 독려했기 때문에 쉽사리 결판이 나지 않았다. 잠깐 물러나는 척하며 적을 유인해봤지만, 금군은 속아넘어가지 않았다.

툴루이는 여기서 더 싸워봐야 소용없다고 판단하고, 야밤을 틈타 다른 곳으로 은밀히 이동했다. 금군은 적군이 갑자기 사라지자 5일 동안 주변을 수색했지만 좀처럼 찾아내지 못했다. 이랄포아는 일단 군량을 확보하기 위해 등주로 철수하기로 했는데, 가던 도중에 소규모 몽골 기병이 튀어나와 군량을 약탈했고, 등주에 입성한 뒤 몽골군 별동대가 등주를 공격했다가 사라졌다. 금나라 장수들은 몽골군의 의도를 알 수 없는 행동에 의아해하다가, 등주 인근에 있는 도시인 당주가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나서야 적군이 전장을 우회하여 수도 개봉으로 진격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이에 이랄포아, 완안합달, 완안진화상 등 금나라 장수들은 개봉을 구원하기 위해 서둘러 출발했다. 이리하여 삼봉산 전투의 막이 올랐다.

3. 전투 경과

1232년 정월, 금군 15만 명은 개봉을 구원하기 위해 등주에서 출발했다. 하지만 추위가 거세게 몰아치는 데다 몽골군이 여기저기를 초토화시켰기 때문에, 금나라 병사들은 먹을 것을 구하고 추위를 피할 곳을 마련하는 게 무척 힘들었다. 또한 3,000명 가량의 몽골군이 끊임없이 금군 행렬 주위를 횡행하여 치고 빠지는 전술을 구사해, 금군을 지치게 만들었고, 야밤엔 몽골군이 북을 치고 떠들어서 편히 자지 못하게 했다. 이랄포아 등은 10,000명의 별동대를 파견하여 3,000명의 몽골군을 쫓아내게 했지만, 몽골군은 곧바로 돌아와서 신경을 건드렸다.

이윽고 금군이 균주의 사하에 이르렀을 때, 비로소 진영을 차리고 쉬려고 하였으나 몽골군이 또다시 공격해왔다. 금군이 전투 태세를 갖췄지만, 몽골군은 곧바로 후퇴했다. 그러는 사이에 비가 내리자 균주성으로 서둘러 가려 했지만, 얼마 안가 비가 눈으로 바뀌더니 폭설이 쏟아졌다. 결국 금군은 더 이상 진군하지 못하고 임시로 군영을 설치했다. 이 무렵 사신이 와서 금애종의 성지를 전달했다. 금애종은 성지에서 개봉이 위험하니 서둘러 귀환해달라고 부탁했다. 그런데 모든 장수가 엎드린 채 성지를 듣고 있을 때, 이랄포아가 벌떡 일어나 소매를 걷어붙였다. 완안합달이 화들짝 놀라며 "일단 논의해보자"고 권하자, 이랄포아는 거부했다.
"다 끝났다. 무슨 논의를 더 한단 말인가?"

그는 곧바로 주둔지를 철거한 뒤 폭설이 쏟아지는 와중에도 병사들을 몰아붙여 개봉으로 진격하게 했다. 그렇게 사투를 벌인 끝에 균주성 앞 10리에 위치한 삼봉산에 도착했다. 그러나 눈이 밤낮으로 내려서 도저히 나아갈 수 없게 되었고, 장병들은 제대로 먹지 못한 채 몽골군에 시달리느라 지칠대로 지쳤다. 몽골군은 금군 진영 주위에서 불을 피우고 포위하며, 소와 양고기를 구워먹으며 전투를 준비했는데, 균주성 방면으로의 길만은 열어뒀다. 금나라 병사들은 이를 보고 균주성 쪽으로 탈영했으나, 몽골군에 의해 모조리 죽거나 사로잡혔다.

금군이 삼봉산에서 발이 묶인 지 3일 후, 몽골군 40,000명이 대대적으로 공격했다. 이미 저항할 여력을 상실한 금군은 완전히 무너져 거의 모든 이가 죽거나 사로잡혔다. 이랄포아는 개봉 방면으로 도주했지만 몽골군에게 사로잡힌 뒤 처형되었고, 완안합달완안진화상은 남은 기병을 수습하여 균주성에 들어갔으나 얼마 안가 성이 함락되면서 몽골군에게 사로잡힌 후 역시 처형되었다. 이리하여 삼봉산 전투는 몽골군의 완승으로 종결되었다.

4. 결과

삼봉산 전투는 금나라에 사형선고와 다를 바 없는 결과를 초래했다. 애종이 수년간 갖은 노력을 기울이며 확보한 명장들과 정예병은 이 한 번의 전투에서 모조리 갈려나갔다.

애종은 최후의 수단으로 남송에 사신을 보내 구원을 호소했지만, 정강의 변 이래로 금나라에게 원한을 품고 있었던 데다 금선종이 개봉으로 천도한 뒤 자기들을 계속 공격했던 걸(명분은 몽골에 맞설 물자를 모으기 위함이었다) 잊지 않았던 남송은 단호히[3] 거부하고 오히려 몽골 제국과 손을 잡고 금나라를 협공했다.

이후 애종이 채주로 도망치나 그 곳에서도 버티지 못하자, 무선이 남송의 사천 지역을 탈취하여 그 곳을 거점으로 삼고자 했다. 그러나 맹공의 부대에 가로막히고 무선의 군대는 복멸되었다.[4]

금애종은 2년간 이곳, 저곳을 피신하며 항전했지만 1234년 2월 9일, 최후의 피신지인 채주마저 함락되자 목을 매고 자살했다. 그는 죽기 직전 궁중 대장 완안승린에게 양위한 후 채주에서 탈출하여 안전한 곳으로 피신하여 금나라를 재건하게 했지만, 완안승린은 몽골군에게 잡혀 죽었다. 이리하여 금나라는 멸망했다.


[1] 암바가이 칸은 과거 폭군 해릉양왕에게 잡혀 잔인하게 처형된 적이 있었다. 칭기즈 칸은 금나라를 침공하는 명분 중 하나로 이 일을 거론했다.[2] 한 기록에 따르면, 오고타이 칸은 이 패배에 격분하여 수부타이를 심하게 질책했지만, 툴루이가 "병사를 일으키면 이길 수도 있고, 질 수도 있지 않겠느냐"고 설득하여 넘어갔다고 한다.[3] 단호히라고 말했지만 사실 내부에서도 이견이 있었다. 정말로 금나라 말대로 금나라 다음에 자신들일지도 모르니 금나라가 밉더라도 도와야 한다는 의견도 나왔던 것. 그러나 금나라에 대한 원한이 너무 컸던 나머지 결국 묻혔다.[4] 이후 무선은 금 멸망 뒤 수비병에게 잡혀 죽게 된다.